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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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가 토니의 이야기의 사로잡힌 이유 중 하나는, 나도 리처드 범브란트가 루마니아에서 풀려난 지 불과 두세 주도 지나기 전에 그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범브란트가 자유의 몸이 된 때는 1965년이었는데, 그것은 노르웨이의 루터교 선교회가 루마니아 정부에 1만불을 주고 그의 자유를 산 결과였다. 풀려난 직후 그는 노르웨이로 갔고, 당시 우리 가족은 오슬로에 살고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첫 일요일을 맞은 범브란트는 노르웨이 말을 몰랐기에 우리가 다니고 있던 미국 루터교회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홀쭉한 뺨과 움푹 들어간 눈에 헌옷을 입은 범브란트와 그의 아내(그녀 역시 투옥되었다)의 모습은, 교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부유한 서구 외교관들과 매우 뚜렷이 대조되었다. 하지만 그 부부에게는 도무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강한 빛이 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박해의 두려움 없이 자유로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만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것을 계기로 그 교회 목사는 범브란트 목사에게 마이크를 넘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박해의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했다. 내 기억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그가 주일학교를 방문해 어린아이들이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다. 공공연하게 예배할 수 있다니! 루마니아에서는 엄연히 불법 행위였다. 바로 그 순간에도 많은 신자들이 어린 세대에게 몰래 기독교를 가르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실정이었다.
당시 나는 13살 불과했으나 범브란트가 들려준 끔찍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죄수들을 시뻘겋게 단 다리미로 지지거나, 거꾸로 매달아 놓고 피멍이 들도록 다리를 때리거나, 벽에 쇠못을 박아 좁은 감방에 가두는 것과 같은 온갖 잔혹한 행위를 겪었다. 종교인 수감자에게는 특별한 고문이 가해졌다. 예를 들어, 목사들은 오줌과 똥으로 성만찬을 집행하도록 강요당했다. 범브란트 자신이 겪은 최악의 시련은 지하 9미터에 위치한 감방에서 홀로 3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기억을 더듬어 볼 때, 범브란트의 간증이 왜 그토록 토니의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루마니아 목사의 메��지가 청중의 가슴에 진정으로 와 닿고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그가 직접 고난을 당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성품은, 고난이야말로 신앙의 질을 시험하는 용광로라는 성경의 원리를 증언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바울은 기록하고 있다(롬 8:17).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의 전반부, 곧 우리가 그분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는 확신에 속히 이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영적 성장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진정한 성화는 고난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시작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순서를 다시 한번 유의하자. 우리가 너무나 가혹한 시련을 겪어 이 세상에 대해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그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경험이 기독교 세계관을 개발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상을 공부하고 그것에 대해 관해 논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죽고 다시 부활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내면의 영적 실제가 없으면, 우리가 세계관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이 하나의 정신적 운동에 불과할 것이다. 기껏해야 지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이거나, 더 나쁘게는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교양 있고 세련된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기 위해 미사여구를 늘어 놓고 특별한 언어를 구사하며, 몇 개의 인상적인 인용구를 반복하는 것은 사실 누구든지 배우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세계관 연구마저도 우리의 지성을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복종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자만심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의 진리의 복종시키는 첫 걸음이 우리의 허영심과 자만심, 그리고 동료와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얻으려는 욕망에 대해 죽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를 움직이는 세상적인 동기를 떨쳐 버리고, 순전히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시키는 진정한 동기를 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 지식을 타인을 섬기는 데 사용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비록 기독교가 총체적 진리임을 논증하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만일 그 진리를 행위를 통해 가시적으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외부인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기독교를 그저 사적인 은둔처로, 편���한 안식처로,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공상적인 신념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이 구체적인 삶과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지 않고 순전히 추상적 개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라 부르는데, 이는 사상이 구체화되는 실질적인 맥락을 가리킨다. 교회가 바로 복음이 구현되는 “타당성 구조”인 셈이다. 사람들이 눈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사랑과 능력과 선과 같은 초자연적 차원을 목격할 경우에,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우리의 메시지가 비로소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이 불의를 행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이 비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경우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누가 믿을까? 언어로 제시되는 기독교 세계관의 메시지는, 우리의 삶으로 그 타당성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 pp. 649-653, 완전한 진리(Total truth) by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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