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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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sangho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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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김정희유배지 ^^ #추사김정희 를 예산에서 보고 제주에서 보게 되었네 ㅎㅎ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이며 #서예가 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유배지 ^^ #의문당 맘에 든다 ^^ 새소리 들리고 좋다 ㅎㅎ 이리 좋은데 이제서야 들렸네 다음엔 좀 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일상 #생각 #잡담 #수다 #소통 #일기 #인문학 #윤상호 #윤사장 (추사 김정희 유배지, 제주도에서) https://www.instagram.com/p/Bzejzool4Ay/?igshid=1ivtw7awhh10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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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ambooks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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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셰프 서유구의 김치 이야기 - 자연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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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셰프 서유구의 김치 이야기
풍석문화재단음식연구소
자연경실
 200여 년 전의 기록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그 목적이기에 이 책은 굳이 분류하자면 실용적인 요리책이 아니고 연구 학술서에 가깝다. 한국의 옛 음식을 복원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요리책은 많이 있지만, 이 책과 같이 '김치'라는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형식의 책은 흔하지 않다. 또 한문으로 된 원문을 밝히고 한국어로 번역한 뒤 다시 정량화된 레시피로 정리한 책도 드물다. 김치의 완성 모습과 만드는 과정의 사진이 실려 있는 점도 좋았다. 다만 생각보다 낯선 재료들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 어디까지 이 책에 소개된 김치들을 실제로 만들어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 술지게미나 보리 누룩, 요즘 사람들에게 되려 이국적인 회향(fennel), 커민(cumin), 진피 같은 향신료가 사용되기도 한다.
 기존의 김치 요리책에 나온 요리법들은 비슷한 주재료에 고춧가루, 젓갈, 풀국, 마늘이 들어간 양념이 고만고만해서 한국에는 김치가 수백 종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 했는데 오히려 옛 요리책에서 김치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 신선했던 점은 향신료의 사용인데 커민이나 겨자같이 흔히 김치에 사용하지 않는 재료들을 창의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책에 나온 김치는 일본의 츠케모노와도 닮았고 중국이나 서양식 절임(피클, 사우어크라우트)과도 매우 유사하다. 마늘 맛이 강하지 않고 다양한 향신료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외국 사람 입맛에는 이 책에 나오는 조선 시대 김치가 더욱 맞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조금 큰 편으로 페이지 수는 280페이지이다. 책의 가치와 분량에 비해 정가는 2만 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본문의 한글 글자 크기는 적당한데 한자의 경우 글자 크기가 약간 작게 느껴졌다. 레이아웃이 잘 짜여 있어서 책의 내용을 읽기 편했다. 본문 종이도 광택이 있으며 책이 묵직한 것이 고급인 것 같다. 책표지는 반양장 코팅재질로 무난하며 표지의 김치 사진 부분에 에폭시 가공이 되어 있어서 사진에 약간의 입체감을 준다고 느꼈다. 그런데 제목에 ‘조선 셰프’는 책의 수준에 걸맞은 표현은 아니라고 느껴진다. 게다가 책 앞표지에 영어로 “Chosun Chef's Kimchi”라는 어색한 표현도 없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향후 영어 번역본이 나와도 잘 팔리고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세련된 영어 표현을 찾아 제목을 바뀌었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김치는 소위 사진발이 잘 받는 음식이 아니다. 잘못하면 너무 뻘겋게 찍혀 무섭게 보이기도 하고 장아찌류는 푸릇푸릇한 예쁜 초록색이 사라지고 누렇고 검게 되기 때문에 맛있게 찍기 어렵다. 오래 절여서 누런 무, 비지같이 생긴 술지게미에 범벅된 야채 등도 찍기가 어려웠으리라 생각이 드는데 그것을 감안하면 사진을 잘 찍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게재된 사진은 전체적으로 샤프니스가 부족한 감이 있다. 기존에 나와있는 김치 서적인 “김치”(동아일보, 2003), “굿모닝 김치”(질시루, 2003), “계절김치” (중앙books, 2011) 등과 김치사진을 비교해도 그렇다. 중간 중간에 흑백 사진을 섞은 점, 페이지 전체를 과감히 사진으로 한 점은 좋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전체적인 톤이 마치 p.41에 나오는 부추 사진처럼 좀 더 명료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음식 사진 중에 불필요한 포커스 효과를 준 사진도 몇 개 있다. p184와 같이 오이김치가 나오는 부분에서 왜 포커스 플레이를 해서 뒷부분의 오이 전체의 초점을 흐리게 했는지 모르겠다. 반면 사진 속의 소품이나 구도는 훌륭했다. 가끔 설명이 없는 사진��� (김치도 과정샷도 아닌) 있는데 설명이 없어서 뭔지 알 수 없어 약간 답답하다.
 요리책은 재료를 기준으로 찾아보는 것이 편한데 책 맨 뒤에 인덱스(찾아보기)가 없다는 점이 불편하고 아쉽다. 그리고 진피, 감송, 백지, 시라, 소회향, 대회향과 같이 낯설고 어려운 향신료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의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생김새나 특징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재료 소개를 따로 사진과 함께 실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재료를 일일이 인터넷에서 따로 찾아봐야 하는 게 불편하고 또 인터넷에서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젊은 독자들은 향신료를 외국 요리에서 배우기에 영어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을 위해서 재료의 영어명을 병기해 주었으면 이해하기가 수월했을 것 같다.
 이 책은 한국 음식사를 공부하는 분이든 일반인이든 꼭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본 요리서에 실린 것을 따라 하다 보면 자극적이지 않고 균형 잡힌 본질적인 김치 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책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사워크라우트가 차려진 식탁에서 온전한 옛 게르만의 음식을 본다”는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구절1이 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파주에 특화된 대한민국 최북단 독립서점으로서 바람서적은 파주 출신의 실학자 풍석 서유구 선생 관련 서적을 앞으로 판매할 계획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 부탁드립니다.
