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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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mzi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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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말도 안되게 추워졌던 날이었다.
집안의 창문을 깨기라도 할 작정인지 바람은 날카롭게 불어댔다. 새벽 4시, 안입던 후드와 양말을 꺼내 신으며 여느때와 다름없이 노트북 앞에 앉았다.
메일함엔 어지러우리 만큼 온갖 메일이 쌓여있었다.
내게 회신이 온 메일이 가끔은 무서울 정도다. 몇통의 전화를 했을까, 한국에 있는 몇명의 감독님들께 전화를 걸고서 겨우 일을 끝냈다. 노트북을 닫으면 그날의 피로를 맞이 한듯, 그제서야 온몸에 피곤이 퍼져나간다.
오전 8시가 되어서야 다시 잠을 자려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문득 베를린을 떠나고 싶었다. 적절하리만치 지겨워진 타이밍이었다. 나는 프라하에 사는 친구 몇명에게 연락을 해두고 가방에 대충의 짐을 싸서 베를린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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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프라하에 있던 건 지난 4월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날씨가 꽤나 추워 가죽자켓을 껴입고 따가운 손 끝을 숨기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다녔던 것 같은데,
그곳에 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너무 많은게 싫어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려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내가 프라하에 있던 건 그리 멀지도 않은 이야기였고, 나는 그때 실패를 앞두고 다가올 미래를 더욱 두려워했었으니까. 걱정이 하루가 멀다하고 쌓여대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하에 사는 동안 이 도시가 너무 싫다며 울먹거리며 찌질하게 돌아섰던 적이 있었다.
과연 내가 안정적이게 될까? 행복이 오려나. 하고 불안감에 휩싸여 막연하게 생각했던 질문에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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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 도착해 친한 언니 양을 만났다. 몇달 전 베를린에 놀러온 언니에게 집중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는데, 그녀를 볼 수 있어 기분이 잠시나마 좋아졌다.
언니는 1월이 오면 한국으로 돌아갈거라고 말했다. 한국에 가기로 결심한 그녀의 결단력이 부럽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도 주변을 정리하고, 바리바리 가져온 짐들을 되돌려 보내고.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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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세차게 내리던 홍수 속의 프라하였다. 언니는 계속해서 우산을 챙기고 나는 그냥 비를 맞고 다녔다. 비를 맞고 걸어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유럽에 와서 생긴 고집이었다.
밤늦게 친구 강도 함께 불러 우리는 길게 술을 마셨고 과거와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 없이 했다. 아주 오랜만에 편안��을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자꾸만 베를린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지금 같은 순간 처럼 마음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자리가 없는 것도 그렇고, 일상의 내 흐름 자체가 불편하다고. 예전 만큼이나 베를린이 마냥 자유롭진 않은 것 같다고. 가끔은 내가 발없는 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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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 곳곳에 내가 기억하는 몇가지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좋아하던 바, 다니던 회사 건물, 광장에 주차 된 트럭, 불꺼진 놀이공원.
대개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 당시 나는 속상한 감정과 맞바꾼 술 한잔을 좋아했다. 붉은 도시 조명이 즐비한 거리에서, 강이 보이는 다리에서, 혹은 이 집 저 집을 옮겨다니며 속상함을 술로 풀었다. 어쩌면 그러한 행위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면서 위로를 얻었던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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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가 더이상 싫지 않았다. 이곳에서 울 일도 절대 없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더이상 중요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었고, 누구와 함께 했는지 그 사실들은 기억 저편에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이렇게 둘러보면 예쁘고 무해한 도시가 있었다는 것 뿐. 그 힘들었던 도시가 이번엔 나를 조금 살게하는 기분이들었다.
행복은 조금 매섭고, 불행은 가끔 너무 유순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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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pink-man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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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필 아저씨의 서사가 궁금해요…
오랜만에 한국어로 들어오는 서사 질문이라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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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필은 흑계경호의 종합보안이사(CSO)로, 흑계파의 인싸, 국가권력급 인맥을 가진 간부급 인물입니다. 어마무시한 연줄로 흑계파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일을 언론에서 묻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이 아저씨는 상당히 다방면으로 유능한데, 친구 사귀는걸 잘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언변이 능통하고 말로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있어요. 사람 심리를 무척이나 쉽게 꿰뚫어버리죠. 어릴 때부터 범상찮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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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계경호에 들어오기 전에는 본인 아버지가 운영하던 대기업에서 거래처 접대업무를 맡던 청년이었는데, 아버지의 애인사정이 정상적이지 않았어서 친모를 포함해서 엄마가 7명이나 있었어요. 아버지가 첩을 여섯이나 들여서 엄마는 물론이요 동생이 수십명씩 있으니, 장남으로써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가족' 과 '수많은 사람'을 대하는 것에 노출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진거죠.
의외로 엄마들과 동생들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는데, 자기 아버지와의 사이는 최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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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언과 구타를 일삼는 아버지의 히스테릭적인 스트레스 해소 풀이를 받아주며 살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증오하며 자라게 됩니다. 그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지 않고 병역의무를 다 하자마자 도피하듯이 사업을 시작해 집에서 독립해버린것도 아버지랑 더이상 한 집에서 살고싶지 않아서였어요.
아버지의 집에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이 세워둔 소규모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만난게 흑계경호이고, 최상필은 당시 회장이었던 전 회장 이철명과 뜻이 맞아서 같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게 흑계파에 들어오게 된 계기였습니다.
다른 이사들보다는 엄청 스펙타클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안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친구 중 하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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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애 셋의 아빠이기도 합니다.(아내와는 현재 이혼한 상태) 자신이 좋은 아빠 밑에서 자라본적이 없다보니, 엄마들 밑에서 자랐던게 익숙한 최상필은 자식들을 다소 엄마처럼 양육했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최상필의 말투가 약간 아줌마스러운것도 엄마들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이겠지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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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tyofficial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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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독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내가 역량이 뛰어 나서라는 말같지도 않은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어서
지금도 그 때로 뒤돌아 가면 당황하고 흥분되서 문장이 써지지 않는다.
그 당시 얼마나 어이가 없는 말인지 나는 아무런 반응도 못했었다.
늘 그래왔다, 내 개인기로 뛰어 넘었고
내 좁은 마음으로 리더십을 베풀었고
힘들때는 내 호주머니를 가장 먼저 열었으니까.
근데 그 게 조직의 독이 된다는 말으로 다가올줄은 몰랐다.
그러면 정말로 나는 이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다란 생각 드는 저녁이였다.
영화 마지막 4중주가 생각난다.
내게 6번째 경영평가이자, 4번째 작품이 온다. 4번째 작품을 잘 마무리 짓고 쉬어야겠다란 생각뿐이다.
교보SAM 무제한을 결제하고 논문을 찾아 보려는데, 열람이 다 되는 건 아니더라. SAM 단말기를 사야하나.
교보직원분이 친절히 응대해주니까 좋더라. 논문만 열람 다운 받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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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chae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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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피(딸)는 캘럼(아빠)에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거나 다름 없잖아? 같은 하늘 아래 아빠랑 내가 있는 거니까. 그럼 같이 있는 거지.”
영화의 ���목은 ‘애프터썬’. 일광욕 후 바르는 썬크림을 뜻하는 동시에 ‘해가 지고 난 뒤’를 의미 한다. 소피는 여행 이후 스스로 생을 마감한(것으로 보이는) 아빠와 더 이상 같은 해를 볼 수 없기에, 어쩌면 해가 진 후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아빠와 튀르키예를 여행하던 열한 살부터 그 당시 아빠와 같은 서른한 살에 이르기까지. 매일 뜨는 해와 상관 없이 소피에게는 모든 순간이 제목 그대로 ‘애프터 썬’인 것이다.
2.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해변으로 뛰어들거나, 알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흐느끼거나. 관객의 감정을 흔드는 캘럼의 모습 중 가장 안타깝게 다가왔던 장면은 여행의 막바지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 딸에게 몇 번이고 사과하는 모습이다. 비단 어젯밤의 잘못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듯 보인다.
몇몇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이전과 달리, 어떤 지점에 도달한 듯한 그의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태도가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어렴풋이나마 예상 할 수 있었던 대목이다.
3.
헤아릴 수 없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일은 불가항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미 지난 일이라면, 그 시간이 멀어질수록 더더욱 그렇다고 느낀다.
