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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없음
꿈 같은 네 얼굴이 내 문지방 너머로 찾아오면 허공을 딛던 내 새벽도 반가운, 네 기별에 눈물겨워라
이 생에 별 그림자 비추는 꿈 속으로
나도 내가 흘린 별들 따라 가고 싶어 왜 빛나던 것들은 불현듯 와 이내 내 곁을 떠나가는지
나도 내가 그린 그림 속에 있고 싶어 왜 눈앞 풍경은 모두 이토록 흐려지기만 하는지
사라지지 마 내 사랑 내 사랑아 사라지지 마 사라지지 마 내 사랑 사랑아
꿈이냐 생시냐 꿈 아니고 생시면 낯선 여긴 어느 아픔이냐 꿈이냐 생시냐 생시 아니고 꿈이면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이냐
- 아를 <기약없음>
https://www.youtube.com/watch?v=3sg0w04i7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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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레온은 일종의 도마뱀으로 고대 그리스어의 땅위(khamai)와 사자(leon)를 뜻한다. 청각이 무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위협을 받으면 검은색으로 변화시켜 죽은 척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의 색깔이나 감정 등에 맞춰 색을 수시로 바꾼다.”
2017.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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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에 대해 궁금해지던 참에, 최근에 개봉했던 <다가오는 것들>을 봤다. 이자벨 위페르는 작년에 혼자 극장에서 봤던 <라우더 댄 밤즈>에서 죽은 엄마의 역할로 나왔는데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 영화에서는 짧게 나오긴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아주 묘했다. 표정이나 몸짓만으로 아주 슬펐던 기억이 난다.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연 ‘나탈리’로 분했다. 주연인 만큼 액션도 크고 대사도 많아서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는 캐릭터지만 <라우더 댄 밤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배우만의 작고 호리호리한 체구에서 나오는 슬픔, 애통함 같은 게 있다. 그런데 그게 나약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단단하게 다져진 내공처럼 느껴진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맡은 역할은 철학 선생님이었는데 이자벨 위페르는 지혜로움과 현명함 따위의 가치들과도 썩 어울리는 배우다. 그러니까 지혜롭고, 단단하고, 현명하고, 당차고, 아름답고, 꿋꿋한… 하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슬픔이나 소외감, 외로움도 가득 안고 있는. 이런 분위기는 ���출된다기보다, 이자벨 위페르의 몸 자체에 배어 있는 것만 같다. 그만큼 다큐멘터리처럼 자연스럽다.
그녀(나탈리)는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었다. 영화에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꽤나 높은 지위로 보이는 철학 교수의 남편. 따뜻한 햇빛이 비치는, 인문 분야의 책들이 커다란 책장 속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던한 인테리어의 집. 여느 화목한 가정처럼 독립한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하고 디저트로 딸기를 나누어 먹는 가족.
물론 불행도 있다. 다정하지 않은 남편과 불안장애를 앓는 나탈리의 엄마. 불행은 ��탈리의 바닥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다가 불시에 수면 위로 올라온다(많은 자기 성장 영화가 그렇듯이 그 불행에는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 남편은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고 나탈리의 엄마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남편은 “그녀(다른 여자)와 살 거야”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나탈리는 “평생 날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등신이지!” 라고 말한다. 이게 끝이다. 그나마 농도 짙은 배경음악이 깔리며 나탈리의 초조함, 다급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나탈리가 증세가 악화된 엄마에게 찾아가는 장면이다. 몇십 년 동안 남편의 고향집 정원을 꾸미고 돌봐주는 데 많은 애정과 시간을 쏟은 나탈리는 이제 남편과 헤어지면서 그 정원과도 이별해야 함을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정원에 찾아간 나탈리는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정원에 핀 꽃을 몇 송이 꺾어 손에 쥔 채로 엄마에게 달려간다. 모든 것은 나탈리에게 불시에, 무자비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다. 나탈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상황을 견디고 대처해 나가는 것뿐이다.
다른 한편 이 영화에서 비중 있게 조명되는 역할은 ‘파비엥’, 나탈리의 제자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탈리는 ‘스탈린주의자’를 비꼬는 부르주아급 지식인, 파비엥은 언어와 행동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급진적 행동주의자다.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에, 직접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대안 출판 공동체를 만들어 산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는 파비엥. 나탈리는 남편과 엄마를 떠나보내고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며 파비엥의 공동체에서 몇일 머물지만, 파비엥과 친구들의 젊고 급진적인 공간에 또 다른 괴리를 느낀다. 나탈리는 이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걸까.
