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tt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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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tam ·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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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 바튼, 피프티 사운즈 Polly barton, Fifty Sounds 01
서문
 점심시간인데 나는 라임색 올빼미로부터 온갖 잔소리를 듣고 있다. ‘아시나요!’ 올빼미는 내 시야를 가로지르며 젠체하고 으스댄다. ‘미국 내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보다 듀오링고로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더 많답니다!’
 지금은 2019년이고 나는 곧 여름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에 따라 나는 디지털 세상 속의 허깨비나 다름없는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링고의 마스코트로부터 이탈리아어 어휘와 문법, 온갖 잡지식을 배우고 있다. 듀오링고가 존재한다는 건 최근에야 알아냈지만, 알고 보니 23개국의 언어 학습 코스를 갖추고 전 세계적으로 3억 명이 사용하고 있어, 경이로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처음에는 마스코트인 듀오의 날갯짓을 보고 일본에서 만든 것인가 생각했지만, 위의 잡지식 퀴즈를 보면 짐작이 가듯이 이 회사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듀오링고는 루이스 폰 안과 세버린 해커의 ‘무상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에서 탄생한 발명품이다.
 듀오의 울음은 소리가 없지만, 야단법석으로, 반쯤은 미친 것처럼, 디즈니 악당처럼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돈다. 아시나요! 아시나요! 아시나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나는 몰랐다. 적어도 큰 눈망울에 긴 속눈썹을 가진 듀오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몰랐다. 화면에 10번째 팝업이 뜰 무렵부터 나는 이 잡지식 퀴즈에 정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이 퀴즈와 마주칠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약간의 찝찝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점심 시간을 듀오와 함께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듀오의 학습 방식에 회의적인 입장은 아니다. 공립학교의 언어 교육과 듀오의 학습 모델을 비교하는 것이 일견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수많은 언어 중점 어플리케이션과는 달리, 듀오링고는 오디오 콘텐츠가 전혀 없지는 않다. 실제 사람들이 말하는 클립이 있어, 사용자가 마이크에 대고 문장을 말하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사용자들이 적어도 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들리는지, 그리고 입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상호작용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레벨 잠금 해제 구조는 게임 생태계에서 가져왔는데, 이 때문에 사용자가 언어를 진정하게 통달하기보다는 그저 레벨 통과 전략에 집중할 우려도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언어 교육에도 같은 비난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점수 받기를 위한 의미 없는 노력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험 출제자나 녹색 올빼미가 원하는 대로 언어를 배우게 되지만, 이는 그저 시작일 뿐이다. 언어 교육을 접할 기회가 없던 사람들이 언어 교육에 다가가고 즐길 수 있다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왜 듀오의 잡지식이 왜 나에게 불안감을 주며 그 호탕한 자존심을 나는 못마땅해 하는 걸까? 내 불편함의 근원이 지극히 불합리하게도, 듀오가 ‘학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단어는 다양한 강도로 수행되는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데 정당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의 태도가 불합리하다고 말한다. 나의 관대하고 합리적인 부분은 사람들이 하루 5분 또는 20분 동안 듀오링고에서 ‘언어 학습’을 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나는 분개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결국에는 발을 구르는 이를 다치게 하는 발도장을 찍으며 세상이 진짜 진실로부터 ���을 돌렸다고 정해버린다. 이 부분에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또 다른, 훨씬 덜 안정적인 형태의 학습, 듀오링고의 야단스러운 네온 색깔에 대항하는 라듐과도 같은 학습 방법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언어 학습 방법은 감각의 폭격에 대한 것이다. 그건 뭔가에 홀리거나 악령이 들리고, 몸을 뺏기는 것과도 같다.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의 물결과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통제 불능의 방식으로 산발적인 연상 이미지들의 공격으로 귀를 막고 싶어지지만, 실제로 귀를 막는다고 해도 머릿속은 반향실로 남게 된다. 나를 매료시키는 언어 학습은 출퇴근에 활기를 주고 ‘연속 5번 정답! 잘하고 계세요!’ 같은 메세지로 도파민을 분출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고, 다음에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자신의 자존감을 거는 것이다. 제대로 이해해서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입증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유아기 때 분명 경험했는데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학습의 일종이다. 때로는 너무 어려서 그 경험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 그 자체에 정말 불안정한 무언가가 있어서 존엄하고 수치심을 두려워하는 우리 인간은 그 경험의 기억을 억압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목표나 경계를 모르는 학습 방법으로, 흔히 ‘몰입형 학습’이라고도 일컫는다. 수영을 한 번도 배운 적도 없으면서 용감하게 바다에, 그것도 알몸으로 뛰어드는, 고독한 인물이 떠오르게 하는 학습법이다.
 독선적인 말투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몰입’이야말로 바로 내가 일본에 갔을 때 겪었던 거다. 몰입이 나에게 일어났다고 말하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가기 전에 알았더라면, 일본에 갈 만한 배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잘했다면서 나 자신의 등을 두들기고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적어도 나 자신은 안 그런다고 생각한다. 녹색 올빼미의 오만함과 마주하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고는 내 마음 한구석에 이런 경험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 마음은 이성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출퇴근길에 친화적인 이 앱의 목표 중심적 합리성에 분노를 느낀다.
 특히 내가 듀오에게 말해 주고 싶어 안달인 것은 다음과 같다: 알고 있니! 완전 초보자로 외국어에 몰입하면, 목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목표가 무엇인지 개념화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없어! ‘읽는 법 배우기’나 ‘유창해지기’ 같은 중요한 목표는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를 찔러 볼수록 점점 더 의미가 없어 보이기 시작���!
