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20사단
518truehistory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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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역사왜곡은 사건의 삭제와 누락 입니다.518 History distortion is the deletion and omission of events.
518 역사왜곡은 전라남도 계엄군 사령부인 전투교육사령부와 그 예하 부대 군장성들과 장교 및 부사관들의 간첩행위를 고의적으로 삭제처리하거나 누락시킨 행위로써,
518 History distortion is the act of intentionally deleting or omitting the espionage of the Combat Education Command, the commander of the martial law force in Jeollanam-do, and the generals, officers, and non-commissioned officers of its subordinate units.
전투교육사령부, 31사, 20사, 보안사, 해군, 합참이 관여되어 있는데, 이들은 광주에서 확인되지 않은 수상한 조직인 소위 연고대생 600명의 군사활동을 지원하고, 이들이 1980.5.25일 01시에 전남도청을 군용차 19대에 분승해 04시 목포해안에서 사라질때 까지 협조했고,
The Combat Education Command, the 31st and 20th, security officers, the navy, and the Joint Chiefs of Staff are involved. We shared 19 military vehicles and cooperated until they disappeared from the Mokpo coast at 04.
광주 전남도청 수복작전때 까지 20사단 지휘부 차량에 있었던 통신음어가 연고대생 600명에게 넘어 갔음에도 음어교체를 하지 않고 통신을 해서 군 작전을 이들 시민군들에게 모두 알려 주면서 작전을 했습니다.
Until the Gwangju Jeonnam Provincial Office Restoration Operation, the communication word that was in the 20th Division command vehicle passed to 600 college students, but the communication was carried out without changing the language, and the operation was carried out by informing all these militiamen of the military operation.
518일 새벽 아시아 자동차 군용차 2대 피습 사건 은닉
아시아 자동차 피습사건 신고 묵살 사건 은닉
연고대생들의 군분교 점령작전 협조 은닉
군분교 톨게이트 거리 장애물 설치 사건 은닉
아시아 자동차 진입로 3군데 절개절단사건 은닉
아시아 자동차 노조 차량출동 지원 사건 은닉
나주 예비군 무기고 탈취사건 은닉 및 조작
목포 별동대 차량과 20사단 짚차 접선 사건 은닉
80.5.20 20시 특전사철수명령 비밀에 붙임 은닉
20사단 지휘부 기습 사건 축소 발표 축소 및 은닉
20사단 음어 피탈사건 은닉
광주통합병원 탈환작전시 주요피의자 석방사건 은닉
수습위원회들의 주요피의자 석방사건 은닉
특전사 11여단 기습은 연고대생 철수 선견작전 은닉
아시아 자동차 19대 미반납 사건 은닉
도청 시민군 본부와 연고대생 600명 철수 사건 은닉
이상의 사건들은 한국군으로써 계엄군으로써 진압군으로써 본분 을 망각하고, 광주시내에 진입해 있던 연고대생 600명과 적극 협 조한 연합작전을 실시하면서, 이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체포된 이들을 석방 시키고, 이들이 광주를 탈출할수 있도록 적극 협조 및 가담한 행위는 모두 다 조사과정에서 삭제 및 은닉을 했었는 데, 이 사건들의 실체가 바로 518 광주사태의 본질 임.
이런 진실을 숨기기 위해 소위 전문가 역사학자 등을 내세워 이런 사실을 은폐하고, 광주에 북한군이 왔네 안왔네 하는 연막작전으 로 광주의 한국군 간첩행위를 숨겼던 것 임.
본 블로그는 이런 사실에 대한 행위자들을 모두 고발 조치하고 사법처리를 하도록 해서 518 광주사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릴것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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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yk600s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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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 선두 짚차는 1980년 5월21일 오전 8시 10분경 광주 톨게이트 입구에서 북한군 제2전대 300명이 20사단 지휘부 차량행렬을 기습해 탈취한 차량이고, 뒤에 레카차와 트럭은 18일 새벽 북한군이 아시아 자동차에 침입해 총을 들이대고 빼앗아 나간 차량이며, 이 차량은 19일 나주 예비군 무기고를 들이받아 무기를 빼앗가 목포로 갔다가, 21일 오전 10시경 독일 간첩 힌츠페터에 의해 촬영된 영상 입니다. 
