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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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muni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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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채식] 쌀밥 (백미 밥)
내용이 너무 길어서 옮길 수가 없네요.;;
읽어보실 분은 블로그에서 읽어주세요.
(무니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ddolbunong/222956916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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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26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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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 이후 20세기 초까지 … 16~17세의 중국인 청년들이 페락을 비롯한 말레이반도의 주석광산으로 몰려들었다. 광부 일은 힘들었지만, 고향과 달리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큰 위아니었다. 배를 곯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흰쌀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포만감이 …신케 광부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배를 곯지 않게 됐다고 안도할 틈도 없이 각기병이라는 ���신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각기병만 중국인 쿨리의 생명을 위협한 것은 아니다. 콜레라와 이질, 폐결핵 등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았다. 하지만 각기병은 1880년대만 해도 사망률이 최고 40퍼센트에 달했고, 20세기 초까지도 발병만 하면 ‘죽음의 전조’로 여길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더구나 신케 쿨리에겐 치명적이었다. 중국인 주석 광부들은 20세기 초까지도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 손바닥만 한 논밭에 기대에 대가족이 먹고 살아야 했다. 19세기 중국 농민 1인당 하루 평균 먹는 쌀의 양은 100 그램 정도였다. 건장한 청년에겐 턱없이 모자랐다. 늘 배를 주리던 중국 남부의 농민들이 주석광산으로 몰려든 데에는 기아의 위기라는 인구압이 작동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제한된 농지에 식구가 늘면서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했던 사정이 쿨리무역선으로 10대 …들의 등을 떠민 것이다.
19세기 말 페락 주석광산 광부의 식사량은 당시 중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광부는 하루 다섯 끼를 먹었다. 우선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30분에 가볍게 아침을 먹는다. 소금에 절인 검은콩을 곁들인 쌀죽을 먹고 오전 작업으르 한다. 오전 11시에 숙소로 돌아와 절인 야채를 얹어 쌀밥을 먹는다. 이것이 진짜 아침밥이다. 오후 1시까지 휴식을 취하고, 오후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쌀밥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후 5~6시에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저녁 만찬이 제공된다. 푸짐한 쌀밥에 염장 달걀이나 절인 생산과 같은 단백질 반찬으로 하루 중 가장 든든하게 배를 채운다. 저녁 만찬 뒤 쿨리들은 도박장을 찾거나 극장에서 중국 경극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잠들기 전에 밤참이 나온다. 찬밥을 찻물에 말아 먹는 것이다. ‘새끼돼지’로 팔려온 쿨리들에게 주석광산의 광부 노릇은 하루 12시간을 뜨거운 열대에서 땅을 파고 주석 알갱이를 찾아내는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다섯 깨의 배부름은 고향에서 배를 끌어안고 잠을 청해야 했던 것과는 판이한 포만감이었다.
중국인 광부는 다섯 끼로 하루 평균 900그램 분량의 쌀밥을 먹었다. 중국에서 하루 먹을 수 있었던 쌀밥의 9배나 된다.[*2017년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61.8킬로그램을 기준으로 환산하자면, 19세기 페락의 주석광산 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늘날 한국인 평균보다 6배의 쌀밥을 먹은 셈이다.] 광산주들도 다른 건 몰라도 쌀밥 인심만은 후했다. 잘 먹어야 주석을 많이 캘 수 있다고 ��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배를 곯기는커녕 과할 정도로 섭취한 쿨리들, 그 가운데에서도 갓 이주한 신케가 각기병에 집중적으로 걸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 식민 당국에 따르면 1881~1901년의 20년간 해협식민지와 말레이국연방 전체 인구 125만 명 가운데 각기병 발병 환자는 15만 명이나 됐다. 직업별로는 주석 광부가 다른 직종에 비해 각기병 발병률이 4배나 높았다. 광부 중에서도 각기병 환자의 96퍼센트는 뱃삯을 빚진 신케였다. 15만 명 환자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3만 명이 각기병으로 숨졌다. … 중국에서 비록 배는 주렸어도 각기병은 모르고 살았던 청년들이었다.
