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우리는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m-rm-r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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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매우 즐거웠다 ~ 살아있음을 느꼈다. 자유를 느꼈다!
요즘 내 삶이 힘들지만 오늘 밤은 너무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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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zzanji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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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ning A Tale
이 번역은 작년에 옮긴 아래 <고든 브라운은 누구인가>와 한 쌍이다: 그들 경력의 가장 화려한 시절이 도래했을 무렵 작성된 것, 2008년 벌어질 사건들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정반대의 관측만을 암시하는 것, 성장 배경과 초반 경력을 두루 설명한 것,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는 것.
조너선 프리들랜드는 영국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 독자들을 위해 글을 썼다. 앤디 베켓은 정치인으로서의 피터 만델슨보다 과거 노동당 언론 보도 당직자 모습에 익숙한 정계 내부자의 시선을 가지고 취재하여 영국인 신문 구독자들을 상대로 기사를 썼다.  그래서 <고든 브라운은 누구인가> 와 달리, 이 글은 영국 문화 전반에 익숙하고 영국 정치의 기초적인 구조와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옮겼다. 고유 명사 번역, 단어 선택, 주석에 이러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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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Mandelson in Hartlepool (1996) by Peter Jordan / Alamy Stock Photo
1996년 2월 4일, <인디펜던트> 지 일요판 문화면
  이것도 지어낸 이야기 SPINNING A TALE
 앤디 베켓 ANDY BECKETT
 피터 만델슨의 웰링버러[1] 유세 지원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런던에서 출발한 그의 일등석 기차는 신속하게, 제시간에 꼭 맞춰 그를 역에 내려주었다. 공손한 태도로 적절한 귀띔을 해줄 수 있는 지역당 담당자가 이미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만델슨은 노동당 만찬회에서 연설하기로 되어있는 펍에 조금 앞서 도착했다. 이미 잔뜩 들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당원들이 하나 둘 들어왔고, 그 짧은 사이 극성스런 지역구 의원 후보는 그에게 오렌지주스 한 잔을 권했다.
매끄럽게 면도한 날렵한 턱선을 가진 남자는 불그스레하고 주름진 얼굴을 가진 사람들 사이를 솜씨 있게 누비고 있었다. 만델슨은 이쪽에서 친근한 인사를 건네고 (“헬로 디어,”), 저쪽에서 사려 깊은 척 몸을 구부리고, 계산된 윙크를 하고, 일부러 h를 발음하지 않으면서, 전화 선거운동 일을 하는 젊은 노동당 열성 당원에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고 즐거운 목소리로, “나도 그래요. 나도 처음 당원이 된 게 열 다섯 살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는 눈을 돌려 지나치게 새빨간 카펫, 목재 무늬를 그려 넣은 싸구려 탁자, 맥주잔, 재떨이, 연기 사이로 큰 소리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간간이 힐끔거렸다. 과거 노동당 공보 총책임자였던 시절이라면 이 시선 끝에 맺힌 것은 분명 메트로폴리탄적 경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지역당의 사기를 북돋우고 전국적으로 자신의 지명도를 올리기 위해 내각 중진이라는 새로운 공적 형상을 입고 있는 바, 그의 눈빛에는 정치인이라는 직업에 걸맞을 진정한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그는 샐러드도 채소도 아닌 허옇게 뜬 절인 양파 한 점을 곁들인 감자칩과 페이스트리가 올라간 종이 접시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서 음식을 집어 입에 넣었다.
지지연설이 시작되자 이곳저곳 마디지고 투박한 손들이 박수를 쳤다. 피터 만델슨을 향한 노동자들의 박수 소리는 이곳에서 노동당 내 좌파들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증거 같았다. 남자는 재킷을 벗고 웰링버러에 대해, 그의 하틀풀 지역구에 관해, 또 자신과 함께 와 있는 취재기자들에 대해 농담을 했다.  “저는 스핀 닥터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만나본 적 있나요?” 청중이 폭소를 터뜨렸다. 여기는 2년 전 토니 블레어가 연설했던 곳이다. 이순간, 같은 장소에서 블레어의 최측근 참모가 그보다 전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허황된 말이 아닌 냉철한 공문서의 언어들로 그는 현실에 도래할 집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얇은 입술의 남자가 조만간 신노동당의 총선 캠페인을 지휘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보수당 표가 무려 다섯자리 수로 집계되는 지역구인 웰링버러에서, 그는 열정적인 젊은 지역구 후보를 옆에 앉혀 두고 감히 승리에 대해 언약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한마디 한마디 모두 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더없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사람들은 연신 담배를 피워 댔다.
그렇게 만델슨이 성공적인 연설을 마치고 만찬회의 경품 추첨을 진행한 뒤 어디까지나 품위 있게, 그러나 신속하게 출구를 향해 걸어가던 마지막 순간, 그 자리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구석 자리의 박수 소리가 노래로 바뀌었던 것이다. “인민의 깃발은 가장 짙은 붉은색, 수의 되어 우리 순교자의 시신을 덮는 기… ”[2] 노랫소리를 듣자 한쪽에 모여 대화하던 노부인들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문가를 돌아보았다.  후보자와 대화 중이었던 만델슨은 눈치채지 못한 듯 노래하는 이들로부터 등을 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가세하여 합창은 점점 커졌다. 노래가 후반에 이르자 젖은 눈가와 갈라진 목소리들이 방의 절반을 채웠고, 옛 낭만주의 시구의 절정에 이르러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비겁자들 후퇴하고 반역자들 비웃어도, 우리 적기가 여기 계속 휘날리게 하라…” 만델슨 옆에 있던 시의회 의원 하나가 소리를 애써 덮으려는 듯 불쑥 말했다. “여긴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만찬회장과는 다르니까요.” 만델슨은 꼿꼿하게 선 채로, 여전히 등은 돌리고서, 대화에 몰두해 계속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재킷을 다시 걸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옷깃에는 자그마한 붉은 장미가 달려 있었다.  십여 년 전 득세하던 사회주의자들을 정당에서 추방하기 위해 자신이 도입했던 상징인 붉은 장미였다. 곱고 창백한 뺨은 조금 더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끝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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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만델슨은 바로 이런 상황들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중앙당 당직자들과 웨스트민스터 언론인들을 회유하는 일에 정치 인생을 바친 후, 웰링버러 같은 초겨울의 황량한 미들랜드 소도시들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하려는 참이었다. 스스로 이런 새로운 야망을 가리켜 “정치가로서의 입신양명”이라고 표현했고 이는 웅변조로 피력됐다. “모든 종류의 정치적 입장을 아우르는 정책을 내고 벌어지는 작은 일 하나하나에 입장을 변경한다면 단순히 중재자일뿐, 정치인으로서는 쓸모없는 사람일겁니다...”
최근 몇 년 그는 “쓸모없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해왔다. 1990년, 햄스테드 출신인 만델슨은 런던에서 다섯시간 떨어진 북동부 도시 하틀풀의 보잘것없는 평의원이 되기 위해 중앙 정당 본부에 있던 자신의 언론 보도 제국을 포기했다. 작년에는 행정조직 담당 대변인이라는 야당의 한직을 받았다. 요즘은 시간을 쪼개 친구인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의 집에 틀어박혀 집권 후 노동당 정부가 무엇을 해야할 지 제안하는 블레어 혁명 The Blair Revolution 이라는 정책서를 쓰고 있다 (책은 이번 달 출간 예정이지만, 원고 마감은 아직이다).  “무척 고된 작업이더군요,” 고상한 목소리였다[3]. “제겐 익숙하지 않아서 큰 절제와 훈련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걸 사랑하게 되었지만요.”
그러나 “쓸모”가 있기는 꽤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권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권력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는 지금까지 최근 노동당 관련 건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어온 인물이다. 이러한 편재, 그리고 이 편재를 획책하고 유지해온 방식이 적을 끌어모았다. 그는 정당 내부의 반대파들과 좌파 기관지[4] 로부터 매우 위험하며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왔다. 당내 좌파의 거물 브라이언 굴드는 만델슨이 80년대 중반부터 블레어를 당수로 만들기 위한 “만델슨 프로젝트”를 은밀히 가동 중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블레어는 94년 경선 출마 당시 만델슨을 막후 조직책으로 인정한 바 있다 (만델슨은 블레어와 지역구가 이웃하고 있어 하틀풀 후보 선발을 준비할 때 블레어 막내딸의 방에서 하숙했었다). 이것은 “중재자”로서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필요 이상으로 음모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옛 동료의 증언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익명으로 남는 것을 선호한다). 그 결과 실제 유권자가 아닌 언론인들과 정치인들만이 만델슨을 유명하고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만델슨을 의식하는 것은 정확히 그런 사람들뿐이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오로지 당수에 의존해 활동함으로써 – 한 동료 의원은 경멸적으로 “맨 앞줄에 앉아 당수 연설문 아래 쓸데없는 것 끄적여놓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 만델슨은 정치인으로서 중대한 신임을 결여하게 되었다.  한 당내 적대자는 신임을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폄하한다. “누구든 피터 만델슨의 정책적인 면을 찾아낸다면 아마 그사람이 세계 최초 발견자일겁니다. 그에게 ‘장기’란 보통 다다음 총리질의응답까지의 시간이거든요.”  
만델슨에겐 이런 적들이 수도없이 많다.  블레어를 당수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을 감춰야 했던 것이 증거다. 블레어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만델슨의 가담을 알고 발길을 돌릴 것을 우려해 그는 “보비”(존 F 케네디의 참모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에게서 따온 별명)라는 암호명 뒤에 숨겨져야만 했다. 만델슨의 어느 하원 동료는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제가 극좌도 아니고 블레어 지지자인 한 스코틀랜드 출신 의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대화 도중 만델슨의 이름이 나오자 그친구가 그러더군요. ‘그 혐오스러운 남자, 또 시작이군! 도대체 여길 언제쯤 관둔다지?’”
물론 이 상황의 대부분은 닐 키녹의 노동당 현대화를 위해 만델슨이 더러운 일을 해야 했던 과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익명으로 언론 요약 보고를 하고 상황을 왜곡해 전달하는, 경멸적 조어로 “스핀닥터”라고 불리는 사람이 하는 일들 말이다. 만델슨 자신과 그의 동료들은, 한때 자기 위안을 얻기 위해 정당의 변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항의시위라는 벼락을 막아주는 일종의 피뢰침 같은 역할을 만델슨이 담당했을 뿐이며, 때로는 하원 의원들이 당권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으면서 변화의 명분을 얻어갈 수 있도록 기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셰필드 대학의 정치학 교수 데이비드 마퀀드는 이에 동의한다. “같은 일이 해롤드 윌슨에게도 일어났죠. 그의 만델슨은 공보관 제럴드 카우프만이나 마샤 윌리엄스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최근들어 만델슨은 “이제 더이상 로비 브리핑을 하거나 언론을 상대하지 않을겁니다.” 라고 말했다. 속임수를 쓰던 시절의 역할은 다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델슨이 “저는 오직 정당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라는 말을 했을 때 그의 동료 대부분은 카우프만이나 윌리엄스가 아니라 라스푸틴을, 혹은 스트랫퍼드 백작[5]을 떠올릴 것이다. 정치적 명성의 척도로 여겨지는 캐리커쳐 풍자쇼 스피팅 이미지 Spitting Image에서 만델슨은 동료들처럼 오만하든 바보같든 어쨌든 정치인의 형태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인간조차 아닌, 작은 머리에 달린 독니에서 군침을 흘리면서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최면술사 뱀으로 그려진다. 바로 그래서 “진정한 정치인” 만델슨은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책을 쓰고, 그래서 웰링버러 만찬회에 간다. 옛날 같으면 연단을 세웠겠지만 이제는 연단에 선다. 평소에 입던 늘씬하게 잘 맞는 회색 수트 대신 유행 지난 헐렁한 녹색 수트를 걸치고, 구깃구깃한 여행가방에 휴대전화와 잘 정리된 서류철들을 터질 듯 쑤셔 넣은 채, 귀한 금요일 밤과 토요일 아침 시간을 남부 미들랜드를 위해 포기한다. 2주 전 그는 먼저 적들에게 점령당해 탈환이 어려운 웰링버러의 당원들을 격려한 후, 목전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7192표 격차로 토리에게 뒤지고 있는 탐워스의 군중을 집결하기 위해 차를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그동안 비서들은 이 언론 권력자가 소도시의 선동가로 거듭났다는 목격을 전하기 위해 기자들을 동원했다. 나는 세인트 판크라스 기차역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아래턱은 내가 사진으로 알던 것보다 앞으로 좀더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촬영할 때 좀 더 잘 나오게 하는 각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언론관 시절 자랑스레 기르던 콧수염은 이제 깨끗하게 밀었고 덕분에 마흔둘보다 훨씬 젊고 잘생기게 느껴졌다. 전에는 수염 탓에 사립 학교 영어 교사 같아 보였다면, 이제는 텔레비전 영화에 나오는 악한 같았다. 머리는 아주 짧게 잘라 귀가 보이도록 깎았고, 새것은 아니었지만 반질반질 윤이 나는 구두와 품이 넉넉한 수트를 입은 그는 단정한 옛날 정치인 같아서, 차림새로만 따지면 애틀리 아래서 부총리를 지낸 그의 외조부 허버트 모리슨과 같은 내각 장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말 현대의 허버트 모리슨이라면 기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으러 어디론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와서 그는 일단 정중히 사과하고, 곧장 커프링크스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녹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만년필과 새 종이 뭉치 한다발을 꺼냈다. 나는 그가 A4 용지에 제목, 별표, 밑줄을 깔끔하게 구분해 표시해가며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십오분쯤 침묵 속에서 집중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글씨체는 단정하고 우아했지만 모음을 작게 쓰는 바람에 내가 앉은 일등석 맞은편 자리에서는 종이 위에 활자체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토니 블레어 하원 의원 귀하” 외에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6].
