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Farewell”, 2017
안녕히, 안녕히 가세요
글. 안성은(아트센터 나비)
인터뷰. 조대원 / 안성은, 이경민
가만히, 불러보게 되는 이름들이 있다. 귀를 쫑긋 기울이며 듣는 목소리보단 먼발치에서 흘려보내는 메아리로 남은 단어들. 지금은 부재한 대상의 이름을 떠올리다 보면, 이제는 지나버린 당시의 풍경 속에서 함께했던 소리도 사라지고 단지 장면으로만 남은 순간과 순간들만 정지된 움직임으로 포착되어 기억 한 켠에 자리 잡는다. 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이번 전시는 회화를 통해, 한없이 바스락거리며 우리 주변을 맴도는 죽음에 대한 애도이자 인사로써 관객과 조우하는 조대원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조대원 작가는 설치와 페인팅, 퍼포먼스의 방식으로 사적 사유를 공적 기억으로 스미게 하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언어화하지 못한 상태를 담은 이미지에는 그가 떠올리고 기억하는 순간들이 담겨있다. 그와 나눈 대화로 전시에 대한 소개/인사를 대신 하고자 한다.
안성은(이하 안) 먼저 작가소개 부탁 드립니다.
조대원(이하 조) 저는 아주 ‘포멀한’ 질문을 하는 작가예요. 이미 남들이 다 이야기한 것을 다루는 것일지도 모르는. ‘왜 사냐’라고 항상 묻는 게 저의 작업인 것 같아요. 살면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왜 사는지에 대해서 ‘이건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고민하고, 답을 구하기 위한 풀이 과정으로써의 작업�� 해오고 있습니다.
이경민(이하 이) ‘나는 포멀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가령 어떤 질문들일까요? 그리고 왜 그것을 ‘포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조 너무 가까이 있거나 당연해서 사람들이 질문하지 않는 것들 있잖아요. 예를 들어 ‘나는 왜 사나’라고 했�� 때, ‘넌 뭐 그런 질문을 해’ 하는 그런 질문들이요. 아버지께 대학교 3학년 즈음에, ‘아버지는 왜 사세요?’라는 질문을 드려본 있어요. 아버지가 보시던 신문을 탁 내려놓으시며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너는 선문답을 하냐’라고 하시더라고요. 어쩌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라는 성철스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은 해요. 존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대로 있음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것들이 계속 궁금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때 사람들에게 ‘너는 왜 사냐’라는 걸 많이 물어보기도 했었고요.
안 그럼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있어, 전시 혹은 개별 작업을 통해 내가 다시금 묻고 싶은 질문이 있나요? 나 스스로에게일 수도 있고 타인에게 일 수도있고.
조 최근 몇 년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집중하며 작업을 해왔어요. 지난번 개인전에서도 그랬고요. 그래서 이번 전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나의 고민과 질문에 대해 ‘이제 이만하면 됐나?’ 라고 조용히 돌아보게 하는 것 같아요. 여전히 ‘왜 사느냐’라는 대 전제에 대해, 이를 대답하기 위한 과정 중에 있지만요.
평소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체감하기 쉽지 않죠. 그런데 2년 전쯤, 그것이 굉장히 가깝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있었고, 죽음을 계속 바라보게 되는 상황이 많았어요. 소중한 대상들이 연이어 죽음을 맞이했던 때였거든요. ‘인간은 왜 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할아버지의 병간호와 수발을 들면서, 그 시간들이 저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죽음을 마주하는 데 있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반대로 담담함, 익숙함,혹은 의연함 같은 관점과는 달리, ‘얼마나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가’에 대한 생각같은 것이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슬프고, 겁나고, 다리가 후들후들하지요.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고. 연이은 죽음을 겪으며 제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죽음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였어요. ‘나는 이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죠.
안 있는 그대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작업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것이라면, 이 각각의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고, 또 담아지길 원했나요? 식물을 선택한 계기가 있으셨는지, 작업에 대한 소개 부탁 드릴게요.
조 예전에 ‘가을방학’이라는 밴드에서 제안을 받아 프로젝트를 진���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키우던,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 마치 주인을 따라가는 것처럼 결국은 죽어갔던 식물들을 그렸고요. 그때부터 시든 식물을 그리게 되었어요. 사실 죽은 식물을 그림으로 그리다 보면 대게 하나의 형태로 귀결돼요. 식물은 죽으면 다 비슷비슷하게 되거든요. 저는 철저히, 제 주위에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애먼 사회 문제를 끌어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거기서부터 출발했지요.