1889년 말라야의 영국인 의사는 한 주석광산에서 쿨리 100명 가운데 90명이 1년 이내에 각기병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쿠알라룸푸르의 말레이국연방 의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한 영국인 의사 해밀턴 라이트Hamilton Wright는 1902년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각기병의 발병률은 계약노동으로 일하는 주석광산 쿨리들에게서 높게 나타난다. 광산 노동자들은 전형적으로 식사량이 많다. 수입한 쌀로 지은 밥을 많이 먹으며, 돼지고기, 염장 생선, 인분으로 키운 야채 등을 넉넉하게 먹는다. 중국인이 일하는 광산의 어디에서도 각기병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한 곳에서는 2,400명의 중국인 쿨리 가운데 800명이 지난 2년 사이에 각기병으로 사망했다. 반면 말라야에서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는 중국인은 각기병에 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각기병은 티아민(비타민 B1) 결핍으로 생기는 병이다. … 쌀밥으로 배를 불리더라도 이따끔 야채만 먹어도 각기병은 피할 수 있다. 전형적인 영양 불균형에서 비롯된 병인 것이다. 베리베리beriberi라는 병명은 스리랑카 원주민이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할 수 없어”라고 하는 말에 서 나왔다고 한다. 부종이 발생하고 신경계를 손상시키는 병이다. 이처럼 많은 중국인이 각기병으로 사망했지만, 영국 식민 당국과 영국인 의사들도 1904년까지는 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1897년에도 싱가포르의 영국인 의사들은 “환자는 고통을 알고, 의사도 환자의 상태를 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오직 신만 안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정도다.
통상 각기병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에서 많이 발병한 탓에 도정한 흰쌀밥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흰쌀밥과 각기병이 상관관계는 있어도, 인과관계는 없다. 오랫동안 다른 건 먹지 않고 쌀밥만 먹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1860년대 이후 페락 주석광산의 신케들이 집중적으로 각기병에 걸린 경우, 흰쌀밥과의 인과관계가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 1850년대까지만 해도 광산 쿨리의 쌀밥 섭취량은 19세기 후반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도 각기병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산주들은 광부의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광부들의 하루 섭취량의 90퍼센트가 쌀밥이었다. 본격적으로 주석 개발 붐이 인 1860년대 들어 영어국은 중국인 광부의 주식인 쌀을 공급하기 위해 쌀 수출국인 버마와 태국에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기계식 정미소를 세웠다. 여기서 기계로 도정된 값싼 백미가 페낭 중국인 교역업자의 손을 거쳐 페락의 주석광산에 보급됐다. 기계로 도정된 쌀은 손으로 찧은 이전 쌀에 비해 티아민이 함유된 씨눈이 떨어져 나간다. 말레이반도 서안에서 당시 벼농사를 짓는 곳은 커다가 유일했다. 급증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공급하기에는 생산량이 너무 적었다. 버마와 태국 쌀을 수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석광산의 대부분이 도시나 촌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신선한 식재료를 먹기 힘든 상황에서 기계로 도정된 쌀밥으로 배를 채운 것은 문제였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흰쌀밥이 주범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주석광산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신케든 라오케든 같았는데도 라오케는 거의 각기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19세기 페락 주석광산 쿨리 식탁의 반찬을 볼 차례다. 밥 인심은 넉넉했지만, 도정한 백미, 염장 생선, 염장 달걀, 절인 야채, 검정콩,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꼴로 제공되는 약간의 돼지고기가 쿨리 식단의 전부이다. 채소도 날것이 아니라 염장하거나 절인 것들이다. 쌀밥에 배부른 노동자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게다가 섭취량의 90퍼센트가 쌀밥이라는 점과 그로 인래 영양 불균형이 생긴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1850년대 이래 주석광산 중국인 쿨리들의 식단은 50년간 그대로였다. 하지만 같이 먹었는데도 각기병은 신케만 습격했다. 그러니 광산주도 식단과 반찬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195~198쪽)
빅토리아 시대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백색과 흑색의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1879년 초 페락 라룻 지역의 카문팅을 방문했다. 카문팅은 1874년 팡코르조약 이후 클리안 바루에서 이름이 바뀐 곳으로, 타이핑(이전의 클리안 파우)과 함께 라룻의 백색 골드러시를 대표하는 중국인 주석 광산촌이다. 비숍의 눈에 비친 카문팅의 주석광산은 이랬다.
