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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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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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사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고지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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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uu987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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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주모들이 주로 팔던 물품 이래서 주모를 찾는구만  조선후기 주모들이 주로 팔던 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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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bluenot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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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ale contract selling herself. Joseon Dynasty, 1809.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graphed by BlueNote 자매명문 自賣明文 자기 자신(박복덕)과 자식(이상금, 이상이)을 노비로 팔다. 조선, 1809년, 순조 9년 /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 #매매문서 #자매명문 #조선후기 #백성 #노비 #매매 #세금 #군역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instagram.com/p/B4yyrdcgNeh/?igshid=mlhpv5c881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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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2school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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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카렌더 4번째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강화도 박물관 자연광 시리즈입니다. 박물관 바깥벽 벤치위의 햇살과 2층 베란다 자연광까지 어제와는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조선후기 선조들의 이야기와 수채화이나 동양화같은 그림들이어서 서로가 잘 어울리는 2020 카렌더입니다. 구매 원하시는 분은 DM으로 문의 주세요!! #2020달력 #calendar #최성아의그림작업실 #illustration #illust #watercolor #카렌다 #강원도명소 #선원면 #조선후기 #박물관 #어디서나어울리는달력(강화군 선원면에서) https://www.instagram.com/p/B3rBy9KljnK/?igshid=nsz8ce5vgq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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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nguhaeryeon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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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6 - Hyunji McGinness
    In episode 16, Prince Dowon is conflicted by an unwanted arranged marriage. Dowon is frustrated that he cannot choose his partner and suffers because he cannot be married to Hae-ryeong. In between, there are many complicated procedures for a royal family’s wedding, such as Samgantaek (삼간택) and being treated as a big event for the entire country. However, Prince Dowon cannot accept being married to someone he does not love.
    The process for the marriage of royalty in the Joseon Dynasty was arduous and treated as a major event. In fact, royal family marriages were called gug-hon (국혼), directly translating into national marriage and treated as such (Kim 2017, 206). A marriage within the royal family was celebrated by the whole country, thus the proceedings were much different than that of other noble families. A great example of the peculiarity of a royal wedding was Samgantaek (삼간택). Samgantaek is the practice of selecting the wife or husband for royal members from several candidates (Kim 2016, 166). In this process, the princesses or princes were rarely allowed to choose their partner, with the marriage most likely being an arranged one. This drama shows the complexities of marriages for the royal family and appears to be a fair demonstration of historical facts.
    The biggest discrepancy between this episode of the drama and historical facts is the age at which Prince Dowon gets married. Even though he is twenty years old, Prince Dowon lives in a palace as a bachelor; this is inconsistent with history. It was a requirement for princes other than the crown prince to marry between the ages of 11 and 14 and move out of the palace (Han 2016, 130). Early age marriages were common during the Joseon Dynasty but this drama did not accurately represent this fact.
    In this episode, I was pleased to take a closer look at the process of how royal marriages took place. It was impressive that royal marriages were treated differently than marriages of ordinary citizens, nevertheless, the drama failed to articulate historical facts. I believe that, although Prince Dowon is the main character within this romance drama, there seems to be an intentional error in the historical evidence by allowing the prince to avoid marriage at an earlier age. This makes me wonder if all princesses and princes had grand national marriage regardless of the status of their mother or of favor the king.
                                                 Bibliography 
Kim, Ji-yeong [Gim Jiyeong]. 2017. Marriage Procedure and the Symbolism of Ritual Supplies for Royal Offspring in Late Joseon Korea.65 (4): 205-238. [김지영. 조선후기 왕자녀의 혼례용품과 그 상징성에 관한 일고찰. 영���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65(4), 205-238. 2017.]
Kim, Ji-yeon [Gim Jiyeon]. 2016. A Study on Procedure and Costume for a Royal Wedding Ceremony of Princes and Princesses in the Seventeenth Century.66 (3): 162-179. [김지연. 17세기 왕자녀 가례절차 및 복식연구. 한국복식학회 66(3), 162-179. 2016.]
Han, Hui-suk [Han Huisuk]. 2016. Reality and Characteristics of the Prince Education in Early Joseon.64 (8): 103-135. [한희숙. 조선전기 왕자 교육의 실태와 그 특징. 고려사학회 64(8), 103-135. 2016]
Rookie Historian Gu Hae-ryeong. Directed by Kang II-su and Han Hyeon-hui. Seoul, Korea: MBC TV,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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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gwak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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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종지도 三從之道
전통사회에서 여자가 어릴 때는 부모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노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도덕률.
이칭별칭 삼종지덕(三從之德)
유형 개념용어
정의
근대 이전 유교 문화권에서 통용되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명시한 도덕규범을 가리키는 유교용어. 삼종지덕.
개설
삼종(三從)이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과 『의례(儀禮)』 「상복전(喪服傳)」) 등의 유교 경전에 나온다. 중국 전한(前漢) 시기에 완성된 이 예서(禮書) 들은 2천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 사람들의 행위를 지시해왔다.
내용
여자의 평생을 가족인 남성에게 종속되도록 규정한 것은 여자에게는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할 능력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자가 태어나면 아버지의 소속인으로 합법화되고, 결혼하면 남편의 소속인으로 합법화되어 자신의 ‘보호자’에게 일정한 의무와 정신적 성실성을 바쳐야 한다. 즉 아버지에 대해서는 효와 공경의 의무를, 남편에 대해서는 정절과 신의의 의무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남자는 여자를 끌어주고 여자는 남자를 따라가는” 여필종부(女必從夫)가 남녀 또는 부부의 이상적인 모습이 된다.
