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7301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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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알 수 없는 곳에 접어들었다.
나는 매번 알 수 없는 곳에 놓이곤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그 어느때보다도 새로운 장소로, 갑자기 내 몸이 무언가에 강하게 이끌리듯 빨려들었다.
이곳은 때론 너무 눈부셔 제대로 사물과 형상을 인식할 없고, 아픈 사람처럼 계속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공기 자체가 어딘가 굉장히 긴장되어 있는 듯한 공간이었지만 또 그 긴장과는 정반대로 그 어떤 장소에 갔을 때보다도 더 마음의 流れ가 안정되는 신묘한 공간이었다.
무엇인가를 매만지고 있다.
굉장히 익숙한 손끝의 감촉. 그러나 정오의 태양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셔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이니 이것이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유추만 할 뿐 어떠한 가닥도 실마리도 잡을 수 없다. 그저 이 세상에서 이것이 영원한 미궁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이 감촉을 가능한 마음 속에서 잊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여름의 냄새가 몸 속으로 들어와 순환하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쾌청한 공기가 코 속을 야릇하게 만들고 나뭇잎들이 바람에 의해 서로 부딪혀 진동하는 소리가 또 몸 속으로 들어온다. 아파트 5층보다 높이 솟은 수 없이 많은 교목들과 조경용 회양목, 바닥에 깔린 오래된 흙, 노후화된 하얀 벽에 나 있는 담쟁이덩굴, 그런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이 어느샌가 마음의 구석진 곳에서부터 점점 마음의 겉면까지 크게 넓혀지면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그림을 내면 속에서 필사적으로 쫓기 시작했다. 나의 내면은 그것을 붙잡지 못할 거 같아 위태로운 감정을 띄면서도 또 한편으론 붙잡지 못해도 좋다고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미쳐버린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드니 한순간만에 이 공간이 다함없이, 무엇보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사무치도록 어둡게만 느껴졌고, 공사장 주변의 쾌쾌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고, 어디로 가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가 그런 당연한 생각조차 들지 않을만큼 정신이 혼탁해졌다.
그러나 내면은 여전히 그 그림을 쫓고있었다. 그것에 내면의 손가락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는가하면 일순간에 멀어져버려 손을 쓸 수 없는 거리에 놓이는 허무함이 반복되었다.
이곳을 떠날 수도 없고(애초에 방법조차 모르지만) 만약에 떠난다면 그 그림을 제대로 보지 않고 떠나버린 것에 평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바보 같아져서 갑작스레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우울해져 움츠러들고 자책했다. 그러곤 뭔가 현실같지 않은 이 현실에 체념 하며 몇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온통이 까맣기만 한 시야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4시간쯤 지났을까,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오로지 이성만이 남은 짐승의 모습처럼 변해가고 있을 때 문득 마음 속에서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눈 앞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의문을 처음으로 품었다. 정오의 태양의 위력만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야, 사실은 난 이곳에 왔을 때부터 태양이 떠 있는 것인지 확인도 못할 정도로 눈을 세게 감고 있었지. 어째서 여태 눈을 뜨지 않은 것일까? 어두운 시야에 익숙해져서? 그렇지는 않다.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나는 마음 속에서 화창한 어느 여름 날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눈을 뜨지 못 하게 하는 것인가?
아! 기억났다. 어째서 이 두 눈을 온갖 고집을 부리며 감고 있던 것인지를!
바보같은 웃음을 띄며 미소를 지었지만 여전히 눈은 뜨지 못한다.
눈물이 흐르지 않은 세월이 벌써 5년도 넘었다. 이제까지 지켜왔던 모든 것들을 눈물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간직하고 싶었던 욕심.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진심으로 말한 것은 또 얼마나 지났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사람인척 하는 짐승.
두려웠고 두려웠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아서 두려웠고 시도하려고 하는 순간이 두려웠고 시도하는 인간들을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두려웠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으니 점점 자신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어째서인지 내 모습보다 그림자의 형태가 더 그럴듯하게 사람처럼 보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느 장소에 이끌려가도 결국 나는 그곳이 어떤 형태인지 오로지 감각으로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그곳에 추악함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는 죽어가는 것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낙화하는 신록을 본 것이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이자 그 한 장의 가녀린 초록색 잎이 떨어진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이대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내 감고 있는 두 눈에 상냥히 키스를 해 줄 어느 아름다운 여인을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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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9tae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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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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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nprojec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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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결핍
어렴풋이 의사 선생님이 말했던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왜 나에게만 '사라지는 일'들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애정을 두는 모든 것이 시간을 앞다투어 사라져갔다.
마음을 주면 떠나기 일쑤였고, 아끼던 물건은 언젠가 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어느 것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마음을 전부 내어줄 수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를 놓아야 '무언가'를 넣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매일을 허전함에 허덕이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쩌면 끊임없는 결핍을 채울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뭐, 틀려도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Ram
*결핍
1. 다정함이 결핍된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종종 다정함을 찾아볼 수 없을 때가 있다. 이유 없는 불친절함은 불신과 예민함을 유발하고, 견제만 늘게 된다. 쌓이고 쌓이다 엄한 사람에게 화풀이는 하는 경우도 많고, 마음속 불만은 크게 부풀어 올라 작은 바늘 하나가 스쳤을 때 펑! 하고 터져버리는 상황도 종종 있다. 스트레스와 화가 쌓이기 전에, 불만과 예민함이 자리 잡기 전에 따뜻함과 사랑을 채워 넣어보자. 그것들이 편하게 있을 수 없도록.
2. 햇살이 잘 드는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 마음껏 원하는 책도 읽고 싶고, 속닥속닥 생각나는 글도 써보고 싶고, 몇 시간동안 집중해서 공부도 하고 싶고, 하얀 구름이 송송 박힌 파란 하늘 아래를 원 없이 걷고 싶고, 커피 볶는 향과 빵 굽는 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두런두런 두서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가을.
3. 시간이 지날수록 칭찬을 듣기가 꽤 어렵다. 잘하고 있다고 한마디씩만 주변에 건네주자. 분명 다들 잘하고 있을 테니까.
-Hee
*결핍
1. 살면서 결핍된 것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 ���은 그 결핍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과정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건 결핍을 채우다보니 넘치는 것들이 생기고, 넘친 것들을 제 때 걷어내지 못하니 그 나름대로 탈이 나는 사실이 또 웃겼다.
행복을 채워나가는 일들이 참 만만치 않았다.
2.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항상 결핍 속에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우선순위가 중요했다. 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는 끝이 없었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은 너무도 부족했다. 그 속에서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행동으로 옮길지.. 기준을 세워 솎아내는 게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결핍.
더 날래야만 했다.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선 지하철 퇴근길. 한번은 '꼭 이렇게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야만 할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여행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더이상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퇴근하고싶지 않단 생각이 먼저 든 건 안비밀.
-Cheol
*결핍
1. 금요일 새벽 구례로 가는 기차에 오르면서 어쩐지 답답한 느낌이 온몸을 가득 채운 것만 같았다. 퇴근하자마자 쉴 시간도 없이 급하게 짐을 꾸려 집을 떠나가는 모습이, 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정해진 약속과 계획 따라 여유 없이 바쁘게 흘러갈 시간들이 아둔하게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할 뿐인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고, 고지식하게 매 주말을 하고 싶은 일에 할애하면 갑갑해지고. 어째서 이렇게 답 없이 쓰라리기만 한지 모르겠다. 무엇이 또 부족해서. 지금 그대로 만족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런 생각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은 또 어떠한 결핍인지.
2. 어쩌면 균형과,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기 때문에 숨 막히게 답답한 것은 아닌지. 금요일의 혼란에 대한 답의 형체가 주말의 끝에서 일렁인다.
3. 나는 내 체력의 삼분의 일도 다 못 쓴 셈이지.
세석에서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귓가에 자꾸만 맴돈다. 비싼 장비와 의류로 온몸을 치장한 남자가 같이 온 아주머니들에게 하는 유세가 끊이지 않는다.
돈 많으면 그럴 수 있지, 당연한 일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종주가 어쩌고 체력이 어쩌고 우습잖아요. 체력도 가졌나 보지.
도대체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면 그럴 수 있지.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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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bae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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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 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란다.
죽을 생각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 받은 일이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 연기가 빠져나가듯이, 생명은 가뭇없이 빠져나갔다. 생명은 본시 연기나 바람 같은 기체가 아니었을까.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죽어가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마지막 이승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이승의 마지막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지막 망막의 기능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서웠다. 그와 나는 마지막 시선을 교환하면서 작별했고, 차가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또 나의 몫이기도 할 것이다. 다 똑같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 무서움은 공유되는 것이 아니고 각각 저마다의 몫일 뿐이다.
나는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일이 무섭다. 그래서 살아 있는동안의 무사한 하루하루에 안도한다. 행복에 대한 내 빈약한 이야기는 그 무사한 그날그날에 대한 추억이다. 행복이라기보다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핸드폰을 사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원을 주었다. 첫 월급으로 사온 핸드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스러움이 겹쳐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그 아이는 나처럼 힘들게, 오직 노동의 대가로서만 밥을 먹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딸아이는 어렸을 때 침을 많이 흘렸고, 늘 젖을 토했다. 두 돌이 다 지나도록 턱밑에 수건을 매달았다. 안아주면 늘 삭은 젖냄새가 났다. 나는 그 젖냄새에 늘 눈물겨워했다. 이것이, 내 혈육이고 내가 길러야 할 내 어린 자식의 냄새로구나, 내가 배반할 수 없는 인류의 냄새로구나……
술 취하고 피곤한 저녁에, 잠든 아이의 머리에 코를 대고 아이의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때때로 슬펐다. 내 슬픔은 결국 여자의 태에서 태어나서 다시 여자의 태 속에 자식을 만드는 포유류의 슬픔이었다. 여자의 태는 반복과 순환을 거듭하며 생명을 빚어내는 슬픔의 요람이었다. 그 어린아이가 자라서 또 여자가 되었다. 결혼을 해도 좋을 만큼 자란 여자 성인이 된 것이다.
이 여자아이가 또 여자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여자아이를 낳을 것이다. 나는 이 진부하게 순환되는 삶의 일상성 속에서 기적과도 같은 경이를 느꼈다. 삶은 느리고도 길게 계속되는 것이고, 무사한 그날그날 속에서 젖을 토하던 아이가 다 큰 여자로 자라는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내미는 딸을 바라보며, ‘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좋은 것이로구나’ 생각하면서 혼자 기뻐했다.
이 무사한 하루하루가 흘러 결국은 저 차가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 속에서 핏덩이는 자라서 여자로 변한다. 그 아이는 내가 기른 아이가 아니라, 저절로 자란 아이였다. 무사한 날들의 이 한없는 시간들이아니라면 무엇이 그 아이를 여자로 길러줄 것인가. 그리고 그 생명의 고유한 힘이 아니라면, 어린아이가 어떻게 여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핏덩이가 자라나서, 검은 머리카락이 늘어지고 젖가슴이 도드라지고 또 어깨가 둥글고 잘 웃는 여자가 된다는 것, 이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지상에는 없다.
그 아이가 어려서, 분홍빛 잇몸에서 흰 싹 같은 앞니가 돋아나고, 또 말을 배우느라고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종알거릴 때도 나는 이 진부한 일상 속에서 살아서 작동하는 삶의 신비를 느꼈다. 이 작은 신비들이 시간 속에서 쌓이고 또 쌓여 갓난아이는 여자로 바뀐다.
다시 눈을 뜨고 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들을 들여다보니, 거기서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누렇고 붉은 열매들이 열린다. 그리고 태어난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시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 만이 영원하다. 모든 강고한 것들은 무너지지만, 저녁노을이나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는다.
갓난아이가 여자로 자라는 기적과, 덧없는 것들의 영원함 만이 구덩이를 기다리는 이 무사한 그날그날의 행복이다.
나의 행복은 이처럼 작고 초라한 것이다. 딸이 늦게 귀가하는 날, 딸이 사다준 핸드폰으로 딸에게 전화를 걸면 그 다 자란 여자가 말한다.
“아빠, 저 오늘 늦으니까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주무세요.”
“알았다. 운전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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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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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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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ol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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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표한 모든 글이 ‘나의 문학론’이리라고 했던 건, 문학비평을 포함한 모든 비평은 결국 ‘문학으로 읽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읽는 대상마다 문학적 평가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학으로 읽는다는 건 무엇이 문학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읽는 대상에 가장 적절한 읽기 방식을 모색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택해진 방법으로써 말들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텍스트이든 문화적 표상으로만 인식하여 사회의 한 증상처럼 분석하는 건 대체로 충분치 않다고 여기는 것. 말들을 즉각적으로 이해시키고 이해해야 한다는 압박에 휘둘리지 않는 것. 말들의 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자명한 어의 외의 요소들을 가지고 의미의 경계 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 이런 태도들을 가져보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할까. 어째서 그런 다짐이 필요한 걸까. 나는 인간에게 말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까지 생각한다는 얘긴 앞에서도 했지만, 한편 이 세상에 이렇게 말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매일매일 인간의 거의 모든 경험이 말로 매개되어 데이터화되는 현실에서 나의 삶, 당신의 일생, 우리의 이야기는 어쩐지 희미해지는 것만 같다. ‘구글신’이라는 말이 터무니없지 않은 이 세계에서, 전체/정체를 알 수 없는 회로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말들은 우리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시스템의 연료로만 쓰이고 말리라는 기분에 휩싸일 때, 어쩌면 기묘한 체념조차 느끼는 듯하다. 누구도 혼자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 정말 거대한 알고리즘으로만 짐작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는 세계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겪는 유동적이고 다형적이고 덧없는 경험들이 어떻게 처리되어야 할지에 대해선 미미한 고민이나마 그만둘 수가 없다. 그만두어지지가 않는다. 별안간 심각해지고 계속 분투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 좋아하는 작가들은 대개 단순하지 않고 심각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다. 합리적이지만 확신하지 않고, 애매한 것을 비합리로 몰아가지 않는다. 갇혀 있지 않으나 은밀하고, 아무 세상이나 떠돌지 않아도 먼 곳에 닿아 있다. 일상의 미지를 알려주면서 시간의 긴 연속성을 생각하게 하고, 개별 정신의 복잡성을 통과하여 비개인적인 곳을 비춰준다. 이런 점들이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일이고, 멋진 말들의 힘이고, ‘나의 문학’이니, 이것은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할 것이고, 모두들 ���처럼 생각해주면 좋겠고, 블라블라.......”
백지은, 「오늘도 인간을 귀하게」, 『문학동네』, 2019년 봄호, p.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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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pan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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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안아줘. 그때처럼 뜨겁게 날 안아줘. 그때보다 뜨겁게
우린 전과 다른 것이 없을 텐데 무엇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나?
여전히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어째서 우린 이렇게 어색할까? 
안아도 될까? 그때처럼 뜨겁게 안아도 될까? 그때보다 뜨겁게 
- Sketch / 2019.07.01  Download : http://xgambit.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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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bukun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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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타츠로 문예춘추 인터뷰
"슈거 베이브 이후 폰타에게 드럼을 맡긴 이유" 야마시타 타츠로가 처음으로 말하는 전우 무라카미 "폰타" 슈이치
야마시타 타츠로 롱인터뷰#1
일본을 대표하는 드럼, 무라카미 "폰타" 슈이치 씨가 3월9일, 입원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1970년대에 발표한 "SPACY", "It's a Poppin Time"등의 앨범에서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 폰타 씨를 기용한 싱어송라이터 야마시타 타츠로 씨(68)가 20대 당시부터 기예의 뮤지션으로서 같은 세대를 산 "전우"의 추억을 회상했다.
인터뷰는 음악 저널리스트인 신보 미유키 씨. 신보 씨는 폰타 씨가 데뷔 30주년을 맞아 출판한 자서전 "자폭자전"(2003년, 문예춘추 출간)의 구성을 다뤘다.
폰타는 이야기를 부풀리니까(웃음)
야마시타 타츠로(이하, 야마시타) - 굉장하네요. 무라카미 폰타를 문예춘추가 다루다니(웃음). 추도기사가 며칠전 문춘 온라인에 실렸지만
-이유는 폰타 씨의 자서전("자폭자전")이 문예춘추에서 나왔기 때문이죠.
야마시타 - 그건 언제쯤입니까?
-2003년입니다.
야마시타 - 그럼 가장 상태가 가장 안 좋았던 시기일려나. 조금은 괜찮아졌던가
-취재중 츄하이 캔을 마셨습니다. 10번 정도 인터뷰를 했는데 말씀하신 전부가 사실인지 어떤지 확실하지 않은 점도 있었습니다.
야마시타 - 이야기를 부풀리니까(웃음)
-한편 야마시타 씨와 자주 했던 70년대, 록폰기 피트인에서의 라이브 앨범("It's a Poppin Time") 전후의 일화는 특히나 말씀이 생생했습니다. 당시의 기세가 전해지는 점�� 있어서 폰타 씨에게도 무척이나 큰 위치를 차지하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번에는 세상을 떠난 것이 계기인 점이 아쉽지만 야마시타 씨 자신이 당사자이기도 하니 부디 일화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야마시타 - 70세였지요. 저보다 2학년 위니까. 2001년이었나 02년 즈음, 심장에 문제가 여러모로 있어서 술, 담배를 끊고
-하지만 시가는 피우고 계셨습니다.
야마시타 - 허세를 부리는 거죠. 멋을 부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5년전이었나 마찬가지로 최근에 세상을 떠난 기타리스트 마츠키 (츠네히데) 씨와 폰타가 신주쿠의 피트인에서 라이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게스트로 노래를 불렀는데 드럼 솔로를 듣고서 많이 힘들구나 하고
-요 10년 사이에 무척 야위셨지요.
야마시타 - 네. 이미 상태가 안 좋았죠. 어찌됐건 너무 많이 마셨어요. 첫째도 둘째도 너무 많이 마셨어요. 90년대에는 리허설은 상관 없지만 본 무대가 되면 취기가 올라왔으니까
-리허설부터 마시기 시작하신건가요.
야마시타 - 마셨습니다. 한참 예전부터.
-70년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까?
야마시타 - 그건 (무대에 같이 서는) 사람에 따라서. 마츠키 씨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로 안 마셨습니다. 엄격한 사람이었으니까. 마츠키 씨 자신은 마셨지만(웃음)
-상대를 보는거군요.
야마시타 - 봅니다. "PONTA BOX"(*80~90년대에 폰타 씨가 결성한 재즈 트리오)라면 (멤버에게) 어리광을 부립니다. 어쨌든 외로움을 잘 타니까요. 언제나 누군가가 곁에 없으면 안 돼요. 술을 마시고서 주정을 부리다가도 "시끄러워, 폰타!"하고 소리치면 움츠러드는 부분이 있었으니
-만났을 때부터 계속 그러셨나요?
야마시타 - 아니요, 처음에는 접점다운 접점은 없었어요. 『赤い鳥』 시절 폰타는 유난히 애드립이 많았어요
-르네 시마르의 투어에서 처음으로 함께 하셨다고요?
야마시타 - 그 전에 『赤い鳥』(*폰타 씨가 멤버였던 포크 그룹)의 실제 연주를 봤습니다. 야마하 매장 이벤트였던가. 기타가 (오오무라) 켄지에 베이스는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네요. 그 때는 폰타라는 걸 몰랐지만요. 몰랐지만 스윙의 왈츠에서 유난히 애드립이 많았어요.
-당시에도 애드립이 많았군요.
야마시타 - 분명히 의식하게 된 것은 스스로 코러스로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뛰게 되면서부터입니다. 폰타가 연주하는 레코드가 어쨌든 많았으니까요. 직접 일을 한 것은 르네 시마르가 처음이었지만 그 때면 이미 폰타는 굉장히 잘 나갔으니까요. 지인이라는 느낌이 아니었어요. 정말로 스튜디오 뮤지션 중의 "스타"였으니까
-그 부분은 당시 현장을 모르면 알 수 없는 감각입니다.
야마시타 - 우리 세대에 있어서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드러머라고 하면 우선 폰타였습니다. 그 전에는 이시카와 (아키라) 씨로 60년대의 스튜디오 작업에서 인상적인 점은 대부분이 이시카와 씨가 연주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시절의 가요곡 레코드에는 뮤지션의 크레딧 같은 건 일절 없으니까요.