주석을 채취하는 여러 개의 작은 구덩이에는 물이 차 있다. 중국인은 이 구덩이의 물을 퍼내기 위해 긴 쇠사슬로 작동되는 기발한 펌프를 창안했다. ······ 여위었지만 강인해 보이는 400여 명의 중국인 광부가 주���을 채굴했다. 이들은 저마다 둘랑dulang이라는, 가운데가 우묵한 작은 대나무 소쿠리를 들고 개미처럼 구덩이에서 두 줄로 기어오른다. 둘랑에는 주석을 함유한 흙이 1.5킬로그램씩 담긴다. 물살이 빠른 인공 수로에 이 소쿠리를 담가 돌리면서 모래와 흙을 씻어낸다. 이렇게 소쿠리에 남은 주석 알갱이�� 굵은 폭약 가루처럼 보인다. ······ 주석광산의 중국인 노동자들은 성과급으로 임금을 받는데, 하루 평균 임금은 1실링 6펜스다. ······ 바람이 잘 통하는 허름한 숙소가 있다. 숙소의 양쪽으로 침상이 놓여 있고, 숙소에 배정된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 침상을 나누어 저마다의 침대로 삼는다. 개인 침대라고 해봐야 매트와 모기장이 고작이다. 광부들은 저마다 제단을 두고, 향이 타는 것으로 시간을 가늠한다.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비옷 몇 개가 걸려 있다. 매트와 모기장, 신상과 향을 비롯해 중국인이 소비하는 거의 모든 물품이 중국에서 수입된다(비숍, 2017: 308~309).
비숍의 관찰은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1879년 라릇 지역 주석광산은 부분적으로 기계화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쿨리의 근육에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 중국인 광부들은 성과급piece work 방식의 임금을 받았고, 1인당 월평균 임금이 9달러였다는 점도 알려준다.[*하루 평균 임근 1실링 6펜스는 30일 기준 월급으로 환산하면 2.25파운드 스털링, 즉 9달러이다. 당시 통용되던 달러(스페인달러)의 환율은 1파운드 스털링=4스페인달러였다.] 주석광산의 임금은 노동 시간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시간급, 주석 채굴량에 따라 지급하는 성과급, 월급이 아니라 광산의 이윤을 배당받는 이익공유 방식이 쓰였다. 1870년대 라룻에서는 성과급 방식이 적용됐음을 알 수 있다. … 1880년대 킨타 지역에서는 이익 공유제가 일반적이었다. 이익공유 방식을 당시 주석광산에서는 펀시카funsika分子家라 했다. 펀시카의 이익공유제에서 중국인 광부는 고용된 노동자라기보다 광산주의 동업자란 의식을 가졌던 셈이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광부의 임금은 국제 주석 시세에 따라 들쭉날쭉했고, 그나마도 임금은 매월 현금으로 지급된 것이 아니라, 장부상에만 기재되어 6개월이나 1년마다 정산되었다.
비숍은 광부들의 숙소 풍경도 알려준다. 야자나무 잎으로 엮은 아탑 지붕의 병영 같은 목조 건물에 가운데 통로를 두고 광부들은 각자 얇은 매트 위에 모기장을 치고 잠을 잤다. 매트 비용은 광부 부담이었지만, 워낙 모기가 극성이다보니 모기장은 광산주가 무료로 제공했다. 중국산 수입품의 대부분은 페낭을 거쳐 들어왔다. 심지어 광부들이 먹은 과일은 페낭의 과수원에서 재배됐다. 하지만 꼼꼼한 비숍도 놓친 것이 있다. 숙소 건물 구석이나 인근에 광부들이 소비하는 물품을 독점해서 파는 광산 매점이 있다는 점, 그리고 거기에는 중국에서 수입되니 않은 쿨리의 필수품 아편이 팔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광산 매점이 페낭의 아편팜 거상과 주석광산 중국인 광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광산주는 본격 채광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소유의 광산 매점부터 열었다. 이 매점은 단순한 잡화점이 아니다. 광산의 쿨리는 이곳에서만 필요한 모든 것을 외상으로 거래할 수 있었다. 광산은 대부분 외딴 곳에 있고, 손에 든 현금도 없는 광부들은 이 매점에서 외상거래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익공유제 임금 방식이라면, 이 매점은 광부를 상대로 한 일종의 도박장이 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익공유제 방식에선 주석 채광 도구나 생필품, 얼마간의 현금 등이 광부에게 선대先貸된다. 이 선대금은 광산주가 미리 지급한 경비이지만, 장부에는 광부의 빚으로 잡힌다. 선대금에는 이자도 붙는다. 게다가 광산 매점에서 외상거래를 맡는 점원의 임금을 광산주가 아니라 광부들이 부담한다. 광산 매점의 점원이 사실상 광산의 경리였다. 광구의 사정에 따라 주석이 나올 때까지 땅만 파는 시간이 길어지면 선대금도 늘어난다. 광부의 매점 외상장부는 오늘날로 치면 월급이 입금되는 마이너스 통장에 해당한다. 반년마다 광산 ‘콩시’의 대표인 광산주는 비용과 매출을 정산한다. 선대금과 광산 매점 외상거래 등 광부가 진 각종 빚을 계산하고, 한편으로는 광부마다의 작업 일수와 주석을 팔아 생긴 이윤을 따져 배당금을 뽑아본다. 이때 배당금이 빚보다 크면 현금으로 광부에게 지급한다. 그 반대면 광부의 장부엔 빚만 남는다. 블라이드(Blythe, 1947: 104~105)는 이러한 중국인 주석광산의 경영 방식을 가리켜 ‘도박’이라고 했다. 광산주가 쿨리 숙소만 세우고 모든 비용을 광부의 부담으로 떠넘기는 구조라는 것이다.
