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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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인생 개같네 ㅋㅋ
중학교 3학년인데 자식새끼 방문잠금장치 작살내는 부모 꼬라지가
아 존나 웃겨
시발 난 어떻게 살아가라고
어떤 부모새끼가 자기가 돈주고 산 패드라면서 강제로 그림을 못그리게 하냐 ㅋㅋㅋㅋㅋ
아직 진로도 못정했는데 지금 나한테 가장 중요한게 고등학교라고?
지랄하네 자식새끼 관심사도 모르는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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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motions (part 1)
가뜬하다 (adj.) : refreshed; light-hearted 몸이나 마음이 가볍고 상쾌하다. Body or mind being light and refreshed. 예.) 가:너 오늘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인다? 나:과제를 다 끝냈더니 마음이 가뜬한 게 날아갈 것 같아.
가련하다 (adj.) : pitiful; poor; pathetic 마음이 아플 정도로 불쌍하다. Sadly sick or troubled. 예.)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형이 매우 가련하다.
가소롭다 (adj.) : ridiculous; absurd 비웃고 무시할 만하다. Deserving to be belittled and ignored. 예.) 형은 내 말을 형편없고 가소롭다는 듯이 들은 척도 안 했다.
가엾다 (adj.) : feeling pity 마음이 아플 정도로 불쌍하고 딱하다. Feeling heartfelt pity or sympathy for someone. 예.) 나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평생을 ���생하신 어머니가 가엾게 느껴졌다.
가증스럽다 (adj.) : despicable; detestable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화가 날 정도로 몹시 밉다. Behavior or a remark being mean or hypocritical enough to upset others. 예.) 승규는 남들 앞에서만 착한 척하는 지수의 행동이 가증스러웠다.
가책 (n.) : admonishment; rebuke 자기나 남의 잘못을 꾸짖음. The act of scolding oneself or others for doing something wrong. 예.) 나는 친구를 속이고 한동안 심한 죄책감과 가책에 시달렸다.
갈등하다 (v.) : be ambivalent 마음속에서 어떻게 할지 결정을 못 한 채 괴로워하다. To experience agony and inner struggle over what to decide. 예.) 나는 시험 준비를 할까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까 한참을 갈등했다.
감개 (n.) : deep emotion 지난 일이 생각나서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감동이나 느낌. One's state of feeling deeply moved and getting emotional from one's memory of past events. 예.) 작가는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쓴 소설이 출판된 것을 보고 깊은 감개에 젖었다.
감개무량하다 (adj.) : touched deeply; emotional 지난 일이 생각나서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동이 매우 크다. Feeling deeply moved and getting emotional from one's memory of past events. 예.) 상을 받은 여배우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소감을 이야기했다.
감격하다 (v.) : be touched 마음에 깊이 느끼어 매우 감동하다. To be deeply moved and touched by someone or something. 예.) 대회에서 일 등을 한 선수는 감격한 표정으로 소감을 말하였다.
감동하다 (v.) : be moved; be touched 강하게 느껴 마음이 움직이다. To be touched by something very deeply. 예.)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동했다.
감명 (n.) : impression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을 느낌. 또는 그런 감동. A state of being deeply touched, or such a feeling. 예.) 지수는 가족의 사랑을 그린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
감미롭다 (adj.) : mellow; sweet 달콤한 느낌이 있다. A story, voice, song, etc., sounding sweet. 예.) 김 감독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행복하고 감미로운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감복하다 (v.) : be impressed; be moved 진심으로 크게 감동하다. To be impressed deeply and sincerely. 예.)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에 감복�� 박수를 쳤다.
감탄하다 (v.) : admire; wonder 마음��� 깊이 크게 느끼다. To feel strongly and deeply about something. 예.) 관객들은 서커스 단원의 공중 묘기에 감탄하여 박수를 쳤다.
감회 (n.) : reminiscence 마음속에 일어나는 지난 일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 Thoughts or feelings on the past. 예.) 아버지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감회에 젖으셨다.
개탄하다 (v.) : deplore; lament 분하거나 안타깝게 여겨 탄식하다. To sigh at something out of anger or regret. 예.) 나는 경솔한 말 한마디로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낸 뒤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개탄했다.
거부감 (n.) : sense of refusal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느낌. The feeling of not wanting to accept something. 예.) 이 책은 고전을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알맞게 개작하여 그들이 거부감을 갖지 않고 쉽게 읽을 수 있다.
걱정하다 (v.) : worry; be worried; be concerned 좋지 않은 일이 있을까 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다. To feel fearful and anxious that something bad might happen. 예.) 그는 다가올 시험에 대해 항상 걱정했다.
겁나다 (v.) : be afraid; be scared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다. To feel afraid or scared of something. 예.) 나는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차 타는 것이 겁난다.
격노하다 (v.) : be furious; be enraged 몹시 화를 내다. To be extremely angry. 예.) 강제로 해고된 직원들이 회사에 격노하여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격분하다 (v.) : be furious; be enraged 몹시 화를 내다. To be extremely angry. 예.) 사기 피해자들이 격분하여 사기꾼의 멱살을 잡고 분통을 터뜨렸다.
격정 (n.) : passion 강렬하고 갑자기 생기는 참기 어려운 감정. A powerful, sudden burst of uncontrollable emotion. 예.) 나는 알 수 없는 격정으로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겸연쩍다 (adj.) : embarrassed; abashed; sheepish; awkward 쑥스럽거나 미안하여 어색하다. Awkward due to being shy or sorry. 예.) 나는 짝사랑했던 그를 마주 대하기가 겸연쩍어 자리를 옮겼다.
sources:
KOR-EN Basic Korean Dictionary through Naver Dictionary.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Accessed 14 July 2024. <https://en.dict.naver.com/#/main>.
Park, In-Jo., & Min, Kyung-Hwan (2005). Making a List of Korean Emotion Terms and Exploring Dimensions Underlying Them. Korean Journal of Social and Personality Psychology, 19(1), 10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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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와이프분 좆되네요 능욕 좀 하겠습니다
와이프년 보자마자 옷 찢어버리고 빨통 거칠게 주무르면서 스팽해주고 강제로 무릎꿇게한다음 얼굴에 좆 올려서 따뜻하게 해주면 수치스러워서 싫은 표정 짓겠지? 그럼 좆으로 싸대기 때려주면서 입보지에 강제 쑤셔 넣어줄게 처음엔 컥컥거리면서 반앙하지만 결국에 목구멍 깊이 좆 받아들이고 내 좆물 끝까지 다 받아먹고 삼키게 해주고싶어
취향에 맞으신다니 좋네요 눈 앞에서 초대남한테 따먹히거나 갱뱅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와이프가 너무 보수적이라 허락을 안하네요... 말씀해주신대로 당하는 날이 올때까지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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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6년간에 걸친 잠에서 깨어났다. ... 이제 나 자신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혹한 일은 내 앞에 거대하고 무의미한 하나의 관념이 맥 빠진 듯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구토 - 사르트르
앉아만 있어야 하는 업무 자리를 보니 위 문장이 떠올랐고, 나는 퇴사 했다. 1월 첫째 주에 했으니 약 2주가 흘렀다. 그동안 생일과 함께 B형 독감을 맞이했고, 오랜 친구들을 만났고, 매달 가는 보육원은 방문하지 못했다.