안 지금 전시에서 소개되는 식물들의 경우 내가 기억하고 있는/혹은 어디에서 수집한 식물에 대한 이미지이지만, 각각 죽음과 관련된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시든 식물을 그리면서 내가 떠올리는 죽음의 인상들이 이 식물을 통해 구현되는 형태가 맞나요?
조 맞아요. 가령 〈화장〉(2017)의 경우 할아버지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쓸어 담는 빗자루질을 떠올리며 그렸어요. 죽음과 관련된 순간들을 작업에 담아둔거죠. 식물의 경우, 죽어가는 것들은 밖에 내놓는 경우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접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채집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구글링해서도 찾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 그런 것은 안 와 닿았어요. 그건 그냥 정말 ‘죽은 식물’이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안 내가, 혹은 누군가 마주한 죽음들을 담길 원했나요?
조 비슷해요.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곁에 있는 친구들에게 죽거나/죽어가는 식물들 사진을 제보 받았고 그들이 실제로 찍어서 보내준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어요. 검색을 통해 받은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요.
이 저도 작업 리서치를 할 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뭔가 표피적인 느낌, 표면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단순히 구글링했을 때의 느낌은.
조 네, 맞아요. 표피적인 느낌. 물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들도 같은 과정을 거쳐 올라온 것이긴 할 텐데, 뭔가 거세된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드로잉을 할 때,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조 고민을 되게 많이 해요. 감상에만 빠지게 되면, 날 것 그대로의 감정만 투영이 되서 조형적으로 예쁘지 않아요. 제 생각에 그림은, 감정과 감각이 연동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감정 때문에 감각이 무시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서로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감정 몰입만 하게 되면 그 밸런스가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 작업들은 자유롭게 했어요. 완전 몰입하기도 하고, 가볍게 그릴 때도 있었고. 오히려 가볍게 그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아요. 감정에 몰입해서 그린 작업은 못생겼더라고요. (하하하) 저한테는 다 의미가 있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그 둘의 밸런스를 잡으려고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드로잉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저의 경우, 계속해서 몰입하려고 집중한다기보다 어떤 상황을 인지한 다음 붓질을 하면, 손이 가요. 손이 간다는 말은 뇌는 멈추고 본능적으로 그림�� 그리는 상태에 가깝고요.
이 이거 약간 자동기술법인가요? (웃음)
조 상황에 취해 그리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여기서 구체적이라는 것은 감정에 가까워요), 이를 인지하여 그림을 그리죠. 대체로 빠르게 그리려고 해요. 이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 올해 개인전 〈시간들(SCATTERED TIME)〉(2017)을 했어요. 그리고 그 개인전에서 다루었던 주제가 지금 전시의 연장 선상에 있단 말이죠. 그런데 매체나 방식이 확연히 달라요. 건너 뛰어온 건 아니지만, 이 방식과 주제를 고른 이유와 차이점이 있나요?
조 아까 첫 번째 질문 ‘본인은 어떤 작가인가요’와 겹치기도 하는데, 저에게 이번 전시는 죽음에 대한 목도, 혹은 수양의 단계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마치 박찬욱감독의 복수 1, 2, 3부작처럼(하하). 제 작업은 저 자신에게로 굽어 있어요.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는 순간에 있어서 관객은 저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에요. 물론 그리기를 마치고 나서는 다르죠. ‘나의 작업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볼까?’ 생각도 많이 하구요.
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가 중요하단 말인가요?
조 네, 그릴 때는. 그리고 난 후에 작업이 태어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궁금해하는 거죠.
안 저는 글쓰기 자체에서 되게 위안을 얻는 편이에요. 해소나 몰입을 위해서일 때도 있고. 글을 통해 내가 자유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글을 쓰는 내가 중요한 거죠. 이런 인터뷰도 다른 방식의 글쓰기와 같아요. 사실 글을 쓴다는 건 괴로움에 가까워요. 그런데 몰입의 과정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나를 보는 과정이 되는 것 같아요. 글쓰기를 마치면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까?’ 궁금하지만, 글 쓰는 당시에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에요. 그 글을 쓰는 바로 나에게 집중하는 것. 마치 그런 느낌이네요.
