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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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8월 11일 말라카해협 북단의 ‘사실상 무인도’인 페낭에 영국 국기가 게양됐다. 영국 동인도회사EIC를 대신해 말레이 술탄국 커다의 영지인 페낭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면서 프랜시스 라이트Francis Light(1740~1794)는 “풀루 피낭이라는 섬을 차지해 ’프린스 오브 웨일즈 섬‘으로 명명한다“고 선언했다.
실질적인 영국의 페낭 점거는 이보다 약 한 달 이르다. 7월 16일 라이트는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3척을 이끌고 페낭에 상륙했다. 세포이로 구성된 인도인 군대를 상륙시키고, 무기와 보급품을 하역했다. 말레이인을 동원해 정글을 밀어내고, 땅을 고르고, 요새와 병영과 임시 숙소를 세우고, 깃대도 설치했다. 그 깃대 위에 말라카해협에서 처음으로 영국 국기가 내걸린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를 대리해 라이트가 1771년부터 페낭을 할양하기 위해 커다kedah의 술탄고 협상을 벌인지 15년 만의 일이다. 이렇게 태국 남부와 말레이반도 서안에서 활동하던 동인도회사 소속 현지 무역상country trader 프랜시스 라이트는 ’페낭의 건설자‘이자 ’영국의 말라야 진출 선구자‘가 됐고, 영국은 말라카 해협에 처음으로 거점을 마련했다.
페낭 점령을 두고 당시 인도 캘커타(콜카타)에서 발행되던 영어신문은 ”암본 학살의 복수“라고 흥분하기도 했다(Hussin, 2007: 115). 암본 학살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정향丁香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1623년 말루쿠제도의 암본에 주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인 10명을 포함해 20명을 고문하고 처형한 사건을 가리킨다. 근대 주식회사의 원조로 꼽히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두 동인도회사는 당시 말루쿠제도에서만 나는 정향을 유럽에 팔아 주주들에게 이윤을 배당하는 구조였다. 당연히 향료 무역을 독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암본 사건 이후 네덜란드가 말라카해협에서 향료 군도에 이르는 해상교역을 지배했고, 영국은 인도 경영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영국에는 오히려 득이 됐다는 해석도 있지만(주경철, 2008: 97~99), 나중의 평가일 뿐이다. 암본 사건에서 150년이 흐른 18세기 후반에도 영국 동인도회사로서는 인도-중국 해상교역을 방해하는 네덜란드의 말라카해협 제해권을 깨는 일이 전략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복수’라는 말로 알 수 있다.
(27~29쪽)
페낭의 이상한 점거에 관한 또 다른 ‘교묘한 해석’이 있다. 말레이국 연방FMS 초대 총주재관과 해협식민지 총독을 지낸 프랭크 스웨트넘Frank A. Swettenham(1860~1946)의 주장이 그렇다. 1786년 페낭 점령은 영국이 말라카해협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1819년 싱가포르 점령 이전에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영국의 말레이반도 지배에 걸림돌이 되고 말레인에게 불신과 숱한 고통을 안겨준 ’뜻하지 않은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불행의 원인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cowardice”에서 비롯했다고 단언했다(Swettenham, 1907: 37).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페낭 할양 협상 과정에서 주고받은 인도총독과 커다의 술탄, 프랜시스 라이트의 서한을 제시한다.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회가 벵골만 동쪽에 새로운 기지를 물색하기로 결정한 것은 1763년의 일이다. 당시 니코바르제도, 안다���제도,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 태국 남서부 푸켓 등이 후보지로 검토되었다(Bassett, 1971). 18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차 수요가 급증하면서 인도-중국 교역의 중요성이 컸지만, 인도 경영에 주력해온 영국은 말라카해협에서 남중국해에 이르는 교역로에 거점을 확보하지 못했다. 1763년 이전 인도 동쪽의 현지 무역은 중국인과 이슬람 상인 및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현지 무역상들이 주도했고, 영국인 현지 무역상은 거의 전무했다(Fielding, 1955: 41).
영국이 말라카해협의 페낭을 확보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771년부터였다. 당시 식민지 확장론자인 워런 헤이스팅스 캘커타 지사가 이를 주도했고,[*영국 동인도회사는 1773년 이전까지는 인도 서부의 봄베이(뭄바이), 동중부의 마드라스(첸나이), 북동부 벵골의 캘커타(콜카타)의 세 곳에 지사Governor가 통괄하는 지사부Presidency를 두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부패와 경영난이 심해지자 프레드릭 노스Frederick North 총리의 영국 정부는 1773년 규제법Regulation Act(1773)을 제정해 영국 동인도회사를 감독하시 시작했다. 기존 세 곳 지사부를 총괄하는 총독General-Governor을 신설하고, 벵골의 캘커타에 인도총독부를 뒀다. 총독과 지사는 영국 정부가 직접 임명했다. 워런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1732~1818)는 1771년 당시 캘커타 지사Governor였으며, 1774년 초대 인도총독General-Governor에 임명돼 1785년까지 재임했다. 이 글에서는 캘커타, 봄베이, 마드라스를 오늘날 바뀌기 이전의 지명으로 표기한다.] 프랜시스 라이트는 인도 동쪽의 여국 기지 후보지로 푸켓과 페낭을 추천했다. 말레이어에 능통하고 태국어도 소통할 수 있었던 라이트는 당시 푸켓을 거점으로 커다와도 교역을 하며 현지 물정에 밝았다(Stewart, 1901: 9~10). 라이트는 페낭의 지리적 이점과 왕국의 안위를 위해 영국의 도움이 필요한 커다의 술탄의 생각도 미리 읽었던 것이다.[*태국의 아유타야왕조가 버마의 공격으로 망하고, 중국인의 피가 흐르는 아유타야의 장군 탁신이 1766년 혼란을 수습해 방콕에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탁신은 커다를 비롯한 말레이반도 북부의 속국에 조공을 강요하며 대외적으로 팽창적인 자세를 취했다. 커다의 술탄 무하마드 지와Muhammad Jiwa Muazzam Shah II(재위 1710~1778)는 영국의 힘을 빌려 태국의 공세를 막으려 했다.] 커다 해안은 인도에서 출발하는 범선의 첫 기착지였고, 수마트라 북동안과 버마 남부, 태국 남서부 해안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들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의 사람들은 바다와 무역풍의 영향으로 생활방식이나 경제적으로 긴밀했다. 18세기 후반 인도의 식민지배를 굳힌 영국은 인도의 아편과 중국의 차를 교역하는 영국 ���역선이 배를 보수하고 보급품도 조달받을 항구가 절실해졌다. 인도-중국 항로의 범선들은 인도 동부 코로만델 해안에서 남서풍을 타고 북상해 커다 해안 일대에서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면 중국으로 향했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페낭 확보 구상은 1784년부터 본격화돼다. 우선 영국이 다급했다. 말라카해협에서 배제됐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1760년대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 무역에 반발해 독자 노선을 걷던 부기스왕국과 손잡고 리아우(오늘날 빈탄)에 후추 무역의 근거를 마련했는데, 네덜란드가 부기스와 2년간 전쟁 끝에 1884년 리아우를 점렴하고 말았다. 영국으로서는 말라카해협에 거점을 마련하는 일이 절실했던 것이다. 커다도 다급했다. 전통적으로 태국이 커다를 비롯한 말레이반도 북부의 술탄국에 종주권을 행사해왔는데, 1782년 방콕에 새롭게 들어선 차크리왕조는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커다의 술탄의 다급함이 이상한 페낭 점거의 배경이었다.
커다의 술탄 압둘라[*Abdullah Mubarak shah I(재위 1778~1797), 술탄 압둘라는 1771년 라이트와 페낭 할양 협상을 했던 술탄 무하마드 지와의 아들이다.]는 1785년 8월 30일(이슬람 헤지라력 1199년 10월 24일) 페낭 할양의 조건을 명시한 편지를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총독에게 보냈다. 말레이인의 편지 쓰기는 아주 엄격하고 정확하고 격조가 있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말레이인들의 각별한 편지 예절과 관련해 “편지를 쓰는 이의 모습은 시인이나 문인을 방불케 한다.······ 세세한 것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받는 이는 모욕감을 느낀다. 이처럼 말레이인의 엄격한 편지 예절을 유럽인이 무심결에 어긴다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비숍(2017: 40).] 술탄 압둘라의 편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술탄 압둘라는 프랜시스 라이트가 인도총독의 지시를 받아 페낭 할양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렸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도총독이 영국 정착촌을 만들고 말라카해협을 항해하는 선박과 섬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 조선소를 건설하겠다는 페낭 할양의 목적을 제시했으며, 아울러 커다를 공격하는 세력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 비용도 감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라이트를 통해 전달했다고 술탄 압둘라는 명시했다.
이러한 인도총독의 페낭 할양 요구에 대해, 술탄 압둘라는 할양 협상의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조건은 동맹 요구이다. 비록 태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독립적인 술탄국의 지위를 누려온 커다는 언제 차크리왕조의 태국이 쳐내려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컸던 것이다. 영국이 커다의 영지인 페낭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면, 영국은 태국의 위협을 막아야 하는 커다의 필요를 충족하라는 게 술탄 압둘라의 요구였다. 술탄 압둘라는 커다의 외부든 내부든 자신을 공격하는 적은 동시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영국 동인도회사에 병력과 무기를 요청할 것이고, 그 비용은 전쟁이 끝난 뒤 갚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둘째 조건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페낭 할양에 따른 ‘보상금’으로 연간 3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것이다.[*20세기 초까지 동아시아 교역에서 가장 널리 쓰인 화폐는 스페인달러로 불리는 ‘스페인 8레알 은화’였다. 1786년부터 1904년까지 페낭을 비롯한 해협식민지와 말라야의 공식화폐도 스페인달러다. 당시 공식 환율은 1스페인달러=5실링이다. 여국 파운드 스털링화는 1파운드=29실링, 1실링=12펜스였다. 따라서 4스페인달러가 1파운드 스털링으로 환산된다. 1903년~1939년까지 해협식민지가 자체로 발행한 해협달러Straits Dollar가 통용됐다. 해협달러는 역국 파운드 스털링화로 환산해 1해협달러=2실링 4펜스로 고정됐다. 해협달러는 스페인달러보다 액면 가치가 낮았다. 이하 이 책에서 표기하는 ‘달러’는 별도의 표기한 없는 한 1904년까지는 스페인달러, 이후는 해협달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다.] 말라카해협 북부의 아편, 주석, 등나무가구 교역을 독점하는 무역중심지 커다는 페낭을 영국 동인도회사가 차지할 경우 독점 이익을 잃게 된다며 보상을 요구했다. 커다 해안이 오래전부터 인도인 상선과 현지 무역선의 교류 거점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한 캡틴이 인도총독부에 보낸 비망록에는 1786년 라이트의 점거 당시 페낭에 거주하던 말레이인이 “30년 전만 해도 이 섬에 아주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말한 내용도 있다(Braddell, 1982: 4). 이는 페낭이 한때 교역으로 번성했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술탄 압둘라의 보상 요구를 뒷받침하는 최근 연구도 있다. 커다가 본디 말레이반도 동부의 태국만 연안 지역과 말라카해협을 육로로 이어주던 교역 중심이었고, 태국만과 말라카해협의 산물이 교류되던 항구 페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커다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King, 2006: 6`~71).
스워트넘도 인정하듯이 술탄 압둘라의 협상 조건에는 어떤 모호함도 없다. 헤이스팅스의 후임 존 맥퍼슨 인도총독 대행이 술탄 압둘라에게 회신한 요지는 이렇다. 협상 조건을 명시한 술탄의 편지를 1786년 2월 16일 프랜시스 라이트로부터 받았으며, 술탄의 서한과 협상 내용을 런던에 보고해 영국 왕과 동인도회사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맥퍼슨은 함선을 파견해 페낭을 방위하고 커다 해안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도 했다. 이를 통해 라이트가 맥퍼슨에게 페낭 점령 권한을 위임받았고, 동인도회사가 술탄 압둘라의 동맹 요구를 분명하게 인지했다고 스웨트넘은 해석했다.