대부분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고 있지만 마음은 꽤 편안하다. 8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씻고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는다. 1시엔 점심을 만들어 먹고 읽던 책으로 돌아간다. 오후쯤 되면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와 고전영화나 독립영화를 1~2편 본다. 가능하면 유튜브나 뉴스는 보지 않는다.(instagram은 이미 작년에 끊은 상태) 그러다 보면 좋은 콘텐츠에도 지쳐 멍해지는 상태가 온다. 이때는 낮잠을 자거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을 만든다답변하기 위해 다시 책을 읽거나 옛날 기억을 들추완성하지 못한 체 하루가 마무리된다.
남들이 지겨워 보이기도 하는 이 루틴은 나름 의도된 것이다. 약 4년간의 근무 기간과 이 일을 시작하기 위해 노력한 1년, 그간 이룬 것들(금연 운동 면허 자립 등)이 있음에도 전혀 채울 수 없는 공허함 때문이다. 강제로 질문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태까지 간 것이다. 가족은 연애나 결혼 등을 이유로 말하지만, 꼭 그런 곳에서 삶의 의미를 의존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순히 열심히 살며 최대한의 자립 고독에 대한 수용이 가능하면 괜��아질 것 같았는데, 내게는 충분치 않아 보였다.
왜 퇴사 날 구토감이 들었는지, 5년간의 성과가 부질없게 느껴지는지, 뻔하고 낡은 질문들을 매번 가져오는지 알 수가 없다. 직업에서의 성취감 때문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내지 않는 남성성 때문인지, 혹은 정말 예술가로서 살지 않기 때문인지 도통 알기 어렵다.
그래서 떠오른 방법이란 시작점을 방문해 보는 것(태어나고 자란 곳을 다시 가보는), 여러 분야의 지식(철학 과학 사회과학 등), 부족한 관용(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는), 예술적 승화 프로젝트(책을 쓰고 사진집을 만드는), 가본 적 없는 곳에서 미아 되기(유럽 특히 독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책을 바로 일기 쓰듯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제작 단계를 설정하고, 그야말로 책과 영화에 파묻혀 살고 있다.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 맞는 게 이 안에서 지루함과 외로움이 우선시 되거나, 대충 유럽 여행 다녀오면 안돼? 어차피 답도 없는 질문을 또 하게 될 텐데 왜 지금? 하고 타협하고 싶은 기분도 든다. 그렇지만 찾지 않고 그저 참기만 하면서 정신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 10대 시절 사적인 공간이 없어 집 화장실을 아지트 삼아 그 안에서 프로이트를 읽던 엄마는 요즘 중국 드라마를 본다. 집안 환경과 애인 문제로 평생 시달리는 친구는 매일 밤 추운 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달린다. 형은 간신히 찾은 방법을 기도문처럼 외우며 너도 해라고 말한다.
나는 살아있고 싶다. 온전히 나로서.
그건 불가능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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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 얼굴 왜 동그라미 아니냐
진짜 측면 그리기 너무 어려워요
사실 정면도 어려워.... 마지막 썬 비율로 그리면 인간들도 커져서 강제로 줄이는중
절대 커지지마...
썬이나 문이나 둘다 인간 옷 입으면 팔다리 삐져나올거같음
분장이랍시고 햇지만 너무 숏한 옷으로 인해 다 들키고마는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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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밉다가도 좋은 두 가지. 첫 번째 일. 매일 쓸거리를 찾아 나서야 하고 여전히 거절 당하는 것이 두려워 취재도 겁이나지만 몰두하는 그 순간 나를 옥죄는 또다른 고민들이 잊혀진다. 좀만 더 하다가 때려치자를 되뇌이고 되뇌이다보니 그냥 계속한다. 나를 강제로 살게하는 일마저 없으면 잡생각과 우울에 빠져 지낼 게 분명하다. 두 번째 나도 너도 너무 잘 아는 그 사람. 나를 가장 슬프게 했다가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 모두가 극단을 오가는 관계의 끝은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만 유일하게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관계이기에 이 또한 놓지 못한다. 정답을 찾기를 이젠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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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를 나와, 다음 행선지를 생각해 본다. 어디 보자, 수첩에 남은 일거리가… 아, 그래. 형님에게 받아 둔 의뢰가 있었지.
사건 명, 다부진 정보원. 단서는 수수께끼 같은 엽서 한 장이 전부다. 엽서에는 오래된 교회 그림과 형님의 짧은 편지. 그는 이곳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며, 그림 속 교회로 동생을 부르고 있다.
교회라. 그러고 보니, 이 주변 어딘가에서 그림 속 교회와 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마주친 적이 있는 듯하다.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스칼라디오였을 텐데.
일단 움직이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할까. 오랜만에 맛보는 코르도나 밤 풍경도 느긋이 즐길 겸.
초반에 열심히 발품 팔아 둔 보람이 있었군. 다행히 몇 걸음 안 가 문제의 교회를 찾을 수 있었다. 스칼라디오 서부 하버 대로 인근. 정확한 위치는 여기.▼
그러나, 교회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셜록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1회차 때의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근처에 있을 그 가게를 찾아도 보지만…… 아닌가?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나.
교회 주변을 아무 소득 없이 배회하던 중, 화면 오른쪽 위에 꽂아 둔 단서가 눈에 들어와 다시 교회 앞으로 복귀. 상냥한 스웨덴 광부에게 말을 걸자, 교회가 스페클드 가와 보나파르트 가의 교차로에 있다며 친절히 길을 가르쳐 준다. 저기요, 아저씨. 그 교회 바로 아저씨 등 뒤에 있는 것 같은데요. 쉬운 걸 굳이 빙빙 돌려 설명�� 필요가…-.-
그나저나, 마이크로프트의 심부름꾼은 대체 어디 있담?
엉뚱한 사람 붙들고 몇 번 허탕을 친 끝에, 형님이 보낸 전령과 만나 의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형님 왈, 이전 사건에서 네 패기를 증명했으니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이전 사건? 어떤 사건을 말하는 거지?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일전의 리들리 사건 얘긴가. 뭐, 아무튼.
마이크로프트는 교회 뒷편에 정보원이 운영하는 카펫 가게가 있다며, 맡긴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가서 확인해 달라고 한다. 역시 내 기억대로 가게가 있기는 했군. 좀 전에는 이 편지를 안 읽고 가서 못 찾았는지도.
그럼, 다시 가 볼까.
다행히 과거 어떤 사건처럼 피로 얼룩져 있지는 않지만, 이번 가게도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분위기. 가게 주인의 대사로 보아, 그의 딸이 누군가에게 강제로 끌려 간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확인하려 해도,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갔는지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 할 수 없지. 언제나처럼 현장에서 답을 찾아 보자. 분명 딸의 행방을 유추할 만한 단서가 있을 것이다.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계산대 위에 꽂힌 칼이 시선을 잡아챈다. 칼은 부러지지 않은 게 신기하다 할 만큼 심하게 녹슬어 있는 상태. 안타깝게도, 싸구려에 매우 낡았다는 점 외에 특별히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언뜻 범행 흉기인가 했더니, 그저 가게 주인을 겁주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다.