김대중은 나주 예비군 무기고가 21일 습격을 받았다고 비석을 세워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바로 저 레카차 앞부분이 부서져 있는 것이 예비군 무기고를 들이받고 부서진 것이며, 김동문 기자가 목격을 했습니다. 
21일 오전 8시 10분에 빼앗긴 차량이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목포 김대중 사조직과 만난것은 연락망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달리한 차량들의 만남 은 바로 김일성과 김대중의 만남의 상징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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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ukabi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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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Hbzfv0uSJMwNcPF: 20사단, 26사단, 30사단은 군 현대화를 하면서 재편된 기계화 사단들 장갑차와 보병이 결합된 군대란 말이지. 5기갑이면 360도 회전 발사가 가능한 K2 전차를 보유한 최정예 기갑사단 그기다 3공수여단이면 아예 전부 몰살시킬 작정한거네. 휴
20사단, 26사단, 30사단은 군 현대화를 하면서 재편된 기계화 사단들 장갑차와 보병이 결합된 군대란 말이지. 5기갑이면 360도 회전 발사가 가능한 K2 전차를 보유한 최정예 기갑사단 그기다 3공수여단이면 아예 전부 몰살시킬 작정한거네. 휴
— 먼스 (@Hbzfv0uSJMwNcPF) October 22, 2019
via Twitter https://twitter.com/zizukabi October 22, 2019 at 09:08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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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kimsworld-blog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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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잡으려다 올가미 걸린 친박.알자회 군 장성들 2017-07-17 17:10:25 hskyedaily.com/news_view.html?ID=75601 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 이슈가 대한민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계엄령 검토 문건 파동은 정치권은 물론 군 내부에도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군 내부 권력 구도에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중론이다. 문건에는 (박 전 대통령 탄핵기각으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폭력사태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심각한 사회혼란이 조성될 것으로 판단된다며 경찰력만으로 치안 확보가 어려운 만큼 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이동병력 규모와 출동지역과 함께 철저한 보안대책 강구와 임무수행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문구도 담겨있다. 병력 배치계획을 보면 서울 지역은 △청와대-30사단 1개 여단·1공수여단 △서울정부청사-20사단 2개 중대 △국회의사당-20사단 1개 여단 △국방부·합참본부-20사단 1개 여단 △헌법재판소-20사단 1개 중대 △광화문 일대-30사단 2개 여단·9공수여단 등 총 병력 4800여명, 특전사 1400여명, 탱크 200여대, 장갑차 550여대 등이 배치된다. 지방은 △경기-육군 2·5기갑 여단, 9공수여단 △충청-8사단, 13공수여단 △강원-11사단, 3공수여단 △호남-26사단, 11공수여단 △영남-수도기계화사단, 7공수여단 등 최전방 정예부대의 이동 배치 계획이 담겨져 있다. http://m.skyedaily.com/news_view.html?ID=7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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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othackm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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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출장 복귀 중 지나가는 양평 옥천 급 추억여행...ㅎㅎ 1990년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 옥천국민학교 2학년 1반 다녔었나? 옥천출신 다 좋아요 누르고 선팔 눌렀! 집주소 아직도 기억함 옥천면 아신 1리 화곡관사 2호 ㅋㅋ 관사는 다 없어졌네 힝~ 그치만 옥수수밭은 그대로네요 그 어릴적 기억하는 장소 다 보고 옴... 우체국, 이발소, 파출소, 다리, 냉면집, 학교까지 다봤는데 그땐 다 커보였는데 이젠 다 작아보이네 기념으로 냉면 한그릇! 영하 1도에 냉면이라... 완자도 먹고 올껄!! 꺼이꺼이~~ 그나저나 여기저기 냉면가게 많이 생겼는데, 다 서로 원조니 본점이니 써있는데... 나 어릴때 여기 하나밖에 없었던 것같은데? 육수맛이랑 면 느낌이 다 기억나는데 뭘... #옥천국민학교 #옥천초등학교 #일상스타그램 #일상 #출장 #출장중 #외근 #외근중 #외근스타그램 #여행 #여행스타그램 #양평 #옥천 #옥천맛집 #옥천면옥 #냉면 #냉면맛집 #냉면집 #옥천우체국 #옥천면사무소 #옥천파출소 #옥천이발소 #20사단 #말리부 #갤럭시s8플러스 #폰카 #폰카메라 #추억 #추억팔이 #태그어디까지 달리는거야(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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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goodmoneyco-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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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6ㆍ25 징비록⑦] 파죽지세 중공군, 무너지는 방어선, 오지 않는 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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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6ㆍ25 징비록⑦] 파죽지세 중공군, 무너지는 방어선, 오지 않는 지원군…
[
백선엽의 6ㆍ25 징비록⑦]
파죽지세 중공군, 무너지는 방어선, 오지 않는 지원군….
