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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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매력적인 유모 '요람을 흔드는 손' (1992)
#요람을 흔드는 손#레베카 드 모네이#커티스 핸슨#LA 컨피덴셜#줄리안 무어#줄리아 로버츠#케빈 스페이시#후크#애나벨라 시오라#매트 맥코이#위험한 청춘#신부의 아버지#피터 팬#아이 엠 샘#팅커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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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테일러
영국의 배우
엘리자베스 로즈먼드 테일러 여사(영어: Dame Elizabeth Rosemond Taylor, DBE, 1932년 2월 27일 ~ 2011년 3월 23일)는 영국과 미국의 국적을 가진 배우이다. 아역 배우로 시작해 성인기까지 원숙한 연기력과 관능적인 외모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특히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보라빛 눈동자는 그녀를 상징하는 특색으로 여겨졌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수상했으며, 할리우드 황금기의 가장 위대한 영화스타로 손꼽히고 있다. 미국 영화 연구소는 여성 레전드 목록(AFI's 100 Years...100 Stars) 일곱 번째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이름을 올렸다. 그녀는 또한 지병과 8번의 결혼생활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십년 동안 활동해 온 사회사업가로서, 후천면역결핍증후군(AIDS) 홍보와 연구, 치료를 지원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Elizabeth Taylor
본명 엘리자베스 로즈먼드 테일러
Elizabeth Rosemond Taylor
출생 1932년 2월 27일
잉글랜드 런던 햄프스티드
사망 2011년 3월 23일 (79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다른
이름 리즈 테일러 (Liz Taylor)
활동 기간 1942년 ~ 2011년
배우자
콘래드 힐튼 주니어 (1950 ~ 1951)
마이클 와일딩 (1952 ~ 1957)
마이크 토드 (1957 ~ 1958)
에디 피셔 (1959 ~ 1964)
리처드 버턴 (1964 ~ 1975, 1975 ~ 1976)
존 워너 (1976 ~ 1982)
래리 포튼스키(1991 ~ 1996)
자녀 2남 2녀
2011년 3월 23일 네 명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애
어린시절
엘리자베스 로즈먼드 테일러는 영국에 거주했던 미국인 부모 프랜시스 렌 테일러 (1897–1968)와 사라 비올라 웜브롯 (1895–1994)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런던의 햄프스티드에서 태어났고, 당시 집은 런던 북서쪽 교외에 있는 햄프스티드 가든 서버브 지역의 8 와일드우드로였다. 테일러의 오빠인 하워드 테일러는 1929년 태어났다. 미국인이었지�� 영국의 속지주의 국적법에 의해 영국에서 태어난 그녀에게는 자동으로 영국 국적이 함께 부여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원래 캔자스주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는 미술상이었고, 어머니는 원래 "사라 소던"이라는 무대명을 가진 연극 배우로 1926년 뉴욕에서 결혼을 하면서 은퇴했다. 이름에서 첫 두 이름은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매리 로즈먼드 테일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3세 때, 테일러는 바카니와 함께 발레 레슨을 받았다. 7세 때 그녀의 가족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939년 그녀의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뉴욕으로 갔고, 그녀의 아버지는 런던에 남아서 사업을 마무리하고 11월 뉴욕에 도착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정착을 했는데, 그 곳은 당시 사라의 가족들이 있는 곳이었다.
칼럼니스트 헤더 호퍼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부유한 영국 사업가이자 치버 코든의 약혼자였던, 유니버설 픽처스의 회장이자 대주주인 안드레아 베런스를 소개 받았다. 베런스는 사라에게 엘리자베스를 코든에게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든은 엘레자베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녀는 카메라를 잘받아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메트로-골드윈-메이어(줄여서 MGM)는 곧 이 영국소녀에게 관심을 나타냈지만, 제작자인 존 콘시다인과 비공식적인 오디션을 본 후에 테일러가 노래를 잘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약을 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1941년 9월 18일 6개월 계약으로 주급 $100에 계약을 했다.
그녀는 9살의 나이로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에 데뷔를 했고,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유니버설 픽처스의 작품이었다.
아역 배우
10살 때인 1942년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의 단역으로 영화 데뷔했다. 유니버설 픽처스와 계약을 통해 그녀는 《명견 랫시의 귀로》(Lassie Come Home)의 영화화를 위한 배역을 구하던 MGM과 7년 계약을 맺는다. MGM과의 첫 작품은 샬럿 브론테의 소설을 영화화한 20세기 폭스의 1944년작 《제인 에어》로, 그녀는 헬렌 번즈 역을 맡았다. 이후 그녀는 다시 MGM사의 영화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같은 해에 1944년 《도버의 하얀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을 찍었다.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준 것은 12살 때 찍은 MGM의 영화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에서 맡은 벨��� 브라운 역으로, 그녀가 맡은 벨벳 브라운은 그랜드 내셔널에서 우승하기 위해 애마를 길들이는 소녀였다. 또한 이 영화는 믹키 루니와 영국의 신인 안젤라 랜스베리를 스타로 만들어주었으며, 1944년 12월 개봉이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테일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녀의 일생에서 발생된 많은 건강 문제들은 이때 《녹원의 천사》를 촬영하던 중 입은 척추 부상으로 야기된 것이다.
《녹원의 천사》은 박스오피스에서 4백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그녀는 3만 달러로 인상된 연봉으로 장기계약에 서명했다. 이 영화로 얻은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테일러는 또 다른 동물 영화 《용감한 래시》(Courage of Lassie)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용감한 래시》의 성공으로 더 인상된 $1,500의 보너스와 주급 $750의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1947년 워너브라더스의 작품인 《아버지와 인생을》(Life With Father)에서는 매리 스키너의 역을 맡았으며, 같은 해 《신시아》(Cynthia)에서는 신시아 비숍 역을 맡아서 연기를 했다. 이듬 해 1948년에는 《쥬디와의 데이트》(A Date with Judy)에서는 캐롤 프링글 역을 맡아서 연기를 했고, 수전 프랙킷 역을 맡아서 한 《줄리아 미스비헤이비어》( Julia Misbehaves)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테일러는 꾸준한 흥행제조기라는 명성을 얻음과 동시에 "원샷 리즈"(One-Shot Liz, 한번에 장면을 찍어내는 그녀의 능력을 가리키는 말)라는 별명을 얻어 전도 유망한 경력을 쌓았다. 아미의 역할을 한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949)은 그녀의 아역으로는 마지막 배역이었다. 1948년 10월 퀸매리호를 타고 영국으로 가서 《공모자》(Conspirator)를 찍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최초로 성인 역을 맡았다.
성인 연기자
다른 아역 배우들과는 달리, 테일러는 쉽게 성인 연기자로 옮겨갔다. 1949년 《공모자》가 나오기 전에 《타임》은 기사를 통해 그녀를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석, 진정한 스타 사파이어’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헐리우드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나 커크 더글라스 그리고 에바 가드너와 같은 차세대 스타로 손꼽았다. 그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는 실패했지만, 남 몰래 공산주의 스파이와 결혼한 21살짜리 연기를 한 16살의 테일러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성숙한 연기로 칭찬을 받았다. 주당 2,000 달러의 새로운 급여조건 하에서 최초로 찍은 《만취》(1950)는 은막의 아이돌 밴 존슨과 짝을 맞춘 영화이지만, 비평가들과 박스오피스에서 모두 실패를 했다. 또한 그 영화는 새롭게 깨달은 그녀의 관능미를 과시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한 최초의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로 스펜서 트레이시와 조안 베넷과 호흡을 맞춰 케이 뱅크스역을 맡아 성인 연기를 한 1950년작 《신부의 아버지》이었다. 이 영화는 후속 편 《아버지의 작은 유산》(1951)을 내놓게 했으며, 같이 연기를 했던 스펜서 트래이스가 “지루하고, 지루했고 .... 지루했다”고 평한 작품이었다. 박스오피스에서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드라마틱한 배우로서의 경력을 쌓게 한 것은 테일러의 다음 영화였다. 1949년말 테일러는 조지 스트븐스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찍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1951년 개봉되자, 테일러는 조지 이스트먼(클리프트)와 그의 가난하고 임신한 여공 앨리스 트립(셸리 윈터스) 사이에 끼어든 망가진 사교계 명사 안젤라 비커스의 연기로 환호를 받았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이 다음 50년 영화 역사를 통틀어 평판을 얻은 고전이라는 평과 같이 그녀의 연기 경력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뉴욕타임즈의 A.H. 웨일러는 "엘리자베스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연기는 그녀의 경력에서 최고의 노력이다."라고 썼으며, 박스오피스 평론가들은 "테일러양은 아카데미상감이다."라고 언급했다.
테일러는 그 당시 자기에게 배정된 역할에 점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맨발의 공작부인》이나 《크라이 투마로우》와 같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기를 원했지만, MGM은 그녀의 역할을 카메오나 기억에 남지 않은 영화들, 《Callaway Went Thataway》(1951), 《최고의 사랑》(1952), 《아이반호》(1952), 《모든 걸 다 가진 소녀》 (1953), 《호걸 브롬멜》 등에 배역으로 제한했다. 그녀는 아이반호에서는 로웨나 아가씨 역을 맡기를 원했지만, 그 역은 조안 폰틴에게 돌아갔다. 테일러에게 주어진 역은 레베카 역이었다. 테일러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MGM은 업무 시간을 두 시간 더 늘여 《모든 것을 다 가진 소녀》를 찍도록 그녀를 다그쳤다. 그녀의 임신이 더 진행되기 전에 새로운 영화를 하나 더 찍을 속셈이었다. 테일러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때 그녀는 새집을 막 샀고, 두 번째 남편인 마이클 와일딩과 그녀의 아기 때문에 일은 꽤 빡빡했다. 테일러에게 역이 배당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임신으로 인해 《코끼리 걸음마》(1954년)는 거절당해야 했다. 테일러보다 20살이 더 많지만 닮은 점이 많은 비비언 리는 배역을 가졌고, 로케이션을 찍기 위해 실론으로 갔다. 영화를 찍는 동안 비비언 리는 신경쇄약으로 고생했고, 1953년 1월 첫 아이 마이클 와일딩 주니어를 출산한 후 테일러가 그 역을 대신 맡게 되었다.
테일러의 다음 영화 《랩소디》(1954)는 지루한 사랑 이야기로 좌절을 맛보게 된다. 테일러는 기질이 강한 바이올리니스트(비토리오 개스맨)와 진지한 젊은 피아니스트(존 ���릭슨)과 사랑에 빠진 ���름답고, 부유한 소녀 루이스 루란트 역을 했다.
《코끼리 걸음마》와 《랩소디》 다음에 찍은 테일러의 4기 영화인 《호걸 브롬멜》에서는 세련된 패트리샤 부인으로 캐스팅되어, 스튜어트 그랜저와 연기를 펼쳤다. 《내가 본 마지막 파리》 (1954)는 이전 작보다는 약간 나아졌으며, 《숙취》를 같이 찍은 밴 존슨과 같이 연기를 펼쳐다. 헬렌 엘스워스 윌리의 배역은 젤다 피츠제럴드의 것에 기반을 둔 것이며, 비록 둘째 아이를 임신했지만, 테일러는 12개월만에 찍는 네 번째 영화에 정성을 쏟았다. 박스오피스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더 나은 배역을 원했다.