같은 태양 아래 서른한 살의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던 열한 살의 소피도, 해가 없는 터널 같은 긴 시간을 지나온 서른한 살의 소피도. 닿을 수 없는 심연의 마음에 닿기 위해 손을 뻗는 일이 점점 덜 잦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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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incels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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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posted about the hashtag campaign. I’ll post an MTL here and the plain original KR text below that. if you see anything that needs correcting please let me know and I’ll fix it ASAP. I truly appreciate the help I am given with this. thank you.
➡️ As the horrific reality of “deepfake sex crimes” has come to light, calls for tougher punishments for perpetrators have been growing. Hashtag movements on social media have called for stiffer penalties, and a petition to the National Assembly to amend the law has garnered more than 50,000 signatures, the threshold for referral to a standing committee.
As of 1:00 PM on the 2nd, looking at the real-time trends of ‘X (formerly Twitter)’, there were over 600,000 posts with the hashtags ‘#교육부는성범죄자들을퇴학시켜라’, ‘#미성년자도피해자다국가가지켜라’, ‘#딥페이크엄벌하라’. The ‘hashtag attack’, where many people simultaneously created posts with the hashtags, was intensively carried out between 1:00 PM and 8:00 PM the previous day, and outrage is still being expressed this afternoon, a day later.
“The production, sharing, and viewing of deepfake sexual exploitation is a serious violation of human rights, and those involved should be considered criminals,” the post that proposed the hashtag reads, ”We strongly oppose deepfake sexual crimes and demand that laws be strengthened and those responsible be severely punished.”
After the “Nth Room” case in 2020, laws were revised to prevent digital sex crimes and protect victims, but there were limitations in terms of punishment. Article 14(2) of the Special Act on the Punishment of Sexual Offenses (Sexual Violence Punishment Act/성폭력처벌법), which was revised at the time, stipulates that anyone who produces deep-fake videos with the intent to spread or sell them is punishable by up to five years in prison or a fine of up to 50 million won, and anyone who produces or distributes them for profit is punishable by up to seven years in prison.
However, the law requires a “purpose to distribute,” so those who simply possess, watch, or purchase the videos cannot be punished. When the law was being discussed for revision, a wide range of punishments were suggested, but the government and some lawmakers from both parties showed complacency toward deepfake sex crimes, and the current law was finalized.
A petition to the National Assembly is also being signed by citizens calling for the law to be revised.
A petition calling for stronger punishment and disclosure of the identities of perpetrators of deep-fake sex crimes posted on August 30th has garnered the support of more than 80,000 citizens as of today. A petition calling for stiffer sentences for those who distribute deepfake sex crimes and stronger punishment for those who abet them has also been referred to a standing committee with the support of more than 60,000 citizens.
The public outcry also prompted the National Assembly to take action. The National Assembly's Gender Equality and Family Committee will hold an urgent session on the 4th to check the government's response to deep-fake sex crimes. Lawmakers from the ruling and opposition parties have also proposed an amendment to strengthen the punishment for deep-fake sex crimes, which they plan to expedite.
pain KR text:
SNS 덮은 ‘#딥페이크_엄벌’ 수십만 물결, 국민 청원도 일찌감치 5만명 넘겨
딥페이크 성범죄’의 참담한 실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SNS상에서는 엄벌을 촉구하는 해시태그 운동이 일었고, 국회에는 법 개정을 촉구하는 내용의 청원이 상임위원회 회부 요건인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2일 오후 1시 기준, ‘X(옛 트위터)’의 실시간 트렌드를 보면, ‘#딥페이크_가해자_전원_신상공개’, ‘#교육부는_성범죄자들을_퇴학시켜라’, ‘#미성년자도_피해자다_국가가_지켜라’, ‘#딥페이크_엄벌하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글이 60만여건가량 이상 올라왔다. 많은 이들이 동시다발로 해시태그를 단 글을 게시하는 일명 ‘해시태그 총공’은 전날 오후 1~8시 사이 집중적으로 진행됐는데, 하루가 지난 이날 오후까지도 분노의 글이 이어지는 중이다. 
이번 해시태그 총공을 제안한 게시물에는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제작 및 공유, 시청은 심각한 인권 침해이며 이와 관련된 주동자와 참여자들은 범죄자로 간주돼야 한다”며 “우리는 딥페이크 성범죄를 강력히 반대하며, 관련 법규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 이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2020년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를 예방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 개정이 이어졌지만 제대로 된 처벌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개정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14조2는 딥페이크 영상물을 퍼뜨리거나 판매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제작하거나 유통하는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반포 등을 할 목적’이 있어야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 소지나 시청, 구입한 이들은 처벌할 수 없다. 법 개정 논의 당시에도 폭넓은 처벌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됐지만, 정부와 일부 여야 의원들이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한 안일한 인식을 보이면서 현재의 법 조항으로 정리됐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에도 법 개정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게시된 딥페이크 성범죄 가해자 강력 처벌 및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청원은 이날 기준 8만명이 넘는 시민들의 동의를 얻었다. 또한, 딥페이크 성범죄물 유포자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고, 이에 방조한 이들에 대한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 역시 시민 6만여명의 동의를 얻어 상임위원회에 회부됐다. 
시민들의 공분에 국회도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는 오는 4일 정부의 딥페이크 성범죄 대응 현황을 점검하기 위한 긴급 현안질의를 진행한다. 여야 의원들도 딥페이크 성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해,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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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of-seoul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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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버지는 좀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제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맨날 집에서만 그림을 그리다, 중학생 때 엄마한테 예고에 가겠다며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어요. 같이 학원에서 상담받고 결제까지 했는데, 아빠가 완강하게 반대해서 무산됐어요. 아빠는 제가 번듯한 화이트칼라 직장인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그림을 전공해서 직업이 안정적이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셨니 그랬겠죠. 당시 아빠의 강한 반대로 바로 다음날 학원에 가서 너무 죄송하다고, 전액을 환불받고 돌아온 적이 있었거든요. 10년도 넘은 일인데, 그날 집에 돌아와서 상심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렇게 좋아하는걸 해보기만 하고 싶다고해도 안 되는구나' 하고요. 근데 이것 보세요. 세상이 바뀌고, 그림 잘 그려서 웹툰이나 이모티콘으로 돈도 잘 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생겼어요!"
“My father is somewhat conservative. I’ve loved drawing ever since I was a kid, and I used to draw at home all the time. But when I got to middle school, I asked my mom to enroll me in an art academy with the dream of attending an arts high school. We went in for a consultation and even ended up paying the tuition. But, my dad was so dead set against it that it all fell through in the end. I think he had planned for me to get a decent white-collar job. He probably thought that if I were to be an art major, it would be hard for me to get a stable career. I remember going back to the academy the very next day, apologizing profusely, and getting a full refund, all because of my dad’s staunch opposition. It’s been 10 years since then, but I still remember the heartbreak I felt after coming home that day, thinking, ‘I can’t even pursue this thing that I love so much.’ But look at how the world has changed. Now, there are so many people making good money by drawing webtoons or creating emoj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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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ntheclouds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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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guys, I found something here😅 You may have already seen some of this, but I decided to share it anyway.
These are sites with artists where there is concept art for seasons 3, 4 and 5. (1st site season 5, 2nd 3 and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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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1vid ·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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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설명:
2001년 대한민국 경기도, 1600년대 후반의 조선시대 소년미라가 발굴 되었다.
소년은 발굴 당시 아버지의 겉옷(중치막)을 바닥에 깔고 어머니의 외투(장옷)을 덮고 있었다. 향년 여섯살이었고, 사인은 천연두였다.
조선 시대에는 아이가 사망하면 관 없이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이 소년은 온갖 부장품과 함께 작은 관 안에 매장되었다.
Back story:
In 2001, a mummified boy from the Joseon Dynasty, dating from the late 1600s, was unearthed in Gyeonggi Province, South Korea. At the time of discovery, the boy was covering his father's coat (joongchimak) on the ground and his mother's coat (Jangot). He was six years old, and the cause of death was smallpox.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customary for children to be buried without a coffin when they died, but this boy was buried in a small coffin with all his belongings.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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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lilcy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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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올리는 텀블러 글로 요즘 근황 남기기
제일 원하던 미국 HCI 대학원에 합격 연락을 받고 지금은 아주 천천히 숨돌리면서 사는중이다.
작년의 과정을 다 겪으면서 스스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는것. 모든지 대가없는 일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1월에 모든 지원을 끝내고 미국에 계신 이모,동생을 보러 로스엔젤레스, 벤쿠버도 다녀오고 친구랑 발리까지 여행하고 돌아왔다.물론 결과가 나오기전이라 엄청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하지 못한게 아쉬울뿐..
이제 대학원에서 나를 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건 성공했으니, 미국 빅테크기업에서 나를 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그 다음 관문을 넘어야한다.