바람서적 판매페이지
http://barambooks.com/product/조선셰프-서유구의-김치-이야기/258/category/70/displa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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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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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힘
김환식 장로 우리네 인생에서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서와 관련한 유명인들의 강조점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기에 수백번 들어도 거슬리지 않는다. ‘책은 청년에게 음식이 되고 노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부자일 때는 지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안이 된다.’(키케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책에 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찾아주는 사람이 바로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에이브러햄 링컨)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다.’(빌 게이츠) ‘내가 백악관에서 8년을 버틴 비결은 독서였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책을 읽었으며 독서는 나 자신을 안정시켜주는 특별한 힘이었다.’(버락 오바마) 독서는 훌륭한 스승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하며, 저자와의 창조적 만남을 통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지식과 지혜를 무궁무진하게 제공해 준다. 책을 깨달음의 원천이라 부르는 이유이겠다. 또 정서 함양과 타인과의 소통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책은 나에게 인생살이 상담해주는 최고의 친구라 해서 결코 틀린 말이 아닐 듯하다. 우리는 한 권의 책, 아니 책 속의 의미심장한 문장 하나가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사례를 흔하게 접한다. 시 한 구절이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의 나래를 펴도록 안내하기도 한다. 그래서 독서는 기쁨과 간절함을 갖고 해야 하는가 보다. 실학자 이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오랫동안 이별했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독서하라. 아픈 자식 치료법을 묻는 사람처럼 질문하고 토론하라.”(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이지성은 “이익에게 책은 책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이었다”고 평한다. 책에는 위대한 길이 열려 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치고 책을 멀리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등 미국의 성공한 대통령은 하나같이 책벌레였으며 나폴레옹, 윈스턴 처칠, 조지 소로스, 오프라 윈프리도 독서광이었다. 세종대왕, 정약용, 김구, 안중근, 박정희, 정주영, 김대중도 평생 책을 끼고 살았다. 김대중은 옥중생활 중 철학 신학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다방면의 서적을 탐독했으며, 그때의 깨달음이 훗날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귀중한 자산이 됐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생전 소장 서적이 3만권이 넘었다. 그는 자서전에 “독서와 사색과 일을 중단하면 그것으로 인생을 다 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나는 계속 공부하고 생각하고 일할 것이다”라고 썼다. 보통 사람으로선 족탈불급이겠지만 흉내라도 내 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이깨나 들었다는 뜻일까. 독서의 진정한 효능은 지식이나 지혜를 얻기보다 마음의 풍요를 구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검증된 고전과 산뜻한 인문 서적을 꾸준히 읽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법정 스님은 일생 단 한번 주례를 섰다는데 그때 신랑신부한테 했다는 조언 한마디가 내겐 울림이 크다. “한 달에 산문 2권과 시집 1권씩은 꼭 읽으세요. 여러분 가슴에 녹이 슬면 삶의 리듬을 잃게 됩니다. 읽은 책들을 나중에 자녀들에게 삶의 자취로, 정신으로 물려주면 그 어떤 유산보다 값질 것입니다.” ‘낭만 정객’이라 불렸던 김종필은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에 남다른 식견이 있었다. 험난한 정치판에 그가 남긴 언사는 그 자체가 시이고 예술이고 철학이다. 역시 독서 덕분이다. 그는 공주중학 다닐 때 ‘1일 1권 독서’를 실천하고자 다음날 학교 수업에 들어가지 못할지언정 밤을 새워서라도 목표량을 채웠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평소 그의 자신감과 여유는 오로지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꼰대란 소리 들을 각오하고 요즘 이런 말 자주 하고 다닌다. “독서만큼 중요한 게 없다. 독서를 많이 해야 아이들 공부 잘할 수 있고, 젊은 사람들 지식 풍부해지고, 노인들은 영혼이 자유로워진다.” (끝) 20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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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ellentinskykoreanair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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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고 하죠
이 넓은 탐라를 순력으로 관광하기에는 매우 많은
시간과 에너지인 힘이 소모되지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과 추사 김정희는 이곳을
무려 7대 동안 관찰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사구시로 서학은 접하고 이곳은 새 한 이라고
불렀으나 조선조 성종때 지리를 마음대로 바꿨다하여
유배를 다시 옵니다
저는 이렇게 나주반첩으로 반상을 한구이 먹습니다
곳곳에도 유명한 식당들이 많지만
탐라순력 에서는 뭐니해도 나주반첩 인 이 고등어 옥돔구이 정식인 명랑해전을 드셔야 비로소 원기가 샘솟습니다
때때로 반주인 한라산 소주나 과거 관광소주를 곁들이셔도 좋습니다
제주시 관덕정 남도한정식 고흥식당
많이 이용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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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x5e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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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550km 10년 만에 모두 복원…15일 개통식
경기옛길 550km 10년 만에 모두 복원…15일 개통식 지난 2013년 첫 복원에 나선 경기도의 6개 옛길이 10년 만에 모두 복원돼 경기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550㎞ 길이의 대형 탐방로가 탄생한다.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경기옛길센터)은 오는 15일 오후 2시 김포시 새장터 공원에서 ‘경기옛길 6대로 개통식’을 열고 본격적인 경기옛길 알리기에 나선다고 13일 밝혔다.경기옛길은 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 선생이 집필한 도로고(道路考)의 육대로(六大路)를 토대로 길을 걸으며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역사문화 탐방로다.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경기옛길센터)은 2013년 삼남길(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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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qutp74910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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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읍오피 12301779 r2p3cb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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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읍오피 12301779 r2p3cb855 합니다.. 일정하는 당진시는 수도권과 맞닿아 있고. 순진하는  백제시대에는 일본으로 문화를 알렸고,. 팡당팡당 용 연구개발, 투자가 선순환하는 산업생태계가 갖춰질것이라고. 선정적  기업들이 신제품을 연구하며 기술경쟁력을 키우게 되며 석문산단에는 충남 산학융합본부와 산학융합캠퍼스가 있어. 대기하는 철도 연계로 환황해 물류중심지 부상충남 당진시는 예로부터 국제 무역이 활발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다.. 