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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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버터 시간 실제 gif 몇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버터 시간 실제 gif 몇분 보는법 공개 합니다. 이탈리아 영화로써 말론 브란도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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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트 위주로 영화 엑기스 정리 되어 있습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버터 시간 실제 gif 몇분 인간의 본성과 욕망, 사랑과 죽음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제작진들이 협업하여 탄생시킨 이 작품은 1972년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감독으로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영화의 주요 캐릭터인 폴(말런 브랜도)과 진(마리아 슈나이더)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시작된 관계에서 서로를 알지 못하면서도 매료되고, 갈증을 해소하며 더욱 깊은 욕망에 빠져들게 됩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버터 시간 실제 gif 몇분 폴과 진의 관계는 순수한 섹슈얼한 욕망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는 결국 그들의 내적 충돌과 현실과의 부딪침으로 번져갑니다. 서로의 신원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된 이 관계는 점차 감정의 혼란과 현실과의 갈등으로 인해 파괴적인 상태로 치닫게 됩니다. 폴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고민과 맞서 싸우며, 진 또한 자신의 욕망과 복잡한 감정에 직면하게 됩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버터 시간 실제 gif 몇분 성적인 콘텐츠와 폭력적인 장면으로 논란이 되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깊이와 복잡성은 놀랍습니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연출력과 브랜도와 슈나이더의 감정 표현은 관객들에게 지적인 고찰을 유도합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나 섹시한 스릴러가 아닌,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색하게 하는 예술적인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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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Schneider 마리아 슈나이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Maria Schneider during the shooting of the film 'Madly' in September 1970, France. Photos by Jean-Pierre Bonno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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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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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과 여행
<출처 네이버 이미지 검색>
관광과 여행
인드라1997-05-29
관광과 여행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화 <마지막 사랑>*에서는 이렇게 답변했던 듯하다.
관광은 잠시 있어보는 것이라면 여행은 한동안 사는 것이라고. 나는 유럽에 도착한 직후부터
내내 아프리카의 광활한 사막에 도착하여
주인공들이 나누던 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관광일까? 여행일까?
늘 떠나고 싶어했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옆에 있음에도,
칼같이 달려드는 일거리가 매일 쏟아지는 데도
문득 문득 출가하고픈 잔망(殘望)이 내게 도사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탈출하고 싶어한다.
반복되는 하루를 바삐 뛰다 보면
한 번쯤 아무 생각없이 산마루 바위에 앉아
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다.
또 이른 새벽 인적없는 해변을 달음박질하다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하늘을 쳐다보고 싶을 때가 있다.
또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거대한 군중에 자신을 내맡기고
종일토록 걷고 싶을 때가 있다.
또 똑같은 양복과 똑같은 넥타이와 똑같은 원피스와 똑같은 하이힐끼리 잘 정돈된 책상에서 속도있게 할 일을 논의하다가도
헝크러진 머리칼과 구질구질한 얼굴, 땀절은 옷, 구겨 신은 신발로
스스럼없이 낯선 사람들과 길바닥에 주저앉아
쓸 데 없이 세상사를 흥얼거리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들은 가끔이라도 강박에서 멀리 멀리 떨어지고플 때가 있는 것이다.
영화 비터문의 습작가처럼
40억 세상사람 삶을 다 살��보고 싶은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외에
나 또한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다.
나타샤가 내게
“자기는 여전히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어. 포기했다고 말만 그러지.”
라고 날카롭게 쏘아붙일 때 별 말을 할 수 없다가 찾아내곤 했던 꿈.
시일이 지나 아내가 다시 똑같이 말하면
덩그러니 담배만 피워대며 내가 왜 이러는지 자문해야 했던 꿈.
평소에는 집 바깥에 나서기도 귀찮아하는 사람일수록
역마살이 심하다는 역설이 성립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한가 보다.
나는 며칠이고 집에만 틀혀 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고독을 즐기면서도
일년에 한 번쯤은 어디든 떠나야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 나를 두고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상관없을 거라 핀잔할 만큼
나는 생각에 몰두하길 좋아하지만
한 달에 한 번쯤은 밤새워가며 사람들과 수다하고픈 율법을 지니고 있다.
또한 나는 종종 내가 만일 무인도에 홀로 살 수 있을까
공상하곤 하는데 살 수 있겠다 싶지만
하루에 한 번쯤은 무인도 위로 비행기라도 훌쩍 지나갔으면 하는 계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내 행위를 유럽 관광이라고 규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떠나보는 것.
그곳에 한동안 정착하여 그곳 사람들과 살기 보다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슬쩍 엿보는 것.
그곳 사람들도 역시 나처럼 일상을 견디고 있는 모습에 안도하는 마음이 드는 것.
마치 만나는 여행자들마다 내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우.
지금 시작이라우.
당신은 쌩쌩해.”
라고 말하는 듯 힘차게 돌아 다니는 모습을 보며
서점에서 십수권 책을 산 뒤 읽지 않고도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과 같은 것.
돌아와 사진 몇 장과 길지 않은 사연을 뻥튀기하여 침 마르게 자랑할 생각으로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
그리고 이산가족이 상봉하여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떠올리며
김포국제공항에서 아내와 재회를 하는 것.
나도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삶이 수만가지라면
하나쯤은 영국에, 또 하나는 프랑스에, 이태리에, 독일에, 체코에, 스페인에,
내가 들렀던 모든 곳에 남겨 두고 오고 싶었다.
두고 올 수 없다면 척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삶은 하나이니 될 법이나 한 소리이던가.
척이라도 할 만큼 하나뿐인 삶이 한가롭던가.
떠난 자의 이야기 결말은 어찌 되었든 돌아온다는 것. 조여진 삶은 조르쥬 바타이유의 일탈행위 같은 관광만을 허락하고 있기에 나는 관광객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하든지 관광객을 부정하고 싶었다.
여행자인 척하고 싶었다.
어느 도시에 하루를 체재하더라도 열흘을 머무르는 느낌을 바랬다. 한 나라 특정 도시만을 돌아다녀도 한 나라를 두루 돌아다닌 체험을 원했다.
단지 그곳 인포메이션 창구에서 직원과 사무적인 대화 몇 마디 나누더라도
신을 만난 기적을 꿈꾸었다.
문득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마을에 한 젊은이가 살았다.
어느날 젊은이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성을 찾아
짝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친구에게 고백하고 길을 떠났다.
마을에 남은 친구는 젊은이를 기다렸지만
수십년이 흘러도 길을 떠난 젊은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무척 지친 늙은 행려병자 한 명이 마을에 왔다.
늙은 행려병자가 바로 길을 떠난 젊은이였다.
마을에 남아 있던 친구는 말했다.
“결국 멋진 여성을 찾지 못한 모양이로군.”
행려병자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닐세. 찾긴 찾았다네.
그런데 내가 찾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성도
나같은 결심을 하고 있더군.”
나는 유럽에 왜 갈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찾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 끝에 내 행위를 관광에 낙서하기라 정의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본디 뿌리는 같지만
열린 모양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가지각색인 꽃봉오리와 같아야 재미난 법이기 때문이다.
가지각색 꽃봉오리가 열려 저마다 씨를 뿌리다 보면
언���가는 원래 꽃봉오리와 천양지차인 꽃봉오리가 열리지 않겠는가?
이런 꿈이라도 꾸는 것이 소심한 나로서는 적당한 일일 것이다, 아래와 같은 공처가 소리를 남발하면서.
아내와 종종 짧은 이별을 경험하는 자는 결코 긴 이별을 꿈꾸지 않는다.
