#17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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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ing Overdress, British, 1797-99
From the Met Museum
#evening dress#dress#fashion#fashion history#met museum#british#1797#1798#1799#1790s#1700s#18th century#over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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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ord 1798-99
Small swords were items of male jewellery. By the 1750s, their elaborate gold and silver hilts, mounted with precious stones and fine enamelling, were the products of the goldsmith and jeweller rather than the swordsmith. They made fitting rewards for distinguished military and naval service. With their blades tucked away inside scabbards, it was their ostentatious and expensive hilts that carried their thrust.
This sword is inscribed: ‘PRESENTED by the Committee of Merchants &c OF LONDON to LIEUT.T FRANCIS DOUGLAS for his Spirited and active conduct on board His Majesty’s Ship the REPULSE. Ja.s Alms Esq.r Commander during the MUTINY at the NORE in 1797. Marine Society Office, May 1o 1798 } Hugh Inglis Esq.r Chairman’
Francis Douglas was rewarded for his role in suppressing a violent mutiny among sailors at the Nore, a Royal Navy anchorage in the Thames Estuary in 1797. According to an account by an eyewitness, published in The Sheerness Guardian 70 years later, the ship, Repulse, made a 'miraculous' escape from the mutineers reaching shore despite receiving 'as was calculated two hundred shot'.
#naval artifacts#naval weapons#small sword#lieutenant francis douglas#mutiny at the nore#1797#age of s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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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classicism Fashion Era, 1790–1800
A simple, high-waisted silhouette of plain white muslin defined the neoclassical look for women. This high waist is often referred to as the empire waist. Sometimes a ribbon around the waist was worn. Headbands were popular, as well as cloth bonnets, decorated straw hats and headwraps.
The graphic below actually explains it best, including what was worn underneath.
Marie-Victoire Lemoine (French, 1754–1820) • A young woman leaning on the edge of a window • 1798-99
Left: Portrait of Madame Récamier, by Jacques-Louis David, 1800
Right: Louis-Léopold Boilly (French, 1761–1845) • Point de Convention (Absolutely no agreement) • 1797
1796 and 1800 fashion plates • colored etchings
#fashion history#art#painting#art history#historical fashion#neoclassical fashion#jacques louis david#french artist#louis leopold boilly#marie victoir lemoin#late 18th century fashion#early 19th century fashion#19th century western fashion#neoclassical fashion plates#colored etchings#the resplendent outfit art & fashion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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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RICHOS – "QUIÉN MÁS RENDIDO" FRANCISCO DE GOYA // XXVI, 1797-99 [etching and aquatint | 21.5 x 15.1 cm.]
#francisco de goya#romanticism#rococo#illustration#surreal#drawing#modern art#caprichos#monochrome#18th century#spanish#ar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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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ollia
La Pazza (Matilde Gherbini), 1905 (Galleria Nazionale d'Arte Moderna, Roma) | Giacomo Balla (1871-1958, Italia)
Il sonno della ragione genera mostri (the sleep of reason generates monsters), 1797-99 (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Bilbao) | Goya (1746-1828, España)
Saturn devouring one of his sons (detail), 1881-82 (Prado, Madrid) | Goya (1746-1828, España)
Il Folle (The Fool), 1907-09 | Lorenzo Viani (1882-1936, 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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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 Summoner; Wild Geese Returning Home (Maboroshi; Rakugan) (right) and A Thin Veil of Clouds; Clearing Weather (Usugumo; Seiran) (left), from the series Eight Views of The Tale of Genji in the Floating World (Ukiyo Genji hakkei)
Chōbunsai Eishi Japanese 17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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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8월 11일 말라카해협 북단의 ‘사실상 무인도’인 페낭에 영국 국기가 게양됐다. 영국 동인도회사EIC를 대신해 말레이 술탄국 커다의 영지인 페낭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면서 프랜시스 라이트Francis Light(1740~1794)는 “풀루 피낭이라는 섬을 차지해 ’프린스 오브 웨일즈 섬‘으로 명명한다“고 선언했다.
실질적인 영국의 페낭 점거는 이보다 약 한 달 이르다. 7월 16일 라이트는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3척을 이끌고 페낭에 상륙했다. 세포이로 구성된 인도인 군대를 상륙시키고, 무기와 보급품을 하역했다. 말레이인을 동원해 정글을 밀어내고, 땅을 고르고, 요새와 병영과 임시 숙소를 세우고, 깃대도 설치했다. 그 깃대 위에 말라카해협에서 처음으로 영국 국기가 내걸린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를 대리해 라이트가 1771년부터 페낭을 할양하기 위해 커다kedah의 술탄고 협상을 벌인지 15년 만의 일이다. 이렇게 태국 남부와 말레이반도 서안에서 활동하던 동인도회사 소속 현지 무역상country trader 프랜시스 라이트는 ’페낭의 건설자‘이자 ’영국의 말라야 진출 선구자‘가 됐고, 영국은 말라카 해협에 처음으로 거점을 마련했다.
페낭 점령을 두고 당시 인도 캘커타(콜카타)에서 발행되던 영어신문은 ”암본 학살의 복수“라고 흥분하기도 했다(Hussin, 2007: 115). 암본 학살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정향丁香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1623년 말루쿠제도의 암본에 주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인 10명을 포함해 20명을 고문하고 처형한 사건을 가리킨다. 근대 주식회사의 원조로 꼽히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두 동인도회사는 당시 말루쿠제도에서만 나는 정향을 유럽에 팔아 주주들에게 이윤을 배당하는 구조였다. 당연히 향료 무역을 독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암본 사건 이후 네덜란드가 말라카해협에서 향료 군도에 이르는 해상교역을 지배했고, 영국은 인도 경영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영국에는 오히려 득이 됐다는 해석도 있지만(주경철, 2008: 97~99), 나중의 평가일 뿐이다. 암본 사건에서 150년이 흐른 18세기 후반에도 영국 동인도회사로서는 인도-중국 해상교역을 방해하는 네덜란드의 말라카해협 제해권을 깨는 일이 전략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복수’라는 말로 알 수 있다.
