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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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Putih Mutih 사원 주차 가이드| 꿀팁과 주차 정보 총정리 | 태국, 치앙마이, 사원, 주차, 여행
치앙마이의 아름다운 사원, Putih Mutih 사원을 방문할 계획이신가요? 웅장한 건축물과 고요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곳이지만, 주차는 늘 골칫거리죠. 걱정하지 마세요! 이 글에서는 Putih Mutih 사원 주차 꿀팁을 총정리하여, 편안하게 사원을 방문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도와알려드리겠습니다. Putih Mutih 사원은 인기 관광 명소이기 때문에 주차 공간이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더욱 혼잡할 수 있으므로, 미리 주차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원 내 주차장은 규모가 작으며,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리가 부족할 경우, 사원 근처의 유료 주차장을 이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원 주변에는 길거리 주차도 가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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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으로 취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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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안 올드타운 투어 추천 일정과 맛집 야경
호이안 올드타운 투어 추천 일정과 맛집 야경 호이안 올드타운 주요 명소와 볼거리호이안 올드타운 투어 시 추천하는 일정호이안 올드타운의 전통 음식과 추천 맛집호이안 올드타운에서의 야경과 밤 문화 체험호이안 올드타운 투어 준비와 최적의 여행 시기비교 분석표: 호이안 주요 명소 정보 비교 호이안 올드타운 주요 명소와 볼거리 호이안 올드타운의 대표적인 명소들로는 일본교, 푹키엔 사원, 탄키 고택, 전통예술공연장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을 지니며, 올드타운을 탐방할 때 빠지지 말아야 할 주요 장소들입니다. 호이안 올드타운 투어 시 추천하는 일정 효율적인 투어를 위해 오전, 오후, 저녁 시간대로 나눠 방문할 명소를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전에는 도보 투어로 주요 역사 명소를…
#베트남 여행#일본교 다리#탄키 고택#투본강 체험#푹키엔 사원#호이안 나이트마켓#호이안 맛집#호이안 명소#호이안 야경#호이안 여행#호이안 여행 팁#호이안 올드타운#호이안 올드타운 투어#호이안 전통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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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온지 벌써 한달이 넘었다. 한 달간 뭐했나 생각해보면 딱히 내세울 건 없다.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말한다면 어느 정도 적응된 것 같으나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지난 주 비바람이 세찼던 날이 지나니 날씨가 더워졌다. 저녁에는 종종 시원하지만 바람조차 불지 않는 날에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흐르곤 한다. 오늘은 아내가 약속있다고 나가서 나도 다시 한번 조지타운에 관광하러 나갔다. 지난 번에 둘러보지 못한 힌두 사원과 쿠콩시를 둘러봤다. 쿠콩시인줄 알고 들어갔던 곳은 호키엔콩시였는데 호키엔은 중국 표준어로 푸젠, 한자식 한글로는 복건福建이다. 중국 복건성에서 건너온 사람들 중 다섯 씨족이 모여 그들만의 클랜을 만든 것이다. 호키엔콩시에서는 무슨 행사가 있는지 거대한 향을 피우고 음식을 어마어마하게 준비를 해놓고 ���었다. 그들은 같은 티셔츠를 ���고 있었는데 몇 없는 관광객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남의 집 행사하는데 카메라 들고 다니는 관광객을 그리 좋아할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관광지이다 보니 무뎌진 거 같았다. 쿠콩시는 쿠(邱, 구)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만든 클랜이다. 콩시는 한자로 공사公司이며, 지금은 중국식으로 회사를 뜻하지만 당시는 클랜이라는 뜻이었다. 쿠콩시는 거의 박물관 수준이었다. 그들은 콩시를 짓고 같은 성씨 사람들을 모았을 것이고, 그렇게 그들의 사업을 유지했는데, 역시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돈을 찾아 이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터다. 힌두교 사원은 12시에 문을 닫아 아침에 갔는데 신발도 벗고 들어갔고, 모자도 써서는 안됐다. 나는 모르고 사진을 한번 찍었는데 다니다보니 사진을 찍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반바지도 입지 말라고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만 나에게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안에서는 향과 꽃을 태우며, 무엇인가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매일 푸자puja(의식)을 행하는 걸 알고 갔다) 주위의 힌두교도들이 모여 초를 켜고 끌때마다 합장하며 절을 계속 했다. 모르는 사람끼리 모여 있다기 보다는 서로 아는 사람둘 같았다. 