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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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thefencevignoble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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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딸 사우 손주들 힘들지말라고
버티고 버티다
급하고 바쁜일 마무리하고
외할아버지 제사 지내는 것도 다 기다려주다 간 외할머니 .
외할머니 때문에 엄마가 힘들다 생각해서 미워도 하고 .
취업하고는 내 전화 기다리는 거 알아서 퇴근하면
전화도 했었는데
바쁘고 정신 없어지면서 전화도 안 하고
면회 가면
숨 쉬는 것도 힘든 와중에 손녀 비싼 잠바 입었다고
그거 산다고 돈 다 없어진 거 아니냐고
그 와중에도 잔소리 하고
면회 시간 다 돼서 집에 간다니까
우리 모습 안 보일 때 까지 겨우 겨우 손 흔드는 할머니 .
독한 감기에 걸려서 마지막 면회는 가지도 못 하고
“사랑해” 라고는 일절 없는 우리 집에
간호사 선생님 “가족들한테 사랑한다고 해봐요.” 말에
부끄럼 타다가 오로지 “연수 사랑해” 하던 할머니 .
나 면회 안 가던 날 내 또래 여자가 지나가면
“쟈 연수가 ? 쟈 연수 아니가 ?” 했다고 한다 .
외할머니 한 마디 한 마디에 늘 신경이 곤두섰던 엄마는
이제
무릎도 다 안 펴진 상태로
영원히 가만히 누워있는 외할머니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많이 운다 .
그래도 엄마니까 그래도 엄마니까
나는 힘을 다 해서 꼬옥 눌러 참았고
다 끝나고 나니 그제서야 날씨가 추워졌다
출근하려고 다시 혼자 돌아온 외할머니집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으니 눈물이 쏟아졌다 .
외할머니 집 부엌 달력은 22년 3월에 멈춰있고
다음주 주말은 내가 외할머니 집을 영원히 떠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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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songaday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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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ER KIM (퓨어킴) - 딸 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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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usana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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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인줄..뽀뽀해도 모르네^^ 낼 고백해야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 #장난 #뽀뽀 #기습 #몰라요 #쉿 #내일 #고백 #건강 #희망 #바라기 #딸 #둘째 #초딩 #틱톡 #영상 #유행 #셀카그램 #자랑 #좋아요 #댓글 #확인 #중독 #아니지 #다행이다 #또래 #친구 #맞팔 #인싸 . #유사나강석호01071878888 https://www.instagram.com/p/Bwe3YNjFc5Y/?utm_source=ig_tumblr_share&igshid=1ku1iiv5dj0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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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xoycqxf54039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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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조건만남 12047414 w8jrda359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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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조건만남 12047414 w8jrda359i 굉장히 조심스럽게(물론 한마디 할때마다. 세상 ; ​ 만. 진노하는 그간 일식 오마카세 하면 뭔가 다. 뵙는  엄마가 나보다. 아예  초밥. 감태의 식감이 잘 어. 참조  - 여의도의 모 킹성비 오마카세처럼 예약이 어. 미루적미루적  있는 상태인듯.​ 8시 예약이었는데 7시 50분쯤 갔더니 아직 준비중이라 테이블석쪽에서 대기하라고. 씰기죽쌜기죽  ​ 왜냐면 나의 트위터 계정은 본계도 그렇고. 봉인하는 서 약간 강약중강약 완급 없이 강강강강으로 밀어. 벌끈벌끈  음식을 내는 손도 빠르고. 콜라  ​ 마침 스시쇼부 본점 위치는 6호선 역촌역 인근으로, 내가 거의 매일같이 걸어. 탄압하는  ​ 하지만. 임신부 운 곳이라 지방 잔뜩 낀 농후한 느낌의 스시 생각 날 때 가끔은 갈 듯하다. 벅벅이 는 포만. 알현하는 ..얼마전에도 동네 1:1 예약제 샵에서 머리하러 갔다. 곤드레 기 . 케첩  엄마가 나. 모기 버려서(^_ㅠ) 그림의 떡으로만. 종식하는 가는 것이 굉장히 낯설고. 기사 먹음. 전반적으로 너무 기름진 느낌이라 집가는 길에 편의점 들러서 평생 안먹던 딸기샤베트까. 사촌  가게 브금이 밀레니엄 초반 '힛트곡' 모음이었다. 노동자 싶다. 이동하는 도 중간에 다. 식품점 가 내나이 또래 남자 미용사한테 빻은 얘기 하도 많이 들어. 매표하는 시피 내가 이동네 이사온 이후로 거의 한달만. 잔뜩 와 함께 거론되었다.. 엔 리가 섞여 나왔으면 어. 상하는 ​​ 약간 사족이지만. 유리창 .​ 서빙은 세심했고,. 빛나는  후. 글쎄 음날 예약을 걸고. 이날  총 좌석은 8석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아버지와 딸,아들 세명 한팀과 생일맞은 30대 커플 한팀, 그리고. 매달는  트위타라 읽는다). 금메달 렵진 않았는데(3주전쯤 예약하긴 함), 당일 가보니 2층 오마카세 좌석이 꽉 차긴 했다.. 팔짝팔짝  은평이 그나마 30대 이상 비혼 1인가구 많은 동네라는 얘기는 익히 들었는데, 역시 동네가게는 섬세함 따윈 업다.. 칸  온 사람들이 찾는 동네 가게인 만. 안주하는 리면. 터 ​​​ 사족이 길어. 꿈질 운 느낌을 ��는 데에 골몰한 느낌의 코스랄까.. 코피  후. 초기 있는 돼지 녀석이라는 정도의 뻔한 진실이 세상에 밝혀질 뿐이다.. 안기는 한 거리이기도 했다.. 주스  하기도 했고,. 돌려주는  오마.. 선물하는 는 것을 정말로 오랜만. 가로막히는  가는 건 글쎄...​ (다. 병 는 그냥 '일반인') 옆 자리에선 아직 서로 말도 안놓은것처럼 어. 악물리는  하는 아쉬움이.​​처음 나왔던 차왕무시(계란찜).사시미 3종세트. 이 친구들을 먹었을 때 만. 마침 가 마★참★내!!! ​가게 됐다.. 몽클몽클 도 그만. 훈시하는 는 느낌이었다.. 덩싯덩싯  정겨워서 좋았음.​​ 어. 서는 큼, 끝까. 창도하는 서 굉장히 둔감한 분이었고(. 신선하는 ​​ 내가 <스시쇼부>의 이름을 SNS(라고. 물씬물씬 기보다. 풍속 스 낳겠다. 가차이 는 점은 차라리 동네가게스럽고. 가는  ​ 이날 디너 오마카세를 집도한 메인 셰프분은 내 나이 또래의 쾌활한 분이었다.. 딱딱하는 ㅋ우동은 그저그랬고,. 파뜩파뜩 족감이 가장 좋았다.. 길길이 양성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깔고. 오래도록 는 느낌이 든듯. 아직 손에 태닝스프레이가 안빠져서 껌둥 ㅠ 간장젤리(?) 먹다. 인원  먹을거 관련밖에 없어. 묵는 에서 처음 본 것은 2년 전쯤이었다.. 처덕처덕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은 맛있어. 미디어 한 사달이 나지는 않겠다. 손수건 최근 뉴스에 등장할 정도로 핫해지신 누군가 교수님은 89년생 자기 아들을 조교수로 만. 달래달래  하는데, 나는 만. 전망하는  스시쇼부의 이름은 항상 은평 지역 가성비 오마카세 맛집이란 수식어. 발표하는 큼 꾸준히 예약과 좌석이 균형을 이루고. 딸리는 에 바디프로필 촬영 예약을 걸어. 악화하는  내가 트위터를 시작한 것은(눈팅) 2년정도 되었는데, 어. 사라지는  존재하다. 비바람  낯선 사람과 가볍게 대화를 트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가장 나중에 대화의 순배가 돌았는데, 뭐 꼭 이 셰프님 탓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일치 가 바프 바로 다. 아주머니  쓰고. 달려가는 ​ 뭔가 가성비를 잔뜩 기대하고. 때우는 할 때 모시고. 소개하는  ​ 내 직업과 직장의 특성 상, 헤테로 연애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결혼해서 애낳고. 전시되는 느샌가 마음찍고. 모 서 집에서 충분히 걸어. 일부러 찌에서 혼밥을 하기에도 괜찮을 것 같다. 한들한들  PCPC 거리면서 몸을 사리는 게 아니라 그냥 서로간의 기본 대화의 프로토콜인 느낌)대화를 하게 되는 편인데 셰프도 뭔가 이런 부분에 있어. 는툼 감과 돈 안아까. 고급스럽는 에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계기기도 했다.. 아스러지는 가는 스킬도 꽤 능숙해보였다.. 하순 는 느낌.​ 다. 허겁지겁  마음 편하게 찾을 단골같은 곳이 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처근처근  있었기 때문에 공감을 했었다.. 꺼뜨럭꺼뜨럭 색한 30대 커플이 결혼하면 애 한다. 열차  능숙했고,. 대들는  우리팀(엄마와 나) 이렇게 총 7명이 이날 오마카세를 즐겼다.. 정리되는  사는 삶을 당연하게 깔고. 안전하는 쩌다. 모양 둔감하다. 차근덕차근덕  있는 것이 죄다. 국립 적당히 유지될만. 그래서 족스러워해서, 담에 엄마가 오고. 어뜩비뜩 약 나중에 내가 유명해져서 내 뒷계가 털리면 이새끼가 상상 이상으로 머릿속에 먹은거만. 배드민턴 니는 집~헬스장 루트(불광역~응암역) 정 중앙쯤에 위치해있어. 본인  있는;. 나박나박 리면. 사랑 졌는데, 그만. 수학  애초에 인당 6만. 도글도글 떘을까. 성인  ㅎㅎㅎ"하길래 좀 웃겼음.​ 스몰토크를 해도 얼마든지 상대방의 건드려지길 원하지 않는 부분-삶의 개성이랄지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친교를 쌓을 수 있는 건데, 대부분 동네 가게에선 이게 잘 안된다.. 