내가 왜 대학원을 가고 싶을까? 미국에서 일하고 싶을까? 차근히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30대가 되었을때 20대를 절대 부러워하고 싶지 않았다.
학부시절 카페에서 알바를 했을때 대표님, 팀장님이 나를 매우 아껴주셨는데 그 당시 22살이었던 나를 엄청 부러워하셨다. 20대가 최고라고, 돌아가고 싶다고, 그분들도 분명 20대를 겪었을텐데 이렇게 나를 부러워할때 내심 좋기도 하면서 불안했다. 내 20대가 아무런 결과도 만들지 못한채 그저 그렇게 흘러가버리는게 끔찍하게 싫었다. 딱 30살이되었을때 내가 나를 온맘 다해 칭찬해줄수있는 직업적 성과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나를 이길로 이끈것같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보면 20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너무 열심히 살아서 절대 돌아가기싫어!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대학교 3학년때부터 막연하게 생각했던일이 현실이 되기까지 어쨌든 스타트를 안전하게 끊었으니 이제 또 다음 관문을 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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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nproject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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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샀다고 생각하는 아이템 3가지"
*잘 샀다고 생각하는 아이템 3가지
1. 건조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쓰던 사람들이 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서 구비하게 된 건조기.
정말이다.
내 인생은 건조기가 있기 전후로 나뉘어도 과언이 아니다.
실내건조 하는 번거로움이 싹 사라졌다.
인간의 발명품 중 위대한 것 중에 손에 꼽을 수 있다.
다들 꼭..사길.
2. 쓰리잘비. 이렇게 명명하는게 맞는지 모르지만, 고무모양 날?로 빗자루 역할을 하는 것인데,
머리 말리고 나서 머리카락 및 먼지 쓸기에 아주 안성맞춤이다.
기존에는 밀대를 썼는데 이게 훨씬 잘 쓸리고 좋다. 대단한 게 아닌데도 아주 좋다.
3. 아직이다.
아직 3번째를 찾지 못했다.
맘에 쏙 드는 것이 없는걸.
4. 나는 되게 팔랑귀에 뒤늦은 유행을 쫓는 사람이다.
얼리어답터는 아니고 더욱이 귀찮음도 많아서 그렇다.
좋다고 하는 것들 덜컥덜컥 사곤 했는데 전부 창고행이다.
인생은 딱히 타인의 기준을 들이댈 수 있는 건 아닌가보다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분을 놓을 수가 없다.
뭘 사야 잘 샀다는 소문이 나려나.
-Ram
*잘 샀다고 생각하는 아이템 3가지
1.등산화 작년에 노스페이스 수유점가서 등산복을 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등산화를 득템했다. 두꺼운 양말을 신을 생각으로 등산화 사이즈도 크게 구매했는데 그 이후로 너무 잘 신고 다닌다. 발 한 번 까진 곳 없고, 물집이 잡힌 적도 없다. 보아 다이얼로 편하게 신발을 벗고, 신고 하니 끈을 꽉 조여맬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보아 다이얼은 겨울에 보드 타러 갔을 당시 부츠 신을 때나 탁 눌러서 돌리고 돌려서 사이즈를 조절할 때 사용했는데, 등산화에도 달렸을 줄이야. 등산화가 있으니 어떤 산이든 일단 가기가 수월해졌고, 실제로 접지력도 좋아서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방수 기능도 좋아서 물이 고인 산길에서도 천하무적이 된다. (예전에 러닝화 신고 어떻게 등산을 했을까) 잘 산 등산화가 어디든 날 데려다준다!
2.노란색 유리도어 철제 수납장 우리 집엔 티비가 없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티비가 나오는 모니터가 방안에 있긴 하다. 하지만 거실엔 커다란 티비를 놓지 않았고 책장을 놓을까, 수납장을 놓을까 고민하다가 먼지가 무서운 나는 도어가 달린 수납장을 샀다. 수납장이든 책장이든 검색하면 흰색과 나무로 된 것이 많이 나왔는데 보다 보니 그냥 내가 그 색들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뜬금없이 노란색 철제로 만들어진 유리도어 수납장을 주문했다. 철제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조립할 때 살짝 애를 먹긴 했지만 결과는 대만족. 일단 수납장 안에 책, 공책, 자주 사용하지 않는 노트북, 아직 뜯지 않은 화장품, 코드들, 스티커들, 파우치들, 보드게임 박스들 등 잡다구니까지 바구니들을 이용해 다 넣으니 속이 후련했다. 수납장 위엔 새빨간색 JBL 블루투스 스피커와 전자시계, 선인장, 커다란 산세베리아 화분에서 어쩌다 보니 자른 잎을 심은 화분, 몇몇 위스키들과 선물 받은 술까지 올려놓으니 그 쓰임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포인트는 색상. 집에 들어오면 바로 노란색 수납장이 보이는데 옆에 있는 커다란 몬스테라와 그 외 식물들과 색조합이 너무 완벽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딱히 인테리어에 욕심이 없었는데 노란색 수납장을 산 후 보는 족족 만족감이 상승하니 사람들이 왜 집 인테리어에 투자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기운을 몰아 집 다이닝룸을 새로 꾸미고 싶어 시간나는 대로 열심히 이것저것 검색하고 있다.
3.멕시코66 태국에 있었을 때 주구장창 신고 다녔던 멕시코66. 내 기준 무지퍼셀보다 편하고 예쁜 신발이 또 있을 줄 몰랐다. 신다 보면 더욱 내 발에 맞아 편해지고 신 자체가 가벼운 건 두말하면 입 아프지. 신발이 가벼운 만큼 밑창이 얇긴 해서 겨울엔 살짝 넣어두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 손이 가고 발이 가는 운동화다. 20대 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0cm가 넘는 힐만 신고 다니다 30대가 되어서야 운동화에 아주 조금씩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계속 힐을 쇼핑하긴 하지만 운동화가 그 시간들을 비집고 들어오다보니 힐 신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불쌍한 내 발한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가을에 나고야를 갈 예정인데 거긴 오니츠카를 저렴하게 살 수 있다길래 또 다른 멕시코66을 들고 와야겠다.
-Hee
*잘 샀다고 생각하는 아이템 3가지
1.리코 Gr3x 카메라
dslr과 미러리스 카메라를 전전하다 다시 안착한 필름 카메라의 세계는 일순간에 붕괴됐다. 한 롤에 삼천 원 하던 싸구려 필름이 이만 원도 넘어서버리니 내가 가진 썩 괜찮은 필름 카메라도 렌즈도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셔터 한 번 한 번을 신중하게 누르게 되고 그 결과물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지금도 너무 좋아하지만 와인딩 한 번 할 때마다 드는 금전적 압박이 내게는 꽤 커다랗게 다가왔다. 이러다가는 기록 그 자체를 멈추게 될까 봐 새로운 카메라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구매한 새 카메라는 리코의 Gr3x였다. 일단은 작고 가벼워서 좋다. 카메라로서의 성능은 무지성으로 HDR을 남발하는 스마트폰 카메라보다 훨씬 사진다워서 좋다. sd카드에 있는 사진을 핸드폰으로 꺼내 오는 과정은 새 필름을 몇 개씩 챙겨서 다니고, 32컷을 모두 촬영한 다음에는 매거진을 갈아줘야 하고,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현상소에 필름을 맡긴 뒤 며칠을 기다려야만 하는 과정보다 훨씬 훨씬 간소하다. 컷 수에 제약이 없는 데다가 화각까지 내 마음에 쏙 든다. 아마 디지털카메라나 스마트폰 카메라부터 접해서 사용해 본 사람은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장점이겠지만.
2. 티타늄 플라스크
백패킹을 갈 때마다 소주든 와인이든 그날 마실 술 한두 병 정도야 거뜬히 배낭에 넣고 다녔지만 이제는 가벼운 티타늄 플라스크에 그날 마실 위스키를 골라서 넣어 다닌다. 무게가 가벼워서 좋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져갈 수 있는 양이 제한적이라 딱 적당하게만 취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플라스크의 뚜껑을 여닫는 느낌. 작은 구멍으로 위스키가 쫄쫄 흘러나오는 소리. 제한을 걸어둔다는 것만으로도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소중해지는 느낌. 고립을 즐기러 굳이 배낭을 메고 산속에 들어가는 일과 결이 맞아서 한 층 더 좋다.
