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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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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반도의 술탄국 페락은 페낭 화인의 엘도라도가 되기 전까만 해도 동남아의 일반적인 특성과 전통적인 말레이 정치구조를 지닌 곳이었다. 말레이어로 ‘페락perak’은 은silver를 뜻한다. 예로부터 주석의 산지였던 것이다. 적도권에 해당하는 페락은 여느 동남아와 마찬가지로 열대와 밀림이란 환경 요인과 인력이 가장 필요하고 가치 있는 생산자원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Trocki, 2008: 336). 페락의 도읍 역시 해안과 강의 하구에 있었다는 점에서 말레이 세계의 전형적인 양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페락의 지배 구도는 술탄이 직할하는 남부의 페락강 하류 지역, 귀족 수장raja이 관할하는 디스트릭트district, 그리고 지역 토호의 관할지인 향촌mukim으로 구성됐다. 전통적으로 말레이왕국은 영역이 아니라 신민을 중심으로 한 까닭에 국경은 분명하지 않았고, 인구가 희박한 강의 상류는 사실상 방치됐다. 술탄은 ‘왕국의 통일성을 상징’하고 실질적으로는 귀족 수장들이 ‘주요 강의 계곡과 그곳의 신민을 통치’했다(Gullick, 1965: 2~3).
주석 러시가 페락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다. 라룻 지역은 페락의 북부 라룻강 유역으로 페락 술탄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페락의 주석 무역을 독점했던 네덜란드는 라룻 지역을 밀수업자와 도박꾼들이 득실대는 골치 아픈 곳으로 간주했다(Andaya, 1975: 234). 페낭 건설 초기부터 주석은 주요 수입품이었다. 페락과 슬랑오르에서 생산된 주석이 네덜란드의 독점 무역보다 값을 더 쳐주는 페낭으로 밀수출됐던 것이다. 그런 라룻 지역에 페낭의 화인 자본과 화인 노동자가 몰려들었다. 라룻 지역의 주석 러시는 페낭 화인사회에는 경제적 엘도라도였지만, 페락의 술탄국에는 왕국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은 정치적 사건이었다. 페��� 화인사회의 라룻 주석 러시는 1860년대 후반 페락의 술탄 승계 분쟁과 맞물리면서 내전으로 치달았고, 이는 1874년 팡코르조약으로 마무리되면서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 시발점이 됐다.
라룻의 주석 러시는 페낭의 복방 비밀결사 건덕당과 라룻의 객가 비밀결사 해산회의 동맹이 주도했음을 앞서 살폈다. 페낭 건덕당과 라룻 해산회의 동맹은 광산 개발 초기부터 이어졌고, 비밀결사의 영수들은 라룻의 지역 수장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주석 개발 붐이 일면서 페락의 술탄은 라룻의 주석광을 발견한 체 롱 자파르를 라룻 지역을 총괄하는 먼트리Mentri로 임명했다. 먼트리는 라룻 지역의 징세권과 징세청부 전매권 판매, 토지 불하 등의 전권을 가졌다. 페락의 오지가 주석 붐으로 흥성하면서 변방인 라룻의 먼트리도 정치적 위상이 덩달아 커졌다. 1862년 롱 자파르의 아들 체 응아 이브라힘Che Noah Ibrahim이 먼트리를 승계했다. 이브라힘도 해산회를 지지했다.
라룻의 먼트리가 대를 이어 해산회의 편을 드는 것을 의흥회는 못마땅해했다. 이권이 걸렸기 때문이다. 주석광산 주도권을 둘러싸고 라룻 화인사회를 양분한 비밀결사 해산회와 의흥회가 유혈 분쟁을 벌였다. 이를 ‘라룻전쟁Larut War’이라고 부른다. 1861년과 1865년의 2차례 라룻전쟁에서 라룻의 먼트리와 페낭 건덕당의 지원을 받은 청켕퀴의 해산회가 승리했다. 의흥회는 근거지였던 클리안 바루의 주석광산에서 밀려났다. 두 차례 분쟁은 말레이반도에서 ’중국인과의 교역‘을 둘러싼 화인사회의 내전이란 성격이 다분했다. 하지만 1872년~73년의 3차 라룻전쟁은 양상이 달랐다. 영국의 식민지 전략, 페락 술탄 승계의 권력 투쟁, 싱가포르 화인 거상의 이해 등이 복잡하게 맞물렸던 것이다.
1872년 2월 페낭에서 비밀결사의 행동대원과 무기를 들여와 전력을 보강한 의흥회는 3월에 해산회를 공격해 클리안 바루를 되찾고 해산회의 근거지인 클리안 파우마저 수중에 넣었다. 해산회가 패하자 급해진 것은 자금 지원을 해준 페낭의 복방 거상과 건덕당이었다. 자칫 거책 투자가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 페낭 건덕당이 전명에 나서 역공을 펼쳤다. 페낭 쿠콩시는 1872년 10월 정크선으로 무장 행동대원 100명을 비롯해 200정의 머스켓 소총과 총검, 8정의 경포輕砲, 400정의 창을 라룻으로 보냈다. 건덕당 지도부도 비밀리에 머스켓 소총 2,000정, 화약 1만 파운드, 무장 행동대원 1,000명을 보내 해산회를 도왔다(Blythe, 1969: 178).
페낭의 건덕당은 해산회에 병역을 지원하는 한편, 페낭의 영국 식민 당국을 움직였다. 1872년 12월 건덕당 영수 ���톈테익은 자신 소유의 증기선 ‘페어 말라카’호가 교역 물품을 운송하던 중 ��룻강 하구 해안을 봉쇄하고 있던 의흥회 소속 정크선의 공격으로 불에 탔다며 식민 당국에 고발했다. 쿠톈테익은 공격을 당한 증기선이 영국 선적이고 선장도 영국인이라며, 영국의 개입을 촉구한 것이다. 이는 의흥회의 라룻강 하루 봉쇄를 깨뜨리기 위한 건덕당의 술수였다(Wong, 2007: 89). 결국 영국 식민 당국은 건덕당-해산회 동맹을 편들어 라룻강에 영국 해군을 파견했고, 의흥회의 하구 봉쇄가 풀리면서 1873년 후반 전세가 역전됐다.