입력 : 2013.11.29 11:35 | 수정 : 2013.11.29 14:19
<조선> 백선엽전 육군참모총장
권 하사의 분노, “나는 60년동안 달아난 분대장을 찾아다니고 있다”
(2) 중공군과의 전쟁
새카맣게 몰려든 중공군
▲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행렬. 1951년 1.4후퇴는 6.25 발발 직후의 피난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혹한 속에서 훨씬 먼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데 명수였다. 5월의 해토기 뒤 병력을 움직여 이곳저곳을 탐색하는가 싶더니 아군의 허점을 제대로 짚어 그곳으로 기습을 감행했던 것이다. 전선은 크게 요동쳤다. 국군 2군단이 그곳을 막아서는 주력이었다. 사령관은 정일권 군단장이었다. 적은 아군의 깊은 곳까지 진출했다. 13㎞에 달하는 전선에서 4㎞를 밀고 내려왔다. 와해라고 할 수는 없었어도, 상황이 심각했다.
6월10일의 중공군 공세는 1주일 이어지다가 멈췄다. 그보다 더 기록적인 중공군의 공격은 한 달 여 뒤 다시 벌어졌다. 우리 전사(戰史)에서 ‘중공군의 최후 공세’ 또는 ‘7·13 전투’로 기록하는 싸움이다. 1953년의 6월10일 벌인 공세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큰 중공군의 공격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행렬. 1951년 1.4후퇴는 6.25 발발 직후의 피난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혹한 속에서 훨씬 먼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행렬. 1951년 1.4후퇴는 6.25 발발 직후의 피난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혹한 속에서 훨씬 먼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나는 이 자리에서 그해 7월13일 시작한 중공군의 최후 공세 때 그 전선 가장 앞에 섰던 노병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그의 이름은 권길성, 현재 대구에 거주하고 있는 85세의 전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당시 전장에서 도망쳤던 분대장을 60년동안 찾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사연은 이렇다. 1953년 7월13일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그는 금성돌출부의 왼쪽 어깨 쪽, 즉 좌견부(左肩部)를 맡고 있는 국군 6사단 19연대 2대대 7중대 로켓포 사수였다. 장마철이라 두터운 구름이 낮게 깔려 아주 어두웠던 밤, 최전선 사주방어(四周防禦)형 고지의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그에게 후방의 소대본부 전령이 다가왔다. 전령은 “적이 막 공격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진지에서 사병들이 잠을 자도록 만들었던 취침호(就寢壕) 속 대원들을 모두 깨워 전투 위치에 서도록 했다.
이어 적의 포성이 주변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고지의 안팎은 격전장으로 변했다. 고지의 뒤쪽에 있던 권길성 하사는 계속 앞으로 이동했다. 고지 전면에서 죽어가는 동료가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 때 “더 앞으로 나가라”며 권 하사의 등을 떼밀었다. 분대장이었다. 그는 권 하사의 카빈총을 달라고 하더니 “지원 병력을 이끌고 돌아올 테니 싸우고 있어라”면서 고지를 빠져나갔다. 기관포 탄통에 담긴 수류탄 10여 발을 통째로 들고 어둠 속으로 기어갔다.