역시나 작은 사원 안에는 관광객으로 느껴질 만한 사람은 달랑 3명이었는데 그들은 나를 힐끔 쳐다만 봤지 특별히 뭐라고 하거니 눈치를 주지는 않았다. 의식을 주도하는 사람은 승려로 보였는데 매우 뚱뚱한데다가 가사만을 두르고 속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아 조금 이상했다. 힌두교 사원은 막힌 공간은 아니었지만 넓지 않아 그 안은 연기로 가득 차있었고, 연기를 빼기 위한 환기팬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를 계속 태우는 것이 의식 중의 하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원 이름이 마하마리암만 사원이고 마하마리암만은 힌두교 여신이라고 한다. 기둥에는 많은 신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가네샤와 시바만을 알고 있어 궁금증이 더했다. 이곳은 입장료를 따로 내지 않으니 힌두교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하고 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갔던 조지타운은 서울로 치지만 사대문 안 쯤 되는 곳이라 점심을 어디서 먹어야 할지 몰랐다.(관광지 물가) 문득 생각이 나서 구글지도에서 미쉐린 빕구르망이라고 검색했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식당이 있어 그리로 갔다. 어묵국수/만두 세트, 차가운 플랫화이트까지 42링깃이었다. 조금 비쌌지만 나름 맛있게 먹었음. 요즘 환율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다. 한달 전 300원이 채 되지 않던 환율이 지금은 322원을 넘었다. 오르는 이유는 말레이시아의 경제 사정이 생각보다 좋기 때문이다. 이달 초만 하더라도 조금 내리면 환전해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가 다들 낭패를 보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지금이 가장 싸게 환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곳 생활을 기록하며 한국돈으로 환산하여 가격을 적었는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큰 오차가 생기는 걸 보고, 앞으로는 링깃 단위로 적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어제부터 페낭 역사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다. 역사적인 동네에서 그냥 이게 뭔지만 알고 보는 거랑 역사를 알고 보는 건 다르긴 하다. 이제 와서 생각나는 건 한국에서는 왜 이런 공부를 안했는지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거나, 현생에 지쳤거나. 잠실의 역사는 내 나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 같고 큰 의미는 없을 것이고, 서울의 역사란 거의 조선시대의 역사이므로 너무 방대해서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를 것 같다. 책 읽으며 도장깨기 하듯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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𝙉𝘼𝘾𝙄𝙁𝙄𝘾 𝙓 𝘼𝙏𝙀𝙀𝙕
𝐖𝐞𝐥𝐜𝐨𝐦𝐞 𝐭𝐨 𝐍𝐀𝐂𝐈𝐅𝐈𝐂 𝐎𝐅𝐅𝐈𝐂𝐄!
정우영 사원'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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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 vocab list
조직 생활 // company culture
공채(公採) 공개적인 방법으로 직원을 뽑음, open recruitment 올 하반기에는 대기업의 신입 사원 공채가 있다.
다양성(多樣性) [다양썽] 특성이 여러 가지로 많음, diversity 오랜 이민 역사를 지닌 미국은 인종의 다양성을 가진 나라다.
충돌(衝突) 서로 부딪치거나 대립함, collision 부장님과 과장님은 성격이 너무 달라서 회의 때마다 의견 충돌이 심하다.
반목(反目)하다 [반모카다] 서로 미워해서 사이가 좋지 않다. to hate each other, to be at odds 감독과 선수들이 의견 차이로 반목하다가 결국 감독이 팀을 그만두 었다.
조화(調和) 서로 잘 어울림, harmony, balance 그의 얼굴과 옷차림, 목소리는 조화를 이루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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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매장에 나오는데 날씨가 꾸물꾸물 ..
매장을 펴며 보니 시장 밖이 누리끼리한게 영 거시기한 비쥬얼 ..
황산가..?
그래서인지 시장에 손님도 뜸한데 양념으로 비까지 뿌려주니 느므느므 행복하시다
가뜩이나 주변 재개발로 주민이 없는 상황에서 날씨까지 딱딱 맞춰주니 몸이 매우 편하시네 ㅎㅎㅎ ( 한주간 고난주간 새벽특새로 피곤함을 아시고 이리 몸을 아껴주시니 얼마나 감사해 ㅎㅎㅎ )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상인분이 지나가며 하시는 말씀 ..
니미 재개발로 사람 없는데 선거 한다고 다 알바뛰러 가니 시장에 개미새끼 한마리 없네 .
그러고보니 공식 선거일정이 시작 됐구나 ..
어쩐지 우리 단골들 안보인다 했드만 다들 알바뛰러가서 그러가보네 ..
오늘 비 오는데 이런날도 그냥 쳐주겠지 ..?
선거알바는 그냥 한시즌으로 쳐주는건가..? 아니면 출석일자로 쳐주나..?
족발아저씨는 안 필요한가..?
뭐라도 좀 먹어가면서 해야지 하는거 아냐..?
저런 악덕 사장들을 봤나..
사원 복지가 영 아니네 ..
단기 계약직 이래도 그렇치 않그래요..?
먹을건 먹여가며 일을 시켜야지 ..그쵸..?
어쩐지 저양반들 뽑아주면 안면 싹 바꾸더만 원래 그런 양반들 이었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더니 .벌써 알바들 챙기는거 보니까 알겠네 .