칼 아래의 피 묻은 편지도 기대와 달리 단순한 협박장이었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계산대 오른쪽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범인?
발자국을 발견하고 계산대 뒤를 살펴보니, 지저분한 작업복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범인이 실수로 남긴 단서라면, 이번 범인도 꽤 부주의한 성격이거나 초범에 가까울 듯하다.
작업복 조각 한 쪽에 수상한 검정 얼룩이 묻어 있다. 호오, 이건. 간만에 화학 시간?
성분 분석 결과, 이 검은 얼룩은 크레오스트로, 철도 침목을 관리하는 데 쓰이는 물질이라 한다. 바꿔 말해, 철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아 다음 단서를 얻으라는 얘기. 코르도나에서 철도종사자들이 자주 출몰할 만한 곳이라면… 광부의 말로? 아니면, 실버튼 정도일까. 운이 따른다면, 더 멀지 않은 곳에서도 적당한 탐문 대상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늘 그렇듯, 우선은 가면서 생각하기로.
광부의 말로 북쪽, 스티븐슨 다리를 향해 가는 길. 도중에 만난 신문팔이 소년이 지난 사건의 후일담이 실린 호외를 팔고 있다. 내용을 보니, 예상대로 범인에게 너그러운 판결. 그래도 생각보다 형량이 너무 가벼운 듯해, 내 선택에 새삼 후회가 일기도 한다. 만약 파비오가 가해자고 범인이 피해자였다면 어땠을까. 만약 파비오가 정당방위 중에 자신을 해치려던 범인을 죽였다면? 그때도 법정은 파비오에게 똑같은 자비를 베풀 수 있었을까.
한편, 셜록이 냉정한 심판을 내린 PS 진영에서는 얄짤없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나마 완전히 썩지는 않은 모양이라 다행이군.
이런 생각을 뒤로 하며 어느덧 목적지인 다리까지. 그러나, 시간을 잘못 골랐는지 애초에 장소 선정이 글렀는지, 다리 위에는 요통에 시달리는 밀주업자 한 명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허탈하네. 뭐, 코르도나에 철도 깔린 데가 이 다리뿐인 건 아니니까.
지도를 펼쳐 다음 탐문 장소를 물색하던 중, 문득 광부의 말로에서 아직 처리하지 않은 일 하나가 더 떠오른다. 양봉장 가는 길에 있던 텅 빈 새장. 한때 이 지역의 번영을 상징했던 은빛 새. 크레오스트 조사하면서 그때 그 카나리아에 얽힌 사연도 같이 알아봐야겠다.
탐문에 필요한 작업복이 수중에 없길래 먼저 시장에 들렀다. 시장 온 김에 골동품 상점에도 들러서 새로 나온 매물 확인. 느낌표가 떠 있어서 일부러 와 봤는데, 이번에도 딱히 마음에 드는 소품은 없군. 음.
이 가게 주인장도 취향 꽤 확고하셔. 다음에는 구색 좀 다양하게 갖춰 놓으세요, 사장님.
시장에서 빌린 일꾼 옷으로 갈아 입고 본격 탐문 개시. 지나가던 크림인 책 장수가 여기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라며, '선의 꽃'이라는 동네 주점을 언급한다.
선의 꽃? 선의 꽃이라면 예전에 다른 사건 조사하러 왔다가 위치 알림으로 마주친 적이 있다. 장소는 레스트레이드 가 북쪽 골목길 근처.
당시에는 '뭐지?' 하고 지나쳤던 것이 이제 와 이렇게 연결이 되네. 몰라도 딱히 나쁠 일은 없지만, 어떤 사건과 이어진 곳인지 추측해 볼 단서가 있었으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사연 들으러 주점 가는 길에 어느 목수한테서 크레오소트 쪽 단서도 입수했다. 막연한 처음 짐작과 다르게, 이 물질의 출처는 실버튼. 정확히는 실버튼 북부 에버노트 가와 실버 웨이 교차로에 있는 실버튼 항구 철도 창고라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다리 건너쪽도 슬쩍 살펴볼 걸 그랬나?
어쨌든 필요한 단서는 얻었으니, 주점에서 후딱 볼일 끝내고 실버튼으로 넘어가자.
그리하여, 주점 '선의 꽃' 앞. 동네 주민 두 사람이 때마침 사건 속 카나리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광부들이 도둑맞은 옛 영광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알고 보니, 은새를 훔친 ���인은 광산 근처 사고로 가족을 잃은 한 남자였다. 슬픔을 견디지 못한 남자는 새를 훔쳐 바다에 던졌고, 그 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고. 광부의 말로는 광산으로 영광을 누렸지만, 남자는 그 영광에 가족을 희생 당했다고 생각한 걸까. 슬퍼서 더 궁금한 사연인데, 간단하게만 언급되고 지나가서 조금 아쉽다.
자, 이렇게 또 한 건 일단락 지었고. 다음은 납치된 니카마 아가씨를 찾아 실버튼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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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페낭의 화인사회에서 극심한 성비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돈 많은 화인 남성은 여러 여성을 정실부인이나 첩으로 두었다. 그 여성들은 현지인일 수도 있고, 중국에서 불러들인 아내와 식솔, 친지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대체로 페낭 화인사회에서 여성의 이주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갈린다. 팔려왔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상대적인 자유의지 여부로 나뉘는 것이다. 고무의 시대 이전 페낭 화인사회에서 화인 여성은 소수의 ‘뇨냐’를 제외하면, 노예이거나 매춘부이거나 무이차이muni tasi妹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인 여성이 독자적으로 자유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Lai, 1986: 16).
중국인의 페낭 이주부터 논란이 된 것이 여성노예의 문제였다.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이후에도 노예는 지속적으로 페낭에 수입되었다. 페낭의 화인들은 수마트라 서부 니아스제도의 니아스족 여성노예를 특히 선호했다고 한다(Lubis, 2009: 154). 니아스족은 무슬림 아닐뿐더러 외모두 중국인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828년에는 페낭의 중국인 소유 무역선 세 척이 니아스섬에서 납치하거나 유괴한 니아스족 소녀노예 80명을 몰래 무역하다 적발된 사건이 발생했다(Hussin, 2006: 83~85). 20세기까지 니아스족 여성노예가 중국인 노예상인에게 팔렸다.
19세기 초 인구통계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말레이제도 출신의 여성 노예���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이 페낭의 극단적으로 불균형한 남녀 성비 문제를 완충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성 노예들은 중국인 부자에게 팔려가 때로 부인이나 첩이 되기도 하고, 매음굴에서 성매매를 강요받았다. 페낭 초기에는 여성노예가 흔했던 탓에 중국인들은 매음굴을 찾기보다 여성노예를 사들이는 예가 흔했다고 한다. 이슬람을 믿지 않는 발리의 여성노예도 화인사회에 많이 팔렸다. 19세기 발리를 비롯해 말레이제도에서는 사소한 빚을 지고 노예가 되는 부채노예가 흔했다. 현지의 수장이나 라자들이 자신이 소유한 부채노예를 노예무역상에게 팔아넘기곤 했다.