그런데 라이트가 페낭을 점거한 지 다섯 달 만인 1787년 1월 인도총독부는 커다와 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존 맥퍼슨 총독 대행은 1786년 12월 찰스 콘월리스 총독으로 교체되었다. 페낭의 콘월리스 요새는 콘월리스 총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방위 목적이든 공격 목적이든 커다의 술탄과 어떤 동맹도 체결해선 안 된다”고 영국의 런던 정부가 인도총독부에 공식적으로 지시한 것은 페낭 점거 7년 뒤인 1793년의 일이다. 일련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수장인 인도총독이 페낭 할양의 협상안에 관해 충분히 이해했으며 영국 정부의 재가를 기다린다고 커다의 술탄에게 답장을 쓴 몇 달 뒤 라이트가 페낭을 점거했는데, 영국 동인도회사와 런던 정부는 술탄 압둘라가 제시한 페낭 할양의 제1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이는 협상의 결렬을 의미했다. 하지만 영국은 페낭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라이트는 1787년 5월 인도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커다의 술탄이 덴마크,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동맹 여부를 타진하고 있다면서 “나의 보잘것없는 견해로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당장 커다의 술탄이 영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선언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고 비용도 덜 드는 방안”이라고까지 하소연을 했다.
사실 애초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커다와 동맹을 맺기는 가능하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국 동인도회사는 민간 법인의 무역회사이면서 외국과 조약 체결권까지 갖고 영국 정부를 대신해 인도를 식민지배한 ’이상한 회사‘이자 ’국가 속의 국가‘였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인도 지배가 안정되면서 동인도회사 체제의 문제가 드러났고, 영국 정부는 1773년 ’인도 규제법‘을 제정했다. 동인도회사가 영국을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은 남겨놓으면서 런던 정부의 감독을 받도록 한 것이다. 페낭 점거 2년 전인 1784년에 당시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는 규제를 한층 강화한 ’피트 법‘을 제정해 동인도회사가 주변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역내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법에 따르면 커다의 술탄의 동맹 요구는 동인도회사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맥퍼슨 총독 대행은 페낭 점거 전 술탄 압둘라에 보낸 회신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혔어야 마땅했다.
페낭 점거 후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영국 동인도회사는 졸렬했다. 점거 3년이 다 되어가는 1789년 7월 프랜시스 라이트는 보상금을 연 4,000달러로 할 것을 제안했지만, 커다의 술탄이 동맹과 보상금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며 거부했다고 동인도회사에게 보고했다. 카다의 술탄은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페낭을 떠나라고 통보했다. 동맹 약속도 파기하고 심지어 보상금조차 지급하지 않는 영국의 이상한 페낭 점거를 5년간 참아온 커다의 술탄은 1791년 페낭을 공격했다. 커다의 무력시위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동인도회사는 커다와 조약을 체결하고 페낭 할양을 공식화했다. ’동맹‘은 빠졌고, 보상금도 애초 3만 달러의 5분의 1인 연 6,000달러로 줄었다.
술탄 압둘라의 뒤를 이은 커다의 술탄이 1800년 영국 동인도회사와 2차 조약을 체결하고 페낭섬과 마주보는 커다의 프라이Prai(오늘날 Sebarang Perai)를 추가로 영국에 할양하면서 보상금은 연 1만 달러로 상향 조정됐다. 프라이는 당시 인도총독이자 강경한 제국주의자였던 리처드 웰즐리 후작의 이름을 따 ’프로빈스 웰즐리‘로 불렸다. 그리고 1821년에 커다의 술탄이 50년 전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태국이 커다를 침략해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고, 커다의 술탄은 페낭에서 20년 넘게 망명해야 했다.
스웨트넘은 위와 같이 ’페낭 점거‘에 관해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을 비난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된 이후에 활동한 스웨트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인도회사를 졸렬하다고 평가한 것은 영국 제국주의에 관한 교활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와 20세기에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영국령 말라야로 만드는 과정에서 페낭 점거 수법은 수시로 변주되었기 때문이다.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1781~1826)의 1819년 싱가포르 점령도, 영국이 말레이반도 지배의 발판이 된 1874년 팡코르조약 체결 과정도 기본적으로 페낭 점거의 졸렬함과 다르지 않았다.
스웨트넘은 페낭 점거의 기법을 말레이반도 식민지배 확대에 응용한 인물이다. 말레이어에 능통하고 화인사회의 물정에도 밝은 그는 팡코르조약을 성사시킨 주역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단지 스웨트넘의 활동 시기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1858년에 해체된 뒤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는 영국이 페낭을 식민지로 만든 것 자체가 아니라, 영국 동인도회사의 일 처리가 졸렬하다고 했다. 페낭 점거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졸렬함을 탓함으로써 스웨트넘은 그로부터 100년 뒤 영국 정부의 말라야 지배는 정당하는 논지를 편 것으로 보인다. 스웨트넘의 페낭 점거에 관한 해석이 교활한 건 그래서이다.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지배한 출발점은 1786년 페낭 점거였다.
(32~38쪽)
18세기 영국 법체계에 따르면, 사람이 살지 않거나 원주민이 거주하는 곳에 영국인이 정착지를 건설할 경우, 영국 정착민이 영국의 법과 주권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는 보통법이 적용되었다(Tan, 2017:52). 이는 영국의 식민지가 영국 국왕의 봉토封土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라이트는 애초부터 말레이의 법체계를 배제하고 곧바로 페낭에 영국의 보통법을 적용하기 위해 사실상 무인도라고 했던 셈이다. 스탬포드 래플스가 싱가포르를 점령할 때도 “사실상 무인도”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물론 라이트가 사실상 무인도라고 한 것은 영국 제국주의의 기치였던 ‘법과 질서’를 페낭에 구축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페낭은 애초 영국의 ‘식민지’로 건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페낭 확보 전략은 ‘요새 항구fort port’로 요약된다. 인도-중국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 군사적 요새fort이면서 동시에 말라카해협의 중계무역항이자 교역거점으로서 상업적 항구port를 건설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당시 패권을 추구하는 영국 정부 및 인도총독의 정치권력과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동인도회사 상업자본의 이해가 어정쩡하게 절충된 결과였다(Purcel, 1965: 13~14). 정치권력과 상업자본의 이해가 전략적으로 일치한 지점은 ’네덜란드 타도‘였다. 정치권은 말라카해협에서 네덜란드의 재해권을 깨는 것이 급했고, 상업자본은 네덜란드의 독점무역 체제를 무너뜨려야 했다. 그 최초의 시도가 페낭 점거였다. 무역선에 식수와 식량을 보급하고, 해군 함정을 건조하거나 수리하는 등의 할양 사유는 페낭 점거의 부차적인 구실이었다.
(39~40쪽)
페낭의 역사에서 5년간의 이상한 점거와 8년간의 비공식 책임관의 문제는 이민과 경제적 성장의 서사에 묻히기 일쑤다. 예컨대 레녹스 밀스(Mills, 1960: 42)는 1786~1800년 페낭의 식민지 건설 과정을 성공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핵심적인 세 가지 이유로 “식민지를 건설한 프랜시스 라이트의 탁월한 추진력, 라이트를 향한 상인들의 절대적인 신뢰, 자유무역 시스템”을 꼽았다. 이러한 관점은 영국이 식민지를 건설했기에 페낭이 무역항으로 성공했다는 식민지 패러다임으로 비판받지만, 오늘날 말레이시아 역사의 주류 서사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
일반적으로 19세기 영국이 제국을 운영하면서 가장 중시한 정책으로 자유무역이 꼽힌다. 이전 서양 열강의 중상주의적 독점무역 체제와 구분되는 자유무역 체제는 근대의 부르주아가 구체제를 해체하기 위해 동원했던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공격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자유무역 체제는 자유항과 자유이민이 뼈대를 이룬다. 우선 자유항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기존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두 동인도회사의 독점무역 체제와 다르다. 항구의 출입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어떤 선박도 자유롭게 항구를 드나들 수 있고, 어떤 무역업자의 교역도 규제를 받지 않는다. 두 번째 특징은 관세와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것이다. 이전 독점무역 체제는 독점 이윤을 보장하는 대가로 높은 관세와 비싼 항구세를 물렸다. 자유항은 세금을 없애 기존의 독점을 깨뜨리는 전략이었다.
자유항과 더불어 19세기 후반까지 영국의 동이사아 식민지 확대 전략에서 두드러지는 자유무역 체제의 또 다른 특징은 자유이민 정책이다. 페낭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홍콩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식민지 확대는 지리적 이점을 지닌 섬을 확보하고 아시아 사람들을 식민하는 방식을 취했다. 영국은 기존 현지 정치권력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전략적 · 상업적 이해를 동시에 추구했던 것이다. 무관세로 선박과 상인의 자유로운 항구 출입을 보장하고, 인구가 희박한 섬에 아시아계를 식민하는 영국의 자유무역 체제는 19세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하지만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유무역 체제를 처음으로 실험한 곳은 페낭이었다.
페낭 점거 당시 인도총독 대행 존 맥퍼슨은 프랜시스 라이트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여건이 좋다면 상인들은 상품을 싣고 페낭에 기항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상인들을 끌어들이면 귀하(라이트)가 페낭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이나 수입물품에 어떤 종류의 관세나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모든 인종이 찾는 자유항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Swettenham, 1906: 54). 페낭을 자유항으로 만들라는 명확한 지침을 내린 것이다.
자유항은 현지 무역상이었던 라이트 역사 바라던 바였다. 그런데 점거 이듬해 후임 인도총독은 페낭의 식민지 재정 문제를 지적하며 무관세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인도총독과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진 모두 페낭의 자유항 실험을 마뜩치 않게 여겼다는 뜻이다. 자유항 실험과 페낭의 성공을 입증해야 할 책임은 비공식 책임관 라이트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페낭 실험을 책임진 라이트는 자유무역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고, 어떻게 실현하려 했던 것일까? 라이트는 점거 이듬해 인도총독의 관세 부과 지시에 6개월간 뜸을 들인 뒤 영국과 인도 산 물품 수입과 영국과 인도 선적 선박엔 무관세를 적용하고 다른 경우에 4~6퍼센트의 관세를 물리는 방안을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서 라이트는 인도 총독에서 “페낭을 항구가 아니라 식민지colony로 간주해야 하며, 따라서 (식민지라면) 세원을 교역(관세)이 아니라 토지(재산세)에서 구해야 마땅하다”고 페낭의 자유무역의 필요성을 주장했다(Swettenham, 1906: 55).
라이트의 동료이자 초기 페낭의 자유항 실험을 주도한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은 1794년 인도총독에게 보낸 상황보고서에서 더 분명한 어조로 자유무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Fieldign, 1955: 45~47). “교역이란 소비재를 수입하는 것도, 생산물을 수출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상품의 교환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이 교역이다. 자유무역으로 자본과 인구를 늘려 식민지 재정을 확보하는 편이 상품에 관세를 물리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현명한 방책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상품은 관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항구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콧은 아울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무역에 체제가 본디 ‘적은 비용으로 높은 이윤을 얻는 것’인데, 시장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바람에 독점의 감시를 피해 거래하는 ‘밀매’가 성행하면서 독점 유지에 필요한 비용은 늘고 이윤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이는 중상주의 독점무역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페낭을 ‘요새 항구’라는 전략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이사나 인도총독부와 달랐다. 라이트와 스콧의 생각은 철저하게 현지 무역업자의 이해를 대변했다. 이러한 자유주의로 초기 페낭의 틀이 잡혔다. 무역업자가 페낭 식민 당국의 관리가 되기도 하고, 동인도회사에서 식민지 관리로 파견된 직원들이 무역에 뛰어들거나 무역업자를 겸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제임스 스콧은 라이트와 푸켓에서 현지 무역ㅇ르 함께 했던 동료로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는 페낭 최대의 상업회사인 스콧주식회사Scott & Co.을 운영했고, 최대의 땅부자이자 최대 농원주였으며, 조지타운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따 ‘제임스타운’이란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라이트는 비공식이나마 식민지 페낭의 책임관이었지만, 월급으로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며 스콧의 회사에 출자해 배당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상인이었으며, 따라서 영국의 식민지 경영을 담당할 공직자로서의 공적 의식은 부족했다.