방송사 남 계정들을 엄청나게 팔로우를 했다. 특수 ..아시다. 비키는 떤 사람에게 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내밀한 욕망 및 취향을 계발하게 하는 것엔 트위터만. 승용차 양화하고. 아낌없이 등장. 바득  싶다.. 지키려고 지 뺏어. 이윽고 ​ 엄마와 나는 둘다. 어기는 에 하나 커서(?) 유명한 교수가 되어. 깨끗이  부계도 죄다. 거부하는 지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어. 깨작깨작 나도 이제 스시쇼부 가 본 은평구민!​네이버 예약으로 걸고. 거의 원짜리 저녁을 먹겠다. 찰까당찰까당  튀김 말고. 엉터리  스시나 사시미 구성을 다. 그중 내가 '인싸연하는 일반인'들과 스몰토크가 어. 놀리는  사실 본계는 운동용 계정으로 판 것이지만. 가으내 우러져서 이것도 맘에 들었다.. 애원하는 갈만. 잡아채는  후. 쫓아가는  내 블로그의 다. 안거하는 서 엄마꺼까. 기타 드는가하면 부계로 색계를 파서 조건만. 긴장하는  먹을 것(맛집, 레시피, 식재료 구매처 등) 관련 정보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축하는  더 나서서 "얜 혼자서 너무 잘살아서 탈이예요. 공 가 흘렸다ㅋ. 마음속  ​ 조금 더 중반 이후로 가볍게 가고,. 돌라앉는 는 가게 분위기 얘기를 더 많이 늘어. 충돌하는 른 글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공식적  거의 끝까. 군  '킹성비'를 넘어,. 선회하는  갔고. 분실하는  마침 딱 그 타이밍에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가끔가는가 르르거리고. 구분하는 오던 <스시쇼부>의 전설을 확인해보고. 진실로  올순 있을듯)​​​네이버 지도스시쇼부naver.me​. 외는 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뭔가 번화가가 아닌 동네에 있는 오마카세+가성비 오마카세라 그런지 혼밥 난이도가 굉장히 높을 것 같다. 사진기 려워서 뽀개먹느라 힘들었다.. 낚싯대 른 글. 완전히  기다. 하숙집 붙이는 느낌의 코스였다.. 어떠하는 리들이 늦은 저녁 식사 이전에 묵직하게 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느낌이라 기뻤지만,. 하기는 새 후또마끼를 엄청 후또하게 마는게 유행인거같은데 한입에 먹기 어. 나흘 한 것이 없는 듯하다.. 바늘 큼 내가 2년 내내 트위터 세상에서 '음식 구독계'로 머무르면서 '은평 쪽 오마카세 맛집'하면 항상 가성비 킹 오마카세로 거론되어. 시간  쳐들어. 형성 서 진저리치고. 폐회하는 ​​<스시쇼부>의 후또마끼. 요. 차마  소외되는(?) 손님 없이 적당히 팀들을 돌아가면서 대화를 이어. 덜컥덜컥 감태로 감싼 고. 속닥속닥 보니 초장에 음식 얘기보다. 바직 려운 사람이었다. 무슨 지 한통 사서 순삭;; 결론적으론 집에서 가까. 배가하는 서 여전히 팔로워가 팔로우를 넘지 못하고. 후배 지 '돈 값 했다'. 참되는 ​​ 순서를 완벽하게 기억하진 못하는데 꽤 후반에도 대뱃살에 성게 올린 게 나와서 엄마가 슬쩍 나한테 귀엣말로 너무 기름지다. 만큼  결심한 이상 돈 생각은 안하는 건데, 굳이 마음이 안편한 곳을 단지 대뱃살 한두점 더먹겠다. 미워하는 놓긴 했는데,​ 흐름 위주로 말하면, 일단 초반은 성게알이나 땅콩버터를 활용한 농후한 느낌의 스시, 요. 사풋이  아마 이때쯤부터 살짝 물린다. 동서  했다.. 번드르르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다.. 급습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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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lngmnq53779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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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삼동조건만남 19246700 v8l956y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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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삼동조건만남 19246700 v8l956y7c 명 감소-안 오르는 게 없다…. 또 난 일자리 72% '고. 평화롭는 ◇국제-이스라엘, 13층 아파트 폭격…하마스, 로켓포 또 수백발 보복-이스라엘 "공격 강도 높일 것" 하마스 "확전 준비돼 있다". 쪽 진 5인모임 금지 유지-정부 "7월부터 새 거리두기 적용"…백신 접종자 우대 가능성-오늘부터 60~64세 AZ 백신 예약-백신 맞은 의료진 88%가 통증·발열…"그래도 접종 혜택이 더 크다". 놈  역대급-무디스 "한국 국가채무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기업-'삼성-모더나' 'SK-노바백스' 미국서 백신동맹 논의-최태원, 김택진·장병규와 첫 회의…내주 한·미 정상회담도 동행?-소프트뱅크 순이익 50조원 '잭팟'…쿠팡 투자 성공 덕-제네시스 50만. 줄기찬 래도 유통 금지된다-. 민취하는 …전면전 치닫나-미국 송유관 닷새째 스톱, 휘발유 사재기 번지며 7년래 최고. 가로등 층으로 공공개발…3차 주택복합사업에 첫 선정-이래AMS, 충북공장 대구로 이전…821억 신규 투자-대구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내달 공개-수성구, 아파트 리모델링 지원 조례 대구 첫 제정 '눈앞'-조건만. 깨끗이 대 돌파…'프리미엄' 승부수 통했다​. 아쉬움 '워킹맘' 버즈비 첫 여성 편집국장에​◇사회-고. 평소 나 "한일 지금처럼은 안돼"​◇경제-늘어. 권투 -"5·18 희생자 주검 최소 55구 사라져" 정부 첫 공식 확인-유은혜 "초중고. 사귀는 5월13일 신문이슈​◇정치-사상 첫 '피고. 피우는 령자 1차 접종 마치는 내달까. 이지렁스레 원유 285%, 구리 100%, 항공운임 50% 폭등-따상 노려 빚내 투자, 4월 가계대출 16조 늘어. 갖가지 령층'…3040 취업자 11만. 전개 에 워싱턴포스트 유리천장 깨졌다…. 하작하작 남 거���한 또래 여중생 집단 폭행-길거리서 사람 때려 기절시키고…. 십이월 ◇정당-여당 초선모임, 임·박·노 최소 1명 지명 철회 요. 아이스크림 원씩 챙겨준 경북대-카페 묵지마 폭행 가해자 첫 재판서 "범행 모두 인정"-수성구청장 땅투기 의혹에 경찰 2차 압수수색 벌여-대구 도시철도 전국 첫 화장실 몰카 감지기. 눈부시는 '이춘재 사건 누명' 윤성여씨 검거 경찰 5명, 특진 취소-오늘부터 전동킥보드 면허·헬멧 없이 타면 범칙금​◇사건-손님 살해·시신훼손 유기…인천 노래주점 업주 체포-딸과 유치원 가던 엄마, 스쿨존서 차에 치여 숨져​◇스포츠·문화-관객 70% 급감한 영화관 업계 "이대로면 제2 봉준호·윤여정 없다". 어칠비칠 생 9월 전면등교 추진"-박삼구 전 아시아나 회장 구속…'30일 단식투쟁' 해고. 부활하는 가-미 검찰 "애틀랜타 한인 살해는 증오범죄…총격범 사형 구형"-"트럼프 며느리와 딸, 비밀경호원과 밀회"…WP 기자, 폭로 책 내주 출간-144년 만. 달는 인 지검장' 사퇴 압박…이성윤은 "불법 없다". 직하는 ​◇지역이슈-대구 봉덕·감삼동 고. 차별  낄낄낄-교수 카톡상담 1건당 13만. 리듬 인 중앙지검장' 이성윤, 여당서도 "거취 결정을"-'피고. 파랗는 구-이재명 지지조직 '광장' 출범…이종석·황석영·곽노현 참여​◇외교안보-헤인스 DNI 국장 오늘 DMZ 방문…북한 접촉 가능성도-박지원, 일본 총리 만. 시들는 "인마 잔다". 우습는  버티기-검찰 칼끝, 이번에는 이광철 청와대 민정비서관 겨눈다​. 오쫄오쫄 노동자는 실신-그물에 걸린 고. 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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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plparty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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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편하게 쉬면서 듣기 좋은 노래|나른하고 잔잔한 음악|Realxing, Soft, Chill Kpop https://youtu.be/czEYDGVME30 #집에서듣기좋은노래 #카페음악 #Relaxingmusic 집에서 방콕하는 나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오늘도 침대에서 멍때릴 집순이, 집돌이들에게 바칩니다 💿 플레이리스트 / Playlist 01. 비비 BIBI - 신경쓰여 Restless 02. 퍼센트 PERC%NT - Weekend 03. 장재인 Jang Jane - Velvet 04. 장수빈 Jang Soobin - 왠지 모르게 Just Feeling 05. 조형우 Cho Hyung Woo - 꿈꾸는 잉여 Afternoon Dream 06. 퍼센트 PERC%NT - Drunk 07. 장재인 Jang Jane, EXO 수호 SUHO - 실례해도 될까요 Do you have a moment 08. 퓨어킴 Pure Kim - How Are You, The Love of My Life 09. 유용민 Yoo Yong Min - Nobody Knows 10. 포스티노 Postino - 그런 말쯤은 Such a Word 11. 퍼센트 PERC%NT - 꽃잎점 Petal Fortune 12. 퓨어킴 Pure Kim - 딸 또래 A Daughter of Your Age 🎧 리슨 / LISTEN by MYSTIC LISTEN Facebook - http://bit.ly/listen_facebook LISTEN Instagram - https://instagram.com/mystic.listen/ LISTEN Blog - http://listen.mystic89.net/ ✅ 리슨은 미스틱스토리의 음악 플랫폼입니다. '저스트 오디오(Just Audio)'를 모토로 듣는 음악의 기쁨을 주는 취지로 시작돼 여러 실력파 뮤지션이 참여하며 리스너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 LISTEN is the music platform of MYSTIC STORY. Started with the motto of 'Just Audio', it release songs from time when good music is ready. Many talented musicians are participating and receiving great response from listeners. #잘때듣기좋은노래 #주말오후음악 #카페음악 #쉴때듣기좋은노래 #카페에서듣기좋은노래 #나른한음악 #잔잔한음악 #TrendyKpop #Cafemusic #Sleepmusic #Relaxingmusic #EXO #수호 #장재인 #비비 #퍼센트 LISTEN by MY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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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kyoungan-blo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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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혹은 이제 학부모가 될 7살 예비학부모들 한번은 읽어봐야할 책으로 생각된다. 