1845년 말레이반도 동안의 파항에서 발리인 노예 50명을 태운 노예무역선이 적발되었는데, 그중 9명이 여성노예였다. 당국의 조사에서 한 여성노예는 남편이 사망해 장례 비용으로 쓸 10달러를 빚지는 바람에 부채노예가 되어 중국인에게 팔렸고, 그 중국인이 다시 부기스족 노예상인에게 자신을 넘겼다고 말했다. 당시 발리에는 납치나 부채노예를 조직적으로 거래하는 노예무역이 활발했다. 그런데 식민 당국에 적발되어 구출된 여성노예들은 발리로 되돌아가 노예로 살기보다 동포들이 많이 정착한 해협식민지에 남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는 발리의 많은 여성들이 노예로 팔려와 싱가포르나 페낭에 정착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말레이제도의 여성들만 노예무역으로 팔려온 것이 아니었다. 1889년의 한 기사는 페낭의 화인 남성과 매음굴에 팔려온 열여덟 살 중국인 매춘부의 사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페낭 캠벨가Campbell St.의 매음굴을 자주 드나들던 화인 헹관셍Heng Guan Seng이 한 매춘부에게 호감을 가져 페낭 화인보호관서 부보호관 레이Wray에게 다음과 같이 제보했다. 헹은 그 매음굴에 있는 참윗호Cham Yut Ho와 결혼하고자 하며, 그녀 또한 자신의 아내가 되고자 한다고 밝혔다. 레이는 화인보호관서의 수사관을 헹관셍과 함께 해당 매음굴로 보냈다. 매음굴 주인과 매춘부들이 참을 데려가지 못하게 방해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수사관이 찾아가자 해당 매음굴에서는 그녀를 순순히 내주었다. 부보호관이 그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참윗호는 당국에 등록하지 않은 채 성매매를 했으며, 중국에서 열두 살 때 150달러에 팔려 페낭으로 왔고, 페낭의 매음굴에 400달러에 팔렸다고 했다. 참은 열네 살 때 포주의 강요에 못 이계 몸을 팔기 시작했으며 4년간 성매매를 했다. 이전에 화인보호관서의 조사가 있을 때마다 (미성년자인) 참은 어떤 가정집으로 피신해 있었기에 지금까지 단속에 적발되지 않았다. 참은 돈을 잘 벌지 못하면 포주에게 매질을 당했다며 흉터도 보여줬다. 그녀는 그 매음굴에 심퐁Sim Fong이란 또 다른 소녀가 있으며, 그녀도 매춘부로 등록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참은 헹관셍을 알고 있으며 그를 ���르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이 정보에 의거해 당일 해당 매음굴에 영장이 발부되어, 미성년자에게 강제로 4년간 성매매를 강요한 혐의로 포주와 3명의 여성 등 4명이 체포되고, 이들은 1인당 1,000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이 기사는 페낭의 여성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전해준다. 우선 열두 살 중국인 소녀들이 페낭으로 팔려왔다는 점, 이들이 매음굴에서 열네 살 무렵부터 성매매를 강요당한다는 점, 페낭의 남성들이 매음굴을 자주 찾았다는 점, 그리고 1877년 화인보호관서 설립 이후 팔려온 중국인 소녀들에 관한 식민 당국의 ‘보호’ 조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다. 이른 시기부터 페낭에는 매음굴인 ‘여인관Nu Jen Kuan’이 있었다(Yen, 1982: 248). 1871년 페낭섬과 프라이에만 281명의 매춘부와 포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881년 인구센서스에선 프라이에만 197명의 매춘부가 확인되었는데, 주로 중국 광동 출신 여성들이었다(Manderson, 1996: 168). 페낭에는 중국인 이외에도 유럽인, 유라시아인, 태국인, 말레이인, 일본인 매춘부가 있었다. 페낭의 중국인 매춘부들은 대부분 인신매매의 희생자였다. 이들은 광동성 일대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던 침모, 다원에서 찻잎을 따는 농부, 수상가옥에서 생활하는 소녀, 누에를 키워 비단을 짜던 직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이들은 가난했기에 부자 여인과 달리 전족纏足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페낭에서 간호사나 봉제 노동자, 미용원, 부잣집 하녀로 일하며 보수도 두둑하게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남성 쿨리무역과 마찬가지로 여성 인신매매 조직의 속임수였다.
쿨리무역 못지않게 매춘부 인신매매도 이문이 컸다. 페낭에 도착한 중국 여성들은 중개인에게 팔렸다. 페낭의 중개인은 100~300달러를 주고 여성을 ‘구입’해 매음굴 포주에게 웃돈을 얹어 ‘판매’한다. 매춘부로 팔려가기까지의 모든 비용이 고스란히 그녀의 빚이 된다. 애초 몸값으로 지불한 돈과 뱃삯에다 매음굴에서 먹고 자는 비용, 약값과 옷값까지 포주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해 그녀의 빚에 얹으며 쥐어짠다(Manderson, 1996: 168). 말 그대로 착취다. 매춘부 가운데는 해협식민지 매음굴에서 매춘부의 딸로 태어난 중국인 여성도 있었다.
페낭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매음굴이 확인되지만, 매춘부 인신매매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주석의 시대부터다. 인신매매 피해자 문제가 불거지자 해협식민지의 화인보호관서는 1896년 소녀보호령Girl’s Protection Ordinance을 제정했지만, 매매춘을 여성들의 자유의지로 간주해 실제로는 규제하지 않았다(Purcell 1967: 174). 식민 당국은 비밀결사 불법화 등 화인사회에 관한 규제와 통제는 강화하면서도 화인 여성의 인신매매에 관해서는 자유��임을 유지하는 양면성을 드러냈다. 매음굴은 1927년까지 합법이었다. 싱가포르의 경우, 1870년대 이주한 젊은 중국인 여성의 80퍼센트가 매음굴로 팔려간 것으로 추산된다. 1863년 한 화인 비밀결사가 중국에서 젊은 중국인 여성 500명을 데려 왔고, 이들은 싱가포르에서 한 사람당 100~400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1863년 당시 싱가포르의 화인 여성 인구는 4,000명 남짓했는데, 이 가운데 인신매매로 팔려온 여성이 2,000~2,5000명으로 추계됐다. 1884년에도 싱가포르에서 인신매매된 13~16세 남짓한 소녀가 전체 화인 여성 인구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했다(Lai, 1986: 28). 페낭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주석의 시대는 주석의 백색 러시와 아편의 흑색 러시가 쌍둥이처럼 진행됐다. 이에 비견할 만한 것이 쿨리무역과 매춘부 인신매매란 두 개의 인간시장이다. 중국인 남성이 저자, 즉 사실상의 부채노예로 팔려왔다면, 중국의 가난한 소녀들이 매춘부로 인신매매됐다. 이 쌍둥이 인간시장을 장악한 것도 화인 비밀결사였다. 여성 인신매매도 쿨리무역과 마찬가지로 교묘하고 악랄한 교역 네트워크로 작동되었음은 물론이다. 매음굴을 운영한 화인 부자 가운데는 아편파머와 비밀결사 지도자도 적지 않았다. 광산 지역에서 남성 쿨리의 생산활동은 공적인public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공적인 남성 광부에게 매춘하는 여성의 활동도 ‘공적 서비스’로 간주되었다(Lai, 1986: 29)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도시와 광산에서 매매춘이 성행하는 바람에 매춘부 확보와 매음굴 장악을 둘러싸고 비밀결사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불법화 이전까지 해협식민지의 매음굴 대책은 이중적이었다. 식민 당국은 매음굴을 선별 허가제로 관리했다. 부자 화인과 유럽인이 주로 출입하는 고급 매음굴은 허가하고, 점원이나 노동자들이 출입하는 저급 매음굴은 허가를 취소하거나 강제로 문을 닫게 한 것이다. 매음굴의 단속 업무를 화인보호관서가 주관한 것으로 보아 매음굴의 주요 고객이 화인이고, 매음굴의 성매매 여성 대부분도 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자발적인 매춘부를 제외하면 인신매매로 팔려온 매춘부들은 매음굴의 성노예나 다름없었다. 매춘부는 음식과 잠자리만 제공받을 뿐, 번 돈은 모두 포주가 가져갔다. 부모의 빚 때문에 부채노예로 팔려온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입의 절반은 숙식비 명목으로 포주가 가져가고 나머지 절반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마저도 홍등가의 무뢰배인 삼셍samseng에게[*중국에서 삼셍三牲은 본디 산 제물로 쓰던 세 가지 짐승인 소와 양, 돼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이 비밀결사의 행동대원와 연계되면서 광동어 발음으로 ‘삼셍’으로 불렸고, 말라이어에도 차용됐다. 비밀결사 해산 이후 깡패, 무뢰배, 조직폭력배 등을 뜻하게 됐다.] 보호비 명목으로 뜯겨야 했다(Purcell, 1967: 175).
