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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은
eliejc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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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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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원 개인전 <fare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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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원 개인전 <farewell>
2017. 09. 07. - 09. 28.
| wed - sun | 12:00 - 19:00
| 별도의 오프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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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안녕히 가세요 
글. 안성은(미디어 비평, 큐레이터) 
인터뷰. 조대원 / 안성은, 이경민 
가만히, 불러보게 되는 이름들이 있다. 귀를 쫑긋 기울이며 듣는 목소리보단 먼발치에서 흘려보내는 메아리로 남은 단어들. 지금은 부재한 대상의 이름을 떠올리다 보면, 이제는 지나버린 당시의 풍경 속에서 함께했던 소리도 사라지고 단지 장면으로만 남은 순간과 순간들만 정지된 움직임으로 포착되어 기억 한 켠에 자리 잡는다. 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이번 전시는 회화를 통해, 한없이 바스락거리며 우리 주변을 맴도는 죽음에 대한 애도이자 인사로써 관객과 조우하는 조대원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조대원 작가는 설치와 페인팅, 퍼포먼스의 방식으로 사적 사유를 공적 기억으로 스미게 하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언어화하지 못한 상태를 담은 이미지에는 그가 떠올리고 기억하는 순간들이 담겨있다. 그와 나눈 대화로 전시에 대한 소개/인사를 대신 하고자 한다. — 
안성은(이하 안) 먼저 작가소개 부탁 드립니다. 
조대원(이하 조) 저는 아주 ‘포멀한’ 질문을 하는 작가예요. 이미 남들이 다 이야기한 것을 다루는 것일지도 모르는. ‘왜 사냐’라고 항상 묻는 게 저의 작업인 것 같아요. 살면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왜 사는지에 대해서 ‘이건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고민하고, 답을 구하기 위한 풀이 과정으로써의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경민(이하 이) ‘나는 포멀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가령 어떤 질문들일까요? 그리고 왜 그것을 ‘포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조 너무 가까이 있거나 당연해서 사람들이 질문하지 않는 것들 있잖아요. 예를 들어 ‘나는 왜 사나’라고 했을 때, ‘넌 뭐 그런 질문을 해’ 하는 그런 질문들이요. 아버지께 대학교 3학년 즈음에, ‘아버지는 왜 사세요?’라는 질문을 드려본 있어요. 아버지가 보시던 신문을 탁 내려놓으시며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너는 선문답을 하냐’라고 하시더라고요. 어쩌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라는 성철스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은 해요. 존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대로 있음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것들이 계속 궁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때 사람들에게 ‘너는 왜 사냐’라는 걸 많이 물어보기도 했었고요.
안 그럼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있어, 전시 혹은 개별 작업을 통해 내가 다시금 묻고 싶은 질문이 있나요? 나 스스로에게일 수도 있고 타인에게 일 수도있고.
조 최근 몇 년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집중하며 작업을 해왔어요. 지난번 개인전에서도 그랬고요. 그래서 이번 전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고민과 질문에 대해 ‘이제 이만하면 됐나?’ 라고 조용히 돌아보게 하는 것 같아요. 여전히 ‘왜 사느냐’라는 대 전제에 대해, 이를 대답하기 위한 과정 중에 있지만요.
평소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체감하기 쉽지 않죠. 그런데 2년 전쯤, 그것이 굉장히 가깝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있었고, 죽음을 계속 바라보게 되는 상황이 많았어요. 소중한 대상들이 연이어 죽음을 맞이했던 때였거든요. ‘인간은 왜 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할아버지의 병간호와 수발을 들면서, 그 시간들이 저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죽음을 마주하는 데 있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반대로 담담함, 익숙함,혹은 의연함 같은 관점과는 달리, ‘얼마나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가’에 대한 생각같은 것이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슬프고, 겁나고, 다리가 후들후들하지요.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고. 연이은 죽음을 겪으며 제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죽음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였어요. ‘나는 이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죠.
안 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작업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것이라면, 이 각각의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고, 또 담아지길 원했나요? 식물을 선택한 계기가 있으셨는지, 작업에 대한 소개 부탁 드릴게요.
조 예전에 ‘가을방학’이라는 밴드에서 제안을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키우던,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 마치 주인을 따라가는 것처럼 결국은 죽어갔던 식물들을 그렸고요. 그때부터 시든 식물을 그리게 되었어요. 사실 죽은 식물을 그림으로 그리다 보면 대게 하나의 형태로 귀결돼요. 식물은 죽으면 다 비슷비슷하게 되거든요. 저는 철저히, 제 주위에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애먼 사회 문제를 끌어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거기서부터 출발했지요.
안 지금 전시에서 소개되는 식물들의 경우 내가 ��억하고 있는/혹은 어디에서 수집한 식물에 대한 이미지이지만, 각각 죽음과 관련된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시든 식물을 그리면서 내가 떠올리는 죽음의 인상들이 이 식물을 통해 구현되는 형태가 맞나요?
조 맞아요. 가령 〈화장〉(2017)의 경우 할아버지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쓸어 담는 빗자루질을 떠올리며 그렸어요. 죽음과 관련된 순간들을 작업에 담아둔거죠. 식물의 경우, 죽어가는 것들은 밖에 내놓는 경우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채집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구글링해서도 찾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 그런 것은 안 와 닿았어요. 그건 그냥 정말 ‘죽은 식물’이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안 내가, 혹은 누군가 마주한 죽음들을 담길 원했나요?
조 비슷해요.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 죽거나/죽어가는 식물들 사진을 제보 받았고 그들이 실제로 찍어서 보내준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어요. 검색을 통해 받은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요. 
이 저도 작업 리서치를 할 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뭔가 표피적인 느낌, 표면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단순히 구글링했을 때의 느낌은.
조 네, 맞아요. 표피적인 느낌. 물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들도 같은 과정을 거쳐 올라온 것이긴 할 텐데, 뭔가 거세된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드로잉을 할 때,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조 고민을 되게 많이 해요. 감상에만 빠지게 되면, 날 것 그대로의 감정만 투영이 되서 조형적으로 예쁘지 않아요. 제 생각에 그림은, 감정과 감각이 연동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감정 때문에 감각이 무시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서로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감정 몰입만 하게 되면 그 밸런스가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 작업들은 자유롭게 했어요. 완전 몰입하기도 하고, 가볍게 그릴 때도 있었고. 오히려 가볍게 그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요. 감정에 몰입해서 그린 작업은 못생겼더라고요. (하하하) 저한테는 다 의미가 있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그 둘의 밸런스를 잡으려고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드로잉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저의 경우, 계속해서 몰입하려고 집중한다기보다 어떤 상황을 인지한 다음 붓질을 하면, 손이 가요. 손이 간다는 말은 뇌는 멈추고 본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상태에 가깝고요.
이 이거 약간 자동기술법인가요? (웃음)
조 상황에 취해 그리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여기서 구체적이라는 것은 감정에 가까워요), 이를 인지하여 그림을 그리죠. 대체로 빠르게 그리려고 해요. 이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 올해 개인전 〈시간들(SCATTERED TIME)〉(2017)을 했어요. 그리고 그 개인전에서 다루었던 주제가 지금 전시의 연장 선상에 있단 말이죠. 그런데 매체나 방식이 확연히 달라요. 건너 뛰어온 건 아니지만, 이 방식과 주제를 고른 이유와 차이점이 있나요?
조 아까 첫 번째 질문 ‘본인은 어떤 작가인가요’와 겹치기도 하는데, 저에게 이번 전시는 죽음에 대한 목도, 혹은 수양의 단계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마치 박찬욱감독의 복수 1, 2, 3부작처럼(하하). 제 작업은 저 자신에게로 굽어 있어요.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는 순간에 있어서 관객은 저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리기를 마치고 나서는 다르죠. ‘나의 작업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볼까?’ 생각도 많이 하구요.
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가 중요하단 말인가요?
조 네, 그릴 때는. 그리고 난 후에 작업이 태어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궁금해하는 거죠.
안 저는 글쓰기 자체에서 되게 위안을 얻는 편이에요. 해소나 몰입을 위해서일 때도 있고. 글을 통해 내가 자유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글을 쓰는 내가 중요한 거죠. 이런 인터뷰도 다른 방식의 글쓰기와 같아요. ��실 글을 쓴다는 건 괴로움에 가까워요. 그런데 몰입의 과정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나를 보는 과정이 되는 것 같아요. 글쓰기를 마치면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까?’ 궁금하지만, 글 쓰는 당시에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에요. 그 글을 쓰는 바로 나에게 집중하는 것. 마치 그런 느낌이네요.
조 네, 정확해요. 애초에 내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 계속 불거져 나오는 주제들에 대해 수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 걸 보면 나는 그림을, 작업을 해야 하는 인간이구나, 싶죠. 아울러 죽음에 대하여 주제적 면에서는 연장선에 있지만 지난 전시는 좀 더 응어리진 감정 상태를 작업으로 표현했었어요. 응어리져 있던 기분들이 과거 그려둔 설치 드로잉과 딱 맞아떨어지면서 만들어졌었죠. 이전에 그려둔 설치 드로잉 중 ‘이건 이러이러하게 하면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만 하고 내용이 없던 것들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내용을 만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안 형식이 내용을 만났나요?(하하)
조 네, 그리고 경험을 만난거죠. 그게 딱 맞아 떨어지면서 ‘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 전시에서도 작업 중 두 점 정도는 과거에 있었던 드로잉이에요. 6–7년 전의 드로잉들을. 우연찮게 잘 맞은 작업이기도 해요. 우연히, 운이 좋아서. 지난번 소개했던 작업 중 하나는, 아이디어 드로잉 단계에서는 원재료가 스컬피(Sculpey) 였어요. 그런데 전시를 하며 유토(油土,plasticine)로 변경하게 되었죠. 남들은 재료 하나 바꿨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컸어요. 저는 그 재료(유토)를 만지며 많은 위안을 받았거든요. 위안이라기보다는, 죽음 앞에서 뭔가를 살리기 위해서 빌고 빌고 또 빌다가 놔 버렸던 상황이 제게 있었거든요. 일종의 탈진과 같아서, 더 이상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못하는 상태요. 유토는 정말 사후강직 상태의 살과 느낌이 거의 비슷해요. 처음 뜯어서 만졌을 때의 단단한 느낌이 특히 그래요. 그런데 유토를 계속 만지잖아요? 마사지하듯이 계속 만져주면 말랑말랑해져요.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원기둥을 만들었죠. 저는 그걸 만들면서 절실히 살리고 싶었던, 살리려고 어떻게든 주무르고 만졌던 대상과 죽음의 기억들을 떠올렸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그런 의미에서 재료의 물성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조 네, 특히 지난 개인전 때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이 스컬피나 흙은 끝이 있는 재료잖아요, 그런데 유토는 그러지 않으니까. 끝이 나지 않는 느낌이 있네요.
조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유토 재료설명을 보면, 작업 마무리 단계에서 베이비 오일을 섞어 바르면 더 마무리가 잘된다는 말이 쓰여있어요. 성서에서 기름은 굉장히 신성한 물질로 표현되잖아요. 약간 주술적인 생각일 수 있는데, 저는 그런 것마저 의미 있게 느껴지더라고요. 기분이 되게 묘했어요. 살리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던 것이, 재료를 통해 살아났다는 것. 베이비 오일은 사실 기능적 재료일 뿐인데, 저한테는 그렇게 생각되더라고요.
안 두 가지 생각이 나네요. 먼저 성경 나오는 향유가 생각나요. 예수를 섬기던 마리아라는 여자가, 당시에 금보다 귀하게 여겨졌던 향유를 예수의 발아래 부어요. 그만큼 당신을 섬기고 따른다는 의미였겠죠,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는 그 행위의 의미는. 또 하나는 성서와는 별개로 장사 지낼 때 시신을 닦을 때 쓰이는 기름이 생각이 나네요.
조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기름이 사용되는 재료를 다룬다는 것에 대해서요. 지난 전시에서는 사실 이런 것들이 잘 드러나진 않았어요. 그게 아쉬웠거든요.재료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인지 알았을지도 몰라요. ‘아는 사람은 유추를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지난 전시에 그런 것들에 대한 단서를 너무 남기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제목에 ‘간병’이라는 말을 썼었어도 알았을 텐데.
안 주제에 대해 일부로 가리고 싶었던 건가요?
조 처음에는 그랬어요. 가리고 싶다기보단, 너무 드러내는 게 촌극 같기도 하고 처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왠지 들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너무 뻔뻔한가, 하는. 너무 드러내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안 지난 개인전에서는 촉각적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공감각적이기도 한 설치가 주였어요. 매체를 회화로 진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이 전시에 소개된 회화가 마치 설치 작업처럼, 순간에 대한 움직임을 기록한 과정으로 느껴졌어요. 특히 전시 제목을 보면 더욱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작업과 주제, 전시명 모두가 하나로 엉켜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난 전시가 마치 옛날에 임금이 죽으면 혼이 돌아오라고 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면, 이번 전시는 잘 장사 지내서 마음의 짐까지 다독여서 보내려는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동일 선상이라고 하지만, 같은 사건 안에서 이 작가가 여러 번 매체를 바꿔가면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조 시든 식물들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저에게는 죽음을 다루는 것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직접적이기 때문에 이전 개인전에서는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싶었고요. 다른 면에서 보자면, 조금 지쳤던 것 같아요. 남들의 눈에서, 그리고 미술적 맥락에서의 내 작업에 대해서도요. 미술적 어법과 현대 페인팅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하는 행위가 현대적이지 못하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지금 잘 나가는 평면들을 보면, 더 그래요. 제가 구식이라 그런진 모르겠지만.
