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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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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기 인터뷰
한국의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K팝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이 들어가는지 잘 안다. 음악을 만들고 골라내는 일부터 뮤직비디오 촬영과 안무까지 이르는 방대한 프로세스를 보면 가히 노동집약적인 업계라는 말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화려한 아이돌 멤버를 내세워 무대 위 환상을 보여주는 산업인 만큼 그 뒤에 땀 흘리며 서있는 각종 스태프의 존재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애써 모른 척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금지된 욕망을 깨고 장막을 끝내 들추어보고 싶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병기다. 한국 1세대 A&R로 불리는 그는 과거 12인 걸그룹 이달의 소녀 제작을 담당하여 솔로와 유닛 활동을 수반한 독보적인 세계관으로 국내외 K팝 팬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최근에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모드하우스(MODHAUS)를 설립해 24인조 조합형 걸그룹 트리플에스를 선보이며 꾸준한 존재감을 내세우는 중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작성한 질문 내용은 대부분 “왜?”였다. 범상치 않은 기획과 전략을 시도하는 이유가 늘 궁금했던 그 인물, 정병기를 3월 강남 모드하우스 사무실에서 직접 만났다. A&R이라는 K팝의 주요 직무에 대한 설명부터 음악 업계에 몸담아온 역사와 제작 철학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묘하게 베일에 싸인 듯했던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열정과 소신을 느낄 수 있던 정병기 대표와의 대화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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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중반부터 K팝 시장 내 언급이 늘어나면서 A&R(Artist & Repertoire)이라는 직무가 사람들에게 조금씩 각인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그 역할을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이른바 '한국 1세대 A&R'로 불리는 사람으로서 정리해 준다면.
A&R이라는 일 자체가 명쾌하게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A&R의 영역을 음악으로만 두는 회사도 있고 시각적인 측��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듣는 음악'의 시대, 그러니까 내가 처음 일을 시작했던 20년도 더 된 그 시절에는 음악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조성모의 '가시나무'처럼 과거 뮤직비디오에서 유행한 드라마타이즈 형식은 아티스트 자체보다 음악에 기반을 둔 형태였다. 실제로 유명 배우가 많이 나오기도 했잖나. 나도 그때는 어느 정도 관여를 할 수는 있어 내 분야는 음악이지 그쪽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특히 지금의 K팝은 '보는 음악'이다. 과거에는 정말 음악 자체만 가지고 콘셉트를 만든다면 이제는 좋은 뮤직비디오 감독과 스타일리스트 등 협업의 규모가 늘어났다. 지금도 음악만 할 수는 있지만 내 견해로는 분리되기보다 이제는 하나로 묶이는 쪽이 맞다. 동시에 이런 확장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과는 많이 달라졌으니 새로운 이름이 필요해 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프로듀서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A&R은 프로듀서를 고용하는 사람이다. 음반의 콘셉트를 만들고 나서 어떤 프로듀서가 이 테마를 음악으로 잘 구현할 수 있을 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로 치면 A&R이 제작사고 프로듀서를 감독으로 대입할 수도 있겠다.
커리어가 굉장히 길다. 음악 업계에 발을 들인 계기부터 시작해 A&R로서 보낸 중요한 순간을 짚어달라. 원래는 PC통신에서 글을 쓰던 사람이었다. 겨우 17세였던 시기에 한창 글을 자극적으로 쓰면서 나름 유명세를 얻었고, 조회수도 잘 나오는 편이라 덕분에 잡지사 같은 곳에서 연락도 꽤 받았다. 그렇게 소소한 돈벌이를 하던 와중에 은퇴를 하고 떠난 서태지가 복귀하면서 차린 서태지컴퍼니 측에서 제의가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 그때가 20살 즈음이었으니 당연히 회사에서 막내였는데 내가 민심을 잘 읽는다 생각했는지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모니터링 업무를 하면서 기획을 도왔다.
그 후에는 가요계에서 전설적이라 할 수 있는 박근태 프로듀서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분이 개인으로 활동하면서 A&R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시기에 같이 일을 하며 기획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방향 설정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요즘 이러이러한 음악이 유행이니까 그쪽으로 가면 어떻겠냐 하는 느낌이었다. 이효리의 '애니모션' 시리즈나 아이비, 브라운 아이드 소울, 신화, 조PD의 '친구여' 등이 그 당시 작업물이다.
