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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이
michellkorea · 16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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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 매화마을
광양시(光陽市)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동남부에 있는 시이다. 서쪽으로 순천시, 남쪽으로 여수시, 북쪽으로 구례군과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섬진강을 경계로 경상남도 하동군과 도계를 이룬다.
지리산 자락을 수놓으며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면 매화나무가 지천으로 심어져 있는 섬진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농가들은 산과 밭에 곡식 대신 모두 매화나무를 심어 매년 3월이 되면 하얗게 만개한 매화꽃이 마치 백설이 내린 듯, 또는 하얀 꽃구름이 골짜기에 내려앉은 듯 장관을 이룬다.
광양은 고대 마한 54국의 하나인 만로국(萬盧國)에 속했다. 가야 점령 이후에는 모루(牟婁) 또는 물혜(勿慧) 불렸으며, 백제시대에는 마로현(馬老縣)이 되었다. 남북국 시대시대에는 희양(曦陽), 고려시대부터는 광양(光陽)으로 불려왔다.
1989년에는 광양군 골약면, 태금면, 옥곡면 광영리가 동광양시로 승격하였고, 1995년 1월 1일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통합되어 현재의 도농복합 광양시가 되었다.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섬진강매화로 1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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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e549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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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파트110화
연인파트110화 [링크]”true” [2012.2.20] <로맨스소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하얀늑대+황금거위 하얀 늑대와 황금이 하일권 지음 / 문학동네 펴냄, 2011년 12월 15일 출간, 136쪽 정가 : 12,000원 ISBN 978-4-8997-534-1(세트) 판매가 : 11,000원 * 도서소개 –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를 보여준다. 사랑이야기만이 아니다. 때로는 웃음과 울음이 공존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연인파트110화 다시보기 링크: https://bit.ly/44Qhwem 특히 마지막 부분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백설이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는…”이라는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쩌면 모든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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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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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 / 김설 박팀장 / 철인 3종 경기 수영 자전거 달리기 / 백설이 초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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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osong75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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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쿠르트 #삑삑이토이 #백설이 #리얼깡패 #사랑하지않을지도 #지리산아랫동네서식 #프로혼밥러 #독거노인 #수린이 #요린이 #배린이 #어른이 #MercedesBenz #E3004maticExclusive #E클래스 #익스포매 #프렌즈팝 https://www.instagram.com/p/Cfu1-cnvEOK/?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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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iarei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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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입니당- #Repost @masan1817_car with @get_repost ・・・ 피니쉬 라인으로 향하는 백설이 #i30 #i30pd #I30Nline #아이서티n라인 #tgdi #아삼공 #쩜육터보 #스냅샷 #snapshot #영암서킷 #백설이 #차쟁이 #차스타그램 #autoporn #carphotography #Carstagram #CANON #6DMark2 model:@susiarei photo by #양덕동제스타. https://www.instagram.com/p/CCmuA5Bl4Wm/?igshid=rge15j1o1q1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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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m939311-blog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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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 문정희, '겨울 사랑'
#우리말예쁜말 #좋은글 #슬픈글 #힐링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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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osong75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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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딧 #야이프레딧놈들아 #소멸포인트 #알림문자 그만 좀 보내라 뭐 이래 매달 보내노 #뜻밖의쇼핑 #백설이 #펫쿠르트 #바스락토이 #느그아부지므하시노 #닭튀기는데예 #동근이숯불두마리치킨중마점 #동근이숯불두마리치킨조례점 #리얼깡패 #사랑하지않을지도 #지리산아랫동네서식 #프로혼밥러 #독거노인 #수린이 #요린이 #배린이 #어른이 #MercedesBenz #E3004maticExclusive #E클래스 #익스포매 #프렌즈팝 https://www.instagram.com/p/CfqOmOqvCcj/?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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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iarei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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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글자 디. Repost @masan1817_car with @get_repost ・・・ #i30 #i30pd #I30Nline #아이서티n라인 #아삼공 #tgdi #쩜육터보 #wheels #dressup #tunning #스냅샷 #snapshot #패닝샷 #PANNING_SHOT #영암서킷 #백설이 #차스타그램 #Carstagram #autoporn #carlovers #carphotography #CANON #6DMark2 #canonimages #canonimagestorming #캐논이미지스토밍 #이니셜D #initialD #頭文字D model:@susiarei photo by #양덕동제스타.(Korea International Circuit에서) https://www.instagram.com/p/CCFd6OcFjVy/?igshid=4py59a7oc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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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theringground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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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
"사람을 믿지마. 상황을 믿어야지."
- <불한당> 중, 재호가 현수에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은 실수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실수의 근본을 깨닫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도원결의라 생각했던 만남이 단순한 이합집산에 불과했음을, 수어지교라 여겼던 교제가 단순히 오월동주와 다름 아님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비참하다.
인간은 관성의 동물이고, 확증편향의 노예다.
갓 태어난 강아지가 처음 본 생명체를 어미라 여기고 계속 그 관계를 신뢰하듯, 한 번 마음 속에 걸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은 믿음은, 내가 처음부터 형체와 본질을 잘 못 파악했을 가능성을 애써 부인하고는 한다.
스스로 만들어 낸 추동력 속에 깊이 빠져버리면, 처음 믿은 명제와 어긋나는 반례가 거듭되어도 그 증거들을 계속해서 부인하고자 한다. 누적된 증거가 마침내 특정 임계를 넘을 때 시쳇말로 '현타'라 부르는 순간이 임재한다. 그리고 읊조린다.
"또냐."
왜 같은 실수는 반복되고,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일까.
세상에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낳고 길러주신 내 어머니와 형제보다 진한 정을 나누며 함께 자란 고향 친구밖에 없다는 잔인한 진실을, 결국은 마주하고 견지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누구도 원망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내 선택이고 내 믿음이었을 뿐이니까.
그래, 백설이 만건곤 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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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0im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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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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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ssuecollector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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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버리는 사람’과 우리와 ‘가족이 되어주려는 사람들’ ㅣ "We Were Abandoned By Our Family On The Streets"
우리를 ‘버리는 사람’과 우리와 ‘가족이 되어주려는 사람들’ ㅣ “We Were Abandoned By Our Family On The Streets”
2019년 주인에게 버려져 길 위에서 만난 생명들.. 그리고 당신과 우리가 함께 만든 기적
베들링턴테리어 순이 이야기↓↓↓
스핑크스고양이 백설이 이야기↓↓↓
페키니즈 흰둥이 이야기↓↓↓
#동물농장 #애니멀봐강아지 #애니멀봐고양이 ————————————————- 애니멀봐와 한배타고⛵ ☞ https://goo.gl/WL9mGy
귀여운 강아지 더 보기🐶 ☞ h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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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elgame2017-blog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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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몰랐던 꿀잼 甲 야마토게임 야마토게임장
100% 그림   1. 작은창(깡통,백설이,철이) 배경(빔 공격,5편대), 큰창(마왕,선장), 야마후라, 깡통무리      등장후 슈퍼 리치가 A은하일 경우 당첨 확정   2. 백설이 + 마왕 당첨 확정   3. 선장 연타자 당첨 확정   4. 5편대 출현 후 슈퍼 리치가 스페이스 제로일 경우 당첨 확정      단, 스페이스 제로에서 야마토 정면포로 연결되면 당첨 확정 아님   5. 리치 전 야마후라 당첨 확정   6. 상하단 찬스눈에서 포를 쏘지 않고 화이트 아웃으로 넘어가면 당첨 확정   7. 캐논 웨이브시 쇼크 캐논을 발사하면 당첨 확정   8. 양 스베리 연타자 당첨 확정 
바로가기: http://bit.ly/릴게임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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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osong75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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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이 #백설그램 #느그아부지므하시노 #닭집하는데예 #나가놀아라 #동근이숯불두마리치킨중마점 #둥근이숯불두마리치킨조례점 https://www.instagram.com/p/Cdmx8VCvOV7/?igshid=NGJjMDIxM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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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iarei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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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뽀 앤 안황토휠 시절. ㅋㅋㅋ #Repost @masan1817_car with @get_repost ・・・ #현대자동차 #hyundaimotors #i30pd #i30 #I30Nline #아이서티n라인 #tgdi #쩜육터보 #아삼공 #스냅샷 #snapshot #영암서킷 #백설이 #차쟁이 #차스타그램 #Carstagram #carlovers #autoporn #CANON #6DMark2 photo by. #양덕동제스타.(Korea International Circuit에서) https://www.instagram.com/p/CB5EhmMllp4/?igshid=15xde6w06mf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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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novel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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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수기
k의 수기
 눈을 감으면 계곡의 습기가 초록 잎더미 위에 내려앉아 풍기는 신령스러운 냄새가 났다. 비온 듯 촉촉한 흙길을 따라 걷는 파란색 등산복을 입은 내가 보였다. 젊고 건강한 내가 뒤돌아서 지금의 나를 보았다. 나 역시 젊고 건강한 나를 보았다. 지금은 더러 멸종하기도 한 온갖 꽃이 피고 검은 물 위에는 달이 뜨고 안개가 산등성을 넘어가고 백설이 쨍한 깨끗함을 선보이고 물에 젖은 낙엽들의 단 향내가 올라오는 곳에 그녀는 있었다. 그녀는 어서 오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곳이 공허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다음 다음으로 옛날의 내가 체험한 전원적이고 신묘한 영상들을 재생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늘 가슴 속에 체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밤늦게까지 이 체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학교를 안 가는 문제를 가지고 멀리에 살고 있는 남자친구와 언제나처럼 말이 통하지 않은 탓도 있고, 하루에도 몇번을 오락가락하는 휴학 결심과 그로 인해 가변적인 교환학생 문제로 여러 사람들에게 밤늦게 결례를 저질러버린 죄책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은 고의적으로 카톡을 사용하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도 조금 했다. 미래는 아이템들의 강강술래 대열에 끼여가지고는 돌아가기 시작했고 내 앞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익숙한 순환들이었다. 나는 어찌할 수가 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을 때 계곡 옆에 있던 그녀 역시 대답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친구는 학교를 그만둔 때의 내 미래를 강강술래로조차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강강술래가 끝나지 않게 펼쳐질 때면, 남자친구의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의식이 고취되었던 기억이 나를 돌이켜 세우고, 너무 반듯한 인생을 살아 왔고 너무 고운 사랑만 하려 하고 너무 상식적인 인생만 그릴 수 있는 남자친구에게 적대의 감정을 내비치는 것이 항례이다.