3. 빅 아그네스 가드 스테이션8 쉘터 돌고 도는 유행을 바짝 따라붙어 다니다가 결혼을 한 뒤 메인 스트림에서부터 한참 멀어지고 나서부터 나의 캠핑 스타일을 정립할 수 있었다. 내가 캠핑이라는 취미를 지속하기 위해서 펼치고 접을 때마다 두 시간씩이나 걸리고, 전기를 끌어다 써야 하는 맥시멀한 캠핑은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오토캠핑을 하면서까지 불편하게 쭈그린 채 지내다가 허리 부서지는 미니멀한 캠핑은 하고 싶지 않다. 가드 스테이션8은 적당히 넓고 적당히 안락하고 설치와 철수에 적당한 시간이 ���는 쉘터다. 만듦새는 적당히를 넘어서면서 적당히 인기 없는 바람에 지난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에 본래 가격의 절반 값에 구할 수 있었다. 아마 스킨이 삭아서 가루가 될 때까지도 처분하지 않고 만족하며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든다.
-Ho
*잘 샀다고 생각하는 아이템 3가지
물건을 잘 안사는 편이고 심사숙고해서 사는편이라 고르는데 힘들진 않았다.
1.호카 호파라 샌달 작년에 남편이 남자친구인 시절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줬는데 진짜 편하다. 맨발에 신어도 되고 양말신고 신어도 되고 바다갈때 그냥 신고가서 물에 닿아도 되서 좋다. 이거 사고 남편이 니가 물건사고 그렇게 웃는거 첨본다 했었다.
2.스텐리 레거시 쿼드백 500미리 텀블러 이건 한 4년전에 사서 아직 잘쓰고 있는데, 찬거든 따뜻한거든 유지가 잘되고 튼튼하다. 요새 나오는거는 빨대형식이 유행인거 같은데 나는 무조건 밀폐되는걸 선호해서 가방에 넣고 다녀도되서 좋다.
3.살로몬 운동화 또 신발인데.. 살로몬은 진짜 너무 편하고 심지어 이뻐서 한국와서 또 사고 싶어봤더니 28만원이라.. 운동화에 28만원은 좀 아닌거 같아서 다음에 운동화를 산다면 호카를 살것같다.
이제는 물건을 살때 최소한 60살이되도 내가 이걸쓸것인가 생각하고 사게된다.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말자 해도, 다이아몬드 반지는 하나 가지고 싶은거보면 미니멀리스트는 멀었지 싶다.
-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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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opos · 6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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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진지하게 속 다 털어놓고 나 참 불쌍하지않냐 라고 하듯이 참 찌질한모습을 보여주고도 나보다 훨씬 철든 친구가 해줬던말
“괜찮아 ... 그럴수도있지 ...”
왠진 모르겠지만 모두한테 용서받는 기분이였다. 이것도 4년쯤전. 너무 단순하고 걔한테는 그 상황에 꺼낼수밖에 없는 말이였겠지만 너무 듣고싶었나보다.
그의 아버지 기일이 지나 연락을했고 말하면서도 참 옆에두기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말은 못했지만. 그는 오히려 내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그 당시 누구에게서 위로를 구했는지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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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솔직히 그땐 미국에있고 형하고 어머님밖에 없었고 나르스시즘에 가까운 슬픔에 잠겼다고 말했다. 친구가 미안해했다. 미안하긴... 1년이나 10년이나 사랑했으면 항상 그리워할건데. 이것도 당연히 말은안했다. 다 타이밍이이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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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uoekim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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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누나(1)
사촌 누나는 4명이 있고 내가 아기였던 시절 나보다 7살 많은 가장 큰 누나가 날 엄청 이뻐했다고 해. 본인도 어린이인데 날 끼고 살았다는군. 물론 난 기억이 나지 않지. 그리고 몇년 후 고모 가족들은 해외로 이민을 갔어. 그 기억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것 같아. 하지만 그 사촌 누나의 모습은 기억이 나지 않았어.
그 뒤로 20년 좀 안되는 시간이 흘렀고 난 대학생이 되었어. 2학년이 되었던 때 그 사촌 누나가 약 한달간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우리집에 머물게 되었지. 부모님은 그 누나가 오면 나보고 같이 다녀주라고 했어. 당시 여자 친구가 있던 난 좀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기에 알았다고 했지.
누나가 오는 날 온 가족이 마중을 나갔어. 게이트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고, 약간 외소하고 까무잡잡한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우리에게 왔어. 사촌 누나였지.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날 보던 덥석 안았어.
"너가 ○○ 구나. 아기때 내가 널 엄청 이뻐했었는데 기억나?"
사실 기억이 안났어. 공항에 나 혼자 나왔으면 누군지도 몰랐을꺼야. 암튼 누나는 날 꼭 안고 볼에 뽀뽀까지 했어. 날 이뻐했던 누나가 맞나봐. 암튼 그렇게 만나서 집으로 왔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외국생활 등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누나는 내 옆에 앉아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 보고 싶었다는 둥 아직도 아기처럼 이쁘다는 둥. 그러면서 볼을 꼬집고 안기도하고 암튼 스킨십이 많았어. 산만한 분위기에 정신이 없었고 사실 누군지 기억이 없기 때문에 어색하기도 했어.
암튼 다음날 부터 누나와 같이 다니게 되었어. 길도 모르고, 한국말도 서툰 부분이 있다보니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지. 그리고 누나에게서 쏟아지는 애정표현과 스킨십도 반복되다 보니 처음보단 덜 어색했지.
둘째날 아침 늦게 일어난 나는 혼자 아침을 먹고 있었고 씻고 나온 누나는 내 앞에 앉았어. 참 말이 많은 누나였어.
"오늘 누굴 좀 만날건데,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가하는 대로 따라와줘."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알겠다고 했지.
나도 나갈 준비가 끝나고 누나와 나갔어. 그리고 누나가 알려준 곳으로 같이 갔지. 사람들이 약속 장소로 많이 정하는 곳이었어.
"손 좀 잡아. 남자친구 같이."
난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누나를 멀뚱멀뚱 쳐다봤어.
"그냥 잡아. 그리고 카페에 가면 가까운 테이블에서 기다려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손을 잡고 누나에게 바싹 붙어서 갔어. 약속 장소에는 남자 한명이 있었고,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누나를 맞이했어. 누나의 옆에 붙어 손을 잡고있는 나를 굉장히 불편한 시선으로 봤고. 어찌되었든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카페로 갔지.
"자기 잠시만 저기서 기다려줘."
누나는 날 자기라 부르며 좀 떨어진 테이블을 손으로 가르켰어. 난 어색하게 대답하고 그 테이블로 가서 앉았어. 책을 보며 기다리는데 누나와 그 남자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시선이 갔어.
그는 굉장히 반가운 눈치였으나, 누난 시큰둥해 보였지. 둘이 이야기를 나눈듯 했어. 거리가 떨어진 나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그 남자는 왠지 좀 실망한 눈치였지. 약 30분이 지나고 그 남자가 일어나 카페를 나갔어. 누나는 날 돌아보며 자기한테 오라고 손짓을 했어.
"이메일을 통해 알게 된 친구인데, 한국에 오면 자꾸 보자고 해서. 나를 좋아한다고 그러는데 난 마음이 없어서. 거절하러 온거야."
스토커까지는 아니지만 계속 누나를 귀찮게 하던 녀석이었고, 남자친구(?)인 나를 보여주며 단념을 시킨거였어. 누나는 이런 부탁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난 아무생각 없었고, 그냥 누나가 원하던 일이 잘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어떤 일이든 누나를 잘 데리고 다니는게 내 일이었으니까.
"근데, 우리 손잡고 다니면 안될까. 너 나 잃어버리면 안되잖아."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누나를 쳐다봤어.
"손 잡자. 그냥 손 잡고 싶어. 아까 손 잡으니까 좋았단 말이야.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아."
나보다 나이도 많은 누나가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데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그냥 손을 잡고 다녔어. 이것도 계속 반복되니 이상하지 않아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모르게 물리적인 거리도 가까워 졌어. 내가 아닌 누나 쪽에서.
한국에 ���는 누나 친구를 만나면 누나와 동생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누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어.
"좋겠다. 사촌 동생이지만 동생이 항상 이렇게 같이 다녀줘서. 이쁘게 생겨서 데리고 다닐 맛도 나고"
"부럽지? 진짜 이런 남자친구 있으면 좋겠어."
"너네는 지금 연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어떤 누나가 그렇게 동생한테 폭 안겨다니냐."
누나는 날 가슴팍에 꼭 안았어. 누나에게서 예전에 만난 아줌마처럼 여자 냄새가 났고, 그때처럼 설레였어.
"얘는 내꺼야. 아무도 못 가져가."
