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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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gotta get better at my Korean consonants. She wasn't calling me "daddy"; she was saying "o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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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외로이 있지 말고 자유롭게지내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얘기 할게요
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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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생긴 일들이 많아서 적어두기로 결심했다.
아빠는 혼자사는 나의 집에 절대 들어오지 않는다.
북한산이 보이는 곳에 살고싶어 서울 창동이라는 곳에 산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아빠는 내가 2년마다 이사를 할때마다 집에 왔었다.
창동에 와서는 경치 좋은 전망을 보고, 혼자 살기엔 텅비고 큰 내가 사는 집을 보더니 고향으로 내려가서는 밤에 잠이 오질 않는다고 했다.
내가 서울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면 좋겠고, 텅 비고 큰 집을 채워주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 잠이 오질 않는다고 했다.
그 뒤로 아빠는 내가 살던 집에 오지
않았다.
그 뒤로 3���이 지나고, 서울 원효로에 있는 작은 오피스텔에 나는 살고있다.
아빠는 잠시 화장실을 쓰겠다며 오랜만에 내가 혼자 사는 집에 오셨다.
매의 눈으로 집 안을 살핀다.
간소해진 나의 기도터(?)를 스윽 보시고 아무말도 안했다. (아빠는 5-6년전 나의 망원동 집에 있던 기도터를 보시고는 내가 사이비에 빠진 것 같다며 또 잠못이루시던 때가 있었다)
원효로 오피스텔 집 변기를 청소를 귀찮아서 안했다.
아빠는 3년만에 내 집에 와서, 변기를 열더니 바로 청소해버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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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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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줄 #인터넷에서 #봤던글 #요약 #시험중인 #아이들 #스트레스 #덜어주려 #쓴 #아빠 #손글씨 #엽서 #화이팅(Campinas, Sao Paulo에서) https://www.instagram.com/p/CmIWPUvtRac/?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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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니가 쓰면 장윤정이 보이거든? 내가 쓰면 아빠가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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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포스팅이 2015년이었으니까 이게 거의 8~9년만에 올리는 것이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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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보낸 지 삼십일이 지났다.
내 평생 써왔던 모든 자전적 수필과 어린 시절 동시의 마침표는 사실 ‘아빠’였다. 참 유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원망하고 미워했었다.
아빠의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슬퍼해도 되는가, 과연 나는 이럴 자격이 있는 자식인가’를 수천 수만 번 자문했었다. 아빠를 미워했던 그 때의 내 마음은 삼십여 년의 시간치만큼 더 괴롭고 더 아프게 내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픔과 죄책감 그 잠깐의 사이 엄청난 혼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전히 그 혼란의 마음은 정리하지 못했다. 당신 생의 반절을 따라 살아보니 내가 그렇게 닮고 싶지 않던 ‘당신’과 ‘나’는 마주히 닮아있었다. 그 고독이 드리운 긴 그림자마저 꼭 맞물려서.
아 당신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빠가 응급실로 옮겨 간 밤. 나는 수많은 기계들에 둘러싸인 그의 옆에서 차게 식어가는 그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는 늦은 고해밖에 할 수 없었다. 볼로 옮겨간 내 손끝에서 느껴졌다. 우리가 곧 이별하게 될 거라는걸. 연달아 찾아온 뇌경색으로 돌아가 있던 아빠의 눈은 그 순간 나와 마주했고, 그 굳은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이 생에 아빠와 화해하지 못했지만, 아빠는 가서 할아버지랑 꼭 화해해. 할아버지가 기다릴 거야’
용인에서 택시를 타고 새벽에 도착한 막내까지 기다려 준 아빠는 곧 지쳤는지 중환자실로 옮겨 갔다.
그 새벽 우리는 구겨진 채 차를 타고 아빠가 있었던 재활병원으로 갔다. 도둑마냥 아빠의 짐을 빼서 차에 실었다. 평생을 간결하게 살아온 아빠는 아픈 동안 자기도 모르게 짐이 참 많이 늘어있었다. 그렇게 아빠를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 즈음 하루 두 번에 나눠서 10분씩 가족들은 중환자실의 아빠를 면회했다.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었는데 아빠는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다.