식민 당국은 매음굴에 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단속했다(Lai, 1986: 36). 하나는 공공위생의 관점이다. 1870년 감염병법Contagious Disease Act을 제정해 매춘부의 등록과 ���기 건강검진을 의무화했지만, 실효는 없었다. 1920년대 유럽인의 성병 질환이 아시아계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당국은 예방 차원에서 유럽인의 매음굴 출입을 단속했다. 해협식민지 기록에 따르면, 1903~8년의 5년간 페낭에서 발병률이 가장 높은 감염질환은 말라리아였고, 그다음이 성병인 매독이었다.[*해당 기간 매독 감염자 수는 적게는 324명, 많게는 534명에 달했다. 감염질환 발병률은 말라리아-매옥-한센병(나병)-각기병-이질 순이었다.] 또 하나는 인도주의 관점으로, 미성년 인신매매 피해자의 구제였다. 인신매매의 희생자로 확인된 매음굴의 여성은 16세 이하 매춘부의 보호와 재활을 돕기 위해 1889년에 설립된 민간단체인 페낭 보량국保良局Po Leung Kuk[*보량국은 1878년 홍콩에서 인신매매된 소녀를 구조하기 위해 처음 설립됐다. 페낭에서는 1889년 푸타이신胡泰興, 코샹탓辜尙達, 커심비許心美 등의 주도로 설립됐다. 푸타이신과 코샹탓은 페낭 초대 명예판사Justice of Peace를 지낸 거상이자 아편파머이고, 커심비는 전술했듯이 태국 몬톤 푸켓의 최고행정관을 지낸 인물이다.]으로 보내졌다. 보량국은 매음굴에서 구조된 소녀를 18세까지 머물게 하면서 입양을 주선하거나 화인 남성과 혼인을 중매했다. 페낭의 화인보호관서에서 부보호관을 지낸 역사가 빅터 퍼셀은 보량국에서 알선한 혼례의 대부분이 성공적이었다며, 결혼이 지속되지 못했다면 지독한 가난 탓이라고 했다(Purcell, 1967: 178~9).
식민 당국은 1930년에 화인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허가받은 고급 매음굴 이외의 성매매를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저급 매음굴은 지하로 숨어들면서 음성화했다. 보량국을 통해 매매춘 여성의 재활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효는 크지 않았다. 매춘부라는 사회적 낙인도 장애요인이었지만, 매음굴과 결탁해 보호료를 챙기는 무뢰배인 삼셍이 매춘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탓이다. 게다가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이 밀어닥치면서 가뜩이나 생계가 막막해진 여성들은 음성적인 매매춘으로 몰려들었다(Purcell, 1967: 184). 매매춘 음성화로 매매춘 여성들은 포주와 깡패들에 더 속박되는 악순환이 나타났다. 식민 당국의 단속이 강화되자 허가받은 고급 매음굴의 여성들도 지하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다는 말 그대로였다. 커피숍, 하숙집, 호텔, 댄스홀, 카바레 등 방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매매춘이 행해졌다(Lai, 1986: 39). 이들 여성은 가게 점원, 가수, 직업 댄서, 댄스홀과 카바레의 웨이트리스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갖기도 했다. 이는 단속을 피하기 위한 위장일 수도 있고, 생계를 위한 겸업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식민지 페낭에서 여성들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일자리가 극도로 제한적이었다는 점이다.
(354~363쪽)
《말레이 연대기Sejarah Melayu》는 항리포Hang Li Po漢麗寳라는 중국 명나라의 공주가 말라카왕국 술탄의 왕비가 됐다는 기사를 전한다. 항리포가 술탄과 결혼하면서 말라카에 500명의 남자와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오늘날 말레이시아에서 중국계의 기원을 항리포 공주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서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항리포 공주는 전설에 불과할 뿐, 말레이시아 화인사회는 19세기에 이주한 ‘무이차이’의 후예라는 주장도 있다(Ho, 2015: ix).
무이차이muni tsai妹仔는 ‘어린 여자’를 가리키는 광동 방언이다. 복건 방언으로는 차보칸Cha Boh Kan査某鐗(仔)이라 하고, 중국 보통어로는 ‘페이누이婢女’라 한다. 영국 식민 당국이 홍콩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무이차이라는 광동어가 널리 쓰이게 됐다. 무이차이는 직접적이든 제3자를 거치든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다른 누군가의 집으로 보내져 보수를 받지 않고 집안을 거들면서 마음대로 그 집을 떠날 수 없는 처지의 소녀를 가리킨다(Tan, 2017: 56). 항리포가 중국의 공주라면, 무이차이는 중국인 하녀 혹은 사실상의 노예이다. 무이차이의 존재는 중국에서는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이며, 페낭에서도 화인 이주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Ho, 2015: 117).
중국에서 가난한 집은 딸들을 8~9세 때 부잣집에 하녀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계약이 맺어지고 얼마간의 돈이 오간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가난한 농가들은 홍수나 기근, 가뭄과 질병과 도적질로 인해 기아선상에 놓이고, 무이차이로 보내는 것은 달리 방법이 없는 빈곤 가정에서 어린 소녀를 굶어죽는 것에서 구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무이차이를 들은 부잣집은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시혜로 여겨 마음대로 부리게 된다”(Purcell, 1967: 181).