하지만 해산회와 의흥회의 분쟁 막후에는 페락의 술탄 승계를 둘러싼 왕족과 지역 수장들의 이해가 얽혀 있었다. 1871년 페락의 24대 술탄이 사망하면서 술탄 승계 분쟁이 벌어졌다. 관계를 따른다면 태자Raja Munda가 승계해야 마땅하지만, 주석 러시로 영향력이 커진 라룻의 먼트리인 이브라힘이 지지한 이스마일이 술탄에 올랐다. 이에 타자 압둘라가 승계권을 주장하면서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화인 방파 갈등과 말레이 권력투쟁이 결합된 3차 라룻전쟁에는 또 다른 세력이 가세했다. 페락의 주석광산 개발에서 소외됐던 싱가포르 화인 거상들이 끼어든 것이다. 1870년대 양철과 통조림 산업이 붐을 이루면서 미국에서 주석 수요가 폭증했다. 깡통을 만들기 위해 미국은 영국 웨일즈 산 주석의 75퍼센트를 수입해갈 정도였다. 1872년 국제 주석 가격은 헌드레드웨이트(50.802킬로그램) 당 7파운드 스털링으로 1823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Cowan, 1981: 141). 이런 상황에서 수세에 몰린 태자 압둘라는 싱가포르의 거상 탄킴칭Tan Kim Ching陳金鐘에게 접근했다.[*탄킴칭은(1829~1892)은 중국 복건 출신으로 탄톡셍 병원을 설립한 싱가포르의 카피탄 치나 탄톡셍Tan Tock Seng陳篤生(1798~1850)의 아들이며, 19세 후반 싱가포르의 아편팜의 실력자였다. 탄킴칭은 비밀결사의 영수로 알려졌다.] 압둘라는 자신을 페락 술탄에 오르게 해주면, 탄킴칭에게 페락 남부의 징세청부권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페낭이 독점한 주석 개발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긴 탄킴칭은 압둘라와 손잡았다. 탄킴칭은 압둘라에게 술탄이 되면 페락에 정책 자문을 하는 영국인 주재관Resident을 받아들이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런던과 해협식민지 정부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속셈이었다.
탄킴칭에 이어 또 다른 변수가 추가됐다. 1873년 11월 강경 제국주의자인 앤드루 클라크Andrew Clarke가 해협식민지 2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클라크는 싱가포르로 향하는 선상에서 영국 정부로부터 말레이 반도의 내정에 간섭해도 좋다는 공식 지침을 받은 상태였다. 1786년 페낭의 ���상한 점거 때부터 영국 정부가 견지해온 내정불간섭 정책이 바뀐 것이다. 이로써 ‘페낭 건덕당-라룻 해산회-페락 술탄 이스마일-라룻 먼트리 이브라힘의 동맹’ 대 ‘페락 태자 압둘라-라룻 의흥회-싱가포르 거상 탄킴칭의 동맹’이란 대결 구도로 재편된 라룻 전쟁의 결정권을 영국 해협식민지 총독이 쥐게 됐다.
클라크 총독은 부임하자마자 라룻전쟁에 개입했다. 분쟁 종식을 페락 술탄 승계 및 영국인 주재관제와 연계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클라크 총독은 의흥회 영수 친아얌을 설득하기 위해 윌리엄 피커링을 페낭으로 파견하고, 프랭크 스웨트넘을 라룻으로 보내 해산회 영수 청켕퀴를 맡도록 했다. 나중에 초대 화인보호관이 된 피커링과 해협식민지 총독이 된 스웨트넘은 영국의 말라야 지배의 분기점이 된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클라크 총독은 라룻전쟁 당사자들을 팡코르섬으로 불러들였다. 팡코르섬으로 향하는 배에서 중국 광동어와 복건어에 능통한 피커링은 친아얌, 청켕퀴와 대화를 나누면서 페락 주석광산의 화인들이 오랜 분쟁에 지쳤고, 영국의 개입을 반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Jackson, 1965: 21~23). 이전에는 싸우고 나면 해산회와 의흥회가 서로 중재하고 휴전을 했지만, 이번에는 술탄 승계 문제가 얽히면서 화인사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했던 것이다.
마침내 1874년 1월 6일 태자 압둘라를 페락 술탄으로 인정하고, 페락은 영국의 주재관을 받아들이며, 라룻 지역은 해산회와 의흥회가 분할해 개발하기로 최종 합의가 이뤄졌다. 1월 20일 영국과 페락의 술탄 압둘라가 서명했다. 이것이 1786년 페낭 점령 이래 페낭, 싱가포르, 말라카를 거점 지배해온 영국이 말레이반도로 식민지배를 확장하는 신호탄이 된 팡코르조약Pangkor Treaty이다. 팡코르조약은 유럽 열강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확보 경쟁에 나서는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세계사의 분기점에 페낭의 화인사회와 주석 러시가 관련되었다는 사실과 페낭 화인의 자본과 노동의 이동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이었다는 점은 기억할 만 하다.
청켕퀴와 친아얌은 라룻 지역을 분할해 개발하기로 별도의 약정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술탄 이스마일은 폐위되고, 응아 이브라힘도 라룻의 먼트리 직위를 잃었다. 1861년부터 12년 넘게 이어진 라룻전쟁은 끝났고, 영국 주재관이 상주하게 되면서 페락은 영국의 ‘보호령’이 됐다. 라룻의 주석광산은 클리안 파우가 타이핑으로, 클리안 바루가 카문팅으로 각각 개명되어 조업이 재개됐다. 청켕퀴와 친아얌은 1877년 타이핑과 카문팅의 카피탄 치나에 각각 임명됐다. 변방이었던 타이핑은 페락의 수도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팡코르조약 이후 페낭과 페락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락이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페낭의 화인사회의 영향력은 한층 커졌다. 페락의 영국 주재관 제도도 20세기 초반까지는 페낭의 해골정부와 다를 바 없었다. 페락에서 영국의 이익은 페낭의 화인 거상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과 직결됐다. 페락 주석광산 개발의 자본과 노동과 교역에 페낭 화인사회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 페낭의 주석 교역은 1870년에서 1910년까지 싱가포르를 압도했다. 이는 페낭의 거상들이 해협 북부의 ‘주석 벨트’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싱가포르의 주석 수입량이 페낭에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수출량에서는 근접한 것은 최대 주석 생산지인 페락과 푸켓에서 생산된 주석을 페낭이 수입해 싱가포르로 재수출했기 때문이다.