이 전시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오히려 지난 전시가 더 정돈된 형태였던 것 같아요 마치 눈물을 삼키는 느낌이랄까. 이번 전시는 눈물을 펑펑 터트리는 것 같아요. 떠나고 남은 흔적을 발견하고 눈물을 팡 터트리는. 아무래도, 혹은 희한하게 평면이라는 매체에서 감정선이 더 잘 드러나서 그런지 그렇더라고요. 
조 네 그렇죠,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차라리 드러나면 더 담백해질 거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가 봐요.
안 작가인 ‘나’는 나를 관통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작품을 통해 사회적으로 제가 경험한 다른 죽음들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 작가가 다루는 죽음의 모습이, 어쩌면 이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와 직결이 된다고 여겨졌거든요. 죽는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떤 면에서는 회피하거나 마치 천 년을 살 것처럼 살잖아요, 사람들이. 그래서 오히려 이 작업을 보며, 사회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해 결국은 ‘나’의 고찰과 고민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서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작업의 동기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러한 궁금증이 해소되긴 했는데, 맞나요?
조 답을 다 말해주셨는데요?(하하) 전시를 준비하며 죽음에 대한 것을 집중해서 더 다루려고 했어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사회가 만들어내는 죽음의 ‘상’을 생각하기도 했고요. 죽음을 생각하면 피곤한 장례의식과 절차, 결국 돈 문제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죠. 거기서 사실 진짜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죽었다’ 인데. 막상 사실 유족들은 그 감정만으로도 힘든 상황인데 온갖 신경은 장례식,제사상, 손님 대접에 신경이 가 있게 돼요. 이러한 형식들이 일부로 슬픔을 덜 느끼게 한다는 생각도 하지만 너무 회피하게끔 만든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는 죽음을 차분하게 봤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고요. 죽음에 대해 우리가 받아드릴 때, 이것조차도 빨리빨리 넘어가려 한다는 생각이요.
안 어느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출산에서 아이가 사산되면 산모는 아이의 죽음을 몸으로 느끼지만, 사실은 아이의 죽음에 대해 곧바로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요. 아이의 시신은 어떻게 할 건 지부터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밀려오는 죽음의 절차에 대한 서류들. 보호자인 부모가 결정해야 하는 것들. 충분히 애도할 수 없이 과정적으로 접하게 되는 아픔에 대한 것들. 그게 장례절차에 대한 이야기와 맞물려 생각났��요.
조 과거 정통 장례식을 지낼 때 꽃상여를 매잖아요. 저는 그 과정이 수고롭겠지만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죽음을 더 많이 보았고,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과거에는 수명이 짧았으니 굉장히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겠죠. 여러 사람이 상여를 메고 곡을 부르면서 그 죽음의 가운데 함께 있었을 테고. 저는 과거와 현재로 넘어오면서 컴팩트하게 되지 말아야 하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해요. 죽음의 절차가 그런 것 같고요. 
안 두 가지 생각과 하나의 질문이 생각나네요. 하나는 인도에서 마주한 죽음이에요. 갠지스에서는 밤마다 힌두교식 예배를 드리는데, 그 강에 꽃과 향초를 띄워요. 갠지스는 화장한 시체를 흘러보내고 목욕도 하며 삶과 죽음의 순간이 늘 함께 있는 공간이죠. 목욕과 빨래를 하는 강가 옆엔 곧이어 화장터가 있어요. 그곳 사람들은 늘 그 광경을 보는 거에요. 힌두교에서는 사후와 지금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갠지스에 띄우는 꽃은 현생의 나와 내 주변의 떠나갈 사람들을 위함이기도 하죠. 또 다른 하나는 제가 마주한 첫 죽음에 대한 기억이에요. 저는 본가 시골에서 꽃상여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작은 마을에선 누군가 돌아가시면 젊은 마을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선산을 올랐어요. 죽음 자체는 너무 슬프지만, 어떤 면에서는 만연해 있어서 우리도 받아드려야 한다는 공동체적 분위기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슬픔에만 빠져있는 게 아니라 다들 위해주고 함께하는 분위기? 그러면서 떠올렸던 질문은 경민 씨가 했던 질문과 닿아있는 데, 드로잉의 과정에 대한 질문이에 요. 작업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한 번 더 듣고 싶네요.
조 일단 식물들을 보죠. 몇 가지 특징들을 봐요. 잎의 형태들 같은 것. 이에 대한 복잡한 배열을 보진 않아요. 사실 식물이 자라는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이 있으니까요. 그런 도식화된 방법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풀마다 자라는 방법도 있기 때문에) 형태들을 좀 더 관찰해요. 배열을 완벽하게 숙지하진 않아요. 다만 기억에 담아요. 작은 우표사이즈로 그려보면서 선을 익히기도 하고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경우도 있어요. 거기서 어떻게 그릴 것인지가 생각나서 그려지기도 해요.
안 앞으로는 어떤 것을 하고 싶나요? 
조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우선 페인팅을 말하자면 좀 더 다양한 걸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식물을 계속 그리다 보니 증명사진을 계속 찍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운드를 다루는 설치 실험도 해보고 싶어요.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주파수가 다르다고 하잖아요. 빈 공간에 고/저주파의 다양한 소리들을 채워서 사운드를 이용해 공간 드로잉을 해보고 싶어요.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를 들어볼 수 있게 하는,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게 듣게 되는 공간작업이요.
안 이상한 질문인데. 설치랑 드로잉 중 뭐가 더 재미있어요?
조 둘 다 재미있는데,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그림이 늘 아쉬워요. 그림은 정말 충분한 여유와 시간이 있어야 해요. 꾸준한 시간 동안 손으로 계속 움직여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죠. 어떻게 보면 설치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형태잖아요. 그런데 그림은 손을 통해서 구현해야 하니까. 드로잉의 완성 과정은 빠른 편이지만 그 완성을, 놓치지 않고 많이 하고 싶은 것 같아요. 
안 잘 그린다는 게 뭘까요. 사람마다 다를텐데
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기준이 명확해요. 아까 말한 것처럼 내 감정을 충분히 이야기하면서도 밸런스가 잘 맞는 것. 노래 부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감정이 너무 격해지면 노래를 잘 못 하잖아요, 울음을 삼키느라. 좋은 노래는 감정과 표현이 잘 어우러지는 상태인 것처럼 잘 그려진 드로잉도 그렇다고 봐요.
안 이번 작업들은 밸런스 맞추기가 잘 된 작업인가요? 아니면 울먹울먹한 상태?
조 다 다른 것 같아요. 울먹울먹하기도 하고 울음을 참고 있는 것도 있고요.
안 경민씨와 제가 좋아했던 〈화장〉은 밸런스가 잘 맞춰진 작업인가요?
조 네, 저는 그 작업은 정말 50:50의 비율로 균형이 잘 맞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밸런스가 잘 잡혔다는 건, 나와 외부의 것을 만나게 하는 것 같아요. 이번 작업은 많이 울면서, 웃으면서 그리기도 했고, 동시에 덤덤하게 그리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후회가 없네요.
안 ‘울먹울먹’이라는 표현이 이번 전시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애틋하네요. 이상하게 짠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럼 식물을 떠안고 있는 손을 표현한 〈뿌리가 썩은 다육식물〉(2017)은 어떤가요?
조 그 작업은 툭 던지듯 그려진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재치라고나 할까요. 그리면서 장례식 생각을 했어요. 할머니 장례식 때 잘 모르는 친척 중 한 분이 와서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어요,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였구요. 몇 번 만나지 않았던, 생판 모르는 사람에 가까운 사람이 그 노래를 불러주는데, 눈물이 나서 못 듣겠더라구요. 위로를 나누는 몇 안 되는 방식으로 내 등을 쓸어주던 누군가의 손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안 손이 많은 걸 전하는 것 같네요.
조 그리고 마지막을 앞둔 사람에게 잡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그저 손을 잡아줄 뿐이죠.
안 우리는 왜 이토록 죽음 앞에서 숙연해질까요,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 저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사회적 죽음에 관해서도. 죽음에 대해, 사회적으로 케어해 줄 수 있는 애도의 기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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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원 개인전 <farewell>
서문 :  안성은
진행 : 이경민 
디자인 : 진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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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가변크기_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2길 11 www.dimensionvaria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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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xedmeat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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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ewell”, 2017
안녕히, 안녕히 가세요
글. 안성은(아트센터 나비)
인터뷰. 조대원 / 안성은, 이경민
가만히, 불러보게 되는 이름들이 있다. 귀를 쫑긋 기울이며 듣는 목소리보단 먼발치에서 흘려보내는 메아리로 남은 단어들. 지금은 부재한 대상의 이름을 떠올리다 보면, 이제는 지나버린 당시의 풍경 속에서 함께했던 소리도 사라지고 단지 장면으로만 남은 순간과 순간들만 정지된 움직임으로 포착되어 기억 한 켠에 자리 잡는다. 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이번 전시는 회화를 통해, 한없이 바스락거리며 우리 주변을 맴도는 죽음에 대한 애도이자 인사로써 관객과 조우하는 조대원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조대원 작가는 설치와 페인팅, 퍼포먼스의 방식으로 사적 사유를 공적 기억으로 스미게 하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언어화하지 못한 상태를 담은 이미지에는 그가 떠올리고 기억하는 순간들이 담겨있다. 그와 나눈 대화로 전시에 대한 소개/인사를 대신 하고자 한다.
안성은(이하 안) 먼저 작가소개 부탁 드립니다.
조대원(이하 조) 저는 아주 ‘포멀한’ 질문을 하는 작가예요. 이미 남들이 다 이야기한 것을 다루는 것일지도 모르는. ‘왜 사냐’라고 항상 묻는 게 저의 작업인 것 같아요. 살면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왜 사는지에 대해서 ‘이건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고민하고, 답을 구하기 위한 풀이 과정으로써의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경민(이하 이) ‘나는 포멀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가령 어떤 질문들일까요? 그리고 왜 그것을 ‘포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조 너무 가까이 있거나 당연해서 사람들이 질문하지 않는 것들 있잖아요. 예를 들어 ‘나는 왜 사나’라고 했을 때, ‘넌 뭐 그런 질문을 해’ 하는 그런 질문들이요. 아버지께 대학교 3학년 즈음에, ‘아버지는 왜 사세요?’라는 질문을 드려본 있어요. 아버지가 보시던 신문을 탁 내려놓으시며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너는 선문답을 하냐’라고 하시더라고요. 어쩌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라는 성철스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은 해요. 존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대로 있음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것들이 계속 궁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때 사람들에게 ‘너는 왜 사냐’라는 걸 많이 물어보기도 했었고요.
안 그럼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있어, 전시 혹은 개별 작업을 통해 내가 다시금 묻고 싶은 질문이 있나요? 나 스스로에게일 수도 있고 타인에게 일 수도있고.
조 최근 몇 년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집중하며 작업을 해왔어요. 지난번 개인전에서도 그랬고요. 그래서 이번 전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고민과 질문에 대해 ‘이제 이만하면 됐나?’ 라고 조용히 돌아보게 하는 것 같아요. 여전히 ‘왜 사느냐’라는 대 전제에 대해, 이를 대답하기 위한 과정 중에 있지만요.
평소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체감하기 쉽지 않죠. 그런데 2년 전쯤, 그것이 굉장히 가깝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있었고, 죽음을 계속 바라보게 되는 상황이 많았어요. 소중한 대상들이 연이어 죽음을 맞이했던 때였거든요. ‘인간은 왜 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할아버지의 병간호와 수발을 들면서, 그 시간들이 저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죽음을 마주하는 데 있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반대로 담담함, 익숙함,혹은 의연함 같은 관점과는 달리, ‘얼마나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가’에 대한 생각같은 것이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슬프고, 겁나고, 다리가 후들후들하지요.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고. 연이은 죽음을 겪으며 제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죽음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였어요. ‘나는 이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죠.
안 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작업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것이라면, 이 각각의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고, 또 담아지길 원했나요? 식물을 선택한 계기가 있으셨는지, 작업에 대한 소개 부탁 드릴게요.
조 예전에 ‘가을방학’이라는 밴드에서 제안을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키우던,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 마치 주인을 따라가는 것처럼 결국은 죽어갔던 식물들을 그렸고요. 그때부터 시든 식물을 그리게 되었어요. 사실 죽은 식물을 그림으로 그리다 보면 대게 하나의 형태로 귀결돼요. 식물은 죽으면 다 비슷비슷하게 되거든요. 저는 철저히, 제 주위에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애먼 사회 문제를 끌어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거기서부터 출발했지요.
안 지금 전시에서 소개되는 식물들의 경우 내가 기억하고 있는/혹은 어디에서 수집한 식물에 대한 이미지이지만, 각각 죽음과 관련된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시든 식물을 그리면서 내가 떠올리는 죽음의 인상들이 이 식물을 통해 구현되는 형태가 맞나요?
조 맞아요. 가령 〈화장〉(2017)의 경우 할아버지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쓸어 담는 빗자루질을 떠올리며 그렸어요. 죽음과 관련된 순간들을 작업에 담아둔거죠. 식물의 경우, 죽어가는 것들은 밖에 내놓는 경우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채집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구글링해서도 찾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 그런 것은 안 와 닿았어요. 그건 그냥 정말 ‘죽은 식물’이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안 내가, 혹은 누군가 마주한 죽음들을 담길 원했나요?
