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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howtomeetinfo-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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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 인생은 춤을 추듯이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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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 인생은 춤을 추듯이 살아가라
문학, 미술, 음악을 포함해서 모든 예술은 시대에 따라 각기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조가 있다. 그리고 예술사조는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세상에 처음 나온 20세기는 본격적으로 현대로 분류되는데 이는 역사적 사건에 따른 분류가 아닌, 사고방식의 전환에 따른 분류이다. 본질의 상실과 소멸이라는 특징을 가진 현대적 사고방식은 『그리스인 조르바』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직접 언급했듯이 베르그송, 니체 등의 현대철학자들의 사상은 그의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니체의 위버멘쉬는 조르바의 모습과 흡사하다. 순간을 즐기는 태도, 삶을 살아가는 적극적인 방식은 니체가 강조한 위버멘쉬의 의지와 광기에 비견할 수 있다. 주인공인 ‘나’는 이러한 조르바의 모습에 점차 동화되는데 그 변화 과정 동안 책을 읽는 독자들도 함께 가치관을 전환시켜 나간다.
    1. 현대적 사고방식
그렇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비롯한 현대문학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 즉 고대, 중세, 근대와 다른 현대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서양의 사상사를 깊이 있게 고찰해봐야 한다.
인간의 본격적인 ‘사고’는 ���라톤의 고대 그리스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 개념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 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현상계는 허구이며 현상계를 구성하는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어떤 것인지 경험할 수도 없는 이데아 세계는 세계의 핵심이자 중심이고, 곧 본질이다. 이러한 비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은 중세의 기독교 철학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중세의 이데아 세계는 하느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중세에는 하느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인간들의 세상은 보잘 것 없는 세계로 치부되었다. 근대에 이르러도 본질에 대한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비록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신적인 세계에 머물던 중심점을 인간 이성의 영역으로 끌어왔지만 여전히 현실, 현상에 대한 중요성은 간과되었다. 고대의 이데아, 중세의 하느님은 데카르트에 의해 인간 이성이라는 요소로 이름만 바뀐 것일 뿐, 여전히 비가시적인 요소에 대한 믿음은 확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인, 중세인, 근대인들은 실제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산다는 게 감옥살이지.” 카라괴즈 극장에서 개똥철학 나부랭이를 주워들은 듯한 텁석부리가 말했다.
“암, 그것도 종신형이고말고, 빌어먹을.”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빛줄기가 카페의 지저분한 창문을 뚫고 손이며 콧잔등이며 이마를 비추었다. (p.8.)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1장의 ‘나’는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의 술집에서 뱃사람들의 넋두리를 듣는다. 여전히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의욕, 삶에 대한 즐거움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은 이데아라는 무게에 의하여, 중세인은 하느님이라는 권능에 의하여, 근대인은 인간 이성이라는 의무에 의하여 짓눌려 살아간다. 상대적으로 중요시되지 않은 현실, 현상, 가시계에서의 삶은 그들에게 있어 즐기는 것이 아닌, 더 나은 세계에서 더 나은 상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고통의 삶일 뿐이었다.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서양의 시대정신은 변화했지만 공통적으로 지금 살고 있는 세계보다 더 중요한 세계, 즉 ‘본질’이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이러한 공통점은 그 시대정신을 사고방식으로 차용한 이들에게 삶의 즐거움을 앗아갔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사고 속에서 본질에 대한 믿음은 점차 소멸해간다. 두 번의 세계적인 전쟁은 비가시계보다 가시계에 방점을 찍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옆에서 생명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신에 대한 믿음,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 즉 본질에 대한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바로 지금 살아 있는 이 세계에서 계속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된 것이다. 또한 헤겔을 정점으로 서양의 관념 철학이 하락세를 보이자 이를 대체할 새로운 철학들이 등장한다. 특히 비트���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인간의 언어활동은 인간이 세계를 묘사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그림 이론을 제시하면서, 본질에 대한 인간의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즉 본질보다는 지금 살고 있는 현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조르바의 대사에서 잘 나타난다. “누가 던져 줬는지 그게 무슨 상관 있어요? 맛은 있느냐? 살점은 좀 붙어 있느냐, 궁금한 건 이것 뿐입니다. 나머지는…….” 즉 지금 얻은 뼈다귀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살점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현상)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던져 줬는지(본질)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하이데거, 사르트르, 니체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그대로 수용한다. 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본질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거부하고 존재 자체의 근본 원리에 집중함으로써 가시계에 무게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은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대 때부터 인간을 속박했던 본질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난 것이다.