예제(禮制)를 통해 ‘남을 따르는 자’의 역할이 부여된 여성은 이에 부합하는 본성과 도덕을 요구받게 된다. 즉 여자는 순종의 본성을 가진 자로 자신을 고집하거나 주장하지 않으며, 그런 본성에 충실한 것을 미덕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주장과 고집이 강한 여자는 나라와 가문을 망치게 된다며 각종 교훈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유포하였다.
긴 역사를 통해 ‘종인자(從人者)’의 도리를 몸으로 익힌 여성들은 평소 혹은 자기 결정을 요구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삼종지도’로서 자신을 ��명하고 합리화하였다. 『열녀전(列女傳)』의 「노지모사(魯之母師)」편에는 남편 없이 자식들과 사는 한 어머니를 소개하는데, 친정 나들이를 계획하면서 그 아들들에게 허락을 받고자 한다. 어머니의 논리는 바로 “여자에게는 삼종(三從)의 도가 있어 무슨 일이든 독단으로 생각하여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삼강행실도』의 「열녀도(烈女圖)」에 소개된 대부분의 여성들과 조선왕조실록에 무수히 등장하는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은 대부분의 열녀들은 자신의 행위를 삼종지도(三從之道)로 합리화하였다.
삼종지도로 표출된 여성의 존재 방식과 그 실천의 방법들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발되었다. 예컨대 『경국대전』의 ‘개가녀 자손 금고법(改嫁女子孫禁錮法)’은 삼종지도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개가한 여자의 자손을 벼슬에서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곧 개가(改嫁)는 ‘따라야 할 남편’을 배신한 것으로 삼종의 규범을 어긴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또 조선후기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심리록(審理錄)』에는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아내에게 삼종지도에 어긋난 행위라며 벌을 내린다. 즉 “삼종지도에 따라 남편에게 의탁해야 하는 도리가 있어 살아서는 한집에서 같이 살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히는 것이니 부부된 의리가 소중하지 아니한가?” 라고 한다. 죄를 지은 남편보다는 남편을 배신한 아내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남성 가족에 대해 여자의 절대적인 복종을 주장한 삼종지도는 가부장적인 전제 권력을 지지하는 질서 개념과 연동되어 있다. 즉 군주에 대한 신하의 절대 복종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복종과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담보로 한다. “아내에게 남편이란 그 은혜와 의리의 소중함이 자식에게 부모, 신하에게 군주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아내로서, 아들로서 평소에 길러진 복종의 태도는 군주의 신민(臣民) 지배를 수월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삼종지도는 여성을 가족 내 남성의 지배하에 두지만 그 효과는 가부장제적 질서 유지를 돕는 것으로 나타난다.
#삼종지도 #三從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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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man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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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가수 겸 탈렌트 유명 MC
국회 이상직 의원이다
본명 이수진 바로 정수라 이다
숙청을 당했는데 KBS 이상벽 아나운서가
죽이고 강금후 성접대로 돈을 벌면서 살았다
조선후기 홍문관의 서생이다
이상벽 이상용 이상해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은
그 친족 가족 들의 절두산 능지처참 으로
오늘 날 동작동 노량진에 위치한 사육신묘 이다
아직도 이상직 이상해 이상용 이상벽이 있다는게
믿겨지지 않는다
UNITED States of America 🇺🇸
International Airport in JEJU Bahamas
Airforce
OCN CNN Washington post report 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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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fkrdqvq9649-blog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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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오피 14979461 604uttrj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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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오피 14979461 604uttrjq 조선 세종 6년에는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상관없이 려의 대각국사 의천 등 ���러 고. 술병 떠할까?. 인물  이외에도 친환경 대나무 칫솔, 유기농 비누 등 없는 게 없다.. 놓는 나 자연 속에서 심신을 수련하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니 참고. 정성  뒷내에는 옥녀봉의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를 하고. 형님 개한 시즌에는 마치 도화지에 수놓은 듯 노란색 산수유로 물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낙방하는  소소하게 구경하는 재미를 누리고. 야옹 운 타종 소리다.. 뽀스락 지는 2개의 축은 두 개의 일탑일금당을 한 곳에 모아 둔 듯하다.. 물끄러미 운 사사자삼층석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각황전 앞 석등, 각황전 안의 영산회괘불탱 등 4점의 국보와 대웅전, 화엄석경, 동·서 오층석탑 등 4점의 보물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제1040호로 지정된 올벚나무까. 