조 비슷해요.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 죽거나/죽어가는 식물들 사진을 제보 받았고 그들이 실제로 찍어서 보내준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어요. 검색을 통해 받은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요.
이 저도 작업 리서치를 할 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뭔가 표피적인 느낌, 표면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단순히 구글링했을 때의 느낌은.
조 네, 맞아요. 표피적인 느낌. 물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들도 같은 과정을 거쳐 올라온 것이긴 할 텐데, 뭔가 거세된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드로잉을 할 때,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조 고민을 되게 많이 해요. 감상에만 빠지게 되면, 날 것 그대로의 감정만 투영이 되서 조형적으로 예쁘지 않아요. 제 생각에 그림은, 감정과 감각이 연동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감정 때문에 감각이 무시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서로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감정 몰입만 하게 되면 그 밸런스가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 작업들은 자유롭게 했어요. 완전 몰입하기도 하고, 가볍게 그릴 때도 있었고. 오히려 가볍게 그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요. 감정에 몰입해서 그린 작업은 못생겼더라고요. (하하하) 저한테는 다 의미가 있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그 둘의 밸런스를 잡으려고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드로잉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저의 경우, 계속해서 몰입하려고 집중한다기보다 어떤 상황을 인지한 다음 붓질을 하면, 손이 가요. 손이 간다는 말은 뇌는 멈추고 본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상태에 가깝고요.
이 이거 약간 자동기술법인가요? (웃음)
조 상황에 취해 그리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여기서 구체적이라는 것은 감정에 가까워요), 이를 인지하여 그림을 그리죠. 대체로 빠르게 그리려고 해요. 이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 올해 개인전 〈시간들(SCATTERED TIME)〉(2017)을 했어요. 그리고 그 개인전에서 다루었던 주제가 지금 전시의 연장 선상에 있단 말이죠. 그런데 매체나 방식이 확연히 달라요. 건너 뛰어온 건 아니지만, 이 방식과 주제를 고른 이유와 차이점이 있나요?
조 아까 첫 번째 질문 ‘본인은 어떤 작가인가요’와 겹치기도 하는데, 저에게 이번 전시는 죽음에 대한 목도, 혹은 수양의 단계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마치 박찬욱감독의 복수 1, 2, 3부작처럼(하하). 제 작업은 저 자신에게로 굽어 있어요.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는 순간에 있어서 관객은 저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리기를 마치고 나서는 다르죠. ‘나의 작업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볼까?’ 생각도 많이 하구요.
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가 중요하단 말인가요?
조 네, 그릴 때는. 그리고 난 후에 작업이 태어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궁금해하는 거죠.
안 저는 글쓰기 자체에서 되게 위안을 얻는 편이에요. 해소나 몰입을 위해서일 때도 있고. 글을 통해 내가 자유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글을 쓰는 내가 중요한 거죠. 이런 인터뷰도 다른 방식의 글쓰기와 같���요. 사실 글을 쓴다는 건 괴로움에 가까워요. 그런데 몰입의 과정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나를 보는 과정이 되는 것 같아요. 글쓰기를 마치면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까?’ 궁금하지만, 글 쓰는 당시에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에요. 그 글을 쓰는 바로 나에게 집중하는 것. 마치 그런 느낌이네요.
조 네, 정확해요. 애초에 내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 계속 불거져 나오는 주제들에 대해 수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 걸 보면 나는 그림을, 작업을 해야 하는 인간이구나, 싶죠. 아울러 죽음에 대하여 주제적 면에서는 연장선에 있지만 지난 전시는 좀 더 응어리진 감정 상태를 작업으로 표현했었어요. 응어리져 있던 기분들이 과거 그려둔 설치 드로잉과 딱 맞아떨어지면서 만들어졌었죠. 이전에 그려둔 설치 드로잉 중 ‘이건 이러이러하게 하면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만 하고 내용이 없던 것들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내용을 만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안 형식이 내용을 만났나요?(하하)
조 네, 그리고 경험을 만난거죠. 그게 딱 맞아 떨어지면서 ‘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 전시에서도 작업 중 두 점 정도는 과거에 있었던 드로잉이에요. 6–7년 전의 드로잉들을. 우연찮게 잘 맞은 작업이기도 해요. 우연히, 운이 좋아서. 지난번 소개했던 작업 중 하나는, 아이디어 드로잉 단계에서는 원재료가 스컬피(Sculpey) 였어요. 그런데 전시를 하며 유토(油土,plasticine)로 변경하게 되었죠. 남들은 재료 하나 바꿨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컸어요. 저는 그 재료(유토)를 만지며 많은 위안을 받았거든요. 위안이라기보다는, 죽음 앞에서 뭔가를 살리기 위해서 빌고 빌고 또 빌다가 놔 버렸던 상황이 제게 있었거든요. 일종의 탈진과 같아서, 더 이상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못하는 상태요. 유토는 정말 사후강직 상태의 살과 느낌이 거의 비슷해요. 처음 뜯어서 만졌을 때의 단단한 느낌이 특히 그래요. 그런데 유토를 계속 만지잖아요? 마사지하듯이 계속 만져주면 말랑말랑해져요.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원기둥을 만들었죠. 저는 그걸 만들면서 절실히 살리고 싶었던, 살리려고 어떻게든 주무르고 만졌던 대상과 죽음의 기억들을 떠올렸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그런 의미에서 재료의 물성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조 네, 특히 지난 개인전 때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이 스컬피나 흙은 끝이 있는 재료잖아요, 그런데 유토는 그러지 않으니까. 끝이 나지 않는 느낌이 있네요.
조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유토 재료설명을 보면, 작업 마무리 단계에서 베이비 오일을 섞어 바르면 더 마무리가 잘된다는 말이 쓰여있어요. 성서에서 기름은 굉장히 신성한 물질로 표현되잖아요. 약간 주술적인 생각일 수 있는데, 저는 그런 것마저 의미 있게 느껴지더라고요. 기분이 되게 묘했어요. 살리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던 것이, 재료를 통해 살아났다는 것. 베이비 오일은 사실 기능적 재료일 뿐인데, 저한테는 그렇게 생각되더라고요.
안 두 가지 생각이 나네요. 먼저 성경 나오는 향유가 생각나요. 예수를 섬기던 마리아라는 여자가, 당시에 금보다 귀하게 여겨졌던 향유를 예수의 발아래 부어요. 그만큼 당신을 섬기고 따른다는 의미였겠죠,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는 그 행위의 의미는. 또 하나는 성서와는 별개로 장사 지낼 때 시신을 닦을 때 쓰이는 기름이 생각이 나네요.
조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기름이 사용되는 재료를 다룬다는 것에 대해서요. 지난 전시에서는 사실 이런 것들이 잘 드러나진 않았어요. 그게 아쉬웠거든요.재료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인지 알았을지도 몰라요. ‘아는 사람은 유추를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지난 전시에 그런 것들에 대한 단서를 너무 남기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제목에 ‘간병’이라는 말을 썼었어도 알았을 텐데.
안 주제에 대해 일부로 가리고 싶었던 건가요?
조 처음에는 그랬어요. 가리고 싶다기보단, 너무 드러내는 게 촌극 같기도 하고 처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왠지 들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너무 뻔뻔한가, 하는. 너무 드러내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안 지난 개인전에서는 촉각적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공감각적이기도 한 설치가 주였어요. 매체를 회화로 진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이 전시에 소개된 회화가 마치 설치 작업처럼, 순간에 대한 움직임을 기록한 과정으로 느껴졌어요. 특히 전시 제목을 보면 더욱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작업과 주제, 전시명 모두가 하나로 엉켜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난 전시가 마치 옛날에 임금이 죽으면 혼이 돌아오라고 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면, 이번 전시는 잘 장사 지내서 마음의 짐까지 다독여서 보내려는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동일 선상이라고 하지만, 같은 사건 안에서 이 작가가 여러 번 매체를 바꿔가면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조 시든 식물들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저에게는 죽음을 다루는 것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직접적이기 때문에 이전 개인전에서는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싶었고요. 다른 면에서 보자면, 조금 지쳤던 것 같아요. 남들의 눈에서, 그리고 미술적 맥락에서의 내 작업에 대해서도요. 미술적 어법과 현대 페인팅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하는 행위가 현대적이지 못하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지금 잘 나가는 평면들을 보면, 더 그래요. 제가 구식이라 그런진 모르겠지만.
이 전시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오히려 지난 전시가 더 정돈된 형태였던 것 같아요 마치 눈물을 삼키는 느낌이랄까. 이번 전시는 눈물을 펑펑 터트리는 것 같아요. 떠나고 남은 흔적을 발견하고 눈물을 팡 터트리는. 아무래도, 혹은 희한하게 평면이라는 매체에서 감정선이 더 잘 드러나서 그런지 그렇더라고요.
조 네 그렇죠,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차라리 드러나면 더 담백해질 거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가 봐요.
안 작가인 ‘나’는 나를 관통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작품을 통해 사회적으로 제가 경험한 다른 죽음들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 작가가 다루는 죽음의 모습이, 어쩌면 이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와 직결이 된다고 여겨졌거든요. 죽는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떤 면에서는 회피하거나 마치 천 년을 살 것처럼 살잖아요, 사람들이. 그래서 오히려 이 작업을 보며, 사회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해 결국은 ‘나’의 고찰과 고민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서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작업의 동기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러한 궁금증이 해소되긴 했는데, 맞나요?
조 답을 다 말해주셨는데요?(하하) 전시를 준비하며 죽음에 대한 것을 집중해서 더 다루려고 했어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사회가 만들어내는 죽음의 ‘상’을 생각하기도 했고요. 죽음을 생각하면 피곤한 장례의식과 절차, 결국 돈 문제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죠. 거기서 사실 진짜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죽었다’ 인데. 막상 사실 유족들은 그 감정만으로도 힘든 상황인데 온갖 신경은 장례식,제사상, 손님 대접에 신경이 가 있게 돼요. 이러한 형식들이 일부로 슬픔을 덜 느끼게 한다는 생각도 하지만 너무 회피하게끔 만든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는 죽음을 차분하게 봤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고요. 죽음에 대해 우리가 받아드릴 때, 이것조차도 빨리빨리 넘어가려 한다는 생각이요.
안 어느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출산에서 아이가 사산되면 산모는 아이의 죽음을 몸으로 느끼지만, 사실은 아이의 죽음에 대해 곧바로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요. 아이의 시신은 어떻게 할 건 지부터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밀려오는 죽음의 절차에 대한 ���류들. 보호자인 부모가 결정해야 하는 것들. 충분히 애도할 수 없이 과정적으로 접하게 되는 아픔에 대한 것들. 그게 장례절차에 대한 이야기와 맞물려 생각났어요.
조 과거 정통 장례식을 지낼 때 꽃상여를 매잖아요. 저는 그 과정이 수고롭겠지만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죽음을 더 많이 보았고,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과거에는 수명이 짧았으니 굉장히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겠죠. 여러 사람이 상여를 매고 곡을 부르면서 그 죽음의 가운데 함께 있었을 테고. 저는 과거와 현재로 넘어오면서 컴팩트하게 되지 말아야 하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해요. 죽음의 절차가 그런 것 같고요.
안 두 가지 생각과 하나의 질문이 생각나네요. 하나는 인도에서 마주한 죽음이에요. 갠지스에서는 밤마다 힌두교식 예배를 드리는데, 그 강에 꽃과 향초를 띄워요. 갠지스는 화장한 시체를 흘러보내고 목욕도 하며 삶과 죽음의 순간이 늘 함께 있는 공간이죠. 목욕과 빨래를 하는 강가 옆엔 곧이어 화장터가 있어요. 그곳 사람들은 늘 그 광경을 보는 거에요. 힌두교에서는 사후와 지금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갠지스에 띄우는 꽃은 현생의 나와 내 주변의 떠나갈 사람들을 위함이기도 하죠. 또 다른 하나는 제가 마주한 첫 죽음에 대한 기억이에요. 저는 본가 시골에서 꽃상여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작은 마을에선 누군가 돌아가시면 젊은 마을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선산을 올랐어요. 죽음 자체는 너무 슬프지만, 어떤 면에서는 만연해 있어서 우리도 받아드려야 한다는 공동체적 분위기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슬픔에만 빠져있는 게 아니라 다들 위해주고 함께하는 분위기? 그러면서 떠올렸던 질문은 경민 씨가 했던 질문과 닿아있는 데, 드로잉의 과정에 대한 질문이에 요. 작업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한 번 더 듣고 싶네요.
조 일단 식물들을 보죠. 몇 가지 특징들을 봐요. 잎의 형태들 같은 것. 이에 대한 복잡한 배열을 보진 않아요. 사실 식물이 자라는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이 있으니까요. 그런 도식화된 방법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풀마다 자라는 방법도 있기 때문에) 형태들을 좀 더 관찰해요. 배열을 완벽하게 숙지하진 않아요. 다만 기억에 담아요. 작은 우표사이즈로 그려보면서 선을 익히기도 하고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경우도 있어요. 거기서 어떻게 그릴 것인지가 생각나서 그려지기도 해요.
안 앞으로는 어떤 것을 하고 싶나요?
조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우선 페인팅을 말하자면 좀 더 다양한 걸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식물을 계속 그리다 보니 증명사진을 계속 찍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운드를 다루는 설치 실험도 해보고 싶어요.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주파수가 다르다고 하잖아요. 빈 공간에 고/저주파의 다양한 소리들을 채워서 사운드를 이용해 공간 드로잉을 해보고 싶어요.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를 들어볼 수 있게 하는,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게 듣게 되는 공간작업이요.
