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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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 같은 피같은 묘사는 어떻게 그려야하나요?
일반적인 물튀김과 혈흔의 차이는, 물보다 혈액이 좀 더 점도가 높다는 점입니다. 이 물질적인 차이로 물과 그리는데에 있어 차이가 생깁니다.
너무 대충그려서 설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물이 튀겨지면 방울방울 맺혀지는 반면에, 피는 물방울보다는 좀 더 점도가 높아서 뭉쳐지려는 성질이 있어서, 방울과 방울끼리 이어져있거나 좀 더 길게 자국이 남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물은 특정 사물에 묻으면 투명하고 점도가 낮아 금방 흘러내리지만, 피는 색이 진하고 점도가 있기 때문에 닿는 사물에 쉽게 흔적을 남기죠.
다른 특징으로는, 물에 젖었을 때보다 피에 젖었을 때 생각보다 훨씬 빨리 마릅니다. 그렇기에 얼굴이나 손이 물에 젖었을 때는 대부분 물끼리 합쳐져 아래로 흘러내려 버리지만, 피의 경우 그 묻은 그대로 굳어서 유지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에 젖었을 때에는 물은 아래로 흐르는 모습으로 그리면 자연스럽고, 피를 그릴 때는 피가 튀겨진 방향으로 그리는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피가 아직 굳지 않았을 때 아래로 흘러내리다 만 흔적을 조금씩 그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사진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네요.
위 이미지는 다른 유혈 자료들을 참고해서 그렸습니다. 피도 결국 색이 있는 액체이다보니, 질량이 뭉쳐질수록 색이 짙어지고 옅어질수록 색이 옅어집니다. 그리고 질량이 뭉쳐진 방울일수록 볼록해지고, 볼록해진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그려 입체감을 표현해주면 더 그럴듯해집니다.
간단하게나마 설명했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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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복선들이 많이 깔려있는 것 같다.. 누군가와 봤던 뮤지컬의 내용이라던가 그 뮤지컬을 보고 나와서 했던 말들, 누군가와 했던 게임의 승부라던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들이 돌아보면 마치 이야기의 대사처럼 복선처럼 깔려있었던 경우들
요새는 믿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에 대해서도, 마음이라는게 항상 방향성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마음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마음의 방향이 일단 정해져 버렸다면 그건 멈출 줄도 모른다. 하지만 방향은 언제든 바뀔수 있다. 생각과 마음은 변하는게 자연스럽다. 앞문이 닫히면 뒷문이 열린다. 중요한 것들은 뒷문으로 오고간다. 그런게 자연스럽다. 삶에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아주 단순하고 너무 쉬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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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를 열심히 탐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성애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던 시간이 헛되지는 않고 흥미로운 점도 있기에 개인적인 경험을 기록을 해두거나 관련된 영화나 책을 찾아보곤 했다. 저질이고 변태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위한 유희를 즐기는 건 죄책감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죄의식이 에로스가 된 취향도 상관 없다. 쾌락은 쾌락일 뿐이니까.(물론 범죄는 제외)
어두운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아이처럼 지금 섹스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밤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대다수가 나와 같은 상상을 하며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어제는 버려야 할 분리수거를 양손에 들고나간 길에 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르겠지만 두 명의 남녀를 보았다. 잠옷 차림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만졌고 여자는 웃으면서 좋아했다. (아무도 못 볼 거라 생각했겠지? 그런데 그 정도 스킨십은 뭐 어때. ) 난 우연히 목격했고 혹여 내 시선에 민망해할까 봐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일부로 많은 걸 일반화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독특한 건 매혹적이지만 유별나서 나처럼 생각이 많은 인간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상념의 수렁에 빠지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감정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겪어봤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내 담론은 조금 거대해졌다. 성애를 규정하고 취향을 확립 시키는 일은 인구만큼, 우주의 별만큼 다양하겠지민 인간이란 매뉴얼 안에선 비슷하지 않겠냐는 이중적인 시선이 흥미로워졌다는 것이다. 한 쌍의 커플이 분리수거를 버리러 나가는 길에 서로의 심장이 찌릿하게끔 스킨십을 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리고 사랑스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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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출근길
이쯤 오��� 행어랑 타워가 보여야 하는데 하나도 안보였다. 한치앞을 볼 수 없어 늘 다니던 출근길이 긴장가득. 두근두근
눈 좀 그만왔으면 좋겠네. 이제 진짜 질린다. 너무 질려. 쫌!!!!