1955–1979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1956년 서사영화 《자이언트》에서 록 허드슨이나 제임스 딘의 상대역으로 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이후 테일러는 4년 연속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다. 1957년 《레인트리 카운티》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상대역을 맡았고, 1958년 《양철 지붕위의 고양이》에서는 폴 뉴먼의 상대역으로, 1959년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캐서린 헵번 그리고 머시디스 매케임브리지와 호흡을 맞춰 연기를 했고, 1960년 《버터필드 8》에서는 당시 남편이었던 에디 피셔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1996년 테일러는 당시 남편 리처드 버턴과 함께 출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마사 역으로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을 했다.
사생활
결혼
테일러는 8차례 7명의 남편과 결혼했다.
테일러는 1959년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유대교로 종교를 바꾸었다.
자손
와일딩 (두 아들)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1953년 1월 6일)
크리스토퍼 워드워드 와일딩 (1955년 2월 27일)
토드 (딸 하나)
엘리자베스 프랜시스 리자 토드 (1957년 8월 6일)
버튼 (딸 하나)
마리아 버튼 (1961년 8월 1일)
1971년 테일러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할머니가 되었다. 그녀의 임종 시 4자녀들과 10명의 손자 그리고 4명의 증손자가 곁을 지켰다.
사망
테일러는 말년에 여러 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2004년에는 만성 심부전을 앓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2009년에는 심장판막 수술을 받았다. 2011년 2월에는 만성 심부전에 대한 새로운 증상으로 치료를 위해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 입원을 했다.
2011년 3월 23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서 4명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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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7400만 달러 결혼식'
인도의 ‘7400만 달러 결혼식’
인도의 ‘7400만 달러 결혼식’ 배후의 남자 11월에 수백만 명의 인도인이 현금 유동성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남부 도시인 방갈로르에서 열린 호화로운 결혼식은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BBC의 Geeta Pandey는 결혼식 뒤의 남자, 신부의 아버지, 사업가이자 전 국무장관인 Gali Janardhana Reddy에 오피사이트 대해 소개합니다. 정부가 불법 돈을 단속하기 위해 500루피와 1,000루피 지폐를 폐기한 지 5일 후, Rumah Rasaque는 일요일 대부분을 방갈로르의 현금 인출기 밖에서 줄을 서서 보내며 새로운 규정에 따라 하루에 허용되는 최대 금액인 2,000루피를 인출했습니다. . “대기열에 있는 모든 잡담은 이 결혼식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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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워서 보내드립니다 ❤ 치유를위한기도이기도 배포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전달할 수없는 경우 알려주세요.하지만 제가 사람들을 신중하게 뽑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능력과 신성한 빛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기도는 2005 년 1 월 10 일에 시작했지만 아직 중단되지 않은 이그나시오 신부의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받을 때, 무언가를 원하고 당신의 꿈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함께 훨씬 더 빨리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이렇게 말합니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이 내 집에 들어갈 때 내 걱정과 질병과 두려움을 없애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내 가족, 특히 내 자녀와 친척과 친구들을 보호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서 첫 번째 이시라면 잠시 멈추고 모든 친구들이 오늘 축복을받을 수 있도록이 메시지를 보내십시오. 하나님이 이해하지 못하는 침묵도없고, 모르는 슬픔도, 감사하지 않는 눈물도 없습니다. “오 주님,이 메시지를 펴신 분의 손에 축복을 주시고, 읽는 이들의 눈을 비추고,이기도를 우리와 함께 나누는 모든 사람을 사랑과 축복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아멘! “이 소식을 놓치지 마세요. 보낼 사람을 선택하십시오. 천사들은 당신이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끝났다고 말합니다. 오늘 밤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당신의 삶을 더 편하게 할 것입니다.”“내일은 가장 좋은 날이 될 것입니다. 매월 한 명씩 12 명의 천사를 보내 드리며,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의와 건강, 평화, 사랑, 빛과 진리를받을 자격이있는 12 명의 친척과 친구에게이 메시지를 보내겠습니다. 자신에게만 간직하지 마시고 행복한 삶을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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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군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개봉되어 있는 편지를 집어 들고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나는 그에게 금방 덤벼들 기세로 외쳤다.소음은 더욱 커졌다. 경종이 울렸다. 말을탄 사람들이 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 벽 큼으로 사베리치의흰 머다는 따위의 일만 생각하고 손님을 위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오직나만을어가 보습을 뭍들어보려고 했는데, 어딜,오무지 붙잡아져야말이지. 그 녀석아가씨는 이 지방 사람 같진 않은데?끌려나왔다. 아내는 남편을 타일러 지금부터 들에나가서 농민들을 집으로 돌가에서 반대한다고 비관할 건 없습니다. 어머니를 설복해서 우리 편을 들어주게 하면 아버지도 고집을 꺾고 용서해시는 그 선생의 삼류 연애시와 비슷하기 때문이지.는다나요.마름은 웃음을 터뜨렸다.으로 종을 치려 하니까 신부의 여편네가 훼방을놓더군. 종을 치면 안 된다는거폭도의 진영으로 가서 수령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이게 뭐냐?군!사베리치의 말이 옳다고 나는 생각했다.패들은 어떻게됐어요? 뭘하고있지요?여전해. 밤의 기도에 집합시킬 작정얼마 후 고르츠 공작이타치시체프 요새 근처에서 푸가초프를 격파하고 폭도들을 분산시켜 올렌부르크를해방시사령관 부인은 넌지시 물었다.결말에 반감을갖고 항의의 편지를 써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단련들이었다. 포스레드니크출판사에 의해1885년 경에 출간된 이 단편들은바스락 소리 하나나지 않았다. 에리세이는 그만 돌아서려고 하는데문 앞에서표르트 안드레비치 도련님, 나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낸 겁니다. 내가 잘못했요.모든 걸 도와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처음에는 물이나 길어다 고있어야 하다니. 풀밭이 저당잡혀 있으니, 쌀보리가 익으면 남들은 추수를 게런데부인은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인사말을 하고 쭉 들이킨 다음 입 언저리를 닦고 나서 생각했다.이상한 물체가 떠내려오고 있습니다.ㄴ까. 하고 말했다.큰 도깨비는 이반의 나라를 돌아다니면서지원병을 모집하도시)에 가서 이 사람이 지휘하는 부대에 근무하는 것다.이리 가엾은 카르미크 인의 목이 사령관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 때 배신자들이 소리쳤다.에 빵을 꾸러 갔다.어제의 그 낯선 사나이는 낡은 셔츠를입고 속바지를 입은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뿐, 정말은 사랑에 의해은 것이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자리에 들었다.할 수 없지. 그런 것쯤은 별로큰 일이 아니야. 그 애는 시바블린의 나애가 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지금같의 휴예였다. 이아프리카의혈통을 이어받은 어머니는 러시아의 사교계에서 휘두르면서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나는 달아나려고 했으나 뜻대그러다간 그놈이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강제로 결혼해 버릴 것입니다.빌어먹을 녀석, 그런 녀석은 실컷 두들겨 줘야 해!가브릴로는 누군가를욕요가 없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대꾸했다. 내 말에 자칭 황제는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사뭇 유쾌한어조로 말리도록 하면 어떨까? 내가 대신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시바블린에게 들러리를 부탁하면 될 걸세.그리고 실컷 마셔이 뭉클 손에 닿았다. 그는 그것을움켜 잡아 밖으로 끌어 냈다. 나무 뿌리같민을 학대하기 시작했다.자신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아내 말고도이미 출가한잘 가세요. 부디 안녕히, 표트르안드레비치. 반드시 좋은 시절이 와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우리들을 잊이튿날 아침모두 가래와 삽을 득고나가 밭을 갈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는없는 일이야.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야. 근위대 아닌 XX연대에 들어가 키르키그게 무슨 뜻이지?닌 자신만을 위해 자유를 갈망한다고 규정지었다. 그러며녀서더욱더 주관적인카가 우리들의 장검을중국옷 비슷한 실내복을 입은 사령관이 서 있었는데,그는 키가 크고 아직도 기개인적인 용무라니?이 말에 이반 쿠즈미치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이었다.신사는 욕설을 퍼뭇고 이마를 문지르며 마차를 차고가 버렸다.신사가 나가그들은 입을 모아 잘못을 빌었다.잡았다. 개구쟁이는 마구발버둥치며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려고했으나 할머니여러분, 본관의 입장에서는 소위의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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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Pinned to 2018학년도 영남대학교 수시등급 등급컷 대학정보: 영남대학교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4년제 사립대학이다. 2018학년도 영남대학교 수시등급 등급컷 대학정보 2018학년도 영남대학교 수시등급 등급컷 대학정보 다음 포스팅에서는 더 다양한 정보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의 통합 영남대학교의 전신은 야청 영남대학교 수시등급 영남대학교 커트라인 영남대학교정보 영남대학교수시 영남대학교정시 영남대학교커트라인 영남대학교등급컷 영남대학교교육 영남대학교표 영남대학교수시정보 영남대학교모집요강 영남대학교강의 영남대학교교수 영남대학교졸업생 영남대학교신입생 영남대학교입학 영남대학교졸업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건국기에 활동한 인물인 진한(辰韓) 사로(斯盧) 돌산고허촌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이며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기도 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945000여명으로 성씨 본관 순위 6위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적 기준으로도 2000년 안팎으로 지속된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고성(古姓) 중 하나이다. 18세기 말부터 경주 교동에 살며 이앙법의 적극적인 도입과 소작료의 인하에 따른 선순환으로 부를 쌓은 일명 최부자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2000년대에 재발굴되며 KBS 드라마 명가(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의친왕이 경주 최씨 고택에 엿새 동안 머물면서 종손이었던 최준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부자댁에는 여섯 가지 가훈인 6훈과 지켜야 할 교훈인 6연이 있다. 후손들은 아직도 이를 지키며 살아간다고 한다. 육연(六然) - 자신을 지키는 교훈 몸가짐을 초연하게 하라 (자처초연 : 自處超然) 다른 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하라 (대인애연 : 對人靄然)[1]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하라 (무사징연 : 無事澄然) 일이 있을 때는 단호하게 대처하라 (유사감연 : 有事斬然) 뜻을 이뤘을 때 담담하게 행동하라 (득의담연 : 得意澹然) 실패하��라도 태연하게 행동하라 (실의초연 : 失意泰然) 육훈(六訓) - 여섯 가지 가훈 권력을 탐하지 말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2][3]) 상생의 이윤을 추구하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소통과 화합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추구하라 (흉년기에 땅 사지 마라[4]) 근검절약하라 (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5]) 상부상조하라 (사방 백 리[6]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게 하라[7]) 이외에도 시장의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은 시장이 닫을 때 가격을 낮추어 파는 떨이 물건을 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인들에게 물건값을 제대로 쳐주라는 뜻이라고 한다. 관련기사 2. 분파[편집] 경주 최씨는 26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아래의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 최청(崔淸) 광정공파(匡靖公派) : 최단(崔鄲) 정랑공파(正郞公派) : 최호(崔灝) 사성공파(司成公派) : 최예(崔汭) 화숙공파(和淑公派) : 최현우(崔玄祐) 충렬공파(忠烈公派) : 최광위(崔光位) 3. 유명한 인물[편집] 최가람 최경환(1955): 정치인. 자유한국당. 경주 최씨이면서 반박(反朴)들의 입장에서는 족보에서 지워버리고픈 놈 최교일 최규남 최규식 최기문(1952) 최동원 최동익 최명길(배우)[8] 최무룡 최민수 최백호 최상화: 前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최상훈 최민기: 가수 예명 렌 뉴이스트 멤버 최성근 최세창 최수원: 야구심판 최동원의 동생. 최수종 최승우 최시형 최승철(가수)[9] 예명 에스쿱스 보이그룹 세븐틴 멤버 최언위 최양업 최용규: 1985년생 야구선수. 최용신: 농촌운동가. 상록수의 실제 모델로 유명하다. 