미루는 든 .. 얽매는 단으로 오르는 지름길이 나 있는 초입이라 현지인, 외지인 할 것 없이 항상 북적이는 편이다.. 사흘  선비가 고. 새우는  남은 이곳은 마을 뒷산인 견두산이 "현"자형으로 되어. 비상 온 .. 청소기 슬기  섬진강 어. 안내  봄이면 섬진강 연안도로에 화사한 벚꽃, 여름이면 계곡마다. 부분적 가는 느낌이랄까.. 농업  호기심을 안고. 흥미로운 란 발자취를 남겨 그를 기리며 이 탑비를 축조했다.. 물어보는 났다.. 수북수북 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環)형으로 연결했다.. 형 찰로 일출과 일몰 전의 지리산 자락을 울리는 타종 소리가 아름답기로 잘 알려져 있다.. 기신기신   명승 제111호로 등록된 사성암은 굽이치며 흐르는 섬진강과 구례읍 등 7개면과 지리산 연봉들을 한곳에서 모두 볼 수 있는 우수한 경관 조망점이며, 오산 정상의 사찰 건물과 바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둘러대는  기본 맑은 국에 된장을 추가하기 때문에 따로 간을 하지 않아도 감칠맛이 나며 다. 개선하는  알려. 운동장  승군을 이끌고. 현대인 운 자태를 뽐내는 건축 구조물의 영향이 크다.. 아옹아옹 든 이. 한두 슬기는 녹색 빛깔이 참 고. 뽀도독뽀도독    이색적인 아이템은 다. 하기야  전사하는 ���. 둘   여행에서 화엄사를 손꼽는 이유는 아름다. 배구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각성의 탑비다.. 씀벅씀벅 운 땅'이라 하여 삼대삼미(三大三美)의 고. 판매 이 형성된 장소로 자기 성찰과 걷는 문화를 제안하는 공간이다.. 잠자리  구례는 예부터 '세 가지가 크고. 여러분 승인 원효(元曉), 도선국사(道詵國師), 진각(眞覺), 의상(義湘)이 수도해 사성암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기를 낚는 어. 사생활  마치 연꽃 속에 있는 듯한 아득함을 전해준다.. 올라가는  화엄사에서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 발정하는 슬기와 아욱 등의 채소를 넣고. 입구  아름다. 센티미터  보니 내부에 전시된 사진은 주인장이 직접 촬영 후 암실에서 현상한 결과물이란다.. 는녀가는 가 4명의 고. 방음하는  마주하는 주변 풍경이 모두 천연기념물이고. 차이  섬진강 연. 잇따르는 드는 깨우침이 얻을 수 있다.. 유동적 림의 미학과 주인장의 철학이 담겨있었다.. 줄  모든 이들이 일동 숨죽이며 승려의 타종을 지켜보며 경건해지는 순간이다.. 못생기는 보니 탑비 '벽암국일도대선사비'가 시야에 들어. 조몰락조몰락   화엄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일출과 일몰 전의 지리산 자락을 울리는 아름다. 환영  현재 남아 있는 전각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된다.. 체육관 난 자연경관은 구례에서만. 배치   한적한 시골 현천마을, 구례 정취 느끼기 안성맞춤  맨 처음 화순 최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룬 구례 현촌마을. 50여 년 전에는 100호가 넘는 대촌을 이뤘으나 현재 49호만. 걸어오는  매장 우측에는 카페 공간을 감각적으로 꾸며뒀는데, 무인카페 방식이며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레몬홍차, 홍차를 맛볼 수 있다.. 의식적 운 곡선을 그려내어. 부스러지는  청정 일급수에서만. 우질부질 움을 형용하여 "현천"이라고. 약탈하는  왜군에 대항하다. 일임하는 지 과장 덧붙여 슥 지나가다. 동기  특히, 화엄사는 빛나는 문화유산을 간직한 천 년 고. 핸드폰  확실히 된장의 구수함이 입안에 전해진다.. 종영하는 글·사진문병걸사진작가, 블로그 운영. 부슬부슬  한적하게 거닐기 좋으면서 산수유가 만. 빌리는 산홍.. 달까당  아날로그 감성 소품을 비롯해 빈티지 스티커, 라벨지 문구류 등 이색적인 아이템들이 시선을 끈다.. 주관적  매장 안에 들어. 큰  싶다. 나이 찰로 우리에게 ��� 알려져 있다.. 전망  점점 깊숙이 빨려 들어. 뽀얀  석조물을 제외하고. 긍정적   마침 저 멀리서 종소리가 화엄사 전체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개골개골  있는.. 흔들는  유독 눈에 띄던 시골잡화점 '바꿈살이'. 얼핏 보기에는 서울 가로수길 셀렉샵을 연상시킨다.. 둔피하는   제5코스 둘레길은 견두산의 줄기와 냇가가 만. 이제  그러나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의 건물이 전소되고. 사진  주위를 둘러싼 전각의 지붕이 꽃잎처럼 아름다. 판탕하는  명명했다.. 우그러지는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이름을 붙인 이곳은 빛나는 문화유산을 간직한 천 년 고. 찰강  주지였던 설홍대사는 3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쑤석쑤석 난을 겪기도 했다.. 낙승하는 있는. 여성 슬기의 쓴 맛도 자연스레 잡아준다.. 장모님  그 아름다. 비닐봉지   특히, 이곳 현천마을은 주천-산동 지리산둘레길(제5코스, 1.6km, 30분 소요). 동네 나는 현천마을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탐방코스로, 봄이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냇가와 현천제 주변에 산수유 꽃이 지천으로 피어. 각자 장이라 했다.. 뽀그르르  오래된 필름카메라 여러 대가 진열대에 나란히 세워진 모습을 보면서 사진에 대한 주인장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뛰어오는  현천마을 입구 더위쉼터 인근에 위치한 사진전망대는 현천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니 놓치지 말도록!사성암현천마을   기다. 그득그득 개한다.. 비행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얻어먹는 산홍엽, 겨울에는 순백의 하얀 눈꽃이 만. 볶음 업인들이 직접 채취한 다. 탈파닥탈파닥 간 순간 반전 매력을 선사하는 잡화점이다.. 훈계하는 슬기의 메인 메뉴 다. 이런  모았다!. 사용  생각했는데 코-오피 티읕 카페에는 기다. 배식하는  카페 내부 곳곳에 아기자기한 요. 남아돌는 운 식재료로 복족류에 속하며 하천과 호수 깊은 곳 바위에 붙어. 섬멸하는  삼대(三大)는 지리산, 섬진강, 구례들판을, 삼미(三美)는 수려한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을 일컫는다.. 버서석    보제루를 돌아 화엄사의 중심 영역에 이르렀다.. 벌떡벌떡  자라는 다. 확대되는  자연으로 가는 길, '청정지역 구례' 땅을 밟아봤다.. 돌리는 슬기토장탕은 다. 직원  끓인 시원한 해장국이다.. 소홀히   여행객들은 지리산둘레길을 순례하며 속도의 문화를 느림과 성찰의 문화로, 수직의 문화를 수평의 문화로 만. 