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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님포매니악 답사기
기 - 님포매니악을 처음 접한 것은 트위터 타임라인에 올라온 짧은 한 줄짜리 트윗을 보고나서였다. ‘문제적 감독으로 소문난 라스 폰 트리에의 색정증 환자 조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제대로 한 편도 본 적이 없고, 그가 누군지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지만 ‘색정증’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묘한 아우라가 궁금했다. 호기심에 못 이겨, 초록 검색창에 색정증을 쳤다. 검색결과를 보고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승1 – 하지만 님포매니악은 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드문드문 유튜브에 30초 남짓한 클립이 올라오긴 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그것’과는 거리가 ��었고, 네이버 영화에도 새로운 정보가 올라오지 않았다. 님포매니악 타이��의 () 마크를 G모 인터넷 쇼핑몰이 영악하게 베껴먹을 때까지도 잠잠했다. 간간히 주연배우 샤이아 라보프가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받은지 20분만에 자신의 성기를 찍어 감독에게 보냈다는 존나게 관심없는 언론플레이만 들려오던 중, 한국의 한 수입사가 님포매니악을 수입했다는 소식과 3월경 미국, 유럽 등지에서 2개의 파트로 나눠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러닝타임은 2개의 파트를 합쳐 ‘무려’ 4시간 30분이고, ‘엄청난’ 수위의 베드신이 등장한다는 소식도 함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스터가 공개됐다.
승2 – 샬롯 갱스부르의 입주름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라. 낯설지만 앳된 외모로 오르가즘을 표현하는 미아 고스의 모습을 보라. 제 버릇 개 못 주고 허세 가득한 표정을 짓는 샤이아 라보프나 고속도로를 지나느라 약 3시간 정도 오줌을 참다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휴게실을 발견하고 빛의 속도로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뇨르가즘을 느끼는 듯한 제이미 벨이나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우마 서먼을 제쳐두고라도, 이 색기발랄한 포스터는 내 호기심을 더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전1 – 해외에선 3월에 개봉을 했다. 한국은 아직 개봉시기에 대한 정확한 발표가 나지 않을 시기였다. 왓챠를 통해 해외에서 먼저 영화를 본 이들의 리뷰가 올라왔다. 어느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충격적 비주얼이다,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내용 등 여러 리뷰가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백 명이 쓴 리뷰보다 내 눈으로 확인하는 영화가 더 정확한 법이다. 손꼽아 개봉일을 기다리던 중,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친구가 토렌트 파일로 <님포매니악>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솔깃했다. 한국엔 언제 개봉할지도 모르고, 수위가 지나치게 높다면 영등위가 장면 일부를 잘라낼 것이 자명했기에. 하지만 훼손되지 않은 원본파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갈등에 빠졌다. 그 갈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의 한마디로 해결되긴 했지만. “야, 근데 자막이 없어.” 자막이 없다는 그 말은 개봉 전에 님포매니악을 보려던 순간의 욕망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너나 보라고 말을 하자 친구는 갸우뚱했다. “왜? 너 어차피 ###@%&$@&& 아니야?” 맞다. 그거 아니었으면 님포매니악에 관심조차 안 가졌을 거다. 하지만 자막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크다.
딴 얘기 – 안타까운 완성도 때문에 한국 에로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유난히 아끼는 작품이 하나 있다. 작년에 개봉...? 출시...? 배포...? 아무튼 작년에 나온 공자관 감독의 <젊은 엄마>다. 80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한국 남성들이 그간 가져왔을지도 모르는(나는 아니고) 성적판타지를 재치있게 묘사한다. 과외선생님, 신입생, 그리고 장모까지. (제목의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고 장모다.) 내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좋아하는 이유는 그간의 에로영화들이 그저 벗겨놓고 똑같은 앵글에 영혼없는 대사로 시간도 허비하고 내 영혼도 허비하게 만든 것과는 달리, 특유의 B급 정서를 유지한 채, 오묘하게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내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감독의 ‘허풍’이라는 작품도 좋아한다.) 까놓고 말해서 단순히 섹스신을 원한다면 여섯 혹은 일곱 자리의 알파벳+숫자 조합으로 만들어진 품번을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 오만가지 야동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다.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에디슨의 전구 발명 다음으로 위대한 토렌트의 발명으로 언제 어디서나 세계 각국의 야동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맥락 없이, 혹은 터무니없는 스토리로 그저 벗기기에만 열중하는 야동은 말초적 신경을 자극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반면, 치밀하게 짜인 스토리의 에로물은 조금 덜 야하더라도 단순한 야동과는 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조금 더 몰입하게 되고, 조금 더 상... 흠.. 아무튼. 자막 없는 토렌트판 파일을 거부한 이유도 그거였다. 전후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관람하는 <님포매니악>은 한낱 서양 야동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전2 – 결국 유혹을 참아내는데 성공했고 어제 극장에 가서 님포매니악 VOL.1을 관람했다. 상영관엔 총 4명의 관객이 있었다. 마치 짠 듯이 가장 먼 동선으로 멀리멀리 떨어져 앉았다. 전부 혼자 온 관객뿐이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조(샬롯 갱스부르)를 셀리그먼(스텔란 스카스가드)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정신을 차린 조는, 자신이 색정증 환자임을 밝히고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5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야기는 대체로 흥미진진하다. 구전설화를 듣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상상치도 못했던 결말로 달려가는 미스테리 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2인1역인 스테이시 마틴과 샬롯 갱스부르가 전혀 닮지않은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크게 거슬리지는 않고, 오히려 거슬리는 부분은 지나치게 상징을 남발하며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연출이다. 피보나치 수열, 정선율 등의 복잡한 개념을 섹스에 대입하는 것에 피로감을 느꼈다. 그것 말고도 이미 충분히 피로한데. 하지만 3+5 자막과 주차 씬에서의 각도 자막은 웃겼다. 유머가 곳곳에 숨어있어 그나마 다운된 톤의 영화에 질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당신들의 호기심을 풀어주자면 <님포매니악>은 포스터가 제일 야하다. 아니, 제일 섹시하다. 노출은 물론 세지만, 야한 것과 섹시한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아직 VOL.2를 보진 않았지만 포스터에서 풍겨 나오는 섹시한 이미지가 1시간 50분 내내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여기엔 고결하신 영등위 여러분의 지침에 따라 순간순간 등장하는 블러 처리 탓도 있다.) 그리고 포스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섹스를 하진 않는다. 힌트를 좀 더 주자면 이 영화는 철저히 ‘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또한 내가 극장에서 영화를 본 이래 가장 충격적인 비주얼이 등장하기도 한다. 미리 알려주진 않겠다. 나만 당할 순 없으니까.
아무튼 영화는 길고 긴 조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전체 분량 중 가장 섹시한 장면에서 막을 내린다. 2편도 와서 보라는 거다. 너무 오묘한 지점에서 끝나는 바람에 2도 보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당장 보고싶다. 지금쯤이면 한글 자막이 나오지 않았을까? (굿다운로더 캠페인을 지지합니다.)
사족1 - '결'이 없는 이유는 아직 vol.2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족2 - 블러 처리된 한국판 포스터는 개똥이다. 영등위 X먹어라.
사족3 - 맥스무비매거진에서 영화인들과 님포매니악 패러디 포스터를 찍었다. 양익준 감독의 겨드랑이를 보고 나니 입맛이 돌지 않아 저녁을 굶었다. 밥값 아끼게 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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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를 읽고
1. 어쩌면 박현욱은 일부다처제와 결혼제도에 대한 돌직구를 던지기보다는 한국 남성의 참을 수 없는 찌질함을 그리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치 홍상수 영화를 활자로 대한 듯.