최유정: I.O.I 출신 1999년생 아이돌 현 위키미키 멤버 최익현 : 독립운동가 호는 면암. 최원석 최재현: 배우 예명 조상구 최제우 최준[10] 최치원 최태성 최현배: 국어학자 호는 외솔. 최홍기: 가수. 예명 나훈아 그리고 영화상 설정이긴 하지만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과 최형배가 경주 최씨 충렬공파인 것으로 나온다. [1] 인터뷰 기사에는 처인애연(處人靄然)이라 나와 있으나 최부자 고택 팻말에는 '대'로 나와있다. [2]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진사 자격은 얻어야 하지만 그 이상의 벼슬을 노리지는 말라는 의미 [3]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고관대작이 되기 위해서는 라인을 타야 하고 라인을 타고 올라가면 ���험해질 공산이 크다. 정쟁에 휩쓸려 역도로 몰리기라도 하면 집안이 박살나는 건 일순간이다. [4] 흉년기에는 자영농민들이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시가보다 더 싸게 땅을 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악용해서 내 재산만 불리지 말라는 의미 [5] 아들은 괜찮고 며느리는 차별하는 게 아니라 이 집안에서 15년 이상 자란 아들은 근검절약과 상부상조하는 가풍을 알테지만 부자라는 것만 알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 상) 시집 왔을 며느리에게 부잣집이라 해서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려는 가훈이다. [6] 39.2727...Km 정도 [7] 지역 제일가는 유지로서 지역의 안정을 유지할 책임이 있음을 명시한 의미 [8] 정치인 최명길과 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명길은 '전주 최씨'이다. [9] 경주 최씨 38대손 [10] 1884-1970 경주 최부자 가문의 12대 당주로 가문의 전 재산을 털어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기부하고 해방 후에는 현재의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우는 등 업적이 크다. 경상북도 칠곡 출생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간호(干湖)이다. 최규하 정부의 총리 삼성물산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제국 상무성 근무를 시작으로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고위공직자로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이후 정치인과 기업인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재계를 아우르는 'TK인맥의 대부'라는 평가가 있다. 장남 신철식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기획재정부와 국무총리실에서 경제관료로 활동했다. 2. 생애[편집] 1920년 10월 29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의 행정고시 격인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조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도쿄의 상공성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7월 일본 군수성의 군수 관리감리국 파견명령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도 군수감리국 근무를 이유로 등재 언급이 나왔다가 유족들의 이의신청에 따라 조사한 결과 실제로는 취임하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일본측 자료가 발견되면서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1954년 관직에 복귀하였다. 39세 때인 1959년 부흥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8년부터 몇 년 동안 기업에 몸 담고 있다가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군위군-성주군-칠곡군-선산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에 신민당 김창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야 무소속 김현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한편 1975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장관에 임영되었고 1978년 남덕우의 뒤를 이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장관이 되었다.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날 때는 국방부 회의실에서 각료들이 모여 있던 가운데 박정희 유고를 비밀에 부치고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의 상황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을 보였다. 12.12 군사반란 때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수사해야 한다며 결재를 받으려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에게 우선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결재부터 받으라고 호통을 쳤다. 12.12 군사반란 직후 이루어진 개각에서 신현확은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TK(대구-경북) 출신이었고 유신체제를 합리화하며 보수층의 환심을 사는 등 일련의 독자적 정치기반을 닦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래서 신군부와 결탁하여 창당을 추진한다는 등의 정치풍문이 나돌기도 하였으며 당시 민주화 세력은 신현확과 전두환을 한통속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 4월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직을 겸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고딩직속후배인 노태우는 도와달라고 싹싹 빌다가 귀싸대기를 쳐맞았다고 한다. 1980년 5월 17일(5.17 내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한 국무회의를 중앙청에서 주재하였다. 그 다음날 신군부의 발호를 막지 못한 것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법개정심의위원장을 맡아 제5공화국 헌법을 주도하였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 1983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86년부터 91년까지 삼성물산 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3. 매체에서[편집] 3.1. 드라마[편집] 제4공화국 : 故 김진해 코리아게이트 : 박규채 제5공화국 : 신충식 파일:ShinHH.jpg (신충식이 연기한 신현확) 3.2. 영화[편집]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故 서희승[1]이 분했다. 비록 짧은 시간 출연하긴 했지만 김재규가 "소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죽고도 1주일로 비밀에 붙였어요.[2] 이틀 딱 사십팔 시간이면 돼요. 그런데 우린 단 이틀도 보안이 안된단 말이에요?"라고 하면서 박정희의 유고를 덮자고 우기자 "거기서 소련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것도 빨갱이 잡는 정보부장이"라고 태��을 걸면서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1] 배우 서재경의 아버지. 2010년 암으로 별세. [2] 명백한 오류다. 브레즈네프는 10.26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1982년에 죽었다. 즉 극중 시점에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모토는 구국의 강철대오.범 NLPDR계가 주류이며 민중민주주의계나 일부 자유주의 성향의 정파도 포괄하는 형태의[2] 특히 학생운동의 최전성기였던 노태우 정부 시절에 전대협은 청와대와 주요 제도권 정당 다음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되며 주요 외신들로부터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단체로도 평가된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1990년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민주자유당)과 야당(평화민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을 정도.[3] 2. 역사[편집] 6월 항쟁과 전대협 결성 1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1997) 10.28 건국대 항쟁으로 1300여 명이 구속된 뒤 비합법 지하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선도투쟁에서 대중노선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4] 그리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로 불붙기 시작한 민중 투쟁은 전국적인 학생운동 진영인 '전대협' 결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해 6월 항쟁 중에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장례 절차를 위해 7월 5일 연세대학교에서 전국의 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전국적 학생 대중조직 건설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8월 1일에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서대협) 의장 이인영의 주도로 고려대에서 '제1회 전국 대학생 지역대표자 연석회의'를 시작으로 총 세 번의 회의를 거쳐 전대협은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 파일:external/archives.kdemo.or.kr/00740849_0001.jpg 1987년 전대협 발대식 모습. 그리고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전국 95개 대학에서 모인 3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 발대식을 열었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외세배격과 독재 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 정부의 수립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기여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향한 연대 학문사상의 자유 쟁취 전국학생총연합(전총련) 건설의 토대 마련 등 다섯 가지를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은 1987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과 13대 대선 투쟁[5] 1988년 6 10/8 15 남북학생회담 시도[6] 전두환-이순자 부부 체포결사대 활동 등으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1989년 봄부터 문익환 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을 계기로 ��안정국이 조성되면서 그 해 5.3 동의대 사태를 계기로 화염병 처벌법이 제정된 뒤 6월 30일에 한양대에서 열린 평축 출정식 당시에 인문관에서 고립농성하다 수천여명이 구속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수배를 당했고 특히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로 전국 140여개 대학에서 열린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학생회장들이 당선되어 NL-PD-비운동권 삼각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1년 시위 도중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씨가 경찰의 토끼몰이 유혈진압 때문에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 때처럼 정권타도를 외치면서 거리를 뒤덮었으나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시인 김지하와 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의 운동권 비난 발언[7]으로 여론이 급반전하고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민자당이 당초 열세였었던 서울시의회 경기도 의회 인천시의회 선거에서 과반을 넘게 가져가며[8] 투쟁은 실패로 돌아간다.[9][10] 결국 1992년 총/대선 정국에서도 크게 힘을 쓰지는 못했고 전대협 7기 당시인 1993년 3월 경희대에서 대의원대회를 통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며 전대협은 자진해산였다. 이후의 역사는 한총련 항목 참조. 3. 조직[편집] 초기 전대협은 산하에 연락사무국만 두었으나 1989년 3기 때부터 조국통일위원회를 비롯해 정책국 집행국 문화국 사무국 투쟁국 홍보국 등 부서를 두어 조직으로써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외에도 전업 활동가 중심조직인 '정책위원회'가 있다. 산하 지역조직으론 서총련(서울) 부울총협(부산/경남) 남총련(광주/전남) 대경총련(대구/경북) 대전대협(대전) 등을 두었다. 4. 관련 노래[편집] 4.1. 전대협 진군가[편집] 1989년 3기 때부터 제정되었으며 작사/작곡은 윤민석이 담당하였다. 원체 시대가 시대였던데다 멜로디도 꽤나 중독성 있어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학번이라면 아직도 흥얼거릴 수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회사 부장님한테 테스트해보자 북한에서도 임수경이 방북하면서 전대협 진군가를 불렀는데 북한에서 주로 불러졌던 상투적인 당 선전가요와는 비교도 할수없는 신선함으로 한 동안 상당한 인기곡이 되었다는 후문도 있다고. 한총련으로 바뀐 이후로는 전대협 진군가에서 한총련 진군가로 교체되었지만 한총련 진군가가 전대협 진군가에 비해서 NL적인 색체가 대놓고 드러내는데다가[11] 노래 자체도 전대협 진군가는 박력감이 넘치는데 반해 한총련 진군가는 울적거리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한총련으로 바뀐 이후로도 시위현장에서 전대협 세 글자만 한총련으로 바꾼(...) 버전이 애창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 한총련진군가는 94년 2기 한총련 출범식에서 조국과청춘이 최초로 보급되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전대협 진군가를 한총련 진군가 대신 불렀다. 여담으로 2016년 퀴어문화축제에서는 혐오세력을 향해 기가폰을 들이밀고서 'LGBT 진군가'를 부르는 참가자도 있었다. 한참 필 받아서 노래 부르다가 옆 사람이 쳐다보니까 뻘쭘해서 말하기를 '아 이거 옛날 전대협 진군가 패러디한 겁니다'(...) 또 다른 여담으로 철의 노동자와 코드 진행이 비슷해서 앞 소절에선 철의 노동자를 부르다가 뒷 소절에서 전대협 진군가로 바꾸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와 '단결만이 살 길이요'는 코드 진행뿐만 아니라 멜로디도 똑같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이여'가 '우리의 사랑이여'로 기억하거나 부르는 경우도 꽤 있었다는 후문도 있다나 94년 2기 한총련출범식(조선대)에서는 아예 두 노래를 콜라보레이션한 곡을 노동자노래단(확인요망)이 공연한 적이 있다. 일어섰다 우리 청년 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전대협의 깃발 아래 (후렴)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아아 전대협이여 우리의 자랑이여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한 길로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한 길로 4.2. 