계속해서 나탈리에게 다가오는 것들. 나탈리가 집필한 총서는 매출고 하락을 이유로 출판사에서 절판되고, 파비엥에게 “사적인 영역의 실천만으로 만족하는 부르주아 지식인”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꿋꿋이 지켜 왔던 신념이 일순간에 비참해지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나탈리 주변을 맴돈다. 그런데 나탈리는 무너짐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파비앵의 세계(젊음과 급진성)를 시기했던 것 같다. 자기가 온���히 누릴 수 없는, 자신이 지나간, 그리고 적극적으로 버렸던 세계(나탈리는 원래 공산주의자였으나, 소련에 직접 갔다 오면서 스탈린주의를 혐오하게 된다)에 대한 후회 섞인 질투. 나탈리는 파비엥이 그의 애인과 물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장면을 길게 응시한다. 뒤이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나탈리가 고양이를 껴안고 침대에서 혼자 흐느끼는 장면이 이어진다. 참 외롭고 쓸쓸한 컷이다.
그러나 나탈리는 그 모든 다가오는 슬픔, 소외, 상실, 외로움을 견딘다. 그리고 살아 낸다. 다시 말하지만 나탈리는 강하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여자다. 크리스마스날 어두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전남편에게 “왜 왔냐, 내가 애인이랑 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핀잔을 주는 나탈리는 유머러스하고 당차다. 남편을 본체만체하며 딸과 사위, 아들과 함께 먹을 크리스마스 식사를 준비하는 나탈리, 만나는 여자가 고향집에 내려갔다는 남편에게 “크리스마스날 혼자라니 딱하네”라고 말할 줄 아는 나탈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갓 태어난 손자를 위해 파비엥이 만든 철학 입문 총서(영화에서 언뜻 비추기로는, 문고본 형태의, 삽화가 곁들여진 어린이용 철학책으로 보인다)를 선물하는 나탈리. 이것이 나탈리가 택한 삶의 화해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컷. 나탈리는 울음을 터트린 갓난아이 손자를 안고 노래를 불러 준다. “맑은 샘물가를 나 거닐다가/ 그 고운 물속에 내 몸을 담갔네/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나탈리는 손자를 안고 어쩔 수 없는 생의 파동을 느낀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다가오는 것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아무리 철저히 무장하고 훈련해도, 다가오는 상대에 따라 잠깐 주저앉거나 처참히 무너지는 것, 둘 중 하나다. 정말이지 지리하고 고된 반복이다. 달콤한 행복이나 생의 환희를 느끼는 순간은 고통과 고통 사이에 드물게 박혀 있다. 그만큼 아주 찰나다. <데미안>의 도입부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밝은 울림과 크리스마스의 향기와 행복에 둘러싸인 천사가 되는 것이야말로 달콤하고도 좋은 일이었다. 오, 그런 시간과 날들은 얼마나 드물게만 찾아왔던가! 선량하고 천진스럽게 허용된 놀이를 하면서도 나는 누이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결국 싸움과 불행으로 끝날 정열과 과격함에 자주 휩싸이곤 했다.”
그럼에도 나탈리는, 우리는, 왜 이별을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수영하고, 꽃을 준비하고, 고양이를 부르고, 학생을 가르치고, 껴안고, 노래할까?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된다.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랴,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영화 중 나탈리는 알랭의 『행복론』에 나오는 이 소절을 읊는다. 어쩌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 소절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과장해서 도식화한다면, 고통을 겪는 상태 = 행복이 오지 않은 상태 = 희망을 지속하는 상태 = 그 자체로 행복한 상태라는 뜻인 것 같다.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사소하거나 커다란 불행들이 다가와도, 그것들이 나의 육신과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도, 우리는 밤이 되면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잠에 들 수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것이 있어야 잠에 들 수 있다. 우리는 이 고통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행복을 기대한다.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해도 꽃을 사고, 잃어도 노래하고, 외로워도 잠을 청한다. 무엇이라도 욕망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만나기 위해서. 내일의 고통이 뚜렷이 보이는데도 잠에 들 수 있는 대담함과 용기는 대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일까. 할 수만 있다면, 쉬이 잠 못드는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순간들을 한데 모아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 나는 아직도 잠에 드는 게 어렵다.
2017.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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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9. ~ 2017.1.18.