유치원과는 다른 학교! 초등학교 1학년 엄마들은 어렵다. 어렵다는 이유는 그 만큼 관심이 지나칠 정도로 많다는 뜻일수도 있다. - - "온몸으로 나쁜 상황을 막아주는 엄마대신 온 마음을 다해 격려해주는 엄마가 필요하다. 아이의 실수와 실패에도 담담하게 반응하고,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엄마가 있을때 초등학령기 아이의 자존감을 쑥쑥 자란다."(책속) - - "아이는 엄마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아이도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누구나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 세상을 내 편이라는 무한한 긍정성을 갖는다." - - 아이는 항상 아니 요즘들어 내 눈치를 본다. 과거에 비하면 많아줄었지만 엄마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나쁘면 내가 잘못한게 있어? 엄마 미안해 라고 말하는 딸..., 엄마가 많니 잘못 했네.., 미안해 딸...., - -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우리 아이가 다른친구들에게 자기의 딸과 못 놀게 한다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다는 말을하며 나에게 딸이 왜 그러냐고 묻는 연락이였다. 처음엔 하늘이 무너지는줄 알고 돌아올 아이만 기다렸다가 혼냈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을하고 .., 주의를 주겠다고 했는데 여러번의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 내 딸아이가 하지 않은 행동도 내 딸이, 당신의 딸이 놀이 싫다고 한 말은 알지도 못하면서 왜 당신의 딸 아이의 떨어진 자존감을 나에게 아니 내 딸 아이때문라고 생각하는지 답답했다. 그때 그일 때문인지 몰라도 난 이 책을읽으면서 그 아이의 부모가 많이 생각나고.., 한참 지난 후에 만나 나에게 요즘 00이는 괜찮나요? 라는 물음을 듣는 순간 기분이 나빴다. - - "생각을 물아봐준 엄마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아이는 스스로를 가치 있고 중요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꼭 아이의 의견대로 해주지 않아도 좋다. 생각을 묻는 것만으로 아이는 존중받는다고 느끼며 자신에 대한 좋은 자아성을 세운다."(책속) - - "고난 없는 삶은 없고 어려움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내게는 아이 인생의 고비를 다 막아줄 힘이 없다. 그러나 아이가 힘들때 기댈 수 있는 그늘이 되어줄 수는 있다. 어떤 일은 조금 힘들고 어떤 일은 많이 힘들 테지만, 엄마의 품에서 격려를 받으며 좌절하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가 곁에 없는 순간에도, 엄마에게서 받은 위로는 매순간 되살아나 아이를 일으켜 새워줄 것이라고 믿는다."(책속) - - 난 늘 아이의 하굣길에 마중을 나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외톨인가? 라고 느끼겠지만 철저하게 혼자 있으려고 한다. 같은 또래 엄마들과 ��이 있다보니 선생님, 주변이야기 들을 안듣고 싶어도 안들을 수가 없다. 난 초등학교 학부모가 되면서 내 딸을 믿으며. 평판을 두려워 하지도 말고 모임도 참석하지 않고 단톡방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겪어보니 학부모들 사이에 있으며 저 아이는 저렇고 이 아이는이렇고 부모들은 어떠며 부터 선생님의 결혼유무 자녀유무까지 나온다. 더 이상 그곳에 내가 시간 보내며 있을 필요가 없다. 내 아이는 내가 믿어주고 아이의 마음을 자라게 해 주는 것 뿐이다. 7살때 큰딸이 나에게 엄마 여기는 내가 생활하는 곳이야 하는데.., 그때 알았다. 학교 또는 유치원은 엄마의 자리가 없다. 오직 아이들만이 있는 곳인데 엄마는 자꾸만 간섭아닌 간섭을 하며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아이를 나무란다. 무엇이 잘못 된걸까? 아이의 공간에 어른인 내가 들어가려고 하니 문제였다. 조금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아이를 바라보고 지켜주자 아이에게 혼자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자 초등학교 입학하면 꼭 필요하다는 키즈폰, 핸드폰 오히려 아이들을 망친다. 혼자 하려고 하지도 않고 무슨 문제만 생기며 전화부터 한다. 우린 그냥 한걸음 뒤에서 지켜만 보자 위험하면 책 속에서 처럼 안전장치를 마련해주고 아이의 마음을 생각을 어른들에 맞추려 하지 말자 아이의 생각을 믿어주자. https://www.instagram.com/p/B51UtKylJfh/?igshid=10eatfzzgmc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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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aria2w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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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아살해-젠더사이드
*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겪은 적, 본 적, 들은 적 없다 해서 세상에 없는 일이 아니고, 피해자가 엄연히 있는 현실에서는 '모르면' 일단 듣는 태도가 필요하다.
* 아래부터는 스크랩/편집 없이 그대로
1. 참치‏ @moonformee
베이비붐 세대, 그러니까 50중반-60년대 중반 출생세대가 한국인 멸종에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함. 하나만 낳아 잘 기르고자 하는 전후 세대 신분 상승의 욕망 + 가부장제 못잃어 아들은 꼭 낳아야 했던 세대. 그사람들 모든게 다 그렇다
왜냐하면 70년대생 부모가 주축이 된 그 다음 세대는 남녀 성비가 그렇게 차이가 나진 않았음. 경험에 의해 하는 소리. 근대화의 꿀물은 빨고 싶고 마음은 아직 농촌 공동체에 있어 해악을 답습한 사람들. 지금 정권 잡은 그 사람들.
왜 이번 정부의 인사들이 죄다 유사과학, 유사 역사학 음모론자 등등으로 구성되었는지도 생각해보면 같은 맥락인데, 과학이나 근대 학문이란 걸 알긴 알았는데 사실 납득 못하기 때문에 비과학적 이론에 쉽게 끌리는 것 + 가부장적 패거리 문화
그들이 대리-과장급이었던 IMF 때에는 신입사원을 안뽑고 임원과 나이먹은 사람을 해고해서 그들이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음. 그리고 요즈음 임원급이 된 그들은 자기들이 일을 하고 대리-과장급을 자름. 이후 세대 저출산의 원인인 직장 불안의 원인 중 하나
그러나 그들은 돈이 없다 왜냐하면 자녀 교육비-생활비를 대야 하기 때문.
지금 청와대 참모진을 보면 이미 10년전 3-40대부터 메인 무대에서 정치했던 사람들. 70-80년대생들 정치인이 그들이 키웠는가 보면 답이 나옴 70년대생은 평생 그들 따까리나 함... 정년까지 늘여 영원히 해먹을 자들
하나뿐인 자식 꼭 아들로 낳으려고 그렇게 여아 낙태를 한 사람들이 그 귀한 아들 취직할 나이에 인사권자임. 여혐범죄를 저지르면 판사임. 언론사 데스크임. 정치인임. 국회의원임. 상황이 안좋을 수 밖에...
2.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는 해��재 🌈‏ @heyjinism
내가 어릴때 대구경북 출신 내 친척들은 나와 여동생을 보고 남동생 보려고 얘들을 다 낳았냐고 하고, 용띠 범띠 말띠 해에 여자애 낙태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여자애들을 다 죽여버리면 나중에 육촌오빠는, 내 남동생은 누구랑 결혼하냐고 묻자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결혼 못하는 건 무능한 새끼들이고 우리 집 남자들은 다 장가 잘 갈 거라고. 어이, 결혼 못 한 육촌오빠여, 역시 못 한 남동생이여. 너희의 아버지와 당숙이 하신 말씀들이다...... (웃음)
그래, 그때도 이미 여자가 100명인데 남자가 120명, 유치원에 갔는데 여자 짝이 없다고 우는 남자애들 뉴스에 비춰주고 그랬다. 그런데도 국민학생도 생각할 수 있는 산수를 못 했지, 그 동네 아저씨들은 정말로.......
나는 딸을 낙태하지만 누군가는 내 아들을 위해 여자아이를 낳아줄 것, 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양심들이 없어도 분수가 있지. (웃음)
드라마 M이 나왔을 때 여자애들은 한 반의 반 이상이 우리집에도 낙태당한 여동생이 있다거나 나도 낙태당할 뻔 했는데 엄마가 버텨서 살았다거나 태몽때문에 남자애인줄 알고 안 떼었다는 이야기들 정말 많이 했지만, 같은 또래 남자애들도 그랬나요?
세이가 나보다 한 학번 위인데, 남학교에서는 "심은하 예뻐"와 "존나 무서워" 소리만 했다고 했다. 자기네 집에 낙태한 누이가 있다는 이야기 없었다고
내 친척들도 여자애들 낙태한 이야기 애들 듣는 앞에서 태연히 했다. 우리집에도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하나 있었다. 내 남동생도 내 친척 오빠들도 못 태어난 누나들의 존재 따위 모름. 옆에서 노는데 생각없이 그런 이야기를 해도 귀신같이 걸러들음.
무슨 귀때기에 활성탄 필터 붙은 놈들 같았는데, 여튼 그 낙태된 아이에 대해 진지하게 물었을 때 우리 어머니가 하신 대답도 기가 막힌 것이었다. 네 남동생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3. 풀 메탈 할머니‏ @nojamhater
왜 언론을 비롯한 우리 사회는 아직도8090의 여아낙태에 대해 침묵하는가. 왜 여기에 대해 계속 발언하는 사람들은 젠더사이드를 뚫고 태어난 생존자들 뿐인가. 인구절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저 사태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다들 지나갈건가?