인간은 비로소 본질에서 벗어나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2000년 동안이나 인간을 지탱시키고 인간 문명을 발전시킨 본질의 상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허무주의를 낳게 했다. 그 동안 인간이라는 유약한 존재가 의지하고 믿었던 본질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진 이후 인간에게는 일종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셈이다. 미약하게나마 삶의 이유를 본질에서 찾았던 사람들은 본질의 소멸로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내세의 삶은 없고 생자필멸(生者必滅), 즉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이라는 진리의 도출은 사람들에게 삶의 허무함을 더욱 절감하게 했다. 현대인들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게 된 것이다.
    2. 니체와 ‘그리스’인 조르바
현대인들이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또 다른 현대인 조르바는 허무주의를 완전히 극복한 모습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를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허무를 극복했습니다!”라며 자신만만하게 허무주의를 제압한 조르바는 자신의 삶이 방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조르바는 삶의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여행하시오?”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하느님의 섭리만 믿고 가시오?”
“크레타로 가는 길입니다. 왜 묻습니까?”
“날 데려가시겠소?”
나는 주의 깊게 그를 뜯어보았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다 눈동자가 밝고 예리했다.
“왜요? 함께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서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왜요! 왜요!” 못마땅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왜요’가 없���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p.17.)
  1장에서 자신과 함께 여행하라고 설득하는 조르바에게 ‘나’는 계속 이유를 묻는다. 그러나 조르바는 이러한 ‘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르바에게 있어서 어떤 일을 진행하는 데에 이유를 찾는 것은 온전하게 그 일을 즐기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조르바는 “왜요?”하고 묻는 ‘나’에게 “그냥”이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그는 모든 일을 아무 이유 없이 하는 사람인 것이다. 조르바는 일뿐만 아니라 사랑, 식사, 여행을 모두 맹목적으로 즐기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삶 자체를 살아가는 데에 이유를 찾지 않는다. 이는 분명 필사적으로 삶의 이유를 본질에서 찾았던 고대인, 중세인, 근대인들과 다르며, 본질의 상실로 허무주의라는 구렁텅이에 빠진 현대인들과 다르다. 조르바는 삶 자체를 온전히 즐기기 때문에 활력 넘치고 생기 있는, 이른바 생산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조르바가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말이다. 조르바는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라고 말하며 인간은 자유와 의미가 같다고 말한다. 진정 자유로운 인간인 조르바는 여행을 하면서 보따리 속에 음식도, 실생활의 필수품도 전혀 챙기고 다니지 않는다. 오직 노래를 부르고 삶을 즐기게 하는 악기인 산투르를 가지고 다닐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필연성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을 생계에 목매게 만드는 삶의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먹을 것 걱정 없이 산투르 하나만을 들고 다니는 조르바의 모습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진정한 자유를 영위하는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조르바는 산투르를 칠 때에는 도취되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이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 산투르를 칠 때에는 산투르에만 집중하듯이 인간은 삶 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조르바와 같은 삶의 양식은 고대 그리스 귀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한나 아렌트도 행복한 삶을 가장 잘 즐긴 사람들로 고대 그리스 귀족들을 뽑은 바, 조르바가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이 같은 사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제목인 ‘그리스인 조르바’의 원제는 ‘Vios ke Politeia tu Aleksi Zorba’이다. 의역하면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위’인데 여기서 ‘삶(Vios)’와 ‘행위(Politeia)’는 모두 그리스 귀족들이 누리던 지극히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의 양식을 나타낸다. 고대 그리스 귀족들이 가졌던 삶에 대한 의지, 삶을 즐겁게 살아가면서 얻는 생산적인 활력을 조르바는 현대를 살아가면서도 유지한다. 이쯤 되어서 우리는 영국의 문예 비평가 콜린 윌슨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콜린 윌슨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러시아인이었다면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지만, 만약에 카잔차키스가 러시아인이었다면 ���욱 안타깝게도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지명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스인, 특히 크레타 섬 주민들이 내재한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내면화해 작품으로 풀어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능력은 그가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스 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 외에도 유명한 한 사람이 더 있다.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는 인간에게 각종 의무와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이 살아가는 대지 위에서 삶을 즐기라고 말한다. 니체는 위버멘쉬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위버멘쉬는 보통 초인으로 오역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을 초월한 어떤 존재라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존재이다. 위버멘쉬는 무력함,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는 언제나 창조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며 생에 대한 환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p.22.)
