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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전부이신 막막함이여, / 이승희
막막한 마음들 데리고 길을 나선 적 있지. 푸르고 맑은 것들의 빛나는 이마를 바라보며 골목을 하루 종일 헤매다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며 시든 잎처럼 앉아 있곤 했어. 여기가 사막이군. 무수한 도시의 사막은 그렇게 발견되었던 거야. 손가락 가득 모래가 빠져나가고 나면 거대한 모래 무덤이 더이상 갈 데 없는 누추한 시절로 허공을 붉게 물들이지.
오래도록 서 있었으며
자주 그랬으며
오늘은 나의 죽음을 저당 잡힐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나 할까?
근거 없는 이유들로 살아내기엔 가슴이 너무 뭉클했고, 잠을 자면 죽는 것들이 가득했다. 마음 없이 떠돌던 모든 것들 내게로 와 잠들었다. 잠든 것들의 이마를 짚어주며, 내게 등을 보인 것들을 하나씩 지워냈다. 버려진 담뱃갑이 각을 세우고 누워 있는 구석 어디쯤, 뭐 그쯤에서 쓰러지면 그만이었다. 막막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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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모르는 사람 / 황혜경
몰라? 가장 쉬운 말로 하려고 했어 슬픔은 그런 것이니까 침대에서 양발로 딛고 내려오는 아침과 양발로 밀고 시작하는 젖은 아침의 무게가 다르지만 스케일이 큰 문장 뒤에 숨은 자잘한 단어들처럼 슬픔은 함께같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 두 사람이 네 사람의 장례를 함께 치르고 나눠 갖고 난 후에 두 사람은 정말 내가 당신 같고 당신이 나 같다,라고 했대 나는 함께같이 슬픈 것들과 더 잘게 애틋하게 슬픔을 잘근잘근 당신은 애써 슬픔의 영감(靈感)을 걷어차는 사람 부디, 제발이라는 말을 잘도 잊어버리지 당신은 포기가 빠르고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자칫, 절도(節度) 있는 태도로 보여 당신은 대범한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몇 개의 슬픈 알맹이들이 어떻게 굴러가다가 짓밟히고 터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지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고 짜임새라고 믿었던 올들이 어떤 계기로 풀리고 묶이고 매듭이 다시 생기는지 보이지 않는 그 슬픔의 과정을 모른다 고아에 감상적으로 접근하면 고독한 아이 나는 고아를 잘 모르지만 버려지고 외로워서 슬픈 아이 함께같이 슬픈 나도
발이 가장 은밀한 눈물의 부위라고 내가 숨겼을 때 주로 조증(躁症)인 당신의 성기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몇 도였을까 또 나를 비웃었을까, 생각하면
붉가시나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더 붉은지 더 따가운지 나는 난대의 훈풍 한가운데 서 있어도 춥고도 외롭고도 슬프다 두 사람이 네 사람의 장례를 함께 치르고 나눠 갖고 난 후에 두 사람은 정말 내가 당신 같고 당신이 나 같다,라고 했대 두 사람은 부부였대
정말 몰라? 나는 함께같이 슬픈 것들과 당신이 없어도 정말 몰라도 슬픔과 슬픔을 모르는 사람의 거리를 이해하면서 나는 함께같이 슬픈 것들과 같이 나는 생각이 없는 사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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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점심상 / 허수경
잠깐, 광화문 어디쯤에서 만나 밥을 먹는다
게장백반이나 소꼬리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이라도
무얼 먹어도 아픈 저 점심상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너는 다시 어딘가에서 넥타이를 반쯤 풀며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누르고
나는 어디, 부모 친척 없는 곳으로 가볼까?
그때, 넌 왜 내게 왔지?
너, 왜라고 물었니?
C’est la vie, 이 나쁜 것들아!