어떤 고취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혁명적 각성이다. 남자친구 눈에는 내가 쑥과 마늘을 계속 먹기를 포기하니까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비칠 것임을 생각하면 분통하여 그에게 적대의 총구를 들이대고 싶을 만큼 확실하고 아픈 경험이다.
그러나 그에게 악의가 없음을 알기에 기어이는 적대의 총구를 디지털화되어서밖에 전달될 수 없는 몇 리터의 눈물을 쏟으며 거두어 들이고, 다시 외로운 자아가 되었다가, 나 자신을 방치했다가, 그 외로움에 못이겨 다시 그에게 의존하게 되는 패턴이 있다.
몇 번을 더 이런 가혹한 패턴 속에 둘이 싫증내지 않을 수 있을까. 잠 오지 않는 오늘 밤중에는 되풀이되어 왔듯이 그와 헤어지는 상상을 했다. 그와 실제로 몇 번을 완전히 헤어지려고 했었다. 헤어지겠다는 결심을 하고, 확실히 헤어질지 안 헤어질지가 가만히 유예되고 있는 그 몇 시간들에, 그와의 사랑이 별로 깊은 자극점도 건드리지 않고 들어갔다 나가는 페니스와 같이 무색무취하다고 느끼곤 했다. 마치 아무런 칼로리도 발생시키거나 소모시키지 않고 부담없이 몸속에 들어왔다 나가는 물처럼, 있건 없건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없으면 내 인생의 의미는 없어.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물론 이런 말을 한 적도 있고 이런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이런 말을 강도 높게 선언하는 이유는, 그만큼 가볍기 때문이 아닐까.
그와 사귀고 있는 동안에 서로에게 귀여운 깨��정을 떨며 격렬하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적도 많았다. 이 감정의 격렬함이 어떤 식으로인가 강해진 나를 그려내는 상상에는 종종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그는 내가 강해지는 것에 어떤 힌트도 되지 못했다. 그게 문제가 되는 적도 많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적도 많다. 그러나 종종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
공기 중에 온기가 돌고 벚꽃이 피어간다 싶더니, 다음 날은 다시 하늘이 미약한 봄비를 흩뿌리고 있다.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여 걱정하였지만, 그럭저럭 평균적인 기상시간에 일어났다.
아픈 몸일수록 제대로 먹고 싶었지만, 아픈 몸이니까 며칠 째 제대로 밥을 못 해먹고 있었다. 일어나면 분식집으로 가거나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나는 오늘도 분식집으로 걸어갔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대안은 없는 식사를 했다. 분식집 남자가 문 밖의 학교 정문을 내다보며 ‘오늘도 사람 많겠다’고 걱정했다. 분식집 알바에 비하면 내가 했던 도서관 알바는 쉬운 일인 것 같기도 했다. 비록 5개월 째 나에게 소파수술까지 받게 한, 에스트로겐으로만 멈춰야 했던 월경불순과 과다출혈 탓에 얼마 전 월경이 터진 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두긴 했지만 말이다. 학교를 그만둘까 말까 하고 있는 판국에, 일자리는 고사하고 다시 그런 좋은 알바자리조차도 나에게 돌아올 수 있을지, 남자친구의 걱정이 전염병이 되어 옮은 듯이 걱정되었다. 기껏해야 분식집 알바나 하면서 도서관보다 몇 배로 더 힘든 일을 하고 적은 돈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번에는 유독, 그것이 싫어 학교를 다녀야겠다고 나 자신을 채찍질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너의 증오는 이해가 간다’고 말하면서도 내 머릿속에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음을 남자친구는 경멸하거나 걱정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막연히 믿고 있는 점도 있었다. 지금 당장 구체적인 것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나와 남자친구의 세상에 대한 공부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은 얼마나 넓은지, 내가 실현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얼마나 다양한 일들이 있는지, 거기에 대한 진짜 공부를 시작하지조차 않았다. 그러니 암울한 미래밖에 떠오를 게 더 있을까.
휴학 결정을 하고 아침나절부터 교수님께 문자를 드렸다. 어쨌든 휴학은 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되고 싶었다. 주권과 자유! 인간으로서, 여기에 대한 절실한 추구가 만약 그것에 정말로 진정성이 있다면 어떻게 쑥과 마늘을 견디지 못한 죄악이 될 수 있을까. 남자친구는 나에게 인내심의 부족이라는 죄명을 붙이고 말았지만, 나는 이제부터라도 진정 나를 위한 사고를 다시 시작하고, 이전의 ‘모방하기’의 삶들보다 어느 모로 봐도 훨씬 충만해지고 싶었다. 추상���인 생각이기도 했고, 아직 본격적으로 진입하지도 못한 출발선 단계의 생각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현실세계의 무엇무엇을 할 거라는 대답이 가능할 만큼 구체적이지도 않았다. 지금부터 인생 공부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었다.
혁명을 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 결의는 충분하지만 당장은 구체적 끈들과 이어져 있지 않고 끈들을 찾고 있는 형국이다.
어제 남자친구가 무엇을 할 것인지 현실세계의 구체적 계획과 거기에 대한 준비과정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그래서 나는 대답할 수 없었는데,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것 봐라. 너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요행을 바라기에 절망할 가능성이 높지만, 나는 참고 준비해서 내 인생을 바꾸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아니꼬웠다. 그가 엉덩이 오래 붙이고 있는 건 본 적이 없고, 자기에게 해가 되는 생각은 하지 않는 둥글게 무던한 정신과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평가할 수 있기도 했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사회와의 친화력과 높은 적응력 말고 별도의 고된 준비와 몇 번의 껍질 깨기를 통해 인생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인생에 대한 시각이 다른데 어떻게 학교에선 금슬 좋은 커플로 알려지고 여태까지 그렇게나 아름다운 청춘의 추억들을 같이 쌓아올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진짜 사랑은 드디어 찾아내었다 생각하는 순간 멀어져가는 것 같다.
언제나 아침이면 자취방에서 홀로 맞는 아침이 압살적일 만큼 외로워 진하게 그가 보고 싶어지고, 싸우고 난 다음이라도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싸우고 나면 그가 사준 물건들을 버리거나 치우곤 하는데, 오늘은 가방에 붙어 달랑거리는 그가 준 인형조차 거슬리지 않았다.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기어이 학교를 다니지 않고 내 길을 찾겠다는 나의 선언. 그 선언에 대한 의견차이가 보여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인생의 가치관의 상이. 내일은 당장 화해할 수 있을 만큼 한 뼘만 멀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자연스럽게 매우 많이 멀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에게 증오를 느끼고 그에게 ‘이것 봐라.’하고 보여주기 위해 오기로 이것저것을 하다가는 내 인생은 더 비본질적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걔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존경할 만큼 무언가를 이루고 나서 전화할 생각이었지만, 차츰 걔에 대한 인생을 건 적대감이 실타래처럼 엉키어간다.
늘 환경호르몬처럼 내 몸속에 축적되어 온 그의 태도는 내가 고졸 검정고시를 친 후 몇 년 간 사회복귀를 못하게 만든 부모님의 잘못된 태도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그가 부모님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꼰대가 되어 갈 것 같아 역겹다. 부모님을 떠나서 눈발 날리는 길을 걷다가 따뜻한 불빛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간 집의 친절한 주인이 제 이의 부모님처럼 군림하게 될 것 같다.
아주 옛날에, 상식적인 인간은 나를 파괴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다 기억나다니, 나는 강강술래 대열에 같이 끼여 돌다가 시간도 회전하여 청소년기로 회귀한 것 같다. 청소년기가 나에게 남긴 것에 관해 나는 타의적으로 입이 봉쇄되었건 자신의 실망에 의해서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를 찾는 것도 분명 중요할 것이다.
나는 그 시절의 실패, 그 이후로도 이어진 비슷한 실패들이 지금부터도 반복될 예정인지 가늠해본다. 경쟁교육과 등급 매기기가 만들어낸 결정장애, 신경증, 강박증. 저 강강술래의 대열을 지금 단칼에 잘라낼 수가 없다면, 악순환은 이어질 것이다.
“잘라낼 수 있다.”
그렇게 믿고 시작하고 싶다. 그런데 수십 수백 번 꼬여버린 인생의 실타래를 지금이라고 풀어낼 수가 있는 것일까. 이전과는 다른 참 지혜를 얻어낼 수 있을까. 이전과는 다른 사고양식과 행동양식을 찾을 수 있을까. 진짜배기 삶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을까. 어떤 공부와 어떤 경험을 해야 하며, 어떤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가. 어떻게 실패로부터 참된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지금 나에게 중심이 되는 욕망은 다음 같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잘못된 독점적 정부체제에 안주하고 복종하기보다 그 정부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을 술술 말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용기와 확신을 나 자신의 가슴 깊숙히 침투시키며 ‘숙청’이라는 목숨을 걸고 이 나라를 탈출하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삶이 결정장애자의 은둔이거나 패배자의 적응 시도였다면, 지금부터는…….
다시 강강술래의 대열이 나타난다.