조 네, 정확해요. 애초에 내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 계속 불거져 나오는 주제들에 대해 수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 걸 보면 나는 그림을, 작업을 해야 하는 인간이구나, 싶죠. 아울러 죽음에 대하여 주제적 면에서는 연장선에 있지만 지난 전시는 좀 더 응어리진 감정 상태를 작업으로 표현했었어요. 응어리져 있던 기분들이 과거 그려둔 설치 드로잉과 딱 맞아떨어지면서 만들어졌었죠. 이전에 그려둔 설치 드로잉 중 ‘이건 이러이러하게 하면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만 하고 내용이 없던 것들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내용을 만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안 형식이 내용을 만났나요?(하하)
조 네, 그리고 경험을 만난거죠. 그게 딱 맞아 떨어지면서 ‘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 전시에서도 작업 중 두 점 정도는 과거에 있었던 드로잉이에요. 6–7년 전의 드로잉들을. 우연찮게 잘 맞은 작업이기도 해요. 우연히, 운이 좋아서. 지난번 소개했던 작업 중 하나는, 아이디어 드로잉 단계에서는 원재료가 스컬피(Sculpey) 였어요. 그런데 전시를 하며 유토(油土,plasticine)로 변경하게 되었죠. 남들은 재료 하나 바꿨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컸어요. 저는 그 재료(유토)를 만지며 많은 위안을 받았거든요. 위안이라기보다는, 죽음 앞에서 뭔가를 살리기 위해서 빌고 빌고 또 빌다가 놔 버렸던 상황이 제게 있었거든요. 일종의 탈진과 같아서, 더 이상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못하는 상태요. 유토는 정말 사후강직 상태의 살과 느낌이 거의 비슷해요. 처음 뜯어서 만졌을 때의 단단한 느낌이 특히 그래요. 그런데 유토를 계속 만지잖아요? 마사지하듯이 계속 만져주면 말랑말랑해져요.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원기둥을 만들었죠. 저는 그걸 만들면서 절실히 살리고 싶었던, 살리려고 어떻게든 주무르고 만졌던 대상과 죽음의 기억들을 떠올렸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그런 의미에서 재료의 물성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조 네, 특히 지난 개인전 때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이 스컬피나 흙은 끝이 있는 재료잖아요, 그런데 유토는 그러지 않으니까. 끝이 나지 않는 느낌이 있네요.
조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유토 재료설명을 보면, 작업 마무리 단계에서 베이비 오일을 섞어 바르면 더 마무리가 잘된다는 말이 쓰여있어요. 성서에서 기름은 굉장히 신성한 물질로 표현되잖아요. 약간 주술적인 생각일 수 있는데, 저는 그런 것마저 의미 있게 느껴지더라고요. 기분이 되게 묘했어요. 살리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던 것이, 재료를 통해 살아났다는 것. 베이비 오일은 사실 기능적 재료일 뿐인데, 저한테는 그렇게 생각되더라고요.
안 두 가지 생각이 나네요. 먼저 성경 나오는 향유가 생각나요. 예수를 섬기던 마리아라는 여자가, 당시에 금보다 귀하게 여겨졌던 향유를 예수의 발아래 부어요. 그만큼 당신을 섬기고 따른다는 의미였겠죠,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는 그 행위의 의미는. 또 하나는 성서와는 별개로 장사 지낼 때 시신을 닦을 때 쓰이는 기름이 생각이 나네요.
조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어요. 기름이 사용되는 재료를 다룬다는 것에 대해서요. 지난 전시에서는 사실 이런 것들이 잘 드러나진 않았어요. 그게 아쉬웠거든요.재료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인지 알았을지도 몰라요. ‘아는 사람은 유추를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지난 전시에 그런 것들에 대한 단서를 너무 남기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제목에 ‘간병’이라는 말을 썼었어도 알았을 텐데.
안 주제에 대해 일부로 가리고 싶었던 건가요?
조 처음에는 그랬어요. 가리고 싶다기보단, 너무 드러내는 게 촌극 같기도 하고 처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왠지 들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너무 뻔뻔한가, 하는. 너무 드러내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안 지난 개인전에서는 촉각적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공감각적이기도 한 설치가 주였어요. 매체를 회화로 진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이 전시에 소개된 회화가 마치 설치 작업처럼, 순간에 대한 움직임을 기록한 과정으로 느껴졌어요. 특히 전시 제목을 보면 더욱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작업과 주제, 전시명 모두가 하나로 엉켜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난 전시가 마치 옛날에 임금이 죽으면 혼이 돌아오라고 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면, 이번 전시는 잘 장사 지내서 마음의 짐까지 다독여서 보내려는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동일 선상이라고 하지만, 같은 사건 안에서 이 작가가 여러 번 매체를 바꿔가면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조 시든 식물들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저에게는 죽음을 다루는 것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직접적이기 때문에 이전 개인전에서는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싶었고요. 다른 면에서 보자면, 조금 지쳤던 것 같아요. 남들의 눈에서, 그리고 미술적 맥락에서의 내 작업에 대해서도요. 미술적 어법과 현대 페인팅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하는 행위가 현대적이지 못하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지금 잘 나가는 평면들을 보면, 더 그래요. 제가 구식이라 그런진 모르겠지만.