그렇다고 족발 많이 시켜주라는건 아니고 ( 시켜주세요 쫌 ^ ^ )
일을.시키려면 좀 먹여가며 하자는 거지 ( 그니까 족발 좀 먹으라고 ..ㅡ ㅡ ;; )
비와서 그냥 아무말이나 해봤어요 ㅋㅋㅋ
#광명전통시장 #광명시장 #전통시장 #추천맛집 #광명왕족발 #광명할머니왕족발 은 #광명소셜상점 #광명8경 #광명동굴 #광명시 #LocalGuides 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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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트라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역사상 최초로 탄트라는 대중들 안에서 폭발을 경험할 것이다. 처음으로 그 시기가 무르익었다. 섹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가 된 것이다. 그 폭발이 서양으로부터 올 가능성이 있다. 프로이트, 융, 빌헬름 라이히와 같은 인물들이 그러한 분위기를 마련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탄트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탄트라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위한 기초를 다져두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심리학은 인간의 질병이 기본적으로 섹스로부터 나왔으며, 인간의 기본적인 광기가 섹스에서 기인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성욕이 중심적인 화두가 되면, 탄트라는 인간의 공통적인 유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학교, 대학, 사원, 교회에 존재해야 한다. 탄트라는 모든 곳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 에너지를 활용하여 초의식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 배워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탄트라가 여전히 비밀로 남겨진 것이다.
나는 그대가 탄트라에 대한 모든 이상한 헛소리를 떨쳐버리도록 돕고자 노력한다. 탄트라는 순수한 과학이다! 그리고 20세기가 끝나갈 때쯤 탄트라는 점차 전 세계적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 오쇼의 <탄트라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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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주) 형제 김치에서 함께 일할 분을 찾습니다 📃" (source: ateez.kqent.com)
behind photos from "명절의 향취" / "the scent of chuseok"
starring seongsang as -—
section chief park ✖️ assistant kim yeosang
박과장 (hwa) ✖️ 김여상 사원 (yeo)
#seongsang#seonghwa#yeosang#ateez#ateez seonghwa#ateez yeosang#ode to seongsang#에이티즈 성화#에이티즈 여상#성화#여상#호떡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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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blr Reactivation Challenge: Week 3 Day 3 - Vocab. List #3
Continuing with my workplace theme, here are a few more Misc. School Vocab!
공립 학교 - public school
사립 학교 - private school
국제 학교 - international school
Note: some 학원 may call themselves private or international schools…but there are official requirements in order to be legally recognized as a legit international/private school. This is good to be aware of if you’re looking to teach in Korea!
학년 - grade level (i.e. 3rd grade = 3학년 [use Sino numbers])
초등학교 - elementary/primary school (1학년~6학년 = Korean age 7-12)
중학교 - middle school (1학년~3학년 = Korean age 13-15)
고등학교 - high school (1학년~3학년 = Korean age 16-19)
학원 - academy; kids often attend math/English/music classes at 학원 after school, but there are also tons of academies for adults that teach everything from foreign language to cooking. A lot of them focus on test prep. because even companies use exams for hiring & promotions.
서울시교육청 - Seoul Metropolitan Office of Education “MOE” (you can replace Seoul with other cities)
등교 - going to school
미나는 매일 걸어서 등교해요. // Mina walks to school every day.
하교 - returning home from school
오늘 1시 50분에 하교버스를 출발합니다. // Today at 1:50 the school bus will depart.
보결 - substitute
학부모 - parents of students
신입생 - new student [see also 신입 사원 for new employee]
방과후학교 (수업) - after school (class); schools often run their own after school activities/classes that are generally cheaper than 학원 classes.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능”) - college entrance exams; this is the big deal test that Korean high schoolers take, it’s only given once a year and many businesses & schools start later than usual in an effort to have less traffic in the morning while the test-takers are commuting to their test sites. The English section is notoriously ridiculous.
매년 수능일은 1교시 수업은 실시하지 않습니다. // Every year on the day of the college entrance exams, we don��t have 1st period. [This is part of a real announcement at my job.]
And, just for fun, here are some important workplace words that don’t only apply to teachers!