(27~29쪽)
페낭의 이상한 점거에 관한 또 다른 ‘교묘한 해석’이 있다. 말레이국 연방FMS 초대 총주재관과 해협식민지 총독을 지낸 프랭크 스웨트넘Frank A. Swettenham(1860~1946)의 주장이 그렇다. 1786년 페낭 점령은 영국이 말라카해협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1819년 싱가포르 점령 이전에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영국의 말레이반도 지배에 걸림돌이 되고 말레인에게 불신과 숱한 고통을 안겨준 ’뜻하지 않은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불행의 원인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cowardice”에서 비롯했다고 단언했다(Swettenham, 1907: 37).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페낭 할양 협상 과정에서 주고받은 인도총독과 커다의 술탄, 프랜시스 라이트의 서한을 제시한다.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회가 벵골만 동쪽에 새로운 기지를 물색하기로 결정한 것은 1763년의 일이다. 당시 니코바르제도, 안다만제도,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 태국 남서부 푸켓 등이 후보지로 검토되었다(Bassett, 1971). 18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차 수요가 급증하면서 인도-중국 교역의 중요성이 컸지만, 인도 경영에 주력해온 영국은 말라카해협에서 남중국해에 이르는 교역로에 거점을 확보하지 못했다. 1763년 이전 인도 동쪽의 현지 무역은 중국인과 이슬람 상인 및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현지 무역상들이 주도했고, 영국인 현지 무역상은 거의 전무했다(Fielding, 1955: 41).
영국이 말라카해협의 페낭을 확보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771년부터였다. 당시 식민지 확장론자인 워런 헤이스팅스 캘커타 지사가 이를 주도했고,[*영국 동인도회사는 1773년 이전까지는 인도 서부의 봄베이(뭄바이), 동중부의 마드라스(첸나이), 북동부 벵골의 캘커타(콜카타)의 세 곳에 지사Governor가 통괄하는 지사부Presidency를 두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부패와 경영난이 심해지자 프레드릭 노스Frederick North 총리의 영국 정부는 1773년 규제법Regulation Act(1773)을 제정해 영국 동인도회사를 감독하시 시작했다. 기존 세 곳 지사부를 총괄하는 총독General-Governor을 신설하고, 벵골의 캘커타에 인도총독부를 뒀다. 총독과 지사는 영국 정부가 직접 임명했다. 워런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1732~1818)는 1771년 당시 캘커타 지사Governor였으며, 1774년 초대 인도총독General-Governor에 임명돼 1785년까지 재임했다. 이 글에서는 캘커타, 봄베이, 마드라스를 오늘날 바뀌기 이전의 지명으로 표기한다.] 프랜시스 라이트는 인도 동쪽의 여국 기지 후보지로 푸켓과 페낭을 추천했다. 말레이어에 능통하고 태국어도 소통할 수 있었던 라이트는 당시 푸켓을 거점으로 커다와도 교역을 하며 현지 물정에 밝았다(Stewart, 1901: 9~10). 라이트는 페낭의 지리적 이점과 왕국의 안위를 위해 영국의 도움이 필요한 커다의 술탄의 생각도 미리 읽었던 것이다.[*태국의 아유타야왕조가 버마의 공격으로 망하고, 중국인의 피가 흐르는 아유타야의 장군 탁신이 1766년 혼란을 수습해 방콕에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탁신은 커다를 비��한 말레이반도 북부의 속국에 조공을 강요하며 대외적으로 팽창적인 자세를 취했다. 커다의 술탄 무하마드 지와Muhammad Jiwa Muazzam Shah II(재위 1710~1778)는 영국의 힘을 빌려 태국의 공세를 막으려 했다.] 커다 해안은 인도에서 출발하는 범선의 첫 기착지였고, 수마트라 북동안과 버마 남부, 태국 남서부 해안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들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의 사람들은 바다와 무역풍의 영향으로 생활방식이나 경제적으로 긴밀했다. 18세기 후반 인도의 식민지배를 굳힌 영국은 인도의 아편과 중국의 차를 교역하는 영국 무역선이 배를 보수하고 보급품도 조달받을 항구가 절실해졌다. 인도-중국 항로의 범선들은 인도 동부 코로만델 해안에서 남서풍을 타고 북상해 커다 해안 일대에서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면 중국으로 향했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페낭 확보 구상은 1784년부터 본격화돼다. 우선 영국이 다급했다. 말라카해협에서 배제됐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1760년대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 무역에 반발해 독자 노선을 걷던 부기스왕국과 손잡고 리아우(오늘날 빈탄)에 후추 무역의 근거를 마련했는데, 네덜란드가 부기스와 2년간 전쟁 끝에 1884년 리아우를 점렴하고 말았다. 영국으로서는 말라카해협에 거점을 마련하는 일이 절실했던 것이다. 커다도 다급했다. 전통적으로 태국이 커다를 비롯한 말레이반도 북부의 술탄국에 종주권을 행사해왔는데, 1782년 방콕에 새롭게 들어선 차크리왕조는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커다의 술탄의 다급함이 이상한 페낭 점거의 배경이었다.
커다의 술탄 압둘라[*Abdullah Mubarak shah I(재위 1778~1797), 술탄 압둘라는 1771년 라이트와 페낭 할양 협상을 했던 술탄 무하마드 지와의 아들이다.]는 1785년 8월 30일(이슬람 헤지라력 1199년 10월 24일) 페낭 할양의 조건을 명시한 편지를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총독에게 보냈다. 말레이인의 편지 쓰기는 아주 엄격하고 정확하고 격조가 있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말레이인들의 각별한 편지 예절과 관련해 “편지를 쓰는 이의 모습은 시인이나 문인을 방불케 한다.······ 세세한 것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받는 이는 모욕감을 느낀다. 이처럼 말레이인의 엄격한 편지 예절을 유럽인이 무심결에 어긴다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비숍(2017: 40).] 술탄 압둘라의 편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술탄 압둘라는 프랜시스 라이트가 인도총독의 지시를 받아 페낭 할양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렸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도총독이 영국 정착촌을 만들고 말라카해협을 항해하는 선박과 섬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 조선소를 건설하겠다는 페낭 할양의 목적을 제시했으며, 아울러 커다를 공격하는 세력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 비용도 감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라이트를 통해 전달했다고 술탄 압둘라는 명시했다.