1880년대 후반 주석광산 개발의 중심은 페락 남부 페락강의 킨타계곡으로 옮겨졌다. 1911년 킨타 지역의 중국인 인구는 13만 3,436명으로 라룻 지역(2만 9,247명)의 4배로 늘어났다. 20여 년 만에 킨타 지역도 상류 오지의 밀림에서 상전벽해된 것이다. 이러한 제2차 주석 러시의 주체도 페낭 화인사회였다. 비록 라룻의 1차 주석 러시와 달리 페낭 화인의 직접 이주는 줄었고, 화인 비밀결사의 영향력이 예전과 달랐지만, 페낭 화인사회의 기여와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Khoo, 2009a,: 60). 라룻 지역의 타이핑과 카문틴이 그러했듯, 킨타 지역의 이포IPoh, 고펑Gopeng, 캄파르Kampar 등 신흥 광산도시를 건설한 토카이 대부분이 페낭 출신이거나 페낭 화인사회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20세기 초 페락의 경제 성장세는 페낭을 앞질렀다.[*1907~8년 해협식민지 정부의 재정 적자로 페낭 당국은 페락을 포함한 말레이국연방에서 60만 달러를 차입했다.] 하지만 페락의 화인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페낭 화인사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페락 화인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광동 출신과 객가 집단도 페낭 화인권의 공통어인 ‘페낭 혹키엔’으로 소통했다. 페락의 화인 부호들은 페낭에 저택을 지었다. 페낭 태생의 페라나칸은 더 큰 기회를 찾아 페락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후술하겠지만, 19세기 후반 이들은 스스로 ‘페낭 디아스포라Penang Diaspora’라고 했다. 페낭을 고향으로 여기는 페낭 화인의 사회가 말레이반도에 형성됐다는 의미다. 이렇게 주석의 시대에 페낭 화인사회는 말레이 세계로 한걸음 더 들어가세 됐다.
(213~220쪽)
페낭 화인사회가 푸켓의 주석광산 개발에 나선 것은 페락의 라룻 지역 진출보다 앞섰다. 16세기 이래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주석 벨트’에 속하는 푸켓의 주석 교역에 관여했다.. 태국에서 가장 큰 섬으로 말라카해협 북부 초입에 위치한 푸켓은 정크 실론Junk Ceylon, 우중 살랑Ujung Sayang, 살랑 포인트Salang Point, 탈랑Thalang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주석 산지이자 교역항이었다.
프랜시스 라이트의 친구이자 페낭 건설 주역인 영국인 제임스 스콧이 1773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푸켓의 주석은 태국인이 채굴하고 중국인이 제련했다. 중국인 제련업자는 태국인이 캔 주석 원광을 제련해 중국인 상인에게 넘기는 교역업자이자, 푸켓의 수장에게 세금을 대납하는 징세청부업자였던 셈이다. 영국이 페낭을 점거하지 2년 전인 1784년 푸켓의 인구는 1만 2,000명을 헤아렸지만, 1809~10년 버마가 태국 남부를 침략하면서 푸켓섬 전역이 파괴되고 수장과 주민 모두 인근 내륙 팡응아로 피난했다. 영국과 태국 사이에 버니조약Burney Treaty이 체결된 1826년에야 태국 항구와 해협식민지의 직접 교역이 가능해졌다. 이를 계기로 페낭의 화인들이 태국 남부의 주석광산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푸켓의 재건이 시작됐다. 1855년 징세와 아편 및 도박장을 제외한 모든 상업 부문의 국가 독점을 해제한 영국-태국의 보링조약Bowring Treaty으로 자유교역이 가능해지면서 페낭 화인사회의 푸켓 진출은 한층 확대됐다.
1820년대 태국 남부 주석광산 개발의 주역은 라농Ranong의 건설자 커수챵許泗漳과 푸켓의 건설자 탄가익탐陳玉淡이었다. 커수챵이 라농을 근거로 한 태국 왕실의 조신朝臣이자 사업가였다면, 탄가익탐은 푸켓의 통카Tongkah에서 주석광산을 개척한 사업가이자 화인사회의 지도자였다. 두 인물은 활동 지역과 성취 내용이 달랐지만, 모두 복건 출신이며 반청 비밀결사인 소도회小刀會 활동을 하다 망명한 전력을 공유했다(Songprasert, 1986: Khoo S. N. 2009).[*소도회는 1850년대 결성된 정치적 결사로 복건, 광동 일대의 천지회와 마찬가지로 반청운동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태평천국과 의화단에도 소도회가 언급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인은 ‘페낭 화인권’의 관점에서 페낭 화인사회의 일원이었다.
커수챵은 1816년 고향을 떠나 수마트라 서안의 영국 식민지 번쿨루Benkulu(Bencoolen)에서 사업 기반을 다졌다. 1824년 영국-네덜란드의 런던조약으로 영국이 번쿨루와 네덜란드의 말라카를 맞바꾸면서 커수챵은 페낭으로 옮겼고, 다시 태국 남부의 라농으로 진출했다. 커수챵의 라농 진출을 페낭 카피탄 치나였던 코라이환의 딸이 주선했음은 앞서 보았다. 1830년대 밀림에 가까웠던 라농은 커수챵의 진출 이후 크게 바뀌었다. 주석광산을 열고 주석제련소를 운영하는 한편, 페낭과 주석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한 그는 1842년 라농의 주석광산 개발과 교역 및 징세에 관한 독점권을 확보했다. 사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행정가의 능력을 높이 산 태국 왕실은 커수챵으르 1854년 라농의 초대 부윤府尹에 임명했다.[*19세기 태국의 지방 행정 체제와 구역 및 직제에 관해서는 혼선이 있다. 영어로는 라농의 행정구역을 ‘province’라 하고, 그 수장을 ’governor’로 표기한다. 라농의 경우 몇 개의 디스트릭트 혹은 현縣을 관할하는 지방 행정구역으로, 현재의 도道나 성省보다는 작고, 중국 청대나 조선 후기의 부府와 가깝다고 여겨진다. 이의 수장을 지방 행정관이란 의미로 태수太守로 옮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본디 중국 고대 군현제 시대 군郡은 군사적 성격이 강할 뿐더�� 태수가 사법과 재정 권한까지 장악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방콕 왕실에서 일종의 면허를 얻어 지방의 징세를 담당하던 것이 주 업무였던 19세기 태국 지방관의 번역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이 글에서는 부윤府尹으로 옮긴다.] 1862년에 그의 작위爵位는 3등작 프라Phra에서 2등작 프라야Phraya로 승격했다(Cushman, 1986: 64).[태국 왕실은 중국 도개의 5등작과 유사한 귀족 작위제를 시행했는데, 아로로부터 쿤Khun-루앙Luang-프라Phra-프라야Phraya-차오프라야Chao Phraya는 각각 남작-자작-백작-후작-공작에 준한다. 관료의 관직과 작위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라농부윤의 작위는 루앙일 수도 프라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라마 5, 6세 시기 방콕 왕실은 부유한 화인에게 명예 작위를 하사하기도 했다.]