애시당초 "스튜디오 뮤지션"이라는 호칭마저도 없어성 요는 밴드맨. 미국의 "렉킹 크루"나 모타운의 "훵크 브라더즈"와 마찬가지로 연주 인세 같은 건 없고 모두 현장에서 일당으로 지급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5년동안 할 수 있는 만큼 일하고 스낵 하나 차려서 그만두는 게 밴드맨의 라이프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 같이 (기존의 가요곡 시스템과 거리를 둔) 이른바 일본의 록이나 팝스, 서브컬쳐에서 나온 음악에는 조금 다른 뮤지션과의 연계가 있었습니다. 가수 뿐 아니라 연주자에게도 기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완전 분업이었습니다. 작곡가 선생이 가수를 키워서 작사가와 팀을 짜서 곡을 쓰는. 레코딩을 하면 레코드 회사의 디렉터가 "드럼 1명, 베이스 1명"하는 식으로 주문하는 감각으로 뮤지션을 모았습니다
스튜디오 드러머 하면 폰타였다
-"자폭자전"에서도 폰타 씨가 가요곡 분야에서 거침없이 벌던 시기의 일화가 나옵니다. 하루에 많으면 6~7곳 걸쳐서 도내의 스튜디오를 택시로 돌았다고.
야마시타 - 제가 오누키 타에코나 요시다 미나코와 코러스 팀을 짜서 스튜디오 작업을 하던 시기에는 누가 연주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연주의 큰 축이 구축되면 코러스를 덧붙여 나가는 식이니까요. 하지만 드러머나 베이시스트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3시간에 2곡을 녹음하는 것이 원 세트로 잘 나가는 연주자는 그 사이클을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반복합니다.
제 경우는 한편 스스로 곡을 쓰고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도 겸했으니까 그 정도로 완전 분업이 아닌 면이 있었습니다. 편곡만 해도 편곡가 선생에게 부탁하는 게 아닌 스튜디오 뮤지션 동료가 조금 더 친밀하게 관련하여 앙상블의 새로운 방법론이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70년대에 들어서면 스튜디오 뮤지션에게 일정 수준이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72년부터 73년에 걸쳐서 스튜디오 뮤지션 드러머라 하면 어쨌든 폰타였습니다.
슈거 베이브 시절에 느낀 '배타적인 분위기'속에서도...
-폰타 씨를 가까이서 접했을 때의 인상은 어땠습니까?
야마시타 - 정말로 상냥한 사람입니다. 그건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변함 없어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냐면 당시 스튜디오 뮤지션, 특히 도쿄의 스튜디오 뮤지션이라고 하면 중산층에서 상위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사립의 부속고등학교 출신 사람들도 많았고
-아오야마 학원이라던가.
야마시타 - 그렇죠. 그리고 케이오나 메이지 학원. 그런 사람들이 아니면 좋은 악기는 살 수 없었어요. 제 고등학교 시절 회사원의 첫 임금이 4만5천엔이던 시기에 깁슨 레스폴이 32만이었습니다. 가장 싼 텔레캐스터조차 17만엔이었으니까요. 드럼에 이르르면 러딕이 5~60만 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걸 살 수 있는 것은 어지간히 좋은 집의 도련님이나 벌이가 좋은 프로 밴드맨뿐이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아르바이트를 해도 기타라면 모리스나 아리아, 드럼은 펄의 저가형 모델이 겨우였으니까(웃음).
그런 의미에서 도쿄의 스튜디오 뮤지션이란 어딘가 괴짜스러웠습니다. 배타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슈거 베이브"(*73년에 야마시타 씨를 중심으로 결성한 인디 밴드)를 하던 시절, 특히 그런 부분을 느꼈습니다. 같은 도쿄에서도 저희들은 죠호쿠 지구 출신. 이케부쿠로나 스가모, 아카바네가 홈그라운드인 인간이라서요.
코러스 보이였던 저에게도 "구별"이 없었다
-'틴 팬 앨리"의 음악 자체가 도쿄의 도련님 문화에서 태어난 면은 있지요.(*호소노 하루오미, 스즈키 시게루, 하야시 타츠오, 마츠토야 마사타카 4명이 모인 세션 그룹. '캐러멜 마마'가 발전적으로 확대된 프로젝트)
야마시타 - 말 그대로입니다. 캐러멜 마마, 틴 팬 앨리, 새디스틱스. 베이비 부머 중에서 그 일군이 돌연변이같은 초절 테크닉을 가지고 등장했습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현상은 없었어요. 불량성이 없는 대신에 도련님스러운 독특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어서... 마츠모토 타카시 씨 같은 사람도 그랬구요.
-미국 대학에서 말하는 남학생 사교 클럽적인.
야마시타 - 맞아요. 거기에는 실력의 격차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니혼세이넨칸이었나 슈거 베이브가 틴 팬의 오프닝 게스트를 맡았을 때 연주가 끝나고 (라이브 음원의) 카세트를 받으러 갔더니 PA 스탭이 "너희들은 실력이 없어서 녹음 안 했다"라며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상다반사였습니다. 상대방은 잊었을지 몰라도 저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웃음).
폰타에게는 그런 면이 전혀 없었습니다. 테크니션이지만 포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후배의 돌보고 정말로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굳이 말하자면 저는 일개 코러스 보이였습니다. 하지만 폰타의 경우 그런 걸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라이브 연주를 부탁하고 싶다"고 요청하러 갔을 때도 노래를 부르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인정해줬습니다. 이 바닥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인간이 적지 않습니다. 폰타는 그런 표리부동한 태도가 일절 없었습니다.
호불호의 기준은 '스타일'보다 '스탠스'
-폰타 씨는 대외적으로 무똑똑한 이미지도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런 부분을 느낀적은 없습니까?
야마시타 - 없습니다. 오히려 관용한 ���람이었습니다. 뮤지션에게도 여러 타입이 있어서 뭐든지 비하하고 나쁜 점만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폰타나 야마기시 준시는 정말로 싫어하는 것 이외에는 비방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호불호"의 기준이 되냐면 스타일보다는 오히려 스탠스입니다. "너 그런 태도로 하는 거 아냐"하는 자세는 있어도 상하관계나 음악 스타일에서는 일절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잘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장르가 아니군요.
야마시타 - 장르가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한 관용은 훌륭했습니다. 이즈미야 (시게루) 씨와 같이 라이브를 한 것도 그 사람 나름의 음악에 대한 열정, 그런 것을 중요시한 것이 아닐까요.
어찌됐건 저 자신이 형편 없는 밴드를 하면서 병행해서 코러스 스튜디오 뮤지션을 하게 됐습니다. 특히 남성 코러스는 이 장르에서는 저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 때가 요시다 미나코와 오누키 타에코와 무라마츠 쿠니오와 르네 시마르의 투어에서 코러스를 했을 때입니다. 그 후 미나코의 "FLAPPER"에 제가 제공한 『永遠に』란 곡을 폰타가 연주하거나 그 즈음부터 조금씩 소통이 시작됐습니다. 거기서부터 제 "SPACY"란 앨범으로 이어졌습니다.
"SPACY"의 밴드는 자신의 "드림팀"이었다
야마시타 - "SPACY"는 굉장히 특수한 앨범으로 저는 그걸 제작할 때 저에게 있어서의 드림팀을 상정했습니다. 호소노 (하루오미)씨의 베이스에 폰타의 드럼, 사토 (히로시)씨의 키보드에 마츠키 씨의 기타라는 4리듬으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구성도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고 호소노 씨와 폰타는 여태까지 같이 연주한 적이 없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폰타 씨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담으로 처음 스튜디오에서 만났을 때 호소노 씨가 의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서 연주하고 있어서 그걸 본 마츠키 씨가 " '너 좀 건방지네'라고 말하고 오라고"명령했다고(웃음).
야마시타 - 그것도 마츠키 씨 특유의 허세입니다. 르네 시마르의 투어 때 마츠키 씨 "뭐야, 저 코러스 팀은 인사도 안 해"라고 말했다고(웃음).
-우선은 시비부터 걸고 보는거군요(웃음).
"LOVE SPACE"의 연주는 칸사이 vs. 칸토였다
야마시타 - 최초로 녹음한 것이 (앨범 첫번째 곡으로 수록된) "LOVE SPACE". 서로 분위기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사토 씨는 어찌됐건 폰타와 마츠키 씨는 호소노 씨와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마츠키 씨는 그런 성격이고. 그렇게 칸사이 2명, 칸토 2명입니다.(*폰타와 사토가 칸사이 출신)
-동서대결이기도 했군요.
야마시타 - 애시당초 제 멋대로인 망상으로 짠 편성이었으니까요. 자신이 하고 싶은 편성으로 어떤 곡을 할지 나중에 생각했습니다.
-어디까지나 편성 우선이었군요.
야마시타 - 저는 항상 그렇게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전속 송라이터입니다. 폰타가 연주하면 어떤 곡이 좋을지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이른바 싱어송라이터의 발상이 아닙니다.
-재료가 갖춰지고서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하는.
야마시타 - 아무리 뛰어난 드러머라도 미숙한 부분은 반드시 있는 법이라서 8비트가 특기인 사람과 16비트가 특기인 사람. 재즈 테이스트이면서 튜닝이 높은 사람이 있으면 이른바 하드록 계열의 중후한 연주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16분 음표를 기본으로 한 4분의 4박자 비트가 16비트. 이에 반해 8비트는 8분 음표를 기본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록의 기본 비트. 마찬가지로 4비트는 오소독스한 재즈의 리듬 패턴)
"SPACY"중에서도 "SOLID SLIDER"는 우에하라 유카리 (유타카)쪽이 곡조적으로 맞았습니다. 거기서는 제 기타에 사카모토 (류이치)군의 키보드, 타나카 (아키히로)의 베이스와 유카리의 드럼 포진으로 또 하나의 팀이 폰타, 호소노 씨, 사토 씨, 마츠키 씨. 이 두 팀으로 곡을 분배했습니다. 이 인선이라면 이 곡이라는 발상으로 진행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면이 강하지만.
"연주의 타임감이 정말로 정확합니다" 야마시타 타츠로가 처음으로 말하는 드러머 무라카미 "폰타" 슈이치
"LOVE SPACE"인트로의 텀 플레이 비화
-그렇다고 하지만 호소노 씨와 폰타 씨의 조합은 발상 자체가 지금 돌이켜봐도 "잘도 이런걸"이라고밖에 말할 길이 없어보입니��.
야마시타 -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일본에서 가장 우수한 베이시스트라고 하면 역시 호소노 씨 이외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반대로 폰타는 압도적으로 개성이 달랐습니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로 뮤지션이라는 것은 결국 언어가 아닙니다. 가령 "LOVE SPACE" 도입부의 피아노입니다. 그건 사토 군이 갑자기 본 레코딩에서 연주했습니다. 2테이크째였을까? 모두 순간 "윽"했겠지만 그 순간이 결정적입니다. 사토 군이 도발해서 거기에 3명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 순간이 창작을 낳습니다.
-그것은 악보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군요.
야마시타 - 악보는 있었습니다. "SPACY"의 전작이자 데뷔작인 "CIRCUS TOWN"을 뉴욕에서 녹음했을 때 어레인저인 찰리 카를로가 작성한 치밀한 악보가 굉장히 실천적이어서 그것을 연구해서 스코어를 썼습니다. "LOVE SPACE"의 인트로의 텀 플레이는 악보에 써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아무도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웃음).
록, 재즈, R&B의 혼돈속에서 뻥 하고 튀어나온 것
-이런 식이니까 이렇게 가면 된다 같은.
야마시타 - 그렇습니다. 야마시타 요스케 씨가 한 명언으로 "음악은 승패가 있는 것이다. 싸움은 승패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가 있습니다. 승패라고 말해도 재즈 플레이어게 있을 법한 실력 없는 연주자를 괴롭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얼마나 소리에 즉각 반응할 수 있는가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3시간에 2곡 녹음"과 같은 특정 시대의 스튜디오 뮤지션이 요구되던 현장의 요청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로큰롤이 탄생한 50년대부터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이르는 음악 르네상스의 섬광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로큰롤이나 재즈, 리듬&블루스가 혼연일체가 된 혼돈속에서 뻥 하고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에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한편 "SPACY"같은 것은 당시 판매량이 2만장도 못 미쳤습니다. 1만4천장 정도. 그런 가운데 그런 "창조"가 일어났습니다. 점점 거대 비즈니스화되면서 일종의 포퓰리즘화됐다고 할까 판매량으로 우선 순위가 옮겨갔습니다. 노래방에서 부르기 쉽다던가 말이죠. 저도 그 이야기는 줄창 들어왔으니까. "어째서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는 곡을 더 만들지 않냐?"라는 식으로. 무슨 소리를 하냐고 남들이 못하는 것, 가령 백 턴 10번을 할 수 있으니까 돈을 받을 수 있다고, 그럴 때는 반응을 했지만 이해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당시의 야외음악당 관객이란 기본적으로 "신나는지 아닌지"였다
-"SPACY"에 이어서 폰타 씨를 드럼에 기용한 더블 디스크 구성의 라이브 앨범 "It's a Poppin' Time"이 발표됩니다.
야마시타 - 슈거 베이브를 해산하고서 한 동안 제가 이끄는 밴드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지인의 밴드와 연주하곤 했지만 라이브 횟수가 급감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SPACY"를 내고서 히비야 야외음악당의 스프링 카니발에 섭외되었습니다.
당시 야외음악당의 관객이란 기본적으로 "신나는지 아닌지"였으니까 슈거 베이브로 출연했을 때도 반드시 야유를 받았습니다. "따분하다"라던가 "좀 더 신나는 곡을 해라"라는. 대체로 웨스트 로드 블루스 밴드라던가 우에다 마사키가 마지막이었으니까.
-거기에 슈거 베이브가 출연하면 원정팀같은 느낌이.
야마시타 - 그래서 그런 류의 야외 페스티벌에 출연할 때 슈거 베이브는 반드시 순서가 가장 먼저였습니다. 초반이라면 아직 관객도 냉정하니까 야유는 해도 적어도 뭔가 날아오진 않았으니까(쓴웃음).
그래서 스프링 카니발의 의뢰가 왔을 때 곤란의 극치였습니다. 아는 멤버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전혀 형태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 때도 피아노는 사카모토 군이었는데 베이스와 드럼이 무엇보다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일류를 써야만 했다
-사카모토 씨는 이미 밴드 멤버였군요.
야마시타 - 사카모토 군은 슈거베이브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까요. 그는 그렇다쳐도 베이스와 드럼은 좀 더 뛰어난 사람한테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카노 선플라자였나? 리허설 중이던 폰타와 대불(타카미즈 켄지・베이시스트)하고 교섭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찌됐건 개런티가 비쌉니다. 일반적인 라이브라면 1스테이지에 6만에서 8만은 받으니까.
-당시 물가로 말이지요.
야마시타 - 게다가 리허설로 그 절반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래도 힘들어서 교섭을 해서 40분 라이브로 합의했습니다. 그래서 스튜디오에서 연습해보니 이틀, 사흘 해도 안 되던게 30분만에 4곡이 완성되었습니다. "LOVE SPACE"와 스모키 로빈슨의 "OOH BABY BABY"와 "CIRCUS TOWN"인가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SPACY"에서 구체화한 세계를 라이브로 재현하려고 했더니 결국 일류를 써야만 했다.
야마시타 - 그래서 라이브도 폰타와 하게 됐습니다. 어떤 경위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츠키 씨가 오카자와 (아키라)씨와 하고 싶다고 말해서 폰타, 오카자와, 마츠키, 사카모토, 색소폰의 토키 히데후미의 라인업이 결정됐습니다. 요시다 미나코는 당시 저와 같은 레코드 회사로 그녀는 폰타 일행과 줄곧 작업한 것도 있어서 그 연장선으로 학교 축제 같은 곳에서 자주 조인트 공연을 했습니다.
미나코가 77년에 낸 "TWILIGHT ZONE"도 거의 같은 면면으로 레코딩했으니까요. 학교 축제라면 개런티도 받을 수 있고 말이죠. 저와 미나코가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해서 미나코의 무대 때는 제가 세컨드 기타로 들어가서 기타를 두 명이서 하기도 했습니다. 솔로 라이브는 멤버의 개런티가 비싸서 할 수 없었지만 한편 라이브하우스라면 한 사람 당 2만엔을 지불하면 되니까 저는 저는 개런티를 받지 않고 모두에게 2만엔씩 내고서 그걸로 어떻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록폰기 피트인이나 신주쿠 로프트만 해도 관객 동원이 제법 괜찮았습니다. 이래저래 시행착오를 겪는 사이에 밴드로서 특색이 드러났고 그 때 라이브 앨범을 내자는 이야기를 레코드 회사의 디렉터가 꺼냈습니다. "SPACY"가 제작비에 비해 팔리지 않은 것도 컸지만요. 라이브 앨범이라면...
-여차하면 하루만에 끝낼 수 있는(웃음). 아이디어였군요.
야마시타 - 그래서 록폰기 피트인을 녹음 장소로 잡았습니다. 당시 피트인 위에 소니의 스튜디오가 있어서 라인을 연결해서 그대로 녹음할 수 있는 것도 컸습니다. 도니 해더웨이의 라이브 앨범 같은 느낌으로 만들기로. 그게 78년입니다.
-"SPACY"도 그렇지만 "It's a Poppin' Time"도 전무후무한 이른바 독특한 라이브 앨범이라고 할까요.
야마시타 - 뭐 시기가 그랬으니까요. 사카모토 군은 같은 해인 78년부터 YMO를 시작하게 됐고. 그는 원래 예술대의 작곡과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했습니다. 탠저린 드림 같은 쪽으로 점점 방향이 바뀌었고 호소노 씨와 뭉쳐서 YMO를 하게 됐습니다. 폰타는 폰타대로 재즈 퓨젼에서 록으로, 뭐든지 가능하다는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안 돼
-저마다 길이 갈라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연주는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ピンク・シャドウ」의 '접근하면 쏜다'같은 긴장감 넘치는 인터플레이(*뮤지션끼리 촉발하여 즉흥연주를 빚어내는 것)라던가.
야마시타 - "It's a Poppin' Time"의 멤버는 연주의 타임감이 정말로 정확했습니다. 저는 밴드 출신이니까 굳이 말하자면 "내달리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 구성으로 1년 반 정도 하니까 타임감이 교정됐습니다. 『ピンク・シャドウ』의 드럼 인트로 같은 건 역시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들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해내니까요.
-"It's a Poppin' Time" 수록중에 타츠로 씨 안에서 '즐겁다'라는 감각은 있었습니까?
야마시타 - 그런건 없어요.
-없군요.
야마시티 - 그 시절에는 정말로 필사적이었으니까요. 어떻게든 라이브를 멀리했었으니까 소리가 그다지 안 나왔습니다. 슈거 베이브 시절에는 적어도 달에 7~8번은 했으니까요. 오오타키 (에이이치)씨는 "목소리는 1년에 반음씩 낮아지니까"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고.
그래서 "It's a Poppin' Time"은 보컬 퀄리티 면에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첫 번째 곡을 스튜디오 녹음으로 넣고 나머지를 신곡 외에 커버곡을 넣거나 하는 노력은 했지만요. 하지만 더블 디스크로 만들어 버렸으니(웃음).
"MONDAY BLUE"등의 발라드는 압도적
-처음에는 경제적인 면을 고려해서 시작한 기획이었는데.
야마시타 - 연주가 그렇게 길어질 줄은 예측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가운데 폰타는 보컬을 얼마나 보조하는지 섬세하게 생각해주는 드러머였습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 책을 (『俺が叩いた。ポンタ、70年代名盤を語る』릿토 뮤직)읽고 처음 알았는데 "It's a Poppin' Time"때에는 심벌이 울리지 않도록 커스터마이즈했다고 합니다. 마츠키 씨가 "너 그 '칭'하는 거 필요없으니까'라고는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모르셨군요.
야마시타 - 그런 건 몰라요.
-그건 그렇고 그런 에피소드란 참으로 폰타 씨 답습니다. 테크니컬적인 면에서 평가받은 면이 많은 분이었지만 사실은 노래를 무척 중요히 여겼습니다. 「赤い鳥」 시절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당시의 라이브 영상을 봐도 애드립이 많은 듯 하고 야마모토 준코 씨의 보컬을 잡아먹는 듯한 연주는 절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야마시타 - 그 사람은 절대로 안 합니다. 노래를 정말로 잘 들으니까. 재즈라고 해도 보컬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발라드. 폰타에게 맡기면 절차를 전부 짜주니까 안심할 수 있습니다. "MONDAY BLUE"라는 곡이 있는데 ("GO AHEAD!" 수록)베이스는 오카자와 씨 뿐이지만 그런 곡은 어쨌든 폰타가 최고였습니다. 발라드의 표현력이 정말로 압도적이었으니까.
그 점은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듯한 느낌입니다.