문학, 철학, 수학…… (그리고 여기엔 완전히 다른 삶을 기대하며 수능까지 나타난다), 일을 한다, 세계 여행을 한다, 대안적 교육단체에 들어간다, 산으로 간다, 영어를 한다. 너무 많은 아이템들이 정리되지 않고 뱅뱅 돌고 있다. 나는 이전과 같은 아이템들을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고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도 못하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랍시고 시간을 보내고, 뒤돌아보면 남은 것은 한 줌 밖에 되지 않을 수가 있다는 불안이 들었다.
오늘도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지독한 혼자만의 어둠 속에서 떨며 끝날 것 같다. 외롭고 불안하다. 당장 이곳 지방 소도시를 박차고 서울로 가서 새로운 만남을 가지고 싶다. 새로운 네트워크에 소속되고 싶다. 일본 대학 교환학생이 최종 통과되어 일본에 가기 전, 단 몇 개월 만이라도.
자극! 나에겐 너무도 지적 자극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예전처럼 책보고 수업듣고 발표하고 공부하고, 그게 내가 얻고자 하며 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일까?
*
어떤 주제를 내 머릿속에 주기로 했다. 내가 생각해온 <학문상의 도약>과 그 정의가 언제나 맞부딪히게 되었던 난점들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생각해볼 것. 그렇게 주제를 정하고 법대도서관에 앉아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자니 답답했다. 불현듯 학교의 심리상담센터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심리상담가에게 여러 이야기들을 토해내듯 쏟아내고 싶었다. 그 순수하고 심지 굳고 열정적이라고 평판이 나 있던 나에게 너무도 일련으로 이어져 온 좌절과 질병과 가증스러움들을, 길 찾는 자의 절실한 말투로…….
상담센터의 직원은 나에게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게 한 뒤 상담 가능한 시간을 추후에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그곳을 나와서 법대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난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렇기에 평판의 진위여부도 판가름할 수 없으면서, 평판에 의존한다.
그러나 평판은 어떤 순간에도 확고한 지지대가 되어주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최근에 추천서를 받고자 하면서 가장 진하게 느꼈다.
교수들께 교환학생 추천서를 받아내고자 했을 때 일어난 겹겹의 사건들은 내가 대학 들어와서 무엇을 했나, 헛공부를 했나, 그 시간들의 의미는 아예 없는 것인가, 재고하기를 촉발시키는 것 같았다. 나는 학과 내의 다른 사람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나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교수들은 내가 누군지 기분 나쁠 정도로 몰랐으며, 그렇다고 내가 나를 추천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진심을 다해 하지 않았다고 마음 속에서 결론 내려졌다……. 3년 동안 한 공부 중에 내 인생에 진짜로 도움이 되어서 머릿속에 금방 기억 나는 게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른 채 탁상공론으로만 머리가 가득 차서 나이만 들고 있었다. 앎이란 게 그리 쉽단 말인가? 앎은 온 몸이 전율하고 온 몸이 기억하여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대학에서 얻은 나의 앎이란 건 고작, 인간관계로 인해 내가 망가진다는 것 뿐.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녀를 본다.
그녀는 보결로 해서 들어온 한문학과 생활을 1년간 적성에 맞지 않아 하면서 하다가, 2015년 1학기부터 자신이 원하는 수업을 마음대로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2014년 계절학기에서 듣고 싶어서 고른 수학과 경제학 전공이 너무 수준이 높아 꾸준히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F를 받은 경험이 있었고, 2014년 2학기에도 자기 학과 수업에 빠져서 몇 개 F를 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F만은 받지 말자는 결심으로 또한 넘치는 지적 욕구의 해갈을 위해 꿈에 그리던 철학과 수업들을 듣게 되었고 프랑스 유학에 대한 막연한 비전도 가져 프랑스어 공부도 하게 되었다. 철학과에서는 높은 난이도라고 정평이 난 수업들을 몇 듣고 있었지만, 그녀는 꿈만 같았고 재밌었다. 친구들도 생겼다. 자극이 되거나 마음의 안정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들인 것 같은 때도 많았다.
그때는 나이가 띠동갑 씩이나 차이가 나는, 한국 최고수준의 대학에서 포스트닥터를 하고 있던 생물학 하는 전-남자친구도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건강했으며 모두들이 아연질색하는 차림으로 학교에 가도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웃고 떠들 정도의 자신감이 있었고 수업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재기를 내비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전-남자친구와 여러모로 비교되어 생긴 열등감도 있었지만, 자신은 젊으니까 지금부터 충분히 만회하면 된다는 여유 덕분에 큰 불안은 없었다. 불안이 자라나면 더 열심히 공부하자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은 위로가 되었고, 무엇보다 당장의 강의들에서 구획지어준 공부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읽고자 했던 책들을 더 많이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레포트를 쓸 때 아쉽긴 했지만, 그런 무언가 아쉬웠던 느낌은 완벽한 성적표가 도착하고 나서 싸그리 사라졌다. 지방대에 있기는 넘칠 정도로 아까운 실력을 갖추고 엄격하기로 악명 높은 교수조차 A+를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얄팍한 성적표 종이 한 장을 가지고서도 자신이 앞으로 철학을 하고 살아도 된다는 법적인 보증수표를 얻은 것만 같았다.
해바라기의 계절, 그 교수는 지방대에 있기는 역시 아까웠던 모양인지 서울의 명문대로 이직을 하였고 전-남자친구와는 헤어졌다. 또,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이상적인 철학도의 모범으로 삼고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또래 여학생도 독일로 갔다. 마음의 지지대가 되고 있던 것들이 셋 씩이나 사라진 채로 2015년 2학기를 맞았다.
그녀에겐 학우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생겼고 성적을 물신하는 태도 역시 생겼다. 마침 학점을 더 올려서 철학과로의 전과신청도 통과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주권을 지우고 강의자들의 지적인 노예처럼 학교를 다녔다. 그녀가 강의들을 모두 녹음하여 받아쓰기한 것을 자신의 ��페이지에 올리자, 철학과 학생 몇이 그것을 족보처럼 이용하면서 ‘열심히 한다’, ‘존경스럽다’ 등으로 찬양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열심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성적을 잘 받는 경제적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을 따름이다. 성적을 잘 받는 그 경제적인 방법이 마치 사원의 업무처럼 끝나면 그녀는 따로 개인적인 학문적 추구를 하는 바도 없이 술을 마시며 혹은 그게 뭐 진한 우정이라도 되는 양 허깨비들과 실없는 수다를 떨며(졸업반이었던 남자친구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진지하게 해보지 않고 놀았다. 그녀는 뼈와 피와 살에 각인된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높은 성적으로 전과를 성공시켰다.
그녀는 그로부터 1년 몇 개월 사이에 망가져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는 바로 몇 시간 전의 자신의 의견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다른 사람들이 탈진해서 나가 떨어질 때까지……. 체계적인 사고 같은 건 불가능한 인간이 되었다.
그녀의 1년 몇 개월 사이의 일들을 쓰고, 추천서를 왜 못 받게 되었는지도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일을 끝내지 못하고 나는 집에 돌아와 쉬었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몇 시간 전에 나는 학교 커뮤니티에 방을 내어 놓았었다. 휴학을 하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휴학했던 작년의 경험을 곱씹어 보건대, 이 지방 소도시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서울에 방을 얻어 재야 연구단체에도 다니고 대학이나 대학원 청강도 하면서 예술적 영감이건 지적 영감이든 듬뿍 받고 싶었다. 또 하나의 감정기복에 불과했던 이 직감은, 막상 방을 보자는 사람들이 두셋이나 연락을 걸어 왔을 때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방을 보여줄 만큼 확고하지는 않았고, 한밤중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뒤집히고야 말았다.
대신에 나는 도서관에서 들어올 예정인 알바비로 이틀 동안 일본여행을 가기로 하고 항공권을 구매했다가 취소했다가 또다시 구매했다가 입금은 하지 않은 상태로 내일까지 고민해보기로 하고, 그동안은 ‘서울에 간다’거나 ‘일본여행 간다’는 사실을 그 순간의 절대적인 감정에 의존하여 확정적인 마냥 카톡 친구들 세 명에게 중계했다. 그 선언이 언제나처럼 내 감정기복에 의해 뒤집힐 때, 나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제는 도출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 명은 몇 십장의 만화를 카톡 배경사진에 올리며 나에게 경고하고, 상태 메시지도 ‘위로가 아니라 욕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도망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로 바꾸었다. 다른 한 명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보였고, 또다른 한 명은 나의 언행들이 적절한 이유로 소름끼친다고 했다.
이 마지막 사람은 A라고 하는데, A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나를 성의 있게 고찰해주고 또 성격도 매우 정의로워서 내가 언제나 믿고 따르고 A의 언술 내용 자체로 인해 나와 인생에 대한 생각을 많이 촉발받기도 하던 동갑내기 여자친구였다.
나는 A에게 남자친구 욕을 하며 겨울방학 때 남자친구와 한 번 헤어졌었다. 그 다음 며칠도 안 되어 나는 A에게는 말하지 않고 남자친구 고향에 과일주스를 사들고 찾아가서 다시 잘해보자고 하였다. 남자친구도 수긍했다. 이 놀라운 감정기복이 A에게 전해지는 것이 부끄러워 가만히 있었지만, 그 사실을 어쩌다보니 들키게 되었다. 나는 설명을 미루다가 드디어 설명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스토리라인을 짰다.
아빠가 남자친구를 매우 좋아하고 내게 그 남자친구가 붙어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였기 때문에, 아빠에게 헤어졌다고 말하기가 힘들어서 말하지 않았다. 아빠는 우리가 사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빠가 셋이서 남해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셋이서 여행을 갔는데, 그때 남자친구가 아빠한테 정말 잘했다. 남자친구는 내게 아직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랑은 없어도 이런 식으로 다시 시작해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카톡 프로필 배경사진을 그애 얼굴로 설정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며칠 가지 않았다. 썩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려 해도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니 반 정도는 사실이었다.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아빠가 주입한 사고방식, 그리고 아빠가 자기의 대타가 나타났음에 안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뒤틀린 효도의 감정, 그 감정들이 내가 그애의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게 하지 않았던가.