회사에 소속된 것은 JYP 엔터테인먼트가 시작이었다. 'Tell me' 시기 원더걸스를 처음으로 전담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A&R로서의 시각이 바뀌게 되었다. 뮤직비디오 자체의 내용보다는 멤버들이 어떻게 해야 더 멋지게 보일지를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박진영 PD도 음악을 만들 때 안무를 같이 떠올리는 분이라 새로운 접근방식을 만나게 되었다. 노래 자체도 좋았지만 사실 'Tell me'가 흥행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안무였으니까. 음악과 시각이 따로 존재하여 합쳐지는 게 아니라 처음 스케치할 때부터 총체적으로 구상하는 방식을 그때 처음 배웠다. 그렇게 JYP에서 투피엠을 거쳐 미쓰에이의 'Good-bye baby'까지 관여했다.
이후 울림 엔터테인먼트로 갔다. 그곳에서 이사로 있으면서 당시 소속 팀이었던 인피니트와 넬을 담당했고 러블리즈는 데뷔부터 'Ah-choo'까지 제작했다. 다음으로는 이달의 소녀 프로젝트를 맡은 시기 < 언프리티 랩스타 2 > 출연 이후 솔로 활동을 시작하는 헤이즈를 만나 콘셉트와 방향을 아티스트와 함께 정리했다. '비도 오고 그래서'가 1위를 휩쓸던 그 시기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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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기 대표의 K팝 제작 스타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독특한 시스템이다. 이달의 소녀는 그룹 데뷔 전 솔로 음원 프로젝트와 유닛을 거쳤고 지금 트리플에스도 유닛 체제가 핵심이다. 이런 방식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이달의 소녀 솔로 음원은 스토리텔링을 위한 도구였다. 팀이 소속된 회사가 당시 신생이었으니 쉽게 주목받는 대기업 그룹이라는 골리앗에 맞설 다윗만의 무기가 필요했고 내게 이는 세계관이었다. 지금은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K팝 내에서 절찬리 사용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거의 쓰지 않는 개념이었다. 실제 음원 플랫폼의 이달의 소녀 설명을 보면 세계관과 관���된 말이 굉장히 반복되는데 개개인과 유닛 앨범 모두 그 스토리텔링 구축의 일환이었다. 즉 형식을 위한 서사가 아니라 서사를 위한 형식이다.
그렇다고 솔로와 유닛이 단순히 과정은 아니다. 오드아이써클(ODD EYE CIRCLE)과 와이와이바이와이(yyxy) 모두 독립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첫 유닛인 이달의 소녀 1/3도 결과적으로는 리패키지까지 음반이 두 개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사실은 이후의 계획도 있었다.
그러면 트리플에스는 이달의 소녀 시스템의 완성본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식의 비교는 어렵다. 물론 나의 작업물이니 어느 정도 응용은 있겠지만 그냥 애초부터 다른 기획으로 보는 쪽이 맞다. 트리플에스의 유닛이 가진 목적은 팬들의 투표를 부각하기 위함이다. 24인이라는 많은 인원수도 이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K팝의 시스템은 모두 하향식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는데, 회사가 결정한 방식으로만 나아가서 성공만 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에 인생을 건 멤버들이 그냥 끝날 수는 없잖나. 이러한 측면에서 활동에 대해 팬들이 직접 관여하는 형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요즘에는 다인원이 맞지 않는다는 말도 사람들이 많이 하고, 유닛 체제를 복잡하다 여겨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어차피 유행은 돌고 돌기 마련이고 트리플에스는 트리플에스만의 방식을 가야 한다. 이것저것 커스텀할 수 있는 팬 참여 체제에 매력을 느낄 수 없다면 그냥 다른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면 된다. 회사 이름인 '모드하우스'도 레고 블록 같은 '모듈'에서 착안한 이름으로, 창작이 가능한 레고처럼 우리의 핵심은 커스터마이징이다. 여러 아이돌이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조합 방식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을 위한 그룹은 K팝에서 우리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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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발매는 되지 못했지만 이달의 소녀 < La Maison LOONA >도 그렇고 이번 트리플에스 아리아 유닛의 < Structure Of Sadness > 등 발라드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그 이유라면. K팝은 퍼포먼스 음악, 비주얼의 음악이다. 따라서 춤이 담보되지 않으면 K팝이 아닌 것처럼 되었지만 옛날 사람인 나는 발라드라는 장르가 한국에서 굉장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외 팬들을 사로잡을 안무가 없으니 발라드가 흥행을 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세상이다. 그렇지만 나 같은 사람은 다양한 음악을 보여주고 싶다. 특히 트리플에스의 모토는 '모든 가능성의 아이돌'인데 계속 춤만 추면 그게 무슨 가능성이겠나. 새로운 것들을 꾸준히 해야 새로운 팬도 유입될 수 있다.