2. 동명의 영화에 나온 손예진의 잔상이 남아 읽기가 수월했다. 인아가 무슨 말을 하든 손예진의 얼굴을 대입하면 수긍이 갔음.
3. 모노가미, 폴리아모리 같은 어려운 용어는 모르겠고, 평생 한 사람하고만 이어가는 결혼생활은 정말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
4. FC 바르셀로나의 역사를 줄줄 꿰고, 프리랜서임에도 일이 끊기지 않고, 배려심 넘치는 여자. 이 소설은 판타지다.
5. 벗겨졌다가 다시 생기고 또 벗겨졌다가 또 다시 생긴다. 뫼비우스의 콩깍지. 짠하면서도 대견한 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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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 트라우마
초등학교에 다닐 때, Y라는 아이가 있었다. 어눌한 말투와 기이한 행동(ex- 우유에 밥 말아먹기, 난데없이 큰 소리 지르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은 Y를 조금씩 피했다. 소위 일진들은 그 아이에게 돈을 뜯거나 폭행을 가했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말리지도, 그 행위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직접적인 가해를 가하지 않았으면서도 왕따를 당하는 Y에 대한 죄책감은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사과를 하려고도, 그 아이의 말을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Y와 엮이는 순간, 내가 또 다른 Y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구의 친구’도 되기 힘들었던 Y는 기나긴 왕따를 당한 이후, 나와 다른 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5년 전,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수능 공부에 한창일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어눌한 목소리로 “그거 OO 핸드폰 아니에요?”라고 말했고, 나는 OO 맞는데 누구시냐고 되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던 그 사람은 Y였다. 며칠 후 군대에 가게 됐다며 초등학교 때 아이들을 오랜만에 만나려고 하는데 나도 꼭 나와달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나는 Y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고, 서로 다른 중학교를 가면서 거의 10년 간 연락이 끊긴 상황이었다. 직접적인 왕따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방관자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던 나를 보고 싶다는 말이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무서웠지만 당시에는 독서실 이외의 외부활동이 전혀 없었던 터라 잠깐 나가서 얼굴이라도 보는 일이 힘든 것은 아니었기에 알았노라고 이야기한 후 Y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만나기로 한 당일이 됐다. 집을 나서는 순간엔 오래간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독서실에 앉아서 내내 생각을 해봤지만 Y의 만나자는 부탁은 긴 세월의 회포를 푸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자신의 억울함을 역으로 해코지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 같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수없이 전화벨이 울렸지만, 나는 Y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제 <한공주>를 봤다.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만든 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분노의 감성은 얼마 전 감상했던 <방황하는 칼날>의 그것과 유사했다. 잘못한 것 하나 없는 피해자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하고, 가해자들을 엄히 벌할 법 집행 체제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데다, 핏줄이 개입되는 순간,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악인이 되어버리는 부모들의 내새끼 우쭈쭈리즘까지. 이 지옥도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던 공주의 선택은 차마 구제되지 못한 이 땅의 수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의 절망감을 보여주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공주만큼이나 내 머릿속을 계속 휘저었던 캐릭터는 은희(정인선)였다.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강제 전학을 당한 공주에게 가장 먼저 마음을 열었던 사람이다. 공주의 장점을 공주 자신보다 더 정확히 파악했고, 내재해있으나 분출되지 못한 그녀의 꿈을 대신 이뤄주려 노력했다. 가해자 학부모들이 공주의 학교에 찾아와 난동을 피울 때도 먼저 나서서 그녀의 편에 섰던 유일한 사람이 은희였다.
끝내 공주가 겪었던 일은 만천하에 공개되었고, 공주를 딸처럼 거둬주었던 전 담임의 어머니는 주변의 눈 때문에 그녀를 집에서 내보냈다. 탄원서를 대가로 돈을 챙긴 아버지에게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사건의 뒷수습에 골머리를 앓는 전 학교 담임도,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한 엄마에게도 찾아갈 수 없는 공주에겐 은희만이 유일한 기댈 곳이었다. 결국 공주는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성폭행 영상을 눈으로 접한 은희는 공주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허울 좋은 말에 어퍼컷을 날리는 이 장면을 보며 가슴 속에서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보다 친구가 필요했을 순간에, 갈 곳을 잃어버린 공주가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리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끝내 마주하게 될 장면이 먼저 눈앞에 그려졌다. 물에 빠진 공주를 비추는 화면 위로 ‘한공주! 한공주’ 라는 응원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 외침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공주에게 닿지 않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가해자들이 몸과 마음에 준 상처와 친구가 방관자로 변하는 순간의 절망감은 무엇으로도 채워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토록 죄책감이 밀려온 것은 나 자신이 비�� 앞의 방관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행동으로 인해 Y가 받았을 상처를 봉합할 수 있었던 자리가 마련되었음에도 쉽사리 먼저 마음을 열지 못했다. 반가움보다 해코지가, 그리움보다 원망이 앞설 것이라고 생각���다. 공주의 전화를 끝내 받지 못하는 은희를 보며, 그 행동을 마음속으로 욕하면서도,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주체할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Y가 주선한 그 모임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중에 다른 친구들에게 전해 들었다. 눈살 찌푸릴 일 하나 없는 즐거운 자리였다고 했다. 못내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다시 Y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휴대폰을 정지했고 그 사이에 Y는 군대에 갔다. 다른 친구들은 Y에게 군대 가기 전 마지막 문자를 받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봐서 너무 즐거웠고 다음에 휴가 나오게 되면 꼭 다시 보자고.
각자의 군입대 시기가 꼬이고 연락처가 바뀌면서 다음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Y에게 사과를 하지 못한 셈이다. <한공주>를 보고 집으로 걸어오는 수십 분간 끝없이 Y에 대한 생각이 맴돌았다. 집에 들어와서도 잠이 오지 않아, 흔하지 않은 Y의 이름을 페이스북으로 검색해봤다. 몇 명의 계정이 떴지만, 내가 아는 Y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페이스북에 Y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편으론 아쉬움이, 한편으론 안도감이 밀려왔다. 죄책감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지금의 이 감정을 고이 간직해서 언젠가 Y를 만났을 때 진심의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해보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왔을 때 이전처럼 그 자리를 피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하지만 <한공주> 카피처럼 Y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내가 Y와의 만남을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만큼 이전의 내 행동이 죄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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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탈모 Live
불알친구 중에 K라는 녀석이 있다. 본인은 잘생겼다고 주장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호머 심슨과 전 국가대표 축구감독 본프레레의 애매한 경계에 놓인 외모를 지녔다. 타고난 머리가 비상한 탓에 이름만 들으면 알 대학교에 갔고 얼마 전엔 영국까지 다녀온 ‘유학파’다. 모든 면에서 자신감이 출중한 탓에 당당하게 살고 있는 친구지만 그런 K에게도 치명적인 ���플렉스가 있다. 바로 머리숱. 새끼손가락으로 결만 타도 두피가 훤히 보이는 앙상한 머리숱 탓에, 실수로 머리카락이 한 올이라도 떨어지면 황급히 주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아이였다. 반면에, 나는 한 구멍에서 3,4가닥이 나오나 싶을 정도로 울창한 아마존 머리숱의 소유자였다. 머리를 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풀어 오르는 머리숱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 또한 100만 탈모인이 듣는다면 집단적으로 봉기를 일으킬 정도의 배부른 소리다. 그러니 풍성한 내게, 빈약한 K는 좋은 놀림거리였다. 내 머리는 언제고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머리를 자른 지 한참이 지나도 머리숱은 이전만큼 자라지 않았고, 샤워를 하면서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보면 이마가 약간 넓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브랜드 메트로시티의 로고였던 M자가 맥도날드 로고의 M자로 변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일 거라고 믿고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너 요즘 머리가 왜 그렇게 많이 빠지냐? 너만 씻고 나면 머리카락이 한 가득이야.”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스파이더맨의 거미줄만큼이나 쫀쫀하고 탄력성 좋던 내 머리카락이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수십 년째 탈모인인 아버지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심각한 수준일 터. 재차 이마를 확인해봤다. 확실했다. 내 머리는 더 이상 고급브랜드 메트로시티의 M이 아니라 정크푸드 맥도날드의 M이었다. 경기침체에 빠진 앞머리를 보며 기분이 우울해졌다.