커수챵과 태국인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도 태국 남부 연안의 프라부리, 랑수안 크라부리, 트랑 등의 부윤에 임명되면서 커 가문은 방콕 왕실의 조신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커수챵의 아들들은 페낭 유력 화인의 뇨냐를 아내로 맞거나 태국 지방 명문가와 혼맥을 맺었다. 아울러 커 가문은 사업가로서 ‘페낭 화인권’ 전역으로 경제적 영향력도 동시에 키웠다. 커 가문은 태국 남부에서 주석광산과 제련소를 운영하며 태국 정부에서 주석의 징세청부권을 확보하는 등 주석 개발을 주도했다.
이러한 커 가문이 신경회로와 같은 교역 회로를 총괄한 것에 페낭의 코에관콩시Koe Guan Kongsi高源公司였다. 코에관은 해협 북부 지역의 증기선 해운회사이자, 태국의 주석을 페낭으로 운송하고 광산에 필요한 쿨리와 식량 및 생필품을 태국으로 수입하는 무역회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태국 남부 연안에서 정치적 ·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던 커 가문이 푸켓으로 진출한 것은 커수챵의 아들 커심비가 몬톤 푸켓의 최고 행정관에 임명된 1900년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 푸켓의 경제권은 탄가익탐을 필두로 한 탄 씨들의 수중에 있었다.
탄가익탐은 1820년대 초 푸켓의 주석광산 개발을 주도했다(王重陽, 1965: 29~30). 그는 당시 푸켓 주석광산의 중심이었던 카투에서 두부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두부 장사가 될 정도로 당시 중국인 광부들의 시장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두부 제조에서 광산촌의 부��품 공급으로 사업을 확장한 탄가익탐은 푸켓부윤의 눈에 들어 푸켓의 카피탄 치나에 임명되었다. 부윤의 재정 지원을 받아 탄은 1828년 주석 개발 회사인 훕힌콩시Hup Hin Kongsi合興公司를 설립했다. 푸켓 통카항의 주석광산 개발은 훕힌콩시의 설립 이후 본격화했다. 훕힌콩시는 페낭으로 수출되는 주석세의 징수 대행사이자, 통카 주석광산 쿨리의 아편과 생필품을 독점 판매하는 트럭 시스템의 일부였다(Khoo, 2009b: 86). 훕힌콩시는 푸켓의 ‘거대한 광산촌 매점’이었던 셈이다. 어촌에 불과했던 푸켓의 통카항은 태국 최대의 광산촌으로 바뀌었고, 푸켓부윤의 작위도 프라야Phraya Witchitsongkhram로 승격됐다. 1860년대 탄가익탐의 주석광산은 320헥타르에 달했다(Wong, 2007: 25).
탄은 애초 푸켓부윤의 재정 지원으로 통카 주석광산 개발에 착수했지만, 광산에 필요한 자본과 인력과 물자는 페낭에서 조달했다. 특히 페낭 탄콩시 영천당 창건을 주도한 탄가익탐은 초기부터 페낭의 종친들을 푸켓으로 끌어들였다. 광부와 점원은 페낭과 연관이 있는 인물을 고용했다. 푸켓은 페락의 라룻과 달리 광부도 대부분 복건 출신이었다. 188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태국 남부 연안 지역에서 중국인과 태국인의 비율이 2대 1인데 반해, 푸켓에선 중국인 4만 5,000명에 태국인은 1,000명에 불과했다(Khoo, 2009b: 92). 19세기 푸켓은 복건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의 섬이었다. 페낭 복건 5대 성씨의 비밀결사인 건덕당의 푸켓지부가 생겨났고, 탄가익탐의 아들 탄위기Tan Wee Ghee陳威儀가 푸켓 건덕당의 ‘토아코大哥’에 올랐다.
태국의 지방 행정이 페낭의 해골정부와 다를 바 없었던 시절 푸켓의 탄 가문은 페낭의 탄콩시와 건덕당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사업을 키웠다. 19세기 후반 푸켓의 거상이자 푸켓의 또 다른 비밀결사 화승의 ‘토아코’였던 탄킴자오Tan Kim Jao陳錦灶는 탄가익탐 밑에서 일을 배웠다. 탄위기와 탄킴자오는 친구이자 동업자였고, 두 동맹 비밀결사의 영수였다. 푸켓부윤의 정치적 지원을 받은 통카항 주석광산 거물 6인방 가운데 5인이 탄 씨였다. 이들 탄 씨는 푸켓부윤과 손잡과 19세기 후반 푸켓 전역이 아편 판매를 독점했다. 페낭-푸켓 교역에서 아편만큼 이문이 많은 품목은 없었다. 페낭이 아편 징세청부업자에게 태국 남부 연안의 주석광산 지역은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었고, 푸켓이 그중 최대였다(Songprasert, 1986: 62, 101, 123).
1880년대 푸켓의 주석 채굴량은 8만 4,000피쿨(약 5,000톤)로, 페락 라룻 지역의 생산량에 근접했다. 페낭의 복건 5대 성씨가 공동 투자한 무역회사 칩혹콩시Chip Hock Kongsi는 1890년대 말까지 통카 · 트랑 · 타보이의 광산업자에게 12만 5,000달러, 푸켓 주석광산 개발에 9만 6,000달러를 각각 투자했다. 태국 남부 주석광산 개발에 페낭의 화인자본이 대규모로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푸켓의 화인사회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76년 3월초, 푸켓에서 주석 광부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폭도로 변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태국인 선원을 살해한 혐의로 푸켓의 화인 비밀결사 회원 2명이 구속되자, 건덕당과 화승 소속 광부 300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 것이다. 당국은 즉각 두 피의자를 석방했지만, 2,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가 푸켓부윤의 청사를 방화하고 상점을 약탈하며 푸켓부윤을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시위가 벌어지기 한 달 전 푸켓부윤은 중국인 주석광산에 자금 대출을 동결하고, 중국인의 인두세를 6배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방콕 중앙정부에 진 부채부터 갚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푸켓부윤이 의흥회 소속 광산은 대출을 동결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인두세 인상 발표까지 겹치면서 푸켓 폭동이 벌어진 것이다.
