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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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ams-posts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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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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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79년 페낭을 찾았다. 영국이 페낭을 점령한 지 한 세기가 지난 뒤 영국인 여행가의 눈에 비친 조지타운의 풍경은 이러했다.
조지타운은 아시아계의 도시다. 중국인, 버마인, 자바인, 아랍인, 말레이인, 시크교도, 마드라스인, 클링인, 출리아, 파시교도 등 아시아계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들은 정크선이나 증기선, 다양한 아랍 선박을 타고 여전히 페낭으로 몰려든다. 아시아계 이주자들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궁핍에 빠지지도 않으며, 저마다 교육의 의상과 관습과 종교를 유지한 채 페낭에서 질서를 지키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다. 홍해에서 중국해까지, 메카에서 광주까지 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잡다한 유색인종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까닭이 궁금하다면, 클링 선원 한 명이 짧은 영어로 내게 한 말이 답이 될 것이다. ‘영국 여황 좋아, 노동자들 돈 벌고, 재산 안전해.’ 이 말을 해석하자면, 페낭의 아시아계 이주민들은 영국의 지배 아래 생명과 재산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며, 영국의 식민지 법정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이들 아시아계 이주민들에게 ‘영국 군대의 북소리’와 영국 함대는, 영국에서 효율적인 경찰이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비숍, 2017: 274~275).
비숍이 다녀간 뒤 다시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역사가의 눈에 비친 페낭은 어떠했을까? 말레이시아 역사를 전공한 빅터 퍼셀Victor W. W. S. Purcell(1896~1965)은 영령 말라야에서 식민지 관리를 지냈다. 해협식민지 정부는 1877년 중국인 문제를 다루는 화인보호관서Chinese Protectorate를 신설하고, 싱가포르에 보호관, 페낭에 부보호관을 뒀다. 퍼셀은 1925년 페낭의 부보호관���로 임명되었고, 1930년대 세 차례나 페낭의 화인부보호관으로 일했다. 말레이어와 중국어에 능통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말라야 관리의 비망록Memoirs of a Malayan Official》에서 조지타운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조지타운은 시민적 자부심이 대단한 도시였다. 조지타운 자치위원회는 상당한 자치를 행사했으며, 아시아인이 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 조지타운은 가로수가 장관이고, 녹지가 넉넉하며, 도시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시민의 열망도 대단했다. 자치위원회에서 도로의 가로수 한 그루를 자르는 안건을 두고 열성적으로 논의할 정도였다. ······ 페낭섬은 내가 말라야에서 거주했던 유일한 곳이다. 자연과 인공물, 그리고 사람들의 다양함과 알록달록함은 마치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는 유리 샹들리에처럼 다채로운 빛깔을 드러낸다. 피트가의 중국인 사원 관음정觀音亭Kuan Yim Teng(廣福宮Kong Hock Keong) 안을 들여다봤다. 자욱한 분향 연기 속에 굵은 초가 켜져 있고 그 가운데 불상과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거기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슬람 사원에선 무슬림이 경건한 기도를 올린다. 1월 말 참회와 속죄의 힌두 축제 타이푸삼Thaipusam 기간엔 타밀족 인도인이 땀을 흘리며 시바의 거대한 은빛 수레를 끌고 희민한 신호등처럼 거리를 행진한다. 축제 수레의 행렬에는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혀와 볼을 쇠꼬챙이로 뚫거나 맨살에 무거운 덩어리를 꿰어 매달고 무아지경에서 신을 향해 기도와 주문을 외치는 광적인 신자들을 볼 수 있다(Purcell, 1965: 173~5).
(55~57쪽)
프랜시스 라이트는 페낭을 점령하고 곧바로 섬 북동쪽 곶에 요새부터 구축했다. 이것이 콘월리스 요새이다. 인도총독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재임 1786~1793)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이 요새 남서쪽으로 격자형 도로로 구획된 직사각형의 도시를 건설했다. 가로로 북쪽에 라이트가Light Street(오늘날 Lebuh Light)와 남쪽에 출라이가Chulia St.(오늘날 Lebuh Chulia)를 두고, 세로로 해안을 면한 동쪽에 비치가Beach St.(오늘날 Lebuh Beach)와 서쪽이 피트가Pitt St.(오늘날 Jalan Masjid Kapitan Keling)를 장방형 기본 도로로 설정했다. 4개의 간선도로 사이로 길들이 교차하는 바둑판 도시가 구획된 것이다.
비치가와 피트가 사이에 남북 방면으로 ‘차이나가’가 있었다. 이 도로는 오늘날 ‘페낭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안에 면한 비치가는 초기부터 조지타운의 상업 중심지였다. 당시 조지타운의 도시 설계는 다양한 인종과 종족의 이우자들을 별도의 집단 주거지로 격리하기보다는 도심에서 도로를 사이에 둔 격자형 주거공간에서 어울려 살도록 하는, 엉성하면서도 융통적인 것이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거나, 하나의 격자형 블록 안에 말레인 주거지와 이슬람 모스크, 중국인 사당과 불교 사원, 힌두교 사원과 기독교 교회가 뒤섞였다. 퍼셀이 다채롭다고 했던 조지타운의 독특한 풍경은 이미 페낭 건설 초기에 틀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1819년 건설된 싱가포르가 인종과 종족 간 주거공간을 구획하는 도시 설계를 했던 것과 대비된다. 물론 페낭의 유럽인들은 기본적으로 콘월리스 요새의 서북 해안에 집단적으로 거주했지만,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유럽인도 격자형 도심에 거주하기도 했고, 아시아계 부자들이 유럽인과 이웃하기도 했다(Huang, 2002).