이 전시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오히려 지난 전시가 더 정돈된 형태였던 것 같아요 마치 눈물을 삼키는 느낌이랄까. 이번 전시는 눈물을 펑펑 터트리는 것 같아요. 떠나고 남은 흔적을 발견하고 눈물을 팡 터트리는. 아무래도, 혹은 희한하게 평면이라는 매체에서 감정선이 더 잘 드러나서 그런지 그렇더라고요.
조 네 그렇죠,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차라리 드러나면 더 담백해질 거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가 봐요.
안 작가인 ‘나’는 나를 관통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작품을 통해 사회적으로 제가 경험한 다른 죽음들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 작가가 다루는 죽음의 모습이, 어쩌면 이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와 직결이 된다고 여겨졌거든요. 죽는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떤 면에서는 회피하거나 마치 천 년을 살 것처럼 살잖아요, 사람들이. 그래서 오히려 이 작업을 보며, 사회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해 결국은 ‘나’의 고찰과 고민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서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작업의 동기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러한 궁금증이 해소되긴 했는데, 맞나요?
조 답을 다 말해주셨는데요?(하하) 전시를 준비하며 죽음에 대한 것을 집중해서 더 다루려고 했어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사회가 만들어내는 죽음의 ‘상’을 생각하기도 했고요. 죽음을 생각하면 피곤한 장례의식과 절차, 결국 돈 문제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죠. 거기서 사실 진짜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죽었다’ 인데. 막상 사실 유족들은 그 감정만으로도 힘든 상황인데 온갖 신경은 장례식,제사상, 손님 대접에 신경이 가 있게 돼요. 이러한 형식들이 일부로 슬픔을 덜 느끼게 한다는 생각도 하지만 너무 회피하게끔 만든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는 죽음을 차분하게 봤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고요. 죽음에 대해 우리가 받아드릴 때, 이것조차도 빨리빨리 넘어가려 한다는 생각이요.
안 어느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출산에서 아이가 사산되면 산모는 아이의 죽음을 몸으로 느끼지만, 사실은 아이의 죽음에 대해 곧바로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요. 아이의 시신은 어떻게 할 건 지부터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밀려오는 ���음의 절차에 대한 서류들. 보호자인 부모가 결정해야 하는 것들. 충분히 애도할 수 없이 과정적으로 접하게 되는 아픔에 대한 것들. 그게 장례절차에 대한 이야기와 맞물려 생각났어요.
조 과거 정통 장례식을 지낼 때 꽃상여를 매잖아요. 저는 그 과정이 수고롭겠지만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죽음을 더 많이 보았고,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과거에는 수명이 짧았으니 굉장히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겠죠. 여러 사람이 상여를 매고 곡을 부르면서 그 죽음의 가운데 함께 있었을 테고. 저는 과거와 현재로 넘어오면서 컴팩트하게 되지 말아야 하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해요. 죽음의 절차가 그런 것 같고요.
안 두 가지 생각과 하나의 질문이 생각나네요. 하나는 인도에서 마주한 죽음이에요. 갠지스에서는 밤마다 힌두교식 예배를 드리는데, 그 강에 꽃과 향초를 띄워요. 갠지스는 화장한 시체를 흘러보내고 목욕도 하며 삶과 죽음의 순간이 늘 함께 있는 공간이죠. 목욕과 빨래를 하는 강가 옆엔 곧이어 화장터가 있어요. 그곳 사람들은 늘 그 광경을 보는 거에요. 힌두교에서는 사후와 지금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갠지스에 띄우는 꽃은 현생의 나와 내 주변의 떠나갈 사람들을 위함이기도 하죠. 또 다른 하나는 제가 마주한 첫 죽음에 대한 기억이에요. 저는 본가 시골에서 꽃상여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작은 마을에선 누군가 돌아가시면 젊은 마을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선산을 올랐어요. 죽음 자체는 너무 슬프지만, 어떤 면에서는 만연해 있어서 우리도 받아드려야 한다는 공동체적 분위기가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슬픔에만 빠져있는 게 아니라 다들 위해주고 함께하는 분위기? 그러면서 떠올렸던 질문은 경민 씨가 했던 질문과 닿아있는 데, 드로잉의 과정에 대한 질문이에 요. 작업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한 번 더 듣고 싶네요.