도시가 마비되자 방콕 중앙정부는 푸켓에 특별판무관을 파견했다. 그해 3월 20일 건덕당 · 화승의 지도자와 협상을 벌인 특별판무관은 폭동의 책임을 묻지 않고 주석 광부의 처우를 개선하는 한편, 푸켓부윤이 공표한 화인 주석광산의 대출 동결과 인두세 인상안을 철회했다. 게다가 푸켓 건덕당 영수 탄위기는 주석 수출관세 징수를 포함해 아편 · 도박장 · 술 · 전당포의 징세청부권도 확보했다. 푸켓부윤과 건덕당 소속 광산 토카이의 대결에서 방콕 중앙정부는 화인 토카이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협상의 결과로 원인을 되짚어본다면, 푸켓 폭동은 푸켓부윤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건덕당의 광산주들이 광부를 사주해 태국 중앙정부를 끌어들이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방콕 왕실이 화인의 손을 들어준 결정은 화인사회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전략적이었다(Wong, 2007: 90~93). 페낭과 푸켓의 건덕당이 주도하는 주석광산 산업을 현상 유지하는 것이 1874년 팡코르조약 이후 제국주의 확장에 가속도를 내는 영국의 태국 진출을 견제하는 데 유리하다고 당시 방콕 왕실은 판단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방콕 왕실의 영국 견제 전략에서 ‘페낭 화인권’은 어떻게 평가받았던 것일까? 푸켓을 비롯한 태국 남부 연안의 주석광산 개발과 요역을 영국 식민지인 페낭의 화인사회가 주도한다는 점은 방콕 왕실도 모를 수 없었다. 의문의 핵심은 영국 식민지 페낭에서 영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계 영국인Chinese British’이 푸켓의 산업과 교역을 장악한 현실과 영국의 태국 진출 견제라는 태국 왕실의 전략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태국 왕실은 화인 디아스포라를 동화시켜온 오랜 역사적 경험을 고려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주목할 대목은 당시 태국 정부가 페낭과 푸켓의 화인사회를 과연 영국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간주했을까라는 점이다. 오히려 태국 왕실은 ’페낭 화인권‘을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 판단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페낭과 푸켓의 연계는 에릭 홉스봄이 ’제국의 시대‘의 분기로 잡은 1870년대의 해협 북부 지역에서 페낭 화인권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1880년대 후반부터 영국이 페낭 화인권을 왜 포획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겠다.
푸켓 폭동 3년 뒤인 1879년 6월 의흥회 소속 화인 417명이 건덕당 건물에서 숨지는 학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푸켓의 광방 비밀결사 의흥회는 페락의 라룻에서처럼 급속히 쇠퇴했다.[*학살 사건에 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건덕당에서는 의흥회의 급습 정보를 입수하고, 통카의 건덕당 건물에 지뢰와 다이너마이트로 부비트랩을 설치했는데, 이를 모르고 습격한 의흥회 회원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의흥회에서는 비밀 결사 간에 분쟁이 있은 뒤 건덕당이 휴전 기념으로 의흥회 회원을 초대해 만찬을 열어 술에 취하게 한 뒤 건물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떼죽음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Khoo(2009b: 88) 참조] 이후 푸켓의 화인사회는 1897년 방콕 왕실이 화인 비밀결사를 금지하기까지 복방의 건덕당이 독주하는 가운데 방파 경쟁에서 방파 협력으로 새로운 질서를 모색했다.
(221~228쪽)
말라카해협에 연한 수마트라 북동부의 메단Medan은 187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와 화인사회가 결합되어 건설된 식민지 도시이다. 오늘날의 메단은 19세기 술탄국 덜리Deli의 영지인 라부한 덜리Labuhan Deli, 메단Kampung Medan, 항구 벌라완Belawan 등으로 이뤄졌다. 18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촌락Kampung에 불과하던 메단은 20세기 초에 ‘수마트라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바뀌었다. 네덜란드가 수마트라를 직할 지배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담배농원을 개발했고, 여기에 중국인 이주자들이 몰려들면서 메단이 중심지로 괄목할 성장을 이룬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메단의 잎담배가 최고 평가를 받으면서 수마트라는 세계적인 댐배 원료생산지로 떠올랐다. 네덜란드인은 ‘돈의 땅het land dollar’,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이라며 메단의 성공을 치켜세웠다(Buiskool, 2009: 114).
메단의 담배농원 개발은 페락의 주석광산과 달리 네덜라드 동인도 정부와 유럽 자본이 주도했다. 단지 인구가 조밀하지 않은 수마트라의 농원을 운영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중국인 이주노동력에 의지해야 했다.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은 영국의 자유방인에 견줘 훨씬 개입주의적이었다. 게다가 페낭과 달리 메단의 화인사회는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와 토착 술탄이란 이중의 정치권력과 상대해야 했다. 이런 메단 화인사회에서 광동성 개까지 집단의 신케인 총Tjong張 씨 3인방이 두각을 나타냈다. 특이하게 메단 화인사회는 복건 방언인 혹키엔을 공통어로 썼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의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다)보다 영국의 페낭과 훨씬 밀접했다.
신도시 메단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페낭의 상인과 해운업자들은 수마트라 북동안과 교역 네트워크를 갖췄다. 1790년 코라이환이 후추 묘목을 들여온 곳도 아체였다. 아체는 1820년대 세계 후추 공급의 절반을 생산했고, 인근의 랑캇Langkat, 덜리, 서르당Serdang 등 수마트라 동북부는 세계 최대 후추 생산지였다. 1849~50년 페낭은 아체와 덜리에서 4만 6,199피쿨의 후추를 수입했다. 이는 아체와 덜리가 수출한 전체 후추의 80퍼센트에 해당했다(Wong, 2007: 32~33). 수마트라 북부의 후추 교역을 페낭이 독점했다는 뜻이다. 1852년 아체와 덜리의 후추를 전담 운송하는 페낭의 무역선이 15척을 넘었다. 초기 후추 교역과 해운을 페낭의 아체 상인들이 주도했지만, 화인 무역 · 해운업자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페낭의 복건 출신 해운업자들은 1810년대부터 지역 해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페낭의 복건 출신 호토아Ho Toah何道는 1810년대에 이미 페낭-수마트라 항로에 정크선을 운항했고, 1820년대에는 태국 남부-페낭-수마트라 노선에 정크 무역선을 투입해 쌀과 제비집, 주석, 잡화, 아편 등을 실어 날랐다. 건덕당의 토아코가 되기 이전부터 굴지의 해운업자였던 쿠톈테익의 무역선은 1850년대부터 페낭-버마의 몰러먀잉-수마트라의 아체-태국의 타쿠아파Takuapa-싱가포르 항로를 운항했다. 페낭의 복건 출신 상인들은 자본을 출자해 1870년대까지 10여개의 대형 해운회사를 운영했는데, 1860년대에 설립된 해운회상 총모콩시Chong Moh & Co.崇茂公司는 증기선과 범선 12척을 소유하고 페낭, 싱가포르, 푸켓, 양곤, 덜리, 아체, 페락, 커다 등 말라카해협의 역내 해운은 물론 인도-중국의 ��거리 해운도 담당했다(Wong, 2007: 20~23).