어느 오후의 면회에서 나는 물었다. 아빠가 지금 고통을 느끼고 계시냐고. 그건 아니란다. 하지만 모든 장기가 망가지고 심장 하나만 온전하다는데, 그게 아빠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 이상의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아빠의 심장만이라도 살려서 보내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나요?’ 모진 말은 또 못된 내가 먼저 꺼냈다.
아빠에게 뇌경색이 찾아온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아빠는 산을 좋아했고 자연을 그리워했다. 그런 아빠가 몸에 갇힌 게 십 년이 지난 거다. 나는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엄마는 힘들어했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아빠와 반년의 재활을 함께한 건 엄마였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식들의 뜻이 같아서 엄마는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우리는 하루 면회를 쉬었다.
장례식에 아빠의 건강한 사진을 두고 싶었다. 마냥 아픈 사람으로 있다가 가는 걸로 기억되게 하긴 싫었다. 각자의 앨범에서 사진을 모았고 나는 엄마와 액자를 사러 갔다. 영정을 찍어두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기에, 내 결혼식의 사진들 중 하나로 영정 액자도 만들었다. 잠깐 카페에 들러 엄마와 아무일 도 없는 듯 무심히 차도 마셨다. 아빠의 장례식을 치를 곳에도 미리 가보았다. 어떤 크기의 공간이면 될지 해는 몇 시부터 얼마나 드는지도 보았다. 미리 준비하라던 아빠의 당부에 사두었던 묘지에도 갔다. 외할아버지가 계시고, 외할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잠드실 곳. 그곳에 아빠와 엄마의 자리도 있다. 숲과 가장 가까운 곳, 강이 가장 멀리 보이는 곳. 아빠가 보았다면 좋아했을 거 같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아빠의 묘비에 쓰일 글을 정리했다. 아빠를 닮은 글, 이해 못 했지만 이제는 너무 알 것 같은 당신을 닮은 글.
다음 날 엄마와 나는 담당 교수와 면담을 했다. 간호사들은 주저했던 말을 ‘어려운 결정 잘 해주셨습니다. 아버님 지금 많이 힘드실 거예요.’라고 교수는 단조로이 정리해 주었다. 생전 아빠가 연명치료를 원치 않았음을 확인하는 글을 쓰고 간단한 인적 사항을 적은 서류를 냈다. 법적인 서류라더라.
아빠를 보내기로 한 날, 모든 가족이 모였다. 차례로 인사를 하고 호흡기를 뗐다. 숨죽여 자는 모습이던 아빠는 가삐 숨을 쉬었다. 오래 뜨지 못한 아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만 원망해 아빠. 내가 아빠 보내주자고 했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호흡기를 떼면 아빠가 바로 갈 거라던 교수의 말과는 다르게 아빠는 힘들게 숨을 쉬어갔다. 임종이 가까워오면 불러주겠다는 간호사들의 말에 우리는 무거운 걸음으로 중환자실을 나서야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승압기를 포함해 다른 기계들도 떼시겠냐는 물음을 받았다.
'아 그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
승압기도 뗐다. 아빠를 살려두던 기계들이 모두 멈췄다. 오후 두시, 아빠는 참 예쁜 가을 단풍을 뒤로하고 좋은 날에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아빠는 하얀 천을 곱게 덮고 엄마와 장례식장으로 갔다. 나는 아빠 뒤의 단풍 나무를 찾아서 사진을 찍고 병원을 떠났다.
짧은 장례였다. 신부님과 많은 신자분들이 오셔서 아빠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울면 아빠가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는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그걸 아는데? 누가 다녀온 거야? 어떻게 아는데? 아빠가 죽었으니 슬픈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인데 어떻게 슬픔과 눈물을 참으라는 건지. 나는 또 가면을 써야 했다. 우울하지 않은 나, 씩씩한 나, 구김 없는 나. 서글프다. 아빠가 가는 날에도 나는 가면을 써야 하다니.