그럴듯한 말들 뒤에 숨겨진 거짓말은 내가 그렇게 몇 순간, 몇 시간들은 정말로 꿈 속에 있는 것 같이 좋았다는 것이다. 말이 통하건 안 통하건 얼마쯤은 내 말의 권력을 그애에게 행사할 수 있다는 쾌감을 느꼈고, 가치관이 맞건 맞지 않건 그애는 나에게 달콤한 감언이설과 다정한 행동을 해주었기 때문에 바닥도 모르고 의존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이외의 시간들은 정말로 좋은 감정 이상으로 피폐하고 서로를 특히 나를 파괴해가는 시간들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애 역시 나와 연동되어야만 하는 시간들에는 30분은 웃고 장난치고 30분은 울고 화내고 그랬다. 그애는 내가 자기와 있으면 빨리건 늦게건 망가져갈 것이라고 한 적도 있었고, 내가 자기의 존재를 박살낸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애의 의견을 업수이 여기고 계속 쾌감과 의존증을 풀기 위해 사귀자고 설득하는 역할은 언제나 나였다. 지금까지는 그애가, 우리가 하는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잘 따라왔다. 지금부터는 어떨지 모르겠다. 아니, 이미 결론이 난 것도 같다. 며칠 째 연락도 뜸하고, 어제부터는 전적으로 연락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의존적이면서,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도 잘 알지 못한다. 어떻게 내가 1년 사이에 -아니면 훨씬 더 오래 전부터였을 수도 있다- 이런 인간이 된 것인지, 써 놓고 보니까 우습고 허무하다.
나는 A에게 보내는 스토리라인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보냈다.
걔가 옆에서 자꾸 서울에 있는 대학교 대학원 좋다, 재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다들 열심히 한다, 지방은 생각도 안난다…… 이런 말 뿌리고 다니니까 난 더 수세에 몰린 나머지 너에게 우울증에서 비롯된 여러 말실수도 하고 그랬어. ‘잘됐다’하고 좋게 생각 중이다가도 내가 자기가 보라고 한 서울에 있는 대학교 편입시험도 안 보고 서울 오려는 노력도 준비도 안한다고 자꾸 갈구는 데, 그게 어불성설인 게…… 나보다 실력 없었던 애가 그러니까. 성공은 근자감인가 보다 하고 그애 성격이 부러울 따름이네. 걔가 학부는 과도기로만, 방편으로만, 수단으로만 존재한대. 대학원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나랑 동갑이고 학교에서 아무리 학년이 낮아도 내가 걔보다 더 잘했고 지금도 걔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내가 더 많은 공부를 해왔는데 단지 신분 때문에 그런 말 듣고 있기 심기 불편해. 걔가 엉덩이살 두꺼웠으면 모르겠지만 같이 공부하면 판타지 소설이나 읽고 있던 게. 세상이 억울하다.
A가 답장을 보냈다.
만나서 너한테 도움이 되면 모르겠는데, 너 또 욕하고 있잖아. 너한테 좋을 게 뭐야 대체. 감정기복이 문제가 아니라, 니 감정에 도움이 될 게 없다고. 계속 욕할거리만 생기잖아. 심란하게만 말들고, 짜증나게만 말들고. 근데 왜 그러고 있어.
걔는 니가 계속 나쁜 말과 나쁜 생각을 하게 해. 계속 욕하잖아. 아니 욕하면서 왜 계속 관계를 유지하냐고. 욕하면서 너만 스트레스 받아. 욕하는 게 스트레스 푸는 게 아니라고. 니가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고 짜증나 하다가 욕하면서 생각정리하고 하는 거잖아. 진짜 시간 낭비, 뇌 낭비다.
욕을 하면서 왜 만나. 말이라도 통하는 애면 모르겠다. 앞에서 욕하면 지 변호하느라 바쁜 애를. 하등 도움될 게 없어. 진짜 누누히 말하지만. 진짜 제발 K야. 욕하면서 너 스트레스 받고 있어. 너는 모르겠지. 니 뇌는 스트레스 받아. 욕할 때, 욕 들을 때, 욕 생각할 때, 물분자 깨지는 거 사진 본적 없냐. 우리의 70%가 물이라고, 욕하지 말라고 하는 거 못들었냐? 말이 안 통해서 욕 나오는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고 끊고 말아. 그 분석철학 교수든 남친이든 그 사람들 말 때문에 고민하고 기분 나빠하다가 생각 정리하고 멘탈 수습하고 그러지 말고.
역시 A다운 성실하게 나와 맞서주는 태도였다. 그래서 내가 더 A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A의 생각을 너무 과신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A의 생각에 너무 깊은 영감을 받기도 했고, 또 정말 객관적 시각으로 봤을 때 그애와 사귀기 시작한 작년 4월달부터 내 몸과 마음이 몸의 측면에서는 소파수술까지 하게 되고 마음의 측면에서는 강강술래가 나타날 정도로 -구체적으로는, 어느 것에도 의욕이 없거나 의욕이 강도 높게 나타났다가 쉽게 꺾이고, 성취감이 없다보니 안정적인 감정 기반도 없어지며 내가 누군지도 잊어가게 되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걸어다니는 불행제작소로 느껴질 정도로 비관적 행동들을 일삼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반면 남자친구는 나의 양기를 빨아 먹어서 자신의 양기로 삼고 있는 것마냥 지난 1년 여 사이에 그의 인생에서 전에 없는 상승곡선을 그려 왔다. 언제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충만할 수 있었으며 마치 2015년 1학기의 그녀처럼 열등감도 현재 도약의 에너지로 쉽게 전환시킬 수 있었다. 노력은 나보다 훨씬 덜 들이는데도, 그애가 나보다 실력이 없다는 것을 들킬 기회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실력과는 무관하게 자신감에 충만한 걔의 그림자에 가려서 대외적으로 나의 가치를 확립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지난 해에 휴학까지 하게 되었다.
사회에서 확립하지 못한 자신의 가치를 가정에서 확립해보고자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그 가장에 내가 겹쳤다. 나는 사적 영역에 속하는 남자친구에게서 내가 공적으로 확립시키지 못한 가치를 확인해내기 위해, 그 위에 군림하려고 늘 애썼다. 그에게 숭배받기만 하면 공적 영역에서의 내 가치는 내 자아실현과 전혀 상관이 없더라도 괜찮았다. 나는 그를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내 자아실현과 가까웠던 목표를 너무도 쉽게 내던지고 포기했다. 그보다 빨리 취업을 해서, 가난한 대학원생인 그에게 집과 돈을 제공하고, 남자친구가 하는 일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시하고,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희생하게 하고 싶었다. 마침 남자친구는 자신의 결혼 정체성을 온갖 가정일을 솔선수범하는 공처가에서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군림하기에는 적절한 대상이었다. 나는 사랑한다는 거짓 믿음을 주면서 계속해서 그의 자존감을 박탈시켜갈 생각이었고,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나의 사회 속에서 좌절된 자존감을 겨우 추스리고 지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DV를 하는 가장들이 집에서 DV를 함으로써만 겨우 망가지지 않고 근근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게 하고 다음 날 다시 페르소나가 되어 출근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와 사귀는 1년 여 간에, 그는 얼마든지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꿈에 부풀 수 있었겠어도, 나에겐, 그런 꿈 밖에 없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그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해주기만 하면 내 인생은 그럭저럭 견뎌나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그런 삶에서 좀 더 자기를 사랑해달라고 요구하면 일시적인 사랑의 표현을 성공시키고, 도덕적 위선을 깊이 숨긴 채 져 주며 대화하는 척으로 인생 끝까지 관계를 유지해갈 생각이었다.
언젠가 J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걔에게로 겨눈 나의 악의를 1년 여 동안 내 몸이 고스란히 받게끔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또 하나의 감정 기복일지 모르지만, 이 사랑이야말로 실제로는 나를 약하게 해 온 근본적 원인이라는 확신이 세워졌다. 어떻게하여 이런 결과가 도출된 것일까? 대답을 반쯤 아는 것 같은 물음을 나는 던져 보았다. 물음을 던져놓고 보니 이 물음에 완전히 대답하기 위해 내가 아직 탐구하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차차 탐구될 것 같다.
누군가는 어이 없고 불쾌하게 느낄 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헤어지건 그애가 헤어지자고 하건 이 관계는 어떤 선언도 불필요한 지점에서 이미 끝났다. (나는 나의 이 말을 어떠한 근거로부터 믿을 수 있나?) 어쨌든 끝났다. 그래서 나는 말 없이 그를 차단하고 그와의 공유 폴더들을 지웠다. 또 그의 편지를 버리고 그가 준 물건들을 옷을 빼고는 다 버렸다. 어떠한 선언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언젠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의 그런 마음에 대해 내가 했던 거절을 다시 한 번 승낙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헤어지건 그러지 않건 간에 절대로 나처럼 망가질 일이 없었다. 그는 그의 길을 알고 있다. 그의 성격과 그의 환경은 어떠한 모순도 없이 잘 맞아 돌아갈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는 그 흔한 실존적 회의조차 찾아오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는 빨리 결론을 내려도 무방한 곳에는 빨리 결론을 내려버리고 납득해버린다. 절대로 함정에 빠질 일이 없는 인간이므로 나는 그가 걱정되지 않았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한 본질을 짚었건 안 짚었건 간에, 그는 빨리, 완벽한 가설을 세우고 납득한 채 회복할 것이다. 또 나와 사귀기 보름 전에 헤어진, 2년을 사귄 전-여자친구의 이름을 몇 달 뒤에는 생각해내지 못하듯이 우리의 황금 같은 청춘의 추억들도 잊어버릴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은 남겨두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게 뇌를 쓰는 인간이니까.
