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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다양한 모서리 도형 만들기(모서리 둥글게) - illustrator
#youtube#디자인을 하다 보면 쿠폰 형태의 디자인을 제작 할 때 사각형의 모서리를 둥글게 하거나 또는 모퉁이를 다양하게 디자인하는 경우가 생기실 겁니다. 그렇다면 일러스트레이터에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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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견이 좁다는 생각은 늘 머리를 맴돈다.
패션사업에 종사하는 주제에 나는 내가 일하는 카테고리는 정말 무지하기 그지없다. 그저 그간에 감각에 의존하고, 숫자로만 일을 하다보니 빠르게 애정이 식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다.
이 일은 사랑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급여도 워라밸도 뭐 하나 챙기기 어렵고, 직장 동료들은 어디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조연들처럼 능력을 뽐내고 싶어하지만 대부분 아집과 스테레오 타입에 가둬진 채 그걸 자신의 감각이라고 믿고 있다.
감도 라는 말이 유행한다. 그러면 감도 라는 것은 뭘까. 구찌의 CD가 바뀌었을 때 젊고 역동적인 컬러감을 보여줬던 것을 기억한다. 고장했던 구찌는 사라지고, 젊은 사교계의 복장과 아이템들이 보였다. 그당시 구찌의 감도는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너무나도 하락하였다고 느꼈다, 그런데 결과는?
팔리지 않으면 그것이 감도 일까? 소비자도 감이라는 것이 있다. 이쁘고 아름다우면서 충동적이게 만드는 무언가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그 감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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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8 Big Hit's Tweet
[네이버 포스트] 제이홉 생일에 제이홉 화보 비하인드? 완전 따봉,, 감동작렬~,, 방림이 센스 기절이지?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5500077&memberNo=51325039) #BTS #방탄소년단 #jhope #제이홉 #정호석
[Naver Post] A behind-the-scenes post from j-hope’s photobook on j-hope’s birthday? Amazing,, an explosion of emotions~,, Bangbell knows what’s up right?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5500077&memberNo=51325039)
#BTS #jhope #JungHoseok
Naver Post Translation
Keep reading for a plain text version of the blog post! Since tumblr has a picture limit for posts, please check out our twitter post or the HD version on our website for a version with all GIFs included!
[BTS] Me, Myself, and j-hope 비하인드 포스트
[BTS] Me, Myself, and j-hope Behind Post
아-하!
Hi-A!
(T/N: Stands for ‘Hi ARMY��, which is how Bangbell always starts these posts.)
아미들 안녕하세요?! 방림이 입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
Hello ARMYs?! It’s Bangbell. I’ve returned. (?)
티저 이미지부터 아미들의 머릿속을 물음표와 느낌표로 도배시켰던 2월 Special 8 Photo-Folio의 주인공이죠! Me, Myself and j-hope 'All New Hope' 의 비하인드 포스트로 찾아왔습니다 ! (박수) (함성)
From the very first teaser image that plastered questions marks and exclamation points all over ARMYs’ minds It’s the main character of the February Special 8 Photo-Folio! I’ve come to you with a behind-the-scenes post for Me, Myself and j-hope 'All New Hope'
(applause) (cheers)
호비호비 생일 떡밥 축복에 끝이 없네…. 아미들 지치지말고 달려보자고 (비장) ㄴ 아미들 : 오히려좋아
There’s no end to this blessing of birthday content for Hobi Hobi…. ARMYs, don’t get tired and keep running (solemn) ㄴ ARMYs : That’s fine with me
이번 화보는 쩨이호옵! 하면 떠오르는 밝고 스트릿한 이미지를 벗어나 제이홉만의 청순,,,섹시,,,아련,, 매력을 새롭게 어필한 화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미들도 그 매력,, 다양하게 느끼셨나요? ㄴ아미 : 네네네네네네네!!!!!!!
For this photobook j-hope! sheds his usual bright, street-style image You can say that j-hope’s unique pure,,,sexy,,,sorrowful,, charms are shown off with a new kind of appeal in this photobook! Can ARMYs,, feel that charm in all these different ways? ㄴARMY : Yesyesyesyesyesyesyes!!!!!!!
또한 화보 이름이 ‘All New Hope’ 인 것 처럼 새로운 호비의 모습을 위해 포토작가님과 직접 미팅도 진행하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었다는 명불허전 Jㅔ이홉의 소식도 소소하게 전해드리면서!
Also just like the photobook’s name is ‘All New Hope’ there were whispers that J-Hope, who lives up to his name, personally met with the photobook designer to discuss the new Hobi’s appearance and actively gave his opinion!
그렇다면! 방림이가 준비한 비하인드 사진, 안볼수가 없겠죠! 지금 바로 구경하러 가보시죠!
So! There’s no way we can’t not look at the behind-the-scenes photos that Bangbell prepared! Let’s go take a look!
모르겠다.. 첫 사진부터 걍 기절이다 요정하라고 나만의 팅커벨 그런거 하라고 그냥
I don’t know.. I’m about to pass out just from the first photo Be a fairy Just be something like my own personal Tinkerbell
님… 왜 자꾸 저 꼬시는거예요..? 아니 이 사람이 먼저 그랬다니까요? 아니 이거 좀 놔봐요 저기요
Sir… why do you keep coming at me..? No this person did it first? No let go excuse me
다음 생에는 돌멩이로 태어나자 장점 : 호비가 쓰다듬어줌
In our next life let’s be reborn as stones Pros : Hobi will pet us
아니면 모니터로 태어날까 이렇게 사랑스럽게 쳐다봐주는데.. (울먹)
Or should I be born as a monitor He’s looking at it so lovingly.. (about to cry)
갑자기 등장한 블랙홉에 아미들 민심 술렁 -
The sudden appearance of black-hope is causing chaos among ARMYs
제이홉,, 뒤에 날개 잘숨겼네,, 보일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j-hope,, you hid your wings behind you well,, I was nervous that they’d be seen,,,,
후,,, ,,,,,,,,, ,,,,,, ,, 아미들 다들 긴장해라 큰거온다
Whew,,, ,,,,,,,,, ,,,,,, ,, ARMYs you should all be very nervous
Countdown
?
??
??????
??????????? ??? ????? ?????? 제이폼 홉 미쳤다 제이홉 폼 미쳤다 (ㅋㅋ) (좋아 자연스러웠어)
??????????? ??? ????? ?????? j-form’s hope is crazy j-hope’s form is crazy (haha) (Nice. That sounded totally natural)
님.. 님은 진짜….. 화보를 찍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으세요..
Sir.. Sir you’re so….. You’re like a person who was born to shoot for a photobook..
제이홉은 웜톤임? 쿨톤임?
Is j-hope warm tone? Cool tone?
아니면 내 인생을 이어나가줄 바톤임?
Or the baton that will carry on my life?
아니면 내가 정호석을 보면서 평생 닦아내지 못할 침샘 1톤임?
Or a ton of salivary glands that I can’t manage to wipe off as I look at Jung Hoseok?
아니면 내 인생의 달달한 메가톤임?
Or my life’s sweet megaton?
아니면 내가 평생 완주하지 못할 사랑의 마라톤임?
Or the marathon of love that I’ll never be able to finish?
