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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오브카드 좌표 시간 시즌1 7화 (조이, 크리스티나)
하우스오브카드 좌표 시간 시즌1 7화 노출 수위 높습니다. 청불 미국드라마라서 19 입니다. 하우스오브카드 출연진: 조이, 크리스티나, 재키, 리앤
하우스오브카드 OTT 보는곳 <
미국드라마 넷플릭스 하우스오브카드 결말까지 매우 평점이 괜찮은 편 입니다. 시즌1부터 시즌6까지 완결 된 상태 입니다. 시즌1부터 시즌5까지 13부작 입니다. (1화부터 13화로 결말 구성) 하우스오브카드 시즌6는 8부작으로 1화부터 8화까지 완결 입니다. 성인미드 찾고 있다면 하우스오브카드 시즌1 7화는 꼭 보세요. 하우스오브카드 시간 좌표 시간 조이 크리스티나 배우 추천 합니다.
하우스오브카드 좌표 시간 시즌1 7화 (조이, 크리스티나) 2013년부터 2018년까지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입니다. 이 드라마는 1990년 영국 드라마 시리즈의 리메이크로서, 제프리 아처가 원작의 주연이었습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요 특징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르 및 플롯: ��치 드라마로 분류되는 "하우스 오브 카드"는 워싱턴 D.C.의 권력 ���움을 그립니다.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키비 스필리)는 정치적인 부정행위와 복수에 목숨을 걸며 권력을 쌓아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프랭크 언더우드와 클레어 언더우드: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으로 출연한 이 드라마에서는 프랭크 언더우드와 그의 아내 클레어 언더우드(로빈 라이트)의 권력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평가와 수상: "하우스 오브 카드"는 고급 제작과 강렬한 연기, 긴장감 있는 플롯으로 극찬을 받았습니다. 특히, 케빈 스페이시와 로빈 라이트의 연기는 매우 주목 받았고, 드라마 자체도 여러 상을 수상했습니다.
시즌: 총 6개의 시즌으로 이루어진 "하우스 오브 카드"는 2018년에 6번째 시즌을 마치며 종영되었습니다.
하우스오브카드 좌표 시간 시즌1 7화 (조이, 크리스티나) 종료와 후속작: 2017년에 스페이시에 대한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면서 6번째 시즌에서 그의 역할이 삭제되고, 이후 스페이시의 연기 생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뒤로 넷플릭스는 "하우스 오브 카드"의 후속작을 계획하였으며, "하우스 오브 카드: 최후의 게임(House of Cards: The Final Season)"이라는 제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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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e Tickets
I had a weird dream last night where my flights to Korea got all complicated so I woke up this morning and decided to just get my plane tickets already I use an app called "hopper" and it's very useful in telling you when is the best time to book and get low prices for airline tickets. I'm leaving a little late because it was the best deal, so I'm gonna get to Korea august 24th (hopefully I won't miss orientation ㅠㅠㅠ)) I bought a one way ticket on Korean air which was relatively cheap. I'm flying from Portland to Seattle to Incheon. I heard that Korean air is really good so I'm excited! I even picked out my seat today and got a window seat muahaha. I think I'm on the same plane as my coworker who is also going to Korea which is ironic l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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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SEI 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 Q & A 연세대 언더우드 국제대학 | Korean Di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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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코멘트
미국이 영국을 모를까 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와 미국을 만들었다고
미국의 뒷통수에서 뒷통수 치는 나라가 영국이다 내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가정에서 위탁으로 자라면서 여태도 늙지않고 이렇게 사는거 다 영국 때문이다
영국 훌리건들 되게 집요하지 그게 소매치기 사회라서 그래 정상적인 이교도 사고의 사회같으면 몇 번 시도하다 교섭이 안되면 포기하는게 당연한데
소매치기들은 포기할줄 모르고 달려드는게 마치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들 같다고 할까
총에 맞아 죽었다는 그의 뇌를 연구에 기증해봐 왜 영국인들은 포기할줄 모르고 저러는걸까
영국 화폐기호 단위가 파운드 1000KG 이거든 1kg당 환산되는 질량에 변화 무게의 경제인데 그 무게의 척도 질량 을 나타내는 환율공식이 없기 때문이다
저울도 그램단위이지 KG이 되면 해자가 돌아가거든 결국 1000KG 의 파운드를 gram 으로 바꿔서 다시 저울에 닳아야 하는데
이미 KG에서 저울에 용수철이 망가졌는데 망가진 저울로 근을 계산해봤자 그 값은 오류거든
그 오류를 실패에 원인으로 삼고 문제를 해결할 생각보다 오류를 밀어부치는 사기 상술에 눈이 뜨인나라 해가 뜨지않는 나라이다
영국 스모그는 아침인지 저녁인지 구분을 못하도록 하지 그건 안개가 아니거든 밤새 퍼부은 폭격이거든
때문에 폭정에 시달린 이교도들이 영국사회를 떠나 이곳 미주인 바하마에 들어온것을 아일랜드 라고 하지
OCN CNN Washington post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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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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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행복은 붙잡을 새도 없이 떠나가고 불행은 예기치 않은 손님처럼 불쑥 찾아온다! 은퇴 후 소일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노부부는 경제적으로 쪼들리지만 그럭저럭 살고 있다. 장남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고, 딸이 이혼 후 자폐증을 가진 아들을 홀로 키우고, 대학을 졸업한 막내가 아직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부의 근심거리들이다. 그런데 아내의 생일날, 여느 때와 다르게 자식들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다. 