4대보험 - 4 insurances (these are the standard insurances that employees get through their employers)
건강보험 - health insurance
국민연금 - national pension
고용보험 - unemployment insurance
산재보험 - workers’ compensation insurance (in case you’re injured on the job)
월급 - monthly pay
#langblr#studyblr#language learning#korean#한국어#vocabulary#langblr reactivation challenge#vocab list#한국어 공부#korean language#lear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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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흰색 사원, 과일 시장, 그리고 불운한 주차 딱지| 잊지 못할 여행의 기억 | 치앙마이, 여행 후기, 팁, 주차 딱지
치앙마이 흰색 사원, 과일 시장, 그리고 불운한 주차 딱지| 잊지 못할 여행의 기억 | 치앙마이, 여행 후기, 팁, 주차 딱지 태국 북부의 매력적인 도시 치앙마이, 눈부시게 빛나는 흰색 사원과 활기 넘치는 과일 시장은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었지만, 뜻밖의 주차 딱지는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습니다. 눈부신 흰색으로 장식된 왓 롱쿤, 흰색 사원은 마치 동화 속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섬세한 조각과 장식들은 경외감을 자아냈고, 그림자 하나 없는 하얀 세상에서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향긋한 과일 향기로 가득한 치앙마이 과일 시장이었습니다. 싱싱한 열대 과일들이 가득했고, 흥정의 재미는 여행의 활력을 더했습니다. 망고, 망고스틴, 용과 등 다양한 과일을 맛보며 행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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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e_dreamnote [#드림노트] #은조 가 쓰는 #드림노트하루 우수 사원 바근조양😗🍋 7월두 수고 많았어🩵 8월두 같이 행복하쟈💛 #DreamNote #ドリームノート #Eunjo #ウンジ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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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8-LIMYOONA__OFFICIAL] _ 융튜브 업로드▶️
안녕하세요❣️ 친절 사원 천사랑입니다🤗 ‘킹더랜드’ 첫 촬영, 제주도 현장 비하인드
#임윤아 #LIMYOONA #limyoona__official #융스타그램 #융카이브 #킹더랜드 #KingTheLand #천사랑 #CheonSaRang
[TRANS] _ YoongTube uploaded▶️
Hello ❣️I am Cheon Sarang, the kind employee 🤗 Behind the scenes in Jeju Island, the first shooting of 'King the Land'
#LIMYOONA #limyoona__official #Yoongstagram #YoongChive #KingTheLand #CheonSaRang
Source: limyoona__official HQ: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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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였던 이사벨라 버드 ���숍은 1879년 페낭을 찾았다. 영국이 페낭을 점령한 지 한 세기가 지난 뒤 영국인 여행가의 눈에 비친 조지타운의 풍경은 이러했다.
조지타운은 아시아계의 도시다. 중국인, 버마인, 자바인, 아랍인, 말레이인, 시크교도, 마드라스인, 클링인, 출리아, 파시교도 등 아시아계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들은 정크선이나 증기선, 다양한 아랍 선박을 타고 여전히 페낭으로 몰려든다. 아시아계 이주자들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궁핍에 빠지지도 않으며, 저마다 교육의 의상과 관습과 종교를 유지한 채 페낭에서 질서를 지키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다. 홍해에서 중국해까지, 메카에서 광주까지 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잡다한 유색인종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까닭이 궁금하다면, 클링 선원 한 명이 짧은 영어로 내게 한 말이 답이 될 것이다. ‘영국 여황 좋아, 노동자들 돈 벌고, 재산 안전해.’ 이 말을 해석하자면, 페낭의 아시아계 이주민들은 영국의 지배 아래 생명과 재산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며, 영국의 식민지 법정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이들 아시아계 이주민들에게 ‘영국 군대의 북소리’와 영국 함대는, 영국에서 효율적인 경찰이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비숍, 2017: 274~275).
비숍이 다녀간 뒤 다시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역사가의 눈에 비친 페낭은 어떠했을까? 말레이시아 역사를 전공한 빅터 퍼셀Victor W. W. S. Purcell(1896~1965)은 영령 말라야에서 식민지 관리를 지냈다. 해협식민지 정부는 1877년 중국인 문제를 다루는 화인보호관서Chinese Protectorate를 신설하고, 싱가포르에 보호관, 페낭에 부보호관을 뒀다. 퍼셀은 1925년 페낭의 부보호관으로 임명되었고, 1930년대 세 차례나 페낭의 화인부보호관으로 일했다. 말레이어와 중국어에 능통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말라야 관리의 비망록Memoirs of a Malayan Official》에서 조지타운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조지타운은 시민적 자부심이 대단한 도시였다. 조지타운 자치위원회는 상당한 자치를 행사했으며, 아시아인이 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 조지타운은 가로수가 장관이고, 녹지가 넉넉하며, 도시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시민의 열망도 대단했다. 자치위원회에서 도로의 가로수 한 그루를 자르는 안건을 두고 열성적으로 논의할 정도였다. ······ 페낭섬은 내가 말라야에서 거주했던 유일한 곳이다. 자연과 인공물, 그리고 사람들의 다양함과 알록달록함은 마치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는 유리 샹들리에처럼 다채로운 빛깔을 드러낸다. 피트가의 중국인 사원 관음정觀音亭Kuan Yim Teng(廣福宮Kong Hock Keong) 안을 들여다봤다. 자욱한 분향 연기 속에 굵은 초가 켜져 있고 그 가운데 불상과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거기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슬람 사원에선 무슬림이 경건한 기도를 올린다. 1월 말 참회와 속죄의 힌두 축제 타이푸삼Thaipusam 기간엔 타밀족 인도인이 땀을 흘리며 시바의 거대한 은빛 수레를 끌고 희민한 신호등처럼 거리를 행진한다. 축제 수레의 행렬에는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혀와 볼을 쇠꼬챙이로 뚫거나 맨살에 무거운 덩어리를 꿰어 매달고 무아지경에서 신을 향해 기도와 주문을 외치는 광적인 신자들을 볼 수 있다(Purcell, 1965: 173~5).