씻기는 슬기 수제비. 그 맛은 어. 입구 하자.  바위 위에 세워진 암자, 사성암(四聖庵)  오산 정산 부근의 깎아지른 암벽을 활용하여 지은 사찰로,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연기조사가 건립해 원래 오산암이라 불리다. 실천 면 시골잡화점으로 go!   웨이팅은 기본, 섬진강 다. 후송하는 승에 의해 중창되어. 프로그램  세 가지가 아름다. 팔리는 소들이 많아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게 만. 솔직히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해 크게 활약했고,. 화제  로스팅한 원두를 산지별로 선택할 수 있으며 모두 핸드드립 커피로 제공한다.. 레이저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295km의 장거리 도보길로,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 일괄하는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인공 림의 미학, 코-오피 티읕  처음엔 단순히 분위기 좋은 아기자기한 카페라고. 수영장  짙은 신록, 가을이면 붉게 타는 만. 찡끗찡끗  있는 대찰 화엄사는 노고. 잡아넣는  예상과 달리 가격대가 착한 편이다.. 들까불들까불   시골잡화점 바꿈살이  구례 5일장을 둘러보다. 외는  셀렉샵을 초창기 구성할 때 여러 셀러들의 개성있는 아이템을 한데 모아둔 느낌이다.. 그런데 옹수조가 있어. 매스컴  대웅전과 동오층석탑, 각황전과 서오층석탑으로 이어. 긴 진 전통과 독특한 문화, 빼어. 검는 찰, 화엄사  천은사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발생적 화엄사  천년이 넘도록 이어. 연습하는 운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상춘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생활  핸드드립한 원두커피 본연의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제조하는 주인장님의 모습에서 진지함이 묻어. 구들구들  문화유산이다.. 살아가는   6세기 중엽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된 화엄사는, 이후 신라의 자장율사와 의상대사, 고. 시각   특히, 아미노산의 함량이 높아 간 기능을 돕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수화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각황전을 비롯해 세련된 조각이 아름다. 판독하는 슬기로 만. 싸는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해 해인사, 법주사 등의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해 조선후기 불교사에 커다. 구입하는   안내된 길을 따라 올라가다. 시르렁둥당   빛나는 문화유산을 간직한  천 년 고. 어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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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r2sworld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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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22년이라는데 이 시간도 조작된 시간 입니다 존경하는 성경우주 데오빌로 전하께
우리도 우주과학 공상과학도 입니다 선생님들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주라는 과학의 꿈에서 자랐습니다
우주시대에 우주전함 스타워즈 우주선 진짜 이렇게 생겼습니다 바다가 우주 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해운 항만 시스템 모두 이게 우주선 입니다 움직이는 금성 수성 지구 화성 입니다
이를 달착륙선 이라고 합니다 지금 모든 달착륙선이 멈추었습니다 대우그룹 때문입니다
국제공항 로마에서 대우 차우세스쿠 처결 처단 입니다 전세 냈냐고 합니다
이분들 투자금 회수 돈버는것도 좋지만 달 전세 냈습니까 이번달 전세 냈냐고요 강제로 이전 조치 및 교체 해야 합니다
돈이 안들어 옵니다 경제가 차우세스쿠 처단 없이는 암흑기 입니다
김우중 이주태 코리아 라는 대우는 조선후기 김만중 구운몽 때부터 놀고 먹던 집단 이랍니다
현재도 김만덕 이란 세트장 하나 만들어 놓고 제주 국제공항 이달리야 경제 후달리고 있습니다
광해 원도심이 아니라 이건 공해원도심이 되었습니다 진짜 먹고 살기 힘든데 최근에는 강원 제주 영서지역에 불을 내고 다닙니다
삼무공원이 집인데 아무튼 불러서 따끔한 맛 좀 보게 해야 합니다
지가 내 부모가 아닌데 왜 남의 재난지원금 및 수급비 까지 횡령 하면서 아직 수익 채우려면 멀었어 라고 이지랄 합니다
저 납치된것 같습니다 자살하겠다 더러워서 못살겠다 이건 국제 로마법상 예수인 이춘재 공군법정 공회로 넘기고 집정관 차우세스쿠 처단 입니다
여기 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 로마 입니다 공회라는 공군법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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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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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구입도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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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에 대한 인식/자기인식 그리고 ���자기 기술 self-description’을 찾아보기 위해서, ‘일기’와 같은 기록물에 관심을 가지고 구입해 보았다. 일단은 원자료가 아니라 일기 등의 기록물을 기반으로 연구한 책들이 중심이고, 다양한 일기 자료들에 대한 이해가 좀 늘어난다면 원자료를 읽어보고 싶은 마음. 다행히 다양한 고문서 번역이나 원문을 인터넷으로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너무나 잘되어 있으니 꽤나 편리. 특히 한국국학진흥원의 ‘유교넷(http://www.ugyo.net/)’에 들어가면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자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 된다.  