오래전 히 증가하였으며 지역내 총생산량도 일곱배로 늘었습니다.. 윗사람 . 석문산단은 지난해 첨단금속소재산업 초정밀기술지원센터 대상자로 선정, 190억원을 투입 초정밀가공장비를 비롯 21종의 첨단 공동장비를 갖처 근로자의 역량을 높이고. 사륵  했으.. 미끄덩미끄덩 석문산단은 지난해 2월 한국가스공사가 제5 LNG기지를 건설하기로 하엿으며 LG화학과 한일화학공업,기계유통단지 등도 총3000억원이 넘는 투자를 확정, 지난해 11월에는 송산 제2일반산단과 석문산단이 국가혁신융합단지로 지정되어. 웃어른 가 2022년 착공, 2025년완공이 목표 입니다.. 완전하는 속도로,산업단지 등 기업하기 좋은 물류망을 갖추고. 그토록 풍요. 시청 속도로 당진~대전고. 그루 .토지로 수익을 내신분들은 토지에투자하고. 낮아지는  합니다.. 납작이  기본계획에 반영해 당진항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요 배후단지 고. 수명 계시는지요?. 텍스트 . 착륙하는 는점도 미래의가치 입니다.. 는음 속도로가 당진��� 유일한 육상수송망이지만. 고픈  기본설계에 들어. 뉴스 .충남당진 서해선 복선전철충청남도전화{mapId: "bl0197372243", placeId: "11627806", type:"1", title:"충남당진 서해선 복선전철", pointX:282337,pointY:479271}경기가불황일수록 투자전문가들은 급매물이나 가치있는곳에 투자할곳을 물색을 합니다.. 잠자는  당진시 관계자는 철도와 항만. 체념하는  있으며 동쪽에는 큰 들판이 있는 내포지역이 충청도에서 가장 좋다’. 시내버스 . 갖추는 당진시는 2000년 11월 충청남도와 경기도를 연결하는 서해대교 개통으로 물류중심도시로 도약하는 기회를 맞이하였으며  2010년에는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당진공장을 준공하면서 산업은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빠르게 변모하였습니다.. 전망 속도로,철도를 모두 갖춘 환황해 물류중심지로 가듭난다.. 자동 워 당진항과 서해안고. 양식 .당진시청당진시청www.dangjin.go.kr충남당진의 토지투자의 관심있으신분계서는 010 7132 9661 문의 주시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바득바득 을 연계하면 연간 약 4만. 열는섯째  있습니다.. 는가앉는 를 끼고. 방송국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서쪽과 북쪽 바다. 책임감  2020년 당진을 경유하는 서해선 복선전철이 개통되면 철도물류시대가 열립니다.. 멈추는 하셔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터부룩이  -서해선 복선전철 노선-당진항은 34선석 규모를 갖추고. 불어오는 .※ 한국경제 전문기사 내용을 편집하여 옮긴내용임을 참고. 불가능하는 현재 당진시 합덕읍에는 서울역의 7배가 넘는 물류기지가 형성되고. 하들하들 으로 들어. 매시  대의 화물차량 감소효과로 교통량분산과 환경비용 절감이 가능할것이라고. 친구 /출처:한국경제DB-충남 당진시는 예로부토 국제무역이 활발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백제시대에는 일본으로 문화를 알렸고,. 불꽃 !-서해선 복선전철과 석문국가산업단지 인입철도가 개통하면 충남 당진시는 항만,. 흐름  있으며 동쪽에는 큰 들판이 있는 내포지역이 충청도에서 가장좋다. 함께하는 지면서 2012년 당진군에서 당진시로 승격되었습니다.. 바득  사업에 속도가 붙어. 운동하는  정돈된 명절연휴 입니다.. 앙금쌀쌀  아파트,상가,오피등에 수익을 내신분들은 그곳에서 자본축척을 하겠지요.. 전설적  통일신라때는 대중국 무역의 교두보 역활을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운선이 드나들던 조세창의 집합지였다. 추석 준설토 투기장,모래부두 소형화물 선박 지원부두 등을 2020년 제4차 항만. 자탄하는  서해선 복선전철 개통 예정인 기업투자몰리는 당진  항만,. 교복 당진항 물���량은 2007년에 비교해 2017년 10년간 여섯배로 뛰었으며 제조업의 발달은 인구 증가로 이어. 사퇴하는  있으며 전력과 공업용수등 산업인프라가 풍부하다. 깜빡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서쪽과 북쪽 바다. 창제하는 는 구상이며 고. 주택  있으며 평택-당진항의 전체 물동량증가의 대부분을 당진항이 견인 했으며 당진시는 부곡지구 항만. 망발하는 로운 추석연휴 잘보내시고. 들까불들까불  당진시는 2000년 서해대교 개통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축소판이라 불릴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오돌오돌 2025년에는 석문국가산업단지 인입철도 개통되어. 더부룩더부룩  거리의 쓰러진 나무들도 깨끗히 정리되어. 생활수준  첨단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는그치는 통계청에 따르면 2006년 678개불과하던 제조업체수는 2016년 1170개로 10년간 두배 가까. 정말로  교통망과 물류시설www.hankyung.com  . 외제  있는 충남 당진에 대해 포스팅 합니다.. 들 즘 저평가되었지만. 식는 철도 연계로 환황해 물류중심지로 도약을 목표로 한창 싹틔울 준비를 하고. 약빠른 기업투자 몰리는 당진…항만·. 몽클몽클 대-송악지구 잡화부두 석문지구 신항만,. 우호적  수도권과 인접하고. 벋치는  한국 최대교역국인 중국항과도 가까. 멀어지는  조선시대에는 조운선이 드나들던 조세창(漕稅倉)의 집합지였다.. 울렁울렁  합니다.. 수굿수굿 오는 각종 원자재, 산업단지에서 생산한 제품들이 철도를 거쳐 전국으로 운송되는 물류망이 가춰지며 석문산단 인입철도는 서해선 복선전철과 석문산단을 연결하는 31km 구간의 단선철도이며 올해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으로 선정되어. 짤록짤록 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냉장고  했으며 내포의 중심이 당진시 합덕읍입니다.. 주먹 당진시는 석문산단과 송산 제2일반산단을 수소산업중심의 신성장 클러스터로 육성하기로 했으며 충청남도와 수소연료전기차 부품,수소충전 기반산업 거점으로 조성한다. 어살버살  추. 속달속달 를 끼고. 망설이는 양한 혜택을 받을수 있습니다.. 더욱  항만. 들이마시는  통일신라 때는 대중국 무역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평화롭는 언제그랬냐는듯 태풍도 지나가고. 반목하는 ..충. 자유로이  기업이 이전하거나 공장을 신,증설하면 보조금-세제-금융 지원과 규제 특례등 다. 어둑어둑  내포의 중심이 당진시 합덕읍이다..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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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wiyasuui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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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이다.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박지원 연보 출생 1737~ 사망 1805 1737 한양에서 출생. 1771 황해도 금천 연암골에 정착. 1777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사. 1780 친족형 박명원이 진하사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 기행문집인 《열하일기》 저술. 1786 왕의 특명을 선공감감역을 지냄. 1791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을 역임. 1797 면천군수를 지냄. 1799 왕명을 받아 농서 《과농소초》를 집필. 1800 양양부사를 지냄. 1805 사망. 호랑이띠 - 자신의 능력을 믿고 강하게 추진하던 일들이 막힘이 있다. 주위에 도움을 줄 많은 지인분들이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부탁하라. 흔쾌히 승락하여 어려움을 해결해 줄 것이다. 50년생 : 평소와 다르게 침착하지 못하고 덤벙대기 쉽다. 62년생 : 금전적으로 유리하다. 일사천리로 일을 이룬다. 74년생 : 일시적인 감정으로 쉽게 결정하지 말 것. 86년생 : 쓸데없는 미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을 것이다. 98년생 :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하지 마라. 기존에 있던 것을 개선하고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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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suhfiu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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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Ⅳ 해충(害蟲)의 피해 ☞