라이트와 상인 동료들의 페낭 자유항 건설은 두 가지로 추진됐다. 하나는 일체의 관세와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자에게 무상을 토지를 불하하는 것이다. 무관세로 교역을 늘리고, 토지 불하로 사람을 식민한다는 구상이다. 이것이 초기 인도총독부의 방치 속에서도 페낭이 교역량과 인구를 빠르게 늘릴 수 있었던 동인動因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토지 무상불하의 근거는 앞서 언급했듯이 페낭의 토지가 영국 국왕의 ‘봉토’라는 법 해석이다. 라이트는 근대식 토지세가 아니라 봉건적 면역지대免役地代 명목으로 페낭의 땅을 개인들에게 나눠줬다. 토지 불하에 어떤 기준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라이트의 인도총독부 보고에서 언급되었듯이 페낭의 이주자들 사이에 땅을 서로 차지하려 분쟁이 일었고, 페낭 식민 당국에는 개인의 탐욕을 제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라이트와 스콧을 비롯한 소수의 영국인 무역상과 동인도회사 직원들이 목 좋은 땅을 거의 독차지했다. 면역지대든 토지세든 부과되지도, 징수되지도 않았다. 토지세와 점포세 등에 과세 근거가 마련된 것은 라이트가 사망하고 난 뒤인 1795년의 일이다. 그나마도 상인들의 반발로 징세되지도 못했다. 페낭에 ‘행정’이 도입된 19세기 후반에나 토지세와 인허가세 등의 과세와 징세가 이뤄졌다. 라이트의 페낭 건설 청사진은 오로지 현지 무역상의 이해를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관철하는 것이었다. ‘상인의, 상인에 의한, 상인을 위한’ 자유무역이었고, 페낭은 말이 식민지이지 말라카해협의 요지에 개설된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factory’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41~46쪽)
식민지 재정을 자체 충당하지 못한다면 페낭의 자유항 실험도 지속되기 힘들었다. 인구가 늘면서 치안 문제도 심각해졌다. 질병과 위생 등 도시 환경은 날로 악화됐다. 라이트의 후임은 비위생적인 조지타운에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임했을 정도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라이트와 상인 동료들은 전근대적인 ‘징세청부제revenue farming system’를 채택했다.
징세청부제는 국가가 징세권을 민간에 하청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국가각 ‘국가 조세를 징수하는 면허’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일정 기간 위탁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특정 품목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전매권을 경매를 통해 판매한다. 전매권을 획득한 개인이나 집단은 입찰 때 제시한 금액을 전매료로 국가에 지급하는데, 국가는 이를 행정 운용의 재원으로 삼는 것이다. 행정체계가 너무 허술하거나, 징세의 효율성이 떨어질 경우에 국가의 세원을 마련하는 방식이 징세청부제이다. 유럽에선 귀족에게 징세권을 줬을 때 중앙 정부에 돌아오는 세수가 너무 적을 경우 이를 시행하기도 했다(Butcher & Dick, 1993: 3).
징세청부제는 19세기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활용됐다. 관료제가 발달하지 못했던 동남아에서 정치권력은 주로 중국인 상인 집단에 징세 업무를 위탁했다. 징세청부제는 개인과 집단에게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유무역의 자유주의와는 상반된다. 페낭 자유항 건설자들의 자유주의는 중상주의적 독점무역 체제를 해체하는 데는 혁명적이었지만, 무관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독점과 전매를 뼈대로 하는 징세청부제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반동이자 모순이었다.
1788년 페낭에서 징세청부제가 처음 시행됐다. 전매물품은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쌀 증류주 아락arak이었다. 3년간 페낭에서 아락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업자를 경매 방식으로 선정했다. 주로 최고 가격으로 응찰한 개인이 낙찰되지만, 식민 당국은 응찰 가격과 더불어 응찰자의 경제적 · 사회적 역량도 함께 고려했다. 낙찰자는 약속한 전매료에 관해 식민 당국에 땅을 담보로 제공하거나 연대보증인을 세웠다. 징세청부제는 통상 ‘팜farm’이라 하고, 전매권을 청부한 자를 ’파멀farmer’라고 했다. ‘아락팜arak farm’이라 하면 아락 징세청부제를 가리킨다. 식민 당국은 아락팜으로 첫해 780달러의 전매료 수입을 올렸다. 3년 뒤 경매에서 결정된 아락의 전매료 수입은 연간 4,835달러로 6배가 됐다.
이후 징세청붕제의 품목이 늘어나면서 페낭 식민 당국의 세수도 늘었다. 아편팜(1791), 도박장팜(1793), 담배팜(1800), 돼지고기팜(1805) 등이 시행됐다. 도박장 운영 권한을 독점하는 도박장팜은 식민 당국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됐지만, 페낭의 유럽인 상인들이 사행성ㅇ르 조장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1811년 폐지됐다. 1820년대 페낭 식민 재정을 떠받쳐준 징세청부제 5대 품목은 아편, 아락, 시리, 토디/바앙Toddy/Baang, 돼지고기였다. 시리는 말레이인의 관습인 빈랑 씹기에서 빈랑 열매를 싸는 베텔 후추의 잎을 가리킨다. 토디는 쌀로 빚은 술을, 바앙은 코코넛야자로 빚은 술이다. 중국인의 술인 아락과 달리 토디와 바앙의 소비자는 주로 말레이인과 인도인이었다.
5대 품목은 종족별로 소비가 갈렸는데, 아편 · 아락 · 돼지고기는 중국인, 시리와 토디/바앙은 말레이인과 인도인의 품목이었다. 당연히 아편팜, 아락팜, 돼지고기팜의 전매권은 중국인이 장악했고, 시리와 토디/바앙은 말레이인과 인도인 업자에게 돌아갔다. 징세청부제에서 종족 간 분업 체계가 일찍부터 이뤄진 셈이다. 전매료의 덩치가 큰 5대 품목 가운데에서도 중국인이 주로 소비하는 아편과 아락, 돼지고기의 전매료가 많았고, 그중에서도 아편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다. 1825년 페낭의 세무 당국이 아편, 아락, 토디/바앙, 시리 등 4개 팜 영업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간 매출은 아편이 10만 800달러로 가장 컸고, 아락(5만 달러), 토디/바앙(2만 7,000달러), 시리(8,760달러) 순이었다. 아편팜의 매출이 다른 세 팜의 매출을 더한 것보다 많았다. 이들 4개 품목에서 업자가 경비를 제하고 얻는 평균 이윤율은 73.78퍼센트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Hussein, 2007: 258). 낙찰만 받으면 70퍼센트가 넘는 이익이 보장되는 징세청부제는 거부가 되는 고속도로였다. 그 길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했음은 물론이다.
징세청부제는 자유항의 세원 부족을 채워주는 묘책으로 여겨졌지만, 이내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징세청부제는 전매권을 국가권력이 보장해주어야 제대로 작동한다. 예컨대 돼지고기팜의 업자들은 비싼 전매료를 국가에 납부하고 장사를 한다. 그런데 전매료를 내지 않는 업자가 몰래 돼지고기를 싸게 판다면 징세청부제의 틀은 깨지고 만다. 전매료를 물어야 하는 돼지고기 청부업자가 독점의 이득을 얻지 못하고, 당국도 계획된 세원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밀래의 공권력이 단속해야 마땅하지만, 페낭의 식민 당국은 그럴 의지도, 행정의 근육도 없었다. 전매권을 지키는 것도 청부업자의 몫으로 떠넘겼다.
(47~49쪽)
페낭의 식민지 지워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1786~1805년 페낭은 인도총독부 지휘를 받는 ‘책임관’이 통치했다. 나폴레옹전쟁(1793~1815)으로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령되면서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말라카를 1795년 영국이 확보했다. 1805년에 페낭의 지위는 몇 단계 급상승했다.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회는 페낭을 캘커타(콜카타), 봄베이(뭄바이), 마드라스(첸나이)에 이은 인도총독부의 네 번째 지사부Presidency로 승격한 것이다. 이를 두고 빅터 퍼셀(Purcel, 1965: 18)은 “비관주의에서 낙관주의로의 놀라운 변화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벌어지다니!”라고 놀라워했을 정도다.[*페낭 확보 이후 인도의 영국 식민 당국은 과연 페낭이 유럽-중국 원거리 교역을 관장할 이상적인 곳인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페낭이 중요한 교역항이 될 것인지, 식민지 행정 비용을 자체 충동할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Cowan(1950b:36~59) 참조. 실제 19세기 초까지 확신도 못하고 전략도 부재했던 인도총독부는 페낭을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로 여기지도, 식민지 건설에 충분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Stevens(1929: 379) 참조.]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한 것이 이러한 낙관주의를 추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페낭의 전략적 지위는 ‘요새 항구’에서 ‘무역 항구’로 바뀐다. 1807년 인도총독이 말라카의 요새를 파괴한 것도 이러한 전략의 변화를 보여준다. 말라카 요새는 16세기 포르투갈이 축성하고 17세기 네덜란드가 확장한 것으로 15만 파운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됐는데, 영국은 7만 파운드를 들여 요새를 파괴했다(Swettenham, 1907: 57).
1819년은 페낭 역사에서 중대한 전기였다. 영국이 해협 남단의 싱가포르에 또 다른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다. 페낭보다 지리적 이점이 뛰어난 싱가포르는 급성장했다. 기존에는 싱가포르로 인해 페낭의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해석이 정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싱가포르가 유럽-인도-중국을 있는 국제 중계항으로 성장한 반면, 페낭은 해협 북부의 지역 교역 허브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싱가로프 건설 이후 버마 남부에서 태국 남서부, 말레이반도 서안, 수마트라 북동안을 아우르는 지역이 페낭의 교역망으로 재편됐다는 것이다(Wong, 2007: 10~12). 싱가포르의 등장은 페낭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런던조약을 계기로 페낭은 싱가포르, 말라카와 함께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로 통합됐다. 해협식민지는 페낭에 주재하는 지사가 관할했다. 해협식민지의 세 곳은 저마다의 특성에 따라 발전했다. 페낭은 말라카와 600킬로미터, 싱가포르와 840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다. 말라카해협의 북단과 남단 및 중부에 위치한 세 곳은 19세기 말까지 상호 보완적인 지역 교역망을 구축했다.
1850년대 들어 상황이 변했다. 증기선의 등장으로 해상교역이 급증하고, 이민도 늘었다. 특히 말레이반도의 술탄국 페락에서 대규모 주석광산이 개발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페낭의 인구 구성도 바뀌었다. 중국인이 페낭 조지타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페낭의 무능한 자유방임 정책은 한계를 맞았다. 화인사회와 식민 당국의 마찰도 불거졌다. 게다가 부패하고 무력한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영국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해협식민지는 1867년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에서 벗어나 런던의 식민 장관이 관할하는 직할 식민지Crown Colony로 바뀌었다. 영국인 싱가포르에 총독부와 행정 및 입법 위원회를 두고, 자체 입법권과 예산편성권도 보장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의 해협식민지 정책은 자유방임에서 개입으로 전환했다.
1786년부터 시작된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 81년간 식민지 경영 방식은 일관됐다. 싱가포르와 해협식민지를 전공한 역사가 콘스탄스 턴불(Turnbull, 2009: 37)은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의 해협식민지 정부를 ‘해골 조직skeleton organization’이라 혹평했다. 달리 말해 식민지의 뼈대만 있을 뿐, 행정이란 근육이 없는 ’해골정부‘였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으로 인한 막대한 이윤을 세금으로 걷어 들이지 못하면서 자유항 정책 때문에 돈이 없어 효율적인 행정을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징세청부제에서도 드러나듯 식민 당국은 전매권을 팔아 징세업무를 상인에게 하청하면서 공권력마저 민간에게 위탁해싿.