아니면 내 인생에 뛰어든 행복 77톤임? ㄴ 그만
Or 77 tons of happiness that jumped into my life? ㄴ Stop
ㄴ킹치만 정호비가.. (물복임? 딱복임? 도 할라했는데 아깝네.. 방림이는 물복임.)
ㄴBut Jung Hobi.. (Is he a soft peach? A hard peach? I was going to do this too but it seems a waste.. Bangbell is a soft peach.)
역! 시! 나! 정호비가 정호비했다.
As! expected! Jung Hobi Jung Hobi-ed.
호비만의 새로운 모습이 가득담긴 Me, Myself and j-hope 'All New Hope' 잘 구경하셨나요? 아직 포토북을 못 받은 아미들은 방림이 포스트 보면서 조금만 기다려~ 기다려~!
Did you enjoy looking through Me, Myself and j-hope 'All New Hope' that’s full of Hobi’s unique new look? For all the ARMYs who haven’t gotten the photobook yet look through Bangbell’s post and wait~ wait~ just a bit longer!
남은 하루도 기분좋게 마무리 하길 바라요 아미들! (요즘 딸기가 그렇게 맛있ㅇ…) 감기조심 하고 우리는 다음에 또 만나요!
I hope you have a great rest of your day ARMYs! (Strawberries are really yummy these days…) Thank you and we’ll meet again soon!
아-뿅!
A-Poof!
(T/N: Short for “Bye ARMY! Poof!”, which is how Bangbell always ends these posts.)
[Note]
본 포스트는 BIGHIT MUSIC에서 직접 운영하는 포스트입니다.
This Naver Post is personally run by BIGHIT MUSIC.
[End Note]
Trans cr; Ali | Typeset cr; Archillea @ bts-trans © TAKE OUT WITH FULL CREDITS
#230218#big hit#twitter#naver post#official#j-hope#hobi#hoseok#me myself and j-hope#what a great concept#bts#bangtan#bangbell#blogpost#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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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고,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찬,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은 열등감, 뭐든지 본인 감정만 앞서는 최악의 상황, 게다가 피해의식은 얼마나 상태를 불편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악으로 악을 갚느냐, 인고 끝에 깨닫는 바, 장애가 있는 이를 보편적인 대화로 이끌어 간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 감정을 받아내는 나는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내 마음을 겨우 잠재었다.
적어도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깐 식의 마음이 제일 크고, 혹시나 나 또한 감정조절에 실패해 애써 숨겨왔던 내 안에 본성이 드러나 오히려 독박을 쓸 수도 있으니깐 아주 조심히, 영리하게 머리를 굴려본다.
당신에겐 눈물 한 방울, 에너지 하나 아까워, 평생 그렇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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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나를 믿지 말아야지(?) 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많이했다.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집에서 공부를 할거라는 나(졸라 구라..)가 있다. 하나에 꽂히면 뭐든 깊게 들어가는 나는 또 생각의 꼬리를 물었는데, 그럼 스스로를 평생 불신하는 쪽이 더 나은 삶인가?였다. 하지만 바로 생각한 대답은 흠...그건 아니지. 였다. 믿을 수 있는 나와 믿으면 안되는 나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보다 믿어줘야하는 나... 상황에 따라 다양하지 않을까. 아 정말 인생은 끝나지 않는 '나 키우기'구나. 그렇다면 인생을 즐겜 유저로 살아보자. 인생은 온라인 게임보다 더 재밌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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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年9月5日に開催された「慰安婦問題をめぐる韓日合同シンポジウム」と6日の慰安婦像傍の街頭集会は、日韓の真実勢力がソウルに結集して声を挙げる記念すべきイベントとなりました。
シンポジウムが行われたコリア・プレスセンターでは、横断幕に日の丸が、開会時には君が代が斉唱されました。近年プレスセンターでこういったことは有り得なかったそうです。
また、6日の街頭活動は、正義連(旧・挺対協)水曜デモよりもさらに慰安婦像の近くで、正義連より参加者が多く賑やかに行われました。
2019年12月金柄憲氏、李宇衍氏らが、同じ場所で慰安婦像撤去の街頭活動を始めたときは小さな日の丸を持っていただけで、罵倒され妨害にあったそうです。
この日は青空をバックに大きな韓国旗と日章旗が翻り、参加者は韓日の小旗を振って声を挙げました。
<シンポジウム資料>
当日配布されたプログラム・資料冊子(韓国語・日本語併記)
http://nadesiko-action.org/wp-content/uploads/2023/09/2023.9.5_symposium_siryo.pdf
シンポジウム パワーポイントPDF
・第一部
http://nadesiko-action.org/wp-content/uploads/2023/09/1.pdf
・第二部
http://nadesiko-action.org/wp-content/uploads/2023/09/2.pdf
西岡力 (麗澤大学特任教授)発表原稿
・日本語版
http://nadesiko-action.org/wp-content/uploads/2023/09/2023.9.5_symposium_nishioka_jp.pdf
・韓国語版
http://nadesiko-action.org/wp-content/uploads/2023/09/2023.9.5_symposium_nishioka_kr.pdf
************************************************************************
<日韓真実勢力 共同声明>
【 PDF版 】
2023年9月6日 ソウル
日韓真実勢力一同
2023년 9월 6일
한일진실세력 일동
慰安婦問題のウソと戦う日韓真実勢力共同声明
위안부 ���제의 거짓말과 싸우는 한일 진실 세력 공동 성명
慰安婦は日本軍が管理した公娼だった。貧困のために両親が受け取った前渡し金を返済するために売春に従事した女性たちだった。その時代を生きた日本人、韓国人はそのことをよく知っていた。
위안부는 일본군이 관리한 공창이었다. 빈곤 때문에 부모님이 받은 전차금을 상환하기 위해 매춘에 종사한 여성들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 일본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南労党出身の在日朝鮮人共産主義者はこう語っていた。「故郷の済州島の村では早く夫を亡くした未亡人が村の若い娘を連れて中国で慰安所を経営し、大変カネを儲けた。そこで、村人たちはこぞって家の娘も慰安所で働かせて欲しいとその女性に頼み、多数が金儲けのために慰安婦になっていた」
남노당 출신인 재일조선인 공산주의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고향 제주도 마을에서는 일찍이 남편을 잃은 과부가 ���을의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위안소를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기 집안의 딸도 위안소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그 여자에게 부탁했고, 다수가 돈벌이를 위해 위안부가 되었다.”
だから、反日政策を進めた李承晩政権も日本との国交正常化交渉で慰安婦への補償は求めていない。
그래서 반일정책을 추진한 이승만 정권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협상에서 위안부에 대한 보상은 요구하지 않았다.
私たちは昨年に東京で、そして昨日ソウルで「慰安婦問題をめぐる日韓合同シンポジウム」を開催して、以上のような歴史的真実を確認した。
우리는 지난해 도쿄에서 그리고 어제 서울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합동 심포지엄’을 개최해 이상과 같은 역사적 진실을 확인했다.
ではなぜ、慰安婦は公娼ではなく、日本軍に強制連行され、性的奉仕を強要された性奴隷だという、ウソが拡散し、日韓関係を悪化させてきたのか。
그렇다면 왜 위안부는 공창이 아니라 일본군에 강제 연행되어 ���적 봉사를 강요받은 성노예라는 거짓말이 확산되어 한일관계를 악화시켜 왔는가.