이유는 있었다. 장남 인철은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몇 달째 먹고 살 길을 찾고 있으며, 딸 경진은 지병인 심장병이 더욱 악화되고 있었던 것. 그날 밤, 인철에게 막내 인호의 전화가 다급하게 걸려온다. 인철은 뜻하지 않은 사고에 휘말린 막냇동생과 여동생 문제까지 해결하느라 홀로 동분서주하지만 무엇 하나 수습되지 않는데... 우드로 윌슨 전임대통령인 루스벨트와 마찬가지로 우드로 윌슨은 자신을 국민 개개인의 대표자로 생각했다. 그는 “��직 대통령만이 국가의 보편적인 이익을 발견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기대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그는 진보적인 개혁정책을 개발했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7년 윌슨은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한’ 세계를 만드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포했다.윌슨은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했었다. 그는 1856년 버지니아에서 장로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남북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조지아 오거스타에서 사제로 있었고 재통합기에는 전쟁의 포화로 그을린 사우스캐롤라이나 컬럼비아에서 교수로 재직했다.프린스턴 대학(당시에는 뉴저지 대학으로 불렸음)과 버지니아 법대를 졸업한 윌슨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1885년 그는 엘렌 루이스 액슨과 결혼했다. 윌슨은 보수적 성향의 젊은 정치학 교수로서 빠르게 성장했고 1902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그의 이름이 차츰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민주당 보수파 일각에서는 그를 대통령 감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선 민주당은 윌슨을 1910년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도록 설득했다. 선거유세를 통해 그는 자신이 보수주의는 물론 그를 후보로 지명한 민주당의 흑막정치와도 무관함을 분명히 밝혔고 그가 주지사로 재임하여 추구하게 될 진보주의적 강령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그는 19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고 개인주의와 주 자치권을 강조하는 ‘뉴 프리덤’이라는 구호 아래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삼파전으로 진행된 대선에서 윌슨은 일반투표 총유권자수의 42%를 득표하는데 그쳤지만 선거인단수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윌슨은 의회에서 세 가지 중요한 법률을 제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첫 번째는 관세인하를 규정한 ‘언더우드 법’이었는데 이 법안에는 누진 연방소득세법이 첨부되어 있었다. ‘연방준비제도법’의 통과로 연방정부가 그토록 원했던 보다 탄력적인 통화공급이 가능해졌다. 1914년에는 ‘반독점법’에 의거하여 불공정 기업관행을 금지하기 위한 ‘연방통상위원회’가 설립되었다.1916년에 일련의 법률들이 또 한번 쏟아져 나왔다. 한 법안은 아동노동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철도노동자 일일 근무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들과 ‘그가 미국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막았다’는 선거구호 덕분에 윌슨은 간발의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그러나 선거가 끝난 후 윌슨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대전의 와중에 중립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1917년 4월 2일 그는 의회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했다.미국의 물량 공세에 힘입어 전쟁의 균형은 조금씩 연합군 측으로 기울어졌다. 윌슨은 1918년 1월 의회에서 14개 항으로 구성된 미국의 평화원칙을 천명했다. 이 원칙의 마지막 조항에 따라 ‘강대국과 약소국 모두에게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을 상호 보장하는······ 국가들의 연맹’의 창설이 제안되었다.1918년 11월 독일이 정전협정에 서명함에 따라 윌슨은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벌이기 위해 파리로 건너 갔다. 귀국한 윌슨은 상원에 국제연맹규약이 포함된 베르사이유 조약을 제출하며 물었다. “이 조약을 거부하고 전세계를 실망시킬 자신이 있는가?”그러나 1918년 선거는 의회에서의 무게중심을 공화당 쪽으로 이동시켰다. 베르사이유 조약은 상원에서 7표차로 인준에 실패했다.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전국을 돌며 조약 찬성 여론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극도의 피로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윌슨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아내 에디스 볼링 갈트의 극진한 간호로 1924년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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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posted from @ejisung1 -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하면 의심하고 화 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 소설 '양화진'에서 발췌 ) #regrann https://www.instagram.com/p/BzxkdWJF2Ng/?igshid=3dtryqp7v9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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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
“삼일운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유관순, 태극기, 만세운동, 일제의 ���압. 작년 삼일절, 문재인 대통령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임시정부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안중근과 이봉창, 김구와 윤봉길이 등장했고,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고난을 상기했습니다. 독도와 위안부 문제를 짚었고, 마지막엔 김구의 소원인 문화강국을 내걸었습니다. 저는 역사학도로서 의아했습니다. 물론 하얼빈의 총성과 홍커우의 폭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1919년 3월 1일과 정확히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어째서 삼일운동의 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의 신한청년당이나, 실제로 선언문을 작성한 이광수와 최남선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기억해야할 삼일운동의 하이라이트는 과연 유관순의 순국 밖에 없을까요?