덧,
요즘 들었을 때 이상하게 귀에 걸리는 말? 표현들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단체 톡방에 누군가 먹음직스러운 사진을 올렸다 치자. 그럼 그 사진을 보고 식당을 물어 볼 때 ”여기 어디예요?“ 라고 표현하는 게 나는 자연스럽다 생각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여기 어디일까요?“ 라고 물어본다. 뭔가 어색했다. 폰소는 그건 브로큰 잉글리쉬처럼 한국말이 서툴러서 그렇게 표현하는 게 아닐까? 라고 한다. 뭔지는 딱 모르겠는데 뭔가 어색하단 말이지…🤔 내가 음식 사진을 올리고 내가 “여기 어디일까~요?“ 라고 하면 또 이건 자연스러운데 누군가 올린 사진을 보고 사진 올린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식당이 어디인가를 묻은데 “여기 어디일까요? “ 라고 물어보는 것은 마치 “1도 몰라요”같은 요즘 사람들의 표현���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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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다리엔쏘 vs 후안 뽈리또"
'탱고 스토리 : 우리를 춤추게 한 위대한 악단들' 책 197쪽에서 후안 다리엔쏘는 1940년 5월, 악단 핵심 멤버였던 후안 뽈리또(피아노), 알베르또 에차게(가수) 포함 전단원을 잃었다고 나옴.
이런 경우 양자 간 세력다툼이 있었나보다 예상하는 게 자연스럽다. 또한 대개는 돈 문제(=수익 분배)가 개입돼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리엔쏘가 리더로서 욕심을 부리다 단원들의 반발을 샀는지, 또는 뽈리또가 단원을 꼬드겨 일종의 반란을 획책한 건지 구글 검색해봐도 상세한 이야기는 못 찾음.
후안 뽈리또는 다리엔쏘가 1938년 로폴토 비아지를 (시기 질투해서) 해고한 뒤 후임으로 들어온 피아니스트였다. 근데 위키에는 비아지가 자신의 악단을 꾸리고 싶어 독립한 것처럼 써 놨다. 왠지 다리엔쏘를 감싸려는 듯한 인상이…
소위 땅고 4대 거장 중 오스발또 뿌글리에쎄는 평생 공산주의자로서 신념을 관철해 악단을 공동 소유로 운영했기 때문에 단원들의 존경심이 대단해 탈퇴가 거의 없었다 하고, 인성마처 '땅고의 신사'였던 까를로스 디 살리, 성품이 자애로왔다고 하는 아니발 뜨로일로에 비해 후안 다리엔쏘는 음악적 역량과는 별개로 인간적 결점이 있지 않았었나 예상. 하지만 음악가에게 도덕 군자의 태도까지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고 보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이해한다.
한편 다리엔쏘를 떠난 후안 뽈리또 악단은 라디오 벨그라노에서 황금시간대 연주를 담당하는 등 상업적 성공은 거뒀으나 땅고 역사에 족적을 남기진 못한 듯하다.
내가 보기엔 연주가 '다리엔쏘 짝퉁'이란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탓이 제일 크다고 봄. '쓴 술 한잔(=Trago Amargo)'은 라파엘 이랴르떼(Rafael Iriarte)가 작곡하고 훌리오 나바린(Julio Navarrine)이 작사해 1925년 이그나��오 꼬르씨니(Ignacio Corsini)가 녹음한 곡으로, 유튜브에서 다리엔쏘와 뽈리또 연주를 각각 들어보면 바로 납득 가능할 듯.
재밌는 뒷얘기로 다리엔쏘와 뽈리또는 1957년에 다시 만나 음반 작업을 한다. 이해 관계만 맞으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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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Moon Bin shared for us to learn from him. Because I won’t forget the time MoonBin dedicated to us.
2204 Arena Interview translation
그러한 창작 습관이 활동에 영향을 주기도 하나?