해충(害蟲)의 피해 홍수, 가뭄, 폭풍, 서리, 폭설, 흙비, 지진, 폭우, 우박, 안개, 이상 기후 등 다양한 기상 이변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와 더불어 해충들의 이상 번식 역시 우리 조상들의 삶에 큰 재앙으로 다가왔다. 우리 조상들은 해충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세계인을 괴롭히는 해충 2012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리비아 등에서는 메뚜기떼가 나타나 농가에 큰 피해를 입혔다. 2011년에는 호주와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수십억 마리의 메뚜기떼의 습격이 있었다. 특히 호주에서는 8㎝가 넘는 커다란 메뚜기가 농장과 목초지를 초토화시켜, 호주 동부의 광범위한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를 표현한 1689년의 동판화. 메뚜기는 하루에 자기 몸무게의 두 배에 달하는 작물을 먹어치우는 식욕을 가지고 있으며, 가뭄과 기근 등의 피해 시에 메뚜기떼가 발생해 더욱 큰 재앙이 되기도 한다. 해충들 가운데 인간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은 메뚜기다. 메뚜기는 평���에는 단독생활을 하는 순한 곤충이지만, 무리를 이루면 맹렬한 공격성을 갖는 무서운 해충으로 변신하게 된다. 메뚜기떼의 발생은 가뭄으로 먹이가 줄어드는 등 한곳으로 몰려야 하는 상황에서 주로 발생한다. 메뚜기는 한자로 황(蝗), 황충(蝗蟲), 비황(飛蝗)으로 표현하는데, 우리말로는 ‘누리’라고 한다.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누리 피해가 많이 기록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도 해충 때문에 고통을 겪었음을 알게 해준다. 삼국시대의 누리 피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누리 피해 8회, 백제 5회, 신라 25회가 기록되어 있다. 누리의 피해에 대한 기록은 주로 음력 7월과 8월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메뚜기는 약 140여 종(種)이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재앙을 일으킨 누리는 주로 풀무치로, 가을철 ���식을 수확할 시기에 주로 활동하며, 건조한 기후에 이어 습기와 따뜻한 온도가 맞게 되면 대규모로 번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종이라고 한다. 이들은 논보다는 산에 인접한 밭이나 휴경지에서 서식할 수 있는 종이고, 유전적으로 대규모로 발생할 요인을 갖고 종이다. 또 애메뚜기 종류들도 삼국시대에 큰 피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도 한다. 삼국시대는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의 비중이 높고, 1년 농사를 짓고 경작지를 한 두 해 묵힌 후 다시 농사를 짓는 농사법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요즘 논에서 볼 수 있는 벼메뚜기는 삼국시대에는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누리로 인해 주로 피해를 입은 작물은 보리나 콩이 아니라, 가을에 수확하는 벼나 조였으며, 특히 조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397년 7월 신라 하슬라(강릉 일대)에 가뭄이 들고 누리가 생겨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이 굶주렸다거나, 465년 신라 사벌군(상주)에 누리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기록 등 구체적인 지명을 거론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나라에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발생한 누리의 피해가 서로 공통되는 바가 적어, 누리의 피해가 광범위한 지역이 아닌 국지적으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다만 고구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1~412) 15년 7월 ‘누리와 가뭄이 있었다.’, 신라 실성이사금(實聖 尼師今, 재위: 401 1)~417) 5년 7월 ‘나라의 서쪽에서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는 기록은 405년에 동시에 발생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동시에 누리의 피해를 입었다면, 피해지역은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122년과 399년 신라, 62년 고구려, 208년 백제에서 발생한 누리에 대해서는 황이 아닌 특별히 비황(飛蝗)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누리가 이동하여 피해를 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누리의 피해를 막기 위한 노력 메뚜기는 한자로 황충(蝗蟲), 비황(飛蝗), 우리말로는 ‘누리’라고 한다. 가뭄으로 인해 메뚜기떼가 발생하면 식량생산이 줄어들어 기근이 발생하고, 이는 전염병의 창궐 등과 맞물려 끔찍한 재앙으로 다가왔다. [출처: gettyimages] 가뭄이 들어 농사가 잘 안될 때에 누리가 발생하여 논밭에서 자란 곡식을 다 갈아먹으면 농민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져 극도의 고통을 겪게 된다. 754년 누리가 발생해 곡식이 귀해지고 백성들이 굶주리자, 향덕(向德)이란 자는 너무 가난해 아버지를 봉양할 수 없어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이기도 했다. 흉년의 피해가 다음해에도 이어지자 당시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죄수들을 석방하고, 늙고 병든 사람,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등 가난한 자들에게는 곡식을 나눠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조치를 해주었다. 571년 고구려 평원왕은 누리떼가 발생하자, 당시 짓고 있던 새 궁궐인 장안성 축조를 중지시켰다.굶주린 백성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관리를 파견�� 백성들을 위로해 주거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면서 백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도 했다.누리의 발생은 정치를 잘못한다는 신호로 여겨져, 왕으로 하여금 정계 개편을 단행하게 만들기도 했다. 720년 신라 성덕왕은 누리가 발생해 농사에 큰 피해가 생기자, 요즘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중시(中侍) 사공(思恭)을 물러나게 하고 파진찬(波珍湌)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는 정계 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769년 5월 누리와 가뭄이 발생하자 혜공왕은 백관들에게 각자 아는 인물을 천거하게 했다. 이러한 삼국시대 왕들의 조치들은 고려, 조선으로도 이어졌다. 고려시대의 누리 피해 삼국시대 황충은 곡식에 피해를 입혀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나쁜 해충이었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에 22회, [고려사]에 57번 기록된 황충 기록 가운데는 이상한 것이 등장한다. [고려사절요]에는 1133년(인종(仁宗) 11년) 황충이 경기의 산과 들에서 소나무를 먹고 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가뭄과 황충이 동시에 벌어진 이 해의 황충 기록에는 누리뿐만 아니라, 소나무를 갉아먹는 송충이의 피해도 같이 기록된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1191년 8월 해주에서 발생한 황충은 벼농사를 해친 벼멸구일 가능성도 있다.하지만 1016년 7월 비황(飛蝗)이 발생한 사건은 전형적인 누리의 피해로 볼 수가 있다. 1016년 현종은 누리의 피해가 발생하자 죄수를 석방하고, 다음 해에도 계속되자 대궐의 정전(正殿)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근신하는 감상선(減常膳- 천재지변으로 흉년이 들 때에 임금이 스스로 음식을 줄이고 근신하는 의식)의 의식을 치름으로써 재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보였다. 또 세금을 낮추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228년 고종(高宗)은 누리로 인해 농사가 망치는 일이 벌어지자 신하들을 보내어 여러 곳의 신사(神祠)에서 재앙을 멈추게 해달라고 빌고, 또 불교의식인 반야도량(般若道場)을 궁궐 안에 있는 선경전(宣慶殿)에서 27일 동안 베풀어 종교적인 힘으로 이를 물리치려는 노력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재해 대책 1536년(중종(中宗) 31년)에는 3도(道)에 누리(飛蝗)가 날아들어 들을 뒤덮어 남아난 곡식이 없을 정도였다. 오랜 가뭄 끝에 누리의 피해를 입은 후에는 다시 장마가 범람해 산과 언덕이 무너지고, 태풍이 불어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흙더미에 깔리는 참혹한 재해가 잇달아 벌어지기도 했다. 그 해 9월 신하들은 중종에게 강무(講武-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일)를 중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중종은 재해를 만나 매사에 한층 삼가는 것은 지당하지만 임금이 재해에만 마음을 써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폐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옳지 못하다고 했다.적은 수의 메뚜기는 좋은 간식거리지만, 수백ㆍ수천ㆍ수억 마리의 누리는 인간이 당장 어쩌지 못하��� 재앙 그 자체였다. 이 때문에 벌레를 많이 죽이면 조화로운 기운(和氣)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잡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잘못된 말이 민간에 퍼지기도 했고, 누리의 발생은 임금이나 관리의 덕이 부족해 발생한 탓이므로 임금과 수령이 덕을 닦아서 물리쳐야 한다는 믿는 선비들도 있었다.1447년 세종은 요망한 기운은 덕(德)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는 선비들의 생각을 두고 글자에만 구애되어 변통할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면서, 해충이 발생하는 즉시 잡아서 묻어버리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도 해충으로 인한 재해를 없앨 수 있는데 민간에서 이런 이치를 모르고 처음에 제거하지 않기 때문에 큰 우환이 된다고 하였다. 세종은 누리떼가 번식하지 못하도록 발생 초기부터 제거하도록 명령하고, 황충이 처음 나오는 상황을 조사해 보고할 것을 주문했다.