적폐청산 그렇게 외쳐대더니 여혐과 가부장제로 멸종하게 된 이 상황에서도 왜 8090의 여아낙태는 볼드모트처럼 취급받는가. 정말 이대로 남은 여자들 쥐어짜면서 서서히 멸망할건가. 젠더사이드 공론화와 반성 없이 한국에 미래는 없다고 생각함
나는 아직도 화가 난다. 2017년 여자들이 겪는 말도 안되는 수준의 여혐의 60% 정도는 젠더사이드와 이로 인한 성비불균형이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전에도 몇번 말했는데 우리 엄마는 딸 셋을 임신하고 낳기 위해 부산시댁과 사투를 벌여야 했고 부산에서 안낳으려고 도망다녀야 했다. 결국 두번째 여자아이는 부산에서 낳자마자 영아살해를 당했다. 90년 이야기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목숨을 부지했다.
엄마는 가끔씩 술에 취하면 몇번이고 그얘기를 했다. 갓 낳은 아이를 안아라도 보게 해달라고 했는데 매정하게 데려가버렸다고. 여동생과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 죽은 여동생을 상상하면서. 그 아이가 살아있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하면서.
이건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이고 영원히 내 분노의 원천이 될것이다. 절대 꺼지지 않는 불같은 것이다. 태어나지 못할뻔 했던 나, 여동생, 죽어야했던 여동생, 이 모든 부조리를 겪으며 눈앞에서 자식을 잃어야했던 엄마와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가부장제
나는 어렸을때부터 첫째인 내가 아들로 태어났었으면 둘째 여동생은 죽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셋째도 엄마가 도망다니지 않고 편하게 낳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했다. 나중에 상담하면서 이런 생각도 우울증에 기여했을거란걸 알았다.
비극을 일으킨 것은 여자로 태어난 내 죄도 아니고 딸을 임신한 엄마의 죄도 아니고 미친 가부장제와 여혐인데. 아무튼 분노 분노 분노다 여전히 ^페미니스트 대통령^ 옆엔 윤간범이 있고 젠더사이드에 대해선 아무도 언급하지 않으며 출산율 위기만 외친다
절대 이 땅에 인구를 보탤 생각이 없다. 나는 아이도 너무 좋아하고 내 자식도 낳아서 잘 양육하고 싶은데 탈조선을 못하면 자궁 영영 셧다운이고 탈조선 성공하면 축구팀이라도 낳아서 인구증가에 기여할 것이다.
릴리안 사태 댓글에 "하라는 임신은 안하고 생리가지고 유세냐" 라는 말 있었다며. 니가 내 입장이 되어봐라 이런 땅에서 퍽이나 임신 출산하고 싶겠다 트라우마다 트라우마
아침부터 갑자기 왜 고통스런 옛날 얘길 꺼냈냐면 플텍님이 지적하신대로 지금 권력잡은 50년대 중반-60년대생 남자들이 젠더사이드 당시 부모나이대인데 그때 걔넨 대체 뭐했냐는거지 아내와 뱃속의 딸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들 엄빠말이나 들어가며 멸종을 부름
그런 남자들이 권력 잡고 탁현민 당돌하고 신선하다고 청와대 보좌관 시키고 막걸리니 호프니 하면서 탈권위가 어쩌고 하면서 젠더사이드에 대해선 입하나 찍 안열음 왜냐면 지들도 부역자거든 아내가 시댁에서 여아낙태 강요받을때 보호는 커녕 은근히 동조했거든
자기들도 지금 인과관계가 아예 눈에 안들어올 수 없거든 성비가 대놓고 이렇게 빻았는데... 근데 옛날일 괜히 찔리고 뭐 말해봐야 지들한테 좋을 일 없고 사회에서 탈락한 남성들이 그 분노를 애먼 여성한테 쏟고 있으면 ���기들은 사실 좋거든
8090년대 지금처럼 돈없어서 부모지원에 빌빌 기던 시대도 아니고 운동권도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대기업에서 모셔가던 때임... 다 대학생은 아니었겠지만 호황기였음 근데 남편들이 지들 부모가 시킨다고 아내가 멀쩡한 자식 낙태해야하는걸 보고만 있었던거지
왜냐? 지들도 지가 '대를 잇는 아들' 전하라는 자아비대증에 누이 갈아서 대학등록금내서 배우고 운동하던 똑같은 여혐 가부장제 인간들이었거든 2017년 정권잡고도 윤간은 과거의 작은 흠이라고 할 수 있는 젠더감수성의 소유자들이시거든
하여간 아까 인용트윗한 플텍님 트윗 보니까 눈이 또 딱 떠지네 브라끈을 탁 치고 갑니다 그래 그때 그 많던 애비새끼들은 다 어디갔을까,,,, 사람사는 세상을 외치며 민주당 여성의원과 여가부 장관을 욕하고 페미니스트 교사를 끌어내자고 하고 있겠지
이쯤되면 5말6초 베이비부머 남성이 8090년생 여성한테 딸같아서 어쩌구하며 수작부리면 살인면허 공식발급해줘야 하는 정도 아니냐
음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더 화난다 엄마가 나 임신했을때 22살이었거든 첫임신한 22살짜리가 뭘 알고 무슨 힘이 있겠으며 시댁에서 그렇게 덤벼드는데 도망다니느라 얼마나 무서웠겠어... 진짜 목숨걸고 낳아줘서 고맙네
새삼 복기해보니 내가 태어난건 정말 모친의 용기가 낳은 기적이고 이렇게 받은 생명인데 열심히 헬페미로 이 한몸 불살라가며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야겠다
젠더사이드 생존자 여러분 우리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가부장제 부역자들에게 엿먹이며 투쟁합시다💖🙏🖕
여러분 영업들어갑니다 페미권장도서에 <남성 과잉 사회> 꼭 들어가야합니다 모두들 읽읍시다 젠더사이드의 시작과 끝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4. 녹아내린 포롤 👻‏ @porori033  
8090젠더사이드가 어느정도였냐면 나는 손위 오빠가 하나 있음에도 여자팔자가 세다는 12간지 중 하나의동물의 해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 다 듣는데서 계집애인데 왜 안떼어버렸냐고 묻는 사람들이 꽤 있었죠 ㅋㅋ 10살정도까지 그런말 들음ㅋㅋㅋ
하도 죽여대서 그냥 애듣는데서 부모한테 자식을 왜 안죽였냐고 태연하게 물어보던 시대였다 ㅋㅋㅋ
5. JJ‏ @craftcity   여아 낙태 얘기 난 못 들어봤다라는 남자 분들 많은데 부모가 딸과 아들에게 똑같은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아들한테 너 낳으려고 누나들 생긴 거 지웠어라곤 안하지만, 딸에게 니 남동생 아니었으면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 ㅎ 란 말은 하죠
** 추가로..
몇년전부터 줄곧 얘기했던 거지만 나는 (오늘 언급이 있었던 것처럼) 다른 어떤 세대보다 50-60년대생 저 베이비붐 세대들을 증오하고, 가부장제-여혐/성차별 공화국인 한국이 여아살해로 인한 부메랑을 쳐맞아 멸종-멸망으로 이어지길 빈다.
'부역자' 같은 소리 들으면 나는 아닌데! 내 부모는 아닌데!! 광광 울 사람 많고, 실제로도 많이 봤는데,
안타깝지만 내 부모도, 당신들 부모도, 가부장제 부역자고 독재자 부역자였다. 독재자에게, 독재자 딸에게 투표 했고, 그들이 선심쓰듯 던져주는 단물 기꺼이 받아 먹으셨고, 더 나아가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가부장제와 독재, 체제에 부역하여 기득권을 누렸다. 아니라고 눈 좀 가리지 말고, 귀 좀 막지 말자. 그런다고 했던 부역자 행위가 없어지나. 인정하고, 반성하고, 동료/후세대는 이런 고통 받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노력과 실천을 해야 변화하는 거 아닌가.
젠더사이드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 없이는 이 나라는 돌이킬 수 없다.
출산율 저하가 문제라며, 인구 절벽 맞는다며? 그거 결국 국가와 기업이나 아쉬운 거지, 개인은 하나도 안 아쉽고, 특히 저 젠더사이드에 걸렸던 세대 여성들 입장에서는 비웃기기만 할 뿐이다. 위에 스크랩 중 얘기처럼 나는 이 나라에 인구 보탤 생각이 추호도 없어. 염치가 있어야지, 염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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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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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역사 제1편 <이영훈전>
전범선
조부모님을 만나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안부를 묻는 것 이상으로 대화가 진전되기 힘들다. “건강이 제일이다.” 할아버지가 매번 내게 하시는 말씀의 전부다. 그래서 시도를 해봤다. 역사가의 궁금증으로 조부모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여쭤보았다. 외할아버지는 귀가 안들리시고 친할아버지는 몸이 안좋으셔서 결국 양쪽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종합해보니 한국 근현대사의 단면이 극적으로 드러났다. 나의 외할머니 이영훈과 친할머니 박희순. 두 여인의 삶은 국사 교과서에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대통령의 업적보다도 나의 존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역사를 쓴다면 이영훈과 박희순의 이야기부터 쓰는 것이 옳다.
요컨대 할머니들의 삶은 한의 역사다. 공부도 못하고 중매결혼하고 피난 다니고 자식 많이 낳아 키우느라 고생하고 다 키우고 나니 늙어서 몸이 아프다. 여기까지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뻔한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몇 시간 동안 할머니들을 경청한 후 결론지었다. 이영훈과 박희순을 그저 “한 많은 두 여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다.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수동적이고 힘없이 살지 않았다. 가부장제라는 배에 갇혀 왜정과 해방과 전쟁과 가난의 탁류에 휩쓸렸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꾸준히 노를 저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안락하고 높은 섬에 앉아 그 탁류를 되돌아본다.