그렇지. 아스트로로서든, 문빈으로서든. 글을 쓸 때, 메타포에 의미를 응축하기 위해 늘 상상한다. 그런 상상력이 무대에 설 때도 큰 도움이 되고, 연기할 때도 그렇다. 상상을 워낙 즐기는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때도 물론 있다.
Do such creative habits also affect activities?
It is Whether as Astro or Moonbin. When I write, I always fantasise to condense meaning into a metaphor. That kind of imagination is a big help when you stand on stage, and it's also when you're acting. I enjoy my imagination so much, but of course there are times when it has a bad effect.
어떤 때인가?
공상에 너무 깊이 빠지면 최악의 상황까지 떠올리게 된다. 불안을 느끼면 멈춰야 하는데, 계속 떠올라 실수할 때도 있다. 중요한 일에 집중을 못한다든지. 그런 면이 부정적이지만 상상을 멈추기엔 긍정적인 부분이 더 크다.
What time is it?
If you go too deep into your daydreaming, you'll even think of the worst. If you feel anxious, you have to stop, but sometimes you keep thinking and making mistakes. I can't concentrate on important things. That aspect is negative, but the positive part is greater to stop the imagination.
감각이 무뎌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새로운 것에 더욱 잘 적응한다는 의미다. 거의 모든 것을 경험했고 이젠 익숙해졌으니까. 무대 위에서 덜 예민하고 더 자연스럽다.
What does it mean to be numb?
It means adjusting to new things better. I've experienced almost everything and now I'm used to it. Less sensitive and more natural on stage.
문빈에게 용기 주는 말은 어떤 것이 있나?
위로의 말들. ‘괜찮아, 잘했어, 충분해.’ 몇 글자 안 되는 단어지만 그 단어들이 주는 힘은 대단하더라.
What kind of words give you courage, Moonbin?
Words of consolation ‘It’s okay, good job, that’s enough.’ It's a few words, but the power of those words is amazing.
오늘,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
힘내고, 고생했다.
Today, what do you want to say to yourself?
Cheer up, you did a good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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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물을 갈아주고 번거롭지만 물을 갈 때마다 줄기 아래부분을 조금씩 잘라주라 한다. 그리고 꽃이 진 줄기는 과감히 제거하는게 좋다고 하는데 마지막 관리법은 늘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못하는건지. 온갖 것에 무심하게 살면서 이런건 또 미련을 가진다.
식물이든 꽃이든 인위적으로 모양을 만든 것보다 제멋대로 자란걸 좋아한다. 그리고 꽃을 살 땐 늘 시드는것까지 생각하고 사는 편이다. 생생할때의 빛은 없지만 나름 오히려 자연스럽다 생각한다. 어차피 한철이라면 조금 더 저무는것까지 보는것도 재미 중 하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철학이지만 삶과 다르지 않다 느꼈다. 같은 세계의 사람은 없다는 것.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욕심이고 오만이겠지만 그 가까이는 가보려한다. 인간관계에서 바라는 유일함은 이런거다.
내 지난 과오에서 배운건 시간은 늘 필요하다는 것이고 관계의 지속과도 별개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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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더라도 대화는 필요하다. 서로에게 각자의 생각을 전달하고 그 중 누군가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통해 그리고 상대방에게 들려주기 위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 지금 나의 생각/입장에 대한 환기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설령 그 결과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존 생각을 더 공고히 해주는 결과일 뿐일지라도 그건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딱히 주제라던가, 결론 같은게 있을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없는 게 자연스럽다. 그냥 상대방을 말 위에 내 말을 얻으면 되는거다. 그 둘 사에에 접점이나 연관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무관하다(사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접점과 연관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대화란 상대방을 이해시키려거나 혹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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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hes Neues