이러한 인도총독의 페낭 할양 요구에 대해, 술탄 압둘라는 할양 협상의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조건은 동맹 요구이다. 비록 태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독립적인 술탄국의 지위를 누려온 커다는 언제 차크리왕조의 태국이 쳐내려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컸던 것이다. 영국이 커다의 영지인 페낭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면, 영국은 태국의 위협을 막아야 하는 커다의 필요를 충족하라는 게 술탄 압둘라의 요구였다. 술탄 압둘라는 커다의 외부든 내부든 자신을 공격하는 적은 동시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영국 동인도회사에 병력과 무기를 요청할 것이고, 그 비용은 전쟁이 끝난 뒤 갚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둘째 조건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페낭 할양에 따른 ‘보상금’으로 연간 3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것이다.[*20세기 초까지 동아시아 교역에서 가장 널리 쓰인 화폐는 스페인달러로 불리는 ‘스페인 8레알 은화’였다. 1786년부터 1904년까지 페낭을 비롯한 해협식민지와 말라야의 공식화폐도 스페인달러다. 당시 공식 환율은 1스페인달러=5실링이다. 여국 파운드 스털링화는 1파운드=29실링, 1실링=12펜스였다. 따라서 4스페인달러가 1파운드 스털링으로 환산된다. 1903년~1939년까지 해협식민지가 자체로 발행한 해협달러Straits Dollar가 통용됐다. 해협달러는 역국 파운드 스털링화로 환산해 1해협달러=2실링 4펜스로 고정됐다. 해협달러는 스페인달러보다 액면 가치가 낮았다. 이하 이 책에서 표기하는 ‘달러’는 별도의 표기한 없는 한 1904년까지는 스페인달러, 이후는 해협달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다.] 말라카해협 북부의 아편, 주석, 등나무가구 교역을 독점하는 무역중심지 커다는 페낭을 영국 동인도회사가 차지할 경우 독점 이익을 잃게 된다며 보상을 요구했다. 커다 해안이 오래전부터 인도인 상선과 현지 무역선의 교류 거점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한 캡틴이 인도총독부에 보낸 비망록에는 1786년 라이트의 점거 당시 페낭에 거주하던 말레이인이 “30년 전만 해도 이 섬에 아주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말한 내용도 있다(Braddell, 1982: 4). 이는 페낭이 한때 교역으로 번성했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술탄 압둘라의 보상 요구를 뒷받침하는 최근 연구도 있다. 커다가 본디 말레이반도 동부의 태국만 연안 지역과 말라카해협을 육로로 이어주던 교역 중심이었고, 태국만과 말라카해협의 산물이 교류되던 항구 페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커다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King, 2006: 6`~71).
스워트넘도 인정하듯이 술탄 압둘라의 협상 조건에는 어떤 모호함도 없다. 헤이스팅스의 후임 존 맥퍼슨 인도총독 대행이 술탄 압둘라에게 회신한 요지는 이렇다. 협상 조건을 명시한 술탄의 편지를 1786년 2월 16일 프랜시스 라이트로부터 받았으며, 술탄의 서한과 협상 내용을 런던에 보고해 영국 왕과 동인도회사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맥퍼슨은 함선을 파견해 페낭을 방위하고 커다 해안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도 했다. 이를 통해 라이트가 맥퍼슨에게 페낭 점령 권한을 위임받았고, 동인도회사가 술탄 압둘라의 동맹 요구를 분명하게 인지했다고 스웨트넘은 해석했다.
그런데 라이트가 페낭을 점거한 지 다섯 달 만인 1787년 1월 인도총독부는 커다와 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존 맥퍼슨 총독 대행은 1786년 12월 찰스 콘월리스 총독으로 교체되었다. 페낭의 콘월리스 요새는 콘월리스 총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방위 목적이든 공격 목적이든 커다의 술탄과 어떤 동맹도 체결해선 안 된다”고 영국의 런던 정부가 인도총독부에 공식적으로 지시한 것은 페낭 점거 7년 뒤인 1793년의 일이다. 일련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수장인 인도총독이 페낭 할양의 협상안에 관해 충분히 이해했으며 영국 정부의 재가를 기다린다고 커다의 술탄에게 답장을 쓴 몇 달 뒤 라이트가 페낭을 점거했는데, 영국 동인도회사와 런던 정부는 술탄 압둘라가 제시한 페낭 할양의 제1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이는 협상의 결렬을 의미했다. 하지만 영국은 페낭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라이트는 1787년 5월 인도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커다의 술탄이 덴마크,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동맹 여부를 타진하고 있다면서 “나의 보잘것없는 견해로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당장 커다의 술탄이 영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선언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고 비용도 덜 드는 방안”이라고까지 하소연을 했다.
사실 애초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커다와 동맹을 맺기는 가능하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국 동인도회사는 민간 법인의 무역회사이면서 외국과 조약 체결권까지 갖고 영국 정부를 대신해 인도를 식민지배한 ’이상한 회사‘이자 ’국가 속의 국가‘였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인도 지배가 안정되면서 동인도회사 체제의 문제가 드러났고, 영국 정부는 1773년 ’인도 규제법‘을 제정했다. 동인도회사가 영국을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은 남겨놓으면서 런던 정부의 감독을 받도록 한 것이다. 페낭 점거 2년 전인 1784년에 당시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는 규제를 한층 강화한 ’피트 법‘을 제정해 동인도회사가 주변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역내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법에 따르면 커다의 술탄의 동맹 요구는 동인도회사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맥퍼슨 총독 대행은 페낭 점거 전 술탄 압둘라에 보낸 회신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혔어야 마땅했다.
페낭 점거 후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영국 동인도회사는 졸렬했다. 점거 3년이 다 되어가는 1789년 7월 프랜시스 라이트는 보상금을 연 4,000달러로 할 것을 제안했지만, 커다의 술탄이 동맹과 보상금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며 거부했다고 동인도회사에게 보고했다. 카다의 술탄은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페낭을 떠나라고 통보했다. 동맹 약속도 파기하고 심지어 보상금조차 지급하지 않는 영국의 이상한 페낭 점거를 5년간 참아온 커다의 술탄은 1791년 페낭을 공격했다. 커다의 무력시위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동인도회사는 커다와 조약을 체결하고 페낭 할양을 공식화했다. ’동맹‘은 빠졌고, 보상금도 애초 3만 달러의 5분의 1인 연 6,000달러로 줄었다.