무이차이가 열여덟 살이 되면 주인은 그녀를 시집보내는 것이 상례이다. 혼례를 마치면 무이차이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무이차이는 하녀로 있는 기간에는 생가와 연락을 끊고 주인집의 소유물처럼 다뤄진다. 주인이 무이차이의 법적 보호인인 것이다. 중국에서 무이차이는 오랜 관습이며, 혼례의 혼수품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무이차이가 집안일을 돕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곱상한 이이들은 다른 역할을 강요받는다. 여주인은 남편의 바람기를 다스리고 집에 머물게 하기 위해 무이차이에게 남편의 성 시중을 들도록 하기도 했다(Tan, 2017: 56).
무이차이는 해협식민지에서 노예처럼 팔렸다. 초대 화인보호관 윌리엄 피커링은 1872년 중국어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비밀결사가 중국인 여성과 아이들을 거래하는 것을 목격하고 “화인 부잣집에 노예로 팔리는 중국인 소녀들이 (싱가포르에서) 무이차이이며, 페낭에서는 차보칸”이라고 했다(Khoi and Khoi, 2004: 31). 1933년 무이차이 의무등록제가 시행되기 이전 영국 식민 당국은 무이차이에 관한 아무런 구체적인 자��도 갖고 있지 않았다. 1922년 화인보호관서는 매달 해협식민지에 무이차이가 60~70명꼴로 유입됐을 것으로 추산했다. 영국 정부가 1936년 무이차이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홍콩과 말라야의 무이차이의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해협식민지에서 무이차이는 1명 당 150~250달러에 거래되었고, 나이와 구입하는 가정의 형편에 따라 500달러까지 나가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해협식민지와 말라야로 무이차이의 이주 또한 크게 늘었다. 이는 당시 전란과 기근으로 중국 남부 가난한 이들의 살림이 궁핍해진 결과였다. 어린 소녀들이 몇 푼의 돈에 팔려갔다. 정치 상황과 극도의 궁핍이 남양의 친지나 이웃, 친구에게 딸들을 팔아넘기게 만들었다. 이들에게 한가닥 희망이라면 장래에 좋은 일자리를 구하거나 좋은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중국에서는 무이차이가 팔려가는 집은 인근이었고, 풍문으로나마 무이차이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해협식민지에서는 아무도 무이차이의 사정에 눈과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영국 식민 당국은 무이차이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1920년까지만 해도 미성년자의 매매춘 강요만 단속할 뿐 무이차이 제도 자체는 방임했다. 이에 무이차이의 인권침애에 주목해 사실상의 노예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집주인에 따라 달랐지만, 무이차이는 대체로 중노동과 멸시, 성적 학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노예제 폐지에 단호했던 영국 정부도 무이차이에 관한 비판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22년 영국 하원은 홍콩과 해협식민지 등 영국 식민지의 무이차이 제도에 관해 총리에게 대책을 다그쳤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홍콩) 총독과 나는 실현 가능한 가장 이른 시일에 이 제도(무이차이)를 폐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며, 나는 총독에게 1년 이내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는 나의 생각을 전달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고 답변했다(Tan, 2017: 50).
1925년 해협식민지 의회가 제정한 하녀법이 1926년에 발효됐다. 이 법률에서 중국인 무이차이가 처음으로 법적으로 정의되었다. 물론 실효는 없었다. 무이차이를 ’하녀‘로 정의했으며, 무이차이인지 아닌지를 주인이 입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열 살 미만 소녀를 하녀로 고용하면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한다고 명시되었지만, 무이차이의 주인이 소녀를 양자로 들였다고 주장하면 당국의 단속이 미치지 못했다. 무이차이를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중국의 관습이 이런 핑곗거리를 제공한 것이다. 무이차이를 어린 아들의 약혼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이를 산포차이san po tsai媳婦仔라 했다. 하지만 결혼할 나이가 된 아들이 약혼녀를 거부하면, 산포차이는 무이차이의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무이차이가 양자가 되거나 첩이 되기도 했다(Tan, 2017: 59~60). 식민 당국이 무이차이를 법으로 규제하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무이차이 거래의 특징은 돈이 오간다는 점이다. 그러나 법은 지불과 선물의 구분에서 헷갈린다. 중국어의 경우 팔려가는 것을 구沽라 하고, 한 가정이 딸자식을 다른 가정에 양자로 주는 것을 치賜라 한다. 중국에서는 두 경우 모두 돈이 오간다. 그러나 전자는 판매하는 것이고, 후자는 선물이 된다. 돈이 오가는 것만으로는 중국인의 관습을 법으로 재단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Tan(2017: 60) 참조.]
1932년에는 하녀법을 개정한 무이차이금지령Mui tsai Ordinance이 제정되었다. 1936년 영국 정부가 ‘무이차이조사위원회’를 파견해 말라야의 실태조사도 벌였지만, 사실상의 노예인 무이차이 제도를 이른 시일 내에 폐지하겠다던 윈스턴 처칠의 약속은 영국이 말라야 식민지배를 포기할 때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1934년 해협식민지 자료에 따르면, 해협식민지를 포함한 영령 말라야 전역에서 등록된 무이차이는 모두 2,749명이었다. 이 가운데 32.4퍼센트가 현지 태생이고, 54퍼센트가 중국에서 팔려왔다. 전체의 10퍼센트는 출생 기록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들 가운데 84퍼센트는 부모가 없는 고아였다. 등록된 무이차이 가운데 30퍼센트가 10세 미만이었고, 10세에서 16세 사이가 거의 60퍼센트를 차지했다. 말라야 태생의 무이차이는 매춘부를 포함해 가난한 가정이나 홑어머니 가정 출신이었다(Lai, 1986: 47).
앞서 소개한 페낭 매음굴 기사에서 중국인 남자 헹관셍을 따르겠다던 매음굴의 참윗호는 매춘을 강요당한 무이차이였다. 이후 참윗호와 헹관셍이 페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한 서시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수마트라 메단의 거부 총아피의 맏딸 퀴니 창이 ‘뇨냐의 추억’을 화려하게 풀어놓은 것과는 대조된다. 하지만 서사는 없어도 무이차이 매춘부 참윗호는 페낭 화인사회의 일부였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쿨리 혹은 저자로 통칭되는 숱한 중국인 남자 이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364~369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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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글 우편!
