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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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ontayseek-blog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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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회는 현재의 북한 교회가 그 대표적 본보기로 성령께서 정해 주신 것
바벨론 신학의 바벨론 교회(개신교와 천주교 통틀어)와의 차별화(구별)를 위해서는 "메시야 교회"라는 명칭이 바람직합니다. "메시아 교회"의 눈에 띄는 특징(대외적으로)은 사도행전 4:32("믿는 무리가...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이어야. 초대교회  당시 사도(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들 외에 "집사" 직분을 두었던 것은 교회의 이러한 구제 활동을 위한 필요성에서 나왔던 것.
메시야 교회는 일종의 새로운 "교파, 교단"처럼 할 필요는 없고 이 "마지막 때" 사명감을 절감하는 형제들의 자율/自律에 달린 것입니다. 장감침/長監侵 소속의 어느 개교회든 신앙 양심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메시야 교회" 규모는 개척교회 또는 "집교회"(고전 16:19/골 4:15/빌레몬 1:2) 수준. 그러한 "메시야 교회"로서 명칭을 붙일 경우 행정 구역을 따라 정하면 좋고 간판을 붙일 필요는 없고, 교회로서 모이는 인원수는 가정 집에서 모일 정도의 숫자면 되고 가령 12명이 되면 반으로 나누어 6명씩으로 해서 장소��� 나누어 모여 다시 시작하는 등. 이렇게 갈라져서 모이다보면 예컨대 서울이면 "강남 압구정 1교회", "강남 압구정 2교회" 등.
이름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교회 간 교류와 식별에 도움이 되겠지요 21세기 교회 활동은 모름지기 현재 핍박 받는 교회(예컨대 북한교회)를 기준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목사 안수 받은 사람을 배척할 필요는 없고 또 반대로 고집할 것도 없고(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구별이 전연 무의미함이 북한교회로써 충분히 입증되었으니까) 뜻 있는 형제는 누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로서 모일" 수 있는 것. 적그리스도로의 때로 접어든 때이니까 핍박 받아 죽임을 당하는(계 13:15) 순간을 매양 변함 없이 각오하는 것이 기본 자세.
소위 "대환난울 피하는 휴거" 따위 망상은 버려야. 주님 재림 현장에서의 "휴거(공중으로 들어올려짐)" 밖에는 성경에 없으니까. '환난을 면한다'는 생각은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것과 똑같은 자아중심. 그렇다고 억지로 교회당 건물을 버리고 집교회 형식으로 전환한다고 해서 그것이 최상일 수는 없을 듯. 성령으로 계시는 구원자(예수)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합석하시어(마 18:20) 교회 주인이시고 친히 지도, 인도하시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교회 운영"의 핵심. 사탄은 자기에게 넘어 온(눅 4:6) 아담의 통치권 행사이므로(아담이 사탄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따르는 결과로서의 범죄였으니까) 주님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는 이는 불변이고 따라서 생살여탈권도 있어(12:4) 때문에 "사망의 권세"(히 1:4)를 쥔 자이기도. 고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교회 핍박, 탄압이 가능합니다.
"혼자서라도 믿으면 되지 굳이 교회로서 모일 필요가 있느냐" 하는 생각은 위험천만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님.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모이기를 힘쓰자>"(히 10:24,2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 2:45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모이기를 힘쓰���> 집에서 떡을 떼며(성찬예식)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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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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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김환식 장로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뜻밖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예배에 관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주신 이 감동적인 스토리는 예수님이 그녀의 감춰진 죄와 그 내면의 수치심을 드러내시자 그녀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던 예배의 문제에 관해 여쭈는 것으로 전개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0-26) 예수님의 이 대답은 그의 공생애를 통한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하시려는 여정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고, 사역과 관련된 중요한 요점들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예배 신학’을 이처럼 잘 설명해 주신 것도 없을 것이다. 우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특별한 선언은 성경적 예배의 모든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특정 행위와 삶의 방식 모두를 강조하고 있는데 행위로서의 예배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즉 교회 예배, 가정 예배, 그리고 개인 예배 형태로 나타난다. ‘교회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주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특별한 은혜의 기쁨을 누리는 예배이다. 이런 종류의 예배는 때때로 ‘공동체 예배’(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함께 참여한다)로 불린다. 또 ‘모임’, ‘집합’ 그리고 ‘회중’ 예배라고도 불린다. 이 예배의 중요성은 신구약 전반에 걸쳐 모두 강조된다. 시편 110편 2절과 히브리서 10장 25절은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와 “함께 모여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교회 예배’�� 일컫고 있다. ‘가정 예배’는 아버지 또는 가족의 연장자들이 인도하는 것으로,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세우고 가족 모든 구성원들에게 삶 속에서의 예배를 고취시켜 교회 예배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성경은 가정 예배의 중요성을 여러 곳을 통해 분명히 하고 있다(출 12:3; 신 6:6-8; 수 24:15). ‘개인 예배’(때로 “은밀한 예배” 혹은 “사적인 예배”라고도 함)도 성경 전반에 걸쳐, 특히 예수님과 다니엘, 다윗, 베드로 등이 예시로 제시한 예배의 형태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6절을 통해 제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전달하셨고, 마가복음 1장 35절과 누가복음 5장 16절에서도 그 예를 보이셨다. 다윗은 시편 5장 3절에서, 다니엘은 다니엘 6장 10절에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 9절에서 이것을 언급했다. 크리스천 삶의 핵심인 예배는 신구약을 통틀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요나서 1장 9절에서 요나 선지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정한 날에만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의 목적을 특징짓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 역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31).