전대협 찬가[편집] 자랑스런 이땅에 아들딸로 태어나 투쟁으로 사랑하고 피땀으로 일구어온 해방조국 건설의 길 온몸으로 나간다 전대협의 깃발들고 당차게 나간다 (후렴)우리가는 이길 어디쯤 모진가시 총칼로 있고 때론 거센 폭압에 상처받을 지라도 믿음으로 일어서고 사랑으로 일으키는 전대협이여 영원하라 통일의 그 날까지 2 5. 역대 의장[편집] 1기(1987년) 이인영 : 서대협 의장 겸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더불어민주당 구로구 갑 국회의원 2기(1988년) 오영식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前 더불어민주당 강북구 갑 국회의원 前 한국철도공사 사장 3기(1989년) 임종석 :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前 더불어민주당 성동구 을 국회의원 前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現 청와대 비서실장 4기(1990년) 송갑석 : 남대협 의장 겸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구 갑 국회의원. [12] 5기(1991년) 김종식 :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녹색친구들[13] 대표. 녹색당(대한민국) 당원 6기(1992년) 태재준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시카고 대학교 사회복지학 박사. 6. 전대협 그 후[편집] 역대 전대협 의장들은 다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학생시절의 NL노선에서 이탈해서 나름대로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 한총련과 달리 전대협은 막가파식 투쟁을 한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한총련 출신이 양지에서 활동하는 경우는 정말 찾기 힘들며 한총련이라 그러면 (가장 좁은 의미의) 종북 이미지가 지금도 투영되어 있다. 자기 과거를 숨기고 언론에 두문불출하는(심지어 개인사업을 하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며 음지에서 활동하다 욕만 먹는 경우도 있다. 1기부터 4기까지는 정치권의 386 영입 붐을 타고 2000년을 전후해서 민주당계 정당을 통해서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다.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라인을 탄 이들은 대외적으론 햇볕정책 사회적으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한미 FTA를 지지하고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하는 등 보수정당과 다를 게 전혀 없는 친재벌 반노동자적인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486세대와 친노의 핵심으로 현재 민주당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전대협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계파라인을 탄건 아니고 여러모로 이합집산이 이루워졌기 때문에 여러모로 우여곡절이 많았기도 했다. 사실 이 항목안에 적기에는 정말로 여백이 부족하다 5기 김종식은 졸업후에 같이 활동하자는 선배들의 제안을[14] 거부하고 광주에서 지역공동체운동을 하다가 민주노동당 최순영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거쳐서 직접 지방선거에도 출마하였다. 이후 민주노동당을 나와서 환경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녹색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6기 태재준은 사실 대학 재학시에도 관악자주파라고 불리던 비주사NL 계열[15]로 기존 NL주류계[16]와의 마찰로 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았고[17] 얼마안가 체포되서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나온뒤에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2000년대 들어서 복지국가 건설을 주장하면서 친민주노동당 성향을 보여주면서 활동했지만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사실상 폐인이 되었다.[18] [19] 1993년 전대협이 자체 해산하고 한총련으로 확대개편된 이후에 전대협 간부 출신들이 결집해서 1994년 전대협동우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 전대협동우회를 통해서 역대 의장단 이외에도 전대협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학생운동가들이 조직적으로 제도권 정치에 투신하였다. 대다수는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으로 이어지는 민주당계 정당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노무현정부 출범과 2004년 총선을 통해서 이들이 대거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자 한국정치를 개혁할 새희망으로 주목받았다.한겨례21 주간동아 하지만 참신성 이외에는 뚜렷한 정치적 실천이나 대한민국을 바꿀 독자적인 대안을 선보이는 데는 결국 실패했고 386세대로 불리우던 전대협 출신들이 조직적으로 캐리했던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는 침몰했고 201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구태기득권으로 청산대상으로까지 몰리게 된다. 이후 민주당이 2015년을 전후해서 엄청난 계파갈등을 겪은후에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전대협 출신 정치인 중 상당수가 문재인 정부 내각에 입각되었지만 당원들과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인물에 따라 케바케인 상황이다. 일부는 우익으로 전향해서 뉴라이트가 되었고[20] 이명박 정부 출범 전후로[21] 한나라당-새누리당쪽으로 대거 입당하였다. 이들은 아스팔트우파라고 불리는 극우세력과도 밀접한 관���를 유지하고 있다. 7. 주요 사건[편집]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 임수경 방북 사건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8. 관련 문헌[편집] 불패의 신화: 전대협 이야기 6년사: 전대협동우회 편. 두리. 1994. [1] 왜 무대의 걸개그림이 "건설 전총련"인고 하니 당시 전대협은 그 이름처럼 6월항쟁이라는 특수한 정세 하에서 각 대학 대표자들로 구성된 일종의 가설조직이란 한계를 안고 있었던 터라 실질적으로 대학생들을 포괄 지도할 수 있는 대중조직으로의 변모를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총련은 향후 건설될 대중조직의 가칭이었고 이 목표는 이후 한총련의 출범으로 달성된다. 결국 망하긴 했어도 아무튼 출범 당시엔 그랬다는 말이다 조직명이 '전국' -> '한국'으로 바뀐 이유는 주사파 관점에 따라 남한만의 조직이므로 '전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조총련이라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통일반대론을 지지하는 쪽이어야 말 되는 명칭이다. [2] 이후로 한총련 초기인 1994년까지도 이런 분위기가 존속해있었지만 1995년부터는 NL강경파가 중앙간부를 싹쓸이 하고 PDNL온건파 등 다른 정파를 모조리 숙청한 이후에 점차 삐그덕거리기 시작였다. 결국 한총련 지도부의 몰아붙이기로 벌어진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이석 치사 사건 이후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하고 PD계는 물론 NL온건파들까지 모두 한총련에서 탈퇴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3] 현대그룹 삼성그룹 대우그룹 등 기라성 같은 재벌이나 이들이 연합한 전경련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 크다고 평가됐다는 이야기다. [4] 그 전까지는 각 대학교의 지하 서클(이를 "언더티"라고 한다)들을 중심으로 연합조직이 결성되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연합시위나 선도투쟁을 하는 형식이었다. 1970년대 까지는 거의 학교별로 조직이 되어 필요할 때만 연계가 되어있는 형식이었고(그 시절까지 대학생 숫자가 극히 드물었던 것도 한몫했다) 대부분 서울대 중심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대학 정원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보다 본격적인 연합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흐름은 무림-학림 논쟁이나 학림 사건 MC-MT 논쟁 항목에서 잘 볼 수 있다. [5] 다만 이 과정에서 후보단일화(김영삼)와 비판적지지(김대중) 민중후보(백기완)으로 나뉘어져 어려움을 겪었다. [6] 그해 8월 15일 판문점 진입 당시 누워서 행진하는 사진으로 알려진 그 사건. [7] 민주화운동으로 오랜 옥고를 치뤘던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궂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게재한 것이 결정타였다. 당시 강경대의 사망 이후 각계각층에서 연쇄분신이 일어났는데 김지하 시인이 이걸 모두 운동권 조직들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강기훈 유서대필 조작도 이런 김지하의 강변을 정권에서 이용하면서 촉발된 것이다. [8] 다만 당시 ���민당과 민주당이 91년 지방선거에서 노태우 정부에게 극도로 부정적인 여론을 믿고 단일화 작업없이 따로따로 후보를 낸 것도 크기는 했다. 그래도 광역의원 선거에서 야권이 수도권에서 압승을 거둘수있었던 선거를 전대협의 뻘짓으로 날려먹었다는 분석은 달라지지 않기는 하지만. [9] 당시 분위기는 거의 정권타도 직전까지 갔었다고 평가된다. 실제로도 3당 합당이후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의 인기가 낮다보니까 1991년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을 내주는것 아닌가하는 얘기가 오갈정도로 정말로 인기가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6월항쟁 때와는 다르게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사무직과 자영업자층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3저호황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으로 두터워진 중산층이 급진적인 혁명 보다는 제도적인 개혁을 선호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10] 특히 정원식 밀가루 투척과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이 학생운동의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다만 강기훈 유서대필은 결국 정권의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지 오래. 그리고 정원식 밀가루 투척은 누가 뭐래도 쓸데없이 벌인 뻘짓이었다. [11] 사실 전대협도 헤게모니는 NL이 잡고 있었고 작곡자 본인도 NL 성향 음악인이라 '민족의 해방을 위해'라는 내용은 들어가 있다. [12] 20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고 이후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다시 공천을 받아 당선. [13] 서울 지역의 사회적 기업. 강북구에서 저탄소주택 건축 사업을 하고 있다. [14] 정확히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 한양대 직계 선배인 임종석이 찾아와서 같이 386세대의 청년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1990년대 중후반 청년운동이란 명분하에 결집한 386세대의 학생운동 출신들은 결국 집단적으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전부 제도권 정치에 투신했다. [15] 소위 NL-left.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NL계에 합류했던 CA 다수파의 후신이다. [16] 이른바 자주대오 = 주사파 [17] 당시 서울대 운동권 내부 정세로 주사파 계열 단독 후보가 나오지 못하여 태재준을 내세웠다고 한다. [18] 사실 태재준은 본인의 활동은 미약했지만 학생운동 그리고 길게 보면 2000년대 진보정당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학생운동 시절 태재준을 따르던 비주사NL그룹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에 맞춰서 온건PD 그룹과 통합해서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을 형성하면서 NL노선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이들은 무조건적인 정권타도 반체체혁명인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현실적인 사회개혁노선을 제시했고 졸업후에 민주노동당 혹은 시민운동에 뛰어들어서 복지국가 노선을 주장하였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할때 실제 정책파트에 가장 많은 인력을 제공한건 바로 21세기 출신들로 2017년 현재까지도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 제도권 정당 등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19] 국가정보원에게 독살을 당할 뻔했다고 주장하면서태재준 블로그 서울역 앞 등지에서 수년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1인 시위 모습 2018년 2월 5일 기준으로 14:5515:00 즈음에 당고개행 전철에 탑승했는데 해당 열차에서 자신이 국정원에게 독살을 당할 뻔했다는 얘기와 국정원을 자칭하는 단체들이 1천만명의 국민을 대상으로 독성 화학물질을 살포한다고 주장했다. [20] 대표적인 케이스가 북한의 인권 탄압 참상을 알고 전향한 하태경. [21] 마침 이명박도 나름대로 운동권 출신이었기도 했다. http://bit.ly/2EW7V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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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ding Story] 한국 여자와 터키 남자의 유쾌한 국제결혼_터키 결혼식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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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ding Story] 한국 여자와 터키 남자의 유쾌한 국제결혼_터키 결혼식 8편
2014년 2월 16일♡ 터키 결혼식 D-DAY
온 가족들은 아침부터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이리저리 바삐도 움직였다.
나는 항상 ‘결혼, 뭐 언젠가는 하겠지’라며 매우 막연하게만 생각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친구들 모두 ‘너는 진짜 결혼 늦게 할 것 같아!’, ‘너를 감당할 남자가 있겠어?’, 심지어 우리 엄마 마저도 ‘너처럼 아프리카 가겠다, 국제 기구 가겠다, 이런 사람을 누가 배우자로 삼겠니?’라며 핀잔을 줬었다.
터키 결혼식 날 아침, 나는 설레임보다는 모든 일정이 무탈하게만, 제발 잘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메이크업이 맘에 들지 않아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는데,부케를 받은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내가 전달한 사진 속의 부케와 내가 받은 부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예쁜 하얀 튤립이 완전 만개해서 꽃 잎이 이미 축축 쳐져있었고, 어떤 것은 아예 시들어 있었다. 그리고 꽃을 제대로 고정을 하지 않아 예식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꽃들이 내 손 안에서 요리조리 굴러 다녔다.
