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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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
*구경
나는 이런 저런 구경을 하는 일들이 재밌다.
사람도 구경하고 사람을 졸졸 따라가는 강아지���도 귀엽다.
옅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꽃풀도 더러 화를 내는 사람들도 그저 웃기고 즐겁다.
종종 창밖의 바쁜 사람들을 보면서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곤 했다.
그러다 가끔 나만 외로이 여기에 있는 것이 우습고 고까운 감정이 들어서 슬픈 기분이 들곤 한다.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낮에 소파에 앉아 바깥을 구경하고 있으면 퍽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외로워서인 것 같다.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나를 구경하기에 알맞은 사람으로 꾸며내기 급급해진다.
껍데기가 중요해진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은 더 믿을 길이 없어진다. 소박한 행복도 희끗해져간다.
그저 구경하던 것들을 즐거워했던 날들을 지나보내고 이제 재미없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재밌나보다. 이런 저런 구경하는 일이 내 것이 아님을 알아서.
-Ram
*구경
가족여행 두 번째 날엔 전날 새벽까지 먹은 술이 남긴 숙취를 이겨내기 위해 짬뽕을 먹으러 갔다. 마침 차이나타운 주변에 맛집이라고 하는 중국집이 있길래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변 중국집들은 휑한데 이 중국집은 넓은 공간에 사람이 꽉 들어차있었다. 6명이라고 하니 직원분이 커다란 회전 원탁이 놓인 독립된 룸으로 안내해 줬다. 오, 이제 우리 가족이 4명에서 6명으로 늘어나버려서 다인원이라 이런 독방을 차지할 수도 있구나 싶은 기분과 함께 동그랗게 모여앉아 돌아가면서 진지하게 메뉴판을 정독했다. 일단 짬뽕은 기본이고, 중화냉면에, 탕수육에 그 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황두면, 매운빨간짜장을 주문했다. '어제의 숙취만 아니었다면, 또는 여행 첫날이었다면 당장 연태고량주에 맥주를 주문하고 여러 메뉴들을 더 추가했겠지'라고 말하며 웃고 떠들자 주문한 음식들이 금방 서빙됐고 한 사람 앞에 앞접시 두 개씩 놓고 여러 메뉴들을 쉐어해서 먹었다. 두반장 베이스의 빨간 짜장은 모두를 아리송하게 했고, 내가 주문한 냉면은 그런 메뉴는 처음 본다는 엄마아빠를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맛있었던 황두면은 말레이시아의 차이니즈 음식들을 떠오르게 했다. 후루룩후루룩 여기저기 면을 흡입하는 소리들이 이어지고 두툼하게 썰려 나온 탕수육을 열심히 먹고 나니 어느새 빈 그릇들만 덩그러니. 슬슬 소화시킬 겸 신포시장을 구경할까 하다가 먼저 카페에 가자는 의견이 더 많아서 주변 카페를 검색해 보니 편집샵이 있는 카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동생과 나는 그런 굿즈들, 문구들 등등 뭐라도 파는 편집샵, 카페 이런 곳들에 환장하기에 둘이 팔짱 끼고 앞장서서 카페로 갔다. 카페에 가서 먼저 커피들을 주문한 뒤 바로 옆을 보니 스티커, 메모지, 가방, 엽서, 펜슬, 연필깎기, 실로 뜬 굴비 등 우리를 현혹시키는 물건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동생과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이것저것 정신없이 구경하기 바빴다. 둘이 살 만한 게 있나 열심히 물건들을 스캔하다가 그중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는 병따개에 눈이 갔다. 나무를 깎아서 코알라의 양쪽 귀를 표현하고, 가운데 얼굴은 귀엽게 코알라 눈과 코가 붙어 있는 병따개였는데 나무를 조각한 느낌이 생각보다 고퀄이었고 무게도 가벼워서 한번 그 병따개를 들자마자 '와! 이거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열심히 저쪽에서 다른 걸 구경하고 있던 동생을 불러서 '이거 봐봐'라며 동생도 내가 느낀 것들을 그대로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 열심히 병따개에 대해 설명했다. 그 모습을 본 제부가 옆으로 오더니 그럼 자기가 기념으로 사주겠다며 고르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세 집의 커플템이 처음으로 완성됐다. 가격은 생각보다 사악했고, 부모님은 이걸 뭐 하러 사냐며 (늘 하는) 한 마디씩 했지만 다들 얼굴은 코알라 병따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 내가 무조건 얼마를 쓴다!', '무조건 비싸도 어떤 것을 산다!'라고 마음먹고 쇼핑을 하면 아무것도 살 것들 (또는 마음에 드는 것들)이 없어 결국 빈손으로 나오고 마는 데에 비해 역시 득템은 아무 생각없이 그냥 구경하다가 이루어진다.
-Hee
*구경
마침 월요일에는 출근을 안 하게 돼서 월요일 저녁에만 진행하는 러닝 클래스를 신청했다. 서울시에서 여의나루역에 러너 스테이션을 만들면서 시작하게 된 브랜드 원 데이 클래스인데, 고작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뭘 배울 수나 있을까 싶었지만 살로몬 티셔츠 한 장이 탐나서 기꺼이 다녀왔다.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든 뭐라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서 더 고마웠던 저녁. 난 늘 한강에 갈 때마다 배달음식과 음주, 사람과 소음이 범람하는 통에 금세 발길을 돌리곤 했었는데 아마도 주말에만 가서 그랬던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공원에 여백이 많아 좋았다. 모처럼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씨. 줄지어 뛰거나 천천히 산책하는 사람들. 여유롭게 잔디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들. 달릴 땐 자세나 현재 몸 상태에 집중하느라 다른 누군가처럼 뛰면서 생각을 정리한다거나 아무 생각을 않는다거나 하지 못하는데 평일 저녁 여의도를 자세히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괜히 또 서울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멍청하게 차 끌고 서울에 가는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아마 이번 서울 앓이는 한 반 년쯤은 가지 않을까.
-Ho
*구경
구경 중 최고는 사람구경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 구경하는 걸 좋아했는데 아빠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 혼을 냈다. 아무래도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게 오해를 부를 수도 있고 하니 그랬겠지.
관광지나 여행을 가서 의미 없는 온갖 것을 파는 잡화점도 지나치기 힘든 구경거리다. 뭘 안 사고 후회하는 거보다 뭘 사고 후회하는 게 더 많다는 걸 알고나서는 쓸데없는 것을 사진 않지만 구경은 늘 한다.
정처 없이 이리저리 다니며 다리가 퉁퉁 부어도 끊임없이 걷는 여행이 고프다. 유럽여행을 다시 가면 잘 할 수 있을것같은데 한 5년쯤 다시 갈수 있으려나. 다음 유럽여행은 에어비엔비를 빌려서 동네에 열리는 마켓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해먹어야지.
곧 7월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콕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랑 가는데 기대가 너무 된다. 그때는 또 어떤 새로운 구경을 하게 될까?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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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엘리안 보도자료] 인류의 우주 기원 밝힌 '마지막 예언자 라엘 : 정신적 혁명 50년' 영상 첫 공개...2월 7일 유튜브 통해
[라엘리안 보도자료] 인류의 우주 기원 밝힌 '마지막 예언자 라엘 : 정신적 혁명 50년' 영상 첫 공개...2월 7일 유튜브 통해
> 라엘리안 보도자료 2024(AH78).2.7
‘무한(영원)에서 무한으로’
인류의 우주 기원 밝혀지다!
-라엘리안, <마지막 예언자 라엘 : 정신적 혁명 50년> 영상 선봬
-2월 7일(수) 유튜브 통해 첫 공개…‘무한의 종교’반세기 활동상, 미래 여정 집중 조명
우리 인류의 기원과 직결된 고도의 외계문명(ET) 엘로힘(Elohim : 고대 히브리어로‘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의 메시지를 전하는 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IRM)가 창시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인‘라엘(Rael)’이 1973년 12월 13일부터 6일간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한 사화산구에서 엘로힘의 대표(야훼 불사회의 의장)를 만나 지구 상에 파견된‘마지막 예언자’로서 첫 발을 내디딘 이후 반세기 역정과 향후 남은 여정의 비전을 집중 조명한 영상(제목 :‘마지막 예언자 라엘 : 정신적 혁명 50년’)을 선보인다.
이 영상은 2월 7일(수) 유튜브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전 세계 시청자들은 https://www.youtube.com/@RaelianMovement(영어) 및 https://www.youtube.com/@MouvementRaelien(프랑스어)을 통해 첫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예언자 라엘 : 정신적 혁명 50년’은 시리즈로 이어진다. 향후 여러 편에 걸쳐‘무한의 종교’(예언자 라엘을 통해 전해진 엘로힘의 과학적, 철학적 종교로,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가운데 신도 영혼도 없으며 도처에 무수히 많은 지적 생명체들이 존재하면서 무한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종교)가 지닌 다양한 측면을 탐구하며 라엘과 엘로힘의 두 번째 만남 50주년을 기념하는 오는 2025년 10월 7일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IRM 총재인 피에르 게리는“라엘이 외계인 엘로힘과 중대한 만남을 가진 후 반세기를 기념하는 지난해 12월 일본 오키나와 라엘리안 국제총회에 바로 뒤 이어 이 획기적인 영상을 공개하게 되었음을 자랑스���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시청자들은 라엘리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성장 과정을 다시 한번 감상하고 역사 상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될 현재의 전환기를 넘어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여정에 상당한 도움을 받을 것이다. 이 영상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가 될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에 따르면 이번 영상 시리즈는 1973년 12월 13일 예언자 라엘이 엘로힘의 대표(야훼)를 만나면서 시작된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역사와 반세기 활동상을 심층적으로 다룰 것으로 예고됐다. 생명과학( 전공학) 발달이 최고조에 달한 초격차 외계문명이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사실은 물론 우리 인류의 외계 기원을 거듭 밝히고 신이나 진화없이 무한한 우주의 원리에 부합하는 혁명적인 정신성을 옹호하는데 비중을 둘 계획이다.
특히 게리는“이‘무한의 종교’는 전통적인 창조론과 진화론 대신 시간과 공간에 있어 우주의 본질인‘무한성’이 우리의 존재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제안한다”며 “지난 50년 동안 라엘이 가르쳐 온 것들, 우주와의 깊은 연결감을 키우고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한 과학적 감각명상 기법”을 강조했다.
한편 IRM은 세계의 각 시민(개개인)이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존중받으며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폭력을 근절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류를 위한 이러한 비전은 전 세계의 부(富)를 재분배하고 과학(선의와 평화를 위한)을 발전시켜 삶의 기쁨을 누리며 심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오랫동안 억압받았던 재능을 키우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게리는“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우리의 세계와 우주적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게 될, 다가오는 정신적 혁명에 대한 이 특별한 탐구(‘마지막 예언자 라엘 : 정신적 혁명 50년’시리즈)를 많은 세계인들이 직접 시청하고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도록 전 세계인들을 정중히 초대한다”며 말을 맺었다.
>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email protected]
엘로힘 (Elohim)
기독교 성경에는 하느님으로 번역돼 있으나 원래 의미는 고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복수형. 오래 전, 외계에서 빛 보다 훨씬 빠른 우주선(일명,UFO)을 타고 지구를 방문해 고도로 발전한 DNA합성기술로 실험실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과학적으로 창조(지적설계)한, 다른 행성에서 온 인류의 창조자들을 의미한다. 엘로힘은 지구에 세워질 그들의 ◆대사관에 공식 귀환할 예정이다.
엘로힘의 모든 메시지는 한국에서 ◆지적설계 Intelligent Design (구 우주인의 메시지) 등으로 출판되어 있으며, www.rael.org 에서는 E-Book을 즉시 무료다운로드 할 수 있다.(스마트폰 이용시, 구글Play 스토어에서 '지적설계' 무료앱을 다운받을 수 있음)
라엘리안 무브먼트 (Raelian Movement)
지난 1973년과 1975년 엘로힘과 접촉한 '마지막 예언자' 라엘이 그들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엘로힘을 맞이할 지구 대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창설한 세계적인 비영리*무신론 종교단체로, 현재 전 세계 120여개국에 13만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주인의 ���사관
우주인 엘로힘의 메시지를 알리는 것과 더불어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또 다른 사명은 창조자 엘로힘을 맞이할 대사관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것입니다. 라엘리안 무브먼트는 여러 나라에 대사관 프로젝트 유치를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런 행운을 얻은 나라는 동시에 엘로힘의 특별한 보호를 누리며 다가올 천 년 동안 지구의 정신적, 과학적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가상 대사관 투어 >> https://3dvisit.etembassy.org/
※참고 영상 : RaelTV 한국 “우리는 외계문명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나요?”
-제1탄 : It’s Time(때가 됐다)-They are here(그들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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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탄 : It’s Time-They are waiting(그들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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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탄 : It’s Time-They are watching(그들은 지켜보고 있다)
youtube
-제4탄 : It’s Time-They are God(그들은 신이다)
youtube
-제5탄 : It’s Time-They sent Prophets(그들은 예언자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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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탄 They are Ready(그들은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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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 (after Hiroshima) 연도
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창설자이자, 그 정신적 지도자인 라엘은 기독교력이나 이슬람력, 불교력 등이 아닌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새로운 AH연도 사용을 유엔(UN)에 제안했다.
AH연도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특히 유일신 종교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전쟁, 테러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계인의 염원을 담고 있다. 또한 원자에너지의 발견으로 이 엄청난 힘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파괴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가 우주만물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시대(Apocalypse:진실이 밝혀지는 계시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다. www.icacci.org
※라엘리안 ‘무한의 상징’에 대한 설명
youtube
RAEL.ORG / 보도자료 / 국제라엘리안뉴스 / 라엘아카데미 / 과학미륵 / 엘로힘리크스 / 다음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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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공상만을 먹고사는 나로서는, 눈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것이 가끔은 가소롭게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절망적이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벌벌 떨 때도 있지만, 역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스스로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다.