세종의 이와 같은 조치는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누리떼의 발생을 미리 예방하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누리가 먹지 않는 토란 등을 다른 작물과 함께 심고, 겨울철에 메뚜기 알을 찾아 박멸하며, 발생 시기를 관찰해 즉시 죽이거나, 떼를 지어 날을 때에는 낙하지점을 알아내서 포살하고, 긴 장대에 울긋불긋한 천을 매달아 자신의 논밭에 오지 못하게 쫓아내거나, 볏짚을 태운 재나 석회를 살포하고, 누리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아침에 포살하는 등의 방법을 제시하였다.세종은 1444년 공주에서 누리가 발생해 곡식을 해치므로 군대를 출동해 잡게 했는데, 잡은 것이 60여 석이나 되었다. 농민들은 누리가 발생하면 물론 잡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누리를 제대로 막기란 불가능했다. 백성들은 하늘에 빌거나, 하늘을 원망하는 것 외에는 날씨가 추워져 저절로 누리가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 피해를 끼친 누리 1604년(선조(宣祖) 37년) 6월 강원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강원도 간성(杆城- 고성군) 지역에는 황흑색 누리(飛蝗)가 날아들어 전답에 두루 깔려 곡식을 남김없이 다 갉아먹었으므로, 며칠 사이에 들판이 불타버린 땅과 같이 변하고 백성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다고 하였다.1437년 (세종(世宗) 19년) 2월 기록에는 작년에 중남부 지역 4개 도(道)가 모두 흉년이 들어 거의 대부분 지역이 농사를 짓지 못했는데, 특히 경기도의 안성과 충청도의 공주(公州)·신창(新昌)·아산(牙山)·회덕(懷德)·직산(稷山), 전라도의 전주(全州)·함열(咸悅)·임피(臨陂) 등의 고을은 모두 누리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금년 봄에는 역질(疫疾- 강한 유행성 전염병)마저 유행��, 백성들이 자기 손으로 소와 말을 잡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보리 뿌리를 캐어 먹이를 하며, 처자를 보전하지 못하여 처자를 버리고 도망하는 자도 있고, 혹은 아이를 길에 버리어 아이가 쫓아가면 나무에 잡아매고 가는 자도 있다는 참혹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누리는 가뭄이나 역병, 홍수 등 다른 재앙과 겹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심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누리의 피해는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충청도, 영남과 호남 등 전국에 걸쳐 발생했다. 백성들을 괴롭힌 송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261건의 황충 발생기사 가운데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곡식을 해치는 벌레뿐만 아니라, 소나무 등 산림을 해치는 해충들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황충이 모두 누리는 아니었고, 일부는 나방이나, 벼멸구, 송충이도 황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곡식에 피해를 주었던 나방(왼쪽)과 소나무에 큰 피해를 입혔던 송충이(오른쪽). [출처: gettyimages] 황충 외에 가장 많이 역사에 기록된 해충으로는 송충(松蟲)이 있다. 송충이가 피해를 입히는 소나무는 고려와 조선에서 필요로 하는, 관리되고 보호되는 나무였다. 송충이 주로 먹는 소나무 껍질은 백성들에게 최후의 구황(救荒)식품이기도 했던 만큼, 국가에서 송충이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1101년에는 고려에 송충이가 크게 번식했다.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1102년 5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도교의 행사인 초제(醮)를 올렸고, 다음 달에는 재상에게 명해 5방의 산신과 3곳의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송충이가 없어지기를 빌기도 했으며, 군사 5백 명을 풀어서 송악산의 송충이를 잡도록 조치를 취했다. 송충이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 송충이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1403년 태종 임금은 송충이를 잡을 것을 명령했다. 이에 승추부(承樞府), 순위부(巡衛府) 등 여러 관청의 장인과 관리가 사람을 내어 1만 명이 참여하였고, 한 사람이 석 되(升) 정도를 잡아 땅에 묻었다. 태종은 송충이의 재앙은 인력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신하들은 이를 생각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여러 날에 걸쳐 송충이를 잡는 일을 한 끝에 송악산의 여러 골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잡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송충이를 잡는 일은 본래 승추부의 일이었다.이렇게 송충이를 잡았어도 또 다시 발생하자, 태종, 세종 등은 여러 관청의 관원들과 노비 등을 징발하여 수시로 송충이를 잡게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송충이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과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시기에 다시 큰 피해를 입혔다. 1685년 숙종은 한성부로 하여금 오부의 군졸들을 다 동원해 경계를 나누어 송충이를 잡아 없애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1702년에는 한양 인근 산에서 송충이가 번식하자, 3일 동안 사람들을 뽑아 잡은 송충이의양이 3,972석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 숙종은 송충이를 제거하기 위해 특별히 재앙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 기양제(祈禳祭 - 재앙을 쫓기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해충 제거와 백성들의 피해 정이품 소나무. 조선시대에 소나무는 궁궐 수리 등의 이유로 특별히 보호를 받기도 했다. 특히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는 세조(世祖)에게 도움을 준 인연으로 벼슬을 받았다. 송충이는 소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나쁜 해충이었다. 송충이를 잡기 위해 백성을 동원하다 보니, 백성들의 피해가 커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1729년 영조는 ‘송충이를 잡는 일은 폐단이 커서 백성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으니, 송충이를 잡느라 백성을 상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금원(禁苑- 대궐 안의 동산)의 소나무 잎을 상하게 하는 편이 낫겠다.’고 하고서, 군졸들을 시켜 사직단 주변의 송충이만을 잡게 하고 나머지는 놔두라고 명하기도 했다.하지만 1755년 한양의 사산(四山- 인왕산, 낙산, 남산, 북악산)에 송충이가 크게 번지자,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동원되어 잡았다. 임금의 명이 철저히 지켜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특히 왕릉(王陵) 주변 숲에 송충이가 발생하면, 백성들은 농사일을 제쳐놓고 군사들과 함께 송충이를 잡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송충이는 백성들의 비상시 먹거리인 소나무 껍질을 없애고, 땔감인 소나무를 말라죽게 하는 등 이래저래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벌레였다. 한국사에 익숙한 해충 미국의 작가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은 그녀의 대표작 [대지(The Good Earth)]에서 중국에서 발생한 메뚜기떼의 피해를 생생하게 묘사한 바가 있었다. 이 때문인지 메뚜기떼의 피해를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생��하기 쉽지만,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20세기 이후에는 방충제(防蟲劑)와 농약(農藥)의 사용으로 인해 해충으로 인한 피해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을 위협한 자연재해의 하나로, 해충 특히 누리와 송충이의 피해는 매우 컸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井上秀雄, [고대조선사서설], 영락사, 1978;문태영, 윤일, [삼국사기의 蝗에 대한 문화곤충학적 해석], [고신대학교 논문집] 5집, 2000;윤일, [조선시대 충청권에서 발생한 황충에 대한 문화곤충학], [자연과학] 13-1, 대전대학교, 2002;문태영, 윤일, 남상호, [역사서에서 곤충기록의 형태], [자연과학] 14-1, 대전대학교, 2003;박해철 외, [조선왕조실록과 해괴제등록 분석을 통한 황충의 실체와 방제 역사], [韓應昆誌] 49-4호, 2010.[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은 [광개토태왕릉비문]과 1년 오차가 있다. 따라서 그의 즉위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392년보다 1년 앞당겨 보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기록뿐 아니라, 신라 측 기록도 1년을 앞당겨서 보아야 한다. 실성이사금의 즉위년은 402년이 아닌 401년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역사의 ��침, 2011년. 53~63쪽 참조.주석 레이어창 닫기 주석 1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은 [광개토태왕릉비문]과 1년 오차가 있다. 