나, 어디 도시의 그늘진 골목에 가서
비통하게 머리를 벽에 찧으며… …
다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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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 류시화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 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 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 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 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 온다해도 나는 소나무 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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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rational man (2015)
악의 평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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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aniel Blake (2016)
This isn’t your 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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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es And Jim (1961)
'완전한 사랑은 오직 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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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청 / 김언
당신의 글씨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당신의 코에서는 취한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눈을 감는 소리는 입에서도 나는데 그것은 아무리 묘사해도 들을 수 없는 안개 같은 맛이다. 취한 뱀이 천장을 기어다니는 맛이다. 당신은 그걸로 글씨를 쓴다. 그것에 반해 냄새를 맡는다. 냄새는 오래되었다. 당신이 말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얼음은 실제로 차갑고 구름은 실제로 뜨겁고 눈은 실제로 무겁다. 너무 무거워서 비는 초록색이다. 너무 가벼워서 9가 8보다 더 빨간색이듯이. 붉은색이듯이. 진홍색이듯이. 변해가는 색깔은 변해가는 기억을 대문에 붙여둔다. 대문은 이대로 가면 검은색이고 흰색이고 또 다른 색이다. 문을 닫으면 큰 소리가 난다. 문을 열면 더 요란한 주인이 소리를 내고 있다. 날카롭고 눈부신 철 대문에 끼어서 손가락이 부었다.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가진 것처럼 우는 소리도 차갑다. 비웃는 소리도 그에 못지않다. 얼마나 의심이 많았으면 우는 사람 앞에서도 손 한번 내밀지 않고 혀를 날름거렸을까. 취한 뱀처럼 바닥에 툭 떨어졌다. 6은 뒤집어도 뱀이다. 9는 다시 보아도 6이다. 8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고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사이렌 소리는 물과 불을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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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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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우리 / 조혜은
너무 슬픈 것 같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힌 낯선 얼굴로 네가 말했다. 어제의 문장에 머무르지 않아. 내가 말했지. 일찍 밤이 찾아오거나 혹은 영원히 밤 같은, 밤의 의미가 상실된 도시에서. 늘 서둘러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서툰 풍경의 사람들. 폭우가 몰아치는 거리를 피해 너는 집으로 달아나려 입을 벌렸고, 나는. 나를 기다렸다. 정말 무서운 건 폭우를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새로운 다리가 놓아지는 일이지. ���와 나 사이에 여유롭게 구조물을 놓으며. 준비가 되면 호흡하는 바른 방법을 배우고 호흡할 수 있길 바랐지. 너와 내가 공통의 분모를 가진 우리가 되길. 관광지처럼 빠르게 달아오르고 재빨리 잊힌 뒤 영영 그리워지길 바라진 않아. 정말 슬픈 건 관광지를 떠나 마지막을 맞는 나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끝이 나야 해. 너는 끝없는 여행을, 나는. 또다른 나를. 너에게 나는 그리운 말이었다. 나는 매일 밤 나를 흉내냈다. 관광지에서. 우리가 서로 멀어지다가 우연히 만나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길. 겹쳐진 많은 날들이 날 선 문장을 선물하고 우리는 걷고 있었다. 관광지가 되는 건 너무 슬픈 것 같아. 사랑은 질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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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휴일 / 조혜은
밤이 깊으면 비어 있는 벤치가 없어. 나와 너는 걷고 또 걸었지.
이제 밤이 깊어도 쉴 수가 없어. 너는 나에게 헐벗은 꿈을 맡긴 채, 어느 먼 곳에서. 나는 나에게 아이의 헐벗은 숨을 맡긴 채, 또 어느 먼 곳에서. 휴일이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언제 일하고 또 어떻게 쉴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어느 낯설고도 낯익은 가난한 골목들을 손에 걸고, 걷고 또 걸었었는데. 이 모든 건 오래된 휴일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한 가닥도 숨기지 못해 내 눈을 피하던 너는, 이제 내게 구석구석 벗은 몸을 찍어 수치심과 함께 보내달라 말하지. 너는 그곳에서 뭇 사내들이, 낯익고도 낯선 여자들의 몸을 더듬어 파괴하는 것을 지켜본다고. 너는 사라진 휴일처럼 두렵고. 너는 나를 모욕하고 상심한 우리를 파괴하고. 하루는 나와 아이의 이름을 손바닥에 소중하게 적었다고 말했지. 나는 모든 소멸하는 것들의 눈 속에 우리의 마지막 날들을 적어 넣었지.
> 너의 몸속에는 매일같이 눈이 노란 독이 쌓이고. 나는 하루하루가 매일의 호흡같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우리는 기껏해야 한 푼도 되지 않는 가녀린 죄책감을 나누며 서로의 병들어가는 몸에 욕을 퍼부었지. 하지만, 괜찮아. 우리는. 우리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 낮고 어두운 그늘에 흩어진 마음을 숨기며. 우리는 왜 죄를 짓기도 전에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 걸까? 이 장마는 언제쯤 끝이 날까?
우리는 약속도 하기 전에 지키는 법을 먼저 배우며 시간을 접어 기다림을 끌어왔고.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고. 사랑해. 그것만은 나의 잘못이었지. 너는 휴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달라 말했지. 미안해. 실패를 고백하는 우리에게선 존재하지 않았던 첫사랑의 냄새가 났고. 저 가파른 골목은 이제 누구의 낭떠러지인 걸까. 먼 곳에 있으면 멀어지는 것들을 바라보기 쉬웠지. 실은 네게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아. 긴 장마는 끝났어. 휴일이 있지만 쉴 수 없는 나라에서. 이제 휴일이 끝나도 결코 만날 수 없어. 조각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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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nger Than Paradise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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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니까 솔직히 말할게. 고등학교 입학 전에 병원에 있었어. 네 도움이 컸어. 내가 하는 말을 이해 못 했다거나 내 상태가 어떤지 몰랐을 수도 있지만, 네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어. 그런 병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거든. 16살에서 17살이 되는 기분을 잊은 사람들. 이 모든 얘기가 언젠가 추억이 되고, 우리의 사진들도 낡은 기념품이 되고, 모두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되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추억이 아니야. 살아있는 순간이야. 난 여기 있고 그녀를 보고 있어. 그녀는 너무 아름답거든. 이제 알겠어 내가 비참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그 순간을. 난 살아있는 거야, 일어서서 건물의 불빛들과 놀라운 풍경들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노랠 들으면서 드라이브를 할 때. 바로 그 순간 우린 무한한 자유를 느껴.
Perks Of Being A Wallflower,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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