누나는 웃으며 친구에게 말했고, 그 친구는 눈꼴 시렵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어. 난 그렇게 잠시동안 안겨있으면서, 예전과 같은 두근거림을 느꼈어.
누나는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모든걸 사줬어. 그렇다고 누나 등골을 빼먹은 것은 아니고. 사봤자 보고 싶었던 책이나 가지고 싶었던 음악 앨범 등 이었지. 자꾸 옷이나 비싼 무엇인가를 사주고 싶어 했지만 내가 받지 않았어. 그때마다 누나는 굉장히 아쉬워 했지.
어느덧 내가 먼저 누나의 손을 잡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나에게 기대어 자는 것들이 너무 자연스러워 졌어. 난 누나의 손을 잡고 싶고, 체취를 맡고 싶고, 살결과 그 살결의 말랑함을 느끼고 싶었어. 물론 속으론 갈등되었지. 어찌되었든 누나에게 이런 감정을 품어도 되나,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이래도 되나 등의. 그래도 본능은 이길 수 없었고, 점점 누나에게 여자로서의 모습을 갈구하게 되었어.
어느날 그날의 일정을 마치고 밤거리를 누나와 오붓하게 걸었어. 말이 좋아 누나의 일정을 따라 다닌것이지, 그냥 여기 저기 놀러 다닌것이고 놀았다기보단 데이트였어.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서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같이 담배를 피웠어.
"너 여자친구 만나야 하는데, 내가 방해하는거 아니야?"
난 여자친구가 있었고 못 만난지 2주 정도 되었어. 여자친구가 어느정도 내 사정을 이해준다고 했지만 그 2주 동안 전화로 몇번 싸웠어. 사촌 누나하고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자기를 못 만나는게 이해할 수 없다며. 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누나와 같이 있고 싶었어.
"괜찮아. 이해해줄꺼야."
"좋은 여자친구네. 보통 누나라면 동생 여자친구와 함께 저녁도 먹고 커피도 마실텐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무슨말인지 모르겠어.
"여자친구한테 너 빼앗긴 것 같아. 내가 더 먼저 알았고, 더 먼저 이뻐했는데. 그리고 지금도 이뻐 죽겠고, 더 이뻐해주고 싶은데."
그녀는 손을 튕겨 담배불을 껐어.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날 봤어.
"내 친구 이야기 들었지? 우리 연인처럼 보인다고. 우리 그냥 하자. 연인. 나 갈때까지만."
여자친구도 있는데 바람을 피우고, 바람을 피우는 상대는 또 누나이고... 하지만 사실 나에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여자이고, 그리고 나도 그 여자가 좋고... 그냥 단순해지고 싶고, 지금 이순간의 감정에 따르고 싶었어. 그리고 누나는 곧 가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어. 누나는 환하게 웃으며 날 껴안았어. 더운날 하루종일 다닌 덕에 그녀의 옷은 살짝 축축했고, 내가 아는 그 여자 냄새는 더 진해진것 같았어.
누나는 나에게 입을 맞추었어.
"너 바람피우면 안돼."
바람 상대가 나보고 바람을 피우지 말라고 했어. 그녀에게 이런 모순을 말을 해주려다 말았어. 그녀의 기분을 해치고 싶지 않았고, 어차피 2주 후면 그녀는 가니까. 그리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 갈 것이라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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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chae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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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가르는 기준은 작품의 메시지가 향하는 방향에 있다. 순수예술은 창작자 개인을 향해 안 쪽으로 파고드는 반면, 상업예술은 대중을 향해 밖으로 나가려는 힘이 강하다. 원심력과 구심력. 메시지의 방향이 다른 각각의 작품들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이 더하는 해석의 힘을 빌려 유기체 처럼 변화 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이 발산하고 개인으로 수렴하는 김희천의 작품은 지극히 순수예술에 가깝다. 김희천의 작품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바벨>, 전자기기의 분실에서 시작된 <썰매> 등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그의 작품은 작업 당시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에 따라 비디오로 재탄생 한다. 내용과 형식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감정을 건드린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무섭고 기괴하지만 때론 웃기기도 하며 이따금씩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 슬프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에 가까운 그의 작품이 어찌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고, 나아가 '김희천의 아류'까지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이루는 본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이루는 단 하나의 본질은 사람이 가진 '감정'이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주된 감���을 기저에 깔고 증식해나간다. 이 증식은 사람들의 예상 밖으로 뻗어 나기기 일쑤지만, 그 아래 흔들리지 않는 본질이 자리 잡고 있으니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하나의 목적이자 목표로 대변할 수 있는 '본질'이 있다는 것. 김희천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얻으리라 생각치 못한 하나의 배움을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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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 김희천의 신작 <스터디>는 도산에 위치한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10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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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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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의 조지타운에는 사실상 ‘차이나타운’이 따로 없다. 중국인이 이주한 도시 어디에나 있는 차이나타운이 1786년부터 중국인이 이주한 페낭에는 정작 없는 것이다. 단지 조지타운의 차이나타운은 다인종 · 다문화의 조화 속에 도시 전역에 스며들어 있을 뿐이다. 페낭 화인사회의 위상을 대변하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페낭 건설 초기의 중국인 이주자와 관련해 누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를 자료로 확인하기는 힘들다. 일부 자료가 있���고 해도 대부분 19세기 몇몇 부자 상인에 관한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페낭에 영국 식민지가 건설된 이후 중국인 이주의 양상이 이전 시대 동남아시아의 중국인 이주 형태와 다르다는 것은 연구자들의 공통된 해석이다. 그렇다면 19세기 대량 이주의 물결이 밀려들기 이전 ‘어떤’ 중국인이 페낭으로 이주한 것일까? 페낭 건설 초기에 해당하는 1786년에서 1820년 사이에 작성된 세 차례의 페낭 인구조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현지 무역상이었던 프랜시스 라이트는 서툰 식민지 행정가이기는 했어도 꼼꼼한 기록자였다. 초기에 항구에 드나드는 배를 일일이 헤아렸고, 이주민의 인구통계도 초기부터 작성했다. 점거 2년 후인 1788년에는 8월과 12월 두 차례 인구조사가 있었다.
8월의 페낭 총인구는 829명이었고, 그 가운데 중국인은 121명으로 조사됐다. 말레이인이 302명으로 가장 많았고, 인도 무슬림인 출리아가 216명, 태국의 기독교 박해로 커다로 피난했다 이주한 기독교도가 180명으로 조사됐다.
12월 조사에서 페낭 인구는 넉 달 사이에 454명이 증가한 1,283명으로 집계됐다. … 한편 해협식민지 정부 기록에는 1788년 페낭에 거주한 중국인 가구의 가장을 이주 지역별로 구분하고 있는데, 커다 출신이 47명으로 가장 많고, 말라카 출신 6명, 말레이반도 북부 퍼를리스와 페락 출신이 각각 1명씩, 태국의 남동부 파타니와 송클라 출신이 각각 7명과 21명이었다. 중국에서 곧바로 이주한 국인 가장은 15명에 불과했다.
확인된 중국인 가장 98명 가운데 말레이반도에서 이주한 경우는 커다 출신 47명(47퍼센트)을 비롯해 57퍼센트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곧바로 이주한 경우는 15���센트에 그친 반면, 태국만에 면한 파타니와 송클라 출신이 28명으로 28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는 페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부터 커다를 중심으로 동쪽 태국만 일대와 서쪽 말라카해협에 육상 교역로가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하며, 이후에도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 1800년 페낭의 조지타운에 중국 복건성 출신과 광동성 출신이 공동으로 설립한 사원인 광복궁(관음정)의 비문에는 450명 기부자 가운데 태국 송클라의 ‘카피탄 우’가 200달러를 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장의 출신 지역으로 볼 때 1788년 페낭 중국인의 85퍼센트가 말레이반도 북부와 태국 남동부에서 이주한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사업 기반을 구축하고 가정을 꾸린 상태에서 페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한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화인‘이었다. 사람이 움직이면 교역 네트워크도 움직이는 게 통례였다.
말라카에서 페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 6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말라카해협 중부에 해당하는 말라카의 화인사회는 역사가 깊다. 하지만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페낭의 화인사회와 말라카 화인사회의 관련성은 그다지 깊지 않다. 나폴레옹전쟁으로 영국은 말라카를 1795년에 접수해 1818년 네덜란드에 되돌려준 바 있다. 이때 영국은 말라카의 유력 상인들을 선별해 페낭으로 이주하는 유럽인에게 정착금 전액을, 중국인에게는 정착금의 8분의 1을 지원하며 이주를 장려했다. 하지만 이주 계획은 성과가 없었다. 말라카의 중국인 대부분이 말라카를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라카의 상인들은 1824년 영국-네덜란드의 런던조약 이후 대거 싱가포르로 이주했다(Wong, 2007: 15).
