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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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yo129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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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 Sub] 나 근대 5종. | MINHO in PARIS 02 | Olympic Games PARI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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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kdramamama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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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근대 5종. | MINHO in PARIS 02 | Olympic Games PARI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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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ho-moho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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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아트스페이스 우월
1) 에피타이저
왼쪽부터 트러플 타르타르 > 프로마치즈타르트 > 미니타코
오빠와 내 원픽은 프로마치즈타르트!
넘 예뻐서 먹기 아쉬웠지만 한입에 쏘옥 ‘0’
2) 근대 잎으로 만든 만두
육즙 한가득 만두, 이것도 너무 맛있었다! 🥟
3, 4) 부채살/채끝��
부채살은 가운데 힘줄이 있어 별미였다!
채끝살은 육즙 가득이었다!
숯불 향도 아주 가득함!
오빠가 자기 자리 조명이 좋다고 자기가 찍겠다고 해서 그러라 했는데 카메라도 안 닦고 찍을 줄이야 ㅠ_ㅠ 고기 사진 두개 빼곤 나도 같이 찍어서 그나마 다행…
5) 카야네면으로 만든 비빔 우동
면발은 아주 쫄깃하고 더덕과 들기름의 조화가 괜찮았다.
6) 양념된 치맛살 / 늑간살
원탑은 치맛살!
양념이 아주 맛있는 양념이었음!
우마카세는 앵콜이 없어서 아쉽… 앵콜이 있었다면 치맛살로 골랐을텐데🥲
7) 브리오슈 번과 한우패티로 만든 버거
아주 비싸고 고급진 햄버거 맛이었다 ㅋ_ㅋ
번이 버터향이 가득해서 풍미가 좋았당
8) 한우육회비빔밥 & 경상도식소고기뭇국
일반적으로 먹는 비빔밥이 아닌 퓨전식이어서 조금 낯설었다.
밥순이는 국까지 나와서 넘나 행복!!
총평 : 바로 앞에서 정성껏 좋은 한우를 구워 래스팅도 해주고 보는 재미, 먹는 재미 다 있었다! 하지만 한번의 경험으로 만족함- 그래도 나 좋은거 먹이겠다고 찾아보고 예약해서 델꾸 가 준 우로빠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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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21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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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화인사회에 ‘정치적 정체성’을 강요하기 시작한 1870년대 중국은 ‘화교華僑 정체성‘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청나라 정부는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도 없었다. 중국인의 해외 이주를 금지했기 때문에 보호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논리였다. 그런 청 정부가 1877년 싱가포르에 중국영사관을 개설하며 뒤늦게 화교 보호에 나섰다.
중국은 근대 국적 개념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속인주의屬人主義를 따랐다. 부계 혈통이 중국인이면 어디에 살든 중국인으로 간주됐다. 화교는 중국 영토 바깥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가리킨다. 중국은 1909년 공식적으로 속인주의 국적 원칙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전에도 영국의 속지주의 원칙�� 따라 영국 국적을 가진 해협 태생의 화인은 중국에서 보자면 해협에 거주하는 중국인, 즉 ‘해협화교’일 뿐이었다. 싱가포르의 중국영사관 개설은 영국의 ‘해협화인’에게 중국의 ‘해협화교’ 정체성을 고양하는 이정표가 됐다(Yen, 1982: 286).
싱가포르의 중국영사관 개설은 1877년 초대 런던 주재 중국 공사에 임명된 곽숭도郭崇燾(1818~1891)가 주도했다. 남양화교를 보호하고, 그들의 재능과 재력을 조국 근대화에 활용하자는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영국은 화인사회에 중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우려해 싱가포르의 중국영사관 개설에 부정적이었다. 초대 싱가포르 주재 중국 영사에 외교관이 아니라, 싱가포르의 거상이자 해협식민지 정부의 신뢰를 받는 후아카이Hoo Ah Kay胡亞基(1816~1880)가 임명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이 타협한 결과였다. 영사관의 지위도 한시적이었다. 당시 해협식민 입법위원회와 집행위원회의에서 화인을 대표하는 민간위원이었던 후아카이는 곽숭도의 구상에 부합한 인물도 아니었고, 실제 영사로서의 역할도 미비했다. 중국은 싱가포르에 영사관만 개설했을 뿐, 영사관 운영 비용을 영사가 부담하도록 했다. 후아카이에게 중국 영사자리는 자원봉사 수준의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다.
싱가포르 주재 중국여사관은 1880년 후아카이 사망 이후 상설 영사관으로 바뀌었고, 이듬해 중국인 외교관 좌병륭左秉隆이 부임해 10년간 재직했다. 옌칭황(Yen, 1982: 287~291)은 신세대 유학자 외교관의 부임으로 중국인 싱가포르에 영사관을 개설하고자 했던 두 가지 목적이 부분적으로 실현됐다고 평가했다. 싱가포르 화인사회 속으로 다가간 영사 좌병륭의 부드러운 접근 방식이 ‘해협화교’의 정체성 고양에 주용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좌병륭은 기본적으로 해협의 화인을 화교로 간주했다. 영국 국적을 가졌더라도 화교는 정치적으로 청 황실에 충성해야 하고, 문화적으로는 유교적 가치와 중국의 관습을 따르며, 모국어인 중국어를 써야 한다는 견해혔다. 그는 해협의 화인사회가 중국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봤다. 1882년 화인 식자층을 대상으로 일종의 문학회인 회현사會賢社를 조직했다. 좌병륭이 회현사 회원에게 주제를 제시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중국어로 쓴 산문과 시문을 품평해 포상하는 방식이었다. 우수한 글은 싱가포르의 중국어 일간신문 《력보叻報Lat Pau》[*랏파우는 1881년 창간된 싱가포르 최초의 중국인 일간 신문으로 1883년 하루발행부수는 350부였다. 랏叻은 말레이어로 해협을 뜻하는 살랏salat에서 ‘랏’을 취한 것으로, 싱가포르를 의미한다.]