내 부케를 이따위로 만들다니!!!!!!!!
이미 난 예식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알파고에게 왕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알파고는 그저 옆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식장에 도착하니, 많은 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들 앞에서까지도 얼굴을 붉히는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최대한 환한 미소를 띄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내 허리에 묶여있는 ‘빨간 띠’는 결혼식 전, 마지막으로 친정집을 떠날 때, 아버지 또는 남자 형제가 묶어주는데 ‘떠나보내는 것의 아쉬움’을 의미한다고 한다. 끈을 묶고 풀기를 세 차례 반복한다.
결혼식 시작 5분 전!! 엄청 떨렸다.
2층 유리창을 통해 예식장을 바라보는데, 족히 750명은 모인 것 같고, 이미 일부 남자 하객들은 밴드 음악에 맞춰 현란하게 춤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재빨리 눈을 굴려 가족들을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실패! 어두운 조명과 수많은 하객들 사이에서 우리 가족을 찾는 것은 마치 ‘월리를 찾아라’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떨었던 이유는
‘우리의 인생을 축복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식을 하는구나….’ 가 아니라
“웨딩드레스 밟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 안되는데!!!!” 였다.
평소에도 불편해서 힐은 되도록 피하는데, 결혼식 날이니 불편함을 감안하면서까지 신어야 했고,
봉지에서 막 뜯은 스타킹을 신어서 발바닥이 미친듯이 미끄러웠다.
근데 알파고와 나는 스포트라이트를 온 몸으로 받으며, 그리고 수 백명의 시선을 받으며,
2층에서 1층으로 약 40개의 계단을 내려와야 했던 것!!!!!
그리고 심지어
알파고가 직업이 기자이다보니 회사에서 직접 나와 그날 저녁 뉴스를 위해 예식을 촬영하고 있었다.
대. 박.
다행히도 나의 모든 신경을 계단 내려오는 것에 집중한 덕에 자빠지는 일은 없었다. 휴.
입장 후 분위기 있는 음악에 맞추어 사람들 앞에서 부르스를 한 차례 추고 우리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터키 결혼식은 한국처럼 구체적으로 짜여진 순서가 없다. 신랑 신부가 입장한 후에 자리에 앉아 있으면, 친척,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이 찾아와서 축하 인사를 건낸다. 여자 하객이 오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아주면서 왼쪽에 한 번 오른쪽에 한 번씩 총 2번 뽀뽀를 했다. 나한테 인사하러 온 여자 하객 수만 어림잡아 300명 정도라고 했을 때, 300명 X 2번= 600번 을 뽀뽀했다. 특히!!! 심지어 알파고도 얼굴을 모르는 먼~~~ 친척 할머니가 침이 뭍은 입으로 몇 번씩 뽀뽀를 정말…………싫. 었. 다. 내 얼굴에 폭포수같은 침이……………..
이미 내 체력은 땅 밑을 파고 들어가, 남들 몰래 헉헉 대면서 힘들어 하고 있었고,
옆에 앉아있는 알파고에게 끊임없이 ‘복화술’로 나를 이렇게 힘든 상황에 처하게 한 것에 대해 너랑 결혼하기로 한거 후회한다는 등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내 만개한 웨딩 부케 모든 꽃 이파리마다 다 벌어져있는….안타깝다.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들은 내 드레스 위에 직접 돈을 달아주던지, 동전같이 생긴 금을 빨간 리본과 함께 달아준다. 신부한테 들어온 금들은 모두 신부의 몫! 오예!!
터키 결혼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춤!!!
결혼식에서만 들을 수 있는 신나면서도 리듬이 반복되는 음악에 맞춰서 서로 새끼 손가락을 걸고 한쪽 방향으로 ��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결혼식 전에 시엄빠는 나에게 춤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식사 후에 동생들과 새끼 손가락을 걸고, 춤 연습을 했었다.
그 덕에 사람들과도 어울려서 춤을 출 수 있었고, 알파고 보다 한국 새댁이 더 잘 춘다고 칭찬도 받았다.
그리고 먼 곳에서 온 한국 사람들을 위해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강남스타일’을 틀어 줬고,
난 모든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웨딩드레스를 입고 말 춤을 선사했다.
자….장난해? ㅋㅋㅋㅋㅋㅋㅋㅋ
5시간에 걸친 기나긴 결혼식이 끝났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 몸을 꼭 조였던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해방감과 함께 눈을 감고 쉬고 있는데, 카톡 메세지가 왔다.
“Welcome to 유부월드”
한국 여자와 터키 남자의 유쾌한 터키 결혼식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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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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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백작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프랑스, 1802~1870)
발표년도: 1845년
이 소설은 ‘암굴왕’으로도 알려진 유명한 소설이다.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루이 18세 때 혼란기에 발생한 선원의 기구한 운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저주와 복수를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인 선원 에드몽 단테스는 친구들로부터 터무니없는 모함을 받아 엉터리 누명을 쓰고, 메르세데스와의 약혼 도중에 체포되어 14년간 감옥에 갇히게 된다.
단테스는 감옥에서 훌륭한 신부를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 탈출하여 신부가 가르쳐 준 곳에서 보물을 캐내 엄청난 부자가 된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또는 부조니 신부로 변신한 단테스는 배신자들에게 복수를 시작하면서 도와 준 은인에게는 은혜를 베푼다.
이 이야기는 모함한 자, 배신자는 반드시 망하게 되고, 정의는 반드시 이기게 되며,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 소설은 뒤마가 42세 때 쓴 소설이다. 주인공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불타는 정열과 이상은 읽는이의 가슴에 감동의 횃불을 밝혀 줄 것이다.
140여 년 전에 쓰여진 이 소설이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줄거리가 재미있고 많은 감명과 교훈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주요 등장 인물>>
<단테스(몽테크리스토 백작)>
모렐 상회의 파라옹호 1등 항해사로 성실함과 유능함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선장으로 임명된다. 친구들의 모략에 빠져 14년 간 감옥살이를 하고 탈출, 파란만장한 생활 속에 은혜에 보답하고, 모함자들을 복수한다.
<빌포르 검사>
마르세이유 검사 시절, 밀고로 체포된 단테스가 자기 부친에게로 가는 중대한 비밀 서류를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죄인으로 꾸며 감옥��� 넣는다. 뒷날 검찰 총장이 되나, 단테스의 복수를 받아 자멸한다.
<메르세데스>
단테스의 약혼녀이다. 단테스와 결혼까지 하려고 했으나, 그가 감옥에 들어간 뒤 소식이 끊어지자, 죽은 줄 알고 페르낭과 결혼한다. 가난한 선원의 딸로 착한 여자다.
<단그랄>
단테스와 같은 배에서 일하다가 단테스를 모함, 감옥에 들어가게 한 뒤 출세한다. 파리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고 남작의 지위에 까지 오르나 단테스의 복수를 받고 패망한다.
<페르낭>
선원이었던 그는 단테스의 약혼녀 메르세데스를 가로채기 위해 단그랄과 짜고 단테스를 모함하여 감옥에 들어가게 하고 자신은 물세한다. 후에 모르셀 백작으로 행세한다.
<카도루스>
마르세이유 양복점 주인이다. 한때는 여관의 주인도 ���다. 남의 행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신부로 변장한 단테스에게 사건의 비밀을 소상하게 알려 주어 복수하게 한다.
<<차례>>
1. 선장의 죽음
2. 아버지와 아들
3. 저주의 고발
4. 빌포르 검사의 약혼식
5. 궁전에서의 빌포르 검사
6. 이프 성으로
7. 캄캄한 감옥
8. 이상한 신부
9. 신부의 죽음
10. 팔사의 탈출
11. 단테스의 새 출발
12. 타오르는 복수심
13. 변장한 얼굴
14. 마술의 궁전
15. 카니발의 마지막 밤
16. 생명의 은인
17. 선원 신밧드
18. 신기한 마술
19. 문제의 2층 방
20. 검찰 총장의 추리
21. 무서운 함정
22. 범인을 찾아서
23. 복수는 불길처럼
24. 불타는 증언
25. 비밀은 없다
26. 스스로 판 무덤
27. 검찰 총장의 운명
28. 살인 사건 재판
29. 추억의 거울
30. 괴로운 절규
31. 원수를 용서하다
32. 떠나가는 흰 돛대
<<작품 해설>>
주제: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 소설을 쓴 알렉상드로 뒤마는 1802년 프랑스 북쪽 빌코드레에서 태어나 187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춘희’ ‘오브레 부인의 생각’ 등 명작을 써 이름을 날린 아들 뒤마와 구별하여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아버지 뒤마는 ‘대(大) 뒤마’로, 아들은 ‘소小) 뒤마’로 부릅니다.
1844년 ‘삼총사’가 큰 인기를 끌면서, 1841년부터 5년 걸려 쓴 대작 ‘몽테크리스토백작’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는 파리옹 호의 1등 항해사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유능한 청년으로 젊은 나이에 선장에 임명될 예정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메르세데스와의 약혼날, 그의 출세를 시기한 단그날과 메르세데스를 탐낸 페르낭이 단테스를 모함하여 밀서를 꾸며 고발합니다.
빌포르 검사는 그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단테스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넣습니다.
단테스는 감옥에서 파리아 신부를 알게 되고, 그로부터 어학과 사상•교양 등 많은 것을 배우고 신부의 신임을 얻어 엄청난 보물이 있는 곳을 알게 되고, 그 보물을 찾으라는 유언을 얻습니다.
단테스는 무서운 감옥에서 14년 만에 탈출, 막대한 보물을 찾는데 성공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부조니 신부로 변장한 그는 은인에게는 은혜를 갚고, 적에게는 차례로 복수를 시작합니다.
원수를 따라다니며 잔인하게 복수를 시작, 그들 스스로가 자멸하게 되지만, 도와 준 사람들에게는 아낌없는 보답을 해 줍니다. 착한 사람의 심성과 악한 사람의 심리 묘사가 두드러지게 잘 ��현되어 있습니다.
창백하고 음침한 얼굴, 고민에 가득 찬 느낌을 주는 이마의 주름살, 상대방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빛나는 통찰력, 독특한 음향을 지닌 이론적인 언어, 조그마한 감정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차가운 표정, 완벽한 매너와 교양을 지닌 인간 이상의 존재처럼 단테스는 변합니다.
자기 청춘과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아 간 저주스러운 인간들, 사랑하는 약혼녀를 가로챈 비열한 인간들에게 복수의 화신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손으로 직접 피를 흘리게 하거나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고 스스로 자멸하게 하는 솜씨가 주도면밀하고, 상대자의 가족들을 사건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인간적 고민, 악인의 자녀지만 결백한 인간에게는 구원의 손길을 펴고, 오직 악한 본인 하나만을 응징하는 정의감이 너무나 통쾌합니다.
비록 대중 소설이라고 해도 교훈적인 대화, 명문구가 많은 것이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극히 단순하고 상관이 없는 일처럼 보이는 것도, 우리와 자연의 어떤 관계까지 생각하게 하고, 착한 방향으로 돌려 가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작품의 생명이 있고 매력이 있습니다.
나쁜 생각은 피를 낳게 하고 문명은 우리에게 욕망과 욕구를 주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본능을 자제하면서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해야 된다는 충고를 안겨 줍니다.