좋아요, 우선, 왜요?? 승한이는 그냥 보이그룹 RIIZE에서 잘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사소한 문제로 강제로 탈퇴하게 된 거예요? 아이돌은 이미 여자친구가 생길 나이가 되었으니 왜 네티즌들은 그걸 볼 수 없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여러분, 제발 포기하는 법을 배우세요. 그들은 아이돌이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누구를 사랑할지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나는 riize를 좋아하고 RIIZE는 7입니다! 6이 아닙니다! 제발 승한, 돌아와요ㅠㅠ
나는 이것을 영어로 쓸 시간이 없어서 너무 답답하고 슬펐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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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겨울의 우리들 후기
2인용 게임이고 통���을 필수적으로 해야함
처음에는 간단한 협동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에 정신을 잃은 후부터
같은 장소에 있지만 다른 시야로 보고 있다는 설정으로 실제로 두 플레이어가 다른 그래픽과 스토리를 보게 되고, 각 물체에 대한 상호작용 또한 달라지므로 뒤로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한 협동이 필요해짐
(초록옷 입은 오른쪽 캐릭터 쪽은 살짝 고어적인 요소가 있는데, 도트라 그렇게 보기 힘든 수준까진 아님)
스토리 애니메이션에서는 둘다 같은 선택지를 골라야만 진행되는 부분도 있고, 서로 스포하지 말라고 마이크 금지 표시가 뜨는 부분도 있는데 이건 게임에서 기능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거라 잘 지킬지 말지는 각자들 정하면 될 것 같음...ㅋㅋㅋ (근데 사실 말해줘도 직접 안봐서 뭔소리지 함)
다회차 방식의 전개인데, 1회차 종료 후 타이틀로 돌아온 후 1회차를 함께한 같은 스팀 계정을 가진 유저와 다시 접속하면 강제로 1회차와 반대 캐릭터가 골라지면서 2회차가 시작됨
그런 방식으로 3회차까지 있긴한데 3회차는 추가 스토리같은 느낌이라 전 스테이지를 다 하는게 아니라서 실질적으론 2회차 게임이라고 보면 될듯
근데 알아서 해석하라는 느낌의 찜찜한 엔딩이라 개발자가 좀더 떡밥을 풀지 않을까 하고있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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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 고언어
예전에 고(go) 언어 얘길 한 번 써서 올리긴 했으나 왜 이거에 관심을 두게 됐는지를 빼 먹고 지나친 것이 기록 강박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 찜찜해 적어놔야 겠기에. 원인은 자바로 개발하기가 넘 싫었기 때문. -=-=-=-=-=-=-=-=-=-=-=-=-=-=-=-=-=-=-=-=-
지난 십 년 넘게 나를 먹여 살린 프로그래밍 언어는 자바(JAVA)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동안 접한 언어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거기도 하다.
구구절절 이유를 나열하기보다 총체적으로 한 줄 요약하면, 어릴 적 세운 상가 길바닥에서 처음 배우면서부터 즐겼던 프로그래밍하는 재미를 빼앗아 갔다. 하지만 한국 IT 업계는 자바가 대세라 이걸로 짜야 돈 준다는 데 별 수 있냐, 꾹 참고 했지.
자바는 '객체 지향' 강박이 매우 심한 언어다. 그 시절엔 이 기법이 프로그래머를 구원할 궁극의 진리 같은 느낌으로 여기저기에서 떠받들었던 기억이 내게도 있기 때문에 이해는 함. 그래서 "Hello World" 한 줄 찍으려고 해도 class부터 만들어야 한다.
EJB는 "엔터프라이즈 자바 빈"의 약자로 대규모 웹페이지 만들 때 썼던 거. 복잡하기가 개미지옥 같아, 자바의 대표 흑역사랄 수 있다. 대안으로 스프링(Spring)이라는 프레임웍이 나왔다. 자바 프로그래머들이 무척 좋아했다. 바로 이 부분이 열나 어이없는 거. 스프링은 EJB에 비해 편리하단 것일 뿐, 여전히 짜증 나는 물건이거든.
이 프레임웍의 핵심은 의존성 주입(=Dependency Injection)이라고 한다. 말�� 거창하지만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써서 코딩하는 짓을 과대 포장한 거. 내가 보기에 여러 개발자 집단 중 유독 자바 쪽 인간들이 허장성세가 심한 편인 거 같다. 이런 점도 거슬려하는 부분 중 하나.
'전자 정부 프레임웍'은 한국 정부가 강제로 정해 놓은 스프링 기반 개발 스펙이다. 이걸 적용해 DB에서 데이터를 꺼내 오려면, Controller → Interface → Implement → DAO 무려 4단계를 거쳐야 한다.
내가 보기엔 규모가 크지 않은 웹페이지의 경우 Controller와 Implement만 있어도 됨. 이 두 개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는 Implement에서 트랙잭션이 발생하기 때문에.
DAO는 Implement가 흡수할 수 있기 땜에 진짜 필요 없다. Interface는 애매하다. 만약 비교적 최근 등장한 go언어, 파이썬처럼 덕 타이핑(Duck Typing)을 지원한다면 당연히 처음부터 필요한 게 아니다. 자바가 클래스에 집착하는 언어인 데다 스프링 개발한 놈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의존성 주입을 포기할 수 없어 계속 이렇게 갈 듯.
이 인간들은 자바 패밀리 중 JSP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왜 그러는지 이해 가는 면이 있긴 하다. JSP는 (PHP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개발툴이기도 하니까. 너무 많은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보니 JSP를 허용하면 MVC(Model - View - Controller)의 토대가 흔들리면서 뒤죽박죽인 코드를 양산할 우려가 큰 거. 그래서 기능을 제한한 JSTL이라는 템플릿으로 뷰(View) 화면을 만들라고 강요한다.
스프링으로 개발할 땐 심지어 컴파일 시간마저 짜증을 유발한다. 사소한 거 하나만 수정해도 프로젝트 전체를 빌드해야 해 결과 나올 때까지 멍때려야 하는 시간 낭비가 크다. 그만큼 개발 속도가 상당히 더디다.
설상가상 가상 머신(=JVM)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느리다. 초기엔 이거 덕분에 컴파일 한 번 해서 여기저기에 다 쓸 수 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규칙도 사실상 깨져버린 상태. 장점은 느릿느릿하긴 해도 안정적인 거 같긴 하다. 오늘날까지 자바가 살아남은 결정적 요인은 하드웨어 성능이 올라갔기 때문일 듯.
예전에 자바 안에 파이썬 소스를 포함해야 할 일이 있었다. 구글 검색하니 '자바 + 파이썬 = 자이썬'이란 게 있다길래 함 써봤다가 너무너무 느려서 바로 폐기. 그래서 파이썬을 따로 만들어 서버에 저장하고 자바에서 리눅스 쉘 스크립스트를 실행하게 하는 약간 촌스런 방법을 썼다.
자바는 설계 구조상 메모리도 많이 잡아 먹을 수밖에 없다. C처럼 포인터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함수 호출할 때마다 파라미터와 리턴값을 통째로 복사할 수밖에 없거든. 종종 클래스 전체를 주고받을 때마다 '아, 이게 뭔 뻘짓인가' 자괴감마저 들곤 한다.
그러던 중에 고(Go) 언어를 살펴 보니 진짜 맘에 쏙 들었던 거. 우선 자바와 달리 무척 컴팩트하다. 개발자가 허풍을 안 깐다. 게다가 핵심 인물 중 한 분이 내 닉네임과 같은 켄(=Ken Thompson)이다.
당연히 포인터 있다. 하지만 C/C++처럼 포인터 연산은 지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버퍼 오버플로우' 같은 버그를 일으키는 원인이란 판단 때문이었을 듯. 진짜 좋다.