라이트가 설계한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 도시, 이것이 조지타운 도시 설계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주민이 급증하면서 주택이 난립하고, 격자의 골격을 이루는 기본 도로 사이에 무수한 골목길이 생겨났다. 19세기 초 잇단 대화재로 도시가 정비되기는 했지만, 조지타운에 제대로 된 도시 계획이 적용된 것은 영국이 점령한 지 100년 뒤인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도심에 정착했다. 프랜시스 라이트는 요새 북서 해변에 주민의 식수원으로 삼을 큰 우물을 파고, 1에이커의 부지를 조성했다. 이곳에 정부 건물과 유럽인 거주지를 건설했다. 토지는 영국인 상인들이 거의 장악했고, 유럽인 자본으로 개발됐다. 페낭 건설 초기 토지 거래업무는 경찰 소관이었다. 당시 치안 또는 행정의 근육이 없었던 터라 토지 거래의 난맥상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주자는 날로 늘고, 도시는 수용 능력을 초과했다. 건물과 도로의 난개발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그 도시 행정 부재에서 비롯된 난개발이야말로 빅터 퍼셀이 감탄했던 조지타운의 다채로움을 낳은 모태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야자나무 잎을 엮어 짠 아탑 지붕의 주상가옥이 줄지어 섰던 조지타운은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는 참사를 겪으면서 점차 벽돌 건물의 도시로 바뀌었다. 페낭의 조지타운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도시로 선정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도심의 2층짜리 ‘숍하우스shop house’는 이렇게 생겨났다. 숍하우스는 19세기 해협식민지와 말라야의 도시에서 주로 중국인 이주자의 상업 및 주거 형태를 대표한다. 말 그대로 상점과 주택이 결합된 숍하우스의 특징은 도로를 따라 폭 5~6미터에 길이 15~30미터짜리 2층 건물이 서로 벽을 맞댄 채 이어진 연립주택이라는 점이다(Knapp, 2010: 20). 대부분 1층은 상점과 생활공간으로 하고, 2층에 침실을 둔다. 특히 1층은 도로에서 1.5미터 정도 들여 짓고, 처마를 길게 내거나 2층을 도로 쪽으로 내어 지었다. 이들 숍하우스가 도로를 따라 연이으면서 자연스럽게 뜨거운 햇볕을 가리는 보도가 만들어진다. 그 보도로 사람이 오가고, 가판대가 펼쳐지며 시가를 이룬 것이다.
영국은 종교에 관해서도 자유방임 기조를 유지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정관定款에서 식민지에 특정 종교를 전파하는 것을 금지했다. 영국국교회가 페낭 유럽인 사회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페낭에 영국국교회 교회인 세인트조지교회가 세워진 것은 1818년의 일이다. 퍼셀이 조지타운에서 보았던 중국 사원 옆에 이슬람 사원이 있는 모습은 영국 종교 자유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59~62쪽)
1788년 12월의 페낭 전체 인구는 1,283명으로 조사됐다. 당시 인구조사 분류 기준으로 보자면,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을 제외한 유럽인이 19명, 포르투갈계 유라시아인Eurasians이 197명, 말레이인과 자위 페칸Jawi Pekans이 530명, 중국인 537명이었다. 유라시아인은 영국식 인종 분류로서,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혼혈을 가리킨다. 자위 페칸은 애초 인도 출신으로 현지 말레이인과 혼인한 이들을 가리켰다. 영국은 말레이반도의 말레이인은 물론 자바와 수마트라 출신과 부기스족도 모두 말레이인으로 간주했다. 출리아와 자위 페칸을 말레인인의 범주에 넣은 것이 독특하다. 당시만 해도 영국 식민 당국은 ‘말레이인Malay’의 범주를 종족ethnic이 아니라 종교를 기준으로 ’이슬람을 믿는 아시아계‘로 분류했던 것이다.
1810년 인구조사에서는 종교 대신 인종 및 종족이 분류 기준이 됐다. 이 조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초기의 인도계와 중국계는 대부분 인도나 중국에서 직접 이주한 것이 아니라 태국 남부와 말레이반도 북부의 커다 등에서 페낭으로 옮겨왔다는 점이다(Hussin, 2007: 185). 이 사실은 ’페낭 화인권‘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1810년 인구조사에서 페낭 조지타운의 도시 인구는 1만 3,885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인도 동남부 출신 무슬림을 가리키는 출리아를 비롯해 인도계가 5,604명으로 40퍼센트를 차지했고, 중국인이 5,088명(36.6퍼센트), 말레이인/자위. 페칸(프라이 포함) 인구는 3만 200명이었으며, 도시 인구는 1만, 2,135명으로 줄었다. 도시 인구가 1810년을 정점으로 1830년까지 1만 1,000~1만 2,000명으로 정체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후추 시세나 전염병 등의 원인도 있겠지만, 19세기 초 페낭은 인구의 유입과 유출이 유동적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종별로 보자면, 페낭의 유럽인은 1820~1870년의 50년간 400~600명에 머물렀다. 1880~1905년의 25년간 페낭의 교역 규모가 400퍼센트나 증가하고, 서양 무역회사의 페낭 사무소가 잇달아 개설되었지만, 페낭의 유럽인 인구는 소폭 증가에 그쳤다. 190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프라이를 제외한 페낭섬의 총인구는 13만 1,917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중국인이 7만 5,495명인데, 반해 유럽인은 1,056명이었다(Wright, 1908: 731). 대체로 페낭의 유럽인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를 넘지 않은 셈이다. 페낭의 유럽인은 주로 영국인 식민지 관리와 상인 및 그 가족으로 구성되며, 말라카나 싱가포르에 비해 아시아계와 섞여 사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중국인 밀집 지역에 있는 페낭의 쿠콩시는 본디 영국 상인이 살던 저택을 인수해 증개축한 것이다. 유럽인 무역업자와 상인들은 비록 수는 적었지만 식민 당국의 정책 결정을 주도했다.