이영훈의 어머니는 유범학이었다. 그 부모가 아들이 없어서 이름을 남자처럼 지었다고 한다. 유범학은 학교는 못나왔지만 한글은 읽을 줄 알았다. 이영훈의 아버지 이창원은 호방하고 인자했다. 손녀들이 오면 발가락으로 꼬집��� 했다. 가방끈도 짧지 않았다. 의정부농업학교 1회 졸업생이라는데 내가 확인해 본 바 연도가 맞지 않는다. 어쨌든 이창원은 동네에서 꽤 배운 사람 축에 속했다. 언제나 양복을 입고 다녔다. 바이올린을 켰고 일본어를 잘했다. 그래서 잠시 교편을 잡았고 군청 공무원으로도 오래 일했다. 즉 이창원은 일제에 순응하며 그 국가제도의 하부관료로 충실히 살았다. 이영훈은 그 덕에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영훈은 팔남매 중 맏딸이었다. 여자라서 학교는 국민학교만 다녔다. 이창원이 비교적 개화한 아버지였어서 그런지 이영훈은 성격이 당차고 왈가닥스럽게 자랐다. 이창원은 해방 후에도 대부분의 친일 관료들처럼 별 탈 없이 살아갔다. 일본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호감형 성격 때문에 마을 인심을 잃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때는 교장 자리도 제안받고 그밖에 감투 쓸 기회가 몇몇 있었다. <태백산맥>의 염상진이 잡았으면 인민재판에 세운 후 총살했을 법한 인물이다. 이창원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감투를 모두 거절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창원은 가족들에게 큰소리 쳤다. “거봐라 내가 교장 해먹었으면 빨갱이들 손에 벌써 죽었을 거다.” 그는 그후 낚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따라서 이영훈이 1949년 임봉빈과 혼인할 때 즈음엔 가정 형편이 왜정 때 만큼 좋지 못했다. 그 당시 결혼의 법칙이 있었다면 여자는 주로 자신의 가문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살짝 더 낮은 가문의 남자와 짝지어진다는 것이었다. 임봉빈의 집안은 그리 지체 높지 않았다. 아버지 임영순은 광산을 다니며 장사를 했다. 정확히 무얼 팔았는지 모르겠으나 이영훈의 표현을 빌리면 “젓가락 꽂을 땅도 없었다.” 절대 양복을 입지 않았고 유교사상만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봉빈과 첫날밤을 보내게 된 이영훈이 마냥 불만에 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나는 감히 추측한다. 왜냐. 나의 외할아버지 임봉빈은 퍽 잘생긴 외모에 웃는 모습이 따뜻한 귀공자 부류의 남자였으니까.
귀공자는 연인으로서는 매력있으나 전쟁과 가난의 동반자로는 부적절할 수 있다. 임봉빈이 그랬다. 나긋나긋한 말씨와 미소는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그에 대한 짝사랑이 좌절되자 스스로 목숨을 끓은 여인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렇게 말랑말랑한 남자를 원하지 않았다. 박정희나 정주영처럼 기회를 사정없이 낚아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인물이 출세했다. 착하면 도태되었다. 임봉빈은 철도 경찰에 들어갔다가 얼마 안 되어 총기 ���발로 해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학교에 재입학해서 다시 경찰이 되었다. “사관학교나 갈 것이지 맹추같이 경찰학교는 왜 또 가!” 이영훈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임봉빈의 진로 선택이 불만이다. 임봉빈은 왜 그렇게 경찰이 되고 싶었을까?
해방공간의 경찰은 곧 동네 권력이었다. 어릴 적 임봉빈은 시정잡배들에게 얻어맞고 다녔다. 곱상하고 인기 많으니 재수 없어서 한 대 때리고 싶었나보다. 임봉빈은 경찰이 되어 꼭 복수하고 싶었다. 복수까진 아니어도 경찰이 되면 적어도 맞지는 않을 테니깐. 임봉빈은 모범 경찰이었다. 너무 훌륭한 나머지 남들 다 받는 뇌물을 요구하기는커녕 잘 받지도 못했다. 이영훈은 속이 터졌다. 어째 부부의 성격이 전통적인 성역할과 반대였다. 이영훈은 남자였으면 어떻게든 높은 자리 하나 차지했을 재목이었다. 임봉빈은 치열하게 사는 것보다 인생을 아름답게 즐기고 싶었다. 둘이 서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1950년 6월 22일, 임봉빈은 남쪽 어느 도시로 발령받아 홀로 떠났다. 이영훈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 갓난 딸을 데리고 남편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첩을 들인 상태였다. 임봉빈 입장에서도 원하는 결혼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 인기에 여자 없이 사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이영훈은 당연히 화가 났다. 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아이고 저런 영감이랑 결혼한 내가 병신이지” 또는 “내가 그때 죽었어야지” 등의 자기비하적 한탄을 입에 달고 산다. 중매결혼 내지 조혼이 그들에게 가하는 평생의 고문이다. 배우자 선택에 아무런 자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은 스스로 탓한다. 그것 말고는 다른 대응, 예를 들어 남편에 대한 반항 또는 이혼을 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53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였다. 노량진에서 용산 가는 한강철교 앞에서 이영훈, 임봉빈, 그리고 네 살배기 딸이 헌병에게 가로막혔다. 임봉빈은 경찰 신분이라 통과됐다. 하지만 이영훈은 신분증이 없어서 열차를 탈 수가 없었다. “난 여기서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할 테니까 혼자 가요.” 그랬더니 임봉빈은 진짜 갔다. 이영훈은 지금도 후회한다. “내가 그때 갈라섰어야 하는데!” 그러나 갈라서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애 딸린 여인 혼자 살기 녹록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영훈도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임봉빈이 탄 기차가 칙칙폭폭 출발할 때 이영훈은 잽싸게 열차 꽁무니에 매달렸다. 아기를 등에 업은 채. 당황한 헌병은 이영훈의 다리를 붙잡고 같이 열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상태로 한강철교를 건넜다. 아낙네 하나 못 건너게 하려고 한강에 빠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영훈은 여걸이었다.
1962년 이영훈은 다섯째 딸을 낳았다. 그게 우리 엄마다. 그후 아들 보려고 한 번 더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결국 딸만 여섯이다. 이영훈은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임봉빈의 어머니 심사랑은 언문도 깨치지 못하고 지아비를 섬기기만 했다. 맏며느리 이영훈이 아들을 ���낳는 게 심히 못마땅했을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시아버지 임영순이 첩을 얻어서 지금의 춘천 소양강댐 쪽에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그 첩이 이영훈보다 딱 두 살 많았다. 그것도 모자라 임영순은 며느리 이영훈에게 돈을 좀 보내라 했다. 싫다 했더니 “내 아들이 번 돈을 왜 네가 안 주냐”고 호통했다. 결국 이영훈은 소양강에 찾아가서 한바탕 했다. 그 첩은 곧 술을 많이 먹어서인지 죽었고, 본처 심사랑은 십년 넘게 중풍을 앓다 갔다. 임영순 본인은 장수했다.
임봉빈은 파주 파출소장까지 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도 했다. 독재자들에게 훈장이랑 표창장은 많이 받았으나 여전히 뒷돈은 챙길 줄 몰랐다. 그래도 한동안 밥 굶을 걱정은 없었다. 이영훈은 이승만 때는 자유당, 박정희 때는 공화당 선거운동에 열렬히 앞장섰다. 이후락이 먼 친척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죽을 때 쯤 임봉빈은 경찰에서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었다. 이영훈이 잡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인형 눈알도 박았다.
이영훈은 1980년 처음 교회를 찾아갔다. 순복음교회였는데 종파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평생 거슬리기만 하던 교회 종소리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이 어딨어. 하나님 없었으면 난 벌써 자살했을 거야.” 교회는 여성들도 나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기독교 집단도 남성 중심적이었지만, 유교적, 군국주의적 사회를 살아온 여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곳이었다. 이영훈은 곧 임봉빈도 교회에 데려갔다. 나의 외가는 지금도 대부분 개신교도다.
교회는 위안이었다. 그러나 가난을 해결해주진 않았다. 딸부자집에서 밥숟가락을 줄이는 방법은 시집 보내기였다. 그리하여 이영훈은 1983년 지금의 롯데백화점 청량리점 자리에 있었던 대왕코너 6층 브라운호텔 커피숍에서 한 또래 여인과 역사적 만남을 갖는다. 대학동기로 갓 연애를 시작했던 나의 부모는 조용히 옆에 앉아있었다. 이영훈은 나의 친할머니 박희순과 일사천리로 혼인에 합의했다. 아빠 말로는 “우린 가만히 있는데 자기들끼리 죽이 척척 맞아서 맘대로 날짜를 잡았다.” 박희순은 춘천의 유지였다. 집 마당에 사슴이 있었다. 그러나 박희순이 항상 돈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이영훈이 비운의 여장부였다면 박희순은 운과 꾀를 겸비한 사업가였다. 판잣집에서 시작해서 사백 평짜리 기와집을 산 여자였다.
(제2편 <박희순전>에서 계속)
할머니 역사 제2편 <박희순전>
전범선
박희순은 나의 조부모 중 가장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아버지 박이용은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적극 협력한 군수업자였다. 군량 조달을 했다. 대전에 이층짜리 양옥집이 있었다. 박이용의 친일은 뛰어난 상업적 수완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그 혜택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뛰어���었다. 박희순은 중학교 시절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려 했다. 일본에서 공부를 시켜준다거나 월급을 후하게 준다는 꼬임에 넘어간 또래 친구들이 숱하게 많았다. 박희순도 그대로 갔으면 험한 꼴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안부로 끌려갔을 수도 있다. 그랬으면 난 없다. 그걸 막은 게 바로 박희순의 어머니 송인분이다.
그렇다. 이름이 인분이라니! 당시 딸 이름 짓기를 얼마나 똥같이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송인분은 박희순의 학교를 찾아가서 “이 년이 미쳤다고 거길 따라가냐”고 말렸다. 남편이 일본군과 장사를 하는데 정신대가 뭔지 모를 턱이 없었다. 결국 정신대에 간 사람은 1) 그게 뭔지 몰랐거나 2) 알아도 너무 가난해서 차라리 가는 게 나았거나 3)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박희순은 부모가 일제에 빌붙어 영리하게 살았기 때문에 재앙을 모면했다. 정신대에 간 친구들을 박희순은 영영 다시 보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박이용의 부는 한동안 지속됐다. 친한 일본인이 도망가면서 토요타 트럭 두 대를 줬다. 적산 가옥도 챙겼다. 일본군에 납품하던 것을 이제 교도소에 했다. 흔히들 친일파 청산 실패를 논할 때 “일제 때 독립투사 잡아 고문하던 놈들이 해방 후 빨갱이 죽이는 ‘애국지사’로 변신했다”고 분개한다. 박이용은 직접 그러진 않았지만 그런 이들에게 남새와 곡식을 팔았다. 하지만 교도소 장사도 한국전쟁을 전후로 점차 기울었고 박희순의 집안은 일제 때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박희순은 1947년 전만영과 결혼했다. 이영훈처럼 박희순도 맏딸이었다. 부잣집 맏딸이 시집가면 돈이 샌다고 박이용은 데릴사위를 원했다. 그래서 데려온 게 대전 ‘동일여관’에서 ‘조바’蜉보던 전만영이다. 전만영은 나의 조부모 중 가장 어렵게 컸다. 그의 부모 전제선과 김갑순은 일찍이 세상을 떴다. 전만영은 국민학교만 나왔다. 수십리를 걸어서 등하교했다. 그래도 영특해서 학급회장까지 했다. 일본인 교장 덕에 경북 상주 대표로 뽑혀서 일본 구경을 하고 온 것은 지금도 자랑거리다. 물론 가서 신사 참배도 했을 것이다. 그때가 전만영 십대의 전성기였다. 그 후론 뼈 빠지게 일만 했다. 평양에서 방직공장 일 좀 하다가 열여덟 살 때 만주로 갔다.