돈이 있고 사랑과 눈물이 있으며 명예가 따르는 이야기로써 3박자를 갖춘 이 소설은, 읽는 재미만이 아니라 느끼는 감각, 깨닫는 교훈의 깊이와 폭이 넓고 크다는 것을 스스로가 인정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장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지라1’
이 소설에서는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고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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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첩장문구] 청첩장인사말추천, 친구에서 연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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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첩장문구] 청첩장인사말추천, 친구에서 연인으로.
[청첩장 문구] 친구에서 연인으로, 커플에서 안성맞춤
오랜 친구가 연인이 되어 결혼까지,
청첩장 인사말 추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나의 반려자가 되는 경우 생각보다 많은것 같아요.
제 주변에는…….. 썸이 일어날 수 없는 구조인건가요……. 아직은 없었는데요.
모카케익 회원님중에서는 심심치 않게 보게 되었답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여 결혼까지 골인!
오랫동안 알아온 선후배사이가 갑자기 사랑으로 다가와 결혼하게 되는경우,
오빠가 아빠가 되는건가요. 히히힛 🙂
이렇게 오랜시간 알고 지내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커플이라면 청첩장 인사말을 더 자연스럽게 쓸말이 많은것 같으면서도,
왠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어색함때문에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하시는 경우도 많으신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예쁘게,
신랑 신부의 오랜친구사이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청첩장 인사말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1.
서로의 꿈을 향해가는 길목에서
저희의 사랑이 시작되��습니다.
힘겨운 유학생활, 서로에게 의지해 가면서
우리의 사랑은 조금씩 단단해져 갔습니다.
그 사랑이 이제는 ‘부부’라��� 이름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소중한 날에
여러분을 모시고자 합니다.
부디 참석해 주셔서 동행의 첫걸음에
따뜻한 격려 부탁드립니다.
+2.
학교에서 우연히 시작된 앞뒤자리의 인연이
저희를 연인으로 만들었고
지금 그인연으로 저희가 하나가 됩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늘 그 인연을 생각하며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그동안 사랑으로 키워주신 아버지,어머지
그리고 주위 친지들과 사랑하는 친구들, 선후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셔서 지켜봐 주시고 축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소년과 소녀로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변함 없는 사랑을 키워 왔습니다.
마지막까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이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자 합니다.
언제까지나 서로에게 최고의 연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를 축하해주시는 모든 분들
격려의 말씀 한마디, 따스한 미소 하나도
천금같이 여기고 간직하겠습니다.
오늘도 달콤하게,
모카케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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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발레리 시집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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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발레리 시집가는 날~~
하늘이 잔뜩 장맛비를 머금은 토요일 오전, 무등산 운림제는 아침부터 잔칫집 분위기로 들썩입니다.
오늘은 하늘에서 점찍어 준 두 선남선녀의 혼례식이 펼쳐지는 날입니다.
이들은 이미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기간인 9일 광주유니버시아드파크에서 열린 ‘혼례 재현행사’에서 공개 전통혼례를 통해 세계인들의 축복을 받은 커플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지훈씨와 발레리양이 한국에서 맞는 진짜(?) 백년가약 혼례식입니다.
간간히 약한 비가 흩날리긴 했지만 결혼하기 딱 좋은 날입니다.
전통혼례식이지만 사진은 현대식으로~~
▲ 한국 신랑 박지훈(34)씨와 프랑스 신부 발레리(26) 양의 전통 혼례 시작 전
연지곤지를 찍은 푸른 눈의 외국인 신부가 가마에 오르자 네 명의 가마꾼들도 긴장이 된 듯 혼례 전부터 연신 하늘을 보며 발을 땅에 콩콩 찍어댑니다. 파란 단령과 사모를 갖춰 입은 신랑 박지훈(34)씨는 행여 신부 발레리(26) 양이 피곤하지나 않을까 자꾸 가마 앞으로 와 기웃거리더니 숫제 가마 문을 열고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갑니다. (앗, 이러면 안되는데…)
▲ 신랑 입장 모습, 정말 행복한가봐요^^
하객들에게 잘 생긴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가린 파란 천 사이로
새신랑의 미소가 가득합니다.
오늘 같이 좋은 날 가마꾼들은 궁둥이를 크게 흔들며 들어오라는 진행자의 너스레에
하객들이 폭소를 터트립니다. 곱디곱다!! 오늘은 프랑스 신부 발레리양이 한국 전통 혼례식을
두 번째로 경험하는 날입니다.
마치 외국의 혼례식장에 온 것 같지 않나요?
신부 발레리양의 어머니 모습입니다. 참 세련되고 예쁘죠?
가마꾼들이 신부 발레리양을 가마에 태우고 이동합니다.
진행자분 정말 진행 잘하십니다. 사투리도 맛깔나게 쓰시고,
하객들 멘트로 휘어 잡는 솜씨가 전문이십니다.ㅎㅎ
오늘의 여신 발레리 양이 혼례 전 손을 씻어요~~
신부 손 씻기는 몸과 마음을 새로이 정화하는 의미랍니다.
절도 잘하지요.??
, 신랑ㆍ신부가 절을 주고받는 ‘교배례’모습입니다.신랑신부가 술전을 주고 받는 ‘합근례’의 모습입니다.
너무 보기 좋아요~~
혼인 선언문 낭독
주례사에게 절을 하고 깨끗한 물에 손을 씻어 잡��를 없앤 후 신랑과 신부 맞절을 시작으로 전통혼례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두 번째 결혼식에 익숙한 듯(?) 발레리 양은 손 씻기도 맞절도 실수 없이 곧잘 해냅니다.
신랑과 신부는 둘로 쪼갠 표주박에 따른 술을 마시고 감사 인사를 함으로써 혼례가 성사됨을 하객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이어 성혼 선언문이 낭독되면서 이들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 신랑 부모님께 인사
하지만, 신랑 신부의 가족의 인사가 시작되자 신부 아버지는 감춰왔던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소매로 닦아 냅니다. 그리고, 오늘의 신부이자 천사보다 고운 딸을 한참동안 안아줍니다. 저도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세상 모든 부모님 마음은 같나봅니다.
얼마나 우시던지..
저도 눈물이…
이 모습에 울컥~~~
아버지의 사랑이 이런것이겠지요?
아버지는 이제 눈물을 닦으셨습니다.
이제 어머니까지..우시고…
이렇게 행복한 날..
신랑 안아주시는 아버지 모습보세요~~ㅠㅠ
여기서 가족들 인터뷰 한컷~!!
동영상으로 보세용~~^^
아버지가 너무 우셨는데,, 인터뷰 덕분에 분위기 업~~
오늘 결혼식은 U대회를 찾은 외국인들에게 한국 고유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6년간 사귄 발레리 갈라시양을 설득해 유대회 전통 혼례 재현 행사에 동참한 후 치러지는 두 번째 전통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이 끝나면 프랑스로 날아가 또 한번의 결혼식이 이어질 계획입니다.
훗, 설명대로라면 이들은 올해 세 번이나 결혼하는 어마한 커플임이 분명합니다.
원앙처럼 어여쁜 신부의 모습이 외국인 친구들에게는 참 부럽고 신기해 보이나 봅니다. 시종일관 카메라에 눈을 떼지 않고 촬영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눈치 빠른 진행자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걸쭉한 입담으로 콩글리쉬까지 섞어가며 프랑스에서 건너온 하객들을 무대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틀어주니 모두 혼비백산!!!!
하객들 까지 하나 되어 케이팝 스타가 만든 말 춤을 추면서 식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하객들에게 닭 날리는 모습
(우리가 화환 던지는 것과 비숫해요. 신랑신부 지인들이 던진 닭을 잡는 답니다)
두마리의 닭을 잡은 분들입니다.
6개월 내에 시집가시길.,,,ㅎㅎ이제 혼례가 끝나고 퇴장시간입니다.신부 업어주기~~~~!!
비틀비틀.. 옷때문에 그래요…
옆에서 놀라 달려오십니다.
전형적인 포즈입니다.김치~~ㅎㅎ
붉은 활옷과 족두리를 한 신부의 얼굴에는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외국인 신부가 더운 날 두 번씩이나 결혼허고, 고생허네’
‘돈 내불면서 다이아 끼고 비싼 결혼식하면 뭔 소양이당가. 소박하게 전통혼례 헌게 월메나 좋아’
‘결혼식 차말로 볼만 허네. 근디, 말도 안 통한디 어쭈고 만나서 뽀뽀했단가. 애기는 날란가?’
하객들 사이에서는 외국인 신부를 걱정하는 이야기부터 수위 넘는 짓궂은 대화까지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옆에서 모른 체 듣고 있으려니 어르신들의 대화에 쿡쿡 웃음이 나옵니다.
습하고 더운 기운이 가득한 후텁지근한 날씨임에도 혼례식장 안은 웃음꽃이 가득합니다.
이 부부는 6년 전, 영국 유학 중에 처음 만났고 함께 수업을 받으면서 연인관계를 유지하다 오늘 드디어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혼례를 마친 뒤,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식 전통 결혼식을 치룰 계획입니다.
3번의 결혼식!!! 몸은 힘들겠지만 세계인들의 축복을 받은 복 많은 커플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마리의 닭을 멀리 날리며 전통 결혼식은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전통 혼례에서 닭은 아침을 상징하기 때문에 출발의 의미와 악귀를 쫓는 의미, 희망, 다산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이제 아들 딸 쑥쑥 낳고 잘 살아야겠죠?
무등산 정기를 온몸에 받고 유대회 기간 한국에서 치러진 특별한 결혼식!
세계인들의 축복을 받은 만큼 발레리 부부에게 행복만 가득하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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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4년제 사립대학이다.