저는 오늘 2019년 대한민국 청년의 시각으로 1919년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을 기억하려 합니다. 삼일운동은 청년운동이었습니다. 1880년대생부터 00년대생까지가 주축이 되어 기획하고, 행동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기성 세대의 봉건적 사고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구한말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유입되고, 유학생들을 통해 수입된 근대 사상이 드디어 물꼬를 튼 것입니다. 서구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다분히 국제주의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세계관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그 시작부터 국제적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상해에서 탄생했고, 대표단을 파리로 파견했으며, 이에 호응하여 도쿄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천도교와 기독교가 3.1 독립선언을 주도한 것입니다. 당시까지 주류였던 유림이 이렇다 할 참여를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2.8 선언과 최남선의 3.1 선언에 담긴 언어는, 여전히 사서삼경에 익숙한 6, 70년대 생이 받아들이기에는 낯설고 불쾌했을 것입니다. 서재필 등 몇몇 선각자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삼일운동 백주년인 올해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피부로 느끼기에 아주 좋습니다. 저는 1991년생이라 이제 29살입니다. 최남선은 1890년생으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쓸 당시 30살이었고, 이광수는 92년생이라 28살이었습니다. 여운형은 86년생, 김규식은 81년생이라 여전히 “청년"이라 부를 수 있는 30대 중후반이었고, 유관순은 02년생 17살이었습니다. 박헌영, 허정숙 등 러시아 혁명의 세례를 받은 공산주의 청년들도 각각 00년, 02년 생으로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일찍이 해외 유학을 했거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봉건적, 가부장적 질서와는 다른, 과학적, 민주공화주의적, 여성주의적 미래를 지향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일운동은 조선 청년들의 사상적 근대화에 힘입은 일대 정신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이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운동이었다는 점, 둘째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19세기 말에야 세계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19세기 말 조선에 태어난 청년들이 온몸으로 습득하여, 전국민의 10%가 참여하는 거국적 운동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그 동시대성이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특기할 만합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배경을 밝히고 의미를 논하는 것이 오늘 방담회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우선 삼일운동의 도화선인 신한청년당으로 가보겠습니다. 86년생 여운형은 몇몇 동지들과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세웁니다. 터키청년당 동지들에게 영감을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때 1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파리 강화회의로 이목이 집중됩니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로 보냅니다. 81년생 김규식은 어릴 적 언더우드 학당에서 공부했고, 서재필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프린스턴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과 몽고를 돌며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몽골어까지 능통한 인재였습니다.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지배 민족이 독립하여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아주 이상주의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윌슨은 국제법에 기반한 영구 평화를 꿈꿨고, 그 장치로 국제연맹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그 꿈은 야당인 공화당의 반대와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승전국들의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국제연맹은 이후 국제연합, 즉 유엔의 모태가 됩니다.
이때 김규식과 함께 파리에 간 선배가 있습니다. 바로 63년생 미국인 호머 헐버트입니다. 86년에 육영공원 교사로 처음 조선에 온 헐버트는 이후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등을 가르쳤고,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었습니다. 1905년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자국 대통령인 루즈벨트를 찾아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렸고, 조미통상수호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1907년 헐버트는 또 다시 고종의 부탁으로 이위종, 이준,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제의 방해로 실패합니다. 베르사유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 헐버트에게는 처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1905년과 1907년, 1919년까지 헐버트의 논리는 일관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 침략은 국제법에 어긋나는 행위이니,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개입하여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엔의 도움으로 국가를 보전한 우리에게 지금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논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논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영구평화론입니다. 서양에서는 토마스 페인이나 임마누엘 칸트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처음 말하고, 조선에서는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펼친 이 주장은 근대 전쟁의 잔학성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고대부터 전근대까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습니다.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 준비 기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류는 전쟁의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독가스와 기관총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도입된 세계 1차 대전은 경종을 울렸습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아니된다, 국제법에 기반한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국제법에 입각해 한국을 변호했습니다. 워싱턴에서도, 헤이그에서도, 파리에서도 번번히 무시당했지만, 그 신념은 한결같았습니다. 힘의 논리 앞에서 법과 도의를 외쳤다는 점에서 헐버트는 윌슨과 같았고, 삼일운동을 이끈 조선 청년들과도 한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삼일운동의 시작을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으로 볼 때, 그것은 반드시 헤이그 평화회의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헐버트와 서재필과 김규식 등 조선 개화 청년들 사이에 퍼져 있던 국제주의적 평화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2.8 독립선언문 논지는 간단합니다. “한일합병은 조선민족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고, 동양의 평화를 헤치기 때문에 무효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우리에게도 적용해달라.” 최남선의 3.1 독립선언문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래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촉하는도다.” 위력의 시대를 보내고 맞이하는 도의의 시대. 바로 국제법과 인도주의에 기반한 평화체제입니다. 윌슨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이광수와 최남선의 선언문은 그들의 사상과 언어가 얼마나 서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보여줍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은, 모든 독립선언문이 그렇듯이,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후예입니다. 최남선의 사상은 단군의 홍익인간 뜻이나 정약용의 실학사상보다도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 정신에 가깝습니다. 육당은 아주 계몽주의적인 심상으로 선언문을 마칩니다. “다만, 전두의 광명으로 맥진할 따름이다.”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돌진한다. 서양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열렬히 ���어안은 조선 청년의 다짐입니다.