  ‘나’가 조르바를 묘사하는 이 구절은 니체의 위버멘쉬를 떠올리게 한다. 대지 위의 삶에 도취되는 위버멘쉬. 생명력과 활력을 나타내는 탯줄이라는 상징은 조르바가 위버멘쉬와 닮았음을 암시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본인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니체를 언급한 것처럼, 그의 작품과 니체의 철학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위버멘쉬와 같이 삶을 즐기는 조르바에게 당대의 도덕과 종교는 ‘나’의 표현을 빌리면 “녹슨 고물 총과 다름없다.” ‘나’가 육욕을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지적했지만 조르바는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며 종교와 도덕을 삶과 동떨어진 허구로 치부한다. 즉 여태까지 본질이라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쓸모없은 것으로 전락하고, 대신 삶 자체, 관능 자체가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란 것을 조르바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존의 종교와 도덕을 가소롭게 여기는 모습은 니체의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니체는 『도덕계보학』을 통해 조르바와 같이 당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종교와 도덕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가한다.
니체의 위버멘쉬와 가장 닮은 모습을 나타내는 조르바의 삶을 가히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조르바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버릇 들게 된 것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고 말한다. 조르바는 일상 속의 사물 하나하나를 모두 낯설게 바라보며 이는 문학 속에서의 ‘낯설게 하기’처럼 예술성을 창출해낸다. 조르바에게는 배를 타고 가며 바라보는 돌고래, 일상적으로 마시는 커피,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빵, 버터, 꿀, 느긋하게 즐기는 담배가 모두 예술을 완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저는 제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살고 있군요.”(p.53.)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야 힘이 펄펄 ��아납니다.” (p.56.)
  이렇듯 조르바는 현재, 순간을 즐기며 살아간다. 조르바의 삶의 양식은 『그리스인 조르바』 내에서 춤으로 형상화된다. 조르바는 작품 내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데 이는 조르바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춤을 추는 순간에는 누구나 춤 자체에 집중한다. 리듬에 몸을 맡기고 아무 생각 없이 몸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인생은 춤추듯이 살아가야 하며,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처럼 그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나’의 고백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나’는 조르바를 ‘무식한 일꾼’, ‘원숭이 껍질을 처음으로 벗어 던진 원시인’, ‘위대한 철학자’로 묘사하지만 무엇보다도 조르바에 가장 어울리는 비유는 ‘어린아이’일 것이다. 순간을 신기해하고 도취되며 정열적으로 살아가는 조르바는 ‘나’의 표현대로 “어린아이처럼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쉬를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나는 원래 중심을 못 잡는 놈입니다.” 조르바의 이 한 마디는 그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속박했던 종교, 도덕과 같은 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인임을 암시한다. 조르바야말로 현대적 사고방식인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관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하는 인간인 것이다.