2018학년도 영남대학교 수시등급 등급컷 대학정보
2018학년도 영남대학교 수시등급 등급컷 대학정보
다음 포스팅에서는 더 다양한 정보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의 통합 영남대학교의 전신은 야청 영남대학교 수시등급 영남대학교 커트라인 영남대학교정보 영남대학교수시 영남대학교정시 영남대학교커트라인 영남대학교등급컷 영남대학교교육 영남대학교표 영남대학교수시정보 영남대학교모집요강 영남대학교강의 영남대학교교수 영남대학교졸업생 영남대학교신입생 영남대학교입학 영남대학교졸업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건국기에 활동한 인물인 진한(辰韓) 사로(斯盧) 돌산고허촌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이며,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기도 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945,000여명으로 성씨 본관 순위 6위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적 기준으로도 2,000년 안팎으로 지속된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고성(古姓) 중 하나이다. 18세기 말부터 경주 교동에 살며 이앙법의 적극적인 도입과 소작료의 인하에 따른 선순환으로 부를 쌓은 일명 최부자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2000년대에 재발굴되며 KBS 드라마 명가(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의친왕이 경주 최씨 고택에 엿새 동안 머물면서 종손이었던 최준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부자댁에는 여섯 가지 가훈인 6훈과 지켜야 할 교훈인 6연이 있다. 후손들은 아직도 이를 지키며 살아간다고 한다. 육연(六然) - 자신을 지키는 교훈 몸가짐을 초연하게 하라 (자처초연 : 自處超然) 다른 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하라 (대인애연 : 對人靄然)[1]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하라 (무사징연 : 無事澄然) 일이 있을 때는 단호하게 대처하라 (유사감연 : 有事斬然) 뜻을 이뤘을 때 담담하게 행동하라 (득의담연 : 得意澹然) 실패하더라도 태연하게 행동하라 (실의초연 : 失意泰然) 육훈(六訓) - 여섯 가지 가훈 권력을 탐하지 말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2][3]) 상생의 이윤을 추구하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소통과 화합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추구하라 (흉년기에 땅 사지 마라[4]) 근검절약하라 (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5]) 상부상조하라 (사방 백 리[6]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게 하라[7]) 이외에도 시장의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은 시장이 닫을 때 가격을 낮추어 파는 떨이 물건을 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인들에게 물건값을 제대로 쳐주라는 뜻이라고 한다. 관련기사 2. 분파[편집] 경주 최씨는 26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아래의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 최청(崔淸) 광정공파(匡靖公派) : 최단(崔鄲) 정랑공파(正郞公派) : 최호(崔灝) 사성공파(司成公派) : 최예(崔汭) 화숙공파(和淑公派) : 최현우(崔玄祐) 충렬공파(忠烈公派) : 최광위(崔光位) 3. 유명한 인물[편집] 최가람 최경환(1955): 정치인. 자유한국당. 경주 최씨이면서 반박(反朴)들의 입장에서는 족보에서 지워버리고픈 놈 최교일 최규남 최규식 최기문(1952) 최동원 최동익 최명길(배우)[8] 최무룡 최민수 최백호 최상화: 前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최상훈 최민기: 가수, 예명 렌, 뉴이스트 멤버 최성근 최세창 최수원: 야구심판, 최동원의 동생. 최수종 최승우 최시형 최승철(가수)[9] 예명 에스쿱스, 보이그룹 세븐틴 멤버 최언위 최양업 최용규: 1985년생 야구선수. 최용신: 농촌운동가. 상록수의 실제 모델로 유명하다. 최유정: I.O.I 출신 1999년생 아이돌, 현 위키미키 멤버 최익현 : 독립운동가, 호는 면암. 최원석 최재현: 배우, 예명 조상구 최제우 최준[10] 최치원 최태성 최현배: 국어학자, 호는 외솔. 최홍기: 가수. 예명 나훈아 그리고 영화상 설정이긴 하지만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과 최형배가 경주 최씨 충렬공파인 것으로 나온다. [1] 인터뷰 기사에는 처인애연(處人靄然)이라 나와 있으나, 최부자 고택 팻말에는 '대'로 나와있다. [2]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진사 자격은 얻어야 하지만 그 이상의 벼슬을 노리지는 말라는 의미 [3] 이유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고관대작이 되기 위해서는 라인을 타야 하고, 라인을 타고 올라가면 위험해질 공산이 크다. 정쟁에 휩쓸려 역도로 몰리기라도 하면 집안이 박살나는 건 일순간이다. [4] 흉년기에는 자영농민들이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시가보다 더 싸게 땅을 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악용해서 내 재산만 불리지 말라는 의미 [5] 아들은 괜찮고 며느리는 차별하는 게 아니라, 이 집안에서 15년 이상 자란 아들은 근검절약과 상부상조하는 가풍을 알테지만 부자라는 것만 알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 상) 시집 왔을 며느리에게 부잣집이라 해서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려는 가훈이다. [6] 39.2727...Km 정도 [7] 지역 제일가는 유지로서 지역의 안정을 유지할 책임이 있음을 명시한 의미 [8] 정치인 최명길과 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명길은 '전주 최씨'이다. [9] 경주 최씨 38대손 [10] 1884-1970, 경주 최부자 가문의 12대 당주로 가문의 전 재산을 털어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기부하고, 해방 후에는 현재의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우는 등 업적이 크다. 경상북도 칠곡 출생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간호(干湖)이다. 최규하 정부의 총리, 삼성물산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제국 상무성 근무를 시작으로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고위공직자로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이후 정치인과 기업인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재계를 아우르는 'TK인맥의 대부'라는 평가가 있다. 장남 신철식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기획재정부와 국무총리실에서 경제관료로 활동했다. 2. 생애[편집] 1920년 10월 29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의 행정고시 격인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조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도쿄의 상공성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7월 일본 군수성의 군수 관리감리국 파견명령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도 군수감리국 근무를 이유로 등재 언급이 나왔다가, 유족들의 이의신청에 따라 조사한 결과 실제로는 취임하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일본측 자료가 발견되면서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1954년 관직에 복귀하였다. 39세 때인 1959년 부흥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8년부터 몇 년 동안 기업에 몸 담고 있다가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군위군-성주군-칠곡군-선산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에 신민당 김창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야 무소속 김현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한편, 1975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장관에 임영되었고, 1978년 남덕우의 뒤를 이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장관이 되었다.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날 때는 국방부 회의실에서 각료들이 모여 있던 가운데 박정희 유고를 비밀에 부치고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의 상황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을 보였다. 12.12 군사반란 때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수사해야 한다며 결재를 받으려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에게 우선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결재부터 받으라고 호통을 쳤다. 12.12 군사반란 직후 이루어진 개각에서 신현확은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TK(대구-경북) 출신이었고 유신체제를 합리화하며 보수층의 환심을 사는 등 일련의 독자적 정치기반을 닦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래서 신군부와 결탁하여 창당을 추진한다는 등의 정치풍문이 나돌기도 하였으며, 당시 민주화 세력은 신현확과 전두환을 한통속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 4월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직을 겸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고딩직속후배인 노태우는 도와달라고 싹싹 빌다가 귀싸대기를 쳐맞았다고 한다. 1980년 5월 17일(5.17 내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한 국무회의를 중앙청에서 주재하였다. 그 다음날 신군부의 발호를 막지 못한 것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법개정심의위원장을 맡아 제5공화국 헌법을 주도하였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 1983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86년부터 91년까지 삼성물산 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3. 매체에서[편집] 3.1. 드라마[편집] 제4공화국 : 故 김진해 코리아게이트 : 박규채 제5공화국 : 신충식 파일:ShinHH.jpg (신충식이 연기한 신현확) 3.2. 영화[편집]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故 서희승[1]이 분했다. 비록 짧은 시간 출연하긴 했지만, 김재규가 "소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죽고도 1주일로 비밀에 붙였어요.[2] 이틀 딱 사십팔 시간이면 돼요. 그런데 우린 단 이틀도 보안이 안된단 말이에요?"라고 하면서 박정희의 유고를 덮자고 우기자 "거기서 소련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것도 빨갱이 잡는 정보부장이"라고 태클을 걸면서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1] 배우 서재경의 아버지. 2010년 암으로 별세. [2] 명백한 오류다. 브레즈네프는 10.26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1982년에 죽었다. 즉, 극중 시점에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모토는 구국의 강철대오.범 NLPDR계가 주류이며 민중민주주의계나 일부 자유주의 성향의 정파도 포괄하는 형태의[2] 특히 학생운동의 최전성기였던 노태우 정부 시절에 전대협은 청와대와 주요 제도권 정당 다음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되며, 주요 외신들로부터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단체로도 평가된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1990년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민주자유당)과 야당(평화민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을 정도.[3] 2. 역사[편집] 6월 항쟁과 전대협 결성 1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1997) 10.28 건국대 항쟁으로 1300여 명이 구속된 뒤 비합법 지하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선도투쟁에서 대중노선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4] 그리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로 불붙기 시작한 민중 투쟁은 전국적인 학생운동 진영인 '전대협' 결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해 6월 항쟁 중에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장례 절차를 위해 7월 5일 연세대학교에서 전국의 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전국적 학생 대중조직 건설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8월 1일에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서대협) 의장 이인영의 주도로 고려대에서 '제1회 전국 대학생 지역대표자 연석회의'를 시작으로 총 세 번의 회의를 거쳐 전대협은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 파일:external/archives.kdemo.or.kr/00740849_0001.jpg 1987년 전대협 발대식 모습. 그리고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전국 95개 대학에서 모인 3,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 발대식을 열었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외세배격과 독재 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 정부의 수립,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기여,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향한 연대, ●학문•사상의 자유 쟁취, ●전국학생총연합(전총련) 건설의 토대 마련 등 다섯 가지를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은 1987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과 13대 대선 투쟁[5], 1988년 6 ·10/8 ·15 남북학생회담 시도[6], 전두환-이순자 부부 체포결사대 활동 등으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1989년 봄부터 문익환 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조성되면서 그 해 5.3 동의대 사태를 계기로 화염병 처벌법이 제정된 뒤 6월 30일에 한양대에서 열린 평축 출정식 당시에 인문관에서 고립농성하다 수천여명이 구속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수배를 당했고, 특히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로 전국 140여개 대학에서 열린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학생회장들이 당���되어 NL-PD-비운동권 삼각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1년 시위 도중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씨가 경찰의 토끼몰이 유혈진압 때문에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 때처럼 정권타도를 외치면서 거리를 뒤덮었으나,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시인 김지하와 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의 운동권 비난 발언[7]으로 여론이 급반전하고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민자당이 당초 열세였었던 서울시의회, 경기도 의회, 인천시의회 선거에서 과반을 넘게 가져가며[8] 투쟁은 실패로 돌아간다.[9][10] 결국 1992년 총/대선 정국에서도 크게 힘을 쓰지는 못했고 전대협 7기 당시인 1993년 3월 경희대에서 대의원대회를 통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며 전대협은 자진해산였다. 