주석광산 운영 방식이 중국인 광부에게 도박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광구가 아예 허탕만 아니라면, 광산주는 광부와 달리 빈손이 되지 않는다. 주석과 광산 매점의 매출 이익을 광산주기 챙기기 때문이다. 이는 주석광산에서 중국인 광부를 두 번 착취하는 ‘트럭 시스템Truck System’으로 가능했다.[*트럭 시스템의 영어 ‘truck’은 교환 또는 물물교환을 뜻하는 프랑스어 ’troquer’에서 차용된 것이다. 우리말로 트럭 시스템을 ‘현물급여’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하지만 19세기 말라야의 경우 현물급여의 성격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이 글에서는 ‘트럭 시스템’으로 표기한다.] 애초 쿨리를 빚쟁이로 만든 게 외상 뱃삯 방식이었다면, 일을 할수록 빚이 늘어나게 만드는 것이 농원에선 ‘루마 커칠’ 방식이었고, 광산에서는 트럭 시스템이었다. 트럭 시스템은 광산 매점을 통해 구현됐다.
트럭 시스템은 19세기 유럽의 공장에서 널리 쓰였다. 노동자의 임금을 고용주의 점포나 고용주가 지정한 가게에서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일종의 상품권으로 지급하는 방식을 일컬었다. 영국은 1830년대부터 트럭 규제법을 제정했고, 1896년 법으로 금지했다. 말라야에서는 1909년 트럭 시스템이 법으로 금지됐지만, 1940년대까지도 공공연하게 시행됐다.
트럭 시스템은 19세기 말라야와 푸켓의 광산, 페낭과 수마트라의 농원에서 아편팜과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했다. 화인사회는 주식회사를 ‘콩시’로 응용했듯이 트럭 시스템과 그들의 방식대로 변용했다. 트럭 시스템, 그러니까 광산 매점이 없었다면 19세기 백색 골드러시에서 토카이 롬봉이든 토카이 라부르든 이익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블라이드는 트럭 시스템이야말로 중국인 광산주가 이익을 내는 원천이라며, 말라야에서 3,500명의 쿨리를 고용한 대형 주석광산을 조사한 영국인 광산 기술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그 지역의 토양은 주석 함량이 많은 곳이 아니다. 노동력을 대거 투입하는 중국인 광산업자의 방식으로는 대규모 채광을 해야만 이문이 남는다. 중국인의 주석광산 운영 방식은 대단히 이윤이 많이 남는 트럭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다. 이 지역에 기계식 채광 방식을 도입해 광부를 대체할 경우 광산업자가 이윤을 남길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 중국인 광산업자는 광산에서가 아니라 광부로부터 돈을 벌기 때문이다(Blythe, 1947: 104).
달리 말해 광산 토카이들은 제사보다 잿밥에 눈독을 들였다는 뜻이다. 광산주들은 광산 매점이란 트럭 시스템을 통해 광부에게 지급한 임금보다 더 많이 털어갔다. 토카이의 셈법에서 광산 매점은 배보다 큰 배꼽이었던 셈이다. 영국 식민 당국도 주석광산에서 트럭 시스템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1880년대에 규제를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광산주의 착취에 제동을 걸기 위한 규제가 아니었다. 광산 매점에서 외상을 지고 달아나지 못하게 광부를 단속하는 대책을 내놓으면서 노골적으로 토카이 편을 든 것이다. 영국 식민 당국에겐 광부를 어떻게 쥐어짜든 토카이들이 주석을 많이 수출하고, 아편팜 전매료를 많이 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유럽과 달리 19세기 말라카해협에서 트럭 시스템이 중국인 광산주에게 ‘대단히 이윤이 많이’ 나는 사업이고, 영국 식민 당국이 광산주와 광산 투자자를 편들었던 공개된 비밀의 요체가 바로 아편팜이었다.