유럽인은 초기부터 상인, 자본가, 부동산 부자로�� 장거리 국제무역을 비롯해 사탕수수와 코코넛 등 농원 개발에 주력했으며, 법무 대행이나 금융 등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했다. 특히 토지 무상불하의 혜택을 독차지한 덕에 부동산 부자가 많았다. 1806년 콘월리스 요새를 중심으로 반경 310미터의 토지와 주택 등 부동산을 보유가치로 환산했을 때 유럽인이 전체의 79.26퍼센트를 독점했다. 중국인이 16.42퍼센트로 뒤를 이었고, 나머지 아시아계가 약 4퍼센트를 소유했다(Hussin, 2007: 297). 하지만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조지타운의 토지 소유권은 급격하게 중국인으로 넘어갔다. 무역사무소와 상점이 밀집한 비치가에선 중국인 소유의 땅에 유럽인 건축가의 설계로 건물이 들어서고, 그고셍 유럽인이 세를 들어 사무소와 점포를 여는 방식이 보통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부를 축적한 중국인 부자들이 초기 유럽인이 불하받았던 땅을 사들인 것이다.
19세기 전반까지 유럽 상인들은 주석과 후추 등의 해협 산물 교역은 물론 인도와 중국산 상품의 무역에서 페낭의 중국인 상인들과 협력했다. 유럽 상인들에게는 중국 상인들의 교역망이 필요했고, 페낭의 중국 상인들에게는 유럽인 자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880년대 이전 페낭의 유럽 상인과 중국인 거상의 관계는 경쟁적이라기보다는 보완적이었다(Wong, 2007: 100).
초기 페낭의 가장 큰 종족 집단은 인도인이었다. 영국은 인도 출신 이주자를 클링Kling과 출리아chulia로 불렀다. 클링은 인도 출신을 가리키는 말레이어 ‘keling’에서 비롯했다. 조지타운의 ‘카피탄 클링 모스크’는 인도 출신 이주자의 이슬람 사원이다. 중국인 이주자의 지도자를 ‘카피탄 치나’라고 했듯이 인도인 이주자의 지도자인 ‘카피탄 클링’이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음을 방증한다. 출리아는 네덜란드가 무어인으로 분류했던 인도 남부 타밀 출신 무슬림을 가리키는 영국식 표현이다. 페낭 건설 초기 조자타운의 중심 도로 이름이 ‘출리아가‘인 것으로 미루���, 타밀계가 초기 이주자의 주류였음을 알려준다. 출리아인은 해운업과 무역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고리대금업에도 손댔다. 이들은 이른 시기부터 말라카와 커다에서 무역업 등을 했는데, 페낭이 건설되면서 대거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이후 인도 남동부 코로만델해안에서 페낭으로 직접 이주하는 출리아가 해마다 1,500~2,000명에 달했다. 무슬림인 출리아는 말레인과의 통혼에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고, 이들의 혼혈 후에는 말레이어와 영어 통역, 경찰, 행정보조, 상점의 점원 등의 일에 종사했다.
페낭의 출리아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 모하메드 메리칸 누르딘Mohameda Merican Noordin이다. ’메리칸Merican’은 코로만델해안 출신 인도인 무슬림을 가리키는 말로, 출리아와 같은 뜻이다. 1820년부터 페낭에서 무역업을 시작한 누르딘은 1830년대 페낭 최대 부자로 꼽혔다. 그는 프라이에 거대한 농원도 운영했다(Wong, 2007: 51).
페낭의 말레인은 대부분 커다와 수마트라에서 이주했다.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도시 외곽에 거주했다. 해상교역에 종사하는 부기스족은 계절풍을 따라 술라웨시 남단에서 말라카해협을 통과해 페낭에서 연간 두세 달씩 머물렀다. 페낭 점령 당시 커다의 말레이 무역상 나쿠다 커칠Nakhudah Kechil이 라이트와 함께 배에 타고 페낭에 상륙했다. 커칠은 밀릴의 나무를 베어내는 등 라이트에 협력했고, 그와 함께 이주한 말레이인은 토지를 무상으로 받았다. 커칠은 라이트가 페낭의 책임관으로 있던 시절 경호관으로 식민지 관료 노릇도 했다(Vaughan 1854: 3~4).