발작이 올까 모두들 내게 비닐을 챙겼냐고 했다. 아빠의 입관���이었다. ‘울지 마세요. 제가 아버님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장례지도사는 적당히 다정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아빠의 푹 꺼진 볼은 봉긋 차있었고 아득히 닫혀있던 눈은 그저 평온히 잠든, 내가 아는 아빠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엔 내 죄책감을 잊었다. ‘내가 아빠를 아픔 없는 곳에 편히 잠들 수 있게 보내준 게 맞구나.’ 잠깐 자만도 했다. 아빠의 배에도 기대 보고 아빠의 이마에 내 이마도 맞대어 보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아빠 주위를 맴돌았다.
살짝 흔들면, 가지 말라고 떼쓰면 잠귀가 밝았던 아빠가 꼭 일어날 것만 같았다.
발인 날 아침엔 비가 왔다.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당신이 지은 집에 아빠는 큰 사위의 품에 안겨 영정으로 돌아왔다. 자식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통곡은 그이 자식의 것과는 달랐다. 그 순간엔 나도 할머니께 참으라 말했다. 참 이기적이지. 참아지는 게 아닌 걸 알면서.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했다. 아빠의 세례명은 라파엘.
'아빠는 별이 될까 천사가 될까.'
입관할 때 몸이 틀리지 않게 묶는다고 하더라. 우리는 그러지 말자 했다. 몸에 갇혀있던 아빠를, 가는 날까지 자유롭지 못했던 아빠를 또 묶어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고이 갔다. 많은 분들의 기도 속에, 꽃으로 가득 채워 아빠를 묻었다.
‘친구야 잘 가라. 잘 가라.’ 거친 손으로 흙을 뿌리고 밟아주며 아빠의 친구는 목놓아 울었다. 생전에 약속했었다더라. ‘우리 둘 중에 누가 먼저 죽든 잘 가라고 꼭 밟아 흙 다져주는 게 친구 아니겠느냐’고.
아빠는 갔다. 내 방은 아빠의 장례 이후로 멈춰있다. 어느 것도 풀지 못하고 그대로 쌓여있다.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많이 울어서 아빠가 좋은 곳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노파심과 죄책감에 성당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보내며 신앙을 약속했듯 나도 꼭 같이 약속했다. 키큰 남자와 나는 늦었지만 혼배 성사도 했다. 혼배 성사 때 작성한 문서는 봉인되어 바티칸까지 간다고 한다.
사랑을 약속하는 날의 고해에서 신부님은 ‘사람이 죽으면 사랑밖에 남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 남은 감정은 사랑 하나로 충분하지. 그만 자책하자.’
사망신고를 하러 간 날, 아빠의 이름으로 가족관계 증명서를 뗐다. 그거라도 있어야 아빠가 정말 내 아빠였던게 증명될 거 같아서. 사실 그 어떤 증명은 필요도 없이 나는 그의 딸인게 확실하면서도 말이다.
언젠가의 면회에서 휠체어에 앉은 아빠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죽고싶다고 했었다. 아빠 당신은 괜찮느냐고 나는 더 없이 견딜 수가 없다고. 정말 지쳤다며 세상에 우리 둘 뿐인 듯 엉엉 울었었다. 당신은 날 기억하지도, 내가 했던 말의 의미도 모를��지. 아빠가 아프다는 것이 그 순간 내게는 안도였다. 하지만 이젠 죽을 수 없다. 내가 죽으면 아빠를 만날 수가 없으니까. 주어진 날까지 다 살고 죄 없이 죽어야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아프지 말고 아빠 좋아하던 숲과 나무 많이 보고 편안히 있다가 우리 다시 만나자. 나 이서방이랑 오래 살다가 나중에 갈게. 아빠 나 죽지 않을게.’