페락 주석광산의 아편팜은 페낭의 도시형 아편팜과 작동 방식이 달랐다. 페낭에선 거상들이 투자자조합을 결성해 아편팜을 확보하고 도시의 중국인에게 아편을 팔았다면, 페락에선 광산주가 광산 매점을 통해 광부에게 독점적으로 파는 방식이었다. 부연하자면 이렇다. 페낭에서는 아편파머가 조지타운의 중국인을 상대로 가공한 아편인 찬두를 독점적으로 팔고, 경매에서 제시한 전매료를 당국에 낸다. 반면 1874년 팡코르조약 이전의 페락은 술탄이 통치하는 독립 왕국이고, 지방의 수장들이 징세권을 행사했다. 라룻 디스트릭트의 수장인 먼트리Mentri가 광산업자나 중국인 비밀결사에 아편 판매권을 주고, 생아편을 수입할 때 관세를 물렸다. 광산업자나 비밀결사가 생아편을 찬두로 가공해 광산촌의 중국인 광부에게 저마다의 가격으로 판매했다. 따라서 광산마다 광부들을 유치하기 위해 아편 가격을 달리 할 수 있었다. 페락의 아편팜은 트럭 시스템과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1874년 페락을 보호령으로 만든 영국은 1880년 후반까지 기존 아편팜 제도를 유지하면서 주석광산 아편팜의 찬두 가격을 페낭보다 낮게 책정했다. 이는 광산주를 편들어 식민 당국의 이익을 늘리겠다는 속셈이었다. 찬두 가격이 낮으면 광부 모집에 유리했고, 더 많은 광부가 찬두를 피워야 광산 토카이의 이득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더 많은 광부가 더 많이 아편을 소비해야 식민지 재정이 늘어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199~206쪽)
다시 광산 매점을 드나드는 광부들로 눈을 돌려보자. 앞서 보통 아편 흡연자들은 하루 평균 찬두 1~2타힐을 소비한다고 했다. 1864년 싱가포르의 물가를 기준으로 아편 1타힐(3.65그램) 값은 2달러였다. 이는 당시 쌀 1피쿨(60킬로그램) 값과 같았다(Trocki, 1999: 148). 하루 1타힐의 아편 값이 광부의 두 달분 쌀 값에 해당했다. 페락 광산 매점에서 찬두 소매가가 이보다 낮았다고 해도 아편 흡연자에게 부담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870년대 페락 주석 광부의 평균 한 달 수입이 10달러, 아편 1타힐에 1달러, 1인당 하루 평균 1타힐의 찬두를 흡연한다고 가정하면, 주석 광부의 월급은 열흘이면 아편 연기로 사라진다. 그런데도 주석광산은 굴러갔고, 광산에 투자하고 아편팜을 장악한 페낭의 토카이들은 더 큰 부를 일궜다.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19세기 유럽의 아시아 식민지배를 ‘아편 체제opium regime’로 규정한 칼 트로키(Trocki, 1999: 67)는 이 체제가 “노동자를 착취할 뿐만 아니라 상점주, 비밀결사, 아편파머, 식민정부의 이익이 실현되도록 작동되었다”고 했다. 아편을 피우는 한 중국인 광부는 결코 빚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중국인 광부는 아편을 피웠을까? 이 또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주석광산 광부들은 새벽 5시에서 오후 5시까지 점심 시간 2시간을 빼면 하루 10시간을 뙤약볕 아래서 무릎까지 차는 물에 발을 담그고 주석을 캐야 했다. 광부들은 이 험한 조건에서 반나절 일하면 탈진했지만 아편 몇 모금 빨고 나면 다시 몇 시간을 생생하게 일했다고 한다. 아편은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노동 마약‘이었다는 것이다. 광부들은 아편 권하는 화인 토카이의 자본에 포획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일할수록 빚만 늘어나는데, 광산과 농원에서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은 ’왜, 무엇을 위해“ 아편을 피웠을까? 트로키는 이렇게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편은 자본가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해롭긴 해도 정글의 노동자에게 얼마간의 유익을 가져다줬다. 일을 마치고 저녁에 피는 아편 한 모금은 혈기 넘치는 이방의 중국인 청년들에게 ‘비 오는 날의 여인’과도 같았다. 아편은 노동자들이 게이가 아닌 한 동료에게서 맛볼 수 없는 성적 즐거움에 비견할 만한 것을 제공했다. 실제로 중국인 노동자들은 성적 긴장을 동료와 동성애로 풀었다.······ 혹자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정글 속에서 고통을 받고는 있지만 중국에서의 그의 삶은 더 가혹하고 짧지 않았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이 살던 중국은 일자리가 귀하고, 땅 한 뙈기도 없고, 사람은 많고, 질병은 창궐하고, 전란은 끊이지 않고, 도적은 출몰하고, 빈곤은 만연했다. 더구나 중국에서 그들은 아편이라도 한 모금 빨 수 있는 처지도 못됐다. 동남아 정글에서는 쿨리로 일할 수 있고, 아편에 중독되지만 않는다면 돈을 모아 정글을 벗어날 수도 있다. 토카이는 못되더라도 모은 ���으로 아내도 얻고 중국에서보다 나은 삶을 살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다못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아편의 환각 속에서 짧은 생을 마감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Trocki, 1999: 144, 146).
