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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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째네.. 원래 사람보다 동물, 식물 그리고 공간애착이 더 큰 나여서 곧 이사가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참으로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산이 있고 전원뷰가 있고 계절마다 불어오는 꽃향기가 있고 산책길에 따먹을 수 있는 열매들이 있어 참 좋은 곳이다. 유흥시설이 없어 돈 쓸 일도 없고 아프면 이 동네서 젤 큰 대학병원 응급실에 바로 가면 되고 톨게이트 가까워 고속도로도 금방이고..ㅋㅋ 쓰다보니 부동산중개업자가 하는 말 같네.
달도 큰 밤. 하늘보고 누워 지난 3년 3개월을 떠올려본다. 아 옮겨다니는 직장 들어올땐 그게 뭐 대수일까 어차피 홀몸. 이랬었는데 담번에 어디로 가게될지 모른다는게 젤 맘에 안든다 안들어..근데 뭐 가람가야지. 돈주는 곳이니 네네 하고 따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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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말임돠 매월 있는 남선교회 헌신예배였습니다
평소에는 벙사복을 입고있어 누가 뭘하는지 알수 없지만 헌신예배때는 그냥 사복이라 평소에 입고 다니는 대로 오기에 누가 뭘 하는지 알기 쉽죠 ..
대학병원 연구실장부터 건물의 청소하는분 까지 참으로 다양한 나이와 직업의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 라는 이름앞에 하나로 모여 한마음으로 움직이는게 중요한거죠
그리고 또 중요한건 그렇게 주님앞에 나오면 과연 내 기도대로 응답하실까..? 하는거쥬..? ㅎㅎㅎ
어제도 집에서 교회로 가기전에 안전운전을 위해 기도할때 집에오면 제자리 하나만 남겨주세요 하고 갔는데
집에 돌아온 시간은 밤 9시가 넘은시각 당연히 주차장은 다 만차죠 .
그래도 일단 기도한게 있으니 뭐 있겠지 하고 지하주차장에 들어갔는데 ..
그런뒈 말임돠 다른때 같으면 후진으로 들어가 전진으로 들어가 하시는데 어제는 암말 없으시더란 거죠 ..
뭐지..?
설마 안챙겨주신건가..?
싶어서 조마조마 후진으로 들어가는데 가보니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
전진으로 들어가서 댈수있는자리 한자리 ..
후진으로 들어가서 댈수있는 자리 한자리 총 두자리 ..
챙겨주시되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챙겨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실제로 보여주시더라구요 음퐈하하하하하..
주님 만세 .!!!!!
그리구 말임돠 집에 도착해서 아이들 델꼬 기도하고 돌아서는데 주님이 그러시더라구요 ..
야 너 그 옷 입는다고 벌써 10개월째 저녁금식 중인데 한번 입어봐 맞을거 같은데 ..
그래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입어봤지 말임돠 ..
그랬더니 이거 완전 딱 좋더라 이거죠 ㅋㅋㅋㅋ
좀더 빡시게 굶어서 약간 할렁한 핏으로 입으면 더 좋을듯요 ㅎㅎㅎ
저녁 금식은 계속 됩니다 쭈우우우우욱 ^ ^
#광명전통시장 #광명시장 #전통시장 #추천맛집 #광명왕족발 #광명할머니왕족발 은 #광명소셜상점 #미리내가게 #광명8경 #광명동굴 #광명시 #LocalGuides 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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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뿐일까? 책자의 뒤쪽 표지에는 1979라는 연도와 내 이름이, 내지에는 모두 여덟 편의 시들이 표지 제목과 같은 연필 필적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페이지의 하단마다에는 각기 다른 날짜들이 시간���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여덟 살 아이답게 천진하고 서툰 문장들 사이에서, 4월의 날짜가 적힌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의 두 행짜리 연들로 시작되는 시였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사십여 년의 시간을 단박에 건너, 그 책자를 만들던 오후의 기억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볼펜 깍지를 끼운 몽당연필과 지우개 가루,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가져온 커다란 철제 스테이플러. 곧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동안 자투리 종이들과 공책들과 문제집의 여백, 일기장 여기저기에 끄적여놓았던 시들을 추려 모아두고 싶었던 마음도 이어 생각났다. 그 ‘시집’을 다 만들고 나자 어째서인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던 마음도.