따라서 그의 즉위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392년보다 1년 앞당겨 보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기록뿐 아니라, 신라 측 기록도 1년을 앞당겨서 보아야 한다. 실성이사금의 즉위년은 402년이 아닌 401년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역사의 아침, 2011년. 53~63쪽 참조. 테러리스트 서울에 상경한 사현,수현 형제. 고아였던 이들은 경찰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성장한다. 명석한 두뇌에 완벽한 실행력으로 서울경찰청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형과 이제 경찰대학을 수석졸업한 동생.그러나 이들 형제의 앞길을 동생 수현이 초임지에서 과잉방어란 명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3년형을 마치고 나온 수현은 친구 상철이 범죄조직의 하수인에게 끌려가 죽음을 당하면서 새생활을 시작하려던 그의 결심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만다. 평생의 꿈과 친구마저 잃은 수현은 직접적인 원인제공자인 암흑가의 보스 임태호란 자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젊은이의 건전한 이상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뒤틀린 세상을 부수기위해 무법의 테러리스트로 변신한다. 한편 사현은 사회에서 일대 혼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바로 동생 수현이란 사실을 알고 난처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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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on-hyeon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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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실학자 안정복(1712~1791)
1. 사람의 육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아 원수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기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그것은 부모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도덕의 근본인 효를 모독하는 것이다. 또한 동신(童身)을 귀하게 여기는 교리도 부부와 인륜과 음양의 근본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2. 조상의 제사에 대한 거부도 효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효는 인간과 천지가 소통하는 근본원리다. 서양 종교는 하늘의 참된 가르침이 될 수 없으며, 도덕규범이 타락한 것일 뿐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묵자의 겸애설보다 더 과격한, 현실성없는 이야기다.
4. 천국과 지옥과 영혼불멸 등 불확실한 것들을 교리의 중심으로 삼아서 비합리적이다. 살아있을 때의 일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후의 일을 알 수 있겠는가? 일상적 관심을 벗어나 초월적 환상에 빠지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5.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마귀의 기만과 유혹을 주의하라고 말하는데, 인간이 본 적도 없는 마귀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소홀하게 만들며 현세의 선악에 대한 책임을 경시하도록 할 뿐이다.
6. 창조설 역시 비합리적이다. 천지는 음과 양의 두 기운이 혼합되어 이루어지는 개벽의 세계이므로 인격체로서의 조물주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7. 신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주장도 틀렸다. 신은 우주를 구성하는 도덕적, 합리적 원리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8. 내세를 강조하기 때문에 반사회적이다. 인간이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현세에서의 선행이다. 신과 영혼의 구원을 주위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상위에 둠으로써 인간공동체의 근본적 중요성을 거부하게 된다.
9. 예수가 아담의 자손인 이상, 예수는 인간일 뿐이며 신이 될 수는 없다.
10. 아담과 이브의 원죄도 신의 모함일 뿐이다. 아담과 이브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사전에 잘 가르쳤어야지, 어떻게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해 놓고 그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벌을 내리는가? 그것은 어진 스승의 태도일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가난과 질병과 죽음 등을 겪는 것이 아담과 이브의 원죄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가소로운 논리적 모���이다.
11.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도 마땅한 ��리일 뿐이다. 그러한 사회적 선을 행하는 윤리적 바탕이 사람의 본성에 들어있다. 왜 인간이 처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한 죽은 후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가? 이는 현세의 고뇌에서 해탈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며, 근원적으로 이기적이다. 인간이 구원을 바라는 이기심으로써는 도저히 바른 세상의 도덕적 토대를 이룰 수 없다.
12. 세례, 죄의 고백, 공개적 기도 등은 불교제식과 비슷하다. 이는 그저 불교나 미륵불 신앙의 아류에 불과하다.
[x] 순암선생문집 제17권 : 천학고(天學考)+천학문답(天學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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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fsfsd-blo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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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창업성공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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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erfg-blo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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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sangho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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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고속도로를 달려 #김정희고택 ^^ #추사김정희 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이며 #서예가 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옛 집 ^^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에 의해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새소리 들리고 좋다 ㅎㅎ 이리 좋은데 이제서야 들렸네 다음엔 좀 더 시간이 ���으면 좋겠다 #일상 #생각 #잡담 #수다 #소통 #일기 #인문학 #윤상호 #윤사장(추사고택에서) https://www.instagram.com/p/ByMABjcgFaM/?igshid=1vrwq92jp00q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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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ssuecollector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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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비운의 실학자가 그린 조선의 국방 청사진 / YTN
[신간] 비운의 실학자가 그린 조선의 국방 청사진 / YTN
[앵커] 다산 정약용의 저서로 잘못 알려졌던 조선 후기의 국방 전략서가 한글로 처음 번역돼 출간됐습니다.
최근 ‘그림 대작’ 사기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가수 조영남 씨가 쓴 현대미술 책도 선을 보였습니다.
새로 나온 책, 박석원 앵커가 소개합니다.
[기자]
■ 상두지 / 이덕리 / 휴머니스트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리가 쓴 국방 전략서입니다.
내용에 감탄한 다산 정약용이 자신의 책에 세 번이나 인용하면서 정약용이 쓴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책을 처음으로 완역했습니다.
억울하게 간 귀양지에서 생을 마친 비운의 실학자는 전근대 저술로는 거의 유일하게 국방 인프라 조성과 무기 체계 정비 등에 대한 실용적 방안을 총망라했습니다.