의심이 들면 공상가로서 실격이다. 그런 법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매일 밤 수면이란 것과 싸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진정한 몽상가라 하면 무(無)를 갈고닦아 그것이 달을 대로 달은 진정한 무의 경지에 이른 송장이라던가, 감정이 초월한 어느 한적한 곳에 살고 있는 초인뿐이다. 그런 류의 인간이 되기에는 그릇이 작은 나라는 인간으로선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감정과 이성의 선을 스물이 넘었지만 아직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나만큼 어지럽고, 계산적이면서도, 감성과 이성을 넘나드는 공상 속에서 분주히 살아가고 있는 녀석도 그리 흔치 않다.
언젠가, 세상이 나를 향해 음침한 계략을 짰다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무엇 하나 두렵지 않게 되어서, 마치 예수의 사랑을 처음 영접했을 때와 비슷한 심정으로 진정한 자유로움에 도달했을 때도 있었고, 아무도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음에도 혼자 멋대로 병들어 터덜터덜 거리를 걸으며 패배자 흉내를 낸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보다 공상 속에서 일어난 비극을 갖고서 실제로 몸이 더 고양되었고 슬펐던 것 같다.
아무튼 간에, 내 속 좁은 인생은 진정한 공상가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또 봐준다면 ‘비열한 공상가’는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쓸데없는 말을 거추장스럽게 한 것 같은데, 어쨌든 이 ‘공상’과 ‘과거의 미화’가 없었다면 나는 이제까지의 나의 삶을 도저히 증명할 수 없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쩌면 내 작디작은 삶은 전부 공상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공상이라 하면, 필히 인간의 본능에 연결되지 않겠는가.
저지르면 안 되는 일들, 혹시나 이것만큼은? 아 역시 아니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한한 욕구. 망상이라 부르는 거짓 평화, 나태를 멋들어지게 포장한 반쪽짜리 안도감, 바보 같은 희비극, 일어나선 안 되는 사랑의 도피, 추악한 밤놀이…그저 그런 것들.
그리고 공상가들은 인생에서 인문학을 그다지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법이라, 가끔 무책임하게 막말을 할 때도 있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주변에 거하게 한바탕 민폐를 끼쳐 한순간에 방랑자 신세로 내쳐질 때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어른’이라는 말을 듣기엔 이 세상의 많은 민족들 중 가장 동떨어진 족속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평생, 이 사회에 너무도 자연히 팽배하게 덮여있는 순리라는 것에 보호받고 자랄 수 없는 가여운 난민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묻고 싶다. 순수와 날것은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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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아침의 경우에는,(똑같은 공상을 한 적은 없다. 매일매일이,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선 깨자마자의 자세를 유지한 채로 눈만 멍하니 떴다. 분명 나는 제대로 된 ���면이 아닐 경우가 훨씬 다분하기에 조금의 두통과 이인감도 함께한다.
그러고 나선 흐트러진 머리 스타일을 상상하고 영혼이 몸으로부터 천장으로 쏙 빠지는 것을 시작으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이른바 3인칭 공상이 시작된다.
밤 새 걷어차 널브러진 이불 위에 자전거를 굴리는 것 같이 놓인 두 다리, 손은 위아래로 제각각, 얼굴은 의외로 깨끗하고 하얗다.
침대 위에 있던 내 몸은 어느새 봄바람이 잔잔히 흘러드는 드넓은 깨끗한 초록색 풀 밭으로 이동한다. 주위엔 인간이라곤 아무도 없다. 내 옆엔 커다란 메타쉐콰이어가 있고 그 나뭇잎이 천천히 내 주위에만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 그곳에서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새 지저귐을 듣는다. 새소리 속에는 가늘게 매미 소리도 있는 거 같고, 익숙해서 어딘가 울적한 [베토벤-비창 2악장]도 희미하게 함께 들린다.
그렇지만 난 전혀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울기는커녕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 내 얼굴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버린다.
이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공상의 묘미이다. 현실에서 몹시 부정적이라 여겨지는 ‘나 이외의 인간을 단정짓는 행위’를 그 무엇보다 쉬운 일로 간주해서 한 번에 100명이고 1000명이고도 단정 지을 수 있다. 그것뿐이랴, 나의 다음 행동에 따른 세상의 변화도, 상대의 대답도 전부 주체자인 내가 멋대로 정할 수 있다. 곧 있을 다가올 꿈만 같은 순간이 오기 전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갑자기, <사상의 등불이 켜지는 순간>이라는 문구가 뇌리를 빠르게 스친다. 그렇지만 역시,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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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아이파크 몰 안에서의 오전, 아니 오후라도 좋다. 시간은 아무래도 좋다. 그곳에, 영풍문고와 유니클로를 잇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밖에서 비가 와도 좋고 안 와도 좋다. 사람은 분명 많을 테니 전부 뿌옇게 비네트 처리를 한다. 오늘의 공상은 날씨와 시간보다도 장소가 중요한 모양이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백화점이라는 건물 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거 같다.
역시 혼자서, 영풍문고를 무심히 걷고 있다. 어째서 걷고 있는지는 모른다. 아니 사실 나는 결말까지는 몰라도 어째서 걷고 있는지, 그 정도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굳이 보태어 말하고 싶지 않다. 기억해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그런 기분이다.
기나긴 검은색 코트를 입고 치마인지 검도복인지 헷갈릴 정도에 통이 큰 회색 바지에, 코트 안엔 청색 폴로 난방, 그 위엔 더 진한 코발트블루 가디건을 겹쳐 입고 있다. 평소 즐겨 자�� 입는 스타일이다. 실제로 이렇게 입으면 바지가 바닥에 끌리기도 하고 내 신발에 내 바지가 밟히기도 하는 둥 여간 불편하다. 또 옷 그 자체가 굉장히 무겁기 때문에 금방 피로를 느끼기 마련인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나체 상태인 것처럼, 무척 편안하다. 거기서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무심히 서점을 한 바퀴 쭈욱 돌다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코너 쪽에 멈췄다. 그러고 있으니 비네트 처리되지 않은 하나의 존재가 밖으로 이어진 문을 통해 영풍문고로 들어온다. 내 주위를 서성이는 주황 불빛과 조명들이 문득 주마등 같다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슬프지는 않고, 오히려 오물처럼 짙게 낀 마음의 사념들이 저 멀리 날아간 느낌이라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다.
나는 수많은 책들 중에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을 집었다. 그리고 ‘어릿광대의 꽃’을 펴서 읽는데, 집중하며 읽으면서도 동시에 찬찬히 다가오는 존재를 인식하고 기다린다. 반드시 나에게 온다. 그것은 알고 있다.
수수하게 입을 줄 아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 앞에서 수수하게 입을 수 있을 테니.
조숙하고 조신한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 앞에서 조신하게 있을 수 있고, 괜히 갖고 있지도 않은 허상을 자랑하지 않아도 될 테니.
수줍은 웃음 뒤에 아무런 거짓이 없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 앞에서 세상의 이면을 노래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
아픔을 있는 여자,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려하게, 그리고 그것에 다시 아파하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 앞에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테니.
누구보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얼굴에 따스한 날카로움이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 앞에서 지금까지 지켜온 나의 동정과 정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 테니.
비웃음과 무시를 모르는 듯한, 아가페의 미소를 갖고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 앞에서 진정한 사랑을 믿을 수 있을 테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그저 특별한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 앞에서 당신을 기다렸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테니.
절망이 세상을 덮는 날에 그것만큼은 사소한 일이라 여기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녀 앞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싶을 테니.
공상, 시작.
그녀는 내 옆을 지나가려는 찰나에 어째서인지 딱 하고 멈춰서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엔 악의나 놀림이 없다. 조소도 계산도 없다. 진정으로 순수한 감격과 세월이 묻어난 태고의 감탄이다. 사실 이때부터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 이상 바란다면 괴로울 거 같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그녀는 이어폰을 끼고 있는 나를 배려해 책을 들지 않은 내 왼팔 팔뚝에 그 깨끗하고 하얀 손가락으로 귀엽게 몇 번 쿡쿡. 노크하듯 살포시 찌른다. 나는 그녀의 존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심지어 나에게 말을 걸 것이라는 것을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마치 아무것도 몰랐던 거처럼,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모든 것이 계산된 간사하면서 어딘가 살가로운 옅은 미소를 띄운다. 그리고 “네?”라고 침착하게 대답한다.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사실은 누구보다 영악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만큼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이 아닐까. 그리고 누구보다 세상에 기대하는 것이 많은 인간. 아닐까. 의미 없는 내면의 아우성이 나왔다.
“혹시..”
그녀는 이 단어 하나만을 말하고 말을 멈췄다.
나는 이 말에서조차 그녀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한두 번 배려를 해본 솜씨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어폰을 빼자 이내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영원을 넘어 영원.”
[영원을 넘어 영원]은 내가 만든 곡 중에 하나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을 앨범으로 낸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들려준 적도 말한 적도 없다. 이른바 이 세상엔 나밖에 모르는 음악이라는 것인데, 그녀는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제목을 내게 말했다.
역시 나에겐 이 여자는 과분하다. 처음에 나를 그렇게 배려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이 여자는 나랑 같이 있기엔, 너무 아까워. 그래. 초인인 진정한 공상가들. 그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여자야. 이 여자는 깨끗해. 깨끗해도 너무 깨끗해. 아직까지 나처럼 더러운 녀석을 본 적이 없기에 이렇게 깨끗할 수 있는 거야. 만약 나랑 사귄다면, 아니 사귀는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아. 같이 있기만 해도 이 여자의 순백은 하루아침에 깨질 게 분명해. 시커먼 결락으로. 어두운 사상으로 이 여자 또한 의도치 않게 나의 길동무가 되고 말 거야.
도망치자. 그래 도망치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 공상이 끝나면 아주 착실하게 살아가자. 감정? 사랑? 쓸모없어. 사상? 이성? 더할 나위 없는 꿈? 전부 진부한 것들 투성이야. 여자든 남자든 결국 돈이라고. 내가 돈이 많았다면, 저 여자 앞에서 이렇게 쫄지도 않았을 테고 자신감 있게 술을 먹자 하든 뭘 하자 하든 있는 힘껏 밀어붙였겠지. 아. 나는 공상에서조차 이리 쩨쩨하구나. 바보 같은 녀석. 이제 두 번 다시 공상 따위는 하지 않겠어. 바보. 바보. 바보 같은 녀석.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스스로가 너무 짠해서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마침표를 찍는 버릇은, 도무지 전부터 고칠 수 없었기에 허겁지겁 떠오르는 말을, 아무런 말을 횡설수설하며 해댄다..
“[영원한 피날레]는?”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만년 속에 사는 남자]는?”
“당연히 알고 있어요. 아니 그것보다 듣고 있어요. 어제도, 오늘도.”
그렇게 답하는 여자의 말을 듣자니, 눈물이 날 거 같았다. 분노도 감동도 치욕도 절실도 아니었다.
단지 애증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린애처럼, 차라리 떼쓰기로 마음먹었다.
“당신, 나를 놀리려 하는 건가? 뭐야 도대체, 갑자기 찾아와서 불러놓곤.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군. 가던 길이나 계속 가세요. 더 이상 난 할 말이 없군.”
나는 현실에서 이렇게 화 내본 적이 없다. 애초에 화는커녕 말 수조차 거의 없다. 지금 낸 화도 결국 어딘가에서 본 누군가의 화를 따라 한 것 뿐이다. 그래서인지 후폭풍이랄까, 이미 다 말해놓고서 그녀의 얼굴과 대답이 대뜸 두려워졌다. 원래 비겁한 인간이란 것은 이리도 줏대가 없고 나약한 법이다.
7초 정도 지났을까, 그녀로부터 아무런 말도 제스쳐도 없길래 되려 조바심이 나 참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예상외로, 그녀는 씽긋 웃고 있었다. 이 미소도 아까의 감탄과도 같이 아무런 꾸밈도 해함도 거짓도 없는, 마치 순수하게 뻗은 하나의 불꽃놀이 줄기의 터지기 직전 같은, 그런 아련함이 묻어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관록이 담긴 미소, 요즘 사람들이라면 도무지 본 적도 없을 정도로 고귀하고 신성한 태고의 미소.
나는 흠칫 놀랐다. 그녀를 보고 놀란 것인지, 자신의 추악함을 보고 놀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 방도조차 없었다. 단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그 순간 그저 넋을 놓고 만 것이다.
앞머리가 있는 검은색 긴 머리에 신장은 165cm 정도, 회색의 긴 나뭇잎 잎맥 무늬 코트를 그녀는 입고 있었고 단추가 전부 채워진 코트 목부분 너머로 흰색 목폴라가 살짝 삐져나와있었다. 주먹만큼 작은 얼굴에 코와 입은 얇고 가늘었으며 무척 조화로웠다. 그리도 애처롭고 애수로운 쌍꺼풀 아래로 영혼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를 갖은 양쪽 눈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모든 인간과 사회의 이상의 결실과도 같은 순백의 웃음을 그 작품에 그리면서, 자신의 팔에 걸치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나의 목에 손수 씌워주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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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쉽게 운다.