その元凶は、強制連行、性奴隷説を広めていった日本と韓国の嘘つき勢力だ。日本の朝日新聞が職業的嘘つきである吉田清治の強制連行ウソ証言を繰り返し大きく報道した。日本人活動家が韓国で元慰安婦らを探し、日本政府を訴える裁判を起こした。原告の元慰安婦は強制連行されたとは言っていなかったのに、その証言を捏造したのも朝日だ。
그 원흉은 강제연행, 성노예설을 퍼뜨려 나간 한국과 일본의 거짓말 세력이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직업적 거짓말쟁이인 요시다 세이지의 강제연행 허위증언을 반복적으로 크게 보도했다. 일본인 활동가가 한국에서 전위안부들을 찾아다니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일으켰다. 원고인 전위안부들는 강제연행되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증언을 날조한 것도 아사히 신문이다.
そして挺対協と遺族会という韓国の二大反日団体が日本発のこのウソを韓国で大々的にひろめた。それを韓国の新聞、テレビが第二の独立運動であるかのように大きく報じた。そして見逃せないのは日韓の嘘つき勢力が北朝鮮と緊密な連携をとっていたことだ。今回、正義連の元理事長の国会議員と現理事長が東京で北朝鮮の手先である朝総連の行事に出たことがそのことを象徴している。
그리고 정대협과 유족회라는 한국의 양대 반일단체가 일본발의 이 거짓말을 한국에서 대대적으로 확산시켰다. 그것을 한국의 신문, TV가 제2의 독립운동인 것처럼 크게 보도했다. 그리고 놓칠 수 없는 것은 한일의 거짓말 세력이 북한과 긴밀한 연계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정의연의 전 이사장이자 국회의원인 유미향과 현 정의연 이사장인 이나영이 도쿄에서 북한의 앞잡이인 조총련의 행사에 참석한 것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ところが、日本と韓国の真実勢力は民族感情などのためなかなか協力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日本では30年間、真実勢力が戦いを続け、朝日が吉田証言をウソだと認めて過去の記事を取り消すところまでいたった。韓国でも、2019年からここ、慰安婦像のすぐ横で「慰安婦は売春婦」「慰安婦像撤去」を叫ぶ韓国の真実勢力が反撃を開始した。そしてついに昨年と今年、東京とソウルで日韓の真実勢力が合同シンポジウムを開催することが出来た。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진실세력은 민족감정 등을 이유로 좀처럼 협력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지난 30년간 진실세력이 싸움을 이어가, 아사히 신문이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거짓말이라고 인정해 과거의 기사를 철회하기까지 이르렀다. 한국에서도 2019년부터 이곳 위안부상 바로 옆에서 ‘위안부는 매춘부’, ‘위안부상 철거’를 외치는 한국의 진실세력이 반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와 올해 도쿄와 서울에서 한일의 진실세력이 합동 심포지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ここで私たちは宣言する。日韓の真実勢力が力を合わせて、日本、韓国、北朝鮮の嘘つき勢力の陰謀と工作を暴露し、彼ら、彼女らの責任を追求する。韓国と全世界に立てられたウソの象徴である慰安婦像を必ず撤去させる。
여기서 우리는 선언한다. 한일의 진실세력이 힘을 합쳐 일본, 한국, 북한의 거짓말 세력의 음모와 공작을 폭로하고, 그들의 책임을 계속해서 추구할 것이다. 한국과 전 세계에 세워진 거짓말의 상징인 위안부상을 반드시 철거시킬 것이다.
以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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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9월의 반절이 지나가고 있다. 일기는 한 달 넘게 쓰지 못했다. 거지 같은 기분과 순간들에게 매일 놓이며 내 성정이 야금야금 갉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깟 마음 따위가 뭐. 나를 봐줄 시간은 없었다. 시간을 최대한 전략적으로 분배해야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시간의 주인인 나를 고의적으로 배제시키는 방법뿐이었다.
시간이 따라주지 않았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엔 꼭 변명처럼 느껴질 억울함이 들었다. 쓸 수 없던 시간까지 빌려서 끌어 썼기 때문이다. 모든 이해관계에선 각자의 사연, 부득이한 문제, 기습적인 사정들이 존재한다지만 이번엔 너무 많은 이슈들이 기습적이었다. 그렇다면 기습에 방어할 대안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던 거냐고 되묻는 자도 있겠지. 그런 의문에게 내 답은 뭐가 됐든 변명에 불과하다. 솔직히 힘이 빠진다.
겨울 1차 촬영이 끝났다.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도 촬영을 마치고 나면 후련하다는 마음은 커녕 늘 아쉽고, 미흡하고, 후회가 남는다. 이게 욕심인 건지, 오만인 건지, 아니면 자학인 건지.
스스로에게 당근을 줄 수 있는 주인이 되고 싶다. 이만하면 됐다. 괜찮다. 잘했다 말해줄 수 있는 주인이 되고 싶은데 감히 오만한 생각인 것 같아 관두게 된다. 혹여나 마음이 약해질까 꾹 참게 된다.
오늘마저 털어놓지 않으면 내일은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이 한계까지 다다랐을 땐 꼭 오늘 그 감정을 정리해주자. 말끔한 해소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인간이니 이해해 줘’ 라는 말도 이렇게나마 털어놓으면 미약할지라도 내일의 동력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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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의 조지타운에는 사실상 ‘차이나타운’이 따로 없다. 중국인이 이주한 도시 어디에나 있는 차이나타운이 1786년부터 중국인이 이주한 페낭에는 정작 없는 것이다. 단지 조지타운의 차이나타운은 다인종 · 다문화의 조화 속에 도시 전역에 스며들어 있을 뿐이다. 페낭 화인사회의 위상을 대변하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페낭 건설 초기의 중국인 이주자와 관련해 누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를 자료로 확인하기는 힘들다. 일부 자료가 있다고 해도 대부분 19세기 몇몇 부자 상인에 관한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페낭에 영국 식민지가 건설된 이후 중국인 이주의 양상이 이전 시대 동남아시아의 중국인 이주 형태와 다르다는 것은 연구자들의 공통된 해석이다. 그렇다면 19세기 대량 이주의 물결이 밀려들기 이전 ‘어떤’ 중국인이 페낭으로 이주한 것일까? 페낭 건설 초기에 해당하는 1786년에서 1820년 사이에 작성된 세 차���의 페낭 인구조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현지 무역상이었던 프랜시스 라이트는 서툰 식민지 행정가이기는 했어도 꼼꼼한 기록자였다. 초기에 항구에 드나드는 배를 일일이 헤아렸고, 이주민의 인구통계도 초기부터 작성했다. 점거 2년 후인 1788년에는 8월과 12월 두 차례 인구조사가 있었다.
8월의 페낭 총인구는 829명이었고, 그 가운데 중국인은 121명으로 조사됐다. 말레이인이 302명으로 가장 많았고, 인도 무슬림인 출리아가 216명, 태국의 기독교 박해로 커다로 피난했다 이주한 기독교도가 180명으로 조사됐다.
12월 조사에서 페낭 인구는 넉 달 사이에 454명이 증가한 1,283명으로 집계됐다. … 한편 해협식민지 정부 기록에는 1788년 페낭에 거주한 중국인 가구의 가장을 이주 지역별로 구분하고 있는데, 커다 출신이 47명으로 가장 많고, 말라카 출신 6명, 말레이반도 북부 퍼를리스와 페락 출신이 각각 1명씩, 태국의 남동부 파타니와 송클라 출신이 각각 7명과 21명이었다. 중국에서 곧바로 이주한 국인 가장은 15명에 불과했다.