금성전투 참전 용사 권길성옹. 금성전투 참전 용사 권길성옹. 8권 하사는 고지에서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후방으로 빠졌던 분대장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호 속의 아군은 거의 사망한 듯했다. 뚜껑이 있는 참호, 유개호(有蓋壕) 형태의 진지는 아주 캄캄했다. 포탄이 작렬하면서 생기는 섬광이 번뜩일 때 그는 참호 구멍 밖에 매달린 중공군의 얼굴을 봤다. 그 중공군은 캄캄한 참호 안쪽을 볼 수 없었다. 수류탄을 굴려 그와 주변의 중공군을 폭살(爆殺)했다.
내 손으로 죽인 신병
▲ 2010년 5월 26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지평역 인근에서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육군 7군단 추최로 프랑스. 미국 참전용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지평리전투 재현행사’가 열렸다. 각각 연합군과 중공군 역할을 담당한 7군단 예하 20사단 장병들이 전투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참호 안쪽에 이미 들어선 중공군이 눈에 들어왔다. 급한 나머지 수류탄을 들어 그의 얼굴을 찍었다. 상대가 넘어졌다. 그리고 옷 안에 수류탄을 밀어 넣었다. 이어 그는 진지가 적에게 모두 점령됐다고 판단했다. 진지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기관총 사수의 총소리도 멎었기 때문이다.
진지 뒤쪽으로 돌아 나오던 그의 앞에 누군가가 움직였다. 마침 그 뒤로 포탄의 섬광이 번쩍였다. 섬광에 비친 상대의 모습은 ‘까까머리’였다. 당시 국군 장병은 대개가 긴 머리였고, 적인 중공군의 머리는 바짝 깎은 상태였다. 권 하사는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쾅’하는 요란한 폭발음 뒤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2010년 5월 26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지평역 인근에서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육군 7군단 추최로 프랑스. 미국 참전용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지평리전투 재현행사’가 열렸다. 각각 연합군과 중공군 역할을 담당한 7군단 예하 20사단 장병들이 전투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2010년 5월 26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지평역 인근에서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육군 7군단 추최로 프랑스. 미국 참전용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지평리전투 재현행사’가 열렸다. 각각 연합군과 중공군 역할을 담당한 7군단 예하 20사단 장병들이 전투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중공군을 또 하나 쓰러뜨렸다고 여긴 권 하사는 그의 품으로부터 ‘따발총’이라도 빼앗아 진지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엎어진 상대를 돌아 눕혔다. 순간 그의 입으로부터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아…살려줘….”
“…….”
권 하사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가 폭탄을 던져 쓰러뜨린 사람은 훈련소에서 막 전입했던 무반동포 탄약수 ‘엄 일병’이었다. 엄 일병은 곧 숨을 거뒀다. 그리고 권 하사는 무사히 진지를 빠져나와 후방의 소대와 합류했다. “싸우고 있어라”고 했던 그 분대장은 훈장을 탔다고 한다.
권 하사, 이제 90을 바라보는 노년의 권길성씨는 엄 일병과 그 분대장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하나에 대해서는 죄책감, 다른 하나에 대해서는 분노 때문이다. 권길성씨는 자신의 손으로 죽인 엄 일병의 유해를 직접 수습하는 일, 그리고 도망친 분대장을 찾아 죄를 묻는 일을 여생의 마지막 바람이라고 했다.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나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7월13일 오후 9시 30만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 공세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튿날인 14일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오후 4시쯤 서울 동숭동의 미8군 ���령부에 전화를 걸어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에게 “전선이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테일러 사령관은 “아직은 괜찮다. 좀 지켜보자”고 했다.
15일 새벽 1시 경이었다. 총장 관사에서 잠을 자고 있던 내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테일러 사령관이었다. 그는 “백 장군, 당신이 나가줘야겠소”라며 “전용기를 대구로 보낼 테니 곧장 전선으로 가 달라”고 했다. 그가 보낸 대형 전용기 C-47을 타고 나는 여의도로 비행했고, 이어 지프로 서울~춘천 국도를 달려 아침 8시 경에 금성돌출부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2군단의 소토고미 사령부에 도착했다.