일기장들과 그 책자를 원래대로 구두 상자 안에 포개어 넣고 뚜껑을 덮기 전, 이 시가 적힌 면을 휴대폰으로 찍어두었다. 그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뛰는 가슴 속 내 심장.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
*
그후 14년이 흘러 처음으로 시를,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약 3년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시를 쓰는 일도, 단편소설을 쓰는 일도 좋아했지만-지금도 좋아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세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여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 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이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그 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 소설에서, 오랫동안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왔던 여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힘을 다해 배로 기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번째 장편소설인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말을 잃은 여자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각자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나아가다가 서로를 발견한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촉각적 순간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손톱을 바싹 깎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을 향해 이 소설은 느린 속력으로 전진한다. 영원처럼 부풀어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음의 소설을 상상했다.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닫게 ���었기 때문이었다.
*
그 시점까지 나는 광주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후 1년 가까이 새로 쓸 소설에 대한 스케치를 하며, 1980년 5월 광주가 하나의 겹으로 들어가는 소설을 상상했다. 그러다 망월동 묘지에 찾아간 것은 같은 해 12월, 눈이 몹시 내리고 난 다음날 오후였다. 어두워질 무렵 심장에 손을 얹고 얼어붙은 묘지를 걸어나오면서 생각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9백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했다. 이후 광주뿐 아니라 국가폭력의 다른 사례들을 다룬 자료들을, 장소와 시간대를 넓혀 인간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긴 역사에 걸쳐 반복해온 학살들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망자들에게,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기에,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었던 상무관에서 첫 장면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열다섯 살의 소년 동호가 시신들 위로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힌다.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같은 해 유월에 꿈을 꾸었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 걷는 꿈이었다. 벌판 가득 수천 수만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고, 하나하나의 나무 뒤쪽마다 무덤의 봉분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에 물이 밟혀 뒤를 돌아보자,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에서부터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다 이 무덤들을 썼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래쪽 무덤들의 뼈들은 모두 쓸려가버린 것 아닐까. 위쪽 무덤들의 뼈들이라도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지금.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에게는 삽도 없는데. 벌써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 아직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이 꿈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꿈을 기록한 뒤에는 이것이 다음 소설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어떤 소설일지 아직 알지 못한 채 그 꿈에서 뻗어나갈 법한 몇 개의 이야기를 앞머리만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2017년 12월부터 2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길을 걷는 동안 소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며,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잔혹한 세부들을 응시하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간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것은, 검은 나무들과 밀려오는 바다의 꿈을 꾼 아침으로부터 약 7년이 지났을 때였다.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여정이 화자인 경하가 서울에서부터 제주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 집까지 한 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뚫고 가는 횡의 길이라면, 2부는 그녀와 인선이 함께 인간의 밤 아래로-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시간으로-, 심해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의 길이다. 마지막 3부에서 두 사람이 그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밝힌다.
친구인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넘겼다가 다시 건네받듯 함께 끌고 가는 소설이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짜 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3년이 흐른 지금, 아직 나는 다음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책을 완성한 다음에 쓸 다른 소설도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내 삶을 잠시 빌려주려 했던,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이다.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내가 그렇게 멀리 가는 동안, 비록 내가 썼으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 나의 책들도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차창 밖으로 초록의 불꽃들이 타오르는 앰뷸런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된 두 자매도. 어둠과 침묵 속에서 남자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는, 곧 언어를 되찾게 될 여자의 손가락도.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내 언니와, 끝까지 그 아기에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말했던 내 젊은 어머니도. 내 감은 눈꺼풀들 속에 진한 오렌지빛으로 고이던,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으로 나를 에워싸던 그 혼들은 얼마나 멀리 가게 될까? 학살이 벌어진 모든 장소에서, 압도적인 폭력이 쓸고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밝혀지는, 작별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사람들의 촛불은 어디까지 여행하게 될까?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金)실을 타고?