야마시타 - 그래서 스타일이 아닙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역시 (음악에 대한) 스탠스. 폰타도 70년대에는 부당한 비판을 받았으니까요. "이런 킥이 약하네"라던가.
"PAPER DOLL"같은 건 지금 들어도 전율
-그런 말이 나왔었군요.
야마시타 -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건 별로... 중요한 건 표현력의 문제입니다. 폰타도 취약한 곡조가 있는데 리듬이 튀는 것은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곡을 연주할 때에는 미리 상당한 연습을 하지 않았나 싶은. 그렇다고 해서 "킥이 약하네"같은 소리하는 사람이 그럼 그 타임감을 낼 수 있을지. 오늘 취재를 위해 "It's a Poppin' Time"을 다시 듣고 왔는데 역시 타임감이 다릅니다. "PAPER DOLL"같은 건 지금 들어도 전율이 오릅니다.
-무사 사이와 같은 느낌이군요.
야마시타 - 하지만 그 느낌을 낼 수 있는 것은 오카자와 씨와 마츠키 씨, 사카모토 군이 합치했기 때문입니다. 한 명만 잘 해도 소용없습니다. 폰타의 킥 위에 오카자와 씨의 포인트가 제대로 들어가니까 킥과 베이스의 "붕"하는 무게감이 발생하는겁니다.
-흥미롭군요.
야마시타 - 뮤지션이란 그런 부분을 깊이 느끼니까요. 그 점이 "너하고는 또 연주하고 싶다" 아니면 "너하고는 두 번 다시 안 한다"의 갈림길. 깊이가 있습니다.
"LOVE SPACE", "DANCER"...... 야마시타 타츠로가 엄선한 故무라카미 "폰타" 슈이치 "베스트 드럼"
폰타와 헤어진 것은 높은 개런티와......
-레코딩이란 애시당초 '기록'이잖습니까? "It's a Poppin' Time"을 듣고 있으면 그런 표현 본래의 의미와도 무척 합치하지 않나 싶은. 그야말로 그런 시절밖에 나올 수 없는.
야마시타 - 그렇습니다. 그 때를 기점으로 몇 개월 뒤에 사카모토 군은 YMO가 되었으니까. 78년12월26일에 시부야 코카이도에서 했던 콘서트가 이 멤버 편성의 마지막 무대였습니다. 마침 그 타이밍에 아오준(아오야마 준・드러머)과 이토 코키(베이시스트)의 콤비가 등장했습니다. 이걸로 겨우 저는 저만의 리듬 섹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시대의 분기점을 느낍니다.
야마시타 - 그럼에도 80년대 말까지는 이번에는 아오야마의 스케쥴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 톱 클래스가 되었으니까.
-타츠로 씨조차.
야마시타 - 네. 폰타 씨와 헤어진 것도 결국은 개런티가 비싼 것과 나머지는 역시 스튜디오 뮤지션입니다. 지명하면 누구나 고용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니까. 결과적으로 같은 리듬 섹션으로 녹음하면 차별화를 꾀할 수 없습니다. 같은 멤버를 불러서 "타츠로의 그거처럼 해 줘"라고 요구하는 것이 일반화됐습니다. 저는 그게 무척 싫었기 때문에.
-타츠로 씨의 레코딩이 레퍼런스로 된 것이군요.
야��시타 - 되버렸습니다. 그래서 저 만의 리듬 섹션을 원했습니다. 그 때 마침 아오야마 준과 이토 코키가 와서 이 두 사람으로 포진을 굳히면 완전히 차별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리허설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뭐 그것도 90년대에 들어서부터 빼았겼습니다만.
-결국 그 정도로 레벨에 달한 뮤지션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일까요?
야마시타 -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SPACY"에서 "It's a Poppin' Time"에 걸쳐서 일단 저 나름의 음색이 맞는 소리가 구축됐기 때문에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긴 했습니다. 다만 뮤지션이란 까다로우니까요. 기분을 맞춰주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맞춰주기만 해도 안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다룰지. 이를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팽팽하게 움직이도록 해야합니다. 기술적으로는 어려워도 작품적으로는 간단히 들리는 음악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안배가 어렵습니다(웃음). 감이라고 해야 되나.
"폰타라면 어떻게 연주할 지"를 생각하고 쓴 곡
-그런 스탠스로 이 시기의 폰타 씨는 응해준 것이네요. 폰타 씨는 항간의 평가 이상으로 무척이나 긍정적인 의미에서 "노래 반주용 드러머"였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SPACY"에서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노래와 연주가 앙상블 속에서 경합하기도 합니다. 밸런스로서 무척이나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노래 반주도 아닌.
야마시타 - 다르지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경계선을 파악하셨던 것 같습니다.
야마시타 - 제 자신이 애시당초 밴드 지향입니다. 콤보 편성으로 빚어낸 리듬 섹션이 곡의 질을 정한다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가요곡의 제작방식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60년대부터 70년대의 아이돌 가요의 구축이란 사실 무시할 수 없어서 아사오카 메구미던 이와사키 히로미던 편곡이나 녹음면에서 보면 노래의 대역에서는 악기가 그다지 방해하지 않습니다. 노래의 조금 파워가 떨어져도 앞으로 나온 것처럼 들립니다. 상당한 엔지니어링이 가해졌습니다.
-노래를 중심으로 설계된 것이군요.
야마시타 - 그렇습니다. 한편 저희들은 노래와 리듬 섹션이 배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감각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포크가 아닌 재즈나 라틴을 듣고 자랐으니까요. 그래서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구축할까? 로우 인터벌이라고 하는 소리 덩어리가 피라미드 형태가 되도록 낮게 구축하여 그 위에 노래를 얹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래와 리듬 섹션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작동합니다. 그런 자의식은 당시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폰타가 "DANCER"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을 읽고서 상당히 기뻤습니다. 특히 가사가 좋다고 말해줘서. "DANCER"자체가 폰타라면 어떻게 연주할지 생각하면서 쓴 곡이니까요.
-맞춰서 쓴 곡이군요. 그것은 드럼에 초점을 맞춘것입니까?
야마시타 - 그런 16비트를 연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금 루즈한 부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래서 드럼으로 시작하는 곡으로. 드럼으로 시작해서 계속해서 그 패턴으로 가는.
-한편 드럼이 주도함에도 불구하고 내향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야마시타 - 무척 내성적인 노래니까요.
-그 부분의 안배가 독특한 곡이기도 합니다.
야마시타 - 일본의 경우 밴드 연주가 가능한 주택 환경이 없으니까요. 집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작곡했지만 그러면 이런 그루브가 나올 수 없습니다. 폴리리듬이란 드럼과. 베이스로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으면 탄생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노래는 그 부분이 취약해서 아무리 인트로가 굉장해도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팍 하고 긴장감이 풀어지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머신으로 리듬을 만들게 된 것도 연주의 주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최초로로 폴리리듬을 구축한 다음에 ��로디를 생각하면 그루브에 맞는 멜로디를 쓸 수 있습니다. "DANCER"를 만들 시절에는 아직 악기를 연주하며 작곡하던 잔재와 같은 것이 느껴지지만요.
내가 오래도록 오오타키 에이이치 씨와 함께한 이유
-다만 그것이 폰타 씨의 드럼과 만남으로 인해 지금껏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빚어냈다고 할까요?
야마시타 - 미나코의 "TWILIGHT ZONE"의 곡도 거의 악기를 연주하며 작곡했으니까요. 예외가 『恋は流星』로 그 곡은 폰타가 연주하는 그루브 위에 만들었습니다.
-그런 노래 중심의 작품을 보는 관점의 차이란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할까요.
야마시타 - 왜냐면 다들 노래를 듣지 않으니까요. 일본에 있어서의 로큰롤과 악기의 발달 방식과 관계가 있지만요. 처음으로 들어온 것이 벤쳐스로 기타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 리드 기타이자 스타였습니다. 다음이 리듬 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키보드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노래를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보컬이 굉장히 약했습니다. 특히 GS 시절까지는 정말로 약했습니다. 겨우 최근에 노래방의 영향도 있어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시절에는 아직이었습니다. 가요곡을 빼면.
-그런 의미에서도 타츠로 씨 안에는 노래의 위치에 대한 혁신이라는 도전이 있었군요.
야마시타 -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어째서 제가 '해피엔드'(*호소노 하루오미, 오오타키 에이이치, 마츠모토 타카시, 스즈키 시게루에 의해 결성된 밴드)에서 오오타키 씨의 노래만 들었냐 하면 오오타키 씨만 완전한 보컬 중심이었으니까요. 해피엔드는 해산 후에 캐러멜 마마로 이어진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연주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그에 대한 반발감이 엄청나게 있었습니다. 제가 오래도록 오오타키 씨와 함께 한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호소노 씨의 베이스는 같은 것을 두 번 하지 않는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호소노 씨와는 함께 하셨습니다.
야마시타 - 호소노 씨는 지금도 일본 제일의 베이시스트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도 노래를 잘 듣는 사람입니다. 이건 폰타도 말했지만 "CANDY"에서 들려준 핑거링의 섬세함이라던가. 다만 악보는 잘 틀립니다. "LOVE SPACE"에서도 3번 정도 틀렸었고(웃음).
-그랬습니까?
야마시타 - 하지만 그 사람은 A라는 패턴이 3번 있다고 할 때 두 번이나 같은 주법을 구사하진 않으니까요. 스모키 로빈슨의 보컬이라던가 호소노 씨의 베이스는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그건 굉장하네요.
야마시타 - 굉장합니다. 나머지는 역시 타임. 타임감이 나쁜 사람하고 하고싶진 않았으니까. 타임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타임에는 당연히 노래도 포함되는.
야마시타 - 그래서 노래의 정확도도 중요합니다.
최근의 드러머는 애드립이 너무 시시하다
-한가지 더 있는데 폰타 씨가 자주 말씀하시던 것 중에 "나는 애드립이 많으니까 노래를 방해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절대로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일종의 자부심으로서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됩니다.
야마시타 - 그 부분은 할 블레인(*미국의 명 세션 드러머)와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신경쓰이지 않습니다.
-애드립이 많아도
야마시타 - 신경쓰이지 않습니다. 왜냐면 노래와 주고 받으니까. 애드립으로 말하자면 우에하라 유카리는 훨씬 많았습니다. 자극하면 자극할 수록 붕붕 날라가는 타입. 유카리에 비하면 폰타의 드럼이 절제됐습니다.
-뭐가 됐건 애드립이 많은 건 문제 없다는?
야마시타 - 노래를 안 듣는 사람이라면 그저 시끄러울 뿐이겠지만요. 우수한 드러머란 대체로 애드립이 많습니다. 반대로 최근의 드러머는 애드립이 정말로 시시합니다.
아오야마 준과 이토 코키도 "투수와 포수"
-애드립에 기명성이 드러나는군요.
야마시타 - 곡의 음상, 음악적인 정경의 변화란 드럼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애드립은 그를 위한 도구와 같은 것이구요. 저는 스스로도 드럼을 연주했으니까 알지만 리듬의 근간을 맡는 것은 사실 베이스입니다. 드럼이 던지는 공을 베이스가 받는 이른바 투수와 포수의 관계입니다. 아오야마 준과 이토 코키의 콤비네이션이 딱 여기에 들어맞습니다. 얼핏 보기에 느슨해보이는 코키 쪽이 정신적으로 아오야마를 이끌었습니다.
-폰타 씨가 '외로움을 잘 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내용과 지금의 이야기는 딱 들어맞는 부분같습니다.
야마시타 - 역시 음악에 인격이 드러나니까요.
-폰타 씨가 연주하는 타츠로 씨의 발라드에 그런 성격이 엿보이는 듯한 느낌입니다.
야마시타 - 그 사람도 외동이니까요. 저도 그렇고. 여담으로 사카모토 군도. 그래서 다들 잘 맞는거고.
신주쿠 로프트 사카모토 류이치 만취 사건의 진상은?
-기왕 인터뷰를 하는 만큼 폰타 씨의 무용담에 대해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자폭자전"에서는 만취한 사카모토 씨를 폰타 씨가 사사즈카의 아파트까지 자주 배웅했다고 나와있습니다만.
야마시타 - 흔했습니다. 70년대 예전의. 신주쿠 로프트에서의 이야기이죠? 다 같이 연주를 하고 마지막에는 뒷풀이로 점내에서 소주부터 위스키, 니혼슈까지 전부 마시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거기에 잠수함 (오브제)가 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문뜩 보니 그 잠수함 안에서 폰타의 양다리가 "이누가미가의 일족"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삐죽하고 뻗어있었습니다(웃음). 그것을 저와 스탭이 끌어내려서 봉고에 실어서 보냈습니다.
-폰타 씨의 이야기에서는 그 양다리는 묘령의 여성이었다고 되어있었습니다.
야마시타 - 그래서 흔했다는 겁니다. 뭐 그의 주특기인 분위기 띄우기 같은 것니다(웃음).
폰타의 베스트 드럼은 "이 곡"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타츠로 씨가 폰타 씨와 함께한 곡 중에서 "이 곡"을 꼽으신다면?
야마시타 - 한 곡이라면 미나코의 『恋は流星』일까요. 그 노래는 더블 드럼입니다.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작품 중에 고르신다면?
야마시타 - 드럼만이라면 "DANCER"로 문제가 없겠지만 악곡적으로 훌륭한 것은 "LOVE SPACE"일까요. 하지만 LP라면 B면에 삽입된 『アンブレラ』같은 것도 무척 좋습니다. 굉장히 섬세한 플레이입니다.
-"SPACY"의 곡이라면 어느 곡도 문제 없이 훌륭하다고 볼 수 있겠군요.
야마시타 - 하지만 일부러 한 곡을 고른다면 "MONDAY BLUE"일까요? 그 긴장감은 그 네 명이 아니면 낼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에서 글리산도가 약해지면서 순간 연주가 멎는 부분은 한 명이라도 어긋나면 안 됩니다. 그 부분을 들은 순간 부스에 있던 전원이 '하아'하고 숨을 내뱉은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출처: 주간문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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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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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mos_Oz )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p7) 이 단어들을 얘기할 때 미카엘의 목소리는 깊고 절제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패널 조명이 붉게 빛났다. 미카엘은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려 있는 사람처럼, 그 순간에는 정확성이 극도로 중요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그가 자기 손 안에 내 손을 꼭 쥐었다 해도 나는 저항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조용한 열정의 물결에 휩쓸려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원하면 아주 강해질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말들은 나를 달래어 시에스타가 끝났을 때의 평온함으로 이끌어갔다. 황혼녘, 시간은 온화하게 느껴지고 나도 주위의 사물도 부드러울 때에 잠이 깨는 그런 평온함으로. (p21~22) 가벼운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짙은 회색 안개가 끼어 있었다. 건물은 무중력상태로 보였다. 메코르 바룩 지구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를 지나쳐 가면서 작은 물방울들을 흩뿌렸다. 미카엘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숙집 문 앞에서 나는 발끝으로 서서 그의 뺨에 입맟추었다. 그는 내 이마를 어루만져 닦아주었다. 주저하면서 그의 입술이 내 피부에 닿았다. 그는 나더러 차갑게 아름다운 예루살렘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좋다고 말했다. 내가 아내였다면 그를 그렇게 마른 채로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둠 속에서 그는 약해 보였다. 미카엘은 미소지었다. 나는 내가 그의 아내라면 누가 말을 걸었을 때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저 웃고 또 웃는 대신 대답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미카엘은 분을 씹어삼키고는 낡아 빠진 계단 손잡이를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는 말아줘요." (p35~36) 그 후에 우리들은 어둠 속을 걸어 큰길을 향해 갔다. 티랏 야아르는 삼나무가 늘어선 길을 통해 예루살렘 대로와 닿아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전신을 후려쳤다. 저녁놀 속에서 예루살렘의 언덕들은 무슨 나쁜 짓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내 곁에서 침묵하며 걷고 있었다. 그와 나, 우리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기묘한 한순간, 나는 내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아니면 시간이 현재가 아니라는 격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일은 전에 겪은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 여러 해 전에 어떤 사악한 남자 곁에서 이 칠흑 같은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을 것이라고 내게 경고했을 것이다. 시간은 더 이상 평탄하지도, 흐르고 있지도 않았다. 시간은 일련의 갑작스러운 격발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꿈 속이든지, 무서운 이야기 속이든지. 갑자기 나는 말없이 내 곁에서 걷고 있는 그 희미한 형체에 느꼈다. 외투 깃이 올라가서 그의 얼굴 아랫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몸은 그림자처럼 가늘었다. 얼굴 나머지 부분은 눈까지 눌러쓴 검은 가죽 학생모자로 가려져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지? 이 사람은 형제도 아니고, 친척도 오랜 친구도 아니고 그저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밤늦게 어둠 속에 있는 낯선 그림자일 뿐. 어쩌면 공격하려고 하는지도 몰라. 어쩌면 아픈지도 모르겠군, 누구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그에 대한 애기를 들어본 적도 없잖아. 어째서 내게 얘기를 안하는 거지? 왜 저렇게 온통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나를 여기에 데려왔을까?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지금은 밤이야. 시골이고, 나는 혼자야. 저 사람도 혼자고, 그가 나한테 했던 말이 전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면, 학생이 아닌 거야. 이름도 미카엘 고넨이 아니고, 병원에서 도망쳐 나왔는지도 모르지. 위험한 사람일 거야. 이 모든 일이 전에 언제 나한테 일어났더라? 누군가 오래전에 이런 일은 이렇게 일어날 거라고 경고해 주었는데, 저기 어두운 벌판에서 나는 저 긴 소리는 뭐지? 삼나무들이 가리고 있어서 별조차 볼 수가 없군. 과수원에 무언가 있는데, 내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면 누군가 들을까? 빠르고 둔한 걸음으로 내 발걸음은 신경도 쓰지 않고 걷고 있는 낯선 사람. 나는 일부러 조금 뒤처졌다.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 이빨은 추위와 공포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겨울 바람이 긴 소리를 내며 매섭게 불었다. 저 그림자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 내가 실체가 없는 자기 생각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듯 멀리 떨어져 자기 안에 몰두해 있는 그림자. 나는 실재예요 미카엘, 춥다구요.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크게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p38~39) 돌아가신 아버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통사람이 철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짓은 늘 저절로 드러나버린다고 말이다. 그건 마치 너무 짧은 담요 같은 것이다. 발을 덮으려고 하면 머리가 드러나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삐져나오고. 사람은 그 구실 자체가 불유쾌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 숨기기 위해서 복잡한 구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완전한 진실은 철저하게 파괴적이고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 (p47) 그런 날 아침에 나는 깨진 바닥 타일에 눈을 고정시키고 남편에게 내가 좋은 여자인지를 물어보았고 그때 내 손에 들려 있던 커피잔은 떨렸다. 그는 잠시 동안 생각해 보고는 약간은 학자적인 태도로 다른 여자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판단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의 답은 솔직했다. 왜 내 손이 아직까지도 떨리고 커피는 새 테이블보에 쏟아지고 있는 걸까? (p61) "나는 진부한 말을 생각하고 있어" 미카엘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 잊는 것은 죽는 것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p65) 사실 이 시기에는 우리 사이에 일종의 불편한 타협 같은 것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마치 장거리 기차여행에서 운명적으로 옆자리에 앉게 된 두 명의 여행자들 같았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어야 하고, 예절이라는 관습을 지켜야 하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거나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서로 아는 자신들의 사이를 이용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예절바르고 이해심을 발휘해야 하고. 어쩌면 가끔씩은 유쾌하고 피상적인 잡담으로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야 하고.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절제된 동정심을 보이기도 하면서. (p73) 미카엘은 저녁에 과의 도서관에서 사서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약간의 돈을 벌었다. "요즘은 저녁에도 폐하를 뵙는 영광을 갖지 못하는군요" 내가 투덜거렸다. 어머니는 담배 냄새를 참을 수 없어했고 또 아기에게도 좋지 않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미카엘은 집안에서 파이프 담배 피우는 것까지 그만두었다. 참을 수가 없게 되면 남편은 거리로 나가서 무슨 영감을 찾는 시인처럼 가로등 아래서 십오 분 가량 담배를 피우다 들어오곤 했다. 한번은 창가에 서서 그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으로 나는 짧게 깎인 그의 뒷머리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주위로 담배 연기가 둥글게 맴돌았고 그는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불려나온 영혼인 것 같았다. 나는 미카엘이 오래전에 했던 말들을 기억해냈다. 고양이들은 사람에 대해서 절대로 틀리지 않지요. <발목>이라는 말을 항상 좋아했습니다. 당신은 차갑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사람이군요. 내 생각에 난 그저 평범한 청년인데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정식으로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어요. 빗속에서 제네랄리 빌딩의 돌사자가 숨죽여 웃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족해서 할 일이 없어지면 감정은 악성종양처럼 되어버리죠. 예루살렘은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데 그게 매일 매순간, 매년 매시에 다른 종류의 슬픔인거죠. 그것은 모두 오래전이었다. 미카엘은 틀림없이 지금은 전부 잊어버렸을 것이다. 오로지 나만이 시간의 차가운 손아귀에서 아주 작은 부스러기조차 포기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일상적인 말에 마법 같은 변화는 어떤 것일까? 사물에는 일종의 연금술이 있는데, 그것은 내 삶의 내적인 선율과도 같은 것이다. 아쿠아 벨라에서 보았던 소녀에게 현대의 사랑은 물 한잔을 마시는 것처럼 단순해야 한다고 했던 청년 지도자의 말은 틀렸다. 게울라 거리에서 내 남편이 될 사람은 아주 강해야겠다고 한 미카엘의 말은 옳았다. 그때 나는 그가 저기 가로등 밑에서 창피당한 아이처럼 담배를 피우고 서 있지만 자신의 고통이 나 때문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왜냐하면 나는 곧 죽을 거니까, 그러니까 그에게 배려를 해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미카엘은 파이프의 재를 털더니 집으로 향했다. 나는 서둘러 침대에 누워서는 얼굴을 벽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미카엘에게 깡통을 따달라고 했다. 미카엘은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p78~79) 시간의 기억은 사소한 말들을 각별하게 봐준다. 특별히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시간과 기억은 부드러운 황혼 빛으로 사소한 말들을 둘러싼다. 나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매달리는 것처럼 기억과 말에 매달린다. (p88) 나는 기억하고 있다. 잊지 않았다. 미카엘이 아이를 팔에 안고 그 불길한 단어들을 아이 귀에다 속삭이면서 창에서 문으로 다시 문에서 창으로 방 안을 왔다갔다할 때 나는 갑작스럽게 그 둘 모두에게서, 우리 셋 모두에게서, 다른 어떤 말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고 우울함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성질을 발견해내곤 했다. (p95) 나는 쉬고 있다. 이제 어떤 사건도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여기는 내 집이고, 나는 여기에 있다. 