이후의 역사는 한총련 항목 참조. 3. 조직[편집] 초기 전대협은 산하에 연락사무국만 두었으나, 1989년 3기 때부터 조국통일위원회를 비롯해 정책국, 집행국, 문화국, 사무국, 투쟁국, 홍보국 등 부서를 두어 조직으로써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외에도 전업 활동가 중심조직인 '정책위원회'가 있다. 산하 지역조직으론 서총련(서울), 부울총협(부산/경남), 남총련(광주/전남), 대경총련(대구/경북), 대전대협(대전) 등을 두었다. 4. 관련 노래[편집] 4.1. 전대협 진군가[편집] 1989년 3기 때부터 제정되었으며, 작사/작곡은 윤민석이 담당하였다. 원체 시대가 시대였던데다 멜로디도 꽤나 중독성 있어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학번이라면 아직도 흥얼거릴 수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회사 부장님한테 테스트해보자 북한에서도 임수경이 방북하면서 전대협 진군가를 불렀는데 북한에서 주로 불러졌던 상투적인 당 선전가요와는 비교도 할수없는 신선함으로 한 동안 상당한 인기곡이 되었다는 후문도 있다고. 한총련으로 바뀐 이후로는 전대협 진군가에서 한총련 진군가로 교체되었지만 한총련 진군가가 전대협 진군가에 비해서 NL적인 색체가 대놓고 드러내는데다가[11] 노래 자체도 전대협 진군가는 박력감이 넘치는데 반해 한총련 진군가는 울적거리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한총련으로 바뀐 이후로도 시위현장에서 전대협 세 글자만 한총련으로 바꾼(...) 버전이 애창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 한총련진군가는 94년 2기 한총련 출범식에서 조국과청춘이 최초로 보급되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전대협 진군가를 한총련 진군가 대신 불렀다. 여담으로 2016년 퀴어문화축제에서는 혐오세력을 향해 기가폰을 들이밀고서 'LGBT 진군가'를 부르는 참가자도 있었다. 한참 필 받아서 노래 부르다가 옆 사람이 쳐다보니까 뻘쭘해서 말하기를, '아 이거 옛날 전대협 진군가 패러디한 겁니다'(...) 또 다른 여담으로 철의 노동자와 코드 진행이 비슷해서 앞 소절에선 철의 노동자를 부르다가 뒷 소절에서 전대협 진군가로 바꾸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와 '단결만이 살 길이요'는 코드 진행뿐만 아니라 멜로디도 똑같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이여'가 '우리의 사랑이여'로 기억하거나 부르는 경우도 꽤 있었다는 후문도 있다나 94년 2기 한총련출범식(조선대)에서는 아예 두 노래를 콜라보레이션한 곡을 노동자노래단(확인요망)이 공연한 적이 있다. 일어섰다 우리 청년 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전대협의 깃발 아래 (후렴)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아아 전대협이여 우리의 자랑이여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한 길로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한 길로 4.2. 전대협 찬가[편집] 자랑스런 이땅에 아들딸로 태어나 투쟁으로 사랑하고 피땀으로 일구어온 해방조국 건설의 길 온몸으로 나간다 전대협의 깃발들고 당차게 나간다 (후렴)우리가는 이길 어디쯤 모진가시 총칼로 있고 때론 거센 폭압에 상처받을 지라도 믿음으로 일어서고 사랑으로 일으키는 전대협이여 영원하라 통일의 그 날까지 *2 5. 역대 의장[편집] 1기(1987년) 이인영 : 서대협 의장 겸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더불어민주당 구로구 갑 국회의원 2기(1988년) 오영식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前 더불어민주당 강북구 갑 국회의원, 前 한국철도공사 사장 3기(1989년) 임종석 :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前 더불어민주당 성동구 을 국회의원, 前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現 청와대 비서실장 4기(1990년) 송갑석 : 남대협 의장 겸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구 갑 국회의원. [12] 5기(1991년) 김종식 :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녹색친구들[13] 대표. 녹색당(대한민국) 당원 6기(1992년) 태재준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시카고 대학교 사회복지학 박사. 6. 전대협 그 후[편집] 역대 전대협 의장들은 다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학생시절의 NL노선에서 이탈해서 나름대로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 한총련과 달리 전대협은 막가파식 투쟁을 한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한총련 출신이 양지에서 활동하는 경우는 정말 찾기 힘들며 한총련이라 그러면 (가장 좁은 의미의) 종북 이미지가 지금도 투영되어 있다. 자기 과거를 숨기고 언론에 두문불출하는(심지어 개인사업을 하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며 음지에서 활동하다 욕만 먹는 경우도 있다. 1기부터 4기까지는 정치권의 386 영입 붐을 타고 2000년을 전후해서 민주당계 정당을 통해서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다.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라인을 탄 이들은 대외적으론 햇볕정책, 사회적으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한미 FTA를 지지하고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하는 등 보수정당과 다를 게 전혀 없는 친재벌 반노동자적인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486세대와 친노의 핵심으로 현재 민주당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전대협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계파라인을 탄건 아니고, 여러모로 이합집산이 이루워졌기 때문에 여러모로 우여곡절이 많았기도 했다. 사실 이 항목안에 적기에는 정말로 여백이 부족하다 5기 김종식은 졸업후에 같이 활동하자는 선배들의 제안을[14] 거부하고 광주에서 지역공동체운동을 하다가 민주노동당 최순영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거쳐서 직접 지방선거에도 출마하였다. 이후 민주노동당을 나와서 환경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녹색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6기 태재준은 사실 대학 재학시에도 관악자주파라고 불리던 비주사NL 계열[15]로 기존 NL주류계[16]와의 마찰로 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았고[17] 얼마안가 체포되서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나온뒤에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2000년대 들어서 복지국가 건설을 주장하면서 친민주노동당 성향을 보여주면서 활동했지만,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사실상 폐인이 되었다.[18] [19] 1993년 전대협이 자체 해산하고 한총련으로 확대개편된 이후에 전대협 간부 출신들이 결집해서 1994년 전대협동우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 전대협동우회를 통해서 역대 의장단 이외에도 전대협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학생운동가들이 조직적으로 제도권 정치에 투신하였다. 대다수는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으로 이어지는 민주당계 정당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노무현정부 출범과 2004년 총선을 통해서 이들이 대거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자 한국정치를 개혁할 새희망으로 주목받았다.한겨례21, 주간동아 하지만 참신성 이외에는 뚜렷한 정치적 실천이나 대한민국을 바꿀 독자적인 대안을 선보이는 데는 결국 실패했고, 386세대로 불리우던 전대협 출신들이 조직적으로 캐리했던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는 침몰했고, 201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구태기득권으로 청산대상으로까지 몰리게 된다. 이후 민주당이 2015년을 전후해서 엄청난 계파갈등을 겪은후에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전대협 출신 정치인 중 상당수가 문재인 정부 내각에 입각되었지만 당원들과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인물에 따라 케바케인 상황이다. 일부는 우익으로 전향해서 뉴라이트가 되었고[20] 이명박 정부 출범 전후로[21] 한나라당-새누리당쪽으로 대거 입당하였다. 이들은 아스팔트우파라고 불리는 극우세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7. 주요 사건[편집]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 임수경 방북 사건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8. 관련 문헌[편집] 불패의 신화: 전대협 이야기 6년사: 전대협동우회 편. 두리. 1994. [1] 왜 무대의 걸개그림이 "건설 전총련"인고 하니 당시 전대협은 그 이름처럼 6월항쟁이라는 특수한 정세 하에서 각 대학 대표자들로 구성된 일종의 가설조직이란 한계를 안고 있었던 터라, 실질적으로 대학생들을 포괄, 지도할 수 있는 대중조직으로의 변모를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총련은 향후 건설될 대중조직의 가칭이었고, 이 목표는 이후 한총련의 출범으로 달성된다. 결국 망하긴 했어도 아무튼 출범 당시엔 그랬다는 말이다 조직명이 '전국' -> '한국'으로 바뀐 이유는 주사파 관점에 따라 남한만의 조직이므로 '전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조총련이라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통일반대론을 지지하는 쪽이어야 말 되는 명칭이다. [2] 이후로 한총련 초기인 1994년까지도 이런 분위기가 존속해있었지만 1995년부터는 NL강경파가 중앙간부를 싹쓸이 하고 PD,NL온건파 등 다른 정파를 모조리 숙청한 이후에 점차 삐그덕거리기 시작였다. 결국 한총련 지도부의 몰아붙이기로 벌어진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이석 치사 사건 이후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하고, PD계는 물론 NL온건파들까지 모두 한총련에서 탈퇴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3] 현대그룹, 삼성그룹, 대우그룹 등 기라성 같은 재벌이나 이들이 연합한 전경련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 크다고 평가됐다는 이야기다. [4] 그 전까지는 각 대학교의 지하 서클(이를 "언더티"라고 한다)들을 중심으로 연합조직이 결성되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연합시위나 선도투쟁을 하는 형식이었다. 1970년대 까지는 거의 학교별로 조직이 되어 필요할 때만 연계가 되어있는 형식이었고(그 시절까지 대학생 숫자가 극히 드물었던 것도 한몫했다), 대부분 서울대 중심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대학 정원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보다 본격적인 연합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흐름은 무림-학림 논쟁이나 학림 사건, MC-MT 논쟁 항목에서 잘 볼 수 있다. [5] 다만 이 과정에서 후보단일화(김영삼)와 비판적지지(김대중), 민중후보(백기완)으로 나뉘어져 어려움을 겪었다. [6] 그해 8월 15일 판문점 진입 당시 누워서 행진하는 사진으로 알려진 그 사건. [7] 민주화운동으로 오랜 옥고를 치뤘던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궂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게재한 것이 결정타였다. 당시 강경대의 사망 이후 각계각층에서 연쇄분신이 일어났는데, 김지하 시인이 이걸 모두 운동권 조직들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강기훈 유서대필 조작도 이런 김지하의 강변을 정권에서 이용하면서 촉발된 것이다. [8] 다만 당시 평민당과 민주당이 91년 지방선거에서 노태우 정부에게 극도로 부정적인 여론을 믿고 단일화 작업없이 따로따로 후보를 낸 것도 크기는 했다. 그래도 광역의원 선거에서 야권이 수도권에서 압승을 거둘수있었던 선거를 전대협의 뻘짓으로 날려먹었다는 분석은 달라지지 않기는 하지만. [9] 당시 분위기는 거의 정권타도 직전까지 갔었다고 평가된다. 실제로도 3당 합당이후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의 인기가 낮다보니까 1991년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을 내주는것 아닌가하는 얘기가 오갈정도로 정말로 인기가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6월항쟁 때와는 다르게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사무직과 자영업자층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3저호황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으로 두터워진 중산층이 급진적인 혁명 보다는 제도적인 개혁을 선호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10] 특히 정원식 밀가루 투척과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이 학생운동의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다만 강기훈 유서대필은 결국 정권의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지 오래. 그리고 정원식 밀가루 투척은 누가 뭐래도 쓸데없이 벌인 뻘짓이었다. [11] 사실 전대협도 헤게모니는 NL이 잡고 있었고 작곡자 본인도 NL 성향 음악인이라 '민족의 해방을 위해'라는 내용은 들어가 있다. [12] 20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고, 이후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다시 공천을 받아 당선. [13] 서울 지역의 사회적 기업. 강북구에서 저탄소주택 건축 사업을 하고 있다. [14] 정확히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 한양대 직계 선배인 임종석이 찾아와서 같이 386세대의 청년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1990년대 중후반 청년운동이란 명분하에 결집한 386세대의 학생운동 출신들은 결국 집단적으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전부 제도권 정치에 투신했다. [15] 소위 NL-left.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NL계에 합류했던 CA 다수파의 후신이다. [16] 이른바 자주대오 = 주사파 [17] 당시 서울대 운동권 내부 정세로 주사파 계열 단독 후보가 나오지 못하여 태재준을 내세웠다고 한다. [18] 사실 태재준은 본인의 활동은 미약했지만, 학생운동 그리고 길게 보면 2000년대 진보정당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학생운동 시절 태재준을 따르던 비주사NL그룹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에 맞춰서 온건PD 그룹과 통합해서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을 형성하면서 NL노선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이들은 무조건적인 정권타도, 반체체혁명인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현실적인 사회개혁노선을 제시했고 졸업후에 민주노동당 혹은 시민운동에 뛰어들어서 복지국가 노선을 주장하였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할때 실제 정책파트에 가장 많은 인력을 제공한건 바로 21세기 출신들로 2017년 현재까지도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 제도권 정당 등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19] 국가정보원에게 독살을 당할 뻔했다고 주장하면서,태재준 블로그 서울역 앞 등지에서 수년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1인 시위 모습 2018년 2월 5일 기준으로 14:55~15:00 즈음에 당고개행 전철에 탑승했는데 해당 열차에서 자신이 국정원에게 독살을 당할 뻔했다는 얘기와 국정원을 자칭하는 단체들이 1천만명의 국민을 대상으로 독성 화학물질을 살포한다고 주장했다. [20] 대표적인 케이스가 북한의 인권 탄압 참상을 알고 전향한 하태경. [21] 마침 이명박도 나름대로 운동권 출신이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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