고언어는 자바처럼 객체 지향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구조체와 인터페이스를 이용해 동일한 성능을 낼 수 있다. 이거는 나도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였으나 삼류 개발자라 자신 있게 주장하진 못했는데, 정말로 되는 거였다니…
병렬 처리가 기본인 시대에 태어난 언어답게 쓰레드 처리가 무척 간단하다. 문장 앞에 'go'만 붙이면 되니까. 다만 자기 손을 떠난 쓰레드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먹통이 된다. 그래서 '채널'이란 걸 잘 써야 하던데 아직까진 능숙하지 못하다. 실무에 써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러나 고언어가 아무리 좋으면 뭐하냐. 아직까지 한국은 "Hello JAVA World"인걸… -_-;; 하루속히 고언어가 쭉쭉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럼 고언어 전문가인 척 구라까고 돈 받으면서 공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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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번 입원에 대해 많은 분들이 위로의.전화를 주시고 격려해 주시더라구요
어 ...다 감사한데 한참 예배시간에 설교를 진행중인데 저화해서 질찔 끌때는 진짜 욱 하더라구요 ㅎㅎㅎ
에휴 그래두 감사 ㅎㅎㅎ
많은 분들의 여러 조언에도 감사하쥬 ^ ^
그분들 말씀도 다 일리있는 말씀 입니다만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온 과정은 모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한것들 이기에 늘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입원 까지도요 ( 안믿는.분들 입장에서 이런말 들으면 단단히 미쳤구나 한다에 천원 )
성경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슬은 누가 강제로 먹인것이 아니니 인간의 선택이며 불순종이요
성령충만은 성령께서 나를.인도하시니 온전한 순종 입니다
성령의 충만과 인도하심을 격어보지 못한 분들은 잘대 이해할수 없는 구절 이죠 ㅎㅎㅎ
제가 입원할때 주신 말씀이 있어요 ^ ^
" 요한복음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병원에 잠깐 입원함으로 주님이 인정 하시고 쓰시는 도구가 된다면 이보다 좋은것은 없죠
물론 이승과 저승이 있는지 하나님이 있는지 예수님이 누군지 천국과 지옥 뭐 그런것들을 모르고 사는 분들은 완전 신이 강림하셨다고 할겁니다 " 도르신 " ㅋㅋㅋㅋ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과 나의 독고다이로 사는 삶의 차이는.이래요 ..
앞으로 더 낮아지고 더 순종하는 삶을 살기위해 더 순종하는 길을 찾아야 겠죠
순종도 쉬운게 아니에요 ^ ^
#광명전통시장 #광명시장 #전통시장 #추천맛집 #광명왕족발 #광명할머니왕족발 은 #광명소셜상점 #광명8경 #광명동굴 #광명시 #LocalGuides 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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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이 아닙니다 본인도 야간에 당적직인 판사에게 입감 되었습니다 언론보도와는 전혀다른 동료의원 폭행 입니다 그리고 벌금 90만원으로 나갔습니다 그때도 나머지 재소자는 피랍중 이었습니다 도지사로서 피랍중인 재소자 구명에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버어마 랑군사태로 전원 사망 안치 되었습니다
각하 지금도 법원에 야간당적을 이유로 꿈에 입감을 시키는데 피랍 입니다 고단한 업무 피로량 알지만 판사가 술을 먹고 같이 들어와서 생활 합니다 안그럼 밥도 안준다 입니다 이걸 자꾸 꿈이라고 주장하는데 정신감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전국 교도소 교정시설마다 피랍된 항공사 기장 내지는 승무원 들이 태반 입니다 그런다고 항공기 탈취가 되는것도 아닌데 자꾸만 반복 됩니다
이게 김현옥 시대 입니다 바로 삼성 입니다 평택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며 천문학적인 국고를 횡령 한 죄입니다 쌍용자동차 부지를 강제로 매입 사유지화 시켰습니다 자동차부지는 국유지 입니다
죽은자는 말이없다며 버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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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할 말 있는 게 최근들어 19금물 강제로 많이 보고 있음 사유는 일본장르 답게 그놈의 선라이즈가 빠빵하고 꼭 등장하는데 희안하게도 변태들은 1도 없음 그래서 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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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아침부터 몸이 너무 안 좋았다. 갑자기 식은땀과 극심한 졸음(눈이 강제로 감겨짐)과 손이 덜덜 떨리고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않아서 걸을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친구가 저혈당 증상 같다고했다.
朝から体の調子がよくなかった。急に冷や汗とともに眠気が襲ってきた。目が強制的に瞑られてしまう感じで。手も震えてきて体に力が抜けていく。そのせいで歩くたび体もふらついた。後から教えてもらったんだけど低血糖ショックだったらしい。
탕비실 소파에서 5분 간격으로 누웠다일어났다. 잠깐 누워서 눈을 감는데도 정신이 블랙아웃을 왔다갔다했다 ㅜ 사무실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가 괜찮냐고 물어봤다
会社の休憩室のソファーで5分ごとに横になって起きてを繰り返した。ちょっと目を瞑っただけなのに精神もブラックアウトを繰り返した。事務室の掃除のおばあさんに大丈夫?って聞かれた。
혹시 코로나때문에 증상이 심각해졌나 싶어서 병원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음성...
コロナのせいかなと思って検査してみたら良かったことに陰性だった。
약을 또 받아 왔다.
薬をまた貰って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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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행방불명됐어요. 제가 9살 때에 일이었죠. 그렇게 10년이 지날 무렵 엄마가 저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생사를 알 수 없던 엄마가 알고 보니 중국으로 도망쳤던 거였어요. 사실 너무 어릴 적에 헤어져서 그리움의 감정이 분명 있기는 했지만 간절하게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엄마가 찾는다고 하니 일단 가겠다고 해서 브로커를 통해서 엄마가 있던 중국으로 넘어가게 됐죠. 중국에서 엄마는 재혼해서 새 가족이 있었어요. 그래도 제가 와서 많이 기쁘신지 그곳에서 저를 굉장히 잘 챙겨줬어요. 그런 와중에 제가 중국으로 오기도 했고 북한에 남아있는 제 친여동생도 빨리 데려오고 싶었나 봐요. 여동생을 데려오려고 엄마는 조금 무리해서 국경 가까운 쪽으로 갔다가 운이 나쁘게도 거기서 잡혔어요. 그렇게 엄마는 강제로 북송당했죠. 저는 중국에서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혼자가 됐어요. 가족은 아무도 없고 언어도 안 되는 채로요. 중국으로 온지 6개월만에 거기서 살 수 없어서 19살에 한국으로 도망쳤어요. 살려고요. 살고 싶었거든요.”
[1/2] “My mom suddenly went missing one day. It was when I was nine years old. Nearly a decade had passed when I got the news that she was looking for us. We hadn’t known if she was even still alive, but as it turned out, she had fled to China. Truthfully, I don’t think I really had a burning desire to meet her. Of course, I definitely had some feelings of missing her, but we were separated when I was so young. Regardless, I decided I should at least go and see her when I heard she was searching for us, and I managed to cross the border to where my mom was in China by using a broker. My mom had gotten remarried and had a new family in China. She still treated me extremely well there, as if she was overjoyed I’d come. At the same time, I guess my mom wanted to bring my younger sister over from North Korea as soon as possible, since I was already in China. She went close to the border to try to bring my sister over, but she’d bit off more than she could chew, and unfortunately, she ended up getting caught. She was forcibly repatriated to North Korea. I was left on my own, not knowing a single person in China. I had no family and I didn’t speak the language. I couldn’t live in China, so within six months of my arrival there, I ran away to South Korea. To live. I wanted to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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