*
지난해 1월 낡은 구두 상자에서 찾아낸 중철 제본에서, 1979년 4월의 나는 두 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말 나는 2014년 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질문했던 것일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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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경영위기 / 한양증권(한양학교법인), 매물 나오다 / 아산재단, 주식 매각 사례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 / 의료사태 후유증 본격화 [공병호TV]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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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의 효능
버섯의 효능과 음용법 한방약차 ▣ 영지영지(靈芝)란 健康長壽를 상징하는 십장생중의 하나이다. ◈ 영지의 유래와 효용 옛부터 버섯은 장기간 복용하면 신효한 효험이 있다 하여 불로초라 하였고 만년청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진시황이 동방의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보낸 서불이란 장군 이라는 사람에게서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상황 버섯도 이와같이 다른나라에서 물 건너올때 상인들이 중국사람들한테 젤 비싸게 사갔다는 것으로보아 그당시의 항암 효과가 매우 높았던것 같다, 이외에도 많은 종류들의 알칼로이드 성분과 미네랄등도 풍부히 들어있어 산삼보다 더 좋아하며 계속먹으면 무병장수한다 라는 말까지 전해지고 잇습니다…. 이런상황의 뛰어난 약성 때문에 옛날 임금님께서 궁중음식 으로 사용했다던 기록 까지 남아 있답니다,, 그만큼 약효가 뛰어나 지금도 만원짜리 몇장이면 구할수있는 약재입니다… 일본규슈 후쿠오카 근방 및 오키나와등애서도 자연산 영지라고 해서 팔더군요 아마우리나라도 오래전 부터 참 많이 보아왔는데 시중엔 왜그리 못팔까요~ 얼마전 뉴스 보니 중금속 오염때문이라던데… 여하튼 예전 에 비해 저렴하니 꼭 한번 드셔 보시길 바랍니다 ▶항암작용 -폐암·위암 간�� 유방암 간염 건망증 두통 치매 등- 최근들어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 정신과 전문교수팀 은 뇌 암에 걸린 환자 가운데 정신분열증 (정신분열 증세가 악화된 상태), 행동장애 등 의 간질환자 3명 에게 알로에로 만든 신경안정 제를 동시 투여했더니 발암물질의 억제 율이 2백20% 에서 7백50%로 크게 향상 됐 다고 발표했읍니다!!.<정력 중추가 쇠약해저서 발기불능 이나 과로사까 염려되시 는분> 특히 임상실험 도중 35차례 부작용 을 일으켰으나 전혀 걱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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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 의사 파업, 의료대란의 내막,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는 대학병원 필수과 교수 인터뷰 #의사파업 #의사증원 #의사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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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40개 의대서 3401명 증원 신청…
삭발식·동맹휴학 반발
☕寸評🗣毒舌
국민들은
의사 증원을
간절히 원한다.
동네 병원에 가면
2분만에 내몰려 나오고,
대학병원 진료는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도
의사들은 국민
불편은 아랑곳없이
돈 잘 버는 의사라는
직업을 소수만이 과점해서
몸값을 높이려고 의대 증원을
결사 반대한다. 너무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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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대학병원
위중증 환자 대사장애 소화를 못시키고 변을 못 봅니다
단 알콜성 식도암 증가
정부 폭식만 하지마시고 FOOD WAR 입니다
1946년 고도 고발 78년치 2024년 경구 투입
식품가격을 드시면서 처리해야
아마 국민지갑에 식품처리비용이 없을겁니다
개인정보 부동산 담보 3개월 입니다 91일 몰 CD이면
10억 입니다 증권 주식상 CNY 100매입 하시면 됩니다
긴급재난지원금200,000₩ 지급 및 유류비 529,820₩
지급 729.820₩ 계산 쉽게 800,000₩ 주시면 됩니다
1인가구 의료수가 기준입니다
서울특별시 수도권 및 전국 제주도 포함 KBS
히포크라테스 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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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병은 조금씩 나아지고있다. 다행스럽게도 …
2022년은 다시는 떠오르기 싫은 시기다.
아빠는 처음으로 내게 네가 고생이 많다며 미안하다는 얘기를 해주었고,
그런 아빠가 새삼스레 불쌍하게만 보였다.
가족중에 한 명이 아프면 고생한다더라.. 우리가 딱 그런케이스의 가족이었다.
아픈 가족을 품어 간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엄마는 … 왜 그렇게까지 변했던걸까.
처음으로 엄마가 심각해지는 증세를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행복해지고싶었는데.. 정말.. 너무 행복해지고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었다. 투잡을 뛰는 내게 너무나도 벅찼었다.
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또 어떤 온갖 욕설로 부정하실까.. 왜 그렇게까지 마음이 아프고 화났던걸까…
하루는 경찰서 형사과에서 전화가 왔었다. 어머니께서 다행스럽게도 기소유예를 받기는 했었지만..
지문검사까지 받는 일이었다.. 언니들에게 자초지정을 대충 설명하고는 언니들도 아빠를 추궁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아빠 혼자만 다 짊어지려고 하지말라고.. 알려달라고..
하지만 아빠는 끝까지 말씀해주지 않으셨다. 그날 아빠는 그냥 엄마하고 당신하고만 알고있을테니..