그 감성 충만하고 눈부셨던 젊은 날의 추억들을 각자의 성격 차이상 그는 대부분 잊고 나는 대부분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때 비로소 쓰린 감정이 들었다. 단순한 속쓰림에 슬픔과 허무함이 덧대워진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겨우 들기 전에는, 몇 시간 동안 마음이 오랜 짐을 덜어낸 듯 무척 홀가분하고 또 명랑해지고 행복감마저 들었다. 그런 쾌활함은 내가 도서관에서 알바하던 어느 날, 그와 헤어짐의 위기가 찾아왔었기 때문에 확실히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2017년 1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가서, 서울에서 지방으로 그가 내려와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는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다고 했고, 그 이유가 ‘재밌는, 지방은 생각도 안 나는’ 대학원 세미나 때문이라고 했다. 나 역시 교수가 되는 것이 내 자아실현을 위한 꿈이고, 누구보다 지적인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런 나의 감정에 지금의 남자친구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내가 인정할 수도 없고(그가 본질을 짚어내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배울 수도 없는(나보다 결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이 환경적 여건과 성격적 여건이 모두 도와주었다는 요인만으로 내가 이루고자 한 꿈의 궤적을 그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기 힘들었다. 나는 헤어질 결심을 하고, 그와 만나주지 않은 채 잠을 자고 출근을 했다. 그땐 남자친구도 나에게 주려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는 남자친구의 친구이기도 하며 나의 친구이기도 한 친구가 애써가며 우리의 재회를 주선했다.
그 친구는 남자친구를 설득해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찾아가게 했다. 이러한 그 친구의 조력의 카톡을 오후 네다섯시 쯤에 통보받고, 나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썩은 나뭇가지에 불 붙이기나, 성욕의 해소밖에는 의의가 없는 마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 기복으로 그애를 다시 만나보기로 했다.
그러한 통보를 받기 전까지 나는 그날따라 도서관 업무가 너무 재밌고, 방문객들에게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방글방글 인사를 할 만큼 친절했고, 일도 손에 익어 척척 진행되는 것이 뿌듯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체증 없고 자유롭고 쾌활한 하루였던가. 그러나 그 친구의 카톡을 본 다음, 웃음기를 잃고 다시 혼란스러움에 빠져서 마칠 시간 쯤에 손에 잡히는 것 없이 화장실에서 그애에게 전화를 걸자, 그애 역시 헤어지려는 말을 하러 온 마냥 사랑이라곤 없는 말투였다. 나는 그것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안절부절 못했는데, ‘내가 아무리 너에게 못돼게 해도, 너는 나를 버릴 수가 없다. 너는 나의 노예니까’라는 사실을 자타공인해내고 싶었다.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니 별 상관은 없는 상대한테, 다만 내가 지금 땅에 두 발을 겨우 딛고 서 있을 정도로만 남아 있는 자기애라도 훼손당하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애에게 다정스럽게 굴고 미안하다고 하고 어르고 달래어 사태를 호도할 수 있었다. 다시 예전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바닷가의 펜션으로 갔다. 값은 내가 계산했다. 변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마침 길거리에서 만난 어떤 남자와도 바닷가의 펜션에 갈 수 있을 것 같이 일 끝나면 자연으로 놀러 가고 싶었던 날이었다.
그 펜션에서, 나는 어둠에 잠긴 바다를 침대에 누워 비스듬히 내려다보면서, 온갖 상념들과 인생의 편린들이 스쳐지나가면서 형성된 거대한 멜랑꼴리에 의해 꺼이꺼이 울었다. 그 감정을 다만 불가해하다고만 생각했을 그애에게 얼마나 더 정나미가 떨어졌던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더 DV 비슷한 군림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립하려고 그애에게 이것저것을 해보라고 시키거나 그의 외모에 대한 사소한 언어폭력을 내뱉곤 했던가.
세상의 끝의 바다. 나에게는 건강도 전적으로 잃고 감정도 병적으로 되어 이룬 것 하나 없이 막다른 벽에 그것이 나타났다는 감명이 있었다. 떠나온 집과 어린 시절이 무척이나 그리웠고, 이젠 돌아갈 수도 없이 청춘의 마지막 경계선을 완전히 넘어 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경제력도 학력도 없는 무력한 스물 여섯 살이었다.
그러한 창 밖의 멜랑꼴리가 뿜어내는 막대한 영감을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춥다고 커튼으로 쳐 버림으로써 차단했다.
날이 밝아 왔던 때에도 파도를 보며 서 있는 나를 그는 굳이 애무하여 침대로 끌고 갔다. 바다와 눈물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바다와 눈물을 공유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순수한 사랑에 빠져들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나는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소설이라면 조금 더 우아한 장면이 그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애써 고안해 낸(사실 제안도 내가 하고 펜션비도 내가 지불했으니까 작가가 애써 고안해낸 것이 맞다) 아름다운 배경이 결코 한 등장인물의 어색한 행동으로 인해 망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은 1년 여 동안 수도 없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내가 드라마 <가을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서정적이고 분위기 있는 장면을 기대하며 그를 데리고 산에 가거나 강에 가거나 꽃을 보거나 단풍을 볼 때, 서두의 ‘그녀’가 있는 세계로 그의 손을 잡고 이끌려 할 때, 그는 언제나 풍경보다 맛집 생각을 먼저 하지 않았던가. 그런 천박함을 밥 없이 살 수 없다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로 변호할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소설가 지망생에게는 1년 여 동안 재앙과 같은 영감의 고갈을 가져다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나의 소설을 판타지 소설만큼 흥미롭게 읽어낼 자신이 없었고, 위와 대장의 안위보다 소설의 안위가 나에겐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에 둔감했다.
나는 2015년까지는 1년에 한 편 이상 마음에 드는 작품을 써 왔지만, 지난 1년 여 동안은 아예 펜을 들고 있다가 떨구어버리는 날이 많거나, 썼다 해도 좋은 작품을 쓰지 못했고, 써 온 것의 방향성도 잃었다. 나는 창작 활동에 방해가 되는 감정적 항력을 끊임없이 느껴야 했다. 여기에 가세했던 사람이 서울로 떠난 엄격했던 교수 대타로 들어온 새로운 분석철학 교수이다. 이 교수 이야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이 탐구 전체의 또다른 핵심이 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풀어놓기가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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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오늘 아침, 며칠 동안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제야말로 진짜로 내 인생을 바꿀 무언가를 하자고 전투적으로 고무되었던 의식의 기억들이 무색하게, 하루의 목적이 바로 떠올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속의 벽을 마주한 듯 절망스러웠다. 이 절망을 다른 감정으로 바꿔보려고 누운 채로 카톡을 보았으나, 전날 밤 A에게 보낸 또다른 긴 카톡을 아무래도 씹힌 것 같고, 또다른 카톡친구(그는 다른 대학 철학과 학생이었다)는 서로간에 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순조롭게 썸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나로 인한 고충을 거의 계정 폭발 수준으로 내비치는 등 내 타락을 한층 더 공고하게 기정사실화할 뿐이었다.
나도 남을 파괴하고, 남도 나를 파괴한다. 카톡을 해서는 안 되겠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감정이 고착되어선 안 되겠다. 몸을 일으켜 카페로 가서 카톡에 대하여 글을 쓰고, 그 뒤 카톡 친구들을 공식 채팅방 이외에는 하나씩 차단을 눌러가던지 하며 카톡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혁명의 의식을 되찾자. 그러나, ‘내가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도덕적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가설은 세울 수가 없었다.
또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김밥집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떼우며(내일은 정말로 아침부터 김밥집에 오고 싶지 않다), 며칠간 적어온 한 두줄 짜리 메모들을 반추했다. 다른 인격들의 다른 고민들을 적어놓은 것처럼 기복이 심한 생각들이었다.
나는 이번 주 목요일에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도 목요일 하루 동안에는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과제도 하는 등 오락가락하다가 금요일 아침에야 교수님께 통보를 하여 허락을 받았다. 몇 개월 간 망가진 몸으로 통원과 수술을 반복하며 고생하고 있고, 지금도 몸이 실제로 심각하게 아프(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일은 아무런 장애물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실은 아직 수술 후유증이 있다고는 해도 이번 주 중에 에스트로겐 없이 피임약만으로 피가 멎었으며, 휴학을(아니, 말이 휴학이지 사실상 자퇴를) 염두에 두고, 내 삶을 혁명하기 위해 내게 실존적인 공부를 하려 의식을 고무시키자 몸이 점점 가뿐해지더니, 그간 사랑이라는 이름의 소리 없는 영혼의 살인자였던 남자친구와 헤어질 마음까지 먹자 몸이 앞으로 건강해지는 일만 남은 것처럼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얼굴색도 전처럼 흙빛이 아니었고, 여드름 자국만 없어지면 자못 순수한 피부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전과 같은 몸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린 채 아침부터 김밥을 먹고 카페인 음료를 먹어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몸에 안 좋은 짓을 할 수 있다는 -그래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자유가 기분 좋았고, 건강해질 의향이 있는 내 몸에 감사했다. 작년 6월달부터 이어져온 난소의 고통과 월경과다의 지옥이 조금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몸 문제라는 거짓말을 통과시키면서까지 나는 휴학을 했다. 계기는 작년과 비슷하다. 나는 새 분석철학 교수의 온라인퀴즈가 풀기 싫었고, 인터넷 상으로 공개될 자동화된 표를 통하여 수강생들의 성적과 내 성적이 비교되기가 싫었다(비록 모든 시험에서 내가 운 좋게 만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성적 시스템을 고안해 낸 새 분석철학 교수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내 옆자리에 앉아서 언제나 그 교수와 죽이 잘 맞는 남자친구, 이들을 지켜보는 나의 언어화되지 못한 미숙한 적대감이 작년 이맘때쯤 나로 하여금 1년간 휴학을 하게 했다.