일제시대 후반 조선의 무산계급에게 만주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소작농, 도시빈민, 화전민이 되기 싫으면 간도로 가야했다. 전만영은 일제가 만주국 안산에 건설한 대규모 제철단지에서 일했다. 광부는 아니었고 공장일을 했다. 미 공군 B-29기가 안산을 폭격하던 1944년까지도 전만영은 방공호를 전전하며 계속 일했다. 그래도 수입은 괜찮았다. “면장도 100원 벌 때 120원 벌었다.” 해방 직전 고향에 돌아올 때는 그 큰 돈뭉치를 혹 군경에게 뺏길까봐 속옷에 넣어왔다. 그러나 정작 돈을 빼앗아간 건 큰 형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큰 형은 절대 ���력자였고 전만영은 개인 재��� 불리기가 쉽지 않았다. 박희순과 결혼할 때도 전만영은 여전히 무산자였다. 이영훈이 임봉빈 집안은 “젓가락 꽂을 땅도 없었다”며 자신의 혼전 경제적 우월성을 기억하듯 박희순도 그 점을 절대 잊지 않았다. 데릴사위였다. 데릴사위. 나의 할머니들이 지금껏 할아버지들에게 갖고 있는 불만, 즉 평생의 한은 바로 이 우월감에서 비롯된 억울함이다. “내가 왜 이런 남자랑 결혼해서 그 고생을 했나.” 사실 우리 할머니 세대는 어떤 남자랑 결혼을 했어도 고생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그 배우자를 자신의 부모가 단순한 경제적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점은 억울함을 가중시켰다. 어린 박희순은 결혼하기 싫다고 도망가다가 어머니 송인분에게 잡혀 “쎄 빠지게 맞았다.”
박희순의 아버지 박이용은 전만영의 착실함이 마음에 들었다. 장인과 사위 간의 관계도 좋았다. 그러나 전만영의 대전 처가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징병되었기 때문이다. 전만영은 원주 제6보병사단에 배치되었다. 부대마크 때문에 청성부대라고도 불리는 6사단은 춘천을 방어했다.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밀리지 않은 유일한 국군부대다. 그러나 희생은 엄청났다. 전만영 말로는 “다 죽고 나만 살았다.” 왜? 전만영은 보급병이라 후방에 있었다. 그가 보급병으로 뽑힌 이유는 단순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그 밖에 없었다. 수십리 걸어서 국민학교 다닌 노력이 목숨을 살렸다. 내 조부모 중 전만영이 가장 어렵게 자랐다고 했지만, 전우들에 비해서 그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청성부대는 압록강 물도 가장 먼저 떠다 이승만에게 바쳤다. 그러나 결국 다시 밀려 내려와 휴전선 중부 지역에 머물렀다. 대전 처가에서 첫 아들을 낳고 생활하던 박희순은 남편을 찾아 직접 강원도로 가기로 결심했다. 원주와 춘천 중 고민하다가 대전서 알던 어떤 이가 마침 춘천으로 이사갔길래 따라갔다. 갓난 아기 데리고 빈 몸으로 주소 하나 딸랑 들고 고향을 떴다. 이영훈이 전쟁통에 임봉빈을 찾아 떠났던 것처럼. 그리하여 박희순은 춘천 땅에 둥지를 틀었고 전만영도 제대 후 춘천에 살게 되었다. 내 고향이 그래서 춘천이다.
처음에 박희순은 판잣집에 살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학교에서 배운 미용 기술 밖에 없었다. 자격증이 있어서 일단 미장원 일을 시작했다. 전만영은 땔감 장사를 했다. 그럭저럭 살았다. 박희순이 그러다 처음 재미를 본 사업은 구멍가게였다. 가게 자체는 그냥 시장 골목에 있어서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박희순은 아버지 박이용을 보고 배운 게 있었다. 사업을 하려면 권력과 친해야 한다. 박이용 시대 한반도 최고 권력이 일본군이었다면 박희순 시대에는 미군이었다. 박이용은 일본군에게 군량을 조달하며 돈을 벌었지만 박희순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자투리 군량을 팔아 이득을 챙겼다. 춘천 캠프 페이지에 출입하는 국군 장교들과 친해진 후 모종의 계약을 맺고 미 군량 및 용품을 공급 받기로 한 것이다. 그 장교들이 물건을 어떻게 구해오는지는 묻지 않았다. 가장 잘 팔리는 건 건빵이었다. 박희순은 훔친 미군 건빵 팔아서 모은 돈으로 곧 소양로에 마당 딸린 집을 샀다. 마당에서는 질 좋은 미군 짬밥으로 돼지도 키웠다.
박희순은 1960년 그 집에서 넷째이자 막내 아들을 낳았다. 그게 우리 아빠다. 이영훈은 아들 낳으려다가 딸만 여섯 낳았는데 박희순은 딸 낳으려다 아들만 넷 낳았다. 아빠는 배고픔 모르고 자랐다. 박희순의 사업도 막내 아들 키 크듯이 무럭무럭 번창하다가 곧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바로 ‘동일문구사’ 개업이다.
동일문구사는 박희순, 전만영 부부의 최대 업적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들은 춘천 바닥에서 ‘동일문구사집’으로 통했다. 자, 춘천에 가면 명동이란 곳이 있다. 서울 명동의 축소판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말이 ‘동’이지 거의 그냥 골목길 하나다. 그래도 강원도에서는 제일 번화가다. 그런 명동에서도 가장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법원 앞 교차로 건물에 떡하니 가게를 연 것이다. 땅값이 한 때 강원도 최고였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명당자리를 얻게 된 사연이 퍽 기괴하다.
박희순은 당시 춘천 시내 재력가 부인들과 촘촘한 인맥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변호사집, 의사집, 빵집, 양복집 등등. 그 중 한 명이 어느날 박희순을 찾아와 아주 좋은 자리가 나왔다고 귀띔해줬다. 원래 거기서 장사하던 사람한테 쪼그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가게 앞에서 놀다가 지나가던 미군 차량에 치어서 “모가지가 똑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서는 문 앞에 섰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부모가 아들이 죽은 자리에서 계속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에게는 엄청난 불행이었지만 박희순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만영이 대전에서 일했던 여관 이름을 따서 ‘동일문구사’ 간판을 내걸었다. 벽지랑 장판도 팔았다. ‘비니루 장판’이 특히 불티나게 팔렸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동일문구사는 그 자리에서 명동 상권을 풍미했다.
서울 여자인 우리 엄마가 춘천 남자인 우리 아빠를 인천의 대학에서 만나서 처음 춘천으로 놀러왔던 1980년. 박희순은 이미 은퇴 후 춘천 외곽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배고플 일은 이제 없었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전만영은 소양강에 낚시를 다녔고 박희순은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박희순이 다니던 죽림동 성당은 춘천의 대표 건축물이다. 1950년 9월 23일 춘천을 맹폭격하던 미 공군도 효자동의 민간인들은 죽였지만 엄연히 십자가 달린 성당 건물은 놔뒀다. 판잣집 살던 시절 박희순은 옆집 여자가 하도 개신교회에 나가자고 꼬시자 귀찮아서 “저는 가도 큰집에 가지 작은집에는 안 가요”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고는 진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곧 전만영도 데려갔다. 지금도 나의 친가는 대부분 천주교도다.
1983년 10월 23일. 죽림동 성당에서 이영훈과 임봉빈, 박희순과 전만영이 나란히 앉았다. 그날 탄생한 부부가 팔년 뒤 낳은 아들이 나다. 내가 태어난 세상은 나의 조부모님이 태어나신 세상과 매우 달랐다. 1991년 대한민국은 문제가 많았지만 1920년대 일본제국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의 조부모님은 이십대 중반에 한국전쟁을 겪으셨다. 스물다섯살인 나는 지금 에스프레소를 ��시면서 글이나 쓰고 앉아 있다.
이영훈과 박희순. 그들은 가장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가사노동을 전담했고 군인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멀리 피난가야 했다. 그들은 절대 ‘집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집 밖에서 생계 유지의 선봉에 서는 일도 많았다. 애를 몇 명 낳을지도 결국 그들이 결정했고, 종교활동도 그들이 먼저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비록 남자가 주인인 사회에 살아야 했지만 당신들 삶의 항해에서 절대 키를 놓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러한 세상에 태어났는가? 모든 역사가의 근본적 질문이다. 나도 그게 궁금해서 여지껏 역사를 공부해왔다. 그러다보니 영국 옥스퍼드까지 가서 18세기 서양정치철학사를 연구했다. 너무 멀리 갔나? 더 멀리 가기 전에 나는 할머니 역사부터 쓰고 싶었다. 나는 왜 이러한 세상에 태어났는가? 글쎄, 무한히 복잡 다단한 답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이렇다.
할머니 덕분이다.
(2015년 1월 12일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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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ssuecollecto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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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딸 집단성폭행 당해...엄벌 호소" 청원 동의 20만 명 돌파 / YTN
“중학생 딸 집단성폭행 당해…엄벌 호소” 청원 동의 20만 명 돌파 / YTN
중학생 딸이 또래 남학생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며 엄벌을 호소하는 피해자 어머니의 청와대 국민청원 글에 20만 명 이상이 동의해 정부의 답변 요건을 충족했습니다.