(207~209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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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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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무 총각김치 알타리"
모친께서 달랑무 김치를 담가 놨다. 옥상에서 부추를 재배 중인데 그걸 넣었다고.
이제 내 나이가 있어 아마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타지에서 오래 살수록 아마도 가장 생각날 한국 음식은 '흰 쌀밥 + 달랑무 김치'일 거 같다. 그만큼 최애 음식.
당연히 이 음식명에 관해서도 찾아봤었는데 국어사전엔 '총각무'만 표준어로 등재돼 있다고.
총각은 總(=모아서 묶다) + 角(=뿔)으로 이뤄진 한자로서 결혼 전 남자 머리 모양이란 설명. 총각무 역시 모양이 비슷해 그리 지은 거라고 나와 있지만, 그럼 어째서 달랑무, 알타리란 별칭이 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무 생김새와 세 단어를 종합했을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거는 사실 딱 하나 뿐이지 않나?
총각무 : 총각에게 달려 있는 거시기.
달랑무 : 달랑 거리는 그거.
알타리 : fire 알 + middle 다리.
구글 검색하던 중 2016년 중도 일보에 올라온 기사에서 "…이 총각김치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다른 견해도 있다. 총각김치는 무의 생김새가 총각의 생식기와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구절을 찾음.
성적 표현을 극도로 꺼리는 한국 사회에서 "이걸 왜 총각김치라고 하나요?"란 질문을 받았을 때 "그건 모양이 총각 머리를 닮았기 때문이지"라고 하면 맘이 편하지만, 차마 (너도 알고 나��� 알지만) "총각 xx처럼 생겼기 때문에"라고는 말 못 했을 것.
https://m.joongdo.co.kr/view.php?key=20160506000000507 "총각무가 표준어, 알타리무, 달랑무는 또 다른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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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ivepainterstarfish · 28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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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한 그릇의 행복, 비빔밥의 매력 탐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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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efalch-blog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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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소년의 퇴근 후 저녁' 65일차|오늘의 메뉴: 카수레와 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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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kpif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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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흰 쌀밥 집착광공된 이유ㅣ사막에서도 농사짓는 미친 집념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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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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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총선거”(2270)
우리세대는 험한 세상을 살아 온 세대이다. 어렸을 때는 일본 식민지를 직/간접 경험한 사람들이다. 해방 후 나라의 혼란을 겪었다. 6.25 전쟁으로 피난길에서 고생 고생하였다. 1.4후퇴라는 추운 겨울 눈 덮인 산길을 걷고 또 걸은 기억도 있다.
전쟁의 페허속에 가난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4.19가 일어났고 이어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격변을 겪으며 산 세대이다. 그후 군대를 갔고, 월남전에도 참전 했다. 해외건설 현장에서 피땀을 흘리며 도로공사와 댐 건설도 하였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하여 우리 세대는 뜨거운 사막의 열기와 싸우며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우리의 젊음은 고군분투 일하다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수출이 점차 늘어났고, 산업이 발달이 되었고, 나라가 부강해져서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나라를 위하여 일한 공로자들이고 애국자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꼰대’라고 젊은 세대는 비웃고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시대가 변했고, 태생 부터가 다른데 옛날이야기를 해서 어쩌자는 거냐고 따지고 든다. 우리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지금의 젊은이들은 선진국의 귀공자들로 태어나 격이 다르단다. 우리가 겪은 험난한 인생에 대한 동정이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를 보상해 달라는 말도 아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을 어떠한 나라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지를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공산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악한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6.25 피난길에 어머니는 나의 손목을 한손으로 잡으시고 무작정 남쪽으로 밤낮없이 걸었다. 피난 가던 중 어머니와 나는 북한군(인민군)에 붙잡혔다. 소나무에 묶여서 취조를 받았다. 옆에 소나무에 묶여 있던 사람들은 하나씩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피난을 왔느냐라는 질문이었다. 군인가족이거나 경찰가족이거나 공무원이 아니면 피난을 올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다가 피난 왔다는 것을 계속 주장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를 취조하던 인민군이 나를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가 토마토를 하나 주면서 아버지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하신 말씀대로 장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무슨 장사를 했냐고 묻기에 어머니가 말 한대로 쌀가게를 하였다고 하였다. 내 말을 믿었는지 나와 어머니를 풀어주었다. 하마터면 그곳에서 묶인 채 어머니와 나는 총살을 당하였을 것이다. 9.28 수복이 되어 다시 고향에 오게 되었고, 그 뒤 또 다시 1.4후퇴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전쟁으로 죽은 민간인만 100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 이것도 지난 이야기이고, ‘꼰대’의 변으로 치자. 지금 우리나라가 공산주의 나라로 통일이 되었다고 하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무료식량배급, 무료 교육, 무료 의료 복지국가로 지상낙원이 되어 있는가이다.