울렁거리는 마음, 금방 축축해지는 눈가, 벌건 눈시울, 뜨거워지는 귀, 일렁이는 가슴 통증, 답답한 목구멍, 훌쩍이는 코, 시린 허벅다리와 무릎 관절, 하도 물어뜯어 화끈거리는 입술과 차가운 발가락,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음악, 꼬불꼬불거리는 강아지의 털, 조금 짧은 잠옷 바지, 무거운 머리, 뿌연 하늘, 적당히 높아진 기온과 킁킁거리는 짐승의 소리, 불쾌한 냄새, 따뜻한 말들, 프리지아의 보드라운 꽃잎 질감, 비단향꽃무의 이름을 알았을 때의 작은 쾌감, 넓은 대로와 그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속도, 시끄러운 도로의 겨울, 그 겨울에 마시는 싸구려 자판기 음료와 독한 담배, 실은 반쯤 피우고 버려진 것들, 멀리서 다가오는 발, 무심하지만 규정 속도는 잘 지키는 기사님, 밝은 햇살, 뜨거워지는 허벅다리, 좁은 그릇과 넓은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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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 #광고 나는 누구? 여긴 어디? ㅋㅋ DM 등으로 신청하라해서 아싸! 근데, 이렇게 잔뜩 올줄이야..Omg! 어쩌지..? 많은 것들 중 일단, 당장. 써보고 싶고 써야하는 맨올로지 스킨케어 로션을 써봤다. 요 며칠 사적인 만남은 없으므로, 면도는 패스! 스마트 리차저와 모이스춰 익스트림 모두 남자들이 좋아하는 올인원 타입이다. 익스트림의 경우 고보습을 위해 크림까지 한번에~♥ 요즘같은 건조한 계절에 쓰기 딱 좋다. 스마트 리차저는 젤 타입이라 산뜻한 발림성으로 기름기 넘치는 여름을 중심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곧 다가오는 발렌타인 데이를 견향한 만큼, 선물하기 너무 만만한 가격대. 만만한 제품군. 받는 사람의 호��호를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나에게도 협찬을 해줬다는 점이 젤 맘에 든다. ㅋㅋ 그래서 아버지께 발렌타인 30년산과 함께 선물로 사드려야겠다. ♥ @belif.official #빌리프 #belif #맨올로지 #보습폭탄 #남성화장품 #남친선물 #발렌타인데이선물 재밌다. ㅋㅋㅋ(Gangneung에서) https://www.instagram.com/p/CoKSFPlBWSL/?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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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rics] VIXX (Leo) - 다가오는 것들 (Things About to Happen) (ft. Choiza of Dynamic Duo)
Don’t ask now, you know better than me You don’t need me, you know that It’s come to this, it’s passing by Even if I try to catch it, it will slip away
I haven’t yet prepared for The things about to happen, I’m drowning in it all
I’m left standing alone As things turn round, I didn’t know you'd leave
It approaches quietly And tries to devour me Before I know it casts a shadow over me And tries to soak through it all
What on Earth is this I don’t know how to say it You’re the one who left So why am I the one breaking down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You’ve gone and aren’t here, but When I get in my blanket alone The remnants of your scent still make a waterway Beneath my eyelids that pours out And I flounder It’s futile Like smoke, I can’t hold onto you Even if I’m crushed like this, I can’t hold onto you It’s not fair, I’m left here alone I walk in this pain
The broken pieces Left behind you Come and pierce me
I lost my way for a time The end disappeared I didn’t know you'd leave
It approaches quietly And tries to devour me Before I know it casts a shadow over me And tries to soak through it all
What on Earth is this I don’t know how to say it You’re the one who left So why am I the one breaking down
You’ve ruined our ending I hold onto the approaching conversation And ask the space you left behind What on Earth you want
You’ve ruined our ending I hold onto the approaching conversation And ask the space you left behind What on Earth you want
It approaches quietly And tries to devour me Before I know it casts a shadow over me And tries to soak through it all
What on Earth is this I don’t know how to say it You’re the one who left So why am I the one breaking down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이제 묻지 마 더 잘 알잖아 필요 없단 거 모두 알잖아 이쯤 됐잖아 흘러가잖아 잡으려 해도 새어 나가잖아
다가오는 것들에 아직 준빌 못해 모두 젖어버려서
돌아서는 것들에 혼자 남아 서서 떠날 줄을 몰라
조용히 다가와선 날 집어삼키려고 해 어느새 드리워선 모두 적시려 해
이게 대체 뭔지 I don’t know how to say it 비워낸 건 너인데 왜 고장 나는 건 나인지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넌 가고 없는데 나 혼자뿐인 이불을 덮을 때 남은 네 냄새는 아직 내 눈꺼풀에 물길을 내 그리고 쏟아져 난 그 속을 허우적대 그리곤 허무해 널 연기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게 이렇게 구겨져도 난 안돼 널 접는 게 억울해 혼자 남겨져 이 고통 속을 걷는 게
너의 뒤를 따라온 깨진 조각들이 나를 찔러 와서
잠시 길을 잃었어 끝이 사라 져서 떠날 줄을 모르고
조용히 다가와선 날 집어삼키려고 해 어느새 드리워선 모두 적시려 해
이게 대체 뭔지 I don’t know how to say it 비워낸 건 너인데 왜 고장 나는 건 나인지
네가 망쳐놓은 우리의 끝자락 다가오는 이야기를 붙잡아 대체 뭘 원하는지 너 없는 빈자리에 묻다가
내가 망쳐 놓은 우리의 끝자락 다가오는 이야기를 붙잡아 대체 뭘 원하는지 너 없는 빈자리에
조용히 다가와선 날 집어삼키려고 해 어느새 드리워선 모두 적시려 해
이게 대체 뭔지 I don’t know how to say it 비워낸 건 너인데 왜 고장 나는 건 나인지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Nothing I can do Things about to hap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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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5 다가오는 것들 muse 2nd solo concert
#vixx#taekwoon#leo#190615#muse 2nd solo concert#this about to happen#다가오는 것들#*v#i‘m supposed to be sleeping earlier but here I am sobbing and posting vids with my p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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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에 대해 궁금해지던 참에, 최근에 개봉했던 <다가오는 것들>을 봤다. 이자벨 위페르는 작년에 혼자 극장에서 봤던 <라우더 댄 밤즈>에서 죽은 엄마의 역할로 나왔는데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 영화에서는 짧게 나오긴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묘했다. 표정이나 몸짓만으로 아주 슬펐던 기억이 난다.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연 ‘나탈리’로 분했다. 주연인 만큼 액션도 크고 대사도 많아서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는 캐릭터지만 <라우더 댄 밤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배우만의 작고 호리호리한 체구에서 나오는 슬픔, 애통함 같은 게 있다. 그런데 그게 나약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단단하게 다져진 내공처럼 느껴진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맡은 역할은 철학 선생님이었는데 이자벨 위페르는 지혜로움과 현명함 따위의 가치들과도 썩 어울리는 배우다. 그러니까 지혜롭고, 단단하고, 현명하고, 당차고, 아름답고, 꿋꿋한… 하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슬픔이나 소외감, 외로움도 가득 안고 있는. 이런 분위기는 연출된다기보다, 이자벨 위페르의 몸 자체에 배어 있는 것만 같다. 그만큼 다큐멘터리처럼 자연스럽다.
그녀(나탈리)는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었다. 영화에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꽤나 높은 지위로 보이는 철학 교수의 남편. 따뜻한 햇빛이 비치는, 인문 분야의 책들이 커다란 책장 속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던한 인테리어의 집. 여느 화목한 가정처럼 독립한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하고 디저트로 딸기를 나누어 먹는 가족.
물론 불행도 있다. 다정하지 않은 남편과 불안장애를 앓는 나탈리의 엄마. 불행은 나탈리의 바닥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다가 불시에 수면 위로 올라온다(많은 자기 성장 영화가 그렇듯이 그 불행에는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 남편은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고 나탈리의 엄마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남편은 “그녀(다른 여자)와 살 거야”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나탈리는 “평생 날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등신이지!” 라고 말한다. 이게 끝이다. 그나마 농도 짙은 배경음악이 깔리며 나탈리의 초조함, 다급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나탈리가 증세가 악화된 엄마에게 찾아가는 장면이다. 몇십 년 동안 남편의 고향집 정원을 꾸미고 돌봐주는 데 많은 애정과 시간을 쏟은 나탈리는 이제 남편과 헤어지면서 그 정원과도 이별해야 함을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정원에 찾아간 나탈리는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정원에 핀 꽃을 몇 송이 꺾어 손에 쥔 채로 엄마에게 달려간다. 모든 것은 나탈리에게 불시에, 무자비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다. 나탈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상황을 견디고 대처해 나가는 것뿐이다.
다른 한편 이 영화에서 비중 있게 조명되는 역할은 ‘파비엥’, 나탈리의 제자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탈리는 ‘스탈린주의자’를 비꼬는 부르주아급 지식인, 파비엥은 언어와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급진적 행동주의자다.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에, 직접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대안 출판 공동체를 만들어 산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는 파비엥. 나탈리는 남편과 엄마를 떠나보내고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며 파비엥의 공동체에서 몇일 머물지만, 파비엥과 친구들의 젊고 급진적인 공간에 또 다른 괴리를 느낀다. 나탈리는 이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걸까.
계속해서 나탈리에게 다가오는 것들. 나탈리가 집필한 총서는 매출고 하락을 이유로 출판사에서 절판되고, 파비엥에게 “사적인 영역의 실천만으로 만족하는 부르주아 지식인”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꿋꿋이 지켜 왔던 신념이 일순간에 비참해지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나탈리 주변을 맴돈다. 그런데 나탈리는 무너짐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파비앵의 세계(젊음과 급진성)를 시기했던 것 같다. 자기가 온전히 누릴 수 없는, 자신이 지나간, 그리고 적극적으로 버렸던 세계(나탈리는 원래 공산주의자였으나, 소련에 직접 갔다 오면서 스탈린주의를 혐오하게 된다)에 대한 후회 섞인 질투. 나탈리는 파비엥이 그의 애인과 물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장면을 길게 응시한다. 뒤이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나탈리가 고양이를 껴안고 침대에서 혼자 흐느끼는 장면이 이어진다. 참 외롭고 쓸쓸한 컷이다.
그러나 나탈리는 그 모든 다가오는 슬픔, 소외, 상실, 외로움을 견딘다. 그리고 살아 낸다. 다시 말하지만 나탈리는 강하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여자다. 크리스마스날 어두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전남편에게 “왜 왔냐, 내가 애인이랑 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핀잔을 주는 나탈리는 유머러스하고 당차다. 남편을 본체만체하며 딸과 사위, 아들과 함께 먹을 크리스마스 식사를 준비하는 나탈리, 만나는 여자가 고향집에 내려갔다는 남편에게 “크리스마스날 혼자라니 딱하네”라고 말할 줄 아는 나탈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갓 태어난 손자를 위해 파비엥이 만든 철학 입문 총서(영화에서 언뜻 비추기로는, 문고본 형태의, 삽화가 곁들여진 어린이용 철학책으로 보인다)를 선물하는 나탈리. 이것이 나탈리가 택한 삶의 화해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컷. 나탈리는 울음을 터트린 갓난아이 손자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준다. “맑은 샘물가를 나 거닐다가/ 그 고운 물속에 내 몸을 담갔네/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나탈리는 손자를 안고 어쩔 수 없는 생의 파동을 느낀다.
우리 삶에 ���가오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다가오는 것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아무리 철저히 무장하고 훈련해도, 다가오는 상대에 따라 잠깐 주저앉거나 처참히 무너지는 것, 둘 중 하나다. 정말이지 지리하고 고된 반복이다. 달콤한 행복이나 생의 환희를 느끼는 순간은 고통과 고통 사이에 드물게 박혀 있다. 그만큼 아주 찰나다. <데미안>의 도입부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밝은 울림과 크리스마스의 향기와 행복에 둘러싸인 천사가 되는 것이야말로 달콤하고도 좋은 일이었다. 오, 그런 시간과 날들은 얼마나 드물게만 찾아왔던가! 선량하고 천진스럽게 허용된 놀이를 하면서도 나는 누이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결국 싸움과 불행으로 끝날 정열과 과격함에 자주 휩싸이곤 했다.”
그럼에도 나탈리는, 우리는, 왜 이별을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수영하고, 꽃을 준비하고, 고양이를 부르고, 학생을 가르치고, 껴안고, 노래할까?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된다.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랴,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영화 중 나탈리는 알랭의 『행복론』에 나오는 이 소절을 읊는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 소절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과장해서 도식화한다면, 고통을 겪는 상태 = 행복이 오지 않은 상태 = 희망을 지속하는 상태 = 그 자체로 행복한 상태라는 뜻인 것 같다.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사소하거나 커다란 불행들이 다가와도, 그것들이 나의 육신과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도, 우리는 밤이 되면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잠에 들 수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것이 있어야 잠에 들 수 있다. 우리는 이 고통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행복을 기대한다.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해도 꽃을 사고, 잃어도 노래하고, 외로워도 잠을 청한다. 무엇이라도 욕망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만나기 위해서. 내일의 고통이 뚜렷이 보이는데도 잠에 들 수 있는 대담함과 용기는 대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일까. 할 수만 있다면, 쉬이 잠 못드는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순간들을 한데 모아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 나는 아직도 잠에 드는 게 어렵다.
2017.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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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1. '치아문단순적소미호'를 보면서 생각한 건데. 이 드라마 팬들 중 많은 이들이 '천샤오시'가 '우보숭'이 아닌 '쟝천'을 선택한 것에 안타까워 한 듯하다. 근데 난 쟝천만의 방식으로 천샤오시를 무지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가 후반부에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싶고.
초반에 천샤오시한테 눈길도 안 줄 땐 진짜 냉미남이었는데. 그때도 여자애가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게 귀찮았지만 칼같이 거절하진 않으면서(기본적으로 착하고 모범적인 성격) 확실하게 선 긋고. 하지만 자기 마음 깨닫고 정면 돌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 감정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고, 본인 성격으론 최고의 애정 표현을 마구 하는 게 드라마 후반부 보는 지금 이 시간까지 애잔한 것...
2. 처음엔 '천샤오시가 쟝천의 얼굴에 반한 건가(ㅇ0ㅇ)...' 싶었다. ���런데 지금은 천샤오시가 반할 정도의 매력이 쟝천에게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남자... 같은? 와우. 그런 모먼트에 치여서 그토록 오랫동안 짝사랑할 수 있었고 포기하지 못했으리라. 드라마 보면 우보숭도 미남으로 나오지만 천샤오시는 이성으로 1도 안 보잖아요? 천샤오시가 얼굴만 보고 쟝천한테 반한 거라면 그 오랜 시간 많은 미남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흔들리지 않았을까(ㅇㅅㅇ) 한 우물만 판 이유가 있었겠지.
3. 항상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연인 되고 지내다가 소홀해진 뒤 멀어져서 3년간 연락 한 번 못(쟝천 입장에선) 했다...?ㅎ 이 드라마 보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훈: 있을 때 잘 하자
4.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인 '이혼전야'에도 이와 비슷한 글귀가 있었지. '한쪽은 뜨거운 반면 다른 한쪽은 미지근하지. 사랑은 언제나 그런 식이야'
근데 표현 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쟝천'도 '천샤오시'를, 천샤오시가 좋아했던 마음 그 이상으로(난 another level이라고 생각) 사랑했지만 그걸 천샤오시만큼 표현하지 못 했다. 그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만들고,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오해를 낳고. 근데 헤어지고 나서 천샤오시는 싹 잊고 자기 인생 살기 잼ㅠㅠ 쟝천만 계속 과거에 붙잡혀 있고 포기하지 못 하고. 하지만 역시 사랑은 쟁취하는 것!!