19세기 후반 싱가포르에는 말라카 출신 중국인 거상이 많지만, 페낭에서 말라카 출신으로 이름을 남긴 상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페낭과 말라카의 화인사회는 상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애초부터 긴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라카해협에서 페낭은 해협 북부, 싱가포르는 해협 남부의 교역과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말라카는 교역과 인적 교류에서 싱가포르와 가까웠다. 이는 또한 영국이 33년의 시차를 두고 건설한 해협식민지 페낭과 싱가포르의 화인사회가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경제적 규모나 교역권의 차이로만 설명하기 힘든 상이함을 만든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프랜시스 라이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793년에도 인구조사가 실시됐다. ’1792~93년 인구조사‘에서는 1787년부터 1793년까지 6년간의 출생과 사망 및 혼인 등에 관한 조사도 이뤄졌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페낭 화인사회의 남녀 성비가 2대 1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는 대단히 불균형한 성비에 해당한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남성 노동자 이민이 급격히 늘면서 화인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비가 50대 1까지 벌어지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Khor & Khoo, 2004: 36), 초기 페낭의 성비 2대 1은 안정적이라 할 만하다. 당시 중국인 여성이 독자적으로 페낭에 이주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때, 초기 페낭의 중국인은 대부분 커다와 태국에서 기반을 잡고 가정도 꾸린 이들이 가족과 함께 이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조사에는 거주 예상 기간을 묻는 설문도 실시했는데, 이를 통해 초기 중국인 이주자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 대다수가 페낭에 아주 눌러살 생각은 없고,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달리 현지 여성과 결혼한 중국인과 그 가족들은 페낭에 정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조사 기간 6년 사이에 태어난 중국인 아이의 대부분이 중국인 남자와 말레이인 여자의 혼혈인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인 다수가 귀향하겠다고 답한 내용과 관련해 당시 이주자들이 페낭에 정주할 뜻이 없었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중국인도 돌아오지 않겠다며 집을 떠나는 법이 없으며, 언제나 꿈은 금의환향해 조상이 묻힌 선산에 자신도 묻히는 것이라고 한다(Smith, 1894: 166). 이러한 귀향 강박이 해외 화인사회에서 중국인 정체성의 요체라는 설명도 있다. 고향을 떠나 어디에 살든 언젠가 귀향하고 싶다는 바람이나 그리해야 한다는 농경사회의 전통으로 인해,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이 언어와 의례 등에서 문화적으로 중국인다움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경사회의 전통으로 19세기 해외 이주 중국인에게 귀향 강박을 규정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왕궁우(Wang, 2003: 3)에 따르면, 중국 전통 농경사회에서 자발적 이주란 개념은 없었다. 이민이란 군대를 이동하거나 당국이 기근이나 홍수 등으로 살림이 어려워진 지역의 인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가리켰다. 권력의 통제를 벗어나 제 발로 고향을 떠난 무리들은 유민流民으로 분류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페낭 건설 초기 중국인 이주자들은 청淸 조정이 해외 도항을 금지한 상황에서 경제적 · 정치적 이유로 고향을 떠났다. 이들에게 향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현지 정착을 방해할 정도로 귀향 강박이 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착 여부는 고향을 떠난 저마다의 이유와 현지에서 삶의 여건에 좌우될 사안이기 때문이다. 페낭에는 초기부터 터를 잡고 살겠다는 화인들이 확인된다.
페낭 인구는 점거 10년 만인 1796년에 1만 명을 넘었고, 점거 22년 뒤인 1818년에는 3만 명을 돌파했다.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는 것은 페낭에서 그만한 인구를 지탱할 경제활동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1810년의 인구조사에서부터 프라이를 포함한 페낭 전체 인구와 조지타운의 인구를 구분했고, 1818년에는 조지타운의 인구를 인종별 · 연령별 · 성별로 나누어 조사했다. 1818년 조지타운에 거주한 중국인 3,128명 가운데 15~39세 인구가 2,238명이었고, 남자는 1,993명, 여자는 245명이었다. 특기할 점은 1793년의 2대 1이던 중국인 남녀 성비가 25년 사이에 8대 1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페낭의 중국인 이주 패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페낭 화인사회의 성비 변화는 무엇보다 가족을 동반한 이주자보다 독신 남성의 이주가 월등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75~80쪽)
페낭 건설 초기에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에서 가족을 동반하고 이주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현지에서 활동해온 중국 상인이나 해운업자, 즉 화상華商의 후손이거나 해상교역 전통의 전승자들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특히 동남아시아 화인 연구에서 중요한 논점이다. 그간 동남아 화인사회에 관해 ‘중국’의 국민인 화교華僑에서 ‘거주국’의 국민인 화인華人으로의 변천이 중심 주제로 논구되어왔다. 이는 탈식민 시기와 국민국가 형성기라는 한정된 시기에 동남아 화인 사회의 정체성 변화에 주목한 설명의 틀이다. 하지만 서양 식민지도, 국경도, 국적도, 민족도, 국민국가도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해협 일대에 존재한 화인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단순히 ‘화교-화인’의 틀로는 설명되기 힘들다. 페낭 건설 초기 중국인 이주자들이 바로 그러한 도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해 동남아 화인사회 연구자들이 주목한 개념이 ‘디아스포라diaspora’와 ‘페라나칸peranakan’이다. 두 개념은 초기 페낭 화인사회의 형성은 물론 20세기 식민지 후기까지 페낭 화인사회의 전개 과정ㅇ르 살피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디아스포라와 페라나칸은 기본적으로 종족성ethenicity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정체성identity’ 문제와 연관된다.
(81~83쪽)
통상 유럽의 집시는 디아스포라의 범주에서 배제되는데, 실향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연구자들은 디아스포라 개념을 중심으로 이주자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 경제적 역할에서 종족적 · 문화적 · 정치적 정체성에 걸쳐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동남아 화인사회와 관련해 디아스포라 개념이 주목받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첫째는 고대로부터 서양 식민지 시기까지 이어져온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관련된 것이고, 1990년대 이래 세계화의 확산 속에서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종족 집단에 관심이 쏠린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해상교역과 관련된 디아스포라 개념은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 서사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15세기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한 대항해 시대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기는 해도, 유럽중심주의 관점은 서양의 도래 이전부터 세계의 대양에서 교역망을 갖추고 활발하게 교역하며 살았던 디아스포라의 서사를 자율적 주체로서 다루지 못했다(Clark, 2006: 386~7).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서양의 진출 이전과 이후 인도양 동쪽 해양교역이 누구에 의해, 어떤 매커니즘으로 이뤄졌는가를 설명하는 틀로서 “외국인 사회에서 연계 네트워크를 갖추고 살아가는 상인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교역하는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란 개념이 도출됐다. 이 개념은 종족 집단의 이주 현장에서 드러난 연관성에 주목한 후속 연구를 통해 “동일한 종족의 기원을 지닌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해외의 도시나 이방의 문화에 형성한 공동체”(Clark, 2006: 391)로 정의되었다.