페낭의 말레이인은 조지타운 교외에서 농사만 지었던 것은 아니다. 페낭 건설 직후부터 페낭에서 거래를 한 무역상인의 60퍼센트가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동안의 말레이인이며, 페낭을 말라카해협 북부의 중계무역항으로 만든 주역이 말레이계였다(Hussin, 2007: 69~100). 이는 페낭 초기의 상업적 번영이 영국 식민지와 중국인 상인이 결합한 결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낭의 운명은 교역에 좌우됐다. 초기 교역의 숨통을 틔운 주체가 수마트라 동안과 말레이반도 서안에서 활동하던 전통적인 말라카해협의 상인 집단이었다. 말레이 상인들은 비록 교역 규모가 작고 선박도 소규모였지만, 페낭과 해협의 무역항을 이어줬다. 영국인 말레이인으로 규정한 부기족 상인들도 리아우와 슬랑오르에서 교역품을 싣고 페낭을 왕래했다. 말레이 상인의 주요 교역물품은 등나무 공예품, 식량(사고야자, 쌀), 금속(주석, 금) 등이었다. 수마트라 상인들은 단일 품목을 싣고 와 페낭에서 판 뒤 돌아갈 때 인도산 의류, 설탕, 소금, 담배 등을 사 갔다. …
중국인이 섞여 살아야 했던 조지타운이란 공간과 다인종 사회의 얼개는 이상과 같다. 우리의 주제인 화인사회로 들어가에 앞서 페낭의 무명용사와도 같은 두 부류의 인간 군상을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바로 죄수와 노예이다.
페낭도 ���주처럼 형이 확정된 죄수를 수용하는 수형식민지였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1800년 조지 리스George Leigh가 페낭부지사 자격으로 조지타운에 부임하면서 죄수의 수와 역할이 달라졌다. 세수 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재정난과 도시 환경 개선의 절박함이란 상충된 현안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묘책으로 죄수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조지 리스가 인도총독에게 더 많은 인도인 죄수를 요청하면서 그 수가 크게 늘었다. 1800년 130명이던 인도인 죄수는 1805년 772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페낭의 각종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강제 노역을 하는 죄수의 월급은 40센트에 불과했다. 1807년 조지타운에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마부의 일당이 20센트였다(Hussin, 2007: 240, 250). 죄수의 월급이 마부의 이틀 일당이었던 셈이다. 식민 당국은 죄수의 값싼 노동력으로 상인들과 마찰을 줄이려 했고, 상인들은 세금을 더 내지 않는다면 죄수를 들여오는 것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페낭의 죄수 유입은 식민지 관리와 상인이 타협한 결과였다.
죄수들은 다양한 노역에 동원됐다. 늪을 메우고, 다리와 하수구를 만들고, 뱃사공과 마부 노릇도 했다. 정부 청사와 결찰서, 병원, 감옥, 요새를 지은 주체는 인도인 죄수였다. 심지어 ‘페낭의 변호사’란 별명을 얻은 등나무 지팡이 ‘말라카 케인’과 같은 공예품도 감옥의 목공방에서 제작됐다 죄수의 수는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1856년 페낭의 인도인 죄수는 1,358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페낭의 인도인 인구 8,000~1만 명의 10퍼센트가 넘는 수치다.
이들은 다양한 노역에 동원되었기에 페낭 곳곳에 수감 시설이 마련됐다. 감옥이라기보다 숙소 주변에 울티라를 치는 정도였고, 그나마 울타리도 죄수를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호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용도였다. 죄수는 당국의 보증 아래 가정이나 관공서에서 하인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1867년 페낭 당국은 죄수를 경찰 보조원으로 고용하기까지 했다(Pieris, 2002). 죄를 지어 형을 살고 있는 이가 죄인을 포박하는 노역에 동원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곳이 해골정부 아래의 영국의 식민지 페낭이었다.
노예는 죄수와 달리 인구통계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정책적으로 노예 폐지론을 지지한 탓에, 실제로 노예는 있어도 없는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노예도 페낭에는 있었다. 초기 페낭 건설 과정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메운 것도 노예였다. 페낭의 말레이계 보호들은 전통적으로 노예를 부렸다. 1801년 페낭에서 노예주 723명이 1,200명의 노예를 부린 것으로 추산됐다. 노예주는 주로 말레이인이었지만, 유럽인과 중국인도 적지 않았다. 1805년 페낭의 노예는 1,400명에 달했다. 1807년에는 빚을 갚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 하는 부채노예가 조지타운에만 3,000명을 헤아렸다는 기록도 있다(Hussin, 2007: 188)
노예무역으로 팔려온 노예도 있었다. 남녀의 성비가 극도록 불균형했던 초기의 페낭에서 여성노예가 ��싼 값에 거래됐다. 1820년 수마트라 동부 해안 지역을 조사한 영국인 존 앤더슨은 보고서에서 여성 노예가 페낭의 안정된 인구정책에 필수적이라며 이런 글을 남겼다. “여성노예는 페낭의 여성 인구를 충당하는 데(매매춘 알선하는 데) 유리하다. 수마트라의 아사한Asahan에만 300명의 노예가 있고, 특히 이들 여성 노예는 해마다 ㅔ나와 말라카로 수출된다. 여성들은 그곳의 돈 많은 중국 상인의 아내로 정착해 안락하게 생활한다. 가족을 꾸린 중국 상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고 현지에 정착하게 된다”(Lubis, 2009: 152).