일선에 선 육군참모총장
▲ 유엔군측 대표들. 1951년 7월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포���를 취한 유엔군측 대표들. 왼쪽부터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수석대표 조이 해군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데스 소장.
권길성씨가 고립된 채 진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간신히 빠져나와 숨을 돌리며 후퇴를 거듭하던 무렵에 나 또한 그와 함께 전선에 섰던 셈이다. 당시의 내가 최전선 진지를 지키던 권 하사의 사정을 들었을 리 없다. 그로부터 57년 뒤 나는 회고록을 적으면서 그의 사연을 처음 알 수 있었다.
유엔군측 대표들. 1951년 7월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한 유엔군측 대표들. 왼쪽부터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수석대표 조이 해군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데스 소장. 유엔군측 대표들. 1951년 7월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포즈를 취한 유엔군측 대표들. 왼쪽부터 크레이기 소장 백선엽 소장 수석대표 조이 해군제독 리지웨이 대장 호데스 소장.중공군은 6·25전쟁 중 2년 8개월 동안 내내 국군의 ‘악몽’이었다. 그들이 다가오는 상황에 접하면 국군은 대개 겁을 먼저 집어먹고 물러서기 마련이었다.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내용이다. 그렇듯 중공군은 국군을 얕잡아봤고, 국군의 방어지역을 집중적으로 골라서 공격을 펼치는 군대였다. 그 점에서 이 금성돌출부를 두고 벌인 중공군과의 싸움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로부터 10여 일 뒤인 7월27일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따라서 금성돌출부 전투에서마저 중공군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면, 국군은 6·25전쟁 내내 우리를 짓눌렀던 중공군의 그림자를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용문산 전투 등에서 중공군에게 승리한 경우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우리는 중공군에 맞서 싸워 이긴 적이 별로 없다. 이 때문에 휴전 직전에 다시 중공군에 크게 패전한다면 우리는 줄곧 큰 심리적 상처를 안아야 했다는 얘기다.
금성돌출부를 공격했던 중공군의 초기 공세는 대단했다. 앞에 적은 권길성씨의 체험에서 알 수 있듯이, 30여㎞에 달하는 국군의 전선은 중공군의 격렬한 포격, 빈틈이 없어 보였던 현란한 기만(欺滿) 전술, 우회와 기습의 다양한 변조(變調)로 일거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 금성전투 참전 용사 권길성옹.
권길성씨가 겪은 참담함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국방부가 펴낸 전사(戰史)는 당시의 초기 중공군 공세를 ‘봇물이 터지듯 밀고 내려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공군은 일선의 국군 진지를 몇 십분 만에 돌파했다. 이어 공격 요로(要路)를 제대로 잡은 뒤 국군의 중대와 대대, 나아가 연대 본부까지 침투했다.
7월13일의 공격이 있기 한 달 전에 벌어진 중공군의 6월10일 공세에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중공군으로부터 습격을 받은 국군의 한 대대본부에서 대대장을 비롯한 장교들이 포위를 당하자 마지막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항전의 의지를 다졌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해질 정도로 유명하다.
문제는 그 짧은 시간에 소대와 중대의 저지선을 넘어 대대까지 중공군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중공군은 근접전에 유리한 ‘따발총’으로 무장했고, 휴전 막바지에 국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안김으로써 6.25전쟁 자체를 자신이 승리한 전쟁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막대한 화력을 투입했다. 그래서 국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거에 전선의 대부분을 내주고 후방의 대대와 연대가 중공군 총 끝에 놓였던 상황을 어찌 봐야 할까. 애국가를 부르면서 마지막 항전에 나섰던 국군 장병의 용기는 물론 대단히 훌륭하다. 그러나 전선의 적으로 하여금 일거에 전투 지휘본부까지 내닫게 내버려두는, 6·25전쟁 내내 노출했던 우리의 약점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7월15일 아침 금성돌출부 전투를 지휘하는 2군단에 내가 도착하던 무렵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 [조선] 백선엽의 6ㆍ25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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