그대로의 나의 모습으로. 하루하루에는 어떤 똑같음이 있다. 내게도 어떤 똑같음이 있다. 허리선이 높은 새 여름옷을 입고도 나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만들어져 아름답게 포장되고 빨간 리본이 달려서 전시가 되고, 구매가 되고 포장이 벗겨져서는 사용되고 버려진다. 하루하루에는 어떤 음울한 똑같음이 있다. 예루살렘에 여름이 퍼질 때는 특히. (p104) 그리고 나는 내 몸 속 깊은 곳에 있는 섬세한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내 심장과 내 신경과 내 자궁처럼 선세한 나의 것들, 완전한 나의 것들. 이것들은 나의 것이고, 바로 나 자신이지만 세상 모든 것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나는 결코 이것들을 눈으로 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을 것이다. (p107) 그리고 저 벽들. 모든 지역, 모든 근교는 높은 벽들로 둘러싸인 숨은 속씨를 품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금지된 적대적인 요새. 과연 여기 예루살렘에서, 한 세기 동안 여기에서 살았다고 해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폐쇄된 안뜰의 도시, 그 영혼은 들쭉날쭉한 유리로 뒤덮인 황량한 벽 뒤에 봉해져 있다. 예루살렘은 없다. 빵부스러기들은 순진한 사람들을 그릇되게 인도하기 위해 고의로 떨어뜨려진 것이다. 껍데기 안에는 또 껍데기가 있고 속씨는 금지되어 있다. 나는 <나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라고 썼다. <예루살렘은 나의 도시다>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러시아인 지구 저 깊은 곳에, 슈넬러 막사 뒤에, 에인 케렘의 수도사 숙소에, 혹은 악한 음모의 언덕에 있는 고등판무관의 궁전 거주지에 무엇이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도시이다. (p114) 바람이 불면 사람들이 발코니와 지붕에 세워둔 골함석 구조물이 흔들린다. 이 소리도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우울함에 한 몫을 한다. 밤의 끝에는 그 둘이 이웃을 떠다닌다. 허리까지 벗은 채, 맨발로 가볍게 이들은 바깥을 미끄러져 다닌다. 개들을 두려워서 미칠 듯한 상태로 몰아넣으라는 명령을 받고서 야윈 주먹이 골함석을 두드린다. 새벽녘이 다가오면 개 짖는 소리는 혼란스러워하는 울부짖음으로 잦아든다. 밖에서는 쌍둥이들이 미끄러져다니고 있다.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들이 맨발로 걷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은 소리없이 서로에게 웃음을 보낸다. 서로의 어깨를 딛고 서서 마당에 자라는 무화과나무를 타고 나에게로 온다. 그들은 가지를 꺾어서 내 덧창을 두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번은 솔방울을 던지는 방법을 썼다. 그들은 나를 깨우라고 보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내게는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 그 사랑하는 힘은 죽어가고 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p123) '저자는 이해심 깊은 아내 한나에게 이 글을 바치고자 한다.' 나는 그 글을 읽고 미카엘에게 축하해 주었다. 형용사나 부사의 사용을 자제하고 대신 명사와 동사를 중점적으로 사용한 것이 좋아요. 또 긴 미사여구를 피한 것이 좋구요.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네요. 당신의 이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가 좋아요. (p138) 자기 아버지의 임종 다음날부터 미카엘은 조용했다. 우리 집도 조용했다. 가끔씩은 우리가 무슨 메시지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나나 아들에게 말을 할 때면 마치 자기가 애도하고 있는 대상이 나라는 듯이 조용히 얘기했다. 밤이면 나는 몹시도 그를 원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결혼생활 내내 나는 이러한 의존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p161~162) 당신도 그걸 알지. 나는 천재도 아니고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 같은 사람도 아니야.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아, 한나, 그렇지만 당신은 할 수 있는 한 야이르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해. 그러면 당신에게도 좋을 거야. 아니, 당신이 아이에게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야. 그건 말도 안 되지. 하지만 당신이 저 애에 대해서 그렇게 열광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거든. 사람은 열광적이 될 필요가 있다구, 한나. 가끔씩은 균형감각을 전부 잃어버려야 할 때도 있지. 내가 하려는 말은 말이야, 난 당신이 이제....... 이런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 잊어버립시다. 언젠가, 몇 년 전에 당신과 내가 어떤 카페에 앉아 있었고 나는 당신을 바라보고 또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지, 난 사람들이 말하는 꿈속의 왕자님이나 말을 탄 기사가 될 가망은 없다고 말이야. 당신은 예뻐, 한나. 당신은 아주 예뻐. 지난주 홀론에서 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신 걸 얘기해 주었던가? 아버지는 당신이 시를 쓰지는 않지만 당신에게는 시인처럼 보인다고 말씀하시더군. 이봐요, 한나, 난 지금 내가 왜 이런 말을 당신에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아무 말도 않는군.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항상 듣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안하지. 내가 지금 이런 얘기들을 왜 한 거지? 당신을 기분 상하게 하거나 상처주려고 그랬던 건 아니야. 저, 우리들이 야이르라는 이름을 밀고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실 이름이 아이를 생각하는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들은 아주 섬세한 감정을 짓밟아버린 거야. 언젠가는 말이야 한나, 틀림없이 당신은 수많은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봤을 텐데 어째서 나를 선택했는지 물어봐야겠어. 그렇지만 지금은 시간이 늦었고 나도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고 당신을 놀라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이제 잠자리를 봐주겠어, 한나? 곧 가서 도와줄게. 그만 자자구, 한나,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나도 아버지지. 이 모든 게...... 이 모든 일이 갑자기 무슨 바보 같은 아이들 놀이 같아 보이는걸. 우리가 언젠가 우리 동네 변두리의 사막이 시작되는 공터에서 놀이를 했던 것이 기억나, 길게 줄을 섰고 맨 앞에 서 있던 아이가 공을 던지고는 줄 맨 뒤로 달려갔고, 그렇게 해서 맨 앞에 섰던 아이가 맨 마지막에서고 맨 마 지막에 섰던 아이가 맨 앞에 설 때까지 계속했지. 그 놀이가 도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아. 무슨 규칙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미친 짓에 무슨 방식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군. 당신, 부엌에 불을 켜두었는데 (p167~168) 미카엘이 집을 나서면 나는 눈물로 목이 멘다. 나는 이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어느 저주받은 곳에 숨어 있다 나와서 슬며시 기어들어와 나의 고요하고 푸른 아침을 망쳐놓는지를, 서류 정리하는 사무원처럼 나는 수많은 무너져가는 기억들을 분류한다. 모든 숫자를 긴 줄에 늘어놓는다. 어딘가에 심각한 실수가 숨어 있다. 이건 환상인가? 나는 어딘가에서 지독한 실수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라디오는 노래를 멈췄다. 라디오는 갑자기 여러 도시에서 발발한 분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깜짝 놀란다. 여덟시. 시간은 결코 쉬지 않고 누구도 쉬게 하지 않는다. 나는 핸드백을 서둘러 집어든다. 나보다 먼저 준비를 마친 야이르를 쓸데없이 재촉한다. 우리는 손을 잡고 사라 젤딘의 유치원으로 향한다. (p170)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손님들에게 설탕그릇을 옮겨주거나 멍하니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지금 유행하는 이런 생각들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걸까요?" 아니면 때로 "사람은 시대에 따라서 움직여야죠" 아니면 "모든 문제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잖아요" 나는 저녁 내내 침묵을 지키고 앉아 무례해 보이지 않으려고 이런 말들을 한다. 갑작스러운 고통. 내가 왜 여기로 유배되어 있을까? 노틸러스. 드래곤. 아키펠라고의 군도. 오라, 아 오라, 라히민 라하미모프여, 나의 잘생긴 부카라인 택시 운전사. 경적을 크게 울려라. 이본 아줄라이 양은 여행의 준비가 되어 있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이. 떠날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다. 지금. (p181) 남편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나는 맨발로 침대에서 뛰쳐나가 다시 창가로 갔다. 나는 거칠고 반항적인 어린애였다. 나는 술취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쥐어짜서 노래하고 소리쳤다. 고통과 쾌락이 서로를 불태웠다. 고통은 즐겁고 상쾌했다. 나는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에마뉴엘 오빠와 내가 어릴 때 곧잘 그랬듯이 으르렁거리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고 새를 흉내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완전한 마법이었다. 그저 쾌락과 고통의 격렬한 흐름에 휩쓸려버린 것이었다. 추웠지만 이마는 불덩이였다. 나는 숨막히게 더운 날 어린애가 그러듯이 맨발에 알몸으로 욕조 안에 서 있었다. 수도꼭지를 완전히 다 틀었다. 얼음 같은 찬 물 속에서 뒹굴었다. 사방에, 번쩍거 리는 타일에 벽에 천장에 타월에 미카엘의 목욕가운에 문에 걸린 고리에 물을 튀겼다. 나는 입에 물을 가득 채웠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뿜었다. 추위로 몸이 새파래졌다. 등 아래로, 척추를 타고 따스한 고통이 퍼져나갔다. 젖꼭지는 꼿꼿해졌다. 발가락은 돌 같아졌다. 머리만이 불타고 있었고 나는 소리나지 않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내 몸의 깊은 곳에, 죽는 날까지 절대로 볼 수는 없을 테지만 나의 것인 가장 민감한 관절과 깊은 곳에 격렬한 열망이 퍼져나갔다. 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내 것이었고 고동치고 전율하고 있었으며 살아 있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방에서 방으로 부엌으로 복도로 헤매고 다녔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알몸에 젖은 채로 나는 침대에 쓰러져서 베개와 이불을 팔과 무릎으로 껴안았다. 수많은 친절한 사람들이 손을 뻗어 부드럽게 나를 만졌다. 그들의 손가락이 내 피부에 닿자 나는 타오르는 듯한 흔들림에 휩싸였다. 쌍둥이들은 조용히 내 팔을 집아 등뒤에 묶었다. 시인 사울은 몸을 구부려 콧수염과 따뜻한 냄새로 나를 취하게 했다. 잘생긴 택시 운전사 라하민 라하미모프도 와서 야만인처럼 내 허리를 나꿔챘다. 미친 듯한 춤을 추며 그가 내 몸을 높이 치켜올렸다. 멀리서 음악이 쾅쾅 울렸다. 여러 개의 손이 내 몸을 눌렀다. 주물러지고. 두드려지고. 더듬어지고. 나는 있는 힘껏 웃고 비명을 질렀다. 소리없이. 얼룩무늬의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에게서는 격렬한 남자의 냄새가 물결처럼 흘러나왔다. 나는 그들의 것이었다. 나는 이본 아줄라이였다. 한나 고넨과는 정반대인 이본 아줄라이. 추웠다. 물에 잠기고, 남자들은 물이 되려고 태어난다, 저 깊은 곳에 평야에 눈 내리는 넓은 대평원에 별 사이에 차갑고 맹렬하게 넘쳐흐르기 위해서. 남자 들은 눈이 되려고 태어난다. 존재하고 쉬지 않으며 소리치지 속 삭이지 않으며 만지지 지켜보지 않으며 흘러넘치지 갈망하지 않는다. 나는 얼음으로 만들어졌고, 나의 도시도 얼음으로 만들어졌고, 나의 신하들도 얼음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모두가. 공주가 말했노니, 단치히에 우박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도시 전체에 격렬하게, 수정처럼, 깨끗하게 몰아칠 것이다. 엎드려라 역신들이여, 엎드려라, 눈에 코를 박아라. 너희들은 모두 깨끗해질 것이요, 너희들은 모두 하얗게 될 것이다 내가 순백의 공주이므로, 우리 모두가 하얗고 깨끗하고 차가워지지 않으면 우리들은 모두 부서져 내릴 것이다. 도시는 전부 수정이 될 것이다. 나뭇잎 하나 떨어지지 않고 새 한 마리 날아오르지 않고 여인네 하나 떨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했노니. (p202~203) 도시의 외곽에서는 확성기를 단 장갑차가 순찰을 했다. 깨끗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새로운 왕국의 질서를 요약해서 공표했다. 그 목소리는 번개 같은 재판과 무자비한 처형을 경고하고 있었다. 저항하는 자는 누구든지 개처럼 총살될 것이다. 미치광이 얼음공주의 치세는 영원히 끝났다. 그 흰고래조차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도시에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나는 반쯤 듣고 있을 뿐이다. 암살자들의 손이 이미 내게로 뻗어오고 있다. 둘 다 붙잡힌 짐승의 신음소리처럼 거칠게 툴툴거리고 있다. 그들의 눈은 욕정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고통의 전율이 떨리며 흘러내려 델 듯이 등을 타고 발끝까지 내려가 내 등에, 목에, 어깨에, 온 전신에 타는 듯한 불꽃과 관능적인 떨림을 보낸다. 안에서 소리없이 비명이 터져나온다. 남편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반쯤 더듬는다. 그가 나에게 눈을 뜨란다. 내 눈이 얼마나 크게 뜨여 있는지 안 보이는 걸까? 그가 나에게 자기 말을 들으란다. 나보다 더 경청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가 내 어깨를 흔들고 또 흔든다. 자기 입술을 내 이마에 댄다. 나는 아직도 얼음에 속해 있지만 이미 어떤 외부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다. (p206~207) 나는 그저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듯이.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 이상이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난 실재예요. 미카엘. 그저 당신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라고요. (p214) "정말 친절하세요, 글릭 씨" 그는 찌그러진 자기 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두 노인은 이제 방 끝에 서 있었고 서로간에 그리고 내 침대와 할 수 있는 한 거리를 두면 서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글릭 씨가 카디쉬만 씨의 외투 등에서 흰 실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떼어냈다. 밖에서는 미풍이 불다가 잠잠해졌다. 부엌에서는 갑자기 새로운 생명력을 찾은 듯한 냉장고 모터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다시 곧 죽을 것이라는 그 평온하고 또렷한 생각에 휩싸였다. 정말 쓸쓸한 생각이다. 안정된 여자라면 죽음에 대한 생각에 전혀 무관심하지는 않다. 죽음과 나는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가깝고도 먼 사이, 인사나 겨우 하는 사이 정도인 아는 사람. 나는 당장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오늘밤에 첫 비가 올지도 모른다. 당연히 나는 아직 할머니가 아니었다. 아직도 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장 일어나야 한다. 화장복을 입어야 한다. 커피와 코코아를 끓이고 케이크를 대접하고 대화를 하고 관심을 보이고 관심을 끌어야 한다. 나도 교육을 받았고 나도 견해와 사상이 있다. 무언가 내 목에서 울컥 치밀어올랐다. (p230~231) 산헤드리야의 교외에서 삼나무들은 미풍 속에 휘어졌다 펴졌다 펴졌다 휘어졌다 하고 있다. 보잘것없는 내 생각으로는 유연성이란 건 모두 마법이다. 흐르지만 그러면서도 차갑고 평온한 것이다. 몇 년 전 테라 상타 대학의 겨울날 나는 히브리 문학 교수의 슬픔으로 가득 찬 말을 베껴 적었다. 아브라함 마푸부터 페레츠 스몰렌스키까지 히브리 계몽운동은 고통스러운 변화를 겪었다. 꿈이 산산조각나면 민감한 사람들은 구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깨진다. <너의 파괴자들과 너를 소멸시킨 자들이 네 앞에 나아가리라.> 이사야서의 이 구절이 가지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라고 교수가 말했다. 우선 히브리 계몽운동은 그 자체 내에 궁극적으로는 파멸로 이르는 사상을 키웠다. 그 다음에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 낯선 땅을 보게 되었다. 아브라함 우리 코브너라는 비평가는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불길에 휩싸이면 자신의 등에 침을 찔러버리는 전갈과도 같았다. 1870년대와 80년대에는 악순환이라는 억압적인 느낌이 존재했다. 소수의 꿈꾸는 사람들과 투사들, 현실에 반기를 든 현실주의자들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부흥은 없었을 것이고 말 그대로 파멸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언제나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교수는 결론지었다. 나는 잊지 않았다. 얼마나 엄청난 번역의 노고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것 역시 나의 말로 번역을 해야겠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한나 그린바움 - 고넨 부인. HG라는 머���글자는 히브리말로 <축제>를 뜻하지요. 평생이 하나의 긴 축제만 될 수 있다면, 내 친구였던 테라 상타의 친절한 사서, 머리덮개를 쓰고 나와 인사와 농담을 주고받던 그 사서는 오래전에 죽었다. 남아 있는 것은 말들이다. 나는 말에 지쳤다. 얼마나 값싼 미끼인가. (p232~233) 알고 있다, 인정한다. 이것은 애처로운 방어다. 하지만 기만 또한 애처롭고 추하다. 나는 지나친 요구는 하지 않는다. 그 유리가 투명하기만 하면 된다. 푸른 코트를 입은 똑똑하고 예쁜 소녀. 허벅지에 확장된 정맥혈관이 퍼져 있는 쪼그라든 유치원 선생님. 그 사이에 이본 아줄라이는 해변 없는 바다를 떠다니고 있다. 그 유리가 투명하기만 하면 된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p251) 하루하루에도, 내게도, 어떤 똑같음이 있다. 똑같지 않은 무엇인가는 존재한다. 그 이름은 모르겠다. 남편과 나는 무슨 신체적으로 불쾌한 병을 치료받는 진료소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만난 두 사람 같다. 둘 다 당황하고, 서로의 생각을 읽고, 불안하면서도 당황스럽게 하는 친밀함을 의식하고는 이제 서로에게 말을 걸 적당한 어조를 피곤하게 더듬어 찾으면서. (p258) 나는 남편을 잠에서 깨우곤 했다. 그의 담요 밑으로 파고들고. 온 힘을 다해 그의 몸에 달라붙고. 그의 몸에서 내가 원하는 자기 통제를 쥐어짜내고. 우리들의 밤은 어느 때보다도 더 격렬해졌다. 나는 미카엘이 내 몸과 자신의 몸에 놀라게 했다. 소설책에서 읽었던 다채로운 방법으로 그를 이끌었다. 영화에서 대충 배운 고통그러운 방법들. 사춘기 때 들었던 키득거리는 여학생드르이 소곤거림에 나왔던 모든 것. 가장 흥분되고 고통스러운 남자들의 꿈에 대해서 내가 알고 짐작해 낸 모든 것. 나 자신의 꿈이 가르쳐준 모든 것. 떨리는 환희의 불꽃. 얼음같이 차가운 웅덩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타오르는 경련의 물결. 기분 좋게 부드러운 쓰러짐. (p263) 이 얘기도 기록해 두어야겠다. 미카엘과 내가 침대덮개를 털기 위해 마당으로 가고 있다. 잠시 후에 움직임을 맞춰서 함께 흔들어낸다. 먼지가 일어난다. 그러고는 침대덮개를 접는다. 미카엘이 갑자기 나를 안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팔을 쭉 뻗은 채로 내 쪽으로 온다. 그가 쥐고 있는 두 귀퉁이를 내민다. 그는 뒷걸음질쳐서 새 귀퉁이를 다시 잡는다. 내게로 온다. 내민다. 뒷걸음질친다. 잡는다. 내게로 온다. 내민다. "됐어요, 미카엘. 다 끝났어요." "그래, 한나" "고마워요 미카엘"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한나. 침대덮개는 우리 둘 다 쓰는 거잖아" 마당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저녁. 첫 별들. 희미하고 멀리서 들리는 울부짖음-비명을 지르는 여자 혹은 라디오의 소리. 춥다. (p266) 나는 이 일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내가 <실험 엔지니어링 계획>, <화학 기업>, <조선소>, <중금속 작업장>, <철강 건축 컨소시엄> 등의 용어에 끝없이 이끌리기 때문이다. 이런 용어들은 어떤 확실한 실재의 존재를 내게 증언해 준다. 나는 이 멀리 존재하는 기업들을 알지 못하며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어디 먼 곳에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구체적 확실성에 만족하고 있다. 그들은 존재한다. 그들은 기능한다. 변화를 겪는다. 계산. 원자재. 수익성. 계획. 물체와 장소, 사람, 생각의 강력한 흐름. 아주 멀리에,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지개 저 너머가 아닌 것이다. 꿈의 세계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니다. (p267) "잘못 알아들었군요, 미카엘.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게 끔직한 게 아니라 당신이 당신 아버지처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끔찍한 거라구요. 그리고 당신 할아버지 잘만.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다음에는 야이르. 우리 모두가요. 인간이 계속해서 거부당하는 거잖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초안이 만들어지는데 결국은 다 거부되고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던져지고는 새롭고 약간 발전된 개작으로 대체되는 거죠. 이 모든 게 다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정말 무의미한 농담이죠." (p269) 미카엘과 나는 휴식시간에 몰래 빠져나왔다. 우리는 해변으로 갔다. 모래사장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항구의 벽까지 갔다. 그것은 갑자기 발가락 끝까지 흘러 들어왔다. 고통처럼. 떨림처럼. 미카엘은 거절하면서 설명을 하려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 자신도 놀랄 만한 힘으로 그의 셔츠를 찢어버렸다. 모랫벌로 그를 밀어던졌다. 물어뜯었다. 흐느낌. 그보다 내가 더 무거운 것처럼 온몸으로 그를 내리눌렀다. 여러 해 전에 푸른 코트를 입은 소녀는 학교 쉬는 시간에 자기들보다 힘센 남자아이들과 이런 식으로 레슬링을 하곤 했다. 냉정하고 붙라오르듯. 울면서 조롱하면서. 바다가 끼어들었다. 모래도. 거친 쾌락이 꿰뚫듯이, 타는 듯이 미세하게 몰아쳤다. 미카엘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나를 모르겠다고, 내가 다시 낯설어졌다고, 내가 싫다고 중얼거렸다. 내가 낯설다니 기쁘군요. 당신이 나를 좋아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p276) "너두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야 한나. 난 확신해. 언젠가는 너희들도 목표를 달성할 거라고. 미카엘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고 너는 언제나 똑똑한 아이였잖아" 하다사의 출국과 그녀가 헤어지면서 했던 말은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리라는 그 말을 들으면서 울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시간과, 헌신이나 인내, 노력, 야망, 성취와 타협한 것일까? 나는 고독, 절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우울했다. 창피했다. 거기에는 기만이 있었다. 내가 여세 살 때 아버지는 달콤한 말로 여자들을 유혹하고 나중에는 버리는 사악한 남자들에 대해서 경고했었다. 아버지는 두 가지 다른 성의 존재 자체가 세상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무질서라도 된다는 듯이, 사람들이 그 무질서의 결과를 완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된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나는 음탕하고 너저분한 남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두 가지 다른 성의 존재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만이 있었고, 그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안녕히, 하다사. 예루살렘에 한나에게 저기 멀리 팔레스타인에 자주 편지하렴. 남편과 아들을 위해서 예쁜 우표도 붙이고. 산과 눈에 대해서 전부 얘기해 줘. 여인숙에 대해서.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버려진 오두막과 바람에 문이 휘둘려서 경첩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는 오래된 오두막에 대해서. 나는 상관없어. 하다사. 스위스에는 바다가 없지. 드래곤호와 타이그레스 호는 생 피에르와 미클론 섬의 항구에 있는 메마른 선창에 정박주이야. 승무원들은 새 여자들을 찾아 골짜기를 헤매고 있지. 나는 평안해. 삼월 중순. 예루살렘에는 아직도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어. (p278~279) 어머니는 최근에 심한 순환장애를 겪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치 임종에 가까운 분 같았다. 내 생각 속에 어머니는 얼마나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였다. 그것이 다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언성을 높였던 몇 안 되는 경우에 나는 어머니를 미워했다. 그것을 빼고 어머니에 대한 자리는 내 마음속에 전혀 남겨두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언젠가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머니와 얘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해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그리고 어머니가 이미 임종이 가까운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기회는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로 내 행복감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나의 행복은 마치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내 안에서 솟구쳤다. (p285) 웅크린 채 뛰어 건너는 길. 그들의 움직임은 무중력상태의 미끄러짐에 가깝다. 그늘진 숲의 살랑거림. 커다란 가위로 잘려지는 철조망. 별들이 그들의 공범이다. 지시사항을 빛으로 비춰준다. 한 무리의 검은 구름 같은 저 멀리의 산들. 평원 아래에는 마을들이 반짝인다. 뱀 같은 파이프에서 휙 지나가는 물소리. 스프링클러가 물을 튀긴다. 그들은 피부 안에서, 신발 안에서, 손바닥 안에서, 머리뿌리 안에서 소리를 감지한다. 도랑 틈새에 숨겨진 복병을 소리없이 맴돌면서. 그들은 칠흑 같은 과수원을 비스듬히 지나간다. 작은 돌이 딸그락거린다. 신호. 아지즈가 달려든다. 할릴은 낮은 돌벽 아래 웅크리고 있다. 재칼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다 조용해진다. 자동소총이 장전되고 발사준비가 된다. 악의에 찬 단검이 번쩍인다. 숨죽인 신음소리. 확실한. 찝질한 땀의 냉기. 소리없는 계속된 흐름. (p291) - 아모스 오즈 , ' 나의 미카엘 ' 중에서 <꿈과 현실의 이중적 설화_최창모> 미카엘은 이상/꿈, 즉 <불fire>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서 현실, 즉 <재ash>에 불과하다. 한나의 결혼은 곧 <재>와의 결혼이며, 미카엘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성취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는 연약한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불>과 <재> 사이를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 모두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꿈을 성취하고자 하는 진지한 열의와 샐러드를 만들 줄 아는 현실성을 동시에 지니도록 요구하며, 변화하는 세계에서 진공청소기를 돌릴 줄 아는 적응 능력과 동시에 꿈을 꾸는 듯한 환상을 지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p298) - 아모스 오즈 , ' 나의 미카엘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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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pangs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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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안아줘. 그때처럼 뜨겁게 날 안아줘. 그때보다 뜨겁게