여러모로 정병기는 변칙을 좋아하는 사람 같다. 재미없는 것을 워낙 싫어한다. 예상 가능한 선물은 언제나 시시하고, 드라마가 예측대로 흘러가는 부분도 필요하지만 뒤통수를 한 번씩 쳐줄 필요가 있다. 이달의 소녀 1/3에 여진 대신 비비가 포함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진은 분수의 작대기 같은 존재, 일종의 와일드카드였다. 영상회 이벤트였던 < CINEMA THEORY : Up & Line >에서 그 자리에 최리가 들어오거나, 오드아이써클의 첫 멤버로 많은 암시를 줬던 진솔이 아닌 김립이 먼저 공개된 것도 그런 이치다.
과거 이달의 소녀 멤버였던 희진, 하슬, 김립, 진솔, 최리가 모드하우스에 합류해 아르테미스(ARTMS)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프로젝트를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했는데 결국에는 그룹명으로 정해졌다. 혹시 원래 계획했던 다른 이름이 있었나 싶은데 이 또한 변칙일까. 이달의 소녀는 12인이 모여야 완성되는 법인데 덜컥 그룹 이름을 지어버리면 당시에 소송이 끝나지 않은 멤버들은 자리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생각했다. 가제는 필요했기에 이를 프로젝트라고 했으나 지금은 결과적으로 모든 상황이 종결되었으니 아르테미스가 그룹 이름이 된 것이다.
유닛 외에 트리플에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굉장히 한국적이라는 사실이다. 과거 맡았던 이달의 소녀의 판타지 세계관을 꾸려낸 사람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생소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현실 밀착형 기획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트리플에스는 그냥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팀으로 꾸리고자 했다. 세계관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팬들이 처음 이해할 수 있게 서울을 바탕에 깔아 놓았다. 물론 이를 한계로 규정지으려 하지는 않는다. 실제 에볼루션 유닛의 'Invincible'은 < 해리 포터 >같은 약간 판타지 느낌이기도 하고.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현실적인 그림을 추구한다.
트리플에스의 뮤직비디오 중 'Rising'의 복도식 아파트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데, 나는 이게 정말 일반적인 서울 사람들의 정서 아닐까 싶다. 모두가 다 부���한 동네에서 살지는 않으니까. 대부분의 아이돌 뮤직비디오는 무대 위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럭셔리한 영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나는 그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꿈의 필요성을 느꼈다. 'Rising' 마지막 장면에서 멤버들이 잠자고 있는 것도 그런 의미다. '뮤직비디오를 보는 당신도 트리플에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다. 그룹 자체가 지닌 다소 친근한 이미지도 비교적 낮은 진입장벽을 지닌 꿈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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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ing' 뮤직비디오 中
이것이 팀의 최대 강점이라 생각한다. 물론 화려한 K팝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영화 < 기생충 > 이후로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아시아권과 한국의 일상적 문화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현재, 트리플에스가 이 리얼리즘 흐름에 가장 잘 맞는 팀이 아닐까 싶다. K팝 시장의 일원이 봤을 때 앞으로 K팝은 어떻게 흘러갈까? 잘해주고 있는 다른 팀이 너무 많아서 내가 추가로 산업의 향방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다만 K팝의 문법이 정교해지다 보니 형식이 너무 굳어진 감이 있다. K팝 뮤직비디오도 컷 사이에 군무가 나오고, 또 2절에서는 다른 의상을 입는 식으로 반복되는데 이게 해외 팬들이 원하는 K팝의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다른 방식을 선호한다. 결국 세상은 얼터너티브가 바꾸니까. 꼭 마이너로 살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해야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투피엠도 투에이엠과 함께 나왔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였고. 이것이 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드하우스의 독특한 점이라면 디지털 기술과의 접목이다. NFT 포토카드 등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특별한 의미라기 보다는 그냥 수단으로 활용할 뿐이다. NFT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과 부정적인 시각을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 회사에게 NFT는 그저 기술일 뿐이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우리의 포토카드 오브젝트(Objekt)도 나쁜 쪽으로 보도되는 경우와 달리 가격 변동성이 없다.
또한 트리플에스라는 팀을 좋아하는 데에 있어서 NFT의 개념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핸드폰 내에서 보다 편안하게 카드를 보고 교환하는 기능을 위해 차용했을 뿐 유망 산업이라 블록체인을 끌어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의심은 계속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저 회사가 노력과 시간으로 증명해야 한다.
제작자로서 정병기는 주류를 아우르기보다는 힙스터에게 보다 사랑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개인으로서는 어떤 코멘트든 간에 다 좋다. 그렇지만 아이돌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나 혼자 대중의 취향을 상관하지 않고 내 음악만 만들 수는 없다. 물론 트리플에스가 지금은 비교적 소수의 사랑을 받는 중이지만 얼리어답터나 코어 팬이 결집 지금 상황도 정말 감사하고, 여기서 쭉 뻗어 나가면 변화를 일으키리라 믿는다.