(65~73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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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s2 ·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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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의 마리아, 이브라힘 나스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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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의 마리아
- 이브라힘 나스랄라
- 후다 파크레딘 아랍어에서 영어로 옮김
이 땅의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나의 아들을 위한 것도, 당신의 아들을 위한 것도 아니나이다.
마리아가 마리아에게 말했다 . . .
오 내 고향의 누이여, 이 땅을 함께 밟은 누이여,
내 영혼의 누이여, 나의 기도여,
투명한 새벽의 누이여, 재앙과도 같은 내 죽음의 누이여,
죽음으로터 우리에게 남은 것과 삶으로부터 우리에게 남은 것 안에 있는 누이여.
이 땅의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저 하늘은 우리를 보지 못하나이까 우리 등에 얹힌 십자가가
쓰디쓴 피의 들판에 선 우리를
가리나이까?
이 땅의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평화는 우리의 적을 위한 것이나이다, 오 주여.
적의 비행기를 위한 것이나이다. 그것이 하강할 때의 죽음과
그것이 이륙할 때의 죽음을 위한 것이나이다,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춤을 추는 죽음을 위한 것이나이다.
아무것도 죽음을 만족시키지 못하나이다,
슬픔에 잠긴 우리의 피도, 아름다움에 잠긴 우리의 피도,
바다에 흐르는 우리의 피도, 들판에 흐르는 우리의 피도.
산을 타고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흙 속으로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모래밭에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해답 속에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질문 속에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북쪽에서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남쪽에서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평화 속에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전쟁 속에 우리의 피가 흐르나이다 . . .
그 무엇도 충분치 않나이다.
평화는 우리의 적을 위한 것이나이다, 오 주여,
먼 나라에서 온 적의 경비대를 위한 것이나이다
가까운 나라에서 온 적의 경비대를 위한 것이나이다.
평화는 우리의 적과 같이 우리를 포위하는
모든 형제를 위한 것이나이다
우리의 죽음 위로 지나가는 모든 형제를 위한 것이나이다
우리의 폐허 위로 적의 왕관을 세우기 위해.
이곳에는 두 발을 잃은 소녀 안에 사는 나비를 위한 자리가 없나이다,
사랑에 죽는 연인을 위한 자리가 없나이다, 비행기를 위한 자리가 없나이다,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살아야만 한다."
라고 쓰는 시인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시를 위한 자리가 없나이다.
바다는 새나 연인을 위한 것이 아니옵고,
하늘은 이국의 땅처럼 우리에게 등을 돌렸나이다.
이 땅의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평화는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나의 아이들이 아닌 다른 아이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평화는 우리 학살 이후의 침묵을 위한 것이나이다,
우리 학살 이전의 침묵
우리 학살 중의 침묵.
평화는 우리가 비명지르는 동안의 침묵을 위한 것이나이다,
우리가 침묵당하는 동안의 침묵을 위한 것이나이다.
평화는 이리 명령하는 목소리이나이다: 그들을 죽여라
그리고 침묵으로 우리를 죽이나이다.
이 땅의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폭군을 위한 것이나이다, 멍청한 지도자를 위한 것이나이다,
흙먼지와 같은 군대를 위한 것이나이다.
파괴를 위한 것이나이다,
젊은이와 늙은이를 죽이는 이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병사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지평선에 족쇄를 채우는 이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피 튀기는 자들, 순교자를 증오하는 자들,
목격자를 죽이는 자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평화는 이곳의 폭군과 저곳의 폭군을 위한 것이나이다,
여기, 또 여기서 짖는 끄나플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온 사방에 야유하는 무기들을 위한 것이나이다,
내가 당신을 보지 못하도록,
지금 나의 눈을 파내는 이를 위한 것이나이다, 오 주여.
모든 것을 가져가소서, 오 주여, 그리고 우리를 여기에 남기소서,
우리의 바다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 가까이에,
우리의 집 가까이에, 여기에.
우리는 사라지지 않겠나이다. 가까이 남겠나이다.
원하시는대로 우리를 데려가거나 남겨두소서,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원하시는대로 하소서. 가까이
당신 심장의 눈 가까이 우리가 남겠나이다.
혹은, 오 주여, 우리의 성벽이 되어주소서.
밤이 오면, 우리 죽음을 피하지 않겠나이다.
우리는, 오 주여, 당신 영혼의 문가에 남겠나이다:
성당, 모스크, 바다,
땅, 야자나무, 그리고 생
혹은 생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들 중 살아남을 작은 무언가.
혹은, 주여, 우리를 데려가시되 우리 영혼 조금을 여기에 남기소서,
우리의 일부를, 여기에, 우리 집 문턱에
집의 폐허 속에. 이 땅의 평화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그리워하고, 꿈꾸고, 사랑하는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기쁨이나 슬픔 속
어머니의 눈물과 같이 단순한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날개처럼 나는 평화,
날개처럼 내려앉는 평화,
노래와 같이 아름다운 평화,
웃음과 같이 부드러운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그들이 죽이기 이전의
우리 고양이와 같이 길들여지는 평화는 우리의 것이 아니나이다
고양이는 죽었기에, 여전히 배고프고,
신음하고, 가르랑거리고, 우리가 이동할 때
북쪽의 방에서
남쪽의 텐트로,
우리 고양이가 아직 우리를 따라오나이다.