좌병륭은 중국어 식자층을 대상으로 회현사를 조직한 데 이어 영어를 쓰는 해협 태생 화인에게도 접근했다. 영국 신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해협의 화인에게 화교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좌병륭은 1888년 중국적 가치와 도덕에 관해 영어로 대화하는 토론회[Celestial Reasoning Association]도 조직했다. 좌병륭이 격주로 영사관에서 이 토론회를 직접 주관했다. 중국어를 모르는 해협의 화인 엘리트에게 영어로 접근함으로써 화교 정체성을 고양하는 실용주의적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는 화교의 재능과 재력이 중국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해협의 화인이 중국인이라는 ’화교 정체성‘을 갖는 것이 먼저라고 봤다. 좌병륭의 우호적인 접근방식은 화인사회의 고정관념이었던 ’중국 관리=탐관오리‘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완화하는 기회가 되었다.
… 중국 영사관이 해협의 화인을 상대로 시도한 문학회, 독서회, 토론회 등의 접근 방식은 이후 영령 말라야의 화인사회가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널리 차용되었다.
해협의 화인에게 화교 정체성을 불어넣고, 중국과 청 정부에 관한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꿔놓은 싱가포르와 페낭의 중국 총영사관과 부영사관의 영향력은 1894년 청일전쟁을 고비로 급격히 약화되고 말았다(Turnbull, 1989: 107). 이후 중국 정부는 ‘해협화교 정체성’ 강화보다 남양 거부들을 중국의 부국강병에 끌어들이는 ‘애국화교’ 유치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 1896년 청 정부는 귀국한 화교를 협박하거나 금품을 탈취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칙을 공포한 데 이어 1899년에는 복건성 하문에 귀국 화교의 공식 보호 기구인 보상국保商局도 설립했다.
해협 화인사회의 화교 정체성을 더욱 첨예하고 정치적으로 만든 것은 세기말 중국의 정치적 격변과 중화 민족주의의 대두였다. 1898년 무술변법에 실패한 개혁파 강유위康有爲에 이어 1907년 혁명파 손문孫文이 싱가포르로 망명했다. 개혁파와 혁명파 두 집단은 각각 보황회保皇會와 동맹회同盟會를 통해 화인사회의 마음과 돈을 얻으려 경쟁했다. 싱가포르와 페낭을 비롯해 중국인이 밀���된 주요 도시에서 강연회가 있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협의 화인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중국의 정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1899~1901년 의화단운동은 열강에 침탈당하는 조국의 현실과 외세를 배격하는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의 대두를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해협식민지 정부는 물론 화인 사회에도 충격을 줬다. 세 가지 정체성의 모순이 동시에 제기되면서 어디에 소속감을 둘 것인가에 관한 화인사회의 고민은 깊어졌다.
개혁파와 혁명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국어 신문들이 싱가포르와 페낭에 잇달아 창간됐다. 화인사회 엘리트가 대체로 보수파였지만, 변화의 물결은 멈추지 않았다. 1910년까지 말라야 전역에 혁명파를 대표하는 손문의 동맹회 지부가 50여 개나 생겨났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곳이자, 손문이 마지막으로 무장봉기를 계획한 곳이 페낭이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武昌봉기로 혁명의 물결이 성과 성을 넘어 확산되면서 결국 청 왕조는 몰락했다. 그 여파는 이내 해협으로 밀어닥쳤다. 신해혁명 이후 페락의 이포에서 열린 대중집회에서 보수파였던 페낭의 화인 거상 푸추춘은 혁명파로 전향을 선언하면서, 청과 인연을 끊는 상징으로 변발을 자르기도 했다(Yen, 1976: 271).
1920년대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영향이 해협식민지로 미쳤다. 공산주의자들이 싱가포르 국민당 지부를 장악했고, 1926년에는 ‘남양노동총동맹’도 결성됐다. 1890년 불법화 이후 ‘깡패 집단’으로 음성화된 화인 비밀결사가 중국의 정치 변화와 결합하면서 좌파 대중조직으로 정치색을 띠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 당국은 인종주의적 차별을 강화하면서 ‘중국인’을 향해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냈고, 해협의 화인사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해협 화교 정체성’ 압박은 페낭의 화인사회가 중국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동일하게 여기는 민족주의 정체성으로까지는 아닐지라도, 조상의 나라인 중국의 운명에 보다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402~408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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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yup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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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무언가를 하고 그래서 성공 또는 실패한다
가 고전적인 이야기의 가장 단순한 구조라면, 그게 현대에 와서는
A는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고선 A'가 되었는데, A'는 결코 A와 같지 않다 혹은 A'는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A일 뿐이다.
라고 변형되었다. 그러니까 그게 왜, 무엇 때문에 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다 수동적인게 표준화되었다? 라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게 바로 푸코가 말했던 은밀하고, 차갑고, 음흉한 근대 권력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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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wuq · 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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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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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데, 30분 기다려서 순대국밥 먹었어. 제발 맛집 좀 노출시키지마. 내 마음 찰떡같이 채워주는 너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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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 우아떠는 거 보면서, 난 순대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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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못한 시선, 교보문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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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도 부재중, 중요한 연락은 메모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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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누가 세대간의 차이를 만드는가. 규정짓지도 말고, 너네는 또 다르다고 유난떨지도 마. 걍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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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1988년도는 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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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차가 생겨서 걷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오늘 미친듯 걸어서 좋았다. 물론 추운거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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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은행(너무 예쁘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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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삼백부터 워라벨이라. 워라벨 뜻은 알고 그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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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ha-hitomi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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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의 역사 1.1 초기 망가의 기원 망가의 기원은 에도 시대(1603-1868)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에는 '토바 에혼'과 같은 초기 형태의 그림책이 등장했으며, 이는 오늘날의 망가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초기 그림책은 유머와 풍자를 담은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2 근대 망가의 발전 근대 망가의 시초는 메이지 시대(1868-1912)부터 시작됩니다. 이 시기에는 서양의 만화 기법이 일본에 도입되었고, 일본 특유의 이야기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식의 만화가 탄생했습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작가로는 '라쿠텐 기타자와'와 '오카모토 잇페이'가 있습니다.