회사 앞 몽슈슈에서 엄청 단 파르페를 먹으면서 그림일기를 썼다. 상담을 받을 때 수안이 내가 보여준 그림일기를 되게 좋아해줬었다. 앞으로 불안하고 두려워질 떄마다 그리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었는데. 두려운 감정을 그림으로 그리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나의 상태를 그렇게라도 기록해둔 건, 늘 두려움을 이기려는 내 마지막 발악이자 용기. 그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해준 그 친구에게 또 고마워진다. 곧 또 고마움의 표시를 해야겠다. 최근에 회사에서 좋은 친구 몇 명을 사귀었다. 셋 다 커피와 술을 좋아해서 가끔 함께 하기로 했다. 서니랑 여행 계획을 짜기로 한 날에 아보카도 수제버거 먹었는데 세상 최고 맛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호되게 아팠다. 월요일에 링겔 맞고 살아나서 화요일 아침에 신문 보며 흰죽을 먹는 나. 수요일엔 유치원에 아이들에게 그림책 읽어주러 갔다. 거기서 만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행갈이 자간 따위 없어도 너무나 예쁜 아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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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0. ~ 2017.01.06.
연말은 역시 좋은 친구들과 술로 마무리. 외삼촌이 새해 선물로 그림을 주셨다. 너무 맘에 든다. 심사정 화가의 <선동도해: 선동이 바다를 건너다>. 불로초를 구하러 동해를 건너 간다는 고사 내용을 토대로 그린 그림인데, 가다가 지쳐서 쪼그려 앉아 잠든 동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벌써 불로초를 얻어먹고 그대로 신선이 되었는지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이 평온해 보이기만 한다. 외삼촌은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알고 이 그림을 주신 걸까 싶을 정도로 멋진 선물이었다. 그리고 파트타이머가 선물해준 직접제작 페미니스트 기모 폴라티. 새로운 고민과 과제가 던져진 후부터 여성의 남성성을 읽으며 잠을 청했던 날들. 가을이랑 대면하고 두려움과 화해한 엄마. 나도 곧, 내 두려움이랑 화해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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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2 ~ 2016.12.28.
12월에 들어와 새롭게 ‘춤’을 시작하면서 일상의 리듬이 꼬이기 시작했다. 와중에 연말이라 회사 일도 많아서 회사에서 담배도 자주 폈다(파트타이머가 인생의 짐을 진 가장의 모습 같다며 찍어준 사진이 있네).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몸 변화 등으로 불면이 찾아온 나날들. 불면과 우울과 춤연습을 동시에 견디고 즐기고 울고 웃고 했던 날들(텔레토비 사이의 소년은 진정 12월의 나였다). 공연은 이주단체 송년행사에서 즐겁게 끝났고 춤은 그날로 큇. 그 사이에 미네가 또 예쁜 말 해줘서 자존감 올라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검정색 밤 한쪽에서 빛을 내는 크리스마스 트리랑 어바웃 타임이랑 와인이랑 만두(중요)가 있어서 덜 쓸쓸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불미스러운 성희롱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개미랑 같이 뚫으며 또 울고 웃고 그랬구나. 28일에는 오지은서영호 공연��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처럼 있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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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9 ~ 2016.12.3.
생일날. 문래동 사진전 데이트. 나의 페이보릿 푸드 칠리새우와 명화가 준 고래등과 함께 보낸 다정한 생일밤. 과장님 퇴사 후에 한남동에서 회동. 한라산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취해서 인생의 설움을 늘어놓은 과장님... 여전히 나의 일상을 지켜주는 오트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애담. 처음 보고 이상희 배우에게 푹 빠져서 이상희 나오는 감독과의 대화 갔지롱. 보고 나니 소원 성취하여 덕질을 멈추게 된 단순한 나란 인간. 미네의 엄청난 관찰력과 애정(ㅎ)에서 나온 마법 세계의 ��... 오네가 카카오선물 통해서 배송해준 우산. 나 이거 잘 쓰고 있어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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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1 ~ 2016.11.18.
1박 2일로 떠난 태안 여행. 충남 태안군 흥주사. 음악과 댄스와 드립과 담배로 점철된 휴가. 다음날 서울 돌아와서 바로 광화문 규탄 행진(개미랑 경찰 쪽에 앉아서 찹스테이크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던 기억이...). 그즈음 척이 소사 집에 초대해줘서 계란 후라이랑 김치찌개를 먹었다. 진짜 맛있었다. 그리고 내 생일 전날. 지은이랑 명화랑 이태원에서 세상에서 하나뿐인 촛불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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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부터 블로그 업데이트를 하지 못했던 아쉬움,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 생존신고 등을 이유로 하여, 죽지 않고 살아낸 나의 일상을 기록한다.