차(茶) 무역을 통해 국방 재원을 마련하자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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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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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길 기술개발이 우선이다
김환식 장로 근래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조치를 보면 한국인이라면 분노와 서글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방이라는 이름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가장 가깝다고 여긴 이웃나라가 그렇게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태도에 환멸을 느낄 정도의 비애를 억누를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국력이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로부터 천시를 당함이야 당연하지만 제국주의 시대도 아닌 개명한 21세기에 마치 우리말을 듣지 않으면 침략이라도 하겠다는 식의 무례하고, 외교관례에도 어긋나는 방자한 태도를 보임은 참으로 기가 찰 일입니다. 분노와 허탈감에서만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이제 200년 전 다산의 지혜를 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산은 말합니다. “오래된 이 나라를 새롭게 개조하자(新我之舊邦).”라고 말하여 『경세유표』 48권을 저술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동안의 제도에는 없던 ‘이용감(利用監)’이라는 새로운 정부 부서를 신설하는 내용이 돋보이��� 나타나 있습니다. 『춘추전(春秋傳)』에 나오는 이용(利用)·후생(厚生)이라는 용어를 빌려다가 이롭게 활용해야만 민생이 후하게 된다는 의미를 부여해서, 기술개발로 이로운 기구들을 만들어 활용해야만 국부가 증진되어 백성들이 넉넉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선의 어떤 정부조직이나 법제에도 없던 ‘이용감’, 실학자 정약용의 면모가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던 대목이 바로 그 점입니다. “진실로 기예가 정교한 사람에게 녹봉을 올려주면 사방에서 기교(機巧)한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 것이다. 농기구가 편리하면 적은 힘으로 곡식이 많이 생산되고, 직기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옷감이 풍부해지고, 배와 수레의 제도가 편리해지면 힘을 적게 들여도 먼 지방 물화가 정체되지 않고, 인중(引重)ㆍ기중(起重)의 법이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토목공사가 견고해질 것이다. … 그러나 온갖 공업기술의 정교함은 모두 수학의 원리에 근본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구(句)ㆍ고(股)ㆍ현(弦)의 예각ㆍ둔각이 서로 들어맞고 서로 어긋나는 본리(本理)에 밝은 다음이라야 그 법을 깨칠 수 있을 것이다.”(利用監條)라고 말하여 수학 교육의 강화로 수리학의 원리가 밝혀져야만 기술의 개발은 가능하다는 탁견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산은 별도의 논문 「기예론(技藝論)」이라는 짤막한 논문 세 편을 저술하여 신기술 습득의 필요성, 기술의 발달을 이룩하는 방법, 신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심도 있게 거론하였습니다. 기술의 발달과 신기술 도입을 통해서 국부의 증진과 국민의 삶이 넉넉해지는 방안을 참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본은 지금 약간의 앞선 기술을 빌미로 우리나라를 깔보는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고급 기술에 국력을 기울여 월등하게 일본을 능가할 때만 우리는 일본의 왜구 근성을 막아내고 침략의 야욕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다. 다산은 그때 이미 조총 따위야 이미 구식이므로 새로 병기를 개발해야만 왜구를 막을 수 있고, 기술력이 증가할 때에만 국가의 위신을 세우며, 굴욕외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피력했습니다. 외교적 노력도 기울이고 대화를 통한 선린의 정신도 발휘해야 하지만, 결론은 기술 개발로 일본의 기술을 앞서는 길만이 종국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다산에게서 배워야 합니다.(끝) 20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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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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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문헌총록
『영인본(1969년 학문각 간행) 강주진 서문』 선조 조에 치른 임진왜란과 광해 조에 겪어야했던 병자호란의 양차에 걸친 남북(南北)에서 적의 침입으로 안일하고 외세에 의지해오던 조선사회에 자주사상이 움트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곧 실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실학사상가로서 정평이 있는 지봉 이수광의 뒤를 이어 알려지지 않았던 실학자 한 분이 있었으니, 이분이 곧 경와 김휴선생이다. 김휴는 지봉보다 30년 뒤에 태어난 분인데 지봉의 지봉유설에 못지않은 큰 저작을 남겼으니 이것이 곧 『해동문헌록』이다. 경와(敬窩, 김휴선생 호)는 선조 30년(1597) 안동 천전동 의성(문소)김씨 일가에서 태어났으며, ���대로 문한과 관직을 이어받은 명문거족이었다. 이러한 친가의 학문과 학덕을 이어받았음은 물론, 외가와 처가까지 모두 퇴계의 학덕을 이어받은 가문이었다. 경와가 이렇게 문한(文翰)1)과 세록가문이었지만 관계(官界)로 진출하지 않고 학문에 진력하게 된 동기는 당시에 실세(失勢)하여 처지가 좋지 못했으며, 또 사화의 참상을 잘 알아 관로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학행있는 이를 널리 천거(薦擧)하라는 왕명에 좇아 공을 강릉참봉으로 천거하였으나 병(病)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두 차례 부과(赴科)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 때마다 가환(家患)등으로 응시할 기회를 잃었다. 경와는 43세를 일기로 조졸(早卒)하였는데, 그가 장수 하였더라면 더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의 시문집, 도동록, 조문록 등을 묶은 경와집 4책(四冊)과 본 해동문헌총록을 남겨놓는데 그치고 말았다. 이 해동문헌총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해제의 집대성으로서 서지학사상 처음으로 뜻 깊은 거작이다. 최초로 서지학적 개념을 가지고 저술하였다는 점에서 민족문화사적 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학자의 손으로 된 훌륭한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해제가 이룩되었다는 데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지금에 와서 겨우 간행을 보게 된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바이다. 공의 족손 성택찬의 「경와공 행장」에 의하면 이 해동문헌총록이 화재를 만나 일부 소실되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지금 간행함에 있어 원본으로 사용한 몇 권은 천전동 경와 본가에서 보존되어 온 것인데, 이것은 과연 화재를 만난 흔적이 있어 경와 자필의 최고(最古)본의 책 주변이 소실되었으나 원문을 알아볼 정도로 불에 탄 흔적이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이것 역시 완질(完帙)이 못되어 다른 사본을 합쳐서 이것이 완질이 되므로 원본을 삼아서 영인하게 된 것인데, 이 다른 사본은 필시 경와 자신 아니면 다른 집에서 여벌로 베껴두었던 사본을 태(台)본으로 해서 따로 필사해두었던 것이 남아 있던 것 같다.그것은 경와가 탈고되기 전에 초고본을 다른 학자들에게 보여서 교정과 교시(敎示)를 받은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원본초고본과 필사본을 이사람 저사람이 필사한 것이 산질본으로 수개 처에서 보존되어 내려왔다.