(55~57쪽)
프랜시스 라이트는 페낭을 점령하고 곧바로 섬 북동쪽 곶에 요새부터 구축했다. 이것이 콘월리스 요새이다. 인도총독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재임 1786~1793)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이 요새 남서쪽으로 격자형 도로로 구획된 직사각형의 도시를 건설했다. 가로로 북쪽에 라이트가Light Street(오늘날 Lebuh Light)와 남쪽에 출라이가Chulia St.(오늘날 Lebuh Chulia)를 두고, 세로로 해안을 면한 동쪽에 비치가Beach St.(오늘날 Lebuh Beach)와 서쪽이 피트가Pitt St.(오늘날 Jalan Masjid Kapitan Keling)를 장방형 기본 도로로 설정했다. 4개의 간선도로 사이로 길들이 교차하는 바둑판 도시가 구획된 것이다.
비치가와 피트가 사이에 남북 방면으로 ‘차이나가’가 있었다. 이 도로는 오늘날 ‘페낭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안에 면한 비치가는 초기부터 조지타운의 상업 중심지였다. 당시 조지타운의 도시 설계는 다양한 인종과 종족의 이우자들을 별도의 집단 주거지로 격리하기보다는 도심에서 도로를 사이에 둔 격자형 주거공간에서 어울려 살도록 하는, 엉성하면서도 융통적인 것이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거나, 하나의 격자형 블록 안에 말레인 주거지와 이슬람 모스크, 중국인 사당과 불교 사원, 힌두교 사원과 기독교 교회가 뒤섞였다. 퍼셀이 다채롭다고 했던 조지타운의 독특한 풍경은 이미 페낭 건설 초기에 틀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1819년 건설된 싱가포르가 인종과 종족 간 주거공간을 구획하는 도시 설계를 했던 것과 대비된다. 물론 페낭의 유럽인들은 기본적으로 콘월리스 요새의 서북 해안에 집단적으로 거주했지만,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유럽인도 격자형 도심에 거주하기도 했고, 아시아계 부자들이 유럽인과 이웃하기도 했다(Huang, 2002).
라이트가 설계한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 도시, 이것이 조지타운 도시 설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주민이 급증하면서 주택이 난립하고, 격자의 골격을 이루는 기본 도로 사이에 무수한 골목길이 생겨났다. 19세기 초 잇단 대화재로 도시가 정비되기는 했지만, 조지타운에 제대로 된 도시 계획이 적용된 것은 영국이 점령한 지 100년 뒤인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도심에 정착했다. 프랜시스 라이트는 요새 북서 해변에 주민의 식수원으로 삼을 큰 우물을 파고, 1에이커의 부지를 조성했다. 이곳에 정부 건물과 유럽인 거주지를 건설했다. 토지는 영국인 상인들이 거의 장악했고, 유럽인 자본으로 개발됐다. 페낭 건설 초기 토지 거래업무는 경찰 소관이었다. 당시 치안 또는 행정의 근육이 없었던 터라 토지 거래의 난맥상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주자는 날로 늘고, 도시는 수용 능력을 초과했다. 건물과 도로의 난개발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그 도시 행정 부재에서 비롯된 난개발이야말로 빅터 퍼셀이 감탄했던 조지타운의 다채로움을 낳은 모태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야자나무 잎을 엮어 짠 아탑 지붕의 주상가옥이 줄지어 섰던 조지타운은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는 참사를 겪으면서 점차 벽돌 건물의 도시로 바뀌었다. 페낭의 조지타운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도시로 선정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도심의 2층짜리 ‘숍하우스shop house’는 이렇게 생겨났다. 숍하우스는 19세기 해협식민지와 말라야의 도시에서 주로 중국인 이주자의 상업 및 주거 형태를 대표한다. 말 그대로 상점과 주택이 결합된 숍하우스의 특징은 도로를 따라 폭 5~6미터에 길이 15~30미터짜리 2층 건물이 서로 벽을 맞댄 채 이어진 연립주택이라는 점이다(Knapp, 2010: 20). 대부분 1층은 상점과 생활공간으로 하고, 2층에 침실을 둔다. 특히 1층은 도로에서 1.5미터 정도 들여 짓고, 처마를 길게 내거나 2층을 도로 쪽으로 내어 지었다. 이들 숍하우스가 도로를 따라 연이으면서 자연스럽게 뜨거운 햇볕을 가리는 보도가 만들어진다. 그 보도로 사람이 오가고, 가판대가 펼쳐지며 시가를 이룬 것이다.