2016.10.3 ~ 2016.11.2.
술자리 레전드 탑 쓰리 안에 드는 행복했던 서니와 개미와의 술자리. 문래동을 사랑하게 했던 권나무 공연 in 재미공작소. 상도동에 신혼집을 차린 언니가 처음으로 아침밥을 만들어줄 때의 뒷모습(풍경이 예뻤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상도동 근처 공원에서 이상한 포즈로 운동하는 나. 자라섬 음악 페스티벌(저날 엄청 아팠다. 내내 너무 추워서 죽을 뻔). ��동이 이별 위로겸 비싼 와인을 마신 날. 기어이 찾아오고야 만 과장님의 퇴사, 그리고 송별회(노래방에서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를 부르는 애어른 엄사원). 사랑해 마지않는 고추튀김과 맥주를 먹으며 나도 혼술한다고 트위터에 자랑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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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노멀(New Normal)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일련의 ‘신화’가 2차 산업혁명의 산물이라는 점, 즉 이 세상에 나타난 지 반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완전고용, 중산층, 정규직, 전국적 고용 및 각종 사회 보험, 복지국가, 정년퇴직, 도시에서의 내 집 마련, 건강보험과 의료 체계, 대중적인 대학 교육, (물질적) 자본 축적을 통한 생산성 증대와 이를 통한 임금 상승 및 경제성장, 인구의 지속적 관리를 통한 재생산 혹은 증가 - 이 모든 것들은 2차 산업혁명이 완숙하여 전 세계로 확산되는 1930년대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들이며, 지금 우리 눈앞에서 유명무실하게 약화되거나 아예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변화된 산업 조건과 세계경제의 상황에서도 위와 같은 것들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지상 과제일까? 간빙기가 오든 열대 기후가 되든 우리는 반드시 ‘스케이트를 타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 반세기 한국 자본주의에서 살아온 우리의 삶은 어떨까? 열심히 사교육하여 좋은 대학 들어가면 좋은 직장 얻을 수 있고, 그러면 예쁘고 멋진 배우자 만나 예쁜 아이 둘 이상 낳고 40대 말쯤 되면 내 집을 장만하고, 50대 이후에는 노후를 준비하여 60 넘어 노동시장을 떠나 여가를 즐기다가 80쯤 삶을 마감한다. 이러한 개개인의 삶이 보장되는 경제체제가 유지되도록, 대규모 생산 시설을 갖춘 재벌 기업들이 계속 경제 성장을 주도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또 부동산 시장도 계속 떠받친다…. 70년대 이후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해 온 이러한 ‘신화’는 과연 얼마나 유효할까? 아마 부정적으로 전망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어떻게든 이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야기만 넘쳐 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교육 경쟁 열기는 식을 기미가 없으며, 대학 진학률도 그러하다. 모든 젊은이들과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정규직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 나는 차라리 야자수와 파도타기를 즐기는 삶으로 전환하는 쪽이 뉴 노멀에 제대로 대처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좋은 일자리’나 ‘내 집 마련’이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고자 한다. 50대 후반에 들어서도 은퇴 준비는커녕 하루 7킬로미터씩 뛰면서 체력을 단련하여 70세까지 돈을 벌 수 있는 몸을 만들고자 한다. 재벌 대기업에게 국가 경제를 맡겨야 한다는 신호는 단호히 거부할 것이며, 아이에게는 일류 대학 진학보다는 3차 산업혁명 시대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각종 기술을 연마하라고 다그칠 생각이다. 병원과 휴양지나 전전하면서 돈만 쓰는 노후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힘을 합쳐 거동할 수 있는 그날까지 무언가 보람 있는 일에 바쁠 수 있는 노후를 계획하고자 한다. 경제성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재산 증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와 우리의 ‘좋은 삶’이 우리 경제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생각을 스스로 실천하고 또 널리 알리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지금의 굼뜨고 연약한 나와는 사뭇 다른 존재가 되어야겠다. 뉴 노멀에서는 스스로 변해 가는 ‘진화’를 택하는 것이 크게 길할 것이기 때문이다.
홍기빈, <‘뉴 노멀’에서 ‘진화’하기>, 《릿터 1호》.