이처럼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은 계몽주의적 사상으로 국제법 질서를 옹호할 만큼, 이미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세기 초 식민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이와 같은 논리로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일운동은 그 방법론에서도 아주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평화주의 내지 시민 불복종 운동의 역사는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운동의 역사 만큼이나 짧습니다. 19세기 중반 철학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미국의 멕시코 침략과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한 것이 시민 불복종의 시작입니다. 그 작동법은 이렇습니다. 정부의 불의에 저항함에 있어 폭력을 쓰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다. 그렇게 확보한 도덕적 정당성을 세계 시민에게 알려 연대를 꾀한다. 이를 통해 정부를 압박하여 원하는 개혁을 도출한다. 이것이야말로 봉건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철저히 근대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운동 방식입니다. 소로우가 착안한 이 개념이 톨스토이를 통해 간디에게, 간디를 통해 마틴 루터 킹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이 비폭력 평화운동사의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인도 독립운동이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철학인 ‘사티아그라하'를 본격 채택한 것은 1920년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전국민의 10%가 넘게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습니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삼일운동이 시기로나 규모로 보았을 때 세계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마땅하지만, 여태껏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도인이 이토록 평화적인 자세로 독립을 원한다"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한 게 간디의 독립운동이라면 그 똑같은 이야기를 더 먼저, 더 크게 한 것이 삼일운동 아니겠습니까? 삼일운동이 제대로 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일단 서양 중심적인 역사관이 클 것이며, 간디나 마틴 루터 킹처럼 대표적인 지도자를 꼽기 힘들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전자는 고쳐야 하겠지만, 후자는 그 자체로 삼일운동의 민주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부각시켜야 합니다.
삼일운동이 어떻게 해서 이토록 선진적인 시위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당시 청년들이 소로우나 톨스토이의 사상에 감화된 것인지, 아니면 도저히 일제에 폭력으로 대항할 엄두를 못낸 것인지, 결론짓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군중들이 미국과 프랑스 공사관을 향해 행진했다는 사실에서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국제법 질서 위에서 열강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끌어오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취한 것입니다. 비폭력적인 시민 불복종의 모습을 보여야 도덕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고, 열강들로 하여금 일본을 압박하게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적어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전봉준보다 소로우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2019년 오늘, 저는 삼일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억하면서 촛불혁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삼일운동의 정신이 곧 촛불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백만이 넘는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혁명을 꾀하는, 이토록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진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한민국 백년의 시작이 삼일운동인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삼일운동의 정신 만큼은 결국 청년들이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삼일운동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당시 조선에 처음 등장한, 80에서 00년대생 청년들의 국제주의적 안목이었습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자란 윗세대에게 그들은 외계인과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 차이는 100년 뒤 지금, 또 다른 양상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60년대생, 속칭 386 세대는 청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를 정도로 밀레니얼 세대를 두려워 합니다. 386이 가난과 독재를 딛고 일어섰다면, 밀레니얼은 부유하고 민주적이고 세계화된 대한민국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헬조선”이다, “꼰대"다, “빻았다", 하는 말들로 기성세대를 공격합니다. 그 간극이 조금은 걱정스럽습니다.
정부는 삼일절 백주년을 맞아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남북 화합을 꾀하고, 김구로 대표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삼일운동의 키워드는 민족, 임정, 나아가 항일무장투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국제주의와 비폭력 평화주의를 또 다른 키워드로 제시합니다.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에 주목할 때, 비로소 삼일운동의 세계사적 의미와 대한민국의 사상적 뿌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참석하신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이 자리를 계기로 삼일운동의 청년정신이 더 널리 논의되고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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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유용 혐의를 받는 트럼프재단이 결국 해산된다
자금유용 혐의를 받는 트럼프재단이 결국 해산된다
자금유용 관련 수사를 받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개인 자선재단이 해산하기로 합의했다고 뉴욕주 검찰이 18일 발표했다.
바버라 언더우드 뉴욕주 검찰���장(겸 주 법무장관)은 지난 6월 트럼프재단(Donald J. Trump Foundation)과 이사진들을 상대로 소송(lawsuit)을 제기했으며, 지난달 법원은 트럼프 측의 기각 요청을 거부한 바 있다.
“우리에게 접수된 진정서에는 트럼프재단의 충격적인 불법 행위 패턴이 상세히 적혀있다. 트럼프 대선 캠프와의 불법적 협조, 여러 번 반복된 의도적 재단 돈의 사적 이용 등등이다. 트럼프재단은 트럼프의 사업 및 정치적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수표책이나 다름없었다.” 언더우드가 소송 당시 밝혔던 입장문이다.