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삶의 전 영역에서의 예배인 것이다. 두 번째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성품과 진리를 향해 교회와 가정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한 장소에 묶여있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을 따라 예배해야만 한다(요 1:14; 14:6).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이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해야만 하는 그 자체로 “진리”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요 1:14), 하나님 아버지 성품의 구현(요 14:6), 하나님의 본성과 계획의 완전한 계시(요 1:18; 히 1:1-3)이시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따라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죄인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할 때, 다음 네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모든 예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알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분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영으로 예배해야 하고, 또 그분이 영원하신 실재이시기에 예배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분의 계시에 따라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끝) 20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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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happyrhino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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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부활절 의 은혜가 모든 인친님들께 임하길 기원드립니다 ~~ 🙏⛪ #Easter #theResurrection #resurrection #JesusChrist #Jesus #Messiah #church #belief #salvation #grace #blessing #miracle #christianity #christian #그리스도의부활 #부활 #예수그리스도 #예수 #메시야 #교회 #신앙 #구원 #은혜 #축복 #기적 #기독교 #크리스챤(Busan, South Kore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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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ontayseek-blog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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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적/靈的 항우/項羽의 역발산 기개세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차등을 두고 차별하실 리 없습니다. 똑같이 사랑하시니까 똑같이 대우하십니다. 모세 시대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실 때에도 많이 거두었다고 해서 그 많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고 적게 거두었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것이 그 명백한 증거입니다. 혹자는 부자로 태어나고 혹자는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부터가 이 세상 "삶"이 정상이 아닌 동물적 육체의 비정상이라는 증거입니다. 동물적 육체가 아닌 "신령한, 영광의 몸"이라면 다 똑같이 평균, 평등할 것인데 자연계 물질의 육체가 되다보니 그런 차등이 생긴 것.
이런 죽음의 인간고가 주관하는 현재의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는 것 자체가(자기가 가진 것을 선한 일에 쓰라고 맡기셨다는 원래의 하나님 뜻을 양심상으로 느낄 수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여 마치 축복 받은 것인 양 여기는 자기 기만으로써) 하나님 앞에 죄가 되어 천국 입국 불가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를 보아도 북한과 같이 교회 핍박이 극심한 데가 있고 미국 등 구미 제국과 같이 자유로운 데가 있는데, 이상과 같이 모든 사람을 평등으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준할 때 핍박 받는 것이 정상이고 편안한 가운데 있는 것이 도리어 비정상이라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는 증거가 됨이 명백한 것입니다. 소위 "자유세계" 에 있는 이들은 이 핍박의 고난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며 더욱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하늘로부터의 신호인데도 이를 무시하고 안일 가운데 지내는 것부터가 하나님 앞에 "불법을 행함"(마 7:23)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고전 12:26ㅡ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의 이치에서 분명코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 몸"이 아니라는 증거만 될 뿐이니까.
이 모���는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므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신다고 해서 그래서 그 고통을 경감해 주신다고 해서 절대로 될 일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 친히 당신께서 세우신 법질서를 무시하심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오직 하실 수 있는 일은, "한 몸"됨의 생명의 법칙에서 죄인된 자로서의 고통의 형벌의 십자가를 친히 함께 져 주시는 것만이 유일한지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지(본을 보이신 대로 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9: 23) 즉 "구원 불가"라는 선언이십니다. 바벨론 신학을 통해 마귀는 이 엄숙하신 명령을 "행함으로 얻으려는 구원"이라고 속여 일괄 처리함으로써 완전히 무시해버렸으니 이 악랄함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 범죄 후 지금까지 인간(아담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은 아담에게 하극상/下剋上하여 아담을 시해/弑害한 사탄과의 전쟁(창 3:15) 양상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육체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나 전쟁은 그 승리가 '사즉생 생즉사(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에 있음은 불변입니다(요 12:25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 이를 항상 마음에 아로새기고 있는 자 실로 복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필패/必敗, 영멸/永滅이기 때문. 자아중심이 그 뿌리라는 것도 공통입니다. 하늘 아래 세상 만물이라 하는 것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짝의 법칙에서의 <상대성의 동시성> 즉 생명의 법칙으로 철두철미 운용되어 나가니까.