안 이상한 질문인데. 설치랑 드로잉 중 뭐가 더 재미있어요?
조 둘 다 재미있는데,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그림이 늘 아쉬워요. 그림은 정말 충분한 여유와 시간이 있어야 해요. 꾸준한 시간 동안 손으로 계속 움직여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죠. 어떻게 보면 설치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형태잖아요. 그런데 그림은 손을 통해서 구현해야 하니까. 드로잉의 완성 과정은 빠른 편이지만 그 완성을, 놓치지 않고 많이 하고 싶은 것 같아요.
안 잘 그린다는 게 뭘까요. 사람마다 다를텐데
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기준이 명확해요. 아까 말한 것처럼 내 감정을 충분히 이야기하면서도 밸런스가 잘 맞는 것. 노래 부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감정이 너무 격해지면 노래를 잘 못 하잖아요, 울음을 삼키느라. 좋은 노래는 감정과 표현이 잘 어우러지는 상태인 것처럼 잘 그려진 드로잉도 그렇다고 봐요.
안 이번 작업들은 밸런스 맞추기가 잘 된 작업인가요? 아니면 울먹울먹한 상태?
조 다 다른 것 같아요. 울먹울먹하기도 하고 울음을 참고 있는 것도 있고요.
안 경민씨와 제가 좋아했던 〈화장〉은 밸런스가 잘 맞춰진 작업인가요?
조 네, 저는 그 작업은 정말 50:50의 비율로 균형이 잘 맞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밸런스가 잘 잡혔다는 건, 나와 외부의 것을 만나게 하는 것 같아요. 이번 작업은 많이 울면서, 웃으면서 그리기도 했고, 동시에 덤덤하게 그리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후회가 없네요.
안 ‘울먹울먹’이라는 표현이 이번 전시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애틋하네요. 이상하게 짠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럼 식물을 떠안고 있는 손을 표현한 〈뿌리가 썩은 다육식물〉(2017)은 어떤가요?
조 그 작업은 툭 던지듯 그려진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재치라고나 할까요. 그리면서 장례식 생각을 했어요. 할머니 장례식 때 잘 모르는 친척 중 한 분이 와서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어요,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였구요. 몇 번 만나지 않았던, 생판 모르는 사람에 가까운 사람이 그 노래를 불러주는데, 눈물이 나서 못 듣겠더라구요. 위로를 나누는 몇 안 되는 방식으로 내 등을 쓸어주던 누군가의 손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안 손이 많은 걸 전하는 것 같네요.
조 그리고 마지막을 앞둔 사람에게 잡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그저 손을 잡아줄 뿐이죠.
안 우리는 왜 이토록 죽음 앞에서 숙연해질까요,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 저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사회적 죽음에 관해서도. 죽음에 대해, 사회적으로 케어해 줄 수 있는 애도의 기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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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원 개인전 <farewell>
서문 :  안성은
진행 : 이경민
디자인 : 진민선
설치도움: 심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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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가변크기_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2길 11 www.dimensionvaria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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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시간들(scattered time)”, “ Farewell “에 대한 기획 평론가 천미림씨의 글
말하기 위한 방법
사랑에 대한 말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애정이나 삶, 추억 혹은 기억 같은 것들을 생각해내려 애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에게 문장이 아닌 오직 장면과 감정으로만 머물러 있다. 이렇듯 어떠한 단어는 직접 정의내리기 어렵다. 사실 나는 여기에서 이별에 관하여 말하고 싶다. 상실이나 허상에 관하여, 비애와 허무, 고통과 염증을 포함한 무언가에 대해서도. 이런단어들은 다른 것에 대한 말들을 먼저 두고, 단지 그것의 부정과 부재로만 설명할수 있다. 그 대상의 실체와는 다소 무관하게 나는 이것들을 말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사랑에 대하여 먼저 생각한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많은 것들을 내뱉고나서야 그것들이 지워지고 사라진 후를 말할 수 있다.어떤 작업은 보이는 것만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것은 볼 수 없는 너머의 감정만을 느낄 수 있다. 이 때 작업을 보는 나는 누군가의 머릿속을 유영하듯 산책하는기분이 든다. 전시를 보는 행위란 작가 안의 기억들이 중첩된 천막들을 걷으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이전 조대원의 전시 「시간들(scattered time)」은 그의 일상과 감정의 파편들이 공간에 널려져 있었다. 시작과끝이 정해진 바 없이, 큰 흔들림이나 파동이 드러나지 않는 물리적인 움직임들이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는, 설득과 외침이 없는 진동과 소음이 오히려 서글펐다. 눈물을 참으니 더 서러워 보이는 얼굴들. 그 들썩이는몸짓이 차라리 울음을 터뜨렸으면 했다.이번 전시 「Farewell」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나열이다. 작가는 이 이별을위해 가장 소중한 기억들을 특정 대상에 부여했다. 어떤 사건과 마음은 반드시 한번은 꺼내야 그것의 끝을 마주볼 수 있을 때가 있다. 화분의 도상은 각각의 형태마다 가족과의 관계맺음과 길러짐, 감정의 공유를 매달고 있다. 일상에서 ‘함께’라는단어는 꽤나 식상하지만 그 의미는 늘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 나 또한 유한한 것들을 외면하려 애쓴 적이 있다. 누군가의 병명이나 죽음, 정해진 이별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것이 실체를 가질까 두려웠다. 마치 말하지 않으면 그것이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애써 숨겨두고 단지 기약하는 말만 꺼내두었다. 작가가 할아버지의병상에서 ‘내일봐요’라고 인사한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력이무색하게도 유한한 것은 유한한 채로 무기한의 시간 속에 머물러있다. 작가는 이별을 인정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하여 캔버스에 자신의 길러짐을 그려낸다. 사랑을 말 할 수 있어야 그 부정으로서의 이별의 실체를 마주보고 인정할 수 있다.작업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결론은 일상의 그늘 뒤에서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글. 천미림(Lim 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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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min-lee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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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Crack> 
공간 가변크기(서울시 성북구 소재),
2020년 4월 16일~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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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고독에 대하여
| 안성은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경민의 작업을 처음 보았던 것은 2014년의 겨울이다. 20여 미터에 달하는 롤지, 컷컷을 그린 영상, 움직임에 따라 이어지는 풍경, 사물의 움직임을 담은 일력 형태의 작품까지. 이경민은 종이의 재생/플레이 방식을 달리해가며, 시간 그 자체를 종이라는 지지체에 옮기는 작업을 오랫동안 이어왔다. 손끝에 닿으면 까맣게 묻어날 것 같았던 진하기가 다른 연필 색들이 오래 기억에 난다.
그는 자주, 긴 산책을 하는 듯했다. 이경민의 산책은 종종 기록되었고, 작업으로 남았다. 오래 걷고, 버스에 올라 창밖을 기록하거나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에 눈길을 뒀고 검정으로 그렸다. 발걸음의 속도나 그날의 바람 세기, 버스의 내달림에 따라 사물의 인상은 나부끼거나 흩날린 상태 그대로 그려졌다. 하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을 통해 이어지는 연속의 풍경이 종이에 담겼다. 종이로 재생되는 비디오 같았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선 통으로 인식되어 하나의 풍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존재를 드러내며 종이에 남겨졌다.
나무, 달, 눈을 감아야 보이는 풍경, 빛을 그리던 작가는 공사 중인 도로와 도시 속 땅의 움직임을 담았다. 현실에서는 실제보다 환영에 가까운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이경민의 두 번째 개인전 《Crack》에서는 움직이는 땅과 사물의 인상에 대한 장면과 상상을 소개한다. 전시된 작품 속 사물들은 오랜 기간을 거쳐 수집된 이미지들이다. 목격자이면서 동시에 산책자에 가까운 작가는 사물들의 고독[1]에 집중했다. 이경민이 기록한 개개의 사물은 고유의 무게를 갖고 자신의 침묵을 지킨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지만, 너무 흔해서 주목하지 않은 것들. 죽은 새, 길고양이, 의자, 차에 가득 실려 가던 공사의 파편 무더기 같은 것이 그렇다.
먼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아주 얇고 두꺼운 것> 시리즈(2020)를 만날 수 있다. 전혀 다른 주제를 가진 이미지들을 중첩하듯 촬영한 사진작가 비비안 사센(Viviane Sassen)의 이미지 방법론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아주 얇고 두꺼운 것>은 그동안 수집한 이미지들로 이질적인 풍경을 연출하여 기존 작업과 다른 방법적 시도를 보인다. 이경민이 포착한 도시 속 버려진 풍경들은 ‘아주 얇고도 두꺼운’ 풍경과도 같아, 그 속에 담긴 여러 인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편집된 파편들을 땅 위로, 손 위로 불러왔다. 대상을 눈앞으로 바싹 당겨온 듯한 <누운 새>(2019)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도처에 널려있는 풍경 중 하나로서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인상에 대해서 말이다.
작가가 2018년도 안산으로 출근하던 당시 주변은 아파트 공사로 많은 개발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세월호 분향 텐트가 철거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깨진 도로를 징검다리 건너듯 지나다녔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사 현장과 끊임없이 행해지는 도로 공사 풍경에 작가는 자신을 빗대어보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Ground>(2018)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추진은 기존의 것을 뒤집고 부수는 작업이 되고, 그것은 작가 개인에게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양면적 의미를 담은 <추진력>(2020) 역시, 결국 과거의 전복이고 미래를 향한 애도이자 격려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공사판에서 넘실거리는 푸른 방수포를 보고 <파도치는 땅>(2020)을 투명한 블루로 표현하거나, 빛에 의해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창문 속 166장의 ‘나’를 종이-비디오로 기록하는 것은(<Crack>, 2020) 사물이 가진 인상의 무게를 담아낸 작가의 다정한 인사로 느껴진다. 이번 전시와 동명의 작업인 <Crack>은 주변의 사물/풍경에서 놓치기 쉬운 작은 틈을 비추고 보여주는 이경민의 작업적 주제-성향을 대변한다. 그리기의 다양한 방법 중 하나로 기존의 작업과 달리 수집/실존하는 이미지가 아닌, 심상이나 기억의 이미지 표현에 대한 시도와 ‘불’이라는 물성 자체에 관한 관심을 담은 작업도 있다. 수성 흑연으로 그린 ‘검은 불’을 물로 지워낸 드로잉, <소용없는 일>(2020)이 그렇다. ‘소용없는 일’이라 말하며 물로 지운 그림을 그렸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바라며 전시장 입구에 배치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아름다움이란 마음의 상처 이외의 그 어디에도 연유하지 않으며, 대상이 가지는 침묵을 드러내는 뿌리 깊은 고독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 [2]이기에 작품 속 이미지는 이처럼 저마다의 의미화 과정을 거친다.
지난 2018년, 안산의 세월호 분향소가 철거되는 과정 중에 생긴 못 자국을 작업으로 그리고 있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때에도, 작가에게도 오랜만인 이번 개인전을 4월 16일에 연다고 했을 때도 같은 생각 하나를 했다. 그가 세상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법 앞에 작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는 마음. 이러한 애도는 대상의 가장 고유한 고독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너무 흔한 나머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나 인상들이 제멋대로 숨으려고 할 때, 작품을 통해 작품 너머의 진동을 인지하고 현재 서 있는 지형을 확인하게 되길 바란다.”[3]
미주_
[1] [2]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윤정임 옮김, 열화당, 2007, pp. 6, 7, 31, 48 [사물들의 고독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장주네가 기록한 자코메티의 짧은 담화를 옮기며 설명을 대신한다. “언젠가 방 한구석에 놓인 의자 위에 걸쳐진 수건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순간, 개개의 사물이 홀로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사물이 다른 사물을 짓누를 수 없도록 하는 무게-차라리 무게의 부재-를 갖고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소. 홀로 있는 그 수건은 너무도 혼자인 듯해서 의자를 슬며시 치워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어요. 수건은 자기 고유의 자리, 무게 그리고 자기만의 침묵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거요. 세상은 가볍고도 가벼워 보였어요.
[3]  이경민 작가 노트에서 발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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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yyyy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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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이어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필사적으로 나선 서울행. 평일에 출퇴근을 고정으로 지키게 되면서 평일 낮에 즐기던 유유자적 혹은 게으름에 대해 갈증이 생겼던거같다. 유난히 볼만한 전시가 많은 9월10월 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금호미술관으로 향했다. 겨우 전시 리스트 중에 하나 체크 하지만 그래도 소중해.
전시를 보고 교보까지 걸어와서 에그드롭을 먹는다. 셀카도 찍어보고 해가 저무는 빌딩숲도 바라보고 저 멀리 인왕산도 본다. 그리고 교보에 가서 피터 드리커 선생님의 <실천하는 경영자> 책을 완독하고 이어 안성은 선생님의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다> 라는 책도 읽었다. 만지작거리던 피터 드리커 선생님의 <최고의 질문>은 차분히 깊이 읽고 싶어서 구매해버렸다. A5 사이즈 메모를 효율적으로 정리하기위해 아르디움 6공 투명커버와 링 세트도. 결국 구매한다. 그리고 만족한다.