영국은 종교에 관해서도 자유방임 기조를 유지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정관定款에서 식민지에 특정 종교를 전파하는 것을 금지했다. 영국국교회가 페낭 유럽인 사회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페낭에 영국국교회 교회인 세인트조지교회가 세워진 것은 1818년의 일이다. 퍼셀이 조지타운에서 보았던 중국 사원 옆에 이슬람 사원이 있는 모습은 영국 종교 자유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59~62쪽)
1788년 12월의 페낭 전체 인구는 1,283명으로 조사됐다. 당시 인구조사 분류 기준으로 보자면,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을 제외한 유럽인이 19명, 포르투갈계 유라시아인Eurasians이 197명, 말레이인과 자위 페칸Jawi Pekans이 530명, 중국인 537명이었다. 유라시아인은 영국식 ���종 분류로서,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혼혈을 가리킨다. 자위 페칸은 애초 인도 출신으로 현지 말레이인과 혼인한 이들을 가리켰다. 영국은 말레이반도의 말레이인은 물론 자바와 수마트라 출신과 부기스족도 모두 말레이인으로 간주했다. 출리아와 자위 페칸을 말레인인의 범주에 넣은 것이 독특하다. 당시만 해도 영국 식민 당국은 ‘말레이인Malay’의 범주를 종족ethnic이 아니라 종교를 기준으로 ’이슬람을 믿는 아시아계‘로 분류했던 것이다.
1810년 인구조사에서는 종교 대신 인종 및 종족이 분류 기준이 됐다. 이 조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초기의 인도계와 중국계는 대부분 인도나 중국에서 직접 이주한 것이 아니라 태국 남부와 말레이반도 북부의 커다 등에서 페낭으로 옮겨왔다는 점이다(Hussin, 2007: 185). 이 사실은 ’페낭 화인권‘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1810년 인구조사에서 페낭 조지타운의 도시 인구는 1만 3,885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인도 동남부 출신 무슬림을 가리키는 출리아를 비롯해 인도계가 5,604명으로 40퍼센트를 차지했고, 중국인이 5,088명(36.6퍼센트), 말레이인/자위. 페칸(프라이 포함) 인구는 3만 200명이었으며, 도시 인구는 1만, 2,135명으로 줄었다. 도시 인구가 1810년을 정점으로 1830년까지 1만 1,000~1만 2,000명으로 정체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후추 시세나 전염병 등의 원인도 있겠지만, 19세기 초 페낭은 인구의 유입과 유출이 유동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종별로 보자면, 페낭의 유럽인은 1820~1870년의 50년간 400~600명에 머물렀다. 1880~1905년의 25년간 페낭의 교역 규모가 400퍼센트나 증가하고, 서양 무역회사의 페낭 사무소가 잇달아 개설되었지만, 페낭의 유럽인 인구는 소폭 증가에 그쳤다. 190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프라이를 제외한 페낭섬의 총인구는 13만 1,917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중국인이 7만 5,495명인데, 반해 유럽인은 1,056명이었다(Wright, 1908: 731). 대체로 페낭의 유럽인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를 넘지 않은 셈이다. 페낭의 유럽인은 주로 영국인 식민지 관리와 상인 및 그 가족으로 구성되며, 말라카나 싱가포르에 비해 아시아계와 섞여 사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중국인 밀집 지역에 있는 페낭의 쿠콩시는 본디 영국 상인이 살던 저택을 인수해 증개축한 것이다. 유럽인 무역업자와 상인들은 비록 수는 적었지만 식민 당국의 정책 결정을 주도했다.
유럽인은 초기부터 상인, 자본가, 부동산 부자로서 장거리 국제무역을 비롯해 사탕수수와 코코넛 등 농원 개발에 주력했으며, 법무 대행이나 금융 등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했다. 특히 토지 무상불하의 혜택을 독차지한 덕에 부동산 부자가 많았다. 1806년 콘월리스 요새를 중심으로 반경 310미터의 토지와 주택 등 부동산을 보유가치로 환산했을 때 유럽인이 전체의 79.26퍼센트를 독점했다. 중국인이 16.42퍼센트로 뒤를 이었고, 나머지 아시아계가 약 4퍼센트를 소유했다(Hussin, 2007: 297). 하지만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조지타운의 토지 소유권은 급격하게 중국인으로 넘어갔다. 무역사무소와 상점이 밀집한 비치가에선 중국인 소유의 땅에 유럽인 건축가의 설계로 건물이 들어서고, 그고셍 유럽인이 세를 들어 사무소와 점포를 여는 방식이 보통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부를 축적한 중국인 부자들이 초기 유럽인이 불하받았던 땅을 사들인 것이다.