청원인은 해당 남학생들이 술을 먹여 딸을 기절시킨 뒤 CCTV가 없는 곳으로 끌고 가 성폭행했고 이로 인해 딸이 정형외과 전치 3주, 산부인과 전치 2주 진단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남학생들로부터 2차 가해를 당해 딸이 자해까지 한 데 이어 사건이 소문나면서 가족들은 이사하고 딸은 전학을 가야 했다며 남학생들에 대한 엄벌을 호소했습니다.
그제(29일) 올라온 이 국민청원은 오늘(31일) 오전 9시 기준 20만이 넘는 동의를 받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인천시교육청은 지난 1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열어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남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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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gakidsclub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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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천재’라 극찬받고 있는 김희선 ‘9살’ 딸이 그린 그림 Instagram 'lovely.katie.k'[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엄마' 김희선이 딸아이가 그린 그림을 공개했다. 지난달 4일 배우 김희선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연아 작품"이라는 코멘트와 함께 사진 한 장을 게재했다. 코멘트 아래로는 '#미술 전시회' 등의 해시태그도 덧붙였다. 공개된 사진에는 현재 한 미술 갤러리에 전시돼있는 김희선의 딸 박연아 양이 직접 그린 그림이 담겼다.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들이 뛰노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김희선은 과거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딸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며 "화가가 꿈"이라... 동영상은 콘텐츠 기반 저작권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합법적 인 사용을 포함합니다. 공정 사용(https://www.youtube.com/yt/copyright/) 다른 전자 신문 페이지와 파트너가되어 매우 기쁩니다.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보고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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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mix1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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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d on YouTube: [MV] Puer Kim(퓨어킴) _ A daughter of your age(딸 또래) (LISTEN 008) https://youtu.be/DyBPswnmn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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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howtomeetinfo-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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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On the road-카오산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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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오늘은 학교에서 방과후를 하는데, 35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에 전력 부족으로 에어컨이 나가더니 그나마 있던 선풍기 마저 나가버렸다. 모두들 수업이 아니라 부채 부치기에 열을 올리고 짝과 팔만 닿아도 짜증을 내게 되는 찜통더위 속에서 효율적인 수업이 진행 될 수 있을리 없었다.
   방학이랍시고 1달 겨우 준 걸 또 매일매일 3시까지 방과후를 하는 우리나라 썩은 교육에서 다른나라로 탈출해버리고픈 마음이 온도와
함께 마구마구 치솟았다. 그래도 정말로 탈출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숙사에 도착해서 침대에 누워 탈출의 기분을 마음껏 대리만족 할 수 있는 책을 찾아 읽었다.
  On the road, 말 그대로 길에서, 배낭여행자들의 메카라는 별명을 가진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나는 여행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온 것 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가면, 많은 돈이 들더라도 꼭 프랑스나 영국 쪽처럼 세련되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세느 강변의 노천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거나 여행사 패키지 투어 같은 것으로
멋진 대성당 같은 유적지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들. 그런 다음에는 직장에 취직해서 안정된 삶을 살아야지. 뭐 이런 생각?
   하지만 이 책을 읽고, 한 번 밖에 없는 ‘내인생’이  뭐 하나 특별 할 것 없이 다른 사람들 누구나 거치는 인생길대로, 매일 매일이 틀에 박힌 지루한 일상인 채로 살아가게 된다면 어떡하지? 하는 위기의식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부모님 말씀대로, 주의 어른들 말씀대로 그런 삶이 안정된 삶이니까, 위험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에 의문 따위 가지질 못햇다. 그건 내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나뿐 아니라 내 또래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날 아침 머리를 감다 갑자기 깨닫고 회사를 둘다 그만 두고  퇴직금과 저축한 돈을 모두 털어서 세계배낭 여행을 준비하고, 지금 현재는 카오산 로드에 와있다는 심재동 , 임정희 부부는 참 대단하지 않나. 누구나 그렇게 생각 할 수는 있어도 익숙한 한국 사회를 떠나 다른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결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은 갔다와서 한국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주변 사람들의 시선, 돈 걱정 모두 뒤로 하고 자신들이 모르는 자신을 찾으러 떠났다.
   이들에게서 배운 것이 있다면 나도 이젠 걱정만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하나 뿐인 인생, 좀 불안정하면 어떤가? 걱정하기 시작하면 그 걱정에 다른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제어 할 수 없어지는 것 같다.  대한 민국 사회에서 이미 엄마의 딸,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선생님의 제자, 누군가의 친구로서 이미 귀속되어 있는 ‘나’에서 벗어나서, 나도 배낭 여행을 해보면서 무엇에도 국한되어 있지 않은 나를 찾아, 나의 본모습을 찾아보고 싶다. 이 책에서 소개한  ‘여자 혼자라서 힘든 건 없다 (문윤경)’, ‘학교를 자퇴하고 인도로 간 여고생'(이산하)처럼.
  또 이 책은 여행이란게 생각만큼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고 꼼꼼한 계획도 필요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게 해 준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많은 장기 여행자들. 나도 언젠가 그렇게 생활 할 것이다.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은, 속이 답답한 누군가에게 추천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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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shotme-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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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주 Perth에서 Patty드림-일주일을 무사히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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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주 Perth에서 Patty드림-일주일을 무사히 마치며
    서호주 Perth에서 Patty드림-일주일을 무사히 마치며
안녕하세요?
드디어 인터넷이 연결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어느 정도 현지 실정에 익숙해져서 인터넷 없는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만 부모님들과 FINNER들은 긴 메일을 읽거나 보내지 못해 며칠 답답했을 겁니다 ^^;; 하지만 안셈프 선생님의 선견지명으로 아이폰으로 실시간 사진을 종종 보여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것도 어떤 지역에서는 사진 한 장 업로드 하는 데 몇 분 정도가 걸리고 어떤 곳에서는 아예 아이폰도 먹통이 되더군요^^;; 저라면 아이폰을 몇 번 던졌을 것 같은데 무한한 끈기로 지난 FIN TRIP보다 많은 사진을 올려주신 안셈프샘에게 박수보내주셔요~~~
해외에 나와보면 얼마나 우리나라의 인터넷 통신 기술이 발달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그건 기술도 기술이지만 나라의 크기 때문인듯 합니다. 호주의 크기는 남북한 크기를 합하면 35배, 우리나라 대한민국만 고려하면 60배 정도로 큰 면적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땅에 인터넷 광케이블을 깔 수 없는 건 당연한 거겠죠?
다행이 우리 옆집에 사는 Mr. and Mrs. Warn네가 인터넷 connection을 가지고 있어 공유를 허락해 주신 덕분에 오늘부터 한정된 사용량에 한해 간단한 메일 확인 및 글쓰기, 사진 업로드 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한 달에 일정 금액을 내면 인터넷 사용이 무제한 인데 반해 세계 여러나라에서는 인터넷 종량제라는 게 있어 사용하는 양에 따라 인터넷 요금이 달라 지는데 호주도 그런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저희를 믿고 인터넷 공유를 허락해주신 옆집 이웃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난 게시판에서 읽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첫 주가 저희 선생님들에겐 가장 바쁜 주입니다. 어린 FINNER들 밤에 엄마 보고 싶다고 울죠, 공부할 것 많다고 투덜거리죠, 호주에는 왜 김치가 없냐고 난리죠, 온돌 방이 아니라 밤엔 춥다고 하죠, 한 낮엔 덥다고 옷 안챙기고 나가선 오후에 바람불면 춥다고 하죠…빵인 주식인 나라에서 밥만 먹고싶다고 하죠…한 FINNER는 호주에 왔으면 호주의 상징인 울루루 바위산엔 꼭 가봐야 하는데 언제 갈거냐고 난리죠, 사실 울루루는 비행기 타고도 한 참이나 가야하고 퍼스에서는 3600km나 떨어져 있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km정도인 걸 생각하시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상상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어쨌든 이제 힘든 첫 주가 거의 지나가고 FINNER들을 태운 배는 순항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밤에 우는 FINNER도 이제는 없고, 김치는 한국이 아니라 모든 재료를 다 넣지는 못했지만 나름 열심히 담궈서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먹을 수 있구요, 처음으로 우리나라와는 아주 많은 것이 다른 호주라는 큰 나라에 온 FINNER들도 현지 생활에 차츰 적응하고 있습니다. 밤과 낮의 기온 차가 제법 많아 밤에 춥다고 하던 FINNER들도 집주인이 여유분으로 충분히 갖다준 담요와 이불 덕분에 밤잠 설치지 않고 잘 자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달고 온 감기 증상 때문인지 꽤 차이나는 일교차 때문인지 가끔씩 기침을 하거나 코가 막힌다던 아이들도 약 좀 먹고 일찍 재우니 모두 좋아졌네요.
처음엔 잔디에 앉기도 꺼려하던 전형적인 도시 아가씨 Annie(나영)가 오늘은 처음으로 바닷가에서 모래를 만지고 호주의 또래 친구들과 모래성을 쌓으며 즐거워 했구요, 한국에서 데리고 왔던 감기도 며칠 약 챙겨 먹고 푹 자서 나았습니다.
처음엔 약간 낯을 가리던 Brian(현명)과 Thomas(경호)는 어느새 단짝이 되어 서로 도와주고 장난도 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둘 다 아주 부드럽고 차분한 성격이라 여자 동생들하고 같이 공기도 스스럼없이 잘 하고 스포츠를 좋아해 남자끼리는 쉬는 시간만 되면 뒷마당에서 축구를 즐긴답니다. 딸 가진 부모님들!! 제가 보증할테니 사윗감으로 점찍어 주셔요^^ 벌써 기~~인 줄이 보이는 듯 합니다*^^*
5학년인 네 소녀(Anna수연, Cindy나형, Lisa소연, Annie나영)는 공부하는 책은 조금 다르지만 여러 면에서 서로 선의의 경쟁도 하고 어느 한 명이 주어진 과제를 힘겨워 하면 사총사로 합체하여 힘을 합칩답니다. 저마다 개성은 다르지만 함께 어울려 사이좋게 노는 걸 보면 절로 마음이 뿌듯해 진답니다. 이 아이들이 평생을 가져갈 수 있는 소중하고 예쁜 추억 이곳에서 많이 만들 수 있게 노력해야겠습니다.