한참이 지난 후 그는 일부러 여유로운 척하며 먼저 말을 붙여왔다. “물어보고 싶은 것 있으면 마음껏 물어봐요. 이제 옛날처럼 신경 쓰는 거 없으니까요.” 그러나 지퍼가 열려 입구가 벌어지는 바람에 자꾸만 안을 힐끔거리게 되는 그의 여행가방과 달리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란 여전히 불가능했다. 정당 정책에 대한 문단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오늘 오후 일찍 있을 주식시장에 관한 블레어의 연설문을 한 단어씩 끊어 되풀이하고, 그것을 마치 유능한 버젼의 존 메이저가 읽는 것처럼 일정하고 지루한 톤으로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때에야 나는 겨우 끼어들어 질문을 건넸다. 노동당/국가/총선거 캠페인에 대한 당신의 주요 의제는 무엇입니까? 대답은 항상 하던 것과 같았다. “미래 닥쳐올 변화에 그저 휩쓸리기보다 앞서 충실히 대비하는 것이죠.”
이렇게 만델슨은 주말 대부분의 시간조차 올바른 노동당원의 자세라는 단단한 벽 안에 앉아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순간에만 그 벽 뒤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슬쩍 엿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당신의 정치적 신념은 무엇입니까? “저는 항상 확고하고 원칙 있는 사회 민주주의자이며… ” 그는 잠시 멈추었으나 눈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기차가 큰소리로 경적을 울렸다. “음… 정부의 중심적 역할은 경제적 효율과 사회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마거릿 대처가 할 법한 소리인데요? 그말에 그는 다시 벽 뒤로 후퇴했다. “완전히 아니던데요. 대처리즘 구경은 보수당 총리 덕에 다들 지난주에도 물릴만큼 해봤을텐데요?”
자신이 누구인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겠다고 말한 사람치고는 희한하게도, 만델슨은 나에게 질문할 때가 훨씬 더 즐거워보였다. 그래서 내가 이걸 누구한테 얘기했어야 한다고? 그사람들은 또 뭐랬더라? 이 얘기 이사람 친구 로버트 해리스에게 하면 안된다고 그랬지? 내가 그 “지긋지긋한” 스핀닥터 기사들 중 하나를 썼던 사람인가? 나에게 질문하는 순간만큼은 그가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눈을 반짝이면서, 깨끗하고 흰 치아가 살짝 보일만큼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재미있고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그가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음흉한 목소리로 중간중간 말을 끊고 들어오며 “앤디”라고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매일 하원 로비 출입 기자들에게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탔어요” 라고 속삭이던 고압적인 미소, 나를 덮쳐오던 스핀의 느낌을 문득 기억해 냈다. 나는 준비했던 질문을 잊어버렸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에 입각한 만델슨의 또다른 전술은 상대를 놀림감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날 탬워스의 꽉 찬 좁은 자선단체 행사장 강당에서 당원들의 전의를 북돋우던 중이었다. 그는 연설 중반쯤 이르러, “우리는 이미 개종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개종자를 원합니다!” 하더니, 갑자기 구둣발을 탕, 구르고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나쁜 소식이 하나 있어요.” 했다. “이 마을에 곧 전세계 언론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메모하고 있던 나를 가리켰다. 후텁지근한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백여명의 사람들이 미친듯이 웃어댔다. 그 웃음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만델슨은 이제 우리 중 하나다, 더 이상 언론들, 홍보관들, 즉 “저들”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웰링버러에서 이미 두 번, 같은 농담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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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함이란 그의 인생을 특징짓는 말이다. 웰링버러에서 두 노부인에게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의 선거 운동은 1959년 선거 결과 보고가 들어오는 것을 참관하던 다섯 살 때 이미 시작되었다. 60년대초 햄스테드 가든 섭어브에 살던 미들클라스 부모(아버지는 쥬이시 크로니클의 광고부장이었다)가 아들의 손에 노동당 홍보전단 뭉치를 쥐어준 것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일요일이면 그의 가족은 외조부인 허버트를 방문하곤 했다[7]. 해롤드 윌슨이 이웃에 살았다. 1964년 윌슨이 그간의 공백 – 오직 1979년부터 현재까지의 공백과만 비교할 수 있을 기나긴 공백[8]  – 을 깨고 노동당을 집권시켰을 때, 만델슨은 “완전히 경도된 채 길가에 서서, 윌슨의 차가 총리 관저로 향하는 것을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곧 그는 아버지와 함께 다우닝가에서의 티타임에 초대받았다.  
어린 만델슨은 체면을 차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이름을 알리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친구들에게 총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던 헨든 카운티 그래머스쿨 재학 시절에 학교를 일반 공립고교로 전환하는 캠페인을 주도했다. 교장은 그를 “극성 노조원”이라고 부르며 비난했으나 결론적으로 그 캠페인자체는 이후 학교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9]. 그가 가입한 첫 정당은 좌파 성향의 청년 사회주의자 정당으로, 베트남 전쟁을 지지한 노동당 외무 장관인 마이클 스튜어트에게 야유를 퍼붓는 등의 활동을 한 학생 모임이었다. 1971년 대학입학시험 직후 여름 옥스포드 캐서린 칼리지 장학금을 받기 직전의 여름, 그는 청년 공산주의 동맹(YLC)에 가입했다.
“공식적으로 가입이 되어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만델슨이 말했다. “모임에 몇번 갔었는데… 솔직히 왜 거기 가기로 결정했었는지도 이제와선 기억이 안 납니다. 잠깐 활동했었거든요... 소속감을 전혀 느끼질 못했습니다.” 그가 강조했다. “그때 전 대부분의 시간을 스위스 코티지에 있는 윈체스터 암스 펍[10]에서 거대 규모의 청년 모임을 조직하는데 쓰고 있었습니다. 그걸 좀 말이 되는 조직으로 바꿔 놓으려고 맨손으로 뒤집어 엎고 있었죠.”
만델슨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일 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그는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를 찾아가서 탄자니아 병원의 마취과 보조로 일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학교 생활에 별 열의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와 생전 처음 계급 투쟁을 발견한 것처럼 구는 다른 신입생들과 공감대가 있었을 리가요.” 그 대신 만델슨은 런던까지 통근하며 국제연합이 나미비아 독립운동 기금을 조성하는 일을 도왔고, 정부기금으로 운영되는 영국청년회 British Youth Council 에서 부의장직을 맡아 일했다. 그시절의 한 동료는 그곳에서 만델슨이 조직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피터는 영국청년회에서 공산주의 청년회와 여성청소년회 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임을 놀라우리 만치 잘 해냈죠.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1976년, 만델슨은 옥스포드에서 정치-철학-경제 전공 과정을 무난히 마치고, 영국청년회로부터 당시 급격하게 상승 중이던 청년 실업률에 대한 연구 과제를 제안받았다. 동시에 통상노조 소속 경제문제 관련 하급직 자리 제안도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실업률 보고서 –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 이라고 표현한 - 를 제출하자 곧 논란이 일었다. 원래 노조직은 그런 종류의 문서를 출판할 수 없도록 규정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부에서 호되게 질책 당했으나, 되려 그 일로 인해 학창시절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큰 보상이 돌아왔다. 정부 내각에서 실업률에 대한 연구를 발표해 달라고 그를 초청했던 것이다. “무척 당황스러웠죠.” 그가 회상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제 직감을 믿었습니다.” 1978년, 만델슨은 램버스 지방의회 의원이 되었다. 통상노조 직책에 머무르며 그는 노동당 정부의 몰락을 내부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노조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하며, 당시를 “잘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꽉막힌” 분위기였다고 묘사했다). 캘러헌 실각 이후 노조 위원장들과 장관들의 회의에서 작성한 메모를 앨버트 부스의 리서처 자격으로 하원에 보고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중앙당과 램버스 지방의회 노동당 모두 그가 대학입학시험 이후 영영 등을 돌렸던 극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1982년, 그는 정치를 그만뒀다. 정확히 말해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만델슨은 런던 위켄드 텔레비전 방송국에 취직해, 존 버트와 멜빈 브랙, 그렉 다이크와 크리스토퍼 블랜드와 함께 일했��. 그는 여기에서 빠른 속도로 승진해 주로 정치인들과 여타 언론인들에게 주목받는 중요한 일요일 점심 정책 프로그램 위켄드 월드 Weekend World의 프로듀서가 되었다.  “솔직히 뛰어난 방송 전문가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의 옛 상사였던 인물이 말했다. “위켄드 월드는 내용보다는 얼마나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느냐가 중요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는 때로 동정적으로, 때로는 잔인하게 주제를 다루며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유지하는데 성공했죠.”
그때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1985년 여름에 머물렀던 웨일즈에 작은 별장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잘 벌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별장과 가까운 근처 브리컨과 래드너 지역구의 보궐 선거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당수인 닐 키녹의 사무실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하겠다고 했고, 결과적으로 근소한 격차로 선거에서 패했다. 그 업적을 인정받아 노동당 언론보도 총책임자로 임명됐다.
“받침대가 흔들려 앉으면 부서질 것 같은 의자가 하나 있는 사무실을 받았습니다. 그게 제가 받은 첫 사무실이었어요.” 만델슨이 말했다. “커다란 잎을 축 늘어뜨리고 죽어가는 화분 하나도 창가에 놓여있었고요.” 일찍이 정당은 처참한 공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여론조사관들과 정당홍보관들로 이루어진 조찬모임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뿐이었다. 만델슨은 이 기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발굴해 늘려나갔다. 1986년 전당대회에서 자신감 넘치는 에메랄드색 배경이 세워졌고, 그 유명한 붉은 장미 상징이 도입됐다. 이듬해 키녹의 총선 캠페인 텔레비전 광고에는 온갖 새로운 촬영기법이 동원됐다.
“매일이 위태로운 시절이었어요.”  만델슨은 아직 노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더 까칠하고 거만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이러한 그의 불안은 정책이 어떻게 보여질까 포장을 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책의 방향성 자체를 결정하는 데에 개입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키녹의 지지를 업고 그림자 내각과 언론의 중개인를 자처했다. 노동당 인물에 관한 인터뷰 요청과 승낙에 대한 모든 결정이 그의 권한 아래 놓였다. 자연스럽게 그가 선호한 신예들(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은 승승장구했고, 그가 싫어하던 당내 좌파 인사들(마이클 미처, 존 프레스콧)은 꾸준히 소외되었다. 동시에 만델슨은 인맥을 총동원하여 자신이 언론에 손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찾아냈다. 그는 마감이 언제인지, 각 언론인들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어느 기자의 상사는 누구고, 편집장과 직접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전부 알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그에게 필요한 것은 통화 매너뿐이었다. 상대를 구슬릴 것인가, 협박할 것인가?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끝이었다. 당시 보수당 원내대표였던 노먼 테빗조차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 남자를 고용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는 막대하고 끝없는 수고가 들어갔다. 모든 ��요 신문에 전화하기 위해 토요일 밤을 포기하는 삶이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바라던 성취는 요원했다. 노동당은 백여석 차이로 1987년 총선에서도 패했다. 그리고 만델슨의 적은 더 많아졌다. 1988년, 그는 BBC의 한 상급직에 지원했으나 낙마했다. 결국 그는 “입신양명” 하기로 결심한다. 하틀풀이 손짓했다.