그때, 나에게는 선명한 강강술래의 대열이 나타났다.
나는 그때는 이 대열과 싸워 이기지를 못했다.
나의 행동에 대한 방침을 내리고 실천하기는 했지만, 그 방침이라고 해도 ‘모든 분석철학 공부를 마스터한 초인이 되는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였을 따름이었으므로, 휴학하고 교실을 떠났으므로 압박을 덜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우종과 열종을 가르려는 악의로 가득찬 진땀나는 교실이 세상 전체가 되어 나를 최대한도로 압박해갔다. 내가 이때까지 해 온 자발적 공부의 역량은 이 뿌리깊은 교육적 실패를 입체적으로 해석하기에는 한참 모자랐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갈 지식이 없다손 쳐도, 문제 자체가 너무 착종되어 있는 데다가 이 문제가 유발하는 감정에서 거리를 두지 못하는 때가 곧잘 생겨났기 때문에(거리를 두지 못했던 환경적 요인은 그 교육에 잘 적응하기도 하고 새 교수의 신임도 얻은 남자친구와 하루에 몇 시간 씩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의 심적 상태를 내관만으로 분석해볼 수도 없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볼 수 없을 만큼 나약해졌고 손상된 자존심을 사랑으로 인해서라도 회복해보려고, 나에게 달고 좋은 말만 (그러나 문제에 나를 접근시키기에 충분한 뼈대와 핵심은 없는 말을) 해주는 남자친구를 매일같이 불렀다. 하지만 남자친구와 오래 얘기할수록 자존심은 더 낮아지고 감정은 더 양극단 지점을 오갔으며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은 뿌리깊어졌고 사고력은 잃어갔고 온갖 건강과 연루된 문제에서 나 자신을 방치해가게만 되었다. 남자친구는 매일같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그토록 나를 모르면서 도대체 나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공감할 수 없었다. 다만 그애가 시간구획이 없는 삶을 대학이나 대학원의 커리큘럼으로 호도하듯이, 나도 감정구획이 없는 삶을 그애라고 하는 외타적 요인에 집착하며 호도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 잘못된 호도의 습관으로 인해 실체가 허약해진 나 자신은 다음 다음으로 일어난 견디기 어려웠던 여러 일들에서 보통보다 몇 배로 더 큰 충격을 받고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에고적으로나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지금은 너무도 그립고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날, 남자친구와 나는 늘 가는 남강변에서 무엇인가를 먹고,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검고 빛나는 작은 개천을 따라 여름의 시원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문장을 적고 보니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시금석처럼 빛나고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청춘의 몇 페이지들이 나의 정서를 자극한다. 이런 정서는 차차 다른 소설들에서 풀어갈 수도 있을 테니, 일단은 본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자. 그날 그 시간에, 남자친구의 카톡으로 분석철학 교수의 전언이 왔다. 내일 대전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평소 나의 철학에 관한 열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같이 가자는 제의는 하지 않은 채로, 남자친구는 ‘자기만이 유일하게 인정받고 있다’고 하는 발랄하게 고양된 감정을 숨기지 못했고, 나는 쇠창살이 내 비늘을 뚫고 심장을 관통하여 영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발겨진 것마냥 부끄러운 존재자가 되어 힘을 잃고 서 있었다.
다음 날 학회에는 나도 따라 갔다. 교수의 자동차에서, 나는 뒷좌석에 타고 남자친구는 앞좌석에 탔다. 뒷좌석과 앞좌석의 거리가 멀어서도 그랬지만, 그들이 형성하는 죽이 잘 맞는 분위기가 나를 배제했다. 교수가 이혼을 하고 현재는 독신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여성을 희롱하거나 무시하는 대화도 간간이 튀어 나왔다. 남자친구는 그 대화가 모욕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해내지 못한 채 대화에 참여했다. 나에게는 거의 대화가 돌아오지도 않았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교수는 나에게 관심을 표명하지도 않았다. 
학회가 끝나고 회식을 갔다. 분석철학 교수는 다른 학자에게 나를 ‘남자친구의 꼽사리’로 학회에 참여했다고 소개했다. 남자친구는 바로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냥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허허 웃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또 길고 긴 관문처럼 나홀로 뒷좌석에 앉아서 밤의 고속도로를 그들과 함께 달려야 했다. 교수는 나에게는 높임말, 남자친구에게는 반말을 사용하면서 나를 타자의 영역에 위치시켰다. 교수는 나에게는 어떤 말도 걸지 않은 채, 남자친구에게 계속 이런 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교수가 되려는 남자친구에 대한 이런 저런 조언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는 그런 힘든 길을 걷는 것은 추천하지 않으며 맷집이 없으면 포기하는 게 맞다고 하였다.
분명 남자친구보다 공부를 많이 한 것은 나였고, 학문적인 면에서 보면 남자친구는 나에게 비교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는데 말이다.
내 생각과 다르게 나타났던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 학회에 다녀오기 전까지 학문의 세계가 사유의 세계에 대한 순수하고 숭고한 추구의 대열이라고 생각했으며 여기에 귀의할 마음을 확고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의 세계였다. 더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지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우종과 열종의 세계였다.
나는 망가졌다. 술을 매일같이 두 세 병씩 마시기 시작했고, 인간관계에 의존적이 되고 자신감도 잃어갔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남자친구를 계속 만났다. 남자친구에게 언어폭력 등을 부리며 나 자신이 상위의 지배자라는 것을 확인하려 드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나에게 질병의 계절이 찾아왔다. 나는 장기들이 차례대로 고장나기 시작해 항문외과, 치과, 비뇨기과, 산부인과, 피부과 등 안 가본 병원이 없었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때 내가 바라보거나 체험하는 삶은 여러 그녀들이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는 삶이었다.
그녀1은 철학을 하며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을 택하려고 했다. 어떤 이윤과 혜택 때문도 아니고, 철학을 하고 살 수 있는 삶 자체의 매력이 그녀가 추구하는 다른 가치들을 쳐내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럼으로써 무구한 순교자의 기분을 느꼈다.
그녀2는 그녀1에 대해 “네가 학문에 관심이 있어서 하니? 단순히 지능에 대한 콤플렉스 아니니?”라고 몰아붙이며(물론 그녀1은 그것은 그녀9에게 해야 될 소리라고 반박을 했을 것이다), 소설과 시를 쓰며 혼자만의 힘으로 살고자 했다. 그녀는 그 삶이 가장 충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녀3는 그녀2를 돕기 위해 그 지방 소도시에서 취직을 하고자 했다. 그녀3에게 그 지방 소도시는 칸트의 쾨니히스베르크였다. 그녀3은 그 안에서만 행복을 알고, 그 안에서만 지식의 확장 방법을 알며, 그 안에 살아가야만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녀3은 같은 지방 소도시에 있는 그녀들의 대학에서 장학금이 보장된 대학원으로 진급하려는 그녀1과 때로는 결탁하고 때로는 관계를 끊기도 했다. 그녀3은 좁지만 햇살 드는 방에서의 삶, 가난하긴 해도 자신의 수입이 있기 때문에 카페도 가고 강도 가고 서점도 가고 영화도 보고 대학에서 청강도 하고 원할 때 스터디에 들어 공부도 하는 삶에 대하여, ‘그거면 되었지’라고 생각했다.
그녀4는 그녀2를 돕기 위해 산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녀4는 서두에 등장한 그녀와 아주 친했다. 그녀4는 막연하게 ‘자급자족을 하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문명을 떠나 잘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을 증인들로 데리고 왔다. 그녀4는 문명을 떠난 삶만이 자신의 자존감과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녀4는 그녀9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당했으며, 여러 그녀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녀5는 서점에서 캐나다 유학 책을 발견하여 읽고 캐나다 유학을 꿈꿨다. 그러나 그녀의 이 발상은 강렬한 것으로 자리잡았다기보다는 현재 상태, 마치 예정된 것처럼 여겨지는 그녀의 우울한 미래, 사회의 여러 추악함에 대한 피해의식 등을 배출해낼 막연한 상상 속 배출구에 불과했다.
그녀6은 학교를 이용해서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고자 했다. 그녀6은 그녀8과 친했고, 그녀9와도 친했다.
그녀7은 학교를 이용해서 일본 교환학생을 간 다음 일본 취업을 알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녀7도 그녀1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7은 그녀1이 가장 시급한 경제적 문제를 외면하고 철학과 사람들의 왈가왈부에 부적절하게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7은 그녀3보다는 적극적이었다.
그녀8은 영어만 잘 한다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며 이 그녀들끼리의 전국시대와 같은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리라 믿고 토플이나 토익만을 목표로 삼고 돌진했다. 그러나 그녀8 역시 반나절만 지나면 강강술래에 휩쓸려버릴 뿐이었다.
그녀9는 자신이 대부분의 그녀들과 양립 가능하다 믿으면서 졸업논문 생각만 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애들 앞에서는 체면이 서고, 분석철학 교수는 자신을 다시 봐줄, 어떤 이도 해결하지 못한(그렇다고 그 주제가 지나치게 세련될 필요는 없었다. 적절히 공략 가능한 문제에 대한 해답만 찾으면 되는 것이다) 수학적인 철학 아이디어를 논문에 넣고자 했다. 그녀9는 분석철학 교수가 원하는 것을 학습하고 아이디어를 내놓고 싶어했으며, 그럼으로써 그 교수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했다.