    3. ‘나’의 변증법적 성장 과정
주인공인 ‘나’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작품 속에서 ‘나’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나’의 본명은 미지수이다. 주인공을 지칭하는 ‘나’는 일인칭 화자를 나타내는 단어임과 동시에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미지수 ‘X’의 의미를 가진다. ‘나’의 행적이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삶과 연관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자전적인 화제로 그 의미를 제한하기에는 미지수인 ‘나’라는 화자의 비중이 적지 않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작가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인물은 당연히 조르바지만, 그 가치관을 체화하는 인물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조르바의 가치관을 보고 전달하는 역할만을 담당하지 않는다. ‘나’ 또한 작품 속에서 조르바의 가치관을 체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미지수인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조르바의 가치관을 내면화시키는 독자와 같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조르바의 가치관을 체득하고 내면화하며 그로써 성장하는 존재이다.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나’는 붓다의 사상에 심취해 있는, 연약한 책벌레에 불과한 인물이다. 조르바는 그를 두고 “배고파 본 적도, 죽여 본 적도, 훔쳐 본 적도, 간음한 적도 없다.”며 조롱한다. 삶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삶의 추악한 면까지 모두 경험해봐야 하는데 조르바에 눈에 정작 ‘나’는 책만 읽고 글만 쓴 샌님과 다름없는 것이다. 친구인 스타브리다키 또한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삶에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며 설교만 하는 ‘나’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는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고 서술한다. 이는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데,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과 작품 초반의 ‘나’의 모습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강단철학, 경제정책 등 전문적인 담론이 펼쳐지는 영역은 현대에 이르러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지고 있다. 탁상공론에 머물고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의미한 발화. 이 발화의 주체는 현대인이면서 동시에 ‘나’이다. ‘나’는 현대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하면서 ‘나’라는 단어를 ‘독자’로 바꾸어 버린다.
  내 마음에 크레타의 시골 풍경은 잘 다듬은 산문, 단정한 어순, 절도 있는 표현, 군더더기 수식을 피한 강력하고도 절제된 산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산문은 필요한 모든 것을 극히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법이다. 여기엔 경박한 데도, 작위적인 구석도 없다. 표현해야 할 것은 위엄 있게 표현하지만 엄격한 행간에서는 의외의 감성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p.49.)
  조르바를 만나고 크레타 섬에 도착한 ‘나’는 크레타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묘사적 특징을 살펴보면 현실 세계를 텍스트적으로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조르바를 만나 그의 가치관을 엿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그 결과 삶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것이다. 만약 ‘나’가 삶을 즐기는 조르바였다면 크레타 섬에 대한 묘사는 극단적일만큼 감각적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아직 세상 경험이 없고 나약하며 삶을 즐길 줄도 모르는 ‘나’는 조르바와 함께 생활하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자기모순을 모르고 살아가는 즉자존재(卽自存在)였던 ‘나’가 조르바를 만나 대자존재(對自存在)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삶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조르바를 보며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한탄한다. 더 나아가 ‘나’는 육신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현대적 사고방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면서 ‘나’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나’는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기뻤다.”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깨달았다.”와 같이 육체의 쾌락을 음미하는 모습으로 점차 변모한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삶이 점차 생기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머릿속으로는 계속 조르바의 삶을 닮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실천에 옮기지는 못한다.
  소리를 지르면 기분이 다소 후련해질 것 같았으나 그러기가 쑥스러웠다. (p.133.)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소리쳤다.(조르바 말이 옳아! 옳고말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어.) (p.140)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p.150.)
  이처럼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나’는 얼마 동안 자신의 모순을 발견한 상태에 머문다.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나’가 적극적으로 즉자대자존재(卽自對自存在)로 성장하게 되는 계기는 탄�� 함몰 사건이다. 크레타 섬에서 사업으로 운영하던 탄광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나’와 조르바는 죽기 직전에 탈출에 성공한다. ‘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나아간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삶의 즐거움을 체감하게 된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갱도 도괴 사건 이래로 과부는 내 속으로 들어와 피로 흐르는 것 같았다.” 남몰래 연모하던 크레타 섬의 과부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조르바의 말에 시종일관 “그럴 수가 없다.”라고 망설이던 ‘나’는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 태도를 전환시킨다. 결국 과부와 하룻밤을 보내며 삶의 관능적 쾌락을 열정적으로 좇기 시작한 나는 그 때를 기점으로 대지 위에서의 인생을 만끽하기 시작한다. ‘나’ 또한 디오니소스적인 쾌락을 즐기는 조르바의 생산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시원한 녹색 바닷물 위에 뜬 것 같은 육체적 행복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p.344.)