남자에게 머리는 중요하다. 목부터 발끝까지 명품 브랜드를 차려입은 남자가 전두환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샤이니의 뺨따구를 후려갈길 정도로 스키니한 남자의 정수리에 양궁 과녁판처럼 층이 지어져있다고 상상해보라. 결국 남자의 완성은 머리다. 대륙을 씹어 먹던 한류스타들도 군 입대를 위해 머리를 짧게 깎자 그냥 대륙인으로 전락한 사례를 우리는 흔히 봐왔다. 심지어 ‘마녀사냥’에는 탈모 방지를 위해 자신의 성욕까지 포기하며 소팔메토를 먹는 남자의 이야기도 나왔다. cm도 아닌 mm 단위로 네 머리가 기네 내 머리가 기네 투닥투닥 싸우는 군인들만 봐도 그렇다. 남자에게 머리란 자존심이고 남겨두고 싶은 유산이다. 머리카락이 줄어들면 무력감이 밀려오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우울과 분노로 표출된다. 그러니 당연히 탈모는 남자 인생의 적이라 볼 수밖에.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에도 탈모로 인해 인생이 망가진 남자가 나온다. 맥스(제이미 폭스)는 오스코프 사에서 일하며 뉴욕 전력망을 설계할 정도로 유능한 남자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음에도 사람들에게 무시 받으며 투명인간처럼 산다. 자신감이라고는 일절 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 그를 보면 참 안타깝다. 근데 그가 왜 그렇게 된 걸까? 바로 탈모 때문이다. 죽을 뻔 했던 순간에 스파이더맨(앤드류 가필드)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 근데 그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감사의 표시도, 안도의 한숨도 아닌 머리 매만지기다. 얼마 안남은 머리카락이 빠졌을까봐. 엘리베이터에서 그웬(엠마 스톤)과 마주쳤을 때 인사를 나누며 그가 한 행동은? 당연히 머리 매만지기다. 얼마 안 남은 머리가 가르마를 이상하게 탔을까봐. 태어났을 때부터 맥스가 소극적인 사람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탈모 때문에 자신감을 잃었고, 자신감을 잃어서 소극적으로 변했으며 사람들과 멀어지게 됐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사고 후에 일렉트로로 변한 맥스가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그게 다 얼마 안 남은 머리마저 다 타고 없어져서 그런 거다. 해리 오스본(데인 드한)도 그린 고블린이 되면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가 전방 탈모다. 또 다른 악당 라이노(폴 지아마티)도 마찬가지다. 얘는 처음 나올 때부터 머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오프닝 때부터 밑도 끝도 없이 분노한다. 왜 그가 악당으로 변모했을까? 탈모로 인한 대인관계의 축소와 주변 사람들의 편견으로 인해 사회적 반감덩어리의 인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그렇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는 탈모인의 분노를 표현한 뉴에이지 슈퍼히어로 영화다. 탈모에 대한 사회적 인프라와 복지 체계를 갖추지 않는다면,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위 이야기는 농담이지만 사실 난 정말 탈모가 무섭다. 군 입대 전날 머리를 밀고 집에 들어갔을 때, 몇 주간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엄마가 처음으로 웃었다. 말은 잘 어울리고 이쁘다고 했지만, 그 슬픈 와중에 웃음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삐져나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짧은 머리 혹은 벗겨진 머리로 중년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게 현실로 다가온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벗겨진 머리를 한 원빈이 김광규와 도플갱어가 되는 짤방을 봤다. 원빈도 그러한데 만약에 내 머리가 벗겨진다면 어디까지 다운그레이드 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결국 난 피할 수 없으니 일단 막아라도 보겠다고 다짐했다. 21세기는 관리의 시대이고 하니 탈모 방지 대책을 차근차근 세워야 훗날 닥쳐올 폭풍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탈모에 좋다는 음식 몇 가지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난 잊고 있었다. 탈모는 유전이라는 사실을. 위에 적혀 있듯이 우리 아버지는 탈모인이다. 탈모 유전자는 한 대를 걸러서 전해진다고? 우리 할아버지도 탈모인이셨다. 미래는 정해졌고 똑같은 탈모는 반복될 것이다. 누가 그러더라. 이런 상황을 사자성어로 ‘빼박캔트’라 한다고(빼도 박도 할 수 없다). 그저 바람이 평소보다 덜 불기를, 내 잠버릇이 덜 해지기를, 한국 과학기술의 개가가 이루어지기를, 하이모가 장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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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라도 살자
(스포일러 있음)
불치병은 휘성의 노래제목으로 들을 때나 낭만적으로 들리지, 너무나도 끔찍한 단어다. 치료할 수 없는 병. 자신이 나아질 수 없고 죽을 날을 대강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은 인생의 묘미 중 하나가 불확실한 변수로 가득한 인생에서 부여받은 달갑지 않은 ‘어드밴티지’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이 단어가 자신의 삶으로 무단침입을 했을 때의 그 감정은, 상상하기에도 벅차다.
론(매튜 매커너히)도 그렇다. 평생 로데오 경기에 도박이나 걸고, 가끔씩 두 명의 여자와 섹스나 하면서 살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고를 당해 가게 된 병원에서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다.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의 ‘죽음의 5단계’ 코스는 곧바로 따라 붙는다. ‘병원 놈들’ 의 말도 안 되는 진단결과를 개코같이 생각하고 여느 때처럼 술과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내는 ‘부정’의 단계를 거쳐, 혹시나 몰라 도서관에 가서 에이즈에 대해 조사를 해보고는 불치병이라는 것을 알고 ‘분노’한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의 동���줄이 내려온다. AZT라는 에이즈 치료약물이 임상실험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AZT는 FDA와의 커넥션을 이용한 얄팍한 상술의 일부일 뿐이다. 자신을 늪에서 구해줄 ‘동아줄’로 믿었던 AZT는 ‘타협’과 ‘절망’으로 가는 지름길에 불과했던 것이다. 절망에 빠진 그는 멕시코의 한 병원으로 찾아가 전혀 ‘의사’로 보이지 않은 의사에게서 자신의 질병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듣는다. 대체의료의 개가라도 이뤄낸 듯, 30일일 줄 알았던 그의 삶은 시나브로 연장된다. 그리고 이 연장된 삶을 이용해 돈벌이와 사회적 환원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계획을 실행한다. AZT라는 허상에 빠져 자신의 삶을 단축하고 있는 불쌍한 ‘동병상련’ 처지의 사람들을 구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영화의 제목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론이 각성한 이후에 설립한 ‘사회적 기업’이다. 병원의 사탕발림에 빠져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는 에이즈 환자들에게 ‘그나마’ 살아갈 수 있는 비법과 약과 돈을 등가교환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혐오스러워했던 트렌스젠더 레이언(자레드 레토)과 함께 동지애를 가지고 사업을 키워 나간다.