그녀10은 그녀9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녀10은 그 분석철학 교수에게 야유를 당하거나 불만을 표출당한다 해도, 자신에게 더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최초로 주체적인 졸업논문을 쓰고자 했다. 자유롭고 철저하고 고유하고 진지한 자기의 사상을 확립하기 위해, 그녀10은 그녀9보다 덜 스토익하지 않았다. 그녀10에게도 해야할 과업은 똑같이 많았고 그것이 그녀10을 실상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어떤 그녀들이건 생산적이긴 해도 대체로는 지루한 작업에 깊은 열정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그녀들이건 집중력이 낮았다. 마치 집중력은 모든 그녀들을 돌게 하는 단 하나의 원심력에 의해서 탈수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들 중 가장 권위가 있었던 것은 그녀8이라 할 수 있다. 그녀8의 생각을 따라 나는 영어학원에 등록하기도 하고 수험서를 풀어보기도 하는 등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에 영어 몇 장을 하고 몇 단어를 외우는 것만으로 ‘그녀들의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안겨다주는 공포와 불안이 수습되지는 않았다. 하는 만큼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느는 것이 없었다. 영어 시험 성적도 생각보다 높게 나오긴 했지만 전혀 만족할 만한 점수가 아니었다. 한 편, 나와 수업 이외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남자친구는 승승장구했다. 여전히 분석철학 교수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영어 성적표 하나 없이, 철학사에 대한 제대로 박힌 전공지식 하나 없이 연구계획서와 상대주의에 대한 면접만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합격했다. 그때가 어떤 시기였던가? 내 생식기에서는 피가 멈추는 날이 없었고 응급실에서 소파수술을 거절하고 나온 뒤로 내 육체는 누운 자리에서 하루를 보내야 할만큼 망가져서 옆에서 밥 떠먹여 주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물론 남자친구의 꿈을 존중해 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기였던 만큼 남자친구가, 가족이라곤 다른 도시에서 노가다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아빠 밖에 없는, 자궁적출을 해야될지도 모르는, 몸도 혼자서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여자친구를 이곳에 혼자 자취하도록 내버려두고, 경제력으로 지원해주려는 동정심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이해득실을 쫓아서(그리고 그 이득은 그애를 경쟁에서 떨어뜨리고 바로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이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으로 가버린다는 사실을, 평소보다 더 뼈 아프고 자궁 아프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헤어지기에는 나의 정신이 너무도 의존적이고 나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타인 같은 연인이라도 나중에는 나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안정시켜줄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기에 쉽게 헤어질 수 없었다. 설령 그애가 속삭여 주는 ‘사랑한다’는 말이 몸을 망치고 정신을 썩게 하는 마약이라고 해도 말이다.
겨울방학의 마지막 무렵, 나는 쓰러졌고 소파수술을 받았다.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2017년 1학기를 다니게 되었다. 근심 걱정이 만면에 가득했으며, 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으며, ‘꼽사리 발언’ 이후로 ‘추천서 사건’이 일어나 분석철학 교수에게는 지성에 대한 더 심한 무시를 받게 됐으며, 이미 깊어져 있는 좌절감의 골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더 깊어져만 갔다. 그 깊어진 골을 ‘사랑한다’ 의존증으로 해결해보려 해도 서울로 간 남자친구는 ‘이곳은 너무 지적이며 재밌는 교육 환경이다’며 연락을 잘 받지 않았다. 카톡 의존증은 내가 가지고 있던 소수의 친구들을 거의 모두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했다. 감정기복은 정상인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심해져서, 크거나 사소한 대부분의 결정들을 너무도 쉽게 포기했다(오늘 하루 동안에도 서울에 간다거나 일본여행에 간다는 열띤 계획을 아무런 칼로리 소모 없이 포기하지 않았던가).
어제 A에게 카톡으로 선언한 대로라면 나는 지금 서울에 방을 보러 다니고 있어야 했다. 심심하면 이상한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서울에서 자기에게 전화를 걸라던 A의 당부를 떠올렸다. 어쩌면 서울에서 허탕을 치고 지금 막 돌아온 참이라고 A에게 전화를 걸면, 오늘 A와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카페를 나와 근처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A에게 전화를 걸었고, 가식이 잔뜩 낀 말투로 오늘 만날 약속을 정했다. A는 남자친구가 A가 나를 만나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카페에서 대화가 무르익자 A에게 시를 보여주었고 그녀는 그 시를 적극적으로 좋아해주며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바로 나야말로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추켜올렸다. 그리고 나의 시의 재능과 영감을 고갈시킬 만한 헛된 만남들(가령 윤동주의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시구절도 모르는, <가을동화>에 나올 것 같은 배경에 가도 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남자들과의 만남들)을 작품 생산의 측면에서 나무랐다. 그녀는 내가 작품과 단절한 1년 여 간의 모든 책임이 내 잘못된 만남들에 있다고 보았다. 내 영혼의 결정(結晶)인 작품들을 보여줘도 시덥잖은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걸 남자친구라고 만나고 다녔으니 작품의 질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거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예민한데. 얼마나 주위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니가 니 재능을 죽여왔던 거라고.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이성과의 연애나 카톡이나 친구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어제부터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카페에서 글을 써 오지 않았던가).
나는 쓰고 싶다. 아직 써야만 하는 막대한 경험들과 생각들이 내게는 있다. 나는 꼬여 있는 내 역사 속에 정적으로 침잠하여 단 몇 줄의 진실이라도 정말로 진실다운 진실을 응결시킬 만큼 예민해져야 하는 시기에 와 있고, 영혼의 교제가 아닌 만남 -특히, 내 현재와 미래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능력을 결여한 허깨비들과의 사랑- 은, 진실을 찾기 위한 내면적 사유를 둔화시키거나 호도시키므로 얼마나 그 만남이 달고 중독적이건 적어도 이 시기가 넘어가기 전까지는 피해야 한다.
자못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봄비의 밤, A는 몇 번씩이나 돌아서서 손을 흔들고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내 쪽에서 그녀를 적극적으로 불러내지 않는다면 그녀가 먼저 날 불러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쩌면 그녀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과장된 사인을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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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학을 생각하던 목요일에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개나리를 이따금 보며 어떤 카페에서 썼던 글을 다시 들추어본다. 나 같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면 대부분의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인 가치관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지적 영감이고, 죽을 때까지 내가 원하는 형태대로 가치 있는 삶이다. 바쁜 삶도 비주체적인 삶도 아닌, 그 귀중한 순간 순간에 충만한 삶을 살고 싶고, 평가되는 것보다는, 어떤 순간에도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가짜가 아닌 진짜. 어떤 게 맞서는 거고 어떤 게 맞서지 못하는 건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 그것은 내가 ‘맞서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안다. 난 싸우고 있고, 허깨비가 아닌 진짜를 찾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나의 강고한 자세, 그것이 바로 도망과 맞섬의 판단 기준이다.
매 순간 매 순간, 욕심도 악의도 없는 행복, 내가 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행복, 자기의 인생을 확실히 알고 있고, 그대로 행동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자의 행복을 느끼고 싶다. 나의 길과 나의 인생을 지금/바로/여기에서 얻고 싶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지금, 무언가를, 비본질적이었던 지난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바로 그것의 행위자가 나 이외에는 될 수가 없는 무언가를, 강하고 주체적으로 해내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들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을 실현할 길을 나는 다음 조건들을 충족시키면서 설명할 수가 있어야 한다 : 완전히 다른 접근법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흐름’을 타서가 아니라 이 잡듯이 구체적으로, 바위를 뚫어버릴 듯한 생존의 사유로, ‘적당히’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고 절대적인 애착으로.
그리는 그대로 살아가야지, 안 그럼 인생이 그려주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게을러선 안 된다. 치열한 경쟁의 압살적인 필요성과는 다른 이유로, 나의 인생을 나 아닌 것이 살게 놓아둘수록 내가 편한 게 아니라, 내가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사유, 행동양식이 필요하다. 그것을 내가 행할 수만 있다면, 그것의 가치는 수업 안 빠지고 시험 점수 잘 받는 것보다도 압도적으로 가치롭다.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역사적인 변화. 단순히 기분을 누그러뜨릴 만한 일로 나 전체를 바꿀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말자.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무언가를 하여야 한다. 우종과 열종에 대해, 인간관계의 수직성과 수평성에 대해 사유하는 사람들 곁에 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번에도 손바닥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렇게 이 문제의식에 대한 사유를 놓쳐버려선 안 된다. 앎과 권력의 착종으로 바로 들어가자.
나는 예의 착종으로 바로 들어가기 위하여 여기까지 글을 써 왔지만, 비유하자면 아직 학정을 피해 산으로 왔으나 이제 막 농사지을 땅을 발견하고 화전해놓은 농민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화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지도 모른다. 내가 “수직성과 수평성에 대해 사유하는 사람들 곁에 난 있어야 한다”라고 쓸 때, ‘그걸 얻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원을 가야 하고 그럴 거면 지금 거기서 대학을 마쳐야지’라는 지극히 상식적이어서 나의 이해자가 되지 못한 전-남자친구에게 얼마나 화딱지가 나며 그것을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하는가 말이다. 평범함의 틀에, 또한 그 자신은 보편적 가치관이라고 생각할지 모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나를 가두는 것만큼 나에게 절망인 것은 없었는데, 현재의 절망은 무시하고 미래의 절망을 걱정하는 것이 과연 나의 요체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단 말인가. 나는 내가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도 예술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남자에 대하여 분노한다.
그러나 그 남자의 가치관에 대한 분노로부터 씨앗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큰 틀에서 나도 그 남자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자문하면서.