이 땅의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어린 아이들 처럼 봄을 만끽하는 가자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천년 동안 깨어 할머니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아카를 위한 것도 아니나이다,
아름다운 자파를 위한 것도 아니나이다,
우리의 피에서 나온,
그 다음에는 우리의 살에서 나온,
그 다음에는 우리의 땅에서 나오고 우리의 끝없는 부활에서 나온
예수를 위한 것도 아니나이다.
이 땅의 평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당신의 거룩한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 아니나이다, 오 주여,
당신의 예언자와 우리의 꾸란과 승천하는 거룩한 예루살렘.
오 주여, 이 땅의 평화는 나의 것이 되고, 그런 후에야 당신의 것이 될 것이나이다.
내 영혼의 아이들이 하늘로 당신께 승천하였으니,
평화는 그들 손가락 사이를 파닥이며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었나이다.
나를 위한 것은 여기 아무것도 남지 않았나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신음하는 긴 하루와, 폐허가 된 문턱, 이름들이나이다
땅에 떨어진 비둘기의 깃털로 덮여버렸나이다.
그들 손가락 사이로 나비의 태양이 지고
지평선의 상처가 지나이다.
나는 나비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나이다.
그 작은 날개가 나의 영혼처럼 파닥이게 두었나이다
그들 손가락 사이를 파닥이고 여행하게 두었나이다
재와 이슬 사이로.
이만... 삼만명의 이름으로 노래하겠나이다,
우리의 땅에서 죽임을 당하고 승천한 삼만명의 이들을 위해.
이리 말하지 않겠나이다: 평화는 죽이고, 뿌리뽑고, 불태우는 자들의 것이다.
이 땅의 평화는 그들이 여기로 오기 전 우리의 것이었나이다,
이 땅의 평화는 그들 다음 우리의 것이 될 것이나이다.
평화는 우리의 것이나이다. 평화는 우리의 것이나이다.
*순교자 시인 레파트 알라레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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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Of Gaza
By Ibrahim Nasrallah
Translated from the Arabic by Huda Fakhreddine
Peace on earth is not for us, not for my son, not for yours, Mary said to Mary . . . O sister of my land, sister of my footsteps on this land, sister of my soul, my prayers, sister of dawn in its clarity, sister of my death in its calamity, here in what remains for us of death and what remains of life.
Peace on earth is not for us. Does the sky above not see us or do the crosses on our backs in the fields of bitter blood obscure us?
Peace on earth is not for us. It is for our enemies, O God, for their planes. It is for death as it descends and death as it ascends, for death as it speaks, lies, and dances. Nothing satisfies it, neither our blood in sorrow, nor our blood in beauty, neither our blood in the seas, nor our blood in the fields. Our blood in the mountains, our blood in the soil, our blood in the sands, our blood in the answer, our blood in the question, our blood in the north, our blood in the south, our blood in peace, our blood in war . . . None of it satisfies.
Peace is for our enemies, O God, for their guards in distant lands and their guards in nearby lands. Peace is for every brother who like an enemy besieges us and every brother who passes over our death to build his throne on our ruins. There is no place here for a butterfly in a girl who lost her feet, no place for a lover to be killed by love, no place for planes, no place for the poem exulting its poet who writes, “If I must die, you must live to tell my story.”* The sea is not for the bird or the beloved, and the sky has turned its back on us like a foreign land.
Peace on this earth is not for us. Peace is for others. It is for children other than mine. Peace is for silence after our massacres, before our massacres amid our massacres.
Peace is for silence when we scream and silence when we are silenced. Peace is the voice that orders: kill them and then kills us with silence.
Peace on earth is not for us. It is for tyrants, cock-headed leaders, and all the armies of dust. It is for destruction, for those who kill the young and old, for soldiers and those who shackle the horizon. It is for the ones who shed blood, hate the martyr, and kill the witnesses.
Peace is for a tyrant here and a tyrant there, for tails barking here and here, and for weapons hissing everywhere. It is for the one now gouging my eyes so I don’t see you, O God.
Take everything, O God, and keep us here, close to our sea and the graves of our loved ones and our homes, here. We will not disappear. Close we will remain. Take us or keep us if you wish, whenever or however you want. Close to your heart’s eye we will remain.
Or, O God, be our fortress. We will not escape our death, if night falls. We will remain, O God, at the doors of your soul: the church, the mosque, the sea, the soil, the palm trees, and life or what little of it survives.
Or, O God, take us but keep a little of our souls here, some of our remains, here, on the thresholds of our homes and their ruins. For peace on this earth is not for us.
The peace we long for, dream of, and love is not for us. The peace that is as simple as my mother’s tears in joy and sorrow is not for us. Peace that flies like a wing, lands like a wing, peace as beautiful as a song, as gentle as laughter, is not for us. Not for us is a peace as tame as our cat before they killed her. And since she died, she still hungers, moans, and purrs, and as we move from a room in the north to a tent in the south, our cat still follows behind.
Peace on this earth is not for us, not for Gaza when it rejoices in the spring like children, not for Akka, awake for a thousand years, guarding us like our grandmothers, not for the beautiful Jaffa, not for Jesus who rose from our blood, then from our flesh, then from our land and our endless resurrections. Peace on this earth is not for us, not for your holy Jerusalem, O God, ascending with your Prophet and our Quran.