알려고 하지말라고 잘 끝난 일이니까 다시 얘기 하지말라며…
그날 나는 마음이 힘들었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엄마의 조현병 증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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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 3학년때즈음 엄마의 병은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방에서 작은언니랑 나랑 장난치며 웃고 떠들고 자는척을 하고있었을 때, 엄마는 부엌에서 왔다갔다 하시며
혼잣말로 온갖 욕설을 하시고는 이내, 아무런 잘못 없는 우리를 때리고는 했었다. 처음이었다.
어린 나는 언니와 무서웠지만… 얘기하지 못했었다… 그게 그냥 엄마가 잠깐 화나서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나보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도착했을 때 저녁까지 엄마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큰언니는 아빠에게 물어보니 처음에는 그냥 친정에 잠깐 시골에
갔다고 둘러 대셨다. 그러고는 다시 큰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물어보자 아빠는 결국에 병원에 입원 시켰다며 말씀해주셨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너무나도 힘들었던 기억이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작은언니와 나를 차를 태우고 가끔은 바람을 쐬러 가기도 하셨었다.
아마 그게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는 가장 최선의 노력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성인이 되고나서야 조금씩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의 면회를 한 달에 한번 내지 혹은 이주일에 한번 정도 주말마다 언니들과 나와 같이 갔었다.
입원해있던 엄마는 .. 엄마의 모습은.. 그 전의 모습들과 전혀 달랐다. 차가워진 엄마의 눈빛부터 조금은 야위어진 모습..
그때 당시 집에서 멀지 않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계셨었는데 아마.. 폐쇄병동에 입원해있었던걸로 알고 있다.
그런 엄마는 우리가 면회가 오면 아무말 없이 갖고온 음식들을 그저 드시기만 했었다. 낯설었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 30대 초반의 내 기억속에 아주 또렷하게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엄마의 병원 입원은 꽤 오래 길어졌다.
초등학생 4학년이었던 나는 집에 오면 다녀왔습니다 라고 혼잣말을 하고는 마치 엄마가 웃으며 반겨줄 것 같은 행복한 상상에 빠지고는 했었다.
하지만 .. 그 어렸었던 나는 엄마가 가장 필요할때에 엄마는… 없었다. 초등학교 체육대회에도 빌라 이웃주민 할머니 아줌마의 도움으로 간식들과 음식들을 함께 먹었던 기억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싸온 음식들을 함께 웃으며 즐기는 모습들 사이에 나는 소외감을 느꼈었다. 엄마가 밉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2년 후 내가 초등학생 5학년 끝날 무렵즈음 엄마는 퇴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집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낯설어서 몇 달 정도는 엄마를 어려워했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타일러주는 어른 한 명도 없었다. 그저 그 시간들을 견뎌내고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 오롯이 어린 우리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성인이 되기까지 엄마에게 반항 아닌 반항을 했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야 엄마의 병을 알게되었다.
대학교에서 엄마의 신분증이 필요한 상황이 있어서 우연히 서랍을 열고 엄마의 복지카드를 발견하게 되었다.
복지카드에는 정신장애 3급 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엄마의 병이 무엇인지 조금은 가깝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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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심각하던 펜데믹 시기에 엄마와 나는 코로나에 걸려 격리를 하고있었던 상황에 엄마는 갑자기 새벽에 나를 불러 깨우며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시다며 머리를 손으로 때리기를 반복하셨었다.
그 이후로 중간에 기존에 드셨던 정신병원 약을 끊고 작은언니가 다니는 인근 대학병원에서 정신과가 있으니 그쪽에서 상담치료 및 약물치료를 권유해주셨다. 기존에 드셨었던 약이 워낙 쎄기도 했어서 엄마는 가끔 잠을 제대로 못자는 상황이 있으셨다. 그래서 대학병원 정신과 약을 드시면서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보니 코로나때 ��리를 하시면서 코로나 처방 약과 시간을 헷갈리셨었는지 정신과 약은 복용하지 않고 계셨었다. 그 이후로 병은 조금씩 심해지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런 엄마의 증상들을 옆에서 지켜보고 엄마의 욕설과 폭언들을 감내해야만 했었다.
언니들은 본인들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줄테니 고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 해도된다 라고 말해주었지만
실상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언니들도 따로 가정꾸려 잘 사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증상이 심각해질수록 야위어지셨었고 퇴근 후 돌아오면 그 상황들을 겪고는 아빠 몰래 방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는 했었다.