애초에 론의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싸구려 마약을 흡입하고 스트립 댄서들에게 팁이나 꽂아주는 삶. 큰 돈을 벌러 사우디에 갈 수 있었음에도 ‘무슬림’ 여자들은 건드릴 수 없다는 말에 주어진 기회를 포기하는 삶. 에이즈에 걸리자마자 친구들에게 등져진 삶.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론은 약을 구하고, 얼마 없는 돈을 싹싹 긁고, 치료법을 수소문해가며 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유는 없다. 그냥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씩 ‘더’ 살아가면서 ‘생’에 대한 의지는 ‘인생’에 대한 의지로 바뀌었고 그 결과물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이런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며 기회가 찾아온 자에게도 장밋빛 미래만 펼쳐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족을 등지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위해 여자로 다시 태어난 레이언은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론은 FDA와의 소송에서 패하며 사실상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잃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죽음이라는 고난 앞에 무너지지 않고 우뚝 선 인간승리’의 이야기도 아니고,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아 아들에게 물려줄 대기업을 키워낸 여타 재벌들과 달리 자수성가로 사회적 기업을 일궈낸 CEO’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 영화는 살기 위해 살기로 결심한 남자가 살게 되면서 겪은 ‘조금 특별한’ 사는 이야기다. 보잘 것 없던 삶에서 ‘에이즈’라는 장애물을 만나며 인생의 항로가 잠시 바뀌었고, 돈을 벌기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껴 생의 의지를 고취시켜주기 위해 노력도 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실패 때문에 세상에 무릎도 꿇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론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운영하며 내건 조건은 월 400달러로 비싸지만 약을 무제한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병원에 비해 훨씬 저렴하고, 클럽이 성장한 후에도 싸구려 모텔 사무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막판에는 돈이 없는 사람들도 클럽 회원으로 받아준다.)
무언가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론처럼 살기 위해 산다. 죽음이 두렵기도 하고, 지금 삶이 힘들긴 하지만 그냥 산다. 앞으로의 삶이 대박이라곤 보이지 않는 암흑의 터널일지라도 그냥 산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예상치 않은 기회 혹은 전환점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처럼 이유는 없지만 살아야겠다는 생의 의지를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발현될 지도 모르는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영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자." 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살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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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생들을 위한 변명
월요일을 기점으로 2014년 1학기의 서막이 올랐다. 자대배치 받은 신병의 어깻죽지에 달려있는 노란 스마일 견장이 어울릴 것 같은 파릇파릇 신입생과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입시 스트레스로 인해 대학생인지 학부모인지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노안이 되어버린 신입생들은 교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설레는 마음으로 캠퍼스를 누빈다. 한편에선 ‘내 것’ 이었던 캠퍼스의 풋풋함을 새내기들에게 넘겨준 2학년들이 이등병을 아래에 둔 일병의 마음으로 한껏 어깨에 힘을 준 채 발걸음을 내딛는다. 과생활의 낭만과 캠퍼스 커플의 명과 암을 보고 듣고 겪은 고학번들은 생기 넘치던 대학생활을 잠시 뒤로 미뤄둔 채 또 다른 현실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과방보다 열람실과 학회실이 더 편한 그들은 신입생들과는 약간 성격이 다른 ‘그들만의 리그’에서 트레이닝에 한창이다. 하지만 풋풋함과 노련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배치된 소외계층 역시 존재한다. 그들은 바로 복학생들이다.
몇 년 전, <개그콘서트> 코너 봉숭아학당에서 유세윤이 ‘복학생’ 캐릭터를 연기한 이후 ‘복학생’은 구림과 눈치없음의 대명사가 됐다. 당시의 복학생 캐릭터는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과장된 측면이 많았다. 올드한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시대를 심하게 거슬러 올라간 패션 아이템들의 사용이나 추억의 만화영화, 놀이문화 등을 소재로 삼은 것이 그랬다. 하지만 실제 대학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복학생들과의 괴리는 컸다. 그들이 학교와 사회를 떠나있던 시간은 단 2년일 뿐이고 군생활 도중 휴가도 종종 나오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SNS와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등장한 연서복(연애에 서툰 복학생)은 디테일이라는 무기를 들고 다시 한 번 복학생 폭격에 나섰다.
연서복은 정체불명의 이모티콘과 엉터리 맞춤법을 통해 여자 신입생에게 추근덕대는 복학생의 멘트를 풍자적으로 게재한 SNS계정이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새로운 내용들과 패러디는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여성들은 실제 대학생활에서 경험했던 복학생들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했고, 남자들은 ‘셀프디스’와 “나는 그러지 않았다.” 라는 자기방어를 통해 이 유머를 확대재생산했다.
하지만 사실 복학생은 굉장히 외로운 존재다. 같이 지내던 여자 동기들은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그들을 챙겨줄만한 여유가 없고, 밥 사달라는 애교에 지갑까지 열어가며 친목관계라도 다져보려 했던 후배들은 마치 짠 것처럼 수십 개의 여러 파들로 잘게 갈라져 그들만의 관계를 돈독히 하느라 복학생 따윈 안중에도 없다. 3개월 단위로 새로운 스마트폰이 쏟아지고 트렌드가 시시각각 변하는 요즘엔 군대 짬밥을 갓 떼어낸 복학생들은 세상 돌아가는 흐름에 맞춰 사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게다가 군대 물을 빼려고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머리는 좀처럼 자라지 않는다. 끝내주는 핏의 옷을 위아래로 빼입는다고 해도 머리에는 옷을 입을 수 없다. 짧은 머리로 인해 풍겨 나오는 촌스러움은 복학생들의 자신감을 한풀 꺾어놓으며 어깨를 더 축 쳐지게 만든다.
수업에서는 달갑지 않은 형이나 오빠대접까지 받는다. 학년은 비슷하지만 나이가 어린 후배들의 등쌀에 못 이겨 팀플의 조장을 도맡게 되고, 사회 적응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깨에 책임감 하나를 더 얹는다. 2년간의 갭으로 인해 표백되어버린 뇌는 생각처럼 잘 작동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나무 목’ 자가 기억이 나지 않고(내 얘기다), 카투사 준비에 한창이던 때는 잘 들리던 영어가 “빵상 께랑께랑 끼리꽁꽁” 같은 외계어처럼 들리곤 한다. 대학에 대한 적응기간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복학생들은 너무 많은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재미라곤 찾아보기 힘든 학교생활의 탄력을 얻기 위해 신입생들과 억지로 어울리려하는 순간 그들은 공공의 적이 된다. 눈치 없이 MT라도 따라가는 날엔 시간이 지날수록 뒷방 늙은이처럼 고려장 직전의 신세가 되고, 후배들에게 밥을 사며 환심을 얻으려 해도 그저 ‘밥셔틀’로만 남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살갑게 대해주는 여자 후배에게 어설픈 작업이라도 거는 날엔... 그는, 연서복이 된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카드는 같은 처지에 있는 복학생들과 신세한탄을 하며 연합체제를 다지는 것밖에 없다. 요즘같이 흡연하기도 힘든 세상엔 캠퍼스 한 구석 탱이쪽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곳에서 눈치를 보며 담배를 뻐끔뻐끔 피면서 여자 동기들의 취업을 축하하고(한편으론 부러워하고) 전역날짜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졸업날을 손가락으로 헤어가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복학생은 ‘시한부 (대학)사회적 약자’다. 군대에서 사회로 나온 이후 맞이하는 첫 학기는 그들에게 어색할 수밖에 없다. 낯선 수업, 자주 가던 단골집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버린 주변 상권, 처음 보는 얼굴들, 훌쩍 커버린 동기들까지. 물론 그들도 한 학기를 다니며 적응과정을 거치면 조금 더 노련해진 대학생이 될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진격의 복학 첫 학기’는 두려운 존재다. 물론 모든 복학생이 이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친화력으로 OB, YB를 막론하고 새로운 인맥형성에 나서고, 또 누군가는 여자 후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지도 모르지만, 내가 여태까지 본 복학생들의 대부분은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 그저 눈칫밥으로 한 학기를 견뎌내는 애잔한 존재였다. 안타깝게도 ‘이 죽일 놈의’ 군대를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소외되고 도태된다. 그러니 주변의 복학생들에게 한 줌의 관심이라도 공유해주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그들도 몇 년전엔 파릇파릇한 신입생이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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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 잔인한 사각지대
태정(하정우)은 어찌 보면 제대로 똥을 밟은 인물이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년병장이 되자마자 들어온 후임은 중학교 동창인데다 군 시스템에 혐오감을 가진 승영(서장원)이다. 친구와 후임 사이에서 승영을 대해야하는 그의 딜레마는 위아래로 그를 옥죈다. 선임이 똑바로 해야 후임이 바로 선다는 위로부터의 갈굼과 쉽게 쓴소리를 할 수 없는 친구 관계라는 애매한 입장이다 보니 ‘좋게 좋게’ 하려던 일들은 점점 꼬여만 간다.