모든 고해와 고백과 약속들은 다 늦어있을 뿐이었다. 돌릴 수 있는 일은 그런 말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늦었다. 너무 느렸다 나는.
'아빠 내 사춘기가 아빠에게만 너무 오래였어서 미안해.'
앞으로 내가 쓰는 모든 글들의 마침표 역시 '아빠'일 것이다. 가슴이 미어지고 코 끝이 아플만큼 찡해도 나는 마침표를 찍고 늘 그를 기억해야 한다.
내가 결혼하면 수영장이 있는 집을 지어주겠다던 아빠의 말이 생각난다. 부지런했던 아빠는 아마 그곳에서도 우리를 위한 집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희고 밝은 집을 짓고 있을거다. 아프지도 않을 것이고 고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아빠가 기쁨과 평온속에 있기를 기도한다.
✟ 라파엘의 묘
‘여기’라는 말에 홀렸으며
‘그곳’이라는 말을 참으며 살았으니
여기를 떠나 이제 그곳에 도달할 사람
1958.6.22~202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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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빠 데이트 방해하는 20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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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피눈물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시든, 남 이야기를 밥먹듯 하시든,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엄마 눈에서 피눈물 나는건 못보겠다.
내 욕은 해도 된다. 남들에게 제단당하는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아프지 않다.
우리 엄마 아빠에게 자식농사 잘 못지었다는 소리도 이젠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엄마 그렇게 힘들게 마음고생하고 피눈물 흘리면서 매일밤 잠을 못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모습은 못보겠다.
그래서 우리엄마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손가락질 당해도 상관없다.
지호에게 같이 오명씌워도 상관없다.
아빠에게 자랑스런딸 못 되도 상관없다.
근데 엄마 마음에서 피눈물나는건 더는 두고 볼 수 가 없다.
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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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모님들 사이에 가장 핫한 아기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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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다. 군대 간 오빠야를 빼고 엄마, 아빠, 나 셋이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된장찌개, 계란말이를 시켰고 아빠는 담배를 핀다고 오지 않는 것 같았다. 된장찌개가 나오고 엄마랑 나는 밥을 먹었는데 아빠는 계속해서 오지 않았다. 집 문 여는 소리가 들려 아빠인가 싶어 잠에서 깨니 엄마가 집에 왔다. 엄마가 나에게 와 뽀보를 하는 순간 아빠는 언제 오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빠는 6월 13일에 돌아가셨다. 아빠가 진짜 보고싶다... 너무 보고싶다
아빠랑 치킨도 먹고싶고 새로운 음식점 생기면 아빠랑 나눠먹어보고 퇴근하면 나를 안아주고 주말마다 엄마랑 아빠 예쁜 카페에 다녀오고 오빠야 휴가 나오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주말에 아빠랑 영화도 보고 밤에 누워있는 아빠 옆에 가서 같이 누워있고 매월 용돈받는다고 아부떨고 귀도 파주고 볼에 털도 뽑아주고 아빠 스마트워치를 탐내고 대학교가 어떻다 친구들이 어떻다 얘기도 하고 등교도 시간되면 아빠가 같이 해주고 야구도 다같이 보러가고... 아빠가 좋아하던 롯데가 지금 4위이다 아빠가 봤으면 진짜 좋아했을텐데 슬프다.
진작 잘할걸 이라고 후회하는 상황이 나에게는 생기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아빠는 늙을 때 까지 내 곁에 있을거라 생각했다. 투정부리는 것도 다 받아주고 진짜 좋은 아빠였기 때문에 더욱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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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생신떡케이크 로 주문해 주신 고객님의 #용돈떡케이크 입니다. #아빠 #생신축하드려요 #늘_건강하세요 떡 안에서 돈이 줄줄 나온다고 해서 #돈케이느 #돈줄줄케익 라고도 합니다. #용돈떡케익 #돈케이크 #서프라이즈케이크 (망리단길에서) https://www.instagram.com/p/CrrizE_vG5M/?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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