만델슨은 하틀풀에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구 일을 “사랑한다” (하틀풀 지역일보에 의하면 그는 인기있는 하원의원이다). 그는 지역 축구팀의 경기를 보러 간다. 영화관에 가기도 한다. “집에서 쉬면서 사람들이 저를 위해 녹화해둔 코미디쇼들을 시청하는 걸 가장 좋아해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서 앱솔루틀리 패뷸러스 Absolutely Fabulous나 원 풋 인 더 그레이브 One Foot In The Grave [11]를 틀어놓고 테스코에서 파는 고급 유지방 아이스크림을 먹는거죠. 친구들 불러서 놀 때도 있고, 그냥 자러 가기도 해요. 여기선 아침 7시 반이나 8시쯤 일어나요. 런던에선 6시반을 넘겨서 자본 적이 없는데요.”
하틀풀의 클러큰월 자택에서 그는 “일주일 중 이틀 저녁은 정치적인 것과 관계없는 일”을 한다. “친구들을 초대하거나, 발레를 보러 간답니다. 올해만해도 벌써 두 번이나 발레 공연에 갔다 왔어요. 한번은 목요일 밤에 유리동물원을 보러 갔었는데 정말 좋았죠.” 그는 여전히 그의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고 (아버지는 8년 전에 돌아가셨다), 자기 사생활을 보호하는데 신경을 온통 곤두세우고 있다. 인터뷰 전 나는 멋모르고 그의 옛 파트너[12]와 통화를 시도했다. 열받은 만델슨에게 곧장 전화가 걸려왔고, 그는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들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으며, 정치 인생의 현 단계에선 밝히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13].  
그러나 그의 “정치 인생”이라는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도대체 그는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은 것일까?  탬워스에서의 연설 후, 마침내 그는 자신의 모든 투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나에게 이야기 해주기로 했다. 그는 밀실로 나를 불러 45분 인터뷰를 허락해줬다. 머리 뒤에 깍지 낀 두 손을 대고, 탁자 위에 발을 올린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나와 동행한 사진사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만델슨은 여유롭고 탁 트인 사람처럼 보였다. “저는 정치인이 되어가는 과정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니지요.” 언제 그곳에 도착한지 알게 될까? “다음 선거에서 이겨서 정부 내각에 자리를 받게 될만큼 운이 좋다면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비해 그의 정치 도덕적 목표는 명확하지 않은 것같다. “이걸 당신에게 설명하기란, 참 어렵네요. 전 옳은 일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알아요…” 웰링버러에서 오는 차 안에서 그는 사람들의 “절망”에 분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이틀간 불평등과 사회주의, 사회적 갈등에 관한 언급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에게 비판적인 당내 좌파들은 그들 중도들의 신념이 무엇인지 자신들은 알고 있으며, 토니 뱅크스 하원의원같은 인물은 그 신념이 “대부분 우파에 가깝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델슨은 “유럽 대륙 국가 소속 사회주의 정당의 행보와 더불어 우파 정당과 기독민주당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역시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발언한 바 있으나, 이러한 발언의 공약 내 구체적인 형태는 오리무중이다. 그는 친유럽주의자로, 책을 통해 블레어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과의 단일통화 도입에 찬성하는 최근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팸플렛에선 최근 당권이 그것을 반대한 까닭에 블레어의 이름이 빠졌다. 어쩌면 30년대 런던에 공공주택을 건설하고 10여년간 정부 내각직을 지낸 외조부인 허버트 모리슨을 이상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마저도 문제가 있어보인다. 동료 장관이었던 휴 덜튼의 말을 빌리자면 모리슨은 정당 내에서 “자신과 직접 관련있지도 않은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을 뒷조종 하려드는 시어머니같은 상사”로 기억되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모리슨과 마찬가지로 그의 외손자 역시 노동당 내부에서 돌아다니는 모든 음모의 흑막이 자신이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드라마틱한 것을 좋아한다. 그는 여전히 외부적 목표보다 내부적 수단에 대한 것에 훨씬 능하다. “내가 참석하는 미팅, 내가 적는 노트,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만드는 제안서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경향이 있어요.” 형광등이 켜진 어둑한 백룸에서 갑자기 활기를 되찾은 만델슨이 말했다. “예측할 수 없는 사소한 사항들이 정치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데에 아주 중요합니다. 내 일은 다른 일들만큼 그런 사소한 것들을 발견해내서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에 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길을 닦아주는 거예요.”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만델슨은 무선호출기를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을 향해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혼잣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앨리가 또[14].” 토니 블레어의 공보비서관인 알라스테어 캠밸의 연락인 모양이었다. 그는 호출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듯했으나, 점심을 가지고 올라온 운전기사를 보자 다가가 곧 출발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만델슨은 라디오를 켰다.  BBC 라디오4 채널의 이번주 세계는 The World This Weekend 이 흘러나왔다. 해리엇 하먼과 켄트에 있는 사립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아 상대방이 들을 수 있게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봐, 그래봤자 여섯 번째 아이템이라고.” 그는 큰 소리로 말한 후 곧장 전화를 끊었다.  
말과 다르게 행동은 서둘렀다. 버밍엄 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지체없이 차에서 내렸다. 노트북을 들어올려 바람을 막으면서 귀에 전화기를 꼭 붙인 채로, 런던으로 돌아갈 기차가 기다리는 한산한 기차역의 중앙 홀을 향해, 주차장을 가로질러 빠른 속도로 걸어 이윽고 그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만큼 멀어져갔다.
갑자기 그가 뒤돌아 소리쳤다. “이 얘긴 쓰지마세요.”
!
(원문 출처 https://www.independent.co.uk/arts-entertainment/spinning-a-tale-1317157.html)
[1] 원문에서는 웰링-버러 Welling-borough 라고 하이픈을 써서 began well 과 말놀이를 의도했지만, 번역에서는 살리지 않았다. 웰링버러는 역대 미들 잉글랜드 접전지역구이다. 1996년 당시 92년 선거에서 이긴 보수당이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1997년 1.6퍼센트 표차로 앞선 노동당 후보가 당선된다. 2005년부터 다시 보수당이 탈환해 현재까지 피터 본Peter Bone이 하원의원으로 있다.
[2] 당가인 레드플래그를 제창하는 일은 블레어가 당수가 된 이후로 사실상 사라졌다.  
[3] 원문에서는 “his clipped, almost posh voice”. 짧게 끊기는 발음을 빠르게 늘어놓는 어퍼클라스의 언어 습관에 가깝게 들렸다는 것이다. 앞에서 유권자를 상대하며 워킹클라스 말투를 흉내내 h를 생략해가며 말하던 사람의 본모습을 비꼬고 있다.
[4] 트리뷴 Tribune 매거진을 가리킨다.
[5] 토머스 웬트워스 Thomas Wentworth, 처형당한 영국왕 찰스 1세의 참모를 가리킨다. 흔히 찰스 1세 실정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으로 여겨진다.
[6] 만델슨 자서전 전자책 버젼에 실린 자료에서 이러한 문서 구성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종이 왼쪽 상단에 “TO: TB / FROM: PM” 등 으로 이름 이니셜을 간단히 적고 아랫줄에 날짜를 표시한다. 여기에서는 기자를 의식해 빈 종이에 일부러 잘 보이게 블레어의 이름을 적은 것 같다.  
[7] 어린 피터 만델슨이 외조부와 실제로 어떤 관계였는가는 다른 번역(https://bit.ly/2AnU9NQ)을 참고. 만델슨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토요일마다 모리슨이 방문했던 것이고, 만델슨의 가족들이 직접 모리슨을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8] 1951년부터 1963년까지 보수당 정부가 집권했다. 총 네 명의 총리(처칠, 이든, 맥밀란, 더글라스-흄)가 재임했다.  
[9] 이 그래머스쿨은 각종 통폐합으로 없어질 위기였는데, 71년에 컴프레헨시브 스쿨이 됨으로써 폐교 위기를 넘긴다. 공립 전환 캠페인이 유효했던 셈이었다.
[10]런던 북서부 캠든에 위치한 청소년 센터이다. 옛 지명과 건물명일뿐 코티지도 아니고 펍도 아니다.
[11] BBC에서 방영하여 당시 큰 인기를 끌던 대중적인 시트콤들이다.
[12] 피터 애슈비.
[13]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14] “It’s Ally P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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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inner-side3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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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견례, 하고나서 느낀점은 우리는 결혼 할 인연 이었구나, 원래 가족이 되기 위한것 처럼 살아온게 비슷하고 생각하는것 환경 등 모두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한시 약속에 모두 12시30분 근처에 도착해 만나 4시30분이 되도록 무려 4시간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일년에 한번씩 사돈어른 오빠와 나 모두 모여 여행 가자는 이야기도 현실감 있게 날짜까지 정해주며 이야기했다. 오늘 확실해졌다. 우리는 결혼하기로 한것이 정말 잘 한 일이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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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omlives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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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onman 70.3 Finland 후기
후기를 쓰기가 너무 힘들다. 하염없이 길어질 것만 같은 이 글. 짤막하고 담백하게 쓰는게 목표다. 자, 한번 시작해 봅시다.
작년 속초에서 철인3종에 입문한지 거의 정확히 1년만에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대회인 하프 아이언맨에 도전했다. 결과는! 5시간 38분의 기록으로 무사히 완주하였다. 올해 1월만 해도 정말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어찌어찌 무사히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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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을 번쩍 들고 결승점을 통과하는 모습. 일주일 전이라는게 믿기지 않는다.>
여튼,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세 손가락에 꼽을만큼 성취감이 드는 활동이었고, 준비과정부터 지금까지 여러 사연이 많았기에 기록으로 남겨둔다. 입문에 대한 상담은 언제나 환영!
핀란드 Lahti에서 열린 Ironman 70.3
Part 1, 시합 후 개인적인 소회(시합에 대한 정보 없음, 개인적인 감상 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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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시 직후 Jonatas, Timur, 나, Janne와 함께>
이번 시합을 준비하고 또 본 시합을 치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이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도 여러 번 했고, 스스로 답하고 반문하는 과정을 여러번 겪었던 것 같다. 아직도 정리가 다 되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takeaway를 공유해본다.
1. comfort zone을 넘어선 도전에서는 뭔가가 upgrade 되기 마련이다
- 작년에 올림픽코스를 입문하면서도 분명 같은 것을 느꼈지만, 이번에 하프 아이언맨에 도전하면서 또 한번 이 과정이 있었다. 연초에 대회가 6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패닉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평소라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새벽 6시 철인3종 훈련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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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부터 6월까지 인스타그램 피드의 90%를 차지했던 나의 모습이다.>
- 정말 비가오나 눈이오나 새벽 6시면 와츠로 출근했다. 기억에 가장 남는 날은 2월 중순 어느날. 회사에서 일일 워크샵을 앞두고 남산을 20km 달린 새벽. 6시에 시작해서 어두컴컴한 남산 산책로를 달리다보면 어느새 신라호텔을 배경으로 동이트고 곧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저 위에 고정식 로라를 1시간 반씩 타고 출근하면 8시반. 기분이 말도 안되게 상쾌하고 좋았다. 회사에서 먹는 아침은 어찌나 꿀맛이던지. 내가 지난 5년간 거의 매일 먹은 요거트+무슬리 조합인데, 평소보다 3배쯤 맛있었다. 그렇게 넉달을 보내니 뭔가 달라지긴 달라졌다. 아마 잦은 출장만 아니었다면 더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2. 철인 3종은 정말 정직한 운동이다
- 나를 사회생활 이전에 만난 친구들은 알겠지만, 나는 정말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운동을 싫어했다기 보다는 항상 뭔가 의지는 있었지만 재능이 없었던 터라, 별로 안했다. 20대에는 흡연을 즐기고, 음주도 꽤 했고, 다른 취미가 많았기 때문에 운동은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그 전에는 학창시절 내내 체력장 5급의 공식적인 기록이 있다. 