졸업자의 넋두리: 독일 예술학교에서 친구들이 ‘사회운동으로써 예술’을 하는 경향과 그의 토대에 대하여 강의로든 토론으로든 제대로 설명을 들은적이 없는데 잠깐이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일 역사와 철학의 경로를 근대까���만 따라가도 적당히 이해되는 문화적 혹은 생태철학적 추구인데 외국에서 온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관심있게 알아보지 않는이상 이해를 건너뛰고 그 사이에서 붕 떠버리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분위기 파악능력, 즉 눈치는 훌륭하여 ‘정치적 선동으로써의 예술관’에 적응심리나 일원로써의 인정욕을 느껴 본인의 예술관이 힘차게 흔들리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ㅇㅇ내 얘기임..특히 한국에서 흔히 접하는 작품의 스타일이 감각과 신기술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으니 ‘예술은 사회의 폭력을 흡수하는 상징체계로 기능한다’는 관점이나 비판이론으로 긴장감을 갖춘 ‘지적 전투’로써의 예술활동에 낯선것이 자연스럽다. 유대인학살이라는 대대적인 수치, 그것에 대한 자국민의 비평을 훏어 읽으면 상당히 일반적인 몸짓들, 단어와 말들 또 사유 능력에 대한 집착적인 태도에 대한 해체주의적 비하인드가 그려진다. 그러다보면 한국의 반지성주의 분위기도 식민약탈역사의 파편으로 이해되고... 선비니 진지충이니 토론의 시간을 폄하하며 그 소중하고 발전적인 기회를 말살하는 안타깝게도 자주 포착되는 습관적 태도가 정말인지 역사적 비극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기불구화: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방해물을 설치하는 행위. 예를 들어, 시험을 망치거나 그럴 것이 예상될 때 공부하나도 못함/잠을 못자서- 같은 말을 발설하므로써 상대의 기대치를 낮추고 일종의 자기보호를 하는 것. 혹은 자신이 평가된다고 생각되는 자리를 차단하거나 피해버리는 것. 그러니까 자기불구화가 대한민국 포스트 모던의 국민성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몇 있었는데, 박원순처럼 자살해버리는 최후의 불구화나 나의 가족들이 보통으로 탑재한 히스테릭한 낙관주의에 해당해 그것이 그 좀 인류보편적 경우보다는 더 갔다고 생각되기 때문. 에고 한해를 시작하는 1월의 글로 싱그럽고 낭만충족한 글을 바랐는데 호호. 제목만 챙겼네. 급하게 나의 다짐을 서술하자면;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보편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고, 또 보편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면서도 구체적인 차원을 절대로 방기하지 않는것. 현상학에 빠샤삭하고 싶다: 생에 임하는 태도로써. 모든 경험의 본질을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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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좋은것같다
연기라는게 어색한건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도 실제보단 어색하니) 이게 가짜라는걸 나도 알고 모든 너도 알고 우리 모두가 가짜라고 합의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상황에선 (현실에선) 거짓말이나 연기가 자연스럽다 이 상황이 가짜라 할지라도 나와 네가 이것이 진실이라 믿기 때문이다 진실이라고 합의했다
에세이는 실제같은 가짜가 아닐까 소설에서의 거짓말이 쑥스러운데 비해 에세이는 거짓말이 술술 자연스럽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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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의 특징 - 순수하고 밝고 활기차다 - 친구를 아주 좋아한다 - 태생 애교쟁이라 스킨십이 자연스럽다 - 자신감이 강하지 않아 행동보단 고민이 앞선다 - 상대의 강한 질책이나 큰 난관에는 풀이 죽는다 - 한번 토라진 상대에게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 예시: 마루, 귀도, 유비 아저씨 - 맡은 역할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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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존재에 중심을 둔 사람은 반항주의자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다. 그는 느슨하고 자연스럽다. 그는 무언가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그일 뿐이다. 그는 규칙을 따르지도 않고 규칙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규칙 자체가 없다. 중심에 선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서 자유로우며, 어떠한 관습이나 사회화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세뇌된 존재가 아니다. 그가 문명화되지 않고 원시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과 문화의 가장 높은 절정의 존재라는 뜻이다. 그는 외부에 의해 세뇌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자각 속에서 성장했으며, 어떤 규칙도 필요 없다. 그는 규칙을 초월했다. 그는 진실하다. 규칙이 진실해서가 아니다. 느슨하고 자연스러운 존재로서 그는 그저 진실할 뿐이다. 그가 진실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는 자비심이 있다. 자비심을 위한 자각을 따라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느슨하고 자연스러움 속에서 그는 그저 온 사방에 자비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것은 계획적인 일이 아니다. 자각이 성장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결과이다. 그는 사회에 반대하지 않으며, 사회에 찬성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는 또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 아이는 절대적인 미지의 세계,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속한 아이이다. 그는 다시 태어난다.