확인된 중국인 가장 98명 가운데 말레이반도에서 이주한 경우는 커다 출신 47명(47퍼센트)을 비롯해 57퍼센트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곧바로 이주한 경우는 15퍼센트에 그친 반면, 태국만에 면한 파타니와 송클라 출신이 28명으로 28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는 페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부터 커다를 중심으로 동쪽 태국만 일대와 서쪽 말라카해협에 육상 교역로가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하며, 이후에도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 1800년 페낭의 조지타운에 중국 복건성 출신과 광동성 출신이 공동으로 설립한 사원인 광복궁(관음정)의 비문에는 450명 기부자 가운데 태국 송클라의 ‘카피탄 우’가 200달러를 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장의 출신 지역으로 볼 때 1788년 페낭 중국인의 85퍼센트가 말레이반도 북부와 태국 남동부에서 이주한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사업 기반을 구축하고 가정을 꾸린 상태에서 페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한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화인‘이었다. 사람이 움직이면 교역 네트워크도 움직이는 게 통례였다.
말라카에서 페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 6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말라카해협 중부에 해당하는 말라카의 화인사회는 역사가 깊다. 하지만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페낭의 화인사회와 말라카 화인사회의 관련성은 그다지 깊지 않다. 나폴레옹전쟁으로 영국은 말라카를 1795년에 접수해 1818년 네덜란드에 되돌려준 바 있다. 이때 영국은 말라카의 유력 상인들을 선별해 페낭으로 이주하는 유럽인에게 정��금 전액을, 중국인에게는 정착금의 8분의 1을 지원하며 이주를 장려했다. 하지만 이주 계획은 성과가 없었다. 말라카의 중국인 대부분이 말라카를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라카의 상인들은 1824년 영국-네덜란드의 런던조약 이후 대거 싱가포르로 이주했다(Wong, 2007: 15).
19세기 후반 싱가포르에는 말라카 출신 중국인 거상이 많지만, 페낭에서 말라카 출신으로 이름을 남긴 상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페낭과 말라카의 화인사회는 상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애초부터 긴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라카해협에서 페낭은 해협 북부, 싱가포르는 해협 남부의 교역과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말라카는 교역과 인적 교류에서 싱가포르와 가까웠다. 이는 또한 영국이 33년의 시차를 두고 건설한 해협식민지 페낭과 싱가포르의 화인사회가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경제적 규모나 교역권의 차이로만 설명하기 힘든 상이함을 만든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프랜시스 라이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793년에도 인구조사가 실시됐다. ’1792~93년 인구조사‘에서는 1787년부터 1793년까지 6년간의 출생과 사망 및 혼인 등에 관한 조사도 이뤄졌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페낭 화인사회의 남녀 성비가 2대 1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는 대단히 불균형한 성비에 해당한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남성 노동자 이민이 급격히 늘면서 화인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비가 50대 1까지 벌어지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Khor & Khoo, 2004: 36), 초기 페낭의 성비 2대 1은 안정적이라 할 만하다. 당시 중국인 여성이 독자적으로 페낭에 이주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때, 초기 페낭의 중국인은 대부분 커다와 태국에서 기반을 잡고 가정도 꾸린 이들이 가족과 함께 이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조사에는 거주 예상 기간을 묻는 설문도 실시했는데, 이를 통해 초기 중국인 이주자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 대다수가 페낭에 아주 눌러살 생각은 없고,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달리 현지 여성과 결혼한 중국인과 그 가족들은 페낭에 정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조사 기간 6년 사이에 태어난 중국인 아이의 대부분이 중국인 남자와 말레이인 여자의 혼혈인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인 다수가 귀향하겠다고 답한 내용과 관련해 당시 이주자들이 페낭에 정주할 뜻이 없었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중국인도 돌아오지 않겠다며 집을 떠나는 법이 없으며, 언제나 꿈은 금의환향해 조상이 묻힌 선산에 자신도 묻히는 것이라고 한다(Smith, 1894: 166). 이러한 귀향 강박이 해외 화인사회에서 중국인 정체성의 요체라는 설명도 있다. 고향을 떠나 어디에 살든 언젠가 귀향하고 싶다는 바람이나 그리해야 한다는 농���사회의 전통으로 인해,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이 언어와 의례 등에서 문화적으로 중국인다움을 유지해��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경사회의 전통으로 19세기 해외 이주 중국인에게 귀향 강박을 규정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왕궁우(Wang, 2003: 3)에 따르면, 중국 전통 농경사회에서 자발적 이주란 개념은 없었다. 이민이란 군대를 이동하거나 당국이 기근이나 홍수 등으로 살림이 어려워진 지역의 인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가리켰다. 권력의 통제를 벗어나 제 발로 고향을 떠난 무리들은 유민流民으로 분류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페낭 건설 초기 중국인 이주자들은 청淸 조정이 해외 도항을 금지한 상황에서 경제적 · 정치적 이유로 고향을 떠났다. 이들에게 향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현지 정착을 방해할 정도로 귀향 강박이 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착 여부는 고향을 떠난 저마다의 이유와 현지에서 삶의 여건에 좌우될 사안이기 때문이다. 페낭에는 초기부터 터를 잡고 살겠다는 화인들이 확인된다.
페낭 인구는 점거 10년 만인 1796년에 1만 명을 넘었고, 점거 22년 뒤인 1818년에는 3만 명을 돌파했다.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는 것은 페낭에서 그만한 인구를 지탱할 경제활동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1810년의 인구조사에서부터 프라이를 포함한 페낭 전체 인구와 조지타운의 인구를 구분했고, 1818년에는 조지타운의 인구를 인종별 · 연령별 · 성별로 나누어 조사했다. 1818년 조지타운에 거주한 중국인 3,128명 가운데 15~39세 인구가 2,238명이었고, 남자는 1,993명, 여자는 245명이었다. 특기할 점은 1793년의 2대 1이던 중국인 남녀 성비가 25년 사이에 8대 1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페낭의 중국인 이주 패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페낭 화인사회의 성비 변화는 무엇보다 가족을 동반한 이주자보다 독신 남성의 이주가 월등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75~80쪽)
페낭 건설 초기에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에서 가족을 동반하고 이주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현지에서 활동해온 중국 상인이나 해운업자, 즉 화상華商의 후손이거나 해상교역 전통의 전승자들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특히 동남아시아 화인 연구에서 중요한 논점이다. 그간 동남아 화인사회에 관해 ‘중국’의 국민인 화교華僑에서 ‘거주국’의 국민인 화인華人으로의 변천이 중심 주제로 논구되어왔다. 이는 탈식민 시기와 국민국가 형성기라는 한정된 시기에 동남아 화인 사회의 정체성 변화에 주목한 설명의 틀이다. 하지만 서양 식민지도, 국경도, 국적도, 민족도, 국민국가도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해협 일대에 존재한 화인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단순히 ‘화교-화인’의 틀로는 설명되기 힘들다. 페낭 건설 초기 중국인 이주자들이 바로 그러한 도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해 동남아 화인사회 연구자들이 주목한 개념이 ‘디아스포라diaspora’와 ‘페라나칸peranakan’이다. 두 개념은 초기 페낭 화인사회의 형성은 물론 20세기 식민지 후기까지 페낭 화인사회의 전개 과정ㅇ르 살피는 중요한 관점을 제��한다. 디아스포라와 페라나칸은 기본적으로 종족성ethenicity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정체성identity’ 문제와 연관된다.