- 철인 3종 입문 전에는 크로스핏을 열심히 했다. 2년간 꾸준히 했는데, 크로스핏을 하면서 운동에 재미를 붙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하지는 못했다. 근육이 워낙 안붙고, 근력 자체를 타고나지 못한지라, 어느 시점에서는 정말 늘지가 않았다. 그리고 무게를 많이 드는 것 자체에 흥미를 많이 못느껴서 한계에 봉착했다고 느꼈다.
- 철인 3종은 달랐다. 정말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왔다. 이것도 똑같이 어느 시점이 되면 기록 향상에 어려움을 느끼겠지만, 적어도 어느정도까지는 훈련량에 비례해서 기록이 향상되는것 같다. 그래서 생활습관을 규칙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실 어마어마한 훈련량을 꼭 소화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5회는 달리기/자전거/수영 가운데 하나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누구나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 올해 훈련량을 보면, 자전거가 가장 많았고, 수영이 가장 적었다. 이에 비례해서 이번 시합 기록도 나왔다 :-)
3. 운동으로 만나는 새로운 커뮤니티
- 본업 이외의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이냐? 가 결국에 어떠한 취미 생활을 가질 것이냐와 직결되고, 나아가서는 본업 바깥에서 어떤 사람들과 교류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번 시합에 참가한 핀란드의 전임 총리 Alexander Stubb이 멋진 말을 남겼다. “Triathlon is new golf for middle-aged professionals.” 사실 정말 시간이 없다고 느낀다. 회사 일에 언제나 100%를 쏟았다. 이미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여기에 더해졌다. 친구나 다른 취미생활에 시간을 투자할 여유가 없다.
- 달리기를 하고, 수영을 하고, 함께 자전거를 타는 시간은 낼 수 있다. 특히 새벽이나 밤 늦게라면 더욱 가능하다. 술을 마시거나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대신 새벽에 만나서 조깅하면서 이야기도 하고, 또 시합에 같이 나가서 교류를 한다. 물론 시합이 끝나고 마시는 맥주는 정말 엄청나게 맛있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다.
-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다. 이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나로서는 당장 앞으로 몇 년간은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미 최근에 들어서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니 새벽까지 무언가를 하다보면 새벽 운동은 물건너가기 일쑤다. 그래도, 장기적으로는 이런 분들과 같이 교류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이 즐거울 것 같다. 아마 이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을 것 같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경험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자전거 덕분에 소비에 대한 욕구도 꽤 충족시킬 수 있는 부분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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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셔 티셔츠와 메달, 배번...보기만해도 설레는건...>
여튼, 정말 지난 6개월동안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미 아는 분들은 알고 계시지만, 이제 곧 4년간 몸담았던 사랑했던 직장을 떠나게 된다. 험난한 창업 전선에 곧 뛰어들 예정이다. 이번 시합은 그래서 더욱 뜻깊었다. 나에게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기는 추억이었다. 지겹게도 갔던 핀란드였지만 새로운 장점들을 또 발견했고, 그간 이곳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도 유효했다. 핀란드도 잠시 안녕, 그리고 철인3종은 안녕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만큼의 애정은 쏟지 못할 것 같다. 이제 모든 애정은 정말 갓난아기와 같은 우리의 새로운 회사에 온전히 보내져야 한다. Goodbye for now! 
(Part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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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시합 전/시합날 (사진 위주의 정보)
<시합 전>
작년에 회사에서 단체로 핀란드에서 최초로 열리는 공식 아이언맨 대회에 참가할 사람을 모집했다. 이미 철인3종에 입문했던 나로서는 피해갈 수 없었던 기회였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하프 아이언맨에 도전할 생각은 없었다. 올림픽 코스만 해도 충분히 힘들었고, 그 2배라니, 상상만해도 끔찍했다. 어쨌든 시간은 후딱 흘러갔고, 결국 6월이 찾아왔다.
6월 25일 헬싱키행 핀에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헬싱키 출장이었기에 부모님을 설득해서 어머니와 아들은 나랑 함께, 아버지는 며칠 뒤에 합류하셨다. (결국 시합 응원은 오지 않으셨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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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같은 아마 이때가 저녁 8시. 공원에 여전히 사람이 많다. 매일 저녁 퇴근하고 놀이터와 공원에서 아들과 시간을 보냈다. 여름 북유럽은 정말 천국이다.>
다들 핀란드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유럽에서 가장 서울과 가까운 도시가 헬싱키다. 핀에어 직항을 이용하면 갈때 9시간, 올때 8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인천에서 아침 출발 비행기가 헬싱키에 오후 2시면 도착하고, 헬싱키서 오후 5시반에 출발하는 비행기가 인천에 다음날 아침 8시면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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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회가 열린 Lahti에서 2016년 6월에 회사 워크샵이 있었다.>
보다시피 잔잔한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이날은 게다가 날씨까지 따뜻해서 기온이 30도에 육박했다. 신청할 당시에는 이런 날씨를 상상했으나, 시합주간 일기예보는 기온 14도에 초속 8미터의 강풍, 게다가 호수 온도는 16도. 정말 악조건의 대회가 될 조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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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전날 모습. 강풍에 소나기. 다음날도 이럴까봐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이한 점은 대회가 오후 4시에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핀란드는 여름에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해가 진다. 이러한 특이점을 잘 살려서 오후 4시 시작, 자정 컷오프인 유니크한 일정이 탄생했다. 그래서 전날 오후 늦게 헬싱키를 출발하여 대회장에 가서 선수 등록을 하고, 그날 다시 헬싱키로 돌아와 1박,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라티로 넘어가 자전거 체크인 및 바꿈터 셋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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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참가한 우리 회사 팀원들. 5명을 제외하면 모두 철인3종 최초 경험자. 1명빼고 모두 완주를 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시합전날에는 레이스 브리핑과 파스타파티가 있었다. 나는 열심히 파스타를 먹느라 저 사진을 찍는 것을 깜빡했다. 여러번 참가한 시합이지만, 그래도 공식 70.3은 처음이라 열심히 레이스 브리핑을 들었다. 특이한 점은 트랜지션이 꽤 길다는 점, 그리고 사이클 중간에도 보급을 3회나 한다는 것이었다. 꼼꼼하게 보급 관련 사항을 체크하고 나오자마자 파스타를 꾸역꾸역 먹었다. 이번에는 카보로딩을 제대로 했다. 시합 3일전부터 삼시세끼 밀가루와 밥을 열심히 먹었다. 저녁에는 숙면을 취하고자 꼬박꼬박 와인도 한잔씩. 시차적응이 여전히 잘 안되서 새벽에 계속 깼는데, 약간의 알코올이 들어가니 아침 7시까지 푹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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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도 덩달아 함께 카보로딩 중. 헬싱키 역시 북유럽 특유의 살인적인 물가에 외식으로 특별히 먹을만한 음식은 없다. 그나마 피자를 먹는걸 추천한다.>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유럽 원정, 특히 핀란드나 북유럽이라면, 주저없이 음식을 싸들고 가서 드시는 것을 추천. 식도락이라 할만한 음식도 없고, 가격도 비싸다. 여행지에서 큰맘먹고 비싼 돈 주고 외식했는데 맛없는것 만큼 속상한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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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파스타 파티" - 파티라고 해서 뭔가 있나했는데, 그냥 부페를 차려놓고 먹는 것이었다. 맛은 없었지만, 그냥 꾸역꾸역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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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합 회사 공식 유니폼, 바바리안 트라이수트>
사실 6월 초 열흘간 출장을 다녀온 뒤로, 운동 의욕이 사라져 훈련을 매우 게을리했다. 1월 중순부터 5월까지 빡빡하게 새벽마다 훈련을 하다가 6월 들어 스케줄이 망가지니 정말 복귀하는게 힘들었다. 데상트 듀애슬론은 좋은 기록으로 들어왔지만, 마지막 토요일에 혼자 떠난 90km 양수라이딩에서 생각보다 저조한 평속으로 상심을 했다. 헬싱키 도착해서도 여전히 몸이 무거웠는데, 화요일에 다녀온 오픈워터 연습 덕분에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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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Oittaa 호수에서 오픈워터 연습>
다음날은 팀원들과 싸이클 30km를 가볍게 탔는데, 역시 컨디션이 좋았다. 내친김에 8km를 4분30초 페이스로 전력질주.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월요일에 도착해서, 화요일에 오픈워터 수영, 수요일에 싸이클 및 달리기. 목요일에 가벼운 조깅을 하고, 훈련은 생략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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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클 훈련 후 헬싱키로 돌아오는 길에. 이 날도 날씨가 정말 좋았다.>
자 이제 시합날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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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일기예보가 우리 팀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렸었다.>
날씨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는데, 위에서 봤던 아름다운 사진과 달리 토요일 날씨는 정말 드라마틱하게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다행히 시합날에는 저정도는 아니었다. 비가 예상보다 일찍 그치면서 바람도 약간은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춥고 쌀쌀한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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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점에 가서 사진을 미리 찍었다. 이때가 오후 3시 경. 7시간 뒤에 돌아올 것을 다짐.>
오후 4시 10분 스타트인 특이한 일정이었기에, 아침에 헬싱키에서 9시30분에 출발해서 11시가 채 되지않아 라티에 도착했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짐을 싸서 내려왔더니 12시. 자전거와 물품백 체크인을 완료하니 1시가 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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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체크인 전 “공식 출정 사진”. 원피스 수트가 몸매는 확실��� 더 좋아보인다.>
원���는 아침에 허겁지겁 일어나서 비몽사몽간에 짐챙겨서 잠이 덜 깬 상태로 수영을 해야하는데, 오후 4시까지 기다리려니 뭔가 좀 어색했다. 1시반에 팀원들 대부분이 식사를 한다고 했는데, 왠지 제대로 밥을 먹는건 내키지 않아 혼자 방에서 커피와 빵을 충분히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고, 3시에 웻수트를 챙겨서 대회장으로 향했다. 생전 안하던 수영연습도 참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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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본부 및 출발/피니시가 있는 Sibeliustalo. 라티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클래식 콘서트 홀이다.>
이번에는 단체로 왔으니 출발하기 전에 단체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처음 참가하는 분들이 많은지라 웻수트를 입으면서 다들 헤매는 모습이었다. 결국 뿔뿔이 흩어져서 사진은 찍지도 못하고 삼삼오오 수영 스타트로 향했다. 수영 스타트 대기하는 30분동안 소나기가 2번 왔고, 햇빛이 쨍쨍하기도 하고, 강풍이 갑자기 불기도 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날씨 속에 시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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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수영 스타트에 섰던 Timur와. 항상 이 자리, 이 시간에 가장 많은 대화를 하고, 추억을 쌓는것 같다. 우리는 내년에 함께 또 다른 시합에 참가하길 꿈꿨다.>
자, 이제부터는 거의 6시간 동안 끊임없이 움직이기만 했다. 피니셔픽스에서 또 고맙게 사진을 남겨주었다.