실제 지금도 트리플에스 멤버들은 팬들이 기여하는 오브젝트 판매를 통해 유의미한 정산을 받고 있다. 예전처럼 몇 년간 마이너스 정산을 계속할 수 없는 시대에 멤버들도 돈을 벌어야지 아이돌이라는 직업의 재미도 느낄 수 있고 지속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나는 판도를 바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하다.
이즘의 공식 마지막 질문이다. 정병기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뮤지션이나 앨범, 곡을 알려달라. 내 음악적인 방향을 결정하던 사춘기 시절에는 많은 일본 음악을 들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음악 마니아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고 자신할 만큼 메이저에서 인디 신까지 일본의 다양한 음악을 팠다. 뒤돌아보면 중2병 같은 마음을 J팝이 투영해 주었다. 리스트는 그때의 막막하고 외로웠던 나를 위로해준 곡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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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사키 아유미(Hamasaki Ayumi) 'Love ~Destiny~': 모닝구 무스메의 프로듀서 층쿠(Tsunku♂)를 좋아했던지라 그가 만든 발라드곡 'Love ~Destiny~'는 더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댄스곡을 잘 만드는 프로듀서의 가슴 아픈 발라드다.
주(ZOO) 'Choo choo train': 댄스 크루 같은 느낌의 주(ZOO)는 쿨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이후 그룹의 멤버인 히로(Hiro)가 에그자일(Exile)을 리딩하며 일본 댄스계의 한 획을 그었으니 그 원형의 존재감이었다.
쿠보타 토시노부(Kubota Toshinobu) 'La la la love song': 아직도 이 노래의 멜로디가 다양한 형태로 리메이크되는 것을 보면 멜로디 계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엑스재팬(X-Japan) 'X': 그 시대를 관통하며 엑스재팬을 한 번이라도 안 좋아했던 소년이 있었을까? 그 화장과 무대의 카리스마, 특히 만화 창작 집단 클램프(Clamp)와의 협업이었던 'X'는 낭만이었다.
우타다 히카루(Utada Hikaru) 'Time will tell': 너무나 충격이었던 우타다 히카루의 데뷔 앨범 < Frist Love >를 한 천 번은 들었을 거다. 그중 'Time will tell'은 내게 신앙 같은 곡이 되었다. 힘들고 어렸던 나에게 시간은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진행: 한성현, 장준환, 김태훈, 손기호 정리: 한성현 사진: 모드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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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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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식? 인간이 '오래 살기 게임' 하는 동물인가”
세계 3대 요리학교로 프랑스의 ‘르꼬르동블루’(1895년 설립), 미국의 CIA(1946년), 일본의 쓰지조그룹교(辻��group校1960년이하 쓰지조)가 꼽힌다. 이 학교 쓰지 요시키(辻芳樹49) 교장은 동아원그룹이 한식 문화의 발전을 위해 2008년 쓰지조와 제휴해 만든 츠지원 개원 5주년 초청 강연을 위해 최근 방한했다.  요시키 교장은 “요리사의 가장 큰 자질은 열정과 근성, 명석한 머리”라며 “요즘 부자가 되려고 창업을 하는 셰프가 왕왕 있는데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한식 세계화에 대해선 “한식을 수출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인지, 한국 문화를 전파하겠다는 것인지 정의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인의 손맛도 중요하지만 정확한 한식 레시피(조리법)를 만들어 표준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쓰지조가 일본에서 화제가 된 것은 2007년이다. 세계적인 식당 추천도서로 유명한 프랑스 ‘미슐랭 가이드’는 그해 11월 영어ㆍ일본어 도쿄판을 발행하면서 식당 150곳을 선정했다. 이전까지 단일 도시 중 가장 많은 식당이 뽑힌 게 프랑스 파리(64곳)였다. 전 세계 음식 매니어들은 깜짝 놀랐다. 미슐랭 가이드에 나온 식당 가운데 쓰지조 출신 요리사들이 주방장을 맡은 경우가 상당수였다. 쓰지 요시키 교장은 “일본 음식을 누구라도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만들고 여기에 일본 문화를 접목해 일식을 세계화한 게 보람”이라며 “음식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결합체”라고 말했다. 