어째서 우리의 발, 손, 배가 이처럼 완벽하게 세계와 조화하는 것인가? (p.344.)
  특히 세계와 ‘배’를 조화시키는 부분은 ‘나’가 인류를 예속해오던 플라톤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인간의 성향을 머리, 가슴, 배로 나누어 욕정에 가득찬 배를 가장 가치가 적은 부분이라고 꼬집어 비판했다. 욕정에 사로잡히면 완벽한 이성적인 사고가 불능에 빠져 최고의 가치인 선의 이데아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중세, 근대에까지 이어졌는데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관능적 쾌락을 긍정하는 태도가 발현되었다. 관능적 쾌락을 긍정하면서 인류는 감각의 생산성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고 ‘나’는 조르바처럼 이를 체화시켜 위와 같은 발화를 내뱉게 된 것이다. 이 부분에 이르러 ‘나’는 ‘나’를 연약하게 만들었던 붓다의 사상에서 벗어났다.
탄광 함몰 사건을 경험한 ‘나’는 더 이상 사업적 손실에 대해 고심하지 않는다. ‘나’는 조르바와 함께 케이블 고가선 개통식 때 일부러 사고를 내 무사안일을 기원해준 부정한 수도승들을 약 올리기도 한다. 일부러 사고를 내는 조르바의 계획이 조르바의 돈이 아닌 자신의 돈으로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르바와 함께 수도승들을 골려준 것에 대해 쾌감을 느끼며 개통식을 위해 마련한 음식을 음미하는 여유까지 나타낸다. 기존의 종교와 도덕적 관습에서 벗어난 나는 작품 후반부에 드디어 삶의 필연성이라는 족쇄마저 벗어던질 수 있게 된다. 조르바와 같은 진정한 자유인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삶을 즐기는 자유를 얻은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청한다. ‘나’와 조르바가 춤을 함께 추는 장면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절정이자 ‘나’의 변화의 정점을 찍는 순간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절대적인 자유를 위해 극복해야 할 마지막 시련이 남아 있다. 바로 자신의 차라투스트라였던 조르바라는 구속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나’는 조르바를 닮은 자유로운 존재로 발전하지만 ‘자유로운 존재’의 명사 앞에는 ‘조르바를 닮은’이라는 수식어가 여전히 붙어 있다. 조르바는 ‘나’에게 ‘조르바를 닮은’이라는 수식어까지 상실하도록 권한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p.429.)