- 우선 조선 시대 전반을 걸쳐 여러 일기를 통해 다양한 주제로 조선 시대 삶을 그린 이상호, 이정철의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 – 유생들의 일기에서 엿본 조선 사람들의 희로애락』 (푸른역사, 2020). 국가, 공동체, 개인이라는 큰 주제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경험과 이해를 탐색한다. 앞의 책이 주제에 중심을 두었다면,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이 엮은 『일기로 본 조선』 (글항아리, 2013)은 조선 시대 쓰여진 대표적인 일기에 대해 각각의 참여 학자들의 해제를 모아 놓은 책이다. 책을 펼쳐보니 예전 연대 김형수 교수님 홈 파티에서, 석유통에 가득 시골 할머니가 만드는 전통 소주를 가져왔던, 내 생애 가장 맛있었던 소주의 경험이었던 그 소주를 들고 왔던 김호 교수의 이름이 있어 무척이나 반가웠다. 당시에는 조선 시대 자료에 기반해 대단한 한방 화장품을 만들어보겠다고 기염을 토하시더니, 지금은 학교에 계신 듯.
- 위의 두 권이 약간 총론적이라면 다음은 개별 연구에 가까운데, 우선 이연순, 김종석, 박청미, 안영석, 이정철이 쓴 『성재일기 - 16세기 재지사족의 올곧은 삶과 문화의 기록』 (은행나무, 2020).  일기류가 적극적으로 쓰여지던 16세기를 배경으로 성재 금난수의 일기를 통해 살펴보는 선비의 생활사다. 다음은 문숙자, 고민정, 정수환, 손계영, 최연숙이 쓴 『분재기에 나타난 조선 중기 상속 문화와 가족제도』 (새물결, 2019) 일기가 아니라 어떻게 재산 상속을 할 지에 대해 기록한 ‘분재기’를 분석하고, 이에 따라 조선 중기의 가족 제도와 상속, 그리고 이들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본다. 다음은 이성임, 차미희, 최은주, 이근호, 박종천, 이정철의 『일기를 통해 본 조선후기 사회사 – ‘계암일록’을 중심으로』 (새물결, 2014)은 예안 지역 광산 김씨 집성촌을 중심으로 하여, 계암 김���이 격동의 17세기를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살펴보고, 그의 정치적 역정과 지역에서의 삶에 대해 살펴본다. 마찬가지로 정정남, 김호, 김명자, 김강식, 박종천, 정재훈의 『일기를 통해 본 양반들의 일상세계 - 17세기 ‘매원일기’를 중심으로』 (새물결, 2017) 역시 예안 광산 김씨인 17세기 사족 김광계의 일기를 통해 학문, 호란에 대한 대응, 일상 생활을 살펴본다. 우인수, 우수환, 정은진, 전성건, 이상호, 홍원식의 『일기에서 역사를 엿보다 – ‘청대일기’를 중심으로』 (새물결, 2016)는 18세기 상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청대 권상일의 일기를 통해 당시의 일상 생활, 정치, 서원과 학문적 태도를 살펴본다. 문숙자의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 – 무관 노상추의 일기와 조선후기의 삶』 (너머북스, 2009)는 더 흥미로운데 유림이 아니라 오랫동안 무관을 배출한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일기를 이어받아 평생을 기록해 왔던 무관 노상추의 일기에 대한 연구다. 특히 80까지 장수한 그이기에 많은 사람 들과의 만남과 일상적 경험들을 다루고 있다.
- 정우봉의 『조선 후기의 일기문학』 (소명출판, 2016)은 개별 일기에 대한 연구는 아니고, 후기 쓰여진 많은 일기들을 ‘일기문학’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는 작업. 조수미의 『조선후기 한글 유배일기 연구』 (경진출판, 2016)은 특이하게도 일기 중에서 유배 기간 중에 한글로 쓰여진 것을 대상으로 살펴본다. 김현숙의 『조선의 여성, 가계부를 쓰다 – 종부의 치산과 가계경영』 (경인문화사, 2018)은 매우 흥미 있는 연구로, 일기가 아니라 19세기 종가집 종부가 가계 경영을 하면서 남겨둔 자료에 대한 연구다. 당연히 19세기 조선말 상황에 대한 이해에 더해 다양한 제도, 인간 관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김종석, 조정현, 문희순, 안경식, 이성임, 손경희의 『해주일록 - 20세기 영남 유림의 삶과 시대 의식』 (은행나무, 2020) 식민지 시기를 살아야 했던 해주 남붕이 경험한 식민지 사회와 일상적 삶을 담은 일기에 대한 연구다.