- <오쇼의 액��브 명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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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 지역과 한국인의 뿌리
- 몇 년 사이 부쩍 많이 이야기되는 요하 지역의 역사 유적. 일단 기본 배경은 그 동안 중국 역사에서 ‘오랑캐’ 땅이라 불렸던 장성 너머 북쪽에서, 정작 중국 황하 문명보다 앞선 문화적 유적지들이 발견된 것. 기원전 4000~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를 전후 해서 신락 하층 (B.C. 5300~4800), 홍륭와 문화 (B.C.5500~4800), 조보구 문화 (B.C.4500~4000), 부하 문화 (B.C.3300~2700), 소하연 문화 (B.C.3000~2000) 등과, 이후 청동기의 하가점 하층 문화 (B.C 2100~1500), 위영자 문화 (B.C. 1400~1000), 하가점 상층 문화 (B.C. 1100~600), 십이대영자 문화 (B.C. 900~400)까지. 이 중 ‘홍산 문화’의 경우 옥으로 만든 ‘용’과 묻혀 있는 ‘���신상’의 모습이 발견되면서, 용을 숭배하는 중국 역사의 뿌리가 이곳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등장.
- 이런 발견과 함께 ‘다민족 통일국가’라는 중국의 정체성을 구축하려 하는 중국 사학계는 이 발견을 중국 역사에 통합해서 해석하려는 시도를 전개. 이전까지 오랑캐라 불리던 이 영역을 갑자기 3황5제 중 황제의 자손이 다스리던 땅으로 규정하고, 이 오랑캐들이 결국 중국을 구성하는 민족이자 문화의 일부로 해석하고 통합하는 작업을 수행. 문제는 이렇게 될 경우, 역사 속에서 요하 지역에 등장하는 모든 문화와 역사가 중국사의 일부가 되는 황당한 일이. 그러다 보니 이제 부여, 고구려 등도 중국 변경사가 되는 일이. 민족주의적 통일성을 강조해야만 하는 중국 입장에서는, 관변 학자들이 어떤 접근을 할 지 예상 가능하다.
- 이런 사실과 중국의 관변 학자들의 대응이 증폭되면서 국내에도 특이한 자장이 벌어지는데, 당연한 몇 가지 사실들 1) 요하 지역은 이후 고조선/부여와 삼국 시대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지역 2) 특히 요하 지역 중 요동의 경우 고조선과 부여의 국가 형성의 기원이 되는 지역이라는 점 등에서 다양한 논의 등이 등장한다.
- 우선 이렇게 우리와 ‘연관이 있는’ 지역이니까 우리도 이 지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 『북���고고학 논총』, 임운 저, 복기대 역, (학연문화사, 2013), 『한국과 중국문명의 기원 홍산 문화의 이해』, 복기대, (우리역사연구재단, 2019), 『한국 상고문화 기원연구-고고학, 유전자, 언어, 문화교류』, 복기대, 신동훈, 이성규, 윤명철 외, (학연문화사, 2013) 등은 복기대가 수학한 중국 학자 임운의 저작과 이후 복기대가 참여한 책들. 요하 문명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기초 자료들. 이 중 임운의 책 같은 경우 요동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유적들이 ‘예맥’ 계통의 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내용 정도가 특기할 것.
- 그리고 점점 이상해지는 논의들. 『요하문명과 고조선』, 한창균 엮음, (지식산업사, 2015), 『홍산문화의 인류학적 조명 - 우하량유적의 새토템과 조이족』, 이찬구, (개벽사, 2018),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우실하, (소나무, 2014),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요하문명』, 우실하, (지식산업사, 2018). 우선 한창균의 책은 요하 문명의 다양한 발굴 성과에 따라 이후 고조선/부여 등의 국가 건설 과정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는 점에서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본다. 그런데 실린 논문들 중에는 거기서 더 나아가 요하 문명이 고조선의 ���접적 기원으로 설명하는 글들도 있다. ‘연관이 있다’, ‘교류가 있다’는 이야기와 ‘여기가 거기다’라는 이야기에는 꽤나 거리가 있는데 자연스럽게 논의가 이어진다. 가장 심각한 건 이찬구나 우실하의 책들. 이들은 요하 문명의 주역이 예맥족이라 이야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중국보다 더 앞선 요하 문명을 예맥족이 건설하였고, 이 예맥족이 다양하게 분화해 나갔다는 일종의 ‘범 요하문명 민족주의’를 구축하는데, 이는 세계 각지에 등장하는 파시즘의 논리와 비슷해서 흥미 있다.