5. 우보숭의 사랑 방법 또한 천샤오시에게 있어서 쟝천이 표현하는 방식보단 덜 미치는 것도 있었을 것 같다. 사랑을 주는 방식은 상대적이고, 사랑을 하고 또 받는 주체인 인간은 주관적인 존재일 수밖에. 많은 이들의 눈에 우보숭의 표현 방식이 넘사벽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그게 천샤오시를 기쁘게만 해주는 것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다. 천샤오시가 원한 건 자길 기쁘게 만드는 것, 자길 바라보기만 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 우보숭의 표현 방식이 이성으로서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을 테고. (물론 천샤오시에게 필요한 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만)
6. 아니, 쟝천 보세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한테 방해 안 하려고 수능 끝나고 고백한다고 하고, 원하는 대학 못 붙으니까 재수하라고 권유하고, 어떻게 전략 짜라고도 다 알려주고, 자기가 기다려준다는 마음 갖고, 의대생이라 공부하기 바쁠 텐데 천샤오시가 모르는 문제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하고, 명문대 수시 합격했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옆에 있으려고 그거 포기하고 의대 가겠다고 하고, 엄마가 학교까지 찾아와서 1지망, 2지망 바꾸려고 하니까 그렇게 하면 자긴 자퇴인가 한다고 하고, 천샤오시가 같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냅다 여자친구로 만들어놓고, 대학생 때도 자기한테 다가오는 여자들한테 눈길 한 번 안 주고... 이런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 어디 있습니까. 사기캐 아니냐고....... 게다가 이 모든 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일어난 것들. 다른 대학생들이 '둘이 사귀나? 근데 남자에 비해 여자가 너무 평범한 거 아니야?' 이렇게 속닥댈 땐 귀 막아주고. 최고시다...
소설이 원작이라는데 원래부터 이런 설정이었는지는 모르겠네. 근데 같은 내용이 나왔더라도 드라마에서처럼 세부적으로 표현하니까 더 로맨틱하고... 쟝천이야말로 역대급 드라마 속 벤츠남 아니냐고요...
7. 애가 자기 일 때문에 천샤오시한테 소홀해지고 실망시키고 언제든 천샤오시가 자길 찾을 거라고 생각해(에라이씨), 결국 그걸로 헤어지게 됐지만. 이것도 쟝천의 성격상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얘도 연애를 해봤어야 알지ㅠㅡㅠ 오락가락하지 않고 첫사랑이랑 이어지고, 원래 사람들은 떠나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외길 걸으면서 살고. 이러니까 연인에게 사랑을 주는 방식을 몰랐던 거라 생각한다. 이기적인 게 아니라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고 착각한 거라고.
애잔하다, 애잔해... '리웨이' 가시나한테 여지 준 것도(야이씨) 철벽 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것 같달까. 여지껏 공부만 했던 FM 범생이가 여자 마음에 대해 뭘 알겠습니꽈. 전 리웨이가 ㅆ년이라고 생각하고 쟝천에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쪽.
8. 천샤오시도 우보숭한테 철벽 일찌감치 치고 쟝천 마음을 일찍이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되면 20부작 넘는 드라마가 될 수 없었겠죠^^ 드라마 볼 땐 여주, 남주가 눈치 없는 건 어느 정도 용서해줘야 하는 듯하다.
9. 사실 주인공 설정, 스토리라인 자체는 굉장히 클리셰가 많이 들어갔지만 주변 친구들 이야기도 함께 나와서 더 재밌었다. 다 개성 강하고 의리 있고 케미도 좋고. 에피소드들도 평범하지 않고 그때의 고등학생들 심리도 잘 담겨 있고. 마냥 놀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대학 입시에 올인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 없이 현실감 팍팍. 중간에 연애하는 이야기도 없고 다 수능 끝나고를 기약☆
고등학교 3년 내내 담임 선생님이었던 분도 학생들 미래 생각해서 잔소리하고 감쌀 땐 감싸주는 게 보여 넘나 훈훈했다. 리웨이 같은 주변인물이나 얄밉게 주인공들 신경 거슬리게 하는 애들 빼면 빡치게 하는 인물도 없어서 개인적으로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다.
10. 뭐든 과몰입 하는 걸 안 좋아하고, 이렇게 분석해서 써 봤자 작가님의 의도가 정확히 뭔지 전 모르니... 이런 세세한 설정까지 있을진 잘 모르겠다. 글쎄. 그냥 드라마 볼수록 쟝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서 달달하기보다 짠해져 기록해본다(ㅠ)
덧.
와우. 원작 소설이 어떤지 찾아 보니 완전 로맨스 소설이네요. 등장인물의 비중, 주인공들의 성격, 사건이 진행되는 시점이 조금씩 원작과 다른 듯. 많은 부분 각색됐다는 점에서 원작도 ���을 만하겠다만 로맨스 코드란 걸 발견한 즉시 읽고 싶은 흥미를 잃었습니다.
덧2.
아니, 그리고 '우보숭'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포기한 건 없잖아?! 결국 국가대표 하러 가고, 수영 다시 시작하고. 고백했다가 차여서 슬퍼하고 짝사랑 길게 했더라도, (마음 찢어지는 거 말곤) 잃은 게 없잖아요. 근데 '쟝천'은 뭐여. (우보숭이란 캐릭터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쟝천의 방식과 비교하는 중!) 어떤 걸 잃을 수 있더라도 '천샤오시'를 나름의 방법으로 곁에서 지켜줬다는 게. '우보숭이 똥차다'가 아니라 '진정한 벤츠남은 역시 쟝천이었다'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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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동 반지하
서울 신림동 102동 반지하에는 숨이 죽어있는 종이들과 빛바랜 물감이 뒤 섞인 채 살아가고 있었다.
종이들과 물감들은 5년 동안 그와 숨을 쉬다가 최근 들어 숨쉬는 것을 그만두었다. 엄마는 삶의 길에는 쉬는 길도 있는 거라며 말을 건넸다. 그만하면 됐다고, 이제는 조금 쉼의 시간. 소화시키는 과정을 가지자고 그만 집에 오라고 하셨다.
길을 걷다가 넘어지고 엎어지면 잠깐 앉았다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내가 지금까지 받친 삶의 가치관과 성실함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었다.
혹시나 내가 살려고 노력한 것들 중에 여전히 버릇처럼 남아 또 죽이는 것은 아닐까봐 모든게 조심스러워진다. 나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 내가 내리는 뿌리로 인해 그들을 죽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혹시 어제 만났던 사람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닐까. 사랑한다고 여겼던 이들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그들의 뿌리를 썩게 하고 있으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 모든 것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그럴 때면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숨을 고르게 쉬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적적함이 흐르는 숲길, 산책길에 만난 강아지들, 부모님의 웃는 얼굴, 여름 짐 박스 안에 든 모서리마다 헤진 종이 같은 것, 희도, 결이와 수윤이 그리고 소연이. 천진했던 아직은 수줍음이 묻어 있을 시절에 만난 나의 작은 친구들.
그들과 있으며 신경 쓰지 못한 사소한 것들에 대해 다시 곱씹어 본다. 영원할 것 같았으나 언젠가는 받아들임의 익숙함에 퇴화 해버리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가깝고 작은 것들이 두려워질 때마다.
새벽 2시 48분.
지금 적적해진 마음이 아주 익숙해진 것이 되려면 몇 번의 계절이 지나야 할까. 언제나 겨울은 또 다가온다. 아무리 긴 새벽과 고뇌의 시간들도 그 끝에는 깨달음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짓누르듯 되새긴다. 겨울이 다가오는 새벽, 불면증에 헤엄치는 이 새벽도 곧 해가 뜨고 아침이 올 거라고 질긴 고무줄 같은 희망을 씹는다.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먼 데서 와서 머리카락에, 그리고 발끝에 부딪히는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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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분위기
그때는 아마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다.
약간 습하고 찐득했던 공기, 적당히 시끌벅적했던 그 날의 가게,
그리고 좀 어색하게 웃기던 너.
대화가 끊길랑 말랑 한 아슬아슬한 끝을 붙잡고 너도, 나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며 바삐 눈동자를 굴렸겠지.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밌었어? 하는 물음에 무어라 답하긴 어렵겠지만 뭐 딱히 재미 없던 대화도 없었던 것 같다.
평생에 흥미도 없던 운동 얘기를 신나서 늘어놓던 너가 조금 웃겼던 것 같다.
여름은 채 가질 않고 가을이 올랑말랑 살그랑한 날 사이에
익숙했던 사람과 새삼스럽게 그런 분위기에 빠진 게 웃기다고 해야할까.
이건 다 그 때의 분위기 때문이라고 해야할까.
-Ram
*분위기
뻔한 분위기가 싫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뻔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나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래도 변함없는 사실은 쇄신은 언제나 중요하고, 부러지지 않는 유연함이 절실하다는 것. 더 많은 공부와 사고가 필요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Hee
*분위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겠다고 집 한구석에 둘 트리와 오너먼트를 사던 때에는 무언가가 망하기라도 한 듯 허탈했었는데, 그 싸구려 트리의 가지들을 펼치고 장식하고 전구를 두르고 겨울을 보낸 뒤 접어서 보관했다가 다시 꺼내두는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내 일이 되고 난 뒤에는 필연적인 애정을 갖게 됐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아~ 트리를 저렇게도 꾸밀 수가 있구나 싶은 것들 투성이다. 지난날 산이나 숲에서 주워 온 솔방울, 나뭇가지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인데다, 이제는 돈을 더 들여서라도 더 잘 꾸며보고 싶은 마음을 다잡느라 애쓰는 지경이 됐다.
지금껏 이런 분위기들에 냉소적이었던 이유는 간결함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따뜻함을 만들려는 인위적인 요소들이 넘쳐서 오히려 차갑고 무겁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사는 행태가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었었는데, 올해 12월이 되기도 전에 트리를 꺼내 설치하던 나는 이제 그런 분위기를 MSG 정도로 여기게끔 바뀌었다. 적당히 즐기면 더 다채로운 겨울이 된다. 겨울이 더 겨울다워지는데, 조금은 더 의존해도 좋을 것 같다.
-Ho
*분위기
사람을 볼때 그 사람의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좋은 사람은 분위기에서 느껴진다. 나는 내 직감을 신뢰하는 편인데, 선입견을 직관으로 착각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좋은 분위기를 풍기고 같이 있을때 즐거운 사람이 되고싶다.
연말 분위기가 한창이다. 모두들 행복한 연말을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모든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2024년이 됐으면 좋겠다. Flow universe. 흐름에 나를 맡기자.
-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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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내 취향 아닌 것들을 길들이는 과정이 좋다 처음부터 딱 맞아떨어지는 것과는 달리 어떤 영감처럼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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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성과 혁명 by 권순구 (펌)
소녀혁명 우테나(少女革命ウテナ)세미나 발제문
I.예비적인 이야기들1. 순구(純久)
제 이름은 순구(純久)입니다.순수, 순박, 순진, 순정. 여기에 모두 들어가는 그 ���(純)에 오랠 구(久)가 붙어있으니, 아마 부모님은 제가 이런 모든 것들을 간직한 채로 오래오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구(久)라는 글자는 때로 영원히(forever)의 뜻을 갖기도 하니까, 그렇게 되면 제 이름은 대충 '순수함은 영원하다'는 포부 당당한 선언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영원히 순수하기를. 그렇게 되어만 준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넌 참 순진하구나' 라는 말은 그다지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이 아닙니다. 물론 순수하고 순진하다는 것은 원래 좋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좋은 의미와, '넌 참 순진하구나'라고 말할 때의 그런 비꼼의 의미는, 사실 서로 크게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가졌구나' 라고 말하건, '네가 아직 세상 험한 꼴을 못 당해봤구나' 라고 말하건, 단지 이 말을 뒤집으면 저 말이 되고 저 말을 뒤집으면 이 말이 될 뿐, 똑같은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세상을 살아보고 산전수전 겪다 보면, 순수하고 순진했던 그런 마음들이 마냥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들장미 소녀 캔디 정도의 경지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오래오래 살 수 있겠나, 하는 의구심은 누구나 철들 무렵이 되면 가져 볼만한 의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좋은 뜻으로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께는 마땅히 감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이가 들수록 '그게 말이 되나?' 하는 의문과회의가 드는 것은 어떨 수가 없습니다.
2. 철들 무렵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4화를 보면, 비행기를 타고 그랑디스 일당에게 쫓기다가 바다 한가운데 추락한 쟝과 나디아를 노틸러스 호가 구조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친절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노틸러스 호의 부함장, 엘렉트라를 보면서 나디아가 계속 경계심을 풀지 않자, 결국 쟝이 한 마디 합니다.
"그렇게 남을 의심하는 건 옳지 않아.”그러자 곧바로 나디아가 새침하게 쏘아붙이죠.“무턱대고 남을 믿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아마도 쟝은 나디아의 대답이 무척이나 뜻밖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디아의 대답을 듣고 갸웃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쟝의 그 천진하고 느긋한 표정이라니...
“그런가???”