아울러 ’교역하는 디아스포라‘가 특정 시기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됐다(Loh, 2009: 1). 근대적 계약체계가 자리 잡기 이전까지 종족 기반의 교역하는 디아스포라는 정치적 경계를 넘어 같은 종족 또는 지역 출신과 거래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느는 것이다. 출신 지역이 같은 상인들과 거래하는 것이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을 상대하기보다 수월했고 속을 가능성도 줄여주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84~85쪽)
페라나칸은 디아스포라의 부수적 개념이면서, 동남아 화인사회의 특성을 함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페라나칸은 본디 말레이어로 ‘현지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이지만, 그 대상은 디아스포라로 국한된다. 출생자의 부계 종족성이 무엇인가에 따라 중국 상인의 후예이면 ‘페라나칸 치나Peranakan Cina’로, 인도계 무슬림 상인의 후예이면 ’자위 페라나칸/자위 페칸Jawi Peranakan/Jawi Pekan“으로 불렸다.[*자위 페라나칸은 ‘동남아시아’를 가리키는 아랍어 ‘자위’와 현지 태상을 가리키는 말레이어 ‘페라나칸’의 합성어이다. 페낭에서는 ‘자위 페칸’으로 통용됐다. 페낭 건설 초기에 이주한 인도 남동부 출신 무슬림 남성이 현지 말레이 여성과 혼인한 경우 ‘자위 페칸’이라고 했고, 이들의 후예를 ‘자위 페라나칸’으로 불렀으며, 이후 인도인 무슬림과 그 후손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자위 페칸’이 쓰였다. Musa(1999: 15) 참조. 인도인 여성의 이주가 본격화한 1860년대 이후 페낭의 자위 페칸은 혼혈의 의미보다 말레이어를 쓰는 인도계 무슬림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페라나칸을 지칭하는 용어는 나라와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말라카해협 디아스포라 화인사회의 원조에 해당하는 말라카에서 페라나칸 화인은 스스로 바바Baba峇峇라 칭했다. 바바가 혼혈의 후손을 가리키는 인도어에서 비롯했다고 하지만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이른 시기에 화인사회가 형성된 말라카에서 바바는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하는 존칭으로 사용됐다. 페라나칸 화인 남성을 바바라면 여성의 존칭은 ‘뇨냐Nyonya娘惹’이다. 페낭을 비롯한 말라카해협에서 페라나칸은 시대에 따라 바바, 바바뇨냐, 해협화인Straits Chinese 등과 혼용되기도 한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페라나칸은 ‘타향에 머무는 자’로서의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온 자’와 ‘머무는 타향에서 출생한 자’의 경계가 생기고 그것을 구분할 어떤 필요성에서 생겨난 말일 터이다. 그 ‘어떤 필요성’이 페라나칸의 특성을 규정하게 된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사회인류학자 탄치벵은 그 필요성이 화인사회가 내부와 말레이 사회의 두 방향에서 제기됐다고 본다. 먼저 말레이 사회에서 말레이 문화에 동화된 화인과 그렇지 못한 화인을 구분할 필요성이었고, 화인 사회 내부에서도 양자의 경계를 구획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이다(Tan, 1993: 21~22). 두 경우 모두에서 바바/페라나칸의 ‘타자他者‘는 중국에서 새로 이주한 신케sinkheh新客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라카해협에서 페라나칸 화인의 역사는 15세기 말라카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명대의 대항해가 정화鄭和(1371~1434)의 원정기에도 말라카왕국에 화인사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교역의 속도와 규모가 커지면서 오랜 역사의 아시아 지역이 앤서니 레이드(Reid, 1988, 1993)가 명명했듯이 ‘상업의 시대’(1450~1680)로 불리게 된 것은 서양 식민지화 이전 시기의 일이다. 동양과 서양의 해상 교차로로서 동남아시아에서 항구에 기초한 정치권력들은 해상을 통과하는 해상교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유럽과 중동, 인도, 중국, 일본의 상인들이 해상의 주요 항구와 기지와 지사를 건설하고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만들었다(Clark, 2006: 391). 이렇게 생겨난 항구 도시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정착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임시 머무는 거처를 의미했다.
중국인은 15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지배했다. 18세기를 ‘중국인의 세기Chinese century’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Blusse, 1999; Reid, 1997: 11~14). 중국인이 동남아 도처의 주요항구에 거주하면서 상업활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동남아 해상교역이 ’중국인의 세기‘였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이를 두고 화인 연구가 왕궁우(Wang, 1991b)는 “제국 없는 상인들”이라고 했다. 이 시기 중국 복���성 출신 중국 상인들이 동남아 해상교역에서 제국이란 공권력의 뒷받침 없이도 거대한 교역 제국을 건설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중국인의 세기가 중국 동남 연해안에서 교역과 해외 이주를 금지하는 명청대 해금海禁 정책의 시기와 겹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중국인 해상활동 황금기라는 남송(1127~129)과 원대(1271~1368)의 250년간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런데 이 시기 동남아 지역에 중국인이 정착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명대인 15세기 초부터 중국인 해외 정착이 기록으로 확인된다(Joh, 2009: 5).
명청대 해금정책에도 불구하고 복건성 연안 지역에는 ‘가까운 이들까리 무리를 이루어 바다로 나가 무역을 하는’ 이른바 주사무역走私貿易이 성행했다. 복건성의 상인은 물론 어민과 토지가 부족했던 농민은 “바다가 바로 논밭”이라고 할 정도로 교역에 열을 올렸다(이화승, 2007: 559). 이들은 범선에 상품을 싣고 남동 계절풍을 받아 말라카해협에서 교역을 하다 북서풍으로 바람이 바뀌면 해협 산물을 싣고 귀향하는 방식으로 교역했다. 이러한 교역 패턴에서 주요 항구에 디아스포라 화인 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은 계절풍이 바뀌면 돌아가지만, 누군가는 현지에 남아야 했다. 무역은 물품을 실어 나른다고 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중국산 물품을 현지에 팔아야 하고, 중국으로 가져갈 현지의 산물을 수집하는 네트워크가 갖춰져야 가능했다. 현지에 머물며 교역망을 구축한 이들을 중심으로 동남아 도처에 ‘교역하는 디아스포라’의 화인사회가 생겼다.
타향에 머물던 자들은 해외 이주를 금지하는 해금조례海禁條例 탓에 귀향하고 싶어도 못하는 처지였기에 현지에 정착해 페라나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Tan, 2003: 40).[*청조는 옹정 · 건륭雍正 · 乾隆 연간(1722~1795) 해금조례를 발령하고 해외 도항을 금지했다. 가경 · 도광嘉靖 · 道光 연간(1796~1850)에 해금조례 자체는 존속됐지만 유명무실해졌다. 청조가 조례를 존속시킨 채로 해외 도항을 단속하지 않은 시점과 페낭의 영국 식민지. 건설 시기가 맞물린다는 점이 흥미롭다. 페낭 건설 초기부터 복건성과 광동성 중국인들이 대거 페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정책 변화를 반영한다. 도항을 금지한 해금조례가 폐지되고 이주자의 귀향이 합법화된 것은 1894년의 일이다.] 해외 이주가 불법으로 규정된 탓에 귀국도 불법이었던 것이다. 이다스포라 화인 가운데 일부는 현지 여성과 혼인해 가정을 꾸렸고, 그 후예들이 페라나칸 화인사회를 형성했다. 말라카해협의 페라나칸을 15세기 복건 상인들의 후예라고 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중국인 디아스포라 무역상들은 동남아시아의 항구 도시를 중계무역항entrepot으로 변모시켰다(Loh, 2009: 3). 중계무역항은 지역의 산물이 모이고, 외부의 상품과 산물이 지역으로 분배되는 중심을 가리킨다. 이는 곧 교역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사람의 총체로서의 중심이며, 상품 생산자와 해상 운송업자, 도매상인과 소매상인, 전대업자와 지역 권력자를 포괄했다. 이러한 교역망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중개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은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가운데에서도 페라나칸의 몫이었다. 페라나칸의 특정 지방 디아스포라 화인사회의 일원이면서도 지역의 교역 네트워크를 따라 유동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인도인 무슬림과 힌두교도 상인들이 그러했듯이 페라나칸 화인 디아스포라도 말레이인은 물론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 상인과도 거래를 성사시킬 만큼 여러 언어를 구사했다. 말레이반도 북부의 술탄국 커다의 페라나칸 화인은 말레이 지배���리트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술탄을 위해 세금을 징수했고, 지역 시장에서 현지 산물과 외래의 잡화를 교환하는 상인이기도 했다(Khor, 2006: 60). 이렇게 수집된 해협 산물들은 항구 도시의 시장으로 모이고, 거기서 중국인 해운 업자에게 팔려나갔다.
말라카에서 여러 방언 집단으로 이뤄진 페라나칸 화인 사회는 공통어lingua franca로 ‘바바 말레이어Baba Malay’를 사용했다. 말레이어를 뼈대로 복건 방언이 대폭 차용된 것으로, 중국인과 말레이인의 교역에 쓰인다고 해서 ‘시장 말레이어bazaar Malay’ 혹은 말레이어와 복건 방언의 혼성어라는 의미에서 ’피진 말레이어pidgin Malay’라고도 한다. 출신 지역에 따라 방언이 다른 중국인은 바바 말레이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말라카해협의 페라나칸 화인은 오랜 세월 여러 세대가 이어지면서 현지의 말레이인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말레이 세계와 문화적으로 동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말레이인의 관습인 빈랑 씹기를 하고, 말레이의 향료를 많이 넣은 이른바 ‘뇨냐 음식’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페라나칸 화인은 전래의 조상 제사를 깍듯하게 모셨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지도 않았다. 말라카의 바바, 즉 페라나칸 화인 남성의 차림새는 중국 남부의 중국인과 다를 바 없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외부를 걸치고, 변발한 머리에는 두개모頭蓋帽를 썼다.