이 세상은 이미 죄와 죽음으로서의 엎질러진 물 바로 그것입니다. 절대로 다시 쓸어 담을 수 없는 영구 폐기물입니다. 메시야 우리 구원자(예수) 주님의 다시 세상 오시기까지는 절대로 정상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그 대망/待望의 순간이 오고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죽음을 마냥 회피하려는 "두려워하는 자"(계 21:8)에게는 "21세기 표적과 기사"로서의 하나님 증명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강력 경고합니다. "침노하여 천귝을 빼앗아 차지하는"(마 11:12), "밀치고 들어가는, 강력히 압박해 들어가는, "침입해 들어가는"(눅 16:16) 자에게만 해당되는,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이시기 때문. 그저 안일하게 "믿기만 하면 영생"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세뇌된 자는 철저히 배제될 것이니까.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이미> 구원 얻었으니까" 그 넘치는 기쁨으로, 확신 충만한 가운데 치솟는 은혜의 기력/氣力으로, 당연히 나타낼 수밖에 없는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임을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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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ontayseek-blog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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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차례로 80억 인류가 멸절해 가는 참극의 심판만이 당장 앞에 가로놓여 있음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한국이 승승장구하고 세계 중심이 된다는 말이 많은데 모든 "예언"은 성령의 이름으로 나지 않는 한 악령이나 귀신들로 인한 것이라 적대적이요 속임수일 뿐 선하고 의로운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과거사가 다 들어맞았더라도 그것은 맨마지막의 거짓말을 위한 위장술/僞裝術의 들러리일 뿐.
이 시기가 "마지막 때" 즉 세상 종말이란 것은 20세기 이후를 지목한 다니엘서로써 이미 확인된 것이고, "한 때, 두 때, 반 때"와 맞물려 나타난 3운법칙과 짝의 법칙과의 상호 검증으로 충분히 확증된 것입니다. 더 이상 증거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늘의 전쟁"(계 12:7)이 끝난 것도 1908년 6월 30일 시베리아 퉁구스카 사건으로 확인되었으니까. 오직 닥칠 일은 "마지막 아담"의 치세/治世의 시작. 이 주님의 재림 앞서 반드시 이루어질 "살아 남을 사람 숫자가 정금 보석보다 희귀해질 것"(사 13:12)이라 하신 대로의 예고된 하나님 심판의 성취뿐.
이 모든 것 전에 있을 대대적인 말씀 전파를 위한 짧은 유예 기간이 있을 것을,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계 7:3),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말하기릏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14:6 ,7)로 알리셨으니, 오늘 우리가 처한 바로 이 시점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오로지 말씀 전파와 교회 육성(충분하고 간절한 기도가 반드시 동반되는)에만 전념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와 사명 의식을 물타기 작전으로 희석시키려고 사탄은 앞서의 지적과 같은 방해 공작을 일삼는 것이니, 그 간악하게 부추기는 <세상 잠>에 휩쓸려 절대 한 순간이라도 한가히 조는 일이 없이 정신 똑바로 차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반도 교회가 가장 선봉에 서야 할 것을 아는 악령들의 이같은 훼방에 넘어가지 말아야. 주님의 다시 오심이 바로 눈 앞이든 아니든 복음 전파는 우리의 변함 없는 마땅한 책무이지만, 말씀을 받는 자의 인식 차이(지금의 세상이 끝난다는 것과 그냥 계속된다는 것과의)는 너무나 막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 이 점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세상 더군다나 기톡교 문화권이라는 구미 제국의 소돔 고모라 난장판(동성 성행위 합법화)이 극에 달해 있어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 앞에 이미 선/線을 넘었습니다. 사태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메시야 우리 주/主(나의 주인, 나를 소유하신 분이시니 고로 나는 주님만을 섬겨 그 뜻만을 따름이 생명이라 이는 주님 친히 나의 소유/所有가 되어 주시어 나를 "섬기시고"-눅 22:27 나만 위하시는 위치에 영원히 계심을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단 번에 증명해 주셨으니���)님의 사랑과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영원한 생명 자체로 역사/役事하시는지라 이 지식만으로도 더 없는 풍성이요 만족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제 곧 지나가니까 환영/幻影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면 깊이 영적 기쁨과 즐거움은 이같이 누려도 육체로는 고난 고통이 여전하니 인간 본연의 "영광의 몸"(빌 3:21 ), "신령한 몸"(고전 15:44)이 아니라 전연 어울리지 않는 동물적 육체의 비정상 상태에 아직도 갇혀 있기 때문인대 이제 그 끝이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아 온 대로 단순히 동물적 생명을 연이어 가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목적 의식이 투철한 삶의 영위가 영/靈으로서의 이지/理智적 생명인 것. 즉 삶의 낙/樂의 극대화를 꾀함이니 이것은 동물 같은 기계적 존재로서의 자아중심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각자의 일상 자세가 상대방 중심일 때에만 즉 머리는 몸 위하고 몸은 머리 위하는 <한 몸>으로서의 이치로만 작동 가능합니다. 물론 동물의 생태/生態도 육체로는 '머리'와 "몸"의 구조이지만 기계적 작용일 뿐 이성적 판단의 자기 의지/意志는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이성적 판단이라 함은, '상대방의 동시성'인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말합니다. 즉 "나는 너만 위할 터이니 너도 나만 위함으로써 이웃을 위하고 네 자신을 스스로 위하지 말라"는 머리로서의 지시, 명령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이시니까 넉넉히 각자 <개개인만을> 위하심과 동시 <모두를 한 사람 같이> 위하실 수 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당시 화폐 단위)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다"(마10:29)고 하심과 같습니다.