(81~83쪽)
통상 유럽의 집시는 디아스포라의 범주에서 배제되는데, 실향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연구자들은 디아스포라 개념을 중심으로 이주자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 경제적 역할에서 종족적 · 문화적 · 정치적 정체성에 걸쳐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동남아 화인사회와 관련해 디아스포라 개념이 주목받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첫째는 고대로부터 서양 식민지 시기까지 이어져온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관련된 것이고, 1990년대 이래 세계화의 확산 속에서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종족 집단에 관심이 쏠린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해상교역과 관련된 디아스포라 개념은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 서사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15세기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한 대항해 시대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기는 해도, 유럽중심주의 관점은 서양의 도래 이전부터 세계의 대양에서 교역망을 갖추고 활발하게 교역하며 살았던 디아스포라의 서사를 자율적 주체로서 다루지 못했다(Clark, 2006: 386~7).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서양의 진출 이전과 이후 인도양 동쪽 해양교역이 누구에 의해, 어떤 매커니즘으로 이뤄졌는가를 설명하는 틀로서 “외국인 사회에서 연계 네트워크를 갖추고 살아가는 상인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교역하는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란 개념이 도출됐다. 이 개념은 종족 집단의 이주 현장에서 드러난 연관성에 주목한 후속 연구를 통해 “동일한 종족의 기원을 지닌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해외의 도시나 이방의 문화에 형성한 공동체”(Clark, 2006: 391)로 정의되었다.
아울러 ’교역하는 디아스포라‘가 특정 시기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됐다(Loh, 2009: 1). 근대적 계약체계가 자리 잡기 이전까지 종족 기반의 교역하는 디아스포라는 정치적 경계를 넘어 같은 종족 또는 지역 출신과 거래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느는 것이다. 출신 지역이 같은 상인들과 거래하는 것이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을 상대하기보다 수월했고 속을 가능성도 줄여주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84~85쪽)
페라나칸은 디아스포라의 부수적 개념이면서, 동남아 화인사회의 특성을 함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페라나칸은 본디 말레이어로 ‘현지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이지만, 그 대상은 디아스포라로 국한된다. 출생자의 부계 종족성이 무엇인가에 따라 중국 상인의 후예이면 ‘페라나칸 치나Peranakan Cina’로, 인도계 무슬림 상인의 후예이면 ’자위 페라나칸/자위 페칸Jawi Peranakan/Jawi Pekan“으로 불렸다.[*자위 페라나칸은 ‘동남아시아’를 가리키는 아랍어 ‘자위’와 현지 태상을 가리키는 말레이어 ‘페라나칸’의 합성어이다. 페낭에서는 ‘자위 페칸’으로 통용됐다. 페낭 건설 초기에 이주한 인도 남동부 출신 무슬림 남성이 현지 말레이 여성과 혼인한 경우 ‘자위 페칸’이라고 했고, 이들의 후예를 ‘자위 페라나칸’으로 불렀으며, 이후 인도인 무슬림과 그 후손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자위 페칸’이 쓰였다. Musa(1999: 15) 참조. 인도인 여성의 이주가 본격화한 1860년대 이후 페낭의 자위 페칸은 혼혈의 의미보다 말레이어를 쓰는 인도계 무슬림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페라나칸을 지칭하는 용어는 나라와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말라카해협 디아스포라 화인사회의 원조에 해당하는 말라카에서 페라나칸 화인은 스스로 바바Baba峇峇라 칭했다. 바바가 혼혈의 후손을 가리키는 인도어에서 비롯했다고 하지만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이른 시기에 화인사회가 형성된 말라카에서 바바는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하는 존칭으로 사용됐다. 페라나칸 화인 남성을 바바라면 여성의 존칭은 ‘뇨냐Nyonya娘惹’이다. 페낭을 비롯한 말라카해협에서 페라나칸은 시대에 따라 바바, 바바뇨냐, 해협화인Straits Chinese 등과 혼용되기도 한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페라나칸은 ‘타향에 머무는 자’로서의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온 자’와 ‘머무는 타향에서 출생한 자’의 경계가 생기고 그것을 구분할 어떤 필요성에서 생겨난 말일 터이다. 그 ‘어떤 필요성’이 페라나칸의 특성을 규정하게 된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사회인류학자 탄치벵은 그 필요성이 화인사회가 내부와 말레이 사회의 두 방향에서 제기됐다고 본다. 먼저 말레이 사회에서 말레이 문화에 동화된 화인과 그렇지 못한 화인을 구분할 필요성이었고, 화인 사회 내부에서도 양자의 경계를 구획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이다(Tan, 1993: 21~22). 두 경우 모두에서 바바/페라나칸의 ‘타자他者‘는 중국에서 새로 이주한 신케sinkheh新客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라카해협에서 페라나칸 화인의 역사는 15세기 말라카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명대의 대항해가 정화鄭和(1371~1434)의 원정기에도 말라카왕국에 화인사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교역의 속도와 규모가 커지면서 오랜 역사의 아시아 지역이 앤서니 레이드(Reid, 1988, 1993)가 명명했듯이 ‘상업의 시대’(1450~1680)로 불리게 된 것은 서양 식민지화 이전 시기의 일이다. 동양과 서양의 해상 교차로로서 동남아시아에서 항구에 기초한 정치권력들은 해상을 통과하는 해상교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유럽과 중동, 인도, 중국, 일본의 상인들이 해상의 주요 항구와 기지와 지사를 건설하고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만들었다(Clark, 2006: 391). 이렇게 생겨난 항구 도시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정착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임시 머무는 거처를 의미했다.
중국인은 15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지배했다. 18세기를 ‘중국인의 세기Chinese century’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Blusse, 1999; Reid, 1997: 11~14). 중국인이 동남아 도처의 주요항구에 거주하면서 상업활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동남아 해상교역이 ’중국인의 세기‘였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이를 두고 화인 연구가 왕궁우(Wang, 1991b)는 “제국 없는 상인들”이라고 했다. 이 시기 중국 복건성 출신 중국 상인들이 동남아 해상교역에서 제국이란 공권력의 뒷받침 없이도 거대�� 교역 제국을 건설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중국인의 세기가 중국 동남 연해안에서 교역과 해외 이주를 금지하는 명청대 해금海禁 정책의 시기와 겹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중국인 해상활동 황금기라는 남송(1127~129)과 원대(1271~1368)의 250년간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런데 이 시기 동남아 지역에 중국인이 정착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명대인 15세기 초부터 중국인 해외 정착이 기록으로 확인된다(Joh, 2009: 5).