술탄 압둘라의 뒤를 이은 커다의 술탄이 1800년 영국 동인도회사와 2차 조약을 체결하고 페낭섬과 마주보는 커다의 프라이Prai(오늘날 Sebarang Perai)를 추가로 영국에 할양하면서 보상금은 연 1만 달러로 상향 조정됐다. 프라이는 당시 인도총독이자 강경한 제국주의자였던 리처드 웰즐리 후작의 이름을 따 ’프로빈스 웰즐리‘로 불렸다. 그리고 1821년에 커다의 술탄이 50년 전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태국이 커다를 침략해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고, 커다의 술탄은 페낭에서 20년 넘게 망명해야 했다.
스웨트넘은 위와 같이 ’페낭 점거‘에 관해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을 비난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된 이후에 활동한 스웨트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인도회사를 졸렬하다고 평가한 것은 영국 제국주의에 관한 교활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와 20세기에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영국령 말라야로 만드는 과정에서 페낭 점거 수법은 수시로 변주되었기 때문이다.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1781~1826)의 1819년 싱가포르 점령도, 영국이 말레이반도 지배의 발판이 된 1874년 팡코르조약 체결 과정도 기본적으로 페낭 점거의 졸렬함과 다르지 않았다.
스웨트넘은 페낭 점거의 기법을 말레이반도 식민지배 확대에 응용한 인물이다. 말레이어에 능통하고 화인사회의 물정에도 밝은 그는 팡코르조약을 성사시킨 주역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단지 스웨트넘의 활동 시기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1858년에 해체된 뒤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는 영국이 페낭을 식민지로 만든 것 자체가 아니라, 영국 동인도회사의 일 처리가 졸렬하다고 했다. 페낭 점거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졸렬함을 탓함으로써 스웨트넘은 그로부터 100년 뒤 영국 정부의 말라야 지배는 정당하는 논지를 편 것으로 보인다. 스웨트넘의 페낭 점거에 관한 해석이 교활한 건 그래서이다.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지배한 출발점은 1786년 페낭 점거였다.
(32~38쪽)
18세기 영국 법체계에 따르면, 사람이 살지 않거나 원주민이 거주하는 곳에 영국인이 정착지를 건설할 경우, 영국 정착민이 영국의 법과 주권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는 보통법이 적용되었다(Tan, 2017:52). 이는 영국의 식민지가 영국 국왕의 봉토封土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라이트는 애초부터 말레이의 법체계를 배제하고 곧바로 페낭에 영국의 보통법을 적용하기 위해 사실상 무인도라고 했던 셈이다. 스탬포드 래플스가 싱가포르를 점령할 때도 “사실상 무인도”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물론 라이트가 사실상 무인도라고 한 것은 영국 제국주의의 기치였던 ‘법과 질서’를 페낭에 구축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페낭은 애초 영국의 ‘식민지’로 건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페낭 확보 전략은 ‘요새 항구fort port’로 요약된다. 인도-중국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 군사적 요새fort이면서 동시에 말라카해협의 중계무역항이자 교역거점으로서 상업적 항구port를 건설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당시 패권을 추구하는 영국 정부 및 인도총독의 정치권력과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동인도회사 상업자본의 이해가 어정쩡하게 절충된 결과였다(Purcel, 1965: 13~14). 정치권력과 상업자본의 이해가 전략적으로 일치한 지점은 ’네덜란드 타도‘였다. 정치권은 말라카해협에서 네덜란드의 재해권을 깨는 것이 급했고, 상업자본은 네덜란드의 독점무역 체제를 무너뜨려야 했다. 그 최초의 시도가 페낭 점거였다. 무역선에 식수와 식량을 보급하고, 해군 함정을 건조하거나 수리하는 등의 할양 사유는 페낭 점거의 부차적인 구실이었다.
(39~40쪽)
페낭의 역사에서 5년간의 이상한 점거와 8년간의 비공식 책임관의 문제는 이민과 경제적 성장의 서사에 묻히기 일쑤다. 예컨대 레녹스 밀스(Mills, 1960: 42)는 1786~1800년 페낭의 식민지 건설 과정을 성공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핵심적인 세 가지 이유로 “식민지를 건설한 프랜시스 라이트의 탁월한 추진력, 라이트를 향한 상인들의 절대적인 신뢰, 자유무역 시스템”을 꼽았다. 이러한 관점은 영국이 식민지를 건설했기에 페낭이 무역항으로 성공했다는 식민지 패러다임으로 비판받지만, 오늘날 말레이시아 역사의 주류 서사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
일반적으로 19��기 영국이 제국을 운영하면서 가장 중시한 정책으로 자유무역이 꼽힌다. 이전 서양 열강의 중상주의적 독점무역 체제와 구분되는 자유무역 체제는 근대의 부르주아가 구체제를 해체하기 위해 동원했던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공격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자유무역 체제는 자유항과 자유이민이 뼈대를 이룬다. 우선 자유항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기존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두 동인도회사의 독점무역 체제와 다르다. 항구의 출입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어떤 선박도 자유롭게 항구를 드나들 수 있고, 어떤 무역업자의 교역��� 규제를 받지 않는다. 두 번째 특징은 관세와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것이다. 이전 독점무역 체제는 독점 이윤을 보장하는 대가로 높은 관세와 비싼 항구세를 물렸다. 자유항은 세금을 없애 기존의 독점을 깨뜨리는 전략이었다.
자유항과 더불어 19세기 후반까지 영국의 동이사아 식민지 확대 전략에서 두드러지는 자유무역 체제의 또 다른 특징은 자유이민 정책이다. 페낭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홍콩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식민지 확대는 지리적 이점을 지닌 섬을 확보하고 아시아 사람들을 식민하는 방식을 취했다. 영국은 기존 현지 정치권력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전략적 · 상업적 이해를 동시에 추구했던 것이다. 무관세로 선박과 상인의 자유로운 항구 출입을 보장하고, 인구가 희박한 섬에 아시아계를 식민하는 영국의 자유무역 체제는 19세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하지만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유무역 체제를 처음으로 실험한 곳은 페낭이었다.