어쩌면 평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은 주말에는 온전히 충전에 힘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새로운 브랜딩도 기다리고 있고, 기존에 운영하던 브랜드도 리노베이션이 필요하다. 방향을 정확히 하고 가설을 세우고 차분히 지키며 검증하는 것. 그것을 남은 올해의 시간동안 제대로 해내고 싶다. 본격적인 30대의 시간이 있고 내 안에 확신하는 것들을 더 나누고 소개하고 팔아야지. 특히 오늘은 하엘언니가 데려온 한 혜산출신 청년을 보며 예수님을 소개하고 팔아야 겠다는 생각이 사실 더 든다. (여기서 판다는 것은 이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향력있고 매력적인 것을 상대가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지불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좋은 날씨 또 값진 혼자만의 시간, 좋은 전시와 책. 방향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젊음, 튼튼한 다리, 책과 바인더노트를 살 수 있는 충분한 재화, 소중한 저녁식사, 안전 그리고 생명.
양들을 찾으러 나서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잘 분간하게 하시고, 내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 숨쉬어서 부드럽고도 따뜻하게 주변에 전달되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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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shotme-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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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화합의 메시지, 영화<박치기!> - 시오야 슌, 타카오카 소스케, 사와지리 에리카, 오다기리 조 출연/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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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화합의 메시지, 영화 - 시오야 슌, 타카오카 소스케, 사와지리 에리카, 오다기리 조 출연/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 (2004)
감독
이즈츠 카즈유키
출연
시오야 슌, 타카오카 소스케, 사와지리 에리카, 오다기리 조
개봉
2004 일본
박치기! – 시오야 슌, 타카오카 소스케, 사와지리 에리카, 오다기리 조 /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 (2004)
      소통과 화합의 메시지, 영화 <박치기!>
          좋은 주제를 담고 있지만, 좋은 영화는 아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뱉었던 한 마디입니다.
  영화 <박치기!> 엄연히 일본 감독이 제작한 일본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한국과 북한의 분단 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운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줄거리
  말이 통하지 않을 땐 (박치기!) | 오늘 사고 한 번 크게 친다! 
  1968년 교토, 히가시고 학생들과 조선고 학생들 사이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연일 치고받는 싸움이 계속 되는 가운데, 코우스케(시오야 슈운)는 선생님의 명령으로 조선고에 친선축구시합을 제안하러 가게 된다. 그곳에서 코우스케는 플룻을 부는 청순하고 예쁜 경자(사와지리 에리카)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경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사카자키(오다기리 죠)로부터 금지곡 ‘임진강’을 배우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코우스케.   코우스케가 용기를 내어 경자에게 한발씩 다가서는 동안, 두 학교 학생들간의 싸움은 더욱 격렬해진다. 인근의 일본고등학교 학생들까지 가담하게 되면서 싸움은 극으로 치달아가는데, 그 와중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과연 조선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 평화는 찾아올 수 있을까? 코우스케는 경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 <네이버 영화> 제공
            인물들의 관계를 생각하며 이 이야기를 풀어내자면, 아무래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인물은 바로, 마츠야마입니다. 마츠야마는 초반에 유행을 즐기는 평범한 고등학생입니다. 그는 우연히 조선고에 친선축구경기시합을 제안하러 갔다가 경자를 보고, 한눈에 반합니다. 처음부터 그는 ‘접수’의 여동생이라며 경자와 친해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사카자키‘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처음엔 노래로 경자와 만남을 가지고, 나중에는 실제로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마도  ‘임진강’을 부르게 된 본래 목적은 경자와 친해지기 위한 단순한 생각이었겠지만, 이 일을 계기로 하여, 재일조선인들과 사이가 가까워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노래를 일종의 화합과 화해의 여지가 있는 장치로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재덕의 죽음으로 그 한계를 깨닫고 기타를 부수며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금지곡인 임진강을 부르면서 절망과, 현실의 벽을 뛰어넘으면서 내적 성장을 이루는 인물입니다. 반면 경자는 일본인과 재일동포의 갈등을 구체화하는 인물로써, 마츠야마와의 사랑을 통해 화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또한 마츠야마의 행동으로 일본인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바꾸고, 자신과 같은 신분인 재일동포들이 마츠야마를 좋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경자의 친오빠인 안성은 조선인 고등학교를 대표하는 학생입니다. 아무래도 안성은 마츠야마에 비해 액션신도 많았고, 선정적인 부분과 폭력적인 부분도 많이 나와서, 일본 영화에서 심의규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기 조국에 대한 동경을 품고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마음먹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사랑하는 여자친구 모모코가 자신의 아이를 출산하게 되자,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합니다. 안성은 모모코와 마츠야마를 통해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게 됩니다. 또 영화를 보면 모모코가 레오폰을 보고 싶다고 하는데, 여기서 레오폰은 사자 암컷과 수컷 표범의 혼혈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는 안성과 모모코를 뜻하기도 하면서 둘이 좋은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몽타주 부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바로 이 장면들입니다. 
         정(正)
 임진강 노래 부르기
 반(反)
 패싸움, 박치기
 합(合)
 모모코의 출산
      
전혀 연관되지 않는 영상들이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조를 이루면서
작가 혹은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는 기법을 말합니다.
  영상을 보면서 찾을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요.
정말 신기하게도, 오묘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와중에 빛나는 오다기리상~~~
  또한 이 영화에서는 Fade-out기법을 사용하면서 감상자로 하여금 잠시동안 생각의 여지를 주었는데요.
  그 장면들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1) 조선어 사전을 구하고 기뻐하는 마츠야마의 모습
(2) 극장에서 친구와 했던 대화들
(3) ‘조선 사람이 될 수 있냐’는 경자의 질문에 멍 때리는 마츠야마의 모습
(4) 스웨덴을 갔다온 사카자키와 마츠야마가 배 위에서 나눈 대화장면
    사실, 이 모든 Fade-out은 다 마츠야마가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장면들인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사실 영화를 보다보면 마츠야마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를 보다가, 같이 생각에 잠기고,
  ‘아, 뭔가 내가 생각했던거 와는 달라.’
  하고, 장난스럽게 웃을 땐 웃다가도 다시 멍 때리게 되고…
                  음, 인상깊은 장면이 있다면 저는, 다리 위에서
마츠야마가 친구와 한국과 북한의 실정에 대해서 이야기한 장면이었어요.
  ‘너, 생각해 봐. 내일 당장 네가 교토역에 못간다면 어떨거 같아?’
  친구의 질문은 제 뒤통수를 퍽- 하고 때리는 것 같았어요.
  사실, 무감각합니다.
정말 지금 여기, 한국에 사는 저는, 통일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어요.
  글쎄요, 얼마전에 친구와 통일에 관련되 대화를 했었는데, 제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통일 되는 건 좋은데, 내가 살아있을 때는 안됐으면 좋겠어.”
    근데, 제 입장에서는 그래요. 통일이 된다는 건 좀 무섭거든요.
  이 영화에서는 음악과 같은 문화로도 통일이 된다고 하지만,
무단이든, 문화든, 둘다 무섭거든요.
  융합이란 건 보기 쉽지 않아요. 그러나 포섭이라는 건 비교적 간단해요. 
  그런데 또 영화를 보면서, 또 뭔가, 뒤통수를 두번 맞은 듯한 느낌이네요.
                  재일교포 역할을 맡으신 배우분들의 발음, 억양이 어색해 되게 재미있었던 영화.
  또한 일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통일, 그리고 남북한의 현실에 다시 한 번 자극을 받았던 영화. 
    그럼 지금까지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 영화 <박치기!> 입니다.
          –
        사춘기 소년들의 틀을 부수는 박치기!!
  –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 영화 「박치기」를 감상하고
        미움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혹은 자신이 미운오리새끼는 아닐까, 의심을 해본적은 없는가. 이 영화는 사춘기 소녀, 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임과 동시에, 우리가 쉽게 다룰 수 없는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북분단에 관련해 청소년들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준 영화가 과연 몇 편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영화로는 얼마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 한창 6.25 때 전쟁을 다룬 영화였고, <간첩>? 북한 간첩들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다룬 영화였다. 그나마 남북한의 갈등과 화합을 다룬 영화는 <코리아>가 전부였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스포츠를 통해서. 하지만 사실, 나는 이번 영화를 보기 전까지도 현재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까!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의 영화 <박치기!> 예고편에서부터 여러 번의 엽기적인 액션이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준 영화였다. 이 영화에는 교토에서 벌어지는 조선고 학생들과 교토고 학생들의 고군분투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조선고 학생들과 교토고 학생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잦은 다툼은 아무래도 두 나라만이 느낄 수 있는 긴 역사가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토고 학생인 마츠야마는 우연히 교토고와 조선고의 친선 축구 경기 시합을 제안하러 갔다가 ‘경자’라는 여학생에게 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학생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조선어사전을 구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기타를 배워 ‘임진강’이라는 노래를 연주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단순히 여학생을 좋아하는 남학생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것을 조금 더 크게 본다면, 일본에서 한국에게 먼저 관심을 갖는 다는 장면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적용시켜보면 화합을 하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바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단순히 한국의 분단에만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고와 교토고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선이 두 학교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을 볼 수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감독이 영화를 통해 일본과 한국이 이런 경쟁심이라던가 긴장감으로 서로를 적대시 한다면, 결국 좋지 않은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를 완화할 수 있을까? 감독은 그 답안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버섯머리는 ‘경자’라는 여학생을 좋아하고 있다. 그런 좋아하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한국어를 배우게 하고, 한국 노래, 한국 문화를 즐기게 한다.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는 동안, 그들은 행복해 한다. 즐거워한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감독이 굳이 선곡한 노래가 ‘임진강’인 이유는 무엇일까? 임진강의 가사를 보면,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당 가고 파도 못 가니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네’이다. 영화 초반에 교토고 학생 둘이 조선고에 방문했을 때, 조선고 학생들은 무조건 교토고 교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그들을 적대시하고 때리려고 했다. 여기서 남쪽 땅이 조선고고 ‘나’가 교토고 학생이라면 비슷한 경우가 성립된다.
  영화는 이 한 가지를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춘기 소년들을 과감하게 끌어들였다. 또한 그들의 내적 심리 상태라던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민들을 그들 스스로 해결해나가며 결말에 다가가는 구조를 취한다. 결국은 언젠가 통일이 될 것이고, 일본과 한국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도 부수게 될 것이라는 결말. 이 통쾌한 결말은 관객으로 하여금 웃음을 준다.
  영화 속에는 ‘재덕’이라는 인물이 죽은 뒤, 그의 유족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일본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리고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미워했을 때, 벌였던 잔인한 역사들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그들은 현재 우리에게 용서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이런 미움들을 지금이라도 사랑으로 없애자는 걸까? 묻어버리려는 걸까? 여러 가지 물음표가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았지만, 감독은 영화에서 정중하게 우리에게 용서를 구한다. 죄송하다고 한다.
  이 글의 맨 앞에, 나는 미움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과거에 나를 미워했던 친구로부터 용서를 해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너를 용서할 수는 없겠다.’라는 말을 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미움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자. 용서를 할 수 있겠는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경우인가? 내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내가 지금 말하고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줄의 댓글과 공감은 뚱아를 행복하게 한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
  본 포스팅은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문학과 문화콘텐츠 산업> 강의와 함께 합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상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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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ejc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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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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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아 개인전 <떼구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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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아 개인전 <떼구르르르>
 2017. 06. 15 - 06. 29
 | wed-sun | 13:00-19:00 | 
별도의 오프닝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선아는 사물과 구조의 인상을 목도하고 분해와 재조합, 그리고 나열의 방식을 통해 이를 시각적 형태로 구현하는 작업을 이어온 작가이다. 이번 전시 《떼구르르르》에서는 작가가 오랜 시간 관찰해온 대상을 주제로 한 신작 4점을 선보인다. 전시에서는 팔각형의 거울로 짠 테이블 <팔각정>(2017)과 크고 작은 자갈이 바닥 면에 깔린 두 개의 의자 <가시방석>(2017), 각목에 꽂혀있는 빨대로 분수의 형상을 나타내는 <분수대>(2017), 그리고 자수가 놓인 캔버스 세 점 <노동과 놀이>(2017)와 오브제 드로잉 일부를 만날 수 있다.
 <팔각정>은 작가가 자주 찾는 집 앞의 휴식공간을 모티브로 하여 실제 팔각정과 동일한 47cm의 높이로 만들어졌다. 본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마루 부분은 거울로 표현되었다. <팔각정> 앞에 선 관객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게 된다. 거울 위에는 원본은 없고 잘린 그림자로만 남은, 흙으로 빚은 바위가 놓여있을 뿐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늘 같은 고민을 이어왔다고 했다.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은 어떤 상태에 대해서, 그러나 그럴 수 없는 마음에 대해 몇 번이고 물었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얼굴과 바위 그림자는 어쩌면 그곳을 맴도는 작가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을 경험하게 하는 형태는 거울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각기 처한 상태는 다르지만 ‘현재 자신이 위치한 곳’을 묻는 동일한 질문으로 작동한다.
책상 형태로 제작된 <팔각���> 앞에는 관객이 직접 앉을 수 있는 두 개의 스툴형 의자가 놓여있다. 먼저 바닥 면이 원형으로 제작된 의자에는 화분이나 어항장식에 사용되는 하얀 자갈이 깔려있다. 또 다른 의자는 엠보싱이 솟아있는 줄과 오목하게 파여있는 줄이 교차하는 형태의 회색 야외용 사각방석을 이용하여 제작했다. 작가는 방석의 비어있는 구멍 치수와 꼭 맞는 조경용 인도네시아산 돌멩이를 발견하게 되었고, 빈 구멍을 채우는 데 사용했다. 처음 앉았을 때는 일반 의자와 큰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 면의 자갈의 냉기와 질감으로 은근한 불편함을 제공하는 <가시방석>은 불편한 관계 혹은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지속적인, 지지부진한 어떤 상황 자체로 느껴진다.