쓰지조는 오사카 본교와 도쿄, 프랑스 리옹(2개)에 7개 학교, 15개 학과를 두고 있다. 어느 곳에서나 일본식의 체계화된 교육을 하고 있다. 주로 프랑스ㆍ일본ㆍ중국ㆍ이탈리아 요리를 가르친다. 학생은 현재 3500명, 졸업생은 13만 명에 달한다. 그중 한국인은 200여 명이다. 교사는 해당 요리 국가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일종의 기능대학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1~3년 과정을 거친다. 다음은 일문일답. ‘잘 버무려라’보다 몇 번, 어떻게 못박아야 -쓰지조는 체계화된 교육으로 유명한데. “우선 전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미각의 기준에 대한 풍토가 있다고 본다. 쓰지조는 음식 맛을 봤을 때 이상할 경우 잘못된 점을 찾아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교육한다. 맛에 대한 기준과 표준을 정립하는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이든 작은 주점이든 간에 어떤 음식점에서 일해도 조직의 일원으로서 일할 수 있는 요리사의 자질을 키워야 한다. ‘더 맛있게 조리할 방법은 없을까’를 늘 고민하는 사람이다. 단순한 노하우나 기술, 많은 레시피를 배우는 게 아니다. 요리를 해석할 뿐 아니라 어떤 곳에서도 적응해야 한다. 아울러 요리 장인(匠人)을 키우는 ��도 중요한 사명이다.”  -한국은 손맛에 따라 김치 맛이 다르다. 이런 감각적인 부분은 계량화가 어려운데. “좋은 질문이다. 일본 요리도 비슷하다. 계량화해도 똑같은 맛을 내긴 어렵다. 몇 그램(g) 이런 식의 데이터화를 해도 식재료의 차이나 먹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요리를 계승하는 것은 힘들다. 한국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숨기는 문화가 강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레시피 형태로 체계화해야 한다. 김치건 나물이건 ‘잘 버무려라’는 식이 아니라 몇 번, 어떻게 한다는 방식이다. 미각의 계승은 만든 사람보다 먹는 사람의 평가라는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돼야 발전한다. ‘프로 요리 비평가’가 점점 줄어드는 게 안타깝다. 미슐랭 가이드는 비평이 아니라 맛집 소개다.”
-한국은 ‘빨리빨리’라는 효율성이 최우선이다. 스시를 배우면서 칼 가는 법은 대충하고 회부터 뜨자고 덤빈다는데.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일본과 같은 교육방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나라에 맞는 방법이 중요하다. 일본은 칼 다루는 법을 기본으로 시킨다. 날을 가는 것부터 회를 뜰 때 칼날의 각도 같은 것 등 1, 2, 3의 순차적인 방법으로 진행한다. 한국은 1, 5, 6, 7 이런 단계의 유연한 방식이 적합한 듯하다.”  -한식 세계화에 대한 조언은. “한국은 식문화가 생활의 일부라 미식이 자연스럽다. ‘먹는 것’ 그 이상으로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고민을 해야 한다. 프랑스 요리가 세계화하면서 식문화 개혁이 일어난 게 불과 50년이다.” -요리 장인은 어떤 사람인가. 스시를 만들려고 밥을 손으로 쥘 때 밥알이 100개로 일정하면 장인인가. “배움은 끝이 없는 논스톱 과정이다. 항상 더 나아지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 장인이다. 스시 밥알이 100개라는 결과물로 평가하긴 어렵다. 중요한 건 100알이 넘거나 부족해도 항상 일정한 맛을 내야 장인이다.” -일본 의사가 쓴 하루 한 끼(저녁)만 먹는 건강책이 인기인데. “그건 의사의 견해일 뿐이다. 쓰지조는 생리학적으로 음식을 통한 행복을 선사하고자 한다. 인간은 오래 살기 게임을 하는 동물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건강을 위해 맛없는 것을 먹으며 10년 사는 것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2시간의 행복을 느끼는 걸 선택하겠다. 요리를 통해 무엇인가 배운다고 느끼는 것도 행복의 일부다. 아무런 감정 없이 하루를 사는 것보다 요리를 통해 느끼고 생각하게 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미식(美食)의 의미를 생각한다.” -한국에서 요즘 ‘셰프’가 인기다. 요리 유학도 붐인데. “요리사 인식에 대한 과도기다. 셰프가 돈을 잘 번다는 환상을 갖고 유학을 다녀와 오너셰프를 꿈꾸는 경향이 있다. ‘돈 때문에 요리사가 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우선 꿈꾸는 ‘롤모델’을 세워라. 언론에서 화제가 되는 셰프는 극소수다. 그들이 모델이 아니다. 돈 버는 수단으로 트렌드에 휩쓸���는 요리사는 실패한다. 언제나 배움의 자세로 연구하는 겸허한 사람이 최상의 셰프가 될 것이다.”