* 나타냐와 같이 못간 여러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다음에 갈 기회가 온다면 식구들 모두랑 같이 갈 것입니다. 마지막 사랑을 언급한 건
베르톨루치가 아프리카에서 기대한 오리엔탈리즘을 구한 것과 비교하여
유럽에서 저의 유럽주의 정체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나는 왜곡되었다는 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베르톨루치가 순응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할 수 있으나
오리엔탈리즘을 피해자 중심주의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역반응 중 하나가 뒤라스의 연인이 아니겠습니까?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
* 마지막 사랑 (The Sheltering Sky) 자료 모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주연 : 데보라 윙거, 존 말코비치 장르 : 드라마 등급 : 18세 이�� 상영시간 : 139분 제작년도 : 1990
정체성을 찾아가는 현대인의 여정과 북아프리카 사막의 엑조티즘 아프리카 북동부의 모로코의 항구 탕헤르. 여기에 결혼 10년을 맞이하는 부부 포트와 그의 아내 키트가 권태를 잊기위한 여행으로 찾아온다. 포트는 수년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음악가. 북 아프리카로의 여행이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어주고 그의 결혼 생활도 새롭게 신선한 감정을 갖고 재출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여행에 지쳐 있었고 남편과의 관계가 회복되리란 생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들의 여행 친구 존 터너가 등장한다. 그는 이 기묘한 부부에 매료되고, 더구나 키트의 미모에 빠져 버린다. 포트는 그 자신이 어디로 갈 지 결정하지 않았지만 여행객이 아닌 순례자로서 도시로 부터 가장 먼 곳까지 가보기를 원한다.
키트는 존 터너와 불륜의 관계를 맞고, 포트는 아랍 여자에게 깊이 빠진다. 모든 것은 알 수 없는 혼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포트는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고,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사람이 키트였다는걸 깨닫고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세상을 떠난다……키트는 모든것이 늦었음을 후회하지만…모든것을 잃고 의욕을 상실한 키트는 사막을 떠돌고 그곳에서 유목민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데…..
원작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근거없이 난해하고 우울한 영화. 베르톨루치는 어느새 초기에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정치적 의식과 복합적인 상징과 은유의 깊이를 모두 상실한 채 균열된 실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의 수렁에 참담하게 무너져 버렸다.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카메라만은 여전히 탁월하다. 모든 것을 다 빼버리고 차라리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카메라로 잡아낸 사막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보는 편이 훨씬 감동적일 대가의 졸작. 그럼에도 주인공 역을 맡은 데브라 윙거와 존 말코비치는 최선의 연기를 보여준다. 끝없는 사막을 잡아낸 비토리오 스토라로의 촬영과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도 언제나처럼 훌륭하다.
<마지막 황제>와 <리틀 부다>의 중간에 제작된 베르톨루치의 못말리게 왜곡된 오리엔탈리즘 3부작 중의 한 편. 만사가 권태로워진 포트와 킷 부부는 옛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지만 그들은 끝없이 겉돌기만 하고 각자 다른 이들과 정사를 나눈다. 결국 포트는 말라리아에 걸려 괴로워하다 죽게 된다. 죽음의 순간에 비로소 자신이 아내를 사랑했으므로 두려움 없는 10여 년의 세월을 누릴 수 있었음을 깨닫고 이 사실을 고백한다. 킷은 이 고백을 ��고 처절하게 울부짖지만 모든 것은 이미 끝나 버렸고 자포자기한 그녀는 사막을 떠돌다 만난 유목민 대상의 아내들 중의 하나가 되어 생활한다. 어느 날 시장에서 화폐를 사용하려다 몰매를 맞고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남편의 친구이자 옛 정부인 터너에 의해서 구출된다. 그러나 그녀는 터너를 외면한 채 포트와 함께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묵었던 호텔의 카페를 찾아 간다.
베르톨루치 조숙했던 천재, 고다르와 함께 68년의 영감으로 영화를 만들던, 왕년의 “마르크스주의자”. 베르톨루치는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에 이은 60년대 이탈리안 네오 시네마의 기수이자 동시대의 장 뤽 고다르에 견줄만한 영화사적 가치가 있는 감독이다. 베르톨루치는 1940년, 이탈리아에서 시인이자 영화 평론가인 아버지와 혁명가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살때 잡지에 시를 발표했고 15살때 습작 영화를 찍었던 조숙한 쳔재다. 로마 대학을 중퇴한 뒤에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첫 장편 영화 <아카토네 Accatone>(1961)에서 조감독으로 일했고 22살에는 시집을 발표해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의 첫번째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그의 전성기 영화들은 68년 유럽 혁명을 정점으로한 60년대 유럽의 정치적 상황에 영향받았는 데, 형식면에서는 기존의 관습적인 양식을 파괴하고 주제면에서는 체제에 순응하려는 의식과 내부에 잠재된 저항의식 사이의 대립을 다루었다. 64년 칸느 그랑프리 수상작이자 두번째 연출작 <혁명전야>가 이런 경향을 대표하고 70년의 <거미의 계략>과 <순응주의자>에서는 성의 정치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성의 정치론은 72년 최대의 화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르러 베르톨루치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경향이 된다.
71년에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전국 노조의 후원으로 <가난뱅이는 빨리 죽는다>는 영화를 찍어 선거 기간 동안 거리에서 상영하기도 했는 데, 실제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76년에는 대작 <1900년>을 다국적 스타들과 함께 화제속에 완성하지만, 영화 시스템의 상리 추구로 곤혹을 치륐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모호해진 영화는 관객과 비평계에게 외면당했다. 그 후로 베르톨루치는 주목 받지 못한 2편의 영화를 더 찍었고 6년만인 87년에 <마지막 황제>를 내놓으며 헐리우드에서도 환영받는 감독이 된다.
베르톨루치는 그의 영화속 주인공처럼 순응주의와 혁명주의의에서 순응주의를 선택했고 아카데미는 10여년전의 냉대에서 9개부문의 수여로 그의 변신을 치하했다.