이 장면을 처음 봤던 중학교 때, 이 둘의 대화가 얼마나 제 가슴에 깊이 와 닿았는지 모릅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늘 꿈을 잃지 않는, 천진하고 낙천적이고 순수하고 밝은 쟝. 그리고 어릴 때부터 외톨이로 자라면서 상처 받고 결국은 자기가 자란 서커스단의 단장한테까지 배반당한, 세상을 믿지 못하고 타인의 친절을 의심하는 나디아. 정말 대조적인 두 사람이지만, 사실 그 시기 철들 나이의 생각들이란 다 한 켠으로는 쟝을 닮아있고, 또 다른 한 켠으로는 나디아를 닮아있게 마련입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것은, 언뜻 이 두 아이들의 말다툼이 평범하고 천진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정말로 여기에 대한 답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고 세상을, 사랑을, 우정을, 꿈을, 희망을, 이상을 믿는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때의 그 의문에 대해서 제가 뭐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그저 이 질문의 답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그냥 잊어버리는 게 훨씬 더 편하다는 사실뿐입니다. 제 나이는 스물여섯이 되었고 저 장면을 본 기억도 거의 10년여가 되어가지만, 결국 제 마음 속의 쟝과 나디아는 함께 모험을 하며 그 답을 구하느니 차라리 선을 긋고 각자의 영역을 서로 침범하지 않는 쪽으로 타협을 본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3. 타협
사람의 생은 유한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꿈은 무한한 것입니다. 유한한 것을 가지고 무한한 것을 쫓아야 한다는 점에서, 산다는 것은 위태롭고 험하며, 때로는 애처롭고 때로는 불쾌하며 때로는 허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고 솔직한 태도를 갖는 것은 (물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그 절망이 너무나도 단호하고 진지해서, 어떤 분홍머리 소녀처럼 스스로 관 속에 들어가 자기 손으로 뚜껑을 덮어버리는 그런 식의 결과가 되어버린다면, 이러한 진지함과 용기가 적당한 불성실과 타협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확실히 혼돈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태어난 이상, 가능한 한 좋은 것을 좇고 싫은 것은 멀리하며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고 또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그러한 욕구를 받아들이고 나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항상 철저하고 솔직한 것 보다는, 때로 오히려 덜 철저하고 덜 솔직한 것이 분명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회의 또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희망보다는, 단지 세상의 혐오스럽고 두려운 부분에는 얼마만큼의 체념과 회의, 냉소를 갖고, 또 내가 바라는 대로 채색되고 치장된 세계 안에서는 적당한 꿈과 희망을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되며 터득해야 할 살아가는 요령일는지도 모릅니다.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어른스럽게’의 의미란, 꿈, 사랑, 이상, 희망, 이런 것들은 여가용으로, 냉소, 회의, 경멸, 혐오 같은 것들은 업무용으로 각각 적절하게 안배할 줄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자는 편안하고 친근한 세계를 즐기기 위한 계기로써, 후자는 냉혹하고 험악한 세상을 마주대하기 위한 무기로써, 각각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이 둘 중 한 쪽만을 가지고, ��를 들어, 꿈과 사랑만을 가지고 또는 경멸과 혐오만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결국, 이런 식의 타협에는 불가피한 면이 있으며, 아무리 철저하고 순수한 삶을 갈구한다고 해도 적어도 어떤 시점, 어떤 정도까지는 이러한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러나.그러나...정말로 그걸로 좋은 것일까요...
4. 이원성
순정 만화 같은 것들 속에서 흔히 우리가 ‘소녀적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런 마음의 밑바탕에는,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섬세하고 애정 어린 시선에 대한 의지, 그리고 그런 시선과 관심을 자신도 받고 싶다는 소망이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의지와 소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봄직한 것이며, 비단 앳된 소녀들뿐만 아니라 설사 중년의 아저씨들일지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램들은 약한 것입니다. 아니, 약하다고들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지속된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약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꿈과 이상 속에 담긴 수많은 바램들. 아름다움. 사랑. 믿음. 기적. 찬란히 빛나는 그 무엇. 영원히 변치 않을 그 어떤 것에 대한 의지와 소망들 역시 마찬가지로, 불행히도 약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시간에 감염된 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결국 사멸하기 위해 생성되는 그 냉혹한 흐름 속에서, 왜곡되고 뒤틀리고 잊혀지는 그런 운명에 묶인, 고귀하지만 나약하고, 아름답지만 홀로 설 수는 없는 그런 것들이라고.
우리가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믿는 그런 어떤 것들이 '약하다'고 말할 때의 그 '약함'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비록 우리가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실 속에서 실현되고 지켜지기가 매우 힘듭니다. 남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보다는 남을 속이기로 결심한 사람 쪽이 훨씬 더 쾌적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 (가슴 아프지만)사실인 것입니다. 이 때 약함의 의미는 바로 바란다는 것과 이루어진다는 것(또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바로 그 이원성을 의미합니다. 즉 현실적인 어려움의 문제입니다.
둘째. 이것은 첫 번째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데, 즉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와 의미일수록, 거기에 대해 우리 자신이 회의하거나 망각하거나 경멸하도록 되기가 매우 쉽다는 점입니다. 세상은 어렸을 때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혼란스럽습니다. 그런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게 되어가는 판국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내가 무엇을 바랬는지, ��가 무엇을 믿는지, 도대체 애초에 그것들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밝고 아름다우며 따스하고 고귀한 그런 순수함이었는지. 아니면 안타까운 연약함이었는지. 아니면 무가치한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경멸스러운 거짓이었는지. 아무도, 아무것도, 그 참됨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약함의 의미는 바로 냉소와 긍정, 환멸과 희망, 무감각과 감각, 무의미와 의미 사이의 긴장과 싸움, 바로 그 이원성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의미의 약함과 두 번째 의미의 약함이란 실제 살아가면서 겪는 고민이나 갈등 속에서 항상 한 덩어리로 엮여있게 마련입니다. 현실의 좌절과 내면의 환멸은 늘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 안의 세계에서든 바깥의 현실에서든, 이렇게 서로 얽힌 이원성의 긴장들은 다양한 변주―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 허구와 실재, 아름다움과 추함 등등을 통해, 우리가 느끼고 바라고 꿈꾸는 삶의 순간순간을 지배합니다.
우리가 흔히 “정말 환상적이야!”라고 말할 때 그 ‘환상’의 의미와, “그건 환상일 뿐이야.”라고 말할 때의 그 ‘환상’의 의미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사뭇 대조적인 이 두 가지의 뜻이 하나의 단어에 모두 담겨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가 처한 이원성의 긴장을 암시합니다. 세상에 대한 지각과 감성이 처음 눈뜨기 시작하는 시기,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바란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고 아름답게 느껴졌던 그런 시절의 기억은, 현실의 흐름 속에서 바래고 꺾이며, 나의 세계는 둘로 나뉘어갑니다. 점점 커져가는 좌절의 그림자를 받아들여가는 이런 과정은, 철저하게 홀로 감내해야 하는 고독한 길입니다.
이원성의 첨예한 긴장과 책임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질 때.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밝은 쪽’과 ‘어두운 쪽’ 사이의 타협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의 끝을 정하고, 그 껍질 속에 숨는 것 이외의 다른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바라면서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할까.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내면과 바깥의 현실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순수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함과 천진함을 동경하는 대신, 알면서도 아니 알기 때문에, 그 많은 갈등과 두려움과 책임을 알고 또 알기 때문에 순수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순수함을 우리는 찾을 수 있을까. 계속 꿈꾸고 싶은 소망과 더 이상 좌절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 사이에 갇힌 나의 세계를 혁명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는 얻을 수 있을까.... 제가 보았던 『소녀혁명 우테나』는 바로 이런 질문들을 향한 도전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II. 이원성의 첫 번째 변주1. 공주님
이쯤에서 한 번만 더 제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즉, 순수함이란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순수함이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는 걸까요? 그 추상적인 의미만을 따져본다면, 순수는 이미 순수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변화하건 그것은 '타락'이거나 '변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북극에 서있는 사람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남쪽일 뿐, 더 이상 북쪽으로는 갈 도리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더러워지기 쉬운 색이 순백색인 것처럼, 가장 순수한 것일수록 그것은 더욱 더 변질되기 쉽고 타락하기 쉬운 운명에 이미 처해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옳건 그르건, 적어도 이런 생각이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순수함'에 대한 인상을 잘 대변해주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순수함의 의미에 대한 이런 회의적인 견해가 계속 발전되게 되면, 결국 순수하다는 것은 단지 세상 험한 꼴을 아직 안 겪어본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여태 속아 본 적이 없다는 증거일 뿐, 현실적으로 볼 때 애초에 세상에 뭔가 바라거니 희망을 가질 이유 따위는 없었다는 식의 회의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회의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부류이며, 이들의 모토는 “몰랐어? 원래 세상이 그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현실 속에서 이런 견해들을 어떤 근거라도 들면서 반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순수한 것일수록 가장 쉽게, 가장 깊게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경우, 정말로 사실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똑 같은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면서도, 회의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또한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김광석 씨의 노래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시들어 가고
햇살이 비치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 순간에 말라버리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김광석, 『일어나』)
이 한 구절에는 순수함의 역설적인 가치가 함축되어있습니다. 즉 그것은, 허망하게 사라질 운명이면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생겨나 나에게 다가오는 하나하나의 계기들입니다. 마치 한 순간에 말라버릴지언정, 매일 아침 다시 깨끗하게 맺히는 이슬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수라는 것의 가치는 오히려 그것이 약하고 변하기 쉽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이러한 의미의 순수란, 바로 그 연약한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애정과 동경, 연민과 관심,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한 송이의 꽃이건 한 방울의 이슬이건, 한 순간의 추억이건 한 순간의 꿈이건, 그 온전함이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 나와 너의 만남이란 단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만큼, 그 계기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게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연약하고 허망해 보이는 그런 의미의 순수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에 깃든 축복이자 커다란 힘입니다.
모든 섬세하면서도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덧없는 그런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따스한 눈길과 애정. 약한 것들을 동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고귀함과 아름다움.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상냥함과 강인함 . 이런 것들이야 말로 순수함의 추상적인 의미 속에 담겨진 인간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불행히도,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변해가는 연약한 것들을 긍정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분명 고귀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상의 어떤 것들에 대한 갈망을 결코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변해가는 것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한 켠에서, 우리는 분명 변치 않는 그 무엇을 꿈꿉니다. 혼돈스런 현실 속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견고한 불멸의 그 무엇을.
2. 왕자님
순수의 반대말은 타락이라고 흔히 말합니다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순수라는 말이 한 가지 뜻만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태껏 이야기해오던 그런 느낌의 순수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또 다른 부류의 순수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또 다른 부류'의 순수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한 예가 바로 영화 『에일리언(Alien, '79)』에 나옵니다.
지금은 SF 호러의 고전이 된 유명한 영화이고, 특히 사실상의 주인공인 괴물(에일리언)의 그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가히 전설적입니다. 어쩌다가 이 외계 괴물을 배 안에 들여놓게 된 우주선의 승무원들이, 살기 위해 우주 한 가운데 고립된 채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는 것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영화의 후반에 나오는 짤막한 한 대목입니다. 이 영화 후반부에 가면, 동료인줄만 알았던 승무원 한 명이 실은 승무원들을 모두 처치하고 그 괴물을 지구로 ���져가려던 스파이 로봇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결국 격투 끝에 승무원들 손에 파괴된 안드로이드는 마지막으로 기능이 정지하기 전에 승무원들에게 조롱하듯 말합니다.
“너희는 아직 그것(괴물)의 정체를 모르지... 그건 완벽한 생명체야. 무한한 생명력과, 포악성, 그리고 무한한 적개심...”
“존경이라도 하는 건가?”
“...그 순.수.성을 존경하지. 양심에 더럽혀지지 않고... 가책에 고뇌하지 않는...”
자, 여기서 분명히 ‘순수’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침이 줄줄 흐르는 끔찍한 입이 트레이드 마크인 이 괴물을 가리켜서. 확실히, 이 안드로이드가 말하는 '순수성'이란 앞에서 이야기하던 그런 느낌의 순수성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그러나 이 괴물은 분명 어떤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합니다. 일말의 갈등조차 갖지 않는, 공격성만으로 순수하게 연마된 무자비한 생명력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일컬어 ‘순수하다’고 말하는 대사의 이면에는 인간의 노예로서 이 안드로이드가 품고 있던,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인 불완전함과 나약함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경멸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여기서의 순수는 나약함을 동정하지 않습니다.순수라는 개념 속에는 분명, 애초부터 어떤 종류의 ‘힘’을 의미하는 가능성이 숨어있습니다. 순수란 결코 덧없는 나약함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함 속에 내포된, 도대체 어떠한 변화나 갈등, 불안의 요소도 갖고 있지 않은 완전한 균일함. 그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범접되지 아니하는 그런 완벽함. 그것은 바로 불변이요 불멸의 권능이며, 이러한 완전무결함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만큼 갈망하고 동경하는, 순수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강하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아름다운 것의 필수 조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강하지 못한 것은 비록 지금은 아름답다 해도 언제든 추한 모습으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 속에 갇힌 존재이면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형벌입니다. 유한한 생에 묶여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유한성과는 별개로 자기가 꿈꾸는 무엇인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보통 연인들끼리의 사랑의 맹세란, 거의 항상 시간 차원을 생략하거나(‘죽을 때까지 사랑한다’) 무한으로 승화를 시키게 마련(‘영원히 사랑한다’)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거의 똑같은 의미인데도, ‘앞으로 한 80년 정도 사랑한다’ 라는 식으로 사랑을 다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습니다. 요컨대 사람들은 항상 마음 한 구석에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이 시간 속에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상 속에서는 아름다운 것, 드높은 것, 찬란한 것은 항상 영원합니다. 즉, 그것들은 절대로 ��할 수도, 변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갈망과 동경을 냉소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덧없는 현실 속에 처해서도, 모든 것이 다 변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꿈꾸고 또 믿으려 하는 그런 용기와 의지. 불멸의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바램과 거기서 비롯되는 힘. 이것은 약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순수와는 구별되는, 인간의 또 다른 소중한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나...불행히도, 역시 이것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하고 완전하고 영속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그게 반드시 소중하지만 연약한 그런 존재들보다 항상 우월한 존재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대통령 자리를 제의 받고 거절하면서, "정치는 순간이지만 물리법칙은 영원하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완전하고 영원한 것의 가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지구를 45억년 째 돌아주고 있는 달보다는, 나를 좋아하게 된지 100일 째 되는 이성 친구에게 더 깊이 감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물리법칙이란 시간 밖에 늘 존재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감정은 시간 안에서 문득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완전한 괴물 에일리언은 외로움 따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겠지만, 어쩌면 차라리 어수룩한 못난이 외계인 E.T.처럼 지구인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쪽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간혹 들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듯이, 때로 진정한 가치란 애초에 변할 리가 없다는 것 보다는 변할 수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완전한 것은 때로 무척이나 공허한 것일 수 있으며, 단지 강하기 위한 강함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3. 공주님과 왕자님의 만남 ~ 동화 ~
아름답고 상냥한 공주님은
세상의 가장 작고 약한 것도 보듬어줄 수 있는 고귀함을...