- 하지만 사실 이런 주장은 기본적 사실조차 맞지 않는데, 요하문명이라고 묶지만, 세계 많은 교역 통로 지역이 그렇듯, 이런 지역은 중심 세력이 끝없이 교체한다. 게다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부족 사회의 안정성이 떨어지니 꽤나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 집단이 국가로 성장하지 않고, 해당 지역을 떠나 사라져버리는 사례가 많다. 이런 관점에서 요하 문명을 하나의 민족에 의한 안정적 성장, 발전의 역사로 보는 것 자체가 황당한 접근이다. 게다가 이런 교류 지역에서는 인근 지역에 문화적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그런 유사성 속에서도 발견되는 차이가 이들의 정체성 이해에 더욱 중요할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대부분 신화학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신화학이 문화적 원형성을 통해 단순한 수준의 사유에서 발견되는 공통점, 그리고 이런 공통성의 분화 과정에서 발견되는 지역적, 사회적 차이를 검토하는 것이라면, 이들이 사용하는 신화학은 공통성의 흔적을 찾고, 공통성이 있다면 그것으로 모두가 같은 민족이라는 식의 황당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즉 통일과 차이에 대한 시간적 이해가 적절하지 못하고, 확장이라는 방향 위에서 작동할 뿐이다. 하긴 19세기말 20세기초에 등장한 많은 신화학자들이 파시스트가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낯 선 일도 아닌 듯. 게다가 일베와 메갈이 서로 혐오를 증폭시켰듯, 이들이 자신의 황당한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중국 역사학, 특히 동북 공정에 대한 문제는, 학술적으로 그 황당함을 지적 해야지, 동일한 민족주의적 견강부회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인데.
- 그런데 이 와중에 또 나름 재미있는 책도 있다. 그게 발견의 즐거움이겠지만. 『요하문명과 예맥』, 문안식, (혜안, 2012), 『요하유역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백종오, (지식산업사, 2018) 등인데, 우선 문안식은 요하문명에 등장한 다양한 문화적 교류 속에서 선진 문헌에 등장한 숙신에 주목하고 숙신에 원고조선 민족이라 해석한다. 그리고 오히려 책 대부분의 내용은 예와 맥족이 각기 부여, 옥저, 동예, 고구려, 백제, 신라로 분화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백종오 역시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의 지속적 교체를 살펴보고,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 국가들의 확장 형성과 확장 과정이 어떻게 요하 문명에 거주하던 선주민들의 이동과 국가 형성에 기여하게 되었는가를 검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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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6: 거제도
정은씨와 재성이를 보러 거제도에 다녀왔다. 재성이는 정은씨를 참 많이 아끼고 보살피는데 (보살핀다는 표현이 맞나 모르겠지만) 그런걸 신기할정도로 티내지 않는다. 여러 행동들이 참 자연스럽다. 그래서 아낌을 받는 쪽에서도 부담스럽지 않고 보는 사람들도 '유난이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좋은 사람들이란 그런 것이구나 실감하였다. 거제도 토박이인 정은씨가 추천해 준 까페들은 정말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리묘라는 곳은 또 한 번 꼭 들르고 싶다. 그리고 재성이랑 정은씨를 오래 알고 지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둘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살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언젠가 또 기회가 되어 리묘에서 커피를 같이 마신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다해 졸라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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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극
학창 시절 유독 별명 많은 애들 있다. 내가 그랬다. 중딩 때 대표 별명은 둥근달, 고딩 때는 외계인. 요즘 나는 마르고 광대뼈 튀어 나온 타조나 기린 또는 곤충 닮은 독특한 인상이란다. 달이 지고 외계인만 남은 샘. 인생 대부분을 퉁퉁이로 살아온 나는 이런 시선이 여전히 낯설다.