날지 못하는 돼지는 그저 평범한 돼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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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길다면 길었던 연휴 마지막 날, 방바닥을 뒹굴면서 사노 요코 아줌마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보다가, 2차대전 때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의 수용소 생활을 경험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재밌는 것은, 극도의 추위와 극한의 배고픔 속에서 ���로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먹을 것과 영화, 그것도 프랑스 영화였단다. "야아, 영화란 그런 거야. 그때 내가 살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초밥을 한 번 더 먹고, 프랑스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였어." 사노 요코 아줌마가 내린 결론은, 인간이 극한에 이르러 추구하는 것이 바로 먹을 것과, 먹을 것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 즉 ‘몸과 정신’의 두 가지라는 것. 그러면서 아줌마는 자신이 죽을 때에 예전에 인상 깊게 보았던 〈디바〉라는 오페라를 떠올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흠~ 그렇단 얘긴가. 사람이 극한의 이르면 가장 원초적인 것과 가장 문화적인 것을 동시에 찾게 된다는 얘기렸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나는 죽는 순간에 어떤 영화를 떠올릴까 하는 생각이 이어졌는데, 그게 좀 황당하다. 때는 1985년,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중딩들이라면 빠짐없이 통과해야 하는 ‘체력장’ 날이었다. 오후에 마지막으로 오래달리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누가 약속을 한 것도 아니건만 우리는 검사장 근처에 있는 영화관 앞에 모였다. 마치 이런 날 일찍 귀가하면 죄 짓는 것처럼. 마침 우리가 끝나는 시간이 다음 회차가 상영되려는 참이었다. 어쩜 그렇게 시간도 잘 맞추는지… 그때 걸려 있던 영화가 바로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그렇다. 굉장히 익숙한 제목이다. 물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 영화를 보면 드러날 터이고, 애초에 두 영화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을 거라 기대한 사람도 없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누가 봐도 B급 애로영화라고 딱 써놓은 영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분명 이 영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었을 텐데 왜 당시에는 아무런 제약 없이 극장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개봉관은 아니었던 모양. 그래도 이렇게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단 말인가. 어쨌거나 입장에는 문제가 없었고, 영화는 시작되었고, 중딩에게는 재밌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영화 내용이 무엇인지 등등 하나도 생각나는 게 없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게 있다면 여주인공이 바닷가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맞으며 하염없이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때 뭔가 끈적한 배경음악이 깔렸다는 것. 정황상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음악이 흐른 것 같지는 않은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으니 지금으로서는 이렇다 저렇다 할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시점에서 왜 탱고 어쩌고 하는 영화인가. 지금 나름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란 얘기지. 삶을 마감하는 때에 그 사람의 삶이 압축된 형태로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는 말도 있는데, 그 많고 많은 영화 중에서, 무슨 감동을 받았던 영화도 아니고, 영화사적으로 일말의 의의를 가지는 영화도 아니고,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던 것도 아니고, 그 후로 내 삶의 궤적을 바꾸어 놓았던 영화도 아니고, 함께 본 사람들이 그리워서도 아닌데, 뭐 이따위 영화가 튀어나오냐고. 무슨 맥락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혹시 프랑스 영화라는 것 때문인가. 그렇다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정도로 타협을 볼 것이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서울에서…〉는 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 말고는 도무지 내 의식의 흐름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 뭐 굳이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하긴 그러고 보니 〈서울〉과 〈파리〉는 내가 본 영화와 안 본 영화라는 차이가 있군. 이쯤 되면 아무리 B급 영화라 할지라도 다시 한번 보고 싶을 만도 한데, 이런 영화 볼 시간은 당연히 없고, 또 그럴 시간을 내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이러다 정말로 마지막 순간에 다시 이놈의 영화가 덜컥 생각나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것. 아 그럼 정말 안 되는데. 이거 말고 재밌는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안 돼! 이럴 바에는 차라리 최후의 순간에 먹는 쪽으로 생각을 하자구. 탕수육 어때, 탕수육. 떡볶이나 라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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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욕망의 모호한 대상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 Cet Obscur Object Du Desir,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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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욕망의 모호한 대상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 Cet Obscur Object Du Desir, 1977)
프랑스, 스페인 | 드라마 | 103 분 | 개봉 1999.03.27
세련된 중년 사업가, 마티유는 7년 전 부인과 사별한 후, ‘사랑하지 않은 여자와는 절대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가진 남자다. 마티유는, 하녀 콘치타에게 홀딱 반해, 하루가 멀다하고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며 돈으로 환심을 사려한다. 정작 자신을 데리고 노는 건 콘치타인지도 모른 채. 아슬아슬하고도 감질나게 남자를 농락하던 콘치타는 어느 날 갑자기, 환멸의 편지 한 통과 함께 사라진다. 그후 5개월, 프랑스 파리의 근교 호화별장. 마티유가 우연히 들른 술집에서 재회하게 되는 두 사람. 그날부터 둘의 은밀한 동거는 시작되는데. 콘치타는 기상천외한 팬티를 입고 첫날밤을 치르는가 하면 “나의 모든 것을 주면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달콤한 변명으로 그와의 잠자리를 거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티유는 자신의 집에서 젊은 애인과 놀아나던 콘치타를 발견하고 내쫓는다. 7개월 후, 스페인 세비아의 한 작은 마을. 점점 시들어가던 마티유는 참다못해 콘치타를 찾아간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고.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스트립쇼를 하고 있는 콘치타의 충격적인 모습. 그녀의 팬티는 난공불락이 아니었던가? 마티유는 콘치타에게 집을 한 채 사주고 일을 그만 두게 한다. 밤마다 펼쳐질 그녀와의 멋진 밀애를 상상하며. 마침내 그녀의 비밀스런 초대가 있던 날. 콘치타는 철문밖에 마티유를 세워놓고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인다. 다음날, “당신을 시험해보기 위한 연극이었노라”라 애원하는 콘치타. 하지만 마티유는 파리행 짐을 싼다. 다시 스페인 세비야 기차역. 마티유는 오늘 기차표를 끊은 것이며, 그를 붙잡으려 쫓아온 콘치타는 물을 뒤집어 쓴 것. 그러나 마티유의 이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
페르난도 레이 Fernando Rey 캐럴 부케 Carole Bouquet 안젤리나 몰리나 Angela Molina 줄리안 베르도 Julien Bertheau 안드레 웨버 Andre Weber 밀레나 뷰코틱 Milena Vukotic 마리아 아스퀘리노 Maria Asquerino 앙드레 라콤베 Andre Lacombe 이사벨르 사도얀 Isabelle Sadoyan Juan Santamaria
연출 부문 루이스 부뉴엘 Luis Bunuel : 감독 루이스 부뉴엘 Luis Bunuel : 각본 장 클로드 까리에 Jean-Claude Carriere : 각본 피에르 루이스 Pierre Louys : 원작 에드몬드 리차드 Edmond Richard : 촬영 세르지 실버맨 Serge Silberman : 제작 리차드 와그너 Richard Wagner : 음악 실비 드 세곤자크 Sylvie de Segonzac : 의상 헬렌느 플레미아니코브 Helene Plemiannikov : 편집
초현실주의 영화 작가 루이스 브뉴엘(Luis Bunuel)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성과 폭력 사이에서 대상화되고 있는 인간 욕망(도덕, 사회, 문화적)의 탐구가 이루어지는 다소 난해한 작품. 프랑스 작가인 피에르 뤼의 소설 ‘여인과 꼭두각시(La Femme Et Le Pantin)’를 원작으로 성에 대한 강박감을 모티브로 했다. 부르조아 사회의 허상적인 일면들을 이 영화 속에서는 인물의 개인적인 심리의 해석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늙은 부호가 한 여자(두 배우에 연기되는)에 대해 완전히 사로잡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녀는 그를 실의에 빠지게 한다. 초현실적인 사랑이야기를 통해 정신분석학, 테러리즘 등 현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원래 여주인공 역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리아 슈나이더가 캐스팅되었으나, 한창 영화를 찍던 부뉴엘은 갈수록 슈나이더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되고, 갑자기 찍었던 필름을 모두 폐기하고, 과감하게 신인 케롤 부케와 안젤라 몰리나를 캐스팅하게 된다. 따라서 여주인공을 2인 1역을 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부유한 홀아비 마티유(페르난도 레이 분)가 세빌에서 파리행 급행열차를 타면서 시작된다. 기차가 출발하려 할 즈음, 콘치다(캐롤 부케, 안젤라 몰리나 2인 1역)가 급히 마티유�� 쫓아오고, 마티유는 그녀의 머리에 물을 퍼붓는다. 그와 같이 타고 있던 탑승객들이 당황해하자 마티유는 그녀를 살해하는 것보다는 물을 끼얹는 것이 더 낫다고 해명을 하고, 영화는 마티유의 슬픈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그려나간다. 호화식당에서 식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업무를 가지지 않은 중년의 부르주아 마티유는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는 아름다운 콘치타를 발견하고는 늘 하던 대로 그녀를 침대로 이끌려고 한다. 그러나 콘치타는 이를 거부하고 마을을 떠나가 버리고, 단 한번도 거부당해 본 적이 없는 마티유는 더욱 몸이 닳아 그녀의 엄마를 돈으로 구워 삶아 기어이 콘치타를 애인으로 만든다. 그러나 콘치타는 마티유의 관대함을 수용하고, 사랑을 약속하지만 자신이 마티유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싫다며 성적인 관계만큼은 끝내 거절한다. 마티유와의 성적 관계를 거절하면서도 콘치타는 자신의 방에 젊은 남자친구를 재우는가 하면, 카바레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나체로 춤을 추고, 마티유가 금방 구입한 집안에서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주도권을 잃고 싶지 않다며 성적 관계를 거부하는 콘치타와 같은 이유로 결혼을 미루는 마티유 사이의 길고 긴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고.