1.3 전후 망가의 황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망가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이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의 대표작 '아스트로 보이(鉄腕アトム)'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랑받았습니다. 테즈카 오사무는 '망가의 신'으로 불리며, 그의 작품은 망가의 스토리텔링과 예술적 표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망가의 특징 2.1 다양한 장르와 주제 망가는 매우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다룹니다. 소년망가(少年漫画), 소녀망가(少女漫画), 성인망가(成人漫画) 등 독자층에 따라 다양한 카테고리로 분류됩니다. 소년망가는 주로 액션, 모험, 스포츠를 다루며, 소녀망가는 로맨스와 드라마를 중심으로 합니다. 성인망가는 보다 복잡하고 성숙한 주제를 탐구합니다.
2.2 독특한 예술 스타일 망가사이트 추천 그 독특한 예술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큰 눈, 과장된 감정 표현, 세밀한 배경 묘사는 망가의 주요 특징입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캐릭터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독자가 이야기 속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2.3 서사적 구조와 연재 형식 망가는 일반적으로 주간 또는 월간 잡지에 연재되며, 이후 단행본으로 출판됩니다. 이러한 연재 형식은 작가가 독자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하고, 이야기의 전개를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을 제공합니다. 또한, 연재가 완료된 작품은 종종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으로 재탄생합니다.
주요 망가 작품 및 작가 3.1 테즈카 오사무 테즈카 오사무는 '망가의 신'으로 불리며, 그의 작품은 일본 망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아스트로 보이', '정글 대제(ジャングル大帝)', '불새(火の鳥)' 등이 있습니다. 테즈카의 작품은 깊이 있는 철학적 주제와 복잡한 캐릭터 설정으로 유명합니다.
3.2 아키라 토리야마 아키라 토리야마는 '드래곤 볼(ドラゴンボール)'의 창작자로 유명합니다. '드래곤 볼'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수많은 파생 작품과 미디어 믹스를 탄생시켰습니다. 토리야마의 유머 감각과 독특한 예술 스타일은 그의 작품을 독창적으로 만듭니다.
3.3 나루토의 마시모토 키시모토 마시모토 키시모토는 '나루토(ナルト)'의 창작자로,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루토'는 닌자 세계를 배경으로 한 액션과 드라마를 결합한 이야기로, 깊이 있는 캐릭터 개발과 감동적인 스토리로 유명합니다.
현대 망가의 영향과 발전 4.1 글로벌 영향력 망가사이트 추천 일본 내에서만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망가 팬층이 두터우며,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글로벌 영향력은 일본 문화의 홍보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4.2 디지털화와 인터넷 디지털화와 인터넷의 발전은 망가의 유통과 소비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만화 앱을 통해 독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망가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작가들이 보다 쉽게 작품을 발표하고,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4.3 애니메이션과의 시너지 망가와 애니메이션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많은 인기 망가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며, 이는 망가의 인기를 더욱 증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의 성공은 원작 망가의 판매를 촉진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너지 효과는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망가의 사회적 역할 5.1 교육적 역할 망가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교육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역사, 과학, 문학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 망가들은 교육적인 도구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 망가'는 일본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5.2 사회적 메시지 전달 망가사이트 추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매체로도 사용됩니다. 인권, 환경 문제, 정치적 이슈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독자들에게 중요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나오키 우라사와'의 '몬스터'는 인간의 본성과 도덕적 딜레마를 탐구합니다.
망가사이트 추천 단순한 만화를 넘어서, 일본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통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디지털화와 글로벌화로 인해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망가는 새로운 이야기와 예술적 표현을 통해 독자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제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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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atymakernight ·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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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새요! 여전에 미술 요구를 원하신다고 바엇내 요! (항국어 가 안조우면 미안행! 우리 어먼님 은 믹국 분 인대 미국 에서 자랐아요) 근대 혹시 나루토 사스캐 와 사쿠라 그려주고 십나요? 고망워요!!
알았어 그려볼게... 시간이 걸리니까 기다려주길 바라
:)
@kakashi-from-accou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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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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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길 공동주택"
오래전 서울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에 관해 쓴 책 한 권 읽은 덕분에 눈여겨보게 된 장충단길 '공동 주택'.
기록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와 1955년부터 한 채 두 채 무허가로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게 쌓여 아파트처럼 변해 버린 거라고 한다. 정식 허가를 받아 주소를 발급 받은 거는 1968년 무렵이고.
개포동 구룡마을이나 장지동 화훼마을에 앞선 역사 현장이랄 수도 있을 듯?
십수 년 전 책 읽고 나서 호기심에 가봤을 땐 마치 홍콩 영화에 나옴직한 슬럼가처럼 방치돼 있었는데 입구에 페인트칠도 하는 등 나름 정비를 한 거 같다.
삼성 재벌가가 이 동네를 자기네 나와바리로 점 찍었단 소문을 들은 적 있고, 교통 요지라서 천정부지로 치솟은 땅값을 고려하면 머잖아 헐리고 고층 건물 올라올 거 같은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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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factor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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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횡단: 생동의 축지법
‘홍천횡단’은 동서로 긴 홍천 지역을 지시한다. 양 끝의 두 지점이 물리적 거리의 한계와 그것을 잇는 연결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면, ‘생동의 축지법’은 그 연결에 부스터를 단 격이다*. ‘축지법’은 힘(=속도)과 힘의 감축을 동시에 구성한다. 힘을 빼고서 힘을 생성한다. 초월적 힘은 하나의 개체들로, 고대의 시간으로, 비합리적 언어 체계로 향한다. 곧 축지법은 각각 하나의 몸을 가정하며, 근대의 기계 문명과 다른 셈법을 요청하며, 가시적인 현실 질서를 흐릿하게 보존한다**.