우린 전과 다른 것이 없을 텐데 무엇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나?
여전히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어째서 우린 이렇게 어색할까?
안아도 될까? 그때처럼 뜨겁게 안아도 될까? 그때보다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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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termovie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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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기도회 #가는길 너무 어물쩡 거렸다 #마을버스 놓쳤네 전 같았음 짜증내고 다시 자러 들어갔을지도 그러나 요즘에 나는 너무 정확하고 확실해서 하던걸 멈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왜 일까? 어째서 였을까? 항상 그렇게 맞다고 배우고 배운데로 가던 내가 왜 나한테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던 길로 어거지로 가며 그렇게 꾸역꾸역 힘들게 겨우 버텨내다 여기까지 밖에 못 올 길을 알면서도 가고 있던거냐고 뭐가 널 그렇게 가게 했냐고 일로 걸어야했던 재미없던 도보가 다시금 나와 대화하고 위로하는 의지의 선택이 되고 이렇게 정리되면 난 조금 다른 무엇이 되려나? https://www.instagram.com/p/BvC3ufBnaHw/?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pzwk1mahpg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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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googoo-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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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그 소년들을 거의 잊은 채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책들 중 한 권이라는 사실 외에는 실상 많은 것이 희미했다. 그러니 당연히,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이 오래된 책을 기억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삼십여 년이 흐른 뒤 다시 읽게 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불꽃에 손바닥을 덴 것처럼 놀라며 깨달았다. 열두 살의 내가 어두워져 가는 방의 벽에 기대앉아 이 책을 쥐고, 무엇이 내 눈과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의 의미를. 그 질문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생생히 살아 어른어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한국어로 번역된 린드그렌의 평전을 이어 읽다가, 생전의 작가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의 뉴스들에 유난히 민감했으며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는 대목을 발견하고 나는 조용히 짐작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그녀의 고통이 이 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 배음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열두 살의 내가 비밀로서 품고 있었던 어렴풋한 사랑과 고통이, 먼 시간과 공간을 건너 그녀의 사랑과 고통에 잠시 맞닿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거의 불가능한 방식으로 때로 우리가 만남을 경험하는지도 모른다고. 그 경험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우리들의 심장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였던 눈에 뜨겁게 새겨지기도 하는 것이리라고. 허락된다면, 린드그렌의 이 아름다운 책의 한 대목을 읽으며 나의 이야기를 마치고 싶다. <우리는 시냇가 푸른 잔디밭에 누워 있었습니다. 텡일이라든가 그 밖의 끔찍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차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침나절이었습니다. 햇살은 맑고 따스했습니다. 어찌나 조용한지 들리는 거라고는 약간씩 거품을 일으키며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푸른 하늘 군데군데 흩어진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복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근심 걱정 없이 즐거운 기분이었는데 요나탄 형이 텡일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 “스코르판, 잠시 동안 너 혼자 기사의 농장에 남아 있어야겠어. 나는 들장미 골짜기에 다녀와야 하니까.” 요나탄 형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 혼자는 단 일 분도 기사의 농장에서 살 수 없다는 걸 형은 정말 모르는 걸까요? 만일 형이 텡일의 소굴로 가면 나도 따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요나탄 형이 아주 야릇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습니다. “스코르판, 너는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야. 나는 모든 불행이나 위험으로부터 너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싶어. 하지만 이번엔 너를 돌볼 수가 없거든. 다른 일을 위해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너를 데려가니? 이건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나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슬프고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농장에 남아 있으라는 거야? 형은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면서, 나보고 마냥 기다리기나 하란 말이지?” 나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습니다. (…)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해. 나는 꼭 돌아올 거야.” 형은 그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 더는 화가 나지 않았지만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요나탄 형도 내 마음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친절한 형은 새로 구운 버터 빵에다 꿀을 발라 주었습니다. 또 신기한 옛이야기도 해 주었는데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텡일이라는 악당만 자꾸 생각났습니다. 모든 괴물과 악당 중에서도 텡일이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요나탄 형이 그처럼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기사의 농장 벽난로 앞에 앉아 편안히 살면 안 될 까닭이 뭐란 말입니까? 그러나 형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래?” 내가 다그쳤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 어느덧 밤이 깊었습니다. 벽난로의 불길도 잦아들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문간에 서서 요나탄 형이 말을 타고 안개 속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벚나무 골짜기는 온통 새벽안개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형이 점점 멀어져, 안개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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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just-said-that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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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겠는가? 질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니 아주 야비해 보인다. 종교인이 내게 그런 식으로 물을 때(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싶은 유혹을 순간적으로 느끼곤 한다. “당신이 선하고자 애쓰는 이유가 오로지 신의 인정과 보답을 얻거나 신의 불만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인가요? 그것은 당신의 모든 움직임, 심지어 온갖 속된 생각까지 감시하는 하늘의 거대한 감시 카메라를 돌아보면서 혹은 당신의 머리에 든 아주 작은 도청 장치에 대고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지 도덕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마이클 셔머는 《선과 악의 과학》에서 그것을 ‘논쟁 중단 장치’라고 불렀다. 신이 없을 때 자신이 ‘강도, 강간,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부도덕한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이며, “우리는 당신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는 충고를 받을 것이다”. 반면에 신의 감시를 받지 않을 때에도 자신이 선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임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선하려면 신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치명적으로 훼손하게 된다. 나는 아주 많은 종교인들이 종교가 자신들에게 선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특히 개인의 죄를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더 그럴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신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진다면 우리 모두가 친절함도, 자비도, 관용도, 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도 전혀 없는 무정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려면 자긍심이 지극히 낮아야 할 듯하다. 일반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가 그런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 그가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빌려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반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자연법칙 같은 것은 결코 없으며, 만일 사랑이 정말로 있고 지금까지 죽 세상에 있었다면 그것은 자연법칙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자신의 영생을 믿기 때문이라고 진지하게 고찰했다. 게다가 그는 자연법칙이 바로 그러하다고 즉, 영생에 대한 믿음이 파괴되면 사랑할 능력도 소진될 뿐 아니라 이 지구의 생명을 지탱하는 생명력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그 무엇도 부도덕하지 않을 것이고 식인 풍습까지도 허용될 것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로도 불충분하다는 양 그는 당신과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신이나 자신의 영생을 믿지 않는다면 자연법칙은 즉각 그보다 우선하는, 종교에 기반을 둔 법칙의 정반대편에 설 것이며, 이기주의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는 것까지도 용납될 뿐 아니라 인간 조건의 본질적이고 가장 합리적이고 심지어 가장 고귀한 존재 이유로 인정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소박하게도, 나는 이반 카라마조프보다는 인간 본성에 대해 덜 냉소적이다. 우리 자신이 이기적이고 범죄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종의 치안 유지 활동(신이 하든 서로 하든)이 정말로 필요할까? 나는 그런 감시가 필요 없다고 진심으로 믿고 싶다. 그리고 친애하는 독자도 그럴 것이라고. 반면에 스티븐 핑커의 말은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킨다. 그는 《빈 서판》에서 환멸스러운 경험을 들려준다. 몬트리올에서 경찰들이 파업했을 때의 일이다. /낭만적인 1960년대에 나는 예의 평화로운 캐나다에 살던 십대 소년이었다. 당시 나는 바쿠닌의 무정부주의를 진심으로 믿었다. 나는 정부가 무장을 해제하면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는 부모님의 주장에 코웃음을 쳤다. 1969년 10월 17일 오전 8시 정각, 서로의 예측을 검증할 순간이 닥쳤다. 몬트리올 경찰이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오전 11시 20분에 첫 은행 강도 사건이 벌어졌다. 정오가 되자 약탈에 못 이겨 중심가의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택시 운전사들이 공항 손님들을 놓고 경쟁하던 리무진 업체의 주차장을 불태웠고, 지붕 위에 있던 저격수가 한 경관을 살해했고, 폭도들이 몇몇 호텔과 레스토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한 의사가 교외의 자기 집에 침입한 강도를 죽였다. 날이 저물 무렵 시 당국이 질서 회복을 위해 군대와 기마경찰대를 요청할 때까지 은행 여섯 곳이 털렸고, 100곳의 상점이 약탈당했고, 열두 곳에서 방화가 일어났고, 차량 40대 분량의 상점 쇼윈도가 박살났고, 300만 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중대한 경험적 검증은 내 정치적 견해를 산산이 부수었다./ 아마 신이 지켜보지 않고 치안 유지도 안 할 때조차도 사람들이 선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나 역시 극도로 낙천주의자일 것이다. 반면에 몬트리올 주민들의 대다수는 아마 신을 믿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속세의 경찰이 잠시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신까지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일까? 몬트리올 경찰의 파업은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선하게 만든다는 가설을 검증하기에 아주 좋은 자연적인 실험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비평가 H.L. 멩켄(Henry L. Mencken)이 신랄하게 비꼰 말이 옳았을까? “사람들은 실제로는 경찰이 필요할 때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찰이 사라지자마자 몬트리올의 모든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아주 미미하다고 할지라도 종교인이 불신자보다 약탈하고 파괴하는 경향이 통계적으로 덜했는지를 알아본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나는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정반대일 것이라고 예측해왔다. 참호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빈정거리는 말을 흔히 듣는다. 나는 감옥에는 무신론자가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하고 싶다(결론을 이끌어내기에는 빈약하지만, 몇 가지 증거가 있다). 그렇다고 무신론이 반드시 도덕을 함양한다는 말은 아니다. 인본주의(종종 무신론과 함께 하는 윤리 체계)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무신론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이나 지성이나 반성 같은 제3의 요소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다. 그런 요소들이 범죄 충동을 억누를지 모른다. 그런 연구 증거들은 신앙이 도덕과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들은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샘 해리스가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Letter to a Christian Nation)》에서 서술한 다음 자료는 놀랍다. /미국에서 정당에 대한 선호가 신앙의 완벽한 지표는 아니지만, ‘붉은(공화당) 주’가 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압도적인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붉은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니다. 기독교 보수주의와 사회의 건전도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면, 우리는 미국의 붉은 주에서 그것의 어떤 징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폭력 범죄율이 가장 낮은 25개 도시 가운데 62퍼센트는 ‘푸른(민주당)’ 주에 있으며, 38퍼센트는 ‘붉은(공화당)’ 주에 있다. 25개의 가장 위험한 도시 중에서 76퍼센트가 붉은 주이며 24퍼센트는 푸른 주다. 사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다섯 곳 중 세 곳이 신앙심 깊은 텍사스 주에 있다. 강도 발생률이 가장 높은 12개 주는 붉은색이다. 절도 발생률이 가장 높은 29개 주 가운데 24개 주는 붉은색이다. 살이 발생률이 가장 높은 22개 주 가운데 17개 주가 붉은색이다./ 아무튼 체계적인 연구들은 그런 상관관계가 있음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대니얼 데밋은 《주문 깨기》에서 해리스의 책이 아니라 그런 연구 전반에 대해 야유를 보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결과들은 종교인들이 도덕적으로 더 고결하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아주 강한 타격을 입혔기에 그것들을 반박하려는 종교 단체들의 주도로 후속 연구들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도덕적 행동과 신앙 사이에 의미 있는 긍정적인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곧 발견되리라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종교 단체들이 그것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자 열의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이 자신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할 때면 과학의 진리 발견 능력에 아주 깊은 인상을 받는다.) 다달이 그렇다는 발표 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니 그렇지 않다는 의심이 깊어진다./ 대부분의 사려 깊은 사람들은 치안 유지 활동이 없을 때의 도덕이, 경찰이 파업을 하거나 감시 카메라가 꺼지자마자 사라지는 일종의 가짜 도덕보다 다소 더 도덕적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감시 카메라가 경찰서에서 운영하는 진짜 카메라든 하늘에 있는 가상의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겠는가?”라는 질문을 그렇게 냉소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종교 사상가라면 가상의 변증론자가 할 만한 다음과 같은 말과 궤를 같이 하는, 도덕적 해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 어떤 절대적인 도덕 기준들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 셈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큰 의지력을 발휘하여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나쁜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결국 종교만이 선과 악의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 종교가 없다면 당신은 홀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규정집이 없는 도덕일 것이다. 그것은 직감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도덕이다. 도덕이 단지 선택의 문제라면, 히틀러는 자신의 우생학적 기준이 도덕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무신론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다양한 기준에 따라 개인적으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 대조적으로 기독교도이나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는 악이 시대나 장소와는 무관하게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히틀러가 절대적인 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령 우리가 도덕적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존재를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다루는 쟁점이 아니다. 내 가상의 종교 변증론자는 신에게 아첨하는 것이 선한 행위를 하는 종교적 동기임을 인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의 주장은 선하려는 동기가 어디에서 나오든 신이 없으면 무엇이 선한지 판단할 어떠한 기준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종교에만 토대를 둔 도덕 원칙들(이를테면 ‘황금률’과 상반되는 것. 황금률은 종종 종교와 연관되곤 하지만 다른 것으로부터도 나올 수 있다)은 절대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며, 특정한 사례를 판단할 때 누가 고통을 겪는가 같은 것들을 고려하면서 판단을 미적거리지 않는다. 내 종교 변증론자는 종교만이 무엇이 선한지를 결정할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일부 철학자들, 특히 칸트는 비종교적인 근원에서 절대적인 도덕을 이끌어내려고 애썼다. 비록 당시에는 거의 어쩔 수 없이 그도 종교인이었겠지만, 칸트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를 위하여 의무를 도덕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의 유명한 정언 명령은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거짓말에 잘 들어맞는다.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선하고 도덕적인 일이라고 간주되는 세계를 상상해보자. 그런 세계에서 거짓말 자체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은 정의상 진실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 따르기를 바라는 무언가를 도덕 원리라고 한다면, 거짓말은 도덕 원리가 될 수 없다. 그 원리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삶의 규칙이라기에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더 일반화하면 이기주의 즉, 남들의 호의에 무임승차하는 기생 생활은 고독하고 이기적인 개인으로서의 내게 알맞고 내게 개인적인 만족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모두가 이기적 기생생활을 도덕 원리로 채택하기를 바랄 수가 없다. 그러면 기생할 대상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명령은 ‘진실 말하기’와 다른 몇몇 사례에 알맞은 듯하다. 그것을 도덕 전반으로 어떻게 확대시킬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칸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절대론적 도덕이 대개 종교에서 나온다는 내 가상의 변증론자의 말에 동의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말기 환자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고통을 끝내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일일까? 동성끼리 사랑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일일까? 배아를 죽이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일일까?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의 근거는 절대적이다. 그들은 어떤 논증도, 논쟁도 참지 못한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쏴 죽여야 마땅하다. 