<시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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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간 30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어긋난 부분은 딱 하나 “수영". 그리고 굳이 더한다면 트랜지션 타임. 트랜지션이 길기도 했지만, 바구니 형태가 아닌 백 형태의 바꿈터에 대한 적응도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도 2차로 목표한 회사 5위안에 들어서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수영, 싸이클 후에 하는 하프마라톤에서 5분 페이스 안쪽으로 계속 유지를 못한것도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전체 기록은 나름 선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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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49:49
정말 처참한 기록. 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위 사진으로 봐도 뭔가 잘못된 표정을 알 수 있다. 혼자서 한참 바깥으로 돌았다. 지난 대만 대회 이후 두번 연속으로 발생한 문제. 우측 호흡만 가능한 내가 반시계 방향으로 돌았을때 계속 바깥쪽으로 도는 경향이 관측되고 있다. 시계방향으로 돌때는 부표나 라인이 계속 보여서 큰 문제가 안되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반시계 방향. 그리고 초반에 수경에 물이 들어가는 문제로 한번 패닉, 그리고 중간에 파도가 어마어마해서 한 번 또 멘붕. 오픈워터 연습이 거의 전무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음. 역시 철인 3종은 정말 정직한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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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클 2:51:44
개인적으로 이번 시합에서 가장 만족했던 부분이다. 물론 달리기 기록이 상대적으로는 더 좋지만, 싸이클은 중간에 한번 무너진 것 이외에는 잘 타서 기뻤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끝까지 잠바를 입을지 말지 고민했는데, 입기로 하길 잘했다 싶었다. 처음에는 햇빛에 바람도 적었지만, 중간 40km지점에서 엄청난 맞바람이 불어와 평속 30km가 5km 구간 세번 연속 무너졌다. 그때까지 평속 33km를 유지하고 업힐도 쌩쌩 잘 올라가고 있었는데, 아쉬웠다. 마지막 1/4 구간은 다시 아주 힘을내서 열심히 탔다. 그러나 또 한번의 실수가 있었다. 다운힐에서 또 욕심을 내다 커브에서 낙차. 다행히 속도가 거의 줄어있던 상황이었고, 바로 도로 옆 잔디밭으로 넘어진터라, 넘어진 즉시 일어나 자전거에 올라서 다시 내려왔다. 아마 자전거에서 떨어진 시간은 15초 정도 밖에 안되었던 것 같다. 아마 낙차가 없었다면 2시간 50분 이내로 들어왔을 것 같다. 또 하나 아쉬웠던 점은 보급품 섭취 스킬. 자전거 위에서 양손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해서 보급품으로 받은 에너지바를 여는데 애를 먹었다. 이것 때문에도 아마 몇 분은 손해를 본 것 같다. 그래도 평지/업힐에서는 여러 명을 추월하며 나름 좋은 퍼포먼스를 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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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1:44:29
표정이 또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정말 힘들었다. 사실 바로 전 시합인 데상트 듀애슬론에서는 완벽하게 페이스조절을 하면서 여유있게 뛰고도 4분 40초대로 10km를 달린터라, 그 때랑 비교해보면 정말 서너배는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싸이클 끝나고 런 시작전에 먹으려고 코오롱 리커버리를 물에 타서 준비를 해놓았는데, 이게 말도 안되는 실수였다. 500ml를 어떻게 T2에서 먹겠다는 계획이었는지...잠깐 들고뛰다가 1km 지점에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미 다리가 무거웠다. 4분 40초대 페이스가 힘겹게 느껴졌다. 그래도 5분 이내로 뛰려고 계속 안간힘을 다했다. 지난 하프마라톤 시합에서는 10km 지점에서 에너지젤 이외에는 물만 마시고 달렸는데, 이번에는 거의 5km마다 젤을 섭취했다. 그래도 힘이 부쳤다. 그래도 역시 런이 재미있는건 이때부터 어느 정도 순위를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팀 top 5를 Janne, Miguel, Jonatas, Timur, 나 이렇게 예측하고 있었는데, Timur가 ��� 앞에 있고 Jonatas가 내 바로 뒤에 있는 것이 보였다. 의외로 다른 Janne와 릴레이 주자인 Laura가 내 앞에 있는 것이었다. 처음 5km는 얘네는 무조건 잡자는 생각이었는데, 내 페이스대로 뛰는 것도 버겁다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다. 결과적으로 Timur가 2번째 랩에서 급격하게 처졌고, Jonatas는 꾸준하게 따라와서 결국 마지막 5km를 남겨놓고 우리 셋 중에 선두로 올라갔다. Jonatas보다 내가 늦게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마지막 1km 지점을 앞두고 콜라를 한잔 마시고, 스퍼트를 시도했으나, 다리가 너무 무거워 힘이 나지를 않았다. 결국 그와는 20초 차이로 아깝게 4등을 했다. 뛸때는 힘들었지만, 결과는 역시 런이 가장 상대적으로 좋았다. 회사에서도 Jonatas와 내가 독보적 1, 2위였다. 아마 날씨가 더웠다면 더욱 상대적으로 기록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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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표정으로 멋진 피니시 포즈 중인데, 이번에도 하필 내가 들어올 때 응원하는 친구들이 놓치는 바람에 피니시 사진은 물건너갔다. 언제쯤이면 하나 건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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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ckyandsavory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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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이틀 후면 약이 끊긴다. 병원 예약일보다 하루치 약이 부족하다. 저번에도 이틀 전에 약 한 종류가 모자라서 조금 넉넉하게 처방해주시면 안되냐고 물었더니 약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원래 내원일보다 더 긴 기간치의 약을 처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해서 세가지 약을 날짜에 맞추어 봉투에 다 따로 담아줄테니 이번엔 갯수가 맞는지 아닌지 알아보자는 말에 꾸역꾸역 오랜시간 기다려가며 타왔는데 역시 하루치가 부족했다. 이번에는 의사가 내 말을 들어줄까? 그랬으면 좋겠다. 병원에 가는 일은 고된 일이다. 진료는 5분도 안 되어서 끝나는데 진료를 위해 채혈하고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 수납하는데도 30분은 기다리는 편이고 약국에서도 길면 한 시간을 기다린다. 대체 무슨 시스템으로 돌아가면 병원이나 약국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걸까. 심지어 나는 예약환자인데.
매일 기분을 기록하기로 다짐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많이 지친 까닭이다. 무엇에 지쳤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서 더 갑갑하다. 적어도 원인이 확실하다면 정말 싫은 기분이 들 때에 그것을 탓하기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사람들? 나 자신? 그냥 모든 것에 있어 지치고 포기하게 되는 시기가 가끔 찾아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나의 기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요즘의 나는 심히 여유가 부족하여 작은 말에도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혼자있는 것을 선택했다. 차라리 쓸 곳이 없으면 낫다. 누군가가 날 알아주길 바라고 인정해주길 바라는 욕구가 조금은 덜하다. 트위터를 쉬었던 며칠간은 그랬다.
어제는 많이 슬프고 힘들었던 경험을 해서 그동안 쌓인 것을 속에서부터 긁어내듯이 토했다. 토해내고 나니 조금 후련해졌나? 잘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그런 감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최근의 나다. 슬픔이란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사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서 막연히 슬픔이라 부르고 있다. 벼랑 끝에 몰려서 주렁주렁 매달린 감정들은 밑으로 떨어지고 싶어한다. 그러면 편해지기라도 할까봐? 언제나라면 월요일 아침이 힘겨워 회사가기 싫다고 떼를 썼겠지만 오늘은 커다란 기계의 태엽이 되어 자기 맡은 바 다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슬픔이 나를 덮쳐올 때 해야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큼 고마운 일이 없다. 사회의 부품이 되는 순간 만큼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 문제는 부품이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할 때 부터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따뜻했고 햇볕도 좋았고. 바람도 선선해서 정말 좋은 날이었는데 집을 향해 걷는 길이 아름다워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인식하기에 내가 너무 초라했다.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전철에 몸을 싣고 집을 향해 가는 길엔 요즘 자주 애용하는 명상 어플을 틀고 슬픔을 다스리는 법 따위의 강의를 들으며 집에 왔다. 일정 구간을 지나면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까지는 사람이 엄청 없는 보통열차로 갈아타야해서 열차 안은 언제나 한 두명, 많아봐야 열 명 정도 타는데, 커다란 의자 한 구역을 나혼자 차지하고 앉아 슬픔을 다스리려고 애를 쓰고 있자니 (심지어 이 명상 어플은 영어밖에 지원을 안 해서 괜히 더 서글펐다. 한국말도 지원해준다면 더 좋은 어플일텐데.)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주변엔 아무도 없어서 나에게 주목하는 이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이 감각에 익숙하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공황이 온다. 우울이 실체화 하기 시작하면 몸의 통증으로 이어진다. 딱 두 역만 더 가면 되는데 당장이라도 바깥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토할 것 같아서 중간에 내려 한참을 실외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고르며 보냈다. 서글펐다. 앉은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시골 구석탱이라 이런 평일 대낮 플랫폼의 구석진 곳엔 사람이 없다. 다행이었다. 나는 왜이렇게 나약할까. 나는 건강한 사람이고 싶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싶다. 무던히 노력하며 사는 것 같은데 (거의 매일 운동을 한다는 건 제법 대단하지 않은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리고 오늘 나에겐 집에 돌아가면 해결해야할 문제가 남아있었다. 죽고싶을만큼 우울했다. 하지만 자주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죽고싶지 않다. 되도록이면 살고 싶고 이상적인 결과로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고 뭐 그렇다. 인간관계의 대부분은 외면해버리면 그만이다.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관계는 언제나 의도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이루는게 관계인걸 당연히 어느 누구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것이 마땅하다. 대신 우리는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멋진 시간을 갖을 수 있다. 그걸 해쳐나가는 것은 당사자들의 몫이다. (아마도 나��� 포함한.)
나를 포함한 당사자들이 잘 이겨낸 덕분에 어찌 저찌 저녁에 걸쳐 쌓였던 문제와 고름을 닦아내고 나니 조금 상쾌해졌다. 기운이 나서 고기도 구워먹고 맛있는 고추장 찌개도 끓여먹었다.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 나는 대체로 그러지 못한 편이지만 그래도 내가 믿는 테두리 안의 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내 의견을 말해보려고 한다.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고 결국에 태우다보면 주변에 남는 것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되는 만큼은 내 안의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이전에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산산조각 흩어진 내 사회성을 줍고 다녀야 하는게 우선이다. 일기인걸까? 뭘 쓰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새벽 다섯시가 넘었고 나는 너무 졸린대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해서 이렇게 넋두리를 쓰고 있다. 요즘은 어떻게 된게 모르겠는 일 투성이다. 나 자신, 내 감정, 내 기록. 그냥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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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우리가 ���학 파티에서 마리
<p>New Post has been published on https://www.travel-guides-and-books.com/%eb%98%90%eb%8a%94-%ec%9a%b0%eb%a6%ac%ea%b0%80-%eb%8c%80%ed%95%99-%ed%8c%8c%ed%8b%b0%ec%97%90%ec%84%9c-%eb%a7%88%eb%a6%ac/</p> <blockquote><p><strong>또는 우리가 대학 파티에서 마리</strong></p> <p><img src=""/></p><p>
또는 우리가 대학 파티에서 마리화나를 사용하여 우리를 실망시킨 받침대 (23 살)를 착용하기로 결정한 사람. 우리는 처방전 약물 남용이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 마리화나를 포함한 거리의 약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빠 가족, 아메리카 원주민 인 것처럼. 몇몇 먼 사촌들과 나의 아줌마 중 한 명이 더 어두운 머리카락과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가 계속 나에 대해 묻고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일했고, 나의 더 어린 시절에 밤의 생활을 충분히 이용했다. 그러나 도시는 그것이 예전보다 훨씬 바쁘다.
그러나 농구는 약 1 억 7 천만 명의 팬과 소년, 여자 축구 경기에 중점을두고 있습니다. 다른 스포츠에는 2 천 4 백만 명의 팬, 2 천만 명의 야구 팬, 1,700 만 명의 팬이 참여하는 배구, 약 1600 만 명의 팬이 참여하는 스포츠가 포함됩니다. 어떤 게임을해야할지 몰랐다. 너무 늦게 우리는 15 야드 라인으로 우리를 밀어 넣은 게임 페널티의 지연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그리워. 중국인은 이것이 개가 한 해 였다고 말했지만, 개가 내려 놓은 것 같아요.