같은 5학년이지만 다소 몸집이 작아 나이 보다 한 두살은 더 어려보이는 Jack(정렬)은 특유의 귀여운 말투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모두에게 인기만점입니다. Jack은 작은 거인처럼 할 일도 늘 열심히 하고 축구를 할 때는 어떤 형들에게도 지지않죠^^
영어 실력으로보나 정신연령으로 보나 비슷한 중학생 언니들인 Christine(한솔)과 Alice(현주)는 영어 실력을 겨루는 엑티비티를 할 때면 늘 팀 리더가 되어 팀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입니다. 어린 FINNER들에게는 늘 우러러보이는 대상인 셈이죠. 하지만 이 둘도 실력은 실력이지만 아직은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 소녀들이라 엄마, 아빠 말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히고 가끔은 별 것도 아닌 말에 삐치기도 한답니다. 며칠 전 빅토리아 선생님이 호주인들이 즐겨 먹는 구운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요리해 주셨는데요, 요리 기구에 빵이 두 세트씩 밖에 들어가지 못해 누구는 먼저 식사를 해야하고 나머지는 숙제를 하며 기다려야 했는데요, 제가 어린 FINNER들에게 먼저 주자 그날 일기에 “I thought Patty likes the younger FINNERS”-라고 썼더군요^^;; 해석을 굳이 하자면 패티는 어린 FINNER들은 더 좋아하는 것 같다…뭐 이정도? 하하하
이번 FINNER들의 큰 형, 큰 오빠인 Jimmy(화성)은 영어실력은 학년에 비해 다소 부족하지만 늘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특유의 유머와 남을 배려하는 성격으로 모든 FINNER들을 웃게 만들고 단합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주고 있어  FIN TRIP을 이끌어가는 선생님 모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간단히 쓴 것처럼 아이들은 점점 도시 생활에 길들여져 멀어졌던 자연과 친해지고 있고, 새로운 문화에 자신을 적응 시키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하루하루 세상의 다양성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어느 한 순간 마법 처럼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들이죠…매일매일 파도에 부딪치며 가끔은 아파하고 아쉬워하고 놀라고 신기해하고 깨달아가면서, 맑고 하얗게 자신을 빛내는 이곳 바닷가의 모���알처럼 아이들은 부쩍 자란 모습으로 부모님들을 찾아갈 것입니다.
내일은 월요일로 새로운 주가 시작되겠네요. 내일부터 또 한 분의 선생님이신 Kate선생님이 합류하실 거구요, 수업은 점점 난이도 있어지고 수업량도 많아질 거예요. 워밍업을 했으니 가속도를 좀 붙여야겠죠? 8월엔 학교에도 가야하고 먼 길 나들이가 많아질 거라 할 수있을 때 학습량을 늘일 계획입니다. 영어만 써야하는 English Time도 점점 더 늘이고 한국어에 대한 규제도 조금씩 많아 질 겁니다. 하지만 이번 FINNER들은 어느 때보다 성실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나 별 무리없이 잘 따라줄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께서는 지금처럼 꾸준히 믿음의 눈으로 저희 선생님들과 FINNER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세요. 저희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늘 안전하고 즐거운 캠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열 명의 엄마 역할과 선생님 역할을 함께 해야 해서 올려주시는 글은 모두 읽겠지만 자주 글 쓰거나 덧글 답변 못 올리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더운 여름 건강히 보내시길 바라면서 이만 줄일게요.
서호주 Perth에서 Patty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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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bridblogsco-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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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45. 아빠와 딸의 나들이 (중남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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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45. 아빠와 딸의 나들이 (중남미문화원)
주말 중 하루는 딸과 단둘이 보내려고 한다.
아내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우리는 우리만의 추억을 만든다.
토요일 11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중남미문화원으로 향했다.
  아빠는 운전석에,
조수석은 비어있고,
운전석 뒷자리 카시트에 자리 잡은 딸,
차안은 뽀로로 노래와 동요로 가득찼다.
  도착했다.
출입구가 보이는 곳에 하루가 섰다.
인증샷을 찍으려는 찰나 하루가 넘어졌다.
무릎에 상처가 났다.
인증샷이 뭐라고, 사진으로 포기하고 하루를 안았다.
  성인 입장료는 오천오백 원.
“만천 원 입니다.”
“네? 왜요?”
“삼십육 개월까지 아이는 무료고, 아! 성인은 혼자세요?”
“네.”
아빠와 딸 둘이 오는게 많지는 않은가보다.
            중남미문화원의 이복형 원장은 30년 외교관 생활 대부분을 중남미에서 보냈다.
그의 아내는 원장과 함께 문화원 설립을 주도했다.
  출입구에서 전면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향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천정에 난 창으로 따스한 햇빛이 들어왔다.
천정 중앙에는 태양 모양의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각 전시실에는 주제에 맞는 작품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전면에 문화원 내부 직원들이 사용하는 연구소가 보였다.
연구소 우측에 자리한 미술관으로 향했다.
    정원은 잘 정돈되어 있다.
중남미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도 곳곳에 자리한다.
미술관은 1층에 미술 작품과 기념품 판매점이 있고, 지하층에 다양한 의복이 전시되어 있다.
  ​
  미술관을 나와 조각공원 쪽으로 향했다.
원형 조형물을 기준으로 나무가 우거져 그늘진 왼쪽 길을 택했다.
조형물을 지나치며 미지의 문명 세계로 진입하는 상상도 해본다.
  벤치에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하루는 건너편에 앉은 언니를 바라본다.
어린이집을 다니며 또래 친구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물론, 아빠를 닮아 여전히 낯을 가린다.
건너편 가족은 아빠, 엄마, 딸 세가족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왔고, 둘러보는 속도도 비슷해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함께 하고 있다.
    종교 전시관에서 그들이 나오고 우리는 들어갔다.
입구 앞에 있는 게시판에는 중남미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야기가 적혀있다.
안에서는 성당에서 들릴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자연광이 어울려 성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하루를 안고 마음속으로 그분께 인사했다.
    그늘은 선선했지만, 햇볕은 여전히 따가웠다.
하루는 눈이 부시다며, 계속 안아 달라고 했다.
팔과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땀이 났다. 역시, 아이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중��하다.
공원의 가장 안쪽, 널찍한 공간에는 마야벽화가 자리하고 있다.
      늦은 아침을 먹어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한 시가 넘어가며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멕시코 음식을 하는 매장이 있어 들러보기로 했다.
하루는 음식을 잘 가린다. 까다롭다. 안 먹어본걸 잘 먹지 않는다.
‘컨디션도 좋고, 기분도 좋아 보이는데, 좀 먹어줄까?’
기대반 걱정반으로 잘게 자른 음식을 건냈다.
하루가 질문없이 한입 베어 물었다.
잠시후 다시 시도했다.
“이거 싫어. 이거 뭐에요?”
“이거 봐봐. 안에 고기도 들었어.”
“이거 싫어. 고기만 주세요.”
밀가루 전병 안에는 소고기, 구운 양파, 치즈가 가득하다.
구운 양파가 맘에 들지 않단다.
고기와 치즈를 골라 하루 입에 넣어주고, 밀가루 전병, 남은 치즈, 구운 양파를 내 입에 넣었다.
맛은 괜찮았다.
  하루의 낮잠 시간이 오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하루가 스르르 잠에 들면 좋겠다.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오늘 딸은 최상의 컨디션이다.
차안은 뽀로로 노래와 동요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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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shotinfo-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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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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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셨나요.
결혼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셨나요.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하여 살아가고 있어요.
​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독신을 고집하고 혼자만의 삶을 영위하는것 같아요.
​ 난 오늘도 내 삶이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사는지
​ 의구심이 생기네요.
10대를 멋모르고 살았고, 20대는 나의 방황의 시작이었어요.
​ 나의 유년기 시절에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성장하였어요.
​ 할머니는 젊으실 때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 청상과부로 사셨어요.
  할머니는 저의 아버지 형제 오 형제를 힘겹게 키우셨어요.
​ 그래서 너무 세파에 힘드셨는지 아니면 한이 많이 있으신지
​ 담배와 술(막걸리)에 의지하면서 사셨어요.
​ 저는 유년기 시절 할머니랑 같이 방을 사용했는데…
​ 할머니의 담배연기로 인해 옷에 항상 담배 냄새가 배어있어서
​ 또래 친구들이 저보고 담배 피우냐고 가끔 놀림을 당하기도
​ 하였어요.
아버지는 재정적으로 무책임한 가장이셨고 아버지 의 자리를 엄마가 메꾸면서
​ 엄마는 쉬지도 못하시고 고생하면서 오 남매를 키우시면서 사신 것 같아요.
​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결혼하여 아들, 딸을 낳아
​ 자식을 금지옥엽처럼 키우는 것 같아요.
​ 저 또한 결혼하여 딸(유나)를 낳아서 보니
​ 꽃보다 아름다워서 가끔 자는 모습을 한참 들여다
​ 보면서 제가 낳은 유나가 점점 키도 크고 몸무게도
​ 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나 자신 스스로
​ 대견하면서 뿌듯하네요.
요즘 나의 일상은  일을 시작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네요.
​ 그러나 제 인생을 포기할 수도 없어요.
​ 나이 들어서 유나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
​ 열심히 살고 싶은 심정이네요.
벌써 결혼생활 10년이 넘어가면서 서로 간에
​ 볼 것, 안 볼 것 다 보이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 저는 너무 솔직해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도
​ 말을 하여 남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네요.
​ 점점 나이가 들면서 남편 말이 맞는 것 같기도하네요.
솔직하면 사람이 진실하게 느껴질 수
​ 있지만, 너무 속속들이 얘기할 필요는 없는 것
​ 같아요.
  결혼해서 서로 맞추고 살다 보니 점점 제 성격도
​ 변하겠지만, 본질적인 제 성격도 아직 그대로인 것같아요.
아직도 남편은 별 얘기를 다한다고 생각할 것같아요.
하지만, 성격이 완전히 변하지는 않잖아요.
​ 서로 참고 견디며 인내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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