물론 진짜로 하는 말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는 말이다. 미국 낙태 병원들의 일부 의사들은 예외다. 그러나 다행히도 도덕은 절대적일 필요가 없다. 도덕 철학자들은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전문가들이다. 로버트 힌데가 간결하게 표현했듯이, 그들은 “도덕 규칙이 반드시 이성을 통해 구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통해 옹호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분류하지만, 현대적인 용어로는 주로 (칸트 같은) ‘의무론자’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 1748~1832] 같은 ‘공리주의자’를 포함한) ‘결과론자’로 구분한다. 의무론(deontology)은 도덕이 규칙들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리키는 멋진 명칭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의무의 학문이며, ‘의무적인 것’을 가리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의무론은 도덕적 절대론과 똑같지는 않지만, 종교를 다룬 이 책의 대다수 목적들에 비추어볼 때 그 구분을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다. 절대론자들은 옳고 그름의 절대값들, 결과와 전혀 무관하게 옳음을 판단해야 하는 명령들이 있다고 믿는다. 결과론자들은 어떤 행위의 도덕을 결과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는, 더 실천적인 관점을 취한다. 결과론의 한 형태는 벤담, 그의 친구 제임스 밀(James Mill : 1773~1836)과 밀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 1806~73)과 관련된 철학인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가끔 안타깝게도 벤담의 부정확한 표어로 요약되곤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도덕과 법의 토대다.” 모든 절대론이 종교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종교가 아닌 다른 것을 토대로 절대론적 도덕을 방어하기는 아주 어렵다. 내 생각에 유일한 경쟁자는 애국심, 특히 전시의 애국심이다. 유명한 스페인의 영화감독 루이 브뉘엘(Luis Bunuel)은 이렇게 말했다. “신과 국가는 무적의 팀이다. 그들은 억압과 유혈의 모든 기록을 깬다.” 징집은 그 희생자들의 애국적 의무감에 크게 의존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여성들은 군복을 입지 않은 젊은 남성들에게 흰 깃털을 건넸다. /오, 우리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국왕과 국가가 그런 당신을 필요로 하니까요./ 사람들은 양심적 거부자를 경멸했다. 설령 그가 적국의 국민이라고 해도 말이다. 애국심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직업군인이 내뱉는 “조국이 옳든 그르든”이라는 말보다 더 절대적인 것은 없을 듯하다. 그 구호는 장래 정치가들이 적이라고 부를 사람은 누구든 죽이겠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결과론적 추론은 전쟁을 할 것인지,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일단 전쟁이 선언되면 절대론적 애국심이 종교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힘과 세력을 획득한다. 결과론적 도덕을 고심한 끝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정한 군인은 군법회의에 설 가능성이 높고 더 나아가 처형될 수도 있다. 이 도덕 철학 논의의 출발점은 신이 없다면 도덕이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것이 된다는 가상의 종교적 주장이었다. 칸트를 비롯한 깊이 있는 도덕 철학자들은 논외로 치고, 애국적 열정도 인정하고 나면, 절대적 도덕의 근원으로 선호되는 것은 대개 역사적 정당성을 훨씬 초월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해석되는, 일종의 신성한 경전이다. 사실 성서의 권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자기 경전의 (대개는 심히 의심스러운)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 딱할 정도로 호기심을 갖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는 자신들의 도덕을 성서로부터 이끌어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며, 그들 스스로도 잘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동의해야 할 것이다.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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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angseo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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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p
물고기들은 고통스롭게 아가리를 벌린 채 불안으로 굳어버린 금빛 눈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거나 절망적으로 버둥거리며 죽음에 저항하고 있었다. 골드문트는 이 물고기들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혔으며, 인간들에게는 쓸씁항 불쾌감을 느꼈다. 어째서 인간들은 이토록 무지막지하고 거칠며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멍청하고 어리석은 것일까. 어째서 인간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벌어진 입들을,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이 눈들을, 거칠게 파닥거리는 꼬리들을 어째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소름끼치면서도 아무 소용도 없는 이 절망의 몸부림을, 놀랄 만큼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이 동물들의 변신을 어째서 못 보는 것일까. 인간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물고기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불쌍하고 사랑스런 동물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뻗어버려도, 혹은 예술의 명인이 성자의 얼굴상에 인생의 모든 희망과 고귀함, 모든 고통과 가슴 죄는 어두운 불안을 전율이 느끼도록 드러내 보여도 인간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모두 자족감에 빠져 있거나 일로 분주했으며, 잘난 체 하면서 바쁘게 살아갔다. 또 서로 고함을 지르고, 비웃고, 무례하게 굴고, 소동을 일으키고, 익살을 떨고, 푼돈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고도 사람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으며, 순조롭게 살면서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돼지나 다름없었다. 아니, 차라리 돼지만도 못하고 돼지보다 더 조악했다! 그런데 골드문트 자신도 너무나 자주 그런 인간들 틈에서 놀았으며, 그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데서 희열까지 느끼곤 했다. 그러나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불현듯 기쁨과 평온은 자꾸만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런 느끼하고 배부른 망상, 자족감과 우쭐함, 나태함에서 오는 안일함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는 고독과 번민에 빠져들고, 떠돌이가 되고, 고통과 죽음을 관찰하고, 모든 활동의 덧없음을 관찰하고, 심연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러면 때로는 무의미하고 두려운 대상을 자라보며 절망적인 체념 상태에 빠져 있다가도 갑자기 기쁨이 솟구치곤 했다. 그럴 때면 격렬한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곤 했다. 혹은 꽃향기를 맡거나 고양이를 데리고 놀 때면 어린아이처럼 소박하게 인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기도 했다. 이제 또다시 그런 기분은 되살아날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다시 세상은 좋아질 것이고, 훌륭해 보일 것이다. 바로 그런 기분을 되찾을 때까지는 슬픔과 번민이 계속될 것이며, 죽어가는 물고기와 시들어가는 꽃들에 대한 절망적이고 가슴 답답한 사랑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돼지처럼 아무렇게나 살면서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경악할 것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고통스러운 호기심에 빠져서 가슴 깊이 불안해하면서 떠돌이 학생 빅토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골드문트는 도대체 빅토르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 불쌍한 마음으로 물고기들을 구경하고 또 구역질을 느끼며 시장 사람들을 구경하는 동안 골드문트의 가슴은 불안한 적의로 가득 찼다. 그리고 모험과 사건, 기이한 농담과 익살로 가득 찬 빅토르의 인생 중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일까? 자신을 죽인 자가 간직하고 있는 몇 가지 느슨한 기억 말고 전혀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이 인간의 삶에서 또 어떤 것이 살아남아 있는 것일까? 아,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인간, 모든 사물이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순식간에 꽃처럼 피어났다가 어느새 시들어 사라지고, 그러고는 그 위로 눈이 내린다. 몇 해 전 이 도시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그 자신의 마음���에는 온갖 꽃다운 꿈들이 가득하지 않았던가! 예술을 향한 열망이 차올랐고, 명인에 대해 가슴 두근거리는 갚은 존경심이 가득 차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시든 꽃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무미건조하고 기쁨도 없는 어떤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한순간 번개처럼 언뜻 스쳐가는 얼굴, 영원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출생과 죽음을 향해, 꽃들과 바스락거리는 가을 잎새를 향해, 예술을 향해, 썩어 없어지는 들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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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juliainfo-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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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일반] 소화효소의 종류와 그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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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일반] 소화효소의 종류와 그 작용
 생물이 생물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에너지이다. 그렇다면 에너지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바로 음식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먹어댄다고 에너지가 바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하고, 어째서 필요한가? 바로 소화효소가 필요하고, 소화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면 소화란 어떤 행위인가? 일반적으로 소화라고 하면 단순히 무엇인가를 씹고 부수어 몸에 흡수되기 쉬운 상태로 만드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계적 소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화학적 소화까지 고려할 경우 물질을 보다 작은 단위,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는 고분자 상태인 음식물의 물리, 화학적 상태를 변화시켜 흡수하기 쉽도록 만드는 것을 소화라고 한다.
   이러한 소화 효소들은 소화를 위한 내분비샘, 이른바 소화샘에서 분비된다. 각각의 소화샘에서 분비되는 소화액은 각각 소화시키는 영양소의 종류가 다른데, 침샘에서 분비되는 침은 녹말을, 간에서 분���되어 쓸개에 저장된 뒤 분비되는 쓸개즙은 직접적인 소화작용을 하지만 다른 소화액의 작용윽 촉진시킨다. 위액은 강한 산성을 띄며 단백질을 분해시키고 이자에서 분비되는 이자액은 3대 영양소 모두를 소화시킬 수 있다. 또한 장에서 분비되는 장액 역시 당과 단백질을 분해하는 작용을 한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아밀레이스는 흔히 아밀라아제라고도 부르는 그것으로, 침에 들어있는 효소이다. 녹말을 엿당으로 분해하는 기능을 하며, 쌀을 오랫동안 씹고 있을 때 단맛이 나는 이유가 바로 아밀레이스에 의한 녹말의 가수분해가 일어나 당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아밀레이스는 작용하는 양식에 따라 α-아밀레이스, β-아밀레이스, 글루코아밀라아제의 3종으로 나뉘는데, α-아밀레이스는 말토트리오스를 말토오스2로부터 분리해내는 역할을 한다. β-아밀레이스는 마찬가지로 녹말을 말토오스로 분리하며, 글루코아밀라아제는 아밀로오스와 아밀로펙틴을 분리하여 글루코오스를 만든다.
   위액의 소화효소인 펩신은 단백질을 작은 단위의 폴리펩타이드로 분해하는 기능을 한다. 일반적으로 위액의 산성도는 1.5에서 2.0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펩신이 기능을 수행하기에 가장 최적인 환경으로, 다시 말해 위가 강산을 띄는 이유는 단백질을 효과적으로 소화하기 위해서이다. 위액에서 분비되는 물질은 펩신과 염산이고, 이러한 강산의 환경에서부터 위가 손상되는것을 막기 위해 위 표면은 뮤신이라는 점막으로 덮여 있으나 스트레스나 생활습관 등으로 인해 이 점막층이 약해질 경우 위궤양이 일어날 수 있다. 좌우간 이 펩신은 페닐알라닌, 트립토판과 타이로신과 같은 방향성 아미노산의 아미노 결합의 20퍼센트를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쓸개즙은 지방의 유화를 돕는다. 또한 위산을 중화시키고 각종 효소의 소화작용을 촉진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이하 여백.
이자액은 지방과 단백질3, 그리고 탄수화물의 소화가 일시에 가능한 소화액으로, 효소로는 트립신과 라이페이스, 아밀레이스를 가진다. 여기서 특기할 효소는 바로 라이페이스인데, 유일하게 지방을 분해하는 효소이다.
   이자에서 분리되는 라이페이스는 트리글리세리드를 모노글리세리드와 지방산 2분자로 분해하는데, 이렇게 분해된 지방산은 암죽관을 타고 최종적으로 심장에서 사용되는데, 특이점으로는 소장세포에 흡수된 이후 다시 트리글리세리드로 결합되어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단위로 분리된 영양소는 최종적으로 소장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분리된다. 소장의 소화효소는 말테이스와 펩티데이스이며, 말테이스는 맥아당을 포도당으로, 펩티데이스는 다이펩타이드와 모노펩타이드를 아미노산으로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 흡수된 영양소 중 수용성 영양소는 융털의 모세혈관에서부터 간문맥, 간, 간정맥을 통해 하대정맥으로 심장에 운반되며 지용성 영양소는 융털의 암죽관에서부터 림프간, 가슴 림프관, 빗장밑 정맥을 통해 상대정맥에서 심장으로 이동한다.
위 사진은 소화효소의 대명사격인 아밀레이스
이른바 엿당, 맥아당
특히 폴리펩타이드를 모노펩타이드와 다이펩타이드로 분해하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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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wnagirlxyz-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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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4분기 방영 애니메이션 감상평 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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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4분기 방영 애니메이션 감상평 ⑤ 야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
연출
스즈키 요헤이
출연
코바야시 유스케, 이시가미 시즈카, 마츠키 미유
방송
2015 일본
평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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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rget=”_blank” class=”con_link”>2. 2015년 3/4분기 방영 애니메이션 감상평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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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rget=”_blank” class=”con_link”>4. 2015년 3/4분기 방영 애니메이션 감상평 ④ 뜬금없이 OP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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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rget=”_blank” class=”con_link”>6. 2015년 3/4분기 방영 애니메이션 감상평 ⑥ 란포기담
OP얘기에서 은근슬쩍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으로 넘어가자면, <시모세카>는 원작도 원작이지만, 이런 원작이 영상화된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또 그대로 영상화해서 문자 그대로 한 화 한 화 매번마다 충격과 공포를 선사해주었죠. 특히 1화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24분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야말로 전설로 남을 파리 짝짓기 장면(…)
  -그런데 그걸 보는 학생들의 상태가…
-단체 발정(…)
물론 심의라는 게 있어서인지, 직접적인 요소는 죄다 우회적으로 묘사하고 있기는 합니다… 만,
-이처럼 대놓고… 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장면들도 종종 튀어나옵니다.
하여튼, 뭐랄까, 이처럼 1화에서도 충분히 돌아버린 듯한 모습을 보여준 바 있었는데 2화 이후로도 1화를 보고 난 기대를 초월해버리더군요. To infinity and beyond! 대략 그런 기분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분명 수위 높은 성적 농담이 난무하는데도 묘하게 야한 기분이나 불쾌감이 드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상상을 초월하는 변태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거 같은데 만일 제가 일상에서 아야메가 늘어놓는 표현들이나 작중의 우회적이지만 노골적인 음담패설들을 들었다면 그 표적이 제가 아니더라도 불쾌감을 느꼈을 법한데, 뭐랄까… 머리로는 “저런 불유쾌한 표현을!!”이라고 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그저 푸흡- 하고 뿜으며 넘어가 버리게 되더군요… 
아무래도 작중의 분위기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적 통제와 검열에 대한 풍자가 그런 성적 표현에 대한 규제로 대표되고 있으니까요. 
-시대착오적인 정조대의 법정화. 작중세계는 “순결에 대해 순결하게 말하는 사람은 적다(파스칼, 팡세, 377)“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뭔가 모순적인 규제가 가해지는 세계입니다.
-그러한 왜곡된 규제의 결과, 작중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왜곡된 연애관 등으로 인해 현실 속에서라면 엄연히 범죄에 들어갈만한 행위도 태연하게 저지르는 사태가 빈발합니다.
-심지어 남자에게 두근거린다거나… -이런 황당한 질문을 하는 경우도 생기죠… 
하지만 BL세계에서는 남성의 배설구에 송이버섯을 삽입해도 애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는 소문이;;; 
이러한 사태는, 위에서 잠깐 인용한 파스칼의 말처럼, 외설적인 표현에 대한 규제는 상당히 외설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외설과 미풍양속은 한 동전의 양면이거든요. 이는 외설이란 사회 통념상 미풍양속에 벗어나서 사람의 성욕을 자극하는 대상 또는 방식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풍양속을 지켜라!”는 곧 “외설하지 말아라!”는 의미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외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요구합니다. 결국 그것은 사회의 통념이 어느 수준을 외설과 미풍양속의 경계로 보느냐에 대한 “정도의 문제”인 것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작중 세계에서는 그러한 인식 자체를 거세해버립니다. 그 결과 외설물을 규제해야 할 학생회가 뭐가 외설적인지 몰라 규제를 못하는 정도는 다반사고,
-그래서 초빙해온 전문가라는 양반이…
-농구골대, 줄다리기 줄, 탁구공, 배구 네트를 음란한 물건으로 규정하여 단속하는가 하면…
이보시오! 전문가 양반! 줄다리기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게 음란물이라니! -BL동인지는 OK라는 사태도 벌어집니다.
-변태들이 한숨 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셋 다 의외로 건전한 청소년들이라는 점이 함정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대상 자체가 음란한 것은 없습니다. 아니, 뒤집어 말하자면, 삼국지의 간옹선생의 말대로 삼라만상은 모조리 음란한 도구들을 기본소양으로 장착한 범죄자 예비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심지어 그 모든 인간들이 음란한 행위의 소산이기도 하지요. 오오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을 규제하고 단속해야 하는 거로구만…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삼라만상 모든 만물을 규제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인간들을 단속하지도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지만 말이죠. 결국, 작중 아야메의 말대로 야한 것은 표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인 것이겠지요. 
저변의 흑: 에로책은 변태를 만들지 않는다! 다만 변태들의 망상을 자극할 뿐이다!!!
토키오미의 목소리로 강변하니 뭔가 이상해애애애─
뭐 안의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긴 하지만;;;
말하자면 대상 자체나 표현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매개로 하여 표현되는 음란,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 내면의 음란마귀(…)가 문제인 것인데, 작중 세계의 현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세계의 방향은 뭔가 표현 자체, 더 나아가 컨텐츠 자체를 규제하는 쪽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묘한 왜곡이 발생합니다. ��미풍양속”을 빌미로 “표현” 자체를 통제해버리는 것이죠. 작중에서야 이를 코믹하게 풍자했습니다만, “표현을 통제한다”는 것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폭정입니다. 그래도 보통 북한 같은 평범한(?) 독재국가에서도 남들 눈에 띄는 발언이나 행동 정도만 통제하는 정도인데, 작중 세계에서는 아주 그냥 몸에 발신기까지 달아놓고 구체적인 손목의 움직임까지 감시하고 있으니… 이는 그야말로 <PSYCHO-PASS> 못지 않은 디스토피아 사회의 모습이지요…
-표현에 대한 억압, 더 나아가 성욕에 대한 억압.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원천봉쇄를 위해 이제는 성정체성의 봉인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실험작인 츠키미구사.
츠키미구사가 남자라는 걸 알았을 때 크라드메서는 진심으로 절규했다는 후문이…
그러나 이 작품이 풍자물로써 더욱 더 훌륭했던 점은, 자신들이 비판하는 세태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만 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애초에 SOX가 지적하는 것처럼 성적인 요소가 인류와 항상 함께 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의 보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에, 음담패설은 인류의 문화와 함께 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성욕이 인간의 자연적인 요소이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음담패설에서 묘한 즐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문화권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생산력과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면 음담패설이나 성적인 표현이 통제되거나 제한되면서 음지로 들어가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무조건적인 억압과 통제, 봉쇄가 위와 같은 왜곡들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통제와 제한이 사라진 곳에서도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타인을 성적 욕구의 수단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사조를 유통시킬 수도 있다는 부분이 있겠군요.
-군집의 피륙과 정점의 하양. 이들은 자신들의 페티쉬즘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들을 그저 속옷조달의 수단으로 착취할 뿐이며, 이는 이들의 버스 하이재킹 사태와 토키오카 학원 인질극 사태에서 잘 드러납니다.  
-대략 이런 변태입니다.
OH MY EYES!!!
    나는 시모네타가 되고 싶다!
나는 시모네타가 되고 싶다!
그 존재, 그 자체가 잘못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어 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존재 가치가 있으며, 
사람들로부터 원하는 시모네타 그 자체는, 
그래, 우리들 시모네타 테러 조직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존재여야만 해!
자신들을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게 계속 되어서야, 시모네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세계야말로 이상적이라고 맹신하는 사람들하고 똑같이 되어버리는 걸!