현재 북한 동포의 굶주림과 헐벗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참혹하기 그지없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그걸 보면서도 북을 찬양할 수 있단 말인가? 먹을 것, 입을 것, 전기, 수도 공급마저 제 때에 공급이 안되는 열악한 실정이다. 영하 20도가 넘는 북한의 추위를 난방 없이 견디기란 쉽지가 않다. 추운 날씨에 수백 미터를 걸어가 얼어붙은 강물을 깨고 물을 길러 와야 한다. 그 찬 물로 빨래를 한다. 먹을 것이 없어 먹을 수 있는 풀이란 풀은 다 뜯어먹고, 심지어 나무껍질까지도 베껴 먹으면서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고난의 행군 때는 3백만 명이 아사하였다. 지금도 북한 주님들은 쌀밥 한번 실컷 먹는 것이 소원이라는 사람이 많다. 개인의 자유가 전혀 없다. 모두가 서로를 감시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번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노예로 당과 수령만을 위해 살다 죽어야 한다. 헌신과 충성의 대가는 참혹한 궁핍과 그 고통을 충성심으로 극복하라는 철권통치뿐이다. 이들에 대한 실상은 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 알려져 있다.
문제는 왜 이런 북한체제를 옹호하고 친북세력를 고수하는지가 문제이다. 김정은이가 “통일만 되게 하라우, 그러면 고급당원으로 한 자리 주갔써”라는 약속을 받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통치 밑에서 살면 지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일일이 눈치를 봐야 하고, 어디를 가도 허락을 받아야 하고, 전기, 더운물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당이 주면 주는 대로, 명령하면 명령하는 대로 복종만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왜 북을 추종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이 갖은 재능과 실력을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하여 마음껏 사용하면 그에 따라 누리는 지금의 행복이 복에 겨워서일까? 미군 철수를 외치고, 미군기지를 몰아내자 외치는 자들이 자기 자녀들은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싶어 하거나 미국유학중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왜 미국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자녀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싶어 할까?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주체사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성경을 그대로 베껴 놓았을까 싶을 정도로 놀란 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김일성으로 다 바꿔 놓았다. 김일성주석수령동지는 초능력을 가진 신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로 받들고 숭배하여야 한다는 것이 ‘주체사상’ 이다.
이것을 어렸을 때부터 교육하고 세뇌시키면 사람들은 어떻게 변할까? 당과 수령을 위한 꼭두각시로 변할 수 밖에 없다. 북한 주민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악마를 만나 생지옥을 살고 있다. 고난 행군 때 3백만명이 굶어 죽어도 눈하나 깜짝하지를 않았다. 이런자를 찬양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니 기가 막힌 노릇이다. 내가 ‘꼴통수구’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죽기 전에 내 자식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절대 공산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서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을 속이는 짓을 잘한다. 광주 5.18, 광우병 촛불집회, 세월호, 천안함,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다 거짓으로 국민을 속이고 선동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제는 더 이상 속으면 안 된다.
그렇게 많은 속임을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한심한 일이다. 이번 4.10 총선은 정말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중요한 선거이다. 자손만대 자유와 번영과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최강, 최선진, 최부강한 자유대한민국을 물려 주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가 바른 결정을 해야 한다. 부강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물려 줄 것인가? 아니면 북한의 통치아래 들어가 신음하면서 우리 후손들이 가난하게 살 것인가?가 나의 한표에 달려 있다. 세계가 우러러 보는 최강국을 물려 줘야 한다.
잘못된 사상을 가진 자들이 나라를 해 먹게 맡겨서는 안 된다. 586 운동권 정치 모리배들은 우리 손으로 이번 선거에서 척결해야 한다. 후세에 빛나고 자랑스런 자유민주주의국가를 물려 줘야 한다. 글로벌 시대를 이끌 자질과 품격을 갖춘 사람을 뽑아야 한다.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에게 자부심을 갖게 해 줄 인물을 뽑아야 한다. 더 이상 우울한 정치, 짜증나게 하는 정치, 우리의 삶을 저질스럽게 하는 사람을 뽑아서는 안된다. 국민에게 희망과 행복과 새 힘을 줄 수 있는 실력 있고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인에게 한 표를 주어야 한다.