해협 일대에서 활동하던 페라나칸과 구분해, 중국에서 태어나 곧바로 페낭으로 이주한 중국인을 ‘신케’라 했다. 신케의 급속한 유입으로 페낭의 화인사회는 이전의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사회와도 질적으로 달라졌다. 이로써 페라나칸 화인은 신케와 대비되는 ‘현지 태생‘의 화인을 가리키는 화인사회 내부의 범주가 되었다(Tan, 1997: 105). 아울러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화인사회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말레이 문화를 수용해온 문화적 수렴화의 흐름도 바꾸었다. 이주자 인구 변동으로 페낭의 화인사회에서 기존의 바바/페라나칸 전통은 약화되고 다수를 차지하는 신케의 중국 문화가 강세를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Khor, 2006: 60).
(86~91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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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ijeon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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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mi)umblr
결국에는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책상에 앉았다. 공들여 글을 쓰기에는 너무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이 시간 내가 글을 읽거나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지금 내 머리에 무언가 새로 집어넣을 에너지는 남지 않았지만 머리에 있는 것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낼 수는 있겠다고 생각해서 tumblr를 열었다. 순간을 스치는 상념에 너무도 어울리는 공간이 아닌가.
오래전 이 사이트를 감정쓰레기통 정도로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글들의 대부분은 텍스트파일로 백업을 해놓고 여기에서는 삭제하였는데, 얼마전 임시보관함을 보니 끝까지 써내지 못한 글이 열개도 넘었다. 당시의 나는 귀신들린듯 글을 써내려갔던 것 같다. 초고를 그대로 올리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절한 진심이 담겨 내가 보기에는 참 좋았다. 최근에 와서야 나에게 이 사이트를 통해 공감하고 소통하는 감사한 이웃(?)이 소수 생겼지만 당시에는 내 글을 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적다가 'tmi이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내지 아웃팅에 대한 공포심에 덜컥 덜컥 막혔던 기억이 있다. 일기장도 아니고 누구나 볼 수 있는 인터넷에 올리면서 뻔뻔하게 그런 걱정들을 했었다. 관심과 위로가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이었을지도.
상황은 그때에 견주어 많이 나아졌다. 평안과 스트레스프리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지만 조금씩 나 스스로를 되찾아가는 길이다. 이렇게 '진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지금의 tumblr만큼 좋은 공간은 없는 것 같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말하기 어려운 비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서로 공감하며 위로하고, 위로받는 공간이라니.. 고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직까지 잘 남아있어주어 고맙다. (내 잠도 좀 재워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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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fe0605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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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여행
오래전 사십중반 무렵에 입사동기이고 절친 친구와 처음으로 하계휴가를
가기로 하고 알뜰히 즐기기 위해 상사에게 살살 거려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고 친구와는 금토일 3박 같이 지내고 월부터 일까지는 헤어져
각기 여행을 하기로 하고 동해안 콘도에 도착
횟집, 노래방등을 거쳐 콘도 입성 취침주 폭탄주 걸치고 친구부부는
거실에서 우리부부는 방에서 자기로 하고 취침
누워서 아내를 슬슬 만지다가 오줌��고 자야지 하고 화장실 가는데
거실부부 홀라당 벗고 친구 마눌하고 한판중이다.
몰래 오줌싸고 와서 술도 취하고 꼴리고 해서 마눌과 한판하다가
여보 철수 미영이 열심히 하는 중이다, 하니 엄청 흥분하네
평소 부부모임에서 술 취하면 당시 소라등 스와핑 3섬 심심찮게
술안주 하던 시절, 철수야 스와핑 3섬 안주거리로 등장하면
아내들은 미친놈들 별 지랄을 다하고 세상이 무너지네 하면서
엄청 비난했지만 집에 올 때 아내는 흥분되더라.
팬티 축축해지더라 솔직히 할 때 우리도 한번 해볼까 하면
콱 직이까 정도 아내는 철수 부부와 저녁 술하는 거 좋아한다.
철수가 나보다 좀 잘생기고 멋진 구석이 있다.
철수도 아내와 떡칠 때 도우미용으로 스와핑 3섬 거론하며
박으면 아내도 엄청 흥분한다고 귀띰 하곤 했다. 서로
침대에서 둘이 박다가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 여보 강수씨
아까 본 거 아니야 하는 소리 들리고 철수는 강수도 하고
있는데 신경꺼 하면서 계속 즐씹을 한다.
나는 순간 급속히 박아대니 아내가 절정에 오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내 손을 잡고 철수와 미영 옆에 아내를
눕히고 박기 시작했다.
미영이는 못본거 같고 철수는 약간 당황한 듯 하지만 계속
업무 진행하고 내 아내 미수는 엄청 흥분하여 소리가 커지자
거의 사정을 향해 달려 두아내가 점점 고조되는데 이때
미영이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는 순간
내가 철수를 쳐다보고 철수도 나를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서 나는 미영, 철수 미수에게
가서 묻지도 않고 삽입 마구 마구 급속히 박아대니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두 아내는 어쩌지 못하고 쾌감 흥분되어 비명을
지른다 어억 아악 으아악 열라 박아대던 우리는 미영과 미수
보지에 싸버린다. 서로 다른 아내보지에 싸버린 우리는
멍하니 있으니 아내들이 좆을 빼더니 화장실 가고 나오더니
한명은 침대에 한명은 바닥에 무릎을 안고 말없이 앉아있다.
철수와 나는 친구야 우리 슬기롭게 해결하자 .
각자 아내를 데리고 나와서 술을 마시며 벌어진 일 방법없고
우리는 평생 보고 살아야 할 사이잖아.
이런 상황을 신속히 해결하고 친밀감,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자. 그래서 오늘 저녁 바꿔서 자자 장장 1시간 설득하여
먼저 아내가 말없이 끄떡이자 미영도 끄떡
우리는 바꿔서 잤다. 그날밤 우리는 새벽까지 했다.
바꿔서 하는게 이런 건줄 몰랐다.
밤새 나는 미영이를 철수는 미수를 애무하고 박고 또박고
아내들도 밤새 받아준다. 괴성을 지르며 흥분하더군
토요일 아침도 거르고 우리는 12시경 일어났다.
완전 서먹한거 어색한거 없애자 내일까지 이방안에서 모두 나체다.
월요일 아침까지 이렇게 바꿔서 다니고 바꿔서 잔다.
이후 아무일 없듯이 살아간다. 오케이 베리굿
관광하면서 교환한 부부는 각기 따로 몇시 까지 여기서 만나자 하고
헤여져 돌아다니가 만나서 저녁먹고 노래방에서 신나게 놀다가
콘도와서 홀딱벗고 놀다가 밤새 또 밤새 섹스했다.
싸고 나면 좀 있으면 발기되었다. 신기하고 기적같은 발기가 지속된다.
아내들은 신음과 비명에 미쳐가더군
일요일 12시 까지 자다가 처먹고 온천 가족탕을 예약 해서 푹 담그기로
교환부부는 가족탕에서 씻겨주고 빨아주고 최선을 다한다.
두 아내는 봉사 또 봉사하는 두남편에게 감동을 받는다.
우리는 지상 최고의 부부고 교환부부도 최고다 라고 감동한다.
내일 아침이면 원래대로 다.
그리고 헤어진다. 아쉬운 교환부부 두쌍은 밤새 열심히 빨고 박아댄다.
오늘 밤은 불편한 감정을 완전히 없게 한다. 거실에서 같이 떼씹으로
진행하자.
두쌍은 서로 아내 얼굴을 마주보게 하여 박기도 하다가 원래대로 박기도
하다가 다양한 체위로 즐기다가 싸고 또 밤새 두 아내를 탐닉하고
두 아내는 다른 남편 좆을 탐한다.
두아내 신음소리는 엄청났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 신음소리다.
월요일 아침 차에 짐을 싣고 헤여져 가던중 서로 통화해서
중간 휴게소에서 만나서 아직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한점을 공감하고
토요일 우리 거주지 인근에서 만나자 하고
아내를 바꾼다. 아내들은 남편을 바꾼다.
각 교환부부는 동해안에서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 거주지에 도착한다.
말 없이 미소지으며 원래대로 돌아간 부부는 늙은 지금도 정기적인
모임 참석하면 교환부부로 한판 후 각기 돌아간다.
물론 중간에 서로 꼴리면 당연히 만나서 이제는 서로 집에서
즐긴다.
우정과 사랑은 변함없고 더욱 진해진다.
바꿔서 떡칠 때 서로 사랑해 너도 내 남편 너도 내 아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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