소장에 따르면, 트럼프의 선대본부장이었던 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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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 YONSEI - WHAT HAS CHANGED? 언더우드 국제대학 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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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패션브랜드의 한계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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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패션브랜드의 한계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단상
사진은 퍼온것이니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전 패션잔문가도아니고 옷못입는 아저씨중하나 입니다 근데 이런기사거리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한때끝발날렸던 유니온베이 언더우드 브렌따노 헌트 써지오바렌떼 SMEX CRUX ASK A6 메이폴 라피도 쌍방울 리~ 슈퍼카미트 프로월드컵 닉스 스톰 펠레리펠레 YHA 보이런던 나인식스 미치코런던 인터크루 안전지대 국제그룹은 다 어디로 갔나여? (아 미치코와 인터크루는 이마트로 갔져? 90년대 고가메이커였는데ㅠ…)
이젠 노스케이프 이젠벅 르샵 EXR 수베누 마저도…정말 한국패션사업은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국내의 패션은 정말 빈폴이 마지막 대항마인가여? 고딩때 집이 방5개인가 6개 80평 졸라부자인 내짝은 메이커중 빈폴이 젤좋다고 자긴 빈폴만 산다고 말하던 친구가 생각나네여
국내브랜드말고 세계적인 브랜드로는 80년대 호황기 “난 켈빈과 그날밤 아무일도 없었다”라는 카피로 세계적인 스타가된 10대의 부룩쉴즈가 나온 켈빈클라인^^
80~90’s초반 돌청으로 전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훔친 게스같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회사들은 아직건제합니다만
조다취(오타아님)….예넨 어디로 같나여?ㅋ
세계적으로는 이제 진짜 공룡이 되버린 폴로가 마지막대항마인가여?
패션기업중 가장 성공한 폴로제국의 독주를 막을 브랜드는 없다생각됩니다(유니클로? 아시아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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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선교사, 동아시아 지식인이 바라본 기독교와 유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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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선교사, 동아시아 지식인이 바라본 기독교와 유교의 관계
한국 초기 개신교는 유교와 어떻게 공생했을까
개화기 선교사, 동아시아 지식인이 바라본 기독교와 유교의 관계
옥성득 [email protected] | 2016.01.26 15:46:14
한 종교가 소수파일 때 내적 확신을 위해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믿지만, 사회에서 공적 지위를 얻기 위해 주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공존할 수 있다는 변증론을 편다. 그러나 변방의 비주류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힘을 가진 다수파가 되면, 어느새 교만한 집단으로 변질되어 타 종교를 차별하거나, 더 나아가 공격하는 근본주의 세력으로 전락한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은 하나님을 섬긴다”, “God과 Allah는 같은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향해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을 미국 휘턴(Wheaton)에서 말하면 다수 기독교인의 비판을 받지만, 이슬람국가(IS) 거점 라카에서 하면 처형을 당할 것이다. 단순한 교리적 명제가 아니라, 정치신학적 함의를 가진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정치와 문화의 유통시장에서 그 말의 액면가는 지역마다 유동하는 환율 차로 인해 실제 가치가 달라진다.
‘정교분리’라는 말도 국경을 넘으면 시장가치가 달라진다. 1900년 이전에는 서구의 정교분리 개념이 아예 없던 동아시아를 생각해 보라. 정부가 종교를 통제하거나 국가(천명을 받은 천자인 황제)가 유사종교 위치를 차지해 온 중국(과 동아시아)에 들어간 극소수파 기독교 선교사들은 국가 종교인 유교와 공존하는 논리가 필요했다. 17세기 예수회는 원시 유교의 상제와 기독교의 천주가 동일하다는 적응주의를 채택하고, 서양의 과학으로 청 황실에 봉사하는 협조자가 되었다.
1949년 이후 중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산당 정권(마오쩌뚱)과 공존하는 논리로 서구 선교사의 제국주의를 배격하는 삼자애국교회를 만들고, 국가와 인민을 살리는 동일 목적을 가진 면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같다고 주장했다. 우(吴耀宗) 목사는 공산주의와 기독교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전자를 택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래서 비록 문화혁명기(1966~1976)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으나, 딩(丁光訓, 1915~2012) 주교 지도 아래 중국기독교협회(CCC)와 삼자애국교회는 부활했고, 매년 수백만 권의 성경을 출판·반포하며 성장하고 있다. 물론 절반 이상의 교인은 가정교회 소속이다.
한국은 어떠했는가? 1870년대까지 한 세기의 천주교 박해 경험 때문에 이후 한 세기 동안 천주교·개신교는 정부(대한제국-일제 총독부-미군정-이승만 정부-박정희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신, 종교의 영역에서 자유를 확보하고 교회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1965년 이후 반정부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교회의 주류는 아니었다.
1880년대 개화기라는 전환기에 한국 개신교는, 주류 종교로 기독교를 금지하거나 배척했던 유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그 역사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당시 개종한 일부 유교 지식인들은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을까? 여전히 위정척사파 유학자들은 서양 종교를 무부무군하는 짐승의 종교로 공격하고 있었고, 정부는 모든 외국과의 조약에서 기독교 문서 유입을 금지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는 지혜로운 정치신학이자 선교신학이 필요했다. 초기 개종자들이 접한 한문 개신교 문서가 제시한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크게 다음 여�� 가지 이미지로 제시되었다. 서로 비슷한 이미지였다.