국회의원이 갖는 모든 혜택 중 특별이 불체포특권 같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떳떳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민주주의 정신을 가진 자, 그리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애국자를 뽑아 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3-30-2024/hwanshikkim.tumblr.com/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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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pangpartners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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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 맛있는 오뚜기밥, 210g, 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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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기한(또는 유통기한): 2024-06-11 이거나 그 이후인 상품 즉석밥 크기: 중간공기 섭취방법: 즉석완조리식품 즉석밥 종류: 쌀밥 유형: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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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a5262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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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프레스 1일차 질문
일일 쓰기 프롬프트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것은 무엇인가요?모든 응답 보기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는 것은 라면 국물에 말아먹는 흰 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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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just-said-that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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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계속 잠만 자니 월요일 하루 동안 허리가 너무 아프다. 대학생 때도 그랬다. 주말에 잠 자고 오후 2시쯤 느즈막이 일어나면 허리 통증이 말도 못했다. 그 당시 전주에서 침 맞으러 자주 다니던 한의원 의사 선생님께 '왜 많이 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아프냐' 했더니 '밥(쌀밥)을 잘 안 먹은 상태로 잠을 자니까 그런 거'라고 하시더라. 탄수화물을 안 먹어서라고 하셨었나? 아님 끼니를 안 챙겨서라고 하셨나?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안 나네. 아직도 친할머니가 단골로 다니고 계시고 우리 부모님이랑 이모도 다 알고 나한테 '서울 애 같지 않게 순수하다'고 하셨다고 할머니가 그러셨는데.
난 대학 시절 기억이 너무 좋고 그 시절에 있던 인연이 끊어지면 그 뭉텅이가 다 날아가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제발 더는 손절을 하고 싶지 않다고요. 근데 내가 하도 억울하게 당해서 푸념해서 그렇지, 손절은 남만큼 하는 듯하다. 친구가 없어서 손절 하면 내 좁은 인간관계의 사라지는 비율이 너무 큰 것도 있고. 친구가 넘쳐나 봐^^ 몇 명 손절 해도 심리적 타격감이 없다고요. 근데 뭐, 저같은 유형은 늘상 그렇듯 말만 이렇게 하지, 살다 보면 잘 삽니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이 말 하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삼천포로 빠졌지;; 여름이 돼서 더위에 지치기 전에 얼른 보자구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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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rokcho97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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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0.
점심 - 마라탕, 현미밥
저녁 - 오겹살, 쌀밥, 된장찌개, 후식물냉면
간식 - 토마토스무디, 버블티, 제로 아이스티, 식혜, 아이스 아메리카노, 금귤정과, 개성주악, 무뚝뚝 감자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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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1004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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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민주당 장경태 말하는 《빈곤 포르노 》 비싼 쌀밥 처먹고 개소리 하지말고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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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살노총각 나혼자산다 먹는행복이다 쌀쌀할땐 쌀밥 침샘주의 Old bachelor real muk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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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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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으로만 듣다가 최근 시청한 영화. 한줄 소감은 '진지해서 더 웃긴 일본식 다찌마와 리' 같다. 주인공은 야쿠자 조직 내 넘버 쓰리 킬러이고, 넘버 원은 '유령'이라고 불린다. 종말에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넘버 원을 쓰러뜨리지만 자기도 죽고 만다. 편집을 잘못 한 건지, 일본 영화도 한국처럼 가위질을 하는지 곳곳에서 맥락이 툭툭 끊긴다. 흑백 영화인데다 배경 음악으로 재즈에서의 워킹 베이스를 쓴다거나 미장센 등 여러가지 면에서 프랑스풍 느와르 영향을 받은 듯. 황당하게도 주인공은 갓 지은 쌀밥 냄새에 환장하는 변태다. 영화를 끝까지 다 봐도 무슨 설정인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외려 재밌어서 가끔 60년대 일본 '액숀' 영화를 종종 찾아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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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yaho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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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와 촉촉한 소시지와 탄만두! 자다 깨서 얼마 못먹은게 아쉬워요. 밤에 또 생각나더라구요... #카레 #소시지 #계란 #만두 #군만두 #쌀밥 #흰쌀밥 #감자 #소세지 #김치 #단무지 #소스 #접시 #당근 #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선물 #계란후라이 https://www.instagram.com/p/CRG9wWTtUFB/?utm_medium=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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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lgosu-blo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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