-쓰지조는 가난해도 요리 열정이 있다면 진학이 가능한가. 1년 교육비는 214만 엔(약 2400만원)이라는데. “매년 100여 명이 장학금을 받는다. 열정이 있다면 고등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입학할 수 있다. 교육비는 비싼 편이지만 확실한 시스템 아래 책임감을 갖고 인재를 키워 낸다고 자부한다. 교육방식도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게 아니라 학생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상호 간 균형이 중심이다. 선생님은 학생이 어떤 롤모델을 세우고 어떤 분야, 어떤 직장을 갈지를 도와준다. 학생의 60% 이상이 구체적인 요리 장르를 정하지 못한 채 시작한다. 다양한 교육을 통해 진로를 고민하면서 결정하게 된다.” '말하지 말고 음식 집중하라' 가정교육 -첫 직장은 금융회사였던데 가업을 승계한 이유는. “열 살에 영국 유학을 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28세)에 돌아왔다. 쓰지조가 망하게 둘 수 없었다. 다행히 미술사 전공과 금융업 6년 경험에서 경영을 배웠다. 어릴 때 아버지는 ‘너의 한계를 알아라’고 가르쳤다.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미식의 이해를 넓혔고 이를 상업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배웠다. 어른이 돼서는 ‘상대방에게 은혜를 준 것은 잊어버리고 은혜는 평생이 걸려도 꼭 갚아라’고 했다. 선친은 요리에 대해선 ‘모든 요리에는 만드는 사람의 품격이 담겨 있다’고 했다.” 선친은 요미우리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쓰지 시즈오(辻靜雄)다. 그가 80년 영어로 쓴 『일본 요리(Japanese Cooking-a Simple Art)』는 서구인들의 일본 요리 입문서로 통한다. 30대 초반 처가의 요리학교를 물려받아 쓰지조를 설립했다. 그는 아들에게 유학을 통해 세계적인 안목에서 일본 요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아들에게 어떤 교육을 하나. “맛난 음식을 먹을 때 ‘말을 하지 말고 음식에 집중하라’는 게 유일한 가정교육이다. 정 자세로 앉아서 음식에 집중해야 미각이 최대한 살아난다. 말을 하면 미각의 일부를 잃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식사를 할 때 음악을 들어도 미각이 달라진다.” 쓰지 요시키 1964년 일본 오사카 출생. 열 살 때 영국 유학을 가 중ㆍ고교를 다녔고 미국 롱아일랜드대에서 르네상스 미술사를 전공했다. 이후 미 증권사와 일본 다이와은행 연구소에 근무했다. 93년 쓰지조 이사장과 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김태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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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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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어 만봉 스님 인터뷰
만봉스님<봉원사 주석>
-수천장씩 초를 그리듯 믿음 다져야-
-무슨 일이든 계산 앞세우면 헛일돼-
-지극한 신심이 부처님세상 만듭니다-
“자나깨나 부처님 상호만 생각
線 하나하나 禪으로 여긴 붓질
金魚의 구도정신이자 법문”
*약력
·1909년 서울 生
·16년 금어(金魚) 김예운화상
문하 입문
·24년 불교전문강원 수료
·26년 봉원사 출가 금어 자격 취득
·72년 인간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지정 태고종 서울교구 종무원장
·75년 서울 봉원사 주지 역임
·78년 일본 전시회
·89년 경복궁 전통공예관
특별기획전
·91년 일본 동경 경도 등 순회전시
·98년 은관 문화훈장 제127호 수훈
◇봉원사 극락전 단청을 완성하고 1956년 10월에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만봉스님
오는 10월에 90세 기념 전시회를 엽니다. 나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다보니 확실한 삶의 비법은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는 겁디다. 요즘 세상이 어디 호락호락합니까. 나 역시 그림을 선별하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고 있습니다. 절이나 전시회 등에서 불화를 접하게 되는 불자들도 그냥 건성으로 보면 안돼요. 정신 집중을 하고 그림 속의 부처님을 느끼고 보살님을 접해야 합니다.
나는 20살이 못돼서 출가했어요. 절에 들어온 것은 여섯살 때 일이지만 그 때야 뭘 알고 절에서 살았겠습니까. 그저 명이 짧아 절에 가야만 장수할 것이라는 지나가던 객승의 말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요. 그림에 취미가 있었던 내가 눈에 들으셨던지 여덟살 때부터 당시 유명한 금어(金魚)셨던 예운스님의 제자가 돼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공부할 때에는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어렵다거나 힘들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안해봤습니다. 그저 불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지요. 예운스님이 시키는대로 꾸준히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생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인연이기보다 전생 인연을 이어가는 길을 그 어린 나이에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나는 전생에도 불화만 그렸을 것 같아요. 그림공부는 20년 정도 했고 그 후에 자작을 시작했지요. 자작그림을 그린지만도 60년이 넘습니다. 무슨 일이나 무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오직 그림그리는 행위 그 자체에만 전념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이 나옵니다.
스승 덕분에 10년동안 그림공부를 마치고 마침내 열여덟에 금어가 됐습니다. 하지만 예운스님은 내가 미덥지 않으셨던지 스물이 넘어서야 비로소 금어로서의 일을 허락하셨어요. 금어가 되면 10여 단계로 진행되는 단청일을 지휘할 수 있는데 금어가 되고서도 2년이 지나서야 금어의 일을 맡기셨던 거지요. 틀림없이 너무 어린나이에 금어가 돼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로 생각됩니다.