실상, ‘홍천’은 행정 단위의 편재일 뿐 그 안의 실질적인 홍천의 언어들을 통합하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 홍천강은 홍천을 동서로 횡단한다. 그리고 예전부터 매우 오랫동안 다른 문화적 생산양식의 차이를 가져왔다. 따라서 ‘횡단’은 자연과 문명의 이중적 질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파생한다. ‘연결과 분리.’ 이러한 지역은 근대 수송 체계를 도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수한 별자리들을 잇는 하나의 대륙에 가깝다. 횡단은 또한 분단의 이미지를 미약하게 지지한다. 곧 분단에 대한 무의식이 굴절된 것일 수도 있다―남북에서 동서로.
축지법은 오늘날에는 가속화된 자본주의의 흐름에 예속되며, 속도의 도입에 따른 감산된 거리에 대한 지연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앞선 ‘하나의 개체들”이 예술가들이라면, 낭만주의적 시간의 질서를 재현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아마도 절대적인 고유명사와 비언어적 언어가 공존하는 본 제목으로부터 예상되는 바일 수 있다. 다시 축지법에서 횡단으로, 홍천으로, 곧 역순으로 되짚어 온다면, 의미는 갱신될 것이다. 도약과 연결, 그리고 지역에 도달하면, 초월의 개념은 현실의 몸이라는 한계와 만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공고한 것을 흐트러트리는 대신 접근하기, 투명한 것을 노출하는 대신 덧대기, 현재를 수용하는 대신 역사를 들여다보기. 아마도 그러한 방식들을 축지법으로서의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예술은 어떤 것에 대한 관점을 창안한다. 그 관점이 현실 너머에 다른 현실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은 유효하다. 그것이 하나의 유희이거나 속삭임이거나 가벼운 것이어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횡단은 ‘지역’에 관한 안팎의 오역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지역과 바깥의 위상차가 아니라, 지역 자체의 요철을 감각하는 것, 스스로의 변증법적 고양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는 것. 안의 입구를 조망하며 바깥의 출구를 정향하는 것. 어느 날 낯선 지역에 던져진 예술가들은 무언가를 붙잡아야 한다. 불안정한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안정화하거나 예술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초과된 지역의 이미지를 투과하는 자신의 연약한 신체를 조정하기 위해. 곧 우묵한 안과 튀어나온 바깥을 조율하는 신체 내 축지법을 가동시키기 위해. (김민관 큐레이터)
* 오스트리아, 독일, 한국의 12명의 작가는 두 팀으로 나눠 팔봉산과 오대산을 답사하며 ‘홍천횡단’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시작을 열었다. 홍천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팔봉산과 오대산이 각 지역의 상징적 거점이라면, 두 팀은 각자의 지역에 머물렀고, 따라서 횡단은 두 장소를 잇기보다 가지 않은 나머지 장소를 각각의 주체가 상상하는 방식에 가깝다.
** 팔봉산과 오대산 답사 이후, 두 팀은 마지막으로 동학혁명군 전적지에서 합류하며 물리적인 홍천 이동의 일정을 마쳤다. ��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혁명을 꿈꾸던 이들을 ‘함께’ 기억하며, 현재를 되비쳐 보고자 했다.
*** 12명의 작가는 9월부터 답사를 포함해 홍천에서 한 달 살이를 시작했다. 특히 답사 이후에는 홍천 읍내에서 유휴공간으로 남은 중앙여관, 그리고 중앙시장 옥상에 자리한 분홍별관에서 작품을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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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muni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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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삽니다.]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는 무니입니다.
조금 전에 스마트 스토어에 몇 가지 상품을 올렸습니다.
​약이 되는 풀 바랭이와 아욱, 근대,
제가 담은 비건 채식 열무 물김치와
진짜 팔 생각이 있는 건가 의심스러운 비건 채식 열무 짜박이 김치까지.^^;;
​​https://smartstore.naver.com/ddolbun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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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en-love-of-sada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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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제국 감독판 무편집 계란신 무삭제
감각의 제국 감독판 무편집 계란신 무삭제 얻을수 있습니다. 감각의 제국1, 감각의 제국2 무편집 완성 되었습니다.
감각의 제국 감독판 무편집 dailymotion <<
계란신 감각의 제국2 감독판 무편집 보기 해보세요. 출연진은 일본 이쁜 배우 나오며, 감각의 제국2 무편집 계란 감독판 보시면 되겠습니다. 감각의 제국 무삭제판 여배우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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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감각의 제국"은 출연 배우들의 실제 정사 장면으로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 등 해외에서까지 외설, 음란성 논란에 휘말렸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영화를 감독했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일본 검찰로부터 외설물 제작, 유포 혐의로 고발되어 법정 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내용이 이렇다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정식 상영이 되지 않고 어둠의 경로로 유포되다가 지난 2000년 정부의 일본 문화 개방 정책에 따라서 상당부분이 삭제되거나 노모자이크 처리되어 제한 상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그 당시 (세계2차대전 발발시…) 에 팽배해있던, 독일의 자민족우월주의를 비판합니다. 자민족우월주의로 인해 수많은 유태인들은 독일군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놓은 게토(유태인 수용소)에 끌려들어가 학살을 당 합니다. 감독인 로베르토 베니니는 그 과정을 아주 익살맞게 그려 나갑니다. 그러나, 맘놓고 웃기만 하기에는 어딘가 한켠의 가슴이 아주 저며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아주 감동적인 영화입니 다.