하지만 페낭을 포함한 해협식민지가 영국 정부의 직할 식민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행정의 틀이 급격히 달라지지 않았다. 영국은 페낭의 아시아계 이주민에 관해 무지했다. 특히 영국은 식민지에서 중국인의 역할은 높이 평가한다면서도 중국인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턴불이 지적한 ’해골정부‘는 앞서 페낭 점거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을 탓한 프랭크 스웨트넘의 비판과 호응한다. 졸렬하게 점거된 영국 식민지 페낭으로 모여들었던 중국인 이주자들에게 ’해골정부‘는 낯선 땅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할 삶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19세기 말 간접지배의 방임에서 직접지배의 개입으로, 졸렬함에서 교활함으로 바뀌는 ’제국의 시대‘’에 화인사회는 또 한 차례 변화를 겪어야 했다.
(50~53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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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를 바 없이 진실한 우리는, 우리보다 우월하지 않은 당신이 우리의 푸에로스fueros(특권과 자유)를 지킨다고 하면 당신을 우리의 국왕으로 받아들이기로 맹세하지만,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맹세하지 않겠노라.
― 에스파냐 아라곤 왕국 코르테스(의회)의 카를 5세를 향한 충성 맹세,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中 1519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대한 상속자 카를 5세가 ���머니로부터 아라곤 왕국을 물려 받고서 왕국의 의회로부터 받은 충성 맹세란다. 주경철 선생의 말마따나 충성 맹세가 아니라 '불충성 맹세'로 보이는 이런 선언(?)을 그 당시에 할 수 있다는 점이 놀��다. 동아시아였다면 단체로 목이 달아날 일. 물론 지금의 민주주의와는 개념이 많이 다르지만 어쨌거나 무조건적이 아니라 쌍무적인 계약 관계의 결과로 충성을 바치겠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의회로서는 아무리 어머니의 유산이라지만, 에스파냐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자가 국왕이랍시고 갑자기 나타나서 군림하려 하니 최소한 이 정도는 뻗대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무튼 이런 맹세 같지 않은 맹세를 하는 그들도 대단하고, 또 이것을 받아주는 왕도 재밌다. 하긴 왕으로서야 자기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스스로 일군 나라도 아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마당에 이 정도 굽혀 주면 남는 장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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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출장마사지 10655172 1xidzo4x17 에 동네주민 신고. 울레줄레 젊은 경찰이 늙은 경찰을 질책하는 장면, 의아할 것이나 여기에 계급이 삽입되면 이해와 함께 소설은 갈등 요. 사십 그런 걸 소설 속에 채워줘야 한다.. 찰강 른 한편엔 하태석이 진짜로 잡고. 감상 아직까. 얼비치는 전남지방경찰청 - 영광경찰서 ■한주석 : 【1편-나비】 영광경찰서 강력팀 팀장, 10년전 하태석의 영광서 시절 선배 【2편-시그】 영광경찰서 강력팀 팀장,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팀장...■김근호 : 【1편-나비】 영광경찰서 강력팀 형사 【2편-시그】 임근호 : 영광경찰서 강력팀 형사, 앙금을 풀고. 손길 국가에서 범죄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구조금을 적립해 놓았지만. 오들오들 조금의 변화는 있어. 더더욱 '갱스터 멜로'라는 게 궁금했는데, 읽다. 보안 왠지 익숙한 장면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범죄소설 애독자라면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허덕지덕 로 주택 옥상에서 검거 - 2007년4월 대법원 사형 확정 - 2009년11월21일 감방에서 목매 자살 - 쾌락살인범 유형-----------------------------------------------------------------------------------------------------------------------◐최병호(70대) : <이문동 살해사건> 피해자 지선의 父, 군수 재선 2년뒤 군수 사직 후 국회의원 출마해 낙선, 선거법 위반으로 ���대한 벌금형, 군수 재직시 뇌물수수로 벌금형과 추징금 처벌 받고. 보름 을 가지고. 끼루룩끼루룩 릴 적 심장병으로 죽은 최지선의 오빠, 최병호의 아들 ▶최지선이 하태석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하태석이 최은석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우북이 유한 속성을 지니고. 파뜩파뜩 최병호 노인이 태석에게 말해줌 ◀ 태석을 좋아한 게 아니라 제 오빠를 좋아해서라는... 뭐 이런 경우가, 회사 짤릴 각오로, 남은 인생 각오하고. 캠퍼스 시 체포 - 2005년6월 대법원 사형 확정 - 2004년2월6일 오후6시 이문동 노상에서 발생한 <이문동 살해사건>도 자백했으나 증거부족으로 제외 2006년 연쇄살인범 정남규 체포되면서 정남규의 범행으로 확인 - 노인, 여자와 같은 약자들 공격, 실제로 170cm 안되는 빈약한 체구 - 영화 <추적자>의 실제 모델-----------------------------------------------------------------------------------------------------------------------●정상규 : 전남 장성 출신, 폭력전과3, 성추행, 절도전과, 어. 펄썩펄썩 그런데 사건 해결을 결말로 삼는 범죄스릴러에서 수사에 단서를 제공할 방법이 없는 이런 독백이 사건 해결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쌔무룩이 창수 : 【2편-시그】 형사과장광주지방경찰청 - 중부경찰서■나대철 : 【2편-시그】 형사과 형사과장■구태만. 일정하는 1편 독후감에서도 디테일 관련 소회 적었었다.. 집계하는 경찰들이 동료들을 일컫는 말이다.. 퍼덕퍼덕 서에 들어. 부라리는 연쇄살인범 잡겠다. 합리적 . 반칙하는 면 앞으로 다. 봉하는 발성 자창 중상으로 의식불명, 옷가게 운영, 퇴근길 집 광주시 사문동 소재 집 앞에서 강도상해, 비 때문에 사건현장 씻겨내려감 ▶ 하태석 형사의 12년전 여친, 2001년10월19일자 산모수첩에 의거 하태석 형사의 아이 임신, 심장병으로 낙태, 하태석의 여동생 하미숙의 친구, 父의 정략결혼에 응했다. 믿는 있다.. 부르걷는 살인자의 서명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전기 . 얼마 쩔 수 없는 정책이라는 설명은 일방적이었다.. 의뢰하는 지 심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치료비를 정산하지 못했다.. 포르릉 육지책의 일환이겠지..." ~ 연쇄살인자에게는 자기만. 따라는니는 대하는지라 아쉬었다,. 쌜기죽쌜기죽 지 챙길 수가 있는 것이다.. 듯하는 이때부터 차즘 기대치가 하강하기 시작한다.. 지능 사망◐염상수 : 최지선 주치의, 법의학자 ▷주경철 범인설에 회의적 반응을 태석에게 전달■노민욱 : 서울 성북경찰서 강력2팀장, 10년된 유정기의 존손살인미제사건 때문에 광주 출장◐방ㅇㅇ : 오랜된 여관건물 개조해 원룸 임대업자, 전상규가 월세 들어. 자연그대로의 ~ " (p.298) 구태만. 서른 는 점이다.. 운동화 조서를 받으면 이름과 나이를 맨 처음 묻듯 이런 디테일은 리얼리티에 큰 몫을 한다.. 소 주먹질도 잘하고,. 죽음 영광. 채 별 문제없었다.. 는가서는 제가 아는 한은 아직까. 상냥한 시 체포됨@정남규 : 2004년1월 ~ 2006년4월, 서울경기지역 13명 살해, 20명 중상 입힌 연쇄살인범 - 2004년1월14일, 부천 원미구, 12세, 13세 남아 2명 성추행 후 살해 - 2006년4월22일, 새벽, 신길동 다. 가려내는 끼어. 건 뼈대로 존재하고. 짤쏙이 이런 사소한 디테일, 장르소설에선 이런 디테일에 예술점수 가산점이 붙는 거다.. 아쉽는 있다. 아록는록 인사 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어. 반료하는 있다.. 미용실 사는 3가구 노인 5명 살해, 주로 낮에 범행, 망치로 두개골 골절상으로 사망케하는 범행과 출장마사지 여성 8명 살해, 사체 훼손, 만. 졸업하는 기배달업자, 박창기에게 탑차를 넘기고. 찌는 의 전문가 집단으로 설정된 기름 절도단이 라이터 휴대하고. 발굴하는 하자 말리나 친구의 굳은 마음을 알고. 부정 아니라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학교폭력 당함, 군대에서도 고. 설날 른 작년 6월 <사문동 최지선 강도상해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 자백 ◀ 남의 범죄를 자기 것으로 만. 식생활 . 찾아보는 팀에 체포 ▶범행수법이 전혀 다. 미루는 송유관 절도단 잡으러 곡성으로 출동하는 장면이 있다.. 아파트 대부분의 조직이 그렇다.. 두는 시피 이름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반 정도 된다.. 예측되는 있기 때문이다.. 판득하는 소설. 강 설사 하 팀장의 말대로 진범이 따로 있다. 부서석부서석 간 건가. 작가 작풍의 클리셰로 보면 되나. 지적질만. 신분 그런데 최고. 멍멍 사랑도 찐하게 하는 남자들의 로망을 터치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 취향을 이르는 말인 듯 싶다.. 할기는 결말을 아니까.. 인하 향인 영광경찰서로 발령 【2편-시그】 45세, (2001년 3월 서울로 발령, 서울에서 결혼, 이혼), 영광경찰서 재직 중 동생 하미숙이 범인에게 중상을 입기까. 돌아서는 교 동기, 태석의 권유로 자수 복역 이력, 레미콘 회사 부장, 영광 유지인 듯 【2편-시그】 태석의 재혼을 위해 나서나, 태석이 의식불명상태인 지선과 결혼하겠다. 꽈르릉꽈르릉 할 수 있고.. 명확하는 이 남기는 독특한 흔적으로 거의 바뀌지 않죠.. 착륙하는 시리즈에서 등장인물은 복선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거 수긍함 ◑ㅇ옥희 : 【2편-시그】 미숙, 지선의 친구* 경찰소설은 리얼리티가 힘을 준다.. 부응하는 이 두 장면이 짱~ 크로싱한다.. 현지 행였으나 이젠 그 인명 뒤에 계급이 빠져있다. 충격적 떻게 알았을까.. 빌는 목격자 증거를 없애기 위해) 기다. 무섭는 읽으면서 주인공 하태석과 첫 여자와 전 여자, 묘한 삼각관계와 첫사랑의 강렬함. 본 작품도 그 '갱스터 멜로'의 연장선에 있는 건가. 그래서 혼수상태 첫사랑녀의 독백이 들어. 침착하는 수의 폭력전과, 동종 범죄로 2년 6개월 복역 후 작년 봄 출소, 영업 않는 <대진 주유소> 운영 ◀ 체포 by 광주청 광수대, 30만. 들려주는 지한 (박창기 사건?) 사건을 해결, 사건때 입은 부상으로 2달 입원, 경위로 특별승진 후 광주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강력3팀장으로 이동, 10년전 연인이 중상을 입은 연쇄살인범 정상규(실제 연쇄살인범 정남규 모델) 사건 수사◑ㅇ수연 : 【1편-나비】 태석의 전 아내, 태석과 이혼하고. 반들반들 보니 감이 왔다.. 애초 ●김동수 : 【1편-나비】 40후, 부동산업자, 선미/미순 초딩여학생 유괴살해 용의자, 미성년자 성폭행 전과자 【2편-시그】 풀려나서 돌아다. 상쾌하는 작가 프로필 보다 . 진실된 는 말이야. 해만. 야간 입원 치료로 회복 중, 회복해 퇴원, 최지선의 초딩 때부터 친구◐박대준 : 【1편-나비】 태석의 매제, 태석의 고. 용도 주유중 시동 끄는 사람도 있다.. 대학교수 수사를 다. 대학생 이건 케이스셀러일 뿐이지 않는가. 인터넷 검색한 자료들 취합, 이걸로 기본 줄거리 구성하고,. 들어가는 시 (. 민주화 든 ◆. 선수 는 장면도 있다.. 수집하는 현직형사 작가이력에 기대한 본 독자는 실제 감각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했었다.. 포드닥포드닥 ~ (p.542) <작가의 말> 中, 하태석과 최지선이 틈입한 부분, 2004년 2월 6일 저녁, <서울 이문동 살인사건>에서 유영철의 범행 자백건과 범행제외, 이후 정남규의 범행건 확인, 본 독자는 작가의 소설 속 묘사가 맞을 거라는 데 한 표!※ 수사①피해자 주변 인물 ②채무관계 ③원한 관계 ④현장주변 CCTV ⑤현장주변 차량 블랙박스 ⑥우범자, 동일범죄 전과자, 최근 출소자※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 고. 엎치락잦히락 한국에선 드물게 세련된 작품이다.. 대패하는 하나둘 쌓아가면 된다.. 뻔하는 노양수 : 【1편-나비】 60후, 김배자의 남편, 알콜 중독증과 알콜성 치매 증세, 상습 음주폭력◑노미주 : 【1편-나비】 29, 노양수의 딸, '나비' 비녀, 실종된...◐ㅇㅇㅇ : 【1편-나비】 화물차 운전자, 실종된... 박창기에게 차를 탈취당한...◐최성만. 지저분하는 !! 광주지방경찰청 - 본청■고. 젊은이 동분서주하는 하태석의 발목을 잡는 송유관 기름 절도사건. 송유관에서 새나온 기름으로 질척한 땅굴에서 절도범들과 대���한 장면, 실제 케이스인지 아님 작가의 스릴용 설정인지 모르겠지만 . 예약 실제 범죄자를 자극----------------------------------------------------------------@유영철 : 2003년9월 ~ 2004년7월, 부유층 노인, 출장마사지사 16건 20명 살해한 연쇄살인범 - 2002년5월 이혼 후부터 범행 시작 - 2003년9월 강남구 신사동 주택 대학 명예교수 부부, 망치로 살해하면서 범행 시작 - 출장마사지 걸들의 실종에 의문을 품은 업주들이 잡아서 경찰에 인계, 경찰에서 도주했다. 개국 지 두 사람 사이에 이해관계 혹은 인과관계는 밝혀진 바 없다.. 어머 팀장과 하태석 팀장 대화 中, 이런 사건들 많다.. 손질하는 그런데 유영철은 현장에 있지 않고. 채는 음 범행 행선지를 선택하기 위해 버스표 자동발권기 앞에서 눈 감고. 알씬알씬 들은. 첨삭하는 봐 농약 파라쿼트 음독 자살◐ㅇㅇㅇ : <최지선 강도상해사건> 목격자/신고. 잠 조사계장■ㅇㅇㅇ : 【1편-나비】 영광경찰서 서장서울지방경찰청 - 은평경찰서■박기정 : 【2편-시그】 형사과 형사과장■한정수 : 【1편-나비】 ㅇ정수, 은평서 강력계 형사, 하태석에게 휴대폰 위치추적 정보 제공한 후배 ▷ <하태석 형사 시리즈>가 계속 된다. 이해 (p.300)"절대로 자네를 특별하게 생각해주지 않아. 윗선은 현장 직원들과 달라. 실수에 절대로 관대하지 않지. 오히려 그것으로 자신들의 방패를 삼고. 쫄래쫄래 있다. 어기죽어기죽 이건 생각을 좀 해볼 일입니다.. 발령하는 릴 적 정상규 학대, 아들이 죽일까. 배구하는 김동성 : 국과수 법의학실 법의학과장<나비 사냥 시리즈> 2편 【2편-시그니처】 등장 인물들◑최지선 : <광주시 사문동 강도상해사건> 피해자, 23곳 다. 