친구인 태정을 궁지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승영이 부조리에 저항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고참이 되면 전부 바꿀 거다.” 라는 굳센 다짐. 후임 지훈(윤종빈)이 들어오자 승영은 마음먹은 바를 실행한다. 몰래 라면도 챙겨주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고민에 귀 기울여주는 좋은 고참의 모습처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위에 있는 고참들과의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자신을 지켜주던 보호막 태정마저 제대하자 갈굼은 더해만 가고, 결국 승영은 신념을 포기한 채 현실에 타협한다. 안 하던 아부를 하고, 부조리엔 눈을 감으며, 늘 하던 후임의 행동이 눈엣가시처럼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토록 싫어하던 이전 고참들을 닮아간다.
위아래로 찍혀 오갈 데 없는 지훈은 여자친구에게 이별통보까지 받으며 더 엇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던 승영도 이제는 다른 고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외딴 섬처럼 버려진 지훈은 화장실에서 군화끈으로 목숨을 끊는다. 화장실 문을 걷어차며 고통스런 단말마를 내뱉는 와중에도 바깥에선 축구하는 장병들의 소리가 들린다. 지훈이 죽고 슬퍼하는 장병들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여자친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조용히 페이드 아웃되는 화면은 그의 죽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나마 유일하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승영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변화한 것 때문에 지훈이 죽음을 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뉘우치진 않는다. 전역한 태정을 찾아가 끊임없이 ���신의 결백함을 확인받으려 한다. 내 판단은 옳았고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했지만 모든 것을 바꿀 순 없었으니 내 탓은 아니라는 식의 끊임없는 외침은, 끝까지 승영을 이해하려 했던 태정의 마음마저 돌아서게 만든다. 결국 자신의 결백함을 확인받지 못한 승영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용서받지 못한 자> 속 이야기는 현실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진다. 비단 군대뿐만이 아니라 짱, 방관자, 빵셔틀이 존재하는 중고등학교나 직원, 관리자, 관리자의 관리자, 관리자의 관리자의 관리자가 존재하는 회사도 마찬가지다. 도태되는 자는 다수에 의해 무시 받고 뒷전으로 밀려나며 체제에 기생하는 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부조리를 눈 감는다. 최상층에 속하는 이들은 굳건한 체제를 창조해낸 뒤, 각종 당근과 채찍으로 유지, 보수하며 그것을 유지한다. 고참이 되면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다짐했던 승영도 결국은 시스템 속 한 마리의 개미에 불과했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도태되기를 포기하고 체제에 기생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지훈이라는 희생자가 발생한다. 하지만 타인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버려진 그들의 실상에 안타까워하면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여자친구와 섹스를 하고, 편의점에 먹을 것을 사러 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TV에서 리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버라이어티 쇼와 판타지 가득한 드라마를 보며 방송 속 ‘가상공간’을 실제 ‘사회’로 착각한다. 하지만 카메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는 또 다른 평행우주가 펼쳐진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경고가 닿지 않는 그 곳에서는 말 그대로 방송 송출이 불가능한 수준의 부조리와 잔혹극��� 일일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이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슴 뭉클한 전우애도, 교훈이 되는 성장담도 없다. 현미경으로 바라본 군대 내부를 잔인할 정도로 사실성 있게 묘사한 이 영화는 군대에 갔다 온 사람, 아니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트라우마를 지독하게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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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재스민' 과거를 먹고 사는 사람들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허세가 외피를 감싸다 못해 세포에까지 헛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재수 없는 여자’다. (재스민과 재수. 왠지 우연일 것 같진 않다. 우디 앨런 영화니까.) 보잘 것 없는 남자와 결혼한 이복동생을 하찮게 바라보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공주처럼 살아온 재스민의 삶의 궤적 속에 경제적 고민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화강암처럼 단단하던 그녀의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남편 할(알렉 볼드윈)이 계절마다 이불을 바꾸듯 여자를 갈아치우며 바람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바람인지라 한 번 휩쓸고 지나가고 말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여성 편력은 17살짜리 프랑스 여자와의 로맨스에까지 다다르며 재스민의 뚜껑을 연다. ‘청춘의 덫’ 속 심은하, ‘아내의 유혹’ 속 김서형 저리가라 할 정도의 독기를 가득 품은 재스민은 자신의 손으로 남편을 감방에 집어넣는다. (남편이 사기꾼이면 복수도 한결 수월해진다.) 그러나 뭐든 최고만 가졌던 자신의 삶을 뭉개버린 남편에 대한 복수는 쾌감 대신 열패감을 가져온다. 외도에 대한 복수는 제대로 했지만, 그로 인해 여태껏 할이 해 온 모든 사기 행각이 발각되면서 재산을 잃고, 심지어 영혼 없이 사인한 종이 쪼가리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돈 없는 자들을 그토록 무시했던 그녀는 이제 그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브런치와 디너 파티로 쌓아온 인맥들은 한 줌의 재처럼 흩어진다. “복수는 차가운 음식처럼 식혀먹어야 맛있다.”라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가르침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아들마저 떠나버린 그녀에게 남은 사람이라곤, 멸시와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여동생뿐이다.
초호화 대저택에서 방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여동생의 다세대주택으로 이전한 삶은 녹록치 않다. 예전 같았으면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했을 남자들과의 술자리에 끌려 나가고, 물보다 자주 마셨던 마티니 역시 ‘몸이라도 팔아서’ 먹고 싶은 사치품이 되어버릴 정도로.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스킨십과 자존심엔 후퇴가 없다. 빚더미에 올라앉았어도 상위 1%의 사고방식과 자존심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번듯한 정치 유망주와의 결혼에 골인하나 싶었지만 박근혜 정부의 부채처럼 부풀어 오른 거짓말은 절정의 순간에 굉음을 남기며 폭발한다. 결국 현재의 팍팍한 삶과 과거의 부유한 삶과의 괴리감 사이에서 남은 것이라곤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헛것을 보는 정신병뿐이다. 그렇다. 그녀는 이제 ‘재수 없는 여자’에서 ‘미친 년’이 되었다.