그리고 영화 '감각의 제국'은 1936년, 일본의 군국 체제가 극에 달했을 때가 배경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그 당시에 일본은 사무라이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 사무라이 정신은 한편으로는 남성우월주의이죠. 영화는 그 남성우월주의와 군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어느 요리집에 여종업인 시다는 주인이던 기찌조와 격렬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기찌조의 아내가 그들의 관계를 알아채버립니다. 그래서 시다와 기찌조는 그 아내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어느 한 요정으로 도피를 합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가학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오르가즘을 느끼는 정사를 벌이지요.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는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낭근을 자르면서 끝이 납니다. 영화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였기에 남자의 장난감으로 반생으로 살아온 여인 사다가 오로지 사랑하는 남 자와 영원히 합체하고 싶다는 간절한 애처로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당시에 일본 남자의 낭근은 신성시 되다시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당시 일본에는 여성이 먼저 남성에게 잠자리를 요구한다는 자체가 거의 금기시 되어 왔죠. 그런데 여성이 감히 남성의 낭근을 잘라서 소지하고 다녔던 것이죠. 그리고 감각의 제국은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영화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일본에서는 엄청난 ��세이션이 붑니다. 호외로 날릴만큼. 당시 일본인들은 전쟁으로 치닫는 현실에 지쳐있었는데, "아베 사다"사건은 그들에게 일시적인 활력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제 생각으로는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감각의 제국 감독판 무편집 계란신 무삭제 당시에 팽배하던 제국주의, 군국주의, 차별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근대 사회로 접어들어 강대국들은 식민전쟁으로 그들의 약육강식적인 팽창주의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독일이나 일본도 물론 마찬가지지요. 개개인의 자아를 구속하고 핍박하던 사회에 영화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뭐 굳이 해석하면 "그러지마라" 겠지요ㅎ 아무튼, 제 생각으로 이 두영화로 근대와 탈근대를 논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비판 →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나?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으로 인한 산업혁명.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겨나는 빈부격차. 그로 인해, 오늘날처럼의 물질만능주의 팽배. 그리고 이어지는 팽창주의.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힘의 제약과 압박. 뭐 이런 것들이 근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것들을 비판할 수 있으므로, 탈근대가 될 수 있겠지요. 여성이 남성의 낭근을 잘랐던 행위. 그리고 게토에 끌려가 보여줬던 휴머로스 하지만, 무게있는 부성애. 아 그리고!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제목을 놓고 봐도, 그리 아름답지 못한 현실을 인생은 아름답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독의 역량을 보여주지요. 제목에 담긴 모토와 함께. 이 단적인 장면들을 놓고 봐도, 근대로 치달아 생긴 모순. 그리고 그것을 탈피하고 싶었던 동시대인의 정서. 감각의 제국 감독판 무편집 계란신 무삭제 그것이 탈근대. 아닐까요? 아무튼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의 제목을 보고 들어와서는 이렇게 떠들었습니다. 좋은 답변 되었기를. 음. 지나가는 말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는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 영화입니다. 덕분의 제 모토도 인생은 아름다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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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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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 그리스 로마신화 4대 고전 / 델로스 동맹(아테네) 펠로폰네소스 동맹(스파르타) / 데마고그(선동 정치) / 디스인플레이션 물가가 계속 오르지만 상승폭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 /
프랑크족(프랑스와 독일 북부) 부르군트족(프랑스 남부) 롬바르드족(이탈리아) 서고트족(에스파냐) 동고트족(발칸 반도 북부) / 카노사의 굴욕 1077 / 서로마 게르만화 동로마 슬라브화 / 이탈리아 롬바르드 동맹 독일 한자동맹 hansa 독일어로 집단 무리 라는 뜻 / 한자동맹 상파뉴 정기시 근대 자본주의의 싹을 틔움 / 십자군 전쟁 사자왕 리처드 살라딘 / 하시신 어쌔신 하시시 IS /
중국 4대 발명품 /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 / 중국 4대 기서 /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 / 과거제 수문제 양견 /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 영국 프랑스 / 9년 전쟁 1688-1697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1701-1715 7년 전쟁 1756-1763 1800년대 초 나폴레옹 전쟁까지 126년간 제 2차 백년전쟁 /
뒤마의 삼총사 철가면 몬테크리스토 백작 / 절대왕정에서 시민사회로 / 철가면 아이언 마스크로 영화화 / 뒤마 2세 춘희 사생아 방탕한 아버지 /
나폴레옹 전쟁 / 대륙봉쇄령 8년 / 산업혁명의 기세를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 / 곡물조례와 비교우위 / 데이비디 리카도 곡물조례 폐지 주장 / 러다이트 운동 러디즘 네드 러드 / 차티스트 운동 선거권 /
감자대기근과 인구론 / 영국의 식민지 착취가 낳은 인재 / 멜서스 인구론 / 저출산 인류의 적응 능력 간과 / 질소비료 등 농업기술 혁신 / 영화 인페르노 설국열차 킹스맨 /
볼테르 캉디드 / 팡글로스 라이프니츠를 대변하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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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26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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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말레이반도 전역이 온통 고무나무농원으로 바뀌었다. 자동차와 타이어 산업의 부상으로 고무 수요가 급증하면서 말레이반도는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고무 원료 생산기지로 급부상했다. 런던 금융시장의 거대한 돈줄에 기댄 영국의 자본과 자유방임에서 관리 · 개입으로 전환한 영국 식민정책이 합작한 결과였다. 가히 ‘고무의 시대’였다. 아편과 주석의 시대에 구축된 페낭 화인권은 고무의 시대를 통과하지 못했다. 페낭의 화인 거상들이 아편팜과 비밀결사를 바탕으로 자본과 노동을 장악하고, 생산과 소비를 주도하며 100여 년에 걸쳐 해협 북부에 구축한 ‘아편과 깡통’의 페낭 화인권은 고무바퀴 아래에 깔리고 말았다.