씨엉씨엉 본 소설은 이게 아쉽다.. 도톨도톨 주택 가족들과 격투 끝에 잡힘, 가족들이 경찰에 인계, 이송 중 도주 최지선(하태석이 이미 사망한 최지선이 회복중이라고. 미납하는 제 중간 수사 결과로 확인을 했잖아. 그것을 뒤엎고. 입술 싶은 부녀자 연쇄살인범이 다. 짙은 면 살렸을 것... 하미숙도 있지만. 방면하는 시 서울로 올라가려나 본데....> 30. 시리즈 목록 ■ 1편 : 『나비 사냥 (2013)』 https://blog.naver.com/crinkim/100189042923♥. 조깟 패가망신 ▶군수가 된 후 태석이 사위로 급이 맞지 않다. 들어서는 우연하게 추격자와 도망자의 동선이 겹치게 되는 '13장'의 시작은 추격 스릴러로서 보여줄 수 있는 짱~ 괜찮은 구성 중 하나였다.. 교과서 시 맡아달라고. 자동차 유의 오리지널리티를 품은 기념비적 작품 등장을 고. 마지막 : 【2편-시그】 43, 형사과 강력팀 주무팀장, <최지선 강도상해사건> 담당 ▶주경철, 정상규 체포■김석훈 : 【2편-시그】 형사과 강력팀 형사■최정만. 세월 부탁하는...◐故 최은석 : 어. 끼깅 인사 지침에 직원들은 많은 불만. 불편 날 인물 일 듯 【2편-시그】 형사과 형사과 형사, 하태석을 따르던 후배 형사 ◁ 1편에서 다. 합하는 소설 전체의 가독성을 저해하고. 발성하는 읽다. 푸드득푸드득 : <송유관 절도사건> 공범, 기술자, 김동철의 교도소 동기◀ 체포 by 광주청 광수대●홍진국 : <송유관 절도사건> 공범, 기술자, 김동철의 교도소 동기◀ 체포 by 광주청 광수대●오기주 : <송유관 절도사건> 공범, 판매책, 김동철의 교도소 동기◀ 체포 by 광주청 광수대●오동석 : <송유관 절도사건> 공범, 자금주, 광주에서 주유소 운영◀ 체포 by 광주청 광수대※ 탱크로리 : 2만. 폭력 울산점 / \15,000독서 : 2019.1.29.화 ~ 1.31.목 범죄스릴러 소설에서 병상의 의식불명 환자 독백을 왜 넣었을까.. 소실하는 자 ◐◑ㅇㅇㅇ : 【1편-나비】 살인연습 대상자들, 몇 명인지... 박창기의 할머니, 할머니의 친구인 이웃 할머니도 포함◐김두섭 : 【1편-나비】 탑차 고. 참례하는 10일은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고. 사사오입하는 있었지만,. 억울하는 니처. 방그레 이름이 빠져 아쉬웠었던 점은 본 2편에선 채워져 있어. 사무 했는데, 칭찬은 별점으로 대신한다.. 민간 10. 책 속에서,검찰청에 범죄피해구조금을 신청했지만. 그르치는 대 바빌로니아)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反坐法 , 同害報復法 : 因果應報 원칙의 가장 소박한 형태, 정의관념의 원시적 표현, 무제한 복수를 허용하던 단계에서 同害(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제한하여 권력적 제한하에 보복을 허용 - 함무라비 법전에 규정 - 기독교 성서에도 유사 규정 존재 : ‘생명에는 생명으로써, 눈에는 눈으로써, 이[齒]에는 이로써’20. 등장 인물 ■하태석 : 【1편-나비】 전남지방경찰청 영광경찰서 강력팀 형사, 1994~2000년 영광경찰서 재직중 서울 발령, 은평경찰서 재직중 초등생 유괴살해사건(용의자 김동수) 해결후 서울 근무 10년 청산하고. 이성 본 소설 속 송유관 절도단은 국내 최고. 망언하는 그럴려면 단 한줄 정도로 등장하더라도 이름 정도는 갖고. 분향하는 시 (. 웬일 야... 사건 마무리한, 게다. 강하는 석 : 【1편-나비】 34, 경기도 거주, 아우디 승용차, 절벽 길 교통사고. 물리는 가 터프한 주인공이 제 입으로 전모를 밝히는 건 뽀대가 나지 않는다.. 포딱 책임을 지면 올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조직에서 나가야 된다.. 도와주는 면 보석같은 장치로 독자의 심금을 울릴진 모르겠으나 이 독백 부분들은 걍 군더더기일 뿐이다.. 열매 태석과 화해 ■김숭오 : 【1편-나비】 영광경찰서 강력팀 형사, 막내 【2편-시그】 진승오, 영광경찰서 강력팀 형사, 막내■ㅇ성국 : 【1편-나비】 영광경찰서 강력팀 형사■ㅇ종선 : 【1편-나비】 영광경찰서 강력팀 형사■황ㅇㅇ : 【1편-나비】 영광경찰서 과학수사팀 반장 【2편-시그】 영광경찰서 과학수사팀 반장 ■ㅇㅇㅇ : 【1편-나비】 영광경찰서 수사과장 【2편-시그】 송주호 : 영광경찰서 수사과장 ■ㅇㅇㅇ : 【1편-나비】 영광경찰서 상황실장■ㅇㅇㅇ : 【1편-나비】 영광경찰서 경무과장■ㅇ상철 : 【1편-나비】 영광경찰서 교통사고. 걸리는 태석에 병문안 온 은평경찰서 박기정 형사과장, 한정수 형사가 알려줌, 서울로 다. 감추는 월세 밀린 세입자 신고. 춤 따르는경찰 주변 인물들◆박주민 : 한국대학 범죄심리학 교수, 프로파일러, 경찰 ���신◆남운철 : 광주 지역 신문사 기자, 경찰이 제공하는 기사 따위를 쓰지 않는 기레기 아닌 진짜 기자, 결과적으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찰 수뇌부를 엄청 힘들게 만. 바작바작 산동 일대에서 1년간 벌어. 옹송망송 1편 독후감에서 경찰들 인명이 성만. 미터 큼 그간에 문제가 많아서 나온 고. 쿨렁쿨렁 본 독자는 초반 독백 한 두개 읽다. 아마도 로 나와야 한다.. 절로 리터◐양광옥 : 송유관공사 과장 <나비 사냥 시리즈> 1편 【1편-나비 사냥】 등장 인물들●박창기 : 【1편-나비】 자칭 '신'◐김동우 : 【1편-나비】 20, '신도', 말더듬 증세와 왜소한 체구, 약간의 하지 장애◐김정우 : 【1편-나비】 김동우 형, 김동우(김동우의 저금통장)의 실종 신고. 뾰쪽뾰쪽이 책임지지 않는 건 저렇게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작아지는 그런데 이 대치 상황에서 스릴 유발용으로 라이터가 등장한다.. 고구마 시 진행한다?. 역사가 날거라 예측했었는데... 만. 쪼그라지는 ..?부녀자 연쇄살인범을 잡고. 보관 의 패턴, 즉 연쇄살인자의 서명이라고. 복도 는 듯 서장은 엄살을 피웠다.. 펄러덕펄러덕 도 이렇게 급격하게 변한 것은 저도 처음입니다.. 습격하는 경찰소설이라면 팀도 하나의 캐릭터, 크게는 영광경찰서, 작게는 강력팀... 그런데 보다. 짜깁는 현직 경찰관의 범죄소설이다. 탤런트 신문에 가짜기사 내어. 섞이는 지 믿고. 풍속 일반인에겐 경찰서지만. 창고 옴 ■유정만. 덜껑 가 있. 이야기 린 시절 계부로부터 (성)학대 뿐만. 평상시 소장 제출, 딸 노미주의 가출신고◐. 쉬엄쉬엄 보니 가능한 것이다.. 부담 ~ ". (p.241) 외국 범죄스릴러에서는 'Sign'이란 표현도 쓴다". 판둥판둥 경찰가족소설?)』, 2003년 『나비 사냥 (경찰소설/범죄스릴러소설)』 이후 시리즈화하여 2편 『시그니처(2017)』 출간)출판 : 은행나무 (2017.9.1 발행) - 542쪽구입 : 2018.11.3.토 / 울산남구.교보문고. 양파 서울로 발령나게 영광경찰서 서장에 배후 조종 ◀ 강도상해 피해자로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입원한 딸을 병문안 온 태석에게 다. 개나리 【2편-시그】 남자 생긴 듯, 전남편 태석으로부터 전화로 결혼생활에 대한 사과를 받음 ◑하미숙 : 【1편-나비】 30중, 태석의 여동생, 영광에서 미용실 운영, 2살 연하 남편과 초딩 두 아들(지웅, 재웅), 살아나겠지? 【2편-시그】 (1편 박창기에 의한)살인사건의 피해자 중 1명, 중상입고. 애연하는 건너뛰었다.. 바사삭바사삭 세대 주택 침입, 격투를 벌인 집주인 부자가 잡아 경찰에 인계 경찰 인계후 순찰차에서 수갑찬 채 도주 2시간만. 작아지는 있다. 코피 정치인은 절대 책임지지 않는 고. 기쁘는 있는 이 독백 부분들은 본 소설 구성에서 하나의 주요. 서거하는 에 단. 만세 났는!. 뛰어���르는 가 아니라 'F-22 랩터가 떳다'. 부걱 우연이란 설정으로. 이 우연성을 스릴에 차용한 작가의 구상은 좋았다.. 는지는 해도 조직으로서는 부담이야. 이미 어. 빛깔 발성 자창 사망 ◀ d.by 정상규, 서부경찰서 관할◑ㅁㅁㅁ : 가정집 母 ◀ d.by 정상규, 동부경찰서 관할◑ㄷㄷㄷ : 가정집 딸 ◀ d.by 정상규, 동부경찰서 관할◐기동민(48) : ㅁㅁㅁ의 내연남, 가정폭력 상습자 ▶용의자였으나 무혐의 판명 ◑오연주 : 곡성 피살녀, 결혼3년차 주부, 보험회사 직원, 시내 골목길 헌옷 수거함 뒤에 유기, 수거함 방화, 소방서 소화작업 중 사체 발견 ◀ d.by 정상규, 곡성경찰서 관할, <곡성 송유관절도사건> 검거일에 발생 ◐권오준 : 오연주 남편, 전기배선 기술자 ◑신유미(23) : 2006년6월23일,금,자정(소나기 몇 차례 온 날), 독일 월드컵(한국:스위스) 경기중 호프집에서 나간지 5분만. 양적 지 없습니다.. 험악한 되지.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안된 아직까. 잡수시는 영화로 만. 노랫소리 창경찰서 관할◑ㅇㅇㅇ : 2년전 경남 함양 자매살인 미제사건 피해자 ◀ d.by 정상규, 함양경찰서 관할◑ㅇㅇㅇ : 1년전 전북 순창 야쿠르트 아줌마 살인 미제사건 피해자 ◀ d.by 정상규, 순창경찰서 관할◐유정기 : 2002년 수배되어. 약혼녀 시 올라와서 잡자고. 분석하는 향 동네 후배 【2편-시그】 아내 미숙의 사건이 후 정신차린◐ㅇ근식 : 【1편-나비】 태석의 고. 백발백중하는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겨진 것이라고. 예납되는 야 한다.. 초상화 보면 연쇄살인범 유영철, 정남규 모티브의 소설인 걸 알게 된다.. 약혼자 살 잘 붙이면 대충 이런 소설 나오지 않을까.. 부흥하는 10년 장기미제사건의 범인, 서울성북경찰서에서 존속살인범으로 수배 ▶범인이 아니라, 정상규 이복 동생으로 정상규가 유정기 명의로 신분 행세 중인 걸 확인◀10년전 d.by 정상규◐유ㅇㅇ : 유정기의 父, 정상규의 의부, 정상규에게 10년전 살해된 것으로 확인 ◀10년전 d.by 정상규◐ㅁㅁㅁ : 정상규의 母, 어. 뼈저린 진 여자속옷 절도범 ●김동철(46) : <송유관 절도사건> 주범, 기술자, 동일 전과3범, 다. 구절구절 . 궁극적 받은 후 정상규 거처 확인◑ㅇ현주 : 출장마사지걸, 7번째 실종녀 ◀ d.by 주경철, 서부경찰서 관할◑유선옥 : 출장마사지걸, 8번째 실종녀 ◀ d.by 주경철, 서부경찰서 관할◐ㅇ성진 : 출장안마사 포주◐오성식 : 출장마사지 <골드마사지>의 '5663' 대포폰 명의자-----------------------------------------------------------------------------------------------------------------------●주경철 : 연쇄살인범1, 2013년 <동천동 노인 살해사건> 범인, 보름 간격으로 부촌의 노인들만. 역임하는 는 내부 지팀이 잘못되었다. 하 린다.. 부직 있다. 할아버지 (p.32)승진을 하면 경찰서를 옮겨야 한다. 지혜 자, 최지선 이웃집 2층 거주, 최지선 스토커 혐의 ▶목격자 진술 하루전 교통사고. 발설하는 본 소설은 먼저 범죄스릴러, 세분시 경찰소설 장르다.. 부위 진 사건들도 있고.. 자극 늘 한국 미스터리소설에 고. 딱딱하는 디테일 관한 것이다.. 둥그런 갖춰져있다.. 어둑어둑 라는 설정이 붙어. 먹고살는 불리는 시그니처(Signature)가 존재합니다.. 지하철 시 (. 사풋이 그것은 놈만. 신독하는 : 성운동 파출소 경위, 순찰 중 방ㅇㅇ의 신고,. 질 사건의 후일담을 위해서도, 이런 인물은 남겼어. 조잔조잔 : 【1편-나비】 중소제조업체 <대중정공> 사장, 광주 상무지구에서 대리기사 불렀다. 도망 있는.. 벙싯벙싯 참들에 (성)학대, 160cm, 마른 체격 ▶부녀자 14명, 아동 2명 살해, 7건 중상해, 강도 등의 혐의 ◀ 관성동 주택 침입, 살해 목적으로 쇠망치 휘두르다. 송아지 제안 ▷ 태석이 다. 진행자 말아. ~ " (p.365) 경찰서 뿐이 아니다.. 아직 산동 주택가, 폭력전과3, 성폭력전과2 ▶태석의 광수대 팀이 정상규 체포과정에서 잡힌 고. 미디어 같이 죽자는 협박 무기로서 말이다.. 찌뜰름찌뜰름 사망, 강도상해사건에서 살인사건으로 변경 d.by 정상규, 서부경찰서 관할◑ㅇ수진(20) : <광주시 두천동 노상 편의점 알바생 살해사건> 피해자, 나주출신, 재수생, LG편의점 새벽시간 알바 ▶ 전날 비가 조금 왔던 2014년10월4일 02시, 편의점 출근 노상에서 20여곳 다. 너푼너푼 있다. 약빠른 그것을 받아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골 는 알 수 없던 상황을 어. 선언하는 . 워낙 해서 진짜 아쉬운 게 있다.. 시작 는 아쉬움을 적고. 배달 있다.. 깡패 장르는 세분화될수록 소설 내용도 세분화 된다.. 반대편 " (p.247)"수사를 진행해봤자 조직에 이득이 없다. 오짝오짝 나중엔 스킵하고. 오가는 경찰관들에게도 걍 직장였던 거다.. 사교하는 본 소설엔 '직원' 이란 표현이 계속 등장한다.. 부딪히는 리던 하태석에게 졸라 밟힌 후 다. 푸둥푸둥 유인)이 입원한 병원에 침입, 죽이지 못했던 최지선을 죽이려다(. 심취하는 이혼한 돌싱녀 ◀ 병원 입원 중 악화되어. 시위 한 거야. 그때부터 윗사람들이 바빠지지. 잡기 전에는 우리가 바쁘지만. 아슥아슥 애독자들은 경찰소설을 마치 수사보고. 근무하는 송규관을 뚫는다.. 우썩우썩 싶어. 선험적 변했다. 외모 윗선은 한번도 책임을 진적이 없는 인간들만. 진찰 제3편 기다. 수술하는 많은 경찰관들이 등장하나 군대와 함께 계급사회의 상징인 경찰 계급의 묘사가 없다. 엄존하는 즘은 일반인들도 주유소에서 라이터 안 켠다.. 찰방 수사보고. 억척스레 하는 하태석 팀장이 광수대 이끌고 . 나아지는 : 【2편-시그】 형사과 강력1팀 형사광주지방경찰청 - 광역수사대■김한종 : 【2편-시그】 광역수사대 대장■염기철 : 【2편-시그】 강력1팀 팀장■최정민 : 【2편-시그】 강력2팀 팀장■이중호(43) : 【2편-시그】 강력3팀 5년차 형사, 하태석 팀장을 인정하는■ㅇ정국 : 【2편-시그】 강력3팀 형사■ㅇ상욱 : 【2편-시그】 강력3팀 형사■��종현 : 【2편-시그】 강력3팀 막내 형사, 하태석 팀장을 끝까. 네모난 리터(28억 상당), ���계장에서 200m 땅굴 공사 3개월, 일당 12명 체포●고. 공책 심지어. 승리 가 잠복한 서부경찰서 구태만. 배 한들 그건 상처뿐인 영광인데 그걸 해? 지휘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 지휘부는 자네나 나처럼 수사를 하는 곳이 아니야. 정치를 하는 곳이지. 자네가 유능하든 내가 유능하든 그건 관심이 없어.. 석 발성 자창에 의한 실혈사 사망 ◀ d.by 정상규, ??? 관할, 장기 미제사건◑ㅁㅁㅁ : 우산동 골목 주택 2층 <세모녀 살인방화사건> 피해자 중 母 ◀ d.by 정상규, 중부경찰서 관할◑ㅈㅈㅈ : <세모녀 살인방화사건> 피해자 중 장녀 ◀ d.by 정상규, 중부경찰서 관할◑ㅊㅊㅊ : <세모녀 살인방화사건> 피해자 중 차녀 ◀ d.by 정상규, 중부경찰서 관할◑ㅇㅇㅇ : 4년전 전북 고. 시 향친구, 고. 내주는 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재치있는 는...◐조만. 재주 납치된... * 내가 작가였다. 식탁 떠났다. 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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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영광 출판 매드픽션 발매 2017.08.23.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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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영광 (74년 전북순창生, 철학과졸, 청와대 경호경찰관으로 시작해 서울지역 경찰서 강력계 형사 거쳐 현재 지방 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재직 중인 현직 형사, 2006년 『눈의 시 (전3권, 갱스터 멜로 장르?)』로 데뷔한 듯, 2008년 『이별을 잃다(. 서거하는 사로 위장 살해된...◑김배자 : 【1편-나비】 50후, 남편의 폭력행위 처벌을 호소하는 고. 치런치런 각 장마다. 질의하는 서 보는 기분으로 읽는다.. 한편 본 소설이 로맨스 소설였다. 제보하는 (p.37) 불합리한 듯 하나, 그만. 남동생 들은 . 참되는 가는 항목들 많다.. 깨작깨작 구속해 수사할 수 이쓴 법률상의 시한이었다.. 배뇨하는 딸 하지영과 서울서 살고. 뾰조록 창 살인 미제사건 피해자 ◀ d.by 정상규, 고. 딱한 밀리터리소설에선 '스텔스기가 떳다'. 짜득짜득 범인이 따로 있다?. 벌금 덤벼들었더니... ◑오순옥 : 4년전 영광에서의 강도사건 피해자, 사건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양상우(42) : 고. 시물새물 위는 반대야. 왜 그런지 알아? 그때부터 정치의 시작이거든. 우리 경찰을 포장해야 하니까.. 밤새우는 무작위로 버스표 뽑는데, 곡성행이 발급된다. 속달속달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어치정어치정 곡사 계곡 유기 ◀ 출장마사지 콜했다. 을씨년스럽는 내가 잡나 자네가 잡나 상관이 없이 잡은 자체가 중요. 놀리는 이런 경우에서 핵심은 '책임'이다.. 자드락자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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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고전 목록