애초에 시모네타도 야한 것도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거야!
잘못되어 있기에 매력적이며, 숨겨야만 하는 것이기에 흥분을 하며, 악(惡)이기에 빛나고 있고, 왜곡되어 있기에 끌리는 거야!
그렇기에 나는!
시모네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루한 이 세계를 부수기 위해서
절대 악으로서 싸울 것을 여기서 표명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SOX는 자신들이 정의롭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음담패설과 성적인 표현이 갖는 성교육적 순기능의 가치에 주목하면서도, 이러한 것들은 잘못된 것이고, 안 좋은 것이며, 왜곡되어있는 것이고, 음성적이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범죄자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파렴치범이나 풍기문란범이 되자는 것도 아니고, 미풍양속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선을 행할 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악인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 정의를 행할 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불의인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성적 욕구를 올바르게 추구하기 위해서는 욕망에 의해 일그러진 성적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성적 욕구를 깨닫지 못하고 거기에 휘둘리기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어찌 보면 궤변입니다만, 그만큼 현실적인 고민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잠든 보물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 “지금 세상에 나오기엔 조금 일러. 우리들의 역할은 이걸 미래에 남기는 것.” 그래서인지 몰라도, 최종화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시대에는 아직 이르다며 훗날을 기약하는, 나름 개념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유물들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스샷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아무래도 수위가 좀 있어서 대사 장면으로 대체합니다
그런 점에서, 처음에는 그저 병신력 폭발에 폭소를 터뜨리며 웃으려고 보기 시작한 작품이었습니다만, 어느 순간부터는 폭소를 터뜨리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이것저것 생각해보게 만든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도 가수 아이유의 어떤 노래가사의 선정성과 관련하여 일단의 논쟁이 오갔다고 들은 바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에서 다루었던 것과도 상통하는데, 논쟁에서는 단순히 선정성 논란을 넘어서,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통용될 것인가를 두고 샤를리 엡도 사태까지 논의가 확장되더군요. 그런 점에서 이 작품도, 미시적으로는 서브컬쳐의 주된 기반인 H(…)함에 대한 통제(우리 나라에서는 아청법이 대표적인 예시이겠지요.)에 대한 논란을 넘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고민까지 확장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나저나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한 가지 서글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안나 니시키노미야 역으로 열연해주신 故 미츠키 미유 씨께서 지난 10월 27일 경 38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소천하셨습니다. 성우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는 아니었기에 부고를 접하고 나서야 고인이 얼마나 대단한 성우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안나 역의 미츠키 미유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사람들 이거 악질적인 농담을 하는 것도 유분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정도로 믿을 수가 없겠더군요… 그야말로 절정에 오른 연기력을 보여주신 직후에 이렇게 부고를 접하게 되니 실로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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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ntea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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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 1. 뱀의 비유
거센 격류가 연약한 갈대의 다리를 무너뜨리듯이 교만한 마음을 남김없이 없애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
01) 뱀의 비유
1.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註)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구도자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 장은 강조하고 있다. 인도에는 코브라 뱀이 많고, 인도인들은 코브라 뱀을 신성한 동물로 여기기 때문에 경전에는 뱀의 비유가 많다. 2. 연못에 핀 연꽃을 물 속에 들어가 꺾듯이, 육체의 욕망을 말끔히 끊어 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註) 이 세상은 물질적인 차원, 저 세상은 정신적인 차원을 말한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는 것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3. 넘쳐 흐르는 집착의 물줄기를 남김없이 말려 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4. 거센 물줄기가 갈대로 만든 연약한 다리를 무너뜨리듯, 교만한 마음을 남김없이 없애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5. 무화과 나무 숲에서는 꽃을 찾아도 얻을 수 없듯이, 모든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지 않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6. 안으로는 성냄이 없고, 밖으로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7. 잡념을 남김없이 불살라 없애고 마음을 잘 다듬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8. 너무 빨리 달리거나 느리지도 않고, 잡념을 모두 끊어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9. 너무 빨리 달리거나 느리지도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덧없다는 것을 아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註) ‘너무 빨리 달리거나 느리지도 않고’는 지나친 과욕이나 게으름을 경계한 말이다. 10. 너무 빨리 달리거나 느리지도 않고, 이 세상이 다 덧없다는 것을 알아 탐욕에서 떠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11. 너무 빨리 달리거나 느리지도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덧없다는 것을 알아 육체의 욕망에서 떠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12. 너무 빨리 달리거나 느리지도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덧없다는 것을 알아 미움에서 벗어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13. 너무 빨리 달리거나 느리지도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덧없다는 것을 알아 어리석은 집착에서 벗어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14. 나쁜 버릇이 조금도 없고, 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뽕아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15. 이 세상에 다시 환생할 인연이 되는, 그 번뇌에서 생기는 것을 조금도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16. 우리들을 생존에 얽어매는 것은 집착이다.. 그 집착을 조금도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17. 다섯 가지 장애물을 뛰어넘고, 번뇌와 의혹을 물리쳐 괴로움을 벗어 던진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註) 다섯 가지 장애물이란 인간의 깨어 있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탐욕, 분노, 우울, 들뜸, 의심을 가리킨다.
02) 소치는 아이
18.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 지붕에는 이엉을 덮어 놓았고, 집 안에는 불을 지펴 놓았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註) 마히 강은 ‘큰 강’이라는 뜻. 19.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도 벗어 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에는 아무 것도 걸쳐 놓지 않았고, 탐욕의 불은 남김없이 꺼 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註) 움막은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20.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모기나 쇠파리도 없고, 소들은 들판의 우거진 풀을 뜯어먹으며, 비가 와도 견뎌 낼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1. 스승은 대답하셨다. “내 뗏목은 이미 잘 만들어져 있다. 욕망의 거센 흐름에도 끄떡없이 건너 벌써 피안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뗏목이 필요 없노라.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2.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내 아내는 착하고 허영심이 없습니다. 오래 함께 살아도 항상 내 마음에 흡족합니다. 그녀에게 그 어떤 나쁜 점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3. 스승은 대답하셨다. “내 마음은 내게 순종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오랜 수양으로 잘 다스려졌다. 내게는 그 어떤 나쁜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4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놀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아이들은 모두 다 건강합니다. 그들에게 그 어떤 나쁜 점도 볼 수 있다는 말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5.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스스로 얻은 것으로 온 세상을 거니노라. 남에게 소속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6.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에게는 갓 태어난 송아지도 있고, 젖을 먹는 어린 소도 있습니다. 새끼 밴 어미 소도 있고, 암내 내는 암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암소의 짝인 황소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7.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에겐 갓 태어난 송아지도 없고, 젖을 먹는 어린 소도 없다. 새끼 밴 어미소도 없으며, 암내 내는 암소도 없다. 그리고 암소의 짝인 황소도 없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8.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소를 매 놓은 말뚝은 땅에 박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새로 엮은 밧줄운 튼튼해서 소도 그것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9. 스승은 대답하셨다. “황소처럼 고삐를 끊고 코끼리처럼 냄새나는 넝쿨을 짓밟았으니, 나는 다시 인간의 모태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註) 인도의 코끼리는 발정기가 되면 난폭해져 숲과 마을을 짓밟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런 비유가 자주 쓰인다. 30. 이때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 검은 구름이 비를 뿌리더니 골짜기와 언덕에 물이 넘쳤다. 신께서 뿌리는 빗소리를 듣고 다니야는 이렇게 말했다. 31. “우리는 거룩한 스승을 만나 얻은 바가 참으로 큽니다. 눈이 있는 이여 우리는 당신께 귀의하오니 스승이 되어 주소서 위대한 성자시여.註) 초기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가르켜 ‘눈이 있는 이’ 또는 ‘눈 뜬 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2. 아내도 저를 따라 행복하신 분 곁에서 열심히 수행을 하겠나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생사의 윤회가 없는 피안에 이르러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33. 이때 악마 파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 34. 스승은 대답하셨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는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03) 무소의 뿔
35.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고, 살아 있는 그 어느 것도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6. 만남이 깊어지면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 사랑으로부터 근심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7. 친구를 좋아한 나머지 마음이 거기 얽매이게 되면 본래의 뜻을 잃는다. 가까이 사귀면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註) ‘본래의 뜻’이란 자기가 목적한 바를 뜻한다. 38.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집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 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9.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0. 동행이 있으면 쉬거나 가거나 섰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1. 동행이 있으면 유희와 환락이 따른다. 또 그들에 대한 애정은 깊어만 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싫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2.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남을 해치려 들지 말고, 무엇이든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3. 출가한 처지에 아직도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수행하는 재가자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흔히 있다. 남의 자녀에게 집착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4. 잎이 진 코빌라라 나무처럼, 재가 수행자의 표적을 없애버리고 집안의 굴레를 벗어나 용기 있는 이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註) 코빌라라 나무는 흑단의 일종. ‘재가 수행자의 표적’은 머리, 수염, 흰 옷, 장식품, 향료, 처자와 하인이 있는 것을 말함. 45.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46. 그러나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7. 우리는 친구를 얻는 행복을 바란다.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대등한 친구는 가까이 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친구를 만나지 못한 때는 허물을 짓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8. 금세공이 잘 만들어 낸 두 개의 황금 팔찌가 한 팔에서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註) ‘두 개의 황금 팔찌가 한 팔에서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는 팔찌가 하나일때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개 이상일 때는 서로 부딪혀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여럿이 함께 있으면 시비가 생기고 번거로우니 혼자서 수행하라는 뜻이다. 49. 이와 같이,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잔소리와 말다툼이 일어나리라.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0.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근심 걱정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1. 이것이 내게는 재앙이고 종기이고 화이며, 질병이고 화살이고 공포이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와 같은 두려움이 있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2.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3. 마치 어깨가 떡 벌어진 얼룩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자유로이 숲 속을 거닐 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4. 연희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탈에 이를 겨를도 없다. 태양의 후예가 한 이 말을 명심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註) ‘잠시 동안의 해탈’이란 세간적인 선정禪定이라는 뜻으로, 그것을 얻었을 때만 잠시 잡념���로부터 놓여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태양의 후예’는 부처님을 가리킨다. 55. 서로 다투는 철학자들의 논쟁을 초월하여 진정한 깨달음의 도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6.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7.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친구를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8. 널리 배워 진리를 아는, 생각이 깊고 현명한 친구를 가까이 하라. 그것이 이익이 됨을 알고 의심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9. 세상의 유희나 오락 또는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갖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0.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모든 욕망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1. ‘이것은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함도 적고 괴로움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시이구나.’ 이와 같이 깨닫고, 지혜로운 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2.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 번 불타 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3. 눈을 아래로 두고, 두리번거리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각을 억제하여 마음을 지키라. 번뇌에 휩쓸리지 말고 번뇌에 불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4. 잎이 져 버린 파리찻타 나무처럼, 재가자의 모든 표적을 버리고 출가하여 가사를 걸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5. 여러 가지 맛에 빠져들지 말고 요구하지도 말며 남을 부양하지도 말라. 누구에게나 밥을 빌어먹고 어느 집에도 집착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6. 마음속의 다섯가지 장애물을 벗어 던지고 온갖 번뇌를 버리고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욕망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7. 전에 경험했던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두 던져 버리고, 또 쾌락과 근심을 떨쳐 버리고 맑은 고요와 안식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8. 최고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마음의 안일함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말며, 부지런히 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9. 홀로 앉아 명상하고 모든 일에 항상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근심인지 똑똑히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0. 집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1.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2. 이빨이 억세며 뭇 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핍하고 외딴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3.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를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4. 탐욕과 혐오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속박을 끊고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5.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사귀고 또한 남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보기 드물다. 자신의 이익만을 아는 사람은 추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04) 밭 가는 사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마가다국 남산에 있는 ‘한 포기 띠’라고 하는 바라문 촌에 계셨다. 그때 밭을 갈고 있던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씨를 뿌리려고 오백 개의 쟁기를 소에 매었다. 스승께서는 오전 중에 바리때와 가사를 걸치고, 밭을 갈고 있는 바라문 바라드바자에게로 가셨다. 때마침 그는 음식을 나누어주고 있었음으로 스승은 한 쪽에 섰다.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음식을 받기 위해 서 있는 스승을 보고 말했다.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당신도 밭을 가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으십시오.” 스승은 대답하셨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 바라문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 고타마의 쟁기나 호미, 작대기나 소를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라고 하십니까” 이때 밭을 갈던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시로써 스승에게 여쭈었다. 註)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불교 경전의 첫머리에 항상 시작되는 구절이다. 註) 사문은 당시 힌두교 정통 사제인 바라문의 권위와 형식주의에 반대하여 강변과 숲 속에서 자유롭게 수행하던 자유사상가적인 수행자이다. 76. “당신은 농부라고 자처하지만 우리는 일찍이 밭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당신이 밭을 간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듣도록 말씀해 주시오.“ 77.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에게 믿음은 씨앗이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쟁기와 호미, 부끄러움은 호미자루, 의지는 쟁기를 매는 줄, 생각은 호미날과 작대기입니다. 78. 몸을 근신하고 말을 조심하며, 음식을 절제하여 과식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실을 김매는 일로 삼고 있습니다. 부드러움과 온화함이 내 소를 쟁기에서 떼어놓습니다. 79. 노력은 내 소이므로 나를 절대 자유의 경지로 실어다 줍니다.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곳에 이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80. 이 밭갈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고 단 이슬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註) ‘단 이슬’은 죽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때 밭을 가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커다란 청동 그릇에 우유죽을 하나 가득 담아 스승께 올렸다. “고타마께서는 우유죽을 드십시오. 당신을 진실로 밭을 가는 분이십니다. 당신 고타마께서는 단 이슬의 열매를 가져다주는 농사를 짓기 때문입니다.” 81. “바라문이여,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나는 먹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르게 보는 사람들(눈 뜬 사람들)의 법이 아닙니다.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눈 뜬 사람들은 받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법도를 따르는 이것이 바로 눈 뜬 사람들의 생활 태도입니다. 註) ‘여기서 ’시를 읊어‘란 설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설법을 하고 보수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82. 완전에 이른 사람, 위대한 성자, 번뇌의 더러움을 다 없애고 나쁜 행위를 소멸시켜 버린사람에게는 다른 음식을 바치십시오. 그것은 마침내 공덕을 바라는 이에게 더 없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고타마시여. 이 우유죽을 저는 누구에게 드려야 합니까?” “바라문이여, 신, 악마, 범천들이 있는 세계에서 신, 인간, 사문, 바라문을 포함한 여러 중생 가운데서 완전에 이른 사람과 그의 제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이 우유죽을 먹고 소화시킬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이 우유죽일랑 생물이 없는 물 속에 버리십시오.” 그리하여 밭을 가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그 우유죽을 생물이 없는 물 속에 쏟아 버렸다. 그런데 그 우유죽을 물 속에 버리자마자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많은 거품이 끓어올랐다. 마치 온종일 뙤약볕에 쬐여 뜨거워진 호미날을 물 속에 넣었을 때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많은 거품이 이는 것과 같았다. 이때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온몸이 오싹하여 두려워 떨면서 스승 곁에 다가섰다. 그리고 스승의 두 발에 머리를 숙이며 여쭈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또는 ‘눈 있는 사람은 빛을 보리라’하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당신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도를 닦는 수행자들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저는 고타마 곁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밭을 가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부처님 곁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았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바라드바자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홀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침내 수행의 최종적인 목표를 --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나 집 없는 상태가 된 것인데 -- 이 생에서 깨달아 증명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태어나는 일은 이제 끝났다. 수행은 이미 완성되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 이제 또다시 이런 생사를 받지 않는다.’라고 깨달았다. 그리하여 바라드바자 장로는 성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05) 대장장이 춘다
83. 대장장이네 아들 춘다가 말했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성인, 눈을 뜬 어른, 진리의 주인, 집착을 떠난 분, 최고의 인간, 뛰어난 마부께 저는 묻겠습니다. 세상에는 어떤 수행자들이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註) 춘다는 부처님 당시 부유했던 금속세공인이다. 84. 스승은 대답하셨다. “춘다여, 네 종류의 수행자가 있고, 다섯 번째는 없느니라. 지금 그 물음에 답하겠다. ‘도의 승리자’ ‘도를 말하는 사람’ ‘도에 의해 사는 사람’ 그리고 ‘도를 더럽히는 자’이니라.” 85. 대장장이 춘다가 말했다. “눈을 뜬 사람은 누구를 가리켜 ‘도의 승리자’라고 부르십니까? ‘도를 말하는 사람’은 어째서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없으며, ‘도에 의해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그리고 ‘도를 더럽히는 자’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86. “의혹을 넘어서고, 고뇌를 이기고 열반을 즐기며, 탐욕을 버리고 신들을 포함한 온 세계를 이끄는 사람, 이런 사람을 ‘도의 승리자’라고 눈을 뜬 사람들은 말한다. 87.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을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알고 법을 설하고 판별하는 사람, 의혹을 버리고 동요하지 않는 성인을 수행자들 중에서 둘째로 ‘도를 말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88. 잘 설명된 진리의 말씀인 도에 의지해 살면서 스스로 절제하고, 깊이 생각해 잘못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수행자들 중에서 셋째로 ‘도에 의해 사는 사람’이라 부른다. 89. 맹세한 계율을 잘 지키는 체하지만, 고집 세고 가문을 더럽히며, 오만하고 남을 속이며, 자제력 없고 말많고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는 사람을 가리켜 ‘도를 더럽히는 자’라고 한다. 90. 학식이 있고 현명한 재가 수행자는, ‘그들 네 종류의 수행자는 다 이와 같다.’고 알아, 그들을 통찰하여 그와 같음을 보더라도 믿음이 변하지 않는다. 그는 더렵혀진 것과 더렵혀지지 않은 것, 깨끗한 이와 깨끗하지 않은 자를 혼동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06) 파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 외로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셨다. 그때 모습이 아름다운 한 신이 한 밤중이 지나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며 스승께 가가이 다가왔다. 그리고 예의를 갖춰 절한 뒤, 한 쪽에 서서 시로써 물었다. 註) ‘사밧티의 제타 숲, 외로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장자의 동산’은 지금의 인도 우타푸라데시 주 사헤트 마헤트에 있는 기원정사jetavana라는 절을 말한다. 91. “파멸하는 사람에 대해서 고타마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파멸에 이르는 문은 어떤 것입니까? 스승께 그것을 묻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92 스승은 대답하셨다. “잘되는 사람도 알아보기 쉽고, 파멸하는 사람도 알아보기 쉽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잘 되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파멸한다. 9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둘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4. “나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착안 사람들을 멀리하며,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을 좋아하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5.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둘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셋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6. “아무 때나 잠자는 버릇이 있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버릇이 있고, 분발하여 정진하지 않고 게으르며,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7.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셋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넷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8. “자기는 풍족하게 살고 있으면서 늙고 병든 부모는 돌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다.” 99.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넷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다섯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0. “바라문이나 사문 또는 다른 걸식하는 이를 거짓말로 속인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註) 사문은 바라문 이외의 수행자인데, 그들은 베다 성전을 신봉하지 않았다. 이 바라문과 사문이 그 당시 종교계의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주석서>에 의하면, 사문에게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라고 하여 필요한 것을 말하게 한 다음, 그것을 주지 않으면 속이는 일이 된다고 했다. 101.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여섯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2. “엄청나게 많은 재물과 먹을 것이 풍족한 사람이 그것을 혼자서만 독차지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일곱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4. “혈통을 뽐내고 재산과 가문을 자랑하면서 자기 친척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다.” 105.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일곱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여덟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6. “여자에게 미치고 술과 도박에 빠져, 버는 대로 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파멸의 문이다.” 107.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덟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아홉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8.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9.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아홉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열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0. “한창때가 지난 남자가 틴발 열매처럼 불룩한 젖가슴을 가진 젊은 여인을 유혹하고 그녀에게 질투하는 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1.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열한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2. “술과 고기 맛에 빠져 재물을 헤프게 쓰는 여자나 남자에게 집안 일을 맡긴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한번째 파멸의 문입니다. 스승님 열두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4. “크샤트리아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권세는 작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5. 세상에는 이와 같은 파멸의 문이 있다는 것을 잘 살펴, 현자와 성자들은 진리를 보고 행복한 세계에 이른다.“
07) 천한 사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는 사밧티의 젯타 숲, 외로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셨다. 그때 스승께서는 오전에 바리때와 가사를 걸치고 밥을 빌러 사밧티에 들어가셨다. 그때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라드바자의 집에는 성화가 켜지고 재물이 올려져 있었다. 스승은 사밧티의 거리에서 탁발하면서 그의 집에 가까이 가셨다. 불을 섬시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스승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더니 말했다. “까까중아 거기 있거라. 엉터리 사문아, 거기 멈춰라. 천한 놈아 거기 섰거라.” 이렇게 당한 스승께서는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라드바자에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도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천한 사람인지 알고나 있소?” 註) ‘까까중아 거기 있거라. 엉터리 사문아, 거기 멈춰라. 천한 놈아 거기 섰거라’는, 신성한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라드바자가 그 신성한 불이 더렵혀질까 봐 스승에게 화를 낸 것이다. “고타마여, 나는 사람을 천하게 만드는 조건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쪼록 사람을 천하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나에게 그 이치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라문이여, 그러면 주의깊게 잘 들으시오, 내가 말해주겠소.” 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스승께 대답했다. 스승은 말씀히셨다. 註) 조금 전까지 이놈 저놈 하면서 서슬이 퍼렇게 대들던 바라문이, 바로 그 자리에서 고분고분 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전이나 주석서에는 그럴만한 상황 설명이 전혀 없다. 부처님의 위력에 태도가 바뀌었거나,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 자신의 지나친 언동에 대해 이내 후회를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후회도 곧잘 하는 법이니까. 116. “화를 잘내고 원한을 쉽게 품으며, 성질이 못돼 남의 미덕을 덮어 버리고, 그릇된 생각으로 음모를 꾸미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17. 한 번 태어나는 것이거나 두 번 태어나는 것이거나, 이 세상에 있는 생물을 해체고 동정심이 없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註) ‘한 번 태어나는 것이거나 두 번 태어나는 것’이라 함은, 한 번 태어나는 것은 태에서 나는 것이고, 두 번 태어나는 것은 알에서 나는 것이다. 알은 다시 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18. 시골과 도시를 파괴하고 공격하여, 독재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19. 마을에서나 숲에서나 남의 것을 훔치려는 생각으로 이를 취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0. 빚이 있어 돌려 달라는 독촉을 받으면 ‘당신에게 언제 빚진 일이 있느냐’고 발뺌을 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1. 얼마 안되는 물건을 탐내여 행인을 살해하고 그 물건을 약탈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2. 증인으로 불려 나갔을 때 자신의 이익이나 남을 위해, 또는 재물을 위해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3. 때로는 폭력을 쓰거나, 또는 서로 눈이 맞아 친척 또는 친구의 아내와 놀아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4. 가진 재산이 풍족하면서도 늙고 병든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5. 부모, 형제, 자매, 또는 계모를 때리거나 욕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6. 상대가 이익되는 일을 물었을 때, 불리하게 가르쳐 주거나 숨긴 일을 발설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7. 나쁜 일을 하면서, 아무도 자기가 한 일을 모르기를 바라며 숨기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8. 남의 집에 갔을 때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면서, 그 쪽에서 손님으로 왔을 때는 예의로써 보답하지 않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註) 찾���온 손님을 기꺼이 맞으라는 교훈은 고대 인도에서 널리 강조되었다. 129. 바라문이나 사문 또는 걸식하는 사람을 거짓말로 속이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0.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바라문이나 사문에게 욕하며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1. 어리석음에 이끌려 변변치 않은 물건을 탐내어 사실이 아닌 일을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2.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무시하며, 스스로의 교만 때문에 비굴해진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3. 남을 괴롭히고 욕심이 많으며, 인색하고 덕이 없으면서 존경을 받으려 하며,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 그를 천한사람으로 아시오. 134. 깨달은 사람을 비방하고 출가자나 재가 수행자들을 헐뜯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5. 사실은 성자(아라한)도 아니면서 성자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전 우주의 도둑이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오. 내가 당신에게 말한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참으로 천한 사람이오. 註) 깨닫지 못했으면서 자칭 깨달았노라고 하면 가장 큰 거짓말이 되어 승단으로부터 축출을 당한다. 136.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오. 때어나면서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137. 나는 한 사람을 예로 들겠으니 이것으로 내 말뜻을 알아 들으시오. 찬다라족의 아들이며, 개백정 마탕가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있었소. 註) 찬다라족은 천민의 한 종족이다. 그들은 주로 도살업에 종사했다. 138. 그 마탕가는 얻기 어려운 최상의 지혜를 얻었소. 많은 왕족과 바라문들이 그를 섬기려 모여들었소. 139. 그는 신들의 길, 더러운 먼지를 떨어 버린 성스러운 길에 들어섰으며, 탐욕을 버리고 범천의 세계에 가게 되었소. 천한 태생인 그가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소. 140. [베다]를 외는 자의 집에서 태어나 베다의 글귀에 친숙한 바라문들도 때로 나쁜 행위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소. 141. 이와 같이 되면 현세에서는 비난을 받고 내세에는 나쁜 곳에 태어나오. 신분이 높은 태생도 그들이 나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을, 그리고 비난 받는 것을 막을 수는 없소. 註) 나쁜 곳이란 한문으로는 악취惡趣, 악도惡道라고 번역한다. 흔히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하는데 수라修羅를 추가하기도 한다. 142.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오. 날 때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오로지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라드바자는 스승께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고타마시ㅣ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또는 ‘눈이 있는 사람은 빛을 볼 것이다’하고 어듬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당신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도를 닦는 수행자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당신 고타마께서는 저희들을 재가 수행자로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08) 자비
143.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화로운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144. 만족할 줄 알고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간소하게 하며, 모든 감각이 안정되고 지혜로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 145. 현명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살 만한 비열한 행동을 결코해서는 안 된다.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146.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약하거나 강하거나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짧은 것이건 중간치건, 굵은 것이건 가는 것이건, 또는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147.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살고 있는 것이나,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148. 어느 누구도 남을 속여서는 안된다. 또 어디서나 남을 경멸하여서도 안 된다. 남을 곯려 줄 생각으로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된다. 149.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있는 것��� 대해서 한량 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150. 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자비를 행하라, 151.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신선한 경지라 부른다. 152. 온갖 빗나간 생각에 흔들리지 말고, 계율을 지키고 지혜를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은 다시는 인간의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註)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윤회가 없다는 뜻이다.