물론 말라야 고무나무농원 개발에 중국인의 기여는 컸다. 1930년대까지 많은 중국인이 고무나무농원을 경영하고 주석광산 광부의 2배나 되는 중국인 쿨리들이 고무나무의 수액을 받아냈다. ‘고무왕’으로 불리며 성공한 중국인 거부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페낭 화인권을 해체한 ‘고무’는 고무나무농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주석이 페낭 화인 거상의 시대를 의미하듯, 페낭 화인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고무는 20세기를 전후해 페낭의 화인사회와 페낭 화인권에 밀어닥친 새로운 질서까지 포괄한다.
… 말레이반도에서 고무나무농원 개발은 1910년을 전후해 개화했다. 광산 개발이 본격화된 1860년대를 중심으로 184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 초반까지 주석의 시대를 살폈듯이, 고무의 시대는 영국의 식민지배가 ‘졸렬함’에서 ‘교묘함’으로 바뀌는 187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말까지를 범위로 한다.
역사학자 존 튤리John Tully는 고무의 사회사를 추적한 책의 제목을 ‘악마의 밀크The Devil’s Milk’(2012)라고 했다. 고무 산업의 눈부신 성취에도 불구하고, 열대의 밀림이나 고무나무농원에서 라텍스를 채취하던 식민지 인민과 20세기 초 열악한 환경에서 타이어를 생산했던 노동자들의 어깨 너머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악마의 밀크 없이 타이어가 만들어질 수 없고, 타이어 없이 자동차로 대표되는 20세기를 상상할 수 없다. 고무가 페낭 화인사회에 ’악마의 밀크‘로 유비되는 이유다. 아편함과 비밀결사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페낭 화인사회는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 고무의 시대에 영령英領 말리아British Malaya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대두하고, 한편으론 중화 민족주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화인사회는 정체성 문제에 직면했다. 게다가 남성 이주자 중심의 경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테스토스테론 과잉’의 페낭 화인사회에서 중국인 여성 이주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삶의 질서가 만들어졌다.
(317~319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자동차 산업의 발흥기를 맞아 세계적으로 고무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영국의 대응��� 신속했다. 말레이반도 전역을 고무나무농원으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근대 상 · 농업 발전의 최후 단계에 해당하는 ‘농원혁명’으로 불렸다(Joseph, 2008: 11). 20세기 초까지 세계 생고무 수요의 대부분을 공급하던 아마존 지역에서는 원주민이 밀림에 자생하는 고무나무에서 라텍스를 채취했다. 하지만 영국은 거대한 고무나무농원을 만들고 인도인과 중국인 노동자를 투입하는 집약적 생산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1890년대부터 1910년까지 생고무 수요가 커지면서 투기자본이 몰려들었지만, 아마존 분지의 생산량은 1910년 이후 정체되고 자본수익률도 급속히 줄어들었다(Tully, 2012: 65~6). 말레이반도의 자본집약적 고무나무농원이 시장의 판도를 좌우한 탓이다. 본격적인 고무나무농원이 개시된 지 10여 년 만인 1913년 말레이반도의 생고무 생산량은 전세계 생산량의 3분의 2를 점했다(Joseph, 2008: 11). 말레이반도는 전 세계 생고무 수요의 57.28퍼센트를 공급한 1932년을 정점으로 점유 비율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최대 생고무 생산 기지의 지위를 유지했다.
고무의 상품가치에 주목한 영국은 1876년부터 런던의 큐 왕립식물원에서 고무나무 묘목을 들여다 싱가포르에 이식하는 시험 재배를 시작했다(Wright, 1908: 345).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1883년 이식에 성공했고, 1890년대 초 말레이반도에서 고무나무의 시험 재배가 시작되었다. 싱가포르식물원에 1888년 주임으로 부임한 리들리H. N. Ridldey는 고무나무 재배를 독려해 ‘고무광 리들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리들리는 말레이반도 고무나무 재배의 선구자이자 최대 공헌자로 말라카의 화인 탄차이얀Tan Chay Tan陳齊賢(1870~1916)을 꼽았다(唐松章, 1999: 48). 식물 연구가였던 탄차이얀은 1896년 리들리의 권유로 말라카 인근의 땅 40에이커에 싱가포르식물원의 고무나무 묘목을 시험 재배했다. 그는 3년 뒤 실적이 좋게 나타나자 재배 면적을 3,000에이커로 늘렸다. 말레이반도에서 고무나무 재배 가능성을 확인한 영국인 투자자가 1901년 22만, 5,000파운드에 탄차이얀의 고무나무농원을 사들였다. 탄은 초기 투자금의 6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이후 영국인 농원주를 비롯해 싱가포르와 말라카의 화인 거상들이 고무나무농원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1910년 이전까지 말레이반도의 생고무 생산량은 남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1905년 말레이반도 고무나무농원의 연간 생고무 생산량이 200톤이었던 데 반해 남미의 연간 생산량은 3만 5,000톤에 달했다(唐松章, 1999: 45~50).
1910년을 기점으로 말라야가 생고무 생산 기지로 급부상했다. 정치와 자본과 기술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영국 식민 당국은 법과 제도를 동원하며 유럽 자본가들의 고무나무농원 개발을 지원했다. 우선 토지법을 손봤다. 19세기 말 말레이국연방에서 대규모 땅을 100년간 장기 임차할 수 있는 토지임대차령을 제정했다. 이는 유럽인 농원 투자자들이 값싸게 농원 부지를 확보할 수 있게 한 ‘보이는 손’이었다. 20세기 초에는 보다 편파적이고급진적인 토지정책을 폈다. 페락의 경우 식민 당국은 1906년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소유한 나대지를 유럽인 상인과 농원주가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고무나무농원 개발 과정에서 도로와 철로에 인접한 목 좋은 땅은 거의가 유럽인 농원주에게 돌아갔다(Wong, 2006: 151~2).