영화를 참고할 만한 글(EBS 소개 글 인용). 여자는 남자의 육체적인 욕구를 조작하면서,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획득하려고 하면서, 서로가 상대방을 장악하려고 하는, 성적이고 초현설적인 남녀의 게임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테러에 의한 폭파와 살인을 배경처럼 삽입함으로서 정치적인 소요와 도덕적 파탄으로 가득찬 퇴폐적이고 소퇴해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브뉘엘식 풍자극이다. 브뉘엘은 인간은 폭력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며 폭력에 의하여 소진된다고 말하며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피에르 루이즈의 1898년도 소설 <인형과 여성>을 영화화한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루이 브뉘엘의 30번째 작품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모든 영화들이 그렇듯 욕망과 인간들의 성격의 다양성을 담아내고 있으며, 성적 관계와 욕망의 어두운 면에 관한 브뉘엘의 가장 완벽한 진술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두 명의 여배우가 한 인물을 연기하는 색다른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007시리즈의 본드걸로 유명한 프랑스의 여배우 캐롤 부케와 스페인 출신의 배우 안젤라 몰리나가 여주인공인 콘치타 역을 맡아 상반된 성격으로 번갈아 출연하고 있는 것이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관능과 순결에 대한 얼음같은 헌신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여자, 콘치타는 늘 신비성을 강조해온 브뉘엘 감독에 의해 관객들의 모호한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Serge Silberman Presente Un Film De Luis Bunuel
극장개봉 : 욕망의 모호한 대상 (1999.03.27)
VIDEO 출시 : 욕망의 모호한 대상 (1999.06.00)
TV 방영 : 욕망의 모호한 대상 (2003.09.06)
번호 영화제 후보부문 관련인물 수상여부 1 제11회 모스크바 영화제 (1979) 공로상 루이스 부뉴엘 Winner 2 제12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1978) 감독상 루이스 부뉴엘 Winner 3 제3회 LA 비평가 협회상 (1977) 외국어영화상 루이스 부뉴엘 Wi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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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욕망의 모호한 대상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 Cet Obscur Object Du Desir,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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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욕망의 모호한 대상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 Cet Obscur Object Du Desir, 1977)
프랑스, 스페인 | 드라마 | 103 분 | 개봉 1999.03.27
세련된 중년 사업가, 마티유는 7년 전 부인과 사별한 후, ‘사랑하지 않은 여자와는 절대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가진 남자다. 마티유는, 하녀 콘치타에게 홀딱 반해, 하루가 멀다하고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며 돈으로 환심을 사려한다. 정작 자신을 데리고 노는 건 콘치타인지도 모른 채. 아슬아슬하고도 감질나게 남자를 농락하던 콘치타는 어느 날 갑자기, 환멸의 편지 한 통과 함께 사라진다. 그후 5개월, 프랑스 파리의 근교 호화별장. 마티유가 우연히 들른 술집에서 재회하게 되는 두 사람. 그날부터 둘의 은밀한 동거는 시작되는데. 콘치타는 기상천외한 팬티를 입고 첫날밤을 치르는가 하면 “나의 모든 것을 주면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달콤한 변명으로 그와의 잠자리를 거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티유는 자신의 집에서 젊은 애인과 놀아나던 콘치타를 발견하고 내쫓는다. 7개월 후, 스페인 세비아의 한 작은 마을. 점점 시들어가던 마티유는 참다못해 콘치타를 찾아간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고.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스트립쇼를 하고 있는 콘치타의 충격적인 모습. 그녀의 팬티는 난공불락이 아니었던가? 마티유는 콘치타에게 집을 한 채 사주고 일을 그만 두게 한다. 밤마다 펼쳐질 그녀와의 멋진 밀애를 상상하며. 마침내 그녀의 비밀스런 초대가 있던 날. 콘치타는 철문밖에 마티유를 세워놓고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인다. 다음날, “당신을 시험해보기 위한 연극이었노라”라 애원하는 콘치타. 하지만 마티유는 파리행 짐을 싼다. 다시 스페인 세비야 기차역. 마티유는 오늘 기차표를 끊은 것이며, 그를 붙잡으려 쫓아온 콘치타는 물을 뒤집어 쓴 것. 그러나 마티유의 이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
페르난도 레이 Fernando Rey 캐럴 부케 Carole Bouquet 안젤리나 몰리나 Angela Molina 줄리안 베르도 Julien Bertheau 안드레 웨버 Andre Weber 밀레나 뷰코틱 Milena Vukotic 마리아 아스퀘리노 Maria Asquerino 앙드레 라콤베 Andre Lacombe 이사벨르 사도얀 Isabelle Sadoyan Juan Santamaria
연출 부문 루이스 부뉴엘 Luis Bunuel : 감독 루이스 부뉴엘 Luis Bunuel : 각본 장 클로드 까리에 Jean-Claude Carriere : 각본 피에르 루이스 Pierre Louys : 원작 에드몬드 리차드 Edmond Richard : 촬영 세르지 실버맨 Serge Silberman : 제작 리차드 와그너 Richard Wagner : 음악 실비 드 세곤자크 Sylvie de Segonzac : 의상 헬렌느 플레미아니코브 Helene Plemiannikov : 편집
초현실주의 영화 작가 루이스 브뉴엘(Luis Bunuel)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성과 폭력 사이에서 대상화되고 있는 인간 욕망(도덕, 사회, 문화적)의 탐구가 이루어지는 다소 난해한 작품. 프랑스 작가인 피에르 뤼의 소설 ‘여인과 꼭두각시(La Femme Et Le Pantin)’를 원작으로 성에 대한 강박감을 모티브로 했다. 부르조아 사회의 허상적인 일면들을 이 영화 속에서는 인물의 개인적인 심리의 해석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늙은 부호가 한 여자(두 배우에 연기되는)에 대해 완전히 사로잡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녀는 그를 실의에 빠지게 한다. 초현실적인 사랑이야기를 통해 정신분석학, 테러리즘 등 현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원래 여주인공 역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리아 슈나이더가 캐스팅되었으나, 한창 영화를 찍던 부뉴엘은 갈수록 슈나이더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되고, 갑자기 찍었던 필름을 모두 폐기하고, 과감하게 신인 케롤 부케와 안젤라 몰리나를 캐스팅하게 된다. 따라서 여주인공을 2인 1역을 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부유한 홀아비 마티유(페르난도 레이 분)가 세빌에서 파리행 급행열차를 타면서 시작된다. 기차가 출발하려 할 즈음, 콘치다(캐롤 부케, 안젤라 몰리나 2인 1역)가 급히 마티유를 쫓아오고, 마티유는 그녀의 머리에 물을 퍼붓는다. 그와 같이 타고 있던 탑승객들이 당황해하자 마티유는 그녀를 살해하는 것보다는 물을 끼얹는 것이 더 낫다고 해명을 하고, 영화는 마티유의 슬픈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그려나간다. 호화식당에서 식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업무를 가지지 않은 중년의 부르주아 마티유는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는 아름다운 콘치타를 발견하고는 늘 하던 대로 그녀를 침대로 이끌려고 한다. 그러나 콘치타는 이를 거부하고 마을을 떠나가 버리고, 단 한번도 거부당해 본 적이 없는 마티유는 더욱 몸이 닳아 그녀의 엄마를 돈으로 구워 삶아 기어이 콘치타를 애인으로 만든다. 그러나 콘치타는 마티유의 관대함을 수용하고, 사랑을 약속하지만 자신이 마티유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싫다며 성적인 관계만큼은 끝내 거절한다. 마티유와의 성적 관계를 거절하면서도 콘치타는 자신의 방에 젊은 남자친구를 재우는가 하면, 카바레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나체로 춤을 추고, 마티유가 금방 구입한 집안에서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주도권을 잃고 싶지 않다며 성적 관계를 거부하는 콘치타와 같은 이유로 결혼을 미루는 마티유 사이의 길고 긴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고.