우리는 2019 년에 셰인을 영입 할 가능성이있다. 현재 유통되고있는 비디오에 대해 알고 있으며이 문제를 조사하고 있다고 제이 앨런 대변인은 말했다. 축구 경기장이 야구 경기장이나 농구 경기장에 비해 얼마나 큰지보세요. 그들이 대구출장서비스보장 말할 수 있고, 웃으며, 판단없이 의견을 제시 할 수있을 때, 사람들과 함께한다. 경계 밖으로 공을 치는 것도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점수는 각 배트맨에게 개별적으로, 팀으로 부여되지 않습니다.. 큰 영화 사람 아니야? 간단한 보드 대구출장아가씨 게임으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전매권은 결코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IQ4 박스 요금도 없습니다. T 적용. 임상 증상은 경미한 TBI의 느린 증상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뇌진탕 후 증상 (PCS) 및 만성 외상성 뇌증 (CTE)을 포함하는보다 장기적인 장애가 겹치는 경우에도 복잡해 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모두 개별적으로 또는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외모에 대한 선입관 : 물리적 외관에 존재하지 않거나 경미한 결함 또는 결함이 적어도 하나있는 선입관이 있어야합니다. ‘선점’은 일반적으로 1 시간 이상인지 된 결함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개념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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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다리를 따라 나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나는 아무것도 손에 넣지 않았고, 나는 막 다른 길을 가다가 17 세의 개인 서버를 가지고 놀아서 방금 포기했습니다. 다른 팀은 모든 터치 다운이나 필드 골 후에 공을 소유하게됩니다. 플레이는 킥오프에서 시작됩니다. 테이블 메모 헤드 라인 순위 수치는 매년 데이터 변화를 보여 주지만 학교 간 클러스터링 패턴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일부 180 점이 Insead라는 상위 프로그램과 98 위를 차지한 학교를 구분합니다.
그러나이 장점은 작업 수명 균형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 주요한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최적의 작업 수명 균형을 달성하지 못하면 생산성이 저하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의 노동자들은 세부적인 방향으로 실제 커뮤니케이션 계획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이 연령대가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프로세스의 모든 변경 사항을 철저히 설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살충제와 같은 염소 및 다른 휘발성 유기 화합물 (VOCs) (휘발성 유기 오염 물질)은 비등점이 물의 비등점에 가까울 경우 증류를 통해 제거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일반 수돗물은 홍수 또는 이와 유사한 응급 상황에서 오염되지 않는 한 완벽하게 안전하며 증류 할 필요가 없습니다.
</p></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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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토요일 / 6일차] 충남 태안군 (안면도) ~ 보령군 (대천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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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토요일 / 6일차] 충남 태안군 (안면도) ~ 보령군 (대천해수욕장)
    날씨 : 아침한때 비, 구름많음
  주행거리 : 29km
  지출내역
  1000\ 태왕사신기세트장 입장료
7400 + 2000\ 대천행 선박운임, 자전거 화물료
6500\ 아이스크림, 담배
5250\ 라면, 맥주
4000\ 번데기, 핫도그
26000\ 조개구이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그래서 어제 그리도 바람이 많이 불었나보다.
  비를 맞으며 짐을 정리할려니 짜증이 밀려온다.. 으으으으으
  그리고.. 여행출발전 인터넷으로 구매했던 패니어가방 덮개가…… 작다………….
  분명히 사진으로는 토픽 DXP용이라고 설명해놨고, 양 날개도 덮히는 사진을 올려놔서 구매했는데..
  처음으로 써볼라고 하니, 양날개는 못덮는 레인커버이다. 장난해??!!!!
  와 완전 급짜증이다 ㅋㅋㅋ 출발하기전 물건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았던 내 문제도 있었지만, 당장 비를 맞을 짐을
  생각하니 짜증이 난다!!! -ㅁ-
    아침, 부대찌개
    별수 없이 비를 맞으며 출발! 오늘은 안면도를 벗어나서 영목항에서 대천항까지 배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목표.
  대천해수욕장에서는 물놀이도 하고 좀 쉬기로 하였다
  영목항까지 가던중, 길가에 태왕사신기 세트장 이정표가 보인다. 오~!! 다행히 비는 그쳤고, 드라마세트장.. 왠지 끌린다
  우선이와 나는 생각할것도 없이 그곳에 들렸다.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 (2500원)에 입구에서 고민하며 서성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곳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자전거 타고
  왔으니 그냥 들어가라고 하신다 ㅋㅋㅋ 나중에 양심적으로 1000원씩은 드리고 나왔지만
  조그만한 산을 하나 넘으면 태왕사신기 세트장이 한눈에 보인다. 오.. 멀리서 보니 꽤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소품들은 다 부셔지고, 천막내부는 지저분하고.. 나무로 만든 건물들은 썩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다.. 좀 허무했지만, 어짜피 들어온거 이것저것 둘러본다. 안타깝게 태왕사신기 드라마를 안봐서 모가몬지는
  잘 모르겠다만, 나중에 우선이와 재미난 놀이를 발견해서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재밋게 놀다 나와서 모.. 나쁘지는 않았다 ㅋㅋ
  (나중에 알게된것은 태왕사신기 세트장을 만들때 일을한 인부들의 급료를 주지 못하고 도망가버린 시공사때문에, 유치권행사중이였고
  현재 이곳에서 나오는 수입들을 그때 당시 인부들이 받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관리가 안되고 있는것)
    태왕사신기 세트장에서
    세트장을 나와서 영목항으로 가던중 그곳 주민분께 영목항에서 대천가는 배 시간을 물어보니 배는 하루에 몇차례 다니며,
  가장 가까운 시간이 얼마 안남았었다. 서둘러야겠다. (13:25)
  영목항까지 계속해서 달리다가 항구 근처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한다. 자세히 보니 우리처럼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같다.
  잠시 멈춰서 얘기를 해보니, 어린 친구였는데 혼자서 의정부부터 땅끝까지 달리는 중이였다. 대단하다..
  이 친구도 어짜피 영목항에서 대천가는 배를 탈 계획이라하여 함께 동행하기로 하였다
  함께 오래 달리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만난 일행이다.
    여행중 첫 인연, 위대영 군과 함께
    영목항에 도착해서 표를 구입하고 함께 배를 타고 대천항으로 이동했다. (영목항에서 대천항까지 50분소요)
  그친구는 오늘 군산까지 달릴계획이라 한다. 혼자서 대단한 친구였다. 떠나기전 잠시 대천해수욕장을 둘러본다 하여 함께
  대천해수욕장까지 이동하여, 이대로 보내기가 아쉬워 함께 라면을 끓여먹고 그 친구 사는곳이 목포인데, 먼저 가서 기다릴테니
  목포에 오���든 다시 보자고 약속하고, 연락처를 주고 받고 헤어졌다. (설마 했는데 진짜 목포에서 다시 만났다)
  대천해수욕장은 많이 변해 있었다. 오래전 왔을때와 많이 달라진 모습…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확실하게 좋아진것은 예전에 왔을때는 무료야영장이 없었는데, 지금은 무료야영장과 주변 부대시설을 잘갖추어 놔서
  텐트를 치는 우리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었다.
    짐을 정리하고, 물놀이를 하기위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였다~ 늦은 오후까지 물놀이를
  하다가 나와서 간단히 군것질을 하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밤이되니 역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친구들이 헌팅을 한다고 방황하는 모습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즐거운 구경거리가
  되었고, 노점에 도박성 + 사기성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것도 즐거웠다.
  사람이 많은걸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행중 돌아다닌 해수욕장이 모두 썰렁해서 아쉬웠는데, 역시 여름바다는 이런 모습이 어울린다
  기분도 좋고 하니 우선이와 맥주도 한잔씩하고~ 근처를 돌아다녔다.
  지금까지 서해안으로 오면서 많이 봤지만, 이곳 역시 조개구이집이 즐비하였다. 몇일전부터 계속해서 조개구이를 먹고 싶어하는
  우선이가 오늘도 그냥 있을리가 없었다 ㅎㅎ 계속해서 조개구이를 노래하니, 나도 오늘은 먹고싶어진다.
  둘이서 많은 고민을 하다 결국은 조개구이집으로 향했다 ㅎ
    즐거워야할 술자리가.. 여행중 가장 안좋은 기억을 남기는 순간이 되었다
    하지만.. 어찌보면 잘못된 선택이였는지도.. 아니다.. 차라리 잘된걸지도 모르겠네..
  조개구이집으로 오기전 좀 안좋은일이 있어서 인지 우선이와 내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는데, 술을먹는 내내 조용하던 우선이..
  갑자기 여행에서 나한테 불편했던 점을 말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많다 -_-…
  가만히 듣고 있다보니 출발부터 지금까지 상당히 많이 쌓인듯하다.. 함께 달리는중 내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못따라 잡을때도 많고 
  먹고싶은걸 못 먹으면서 참아야 하고, 중간중간 서로 가고싶은 곳이 틀릴때마다 기분이 안좋았고 너무 내가 일방적으로 이끄는것
  같다는 말을한다..
  물론 지금까지 서로 의견차이나, 사소한것으로 중간중간 벽이 생겼던것은 느껴왔는데 우선이가 이렇게 심하게 생각하는줄
  몰랐다.. 어떻게 보면 여행의 출발부터 여행의 목적이 틀린상태에서 출발을 했던것 같다.
  술을마시면서 감정이 좀 격해졌는지 우선이는 많은 이야기를 했고.. 일단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당장은 답을 해줄수 없고 머리속이 복잡해서 그냥 그자리에서 일어나서 텐트로 돌아왔다.