시선을 돌리면, 빨대의 끝부분을 동그랗게 말아 분수에서 솟구치는 물을 형상화하고 이를 각목에 설치한 <분수대>를 마주하게 된다. 분수는 넘치지도 흐르지도 않는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분수는 그저 제 몫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을 따름이다. <분수대>를 이루는 4개의 각목은 바닥에 고정되어있지 않아, 관객의 손길이 닿으면 사각틀이 가변적으로 움직이도록 놓여있다. 짜인 틀에 매여있지 않고, 유동적인 상태로 움직임을 취한다는 면에서 수행적이다.
이어 벽면에는 세 점의 자수 작업 <노동과 놀이>가 전시된다. 자수는 ‘노동’이자 ‘놀이’로써의 작업 행위로 기능한다. <노동과 놀이>에는 서로 다른 ‘구르기’를 수행 중인 대상이 등장한다. 하나는 놀이로써 굴렁쇠를 굴리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생존을 위해 제 몸보다 더 큰 쇠똥을 굴리는 쇠똥구리, 그리고 형벌로 인해 언덕 끝까지 큰 바윗돌을 굴려야 했던 시시포스(Sisyphos)의 모습이다. 시시포스의 돌은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다시 밑으로 굴러떨어지기 때문에 이 형벌은 영원히 되풀이된다. 또 다른 캔버스에 수 놓인 ‘계란’과 ‘거미줄’은 형태에서부터 의미로 나아가길 시도한다. 작가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살색의 계란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예쁘게 느껴졌다고. 이윽고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경이와 신비의 대상으로써 계란을 독해했고, 이는 곧 6개의 계란 자수로 남았다. 연결과 포착에 대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거미줄’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제작됐다.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형식적으로는 설치와 자수의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주제적 측면으로는 작가로서의 생존과 지속가능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 개인의 환경적, 심리적 상황을 다루고 있다. 각각의 상황에는 작가 특유의 위트가 묻어난다. <팔각정> 앞에서 <가시방석>에 앉아 불편한 휴식의 순간을 견디며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인내하다가도,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이는 생존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고통과 유희적 행위로서의 작업 행위와 이를 수행하는 작가 자신을 지시한다. 작가에게 있어 작업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매 순간을 증명하는 듯하다. 일상의 것에서 동시대를 감각하고 담아내는 작가의 이러한 시도들은 작가 개인의 서사에서 시작되었으나, 정도의 차이일 뿐 같은 고민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처럼 작가는 일상에서 발견된,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사물의 인상을 기록했고, 사물의 인상들은 작업이 되었다. 이는 해변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마모된 유리 조각이나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조개껍데기를 줍는 비치코밍(Beach Combing)의 행위와 닮아있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은 작가 자신의 조형행위를 유발하는 동력으로 말해온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e; 발견된 사물)적 시도로, 예술을 일상의 발견으로 보는 오선아의 기존 작품들과 일정 부분 맥을 함께 한다. 전시장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형태의 기둥에 대한 생각은, 붉은 다이모 테이프에 사랑과 자유를 노래하는 팝송 가사들을 빼곡히 새겨 속이 텅 빈 기둥으로 제작한 <사랑과 자유를 위한 기둥>(2014)이 됐고, 플라타너스 나무를 통해 가을의 부분을 담고자 했던 생각은, 낙엽을 석고로 캐스팅하고 날짜와 날씨와 함께 책으로 만들어져 <가을일기>(2014)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에겐 오랜만의 개인전이다.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러나 나는 작업실 안에서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은색 비가 내리는 푸른 바다를 상상하고(비 Rain, 2008), 불안을 진정시키려 먹던 약과 그 약봉지를 재료로 반짝이는 별을 만들어 띄우려 했던(별들 Stars, 2008) 그녀의 감각이 오롯이 그 자신을 이끌어갈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예술은 사실,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속이 헐거웠다. 그래서 속이 겉을 깨고 나오려 했다>(2009)는 작품명은 ‘어쩔 수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 수밖에 없어서, 그래서 만들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의 자기 고백적인 작업관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작고 허름하여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내 힘으로 노를 저어야 하는 ‘내일의 배’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오래도록, 자신의 새하얀 조각배를 저어가며 꿋꿋이 망망대해를 탐험해 나가기를 바란다. “떼구르르” 자신의 공을 굴려 가는 그 여정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 안성은(미디어 비평,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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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아 개인전 <떼구르르르>
서문 : 안성은
진행 : 김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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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가변크기_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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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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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 개인전 <Crack>
2019. 4. 16. - 2019. 4. 30.
| wed - sun | 12:00 - 19:00
별도의 오프닝은 없습니다.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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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의 고독에 대하여
| 안성은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경민의 작업을 처음 보았던 것은 2014년의 겨울이다. 20여 미터에 달하는 롤지, 컷컷을 그린 영상, 움직임에 따라 이어지는 풍경, 사물의 움직임을 담은 일력 형태의 작품까지. 이경민은 종이의 재생/플레이 방식을 달리해가며, 시간 그 자체를 종이라는 지지체에 옮기는 작업을 오랫동안 이어왔다. 손끝에 닿으면 까맣게 묻어날 것 같았던 진하기가 다른 연필 색들이 오래 기억에 난다.
그는 자주, 긴 산책을 하는 듯했다. 이경민의 산책은 종종 기록되었고, 작업으로 남았다. 오래 걷고, 버스에 올라 창밖을 기록하거나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에 눈길을 뒀고 검정으로 그렸다. 발걸음의 속도나 그날의 바람 세기, 버스의 내달림에 따라 사물의 인상은 나부끼거나 흩날린 상태 그대로 그려졌다. 하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을 통해 이어지는 연속의 풍경이 종이에 담겼다. 종이로 재생되는 비디오 같았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선 통으로 인식되어 하나의 풍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존재를 드러내며 종이에 남겨졌다.
나무, 달, 눈을 감아야 보이는 풍경, 빛을 그리던 작가는 공사 중인 도로와 도시 속 땅의 움직임을 담았다. 현실에서는 실제보다 환영에 가까운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이경민의 두 번째 개인전 《Crack》에서는 움직이는 땅과 사물의 인상에 대한 장면과 상상을 소개한다. 전시된 작품 속 사물들은 오랜 기간을 거쳐 수집된 이미지들이다. 목격자이면서 동시에 산책자에 가까운 작가는 사물들의 고독[1]에 집중했다. 이경민이 기록한 개개의 사물은 고유의 무게를 갖고 자신의 침묵을 지킨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지만, 너무 흔해서 주목하지 않은 것들. 죽은 새, 길고양이, 의자, 차에 가득 실려 가던 공사의 파편 무더기 같은 것이 그렇다.
먼저 전시장 입구에 들어���면 <아주 얇고 두꺼운 것> 시리즈(2020)를 만날 수 있다. 전혀 다른 주제를 가진 이미지들을 중첩하듯 촬영한 사진작가 비비안 사센(Viviane Sassen)의 이미지 방법론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아주 얇고 두꺼운 것>은 그동안 수집한 이미지들로 이질적인 풍경을 연출하여 기존 작업과 다른 방법적 시도를 보인다. 이경민이 포착한 도시 속 버려진 풍경들은 ‘아주 얇고도 두꺼운’ 풍경과도 같아, 그 속에 담긴 여러 인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편집된 파편들을 땅 위로, 손 위로 불러왔다. 대상을 눈앞으로 바싹 당겨온 듯한 <누운 새>(2019)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도처에 널려있는 풍경 중 하나로서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인상에 대해서 말이다.
작가가 2018년도 안산으로 출근하던 당시 주변은 아파트 공사로 많은 개발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세월호 분향 텐트가 철거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깨진 도로를 징검다리 건너듯 지나다녔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사 현장과 끊임없이 행해지는 도로 공사 풍경에 작가는 자신을 빗대어보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Ground>(2018)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추진은 기존의 것을 뒤집고 부수는 작업이 되고, 그것은 작가 개인에게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양면적 의미를 담은 <추진력>(2020) 역시, 결국 과거의 전복이고 미래를 향한 애도이자 격려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공사판에서 넘실거리는 푸른 방수포를 보고 <파도치는 땅>(2020)을 투명한 블루로 표현하거나, 빛에 의해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창문 속 166장의 ‘나’를 종이-비디오로 기록하는 것은(<Crack>, 2020) 사물이 가진 인상의 무게를 담아낸 작가의 다정한 인사로 느껴진다. 이번 전시와 동명의 작업인 <Crack>은 주변의 사물/풍경에서 놓치기 쉬운 작은 틈을 비추고 보여주는 이경민의 작업적 주제-성향을 대변한다. 그리기의 다양한 방법 중 하나로 기존의 작업과 달리 수집/실존하는 이미지가 아닌, 심상이나 기억의 이미지 표현에 대한 시도와 ‘불’이라는 물성 자체에 관한 관심을 담은 작업도 있다. 수성 흑연으로 그린 ‘검은 불’을 물로 지워낸 드로잉, <소용없는 일>(2020)이 그렇다. ‘소용없는 일’이라 말하며 물로 지운 그림을 그렸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바라며 전시장 입구에 배치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아름다움이란 마음의 상처 이외의 그 어디에도 연유하지 않으며, 대상이 가지는 침묵을 드러내는 뿌리 깊은 고독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 [2]이기에 작품 속 이미지는 이처럼 저마다의 의미화 과정을 거친다.
지난 2018년, 안산의 세월호 분향소가 철거되는 과정 중에 생긴 못 자국을 작업으로 그리고 있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때에도, 작가에게도 오랜만인 이번 개인전을 4월 16일에 연다고 했을 때도 같은 생각 하나를 했다. 그가 세상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법 앞에 작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는 마음. 이러한 애도는 대상의 가장 고유한 고독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너무 흔한 나머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나 인상들이 제멋대로 숨으려고 할 때, 작품을 통해 작품 너머의 진동을 인지하고 현재 서 있는 지형을 확인하게 되길 바란다.”[3]
미주_
[1] [2]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윤정임 옮김, 열화당, 2007, pp. 6, 7, 31, 48 [사물들의 고독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장주네가 기록한 자코메티의 짧은 담화를 옮기며 설명을 대신한다. “언젠가 방 한구석에 놓인 의자 위에 걸쳐진 수건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순간, 개개의 사물이 홀로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사물이 다른 사물을 짓누를 수 없도록 하는 무게-차라리 무게의 부재-를 갖고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소. 홀로 있는 그 수건은 너무도 혼자인 듯해서 의자를 슬며시 치워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어요. 수건은 자기 고유의 자리, 무게 그리고 자기만의 침묵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거요. 세상은 가볍고도 가벼워 보였어요.
[3]  이경민 작가 노트에서 발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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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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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나 개인전 <Light Grey>
2019. 12. 5. - 2019. 12. 22.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  12. 5. (thu) 19: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dimensionvariable.tumblr.com/ -
풍경을 쓰는 법
안성은(미디어 비평, 큐레이터)
조미나는 풍경을 쓴다. 여기서 쓴다는 건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풍경을 작업의 소재/주제로 다룬다는 것이고, 하나는 말하기의 방식 혹은 도구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어떤 상황이나 대상이 풍경이 된다는 건 관찰자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확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미나의 풍경은 작가가 들여다본 사회와 내면의 심상이 담긴 일종의 기록물로 관객과 만난다. 
첫 개인전 《Light Grey》에서는 옅은 회색을 입힌 새 캔버스 위에 옮겨온 총 8점의 회화 작품이 소개된다. 캔버스에는 이식하거나 가공하지 않은 날것의 자연이 담겨있다. 우거진 수풀, 기이한 암석층, 발치에 닿는 군집을 이룬 풀, 어른거리는 햇살 너머의 나무들, 생경한 질감의 사막과 번뜩이는 불꽃. 채도가 높고 낮은 각각의 장면은 개별의 구조를 가진 자연 속 단면이다. 대상과의 거리에 따라 부분이 전체가 된 장면이 있는가 하면, 제법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서 바라본 듯한 장면도 있다.
멀리서 환영과도 같은 불꽃을 바라보거나[1] 가보지 않은 사막 속 환경[2]을 캔버스 속으로 불러들이던 작가는 실제 풍경 앞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작가는 구조에 관심이 있다. 이는 평면을 탐구하며 어떤 상태에 대한 누적된 관찰과 (소리 없는) 크고 작은 폭발로 이어졌다. 이전 작업에서 외부나 가상의 환경을 가공하여 그것이 정리된 풍경으로 다가오기까지 여러 번의 형식 변화(평면 내 시점이동, 덩어리의 해체, 사용 빈도가 낮은 색상 매치 등)를 거쳤다면, 신작에서는 직접 마주한 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내밀하게 다듬어진 방식으로의 발산이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Grass of the night>와 <Fairy stream> 시리즈 (2019)는 작가를 압도시켰던 실제의 풍경에서 발췌한 것이다. 타국에서 마주한 야생의 자연에서 발견한 규칙, 나열, 경외,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구조들을 택했다. 대상과의 거리, 관찰자의 시점과 눈높이에 맞춰 시점의 변화를 담은 이 풍경들을 감상하기 위해선 관람에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작품의 위치에 따라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하게 하거나 몸을 낮춰보고, 어깨쯤 왔을 풀의 높이를 가늠해 보게 하는 관람의 방식은 감각적으로 재편된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한 장면에 대한 상상으로 한눈에 전체를 보기 어려웠을 키가 훌쩍 큰 풀숲 앞에 선 듯한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이처럼 여덟 개의 장면 앞으로 관람자를 바싹 끌어당긴 작가의 눈은 장면에 맞는 관람 동작과 시간사용법을 제시한다.