영화를 참고할 만한 글(EBS 소개 글 인용). 여자는 남자의 육체적인 욕구를 조작하면서,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획득하려고 하면서, 서로가 상대방을 장악하려고 하는, 성적이고 초현설적인 남녀의 게임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테러에 의한 폭파와 살인을 배경처럼 삽입함으로서 정치적인 소요와 도덕적 파탄으로 가득찬 퇴폐적이고 소퇴해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브뉘엘식 풍자극이다. 브뉘엘은 인간은 폭력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며 폭력에 의하여 소진된다고 말하며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피에르 루이즈의 1898년도 소설 <인형과 여성>을 영화화한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루이 브뉘엘의 30번째 작품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의 모든 영화들이 그렇듯 욕망과 인간들의 성격의 다양성을 담아내고 있으며, 성적 관계와 욕망의 어두운 면에 관한 브뉘엘의 가장 완벽한 진술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두 명의 여배우가 한 인물을 연기하는 색다른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007시리즈의 본드걸로 유명한 프랑스의 여배우 캐롤 부케와 스페인 출신의 배우 안젤라 몰리나가 여주인공인 콘치타 역을 맡아 상반된 성격으로 번갈아 출연하고 있는 것이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관능과 순결에 대한 얼음같은 헌신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여자, 콘치타는 늘 신비성을 강조해온 브뉘엘 감독에 의해 관객들의 모호한 욕망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Serge Silberman Presente Un Film De Luis Bunuel
극장개봉 : 욕망의 모호한 대상 (1999.03.27)
VIDEO 출시 : 욕망의 모호한 대상 (1999.06.00)
TV 방영 : 욕망의 모호한 대상 (2003.09.06)
번호 영화제 후보부문 관련인물 수상여부 1 제11회 모스크바 영화제 (1979) 공로상 루이스 부뉴엘 Winner 2 제12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 (1978) 감독상 루이스 부뉴엘 Winner 3 제3회 LA 비평가 협회상 (1977) 외국어영화상 루이스 부뉴엘 Wi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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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윈터바텀 - 웰컴 투 사라예보//원더랜드//당신과 혹은 당신없이//더 클레임//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인 디스 월드//코드 46//나인송즈//수닭과 황소 이야기//관타나모로 가는 길//마이티 하트//제노바//킬러 인사이드 미//더 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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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윈터바텀 - 웰컴 투 사라예보//원더랜드//당신과 혹은 당신없이//더 클레임//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인 디스 월드//코드 46//나인송즈//수닭과 황소 이야기//관타나모로 가는 길//마이티 하트//제노바//킬러 인사이드 미//더 트립
나는 이제까지 그를 16번 만날 수 있었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1961년생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관심 중에 굳이 정치적인 부분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당연히, 이 시대가 아닌 지나간 역사 안에서 반면교사를 발견하는 것도 호기심 이상의 깊이가 있다.
모든 감독은 자신만의 주제를 따라 일관된 선을 그린다고 볼 때,
지금까지의 마이클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다양한 소재를 통해 같은 건물을 지을 뿐이다.
그의 집은 자유주의자로서 혹은 휴머니스트로서 삶에 향한 진정성의 자세라고 할 만하다.
책임지지 않는 곁눈질의 냉소에서 약간 벗어나 적어도 현상 자체를 인지하려는 의식은
작품 ‘광끼’나 ‘당신과 혹은 당신없이’, ‘나인 송즈’같은 이성애 드라마에서도 관철된다.
오히려, 그의 주변인적 사회의식이 드러나는 일련의 작품들은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서 있다기보다
지극히 관찰자로서의 비판적 온정만을 유지하려는 빛이 역력하다고 느껴진다.
현 영국의 감독들 중에서 신작들이 나올 때마다 눈여겨 보는 이는 몇이나 될까.
우선, 켄 로치가 떠오르면서 동류이면서도 다른 마이크 리와 스티븐 프리어스가 선두에 잡힌다.
‘트레인스포팅’ 이후 대니 보일이 들어오고, ‘새벽의 황당한 저주’ 이후 에드가 라이트가 참여했다.
복잡한 수학 공식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또다른 미학의 성취를 질문하는 피터 그린너웨이도 계신다.
영국과 미국을 오가거나 거의 미국으로 주저 앉으신 분들을 제외한다면
마이클은 그 중 중년에 속하는 감독이며, 필름 4를 통해서 자기만의 스탭을 가지고
줄창 지치지 않고 시대극과 미래극, 현대 애정물, 페이크 다큐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데뷔작 몇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행운을 지닌 감독이다.
( 영국 감독 중 현재 누구도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감독이 얼마나 있을가?
이는 그가 의도와 관계없이 그의 영화들이 그만큼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심지어는 마이클 윈터버텀 카페도 개설되어 활발히 활동중이다. )
내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큰 만족 없이 장인으로서의 솜씨 이상으로 큰 울림이나 은근한 은유가
살떨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다양한 시대적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흥미로웠다.
“광끼’와 “쥬드”의 대비되는 공간과 색감이 비디오를 통해 처음으로 내가 그를 알게된 경로라면
최근 그의 영화들을 쭈욱 읽어나간 이유는 오로지 전작주의의 못된 습관때문인 듯 하다.
그럼에도 큰 실망 없이 마치 미국 액션물을 보는 듯이 편안히 시간을 보�� 수 있었다.
1. 웰컴 투 사라예보 Welcome To Sarajevo(1997) : 불과 십여년전…파시즘은 잡초처럼 질기다.
아우슈비츠는 유태인의 2차 대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 대 인간의 억압이 숨쉬는 본능이 와글거리는 인류사 어디서나 발견된다.
학살은 이성으로 제어된 것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조율되고 감추어진 것이다.
그가 직접 발칸반도로 가서 고발한 이 작품은 이후 그의 다른 사회적 작품들의 출발점이 된다.
종교, 민족, 경제의 삼박자의 화약고인 보스니아 내전을 숙지하기에는
나약하면서 안전한 강대국 외국인 기자의 시선은 한참이나 미숙하지만,
동시대 영국의 다른 감독들의 관심이 주로 국내성이나 경제 계급에 머물렀을 때
과감히 스탭들과 국경을 넘어간 용기는 주목할만하고 그것이 나를 잡아끈 이유가 아닐가싶다.
2. 원더랜드 Wonderland,(1999) :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를 탈출할 수 있을까?
냉랭함과 거리 두기 사이 그 어정쩡함에서 참고 견디는 하층민의 현실을 가진
네남매의 빈틈으로 애정이 푹 새는 소리가 나는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전한다.
이런 세상은 뒤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상한 나라”임에 틀림없지만,
대안을 내놓기에는 아무런 반찬도 없다는 것을 자인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감독은 연인을 기차에 태우고, 관습처럼 아기를 낳고, 고독한 두 남녀를 재회하게 하지만
당신도 알고 나도 알듯이 그 모든 것은 잠시의 마취제 이상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으로 유치하고 진부하지만 “앨리스는 항상 여기에 살 수 밖에 없다”.
3. 당신과 혹은 당신없이 With Or Without You (1999) : U2 없이 혹은 슈베르트와 같이
< 아기를 ‘아직’ 낳지 못한 부부에게 부인의 첫사랑이 프랑스에서 ‘놀러’왔다. >
< >안을 넘어서는 의미도 이미지도 찾을 수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동명으로의 U2의 곡 뿐이다.
하지만, 그 경쾌하고 달콤한 노래는 바람난 두 남녀가 자동차를 타고 바다로 가는 관습 안에서만
단 한번 연주되고, 현실과 같은 영화 전반은 내내 슈베르트의 음악으로 덮힌다.
임신 확인서로 종결되는 장소는 역시 바닷가다, 인간들의 희망은 언제나 물에서 비롯된다.
4. 더 클레임 The Claim(2000) : 당신의 땅과 집을 옮겨서 치유되기 바라는 것들
베르너 헤어조크는 “휫츠카랄도”에서 실제로 보조출연진들을 동원해서 배를 산 위로 넘겼다는
전설을 만들었는데, 과대 포장된 영화판의 신화�� 수 있지만, 아주 힘들게 만난 비디오값마냥
그 이미지가 오페라와 오래 남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집은 설원을 지나 가족에게로 옮겨진다.