재수가 없다 못해 ���쳐버린 재스민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라스트씬은 차가우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재스민이 벤치에 걸터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순간, 같은 벤치에 앉아있던 여성은 자리를 뜬다. 아들, 동생,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그녀의 주변엔 아무도 없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과거의 영광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발악이자 끝없이 반복되는 욕망의 굴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화차에 올라 탔던 재스민은 영화 초반부와 달리 20년은 늙어 보인다.
<미드나잇 인 파리>, <로마 위드 러브>, <블루 재스민>으로 이어지는 우디 앨런의 최근작들은 과거와 현재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들어있다. 1920년의 로망을 동경하던 소설가 길(오웬 윌슨), 자신의 과거를 빼닮은 청년 잭(제시 아이젠버그)에게 연애 코치를 하는 존(알렉 볼드윈), 상류층의 삶을 잊지 못하는 현실부적응자 재스민까지.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언제나 한결 같다. “현재에 충실해 이 멍청이들아.” 1920년대로 돌아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인 애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를 만나 그 시대에 정착하려한 길은 그녀가 더 과거인 1890년을 동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여우 9단 모니카(엘렌 페이지)의 권모술수를 꿰뚫어보고 연애를 말리던 존의 작전은 결국 실패한다. 그리고 재스민 역시 눈앞의 현재가 아닌 지나버린 과거에 목을 매다가 정말로 목을 매게 된 처지에 놓인다.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 굴욕적인 과거, 영광스러웠던 과거 모두 말 그대로 ‘과거’일뿐이라고 외치는 우디 앨런의 강박적 메시지는 굴곡 많았던 그간의 일생에 대한 회고와 지금 이 순간의 삶의 의지처럼 느껴진다.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과거를 추억하며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그에게는 부질없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재스민을 보면서 “내가 왕년에~”를 입에 달고 살며 나는 옛날에 이랬는데 요즘 애들은 어쩌구저쩌구 궁시렁궁시렁 3/4박자 미디엄템포로 쉴 새 없이 소음공해를 만들어대는 꼰대들이 떠올랐다. 군대 꼰대, 회사 꼰대, 학교 꼰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넓고 꼰대는 많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버린 미지의 종과 같다고나 할까. 기억력이라는 축복이자 저주를 달고 사는 인간에게 과거를 추억하고 되돌아보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과거와 현재가 전복되거나 뒤죽박죽 혼재되어버린 꼰대들의 삶은 칼라도 아니고 흑백도 아닌 잿빛이 아닐까 싶다. 디지털의 진보도 아날로그의 향수도 없는 그저 구린 잿빛.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재완료’는커녕 ‘과거’ 혹은 ‘대과거’ 시제에 집착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게다가 그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구림의 완성이고.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 할 말만 하고 자기 말이 다 맞는 그들이야말로 소통과는 거리가 먼 ‘누구의 뭣도 아닌 꼰대’다. 안타깝게도 지금 나라가 돌아가는 꼴로 보아 “너희는 그 시절에 살아보지 않아서 몰라.” 라는 외침으로 가득한 꼰대월드는 앞으로 나날이 확장되겠지만, 굳이 그들을 신경 쓰며 스트레스를 사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존재감은 ‘반면교사’로 충분하니까. 새해도 됐고 하니 응답해주지 않는 과거에 미련을 못 버리고 현재가 옛날의 연장이라고만 생각하는 그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당신들의 미래는 ‘창조미래과학부’에 가서 찾으라고. (정치 편향 발언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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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천안함 프로젝트 - 그들을 위한 나라는 있다
(스포일러 있음)
배가 두 동강이 났고, 오를리 공항에서 한 여성이 마약 운반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장병 46명은 목숨을 잃었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주부였던 여자는 말도 통하지 않는 프랑스 땅에 고립됐다. 배가 두 동강 난 원인은 북한 잠수정이 발사한 어뢰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고, 여자의 행동은 남편 친구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들어줬다가(심지어 마약 운반인 지도 몰랐던) 범죄 행위에 단순가담 했던 것임이 밝혀졌다. 장병 46명은 명예 해군으로 추앙 받으며 국군묘지에 인장되었고, 여자는 주범이 잡혔음에도 주불 대사관의 무관심 때문에 한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일부 언론에 의해 북한 잠수정의 소행이 맞느냐는 반론이 제기되었고, 지상파 방송 추적 프로그램에 의해 억울하게 프랑스에 고립된 여자의 이야기가 전국에 알려졌다. 군 당국은 의혹을 제기한 신문사 기자와 조사위원을 고발했고, 주불 대사관이 뒤늦게 일을 수습해 여자는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국방의 의무의 일환으로 배에서 묵묵하게 복무하던 장병들은 어뢰(라고 높으신 분들이 주장하는)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었고, 비록 범죄행위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나 자신이 지은 죄보다 훨씬 더 부당한 처지를 받은 주부의 처절한 외침은 주불 대사관과 외교통상부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확실한 결론 없이 끝나버릴 것 같았던 사건들은 시간이 흐르자 감춰졌던 꺼풀이 조금씩 벗겨졌다. 지금의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폐부를 찌를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쓴 누군가의 노력 없이는 그들의 진실 혹은 의혹들은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민군합동조사단에 참여했던 위원이 적극적으로 제기한 의혹들을 일부 언론들이 외압을 무릅쓰고 기사로 만들어 세상에 던져놓고, 아내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남편 종배(고수)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지구 반대편 마르티니크 섬에 고립되어있는 송정연(전도연)의 이야기를 파헤친 방송사의 PD가 있었기에 진실들은 밝혀졌고 또한 밝혀지고 있다. 묻혀버릴 혹은 누군가가 고의로 묻어버린 사건을 끄집어내어 공개재판 받을 기회를 제공했다는 이유 때문이라도, 현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천안함 프로젝트>나 과거의 이야기이기는 하나, 태만한 공직자들로부터 촉발된 끔찍한 실화를 다루고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은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안타까운 실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피해자의 처우 측면에서 두 작품이 다루는 사건은 약간 다른 노선을 탄다. 천안함 사건이 터지고, 원인 규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높으신 분들은 사망한 장병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명예를 안겨줬다. 그리고 그 영웅화를 뒷받침해줄만한, 이젠 말하기도 입 아프고 글로 쓰기에도 손가락이 쑤시는 ‘공공의 적’ 북한이 자연스레 소환됐다. 미 해군 군사력으로도 힘든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어뢰발사하고 흔적 없이 튀기’ 외에도 국가기관, 방송국, 금융기관의 해킹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들의 신출귀몰함은 이젠 홍길동, 머털도사, 손오공에 준하는 초능력 집단의 스킬로 보일 지경이다. 높으신 분들은 이 초능력의 존재를 믿기에 대중들에게 ‘북한 개객끼즘’을 널리 전파하고, 희생당한 장병들의 죽음을 주적의 비열함 때문에 촉발된 안타까운 사건으로 포장했다. 반면에 송정연(전도연)은 자신의 억울한 사건에 대한 방송이 전파를 탄 이후, 정보 유출이라는 사유를 달아 주불 대사관으로부터 협박을 받았고, 재판이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어떤 사과나 보답도 받지 못했다. 정당한 요구는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탄원이 되었고, 외교통상부와 주불대사관이 탁구 치듯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와중에 경기장 밖으로 튕겨 나가버린 공들을 주워 와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연의 남편 종배였다.