시각적 경험 외에도 만져질 것만 같은 촉각적 시각성, 실제의 촉감, 그리고 후각을 자극했던 기억 속 감각이 풍경이 되기까지 조미나는 잊히는 기억을 자꾸만 밝혀야 했을 것이다. 기억을 비추는 풍경의 빛이 희미해지지 않고, 잠잠히 그곳에서 누군가의 기억이 되는 곳. 《Light Grey》가 직조하는 풍경이 그와 같은 역할이 되기를 바란다.
[1] Explosion 시리즈, <Untitled>, 53x45.4cm, oil on canvas, 2016
[2] Explosion 시리즈, <Untitled>, 53x40.9cm, oil on canva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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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백 개인전 <길 위의 순간선(불타는 카메라)>
2019. 10. 31. - 2019. 11. 14.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  10. 31. (thur) 19:00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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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일렁이는 곳
| 안성은(미디어 비평, 큐레이터)
“우리는 누구나 어떠한 순간 위에 있다.”
-작가 노트
한영백은 일상의 단면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스트릿 스냅 사진을 찍는다. ‘순간선(순간을 마주하고 기록하는 시선)’이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영백에게 길 위의 순간을 기록하는 일과 그 시선에 대한 생각은 오랜 주제이다. 작가가 몰두한 일상의 파편화된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개인전 《길 위의 순간선(불타는 카메라)》에서는 그가 유학 후 구직을 위해 도쿄에 머물렀던 지난 2017년 촬영한 사진들 중 일부를 소개한다. 붉은 빛으로 얼룩진 23장의 사진은 촬영 시에는 미처 몰랐던 카메라 고장으로 빛이 새어 들어가 노광 된 필름에 담긴 도쿄의 풍경들이다. 필름이 빛에 노출되면 흔히 ‘필름이 탔다’고 말하는데 전시 명의 부제인 ‘불타는 카메라’는 여기서 착안하여 붙여졌다.
작고 휴대가 용이한 필름 카메라 ‘후지 티아라 II’를 들고 거리로 나선 작가는 도시의 장면들을 기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이어왔다. 지하철에서 잠이 든 아이와 노인,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사람이 가득한 거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표정 같은 것들. 고감도 필름으로 기록되어 입자가 거칠고 노이즈 범위가 넓은 사진 속 거리 곳곳에 불꽃이 인다. 사진의 면을 따라 겹쳐진 붉은 빛은 때론 비처럼, 바람처럼 거리에 피어오른다. 평면 위로 얹힌 붉은 빛에 휩싸여, 오늘의 광경은 어제와 같지 않다. 채도가 높고 노란빛이 강하게 도는 코닥 울트라맥스 400이 쓰인 이 사진들은 저해상도 특유의 색 면이 잘게 분절된 표현이 강조되어 입자가 굵은 점묘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카메라를 통해 객관적 대상을 포착하지만, 그 결과물은 그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관념적 대상이 된다. 여기에 사용한 카메라의 선예도나 해상력, 필름 고유의 색채와 감도 등이 더해지면 또 다른 심미적 필터가 씌워진다. 이는 조형성과 의미화의 과정에 개입되는 주된 요소로 작용하여 표현과 해석의 차이를 낳는다.
한영백의 고장 난 카메라가 부여한 우연적 효과는 일상과 포착 사이에 반쯤 스며든 레이어로 존재하며, 우리를 둘러싼 일상 풍경에 대한 인상적 피드백으로 기능한다. 스트릿 스냅 사진은 솔직한 표현 방식이다. 연출되지 않은 비 계획성, 그리고 순간 포착하지 않으면 사라질 한시적 장면을 기록한다. 스냅 사진을 관람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정지된 순간으로 기록되었으나 거리 속 사람들의 모습은 다음 동작을 예견하게 하는 움직임이 함께 담겨있다는 점이다. 이는 사진 속 공간에 시간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동적-정적 특성을 함께 가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읽힌다.
일상의 단면이란 때론 비일상적 풍경에 가까워서 익숙함과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거기에 사진의 힘이 있다. 이어 ‘불타는 카메라’는 거리와 풍경이 한 사람의 시선에 의해 어떤 겹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해 들여다보게 한다. 층층의 시선, 눈-빛으로 일렁이는 그 길을, 고요히 들여다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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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mensionvariable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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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림 개인전 <조금씩,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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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림 개인전 <조금씩, 가만히> _ 2018. 5. 24. ~ 6. 7. | wed - sun | 12:00 - 19:00 | opening _ 5. 24.(thur) 7pm _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는 미지의 섬으로 간다. 알지 못하고 본 적 없는 땅덩어리에 식물이 도착한다면 뿌리내리기에 알맞은 땅이란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본다. 자리 잡기에 적당한 환경을 더듬어 입체드로잉을 한다. 내내 바라보며 관찰하고 수집한 이미지를 평면 드로잉으로 재구성해서 스크랩 북을 펼친 것처럼 한쪽 벽면을 채운다.식물의 모습이나 빛깔, 생장하는 방식, 끝없는 변화, 움트고 자라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가 관찰의 대상이자 작업의 소재가 된다. 전시장 전체를 가상의 환경으로 정하고 식물들이 ‘이상한 땅’을 만나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환경을 표현하고자 한다.”      
-   김하림의 작가 노트(2018)에서 발췌  
김하림의 개인전 《조금씩, 가만히》는 작가가 수년간 관찰하고 수집한 식물들을 모티브로, 식물의 생장 과정과 이를 위한 조건을 다룬 입체-드로잉 전시다. 김하림의 식물-연구는 개인의 서사를 담은 식물 이미지, 그리고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에 관한 작가의 상상을 바탕으로 한 오브제 드로잉으로 구성된다. 이를 위해 전시 기간 동안 공간 가변크기는 작가가 옮겨온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는 가상의 환경으로 존재한다. 
전시장 곳곳에 위치한 식물들은 형형색색의 ‘이상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어디에서든 불쑥, 자라나거나(spring_up_nowhere, 2018), 식물에 관한 작가의 연구/관찰을 토대로 재구성된(BOTA(botanical)_study, 2018) 것으로, 특정 종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형색의 줄기를 늘어뜨린 식물이 되어(Rain-Bow, 2018) 관객과 마주한다. 여기에는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아 어머니가 키우는 식물부터 작가가 운영하는 독립서점 앞의 작은 화단에 심긴 식물, 여러 사람에게서 건너와 시들기와 성장하기를 반복했던 다양한 식물에 관한 인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도시에서 식물을 매개로 한 예술의 가능성과 새로운 시각을 탐구하고자 했던 콜렉티브 ‘식물생활(강은영, 김하림, 유상희)’에서의 경험 일부도 함께 포함되어있다. 
식물에게 환경과 조건은 주어지는 현실일 뿐,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종에 따라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뿌리내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작가가 주목한 이러한 환경은 어딘지 낯설지 않다. 김하림은 작가이자 독립서점 제로헌드레드의 운영자, 그리고 전시 공간 운영관계자로, 미술계의 이상한 지형 속에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늘 생각해왔을 것이다. 안정적이고 오랜 기간 지속해서 머무를 수 있는 공간과 운영에 관한 고민에서부터 생존 그 자체를 위한 활동, 이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에 대한 모색까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어디에도 위치하지/속해있지 않은 상태임을 역설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상태가 포괄하는 감각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머물 자리, 둘 곳이 없어지는 것에서 오는 불안’을 일으킨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자라날 수 있으나 동시에 언제든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동시에 찾아야 하는) 상태.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김하림의 관찰은 작가의 개인사가 녹아있는 식물-연구임과 동시에, 오늘날 상당수의 작가가 처한 현실을 대변한다. 이러한 현실은 미술계에서 작동하는 시스템과 사회적 인식/상황에 관한 것이며 김하림의 식물들이 ‘작고, 가벼운’ 형태로 자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손으로 빚은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땅덩어리와 거기서 자라나는 식물이 특정 서사를 지칭하기보다, 관객에게 개별의 형용사로 읽히길 바란다고 했다. 시처럼 형용되는, 자라나고 그려지는 이미지들로. 전시명 ‘조금씩, 가만히’는 움트고 생장하는 존재들을 생각하게 한다. 숱한 날 웅크리고 있지만, 뿌리를 내리는 데 망설임이 없고, 싹이 트면 때에 따라 자라며 뻗어 나가는 것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한 것들. 작가가 개별의 식물에 담긴 시간을 떠올리며 거기에 맞는 색을 고르고 만들었을 작업 과정을 상상하며, 나는 내가 아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어떤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이와 동시에, ‘소리도 없이 자란다’는 문장을 자주, 많이 생각했다.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이 눈에 띄는 계절이다. 생명력이란 어떻게 이다지도 강인한 것인지. 엉겨 붙은 먼지에조차 자리 잡은 풀은 해마다 생장하고 꽃을 피우고 지우길 반복한다. 앞으로도 작가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는 유효한 문장이길 바란다.
■ 안성은 (미디어 비평,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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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림 개인전 <조금씩, 가만히>
서문 : 안성은
진행 : 이경민
_ 공간 가변크기 _ 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2길11 www.dimensionvaria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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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개인전 _ 볼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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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2. 15. - 12. 29.
| opening _ 12. 15.  7pm 
| wed - sun | 12:00 - 19:00
공간 가변크기_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2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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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져가는 흔적을 애도하는 ‘달큼한’ 채집의 언어, 볼멘소리
  개인의 사적 경험이 공적 공간에 놓였을 때,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가능하게 할까.
사진은 과연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는가.
 최요한은 자신의 사적인/공적인 기억을 작업의 모티브로 사진과 텍스트 작업을 이어온 작가이다. 이번 <볼멘소리>에서는 아버지와 관계하는 사적인 사물들을 채집했고 그것이 보내는 신호들과의 정서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 이 과정은 총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되었다. 아버지들이 머문 노동의 환경을 수집한 잔여물(2016), 그 공장에서 사용된 수-공구들에 대한 관찰기록 달보드레한 채집(2015),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수감된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한 2006년 가을(2016),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을 드러내는 사진-수공예 작업 뿌리(2016)까지.
<볼멘소리>는 아버지와의 노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날’ 작가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그가 명명하는 공구들을 건네주었다. 오래된 쇠망치, 각종 렌치, 볼트, 가위와 기어 등 흠집 나고 휘어진 공구들. 아버지에게 있었던 연속된 ‘그 날’들은 공구를 닳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해 아버지가 보내온 시간에 대한 시각 정보로 기능한다. 닳은 공구를 통해 아버지의 노동과 그 세월을 목도한 것이다.
작가는 사진이 무언가를 절단시키고 고립시키는 민첩한 매체라고 말했다. 개인의 감성에 따라 채집되는 움직임과 밀도는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작가는 차라리 아버지를 늘어놓는 방식을 택했다. 100여 장이 넘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가 되기보단 연속된 이야기의 파편으로 자리 잡았다. 개별 사진 속 사물들은 한 명이면서 동시에 여럿인, 아버지를 표상한다. 여기서 채집된 ‘달보드레한(달큼한)’ 것들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증거이며 곧 애도가 된다.
아버지가 머문 공간을 기록한 잔여물에서 각각의 사물들은 아버지, 그리고 그와 함께 노동한 누군가의 ‘아버지들’을 은유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것들은 대개 여전히 익숙하게 사용되어 오는 물건이거나, 쓸모를 다 하였음에도 거기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기록의 방식 역시, 익숙하게 보아왔지만 낯선 것들(이를테면 근현대로부터 시작되어 가까운 근미래에도 남아있을 무언가)을 바라볼 때의 감상적인 채집과 닮아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사용됐지만 현재의 것들과는 유리되어 있고, 한때 개인을 지탱해온 것들이었으나 점점 그 결속력, 밀도가 느슨해지고 있는 작업 환경을 반영한다.
닳아가는 도구들처럼 주름진 아버지의 신체에 대한 목격이 담긴 달보드레한 채집에서 이는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사진 속 공구와 주름진 손과 맨발의 장면은 휘고 흠집이 난 아버지가 그 자체로 도구가 되어 보내온 시간과 병치 된다. 이는 동시에 아버지가 날마다 마주한 풍경이 어떠했는가를 연상하게 한다. 사진 속 사물은 아버지의 시간을 대변하는 각각의 설명이 되었다. 정지된 그것은 한숨처럼 내리쬐는 빛이 비칠 때만 거기 있음이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2006년 가을. 이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난 해 이기도 하다. 보고 싶고, 갖고 싶은 이미지가 끝도 없이 많았던 예민한 감수성의 나이였다. 가난한 자의 라이카라 불리는 야시카 일렉트로35 GSN을 함께 구매했고, 그려나가던 저마다의 청사진으로 가슴이 뜨거웠던 나이. 우리는 같은 도시에서 만났으나 작고 고요했던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내게는 어쩐지 아픈 구석으로의 태생지에 대한 감정이 우선이라면, 유년기의 지배적인 키워드가 ‘이주’였다 던 그에게 김천은 어떤 도시였을까.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은 큰 소리를 내던 제조 공장이었다. 주변에서 소음에 의한 민원이 높아지면 그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또 다른 도시로 이사를 다녔다는 작가에게 그가 머물렀던 곳은 늘 언젠가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가변적 고향이었을 것이다. 속해있던 도시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언제나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보냈던 십 대의 어느 날들은 그를 더욱 이방인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날 중 어느 날, 납품일의 문제로 부채를 떠안은 채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은 가동을 멈추고 그 아버지마저 수감될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그에게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는 몇 번의 큰 문을 지나야 했다고, 그것은 그가 속해있던 세계와 다른 곳으로 가는 입구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세계가 크게 요동쳤다고 느껴지던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 가을이 작가에게는 그런 계절이 아니었을지.