골드 러쉬는 오히려 아일랜드 대기근을 은폐하고 자본은 가부장제와 더불어
가족의 귀환과 봉합을 방해하면서 한편으로 탈출하려고 하지만, 실패는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
5.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 24 Hour Party People(2002) : 가시 철망 속에 처박힌 뒤에 만나는 너만의 하느님 !!
섹스 피스톨즈의 첫 공연에 48명이 모이든, 마지막 만찬에 13명이 있었든
너무 자주 객기에 차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주인공의 말마따나 중요하지는 않지만,
영국 락그룹의 탄생-성장-소멸 신화를 발화하는데 온갖 마약적 환몽만 가득하고
정작 그들에게 열광한 당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비어있는 것은 허전하다.
6. 인 디스 월드 In This World(2002) : 컨테이너에 담기지 않을 자유(본)를 찾아서
일당 천원 이상의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해서 가는 소년을 바라본 부산영화제 부산극장 2층의
맨 앞줄에는 쉴새없이 영화가 시작한 이후 내내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고 오고갔다.
나는 그들에게 신경질이 났고, 정작 소년이 갇힌 컨테이너의 굳건한 사각고정틀에는 무덤덤했다.
자비에 콜러의 “져니 오브 호프”를 비디오로 만난 이후, 혹은 멕시코인들의 미국경 밀입국을 다룬
영화들이 아니라도 서구 제국은 식민지 광물의 끝을 본 뒤에는 인간 자원을 강제로 송출하였다.
그 강제의 끝이 법안의 자유로 밑줄 그어진 이후 자본은 이제 직접 진출하거나 제 3국의 인민들이
스스로 몸둥아리를 바치러 목숨을 걸게 만들었다.
아직은 20여년전의 이 상황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빵과 장미”는 여전히 꽃을 피우기보다 조롱 속에서 조금씩 경감되고 있다.
“클레임”과 더불어 감독의 어떤 정점이 되는 이 작품은 전작에서의 지식인적 오류를 탈피하고 있다.
문제는 그 여정에 마음 편히 동참하기에는 독자들이 쭉 뻗은 다리가 불만족스럽다는 것에 있다.
7. 코드 46 Code 46 (2003) : SF의 계급 존재론이 근친 상간의 신화 속으로 내려앉다
실수로라도 살해하지 못할 친부가 없는 신화 속에서 복수해야 할 대상은 단순한 미래가 아닌
자본으로 함축된 거대 정밀 과학의 체제, 한 마디로 합리성의 촘촘한 만리장성이다.
남자가 굳이 출장을 가서야 동양인도 아닌 여자(어머니)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서구에는 이미
출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중국에 문화-이념적인 향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을 사막이 아닌 상하이에서 판매하면서, 든든한 보험을 저버리려는
탈출의 경주는 간단한 로맨스와 몽상적인 편집으로는 기억의 3 시제를 현재에서 해결하지 못한다.
어머니(과거)- 여자(현재)-낙태된 아이(미래)는 남자(아들,아빠,연인)의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상하이/미국 역시 자본/이국의 무모한 대립항을 벗어나지 않는다.
8. 나인 송즈 9 Songs(2004) : 욕망이 지배하는 일년동안은…참 작다.
이성이 내리앉은 자리에 몸을, 가능한 욕망을 갖다놓고 바껴치기 하시려는 분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몸의 철학”은 순전히 개체적이어서 탈주의 동력이 되기에 부족하다.
게다가 “몸의 철학”의 예술상이 모두 성관계에 있지만은 아닐터인데,
(우습지만 욕망으로 따지자면 식욕이 더하지 않을까싶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기까지 일련의 무미건조한 성애 영화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감각의 제국”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 사견이다.
마치 90년대 후반의 문단의 사소설적인 분위기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거대 담론 따위는 필요없어를 외치면서 몸의 울렁임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도는 가련하기까지하다.
두 남녀의 뒤엉킴과 영국 락 음악공연, 북극이라는 황량한 자연을 열/냉탕식의 반복으로
세꼭지점으로 등식화하는 이 지루한 이야기는 다만 평범한 로맨스일 뿐이다.
산뜻한 결말을 위해서 그냥 미국으로 간다라고 말하는 자막은 오히려 부족한 능력 이상이 아니다.
9. 수닭과 황소 이야기 A Cock And Bull Story(2005) :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어도, 시간과 잡담은 친구가 되네
꼬마는 자신의 작은 성기를 창틀에 희생당한다. 하지만, 아역으로 오히려 잘했다고 보장받고싶어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사소한 피크닉이나 시끌벅적한 파티 한 마당과도 같지만,
다만 하나의 결과물로 서로 다르게 말하고 바라보며 달려가는 과정만이 다르다.
그러므로, 그 결과물은 누구도 잡담하지 못할 엉뚱한 필름으로 남겨져서 제시되고
아무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해도 그 혼잡함을 다시 만나고싶지 않기에 이제 진짜 파티를 한다.
작품를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많은 영화 중에서 갸륵한 교훈을 던져 주신 작품들
펠리니, 트뤼포, 우디 알랜, 톰 디칠로 등의 가면을 벗은 반전과 영화/삶의 변증법을 기억한다면
아쉽지만, 마이클의 이 작품이 더듬더듬 하룻밤의 소동 정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마치 저 장면에서의 주인공이 거짓 자궁안으로 거꾸로 들려지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10. 관타나모로 가는 길 The Road To Guantanamo (2006) : 나는 여기 방 안 침대 위에서 대형 PDP로 당신들을 본다
나는 ‘인 디스 월드’이후 좀 더 안락해졌다. 관객의 두리번거림이 싫어서 내 안에 극장을 만들었다.
물론, 2년을 2명이서 적금을 부어서 다시 1년을 기다려 큰 방으로 이사한 후에야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사이에 여전히 이라크 파병은 철수되지 않았고, 아프가니스탄에는 폭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전에는 작은 TV로 보던 외국 자료 화면을 3년전부터 유선방송을 거부한 이후로는 컴퓨터 모니터로
가끔 만나는 데, 그 때마나 철지난 시뮬라시옹의 찬란한 효용을 만끽하게 된다.
얼마전 뉴스에서 미국 민주당의 몇 의원들이 관타나모의 실제 보고를 받고도 묵인했다는 고발성
기사가 나왔는데, 9/11 이후 이슬람에 대한 악마적인 반향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문명의 충돌’을 이야기하는 보수 학자들에게는 황당하겠지만, 속내는 ‘문명의 말살’에 있지 않을까?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여기 집 안에서 당신들의 처참한 5년을 숨 죽이며 응원하는 도리만 갖는다.
물론, 같은 방의 친구는 경제가 어려운 나라의 아이의 학자금으로 만원을 보내긴 하지만 말이다.
국내도 국외, 국제 무대의 참혹극을 마주하는 안방의 소시민은 두 손이 스스로 묶여있다.
그동안 타인들은 총탄으로 공기 구멍이 뚫려진 컨테이너에 짐짝처럼 시체와 동거할 것이다.
11. 마이티 하트 A Mighty Heart (2007) : 반대편의 김선일”적 혹은 관타나모의 얕은 속살
역사상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최강제국인 미국이 최근에 두려워하는 선은 단 하나다.
그것은 냉전 시대 이전의 두려움이 귀환한 듯 하지만, 그 숫자와 경제/자원이라는 겉포장이 다르다.
2020년대에 미국의 총생산 규모를 넘어선다는 만리장성이 푸틴 이후의 러시아와 결합하고 거기에
인도라는 원시 시대의 잠룡이 하나의 선을 이룩한다면 무지막지한 미국도 슬쩍 겁이 날만하다.
2002년의 미국 주요언론의 기자 테러 납치 살인사건의 당사자가 쓴 소설을 영화한 것이라는 배경을
무시한다면,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속편이랄 수 있다.