이외에도 홍기빈은 90년대 이후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체제(고도의 산업 정책과 보편적 복지 정책을 결합하여 높은 생산성 + 고부가가치의 좋은 일자리 + 낮은 실업률 + 높은 조세부담률 = 두터운 복지, 교육, 튼튼한 재정 구조, 노동생산성 증가, 노동권 보장)가 노키아(국민 기업)의 파산으로 이어지며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핀란드의 보수 정권이 ‘기본소득제’의 실험을 적극 검토하고 있고 이는 각종 사회 복지 시설과 인프라를 해체하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되어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고. 여하튼 선진국이라고 여겨지는 북유럽도 뉴 노멀 앞에서 위기를 맞은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홍기빈의 글은 대체로 잘 읽혔고 마지막 단락을 개인의 노력으로 끝맺은 것은 필자의 무책임 때문이 아닌 뉴 노멀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는 서글픈 생각도 ���다. 홍기빈 다음으로 장시복 부교수가 쓴 글 내용을 덧붙이면, 뉴 노멀(장시복은 뉴 노멀을 2008 세계 대공황 이후 발생한 자본주의 모순들, 즉 비정상들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비정상의 정상화’로 본다) 시대에서의 국가는 재벌 중심 체제를 강화/보완하는 존재이며 승자 독식 구조를 더 견고하게 만들 뿐이다. 동시에 국가는 역설적이게도 중산층 진입의 꿈, 즉 ‘좋은 일자리’와 ‘내 집 마련’ 신화를 내 또래의 청년들과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출산 1세대에게도, 또 그 뒷세대들에게도 영원히 주입할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홍기빈의 ‘열대기후(뉴 노멀)가 찾아왔으니 아이스 스케이트장을 만들(환경을 바꿀) 생각 말고 차라리 야자수 타는 법, 파도 타는 법을 배우자’는 말에 차라리 마음이 기우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 자체를 거부하는 것. 국가가 호명하는 중산층의 생애주기(취업-연애/결혼-출산-자녀교육)에서 탈피하는 것. 그들의 예상과 기대를 배신하는 것. 정부의 거짓말에 우리는 얼마나 오래 냉소해왔는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우리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들의 연대’를 구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요새 트위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강남역 분향소 앞에 함께 고개를 떨구고 침묵하고 있던 여성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우리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믿는다. 경험으로 단단하게 묶인다. 그 경험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대단히 오랜 시간 누적된 폭력의 공기다. 우리는 그 공기 속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말 각잡고 생각해볼 문제다. 누가 그 단단한 ‘뉴 노멀’에 한 획을 긋는 주역이 될 것인가. 『확률가족』을 기획한 박해천 씨는 젊은 여성들이 뉴 노멀 시대에 혐오의 표적으로 급부상했다고 말했다. 주로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 세대, 즉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사이 출생한 여성들이다. 이들은 저성장 시대의 진입과 함께 부모 세대의 중산층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안다. 이들이 ‘어머니’와는 다른 삶의 모델을 모색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가부장제가 만든 남성 중심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회적 이동에서 좌절을 경험하거나 생존 경쟁에 시달려야 하는 젊은 남성들은 ‘화목한 중산층 가족’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가부장제의 성 역할을 거부한 젊은 여성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반응하며 분노와 혐오의 감정을 쏟아낸다. 하지만 박해천이 말하듯 ‘용도 폐기’를 목전에 둔 권력이다. 우리의 경험을 믿기로 한 우리는, 더 이상 그 권력에, 그 중산층 가족 신화에 목매지 않는다. 놀랍게도 박해천은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맥락들로 인해 젊은 세대의 여성들을 중산층 가족 모델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집���적 주체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사회적으로 확장해 간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국민 이후의 현대적 개인’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섣부른 전망일 수도 있다.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출산 1세대의 사회 진출이 목전으로 다가온 상황, 조난신호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반면 희망의 조짐은 그리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섣부른 전망, 맞다. 하지만 우리가 바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중요한 집단적 주체가 될 거라는 말도, 맞는 것 같다. 밑바닥을 쳐야 위로 올라올 수 있다고 했던가. 우리는 최악을 딛고 올라서고 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그리고 너희와 무엇을 하면서 살면 좋을까. 나는 조금씩 방향을 바꿔서 움직여보려고 한다. 첫 단계는 이렇다. 가능하다면 ‘좋은 일자리’의 신화부터 배신해보는 것. 나는 안정적인 직장의 꿈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대신 월급쟁이로 2년치 살아본 경험, 그 폭력의 공기를 더 많이 믿는다.
=========== 이하 참고 자료.
조형근, <응답하라 2016은 가능한가? - 20세기 청년 고아들과 뉴 노멀 시대 약자들의 연대>, 《릿터 1호》.
장시복, <’뉴 노멀’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 《릿터 1호》.