해운을 장악한 페낭의 복건 출신 화상들을 아체와 덜리에서 아체인과 바탁족이 재배하는 후추를 수입하면서 정치권력과 결탁한 일종의 계약 재배 방식을 썼다. 1850년대 후추 무역으로 세력이 커진 아체의 술탄은 지역 소영주의 후추 재배를 장려하던 참이었다(양승윤, 1944: 186). 화상이 후추 재배지의 술탄이나 수장과 동맹을 맺고 자금을 대주면, 이들이 현지 농민에게 영농자금으로 선대하고, 농민은 수확한 후추를 고정된 계약 가격으로 페낭 상인에게 넘기는 방식이었다. 페낭화상들은 피쿨당 2달러에 구입해 검은 후추는 4~6달러, 흰 후추는 7~14달러에 유럽 상인들에게 넘겨 2~7배의 이윤을 챙겼다. 입도선매立稻先賣의 착취적 거래였다.
1860년대 메단에 담배농원이 개발되던 무렵 수마트라의 교역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1830년 자바 전역을 장악한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가 수마트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 세력 균형의 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 세력 균형의 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런던조약을 맺고 말라카 해협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분할한 바 있다. 런던조약의 허점은 수마트라의 지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수마트라가 정치적으로는 네덜란드의 세력권이었지만, 해협을 장악한 영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의 간섭 없이 수마트라와 교역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체는 영국의 보증 아래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런던조약 덕에 19세기 전반 영국 식민지 페낭이 네덜란드령 수마트라 북동부 연안에서 교역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낭의 화인 거상들이 주석광산 개발을 위해 말레이반도로 몰려가던 1840년대 후반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의 군대와 자본은 수마트라 중부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북상 명분은 독립 술탄국인 아체의 경제적 ·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다는 점과 미국이나 프랑스 등 열강이 아체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1860년대 후반 제국주의 경쟁이 본격화하자 영국도 네덜란드의 수마트라 북상을 용인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1871년 11월 헤이그에서 ‘수마트라조약Anglo-Dutch Treaty of Sumatra’을 맺고, 네덜란드의 수마트라 지배권을 확정했다. 이 조약에서도 아체의 독립은 확인됐는데도 네덜란드는 1873년 아체 침공을 단행해 수도 반다 아체를 점령했다. 이로써 아체의 술탄은 폐위됐지만, 아체 이슬람 지도자의 완강한 저항으로 1903년까지 30년에 걸친 ’아체전쟁‘이 이어졌다(최병욱, 2015: 329~330).
19세기 후반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가 수마트라 중부 이북으로 북상하며 곳곳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던 상황에서 메단의 광동 객가 ’총씨 3인방‘이 두각을 나타냈다. 총파츠Cheong Fatt Tze張弼士(1840~1916)와 총용혠Tjong Yong Hian張榕轩(1850~1911), 총아피Tjong A Fie張阿輝(1860~1921)가 그 3인이다.[*총파츠는 중국 광동성 대포大埔 태생으로, 본명은 장진훈張振勳이며 객가 방언의 알파벳 표기로 ‘Tjong Tjen Hsoen’이다. 필사는 그이 자이다. 총파츠의 이름 알파벳 표기는 문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페낭의 총파츠 맨션과 관련해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표기가 ’Cheng Fatt Tze’이다. 위에 언급한 본명이나, 중국에서 불리던 이름原名의 복건 방언 표기인 ‘Thio Thiau Siat張兆燮’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총용혠은 중국 광동성 매현梅縣에서 태어난 객가로, 본명은 張煜南Tjong Yu Nam이며, 용현榕轩은 자이다. 총용혠의 동생인 총아피의 본명은 張涄南Tjong Fung Nam이며, 자는 耀轩Yiauw Hian이다. 총아피張阿輝로 더 널리 알려졌다.] 총용혠과 총아피는 친형제이며, 총파츠는 두 형제의 후견인이었고, 두 형제는 총파츠의 재산 관리인이기도 했다. 이들 3인방이 각각 10년 터울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후술하겠지만 총파츠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남양 화인을 대표한 거상이며, 청조 말기 중국 정치와 경제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여기서는 메단과 관련된 총파츠의 초기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총파츠는 1859년 네덜란드 동인도의 바타비아로 이주했다. 화인 미곡상점 점원으로 일하다 상점주의 딸과 결혼했고, 장인의 지원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식료품을 판매는 그는 네덜란드 육군과 해군에 식량과 부식을 공급하면서 식민 당국의 신뢰를 얻었다. 이를 토대로 총파츠는 아편과 술의 징세청부권을 따내며 자바 서부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거부의 길을 내달렸다. 1860년대 농원과 도시 개발 붐이 일면서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중국인 쿨리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총파츠는 쿨리를 공급하고 관리하는 독점권도 수중에 넣었다(Godley, 1981: 10~11).
빠르게 부를 축적한 25세의 총파츠는 1865년 유홉콩시Yoo Hop Kongsi裕和公司를 설립하고, 벼와 코코넛농원도 운영했다. 187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 군대가 수마트라 중부 이북으로 세력권을 넓히며 북상하자 총파츠도 자바를 떠나 수마트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총파츠는 1873년 네덜란드의 아체 침공 때 군대의 식얄 보급을 독점했고, 아체의 아편팜도 확보했다. 덜리의 아편팜도 손에 넣은 총파츠는 1875년 바타비아의 카피탄 치나 리아기Lee Ah Ghee를 끌어들여 페낭에 무역회사 리왕콩시Li Wang Kongsi笠旺公司를 세웠다(Wringt, 1908: 777), 총파츠와 페낭의 공식적인 관계는 1875년부터 시작된 셈이다.