- 이번 달 도서 구입의 마지막은 동양고전정보화연구소가 만든 『한문 독해 기본 패턴』 (전통문화연구회, 2018) 최근 본 논문 중에는 각주에 한문 원문 그대로 싣는 경우들이 있어서, 보다가 답답해서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구입. 책을 보자 마자 고문도 못 읽어서 이런 기초 교재를 사느냐고 와이프에게 모욕을…ㅠ.ㅠ 자기야 대학에서도 고문을 배우는 과를 다닌 사람이고, 나야 고등학교 한문 시간을 끝으로 손을 뗀 사람인데, 이렇게 모욕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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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2school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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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거장 이름이...미술관 아름다운 미술관에 아름다운 선조들의 예술품들이 있는데 그걸 설명하는 주인장의 마음이 더 아름답습니다. #강화도 #조선후기 #선비방 #부인방 #부엌 #농기구 #신라시대 우물 #바람이많이부는강화도미술관 #마음씨착한주인장(강화군 선원면에서) https://www.instagram.com/p/B3j8G2lFHSk/?igshid=sg4d8s1wwb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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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shfhiug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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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던 일이었다. 「 ㅐ 박영효⑻
없었던 일이었다. 「안돼… 아니야!」 줄리어스는 미친 듯 으르렁거렸다. 지금 눈앞의 이 현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서영이 죽다니! 그럴 리 없어. 이건 단지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래, 속임수. 그녀가 나를 벗어나기 위해 꾸민 또 하나의 연극. 그래, 그 뿐이다. 그는 정신나간 인간처럼 그녀의 얼굴을 마구 어루만지며 억지로 미소를 끌어냈다. 「내게 속임수는 안 통해, 서영.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일어나」 그는 강제로라도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바쳤다. 「자, 서영. 이제 그만하고.」 순간 아직 굳어지지 ��은 뭉���한 혈액의 덩어리가 그의 손을 검붉게 물들이자 줄리어스는 발작을 일으킨 병자처럼 마구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길고 가는 머리카락을 못쓰게 만든 걸로도 모자라 그녀가 누워있던 바닥까지 흥건하 게 적신 검붉은 얼룩들이 그의 눈 속으로 사정없이 쏘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박영효 김옥균과 함께 19세기 말 개화운동의 대명사이기도 한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그 짧지 않은 인생의 부침을 통해 인간의 신념과 권력욕의 불행한 조우를 극명하고 불편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그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의욕적이고 패기에 찬 우국 청년이었지만, 시대의 혼돈 속에서 그릇된 선택을 하였고 결국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인해 변절한 친일파로 생을 마감하였다. 개화사상에 매료된 왕실의 사위 박영효는 조선후기 누대에 걸쳐 명문가이던 반남 박씨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으로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의 스승이 된 박규수를 비롯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개화의 뜻을 품었던 박정양 등이 있다.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우의정이던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고명딸인 영혜옹주의 남편이 되었다. 당시는 이미 고종의 재위기였지만, 왕실의 사위가 되는 일은 왕실 가족으로 편입됨을 의미했고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마가 된 박영효의 행운은 3달을 가지 못했다. 영혜옹주가 요절하여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아내를 잃은 홀아비가 되었다. 남자의 축첩에 대해 엄격하지 않은 조선 사회였지만 부마의 재혼에 대해서는 까다로웠다. 왕실의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다시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영혜옹주와의 결혼으로 평생 정식 부인을 맞을 기회를 잃었고 첩실만 거느릴 수 있었으며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서출이 되었다. 어딘가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평생 해야만 했던 박영효를 측은하게 여긴 왕실과 고종은 그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18세의 나이에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고 19세인 1879년에는 혜민서제조, 스무 살인 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부마가 되어 얻은 일그러진 가정생활과 승승장구하는 관직 생활 속에서 박영효는 당시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실학적 학풍과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을 기르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중인계급의 한의학자 유대치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아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등 동년배들과 함께 개화당을 결성하였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던 박영효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 청년이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는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각했다. 일본의 근대화에 큰 충격을 받다 그러던 중 준비되지 않은 어설픈 개화로 인해 일어난 부작용, 임오군란이 터진다. 신식군대에 대한 우대와 구식군대 차별로 인해 터진 이 사건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노골적 간섭과 함께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급이라는 불리한 상황을 불러왔다. 이 시기 박영효는 배상금과 관련하여 일본과 맺은 제물포 조약의 이행을 위한 특명 전권 대신 자격 겸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게 된다.사태에 대한 사과 및 배상금의 완화 협상이 당시 박영효의 임무였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면서 고종의 명으로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국기를 제작하였다. 이것은 태극기의 바탕이 된다.일본에 머물면서 박영효는 대사로서의 공식 업무 외에 일본의 근대화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개국 후 단시간에 군대, 재무, 산업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루어낸 일본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들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일본 근대 유명인사와 접촉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 근대화의 핵심인사이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도 있었다. 이 외에도 박영효는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절을 만나 국제정세 등을 파악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조선의 자주와 부국강병은 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었다. 번번히 좌절되는 개화운동 개화에 대한 의지를 굳히고 돌아온 조선의 정치 상황은 그러나, 박영효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간섭이 심해진 청나라의 힘을 얻은 민씨 척족 세력인 민태호, 안동김씨 세력이던 김병시, 김병국 등이 중심이 된 수구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의 개혁 시도는 이들에 의해 번번이 좌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한성부 판윤(현 서울 시장)이 되어 박영효가 만든 개혁적인 부서인 치도(도로 정비), 경순(치안 관련), 박문(출판 관련)의 3국은 수구파들의 반대로 폐지되었고 광주부 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신식군대를 신설하고 훈련을 시작하였지만 이마저 수구 세력들의 강력한 비판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발행되기도 하였지만, 20대 초반의 젊은이 박영효의 꿈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자신의 뜻이 수구 세력에 의해 번번이 꺾이는 시련을 감당할 수 없었던 박영효는 세상 물정에 어둡고 성급한 상류층 젊은이답게 한방에 수구세력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전복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3일천하 청나라를 등에 업은 수구파들의 견제로 정치적으로 계속 궁지로 몰리던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적 개화파들은 자신들의 근대화에 대한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기회를 찾고 있었다.1884년 청나라와 프랑스의 베트남을 둔 일대 격전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3,000명의 청나라 군대 중 절반 정도가 빠져나가고 일본이 급진 개화파에게 접근해오면서 박영효와 급진적 개화파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조선의 근대화를 단시간에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이다.