O God, peace on this earth will be mine, mine then yours. Since the children of my soul ascended the sky to you, peace has become the butterflies fluttering between their fingers. Nothing remains for me here but their remains, a long day that moans, ruined thresholds, and names covered with feathers of fallen doves. Between their fingers the butterfly’s sun sets and the wound of the horizon.
I said nothing to the butterfly. I let the little wings flutter like my soul between their fingers and travel between ashes and dew. I will sing in the name of twenty . . . thirty thousand, killed and risen on this land of ours.
I will not say: peace is for those who kill, uproot, and burn. Peace on this earth was ours before them here, and peace on this earth will be ours after them. Peace is ours. Peace is ours.
*A line by martyred poet Refaat Alar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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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ng-magnet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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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빙 16 화 17 화 무료로 보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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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lamba의 메인 메뉴에는 양고기 포리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타밀족이 거주하는 스리랑카 북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요리로 고기를 양파, 청양고추, 라임과 함께 건조하여 튀겨냅니다.
인기 있는 디저트 중 하나는 이슬람교도들이 무빙 16 화 17 화 Eid를 축하하기 위해 준비한 코코넛과 야자나무 재거 커스터드인 와탈라팜(watalappam)입니다.
Meewella는 스리랑카 요리가 채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다양한 비건 옵션이 있어 요리가 눈에 띄고 전 세계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식습관은 우리에게 유행이 아닙니다.”라고 그녀는 덧붙입니다.
수세기 동안 스리랑카인들은 잭푸르트, 물 시금치, 참마와 같은 야생 및 유기농 재배 재료를 향신료 및 허브와 혼합하고 튀기고 카레를 만들어 독특한 맛이 나는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Kolamba의 메뉴는 코코넛 밀크로 조리한 빵나무 카레, 갈은 코코넛과 함께 튀긴 생 녹색 바나나와 같은 요리로 이러한 식물성 요리법에 경의를 표합니다.
스리랑카 요리에서는 코코넛의 흰 과육을 갈아서 무빙 16 화 17 화 짜서 풍부하고 크리미한 코코넛 밀크를 만들어 다양한 야채와 고기를 베이스로 한 카레를 걸쭉하게 만듭니다.
신선한 코코넛 밀크는 허브와 쌀로 만든 콜라 켄다라는 아침 스무디 같은 음료에도 첨가됩니다. 새해나 직장 첫날과 같은 축하 행사 동안 스리랑카인들은 쌀과 함께 코코넛 밀크를 요리하여 키리바스(kiribath)라는 크림 같은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집에서 브런치를 주최할 때 키리바스 같은 요리에 대한 식욕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가 어린 시절에 먹던 맛에 반했습니다."라고 렉싱턴에 거주하는 스리랑카계 미국인 셰프 Sam Fore는 말합니다. 켄터키.
“결국 수요가 너무 많아져서 동네 바 뒤에 텐트를 무빙 16 화 17 화 치고 제가 요리하는 음식을 팔기 시작했어요.”
2년 만에 Fore의 팝업은 스리랑카 요소를 통합한 간단한 레시피를 부각시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제 Fore는 Lexington에 첫 번째 레스토랑을 열 준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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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ext-kr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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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멍과 힐링의 시간" 제주도만의 감성을 지닌 '게스트하우스' 여행기
동탄 자영업자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인데요. 일단 제주 갔다가 또 시간되면 동탄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제주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진짜 좋을 때 왔어요. 친구가 제가 입은 옷이랑 제주의 야자나무 같은 걸 보니까 태국에 온 느낌이라고 하네요. 점심 메뉴도 똠양꿍이거든요. 오토바이 렌트샵에 도착했는데요. 차 대신 오토바이를 렌트하기로 했어요. 취향에 맞게 한 대 골라서 출발해 보겠습니다. ‘ㅁㅇㅅ(모이소)’ 소품샵에 도착했는데요. 저는 감귤 모자를 골랐는데요. 귤글라스는 3,000원 밖에 안 하네요. 모자와 선글라스를 샀습니다. 태국 음식점 ‘타무라’에 도착했습니다. 동네 분위기가 태국 빠이 같아요. 아직 제주 날씨가 꽤 추워요. 바람이 너무 많이 부네요. 똠양꿈에 쏨땀, 커무양을 주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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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airportjeju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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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제주 야자나무 감귤나무 심어놓고 제주도라고 속이는 유사성행위 업소가 많습니다 이건 보호가 안됩니다
꼭 제주도 확인하시고 공항에서 호텔로 연계되어야 제주도 입니다 전 지난 2021년 제주왔다가 자꾸 인천으로 깨어서 머리를 벽에 박고 제주도 제방에 들어와 잤습니다 그걸 비행 환각이라고 하더라구요
지금도 호텔 가고싶은데 자비 결제 능력이 안됩니다 그래서 저도 비행기 타고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하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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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lovlun119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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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 과테말라 과테말라시티 국장 올리브가지 새 케찰 1821 9월 15일 해방 스페인어 / 그레나다 세인트조지스 중앙 노란별 수도 세인트조지스 노란별 6개는 6개 주 노란 불꽃모양은 육두구열매 / 니카라과 마나과 국장 / 도마니카 로조 보라색새 황제아마존앵무 / 도미니카공화국 산토도밍고 국장 히스파니올라섬 서쪽이 아이티 동쪽이 도미니카공화국 / 멕시코 멕시코시티 뱀을 문 독수리 / 바베이도스 브리지타운 삼지창 섬나라 / 바하마 나소 버뮤다 삼각지대 / 벨리즈 벨모판 바다와 산호초 카리브해의 보석 영국령 온두라스로 불렸으나 독립 국장 도끼든 사람 크리켓배트 든 사람 / 세인트루시아 캐스트리스 겹친 삼각형 2개 피통산 봉우리 2개 / 세안트빈센트그레나딘 킹스타운 초록색 마름모 3개 앤틸리스제도의 보석과 세인트빈센트섬 / 세인트키츠네비스 바스테르 흰별 2개 자유와 희망 세금도피처 /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국장 야자나무 프리기아 모자 무기 전쟁용 나팔 끊어진 쇠사슬 단결이 함을 만든다는 프랑스어 히스퍼니올라섬 서쪽 ; 동쪽은 도미니카공화국 / 앤티가바부다 세인트존스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국장 화산 5개와 자유를 뜻하는 프리기아 모자 1821 9월 15일 해방 문구 / 온두라스 테구시갈파 파란별 5개 / 자메이카 킹스턴 성안드레아 십자가 x자모양 / 코스타리카 산호세 국장 / 쿠바 아바나 흰색별 / 트리니다드토바고 포트오브스페인 / 파나마 파나마시티 파란별 빨간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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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info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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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판매를 위해서 화분에 이식~~~에서)