페낭 점거 당시 인도총독 대행 존 맥퍼슨은 프랜시스 라이트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여건이 좋다면 상인들은 상품을 싣고 페낭에 기항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상인들을 끌어들이면 귀하(라이트)가 페낭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이나 수입물품에 어떤 종류의 관세나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모든 인종이 찾는 자유항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Swettenham, 1906: 54). 페낭을 자유항으로 만들라는 명확한 지침을 내린 것이다.
자유항은 현지 무역상이었던 라이트 역사 바라던 바였다. 그런데 점거 이듬해 후임 인도총독은 페낭의 식민지 재정 문제를 지적하며 무관세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인도총독과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진 모두 페낭의 자유항 실험을 마뜩치 않게 여겼다는 뜻이다. 자유항 실험과 페낭의 성공을 입증해야 할 책임은 비공식 책임관 라이트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페낭 실험을 책임진 라이트는 자유무역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고, 어떻게 실현하려 했던 것일까? 라이트는 점거 이듬해 인도총독의 관세 부과 지시에 6개월간 뜸을 들인 뒤 영국과 인도 산 물품 수입과 영국과 인도 선적 선박엔 무관세를 적용하고 다른 경우에 4~6퍼센트의 관세를 물리는 방안을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서 라이트는 인도 총독에서 “페낭을 항구가 아니라 식민지colony로 간주해야 하며, 따라서 (식민지라면) 세원을 교역(관세)이 아니라 토지(재산세)에서 구해야 마땅하다”고 페낭의 자유무역의 필요성을 주장했다(Swettenham, 1906: 55).
라이트의 동료이자 초기 페낭의 자유항 실험을 주도한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은 1794년 인도총독에게 보낸 상황보고서에서 더 분명한 어조로 자유무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Fieldign, 1955: 45~47). “교역이란 소비재를 수입하는 것도, 생산물을 수출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상품의 교환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이 교역이다. 자유무역으로 자본과 인구를 늘려 식민지 재정을 확보하는 편이 상품에 관세를 물리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현명한 방책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상품은 관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항구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콧은 아울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무역에 체제가 본디 ‘적은 비용으로 높은 이윤을 얻는 것’인데, 시장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바람에 독점의 감시를 피해 거래하는 ‘밀매’가 성행하면서 독점 유지에 필요한 비용은 늘고 이윤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이는 중상주의 독점무역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페낭을 ‘요새 항구’라는 전략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이사나 인도총독부와 달랐다. 라이트와 스콧의 생각은 철저하게 현지 무역업자의 이해를 대변했다. 이러한 자유주의로 초기 페낭의 틀이 잡혔다. 무역업자가 페낭 식민 당국의 관리가 되기도 하고, 동인도회사에서 식민지 관리로 파견된 직원들이 무역에 뛰어들거나 무역업자를 겸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제임스 스콧은 라이트와 푸켓에서 현지 무역ㅇ르 함께 했던 동료로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는 페낭 최대의 상업회사인 스콧주식회사Scott & Co.을 운영했고, 최대의 땅부자이자 최대 농원주였으며, 조지타운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따 ‘제임스타운’이란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라이트는 비공식이나마 식민지 페낭의 책임관이었지만, 월급으로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며 스콧의 회사에 출자해 배당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상인이었으며, 따라서 영국의 식민지 경영을 담당할 공직자로서의 공적 의식은 부족했다.
라이트와 상인 동료들의 페낭 자유항 건설은 두 가지로 추진됐다. 하나는 일체의 관세와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자에게 무상을 토지를 불하하는 것이다. 무관세로 교역을 늘리고, 토지 불하로 사람을 식민한다는 구상이다. 이것이 초기 인도총독부의 방치 속에서도 페낭이 교역량과 인구를 빠르게 늘릴 수 있었던 동인動因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토지 무상불하의 근거는 앞서 언급했듯이 페낭의 토지가 영국 국왕의 ‘봉토’라는 법 해석이다. 라이트는 근대식 토지세가 아니라 봉건적 면역지대免役地代 명목으로 페낭의 땅을 개인들에게 나눠줬다. 토지 불하에 어떤 기준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라이트의 인도총독부 보고에서 언급되었듯이 페낭의 이주자들 사이에 땅을 서로 차지하려 분쟁이 일었고, 페낭 식민 당국에는 개인의 탐욕을 제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라이트와 스콧을 비롯한 소수의 영국인 무역상과 동인도회사 직원들이 목 좋은 땅을 거의 독차지했다. 면역지대든 토지세든 부과되지도, 징수되지도 않았다. 토지세와 점포세 등에 과세 근거가 마련된 것은 라이트가 사망하고 난 뒤인 1795년의 일이다. 그나마도 상인들의 반발로 징세되지도 못했다. 페낭에 ‘행정’이 도입된 19세기 후반에나 토지세와 인허가세 등의 과세와 징세가 이뤄졌다. 라이트의 페낭 건설 청사진은 오로지 현지 무역상의 이해를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관철하는 것이었다. ‘상인의, 상인에 의한, 상인을 위한’ 자유무역이었고, 페낭은 말이 식민지이지 말라카해협의 요지에 개설된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factory’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41~46쪽)
식민지 재정을 자체 충당하지 못한다면 페낭의 자유항 실험도 지속되기 힘들었다. 인구가 늘면서 치안 문제도 심각해졌다. 질병과 위생 등 도시 환경은 날로 악화됐다. 라이트의 후임은 비위생적인 ���지타운에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임했을 정도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라이트와 상인 동료들은 전근대적인 ‘징세청부제revenue farming system’를 채택했다.
징세청부제는 국가가 징세권을 민간에 하청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국가각 ‘국가 조세를 징수하는 면허’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일정 기간 위탁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특정 품목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전매권을 경매를 통해 판매한다. 전매권을 획득한 개인이나 집단은 입찰 때 제시한 금액을 전매료로 국가에 지급하는데, 국가는 이를 행정 운용의 재원으로 삼는 것이다. 행정체계가 너무 허술하거나, 징세의 효율성이 떨어질 경우에 국가의 세원을 마련하는 방식이 징세청부제이다. 유럽에선 귀족에게 징세권을 줬을 때 중앙 정부에 돌아오는 세수가 너무 적을 경우 이를 시행하기도 했다(Butcher & Dick, 1993: 3).