명청대 해금정책에도 불구하고 복건성 연안 지역에는 ‘가까운 이들까리 무리를 이루어 바다로 나가 무역을 하는’ 이른바 주사무역走私貿易이 성행했다. 복건성의 상인은 물론 어민과 토지가 부족했던 농민은 “바다가 바로 논밭”이라고 할 정도로 교역에 열을 올렸다(이화승, 2007: 559). 이들은 범선에 상품을 싣고 남동 계절풍을 받아 말라카해협에서 교역을 하다 북서풍으로 바람이 바뀌면 해협 산물을 싣고 귀향하는 방식으로 교역했다. 이러한 교역 패턴에서 주요 항구에 디아스포라 화인 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은 계절풍이 바뀌면 돌아가지만, 누군가는 현지에 남아야 했다. 무역은 물품을 실어 나른다고 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중국산 물품을 현지에 팔아야 하고, 중국으로 가져갈 현지의 산물을 수집하는 네트워크가 갖춰져야 가능했다. 현지에 머물며 교역망을 구축한 이들을 중심으로 동남아 도처에 ‘교역하는 디아스포라’의 화인사회가 생겼다.
타향에 머물던 자들은 해외 이주를 금지하는 해금조례海禁條例 탓에 귀향하고 싶어도 못하는 처지였기에 현지에 정착해 페라나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Tan, 2003: 40).[*청조는 옹정 · 건륭雍正 · 乾隆 연간(1722~1795) 해금조례를 발령하고 해외 도항을 금지했다. 가경 · 도광嘉靖 · 道光 연간(1796~1850)에 해금조례 자체는 존속됐지만 유명무실해졌다. 청조가 조례를 존속시킨 채로 해외 도항을 단속하지 않은 시점과 페낭의 영국 식민지. 건설 시기가 맞물린다는 점이 흥미롭다. 페낭 건설 초기부터 복건성과 광동성 중국인들이 대거 페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정책 변화를 반영한다. 도항을 금지한 해금조례가 폐지되고 이주자의 귀향이 합법화된 것은 1894년의 일이다.] 해외 이주가 불법으로 규정된 탓에 귀국도 불법이었던 것이다. 이다스포라 화인 가운데 일부는 현지 여성과 혼인해 가정을 꾸렸고, 그 후예들이 페라나칸 화인사회를 형성했다. 말라카해협의 페라나칸을 15세기 복건 상인들의 후예라고 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중국인 디아스포라 무역상들은 동남아시아의 항구 도시를 중계무역항entrepot으로 변모시켰다(Loh, 2009: 3). 중계무역항은 지역의 산물이 모이고, 외부의 상품과 산물이 지역으로 분배되는 중심을 가리킨다. 이는 곧 교역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사람의 총체로서의 중심이며, 상품 생산자와 해상 운송업자, 도매상인과 소매상인, 전대업자와 지역 권력자를 포괄했다. 이러한 교역망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중개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은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가운데에서도 페라나칸의 몫이었다. 페라나칸의 특정 지방 디아스포라 화인사회의 일원이면서도 지역의 교역 네트워크를 따라 유동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인도인 무슬림과 힌두교도 상인들이 그러했듯이 페라나칸 화인 디아스포라도 말레이인은 물론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 상인과도 거래를 성사시킬 만큼 여러 언어를 구사했다. 말레이반도 북부의 술탄국 커다의 페라나칸 화인은 말레이 지배엘리트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술탄을 위해 세금을 징수했고, 지역 시장에서 현지 산물과 외래의 잡화를 교환하는 상인이기도 했다(Khor, 2006: 60). 이렇게 수집된 해협 산물들은 항구 도시의 시장으로 모이고, 거기서 중국인 해운 업자에게 팔려나갔다.
말라카에서 여러 방언 집단으로 이뤄진 페라나칸 화인 사회는 공통어lingua franca로 ‘바바 말레이어Baba Malay’를 사용했다. 말레이어를 뼈대로 복건 방언이 대폭 차용된 것으로, 중국인과 말레이인의 교역에 쓰인다고 해서 ‘시장 말레이어bazaar Malay’ 혹은 말레이어와 복건 방언의 혼성어라는 의미에서 ’피진 말레이어pidgin Malay’라고도 한다. 출신 지역에 따라 방언이 다른 중국인은 바바 말레이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말라카해협의 페라나칸 화인은 오랜 세월 여러 세대가 이어지면서 현지의 말레이인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말레이 세계와 문화적으로 동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말레이인의 관습인 빈랑 씹기를 하고, 말레이의 향료를 많이 넣은 이른바 ‘뇨냐 음식’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페라나칸 화인은 전래의 조상 제사를 깍듯하게 모셨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지도 않았다. 말라카의 바바, 즉 페라나칸 화인 남성의 차림새는 중국 남부의 중국인과 다를 바 없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외부를 걸치고, 변발한 머리에는 두개모頭蓋帽를 썼다.
…
해협 일대에서 활동하던 페라나칸과 구분해, 중국에서 태어나 곧바로 페낭으로 이주한 중국인을 ‘신케’라 했다. 신케의 급속한 유입으로 페낭의 화인사회는 이전의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사회와도 질적으로 달라졌다. 이로써 페라나칸 화인은 신케와 대비되는 ‘현지 태생‘의 화인을 가리키는 화인사회 내부의 범주가 되었다(Tan, 1997: 105). 아울러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화인사회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말레이 문화를 수용해온 문화적 수렴화의 흐름도 바꾸었다. 이주자 인구 변동으로 페낭의 화인사회에서 기존의 바바/페라나칸 전통은 약화되고 다수를 차지하는 신케의 중국 문화가 강세를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Khor, 2006: 60).
(86~91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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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민규 Weverse Post Update:
그렇다면 우리도
trans: if you're gonna do that (post selfies), then we will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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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MINGYU WEVERSE UPDATE WITH VERNON
[그렇다면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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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e teacher in my class?]
You're happily going to school, sitting next to your favorite sorcerer.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누구?]��환사는 좋아하는 마법사 옆자리에 앉아 행복한 학교생활이 한창입니다!
So, who is your classroom teacher?
그렇다면 담임 선생님은 누구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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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도가 치면 지레 겁을 먹고 모래성을 부수기 급급했다_(나의 비겁에 관하여)
나는 파도가 치는 바다에 수십년을 살아가면서도, 늘 철썩이는 파도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기 일 수였고 어느 날은 밀물에 불어나 수면을 넘어오는 그것들에 지레 겁을 먹고 내가 손 수 세웠던 모래성을 다시 내 손으로 부숴버리기 급급했다.
소중했던 것들을 잃었던 기억들을 되돌아보면, 항상 도망치는 쪽은 나였고, 상대방은 영문도 모른 채 서 있다 등을 돌려 떠나버리거나, 쫓아오기에 지쳐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도망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그럼 그렇지, 저런 사람이었다니까.’ 와 같은 역겨운 자기위안에 빠진 채 스스로가 슬기로운 선택을 하였다는 고독한 안도감의 모래지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은 것은 언제였을까, 한 연예인이 몇 년 전 예능에서 ‘늦었다고 생각하였을 땐 정말 늦었다.’라고 농담같이 말했던 이야기가 뜬금없지만 그 깨달음과 함께 떠올랐다. 내 멍청함을 깨달은 것이 언제였든, 나는 내 손에 움켜쥐었던 모래들이 이미 제 스스로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애써 먼저 손을 펼쳐 털어버리는 짓을 반복하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이후이기에 결국엔 후회 섞인 비통함으로 반죽한 감옥에 스스로를 투옥할 수밖에 없었다.