금어가 되면서 정식으로 이곳 봉원사에서 출가했습니다. 내게 수행은 불화를 그리며 마음다스리는 것이었지요. 그림그리는 것에 원래 취미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하루종일 무릎꿇고 엎드려서 똑같은 그림을 수천장씩 그리는 것이 재미있을리 있겠습니까.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신심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지요. 그림공부를 하면서 용맹정진도 많이 했습니다. 불화를 그리는 제자들에게 용맹정진을 시키지는 않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있어야할 경건한 마음과 신심은 강조합니다.
불교전문강원에 들어가 <초발심자경문> 등 글공부를 조금하고 범패를 배웠습니다. 봉원사 범음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월하스님께 직접 지도받았지요. 그러다보니 1966년 창립된 옥천범음회에서 6년동안 회장직을 맡아 1972년 영산재보존회가 생길 때까지 회장을 했었지요. 범패공부는 영산재 짓소리까지 배웠습니다. 범패공부를 한 것도 수행자로서 근본적인 원리를 깨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글공부도 그렇구요. 이후엔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습니다. 내 근기가 그림이거든요.
72년 나는 단청장이 되었습니다. 불화는 탱화위주인데 단청이 쉬워 보여도 단청을 하기 전에 불화를 배워야 합니다. 시방초라고 초등과에 해당되는 그림인데 이 시방초를 3천장 이상을 그려야 중등과에 해당하는 천왕초 그리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이 천왕초는 사천왕상을 3천장 그리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부처님을 그리는 여래초로 넘어가는데 이 역시 3천장을 그려야 합니다. 탱화나 단청에 쓰이는 색깔은 20여가지정도 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몇천장씩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는 이 일은 이론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계산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일이라 여겨 하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은 불화 그리는 일에만 속하는 일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에도 꼭 들어맞는 이치입니다. 내가 그림을 배우면서 9천여장의 초를 그린 것이 어디 이론으로 될 일입니까. 스스로의 노력 속에서 떠지는 눈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나이에 더러 꾀도 생기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생겼지만 그래도 그 일에 왠지 마음이 끌려 견디다 보니 10년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은 나에게 색과 선을 보는 눈을 키워 주었던 것입니다. 무슨 책을 보며 체계적인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세상사는 일도 이와 같은 게 많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꾸준한 실천만 있으면 될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걸 잘 분별해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화 그리는 일이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은 돈 같은 재물의 계산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재물의 계산이 앞서서도 안됩니다. 모든 불사는 크건 작건 간에 시키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 그리고 보는 사람이 모두 한마음으로 간절한 불심을 가져야 되는 것이니까요. 부처님의 회상을 그리고 당우를 장엄하는데 재물의 계산이 앞서면 이미 그 일은 망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딴마음을 품고 그림에 임하는데 색이 잘 나올리 없고 선이 힘차고 곧고 부드러울 리가 없습니다. 지극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번뇌가 사라진 청정한 마음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계산으로 되는 일이 아니란 겁니다. 부처님 상호를 그리는 선(線) 하나하나를 선(禪)이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붓질이 나에게는 선수행과 다를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화폭에 무엇을 그릴 것이란 계획 이외의 어떤 계산도 필요없는 것입니다.
하루종일 화실에서 불화에 매달리다 보면 불자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 드뭅니다. 법문같은 것도 따로 하지 않지요. 법문이야 잘하시는 법사스님들이 하셔야지요. 깨달음이니 화두니 하는 것보다는 그저 나한테 주어진 그림을 잘 그리려 애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을 더욱 신비하고 아름답고 자비롭게 보이도록 그려낼 것인가를 자나깨나 궁리하고 매진하는 것이 내 법문입니다. 불화를 조성하는 일은 백척간두에 선 수행자와 같은 구도자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루종일 부처님 그려모시고 채색해야 하는데 부처님에 대한 신심과 구도정신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불화에 첫 입문한 사람은 수행자의 초발심같은 끝없는 인내와 수행이 필요하지요.