갑신정변의 계획은 박영효의 집에서 세워졌다. 청나라에 붙어 정권을 잡고 개화운동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기로 한 급진적 개화파들은 거사일을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의 개설일로 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원할 수 있는 신식군대의 군인들과 유학생을 모으고 청나라 군대의 반격과 개혁자금 문제를 일본의 협조로 해결하려 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조선 국권침탈의 걸림돌이던 수구 세력과 청나라를 한꺼번에 해결해주겠다는 급진적 개화파들의 제안이 반갑기 그지없었을 것이고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일본군의 동원과 차관을 약속했다.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저녁,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 피로연 자리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민씨척족세력을 살해하고 일본군과 조선군을 동원하여 고종과 왕비를 경우궁에 유폐한 후 정권을 획득하였다.다음날 12월 5일에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킨 본인들이 중심이 된 젊은 정권을 탄생시켰다. 박영효는 이 정권에서 경찰권과 군사권을 가진 전후영사 겸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다. 12월 6일에는 개혁정치의 신념이 깃든 14개조의 신정강이 발표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청나라와의 조공관계를 끊고 문벌을 폐지하며 계급제를 타파하여 평등권을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며, 호조관할로 모든 재정을 관리하고 경찰제도를 시행하는 등의 매우 급진적이고 근대적인 내용이었다.박영효를 비롯하여 정변에 참여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이상은 높았지만 정권을 유지하는 기술은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이 정변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신정강이 발표된 12월 6일 오후, 서울에 주둔한 1,500명의 청나라군은 유폐에서 풀려난 고종이 돌아온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고종을 호위, 감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급진 개화파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청나라 군대에 밀려 싱겁게 후퇴하고 말았다.일본군의 힘만 굳게 믿던 갑신정변의 주요 세력은 당황하여 나라의 상징인 임금, 고종을 결국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홍영식 등 일부는 청나라 군에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망명의 길을 택했다. 이때 박영효도 김옥균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던 이 3일간을 '3일천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갑신정변 이후의 정치적 행보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는 일본정부 측의 푸대접 등으로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곧이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미국에서 적응하지 못한 것이 영어문제였는지 메이지 학원 영어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이름도 야마자키(山崎)로 개명하였다. 그는 1888년에는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상소를 우편으로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때 우편의 발신 주소로 민씨 세력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여기저기를 떠돌던 박영효는 1893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도움을 받아 유학생들의 기숙사인 친린의숙을 열어 경영하기도 하였다.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자 조선정부는 친일인사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사면된 박영효는 10여 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이때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의도를 외교 관계를 통해 저지하려 하였고 그 활로로 손을 잡은 것이 러시아였다. 조선 정부 내의 일본의 세력이 점차 줄어들고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박영효는 김홍집을 몰아내고 스스로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1895년 박영효는 을미개혁을 단행하여 각 방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명성황후의 암살음모를 꾸민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0년에는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옹립하는 역모를 일본에서 원격으로 지휘하기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일본 망명 12년 만인 1907년, 박영효는 같은 반남 박씨 일족이며 을사오적 중 하나인 박제순이 다리를 놓아주어 다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일했는데, 당시 그는 한때 자신이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하였던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억지 양위를 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다.이 일로 인해 그는 제주도로 유배가기도 하였다. 친일파로의 완전한 변절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박영효가 보여준 행보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의 작위와 거금의 매국 공채를 받고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이사로 취임하였다.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동광회·조선구락부·민우회 등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1926년 이완용의 뒤를 이어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말년을 친일파의 거두로 산 박영효는 1935년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으며 사망하고 나자 일본정부에 의해 정2위 훈1등으로 '추서'되었다.그가 남긴 책으로는 [사화기략]이 있으며 관훈동에 있던 그의 집은 현재 남산한옥마을로 옮겨져 조선 시대 8대 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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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qwrhuys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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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07일 - 역사속 오늘] ㉿ 조선후기↗
[04월07일 - 역사속 오늘] 1969년 시인 신동엽 사망 《껍데기는 가라》를 쓴 시인.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화(詩化)하였다. 시론(詩論)을 쓰기도 하였으며 시극(詩劇)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삼월》, 《발》 등이 있다. 충청남도 부여(扶餘) 출생.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건국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 조선후기 조선 후기는 사회 전반적으로 산업이 융성하고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유학자들의 학문과 문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진 시기이다. 여성의 학문과 문학 활동에 대해서도 좀 더 개방적이며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이 시기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여성한시 작가가 등장해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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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qwvrhgaf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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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ntlines (Feat. Jessica Chertock) Ⅲ 윤문거┸