서구 지식인의 자유주의 시각은 구체적 국제정세보다는 테러리즘의 파편의 흠집을 찾기에 바쁘기에
이 납치 ��건에 국내 독자가 유혹된다면 그것은 반대편의 김선일’적’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국가 정확히 국가 내 자본가들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생명 정도는 언제나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대전제 아래서 그것은 동류일테지만, 상대편 나라의 대통령까지
움직일 수 있는 열강의 힘과 보잘 것 없는 대처라는 점에서는 나란한 평행선일 수 밖에 없다.
기존의 정치적-납치 실종극이 가졌던 긴장감과 드라마틱함의 관객 함몰을 상당히 견제하면서
주변 인물의 감정 과잉보다는 냉철하고 과학적이며 고문도 마다하지 않는 수사를 따라가는
이야기는 중간중간 휴지를 파키스탄 아기에게 두는데, 이는 결말부 여주인공이 작별을 고하는
위 장면에 다다르면 주제의 함축을 감추지 않는다.
안젤리나 졸리의 국외 입양아 가족과 아프리카 등지의 자원 봉사, 기부활동 등과 확실히 겹쳐지는
장면은 파키스탄의 국경일에 가축을 잡아 가족, 이웃, 빈민과 나눈다는 음성 해설에 이르면
평범한 휴머니즘과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작품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영화 감독이 그렇듯 마이클 또한 그의 몇몇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들 안에서
아주 가까운 참혹한 과거의 겉그림을 생존자와 더불어 고발하듯 전해주지만,
세계 체제적인 면이나 국제정치경제 또는 자원의 약탈에 대한 심도깊은 고찰이나 대안 없이
독자에게 우리 시대 가장 불행하고 어두운 나날들을 사는 이들을 작게나마 밝혀주는 데 힘을 쏟는다.
14. 제노바 Genova(2008) : 걸어서 걸어서 정착하는 땅
첫번째는 방향성의 차이라고 생각한��.
니콜라스 뢰그의 걸작 “돌아보지 마라 Don’t Look Now(1973)”를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본편은
“제노바”라는 제목에서부터 선배가 내왕했던 같은 이탈리아땅 베니스와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선배는 가족 상실극에서 극단적인 환영 幻影을 통해 환영 歡迎받을 수 없는 외부인의 유입으로 옮겨갔다면
후배인 마이클 윈터바텀은 가족 상실극의 성장통과 치유지로서 제노바를 선택했음을 분명히 했다.
두번째는 공간에 대한 두려움과 낯설음, 그들이 쌓아올라가는 기괴함과 친숙함에서
선배인 니콜라스 뢰그가 철저하게 주술적인 사유 안에서 이방인의 침입을 허가하지 않는 장막을 쳤다면
후배는 가능한 자연스러운 유혹과 방황, 죽은 이와의 조우를 통해서 현실을 걷어내려는 시도를 한다.
여기서 문제는 베니스와 제노바 두 공간을 다루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른 정서적 풍경일텐데
선배가 자신의 의도에 맞게 호러적이었다면 후배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집착하거나
초반의 “파라노말 액티비티”같은 알갱이들이 만져지는 촉감의 화���을 이어가지 않고
죽은 엄마의 환영조차 튼실한 맥이 없이 부유하는 듯한 느낌만 던져준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무수한 가족 상실극의 장르 안에서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가보지 않은 타국에서 가지는 이질감으로 결핍을 보충하려는 시도를 한다.
성공 여부를 말하기보다 가족 전원이 어머니-아내의 빈 자리를 감내한다는 분위기보다
그저 막내딸의 치유를 위해 관습적인 도피를 시도했다는 건조함만이 극 내부에 붕붕 뜬다.
카메라는 좀 더 낮은 위치에서 제노바의 골목길과 높은 건물의 끝머리를 올려다보았어야하며
인물들은 현실과 호흡하면서도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불안한 이탈의 징후를 포착했어야한다.
아버지 교수는 평면적이고, 큰 딸은 다소 발작적이고, 작은 딸은 너무 순종적이다.
그들이 종결부 한 자리에 모여 끌어안는 장면은 고민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나마 제노바에 정착하기로 한 가족의 아침 등교 라스트 시퀀스의 처리보다는 참을만하다.
최근에 가족 상실극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장르 안에서의 핵심은 그들이 어떻게 상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가에 대한 감독의 대안이다.
동기와 과정과 결과, 이 세가지를 극 내부에서 인물을 통해 전달하고 흐르게 하는 것은 쉬운 도식이 아니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애시당초 동기와 과정보다는 결과와 분위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듯 하다.
해변과 피아노와 오래된 교회와 주변 인물들에게서 그는 좀 더 다른 종류의 애정을 불어넣어야했다.
니콜라스 뢰그도 유명한 결말부의 공포를 갑작스럽게 선사했지만 일관된 반면
마이클 윈터바텀의 본편에서의 일관성은 처음부터 방향타를 잘못 잡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이 그가 의도한 최선이라면 관객으로서 내가 탓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다.
적어도 나는 그의 본편 속 무수한 걸음들이 그리 슬퍼보이지 않았다.
15. 킬러 인사이드 미 The Killer Inside Me(2010) : 프로이드는 엉덩이 때리라고 안 시켰다 얘야.
마이클 윈터바텀도 어느듯 쉰 50을 넘겼다.
이미 영국의 중견 감독 대열에 들어선지는 오래되었고, 국내에는 “쥬드” 이후 거의 모든 작품이 소개되었다.
본편 “킬러 인사이드 미”와 소재의 유사성 – 보수적인 이성애를 넘어선 섹슈얼리티를 소유한 살인자-로 인해
비교될 수 밖에 없는 “버터플라이 키스(1995)” 이후로 그는 18년간 쉬지 않고 작품 21편을 영화사에 상재했다.
아시다시피, 마이클 원티버텀의 여정은 대략 세 가지 길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째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다큐 형식을 차용한 일직선적인 발언인데
“월켐 투 사라예보”로부터 시작하여 “인 디스 월드”, “관타나모로 가는 길”, “마이티 하트”,
“쇼크 독트린”을 비롯하여 아직 접하지 못한 “약속된 딸(2011)”까지 그의 필모 중 3/1 가량을 차지한다.
두번째 부류는 토마스 하디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쥬드”를 비롯한 “더 클레임”, “트리쉬나” 등을 비롯하여
본편인 “킬러 인사이드 미” 등의 작품으로 여기에 “버터플라이 키스”, “광끼”, “코드 46”, “제노바” 등을 더한다면
논자에 따라서는 마이클 윈터바텀의 각종 장르 도전이라는 표현으로 뭉둥거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코드 46″이나 본편 “킬러 인사이드 미”, ‘나인 송즈” 등은 장르물로서 확연한 색태를 보인다.
세번째 부류는 마이클 윈터바텀식의 수다방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류인데,
“원더랜드”, “당신과 혹은 당신없이”,”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 “나인 송즈”, “수닭과 황소 이야기”, “더 트립”까지를
포괄할 수 있는데, 그 중 “수닭과 황소 이야기”, “더 트립”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면
나머지 4작품은 일종의 일상 다큐적 형식으로 영국 청년층의 현 주소를 대변한다.
본편 “킬러 인사이드 미”는 유명한 범죄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기존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영화 장르의 공식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오직 주인공 남성만의 캐릭터화를 위해서 다른 캐릭터들 모두를 그야말로 주변화시켜버린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작정하고 관객들에게 “이 남자를 보라”라고 강요하다시피한다.
영화는 흔한 할리우드 연쇄살인마극이 가지는 추적 스릴러의 양식은 거부하면서
오직 주인공 루 포드의 듣기조차 거북한 목소리의 일관성을 통해서 관객의 청력 인내심을 시험하면서
사건의 범인이자 주인공의 성적 일탈과 살인 등의 과거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보고서 형식을 취한다.