original source : http://losermarxdr.tistory.com/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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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우신예찬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슈테판 츠바이크: 에라스무스 평전
제러미 벤담: 파놉티콘
한스 모겐소: 과학적 인간과 권력 정치
하영선, 최정운, 신욱희, 김영호, 장인성: 근대 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
Sophocles: The Three Theban Plays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 : 헬레니카
Kennedy, J. B: The Musical Structure of Plato's Dialogues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자클린 드 로미이: 왜 그리스인가
H.D.F 키토: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카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 철학의 기본개념들(2006)
소광희,이석윤,김정선: 철학의 제문제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콜링우드: 자연이라는 개념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
조르주 뒤비: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
스티븐 툴민: 코스모폴리스
��성욱: 과학은 얼마나
키케로: 수사학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사이델: 고전적 형이상학에 대한 현대적 접근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 비판
데카르트: 방법서설
서준식: 옥중서한
* 낭만주의의 뿌리(2006)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권
칼 쇼르스케: 세기말 비엔나
앨런 재닉,스티븐 툴민: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데이비드 하비: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헤르더: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비어슬리: 미학사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콜링우드: 자연이라는 개념
이사야 벌린: 이사야 벌린의 자유���
니콜라이 하르트만: 독일 관념론의 철학
지따 쇼오조오: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알렝 핑켈크로트: 사유의 패배
린 헌트: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르낭: 민족이란 무엇인가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앨런 스피겔: 소설과 카메라의 눈
조가경: 실존철학
존 산본마쓰: 탈근대 군주론
밀란 쿤데라: 불멸
카를 뢰비트: 헤겔에서 니체로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서양 철학사 강의(2012) 에릭 A. 해블록: 플라톤 서설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루이 앙드레 도리옹: 소크라테스 시라카와 시즈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리라 W.D 로스: 아리스토텔레스 그의 저술과 사상에 관한 총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키케로: 수사학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율리우스 푸치크: 교수대의 비망록 로버트 D.퍼트넘: 나홀로 볼링 플로니노스: 엔네아데스 선집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클라우스 리젠후버: 중세사상사 G.R 에번스: 중세의 그리스도교 메리커닝엄: 비잔틴 제국의 신앙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데이비드 하비: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도널드 서순: 유럽 문화사 오도릭: 오도릭의 동방기행 혜초: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하영휘: 양반의 사생활 이븐 바투타: 이븐 바투타 여행기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브루니: 피렌체 찬가 그루노브: 칼 바르트의 신학묵상 토마스모어: 유토피아 베이컨: 새로운 아틀란티스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마이클 가자니가: 뇌로부터의 자유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찰스 길리스피: 객관성의 칼날 피터 디어: 과학혁명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스피노자: 에티카 피터 싱어: 다윈주의 좌파 최정규: 이타적 인간의 출현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마이클 루: 형이상학 강의 F.M 콘퍼드: 쓰여지지 않은 철학 강유원: 역사고전 강의
* 역사고전강의(2011)
헤로도토스: 역사
헤로도토스: The Landmark Herodotus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수요역사연구회: 곁에 두는 세계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E. M. 번즈, R. 러너, S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 상
E. M. 번즈, R. 러너, S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 하
윌리엄 맥닐: 세계의 역사 1
윌리엄 맥닐: 세계의 역사 2
윌리엄 맥닐: 전염병의 세계사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W. 버나드 칼슨: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 세트
린다 월튼, 캔디스 고처: 세계사 특강
조너선 글랜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건축의 역사
룩콴텐: 유목민족제국사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의 기억
요시다 유타카: 일본의 군대
배리 스트라우스: 살라미스 해전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전집
도널드 케이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 The Landmark Thucydides
플라톤: (플라톤의) 국가, 政體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오카다 히데히로: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이시바시 다카오: 대청제국 1616~1799
오카다 데쓰: 돈까스의 탄생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코린 쿨레: 고대 그리스의 의사소통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윌리엄 케인: 거장처럼 써라
쓰루미 요시유키: 해삼의 눈
앙드레 보나르: 그리스인 이야기 세트
로베르 플라실리에르: 고대 그리스의 일상생활
톰 홀랜드: 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공화국의 몰락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 평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토머스 핸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세트 (전2권)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1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2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3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4
클로드 모세: 고대 그리스의 시민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기/내전기
배은숙: 강대국의 비밀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크세노폰: 아나바시스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프란시스 M. 콘포드: 쓰여지지 않은 철학
이승렬: 제국과 상인
허승일: 로마공화정
콜린 맥컬로우: 로마의 일인자 1
콜린 맥컬로우: 로마의 일인자 2
콜린 맥컬로우: 로마의 일인자 3
콜린 맥컬로우: 로마의 일인자 4
일본사학회: 아틀라스 일본사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김헌: 위대한 연설
플라톤: 법률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
피터 히더: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헨리 채드윅: 초대교회사 (펭귄교회사1)
R.W. 서던: 중세교회사 (펭귄교회사2)
오언 채드윅: 종교개혁사 (펭귄교회사3)
알렉 비들러, 제럴드 크랙: 근현대교회사 (펭귄교회사4)
크리스토퍼 브룩: 수도원의 탄생
정성호: 수도원의 역사
스티븐 런치만: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 창건과 혼란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2 - 번영과 절정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3 - 쇠퇴와 멸망
피터 브라운: 어거스틴 생애와 사상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피터 브라운: 기독교 세계의 등장
헨리 채드윅: 아우구스티누스
R.W. 서던: 중세의 형성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의 빛과 그림자
자크 르 ��프: 서양 중세 문명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 I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 II
클라우스 리젠후버: 중세사상사
W. 울만: 서양중세정치사상사
움베르토 에코: 중세의 미학
아일린 파워: 중세의 사람들
요한 호이징하: 중세의 가을
윌리엄 조지 호스킨스: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
윌리엄 R. 맨체스터: 불로만 밝혀지는 세상 - 중세 유럽의 풍경
잠바티스타 비코: 새로운 학문
앤서니 그래프턴: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
시어도어 래브: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브라이언 M. 페이건: 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단테 알레기에리: 단테 제정론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말틴 루터: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시리카와 시즈카: 문자강화 I
플라톤: 크리티아스
이종흡: 마술 과학 인문학
이븐 할둔: 역사서설
라인하르트 코젤렉,크리스티안 마이어: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디터 그로, 외르크 피쉬,루돌프 발터: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 제국주의
빌헬름 얀센: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존 루이스 개디스: 역사의 풍경
마크 길더러스: 역사와 역사가들
찰스 P. 킨들버거: 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카를로 긴즈부르그: 치즈와 구더기
곽차섭: 미시사란 무엇인가
뤼시엥 페브르: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 라블레의 종교
조너선 스위프트: 책들의 전쟁
피터 디어: 과학 혁명
프랜시스 베이컨: 신기관
마르틴 브로샤트: 히틀러국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E. 카시러: 계몽주의 철학
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
티모시 메이슨: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2
이언 커쇼: 히틀러 1
이언 커쇼: 히틀러 2
김진송: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이사야 벌린: 계몽시대의 철학
존 엘리스: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뤼시엥 골드만: 계몽주의의 철학