웃긴 이야기는-사실 역겨운 이야기이겠지만 서도- 이런 나에게 늘 다가오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회들이 있었고 그들은 여전히 친절하고 건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 내 토악질 나오는 본 모습을 가리기 위하여 쓰고 다닌 가면이 이렇게 매력적이라니. 처음부터 나 자신을 그렇게 가꾸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인가? 사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망해버린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멀티버스 세계관처럼, 어떤 행동을 하고 난 후의 변화의 경우의 수는 무한대로 뻗어 나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 자신의 변화가 긍정적일 것이라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뿐이며, 나는 그러지 않을 수많은 삶을 리스크 체크라는 변명으로 포기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해변에 서핑샵을 열고, 파도를 타며 저녁이면 우드 향 가득한 위스키에 탄산수를 조금 타 마무리하며 깊고 안온한 잠에 들겠지만, 나는 내 선택들의 연쇄효과를 통하여 비어버린 해변에서 파도소리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스톡홀름 신드롬이 생겨버린 피해자처럼 ‘파도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도, 변화를 해보겠다고 가끔 내 해변에 모래들을 열심히 반죽하여 성을 쌓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면, 완성된 성의 모습을 상상을 하다, 누군가 나의 해변을 지나가다가 칭찬과 관심을 보이며, 대화를 이어가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그런 미래가 있지 않을까 퍽이나 쓸데없는 망상으로 변질되고는 한다. 자,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 나는 남들과 비교하여도 객관적으로 불행하다고 할 만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외모와 행동으로 인한 왕따, 그로 인한 반사회적 성격 형성, 악순환처럼 이어지는 스스로의 고립까지. 하지만 분명 그 사이에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였다.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고 방어적이며 그룹활동을 철저히 거부하는 나를 교실 안으로 다시 들여준 선생님들, 집 가는 길 나를 처음 같이 PC방을 가자고 하며 끌고 가준 친구들, 기억엔 없지만 수없이 많은 호의가 나를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떠한가? 그 때의 나보다 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결론적으로는 내면적으로는 동일한-혹은 더 퇴보한-사람이지 않는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고, 더욱이 나의 이 어두운 면을 감싸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결국에 연락처를 바꾸거나, 타지로 도망가거나 등 다양한 이유로 그들을 끊어낸 것은 역시 나였다.
영장류는 학습을 하여 발전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 수많은 사례들만 봐도 ‘나는 그 고통을 통하여 성장하고 알을 깨고 나아갔다’는 희망적인 결말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나는 한 자리 수의 평수 단칸 방 침대에 누워 불면도 숙면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 에서 시간을 버리며 살아가다 결국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 사이에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대학을 자퇴했고, 수 번의 이직을 하며 조직에 녹아들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괴짜 천재들처럼 비범하지도 않으며, 남들 모르게 세상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저 그런 한심한 존재로 남아있다.
이제 제법 빠르게 모래성을 지을 수 있고, 언제쯤이면 이 파도가 해수면을 넘어오는지 감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낸 것은 빠르게 지을 수 있는 모래성 도면과 어디쯤에서 부수게 될지에 대한 예측이다. 이것은 마치 삼체 문제 마냥 내가 아무리 견고한 가설을 쌓아도 무너지고 만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룬 것이 없는 삶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이 삶이 어디서 끝날지 알 수 없다. 몰디브처럼 언젠가 바다에 잠길지도, 혹은 그 전에 나의 해변에 모래가 모두 파도에 이끌려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얻은 하나의 교훈은,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대학교 과제로 글을 쓸 일이 생겨서, 이 축복을 담아 꾹꾹 눌러 써 기고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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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NG LYRICS] Haegeum (해금) by Agust D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해석들은 자유 You’re free to make interpretations
개소리는 아웃 Out with the bullshit
표현들의 자유 Freedom of expression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 사유 could be the reason for someone’s death
그것 또한 자유일런지 Is that another type of freedom?
당신의 판단과 추측엔 Do your judgments and speculations
확실한 신념들이 있는지 rest on firm convictions?
당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가 Do you believe that your freedom
동일하다 믿는지 is the same as other people’s?
그렇다면 주저 말고 올라타 봐 Then don’t hesitate and come on now
금지된 것들로부터의 해방 Freedom from all that was forbidden
각자의 취향조차 이해들을 못 하는 불행한 This is a song for all of those living in this unfortunate age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where no one understands their own preferences
위한 이 노랜 금지된 것을 푸는 것뿐이지 All it does is lift the ban on all that was forbidden
허나 자유와 방종의 But please keep in mind the difference
차이쯤은 부디 구분하길 between freedom and self-indulgence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쏟아지는 정보들은 상상의 자유들을 The overload of information
금지시킴과 동시에 bans freedom of imagination
사상의 통일성을 원해 and demands uniformity of thought at the same time
꽤나 머리 아픈 각종 노이즈는 눈을 가리고 All this headache-inducing noise blinds us
이제는 생각의 자유조차 범해 and now it even violates freedom of thought
각종 논란들은 판단들의 혼란들을 Controversies being pumped out nonstop
야기시키고 또 쉴 틈 없이 생산되네 uh causes confusion in judgement, uh
과연 우릴 금지시킨 건 무엇일까 What has put a ban on us?
어쩌면은 우리 자신 아닐까 Maybe we did it to ourselves?
자본의 노예 돈들의 노예 Slaves to capitalism, slaves to money
증오심과 편견 혐오의 노예 Slaves to hatred, prejudice and hostility
유튜브의 노예 플렉스의 노예 Slaves to YouTube, slaves to flexing
이기심과 탐욕이 미쳐 날뛰네 Selfishness and greed run rampant
눈 감으면 편해 모든 게 뻔해 It’s easier if you close your eyes, everything’s so obvious
이득에 따라서 뻔히 갈리는 견해 Opinions so clearly split according to profit
시기와 질투에 다들 말야 눈들이 머네 Envy and jealousy have blinded everyone
서로가 서로에게 족쇄를 거는 것도 모른 채 Unaware of the shackles they put on each other
정보의 쓰나미에서 쓸려 내려가지 말길 May we not get swept away by this tsunami of information
우린 자유와 방종의 차이쯤은 모두 구분하니 Do we all differentiate freedom from self-indulgence?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이 노래는 해금 This song is a haegeum
올라타 봐 지금 Come on now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This busy rhythm might be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A new type of haegeum
Translators’ Notes:
*A traditional Korean string instrument but it can also mean ‘lifting a ban’.
Trans cr; Rinne | Spot Check cr; Aditi, Annie & Faith @ bts-trans © TAKE OUT WITH FULL CRED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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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도! 끝나고 직후!
Then me too! Right after it ended!
#ONEDOOR #SUMMERSONIC #JAEHYUN #BOYNEXTDOOR
#명재현 #보이넥스트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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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들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좋아할까 생각해봤다. 그의 영화 속 대사들은 왠지 모르게 나를 편안토록 만들고, 주변을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주인공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찌질해지고 궤변을 토로하지만, 그 안에는 포옹력과 신비로움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구조의 재미 때문이다. 그의 모든 영화는 반복과 변주를 통해 관객들에게 구조의 발견을 요구한다. 구조적인 반복을 통해 욕망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의 영화가 매번 똑같고, 발전이 없다고 말한다. 항상 이야기가 주인공의 욕망에만 머물러있고, 되풀이되는 이야기만 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홍상수’ 감독이 구조를 어떻게 변형시키며 가지고 노는지 발견해야 한다.