그 중 경와종가에서 보존해온 경와 자필의 초고본 몇 권에 있는 자필의 문헌록서문에 의해서 밝혀진 이 책의 집필 편찬된 동기와 목적 및 기간 등은 ‘저자 서문’을 보면 자세히 알게 될 것이나,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경와가 스물 살 되던 해(1616년) 처가 쪽 인척인 여�� 장현광을 원당으로 찾아뵙는다. 당시 여헌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자로서 기호의 송시열, 송준길 등도 소시적에 이분을 찾아 올 만큼 명성이 높았고, 서애(유성룡)의 셋째 아들을 수학케 할 만큼 문명(文名)이 높았는데, 여헌은 경와에게 수권의 책을 보이면서, “이것이 ‘문헌통고경적고’인데 여러 경적을 소개한 것으로 이 한권으로 고금문헌의 성쇠를 손쉽게 알 수 있다. 나는 문헌통고 중에서 경적만을 초출하여 부록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이것으로써 일목요연하게 경적의 대략을 알게 된다. 지금 우리는 동방인으로 동방문헌을 꼭 알아야 한다. 말하고, 내가 군(휴)을 만나본 즉 박식하고 재량이 있으므로 우리나라 문헌을 정리하면 좋을 것 같다. 더구나 군이 거주하는 군읍(안동,예안,영주,봉화,예천,영양,청송,상주,문경,선산)은 병화를 면한 서적이 잘 보관되어 있는 곳이 많으니 이것을 수집편찬하고 또 얻어 듣는 데로 이를 기록하여 하나의 문헌해제 같은 것을 편술하면 문헌을 충분히 밝힐 수 있고, 또 널리 참고로 삼을 수 있으니 그 저술의 공이야 말로 충분히 선인들의 대작에 못지않은 공적이 될 것이다.”라고 부탁 겸 당부했던 것이다. 경와는 선생님의 가르침과 그 뜻을 이어받아 노력할 것을 다짐한 이후, 우리나라에서 처음 가는 《도서해제》작업이 경와의 손으로 시작된 것이다. 낙동강 좌우 동서지방에 있는 명문대가에서 서책을 보관하지 않은 집이 없었다. 이러한 서책을 찾아다니면서 도서해제작업을 했다. 도서해제를 하자니 저서를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서책명과 그 내용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적으로 지금부터 390년 이전인 까닭에 나려(羅麗)시대의 고서적도 지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그 때는 그 때대로 어떤 서책은 책만 있고, 저자가 불분명하고 또 어떤 책은 저서와 서명이 분명한데 실물인 책이 없고 해서 편술에 곤란을 느끼었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저자의 성격 행실과 저작 내용의 가치와는 별개로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옛 그 시대는 저자의 행적과 그 저작의 내용과를 별개로 볼 수 없을 때인 만큼 도서해제의 중요한 부분이 그 저작자의 행적을 밝히는데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해 동안 수집 편술한 약간의 책 질이 되었을 때 그 이름을 『해동문헌록』이라하여 미탈고 된 채 이를 여러 선생에 보내서 좋은 교시와 교정을 받기로 했던 것이다. 여기서 경와는 ‘문헌을 밝히는 데는 인물의 성쇠, 문헌의 고하, 세도승강도 알고 있어야 한다’ 는 여헌 선생의 교시를 받고, 이에 맞추어 다시 교정 보완했던 것이다. 「나려예문지(羅麗藝文志)」에 수록된 고려본만 하더라도 전체의 삼분지 일 정도의 숫자가 이미 경와의 이 해동문헌록에서 취급된 것이며, 이 해동문헌록에 수록된 670여종의 도서 중에서 고려본 이상의 고전적이 삼분의 일을 ���지하고 있다. 당시 낙동강 좌우 동서근읍에 산재하고 있었던 풍부한 전적량을 짐작 할 수 있다. 지금도 이지방의 이곳저곳에 대를 물려 전해진 서고의 것이 흩어져 나와서 권위 있는 도서관의 고전실을 채우고 있고, 고서 애호가들의 서재를 메워주는 고전의 보급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고금상정예문」이란 책은 세계에서 활자발견의 가장 오랜 문헌이나 지금에 와서는 기록상으로만 접할 수 있어 당시의 실물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경와가 이 책을 다룬 것을 보면 이 당시에는 이 책이 실존해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예악(禮樂)류에 해제되어 있다.위로부터 신라의 최문창(최치원)으로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많은 인물과 저서가 있었는데, 저자도 거의 알 수 없거니와 저서도 모두 보존되지 못했다. 따라서 경와는 이 도서해제에서 서명만 기입하고 저자와 내용을 상기(相記)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이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경와가 해동문헌록의 작업을 착수한 것이 20세 되던 해에 여헌 선생을 찾아가 뵌 이후의 일인데, 이 책의 서문을 쓴 것이 41세 되던 해이므로 약 20년이 걸린 셈이다. 그가 43세에 서거한 점을 참작한다면 그의 필생의 사업이었고, 또 이러한 난사업으로 해서 건강을 상하게 한 점도 있으리라 믿어진다. 경와는 이 책을 탈고한 후에 참황(慙惶)하여 스스로 생각해 본 탈고 소감을 이 책 서문에 적어 두었다. 여기에 보면 대개 인물을 논하자면 먼저 기량과 지식을 가름한 다음에 그 사람의 문예를 논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작자는 반드시 그 사람의 행적을 먼저 살핀 연후에 문장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행적을 알려면 먼저 선ㆍ불선을 간파하여야 한다고 했다.수 천재(千載)의 많은 인물의 선, 불선을 총괄하여 일일이 되새겨 본즉 독서자 경와가 이렇게 인물에 치중해서 도서해제를 한 것은 실로 맹자의 유의에 쫒았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경와는 작품과 작자의 관계, 즉 저자와 저작, 사람과 문장 등을 중요시 했던 것이다. 이로써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신라이후 고려, 조선에 걸쳐 670여종의 도서해제를 완성하였다는 것은 한국서지학사적 최유의 대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저 고본은 사본(寫本)으로서 6권으로 되어있는 것을 일 책으로 합쳐서 간행하게 된 것이다. 1) 문한(文翰) : 문필에 관한 일, 문한서 : 임금의 명령을 글로 기초하던 관청, 1275년에 한림원을 고친 이름으로 뒤에 사림원으로 고쳤다. 조선 시대, 궁중의 경적, 사적 등을 관리하고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 저본 : 해동문헌총록 / 김휴 원저; 강주진 편저; 윤병태 색인 - 김휴 선생(1637년) 원저 해동문헌총록 영인본(학문각, 1969년)을 ��탕으로 함. 2. 번역 - 원본 페이지를 그대로 글자크기도 대등하게 가로로 옮겼으며, 또한 한 단락별로 번역하여 한자원문과 쉽게 비교��도록 작성하였음. - 일반인들이 쉽게 비교, 열람할 수 있도록 가급적 직역(直譯)을 채택함. 3. 수록 : 「해동문헌총록」은 총 670종 옮겨 새김 [저본 : ~835쪽] - 목록 : 총 670여 책 4. 부호의 쓰임 - 좌측에 쓰인 숫자는 저본(영인본) 수록 페이지임. - 《 》; 〈 〉 : 서명(書名) ; 부서명 - ‘ ’ : 대화체, 인용문 5. 저본(필사본)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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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chronicle-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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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의 치도론
조선 후기 개혁적 학자들은 길을 다스려 경세(經世)하자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통칭 “실학자”로 불리는 일군(一群)의 지식인은 경제, 군사, 행정, 박애의 관점에서 치도(治道)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이은숙, 1990). 이들은 정치, 경제, 행정, 군사적 측면에서 수레 사용의 용익(用益)을 강조했고, 같은 이유에서 도로 건설을 주장했다. 그 중에서도 상업 발전을 통해 국력을 도모하려했던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 학자들에게 수레와 도로는 필요 불가결한 대안이었다.
북학파의 견지에서 조선의 열악한 도로상은 큰 골칫거리였다. 내륙 험지는 고사하고 도성 저자거리에서도 물자의 순환이 어려웠다. 수레가 다닐만한 노폭, 노면이 불비했다. 특히 마차가 통행할 수 없는 도로는 상업, 산업 발달에 큰 장애라 인식했다. 일례로 북학파 학자 유수원이 쓴 『우서』(迂書)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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