아마 아빠도 그런 상황에서 내게 많이 미안하셨을 것 같다. 아빠는 상황이 심각해짐을 느끼시고는 우리들에게 엄마 그냥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시킬까 하고 의견을 물으셨다. 작은언니는 실습을 하면서 정신병원 실습을 다닌적이 있어서 폐쇄병동을 다시 보내게 된다면 엄마가 많이 힘들어 할 것 같다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최선의 선택으로는 그냥 다시 기존 병원에 가서 상담을 처음부터 다시 하고 약물치료를 조금씩 하는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으시고 약을 처방해오셨다. 엄마는 무덤덤해진 표정으로 약을 다시 드셨다.
그러면서 증세가 조금씩 호전이 되면서 지금의 엄마는 완전히 나아진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엄마가 증상이 심해지셨을때 일어났던 상황들이 몇 번이나 더 있었다. 차마 글로는 설명하기 어렵거니와 다시는 떠오르기 싫은 기억으로 남겨져있다. 그래서 아마 엄마의 병을 처음 알게되었을때 나는 사회복지사 라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지금은 뭐… 너무나 다른 길을 가고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남겨져있다. 충분히 노력할 수 있었던 상황들과 그런 기회들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들은 내가 돌아서버려서 다시는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노력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은…,
몇 달 전에 넷플릭스에서 반영했던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라는 드라마 시리즈를 했었는데 극중 이정은 배우님이 맡으신 역할에 친동생이 조현병을 앓고 있어서 주변 이웃들의 따가운 시선과 떠도는 소문들을 들으며 이웃들에게 친동생의 병을 솔직하게 말하며 감정을 호소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에서 조현병 가족에 대한 시선과 그리고 조현병을 갖고있는 시선들이 공감이 가기도했었고 여러가지로 이해가 되기도 했었다. 눈물이 날수밖에 없었던 장면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져서 엄마에게 편한 감정이 더 앞선다.
엄마의 그런 폭언과 욕설들은 아픈 엄마의 모습이니까..
나는 그 마음의 병을 완전히 나아지게할 수 없으니까.. 그저 엄마를 그냥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밖에 없다.
또 한번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나는 똑같이 맞설 것이다. 그래도 우리 엄마니까.
엄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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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확인 유전자검사 1분신청
친자확인 검사 신청은 유전자 검사 기관에서 가능합니다. 이러한 기관들은 질병관리청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유전자검사는 민간업체와 대학병원 등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예전과 달리 비용이 많이 들지 않습니다. 약 10만원에서 20만원 사이의 비용만 내면 누구나 쉽고 빠르게 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허가한 민간 유전자 검사업체는 약 5곳이 있으며, 이들 기관의 홈페이지에서 유전자 검사 확인 신청이 가능합니다. 출장 검사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만약 공공기관에 제출할 목적으로 유전자검사를 받으려면 KOLAS 인증을 받은 기관에서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뉴스채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친자확인 유전자검사 신청 비용 및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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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차 간호사 출신 사장님이 환자 대신 손님에게 진심일 때 벌어지는 일…
저는 대구 칠곡에서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33살 박성은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소방관이라 직장 생활하고, 가게는 저 혼자 운영하고 있어요. 아기가 만 18개월이에요. 장사를 준비하고 시작할 때 주변에서 “아기 있는데 할 수 있겠냐?”, “어쩌려고 그러냐?” 이런 얘기 진짜 많이 들었거든요. 근데 다행히 아기가 아빠랑 할머니랑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원래 11년 차 간호사였어요. 첫 직장이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고, 아기 낳고 처음으로 쉬게 된 거예요. 사실은 남편도 간호사 출신의 소방관이에요. 남편은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소방관 시험을 쳐서 소방관이 돼서 소방관 생활을 하고 있어요. 저랑 남편 둘 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만나서 결혼하게 됐어요. 남편이 쉬는 날에는 집에서 아기도 보고, 한 번씩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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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19일차
- 우리에게만 빨라진 시간들
월요일. 차 너무 막힌다.
운전하는 것.. 세상 젤 싫어 했지만 또 하다 보니 괜찮아 진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것.
병으로 된 엄청 무거운 커피 한 박스를 들쳐 업고 병원 도착.
매일 반갑게 맞아 주시는 선생님들과
야간 당직 선생님들이 너무 감사하다.
아부지, 어무니 모시고 정말 지겹도록 다닌 병원들.