  조르바는 자신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나’에게 위와 같이 말한다. ‘나’가 절대적인 자유를 얻고 진정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조르바라는 굴레마저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태껏 ‘나’는 조르바의 가치관을 내면화해서 발전했지만 그 발전을 완성시키는 것은 조르바의 가치관을 ‘나’의 가치관으로 녹여내는 일이다. 조르바 또한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와의 작별을 고한다. 오르탕스와 과부의 죽음, 조르바와 닮은 친구인 스타브리다키와 수도승 자하리아의 죽음 또한 조르바와 이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생을 즐기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에 도취되는 자세를 ‘나’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에게 영향을 준 이들과 정신적인 고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조르바를 비롯해 여러 인물들과 이별하면서 독자적인 가치관을 견고하게 쌓아나가게 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모두 읽고 그 가치관을 내면화할 수 있는 독자들은 조르바의 말을 되뇔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를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허무를 극복했습니다!”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인한 허무주의의 극복. 현대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것은 조르바의 삶처럼 현재를 즐기고 순간을 즐기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가치를 위해 온 육체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여전히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아직 먼 미래를 바라보며 괴로움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조르바는 묻는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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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santur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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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상처받고, 사람에 감동받고 - 젊은 친구들이 너무 웃으면서 잘 응대해준다고 식품관에서 이것저것 사다주고가신 고객님. 그렇게 매일 일주일에 3-4번은 들러주신다. 우리옷이 그냥 느낌이 좋으시단다. 배고프니까 먹고 하라고.. 넘나 감동. 한사코 이것저것 챙겨주려해도 절대 받지 않으시고 조용히 매장에 그냥 들러주시고 입어보신 후 구매해주시고 담소도 절대 길지 않으며 기약도 없으시다. 이런 고객님껜 이상하게 권하지도 못하겠다. 급해지는 마음도 느긋해지며 상업적인 말로 구매유도를 하고 싶지도 않다. 안사도 되니 천천히 입어보시고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괜시리 다녀가면 더 챙겨드리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 - 사람을 사랑하며 배려하실 줄 아는 분 좋은 향기가 매장에서 한참을 맴돈다. #목동현대백화점 #산투르 #santur #daily #일상 #글귀 #글스타그램 #데일리(목동 현대백화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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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mingeom · 11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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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santur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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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넘나돼지처럼나온것ㅠ , 2. 늘 웃으면서 화이팅하자. 감정적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지만 우리끼린 에너지 아껴야줴. 짜증을 내어서 무얼하나. 인생 호접지몽. 긍정에너지파워✨ , 3. 모든 걸 접���두고 이민을 간다는 다른 브랜드 대표언니 이야기를 들었다. 멋있었고 쿨했다. 제 2의 꿈을 꾸며 사는 것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갑자기 지오디 길 돋음 소름😫 내가 가는 이 길은...??????? 오늘부러 산투르 방향성 잡기 프로젝트 일단 밥부터 흡입하ㅈ ㅏ.🍴🍴😋 , , #20140429 #현대백화점미아점 #산투르 #일상 #데일리 #daily #dailylook #selfie #셀카 #셀스타그램(Hyundai Department Stor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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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santur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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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더 예쁘게 나와줘서 만족~ 오빠가 칭찬 많이해서 돌고래 될 것 같으다😅 벽면 어택 몇 번 당하고 도사님 될 지경 😂😂😂 - 현대 압구정 본점에서 17일 내일부터 2주간 산투르 팝업스토어를 진행합니다✨ 산투르의 자체일러스트 자체제작 3D시안을 거쳐 나온 신상룩들과 다양한 사이즈의 모칠라백도 만나볼 수 있다요. - Ps. 지각하면 ㄷㅈ각 산투르 식구들 지각은 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노 네버 에버 네버 #현대백화점본점 #압구정현대백화점 #산투르 #디자이너브랜드 #santur #dailylook #데일리룩 #휴양지룩 #리조트룩 #블라우스 #원피스 #산투룩 #돌고래랑풍덩풍덩룩 #돌고래물뿜는룩(압구정 현대백화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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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santur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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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칠라 바로 쏠드아웃😆 , #산투르 #데일리룩 #모칠라백 #스트라이프 #현대백화점판교점 #디자이너브랜드 #팝업스토어 #일상 #데일리 #daily #ootd #세일(현대백화점 판교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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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santur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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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했던만큼 좋은 결과가😊 모두 감사드려요. #산투르 #santur #힘을내요슈퍼파월 #일상 #데일리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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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santur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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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병 스따뜨.😁 #산투르 #santur #디자이너브랜드 #옷스타그램 #style #fashion #daily #dailylook #ootd #데일리 #데일리룩 #맞팔 #일상 #셀카 #selfie #셀스타그램 #instasiz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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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santur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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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 슈즈 네일 :-) #nail #nailart #네일아트 #젤네일 #네일 #데일리 #daily #멋스타그램 #산투르 #santur #셀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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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santur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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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쟈뎅드슈에뜨 #산투르 #santur #dailylook #daily #데일리룩 #셀카 #self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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