조 일단 식물들을 보죠. 몇 가지 특징들을 봐요. 잎의 형태들 같은 것. 이에 대한 복잡한 배열을 보진 않아요. 사실 식물이 자라는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이 있으니까요. 그런 도식화된 방법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풀마다 자라는 방법도 있기 때문에) 형태들을 좀 더 관찰해요. 배열을 완벽하게 숙지하진 않아요. 다만 기억에 담아요. 작은 우표사이즈로 그려보면서 선을 익히기도 하고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경우도 있어요. 거기서 어떻게 그릴 것인지가 생각나서 그려지기도 해요.
안 앞으로는 어떤 것을 하고 싶나요?
조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우선 페인팅을 말하자면 좀 더 다양한 걸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식물을 계속 그리다 보니 증명사진을 계속 찍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운드를 다루는 설치 실험도 해보고 싶어요. 사람마다 들을 수 있는 주파수가 다르다고 하잖아요. 빈 공간에 고/저주파의 다양한 소리들을 채워서 사운드를 이용해 공간 드로잉을 해보고 싶어요.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를 들어볼 수 있게 하는,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게 듣게 되는 공간작업이요.
안 이상한 질문인데. 설치랑 드로잉 중 뭐가 더 재미있어요?
조 둘 다 재미있는데,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그림이 늘 아쉬��요. 그림은 정말 충분한 여유와 시간이 있어야 해요. 꾸준한 시간 동안 손으로 계속 움직여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죠. 어떻게 보면 설치는 말 그대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형태잖아요. 그런데 그림은 손을 통해서 구현해야 하니까. 드로잉의 완성 과정은 빠른 편이지만 그 완성을, 놓치지 않고 많이 하고 싶은 것 같아요.
안 잘 그린다는 게 뭘까요. 사람마다 다를텐데
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기준이 명확해요. 아까 말한 것처럼 내 감정을 충분히 이야기하면서도 밸런스가 잘 맞는 것. 노래 부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감정이 너무 격해지면 노래를 잘 못 하잖아요, 울음을 삼키느라. 좋은 노래는 감정과 표현이 잘 어우러지는 상태인 것처럼 잘 그려진 드로잉도 그렇다고 봐요.
안 이번 작업들은 밸런스 맞추기가 잘 된 작업인가요? 아니면 울먹울먹한 상태?
조 다 다른 것 같아요. 울먹울먹하기도 하고 울음을 참고 있는 것도 있고요.
안 경민씨와 제가 좋아했던 〈화장〉은 밸런스가 잘 맞춰진 작업인가요?
조 네, 저는 그 작업은 정말 50:50의 비율로 균형이 잘 맞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밸런스가 잘 잡혔다는 건, 나와 외부의 것을 만나게 하는 것 같아요. 이번 작업은 많이 울면서, 웃으면서 그리기도 했고, 동시에 덤덤하게 그리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후회가 없네요.
안 ‘울먹울먹’이라는 표현이 이번 전시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애틋하네요. 이상하게 짠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럼 식물을 떠안고 있는 손을 표현한 〈뿌리가 썩은 다육식물〉(2017)은 어떤가요?
조 그 작업은 툭 던지듯 그려진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재치라고나 할까요. 그리면서 장례식 생각을 했어요. 할머니 장례식 때 잘 모르는 친척 중 한 분이 와서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어요,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였구요. 몇 번 만나지 않았던, 생판 모르는 사람에 가까운 사람이 그 노래를 불러주는데, 눈물이 나서 못 듣겠더라구요. 위로를 나누는 몇 안 되는 방식으로 내 등을 쓸어주던 누군가의 손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안 손이 많은 걸 전하는 것 같네요.
조 그리고 마지막을 앞둔 사람에게 잡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그저 손을 잡아줄 뿐이죠.