이 "언약" 관계는 친히 우리 피조물의 창조주로서 머리 역할을 자임/自任하신 하나님의 계명, 율법(법칙)으로 가동/稼動됨이니, 가장 이상향적인 삶의 유일무이의 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이 "언약/言約"(호 6:7)으로 좌우되어 유지 보전됩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각 지체/肢體, 각 부분에 해당되기에 저마다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은 그를 위하시니까 하나님과 머리 몸 관계를 형성해 "언약(약속)"으로 맺어지면 다른 사람도 동일한 관계로 하나님과 일치하게 맺어져 있는 고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 모든 사람(이와 같은 언약 관계에 들어가 있는)의 위함을 받게 되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하면 단 1이지만 그런 이웃이 1억이면 100,000,000 갑절이나 내가 위해지는 것이므로 1억의 나 자신이 새로 생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언약 관계에 들어감을 뜻함이라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요 "믿음"이요 "구원"이요 "자기 부인"이요 "십자가 지는" 것이요 "모든 것을 버림"(눅 14:33) 곧 자기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 위함, 이웃 위함입니다. 이런 철두철미한 공동체 정신이기 때문에 초대/初代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공용/共用)하고 제 재물(財物)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지금은 그 전통과 본을 말짱 버렸으니 소위 "자유세계"에서는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어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사이비 교회". 그러나 북한을 비롯해 지금도 핍박 받는 지역에서는 "재물"이라 할 것도 없이 모두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로 평준화가 되어 있어 그나마 "교회"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살 만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요 12:25)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생명이라고는 지푸라기 하나도 구경할 것이 없는데도(자연계 동물이 아닌 인간은 영광의 신령한 몸으로서 죽음 없고 고통 고난 없이 영원한 부유와 풍족을 누려야만 "사는 것", "삶"이라 할 수 있어) 이 세상 신/神으로 군림해 있는 원수 악령 사탄(고유명사가 아닌 "적대자/敵對者"란 의미의 별칭)이 아담 범죄 결과인 우리의 현재의 이 동물적 육체를 본연의 인간 모습인 양 속여 아담의 "죽음"을 "영적 죽음"이라는 거짓말로 합리화시킴으로써 거의 2천년간 속여 왔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영적 죽음"이라는 '바벨론 신학'의 용어 자체가 없었습니다. 단지 "이 새상에서의 헛된 삶"이라고만 인식시켜 그 위험성을 경고했던 것인데 지금은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미신에 빠져 자멸/自滅의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오늘날은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시대. 단 천사의 월등한 제압력으로써 이제까지의 악령들로 인한 온갖 거짓을 분쇄해 원래의 순수한 복음이 밝혀졌다는 의미이지, 보다 강력하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그런 뜻은 아니니, 이전과 같이 복음 전파자의 흘리는 피와 땀으로 말씀이 전달됨에는 변함이 없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고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 밝혀졌은즉 이 실상대로 전달해야 하고 여전히 바벨론 신학 그대로의 거짓말을 그냥 덮어두는 경우 그에 따른 엄중한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사사로운 것을 더 사랑헀다는 자아중심이라는 판정을 면할 수 없기에. 자아중심이 모든 죄의 뿌리이니까.
바벨론 신학은 전세계적인 것이므로 눈치 볼 것 전혀 없습니다. 최초로 이를 쳐 깨뜨리고 뚫고 나가는 은혜의 특임/特任이 한국교회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알고 순종��나가면 됩니다. 한반도 교회에 이 은혜를 베푸신 것은 거의 90년간(1935-2024)의 핍박 속에서 연단된 믿음과 기도의 결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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