박해천, <2016년, 중산층 가족 모델 이후의 세계>, 《릿터 1호》.
2016. 10. 18.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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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소음 없는 집, 소음 없는 내 방에 있다. 너무 평온해서 죽어도 좋을 것 같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다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을 주욱 둘러봤다. 내 죽음을 생각했다. 내가 당장 내일 죽는다면, 지금 이 상태의 방이 내 지인들이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내 마지막 흔적이 되겠구나. 한쪽이 불룩 파인 로션통, 헌 이어폰과 시계가 담긴 파우치, 책장에 삐죽빼죽 꽂혀있는 여러 색깔의 책들. 투명 비닐에 담겨 있는 주짓수 도복, 그 옆으로 널부러져 있는 검정색 가방 두개가 보인다. 하나는 숄더백, 하나는 백팩. 검정색을 좋아했구나, 라고 생각해줄까. 통기타를 지나 책상으로 오면 내 용기와 강단이 반드시 날 행복으로 이끌어줄 거라고 매일같이 말하고 있는 너의 3월 편지, 그 편지를 맨앞에 두고 캐롤 엽서와 비엠아이 진단표, 주변에서 도착한 청첩장들을 겹겹이 안고 있는 나무 독서대가 보인다. 그 오른쪽으론 요새 읽는 책들이 두서없이 가로로 쌓여있고 그 앞엔 집에서만 끼는 검정 뿔테 안경, 가만한 당신에 부록으로 담겼던 신문이 놓여있다. 마우스가 놓여있는 걸 보니 신문을 마우스패드로 썼나봐, 하면 옆에서 아빠가 맞다고 말해줄까. 멀쩡한 마우스패드 놔두고 신문을 패드로 쓰냐며 뭐라한 적 있다고 말해줄까. 혹시 그런 사소한 핀잔도 후회할까 아빠는. 그러면 어쩌나. 책상을 지나면 드디어 푸른색 침대가 보이고 흰색 이불 푸른색 베개가 보인다.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내가 여기서 그렇게 잠을 못 이뤘을까 떠올려볼까. 그게 슬플 것 같다 내 친구들은. 하지만 내가 많이 노력했다는 것도 알아줄거야. 베개 옆엔 윤코랑 윤새가 있고 그들이 어두운 밤 누구보다 나와 가장 가까웠던 베스트 프렌드였다는 것도. 사인까지 정해두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당장 내일의 죽음을 두고 시작한 이야기고, 요새 내 화두가 불면이고, 그러니까 어쩌면 침대에서 가장 많이 울고 싶지 않을까. 나를 사랑한 사람들은. 하루라도 함께 누워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까지나 노력했고 너희들은 최고였어. 그러니 너무 수고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나는 지금 좋은 편지를 쓴 것 같다.
2016. 10. 1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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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 좋아해? 라고 묻는 사람이 하도 많은데 그때마다 길게 고민하는 게 왠지 맘에 들지 않아 하나로 정해놓고 앞으로는 간격 없이 대답하자고 다짐했다. 어떤 사람 좋아하냐면 자신과 싸울 (struggle)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싸워서 이겨본 사람. 그런 사람 좋아한다. 됐지? 내가 생각해도 좋은 대답이다.
2016. 10. 1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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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못 잤어, 라고 말했을 때 지체없이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면서 왜, 왜 못 잤어, 라고 물어봐 주던 게 자꾸만 생각이 난다. 이렇게 힘든 날이면 그런 다정함이 여지없이 떠오른다. 그 다정함에 모든 걸 맡기고 싶어진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고 싶은 아이일 뿐이고 이렇게 다시 온몸이 무너져내릴 듯 방문고리를 돌리는 것조차 힘이 드는 날이면 내가 아닌 진짜 어른을 찾고 싶고 어른 거인 같은 사람을 만나 그 넉넉한 품속에 들어가 머리를 숙이고 싶다. 아이는 촉각을 세워 시간을 세지 않는다. 머리를 숙이고 원없이 울다 보면 그 품이 축축해지고 그러면 그 축축함이랑 밤새 있고 싶어지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기어이 어른 대 어른도 되보고. 거꾸로 너가 아이 내가 거인도 되보고. 그래 그러니까, 너 언제까지 혼자 애써서 버틸 거야. 이제 나는 대답을 해야 한다.