1. 마틴의 <천도소원>과 금목걸이
중국 선교사 윌리엄 마틴(W. A. P. Martin, 1827-1916)은 <천도소원(天道溯原)>(Evidence of Christianity, 1854)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정통과 이단(正邪)이 아닌 넓고 좁음(廣狹)의 관계로 규정했다. 흩어져 있는 유교의 보석들(예, 오륜)을 예수교의 일이관지하는 황금 줄로 엮어 좋은 목걸이를 만들어 중국인에게 선물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천주교에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1603)가 있었다면 개신교에는 윌리엄 마틴의 <천도소원>(1854)이 있었다. 출판 후 1900년 전후까지 중국과 일본에서 기독교 서적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을 읽고 이수정이 개종했고, 김옥균도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최병헌은 이 책을 일부분 번역해서 <신학월보>에 실었는데 <성산명경(聖山明鏡)>(1909)에도 넣었다. 한마디로 유학과 개신교의 관계 설정에서 천주실의-천도소원의 보유론이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국 기독교를 논할 때 이 두 책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그 출발을 논할 수 없다.
▲ <天道溯原> 중권, 57쪽.
마틴 선교사는 “예수교를 믿으면 유교를 버려야 하는가?” 질문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어떤 사람은 ‘만일 내가 이 도(예수교)를 따르면 유교에 대해서는 반드시 등을 돌려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이는 다음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유교는 (인륜인) 오륜을 말하나 예수의 도는 오륜 위에 있는 신인(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더한다, 신인 관계가 조화롭게 되면 오륜의 인간관계도 각각 제자리를 잡게 된다. (중략) 유교와 예수교는 그 도의 광협(넓고 좁음)으로 차이가 나지 정사(정통과 이단)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찌 배교라 하겠는가?”
보유론(補儒論 accommodation theory)을 수용하되, 예수교 안에 유교가 들어 있으므로 참예수교인이 되면 참유교인이 된다는 초유론(超儒論)적 요소를 가진 성취론(成就論 fulfillment theory)이다. 유교 도덕의 기초인 인간관계에 대한 오륜을 버리지 않으면서 신륜(神倫)인 하나님 관계가 우선순위에 있는데, 원시 유교에 있던 상제 숭배를 주자의 신유학이 상실했으므로(마테오 리치의 주장), 예수교로 신인 관계를 회복하면 오륜도 제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이 중국이 근대화되는 기초라고 제시했다.
이어서 마틴은 유교와 예수교의 관계를 흩어져 있는 보석(오륜)을 하나로 꿰는 황금 줄(예수교의 유일신 예배)로 엮어 좋은 목걸이를 만들어 중국인에게 선사하는 것으로 그렸다.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은 좋은 것이나 인간관계만 규정함으로써 각각의 보석이 흩어져 결국 인륜이 무너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천(敬天)의 줄로 하나로 묶어야만 완성된 목걸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논어에서 공자는 일이관지를 충서(忠恕)로 말하였으나, 마틴은 충서, 곧 개인의 주체성 확립과 이웃 사랑(愛人)의 인륜(人倫)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경천(神倫)이 일이관지의 길이라고 제시했다.
2. 로스의 ‘한 겨리의 소’
마틴의 목걸이론과 유사한 것이 만주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에게서도 발견된다. 로스는 <Mission Method in Manchuria>(1900)에서 네비어스 방법을 만주에 적용하되, 네비어스보다 중국 유교와 도교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로스는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함께 중국인의 영성의 밭(靈田)을 가는 한 겨리(두 마리)의 소에 비유했다. 예수교는 유교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영성을 밭갈이하고 파종하는 동역자라는 이미지를 제시했다.
로스는 또한 도교가 강한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도교 사원 주지들과 교제했다. 요한복음 1장을 놓고 나눈 서면 대화에서 도교승은 요한복음 1장의 도(道), 광(光), 흑암(黑暗), 은혜(恩惠), 진리(眞理) 등의 개념이 도교와 흡사하다고 말했다. 이런 종교 대화의 한 결과가 1890년 선양교회를 건축할 때 드러난다. 로스는 건물 하반부는 서양 벽돌 양식으로 짓되, 탑처럼 올라가는 상단 부분은 도교 사원 양식을 차용해 독특한 반양반중 양식의 예배당을 만들었다. 만주에서 도교와 공존하면서 동시에 도교를 성취하려고 했던 로스의 토착화 신학의 한 결실이었다.
3. 쯔다센의 등불과 태양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농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했던 안종수(安宗洙)는 근대 농학자요 일본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쯔다센(津田仙) 박사를 만났다. 쯔다는 그에게 기독교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집에 걸려 있던 산상수훈 족자를 주었다. (기독교 금지령으로 가져갈 수 없어 받지는 않았다.) 안종수는 그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고 감개무량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種德門中見吉光 선하고 덕이 많은 명문가에서 상스러운 빛을 보았다. 耕田自在福田長 백성의 생업은 뜻대로 되고 복을 거두는 밭은 길다. 欣欣虛己迎人處 흔쾌히 나를 비우고 사람들을 환영하는 자리이지만 更悵明朝各一方 섭섭하게도 내일 아침이면 서로 헤어져야 하도다.