징세청부제는 19세기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활용됐다. 관료제가 발달하지 못했던 동남아에서 정치권력은 주로 중국인 상인 집단에 징세 업무를 위탁했다. 징세청부제는 개인과 집단에게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유무역의 자유주의와는 상반된다. 페낭 자유항 건설자들의 자유주의는 중상주의적 독점무역 체제를 해체하는 데는 혁명적이었지만, 무관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독점과 전매를 뼈대로 하는 징세청부제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반동이자 모순이었다.
1788년 페낭에서 징세청부제가 처음 시행됐다. 전매물품은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쌀 증류주 아락arak이었다. 3년간 페낭에서 아락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업자를 경매 방식으로 선정했다. 주로 최고 가격으로 응찰한 개인이 낙찰되지만, 식민 당국은 응찰 가격과 더불어 응찰자의 경제적 · 사회적 역량도 함께 고려했다. 낙찰자는 약속한 전매료에 관해 식민 당국에 땅을 담보로 제공하거나 연대보증인을 세웠다. 징세청부제는 통상 ‘팜farm’이라 하고, 전매권을 청부한 자를 ’파멀farmer’라고 했다. ‘아락팜arak farm’이라 하면 아락 징세청부제를 가리킨다. 식민 당국은 아락팜으로 첫해 780달러의 전매료 수입을 올렸다. 3년 뒤 경매에서 결정된 아락의 전매료 수입은 연간 4,835달러로 6배가 됐다.
이후 징세청붕제의 품목이 늘어나면서 페낭 식민 당국의 세수도 늘었다. 아편팜(1791), 도박장팜(1793), 담배팜(1800), 돼지고기팜(1805) 등이 시행됐다. 도박장 운영 권한을 독점하는 도박장팜은 식민 당국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됐지만, 페낭의 유럽인 상인들이 사행성ㅇ르 조장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1811년 폐지됐다. 1820년대 페낭 식민 재정을 떠받쳐준 징세청부제 5대 품목은 아편, 아락, 시리, 토디/바앙Toddy/Baang, 돼지고기였다. 시리는 말레이인의 관습인 빈랑 씹기에서 빈랑 열매를 싸는 베텔 후추의 잎을 가리킨다. 토디는 쌀로 빚은 술을, 바앙은 코코넛야자로 빚은 술이다. 중국인의 술인 아락과 달리 토디와 바앙의 소비자는 주로 말레이인과 인도인이었다.
5대 품목은 종족별로 소비가 갈렸는데, 아편 · 아락 · 돼지고기는 중국인, 시리와 토디/바앙은 말레이인과 인도인의 품목이었다. 당연히 아편팜, 아락팜, 돼지고기팜의 전매권은 중국인이 장악했고, 시리와 토디/바앙은 말레이인과 인도인 업자에게 돌아갔다. 징세청부제에서 종족 간 분업 체계가 일찍부터 이뤄진 셈이다. 전매료의 덩치가 큰 5대 품목 가운데에서도 중국인이 주로 소비하는 아편과 아락, 돼지고기의 전매료가 많았고, 그중에서도 아편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다. 1825년 페낭의 세무 당국이 아편, 아락, 토디/바앙, 시리 등 4개 팜 영업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간 매출은 아편이 10만 800달러로 가장 컸고, 아락(5만 달러), 토디/바앙(2만 7,000달러), 시리(8,760달러) 순이었다. 아편팜의 매출이 다른 세 팜의 매출을 더한 것보다 많았다. 이들 4개 품목에서 업자가 경비를 제하고 얻는 평균 이윤율은 73.78퍼센트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Hussein, 2007: 258). 낙찰만 받으면 70퍼센트가 넘는 이익이 보장되는 징세청부제는 거부가 되는 고속도로였다. 그 길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했음은 물론이다.
징세청부제는 자유항의 세원 부족을 채워주는 묘책으로 여겨졌지만, 이내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징세청부제는 전매권을 국가권력이 보장해주어야 제대로 작동한다. 예컨대 돼지고기팜의 업자들은 비싼 전매료를 국가에 납부하고 장사를 한다. 그런데 전매료를 내지 않는 업자가 몰래 돼지고기를 싸게 판다면 징세청부제의 틀은 깨지고 만다. 전매료를 물어야 하는 돼지고기 청부업자가 독점의 이득을 얻지 못하고, 당국도 계획된 세원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밀래의 공권력이 단속해야 마땅하지만, 페낭의 식민 당국은 그럴 의지도, 행정의 근육도 없었다. 전매권을 지키는 것도 청부업자의 몫으로 떠넘겼다.
(47~49쪽)
페낭의 식민지 지워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1786~1805년 페낭은 인도총독부 지휘를 받는 ‘책임관’이 통치했다. 나폴레옹전쟁(1793~1815)으로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되면서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말라카를 1795년 영국이 확보했다. 1805년에 페낭의 지위는 몇 단계 급상승했다.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회는 페낭을 캘커타(콜카타), 봄베이(뭄바이), 마드라스(첸나이)에 이은 인도총독부의 네 번째 지사부Presidency로 승격한 것이다. 이를 두고 빅터 퍼셀(Purcel, 1965: 18)은 “비관주의에서 낙관주의로의 놀라운 변화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벌어지다니!”라고 놀라워했을 정도다.[*페낭 확보 이후 인도의 영국 식민 당국은 과연 페낭이 유럽-중국 원거리 교역을 관장할 이상적인 곳인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페낭이 중요한 교역항이 될 것인지, 식민지 행정 비용을 자체 충동할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Cowan(1950b:36~59) 참조. 실제 19세기 초까지 확신도 못하고 전략도 부재했던 인도총독부는 페낭을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로 여기지도, 식민지 건설에 충분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Stevens(1929: 379) 참조.]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한 것이 이러한 낙관주의를 추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페낭의 전략적 지위는 ‘요새 항구’에서 ‘무역 항구’로 바뀐다. 1807년 인도총독이 말라카의 요새를 파괴한 것도 이러한 전략의 변화를 보여준다. 말라카 요새는 16세기 포르투갈이 축성하고 17세기 네덜란드가 확장한 것으로 15만 파운���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됐는데, 영국은 7만 파운드를 들여 요새를 파괴했다(Swettenham, 1907: 57).