수마트라 이주는 총용혠이 총파츠보다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총파츠가 1880년 페낭 리왕콩시의 메단지부를 설립할 때 총용혠과 합자했는데, 당시 총용혠은 네덜란드 식민지 관리인 ‘라부한 덜리의 루테난트’였다(Chang, 1981:26).[*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화인사회의 지도자를 임명해 간접 통치한 ‘카피탄 치나’ 제도를 차용하면서, 정부의 공식 관직으로 제도화했다. 군대 계급과 같이 카피테인Kapitein(대위) 위에 마요르Majoor(소령)와 아래로 루테난트Lieutenant(중위)의 등급을 뒀다. 총용혠은 당시 라부한의 루테난트에서 카피테인을 거쳐 최고 등급인 마요르Majoor der Chinezen에 올랐다.] 잡화상 집안의 8남매 장남이었던 총용혠이 여느 이주자들처럼 18~20세에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면, 그의 라부한 덜린 이주 시기는 187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수마트라의 담배 재배를 독점한 네덜란드의 ‘덜리 회사Deli Company’가 1869년 메단에 설립되어 담배농원 개발이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1870년~1933년 메단 지역의 담배농원에 동원된 중국인 쿨리는 30만 명에 달했다(Buiskool, 2009: 118).
총아피는 총파트와 총용혠이 동업자가 된 1880년 라부한 덜리에 이주했다. 그가 은화 10냥을 들고 광동성 산두에서 메탄행 배에 올랐을 때, 그와 함께 탑승한 중국인 대부분은 담배농원의 쿨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술했듯이 1880년대부터 메단 담배농원의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페낭 화인권의 농원과 주석광산 쿨리 조달이 차질을 입었을 정도다. 하지만 총아피는 쿨리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형의 도움으로 라부한 덜리의 화인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네덜란드 식민 당국의 신임도 얻어 1888년에 루테난트에 임명되었고, 1890년 카피테인, 1911년 마요르로 승진했다(Leo, 1995: 210).
총용혠과 총아피 형제는 네덜란드 식민 당국이 임명한 관리인 ’카피탄 치나‘로서, 담배농원에 중국인 쿨리의 조달과 관리를 책임졌다. 메단의 담배농원은 페락의 주석광산과 달리 자본과 노동이 분리됐다. 농원주는 유럽인이었지만, 농원 임노동자는 중국인이었다. 이에 따라 노동의 통제권은 화인엘리트에게 돌아갔다. 메단 총 씨 형제의 핵심 사업은 ’쿨리무역‘이었고, 페낭 화인사회와의 연계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당시 해협 북부의 쿨리무역은 페낭 복방 비밀결사 건덕당이 장악하고 있었음은 전술한 바 있다. 총 형제는 담배농원에 중국인 쿨리는 물론, 식료품과 의복 등 생필품 일체를 독점적으로 조달했다. 19세기 전반 자바의 화인들이 네덜란드 식민지의 중개인으로서 현지인을 상대로 한 ’비중국인과의 교역‘에 치중했다면, 19세기 후반 신생 도시 메단에서 총 씨 형제는 급증하는 중국인 쿨리를 상대로 한 ’중국인과의 교역‘을 중심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태국의 커 가문처럼 메단의 총 씨 형제도 네덜란드 동인도의 관리이면서 사업가였다. 총파츠가 설립한 페낭과 메단의 리왕콩시는 수마트라 농원에 아편과 물리 및 생필품을 조달하는 ’중국인과의 교역‘을 위한 총 씨 3인방의 거점이었던 셈이다. 총파츠는 1999년 증기선 해운회사 반유힌콩시Ban Yoo Hin Kongsi萬裕興公司도 설립했다(Wright, 1908: 777). 1895년까지 반유힌의 증기선은 덜리-페낭-페락 항로를 운영했다.
총파츠가 1880년대 후반부터 말레이반도의 주석광산과 아편팜에 투자하고, 페낭 주재 중국 부영사와 싱가포르 주재 중국 총영사를 맡으며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총용혠은 총파츠의 뒤를 따라 움직였고, 메단의 사업은 총아피가 관장하게 됐다. 총아피는 총파츠와 총용혠이 닦아놓은 토대, 네덜란드 식민 당국 및 덜리 술탄과 긴밀한 협력, 그리고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총 씨 3인방의 사업을 키웠다. 총아피는 메단의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사전에 입수한 도시 개발 정도를 바탕으로 부동산에 투자해 재산을 늘렸다. 1900년 초 총아피는 메단 부동산의 75퍼센트를 소유했다(Buiskool, 2009: 115)>
총아피 형제는 1886년 메단에 정육시장 건설을 시작으로 생선시장(1887), 야채시장(1906)을 잇달아 세웠다. 총아피는 1911년 총용혠이 사망하자 ‘마요르’를 승계하고, 이들 시장에서 나온 수익으로 메단에 극빈자와 고령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치온의원Tjie On Djie Jan濟安醫院과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도 세웠다(Leo, 2012: 1198). 총아피는 1906년 수마트라 최초로 화인 소유의 고무나무농원을 열었고, 이듬해인 1907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최초의 화인 은행인 덜리은행Deli Bank도 개설했다.
(229~237쪽)
신케 객가인 총 씨 3인방이 19세기 후반 메단 건설의 주역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수마트라 북동 연안 지역 화인사회와 페낭의 관련은 더 오래고 뿌리 깊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메단 화인사회의 공통어가 혹키엔이라는 점이다. 수마트라 동부 연안의 화인 사회에서 주류는 광동 출신이고 광동 방언이 널리 쓰였지만, 메단은, 복건 출신 비중도 높았고 복건 방언이 우세했다(Buiskool, 2009: 124). 이는 담배농원의 노동자는 광방과 조주 출신이 주류였지만, 메단의 도시 상업사회는 복방이 주도했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메단을 비롯한 수마트라 동북 연안의 화인사회는 네덜란드어보다 영어 교육을 더 선호했다. 메단의 부자 화인들은 자녀를 페낭의 영어 학교로 유학시키곤 했다. 19세기 ‘페낭 화인권’은 식민지의 경계에 구애되지 않는 지리 경제적, 지리 문화적으로 ‘월경越境하는 화인사회’였던 셈이다.(239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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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thv9597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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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 BIFF2024 감독 인사말 | 이석준 LEE Seokjun | 알엠: 라이트 피플, 롱 플레이스 RM: Right People, Wro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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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miao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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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와 처서를 보내며 ‘여름’ 테마의 드라마 * 영화 * 책을 열심히 봤다. 드라마 <롱 베케이션>도 그 중 하나였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한 편, 집에 와서 저녁에 한 편씩 봤는데 보는 중에는 그냥 풋풋한 청춘 로맨스 드라마였다. 문제는 보고 나서 자꾸 뭔가 남아 있는 기분이 든다는 것.