너와 내가 서로 인정하고 알아보는 아름댜운 상황이면 겸��과 칭찬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내가 누군줄 모르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오히려 날 가르치려 들고 막말로 줘도 못 먹는 한심한 자들 앞에서는 겸손은 힘들다. 나 같이 하찮은 자도 이러할 진데 예수님 심정은 오죽했을까.
전자의 경우로 만난 사람은 나를 마냥 사람 좋은 무골 호인으로 여기고, 후자의 경우로 만난 사람은 나를 할 말 안할 말 다 하는 냉혹한 독설가로 본다. 이처럼 나에 대한 주변 평가는 상황과 관점에 따라 극과극. 나도 이제 나이 먹어서 요즘은 독설과 언쟁은 왠만하면 피하고 본다만.
타인의 한심함을 곱씹지 말고 바꾸려고 하지는 더더욱 말자. 사람은 지극히 감정적인 동물. 함께 천하를 도모할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면 굳이 기분 상하게 해서 좋을 것이 별로 없다. 결국 다들 운명대로 인연대로 사는 것이고, 나 또한 다를 바 없다. 부족한 나는 그저 범사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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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고의 꼬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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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밀롱가에서 춤추는 동안 상대와의 느낌이 유난히 좋으면 "꼬라손을 느꼈네, 어쨌네..."라고 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게 콩패니쉬란 걸 대충 주워 들어 알고는 있었다. 개인적으론 "4 다리 1 심장"이란 표현과 더불어 심히 오글거려서 절대로 안 쓴다.
사전에서 '꼬라손'을 찾아보면 주로 '염통(심장), 마음'이란 말로 쓰인다. 아마도 한국 사람 뇌리에선 '마음 → 마음을 느꼈다 → 이심전심'으로 의미 확대가 일어난 듯.
심장이 아플 땐 병원을 가야 하고, 마음이 아플 땐 울어야 한다.
위 동영상의 화자가 '꼬라손'의 오용을 지적하시는 점은 공감하나, '꼬라손 = 심장, 마음'이란 의미를 제쳐 놓고 '호격 대명사'로 단정해 버린 결론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내가 서반어를 전혀 못 하긴 하지만 영어로 번역한 땅고 가사를 살며 본 바로는 아마도 '심장, 마음'으로 쓰인 경우가 제일 많을걸?
우선 까를로스 디 살리 악단 연주로 유명한 '꼬라손' 가사를 영어로 번역한 내용을 대충 보면 "Corazón, me estás mintiendo… Corazón, ¿por qué lloras? No me ves que voy muriendo de esta pena a tu compás. (내 심장이 나를 속이려고 한다. 마음은 왜 울고 있는가. 고통이 심장 박동에 이르러 나를 죽이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Alma, Corazon y Vida"라는 곡도 '영혼, 마음과 삶'으로 이해해야 자연스럽다. "Alma para conquistarte, corazón para quererte, y vida para vivirla junto a tí (널 갖고 싶어 하는 영혼, ���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너와 함께 사는 삶)"
2000년에 발표한 까를로스 산타나의 'Corazon Espinado' 역시 '가시에 찔린 마음'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나?
화자는 "Mi Corazón = My Sweetheart"라고 주장하시지만 이 또한 단순히 '내 마음'으로 번역하면 되는 가사가 대부분인 거 같은데? 가령 호르헤 비달이 부른 'Estás En Mi Corazón'은 '너는 내 마음 속에'로 번역해야지 '너는 My Sweetheart속에'라고 하면 되겠냐.
물론 'Adios Corazon'처럼 호격 대명사로 쓰인 사례도 있긴 하다. 만약 이걸 콩패니시로 번역하면 '(내가 느낀) 꼬라손이여 안녕히' 같은 이상한 의미로 바뀌겠지.
한편, 화자가 말씀하시는 대로 꼬라손을 Alegria, Emocion, Satisfaccion, Amor 같은 단어로 바꿔도 될까? 내가 보기엔 이것도 아닌 거 같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꼬라손이란 의미는 Alegria + Emocion + Satisfaccion + Amor를 모두 합한 복잡한 뉘앙스로 재생산된 느낌이 강하다. "파이팅"이 더 이상 "Fighting"이 아니듯, 꼬라손 역시 이미 대체 용어가 없는 원조 콩패니쉬 중 하나가 아니겠냐 싶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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