도서관에서 『김예슬 선언』을 읽었다. 99%는 그녀가 나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뜨거워져서 도서관에서 몇 번 씩이나 가만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머지 1%는 그녀처럼 ‘삶 공부’를 찾아 대학이 독점하는 학문을 완전히 내팽겨칠 수 없는 나의 기만성이었다.
물론 나는 학교를 그만둘 것이지만, 일본 교환학생에 붙었기 때문에 9월부터 1년간 일본에 갈 생각이며, 그때까지는 학생 신분을 유지해야 하기에 휴학중이다. 이 학교를 졸업할 생각이 없더라도 일본에서 또다른 대학에 다닐 것이고 나는 또다른 대학에서 답을 구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학적으로 학과 지의 문제에 관해 연구할 생각이 있었고 대학은 학을 독점하고 있었다.
소설을 쓴다면, 김예슬 같은 캐릭터와 나 같은 캐릭터를 각각 등장시키자. 두 사람의 갈등을 통해
대학을 적대로 두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경쟁이 문제지 책 읽고 배우는 것 자체는 자극이 되지 않는가. 다만 대학 시스템이 지금의 내게 안 맞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일정 기간 떠나 있는 것이고 또 원하는 때 대학에 뛰어들면 된다는 생각도 괜찮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을 파고들자.
아직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은가? 이대로 공부해도 괜찮은가?
에 대한 진정한 물음은 대답되지 않은 채, 나는 생각을 하면서 도서관을 나왔다. 그 부근에서 2년 전 내가 프랑스 철학 홈페이지를 구축하던 시절에 프랑스 철학 스터디를 같이 하기도 했던 후배 M을 만났다. M은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이었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학문적으로 발전되지 않았을 뿐이지 똑같은 문제의식 속에 있었기 때문에, 부르디외의 『재생산』이나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데리다의 『조건 없는 대학』을 깊이 있게 읽어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또한 브루노 라투르가 이분법과 상대주의 극복하는 방식에 영감을 받아 왔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에 뿌리 깊은 친���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2년 전 M과의 스터디도 도중에 나가 버리고 몇 개월 뒤에는 홈페이지 업데이트도 끊어버렸다. 그렇게 열의를 잃어버린 데는 분석철학 교수들의 엘리트주의가 한 몫 했다. 그들은 프랑스 철학은 철학이 아닌 인문학이며 철학이라고 해도 후진적인 철학이라고 여겼다. 분석철학에 비해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론이며 무엇보다 수입 번역에 급급하게 하여 사람을 스스로 사유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땐 그런 생각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분석철학 역시 자기 전통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수입에 급급하고, 상대를 현학으로 눌러버리는 우종과 열종의 형성 기제에서 가장 큰 쾌감을 느끼는, 자기의 진정성과 남과의 공존을 위한 ‘자기 머리에서 우러난’ 철학과는 다른 철학이 아닌가? 비록 그 학문을 획득하기 위해 지난한 정신노동이 필요하더라도, 그 정신노동은 분석적 전통의 룰에 맞춰 정답 찾기라는 이데올로기의 시중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분석철학은 자신의 선생님들을 능가할 어떤 새로운 전통을 창조할 수 있는가? 남을 배제하는 엘리트주의만 강화할 뿐이 아닌가? 분석철학을 하면서 다른 비엘리트주의적인 사람들을 비웃고 그들의 열등감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 행사에 대한 쾌감을 느낄 뿐이라면, 그런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없다면 분석철학은 우리 삶을 좋게 하는 부분에 있어서 대체 무엇에 기여하는가? 분석철학은 내 삶을 바꿀 만큼 충분한가? 분석철학이 내세우는 엄밀성, 그것이 내가 내 모든 노력과 시간과 젊음을 바칠 만큼 내게 중요한가? 그게 전부인가?
지난 1년 여 간 겪었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이걸 못 풀어내면 넌 열등한 생물체야. 넌 이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있군, 넌 열등해’라는 주박에 휩싸여, 엘리트주의의 노예가 될수록 나만 불행해져 왔던 증거들로서. 꼽사리 사건, 영어 사건, 유학서 여자친구가 레벨이 낮은 대학에 들어가면 헤어질 거라는 교수의 걱정을 남자친구에게 전해 들은 사건, 일본 명문대에 선출되어 추천서를 내려고 할 때 아무도 써 주지 않아 분석철학 교수에게 부탁했더니 그가 일본 명문대 무시를 하는 것도 모자라서 나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버린 사건. 새 분석철학 교수 뿐만이 아니라, 2015년 1학기를 함께 했던 그 분석철학 교수도 내가 인생을 바쳐 경도될 만큼 충분히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M과 헤어져서 M에게 프랑스 철학의 스터디를 문의하며 이런 내용이 담긴 긴 카톡을 보내고 말았다. M은 ‘이 누나는 진짜 남의 말들에 잘 휘둘리는구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주위 환경에 예민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주변인과의 만남 속에서 나의 가능성을 여과하고 제한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방 소도시의 소규모 국립대라는 이 좁은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의 가능성의 제한이 조금씩 풀릴 것이다. ‘저렇게 살아도 되겠구나’하는 것을 훨씬 더 많이 보면 볼수록 말이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벽을 부수고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몇 개월 전 Z의 페이스북을 훔쳐 봤을 때, 그녀는 지금 뮌스터에 있다는 정보가 공개되어 있었다. Z와는 2015년 1학기 분석철학 교수의 수업에서 만났고 수업이 마친 뒤 한 두 번 얘길 나누었으며, 깊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 때 내가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탁월한 철학도였다. 대학에 있을 때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용해 미국에 다녀 왔고, 당시에는 서울대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서울대 대학원 입시에서 고배를 마시고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과외를 하며 돈을 모으다가 독일어는 또 언제 배웠는지 독일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2015년에 관찰했던 그녀는 새벽 5시에 일어났고 언제나 공부만 했으며 어중이 떠중이같은 우리 철학과 소속들과는 친해지려 하지 않았고 사회에 대해 자주 분노를 느꼈으며 세상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나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홈페이지에 그녀와 공부했던 수업을 그녀 이름을 적극적으로 기입하며 업로드한 적도 있었지만, 그와 관련하여 공부 얘기를 하려 해도 일시적으로만 성의 있게 이어졌을 뿐이었다. 내가 공부와는 별 상관 없는 인생 얘기를 하자 여태껏 대부분의 이들이 나가 떨어졌듯이 그녀 역시 나와 연락을 끊고 말았다.
나는 오랜만에 Z의 페이스북에 들어가보니 친구추가를 하지 않아 새 업로드를 확인할 수 없어서인지 몇 개월 전과 동일하게 뮌스터로 이사갔다는 정보만 확인할 수 있었다. Z는 독일의 거리에서 건강하고 발랄하게 꿈꾸는 표정으로 찍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 두었다. 그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직접 물어보는 것은 두렵다. 그녀 앞에 서면 내 존재의 알량한 깊이가 다 드러나버릴 것만 같기에. 그래서 나는 이렇게 몰래 보는 방식으로 그녀가 쓰고 있는 글들이나 관심사를 알고 싶었지만, 거의 어떠한 정보도 알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김예슬의 근황을 인터넷에 쳐 보아도 마찬가지로 <나눔문화>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말고 어떤 내실 있는 정보도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세계들이 있는지, 그곳은 어떠한지, 나는 알고 싶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인터넷을 써서만 간접 체험하고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몇몇 글들을 찾아 읽는 것 만으로는 중요한 건 거의 아무것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예슬의 책을 읽고서 그렇게 마음 잡히지 않고 있다가, 대학을 둘러싼 문제를 더 명료화하기 위하여 내가 알고 있는 범주에서 이 문제에 도움이 될 것 같았던 데리다란 철학자가 영어로 쓴 책을 몇 시간 동안 읽어 가기 시작했다. 데리다의 영어는 어려웠고, 그래서 그를 이해하려고 성심성의를 다해도 일독으로는 아무런 지식도 내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나는 힘이 쭉 빠지고 어딘지 성이 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 글을 계속 써 내려가고 싶었지만, 무언가 학술적인 작업의 필요성이 느껴졌고, 그 작업은 이 글의 문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글의 한계로 남게될 것 같았다. 그 작업을 위해 머릿속에 지식을 넣어야겠고, 외부의 것을 이용하여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이 글에서 사유를 밀고 나갈 기력이 생기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중요성이 학술적인 작업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력이 생겼다. 조금 더 진심을 다해 쓰기만 한다면, 외부의 기준에 내맡겨진 학술보다는 나에게 철저할 수 있는 문학이 훨씬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힘을 갖게 될 것이었고, 지금 나에겐 저변에서 나를 밀고 나갈 인생의 힘이 필요했다.
지난 1년 여 간의 기억나는 씬들, 거기서 k가 경험했던 것들을 재현하고 k의 생각을 재기술함으로써 여러 진실들이 밝혀질 것 같았다. 그 진실들이 종국에 이르러서는 k의 어떤 결행인가를 촉구할 것이다. 그 이유가 나의 삶의 방식의 기준이자 확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꼭 주인공이 k가 아니어도 좋다. 다른 상황에 동일한 본질이 있다면, 여러 가공의 인물들이 삶의 앎들을 그려갈 공간, 나는 그것을 만듦으로써 앎을 획득하고 싶다…….
혼자 있으니까 미쳐버릴 것 같다. 사람이 그립지만, 그들이 나를 파괴한다는 것을 안다. 영혼의 동지들이 필요하다. ATP가 있는 곳으로 가면 난 그런 동지를 만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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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uya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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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백설이👧🏻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키카 가서 신나게 놀았당ㅋㅋㅋ 다른 드레스도 입혀보고 싶었지만 너무 싫어하는 너 😢 갈때마다 다른 드레스 입혀봐야지 😉 . 2018.02.08 #비비육아일기 #원숭이띠아기#키즈카페#룰루키즈카페#백설공주#딸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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