지금의 정체기를 신이 준 휴식 ‘롱 베케이션’ 이라고 생각하니 하루가 견딜만 해진다. OST가 자꾸 귀에 남아 하루종일 찾아 듣고 있다. 나도 피아노가 치고 싶어진다. 다시 배울까? 20대 기무라 타쿠야의 사슴같은 눈 * 장발 * 뿔테의 조합은 참 훌륭하구나. 봐도 봐도 질리질 않네. 나의 롱 베케이션은 언제 끝이 나려나. 핸드폰이 없어 보고싶으면 전화하고 집으로 달려가는 1996년으로 몇번이고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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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ose to you
* DON’T WORRY BE HAPPY
* 이렇게 생각하면 안될까? 긴 휴식이라고 말이야. 항상 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어떤걸 해도 안 될때가 있잖아. 뭘 해도 안될 때 말이야. 안그래? 그럴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신이 주신 휴식이라 생각하고 힘들게 뛰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애쓰지 말고 흐르는대로 몸을 맡겨봐. / 그러면? / 좋아져 / 정말? / 아마도 / 아마도…
* 타카코, 음악은 소리를 즐긴다는 뜻이잖아. 수학이나 과학과 다르게. 쇼팽이든 샤란큐든 네가 좋아하는 걸 즐기면 돼. 넌 진지하게 음악을 목표로 하니까 언젠가 말해주고 싶었어. 우리는 악보를 옮기는 기계가 아니라 표현하는 사람이야. 그 곡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니, 피아노를 사랑하지 않으면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어.
* 잠깐 이렇게 있어도 돼? / 그래.
* 내 생각엔 말이야.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사람은 날개가 있어. 날개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날고 싶어도 못날아.
* 재능이 없어 / 재능이 없으면 있도록하면 안돼? / 말이 되는 소리를 해 / 어느날 갑자기 엄청나게 잘할 수는 없어? / 그런 건 기적이지 / 기적은 없어? 나는 있다고 생각해.
* 피아노를 그만두면 안돼. 절대 버리면 안돼. 세나씨가 버리면 피아노가 슬���할거야.
* 혼자서는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누군가와 있는다고 과연 행복할까?
* 있잖아. 그 곡… 다시 한 번 들려줘.
*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는 김에 폭죽을 샀어요. 공기가 맑은 여름날 밤. 당신은 누구와 불꽃놀이를 하고 싶나요? 네?
* 계속하는 건 원래 힘든 일이잖아. 왠지 싸우는 것 같고… 하지만 그만두면 거기서 끝이거든. 어쨌든 나도 피아노를 그만두려고 했었잖아. 하지만 정말… 좋아한다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힘든 시기도 함께 견뎌야한다고 생각해.
* 앞으로 더 멋진 사랑을 할 거예요. 그러면… 신지씨는 다 잊을 거예요. / 그래? /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거짓말이에요. 계속… 계속 기억할게요. / 고마워.
* 난 기적을 꽤 믿는 편이야. 보여주게. / 열심히 할게요.
* 그럼 붙으면 보스턴이고 떨어지면 백수야? 모 아니면 도네. / 하지만 이제…휴식은 끝났어. 기나긴 휴식은 이제 끝났어.
* 허세부리는 게 아니라 미나미를 만나서 정말 기뻤어. 많은 힘이 됐거든.
* 있잖아. 너무 아등바등 버티지마.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행복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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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legs-2024-streaming-ott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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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레그스 한글자막 Longlegs 2024 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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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레그스 한글자막 Longlegs 2024 ott 지난 10년간 관객들에게 공포와 충격을 선사한 작품으로, 공포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를 넘어, 모든 프레임에 심어져 있는 복잡한 단서와 숨겨진 의미로 인해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스토리 개요 영화는 한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주인공인 사라는 어린 시절부터 그 마을에 대한 두려운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실종 사건들과 자신의 악몽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을에 돌아온 사라는 자신이 잊고 있었던 충격적인 과거를 마주하게 되며, 그 중심에는 '롱레그스'라는 악마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이 존재는 마을 주민들의 정신을 지배하며, 그들을 차례로 파멸의 길로 이끕니다. 사라는 롱레그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를 무찌르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의 싸움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악마의 단서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영화 내내 숨겨져 있는 '악마의 단서'들입니다. 감독은 매 장면마다 관객이 쉽게 눈치채지 못할 작은 디테일들을 배치해, 롱레그스의 존재감을 점점 강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배경의 그림자 속에 은근히 드러나는 악마의 형상, 주인공이 지나치는 순간마다 스쳐가는 으스스한 소리, 그리고 특정한 카메라 앵글에서만 포착되는 이상한 흔적들 등은 모두 롱레그스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이러한 단서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들의 머릿속에 남아,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들고,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공포를 경험하게 합니다. 처음 관람할 때는 지나치기 쉬운 이 디테일들이 결국 전체 스토리와 연결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공포를 느끼게 만듭니다.
롱레그스 한글자막 Longlegs 2024 ott 상징성 롱레그스는 단순히 공포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숨겨진 악마적 본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진 두려움과 죄책감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롱레그스는 마을 주민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죄악을 끌어내어,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단순한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한 악마의 투영으로 그려집니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롱레그스와 같은 악마적인 본성이 잠재되어 있으며, 그것을 외면하거나 숨기려 할수록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내면의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를 심어줍니다.
롱레그스 한글자막 Longlegs 2024 ott 결말과 여운 영화의 결말은 매우 충격적이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사라는 결국 롱레그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그에게 잠식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 속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사라의 희생을 통해 마을은 구원받고, 롱레그스의 저주는 끝이 나지만, 여전히 그 존재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암시를 통해 관객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롱레그스 한글자막 Longlegs 2024 ott 단순히 무서운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싸움을 그린 심리적 공포 영화입니다. 매 장면마다 숨겨진 악마의 단서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들고, 결말 후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여운을 제공합니다. 공포 영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이 작품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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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ckbonga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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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롱 베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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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da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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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펜서 진짜 롱 타임 3시간 + 내인생 샵에서 첫 네일(맨날 친구가 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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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sm-v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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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rmeatsims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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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bijin1337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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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room3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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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zrule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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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thv9597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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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 BIFF2024 Trailer l 알엠: 라이트 피플, 롱 플레이스 RM: Right People, Wrong Place l 오픈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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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layos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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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time no see ♡ do not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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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ivepainterstarfish · 22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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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맥도날드 마스코트 탐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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