19세기 전반까지 유럽 상인들은 주석과 후추 등의 해협 산물 교역은 물론 인도와 중국산 상품의 무역에서 페낭의 중국인 상인들과 협력했다. 유럽 상인들에게는 중국 상인들의 교역망이 필요했고, 페낭의 중국 상인들에게는 유럽인 자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880년대 이전 페낭의 유럽 상인과 중국인 거상의 관계는 경쟁적이라기보다는 보완적이었다(Wong, 2007: 100).
초기 페낭의 가장 큰 종족 집단은 인도인이었다. 영국은 인도 출신 이주자를 클링Kling과 출리아chulia로 불렀다. 클링은 인도 출신을 가리키는 말레이어 ‘keling’에서 비롯했다. 조지타운의 ‘카피탄 클링 모스크’는 인도 출신 이주자의 이슬람 사원이다. 중국인 이주자의 지도자를 ‘카피탄 치나’라고 했듯이 인도인 이주자의 지도자인 ‘카피탄 클링’이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음을 방증한다. 출리아는 네덜란드가 무어인으로 분류했던 인도 남부 타밀 출신 무슬림을 가리키는 영국식 표현이다. 페낭 건설 초기 조자타운의 중심 도로 이름이 ‘출리아가‘인 것으로 미루어, 타밀계가 초기 이주자의 주류였음을 알려준다. 출리아인은 해운업과 무역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고리대금업에도 손댔다. 이들은 이른 시기부터 말라카와 커다에서 무역업 등을 했는데, 페낭이 건설되면서 대거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이후 인도 남동부 코로만델해안에서 페낭으로 직접 이주하는 출리아가 해마다 1,500~2,000명에 달했다. 무슬림인 출리아는 말레인과의 통혼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고, 이들의 혼혈 후에는 말레이어와 영어 통역, 경찰, 행정보조, 상점의 점원 등의 일에 종사했다.
페낭의 출리아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 모하메드 메리칸 누르딘Mohameda Merican Noordin이다. ’메리칸Merican’은 코로만델해안 출신 인도인 무슬림을 가리키는 말로, 출리아와 같은 뜻이다. 1820년부터 페낭에서 무역업을 시작한 누르딘은 1830년대 페낭 최대 부자로 꼽혔다. 그는 프라이에 거대한 농원도 운영했다(Wong, 2007: 51).
…
페낭의 말레인은 대부분 커다와 수마트라에서 이주했다.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도시 외곽에 거주했다. 해상교역에 종사하는 부기스족은 계절풍을 따라 술라웨시 남단에서 말라카해협을 통과해 페낭에서 연간 두세 달씩 머물렀다. 페낭 점령 당시 커다의 말레이 무역상 나쿠다 커칠Nakhudah Kechil이 라이트와 함께 배에 타고 페낭에 상륙했다. 커칠은 밀릴의 나무를 베어내는 등 라이트에 협력했고, 그와 함께 이주한 말레이인은 토지를 무상으로 받았다. 커칠은 라이트가 페낭의 책임관으로 있던 시절 경호관으로 식민지 관료 노릇도 했다(Vaughan 1854: 3~4).
페낭의 말레이인은 조지타운 교외에서 농사만 지었던 것은 아니다. 페낭 건설 직후부터 페낭에서 거래를 한 무역상인의 60퍼센트가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동안의 말레이인이며, 페낭을 말라카해협 북부의 중계무역항으로 만든 주역이 말레이계였다(Hussin, 2007: 69~100). 이는 페낭 초기의 상업적 번영이 영국 식민지와 중국인 상인이 결합한 결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낭의 운명은 교역에 좌우됐다. 초기 교역의 숨통을 틔운 주체가 수마트라 동안과 말레이반도 서안에서 활동하던 전통적인 말라카해협의 상인 집단이었다. 말레이 상인들은 비록 교역 규모가 작고 선박도 소규모였지만, 페낭과 해협의 무역항을 이어줬다. 영국인 말레이인으로 규정한 부기족 상인들도 리아우와 슬랑오르에서 교역품을 싣고 페낭을 왕래했다. 말레이 상인의 주요 교역물품은 등나무 공예품, 식량(사고야자, 쌀), 금속(주석, 금) 등이었다. 수마트라 상인들은 단일 품목을 싣고 와 페낭에서 판 뒤 돌아갈 때 인도산 의류, 설탕, 소금, 담배 등을 사 갔다. …
중국인이 섞여 살아야 했던 조지타운이란 공간과 다인종 사회의 얼개는 이상과 같다. 우리의 주제인 화인사회로 들어가에 앞서 페낭의 무명용사와도 같은 두 부류의 인간 군상을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바로 죄수와 노예이다.