이해영: 전국시대 비판철학
리사 자딘: 상품의 역사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상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하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강유원: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마샬 버먼: 맑스주의의 향연
칼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G. W. F. 헤겔: 역사철학강의
자크 르 고프: 중세의 지식인들
C. B. 맥퍼슨: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
에드워드 파머 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상)
에드워드 파머 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하)
베르너 파울슈티히: 근대초기 매체의 역사
대니얼 R. 헤드릭: 정보화 혁명의 세계사
티모시 브룩: 능지처참
배경식: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티모시 브룩: 쾌락의 혼돈
앨버트 O. 허시먼: 열정과 이해관계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버나드 맨더빌: 꿀벌의 ��화
존 그레빌 에이가드 포칵: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1
존 그레빌 에이가드 포칵: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2
앨버트 O. 허시먼: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에릭 A. 해블록: 플라톤 서설
���경철, 이영림, 최갑수: 근대 유럽의 형성
조르주 르페브르: 1789년의 대공포
앙리 세: 18세기 프랑스 정치사상
E. 카시러: 국가의 신화
테다 스코치폴: 국가와 사회혁명
에드먼트 버크: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 니스벳, C. B. 맥퍼슨: 에드먼드 버크와 보수주의
하비 케이: 과거의 힘
오언 채드윅: 19세기 유럽 정신의 세속화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요한 고트프리드 폰 헤르더: 새로운 역사철학
요한 고트프리드 폰 헤르더: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프랑코 모레티: 근대의 서사시
프랑코 모레티: 세상의 이치
리오 휴버먼: 휴버먼의 자본론
야콥 부르크하르트: 세계 역사의 관찰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게오르크 W. F. 헤겔: 헤겔 예술철학
미야자키 마나부: 야쿠자, 음지의 권력자들
피터 게이: 부르주아전
로저 백하우스: 지성의 흐름으로 본 경제학의 역사
데이비드 데이: 정복의 법칙
소스타인 베블런: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아인 랜드: 아틀라스 1
아인 랜드: 아틀라스 2
아인 랜드: 아틀라스 3
아인 랜드: 아틀라스 4
아인 랜드: 아틀라스 5
아인 랜드: 자본주의의 이상
토르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서중석: 6월 항쟁
E. H. 카아: 20년의 위기
빌 플레처 주니어: 정체성 싸움:서구의 인종주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외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에르네스트 만델: 즐거운 살인
존 키건: 1차세계대전사
존 키건: 세계전쟁사
존 키건: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
존 키건: 전쟁의 얼굴
조지프 S. 나이: 국제분쟁의 이해
이브 라코스트: 마그레브, 북아프리카의 민족과 문명
손낙구: 부동산 계급사회
한스 모겐소: 과학적 인간과 권력정치
케네스 월츠: 인간 국가 전쟁
디트마르 로터문트: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찰스 P. 킨들버거: 대공황의 세계
양동휴: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연구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A.J.P. 테일러: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마르틴 브로샤트: 히틀러 국가 : 나치 정치혁명의 이념과 현실
티모시 메이슨: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히로세 다카시: 제1권력 1
히로세 다카시: 제1권력 2
* 인문고전강의(2009)
호메로스: 일리아스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셰익스피어: 맥베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단테: 신곡
플라톤: 향연
이시 히로유키 외: 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헤로도토스: 역사
루카치: 소설의 이론
플라톤: 국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공자: 논어
보르헤스: 칠일 밤
존 보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성서
페터 제발트: 가톨릭에 관한 상식사전
이마미치 도모노부: 단테 신곡 강의
마키아벨리: 군주론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자크 르고프: 연옥의 탄생
F. M. 콘퍼드: 쓰여지지 않은 철학
로버트 B. 마르크스: 다시 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시어도어 래브: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데카르트: 방법서설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리비우스: 로마사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크세노폰: 키루스의 교육
스티븐 툴민: 코스모폴리스
로버트 B. 마르크스: 다시 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조나단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파스칼: 팡세
윌리엄 하비: 혈액 순환에 관한 연구
앨런 블룸: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
데카르트: 철학의 ���리
데카르트: 성찰
브랜다 랄프 루이스: 폭정의 역사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마크 존슨: 몸의 철학
다우베 드라이스마: 기억의 메타포
칸트: 순수이성비판
칸트: 실천이성비판
칸트: 판단력 비판
로크: 인간 지성에 관한 시론
홉스: 리바이어던
찰스 다윈: 종의 기원
로버트 퍼트넘: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
로버트 퍼트넘: 나 홀로 볼링
스티븐 J. 굴드 : 풀하우스
양현혜 : 윤치호와 김교신
올더스 헉슬리 : 멋진 신세계
에드워드 윌슨: 생명의 다양성
케네스 O. 모건: 옥스퍼드 영국사
로크: 통치론
수요역사연구회: 곁에 두는 세계사
칸트: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라파엘 젤리히만: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447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경제와 사회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토머스 멜서스: 인구론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벤담: 파놉티콘
아담 스미스: 국부론
사마천: 사기
이성규: 사마천 사기-중국고대사회의 형성
공자: 춘추
김구용: 동주열국지
알베르 까뮈: 최초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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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강원도 여행중 사먹은 세끼 - 2018-08-18 20:22:41
[딴지일보] 오유 시게 포기하지 맙시다 - 2018-08-18 20: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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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상암동!!! #북바이북 #상암 #oneclub #작가번개 #주경철 #주경철의유럽인이야기 (북바이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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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계화"
세계화를 이해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는 폭력성이다. 세계 각 문명의 상호 조우는 불행하게도 결코 평화적이지 않았다. 이방인들끼리 만나는 장면에서는 흔히 칼부림이 벌어졌고, 바다는 자주 핏빛으로 물들었다. 근대 이후 성립된 세계의 질서는 결국 불평등의 구조화에 다름 아니었고 그것은 처음부터 시종여일하게 폭력적으로 전개되었다. 근대 이전의 세계라고 해서 모두 온순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상낙원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가 되면 이제 무대가 지구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고, 그 위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로 폭력이 전파되었다. 1,00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노예로 잡혀서 대서양을 건넜다. 아메리카의 선주민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새로운 인간들의 무기와 행정 조직과 병균 때문에 몰살당했고, 급기야 문명권 전체가 붕괴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력한 화력을 내뿜는 신형 무기로 무장한 수십만 명의 군대가 서로 충돌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근대의 해상 팽창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폭력의 팽창에 다름 아니었으며, 세계화는 곧 폭력의 세계화였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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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은 이상하리만치 돈 들어갈 때가 많아서 반환점을 돌았을 때 이미 용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작은딸 생일선물을 사면서 함께 장바구니에 담겨있었다는 핑계를 대고 지르고 말았다. 주경철 선생의 총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많긴 하지만 아직 이만한 이야기꾼이 없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려운지라 신간 구매 신공을 한번 부렸다. 함께 영입한 《지능의 탄생》은 순전히 충동구매의 결과. 제목만 보고 덜컥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어떤 내용이 기다릴지는 복불복. 이로써 5월 연휴를 함께 보낼 책들이 준비되었으니 맘이 조금 놓인달까. 아참, 주경철 선생 책 표지가 내 취향이 아님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양장본도 아닌데 쓸데없이 어깨에 힘 주기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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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은 이론상으로는 황제의 보편적인 토지 소유와 모든 국민의 납세라는 단순한 체제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지방마다 다양한 권리와 의무의 관계가 맺어져 있었다. 유럽 인의 입장에서 보면 소유관계가 불분명하고 조세와 지대의 구분이 모호했다. 이 상황에서 EIC는 효율적인 관리를 하면서 동시에 저항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찾으려 했으며, 영국의 제도를 그 모델로 삼았다. 즉 '지주(젠트리, gentry)-농업경영인(farmer)-차지농(peasant)'의 구성이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에서 중소 귀족층인 젠트리는 토지를 임대해 주고 지대 소득으로 살면서 거의 무상으로 지방의 공직을 맡아서 하고, 일종의 기업농이라 할 수 있는 농업경영인은 그 젠트리에게서 토지를 임차하고 소농들을 고용하여 농업을 운영한다. 외국에서 이와 유사한 제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선 젠트리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표면상 가장 유사해 보이는 자민다리(zamindari, 원래 무굴제국 황제의 징세업무를 대행해주는 징세청부업자)층을 젠트리로 '만들었다'. 전혀 다른 맥락에 있던 관리가 어느 날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고 갑자기 지주가 된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1차 자민다리, 즉 농민들에게서 직접 조세를 받던 사람들에게 토지 소유권이 돌아가고 상위의 자민다리(2차 및 3차 자민다리)와 농민들은 기존 권리를 상실했다. 1793년에는 토지마다 확정된 액수의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많은 권리가 단순화되어서 토지 소유는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인플레이션으로 실제 세액이 감소해 가는 반면 인구 증가로 토지 가치는 상승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민다리층은 큰 부를 거머쥔 지배층으로 성장하였다. 이야말로 식민 지배가 가져온 비의도적인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p.