1819년은 페낭 역사에서 중대한 전기였다. 영국이 해협 남단의 싱가포르에 또 다른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다. 페낭보다 지리적 이점이 뛰어난 싱가포르는 급성장했다. 기존에는 싱가포르로 인해 페낭의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해석이 정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싱가포르가 유럽-인도-중국을 있는 국제 중계항으로 성장한 반면, 페낭은 해협 북부의 지역 교역 허브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싱가로프 건설 이후 버마 남부에서 태국 남서부, 말레이반도 서안, 수마트라 북동안을 아우르는 지역이 페낭의 교역망으로 재편됐다는 것이다(Wong, 2007: 10~12). 싱가포르의 등장은 페낭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런던조약을 계기로 페낭은 싱가포르, 말라카와 함께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로 통합됐다. 해협식민지는 페낭에 주재하는 지사가 관할했다. 해협식민지의 세 곳은 저마다의 특성에 따라 발전했다. 페낭은 말라카와 600킬로미터, 싱가포르와 840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다. 말라카해협의 북단과 남단 및 중부에 위치한 세 곳은 19세기 말까지 상호 보완적인 지역 교역망을 구축했다.
1850년대 들어 상황이 변했다. 증기선의 등장으로 해상교역이 급증하고, 이민도 늘었다. 특히 말레이반도의 술탄국 페락에서 대규모 주석광산이 개발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페낭의 인구 구성도 바뀌었다. 중국인이 페낭 조지타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페낭의 무능한 자유방임 정책은 한계를 맞았다. 화인사회와 식민 당국의 마찰도 불거졌다. 게다가 부패하고 무력한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영국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해협식민지는 1867년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에서 벗어나 런던의 식민 장관이 관할하는 직할 식민지Crown Colony로 바뀌었다. 영국인 싱가포르에 총독부와 행정 및 입법 위원회를 두고, 자체 입법권과 예산편성권도 보장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의 해협식민지 정책은 자유방임에서 개입으로 전환했다.
1786년부터 시작된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 81년간 식민지 경영 방식은 일관됐다. 싱가포르와 해협식민지를 전공한 역사가 콘스탄스 턴불(Turnbull, 2009: 37)은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의 해협식민지 정부를 ‘해골 조직skeleton organization’이라 혹평했다. 달리 말해 식민지의 뼈대만 있을 뿐, 행정이란 근육이 없는 ’해골정부‘였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으로 인한 막대한 이윤을 세금으로 걷어 들이지 못하면서 자유항 정책 때문에 돈이 없어 효율적인 행정을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징세청부제에서도 드러나듯 식민 당국은 전매권을 팔아 징세업무를 상인에게 하청하면서 공권력��저 민간에게 위탁해싿.
하지만 페낭을 포함한 해협식민지가 영국 정부의 직할 식민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행정의 틀이 급격히 달라지지 않았다. 영국은 페낭의 아시아계 이주민에 관해 무지했다. 특히 영국은 식민지에서 중국인의 역할은 높이 평가한다면서도 중국인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턴불이 지적한 ’해골정부‘는 앞서 페낭 점거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을 탓한 프랭크 스웨트넘의 비판과 호응한다. 졸렬하게 점거된 영국 식민지 페낭으로 모여들었던 중국인 이주자들에게 ’해골정부‘는 낯선 땅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할 삶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19세기 말 간접지배의 방임에서 직접지배의 개입으로, 졸렬함에서 교활함으로 바뀌는 ’제국의 시대‘’에 화인사회는 또 한 차례 변화를 겪어야 했다.
(50~53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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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someone who rotates martin inside their head all day, i for one would Love to hear your thoughts on his traumatic backstory
Ah, a fellow Martin rotator 😌
I'm 99% sure I've posted about this before but I'm too lazy to find it so I'll summarise my thoughts as briefly as I can. Also, a lot of these ideas surface in my fic, through the dark, but most just exist in my brain (though I do plan to write a few oneshots on this).
So, here's my version of Martin's backstory:
Martin was born in a small fishing village near Arran in 1797 as the youngest of three children. His father was a fisherman and spent most of his time out on the sea. He had a difficult birth that left his mother sickly and unable to do much else to earn money other than mending nets and making crab traps etc.
During the Insurrection, his father served in the Morleyan navy but was injured and returned home before the war was lost. His father was once a quiet but stern man, and the war turned him short-tempered and prone to fits of rage. He's left unable to walk unaided and struggles to find work to support his family in a country that doesn't want him.
In those terrible years following the war, famine strikes Morley and Martin's mother doesn't survive it. Martin and his two older siblings, Aoife and Niall, take up small jobs to keep them afloat, neglecting their education.
Martin's father is a wrecked and foul man after the loss of his wife and he spirals into drinking himself into oblivion, throwing blame at the easiest target: young Martin. He berates his youngest son for weakening his wife, for draining what little coin they have to afford medicine for Martin's fickle health and frequent seizures. His father believes him to be a curse on their family.
Morley, post-insurrection, simmers with brewing tension as the Empire stakes their claim. Taxes rise, new restrictions limit the movement and gathering of the working class, and naturally, pockets of resistance begin forming. Martin's father becomes the centre of one such resistance. Angry men who's livelihoods have been ruined by the war gather and plan to strike back at the Imperial soldiers occupying their towns and cities.
Martin is only thirteen when the Imperial soldiers raid their small home, bursting through the door with men shouting and guns pointed. Aoife puts herself between him and a soldier, and as he wriggles through a window and runs, he hears the gunshot.
He doesn't turn back.
Alone, Martin travels to the nearby city of Alba where he sleeps huddled up in alleys and doorways, scrounging and stealing for food. He hears of the Imperial Army recruiting boys from the street, providing the starving and desperate with food and shelter in return for their loyalty, and at age fourteen, he enlists.