‘홍상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억’과 ‘우연’에 대한 테마를 대구(對句)를 통해 드러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하하하> 이후로 그는 그 대구를 점차 희석시키면서 영화의 구조적 시공간이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한다. 특히 <자유의 언덕>은 시공간적 개념을 뒤엎는 실험이 두드러진 영화이다. 북촌과 서촌에서의 시간은 비선형적인 구조로 진행되고, 편지가 뒤섞임으로써 시간 감각을 배제한 세계를 보여준다. 시제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내레이션은 지금과 그때라는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유의 언덕>은 이러한 모호한 시간 속에서 주인공 ‘모리’의 애틋한 정서를 신비롭게 묘사한다. 또한 ‘모리’를 찾아가는 ‘권’이라는 또 하나의 서사의 축이 형성되면서 구조적으로는 더 확장되고, 정서는 더 깊어지게 된다.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 감독이 자주 보여줬던 ‘시간’이라는 테마에 대한 사색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리’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 또한 <시간>이다. 그는 책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관념의 틀이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의문을 제기한다. 이 논리는 영화적 서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전적인 영화 서사에서 중요시 된 ‘인과성’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고, 이를 뒤틂으로써 현재, 과거, 미래를 잇는 연결점 보다는 화면에서 보이는 그 때 그 순간에 더 집중하게끔 만든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건 간에, 지금의 순간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지향하는 감독의 바람이 담겨있는 것 같다. 개연성, 필연성, 인과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간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상수’ 감독은 왜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나는 그것을 ‘순간’의 즐거움을 중요시하는 감독의 실존주의적인 태도와 연관시켜 볼 것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이 주는 모호함과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소통의 간극에 대해서도 분석해 볼 것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바로 ‘모리’와 ‘권’이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 다음에 나오는 장면이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상한 꿈을 꿨다고 말하고 방에서 나오는 장면인데, 이는 인과성의 개념 자체를 온전히 해체시켜버린다.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도 감독의 철학과 관련지어 이야기 해 볼 것이다.
‘홍상수’ 감독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아졌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그의 스캔들에 대한 비판이 더 많다. 그의 선택은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고, 매년 기다리는 관객으로서 그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고 감독님과 관객과의 대화를 한 경험이 있는데, 그의 말을 들으면 정말이지 편안해지고 위로가 된다. 종교처럼 말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입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 자체로 보는 순간, 그 어떤 위로보다 위대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세상을 머릿속으로 규정짓는 순간, 우리는 축소된 삶을 사는 거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분석하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자유의 언덕>에서 내가 느꼈던 정서와 그것을 만들어낸 구조를 통해 솔직하게 이야기 해보고 싶다.
201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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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ust D - 해금 (Haegeum) [lyrics+vocab]
이 노래는 해금, yeah 올라타 봐 지금, yeah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 해금 - to lift a ban 해금 is also the name of a single stringed traditional Korean instrument but the hanja for "lifting a ban" is the following: - 解 풀 해 - to lift, free - 禁 금할 금 - to ban ⁕ 올라타다 - to get on ⁕ 지금 - now ⁕ 복작대다 - to bustle, swarm ⁕ 리듬 - rythm ⁕ 어쩌면 - maybe ⁕ 또한 - also
이 노래는 해금, yeah 올라타 봐 지금, yeah 복작대는 리듬 어쩌면 이 또한 또 다른 해금, yeah 해석들은 자유, yeah 개소리는 아웃, yeah 표현들의 자유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 사유 그것 또한 자유일런지 당신의 판단과 추측엔 확실한 신념들이 있는지 당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가 동일하다 믿는지 그렇다면 주저 말고 올라타 봐 금지된 것들로부터의 해방 각자의 취향조차 이해들을 못 하는 불행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이 노랜 금지된 것을 푸는 것뿐이지 허나 자유와 방종의 차이쯤은 부디 구분하길 이 노래는 해금 올라타 봐 지금 복작대는 리듬 또 다른 해금
⁕ 해석 - interpretation ⁕ 자유 - freedom ⁕ 개소리 - bullsh*t ⁕ 표현 - expression ⁕ 죽음 - death ⁕ 사유 - cause ⁕ 판단 - judgement ⁕ 추측 - assumption ⁕ 확실하다 - to be sure ⁕ 신념 - belief ⁕ 타인 - others ⁕ 동일하다 - to be the same ⁕ 주저하다 - to hesitate ⁕ 금지되다 - to be forbidden ⁕ 해방 - liberation ⁕ 각자 - each ⁕ 취향 - taste ⁕ 이해하다 - to understand ⁕ 불행하다 - to be unhappy ⁕ 시대 - generation ⁕ 풀다 - to undo ⁕ 허나 - however ⁕ 방종 - self-indulgence ⁕ 차이 - difference ⁕ 부디 - please ⁕ 구분하다 - to differentiate
쏟아지는 정보들은 상상의 자유들을 금지시킴과 동시에 사상의 통일성을 원해 꽤나 머리 아픈 각종 노이즈는 눈을 가리고 이제는 생각의 자유조차 범해 각종 논란들은 판단들의 혼란들을 야기시키고 또 쉴 틈 없이 생산되네, uh 과연 우릴 금지시킨 건 무엇일까 어쩌면은 우리 자신 아닐까 자본의 노예, 돈들의 노예 증오심과 편견 혐오의 노예 유튜브의 노예, 플렉스의 노예 이기심과 탐욕이 미쳐 날뛰네 눈 감으면 편해, 모든 게 뻔해 이득에 따라서 뻔히 갈리는 견해 시기와 질투에 다들 말야 눈들이 머네 서로가 서로에게 족쇄를 거는 것도 모른 채
⁕ 쏟아지다 - to pour, spill ⁕ 정보 - information ⁕ 상상 - imagination ⁕ 동시에 - at the same time ⁕ 사상 - thought ⁕ 통일성 - unity ⁕ 원하다 - to want ⁕ 각종 - various ⁕ 눈을 가리다 - to cover one's eyes ⁕ 논란 - controversy, dispute ⁕ 혼란 - chaos, mess ⁕ 야기시키다 - to cause havoc ⁕ 쉴 틈 없이 - without a rest ⁕ 생산되다 - to be produced ⁕ 우리 자신 - ourselves ⁕ 자본 - capital ⁕ 자본주의 - capitalism ⁕ 증오심 - hatred ⁕ 편견 - prejudice ⁕ 혐오 - loathing ⁕ 노예 - slave ⁕ 이기심 - selfishness ⁕ 탐욕 - greed ⁕ 날뛰다 - to leap ⁕ 편하다 - to be comfortable ⁕ 뻔하다 - to be obvious ⁕ 이득 - profit ⁕ 갈리다 - to be split ⁕ 견해 - point of view, opinion ⁕ 시기 - jealousy, envy ⁕ 질투 - jealousy, envy ⁕ 눈이 멀다 - to be blind ⁕ 서로 - each other ⁕ 족쇄를 걸다 - to shackle
정보의 쓰나미에서 쓸려 내려가지 말길 우린 자유와 방종의 차이쯤은 모두 구분하니
⁕ 쓰나미 - tsunami ⁕ 쓸리다 - to be swept away ⁕ 내려다가 - to go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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