강하고 용감한 왕자님은
세상의 어떤 두려운 적들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찰나의 연약함을 사랑할 수 있는 따스함이 인간의 유한성에 주어진 축복이라면, 불멸과 영원을 꿈꿀 수 있는 능력 또한 인간에게 잠재된 무한한 힘입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의미의 순수함이 서로 만나 하나가 된다면, 세상의 그 무엇이 이들의 영원한 행복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동화 속의 왕자님과 공주님은 어째서 만나기만 하면 ‘그 후로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냐고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테나라는 작품 속에서 철저하게 비틀리고 낱낱이 분쇄되어버리는 왕자와 공주의 모티브는 지금 공연��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인지... 물론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즉 메르헨 속의 왕자와공주의 이야기에서 비현실적인 것은, 둘이 만나면 무조건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둘이 서로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랑에 빠진다는 겁니다. 이 작품은 바로 이 아름다운 거짓에 대한 분노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현실 속에서, 그 이원성의 긴장 속에서,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듬으려는 바램과 영원한 것을 꿈꾸는 이상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등을 돌리게 됩니다. 현실 속의 공주와 왕자는 결코 그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아니, 서로를 애써 외면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국 오히려 서로를 맹렬히 증오하게 됩니다.
왕자와 공주의 저 순수함은 분명 둘 다 참으로 소중한 인간의 가치이지만, 현실 속에서 이 두 가지가 하나의 내면에서 조화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듭니다. 거부할 수 없는 좌절과 체념의 경험들 속에서, 덧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을 함께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반쪽짜리 꿈이나마 남은 것을 지키려는 그런 안타까운 몸부림 속에서, 내버린 나머지 반쪽에 대한 그리움은 차차 혐오와 경멸로 변해갑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이원성의 긴장이라는 것이 단지 이상과 현실, 꿈과 일상, 순수와 타락 사이에 걸쳐진 단순한 구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실만이 이상을 좌절시키는 것은 아니며, 일상만이 꿈을 바래게 하는 것도 아니며, 타락만이 순수를 변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냉혹한 현실. 무의미한 일상. 타락에의 유혹. 어쩌면 이런 것들보다도 더 위험하고 비극적인 것은, 이상과 꿈과 순수에 대한 갈망 자체가 오히려 그것들을 변질시키며 스스로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4. 공주님의 타락, 왕자님의 타락
우리가 잘 아는 시인 윤동주(1917~1945)는, 제가 느끼기에, 너무나도 가혹했던 현실 속에서 그야말로 순정만화 속의 맑고 따스한, 그런 혼을 가졌던 (제 또래의) 젊은이였습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
(...중략...)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윤동주, 『별 헤는 밤』)
도대체 당시의 가혹한 현실 속에서, 저런 정감들을 지키고 보듬기 위해서는 얼마나 처절하게 스스로와 싸워야 했을까.... 그러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이 젊은이는, 일본 유학 도중 항일운동 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되어 거기서 죽었습니다.
지켜줄 이 없이 세상 한가운데 던져진 저 아름답고 상냥하고 고귀한 마음씨, 메르헨 속의 공주로 표상되는 그런 의미의 순수함으로 저 두렵고도 두려운 현실을 마주해야 했던 이 사람이 필사적으로 갈구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화해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9
자기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순수함이, 현실 속의 무력감과 좌절 앞에서 허물어져간다고 느낄 때,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자기혐오와 환멸의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과 화해할 수 있기를 그는 바랬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려던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공주님처럼,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증오로부터 고통당할 때, 그는 단지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 부끄러운 모습과 화해할 수 있기를 갈구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이런 갈망은 결코 한 시대 한 젊은이만의 괴로움이 아니며, 모든 좌절당한 나약한 순수함의 갈망입니다.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될수록, 그가 이런 갈망에 어떤 위안,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었기를 저는 간절히 바라게 되었지만, 또한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힘든 바램인가 하는 것 역시도 점점 또렷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든 연약하고 덧없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정을 담으려는 그런 아름다운 소망도, 정작 자기 자신의 나약함만은 감싸 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줄 아는 공주님이라도, 문득 깨닫게 되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까지 사랑하기란 도저히 힘든 노릇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순수함이라는 것이 실은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거짓일 뿐이라는 회의 앞에서 스스로를 사랑할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 머리채를 잡아서 스스로를 들어올리려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력일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아름다운 환상으로서 세상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조소당하느니, 차라리 그 모든 것을 ���념과 환멸의 늪 속으로 처넣고 자기 자신까지도 그 깊고 어두운 안식 속에 눕기를 바라는 그런 충동. 그것은 현실 속에 던져진 순수의 타락, 공주님의 타락입니다. 그러나 저는 차마 그 타락을 경멸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안시의 타락을 경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 누가, 모든 약하고 소중한 것들을,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했으면서도 결국 그런 자기 자신만은 끝내 사랑할 수 없었던 공주님을 동정하고 말을 걸며, 화해의 손을 내밀어줄까요? 어느 누가, 스스로를 비웃고 경멸할 만큼 타락해버린 공주님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용기를 가질 수가 있을까요? 그 누가, 저 고귀한 아름다움마저 타락시킨 현실 속의 냉혹함과 가혹함을 마주할 힘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왕자님일까요? 그러나 타락한 왕자 아키오는 결코 안시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 나름의 좌절의 울분과 분노 속에서 그 역시 그 어떤 것도 동정할 수 없게 된 처지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전쟁 영화의 기념비적 걸작인 영화 『지옥의 묵시록1)』은, 흔히 전쟁의 광기 속으로 가장 깊이 파고들어간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전쟁이라는 소재를 그려가는 시각이란, 전쟁에 대한 리얼리즘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묵시록'이라는 제목에 걸맞게도 몽환적이고 상징적인 네러티브로 시종하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아날로지(analogy)로써의 의미가 더 강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것은 결투게임의 놀이가 아니야.
넌 아직 놀이의 결투밖에 몰라. 그렇지만... 지금 검을 무르지 않으면
너는 여기서 현실에서의 싸움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다
38화에 나오는 아키오의 대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 즉 객관적 사실의 집합으로써만의 '현실'이 아닌, 내가 가진 모든 꿈을 분쇄해버리는, 그런 저항할 수 없는 공포로서의 '현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전쟁보다 더 극명하고 노골적이고 벌거벗은 현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옥의 묵시록'은 그 공포를 가장 처절하게 형상화한 커츠 대령이라는 인격을 보여줍니다. 월남에 투입된 정예부대의 장교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밀림 속으로 숨어버린 그는, 거기서 자신만의 광기의 왕국을 만들고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위험한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그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받은 주인공 윌라드 대위가 밀림 속으로, 전쟁 속으로, 그리고 그 광기의 중심부로, 이끌리듯 커츠 대령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능하고 정직하며 올곧은 마음을 가진 훌륭한 군인이었던 그, 월터 E. 커츠 대령을 미치게 만든 현실. 거기에 대한 의문의 답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자, 영화 전체가 투영되는 하나의 그림자로써, 불가사의한 이미지들을 통해 서서히 묘사되어갑니다.
하지만 그의 인격이 아무리 불가사의한 어둠 속에 잠겨있다고 해도, 그의 광기는 평범한 인간들의 좌절에도 내제해있는 것입니다. 이 좌절은, 앞서 언급된 공주님의 좌절과는 또 다른 의미의 좌절입니다.
나의 유한성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는 그 무엇. 그래서 나의 유한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믿는 그 무엇. 바로 그런 진리와 이상과 꿈을 위해,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과 기적을 지켜내려는 고결한 용기와 강함을 가진 왕자님은 그 용기와 강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참혹하게 패배할 운명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진리와 이상. 그 변하지 않는 순수함에 대한 헌신이, 바로 그 진리와 이상으로부터 배신당할 때, 그것도 현실이 가장 냉혹하게 그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그러한 좌절을 맞이할 때, 고결한 군인이기를 바랬던 한 인간은....
완전한 이방인이 된 그를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세상을 버렸고 결국 자기 자신까지도 버렸다
나는 그토록 갈가리 찢어진 영혼을 본 적이 없었다
이 대사는, 마침내 그의 광기의 왕국에서 커츠 대령을 만나게 된 윌라드 대위의 독백입니다. 변치 않는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 가장 참혹하게 강요된 좌절 속에서 어떻게 변해갔는가.... 그는 월남에서 처음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베트콩들이 몰려와, 방금 미군들한테 예방접종을 받은 월남 아이들, 동포인 어린 아이들의 주사 맞은 팔을 모조리 잘라 산더미처럼 쌓아둔 광경을 바라보던 그 기억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생각했지. 그 능력......
팔을 잘라 내는 그 의지는 완벽하고 순진하고 수.정.처.럼.순.수.했.어.
그들이 우리보다 더 강하다는 걸 깨달았지.
우리에겐, 양심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원초적인 본능으로 살인을 하는 인간이 필요해.
느낌도, 격정도, 판단도 없이. 판단 없이.
우린 판단하기 때문에 패배한 거야.
아키오는 현실에 패배한 왕자님입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했기 때문에, 무엇이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격정에 이끌렸기 때문에, 패배한 것입니다. 그가 바라던 순수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세상에 영원 같은 것은 없다고, 기적 같은 것은 없다고 그리고 왕자 같은 것은 없다고 왕자님이었던 자기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만 하는 그런 잔인한 절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비틀고 왜곡시키며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든 이들을 비웃기 위한 무대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더 이상 그는 어떤 것도 지키려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심지어 절망에 빠진 공주님조차도 동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저 '수정처럼 순수한' 완전히 투명한 텅 빈 강함입니다.
“저 문에는 영원이, 빛나는 것이, 기적의 힘이 있어. 그 힘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가 있다. / ...힘이 없으면 결국에는 남에게 의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세계라는 거다.”
(39화, 아키오의 대사)
결국 패배한 왕자님은 '힘'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그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닌, 그 무엇에 헌신하는 것도 아닌, 단지 자기가 '현실'이라고 불렀던 공포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켜 줄 그런 힘만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III. 이원성의 두 번째 변주1. 알(卵)
언젠가 제 친구 한 명이 저한테 "야, '여신님' 같은 만화도 순정 아니냐?"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순정만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그야말로 펄쩍 뛸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달리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순정 만화 속에서 자기가 받은 느낌들과 『오! 나의 여신님』이라는 작품에서 받은 느낌들이 어쩐지 비슷한 면이 있다는 말을 하려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대리만족이니, 여성상의 왜곡이니 여러 가지 비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제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말하기는 좀 쑥스러운 노릇이지만, 저도 군대 가던 날 훈련소로 가는 밤 기차를 타기 전에, 갖고 있던 '여신님' 만화책들을 한 권 한 권 찬찬히 다 정독을 하고 집을 나섰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의 군생활 30개월(공군) 중에 가장 힘들었던 때는, 정작 군대 안에서 지내던 때가 아니라, 입대하러 기차를 타고 진주 교육사령부로 내려가던 그 하룻밤이었습니다. 막상 현실로 닥치고 피부로 와 닿는 군대에서의 하루하루보다도, 무슨 일을 겪을지도 모르면서 그저 온갖 불안한 상상만 떠올리던 경험이 저한테는 더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기차를 타고 밤새 훈련소로 향하면서, 말 그대로 몸에 걸친 속옷 한 장까지 온통 낯선 것들에 둘러싸이는, 그런 무섭고 외로운 곳으로 끌려간다는 생각에 밤새 차창만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오돌오돌 떨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좀 (아니 많이) 엉뚱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제가 공연히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여신님'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이 만화가 그리고 있는 다사롭고 포근한 느낌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그것이, 각박하고 두려운 현실을 마주하기 위한 제 나름의 준비였습니다.
그런데, 입영 열차 안에서의 이런 경험이란 어쩐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압축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지나온 기억들을 떠올리노라면,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저 오돌오돌 떨면서 저항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그런 낯설고 겁이 나는 현실 속으로 차근차근 등 떠밀리듯 내몰려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군대가기 전의 심정이 그랬듯,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마주하게 될 그 각박하고 두려운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위안이나 의지가 되는 무언가를 찾는 생각 또한 간절해지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군대뿐만이 아니라, 이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내면을 깊게 보듬어주는 그런 눈길. 그런 섬세하고 애정 어린 시선. 그런 순수한 마음, 그런 '순정'을 지켜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바램들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막상 나는 어느 누구한테 건 그런 마음으로 대해줄 수가 있을까. 또, 누군가 나한테 그렇게 상냥하게 대해주었으면,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마음 속 깊은 곳의 소망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힘듭니다. 이것은 단지 쑥스러움이나 창피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회의의 문제입니다.