09) 설산에 사는 자
153. 칠악 야차가 말했다. “오늘은 보름, 포살 날이다. 눈부신 밤이 가까워졌다. 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스승 고타마를 만나러 가자.” 註) ‘야차’는 범어 약사yaksa에서 음역된 말인데, 본래는 신적 존재, 영적 존재를 의미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포악한 귀신의 일종으로 생각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귀신의 한 가지다. ‘포살’은 범어 우포사타uposata에서 온 말로, 한 달에 보름과 그믐 두 차례 출가 수행자들이 불전에 모여 계율을 읽고 지은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154. 설산 야차가 말했다. “그의 마음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 편히 안정되어 있을까. 그리고 좋아하는 것이나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은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을까.” 155. 칠악 야차는 대답했다. “그분의 마음은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편히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이나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그분의 생각을 스스로를 잘 자제할 수 있다. 156. 설산 야차가 말했다. “그는 주지 않는 것은 가지려 하지 않을까. 그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려 하지 않을까. 그는 게으르지 않을까. 그리고 그는 명상을 멈추고 있지 않을까.” 157. 칠악 야차는 대답했다. “그분은 주지 않는 것은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분은 산 것은 죽이려 하지 않는다. 그분은 게으르지 않다. 눈을 뜬 사람은 명상을 멈추지 않는다.” 158. 설산 야차가 말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거친 욕설을 하지 않을까. 이간질을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을까.” 159. 칠악 야차는 대답했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분은 거친 욕설을 하지 않는다. 그분은 이간질을 하지 않는다. 그분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160. 설산 야차가 말했다. “그는 욕망의 쾌락에 빠지는 일은 없을까. 그의 마음은 혼탁하지 않을까. 마음의 방황에서 벗어났을까. 그리고 모든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을까.” 161. 칠악 야차는 대답했다. “그분은 욕망의 쾌락에 빠지지 않는다. 그분의 마음은 혼탁하지 않다. 모든 방황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명확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162. 설산 야차가 말했다. “그는 밝은 지혜를 갖추고 있을까. 그의 행동은 순수할까. 그는 온갖 번뇌의 때를 소멸해 버렸을까. 그는 이제 또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까.” 163. 칠악 야차는 대답했다. 그분은 밝은 지혜를 갖추었다. 그분의 행동은 순수하다. 그분은 온갖 번뇌의 때를 소멸해 버렸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없다.“ 163 - 1. 설산 야차가 말했다. “성인의 마음은 행동과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밝은 지혜와 맑은 수행을 갖추고 있는 그를 그대가 찬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63 - 2. 성인의 마음은 행동과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밝은 지혜와 맑은 스행을 갖추고 있는 그를 그대가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64. 칠악 야차가 말했다. “성인의 마음은 행동과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자, 그럼 우리는 밝은 지헤와 맑은 수행을 가지고 있는 고타마를 만나러 가자.” 165. 설산 야차가 말했다. “그 성인의 정강이는 영양과 같이 여위고 가늘다. 그분은 지혜롭고, 많이 먹지 않으며, 탐욕스럽지 않고, 숲속에서 조용히 사색하고 있다. 자, 우리는 고타마를 만나러 가자. 註) 깨달은 사람의 정강이가 영양과 같다는 말 속에는, 그 당시 수행자의 이상적인 신체 조건이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수행자는 살이 Wu서도 안 되며, 많이 먹어서도 안 된다. 166. 욕망을 돌아보는 일 없이 마치 사자처럼, 코끼리처럼 홀로 가는 그에게 우리는 물어보자. 죽음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길을.“ 167 두 야차가 함께 말했다. “열어 보이는 분, 풀어서 밝히는 분, 모든 사물의 궁극에 이르고 원망과 두려움을 초월하여 눈을 뜬 고타마께 우리는 물어보자.” 168 설산 야차가 물었다. “세상은 무엇으로 인해 생겨났습니까. 무엇으로 인해 사랑하게 됩니까. 세상 사람들은 무엇에 집착하고 있으며, 또 무엇에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169. 스승은 대답하셨다. “설산에 사는 자여, 여섯가지 것으로 인해 세상은 생겨 났고, 여섯 가지 것으로 인해 사랑하게 되고, 사람들은 여섯 가지 것에 접착하고 있으며, 또 그 여섯 가지 것에 괴로워하고 있다.” 註) 여섯 가지는 눈, 귀, 코, 혀, 몸, 뜻意志를 가리킨다. 이를 육근六根 또는 육입六入이라고 한다. 170. “세상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그 집착이란 무엇입니까. 거기서 벗어나는 길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171. “세상에는 다섯 가지의 욕망의 대상이 있고 의지의 대상은 그 여섯번째이다. 그런 것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난다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나리라. 註)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은 형태, 소리, 향기 , 맛, 감촉 등 오관五官의 대상이다. 172. 이와 같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그대들에게 사실대로 밝혔다. 이 일을 나는 그대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173.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큰 바다를 건널 수 있겠습니까.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는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어떤 사람이 가라앉지 않습니까?” 註) 거센 흐름은 윤회의 생존을 비유한 말이다. 때로는 바다에도 비유한다. 174. “항상 계율을 몸에 지니고 지혜가 있고 마음을 한곳에 모아 안으로 살피고 염원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흐름을 능히 건널 수 있다. 175. 관능의 욕망에서 떠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고 쾌락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깊은 바다에 가라 앉지 않을 수 있다.“ 176. 설산 야차는 자기 동료들에게 말했다. “지혜가 깊고 심오한 뜻을 깨닫고 아무것도 갖지 않고 육체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천상의 길을 가는 저 위대한 선인을 보라. 註) 천상의 길은 진리의 길을 말한다. 177. 명성이 높고 심오한 뜻을 깨닫고 지혜를 가르쳐 주고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알고 거룩한 길을 가는 저 위대한 선인을 보라. 178. 오늘 우리는 눈부신 태양을 보고, 아름다운 새벽을 만나 상쾌한 기분으로 새날을 맞이했다. 거센 흐름을 건너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깨달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179. 여기 1천이나 되는 야차의 무리들은 초능력이 있고 명성도 가지고 있지만, 우리들은 모두 당신께 귀의합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더 없는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180. 우리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깨달은 분과 진리의 위대함에 예배드리면서.“
10) 알라바카 야차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알라비국 알라바카 야차의 처소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알라바카 야차가 밖에서 돌아와 스승에게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 주시오.” “좋다, 친구여.” 스승은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오시오.” “좋다, 친구여.” 스승은 들어가셨다. 또다시 알라바카 야차가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주시오.” “좋다, 친구여.” 스승은 다시 나가셨다. 또 야차가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오시오.” “좋다, 친구여.” 스승은 또 들어가셨다. 세 번째 또 알라바카 야차가 스승에게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주시오.” “좋다, 친구여.” 스승은 나가셨다. 또다시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오시오.” “좋다, 친구여.” 스승은 들어가셨다. 네 번째 또 알라바카 야차가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주시오.” 그러자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더 나가지 않겠다. 네 할 일이나 해라.” 야차가 말했다. “사문이여, 제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내게 대답을 못한다면,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당신의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붙잡아 갠지스 강 건너로 내 던지겠소.” 스승은 대답하셨다. “친구여, 신, 악마, 범천을 포함한 세계에서, 그리고 사문, 바라문, 신, 인간을 망라한 모든 살아 있는 것 중에서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내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붙잡아 갠지스 강 건너로 내던질 만한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노라. 친구여, 그대가 묻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이든 물어보라.” 알라바카 야차는 스승에게 다음의 시로써 여쭈었다. 181.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입니까. 어떠한 선행이 안락을 가져옵니까. 맛 중에서 참으로 맛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을 최상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182. 스승은 대답하셨다. “이세상에서 믿음이 으뜸가는 재산이다. 덕행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오고, 진실이야말로 맛 중의 맛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삶이라 할 수 있다.“ 183. “사람은 무엇으로 생사의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무엇으로 바다를 건너며, 무엇으로 고통을 극복합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완전히 맑고 깨끗해 질 수 있습니까?” 184. “사람은 신앙의 힘으로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 바다를 건너며, 근면으로써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지혜로서 완전히 맑고 깨끗해진다.” 185. 사람은 어떻게 해서 지혜를 얻습니까. 어떻게 해서 재물을 얻고, 어떻게 해서 명성을 떨치며, 어떻게 해서 친구를 사귑니까. 또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을 때 걱정이 없겠습니까?“ 186. “성자들이 열반을 얻는 이치를 믿고 부지런히 배우면 그 가르침을 들으려는 열망에 의해서 지혜를 얻는다. 187. 적절하게 일을하고 참을성 있게 노력하면 재물을 얻는다. 성실을 다 하면 명성을 떨치고, 베품으로써 친구를 사귄다. 188.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성실과 자재와 인내와 베품, 이 네가지 덕이 있으면, 그는 저 세상에 가서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189. 만일 이세상에 성실과 자재와 인내와 베품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널리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물어 보라.“ 190. 야차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다시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널리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세상에 이익 되는 일을 깨달았습니다. 191. 아, 깨달은 분께서 알라비에 살러 오신 것은, 저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저는 남에게 베풀면 어째서 위대한 열매가 얻어지는가를 알았습니다. 192. 저는 시골에서 시골로 도시에서 도시로 돌아다니겠습니다. 깨달은 분과 진리의 위대함에 예배드리면서.“
11) 극복
193. 걷거나 서고, 앉거나 눕고, 몸을 구부리거나 편다. 이것은 육체의 동작이다. 194. 이 몸은 뼈와 힘줄로 연결되어 있고 살과 살갗으로 덮여 있어,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다. 195. 이 몸의 내부는 위와 장과 간, 방광, 심장, 폐장, 신장, 비장으로 가득차 있다. 196. 그리고 콧물, 침, 땀, 지방, 피, 관절액, 담즙, 기름 등이 있다. 197. 또 이 몸의 아홉 구멍에서는 끊임없이 오물이 나온다. 눈에서는 눈곱, 귀에서는 귀지.“ 註) 아홉 구멍은 양쪽 눈, 양쪽 귀, 양쪽 콧구멍, 입, 항문, 생식기를 가리킨다. 198. 코에서는 콧물, 입에서는 침과 가래, 그리고 온몸에서는 땀과 때가 나온다. 199. 또 머릿속의 빈 곳은 뇌수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지에 이끌려서 이런 육신을 깨끗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200. 또 죽어서 쓰러졌을 때는 몸이 부어서 검푸르게 되고, 무덤에 버려져 친척도 그것을 돌보지 않는다. 201. 개나 여우, 늑대, 벌레들이 파먹고, 까마귀나 독수리 같은 날짐승이 쪼아먹는다. 202.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수행자는, 깨달은 사람의 말씀을 듣고 그곳을 완전히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203. ‘저 죽은 시체도 얼마 전까지는 살아 있는 내 몸뚱이와 같은 것이었다. 살아 있는 이 몸도 언젠가는 죽은 저 시체처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알고 안팍으로 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204. 이 세상에서 육체의 욕망을 떠난 지혜로운 수행자는 죽지 않고, 평화롭고 멸하지 않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 205. 인간의 이 몸은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므로, 꽃이나 향으로 은폐되어 있다. 그렇지만 온갖 오물로 가득 차 있어 여기저기서 그것이 흘러나오고 있다. 206. 이런 몸뚱이를 지니고 있으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거나 남을 무시한다면, 그는 눈먼 소경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12) 성인
207. 친한 데서 두려움이 생기고 가정 생활에서 더러운 먼지가 낀다. 그러므로 친함도 없고 가정 생활도 없다면 그것이 바로 성인의 생활이다.“ 註) 성인의 원어는 무니muni, 즉 침묵을 지키면서 수행하는 성자를 가리킨다. 석가모니는 사캬sakya족 출신의 성인이라는 뜻이다. 208. 이미 돋아난 번뇌의 싹을 잘라 버리고 새로 심지 않고 지금 생긴 번뇌를 기르지 않는다면, 이 홀로 가는 사람을 성인이라 부른다. 저 위대한 성인은 절대 평화의 경지를 본 것이다.“ 209. 모든 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을 살펴 그 원인을 헤아려 알고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기르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절대 평화의 세계를 바라본 성인이다. 그는 이미 망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미궁에 빠진 자의 무리속에 끼지 않는다. 210. 모든 집착이 일어나는 곳을 알아 아무 것도 바라지도 않고, 탐욕을 떠나 욕심이 없는 성인은 무엇을 하려고 따로 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절대 평화의 세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211.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알며, 지극히 지혜롭고 여러 가지 사물에 더럽혀지지 않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집착을 끊어 해탈한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2. 지혜의 힘이 있고 계율과 맹세를 잘 지키고, 마음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있고 명상을 즐기며, 생각이 깊고 집착에서 벗어나 거칠지 않고,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3. 홀로 걸어가고, 게으르지 않으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리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4. 남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거나 욕을 하더라도 목욕하는 강가의 기둥처럼 태연하고, 육체의 욕망을 떠나 모든 감각을 잘 다스리는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註) ‘목욕하는 강가의 기둥’은, 강이나 연못 등 사람들이 목욕을 하는 곳에 네모와 팔모의 기둥이 있어, 그 기둥에 대고 몸을 문지르며 씻는데, 이 기둥은 귀한 사람이 오거나 천한 사람이 오거나 조금도 우쭐거리지도 않고 비굴하지도 않다. 215. 베를 짜는 북처럼 곧고 편안하게 서서 모든 악한 행위를 싫어하고,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6. 스스로 자재하여 악을 행하지 않고, 젊었을 때나 중년이 되어서도 자신을 억제한다. 그는 남을 괴롭히지 않고 남한테서 괴로움을 받지도 않는다.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7. 남이 주는 것으로 생활하고, 새 음식이거나 먹던 음식이거나 또는 먹고 남은 찌꺼기를 받더라도 먹을 것을 준 사람을 칭찬하지도 않고 화를 내어 욕하지도 않는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8. 성의 접촉을 끊고 어떤 젊은 여성에게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교만하지도 태만하지도 않은, 그래서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9. 세상을 잘 알고 최고의 진리를 보고 거센 흐름과 바다를 건넌 사람, 속박을 끊어버리고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20. 출가한 이와 집에 있는 이는 거처와 생활 양식이 같지 않다. 집에 있는 이는 처자를 부양하지만, 계율을 잘 지키는 이(출가자)는 무엇을 보아도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다. 집에 있는 이는 남의 목숨을 해치고 절제하기 어렵지만, 성인은 자제하고 항상 남의 목숨을 보호한다. 221. 마치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백조를 따를 수 없는 것처럼, 집에 있는 이는 세속을 떠나 숲 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자에게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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