페낭도 호주처럼 형이 확정된 죄수를 수용하는 수형식민지였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1800년 조지 리스George Leigh가 페낭부지사 자격으로 조지타운에 부임하면서 죄수의 수와 역할이 달라졌다. 세수 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재정난과 도시 환경 개선의 절박함이란 상충된 현안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묘책으로 죄수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조지 리스가 인도총독에게 더 많은 인도인 죄수를 요청하면서 그 수가 크게 늘었다. 1800년 130명이던 인도인 죄수는 1805년 772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페낭의 각종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강제 노역을 하는 죄수의 월급은 40센트에 불과했다. 1807년 조지타운에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마부의 일당이 20센트였다(Hussin, 2007: 240, 250). 죄수의 월급이 마부의 이틀 일당이었던 셈이다. 식민 당국은 죄수의 값싼 노동력으로 상인들과 마찰을 줄이��� 했고, 상인들은 세금을 더 내지 않는다면 죄수를 들여오는 것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페낭의 죄수 유입은 식민지 관리와 상인이 타협한 결과였다.
죄수들은 다양한 노역에 동원됐다. 늪을 메우고, 다리와 하수구를 만들고, 뱃사공과 마부 노릇도 했다. 정부 청사와 결찰서, 병원, 감옥, 요새를 지은 주체는 인도인 죄수였다. 심지어 ‘페낭의 변호사’란 별명을 얻은 등나무 지팡이 ‘말라카 케인’과 같은 공예품도 감옥의 목공방에서 제작됐다 죄수의 수는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1856년 페낭의 인도인 죄수는 1,358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페낭의 인도인 인구 8,000~1만 명의 10퍼센트가 넘는 수치다.
이들은 다양한 노역에 동원되었기에 페낭 곳곳에 수감 시설이 마련됐다. 감옥이라기보다 숙소 주변에 울티라를 치는 정도였고, 그나마 울타리도 죄수를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호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용도였다. 죄수는 당국의 보증 아래 가정이나 관공서에서 하인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1867년 페낭 당국은 죄수를 경찰 보조원으로 고용하기까지 했다(Pieris, 2002). 죄를 지어 형을 살고 있는 이가 죄인을 포박하는 노역에 동원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곳이 해골정부 아래의 영국의 식민지 페낭이었다.
노예는 죄수와 달리 인구통계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정책적으로 노예 폐지론을 지지한 탓에, 실제로 노예는 있어도 없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노예도 페낭에는 있었다. 초기 페낭 건설 과정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메운 것도 노예였다. 페낭의 말레이계 보호들은 전통적으로 노예를 부렸다. 1801년 페낭에서 노예주 723명이 1,200명의 노예를 부린 것으로 추산됐다. 노예주는 주로 말레이인이었지만, 유럽인과 중국인도 적지 않았다. 1805년 페낭의 노예는 1,400명에 달했다. 1807년에는 빚을 갚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 하는 부채노예가 조지타운에만 3,000명을 헤아렸다는 기록도 있다(Hussin, 2007: 188)
노예무역으로 팔려온 노예도 있었다. 남녀의 성비가 극도록 불균형했던 초기의 페낭에서 여성노예가 비싼 값에 거래됐다. 1820년 수마트라 동부 해안 지역을 조사한 영국인 존 앤더슨은 보고서에서 여성 노예가 페낭의 안정된 인구정책에 필수적이라며 이런 글을 남겼다. “여성노예는 페낭의 여성 인구를 충당하는 데(매매춘 알선하는 데) 유리하다. 수마트라의 아사한Asahan에만 300명의 노예가 있고, 특히 이들 여성 노예는 해마다 ㅔ나와 말라카로 수출된다. 여성들은 그곳의 돈 많은 중국 상인의 아내로 정착해 안락하게 생활한다. 가족을 꾸린 중국 상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고 현지에 정착하게 된다”(Lubis, 2009: 152).
(65~73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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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목요일 이후 외교적 접촉이 강화되었습니다. 모두가 라마단 단식을 끝내기 위�� 폭동 이후 그의 2인자 모하메드 함단 다글로 장군의 신속 지원군(FSR)의 매우 두려운 준군사들과의 싸움을 종��시킬 것을 간청했습니다. RSF는 현지 시간으로 오전 6시(파리에서도 오전 6시) "72시간 휴전에 대한 합의"를 발표하여 여전히 총격에 휩싸인 수단에 휴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매번 그랬듯이 이러한 발표는 후속 조치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Bourhane 장군은 4월 15일 적대 행위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국영 TV에 출연했습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그는 휴전을 언급하지 않고 Eid-ul-Fitr을 위해 국가에 연설했습니다. 그는 "올해 Eid를 위해 우리나라는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파괴, 황폐, 총알 소리가 기쁨보다 우선했습니다." , 시민 권력을 향한 단일 민족 (…). 지금까지 그의 라이벌 Daglo 장군과 마찬가지로 그는 4,500만 명의 수단인에게 직접 연설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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