  우선이는 먼저 들어가 자고, 난 밖에서 머리속이 복잡해서 잠이 안왔다.. 여행 초반부터 안보이는 충돌이 있긴 했지만
  이정도로 골이 생겼는지는 몰랐기에… 내일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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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7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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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7일 화요일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군대에서야 항상 5시에 일어났지만 제대 이후에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거의 처음 같다. 5시에 눈은 떴지만 활동적으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날씨도 무척 쌀쌀했다. 아침 먹을 여유까지는 안 됐고 샤워만 했다. 옷 입고 준비하는 데에도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오늘 Yukino 씨와 하루 종일 즐거운 시간 보낼 생각을 하니 절로 힘이 났다. 6시 경에 집을 나섰는데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너무 이른 시각이라 다니는 차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날씨도 추워서 무작정 기다리기도 힘들었다. 공항이나 기차역 가는 경우에는 승객이 약자고 기사가 강자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임에 불구하고 비싼 택시비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내가 4,000숨을 불렀는데 대부분 기사가 5,000이나 6,000을 불렀다. 성립할 수 없는 거래다. 마침내 Yukino 씨와 약속한 시각인 6시 30분이 다가오자 내 마음이 무척 급해졌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대를 세웠는데 역시나 5,000숨을 요구했다. 그때 내가 갑자기 우즈베크어를 쓰면서 학생이니 부디 싸게 해달라고 말했더니 기사가 바로 승낙했다. 놀랍게도 기사와 계속 우즈베크어로 대화하면서 기차역까지 갔다. 더 놀라운 점은 내가 상당 부분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기사가 맨 처음 한 말은, 내가 우즈베크어를 했기 때문에 깎아주었다는 거다. 만약에 조금이 아니라 훌륭하게 했다면 공짜로도 갈 수 있었다고 그런다. 농담이겠지만 참 재미있는 경험이 되었다. 가는 길에 합승하려고 하는 손님이 있었는데 손님 자신이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실패했다. 다만 기사의 전화기를 빌려서 어떤 사람과 통화했는데 그제야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고 갈 수 있었다. 택시 기사 참 착한 사람인 것 같다. 덕분에 나 지각할 뻔 했지만 다행히도 딱 맞춰 기차역에 도착했다. 가방 열어서 어젯밤에 쓴 종이를 꺼내려고 했지만 뭔가 부끄러워서 그렇게 안 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바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엄청나게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배낭여행인 줄 알았는데 보통의 패키지여행보다도 더 많은 짐을 챙긴 것 같다. 만약에 나 안 만났으면 저 큰 캐리어를 하루 종일 끌고 다니면서 여행할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내가 대신 끌어줬다. 저 캐리어와 함께 여행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녀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택시 탈까 하다가 아직 우즈베키스탄에서 트램 타본 적이 없다고 하기에 9번 트램을 함께 탔다. 그녀에게도 좋은 경험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트램 안은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내리자마자 또한 극한 추위를 경험했다. 내가 캐리어를 대신 끌고 둘이 함께 우리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우리 집의 특성상 이렇게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4층까지 올라가기 진짜 쉽지 않았다. 오늘 운동 많이 한다. 그녀를 거실에 앉혀놓고 요리를 시작했다. 빵과 밥 중에 뭐 먹고 싶냐 물어보니 밥 먹고 싶다고 해서 평소에 하던 대로 쌀밥 안치고 감자와 양파를 볶았다. 소스도 토마토, 고추장, 소금 중에 하나 고르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고추장을 골랐다. 요리하는 동안 그녀에게 딸기 홍차 한 잔을 대접했다. 그녀는 거실에 앉아서 내가 놓아둔 한국사 책을 보고 있었다. 관심 좀 있나 보다. 내게 몇 가지 물어보기도 했다. 마침내 요리를 마치고 그녀와 함께 먹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일본도 한국도 아닌 제3국에서 내가 직접 만든 요리를 둘이 먹으니 아주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식사 마치고 그녀는 양치질을 했고 나는 설거지를 했다. 내 타슈켄트 지도를 펼쳐놓고 어디 갈까 함께 고민했는데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내가 혼자 정해줬다. 먼저 Chorsu 시장 보고 그 옆의 신학교와 모스크 등을 구경하기로 했다. 캐리어는 남겨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버스, 택시, 지하철로 이동할 수 있는데 그녀가 지하철을 타보고 싶다고 해서 Hamza 역까지 걸어갔다. 1주일 동안 여행을 다니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아직까지 쌩쌩한 것을 보니 보통 여자는 아닌 것 같다. 지하철을 타고 Paxtakor에서 환승하여 Chorsu에 도착했다. Chorsu는 타슈켄트에서도 아주 크고 유명한 시장이다. 몇 번 와본 적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아는 것들을 그녀에게 설명해주니 나도 무척 재미있었다. 대충 시장 구경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어느 상인이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들어보니 한국에서 5년 일하다 왔다고 한다. 게다가 당진에서 2년 살았다고 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 한국어가 무척 유창한 우즈베크인이었다. 짧았지만 유쾌한 만남이었다. 그녀와 함께 시장을 나와서 바로 옆 신학교로 향했다. 나도 지나쳐만 봤지 실제로 들어가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는 오랜 역사의 도시지만 타슈켄트는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한 곳이고 50년 전에 대지진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파괴된 적이 있다. 그때에 소련의 기술자들과 건축가들이 와서 현대적인 모습의 도시로 재건해주었다. 그래서 다른 지방 도시들에 비하여 역사적인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 신학교도 지진 이후에 복원한 거라고 들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신학교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줬는데 가이드비로 3,000숨을 받아 갔다. 역시 썩었다. 신학교가 자기들 돈 버는 데에 쓰라고 만든 게 아닐 텐데 참 잘도 써먹는다. 게다가 1층의 일부 방은 기념품점으로 쓰이고 있었다. 역시 답이 없는 우즈베키스탄이다. 물론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구경 마치고 Hazrati Imam으로 이동했다. 걸어가려고 경찰에게 물었더니 택시로 2,000숨이면 간다고 택시를 추천해줬다. 그러나 아무도 2,000숨에 가려고 안 했다. 버스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지하도로 길을 건너서 버스를 기다렸다. 곧 42번 버스가 와서 함께 버스를 타고 Hazrati Imam에 도착했다. 나는 두 번째이지만 언제 와도 참 멋진 곳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저번에는 그냥 구경만 했지만 오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코란을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와 함께 전반적으로 구경도 하고 기념품점도 많이 들렀다. 카자흐스탄 속담 중에 「우즈베크인들은 달나라 가서도 장사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웃긴 족속들이 아닐 수 없다. 별로 살 것은 없었지만 그녀는 친구들 줘야 한다며 조그만 찻잔을 다섯 개 샀다. 조금 비싸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Hazrati Imam의 핵심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코란을 보러 갔다. 아무것도 없는 박물관인데 입장료가 7,500숨이다. 나 여기 산다고, 학생증도 있다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역시 우즈베키스탄이다. 신기하기는 했다. 여기 대부분 박물관은 아주 당연하게도 다 가짜인데 이 박물관은 타슈켄트에서 거의 유일하게 진품이 있는 곳이다. 크기도 대단하고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잘 남아있어서 한 번은 볼 만한 코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밖에 없는 박물관이었다. 10분 만에 구경을 마치고 나왔다. 점심시간이 되어 메뉴를 고민했는데 그녀가 위구르 음식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 집 근처의 Kashgar로 데려갔다. Ganpen과 lagman을 하나씩 시켜서 나눠먹었다. 그녀가 좋아해서 참 다행이었다. 나도 오래간만에 먹으니 무척 맛있었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1시 반에 그녀가 어떤 우즈베크 소녀와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리도 멀고 이미 그녀가 가본 장소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곳을 더 보여주고 싶었다. 그 소녀와 통화했는데 반드시 Amir Temur에서 만나야 한다고 그런다. 무척 화가 났지만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면서 택시를 잡았다. 시간 딱 맞춰 도착했다. 소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다른 곳 좀 데려가고 싶었는데 자기 마음대로 Book Cafe에 가자고 그런다. 솔직히 나처럼 여기서 1년 사는 사람이야 뭔 짓을 해도 상관이 없지만 Yukino 씨는 단 1주일 여행하는 사람인데 Book Cafe에 앉아서 시간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러나 그 소녀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Book Cafe는 멀지 않았다. 외국인 전용���럼 보이는 아주 비싼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소녀는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우리를 데려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커피, Yukino 씨는 레모네이드를 주문했고 둘이 돈 모아서 소녀를 위한 코코아도 하나 시켰다. 정말 쓸데없는 시간을 보냈다. 소녀는 그냥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계속 하고 짜증만 낼 뿐이었다. 뭔가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으면서 짜증만 내는 모습이 전형적인 우즈베크인이었다. 어려서부터 태도가 이 모양이니 어른이 돼서도 답이 없는 게 당연하다. 유일하게 감사했던 점은 우즈베키스탄의 동전을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다. 여기서 동전 모으기 쉽지 않은데 이 소녀 덕분에 세 개의 동전을 더 모았다. 약 1시간 정도 카페에 앉아 있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소녀는 자꾸 Alay 시장에 가자고 그랬다. 오전에 이미 Chorsu 시장을 다녀왔고 Alay 시장 아무것도 없는 것을 내가 잘 아는데 소녀가 자꾸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니까 답답하고 열이 뻗쳤다. 자기 집이 그 근처란다. 그리고 일본문화원도 가자고 한다. 일본인 데리고 일본문화원 가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자기야 좋겠지만 관광객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장소를 소개해주려고 하니까 내 인내심이 슬슬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Mirabad 가자고 강력히 주장해서 마침내 관철시켰다. 택시 타고 싶었는데 소녀가 버스 타기를 요청하기에 결국 버스를 탔다. 참 힘든 오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나보고 의심스러운 사람이란다. 누가 누구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시간 낭비의 전문가이면서 아주 이기적인 소녀였다. Mirabad 도착해서 시장을 먼저 구경하고 러시아 성당에 들어갔다. 소녀는 자신이 무슬림이라서 안 된다고 밖에서 기다렸다. Yukino 씨가 러시아 성당을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타슈켄트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다시 소녀와 만났다. 부모님이 걱정해서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집에 가지도 않고 우리한테 자꾸 짜증만 내니까 나까지 무척 화가 났다. 참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참았다. 결국 자기 집 근처의 Alay 시장까지 가자고 계속 보채는데 Yukino 씨가 너무 착해서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말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갔다. 그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Amir Temur에서 갔으면 좋았을 텐데 동선이 완전 꼬이고 말았다. 열심히 인내했다. Alay 시장은 기념품이 많이 있었다. 나는 나중에 한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Yukino 씨에게는 별 재미가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소녀의 귀가 시각이 되어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택시를 탔다. NEXT에 갔다. 1층에는 마트가 있는데 오늘 Yukino 씨의 가장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여러 가지 물건도 보고 내가 번역도 좀 해줬다. 그리고 처음으로 캔에 담긴 plov 통조림을 보았다. 나도 처음 보는 물건이라서 무척 신기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그 통조림을 몇 개 샀다. 괜찮은 기념품을 산 것 같아서 나도 즐거웠다. 시간이 좀 남아서 NEXT의 2, 3, 4층을 모두 구경했다. 저녁으로는 NEXT에서 우리 집 가는 길에 있는 전통음식점에서 먹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늦어서 plov은 없었다. Pelmeni와 다른 하나의 전통 음식을 시켜서 둘이 나눠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오늘 그렇게 오랫동안 둘이 함께 다녔는데 같이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일단 둘이니까 우리를 찍어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Yukino 씨 자신이 사진 찍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내가 많이 요청하지를 못 했다.
마침내 저녁 같이 먹으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사진 찍었다. Yukino 씨 덕분에 정말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또 일본어 공부도 엄청나게 많이 됐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말하고 들으니 다시 많이 기억이 났다. 즐거운 하루였다. 집에 돌아와서 그녀의 가방을 챙기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오늘 전체적으로는 거의 더치페이로 계산했지만 공항 가는 택시비는 그녀가 냈다. 어차피 비싸지는 않다. 아쉽게도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짧은 만남이었고 우연한 기회였지만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집에 거의 도착할 때에 Rafael과 ���락이 닿았는데 오늘 Patrick’s Day라며 맥주 마시고 있단다. 그냥 들어가기 아쉽기도 하고 해서 지호에게 나오라고 연락했다. 집 앞에서 지호랑 만나서 택시 타고 Patrick’s Irish Pub에 갔다. Rafa와 Bahram은 이미 맥주 마시고 있었다. 넷이서 신나게 맥주 마셨다. 곧이어 David까지 왔다. 오랫동안 못 본 친구들 다시 보니까 무척 반가웠고 맥주 몇 잔 마시니까 기분도 아주 좋아졌다. 그리고 선거 끝나면 진짜 오시 가기로 확정을 지었다. 꼭 가고 싶다. 정말 기대된다. David는 혼자 집에 갔고 우리 넷은 한 택시를 탔다. 나랑 지호는 술이 조금 부족해서 택시 내리자마자 술을 또 샀다. 오늘은 화이트와인에 도전했다. 집에 돌아와서 과자를 안주 삼아 간단히 한 잔 더 했다. 아주 바빴지만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하루였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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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K팝 열차가 아바(Abba)의 나라 스웨덴에 도착한날, 싸이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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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K팝 열차가 아바(Abba)의 나라 스웨덴에 도착한날, 싸이 만세
  “K-pop 열차가 스웨덴에 도착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제목이었다. 스웨덴 역사상 이렇게 한국에 대한 화끈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을까. 군중들이 몰려서 춤을 추는 사진이 확 들어왔다. 
9.24(월)스웨덴 유력 일간지 다겐스 뉘히에떼르Dagens Nyheter지 문화면 제1면, 4면 및 5면 전체 지면은 K팝의 역사와 특징에 대한 소개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나는 스웨덴 언론사들에서 취재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거창한 제목으로 보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진은 9.22(토)오후 2시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의 중심부 광장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 플레쉬몹”을 찍은 것이었다. 그 사진 속 군중속에 나도 있었다. 
  1.
  오후 1시 10분. 대낮시간인데도, 아직 어두워질 시간이 아닌데도 어둑어둑한 하늘에 비가 내렸다.
세상에 이런 날씨를 누가 9월말이라 할 것인가.
    전날 나는 잠자기 전에 아바의 노래를 들었다. 그 중에 ‘워터루’는 나를 각별한 감회에 젖게 했다.
어린날 시골에서 국악판이 열리는 곳에 가곤 하던 내가 국악 명창이 아닌 대중음악 가수를 접할 기회가 딱 한번 있었다. 고향의 해수욕장에 유명가수들이 온 것이다.
지금 컨서트에 가는 젊은이들이 상상도 못할 허름한 간이무대였겠지만 내게는 당시 해변에 설치된 무대가 너무나 화려해보였다. 여러 가수들이 나왔지만 내가 가장 보고 싶었고 기억에도 남는 가수는 바니걸스였다. 쌍둥이 자매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 바니걸스는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이었다.
챙이 긴 하얀 모자를 쓰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바니걸스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모두들 앞쪽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군중들 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5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보았다. 바니걸스는 나에게는 천사로 보였다.
  당시 바니걸스가 부른 노래가 ‘워터루’였다. “마마. 나의 워터루 어디로 떠나버렸나.”로 시작되는 노래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정도로 황홀한 순간이었다.
 이후 그 노래가 스웨덴 출신 그룹 ‘아바’의 곡인데 한국말로 번안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아바라는 가수를 알게 되었고 아바는 내가 좋아하는 외국가수들 중에서도 앞쪽에 자리하게 되었다.