하루가 멀다 대학병원 가고
하루가 멀다 응급실에 갔다.
너무나 차가운 의료진들이 어찌나 서러운지.
하루에도 수백명 환자들을 돌보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바쁘고 힘든지,
간호사 친구에게 들어서 너무나 잘 알지만.
발만 동동 거리는 내 입장에서는
이기적이게도 너무나 야속 할 때가 많았다.
그랬던 기억들이 많아서 일까
지금 병원 선생님들의 작은 배려에도
친절과 다정함을 더 느낀다.
커피를 건내고 병실로 들어 서는 순간
간병인 여사님 표정이 어둡다.
그 짧은 순간 불안감에 또 심장이 저리기 시작했다.
결국 식도를 통해서 더 이상 음식도, 약도 먹을 수 없다 한다.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계속 머금고 있다 보니
갑작스레 삼키다 자칫 위험한 순간들이 올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내일부터 음식 중단,
영양제 투약 결정.
생각하기 싫은 순간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4월,
날씨가 너무 좋았던 날
어무니와 같이 벚꽃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었던 그날이 너무 그립다.
아니,
몇 달도 내겐 과분한 시간이지.
몇 주 전..
제발 며칠 전,
카스테라 빵이 먹고 싶다고 애기처럼 말하던
어무니의 그날이 너무 그리워진다.
나와 어무니의 시간은 왜 이리도 야속하게만 흐르는 건지 원망 스럽다.
그래도 내가 있자나.
엄마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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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콤하게 피폐해진 네가 가장 맛있어 1화~ 무료
매콤하게 피폐해진 네가 가장 맛있어 1화~ 무료 올립니다.
매콤하게 피폐해진 네가 가장 맛있어 1화~ DLsite 웹툰 보기 <
만화 작가 umekoppe 번역 되있습니다.
신경성 식욕 부진, 폭식증, 폭식 장애… Covid-19 전염병과 감금 기간의 해로운 영향은 정신 건강, 특히 섭식 장애(ED)에 계속해서 느껴집니다. 여러 국제 간행물에 따르면 2019년 이후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2022년 2월 영양 및 신진대사(Nutrition and Metabolism)에 발표된 Rouen 대학병원 영양학과장인 Pierre Dechelotte 팀이 8,9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2009년에서 2021년 사이에 섭식 장애 유병률이 두 배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임상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파도의 꼭대기에 있습니다. 프���스 연맹 거식증 폭식증(FFAB)의 회장이자 Fondation Sante des Etudiants de France의 아동 정신과 의사인 Nathalie Godart는 말합니다. 무엇보다 진지한 형태가 늘었다.
국제 문헌을 종합한 FFAB의 데이터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매콤하게 피폐해진 네가 가장 맛있어 1화~ 무료 약 100만 명이 특징적인 섭식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낮은 추정치입니다. 소위 "비특이적" 장애, 즉 모든 진단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섭식 장애를 고려하면 여성의 20%, 남성의 15%가 영향을 받습니다. 이 중 특정 음식에 대한 제한 및/또는 회피로 구성된 특정 행동은 때때로 구토 공포증(구토 공포증) 또는 식식 공포증(먹는 동안 질식하는 공포)에서와 같이 가장 심한 경우에 완전한 실어증까지 갈 수 있습니다. Robert-Debre 병원(AP-HP)의 아동 제한 TCA 센터 책임자인 Coline Stordeur는 "조기에 발병하는 신경성 식욕부진증에서와 같이 영양실조와 관련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멸시하라" 6월 2일 금요일 세계 ED의 날을 맞아 FFAB는 "발언의 자유"라는 주제로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ED는 가혹한 상태이며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거의 감지되지 않습니다"라고 경고합니다. "이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효과적인 식별 및 의료 공급 부족으로 인해 전문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연맹은 계속합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섭식 장애에 대해 인식하게 하고, 섭식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오명을 벗기고, 그들이 그것에 대해 공개하고, 도움과 치료법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Godart 교수는 주장합니다. 많은 질병 정신과 환자들은 빨리 돌볼수록 회복이 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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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 "대학병원 인턴의 비타민D합성하는 방법~! #일상vlog #의사#인턴vlog" on YouTube
Ordinary Korean's Vitamin D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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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신문 ⓐ] '증원' 발표에 의사협회 "파업 불사"…전공의도 참여하나 : https://mnews.sbs.co.kr/news/endPage.do?newsId=N1007528190&plink=THUMB&cooper=SBSNEWS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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