농원 노동자도 식민 당국이 직접 통제했다. 이전 주석광산 개발 과정에서 광부 노동력을 페낭의 화인자본에 위탁하고 방임한 것과는 판이했다. 유럽인 자본과 식민 당국은 고무나무농원의 노동자로 인도인을 끌어들였다. 1907년 식민 당국은 인도인 이민위원회와 타밀인 이민기금을 각각 개설했다. 이민위는 노동자 조달의 기준을 정하고, 이민기금은 노동자의 뱃삯 등 이주 비용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덕분에 인도인 노동자 1명을 확보하는 데 드는 비용이 1인당 17달러로, 당시 중국인 노동자 1인당 비용(22달러)보다 5달러 낮아졌다. 게다가 1912년 해협식민지 당국은 중국인 쿨리의 말레이반도 유입을 통제했고, 1928년에는 이민규제령을 통해 중국인의 해협식민지 이주도 제한했다. 이로써 1907년에서 1938년까지 말레이반도 전역의 다양한 농원에서 인도인 노동자 비중은 73.7퍼센트로 높아졌다(Wong, 2006: 142). 이 무렵 수마트라의 담배농원에서도 자바인이 중국인 쿨리의 노동력을 대체했다. 토지법과 화인 노동 이주 규제는 중국인 거상들을 배재하고 유럽인 자본가들이 손쉽게 농원 개발을 주도하도록 식민 당국이 정치적으로 개입한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와 경제가 한층 더 밀착된 ‘제국의 시대‘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냈다(홉스봄, 1998: 149~50). 19세기 중반 자본의 시대에 ’보이지 않는 손‘은 19세기 말 제국의 시대에 ’보이는 손‘으로 바뀌었다. 식민 당국의 노골적인 지원 아래 고무나무 재배에서 생고무의 국제 교역까지 유럽의 자본과 교역망이 주도했다. 런던 금융시장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해운과 보험 및 선진 경영 기법으로 무장한 유럽인 무역회사들이 독주하기 시작하면서 페낭 화인권은 위축됐다.
정치와 자본의 결합 못지않게 고무나무 품종 개발의 기술 발전도 큰 몫을 차지했다. 자생하는 고무나무에서 수액을 얻는 남미의 방식은 노동력 투입 정도가 생산량을 결정했지만, 농원 방식은 단위 면적 당 라텍스의 생산성이 관건이었다. 그 실마리는 엉뚱하게도 영국이 아니라 네덜란드가 풀어냈다. 뒤늦게 고무나무 재배에 뛰어든 네덜란드는 고무나무의 품종 개량으로 승부를 걸었다. 1913년 자바의 보고르와 수마트라의 메단에 고무나무연구소를 설립해 라텍스를 더 많이 생산하는 신품종을 개발했다. 1910년대 생고무 생산량이 평균 1에어커당 500파운드에서 1920년대 1,000파운드로 2배 들었고, 1930년대에는 다시 4,400파운드로 급증했다(Joseph, 2008: 11~12). 생산성 높은 개량 품종을 수입하면서 말레이반도는 세계 최대 생고무 수출국이 됐다.
식민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과 런던 금융시장의 거대한 돈줄, 여기에 고수확 품종 개발의 기술력이 합쳐지면서 말레이반도의 고무나무 농원은 재배 면적도 확대되고 생산량도 크게 늘었다. 1905년 200톤에 불과하던 말라야의 연간 생고무 생산량은 1910년 6,000톤, 1920년에는 17만 4,000톤으로 급증했다(唐松章, 1999: 50). 말레이반도의 ��체 수출액에서 생고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주석을 두 배 이상 앞질렀다. 하지만 생고무의 생산과잉과 1929년 대공황이 겹치면서 고무나무농원도 급격한 구조 조정을 겪어야 했다. 생고무 1파운 가격이 1900년 2실링 3펜스(27펜스)에서 1910년 12실링 9펜스(153펜스)로 치솟았다가 1932년에는 2펜스로 폭락했다. 이 바람에 고무나무농원의 땅값이 100분의 1 이하로 곤두박칠쳤다. 이때 중소 규모의 고무나무농원을 운영하던 화인 농원주들이 대거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0년대 말까지 말레이반도에서 대형 고무나무농원은 대부분 유럽 자본이 장악했지만, 화인 농원주와 노동자의 참여 비중이 결코 낮지 않았다. 1931년만 해도 말레이반도에서 고무나무농원주와 관리자 층의 44.1퍼센트, 노동자의 36.3퍼센트가 화인이었다. 하지만 1936년 이후 화인 가운데 대규모 고무나무의 농원주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대공황을 거치며 유럽인 고무나무 농원주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됐다. 1936년 조사에서 100에이커 이상인 고무나무농원의 총면적은 183만 8,581에이커였고, 이 가운데 화인 소유는 34만 662에이커로 집계됐다. 100에이커 이상 대규모 농원이 말레이반도 전체 고무나무농원 면적의 60퍼센트를 점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화인이 소유한 고무나무농원의 비중은 11.1퍼센트에 불과했다(唐松章, 1999: 53).
페낭 거상의 입장에서 고무야말로 ‘악마의 밀크’였다. 고무나무농원 경영이야 여느 상업작물 농원 경영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고무는 특성상 벼나 사탕수수, 코코넛, 감비아 등과 달랐다. 식재에서 수확까지 최소한 3년 이상이 걸렸다. 게다가 고무나무농원은 농사만 잘 짓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알고 확실한 판로를 구축해야만 가능했다. 농원주는 토지 구입과 노동자 확보, 노동자를 위한 생필품 조달, 영농을 위한 기계와 운송자비 등 자본재 수입에도 밝아야 했다. 무엇보다 미국과 유럽으로의 원거리 해운을 확보하고, 서양 시장의 물정에도 밝아야 하며, 자본 시장의 돈줄을 끌어들이는 능력도 갖춰야 했다. 이는 유럽인 무역회사들의 몫이었다.