천안함 사건은 진실의 은폐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면서 피해자들의 죽음이 기능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이용된 데 비해, 송정연 사건은 단순히 그간의 공무태만이라는 치부 이외에, 높으신 분들이 건져먹을 떡고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차이가 있다. 약자의 피해가 강자의 이해논리에 따라 결정된 안타까운 사건들의 뒷수습을 결정지은 요소는 사건을 대하는 ‘높으신 분들의 적극성’ 여부였다. 중심에 있어야 할 피해자는 곁가지로 밀려난 채, 가해자는 왕 노릇을 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북한’과 ‘느려터진 프랑스 놈들’이라는 정체모를 가상의 적이 등장했으며, 전자는 ‘이용’의 용도로, 후자는 ‘회피’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결국 사고로 사망한 국군장병들은 피해자이자 영웅이 되었고 송정연의 가족이 받을 수 있는 거라곤 유효기간 짧은 대중들의 동정뿐이었다. 국군장병은 명예를 얻은 대신 목숨을 잃었고,국군장병의 유가족들은 보상금을 얻은 대신 사랑하는 가족과 진실을 잃었으며, 송정연은 가족과 동정을 얻은 대신, 2년이라는 시간을 잃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은? 보직은 잃었으나 결코 밥줄을 잃진 않았다.
은폐된 혹은 조작된 진실과 부당한 처우 속에 남겨진 약자들의 설움은 앞으로도 그랬듯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공산이 크다. 신석기 농경 혁명과 청동기 농기구가 도입된 이후, 사유재산의 개념이 생기면서 1+1으로 따라붙은 계급 사회의 고리는 수천 년이 지나도 끊어지지 않는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층은 자신들의 위치를 이용해 혜택을 받고, 피라미드의 하단부는 혜택은 고사하고 피해라도 받지 않으려 아등바등 살아간다. 통역도 없이 위치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곳에서 울분을 담아 쓴 편지보다 국회의원들이 방문할 미슐랭 별 세 개짜리 레스토랑 가이드북이 더 중요시되는 아이러니나, 사람의 생명이 훈장과 1계급 특진으로 퉁쳐질 것이라고 믿는 저열한 부류의 졸렬한 가치관이 상위에 놓이는 광경은 단순히 <천안함 프로젝트>나 <집으로 가는 길>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죽을 것처럼 힘든 생지옥을 살고 있거나 실제로 목숨을 잃음에도 그들은 별 일없이 산다.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안녕하다고 답할 것만 같은 그들을 위한 나라는 있다. 아니, 여기는 그들을 위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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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이들이 기억을 다루는 법
(학교 글쓰기 수업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연애, 더 나아가 사랑은 초콜릿 같다. 입에 넣는 순간엔 세상 어느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지만, 초콜릿 덩어리를 목구멍으로 넘긴 순간부터 입 안에 감도는 텁텁함과 쓴 맛은 연애의 시작과 끝을 닮은 점이 많다. 쓰디쓴 뒷맛과 축적된 칼로리가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가 초콜릿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건, 처음 혀에 닿을 때의 촉감과 달콤한 맛의 기억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초콜릿 대신에 연애를 집어넣어도 문장의 어귀가 맞는다.) 망각의 동물이자 기억의 동물인 인간의 본성을 유린이라도 하듯이 연애 혹은 사랑(또는 초콜릿)은 우리의 곁을 언제나 맴돈다.
영화 <500일의 썸머>의 주인공 톰(조셉 고든 레빗)은 연애 초기, 친구와의 대화 도중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인 썸머(주이 디샤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의 미소가 좋고, 머리칼과 무릎도 사랑하고, 목에 있는 하트 모양의 점도 사랑해.” 로맨틱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말은 연애가 파국을 맞이한 뒤 “나는 그 비뚤어진 치아도 싫고, 60년대 헤어스타일도 싫고, 목에 있는 바퀴벌레 모양 반점도 싫어.” 로 바뀌고 만다.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는 그대로이지만, 그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미소가 부정교합으로, 하트가 바퀴벌레로 바뀌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또한 ‘사랑’이라는 요물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겨진 연인의 이미지와 흩어진 추억의 조각들이 조합되며 만들어내는 왜곡된 기억은 사랑에 빠졌던, 혹은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의 주위를 망령처럼 떠돈다. 목구멍을 통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 알았던 고체 초콜릿의 잔여물들이 액체로 변해 입 안을 맴도는 것처럼. 좋았던 기억과 나빴던 기억은 분명 독립된 개체이지만, 그것이 혼재됨과 더불어 발생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심할 경우엔 육체적 열병까지 불러오는 이 망령으로부터 왜 사람들은 종종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터널 선샤인>의 메리(커스틴 던스트)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기억 삭제’ 클리닉의 원장인 닥터 하워드(톰 윌킨슨)를 사랑한다. 꽤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서로에게 약간의 호감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하워드는 유부남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객 조엘의 시술을 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하워드에게 키스를 한 뒤 숨겨두었던 마음을 털어놓는데, 때마침 등장한 하워드의 아내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메리가 하워드와의 사랑에 실패한 이후 기억을 삭제한 전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메리는 경악한다.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 기억을 모두 지웠지만 또 다시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운명의 장난질에 대한 놀라움과 기억을 삭제한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한 하워드의 태도 때문이다.
영화에서 자세히 설명되진 않지만, 맥락을 따져보면 메리는 하워드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50대(혹은 60대) 유부남과 20대 미혼여성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이나 결혼이라는 제도에 종속된 하워드의 상황 혹은 외부적인 영향 없이 오롯이 둘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메리는 ‘기억 삭제’라는 선택을 함으로서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려놓으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성이 아닌 본능의 영역을 거스르지 못하고 다시 하워드를 사랑하게 된다. 이미지에 해당하는 기억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몸과 세포가 그 남자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간에게 ‘기억’이란 한순간에 휘발될 수 있는 감정적 잔여물이 아닌, 축적된 정도에 따라 고스란히 체화되어버리고 마는 하나의 ‘인장’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애초에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인간에겐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행복했거나 좋았던 기억만을 간직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의 뇌는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던 한 마디의 말이나, 자신을 나락까지 몰아가는 심리적 충격마저도 고스란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뇌의 영역 이외에도 무의식중에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몸 전체를 떠돈다. 결국 벗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메리가, 조엘(짐 캐리)이,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끝나버렸다고 믿었던 사랑의 화살표가 원점으로 회귀하는 지점은 단순한 기술적 오류라기보다 체화된 기억이 본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외부로 발현되었다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기억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활보하며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려하지만, 무형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왜곡이 가능하다는 특징도 존재한다. <메멘토>의 레너드 셸비(가이 피어스)는 욕망으로부터 촉발된 기억의 왜곡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보험 조사원인 레너드는 10분간만 기억을 유지할 수 있는 희귀병을 가지고 있���. 그 희귀병을 앓으면서도, 아내를 강간한 뒤 살해한 범인을 찾아 나선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를 맞닥뜨리고 복수에도 성공하지만 숨겨진 진실은 따로 있다. 아내는 강간살해를 당하지 않았으며,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자신의 행동 때문에 인슐린 과다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사실 레너드는 사건의 진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기억상실증이라는 자신의 질병을 악용하고 기억을 왜곡하여 피해자들을 양산한다. 레너드는 자신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고,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만을 되풀이하며 지금 상황이 본인이 아닌 타인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죄책감 덮어씌우기의 일환으로 실체 없는 범인을 쫓는다. 기억은 철저하게 개인 고유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왜곡이 가능하다. 