불화나 단청을 하는 동안은 늘 부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불화를 조성할 때면 잠을 잘 때도 꿈 속에서 극락세상에 있는 여러 부처님들을 친견하고, 지옥문 앞에서 지옥에 오는 중생들이 한사람도 없을 때까지 자기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원을 실천하고 있는 지장보살을 만나고, 때론 지옥에서 자기 어머니를 구해낸 목련존자를 친견하기도 하지요. 자면서도 깨어서도 부처님 상호만을 생각하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 끝임없는 정진 끝에 불화라는 화두가 이제서야 조금씩 잡히기 시작하고 있어요. 가는 붓을 들어 부처님의 눈을 그려넣는 화룡점정의 순간, 한껏 위엄을 갖추었으면서도 자비로운 부처님이 환한 눈웃음을 지으며 화폭 위에 나투십니다. 그 다음은 나의 몫이 아니예요. 다음의 몫은 그 부처님을 향해 경배드리는 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떠나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린 불화들 중에 애착가는 작품이 뭐냐고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부처님 마음을 따라 부처님 마음으로 조성해온 불화는 모두 한결같아 보입니다. 작품성이니 뭐니해서 따지는 것은 모든 사물에 시비와 우열을 가리려는 인간의 헛된 사량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처님 저 부처님 하면서 그 순위를 정할 수 없듯이 전국 사찰에 봉안한 수많은 불화가 제각각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떻게 분별심을 갖고 이렇다 저렇다 평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현대적 불화라고 자기마음대로들 그리는데 절대로 안되는 일입니다.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쓸데없는 짓이예요. 불화는 모두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것들입니다. 거기에 어찌 현대적이란 말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스승들이 해온 그대로 이어가며 장엄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할 일이지요. 또 그렇게 고이 물려줘야 하구요.
공부를 하려고 들어오는 이들에게는 원만히 이뤄놓고 나가야 한다고 이르지요. 하지만 진득하니 공부하는 이들이 드물어요. 한참하다보면 내가 능히 할 것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제 능력 발휘조차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내 밑에서 2∼3년 공부하다가 나가서는 죄다 제자랍시고 간판걸고 그림을 그리더라구요. 최소 10년은 공부해야 기본이 생기는 겁니다. 시방초며 천왕초를 수천장씩 그리는 이유는 단순한 연습만이 아닙니다. 근데 요즘 사람들은 그걸 못참아 하더군요.
밑그림은 전대 스승들이 그려놓은 것을 모방하는 겁니다. 근본원리로 밑그림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가지고 있는 밑그림 중에는 1백년이 더 된 것들도 있습니다. 밑그림은 원래 전대 스승에게 물려받아 교재로 열심히 익히고 고이 간직하다가 제자에게 물려줄 때는 똑같게 넘겨 줘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물려받을 사람도 별로 없을뿐더러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밑그림을 팔아먹기도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대대로 물려야 하는 것들을 돈을 주고 파는 것인지 그냥 주는 것인지는 몰라도 간직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안타까운 일은 물려받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고 물려받는다고 해서 굳은 심지를 가지고 지켜갈 이도 얼마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그렇지만 단청과 불화는 신심이 밑바탕이 된 정성이 제일입니다. 수십 수백년동안 사찰을 장엄하는 단청과 불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늘 경배하는 성스러운 대상인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큰일이지요. 옛 불화나 단청을 보면 세월 때문에 빛은 바랬어도 며칠 전에 그린 듯 생생한 기(氣)가 살아있습니다. 그만큼 지극한 신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기교만 중시하고 있는 듯해요. 혼이 배이지 않으면 아무리 잘 그렸어도 죽은 그림일 뿐입니다. 불화를 그리기 전에는 목욕재계와 좌선으로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일심이 돼야 합니다.
내가 평생 살아온 봉원사의 단청 탱화는 모두 내손으로 그려 모셨습니다. 비구니사찰인 보문동 보문사도 20여년 걸려서 완성했지요. 조계사 단청, 표훈사, 유점사, 마곡사, 도선사, 봉은사, 백련사, 천축사 등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제 손이 닿은 사찰이 전국에 많지요. 제가 평생 그린 불화가 몇 점인지도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수만점은 될 겁니다. 절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 경복궁 경회루, 남대문, 종로 보신각 등 고건축의 단청도 했지요.
불사를 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금어들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어로서 어떤 불사에 동참하여 맡은바 일을 하는 것도 공덕이고 그 작품을 누군가 보고 발심할 것이니 남의 환희심을 자아내게 하는 것도 큰 공덕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심입니다. 나같이 불화나 단청을 하는 사람과 미술가의 차이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나보고 그냥 화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거든요. 황송하게도 ‘금어’라 불��주고 ‘단청장’ ‘불화가’라 불러 주는데 그 의미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미술가 화가와는 아주 다릅니다. 예술을 하려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지극한 신앙심을 발휘해 그 의미를 새겨넣고 보는 사람에게 환희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어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신앙심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거기에 다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노력이란 수행으로 받아들여도 됩니다. 불자는 생활하는 모든 것이 다 수행이니까요. 곳곳에서 보여주는 불자들의 지극한 신심과 노력이 이 세상을 부처님 세상으로 만드는 겁니다.
정리=강지연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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