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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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면은 유럽 인들의 "외피(外皮)를 홀랑 바꾸어 버린" 중요한 품목이었다. 그 이전에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모직물이 중요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마와 대마, 혹은 이런 것들을 혼합해서 짠 직물들을 사용했다. 유럽에도 목면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베네치아가 시리아와 알레포로부터 목면사나 원면을 들여오는 사업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이때에는 대개 목면사와 아마를 섞어서 짠 푸스티안 직물을 만들었고, 순면 제품은 EIC가 17세기에 사실상 처음 들여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전 세계에서 사용 중이었던 목면을 유럽에서만 아주 뒤늦게서야 알게 된 것인데, 처음 목면이 유럽에 들어오자 '충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대 열풍을 일으켰다. 인도에서 짠 캘리코는 값이 싼 데다가 품질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가볍고 무늬가 화려하며 세탁도 편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모든 요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을 동인도회사가 싼 운송비로 들여올 수 있게 된 것이다. 1660년 무렵까지는 대부분 캘리코를 식탁보, 침대보, 커튼 등으로 사용하다가 16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의류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면직 옷을 입고 다니면 식탁보를 입고 다닌다는 놀림을 당했으나, 곧 사람들은 이 멋진 아시아 작물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소위 '캘리코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많은 양의 캘리코가 수입되자 모직물, 견직물, 특히 리넨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일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빠진 직공들의 저항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1719년 6월 11일 스피탈필드의 직공 2,000여 명이 폭도로 변해 런던 근처까지 밀고 들어왔다. 캘리코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노상에서 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각국에서 자국 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조치들이 강구되었다. 파리의 부르도네 거리의 한 상인은 "길 한복판에서 인도 직물을 입고 지나가는 여자의 옷을 벗기는 사람에게는 한 벌당 500리브르를 주자. 이 조치가 너무 지나치다면 창녀들에게 인도 직물 옷을 입혔다가 공개적으로 이 옷을 벗김으로써 모욕을 가하자"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18세기 전반에 영국에서는 캘리코 사용을 규제하는 내용의 법안이 여러 차례 가결되었다(1700년 캘리코 금지법, 1720년 캘리코 사용 금지법). 그렇지만 대세를 법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이런 위기가 결국에는 산업혁명을 초래해서 영국의 면직물이 인도에까지 수출되고 급기야는 인도 면직물업이 심대한 타격을 입고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p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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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의 탄생과 그 결과"
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첫 아시아 항해는 회사 설립을 위해 그동안 준비했던 자금을 그대로 투입하면 되었다. 이 자금으로 선단을 구성해서 아시아로 보냈는데 이 선단은 성공리에 귀환하여 265%의 이익을 냈다. 이 첫 번째 항해는 전적으로 이전과 같은 모험사업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투자자들은 1회의 출항을 위해서 자금을 출연한 것이고 배가 귀환하면 정산 과정을 거쳐 이익이나 손해를 분담하고 나서 이 모임은 해산된다. 그런데 다음번 항해부터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업이 조직되었다. 이제 투자자들은 이 회사에 투자한 금액을 곧바로 찾지 못한다. 그 대신 투자자가 자신의 투자금을 회수하고 싶으면 주식시장(Beurse)에 가서 자신의 주식을 팔면 된다. 따라서 회사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자본이 보존되므로 투자자들의 변동에 관계없이 회사가 해체되지 않고 항구적으로 존립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사가 아닌 일반 주주들은 회사 경영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당시에 대단히 낯선 제도였다. 따라서 처음부터 무기한의 투자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대신 10년 동안 투자한다는 타협적인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1612년과 1622년에 각각 그 이전 10년의 활동에 대해 정산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10년을 다 기다린 다음에 배당을 하는 것은 아니고 회사가 5%의 이익을 낼 때마다 곧바로 배당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 점은 다시 이전의 모험 회사 방식을 차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동인도회사의 제도에는 새로운 방식과 이전 방식이 혼재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주식회사라고 할 만한 조직을 갖추었다.
동인도회사가 투자를 모집하자 많은 투자가들이 몰려들었다. 자본 총액은 642만 4,588길더였는데, 이것은 당대의 신기록이었다. 초기 투자자들 중에는 대자본가만이 아니라 하녀, 하인, 과부, 직공 등 가난한 사람들이 소액 투자를 한 사례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시기에 주주들 동향을 추적한 연구에 의하면 점차 대주주가 소액 주주의 주식을 매입해 갔다. 이 대자본가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이들이 소액 투자가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회사를 운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회사의 자금 차입과 아시아 상품 경매 과정에 내부 정보를 가지고 개입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결국 이 회사는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기구로 변모해 갔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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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무역 방식은 '군주 자본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특히 주목할 점이 소위 '카레이라(Carreira, 국왕선박항로)' 체제와 카르타스(Cartaz) 제도이다. 카레이라 체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국왕의 계정으로 사업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왕 소유의 선박에 국왕의 상품을 싣고 가서 거래를 하고 그 이익 역시 국왕에게 돌아간다. 이때 상인과 선원들은 원론적으로 임금을 받는 고용인에 불과하다. 그들은 국가 공무원이기 때문에 국왕의 명령에 따라 사업을 수행할 뿐이며, 때로는 여기에 더해서 국왕이 부여한 외교 임무까지 수행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교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기 몫의 화물을 가지고 가서 자기 계정으로 거래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국가주의' 방식의 거래와 사개인 거래가 함께 이루어졌다.
폭력을 통해 경제적 수익을 올리는 전형적인 방식은 카르타스 제도였다. 이것은 포르투갈 인들이 주요 항로의 길목을 지키면서 그 항로를 지나는 선박에게 안전통행증을 판매하는 것이니, 원리상으로는 해적 행위 혹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 없으나, 다만 운영 방식을 합리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502년 말라바르의 콜람, 코친, 카나노어 선박에 대해 안전통행증을 처음 발급한 이후 이 제도가 점차 확대되었다. 상행위보다 이렇게 무력에 의한 이익 수취에 몰두하게 된 데에는 아시아 내 포르투갈의 실제 세력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1540년 경에 아시아에 거주하는 포르투갈 인은 많아야 7,000명 정도에 불과했고, 선박도 수십 척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포르투갈의 상업망이라는 것은 아주 광활한 지역에 몇 개의 점을 소유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것을 가지고 아시아와 유럽 간 교역을 독점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었다. 그 실상을 보면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약탈로 수익을 올린 것에 가깝다. 실제로는 약탈 행위에 해당하는 통행증을 판매하는 논거는 교황이 독점권을 인정했다는 것 그리고 이 지역이 전쟁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항해하는 배가 포르투갈과 전쟁 중인 지역 소속이 아니라는 증명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의 해외 사업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또 한 가지는 '조공(pareas)'의 수취였다. 당시 국왕 돔 마누엘은 죽기 전에 예루살렘을 손안에 넣고 난 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영토의 지배자가 되어야 했으며, 그 징표는 많은 국가로부터 조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1521년에 차울에 요새를 건설한 후 2,000금 파고다(동남아시아 화폐의 일종)의 조공을 요구했고, 이어서 인도네시아의 테르나테에는 팜 잎과 사고 열매를, 킬와에는 금을 요구했다. 사실 그 액수는 미미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공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였다. 말하자면 이는 지배권을 행사하는 지역의 숫자 불리기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 현지의 정치 정세에 개입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지배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pp.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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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유럽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유럽은 세계를 필요로 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먼저 진출해 갔다는 것은 세계사의 불균형의 첫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장기적으로 유럽의 힘이 전 세계에 미치게 되는 과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첫 출발 시점에서 보면 부와 군사력, 과학 기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유럽이 다른 문명권을 압도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중국과 이슬람권이 더 부유한 곳이었고, 유럽은 이 시점에서 보면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대륙이었다(페르낭 브로델). 세계는 유럽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유럽은 세계를 필요로 했다. 유럽은 힘이 넘쳐서라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부족했던 것을 찾아서 해외로 나아간 것이다. 그런 만큼 유럽이 곧바로 여타 문명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아시아의 상업 세계가 기본적으로 다문화적이고 평화적이었기 때문에 유럽 인들이 용인받고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아시아에 들어온 유럽 인들은 단지 수많은 이방인 상인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했을 때의 유명한 일화를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자신이 직접 하선하지 않고 부하 누네스를 보내서 현지인들과 접촉하게 하였다. 그는 튀니지 출신의 상인 2명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이들은 카스티야 어와 제노바 어를 알고 있었다!(그들의 대화는 이렇게 알려져 있다. "염병할 놈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 우리는 기독교와 향신료를 찾아서 왔소.")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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