He learns a lot from his time in the military. He learns how to fire a gun, how to plan attacks, how to lure out the nationalists hiding in small towns and camps spread out over the southern Morley coast. He's part of a force meant to pick out the rebels and secure the Empire's rule over Morley, betraying his father's beliefs, and turning against his own countrymen. He doesn't believe in what he does, but he finds he doesn't care as long as he is fed and housed and trained.
Martin is a survivor. He's loyal to no one.
At twenty-one, he's offered a large sum of coin to turncoat and kill a commanding officer of the Imperial army by stopping his carriage on a quiet road. He does it, for no other reason than the opportunities that amount of money will afford him. There's no progression for someone of such low social standing as him.
Unfortunately, the carriage carried more than just the officer. He had been travelling with his young family. Martin can't bring himself to hurt his young son and leaves him alive, instead fleeing.
With a price on his head, Martin keeps moving, never staying in one place for long. He makes his money robbing those travelling on the roads, being careful to only take from those who can afford it.
He crosses paths with Daud at this stage of his life and the two engage in a mutually beneficial relationship, taking jobs and splitting the prize. When Daud moves on, Martin meets a gang of smugglers led by a woman named Resa, and knowing how valuable a good partnership can be, he joins them.
He travels with the gang for years, slipping into an on and off relationship with Resa. Their focus begins to drift from smuggling contraband and illegal goods to heretical items and slowly, Resa becomes obsessed. She becomes fixated on acquiring an artefact she believes can bind the Outsider, but requires a sacrifice to do so. She turns on Martin, wounding him, but he gets away and flees.
Feeling that the only safe place he can go to protect himself against Resa's wrath, Martin turns to the Abbey. He slips into their ranks with the intention of it being temporary, but eventually warms to it. He finds sense in the strictures, comfort in the regulated structure of life as an Overseer, and most importantly, recognises a route to power.
Sorry this was so long! I swear I tried to make this brief 😅 I breezed over all the detail, so there's a lot more nuance to these situations than I can go into here, but that's essentially it!
#dishonored#teague martin#mae's#i swear it all makes thematic sense in my head lmao#i could gnaw on the trauma of Resa's betrayal its so fun and tasty#god i love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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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of seven bronze medallions created in 1900 by Arnold Hartig (1878 - 1972) who was a Czech sculptor and medalist who worked six decades in Vienna. This medal featured Johannes Brahms (1833-97). All of them feature composers, starting with J.S. Bach (1685-1750), Haydn (1732-1809), Johannes Mozart (1756-91),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Franz Schubert (1797-1828), and last but not least Johan Strauss II (1825-99). To see them all, in spite of their lack of beards, left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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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Goya
Truth, Time, and History, about 1797-99 or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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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Sommeil de la Raison Engendre des Monstres" de la série "Les Caprices" eau-forte et aquatinte de Francisco de Goya (circa 1797-99) à l'exposition “Louis Janmot, Le Poème de l'Âme” au Musée d'Orsay, novembr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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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éclaration de Pillnitz
La Déclaration de Pillnitz est une déclaration commune publiée le 27 août 1791 par Léopold II, empereur du Saint Empire romain (r. de 1790 à 1792) et le roi Frédéric-Guillaume II de Prusse (r. de 1786 à 1797). Cette déclaration appelle toutes les puissances européennes à s'unir contre la Révolution française (1789-99) et à rétablir dans ses pleins pouvoirs le roi de France Louis XVI (r. de 1774 à 1792), réduit à l'état de monarque constitutio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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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Dick and the Spithead Mutiny
Admiral of the Fleet Richard Howe, 1st Earl Howe (1726-1799) was an extraordinary personality and spent more than 60 years in the service of the Royal Navy. On 16 April 1797 the mutiny began at Spithead, the main naval anchorage near Portsmouth.
Admiral Richard Howe, 1726-99, 1st Earl Howe, by Henry Singleton (1766–1839) (x)
16 ships of the Channel Fleet raised the red flag of insurrection. The demand of the men: a rais in pay, a more equitable distribution of prize money and better victuals. When negotiations broke down between the two sides, King George III personally requested Howe.
And why him? well, he was one of the few officers who treated men well and was always fair, so he was a stalwart of the men's hearts and was even affectionately known as Black Dick. There have been a number of explanations offered for this, his swarthy complexion also known as " Sea Tan" being one and the fact that he never smiled unless a battle was about to begin may be the other one. But back to the Mutiny. Although over 70 and suffering from gout and other ailments, he agreed - but only if his dear wife Lady Howe accompanied him.
Print of a caricature published 9 June, 1797, depicting the Delegates of the mutiny meeting with Admiral Buckner. Richard Parker is the figure on the far-right. (x)
They set out on 10 May on a wild and stormy night and arrived at Portsmouth the following morning. Howe left his wife at the governor's house and immediately set out by barge for Spithead. He came alongsinde HMS Royal George, the headquarters of the insurrection, and despite his infirmities he rejected all offers to help him come aboard and clambered up unaided. He called the ship's company to the quarterdeck and started to talk to them man to man, neither reproaching their conduct nor standing on his dignity. Several hours later he went to HMS Queen Charlotte. For three days he went from ship to ship - talking, listening, heaving his rheumaticky knees and gouty feet up and down ladders until he was so tired he had to be lifted in and out of his boat. But by the end he has achieved reconciliation on both sides, with a Royal pardon for all the mutineers, a reassignment of some of the most unpopular officers and a pay rise and better victualling for the sailor.
On 15 May there was a grand celebration in Portsmouth, and the mutineers' delegates marched in procession up to the governor's house accompanied by bands playing " God Save the King" and " Rule, Britannia". The delegates were invited inside for refreshments, then appeared on the balcony with the Howes to huzzahs from the multitude, after which they set out together for the anchorage. On board Royal George Howe was given three cheers and the red flag of mutiny was pulled down; the other ships quickly followed. Later that day Lord and Lady Howe hosted a special meal for the delegates before they returned to their ships and reported for d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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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richo no. 26; Now They Are Sitting Well (1797-99) - Fransisco de G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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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RICHOS – "VOLAVÉRUNT" FRANCISCO DE GOYA // LXI, 1797-99 [etching print | 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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