▲ 쯔다센의 등불 태양론과 안정수의 시. “三府近事: 東京,” <七一雜報> 명치 14(1881)년 11월 25일.
시를 풀이하면 이렇다.
“선을 쌓고 덕의 씨를 뿌린 적선종덕(積善種德)의 문중인 쯔다센의 집에 와서 빛나는 기독교 진리의 빛을 보았다. 기독교는 일본 근대화를 이루는 문명의 빛으로서 백성들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가난한 자의 복지를 돕는다. 나는 아주 기쁘게 사심을 비우고 여러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리를 가졌으나, 아쉽게도 내일이면 조선으로 떠나야 한다.”
기독교 개종자와 세례자가 줄을 잇던 1880년대 초에 쯔다센을 비롯한 일본 기독교인들은, 위의 신문 본문에서 보듯이, 공자의 빛은 등불과 같아서 유용하지만 한 나라의 암흑을 다 밝힐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유교의 계몽의 빛은 과거의 몽학 교사였다. 이제 개화의 새벽이 밝아 문명 종교인 예수교의 해가 솟았으니, 더 이상 등불이 필요하지 않다. 해처럼 밝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유교 윤리를 초월하는 8복의 가르침과 사랑의 윤리가 있다. 열심히 공부하여 경쟁에서 이겨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올라 출세하고 입신양명하는 것이 효라고 알았던 유교 양반들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굶주리고 긍휼을 베풀고 정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되다”는 가치 전복적 윤리관에 도전받았다. 무엇보다 경천애인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충격을 받았다. 가족주의와 파당주의에 묻혀 원수 갚는 것까지 효로 인식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유교와 기독교는 같지만 우열이 있다는 논리였다.
밤에는 촛불도 유용하고 길을 가자면 등불도 필요하므로, 유교는 개인과 가족 윤리 안에 존속했다. 문제는 교회가 그 등불의 가치관을 낮에도 들고 다닌��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조차 입신양명하기 위해 연고주의와 파당주의가 득세하여 불공정한 경쟁을 벌인다. 부패는 불신의 골을 깊게 하여, 햇빛이 들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많다. 정치나 교회 지도자나 기업가를 불신하는 사회는 결국 악순환의 투쟁을 불러 고비용 사회를 만든다.
4. 파베르의 접목론
바젤복음선교회의 에른스트 파베르(Ernst Faber 1839~1899)는 동서양의 문명을 비교한 <자서조동(自西徂東)>(1884)에서, 유교와 기독교는 사회를 개혁하고 하나님나라를 만드는 데 동맹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두 종교는 접목(接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접목은 야생 대목이 어느 정도 자라면 줄기를 자르고 좋은 묘목의 순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오래되어 썩고 죽은 가지를 잘라낸 뒤 중국 종교 문화의 원형이라는 대목(臺木)에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붙이고자 했다.
파베르는 서양의 기술과 세속 학문만 중국 문명에 접붙이는 중체서용(中體西用)적 근대화 시도는 새로운 줄기를 죽어 가는 가지에 접붙이는 것처럼 일시적이고 결국에는 헛된 수고라고 봤다. 그래서 기독교를 접붙임하여 중국 문화의 뿌리와 이어지는 새 문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없이 서양 기술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국의 전국(戰國)시대에 양주가 주장했던 이단적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적 이기주의, 또는 묵자가 주장했던 공리주의와 같다고 보았다. 유교의 천명(天命) 실천과 기독교의 신의(神意) 순종이 크게 다르지 않듯이, 접목된 두 종교는 서로에게 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뿌리에 있는 유일신 사상에서 올라오는 기운으로 유기적 합일을 이룰 수 있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 이수정의 세례 기념 사진, 앞줄 중앙이 루미스 목사. 뒷줄에 녹스 박사, 이수정, 야스가와 목사.
5. 이수정의 송백론
일본에서 개종한 이수정도 파베르와 유사한 입장이었다. 안종수의 친구였던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왕비를 보호해 준 공으로 일본에 유학을 가서 안이 적극 추천했던 쯔다센을 만났고 야스가와(安川享) 목사의 문답을 거쳐 1883년 4월 29일 로게쯔조(露月町)교회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녹스(George W. Knox)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 기독교인 친목회에서 신앙고백서를 발표했으며,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한시를 썼다.
人有信心 如木有根 不有仁愛 根枯木萎 愛之於心 如水潤根 秋冬葉落 其根不朽 當春發生 花榮葉茂 敬天信道 花爲成實 壘壘滿枝 孔甘且碩 幹如松栢 霜雪不凋
사람에게 믿음이 있음은 나무에 뿌리가 있음과 같으니 인애가 없으면 뿌리는 마르고 나무는 시든다. 마음에 있는 사랑은 물처럼 뿌리를 촉촉하게 하여 가을과 겨울에 잎은 떨어지나 뿌리는 마르지 않는다. 봄이 되면 생기가 올라와 꽃이 만발하고 잎이 무성하듯이 하늘을 섬기고 도를 믿으면 꽃은 열매가 된다. 가지마다 가득 달린 열매는 아주 달고도 우람하며 줄기는 송백과 같아 눈서리에도 쇠하지 않는다.