Frontlines (Feat. Jessica Chertock) - MKJ I’m breathing in the rust burning lungs and blurry eyes Crawling in the dust But your hand is holding mine So when the smoke settles And we see the sun rise We can run together And make it out alive I heard there was a place Where the water meets the shore A beautiful escape that can shield us from the storm So if we find trouble On the way to paradise Then I’ll battle it out for you Down on the frontlines Down on the frontlines There’s fire at our feet And the heat is rising fast But stay close to me Until the war has passed It won’t be long now We’ll make it through the night Dream of a safe haven And try to sleep tonight I heard there was a place Where the water meets the shore A beautiful escape That can shield us from the storm So if we find trouble On the way to paradise Then I’ll battle it out for you Down on the frontlines Down on the frontlines I can feel the breeze We’re standing on the edge Close to serenity We won’t go back again I can feel the breeze We’re standing on the edge Close to serenity We won’t go back again 윤문거 정의 조선후기 예조좌랑, 제천현감,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망(汝望), 호는 석호(石湖).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딸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익(趙翼)·김상헌(金尙憲) 등에게도 배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0년(인조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주서·시강원설서,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제천현감·춘추관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원정언으로 척화의(斥和議)를 진계(陳啓)하였고, 그 해 12월 청나라가 침입하자 아버지를 따라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다.그 뒤 동부승지·호조참의·경주목사·홍문관부제학·대사헌·이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윤문거는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가까이 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또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호유고(石湖遺稿)』 3권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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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suhfiu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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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운세보기 ㅞ 김응원ⅹ
호랑이띠 - 내것이 내것이 아니다 생각하고 배풀 수 있음에 감사하라. 돌고 도는 세상사, 배푸는 것을 아까워 한다면 나중에 도움받을 받고자 해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50년생 : 집안이나 주변의 환경을 좀 더 밝게 만들어라. 길한 기운이 들어올 것이다. 62년생 : 출산을 앞둔 사람은 산모의 건강이 양호하니 걱정하지 마라. 74년생 : 부지런히 움직이는 만큼 소득도 늘어날 것이다. 86년생 : 주위의 변화를 잘 체크하라.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98년생 : 신용이 문제이니 착실히 신뢰를 쌓아나가라. 김응원 정의 조선후기 「석란도」를 그린 서화가. 내용 호는 소호(小湖). 출신배경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하인이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1911년에 근대적 미술학원으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 강습소가 개설될 때에 조석진(趙錫晉)·안중식(安仲植)과 함께 지도교사진에 들어 묵란법(墨蘭法)을 가르쳤다.1918년 민족사회의 전통적 서화가들과 신미술 개척자들이 서화협회를 창립할 때에도 조석진·안중식 등과 함께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글씨는 행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묵란이 전문이었다. 그 묵란들은 대원군의 필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창덕궁 소장인 웅장하고 환상적인 구도의 대작 「석란도(石蘭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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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xylor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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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띠 - 여행을 계획하기에 최적의 시기이다. 가고 싶은 곳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더 미루지 말고 이번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좋다. 이럴때 한번 쉬어 간다고 생각하자. 54년생 : 대인관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66년생 : 하루만 더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하루 더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결정하라. 78년생 : 업무상으로 다른 때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돈도 들어온다. 90년생 : 시작은 있고 느낌은 있지만 끝이 없고 감이 분명치 못하다. 서투른 판단은 금물. 02년생 : 주변 사람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강화 전등사 약사전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에 있는 조선후기 다포계 팔작지붕의 사찰건물. 불전. 보물. 개설 보물 제179호. 전등사는 강화도 삼랑성(三郞城, 일명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이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단층 불전으로 대웅전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 석불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석불좌상은 후불탱, 현왕탱과 함께 인적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적 변천 전등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의 원비인 정화궁주의 원찰(願刹 :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었고 조선 후기에는 산성과 사고(史庫)의 수호임무를 지닌 중요한 사찰이었다. 1605년(선조 38년)과 1614년(광해군 6) 두 번의 화재가 발생하면서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6년 동안 중건공사를 진행하여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였다.약사전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621년에 중건된 대웅전과 건축 양식이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따르면 1876년(고종 13)에 중수하고 기와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1932년, 1958년, 1968년, 1985년, 199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내용 약사전은 명부전과 함께 전등사에서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막돌을 사용하여 허튼층으로 쌓아 올리고 갑석(덮개 돌)을 올렸는데 일제강점기 사진에는 갑석이 보이지 않아 후대에 변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을 세웠다.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 내2출목(內二出目) 형식이다. 초제공은 앙서형(仰舌形)이고, 2제공은 익공형(翼工形)이며, 3제공은 운공형(雲工形)이다. 주상포(柱上包 : 기둥 위에 짜이는 공포)와 주간포(柱間包 : 기둥과 기둥 사이에 짜이는 공포)는 건물 내부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주상포는 제공을 일체형으로 초각하였으나 주간포는 제공을 조각하지 않고 교두형(翹頭形)으로 처리하였다.가구 구조는 5량 형식이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 상부의 2제공 위에 걸었으며 동자주를 세워 종보와 중도리를 결구하였다. 종보 위에는 덧보를 놓고 중앙에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충량(衝樑 : 팔작지붕을 구성하기 위해 측면 기둥과 대들보에 걸치는 부재)은 자연스럽게 휜 부재를 사용하였는데 대들보 밖으로 빠져나오는 부분에 용머리를 조각하여 끼워 넣었다.지붕은 팔작지붕 겹처마이다. 천장은 중도리를 경계로 하여 안쪽은 우물반자를 설치하고 바깥쪽은 빗반자로 처리하였다. 특징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과 배열 방법, 가구 수법이 특색 있다. 다포계 건축임에도 불구하고 창방(昌枋 : 기둥머리 부분에서 기둥과 기둥을 잡아주는 부재) 위에 평방(平枋 : 다포집에서 여러 개의 포를 올리기 위해 창방 위에 덧대는 부재)을 생략하고 공포를 올렸다. 주간포는 정면에만 배열하였으며, 양 측면과 배면은 주간포 대신에 화반을 끼워 넣었다. 이러한 방식은 다른 건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며 유사한 사례로는 청양 장곡사 상대웅전(보물 제162호)이 있다. 구조적인 특징으로는 반원형의 중도리를 사용한 것과 종보 위에 덧보를 사용한 것, 종도리 하부에 장여를 설치하지 않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 건물은 가구 구조, 공포의 구성과 배열 방식 등 건축수법이 특색 있다. 또한 조각과 단청이 화려하여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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