아바의 고향에서 우리나라 말로 된 노래를 듣게 되다니. 나는 한동안 감흥에 빠져들었다.
   2.
  “강남스타일“이란 뮤직비데오를 처음 보고 들은 것은 지난 8월 1일,
지인이 보내준 카톡을 통해서였다.(혹시 저작권에 위촉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스트레스를 ”쫙 해소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온 강남스타일을 보자마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내 뇌리에 떠오른 말은 ‘천재’란 말이었다. 연속해서 들었다. 이 음악과 춤을 만든 사람은 진정 천재라고 느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직감에 가까운 통찰력과 대중을 움직이는 마력을 가진 인물로 느껴졌다.   
  그동안 스웨덴 사람들이 한국을 너무 모른다는 불만감이 있었다. 계속 보도되는 북한관련 기사. 한국관련 좋은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리적으로 먼 곳이어서인지 다른 유럽과 비교해도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너무 낮아보였다.
스웨덴 사람들에게 ‘강남스타일’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를 얘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남스타일은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다. 오직 스웨덴만 빼고.”
강남스타일의 말춤에서 서부극의 카우보이를 연상할 법한 미국, 영국등에서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덴마크를 비롯한 다른 북유럽나라들에서도 이미 강남스타일이 노래순위에서 정상에 있는데 왜 하
필 유독 스웨덴에서. 그러면서도 나는 스웨덴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웨
덴이 어떤 나라인가.
  인구대비 음악인 비율이 세계 1위인 나라, 1천만이 안 되는 인구를 가지고도 미국, 영국에 이어 세
계 대중음악수출국 3위인 나라이다. 아바(Abba), 에이스 오브 베이스 등 대중음악의 별들이 수두
룩하다. 그것도 영어사용국도 아닌 나라가 말이다. 세계적인 곡을 만든 작곡가들도 널려있다. (전
세계적으로 5천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한 뮤지션의 90% 가량이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아일
랜드 등 영어권 국가 출신인 상황에서 아바를 비롯한 스웨덴출신 세 그룹이 이름을 올리고 있
다.).  
  다른 직업을 가지고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면서 음반도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혼자서 작곡
과 작사, 그리고 프로듀싱작업까지 모두 해버리는 홀로 음악기획사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보아와 소녀시대 등 우리나라 가수들의 음악을 작곡하거나 프로듀싱에 스웨덴 음악인들이 다수
참가하고 있다. 
  3.
  스웨덴 사람들이 새로운 음악에 대해 열려있고 좋은 음악을 알아보는 높은 안목을 가진 것을 확인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스톡홀름 인근 도시인 읍살라에서 가진 이지영교수(서울대 국악과)의 가야금연주회
(고수 : 이태백)에서였다. 이교수와 연락이 되어 연주곡목이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한바탕”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스웨덴 초청자측에서 골랐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청중을 찾기 쉽지 않은 우리 정통국악 한바탕을 유럽에서 연주한다니.  조심스럽게 청
��들에게 서비스하는 차원에서 짧고 빠른 것으로 몇곡을 추가할 수 없느냐고 제의했을 정도였다.
북유럽답게 싸늘한 5월 첫 토요일, 연주회장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박수라도 잘 쳐야지 하고 다
짐하고 있는데 청중들의 반응은 걱정했던 것과 달랐다. 쉬지 않고 연주되는 1시간을 그들은 진지
하게 듣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서공철 선생의 영혼이 스웨덴청중들에게 얼마나 고마워할지.
우리 국악을 이 정도로 알아보는 사람들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교수는 맨 앞줄에서 호기심을 갖고 끝까지 경청하던 10세가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이에게 내가
준 꽃다발을 다시 전달했다.
연주가 끝난 후 예술감독에게 쉽지 않은 좋은 곡을 선택해준 점과 잘들어준 청중들에게 감사하다
고 하자 그는 곡이 아주 훌륭하고 연주도 좋았다면서 멋진 말을 남겼다.
“우리는 청중에게 영합하는 곡을 선택하지 않는다”.  
    4.
  행사를 주도하는 K팝 열렬팬인 젊고 어린 친구들에게 오겠다고 신청한 사람들이 3천명이 넘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과연 그들이 와 줄까.
스톡홀름 중앙광장이라 할만한 Sergel 광장. 왠만한 비는 피하지 않고 내색을 앉고 걸어야 스웨덴 인이 된다.
그렇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굵기는 아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행사를 주도하는 팬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반갑게 인사한 후 바로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하필 오늘.
  지금 상태가 지속된다면 쉽지 않을 것이고 조금만 더 굵어진다면 행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광장을 오갔다. 광장 옆으로 젊은이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그들이 비에 위축되지 않을까. 곧 시작할텐데.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이 비를 맞으면서 생쥐처럼 초라한 몰골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이 곳 언론들이 어떻게 보도할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비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나부터 보여줘야겠다.
 우산을 접어서는 젖은 우산채로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오후 2시가 되자 가느다란 안개정도로만 흔적을 남길 뿐 흐릴망정 비는 거의 그쳤다고 봐도 좋았다.
   하늘이 도왔다.
삽시간에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광란의 현장에 있었다. 
500여명의 사람들이 춤을 추었다. 그들을 둘러싼 2000명이 넘는 관중.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나는 천국속에 있는듯했다. 한국말로 나오는 노래에 따라 벽안의 젊은이들이 즐거워하고 춤을 추는 광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젊은이들. 동양의 멋을 아는 젊은이들. 동양의 해학에서 매력을 발견한 사람들.
중간에 ‘오빠는 강남스타일’이라는 멘트가 나올 때가 되자 젊은이들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확실하게 외워서 발음할 수 있는 단어로 보였다. 드디어. 그 부분이 나오자 “오빠는 가나암스타일”이라고 외치는 그들. 세종대왕이 벙글벙글 웃을 광경이었다.
그렇게 천국은 끝나가고 있었다. 끝나자마자 젊은이들이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왔다. 그들과 찍은 사진은 아마도 내가 스웨덴에서 기억할 가장 소중한 사진이 되리라. 
  5.
  다겐스 뉘게르테지는 일찍부터 K팝의 매력을 알아보고 우리나라 가수들의 음악작업에 참여해온
스웨덴 음악인 Pelle Lidell씨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서울에서 처음 K-팝 컨서트를 보았을 때 ‘숨이 멎는 듯했다’고 고백했다.
‘Coldplay와 U2를 합한 것’ 같았고 관중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최
고수준의 기술, 완벽한 안무’였다. 한국의 음악기획사와 협업을 해온 그는 스웨덴 작곡가들에게 자
신이 한국의 그런 베스트셀러 작품들을 만들었다고 얘기해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고 했다.
세계수출 3위, 인구 1인당 기준 압도적인 세계수출 1위로서 자부심을 가진 그들은 한국의 음악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팝음악의 개척자들이 세계 음악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세계 팝 음악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변할 것이라고 했다. 현대 자동차가 1980년대 유럽에서 판매되었을 때, 한국산이라면
품질이 낮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으나 요즘에는 좋은 평면 텔레비젼을 구입하려면 당연히 삼성
제품을 구입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K팝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국영방송 Aktuellt 도 9.24(월) 저녁 프라임 뉴스 시간대에
K-팝 현황을 보도했다. K-팝은 대중성에 있어 서양의 팝 음악보다 앞서가고 있다면서 K-팝이
귀여운 이미지로 대중에게 접근하고 화려한 춤이 특징이라고 전했다. 스웨덴 최대 민간방송인
TV4 Nyhetsmorgon 도 9.25(화) 플래쉬몹 영상을 보여주면서 K-팝팬들을 방송국에 초대, 행사를
계획한 계기 및 K-pop 열풍에 대해 소개했고 플레쉬몹에 참가했던 10여명의 K-팝 팬들이
스튜디오에 나와 강남 스타일에 맞추어 율동과 노래를 선보였다.
  K-팝 팬들은 오늘 스톡홀름 시내에서 K-팝 파티를 갖고 앞으로 제2의 도시인 예테보리 등 다른 도
시에서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강남스타일을, K팝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고 있다. 2000여명 정도로 추산되던 K팝 팬
들은 강남스타일 이후 두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새로 K팝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있지만 지난 플레쉬몹을 계기로 한 본격적인 언론보도로 자신감을 가진 팬들이 서로 연
락을 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탓도 있을 것이다. 어제 만난 스웨덴 사람은 내가 싸이의
이력에 대해 얘길 하자마자 웃었다. 바로 모바일로 강남스타일을 들어보도록 하려다가 집에 가서
보라고 권했다.
“노래를 틀면 이 곳 레스토랑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춤출까 걱정이다.”
   6.
  나는 싸이와 강남스타일의 매력에 더욱 빠져든다. 싸이는 그동안 우리 팝가수들이 주로 아시아권
에서 인기를 얻은 것과 달리 왜 서양사회에서 인기를 얻고 있을까.
싸이는 동양의 현자이다.
싸이의 음악과 춤은 혁명적이다. 싸이의 몸은 자연스럽다. 인위적인 가식이 없다. 싸이의 동작은
소박하다. 춤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문댄스에게 배우고 발레동작을 배우면서 가수들의 춤은 날
로 정교해졌다. 춤은 어느덧 대중과 유리된 ‘가수의 것’이 되어 버렸다. 싸이의 춤은 보는이의 찬탄
과 숭배를 자아내지 않는다. 춤의 원시성과 건강미로 춤의 원형을 회복한 듯이 느껴진다. 정교함에
내몰리던 춤의 고민을 해결했다. 그의 춤은 낮은 데서 시작된다. 그는 전문적인 춤의 복잡한 기술
을 간결하고 단순한 동작으로 해체해버렸다. 그는 춤을 가수의 것에서 관객의 것으로 돌려주었다. 
서양인들은 그의 춤에서 한국춤을 볼 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여유와 담백한 여백의 미를 발견한 것
이 아닐까.  
    싸이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겸양의 미덕을 가진 동양의, 한국의 군자이다. 그의 노래
와 춤은 한국적인 해학으로 가득하다. 날로 기세가 오르는 동양에 대한 경계심이나 편견을 가진 사
람들에게 그는 해학과 겸양으로 거리감과 경계심을 대번에 무화시켜버린다. 
  나는 그가 내세우지 않기에 그를 내세운다. 스스로 월드스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월드스타라
고 말한다. 싸이의 빛나는 어록들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싸이가 우리나라가 자신을 용서해서 감사하다고 말할 때 우리 국민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감동
한다. 자신을 낮추고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그는 애국을 말하지 않아도 세계인
으로 행동해도 누구보다도 더 애국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  
  7.
    K팝이 하나의 물결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듣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음악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강남스타일을 즐길 때이다. K팝의 붐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연속되어서 세계 음악사에 큰 줄기를 형성할 것이다. 스웨덴 언론에서도 K팝
을 보도하면서 한국의 대형기획사체제와 과열화된 경쟁 등 문제점�� 지적한다. 하지만 그들이 간
과하는 것이 있다.
나는 한국으로 가는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려거든 꼭 노래방과 공연장을 찾아가라고 권한다. K팝이
해외에서 각광을 받는 것은 몇몇 대형 기획사의 공헌이전에 우리 민족이 가진 DNA의 남다름에 있
다고 생각한다. 음악과 춤이야말로 수천년간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의 변함없는 자랑거리이고 세
계는 우리음악성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 
  8.
  지금 나는 곧 있을 즐거운 시간을 기다린다. 젊고 어린 친구들은 나이든 내게 좋은 좌석을 준비하
겠다고 했다. 그것도 공짜로. 나 는 대답했다.
어떻게 감히 공짜로 그 좋은 음악을 듣겠는가. 늦게 가서 입장권이 없으면10배를 내고서 기쁜 마
음으로 암표를 사서라도 들어가겠다고. 그래서 10배 정도까지 암표를 내야 보는 행사라고 소문을
내라고.  K팝 열성팬들은 요즘 바빠졌다. 그들은 언론에 불려 다니고 새로운 행사를 기획하고 있
다.  
“싸이 선생님. 우리나라를 이렇게 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싸이 만세.”
  한국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분들께
2012년 9월 28일 저녁 스톡홀름에서. 조재철(소설 ‘다리’작가) 올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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