앞에서 인용한 안종수의 시는 짧지만 종교적 상징과 불교 용어가 가득하다. 당시 유학자들의 불교 지식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정의 시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느낄 수 있는 유학자의 강기와 절개를 느낄 수 있는 시다. 믿음과 사랑을 강조하고, 뿌리 깊고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잣나무를 신앙인에 비유하고 있다. 동시에 봄이 되면 꽃이 만발하고 가을에 가지가 풍성한 모습에서 개화파 지식인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과 소망을 본다. 신망애(信望愛)가 어울린 시라고 하겠다.
6. 언더우드의 ‘양춘에 반짝이는 무성한 나무’
이런 나무 이미지는 189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유교와 기독교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와 이론은 1890년대에 제시된 표리론이었다. 유교와 예수교는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관계라는 주장이었다. 1897년 창간된 언더우드 편집의 <그리스도신문> 사설은 1898년 말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논하면서 유교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비록 초고는 한국인들이 썼지만 언더우드가 편집장이었으므로 그의 견해로 일단 제시한다.
“유교는 인륜의 지극한 법이라. 만세의 큰 강령이요, 선비를 가르치는 큰 가르치는 데 몸이니 참 지극한 보배요, 진실히 하늘을 공경하는 미쁜 덕이요, 격물치지하며, 만물을 마루 재는 큰 꾀가 다 갖추어 있다.” (“양교가 표리가 되는 론,” <그리스도신문> 1898년 12월 15일.)
비유하자면 유교는 아름다운 나무와 같고 예수교는 봄날의 태양과 같아서, 나무의 뿌리를 깊게 하고 줄기에 생기를 주고 잎을 무성하게 하여 가지마다 열매 맺게 한다. 나무가 태양이 아니면 무성할 수 없고 태양도 나무가 없으면 빛나는 것을 나타낼 수 없다.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율법과 예언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성취하러 왔다고 선언했다(마 5:17). 선교사들도 이 성취론에 근거하여 예수교는 조선에 유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여 ‘더 나은 유교’인 기독교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러 왔다고 전했다. 예수교는 서양 종교가 아니라 본래 동양 유대국에서 유래했다. 예수교는 조선 유교가 잃어버린 하나님을 섬기는 경천을 되살리고 애민의 뜻을 새롭게 한다.
뒤틀린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이상의 여섯 가지 비유에 나타난 적응주의 태도나 성취론적 타 종교 신학은 개신교가 비주류로 머문 해방 이전까지는 계속 되었으며, 1960년대 토착화 신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급성장한 개신교는 점차 사회 주류로 진출하면서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중심으로 강화되던 근본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 결과 지난 30년 넘게 한국 개신교회는 1920년 이전 한국 초대교회가 가졌던 온건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상실하고, 근본주의가 마치 한국 개신교의 원류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그런 망각과 오해에 기초한 근본주의적 복음주의가 법당을 불태우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극단적 행동을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해외에 나가 불교 사찰에서 마당 밟기를 하며 저주를 퍼붓는 것을 선교의 미명으로 정당화했다. 반면 내적으로는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기복하며 우상처럼 섬겼다.
이런 한국교회 역사의식 빈곤 현상은 민주화 운동 시기에 국가조찬기도회 등에서 잘 드러났다. 일제 말 신사참배를 하면서 교회를 지킨 것이 고통을 감내하는 수난이었듯이, 1970~1980년대 독재 정권하에서 역사상 유래 없는 교회 성장을 이룬 것은 교회성장론과 번영신학의 공이었다고 자화자찬했던 모습으로 이어졌다.
1890년대 한국 예수교가 가졌던 반봉건 개혁주의와 반제국 독립운동의 정치 참여적 신학의 유산을 되살린 것이 80년대 민중 신학이요 90년대 이후 참여적 복음주의였다. 그러나 타 종교 신학에서는 아직 갈 길은 멀다. 초대 한국교회가 가졌던 온건하고 겸손한 타 종교 신학을 다시 들여다보고 되살릴 때이다.
1880년대 초기 개종자들은 극소수였기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공적 통로나 언로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타 종교관은 개인적인 내적 확신의 표현이었다. 이때 등장한 논리가 유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론이었다. 한 종교가 더 낫다는 확신이 없으면 누가 선교를 하겠으며, 누가 그런 초기에 목숨을 걸고 개종을 하겠는가? 그러나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890년대 후반, 한국 사회가 개화를 향해 나아가고 청년 지식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교회는 유교와 기독교가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의존(interdependence)의 관계에 있다는 공존론과 유교를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성취론을 내세웠다.
복음의 씨앗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있는 곳에서 잘 자라지 못한다. 밭은 변하고, 신학도 변한다. 오늘의 젊은이의 마음 밭(心田)에서 예수교가 발견하는 보석은 무엇일까? 그것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신학은 무엇일까? 한국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영적 상상력의 빈곤이 문제이지, 젊은이들의 메마른 땅이 문제가 아니다. 150년 전, 100년 전에는 돌밭이요 잡초 무성한 황무지였다. 교회와 한 겨리의 소가 될 오늘의 영성은 무엇인지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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