페낭 화인권의 교역망은 이와 달랐다. 지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사적 신뢰와 개인관계로 얽혔다. 무엇보다 런던의 금융 시장에 돈줄을 대고 있는 유럽인 자본과 경쟁할 수 없었다. 자본력에서 열세였던 것이다. 화인 거상들이 조달할 수 있는 돈줄은 혈연 조직인 콩시와 인도인 대부업자가 고작이었다. 장기 대출이 불가피한 고무나무농원에 선뜻 목돈을 대출해줄 은행도 많지 않았다. 예컨대 페낭 림콩시의 2대 족장을 맡았고, 페락과 푸켓에서 주석광산회사 반관힌Ban Guan Hin萬源興礦業을 운영해 부를 쌓은 림분화Lin Boon Haw林文虎(1864~1934)는 1910~20년대 림콩시에서 40만 달러를 대출해 고무나무농원에 뛰어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출 기간도 짧았을 뿐더러 농원 토지를 담보로 잡히고도 연간 12~36퍼센트에 달하는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Wong, 2006: 140). 장기에 걸쳐 막대한 자본이 요구되는 고무나무농원 운영에서 유럽 자본과 경쟁할 방도가 없었다. 주석과 달리 노동자의 임금만 선대하면 곧바로 생산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토지를 구해 고무나무를 심고 라텍스를 채취하려면 최소한 3년이 걸린다. 런던 자본시장에서 투자를 받은 영국인 소유의 농원은 이자나 원금 상환 부담에서 자유로웠다.
(323~329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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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ectlyshinylight · 28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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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숨겨진 역사적 보물들 탐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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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goo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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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끝나고 작업할 인형
미술부에 처음 들어가게 된 계기는 웃기게도 미술 분야 동아리 중에서 포스터가 가장 귀엽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미국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유행한 러버호스 스타일의 팔레트 캐릭터가 그려져있던 포스터였다. 근대 미국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가진 나로서 안들어갈 수 없었다. 물론, 포스터를 그렸던 동아리 부장의 원래 그림 스타일은 아니었나보다... 동아리 홍보 시기 이후론 두번 다시 그 캐릭터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두달 전 부터 마음 속에 싹텄던 아이디어가, 얘를 인형으로 만들어서 미술부의 마스코트로 삼는다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난 공예에 관심이 많고 특히 부드럽거나 귀엽고, 상업적인걸 만들기 좋아한다. 클레이 아트를 주로 하던지라 봉제인형의 도안 제작 과정은 쉬웠고, 사실 4달 전에 재료를 이미 사뒀다가 방치하고 있던 참이었다. 재료 몇개만 더 주문하면 만들 수 있다! 시험 끝난 뒤 내 차우선 순위는 이게 되지 않을까?(최우선은 나 혼자 완성 못한 세바창 마무리) 안그래도 집에 들어감 주문할 계획이다. 오늘 주문해야 재료가 올 것이다.
그리고 이제 디자인에 대해 말해보자면, 팔레트가 색 때문에 아무리 봐도 대머리 같아서 베레모를 씌워줬고, 원래의 포스터에 그려진 팔레트는 물감이 시계방향으로 무지개색으로 묻혀져 있었기에 그 색의 순서와 위치를 유지한 채 여기저기 물감을 묻혀주었다. 러버호스 캐릭터들이 흔하게 착용하는 악세사리인 나비넥타이도 위치에 맞춰 노랑/연두를 띄게 했다. 또한, 신발 색은 원래 하양이었으나 베레모, 장갑, 신발 모든게 하양이 되자 밋밋해져 색의 조화를 위해 약간 밝은 갈색으로 신발을 칠해주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길 바라며, 눈을 크고 똘망똘망하게, 코와 입을 쪼끄맣고 앙증맞게 만들어주어 아기의 얼굴 패턴과 비슷해보이도록 만들었다.(인터넷에서 귀여운 캐릭터 조형에 대한 야매 정보를 찾아보았다)
완성된 인형은 미술부에서 자주 갖고 놀며 애지중지 받았음 하기에 인형의 구조에 대해 생각도 해봤다. 먼저, 다양한 포즈를 구현하기 위해 팔과 다리를 따로 제작해, 내부에 철사를 넣어 포즈가 변형되고 고정되도록 하며, 지지를 위해(그리고 귀여움을 위해) 손과 발의 크기를 대폭 키웠다. 특히 발이 커졌다. 신발 아랫면에는 골판지든 뭐든 지탱이 가능한 판을 넣어서 인형이 쓰러지지 않고 설 수 있게끔 만든다. 또한 러버호스 캐릭터답게 당시의 캐릭터들이 툭하면 신던 구두를 신겨주기 위해 구멍과 틈을 자수로 표현할거다. 토이스토리 우디 신발처럼 말이다. 손은 부드러운 원단인 덕에 아무 물건에 벨크로(찍찍이)를 붙여 손에 쥐어주면 잡을 수 있다. 꾸미기에 유용할 것이다. 베레모는 벗길 수 있으며 다른 모자도 충분히 씌울 수 있다. 아쉬운 건 안기 좋은 크기로 만든데다 머리가 몸통이랑 분간 안되는 1등신 캐릭터라 머리가 너무... 너무 커서!! 안경은 씌울 수가 없다.
동아리가 시키지 않은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그대로 기여하는 건 처음이다. 난 원래 이렇게 주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속한 이 곳은 뭔가 다르다... 직접 성장시키고 동아리의 명성을 높이고 싶다! 언젠가 부회장을 뽑는 날이 오면 바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오픈채팅방을 만들고, 교내 미술 행사든 무엇이든 홍보하고, 미술 관련 프로젝트 홍보해주고, 인스타그램을 만들고, 미술부원들의 작품을 공개하고, 내가 가능한 선에서 미술부를 더 키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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