2016. 10. 1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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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 날
안녕. 오늘은 일기를 쓰고 싶었어. 써야 했어. 어제는 하루종일 집에 누워만 있었어. 먹고 싶은 걸 먹으면서, 보고 싶은 걸 보면서. 내내 벌러덩 누워 만화책을 읽었고 먹고 싶은 게 생기면 꺼내 먹었어. 물론 하나도 주저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먹을까 말까 누울까 말까 운동하러 갈까 말까 자잘한 고민의 순간들은 있었거든. ㅋㅋㅋ 하지만 결과만 보자. 결과만 보면 주저함이 없었던 것마냥 하고 싶은 걸 다 해버린 날이야. 편한 것만 했어. 편한 욕망만 따라갔지. 너무 누워 있어서 등이 아플 정도였지만 그만큼 일주일 동안 쌓였던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좀 풀린 것 같아. 그래 그런 거지. 매일 엄격하게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근데… 웃긴 건 내가 이 패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야.
오늘은 다시 내가 살던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오니까 안도감이 들더라고. 오트밀을 먹고, 스트레칭을 하고, 농구를 하고, 샤워를 하고, 깨끗이 몸을 단장하고, 밤공기를 마시고, 걷고. 어쩌면 내 가장 큰 욕망은 이런 것일지도 몰라. 내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컨트롤하고 싶다. 훼손되고 싶지 않다.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쥐고 싶다. 깨끗한 차림새로 길을 걷고, 바른 자세로 허리를 피고 숨을 쉬고 싶다. 그렇게 말끔한 태도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러니 어제로부터 ���늘로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가. 결국 나는 내가 원하는 일상을 지키러 금방 돌아오고야 마는구나. 사실 좀 고맙더라고. 나한테 말이야. 어떤 면에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은 거니까.
구체적으로도 오늘은 참 좋은 날이었어. 저녁 늦게는 개미와 권나무 콘서트를 가는 일정이 있었어. 그 전까지 슬기님과 둘이 서울고 운동장에서 농구를 했지. 농구를 하기 전까지는 몸이 뜨겁고 머리가 아프길래 걱정이 좀 됐는데, 막상 몸을 움직이니까 기운이 다시 나더라고. 거기다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농구 골대로 뛰어가는데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과 사이사이 비치는 햇빛이 얼마나 예쁜지 본 사람만 알 거야. 그 기분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건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는 거였어. 무슨 청춘 드라마 찍는 줄 알았다니까. 슬기님과는 특이하게도, 사적인 얘기를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농구만 열심히 할 수 있는 신선한 느낌이 있어. 서로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 친해지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농구를 하는 거야. 정말 농구만. ㅋㅋㅋ 서로에게 공평히 패스를 하고, 슛 기회를 주면서. 이런 모임도 흔치 않아서 진득하게 이어가보려고 해. 농구도 점점 더 재밌어지는 참이고.
말끔하게 씻고 나서 입고 싶었던 가디건을 걸치고 개미를 만나러 문래동에 갔어. 처음 가본 동네였는데 정말 너무 좋더라. 길이 넓고 건물은 낮고 밤공기가 차가운 문래동에 첫눈에 반해버린 것 같아. 이 동네에 대해 천천히 더 많은 걸 알아가고 싶어. 근처 골목골목, 문래역 건너편 공원, 그리고 재미공작소까지. 연남동과 한남동, 경리단길과는 또 다른 느낌인데. 마치 청년과 노인이 섞여 있는 느낌이 아닐까 싶다. 전체적으로는 어둡고 넓고 낮은데 사이사이 촘촘하고 밝단 말이지. 오늘 권나무가 최고로 노래를 잘 불러서 그랬을까. 어두운 문래동 속 작은 조명들이 눈에 들어와서 그랬을까. 작은 홍학들이 핑크색 불을 켜고 그 앞에서 사라지는 마음과 똑같이 반복되는 일들을 보았다고 노래하는 권나무, 사랑을 도망친 적 있냐는 내 질문을 뽑아서 내 맘을 설레게 한 권나무, 사랑을 도망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한다는 권나무, 사랑을 도망치지 않으려 애쓴다는 권나무. 어찌나 그 공간이 좋았던지 나는 핑크색 주황색 조명들이 예뻤던 재미공작소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그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했어. 궁금한 게 생기는 밤이었어. 그 시간을 너와 함께해서 더 좋았을 거야. 지하철 안에서는 너에게 내 고민을 잠깐 얘기했어. 답이 없는 얘기이자 답을 찾는 얘기인데 너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얘기를 들어주더라. 조용히 집중해주는 거 있잖아. 그게 참 고마웠어. 나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어. 그냥 좋은 사람 말고 쓸모있는 사람. 그리고 그게 너무 어렵다고 이야기했어. 너는 내가 좀 더 좋은 공간에 갈 수 있다고 말해줬어. 하지만 무언가는 반드시 포기해야 할 거라고. 좋은 말이었어. 분명 내게 큰 도움이 되는 말이었을 거야.