군 생활에서 사병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의 절반 이상은 다 '욕'입니다. 욕을 먹지 않기 위한 욕. 욕을 견디기 위한 욕. 흔히 듣는 말이지만, ‘군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나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오고 나서야 자신이 그렇게 격하게 화를 내거나 심한 욕설을 내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습니다. 전혀 원치 않았던 자기의 처지를 의식할 때처럼 누군가에게 그 탓을 묻고 싶은 욕구가 간절할 때도 없습니다. 그 욕구는 너무나도 커서, 대체로 그런 욕설들이 근거가 있거나 가당한 것인지 따위는 별 고려의 대상이 못됩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들 속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이병, 일병 시절을 거치노라면, 결국 화장실이나 다른 으슥한 곳에 숨어 혼자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건빵을 씹으며, (대부분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이런 종류의 고독과 울분에 익숙해지는 법을 홀로 터득해 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얻게 되는 결론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 생각해줄 여유 따위는 없다!‘ 이 해답에 빨리 닿을수록 마음은 편해집니다. 말하자면, 이기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그것을 합리화시켜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전까지 익숙했던, 만만한 현실 속에서나 통용되던 예절이나 규범 대신, 차차 혼자 버텨나가기 위한 새로운 규칙들에 따르게 됩니다. 불안에 떨던 갓 온 신병은 점차 고참이 되어 가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해득실에 따라, 주위에 적당히 적대적이고 적당히 호전적이며, 또 때로는 경우에 따라 적당히 사근사근하고 적당히 허세부리는 행동으로 대처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들이, 단순히 남자들이 군대라는 특수한 곳에서나 겪게 되는 불유쾌한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군대에서의 경험들을 특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 경험들이 매우 ‘압축적’이고 ‘노골적’이라는 점에서만 그럴 뿐이며,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한 지금에 와서 제가 느끼기에,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상 속에 홀로 내던져지는 그 경험들 속에는 모두 이와 유사한 패턴의 고독과 울분이 담겨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순수하게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그런 소통에 대한 바램이라는 것이, 만만하고 나긋나긋하던 어린 시절의 ‘현실’에서나 가져볼 만한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는 울분과 고독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울분과 고독에 비례해서, 우리는 서서히 매일매일 접하는 주위 사람들의 개성과 고민을, 갈등과 인내를, 그 아픔과 깊이를 거의 의식 못하게 되어갑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큰 고민과 갈등에 처해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고뇌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강하게 의식한 나머지 대신 타인들의 그것을 과소평가하게 마련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개개인의 고뇌보다는 단조롭고 어리석어 보이는 전체적인 집단의 모습에 주의를 집중하게 되며, 이것은 사람들을 타인에게 무감각하게 만드는 작용을 촉진���킵니다.
자신의 울분과 고독을 누군가가 바라봐주고 보듬어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간절한 바램은, 지나치게 간절한 나머지, 스스로의 것을 잠시 덮어두고 남의 것에 먼저 관심을 가져주기가 힘들다는 데 그 비극의 씨앗이 있습니다. 비록 서로 똑같은 외로움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해도, 동병상련 이심전심의 낭만보다는 저마다 자신의 간절함에 매달려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기가 훨씬 쉬운 법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결과적으로, 애초의 그 순정만화 같은 수줍은 소망을 신경증적인 분노와 긴장으로 바꾸어놓습니다. 결국, 이런 판국에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나는 이렇게 다른 누군가의 상냥함을 바라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터에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는 자살행위입니다.
물론 이련 식으로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는,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태를 다소 과장하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현실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분명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이러한 두려움을 이겨낸다고 해서 늘 그 보답이 돌아오는 것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완전히 회의적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나무라기에는 그 근거가 희박합니다. 도대체 이 모든 외로운 싸움, 두려움과의 싸움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있으리라는 보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두려움의 한계 안에서, 자기가 그 안에서 살아갈 세계의 경계선을 긋게 됩니다. 즉 자신이 받아들일 세계의 안과 밖을 가르게 되는 것입니다.
2. 안과 밖
다른 부대도 그런지는 확실치 않지만(아마 비슷하리라 생각되지만), 제가 있던 부대 사람들은 보통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보다도 별나게 드라마를 좋아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달콤하고 순정만화 같은 분위기의 그런 작품일수록 인기가 좋았습니다. 물론 거기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일단 생활이 각박하다 보니 이런 드라마 안의 핑크 빛 세상이 마냥 그립고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이런 연속극들은 점호가 끝난 뒤에 합니다. 규칙 상 TV 시청이 금지된 시간입니다. 결국은 늘 불쌍한 내무실 막내(보통은 이병)들이 희생양이 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란 말 그대로 희비극이 엇갈리는 기묘한 풍경입니다.
TV에서는 『가을동화』(제가 군대에 있을 때 부대 안에 돌풍을 일으켰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펼쳐지고, 그 해맑은 사랑에 애를 태우는 병장들이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있는 동안, 대신에 TV 쪽으로는 고개조차 못 돌리게 되어있는 이병 한 명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혹시나 일직사관이 사정권에 들어오지는 않는지 소리만으로 망을 봐야 합니다. 그것도, 자기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잠도 못 자고.
제가 이런 취향의 작품들에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들 속의 낭만과 순수에 얼마나 큰 위안을 얻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건 간에,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TV를 끄던가, 아니면 차라리 일직사관한테 걸릴 때 걸리더라도 졸병한테 그냥 망보지 말고 와서 함께 TV를 보자고 한마디를 던지는 쪽이 수천만 배는 더 감동적이고 낭만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품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대단히 눈물겨운 감동을 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허구(Fiction)의 위안과 서러운 이병 신세에 고참의 조그만 배려 하나가 주는 현실 속의 위안이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상황은 항상 "군대가 원래 그래. 나도 다 겪었어."로 결론이 나고, 여전히 내무실 한 켠은 TV속의 낭만에 취해있는 동안, 그 대가로 다른 한 켠에서는 상당히 낭만적이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는, 코믹하고도 비극적인 장면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상황 속에서, 즉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영문도 모른 체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낯선 곳에 끌려와, 낮에는 하루 종일 부대끼며 이유도 모를 욕들만 배불리 먹고, 동료들이라고는 부려먹으려는 고참과 기어오르려는 졸병들만 득실한 틈에 끼어 고단한 일과를 보내다가, 밤이 되어 그나마 지친 심신을 눕히고 잠시나마 아늑하고 따스한 허구로 자신의 내면을 감싸고 달래주는 그런 감미롭고 애절한 위안의 한 때를 만끽해보려는 순간에까지, 억지로 다시 현실에 눈을 돌려 보이지도 않을 새까만 졸병의 서러운 처지 따위에 관심 갖고 신경을 써주기란 죽기보다 힘들고, 죽기보다 싫은 노릇임이 분명합니다. 이 각박한 생활 속에서는, 도무지 그렇게 하려는 의지도,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찾아보기가 힘든 것입니다.
물론 이런 군대 일화가 그다지 보편적인 경험이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하고 보편적인 모순의 한 자락이 깔려있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요컨대, 언뜻 생각하기에 어느 누구라도 허구 속의 낭만 보다는 현실 속의 낭만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싶겠지만, 실제로 살면서 겪어보기에는 사정이 영 다르다는 점입니다.
나의 환상 안에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동화 같은 사랑이야기에 감동하는 진정 꿈 많고 순수한 청춘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참으로 편안히 그런 꿈속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분명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합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세계 안의 환상에 대한 대가로,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세계 밖에서 나는 죄 없는 졸병을 잠도 못 자게 괴롭히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에 둔감해져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두려움과 회의의 한계 안에서라면, 나는 원하는 만큼 진솔하고 순수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은 세계의 경계 바깥, 내가 감당하고 싶지 않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회의의 영역에서는 나는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도, 비겁할 수도, 심지어 파렴치해질 수도 있습니다. 안과 밖 사이에 놓인 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의 심연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나 자신을, 내 세계를, 둘로 셋으로 넷으로 산산이 갈라놓습니다.
3. 세계의 끝
세계의 끝인 아키오는 말합니다(38화).
...나는 언제나 성의 꿈을 꾼다. 그래... 왕자님과 공주님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사는 성이다.
그러나 자신이 다시금 성안의 행복한 왕자님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매일 밤 꿈꾼다던 그는, 또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보고 있으면 옛날의 내가 생각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녀를 구할 수 없다.
어차피, 왕자님이라든가 영원이 있다는 성이라는 건 다 속임수다.
지금 너에게 현실을 보여주마.
영원한 행복의 성을 꿈꾼다면서도 영원이 있다는 성이란 속임수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 모순. 그러나 이 모순은 단지 모순인 것만이 아니며, 그 실체는 두려움입니다.
허구와 거짓은 상상하는 만큼 아름답고 상상하는 만큼 눈부시며 상상하는 만큼 영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만큼 위험하고 두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그은 세계의 경계 안에서, 그 허구들은 나를 둘러싸고 나를 이루며 나를 가꾸어주고 나를 빛나게 해줄 수 있으며, 동시에 나를 에워싸고 나를 갉아먹으며 나를 가두고 나를 질식시켜갈 수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듀얼리스트들은 자신의 껍질을 깨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힌 체 살아간다는 것 또는 죽어간다는 것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들을 결투의 장으로 내모는 것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 할 만큼 정교한 허구 속에 속박되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이며, 거짓된 허상이 아닌 참되고 실재하는 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동경과 의지입니다. 그러나...
현실과 실재는 어느 누구의 편견도, 어느 누구의 거짓도, 어느 누구의 허상도 압도하는 강대한 힘입니다. 꿈을 실현한다는 것, 바램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내가 그 힘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느 누구의 의지조차도 거스르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그 모오든 다채로움과 활력의 일부를 나의 것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과 실재는 그 힘을 통해 어느 누구의 환상이라도 깨트리고 어느 누구의 꿈이라도 짓밟을 수 있으며, 그 결과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듀얼리스트들은 결투의 장에서 또다시 자신의 세계의 안으로 숨기 위해 되돌아섭니다. 그들은 그 어떤 환상의 도움도 없이, 그 어떤 허구의 위안도 없이, 벌거벗겨진 체 현실 앞에 마주해야한다는 공포 앞에서 주저합니다. 그들을 결투의 장에서 번번이 패배시키는 것은, 어떤 의지도 어떤 의미도 존중해주지 않는 현실과 실제의 그 냉혹함에 대한 마음속으로부터의 두려움과 회의이며, 그리고 그 냉혹한 혼돈보다는 정교하게 세공되고 조화된 허구 속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유혹과 망설임입니다.
그들은 어느 때인가 빛나던 한 순간의 순수를 그리워하면서도 오히려 그 그리움이 현재 자신의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기적을 갈구하면서도 자신이 그 갈구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조차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의 궁극을 통해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면서도, 그 힘에 대한 동경이 스스로를 무의미한 공허함으로 바꾸어놓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키고 싶은 한 순간에 ���한 집착이, 영원에 대한 목마름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 지키고 싶어 하던 기억마저 비틀어놓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계의 안과 밖 사이에서, 용기와 두려움을 모두 안은 체 그 언저리를 맴도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참으로 평범한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 ‘세계의 끝’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기에 ‘세계의 끝’이란, 듀얼리스트들이 처음에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무언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넘어서 있는 초월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자신의 세계에 끝―즉 한계 또는 경계―을 갖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는, ‘세계의 끝’이란 초월을 가장한 교묘한 구속이자 속박일 뿐입니다. 영원한 행복의 성을 꿈꾸면서도 영원이 있다는 성을 속임수라고 말하던 아키오의 모순은, 바로 이런 ‘세계의 끝’의 두 가지 상반된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밖을 향한 욕구와 세계의 안을 향한 욕구가 서로를 상쇄시키는 모순입니다.
분명 어느 누구도 자신이 허구 속에서 기만당하며 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분명한 것은, 허구가 아닌 진짜 현실 속에서 진정 자신이 소망하는 모습대로 살 용기를 갖기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 속에서 어떤 꿈이나 소망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허구에 기만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세계 밖에서 현실과 싸워나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두 가지 두려움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의미합니다. 결국, 앞서 언급했듯이, 이 허구와 현실, 내면과 외면의 긴장 사이에서,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두려움의 한계 안에 자기가 살아갈 세계의 경계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내가 인식하는 세계의 안과 밖이 갈리는 시작이 되며, 이 첨예한 두려움과 갈등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4. 현실과 사실과 의미와 책임
어렸을 때는 단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버겁기 때문에. 영원, 순수, 꿈, 이런 단어들은 마냥 아름답고 좋은 것에서 그저 살갑고 유치한 것으로 어느 샌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유를 갖기에는, 다짜고짜 닥쳐오는 현실들이 너무나도 어렵고 무섭고 다급해 보였기 때문에... 꼭 답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그런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저는 아직 아무런 답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어느 샌가, 한때 꼭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게 되어버리고,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은 너무나도 견고하고 거대한 것이 되어 나를 덮쳐오는 이 모든 변화들은, 정말이지 너무 쉽고 너무 빠릅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자주, 변하기를 원했던 부분은 안 변하고, 변할 줄 몰랐던 부분만 골라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해가는 것들 중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변해가는 혼돈 속에서 처음에 떠올랐던 의문은, 무엇이 변치 않는 진실이며 무엇이 덧없는 허상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오히려, 객관적인 사실이 좋은 것인지 주관 속의 환상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실,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항상 마음속의 꿈과 이상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며, 또 마음속의 이상과 바램들은 현실을 변화시켜나가는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이
항상 더 ‘좋다’거나 ‘참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무리 정말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진리라고는 해도, 막상 살면서 현실과 꿈 사이의 접점을 찾거나 균형을 잡기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세미나를 준비하며 이 글을 쓰는 동안, 제가 속한 이 현실 속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한국인 민간인이 테러 단체에 납치되어 살해당했고, 우리나라 안에서는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이런 실상들을 접하는 동안, 차라리 세미나 준비를 그만 둬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렇게 심각하고 급박한 현실들을 뒷전으로 한 체 ‘고작 만화’에나 골몰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접점이나 균형이라는 것을 떠올리기란 더더군다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현실과 이상이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한데 엮여져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현실이 곧 사실이고 이상은 곧 허구라는 식으로 말하는 데는 다소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이란 거칠게 말해서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예를 들어, 뜨겁다든가 차갑다든가 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굳이 달리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고 때로는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찬 것은 차다고 생각하고 뜨거운 것은 뜨겁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체로 그 원인이 바깥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객관적’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사실들은, 그 원인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 내가 무언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이런 것들은, 다름 아닌 내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사실의 진위 여부가 나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과는 구분되는 ‘주관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사실을 인지하는 데에, 예컨대 찬 것을 차다고 말하는 데에, 어떤 책임이나 긴장이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관적 사실을 느끼고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책임과 긴장이 따릅니다. 내가 더 이상 그것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그 때부터 그 느낌은 거짓이 됩니다. 내가 느낀다는 것을 하나의 사실로 만드는 책임은, 그것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의미들을 느낄 수 있는 결단과 의지를 행사하도록 부여된 나의 권리에 대한 책임입니다.