사람이 기억을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은 이미지 형태로 남아있는 기억의 서사구조를 뒤바꾸거나, 당시의 분위기나 사건의 디테일을 왜곡함에 있어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앞뒤 맥락 없이 연인과의 스킨십 장면이나 행복했던 순간만을 떠올리는 것이 가능하고, 엉망으로 끝나버린 데이트에 대해서도 연인을 만나러 나가는 준비 과정에서의 설렘만을 기억하며 그 순간의 황홀감과 흐뭇함으로 과거를 변형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치부나 단점이었던 부분을 그간 꿈꿔왔던 판타지적 요소로 포장하면서,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고 실패한 사랑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는 식의 자위행위는 ‘추억’이라는 듣기 좋은 어휘로 감춰진, 욕망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이 기억을 왜곡할 수 없을 경우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영국드라마 <블랙 미러> 1시즌 3화 “The entire History of You”다. 그레인이라는 장치를 몸에 이식하면 자신이 바라보는 시점의 모든 기억을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는 미래를 배경으로, 이 사회에서는 기억이 동영상 형태로 매분매초 저장되고 되감기, 불러오기 등의 기능도 탑재되어있기 때문에 ‘기억의 왜곡’이 배제되어있다. 주인공 리암은 아내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 모임 자리에서 평소와는 다른 아내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의심을 품게 된다. 그레인에 저장된 아내와의 기억을 재생하며 바람의 흔적을 찾는 리암 부부의 말다툼은 잦아지게 되고, 결백한 것처럼 보였던 아내의 주장은 ���두 거짓으로 드러난다. 아내의 외도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리암은 결국 결혼생활에 파국을 맞이하고 귀 뒤에 이식되어있던 그레인을 스스로 도려내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메멘토>의 레너드가 기억의 왜곡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했다면 리암은 사랑이 좌절된 이후, 기억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완벽한 기억’을 포기한다. 사랑을 실현함에 있어서 그레인에 저장된 기억이 적어도 리암에게는 약이 아닌 독으로 작용했고 그 관계가 정리됨과 동시에 자신이 받은 상처를 잊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의 사랑에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본래 가지고 있던 이점 아닌 이점을 포기한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 있어 기억이 데이터화되어 객관성만을 가지는 것은 ‘사랑’을 이루고 유지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왜곡을 해서라도 좋은 기억만을 간직하고, 나쁜 기억은 순화시키는 것이 외부적 영향 때문에 균열이 갈 수 있는 ‘사랑’을 지속시켜주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인셉션>의 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일당처럼 타인의 기억에 대한 조작이나 왜곡을 시도하지 않는 이상, 자신 고유의 기억에 대한 왜곡은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선을 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고 죄책감에 구애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인간은 왜곡된 혹은 순화된 기억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곤 한다.
앞서 언급된 <이터널 선샤인>과 <메멘토>의 사례에서 체화된 사랑의 기억, 왜곡을 해서라도 당시의 낭만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있었다면, 이와 관련해 현실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사례는 애초에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손상 없이 보유한 상태에서 상황에 따라 원하는 것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다. <연애의 온도> 의 동희(이민기)와 영(김민희)은 연애 3년차 사내커플이다. 남들의 눈을 피해 비밀연애를 하는 와중에 둘은 여느 오래된 연인처럼 지속되던 싸움에 지쳐 헤어지게 된다. 매일 마주쳐야만 하는 일적인 관계와 그 둘 사이를 알고 있었던 주변 인물들 때문에 헤어진 이후에도 서로를 신경 써야만 하는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보려 애를 쓰다가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버린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면죄부가 선사한 과거 행복했던 기억이 머리에서 맴도는 것을 막지 못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연애를 시작한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거의 매일 만나야하는 이들의 관계에서 쌓인 기억 데이터의 양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 기억은 체화되다 못해 신체의 한 일부처럼 자리를 잡았을 것이고, 직장에서 매일 봐야하는 관계적 특성과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질병 없이 건강한 신체 때문에, 본래 간직하고 있는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들은 관계 유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함께 갔던 추억의 장소에서 과거의 낭만을 꺼내보다가도, 헤어짐의 원인이 되었던 말이나 행동이 비수처럼 다시 가슴에 꽂힐 땐, 이전에 받았던 상처 그 이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각자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서로의 모습들은 ‘익숙함’이라는 이름을 달고 끊임없이 주변을 맴돌며 인연의 끈을 놓아야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게 만든다.
오래토록 지속된 연애 혹은 결혼생활의 경우, 관계의 단��을 고민하는 순간에 항상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사이의 갈등이 찾아온다. 생살을 도려내는 듯했던 아픔의 순간이 몸을 콕콕 쑤셔오는 와중에 좋은 기억이라는 연고는 살며시 다가와 그 위를 덮는다. 견딜 수 없이 아파도 어느 순간에 연고가 상처를 치료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평행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은 별개의 영역이다. 그들은 결코 하나로 만나 제3의 기억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으로 인해 희석되거나 변질되는 순간 그것은 기억의 왜곡이 된다.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쁜 기억 속 연인이 상처를 주는 행동은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돌아온다. 너무 쉽게 좋은 기억에 의존할 때의 초콜릿 같은 행복이 훗날 당뇨라는 질병으로 돌아오는 것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현재의 초콜릿만을 눈앞에 그린다. <연애의 온도> 후반부에서 동희와 영이 대판 싸우게 되는 것도 3년간의 정 때문에 이전의 안 좋은 기억을 잠시 접어두고 평화를 찾기 위해 놀이동산에 갔다가 날씨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꼬인 후, 서로의 숨겨뒀던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폭발적으로 분출되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을 취사선택한 이들이 나쁜 기억의 본능적 분출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것은 그간 가져온 기억의 총량이 나쁜 기억 쪽으로 부등호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50:50의 싸움이 아닌 30:70의 싸움에 자신의 20을 채우려 해 본들, 70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병렬적으로 놓여있는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하나를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마치 영과 동희처럼.
인간에게 ‘기억력’이란 삶의 디딤돌임과 동시에 하나의 장애물과도 같다. 특히 이성의 영역이 가장 흐릿해지는 ‘사랑’에 있어서는 양면성이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나곤 한다. 좋은 기억은 꽃가루가 흩날리며 한없이 판타지를 선사해주지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는 말이 오히려 코끼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처럼, 잊고 싶은 안 좋은 기억은 잘 잊히지 않는다. 기억을 삭제하는 과학기술이 상용화되지 않는 한, 인간들은 끊임없이 이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며, 그 기로 앞에서 왜곡이라는 꼼수를 사용하거나, 나쁜 기억은 잠시 접어두고 좋은 기억을 취사선택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왜곡과 기억의 취사선택 모두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한 줌의 노력이다. 그 노력이 실제로 한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끝없이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올려야만 하는 시지프스와 같은 애잔함을 숙명처럼 달고 사는 인간의 욕망은 혐오의 대상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사랑에 눈이 멀어 돌덩이를 밀어 올리는 자신의 행동이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사��에 빠진 이들에겐 꼭대기 반대편의 내리막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돌덩이를 산꼭대기에 올려놓았을 때 찰나처럼 지나가는 환희의 순간이 사랑하고 있는 이들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드레날린이기 때문에, 바보 같은 노동의 결과물인 잔근육이 자신의 몸에 아로새겨짐에도 묵묵히 돌덩이를 밀어 올린다. 그리고 돌덩이가 다시 내리막길을 통해 굴러가는 것처럼 다시 한 번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묵묵히 처음부터 돌을 밀어 올릴 것이다. 이 광경을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본인에겐 희극일 수 있다. 찰나의 기쁨을 위해 바보 같은 기억의 되새김질을 반복하며 한계를 깨닫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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