안 우리는 왜 이토록 죽음 앞에서 숙연해질까요,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 저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사회적 죽음에 관해서도. 죽음에 대해, 사회적으로 케어해 줄 수 있는 애도의 기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_
조대원 개인전 <farewell>
서문 : 안성은
진행 : 이경민
디자인 : 진민선
설치도움: 심희규
_
공간 가변크기_서울시 성북구 삼선교로2길 11 www.dimensionvariable.com
-------------------------------------------------------------------------------------------------------
개인전 “시간들(scattered time)”, “ Farewell “에 대한 기획 평론가 천미림씨의 글
말하기 위한 방법
사랑에 대한 말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애정이나 삶, 추억 혹은 기억 같은 것들을 생각해내려 애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에게 문장이 아닌 오직 장면과 감정으로만 머물러 있다. 이렇듯 어떠한 단어는 직접 정의내리기 어렵다. 사실 나는 여기에서 이별에 관하여 말하고 싶다. 상실이나 허상에 관하여, 비애와 허무, 고통과 염증을 포함한 무언가에 대해서도. 이런단어들은 다른 것에 대한 말들을 먼저 두고, 단지 그것의 부정과 부재로만 설명할수 있다. 그 대상의 실체와는 다소 무관하게 나는 이것들을 말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사랑에 대하여 먼저 생각한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많은 것들을 내뱉고나서야 그것들이 지워지고 사라진 후를 말할 수 있다.어떤 작업은 보이는 것만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것은 볼 수 없는 너머의 감정만을 느낄 수 있다. 이 때 작업을 보는 나는 누군가의 머릿속을 유영하듯 산책하는기분이 든다. 전시를 보는 행위란 작가 안의 기억들이 중첩된 천막들을 걷으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이전 조대원의 전시 「시간들(scattered time)」은 그의 일상과 감정의 파편들이 공간에 널려져 있었다. 시작과끝이 정해진 바 없이, 큰 흔들림이나 파동이 드러나지 않는 물리적인 움직임들이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는, 설득과 외침이 없는 진동과 소음이 오히려 서글펐다. 눈물을 참으니 더 서러워 보이는 얼굴들. 그 들썩이는몸짓이 차라리 울음을 터뜨렸으면 했다.이번 전시 「Farewell」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나열이다. 작가는 이 이별을위해 가장 소중한 기억들을 특정 대상에 부여했다. 어떤 사건과 마음은 반드시 한번은 꺼내야 그것의 끝을 마주볼 수 있을 때가 있다. 화분의 도상은 각각의 형태마다 가족과의 관계맺음과 길러짐, 감정의 공유를 매달고 있다. 일상에서 ‘함께’라는단어는 꽤나 식상하지만 그 의미는 늘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 나 또한 유한한 것들을 외면하려 애쓴 적이 있다. 누군가의 병명이나 죽음, 정해진 이별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것이 실체를 가질까 두려웠다. 마치 말하지 않으면 그것이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애써 숨겨두고 단지 기약하는 말만 꺼내두었다. 작가가 할아버지의병상에서 ‘내일봐요’라고 인사한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력이무색하게도 유한한 것은 유한한 채로 무기한의 시간 속에 머물러있다. 작가는 이별을 인정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하여 캔버스에 자신의 길러짐을 그려낸다. 사랑을 말 할 수 있어야 그 부정으로서의 이별의 실체를 마주보고 인정할 수 있다.작업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결론은 일상의 그늘 뒤에서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글. 천미림(Lim Cheon)
3 notes
·
View notes
Photo
“시간들 (Scattered Time)” 2017
조대원
나의 작업에 주된 관심사는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형용 할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한다. 그런 상태는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풀이 과정 같이 느껴지는데 그런 상태를 관찰하고 떠오르는 ���미지, 현상 등을 조합해보며 표현하는 것이 나의 주된 작업 방식이다. 2015년 조부모님과 강아지 동희는 그해 모두 떠나갔다. 그들을 보살피며 죽음을 겁냈었고 결국 재로 변해가는 그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2년이 지난 뒤 그 시간들을 꺼내어 보며 생사의 사이 어딘가 형용할 수 없는 상태를 오브제와 물리적 현상을 통해 표현했다.
장소: 공간형
책임큐레이터: 장성욱
디자인: 진민선
도움: Studio Bigmini, 유정민, 김우진
0 notes
Photo
시간들(간병일기, 따뜻한 몸, 차가운 몸, 무반응) 핫플레이트, 물, 드라이아이스, 물 분배장치, 담요 가변크기 2017
*전시 공간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도록 설치 한 뒤 그 물방울에 각각 다른 반응을 하는 3가지(흡수, 기화, 승화) 오브제를 설치했다.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