하지만, 아직 별로 나이를 먹지도 않았는데, 이 책임이라는 게 정말 무거운 것이라는 느낌이 종종 들곤 합니다. 많은 것들이 변해가는 속에서, 무언가 믿고 있던 의미, 갖고 있던 느낌들이 하나씩 변해갈 때마다,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믿고 바란다는 사실은 거짓이 되어가고, 왠지 나는 허깨비를 쫓던 것이 아닌가 싶은 불안은 사실이 되어갑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의미와 내가 살아갈 모습을 꿈꾸고 그려볼 권리는 서서히 괴로운 의무처럼 느껴져 갑니다.(사실 그래본 적은 없지만...) 내가 만약 모든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랬다면, 그 바램이 좌절되었을 때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만 돌린다는 것은 당연히 지나친 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것은 단순한 좌절에서 그치지 않고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갑니다. 세상으로부터 타락을 강요당하느니, 차라리 내가 세상을 타락시키는 것이 더 좋게 생각되는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로부터 배신당하느니 차라리 내가 모든 것을 배반하는 것이, 그리고 버림받느니 먼저 내버리는 것이 더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정말이지, 환상을 쫓다가 무기력하게 좌절당하는 몽상가에 비하면, 적어도 더 이상 속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느끼려하지 않고 아무 의미도 찾지 않으려 하는 냉소와 허무주의가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객관적 사실들(예를 들어, 신호등이나 달궈진 냄비 손잡이 따위)은 그 느낌을 달리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때로는 해롭기 때문에 온전한 사실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주관적 사실들은, 즉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바란다는 그 사실들은, 우리가 그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때로는 해롭기 때문에 온전한 사실로 남기가 힘듭니다.
느끼고 소망한다는 것의 책임, 그 의미와 가치가 어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단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책임, 그 느낌과 의미에 대한 선택의 책임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객관적 현실 속에서 인간들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자기 주관의 믿음과 결단에 책임을 지기 위해, 과거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은 커다란 대가를 치루면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합니다. 현실이란, 세상이란, 삶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흔히 말해지곤 합니다. 그리고 기실 그 말들이 뜻하는 것은, 스스로가 현실에서, 세상에서, 삶에서 아무것도 느끼려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나는 장미의 신부니까... 마음이 없는 인형이니까...
몸이 아무리 깎이고 무뎌져도...
마음 같은 건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38화, 안시의 대사)
느끼고 바란다는 사실의 책임은 큽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려 하지 않는 허무의 대가 역시 큰 것입니다. 느끼는 것이 괴롭고 바라는 것이 힘겨운 그런 감당할 수 없는 책임들은 세계의 껍질 밖에 남겨져 무의미 속에서 잊혀져갑니다. 그러나 세계의 껍질 안에 남겨둔 지키고 싶은 의미들조차, 결국은 박제된 모습으로 그 빛을 잃어갑니다. 안과 밖으로 갈라진 세계는 결코 어떤 소중함도 살아있는 온전함으로 지켜줄 수 없습니다.
IV. 소녀혁명1. 소녀들
‘소녀혁명’이란, 소녀들을 향한 혁명이자 또한 ���녀들로부터의 혁명입니다. 그것은 힘없이 깨트려지고 변질되고 조소당하는 것들로부터의 혁명이자, 그런 것들을 향한 혁명입니다.
나약하고 연약한 것은 소녀들이 아닙니다. 생애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무지하고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이제 막 세계의 끝을 마주한 지금의 미숙한 우리 자신이야말로, 가장 힘겹게 스스로의 나약함과 싸워야 하는 시기에 처해있는지도 모릅니다. 왕자님을 동경하건, 공주님을 동경하건, 그저 나약하고 연약할 뿐인 존재는 바로 지금의 우리들 자신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우테나가 현실 속에서 배워간 것은, 단지 자신이 모든 시작에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기만당하고 경멸당해왔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되고 싶어 했던 왕자도, 그녀가 그토록 구해주고 싶어 했던 공주님도, 그 모든 것은 애초부터 잔인한 절망 속에서 뒤틀리고 망가진 체 차마 돌아보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이끌어주고 있다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은, 실은 처음부터 깊은 허무의 심연에서 자신을 냉소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쥬리가 말했던 우테나의 그 ‘잔혹한 순수함’은, 고스란히 우테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칼날이 되어버렸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다름 아닌 자신의 바로 그 고결한 순수함으로 인해 세상의 끝 언저리를 맴도는 자들의 참혹한 좌절과 무서운 타락과 끝없는 괴로움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절망과 슬픔은 다른 어느 듀얼리스트들보다도 깊고 가혹한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이원성의 갈등과 괴로움을 겪기 훨씬 전부터, 꿈꾸는 법을 알아버렸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그 잔혹한 순수함으로, 세상과 나 자신에게 너무나도 많은 꿈을 지워버렸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 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 체 세상 사람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자신이 장차 무의미와 체념 속으로 어떻게 길들여지게 될런지를 알지 못한 체, 세상 모든 일에는 저마다 의미가 있다고 믿으려 했습니다. 현실 속의 무수한 좌절과 증오와 시기와 냉소와 환멸의 의미들을 일일이 새겨보기도 전에, 너무나도 성급하게 그 모든 것들에 아름다움과 희망을 덧칠하려 했습니다. 결국 그 순수가 진실되고 성실하고 고결한 것일수록, 그 잔혹함은 더욱더 깊고 두려운 것이 되어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꿈꾸던 시절 우리의 무지함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 영원이란... 뭔가요....? (33화, 우테나의 대사)
애처롭고도 간절한 그 질문, 그 장면, 그 모습은 저에게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우테나처럼, 현실 속에서 바로 그런 나약함으로 아무도
대답해줄 리 없는 질문을 여전히 품고 있는 이들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계를 혁명해야 할, 이 세계로부터 혁명되어야 할 약하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 고귀한 나약함으로 세상을 바꾸며, 동시에 세상 속에서 그 나약함을 나약함 만이 아닌 것으로 바꾸어가야 할.......
섣불리 꿈꾸었던 순수함의 잔혹한 대가 앞에서, 한 때의 자기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믿었던 것들이, 더할 수 없이 밉고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워질 때조차,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다시 절망에게 손을 내밀 수 있기 위해서. 그 절망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너를.. 구하러 왔어...
너를 만나기 위해서 나는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니까 너와 내가 만나는 이 세계를... 두려워하지 마.
(39화, 우테나의 대사)
...우리는 세계를 혁명해야 합니다.
2. 혁명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다시 꿈꾸게 될 수 있을까요? 회의를 배웠기 때문에 다시 믿을 수 있고, 절망을 배웠기 때문에 다시 희망을 그릴 수 있고, 체념을 배웠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무엇이 나를 이끌어줄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해서 거의 잊고 있던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 혹시 너에게 무슨 곤란한 일이 있으면
우선 나에게 이야기해 줘.
무엇이든지 서로 돕자.
너와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
(25화, 우테나의 대사)
타락한 왕자는 우테나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말합니다. 너는 과거의 나를 닮았다고... 그리고 세계의 끝에서, 이제껏 겪었던 가장 슬픈 절망 뒤에 결국은 꺾이고 쓰러진 우테나에게 왕자님은 조용히 위안을 속삭입니다. 지금까지 노력해왔으니까, 그 고결함을 소중히 여겨주었으니까, 자신을 책망해선 안 된다고. 나는 너와 가장 닮았던 사람이니까. 나는 너의 모든 괴로움을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니까. 이제 우린 충분한 대가를 치렀으니까. 이제 저 영원의 성의 환상 속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없이 내려치는 우테나의 손이 그 위안과 환상을 산산조각 낼 때.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6년 전의 그 느낌과, 이미 자신도 모르게 그런 위안과 환상을 바라게 되어버린 6년 후 지금의 제 느낌은 사뭇 달랐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저렇게 거역할 수 없는 위안과 동정을, 도대체 어떻게 내버릴 수가 있을까. 나의 모든 것을, 나의 모든 아픔을, 나의 모든 고독한 싸움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줄지도 모를 그런 손길을.
하지만.안시가 좌절해가는 우테나의 곁에서 과거 자기 자신의 괴로움과 슬픔을 다시 바라보게 된 시간을 통해, 그리고 우테나가 안시의 그 괴로움과 슬픔을 고스란히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시 배워간 시간을 통해, 마침내 그들이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이 바로 서로의 가장 소중하고 슬픈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테나는 껍질 속에 갇혀 죽어가기 보다, 껍질 밖에 내던져진 안시의 괴로움을 향해, 그 망각과 무의미에 갇힌 슬픔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기 위해, 살아가는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껍질 속의 환상 속으로 숨기 위해 안시를, 그 절망과 체념의 괴로움을, 껍질 밖의 무의미로 내던져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힘겹게 다시 일어나려했습니다. 환상을 깨트린 바로 그 손으로.
세계의 끝과 끝을 아우르는 모든 희망과 절망, 의미와 무의미, 이상과 현실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날줄씨줄들에 비하면, 이 둘의 애정이란 그 얼마나 평범하고 소박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왕자님을 동경했던 소녀와, 타락한 공주님이었던 소녀의 만남은 하나의 소중한 혁명입니다. 그 모오든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갈등과 책임을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기를 선택했던 바로 그 평범함과 소박함이었으니까, 그들의 만남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빛날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그 소중한 나약함을 사랑하는 고귀한 공주님이던 한 소녀가 타락했을 때. 그리고 그녀 앞에, 왕자님의 고결함을 동경한다는 다른 한 소녀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겠다며 말을 걸어왔을 때.
공주님이었던 소녀는 왕자님이 되겠다는 소녀를 경멸했습니다. 너는 비겁자라고. 세계의 끝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주제에 자신의 고결함에 눈이 멀어 세상의 타락과 슬픔을 알려 하지 않는 비겁자라고.
그리고 왕자님을 동경하던 소녀 역시 공주님이었던 소녀를 경멸했습니다. 너는 비겁자라고. 모든 순수함이 자기와 같은 타락과 파멸을 겪을 거라고 믿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주제에 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비겁자라고.
그런데.. 우테나님. / 응?
간타렐라(Cantarella)라고 아십니까?
간타렐라? 뭐야 그게?
옛날 이탈리아의 보르지아(Borgia)가문에서 쓰던 맹독의 이름입니다... 어떻습니까, 그 쿠키? 그거 제가 구운 거에요
우연이네... 그 홍차에도 독을 넣었는데.
그렇습니까... 정말 맛있는데요, 이 홍차.
이 쿠키도 말야.
우테나님. 우테나님의 10년 후는?
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 그렇지만?
10년 후에 우리들 또 이렇게 함께 차를 마셨으면 좋겠네.
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거... 왠지 좋을 것 같아. 반드시.. 10년 후에도 함께 웃으며 차를 마시자. 약속이야.
예, 반드시.
이 둘이 어떻게 서로를 경멸하던 그 증오를, 한 순간 서로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 함께 빛나기를 기원하는 약속으로 되돌릴 수 있었는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은 절망과 희망, 타락과 순수,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 허구와 실재, 아름다움과 추함, 이상과 현실, 의미와 무의미... 들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동정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언젠가 함께 빛나기를 약속할 수 있는 그런 만남입니다. 그것은 이원성을 향한 혁명입니다.
아직 젊은 우리들은 지금 모두.......
얼마만큼의 용기와 얼마만큼의 두려움을 갖고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의 끝 언저리에서 낯선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루어내기도 힘들고 지키기도 힘들고 심지어 기억 속에 간직하기 조차 힘든 그런 꿈들―영원, 빛나는 것, 기적 그리고 순수에 대한 꿈들과 더불어.
막연한 꿈과 미숙한 힘만으로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는 질문의 해답을 스스로 구하기 위해서.
세상 밖을 향해서.
어쩌면
혁명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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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심상치 않은 바람에 땅에 있던 낙엽들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나무보다 더 높이. 덕분에 하늘이 맑아졌다. 밤인데도 하얀 구름이 잘 보인다. 이제 기차 안에서 졸기도 한다. 밖에서 잠들지 못해 이동 중에는 대체로 뜬 눈인데. 정신도 몸의 피로는 이길 수 없다. 며칠 동안 강아솔의 Dear를 듣는다. 여전히 엉킨 이어폰을 풀어서, 길을 걸으면서, 표정이랄 것도 없이. 그러나 매번 눈물이 날 것 같다. 무던한 마음은 고단해지고 눅눅해진다. 나는 때로가 아니라 항상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내려놓는다는 건 단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고 바다를 보다가 글을 쓰고, 지겨우면 책을 읽다 또 모래를 밟고 하는 것들. 어쩌면 책도 글도 멀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 멀어진 것 같던 이에게는 어느 밤 연락이 오고, 아주 멀어진 이는 잘 지내겠지 싶다가도 종종 그립고, 새로 알게 된 동료는 더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한다. 맞지 않는 이와 있을 때엔 어느새 틱틱대고 있는 내가 싫어서 그 사람으로부터 매일 멀리 가고 싶다. 나는 이렇게 미운 사람이 아닌데.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무언가 나를 들춰내는 것 같다. 내 미운 속을 들킨 기분이 든다.
목요일, 퇴근 후 듣는 수업에서 대학 선배를 만났다. 친한 선배도 아니었고, 친해지고 싶은 선배도 아니었는데 보통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 번에 얼굴을 알아보아서 수업이 끝난 후 선배, 하고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익숙하고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인지 마음이 조금 떨렸다. 친한 정도를 떠나 같은 업계라는 이유로 반갑기도 했다. 이제껏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구나. 선배는 내 얼굴이 익숙하다 말했지만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지난 수업에는 새롭게 알게 된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에 반해 여운이 길었고 오늘은 과거의 사람을 마주했다. 지친 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도 가끔씩은 나를 콕 찌르는 일들이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말마다 약속이 잡혀 있고 다가오는 토요일에는 몇 달 전이었다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을 본다. 마음이 부드러워진 걸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들을 때마다 휘청거린다. 저 사람은 그런 이야기가 있구나. 저이는 참 멋지구나. 저이는 참 저답구나. 나는 내가 되면 된다고, 어쩌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뿐인데도 나를 다른 곳에 비추느라 연신 눈을 굴린다. 나는 지금 너무 무르다. 앞으로도 이렇게 물러터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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