그로부터 10년. 작가는 아버지가 수감되었던 교도소를 찾았고 지난 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했다. ‘법과 질서의 확립’을 위한 감시의 도구, 공허하게 남은 희망찬 표어들과 접근이 금지되어있기에 몰래 넘겨다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방. 본 파트에서는 질서와 감시에 최적화된, 그래서 상상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조직화된 공간에 대한 조소와 공권력 앞에의 무력감이, 허무가 곳곳에 드러난다.
이윽고 <볼멘소리>에서 가장 마지막에 제작된 뿌리는 앞선 세 작업 시리즈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아버지로부터 내게로 온 것을 드러낸다. 본 작업을 위해, 작가는 어린 시절 그의 부친과 찍은 사진들을 스캔-재인화하였다. 시간의 결을 드러내기 위해 부러 입자가 드러나는 형태로 인화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붉은 실로 작가와 아버지 사이의 경계를 바느질 해 나갔다. 붉고 분명하게 자리 잡은 작가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그을린 형태로 사그라졌다. 헌신은 이토록 그 자신을 삭히고 지움으로써 완성이 되어간다. 이로써 작가는 아버지의 유산이 되었다.
퉁명스럽게 건네는 말투(볼멘소리)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외면할 수도, 외면되지도 않은 부모에 관한 달큼한 애도가 아니었을지. 여기에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부모-자식의 관계에서, 끌어안기에는 버겁고 내려놓을 수는 없는 헌신과 효의 강요 또는 세습된 교육에 대한 작가의 질문과 연민이 교차한다. 이는 “부모처럼 되기-살지 않기”와 “그들을 슬프게 하지 않기” 사이에서 어떤 것도 명확히 할 수 없는 자녀세대의 어떤 초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족 앞에서 자유로운 이가 몇이나 있을까. ‘가족들이 나오는 꿈은 늘 불안하지.’ 하고 노래하던 루시드 폴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이는 듯했다.[1]
<볼멘소리>에서 묘사된 바래져 가지만 남아 있는 것들, 그리고 가늘게 숨을 내쉬며 멈춰있는 공장과 채집의 대상물은 손에 잡힐 듯 촉각성을 가지지만 채도 높은 푸른 빛에서조차 물기가 만져지지 않는다. 말이 없고 건조하며 녹이 슬어있거나 정지해 있다. 온도로 표현하자면 이미 끓는점에서 한참을 내려온 미온의 상태. 그래서일까, 최요한의 사진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겨울 냄새가 난다. 만지면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그러나 동시에 소리 없는 장면 너머로 작가는 피사체와의 거리를 숨기지 않고 다가선다. 클로즈업. 그는 그가 보는 것을 명확히 “본다”. 개별 대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사진 전체에 가득 차 있다. 이미지 조작으로 실제를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이미지 과잉생산의 시대에 사진을 통한 “보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혹은 가져야 할까)? 가시적 세계의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사진의 기계적 특성상 ‘본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은 불가피한 질문이 된다. 보는 것은 결국 작가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이는 다시 말해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요한은 ‘무엇을’ 보고 있나.
먼지가 내려앉은 공장 기계, 창틀 위 죽은 벌, 물기 없이 바싹 마른 수건, 기름때에 절은 옷가지들, 뜯어진 벽지, 마른 하수 구멍, 철창 너머로 보이는 먼 먼 교도소 건물, 나무 너머로 가리어진 순찰 탑, 문틈으로 새 나온 철판 위의 빛줄기, 녹이 슨 거울, 미처 끝내지 못한 설거짓거리들, 흐트러진 쌀알, 주름진 손,...
그의 사진은 미끈한 것, 광택이 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손가락으로 따지면 예쁜 약지보다는 연필 근육이 붙어있는 중지이거나 짧고 조용한 새끼손가락에 가깝다. 차라리 생채기가 나 있는 것들. 최요한에게 매끈한 것은 되려 부정이다. 잘 정렬된 자본주의적 스펙터클이 아니라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의 거친 단면과 개인적 서사에 주목함으로써 이에 대한 양가적인 해석을 끌어낸다.[2] 그것은 작가가 통과한 시간의 결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해보게 한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지나칠 수 없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가 찍었으리라 생각되는 장면들이 많다. 남은 것들은 버려진 것도 아니고, 제자리를 잃은 것도 아닌 데 거기 있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의 눈길이 머물러 있고, 그리하여 선택한 것들은 대게 쓸모를 다한,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유효한 채집 대상물이다. 쓰임을 다 하고 남은 것들이 가지는 연약함과 으스러진 시간들이 거기에 있다.
이처럼 작가는 아버지의 연대기를 되짚어가며 한 개인(작가)의 서사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에 대하여 시각적 언어로 서술한다. 그리고 작품과 관객이 대면하는 때에, 해석이 아닌 관찰과 개별 상상력을 요하는 순간을 소원했다. 이러한 감상법은 그의 최초 작업들과도 닮아있다.
최요한의 사진을 처음 봤던 때를 기억한다. 그의 사진은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한다. 지극히 사적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동시대와 닿아있는, 공공의 영역을 다루지만 내밀한 자신의 오늘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하는 사진들. 나는 그 ‘말하기’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툭 하고 불거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지금과 공명하여 사회의 틈들을 고발해주기를.
  ■  안성은 (미디어 비평, 큐레이터) 
 미주_
 [1]  루시드 폴, 6집 ‘꽃은 말이 없다’ 수록곡, 가족, 2013
 [2] 이 점은 동시대의 자본주의적 아름다움이 부정성과 낯섦이 제거된 채,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향락적 향유의 대상으로만 축소된 것을 비판하는 한병철의 시선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이재영 역, 문학과 지성사, 2016
  _
<볼멘소리> 작가 노트
 시작은 아버지와의 노동에서부터였다. 가져와 달라는 공구를 전해주었다. 일이 끝났을 시간에 그 공구의 흠집과 휘어있는 부분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 날’의 노동 탓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고 차갑게 느껴졌었다. 
 노동의 연속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공구들을 갉아 먹어갔다. 공구들의 흠집은 그의 삶에 관한 시각적 정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 공장은 멈췄다.
정지된 삶이 된 것이다. 
그곳을 거쳐 간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던, 아버지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의 공간을 휘저으며 아버지의 흔적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라는 인물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은 다양하다. 소스라치는 순간도 있었고, 묘하게 아버지와 오브제가 겹쳐지는 모습에 시큰함도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잔망스러운 모습을 찾았다.
더불어 맹목적인 부모의 헌신에 대한 의문을 떠올렸다. 난 못 할 것이라는 가설도 함께.
순간, 난 그의 등에 지독하게 달라붙어서 칭얼거린 것이다.
자녀를 향한 날 선 교육과 헌신은 모순을 낳았고, 당연하다는 식으로 기이한 사회현상을 구축해 나갔다.
스스로 무언가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힘들어진다는 것이 분명한 노후가 걱정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난 정말 오랜 시간 그의 등에 업혀 있구나.
스스로 설 수 있고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걸까.
헌신도 교육이 되나요
난 아직도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그와의 관계를 더듬고 있다.
■ 최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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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한 개인전 <볼멘소리>
서문 : 안성은
진행 : 이경민
디자인 : 최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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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다영 개인전_엷은 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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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7. - 11.10. | wed-sun | 12:00-19:00 | opening 10.27. 7pm
| 공간 가변크기(서울 성북구 삼선교로 2길 11)
엷은 부조-화(浮彫-畵) (Subtle, Bas relief-painting)
세 번째 만남에서였다. 작가가 몇 번이고 매만졌을 “엷은 부조화”라는 말을 처음 들려주었던 것은. 엷은, 부조(Bas relief)-화(painting). 낯설었던 말의 온도가 익숙해질 무렵, 그녀를 따라 조심스레 그 단어를 발음해보았다. 손끝으로 만져질 것 같은, 시각적 촉각성이 느껴지는 단어였고 어디로 향해있는지 모를 어떤 시선들이 와 닿는 듯한 말이었다.
기본적으로 평면 위에 표현된다는 점에서 회화에 가까운 조각 기법인 부조는 평면에 입체적으로 형상을 새김으로써 깊이감을 드러내는 조각의 일종이다. 부조가 회화를 닮은 조각을 일컫는 말이었다면, 작가는 형상이 도드라지게 표현된 그녀의 페인팅을 수식하는 말로 《엷은 부조화》를 이번 전시에 불러들였다.
송다영은 사물-다시 쓰기 방식을 통해 회화의 형식 탐구를 이어온 작가이다. 그녀는 보는 것에 대한 일종의 관성을 벗어나고자 시도해왔다. 최근 주요하게 다뤄온 주제는 물체의 정적인 상태를 구현하면서, 그것이 가진 움직임의 가능성을 목도하는 일이다. 이는 끊임없는 변화가 진행되는 현실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유지되는 일련의 정지 상태를 포착해 냄으로써 부동성을 강화한다. 작업은 대개 대상이 가진 존재감이 그 위치를 탈바꿈하는 순간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문득 텀블러에 씌운 촘촘한 뜨개 커버의 틈 사이로 보이는 까만 표면에 시선이 갔다고 말했다. 형태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메워지는 공간이자, 대상과 대비되는 음영의 상황에 놓여있던 사물의 여백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에게 회화에서 늘 우선시해서 그려졌던 것은 발아를 위해 물이 담긴 그릇에 떠 있거나 가라앉아 있으면서 형성된 씨앗의 그림자(낱알, 2016)나 구겨진 채 놓여있는 화장실 타월과 수건(무제, 2016)처럼 일시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장면 혹은 대상이 되는 사물 그 자체였지만, 이번에는 사물 너머에 놓여있는 배경, 혹은 빈 곳에 집중하였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일상에 스며들어 있지만, 부러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주제로 수집해온 풍경들에 시선을 모았다.
드문드문 간격을 유지한 채 그 자체로 도드라지는 <봉오리>(2016)나 도톰하게 촘촘히 짜인 <뜨개> 시리즈(2015-2016), 군집을 이루고 있는 풀을 묘사한 <낱낱의 이어진 잎>(2016)에서 대상들은 얇게 잘 쌓아 올려진 조각처럼 감각된다. 하지만 정작 작가가 집중한 것은 화면 밖으로 불쑥 삐져 나오는 각각의 배경 같은 ‘틈’과 그것이 만든 무늬, 혹은 그림자이다.
명과 암이 대조되는 일상의 사이 공간을 엮어가는 과정에서 화면에는 두 개의 레이어가 포착된다. 정지된, 그러나 표면적 촉각성이 두드러지는 대상을 묘사한 것이 첫 번째 층이라면, 캔버스 내 분산적 묘사를 통해 시선의 이동을 의도하는 어두운 대비적 배경이 곧이어 뒤따른다. 작업에서는 이 두 개의 층에서 구현된 깊이 차를 통해 부조(浮彫)성을 강조한다. 이는 빛과 관계하는 일이며 회화적 서사를 유발하는 요소가 된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대상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수직적 시점 역시 깊이감을 체현하게 하는 구성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 깊이는 ‘엷다’. 표면에서부터 바닥을 탁 차고 올라오는 높이에의 감각이 아니라 구분을 위한 문턱에 가깝다. 이러한 표현은 대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 두기와 정서적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특정 ‘보기’의 시점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작가는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의 바닥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길이 가닿은 곳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들, 그리고 느슨하지만 연결되어 있는 틈의 리듬감 같은 것들 말이다. 특히 <뜨개> 시리즈의 경우, 이러한 부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그녀의 어머니가 직접 뜬 뜨개 발판, 자리 등을 캔버스에 옮겼다. 어머니가 실을 이용했다면, 작가는 캔버스에 어머니의 뜨개를 새롭게 떠 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실로 어머니의 수공예적 작업과 흡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리라. 물감과 오일로 옮겨진 뜨개들은 그것이 놓인 바닥면과 저마다의 깊이를 확보했다. 보는 것에 관한 것, 틈을 짚어내는 과정은 사물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작업 방식과 동의어로 기능하며 필연적으로 관계적 애착을 형성한다.
이처럼 사물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작업 방식은, 조각난 틈의 모양에 눈길을 쏟았고 그것의 형태를 세밀하게 잡아가는 과정을 거쳤으나 역설적으로 그 대상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분명하게 만져지는 것 앞에서 ‘보는 것의 태도’를 질문하는 방식은 캔버스 안에서 시선의 움직임을 의도한다.
회화의 동시대성에 관한 질문 앞에, 송다영은 여전히 ‘회화여야만 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러한 작가의 태도가 동시대의 회화에 관한 유의미한 질문들을 지속해서 상기시킬 수 있길 바란다. 반사되고 있는 빛이 어디에 부딪혀 튕겨 나왔는지를 보게 하는 어두운 틈, 빈자리가 만들어낸 무늬와 너머의 그림자들은 작업에서 공들여 묘사한 각각의 사물보다 반쯤 아래에서, 너울져 흐른다. 얕은 촉각으로만 감각되는 것들이 회화적 목소리로 만져지는 듯하다.
■  안성은 (미디어 비평, 큐레이터)
송다영 개인전 <엷은 부조화>
서문 : 안성은
진행 : 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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