오늘 같은 날은 혼자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어. 특히 어두운 집에서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서 언니가 사는 집에 왔어. 여긴 따뜻한 집 냄새가 나. 뭔가 대단히 온화한 냄새 있잖아. 보호받는 것 같은. 곧 잠이 들겠지? 내일은 책을 읽을 거야.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생각해볼 거야. 내가 꾸려나가고 싶은 내 미래를. 내 현재가 될 앞날을. 나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보다. 이렇게 오늘은 일기를 쓰고 싶었고 또 써야 했어. 나 오늘의 기분들을 되게 기억하고 싶을 것 같거든. 더 많이 살아있고 싶어지는 기분들이 많은 날이었거든. 그럼 안녕, 또 보자.
2016. 10. 08. 토요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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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린 사자
· 어제 카멜레온 한 마리를 봤는데, 녀석은 나무 둥치에서 땅으로 기어 내려오던 중이었죠. 카멜레온이 골반―아주 작은 골반에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장골(腸骨)이 튀어나와 있지만, 등뼈 위에서 움직이는 방식은 달라요―을 뒤트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능숙했어요. 녀석들은 평평한 바닥과 수직으로 선 벽에 동시에 체중을 실을 수 있다고 하네요! 어려운 협상을 할 때는 녀석들에게 배워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알렉시스의 말에 따르면 카멜레온은 그리스어로 ‘엎드린 사자’라는 뜻이래요. (pp.17-18)
· 장례식을 마치고는 이싸의 집에서 베라 이야기를 했어요. 아무 말이 없을 때도 우린 그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였죠. 죽은 이들에 대해선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어요, 아마 죽은 이들도 그런 침묵의 대화를 더 편안해 할 거예요. 베라는 죽었고, 사라져 버렸죠. 그런 사라짐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둥글게 모여 앉았고, 그 중심에 베라의 사라짐이 있었어요. 그렇게 기하학적인 모양새였죠. 그녀의 무덤에서 온 지 세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치 석 달은 된 것 같았어요. 아주 작은 일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는데, 간단히 말하면, 그 세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던 거죠. 거의 매 순간 우리들 중 누군가는 사라져버린 것, 그녀와 함께 사라져버린 것을 새로 떠올렸고, 그에 대해 앞으로 우리가 의지할 사람 역시 우리밖에 없었어요. 그게 우리가 둥글게 모여 앉아야만 했던 이유였죠.
이싸의 집에서 우리는 둥글게 모여 앉아 베라의 목소리며, 그녀의 귀걸이, 마치 꽃다발 들듯 총을 들던 그녀만의 모습, 그녀의 웃음, 조바심을 느낄 때면 숱이 많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던 모습, 그녀의 편두통, 그녀가 ���아했던 파인애플 등을 다시 떠올렸어요. 그리고 결국엔 모두들 말이 없었죠. 그렇게 오랜 시간 앉아 있었어요.
그 침묵을 깬 건 이싸였어요. 이제 곧 우리는, 그가 말했어요, 함께든 아니면 혼자서든, 여러 곳에 가게 되겠죠, 그게 어디든 베라는 이미 거기 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매번 그녀는 우리가 알아보기 전에 그곳을 떠나겠죠, 우리가 아무리 일찍 도착한다 해도 말이에요!
이싸의 말을 듣고, 나는 울었어요. 몇 시간을 계속 울었죠. (pp.149-152)
『A가 X에게』, 존 버거
2016.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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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江), 강(降), 강(强).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엔 봄이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엔 파란 물감이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오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너의 얼굴이 황홀히 눈을 감아봐도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이 아름다운 너의 얼굴이
권나무, 「소년 1,2 」, 『가내수공업노래제작소』
모든 기찻길들이 등 보이며 사방으로 흘러나갔지
스무 살이 되길 별러서 경부선을 타고 떠났지 나는 늘 하나의 작은 강으로 사는 거라고 여겼었지 때로는 온종일 [항해]*를 흥얼거리고 다녔었지 강은 돌아오는 일이 없어도 사람은 어쩌면 돌아가지 대간하고 지친 한 덩이로 경부선을 거슬러가지
생각의여름, 「대전」, 『다시 숲 속으로』
일단, 적어두기.
2016.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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