이같은 과정 하에서 주변 인물들, 노동조합장, 취객, 동네 비행청년, 늙은 보안관, 마을 유지 등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제시카 알바나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하는 두 여인마저도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위해서
그냥 거기 놓여 있는 도구처럼 사용된다.
문제는 주인공의 성적 이상 심리와 살인 충동과 과정 비롯하여 어머니로부터 받은 성적 영향까지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동원된 듯한 인공성이 극을 초라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흔히 사용되는 주제의 암시 시퀀스인 도서의 책 제목을 사용한 위 장면에서
주인공은 성경을 뽑아들지만, 그 옆에 놓여진 지그먼트 프로이드의 책들이 제목 인쇄체가 더 크게 드러난다.
전후 미국 서부의 한적한 마을의 SM적 살인마라는 존재는
흔히 안정과 보수, 호황기 내부에 숨겨진 제거될 수 없는 불안을 내포-지시하기 마련이지만,
마이클 윈터바텀의 어머니 살해와 아버지 자살, 형의 타살이라는 가족도는 무난한 관습의 감옥을 탈주하지 못한다.
가령, 그가 반전으로 제시된 부활한 제시카 알바와 마지막으로 나누는 “사랑”이라는 언설은
가족과 국가를 유비하는 전후 내밀하게 부패해가는 관계의 지옥도로 승화시키기에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내 곁에 살인마가 있고, 내가 살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영화의 엔딩처럼 화염에 사라져야만 하는 이유를 가졌는지
호기롭게 점검해봐야하는 기회를 유혹적으로 던질만큼 “킬러 인사이드 미”는 자극적이도 현명하지도 못하다.
16. 더 트립 The Trip(2010) :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자넨 인생-여행을 장르화했네.
개인적으로 여행이라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혐오한다.
내가 전혀 모르는 가보지 못한 곳을 그저 풍광이나 음식을 즐기기 위해 가는 것이란 편협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전지구적 차원에서 보자면 관광이란 상품을 통한 일종의 위력적인 착취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내게는 아직 한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부모님이 계시는 처지라,
고령의 두 분도 보내드리지 못한 이국땅을 나 좋자고 가는 게 선듯 내키지 않는다.
가려는 곳의 역사적, 문화적 지식도 없이 가서 우두커니 서서 감탄사만 연발하거나
그 곳에는 막연히 무엇인가가 있으려니 하고 떠나는 식은 로드 무비에서나 가능한 발상 아닌가싶다.
이같은 못난 고정관념에 찌들어있는 입장에서 “더 트립 – 여행”이라는 영화를 접하게되니
결국 육체의 경험보다는 기존의 영화 장르 안에서 본편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화 분류 중 세번째 일종의 수다방에 속하는 작품으로서 본편 “더 트립”은
같은 부류의 작품 중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과 “수닭과 황소 이야기”에서 주연을 맡았던
스티브 쿠건이라는 배우 자신을 실명으로 등장시키면서 사적인 외피를 두른 공적인 영화작업의 형식을 갖춘다.
흔히 상상되는 둔중하고 심연을 알려고 하지 않는 목적없는 로드 무비의 예술성을 외면하고
본편은 이제 45살을 바라보는 스티브 쿠건이라는 코미디 배우가 가지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개인사를
영국의 유적들 – 워즈워드나 쿨리지 같은 시인들의 마을 – 이나 유명한 레스토랑과 풍광을 순례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공간으로 여행의 일차원적인 장르성에 주력한다.
여행이란 일상에서의 무단이탈이 아니라 일상과 함께할 수 밖에 없는 속박의 다른 형태라는 점에서
스티브 쿠건이 자신의 연인과 아들과 통화하는 시퀀스들은 현실성의 결실을 낳는데,
아닌게 아니라 본편 “더 트립”의 핵심은 여행은 평상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라는 관습어구를 증명하는데 주력한다.
스티브 쿠건이 악몽 속에서 자신의 스캔들이나 벤 스틸러(실제 출연한다.)를 만나 배우로서의 급상승을 꿈꾸는 장면은
그가 어떤 여행으로부터도 자신의 현재 배우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우스꽝스럽게 드러낸다.
( 영화 속에서 호명되는 감독들은 마이클 윈터바텀의 입장에서 씌여진 것이라면 흥미롭다.
폴 토마스 앤더슨, 웨스 앤더슨, 노아 바움백, 토드 헤인즈, 알렉산더 페인 등이 할리우드 내 작가주의 감독으로 호칭된다.
형제 감독들에게도 주목하는데 패럴리 형제, 리들리-토니 스코트 형제, 코엔 형제, 워쇼스키 형제 등도 언급된다.)
이와 더불어 같이 여행을 떠나는 역시 실명으로 출연하는 롭 브라이���과 더불어 하는 배우 성대모사는
( 안소니 홉킨스, 이안 맥켈렌, 마이클 케인, 숀 코넬리 , 더스틴 호프만, 멜 깁슨 등) 그 자체로는 코메디적인 요소이지만,
내적으로는 간단히 주류 영국 출신 유명 배우들에 대한 선망과 질시를 담고 있다.
성대모사란 타인을 흉내냄으로서 즉각적으로 그들과 같지 않음을 드러내는 못난이 그림자 목소리 놀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여행은 잠자리와 먹거리로 기억될 여지가 많다는 점을 감독 역시 잘 알고 있다.
수회에 걸쳐 반복되는 고급 레스토랑의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고급요리의 재료와 코스 진행은
식당 내부의 조리 과정을 다큐처럼 활용함으로서 현장성을 담보하지만,
동시에 장인의 정성들인 요리를 제대로 시식할 식감을 두 중심인물이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머뭇거린다.
주인공 스티브 쿠건의 전 여친을 미식가로 포장하는 전술을 방패삼아 깔아두고 있기는 하지만,
두 남자는 음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근거없는 불만과 거북함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더 트립”의 식도락적인 여행 취지는 그다지 목적적이지는 않다.
다만, 주방을 비춰주는 카메라는 주인공과는 관계없이 영국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선사한다.
낯선 여인으로 표방되는 여행에서 만나는 여인들과의 잠자리는
보여지는 육체적 관계를 생략하고 아침에 옷을 입고 나서는 여인의 뒷모습을 잡아냄으로서
주인공 스티브 쿠건의 외로운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들 중 한 명은 이미 한차례 만났던 인연이 있지만, 남자는 그것조차 기억을 못하는데,
이는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정착할 수 없는 남자의 내면을 일차원적으로 지시하는 기능을 한다.
근 5년내 만들어진 마이클 윈���바텀의 영화 중에서 만약 본편 “더 트립”이
관객으로 하여금 은근한 미소를 품을 수 있을 정도의 유쾌함을 안겨주었다면
그것은 본편이 여행이 가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을 성대모사라는 내외적인 기법으로 활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유일하게 자신의 영화에 3차례나 출연해준 스티브 쿠건이라는 영국 코메디 배우에게
헌정하는 측면도 없진 않았겠지만, 자신을 배우와 겹쳐서 놓으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정리하는 일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영국 변두리 마을의 문화 역사와 풍광,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빠뜨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라스트 시퀀스에서 스티브 쿠건이 미국 드라마의 주연 자리를 거절하고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는 태도는 여행 영화의 관습적인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편 내부의 과정상의 즐거움은 그다지 탈색되지는 않는다.
여행은 항시 떠나온 곳을 떠나지 못하고 떠나갈 곳을 찾지 못하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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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그의 작품 중 “광끼”, “쥬드”는 비디오로 접한 지가 10여년이 넘어 기억에 의존한 100자��이라도 무리가 있어 생략한다.
마이클 윈터바텀(1961. 3. 29 ~ ) – 다양한 길을 찾는 그가 그 여정에서 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
좋은 자료를 주신 카페 회원들에게 감사드리며 그의 초기작들이 곧 자료실에 올려지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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