식물명    워싱턴야자 (워싱토니아 필리펠라) 학 명    Washingtonia filifera 영문명    Washington palm, California Fan Palm 종려과 원산지    아메리카대륙 다년생 - Perennial 기타    상록수 - Evergreen plants 남부수종 - Southern species 번식법    씨앗 최저온도    -11.1℃ 발아온도    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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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k1130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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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의 어느 야자나무 가로수길에 건물의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야자나무 #담벼락 #벽화#담벼락벽화#그림#(Jeju에서) https://www.instagram.com/p/CDpW8tulCv1/?igshid=1tb7qabrzuc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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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sh-blo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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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명 : 워싱턴야자 (워싱토니아 필리펠라) 학 명 : Washingtonia filifera 영문명 : Washington palm, California Fan Palm 종려과 다년생 - Perennial 기타 : 상록수 - evergreen plants 번식법 : 씨앗 생육최저온도 : -8℃ 발아최적온도 : 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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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o-blc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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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ing now! Talk it over and share!!! Contact me for more information. 💀IDEO TATTOO☠️이데오타투💀 📞010-9241-8717 ✉️[email protected] 💻http://www.fb.com/IdeoArtTattoo 💬Kakao ID: ideoblc http://www.instagram.com/artofideo/ #ideoarttattoo #이데오아트타투 #이데오아트문신 #tattooist #jeju #jejutattoo #제주 #제주타투 #제주문신 #타투이스트 #타투 #문신 #tattoo #coconut #coconuttree #coconuttreetattoo #코코넛 #코코넛나무 #야자나무 #야자나무타투 (à Ideo art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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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stella-nail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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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텔라트랜드✌🏻] #오늘네일뭐하지? #네온사인네일 #트렌드네일 #형광네일 #블랙 위에 #네온컬러 로 그린 #야자나무🏝 #무지개🌈 가 #기가막히다잉😏 #neonsignnails #trendnails #magazinenails #unistella #daily_unistella #daily_uninails #NOTD💅🏻 ✔유니스텔라 내의 모든 이미지를 사용하실때 사전 동의, 출처 꼭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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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isba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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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Vocab list - Relaxing/Positivity/Vacation
to wish / to hope - 바라다
happiness - 행복
sunshine -  햇빛
friend - 친구
love - 사랑
rainbow -  무지개
shooting star - 유성
lucky - 운이 좋은
to laugh/smile - 웃다
hug - 포옹
flower - 꽃
raindrop - 빗방울
wave -  파도
ocean - 바다
island - 섬
palm tree - 야자나무
coconut - 코코넛 열매
lake - 호수
to swim - 수영하다
park - 공원
to read - 읽다
music - 음악
angel - 천사
to look up to s.o./ to admire s.o. - 존경하다
pet -  애완동물
to relax - 휴식을 취하다
vacation -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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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supchung-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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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야자 #워싱턴야자수 #야자나무 #washingtonpalm #washingtonia #안산식물원 #ansanbotanicgarden #2017 (Ansan Botanical Garden 안산식물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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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lilistory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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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나무 . Palm tree . #훌리리 #Hulili #훌리리빈 #HuliliBean #design_private_tour #Coffee #커피 #원두 #여행 #Travel #하와이 #hawaii #夏威夷 #ハワイ #ฮาวาย #커뮤니티 #Community #kona #코나 #빅아일랜드 #Bigisland #여행 #Travel #하와이여행 #Palm #PalmTree #야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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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hgomi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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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CRBU #퍼시픽리조트 #PCR #가족여행 #FAMILYTOUR #휴양관광 #야자나무? #코코넛나무? 아침부터 조식뷔페 10접시는 먹은듯!! 모기에게 않물리겠다고 "#모기기피제"를 얼굴에 뿌리는 딸래미만 빼면 모두 정상적인 오전!!(Pacific Cebu Resort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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