 외국어에의 몰입은 소리의 폭격이다. 이걸 붙잡고 배우기 시작할 거라고 자기 자신이 선택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 뒤에는 벼락치기의 폭격으로 변한다. 일단 이것 배우고, 이것도 배우고, 또 이것도 배우고. 일단 기초부터 시작하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물결 속에 던져질 때 머릿속의 목소리가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모르는 언어로 생활하다 보면 이 ‘기초’라는 범주가 이론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괄하는지 점점 분명히 보인다. 인사말과 일상적인 대화는 당연히 기초며, 기초적인 동사 형태를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숫자가 기초 중의 기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색깔, 옷,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목, 동물, 날씨와 관련된 모든 것, 사람을 묘사하는 형용사들처럼 말이다.
사실 모든 사물이 기초 어휘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어렸을 때 모국어로 처음 배울 곰인형, 유모차, 신발끈과 같은 단어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면 더욱 걱정될 것이다. 그리고 정의, 우정, 쾌락, 악덕, 허영과 같은 추상 명사처럼 가장 근본적으로 보이는 어휘들도 있다.
 이 외국어가 당신이 알고 있는 언어와 완전히 다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말하기의 ‘기초’를 숙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기초가 글자의 형태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어는 표음 문자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묶어서 가나로 통칭한다)가 각각 46자씩 갖춰져 있고, 중국 한자에서 유래한 칸지 2136자가 공식적으로 ‘통용 문자’로 간주되어 총 세 가지 형태의 문자 체계가 존재하는 점에서 끝없는 선물을 주는 언어다. 즉, 당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 깨닫게 해줄 기초 어휘가 절대 부족하지 않다는 거다.
 지난주(정말이다) 나는 ‘올빼미’를 뜻하는 한자를 찾아봐야만 했다. 완전히 모르는 한자는 아니고, 어디선가에서 배웠다가 잊어버렸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맞다, 이건 자주 사용되는 한자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번역가가 아닌가. ‘올빼미’ 정도의 기초 어휘는 알고 있어야만 했다.
 올빼미 한자를 절망적인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2분 전의 내가 기억만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어떻게 나무에 앉은 다리 없는 새1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아해 했는데, 일본어를 배운지 2년이 조금 넘었던 시절, 런던의 소형 일본 출판사에 막 취직했던 오래 전의 일을 불현듯 떠올렸다. 어느 날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책상으로 다가오는 선배 직원 O를 보았다. O의 손에는 직원들이 휴가를 신청하거나 보고할 때 제출하는 서류 두 장이 들려 있었는데,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바로 내가 최근에 작성한 서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폴리 쨩,’ 그는 내 옆의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음모를 꾸미는 것 같기도 하고 설교하려 드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얘기 좀 하자. 한자 사용이 엉망이네.’
 ’아,’ 이것 말고는 할 만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 들을 말에 대한 걱정이 앞섬과 동시에, 선배 직원이 직접 시간을 내서 나를 따로 교육해 준다는 것에 으쓱해졌다.
 ‘어떨 때는 완벽하고, 또 어떨 때는 아무 것도 안 맞네.’
 말하면서 O의 눈은 내 컴퓨터 모니터 위를 표류했는데, 그 화면 가장자리에는 내가 한자 몇 개를 작은 포스트잇 메모지에 써서 붙여 놓았다. 그 중 하나는 ‘까마귀’였던 것을 기억한다. ‘새’와 같아 ��이지만 눈을 뜻하는 획 하나가 빠져 있다.2 지난 주에 부탁 받은 번역 자료에서 나온 실수인데, 그때는 몰랐던 차이였다. ‘저건 필요 없어.’ O는 까마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는 다른 포스트잇 메모지 위로 손가락을 맴돌며 내가 필요할 것들과 필요 없는 것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매의 눈으로 문제가 된 서류를 다시 보았다.
 ‘이것 봐.’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말했다. ‘여기에 뭐라고 썼는지 보렴. 가장 중요한 게 빠졌네. 완전히 다른 뜻이 되어 버리니까 한자는 일부분을 이런 식으로 빼먹으면 안 돼. “문제”라고 쓰려고 했는데 “몬”이라고 썼잖아.’
 내가 따라잡기 힘들어 한다는 걸 느꼈는지,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고는 적대감이 느껴지는 선명한 영어로 한 글자씩 말했다. ‘’몬’은 ‘문’이라는 뜻이야. 너 ‘문’이라고 썼다고.’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고, 역시 그의 말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쓴 서류에는 ‘건강 문으로 인한 예기치 않은 결근’3이라고 영어로 번역할 수 있을 만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에피소드는 그때처럼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입장을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즉, 나는 항상 문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 절에서나 볼 수 있는 크고 우뚝 선 문이다. 나는 그 빗장 앞에 서서 문지기들의 환영을 받기도, 빈축을 사기도, 쫓겨나기도 하면서 가끔씩 드나들고 있다. 그 안에 있을 때도, 언제든지 다시 밖으로 밀려나거나, 내가 몰랐던 기초적인 요소들이 나에게는 없다는 걸 항상 의식하고 있다. 가끔은 내가 일본어 학사 학위를 땄거나 제대로 된 어학 코스, 혹은 박사 과정을 밟았다면, 즉 기초를 쌓는 과정을 어떻게든 나보다 더 큰 시스템에 맡겼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자문한다. 대답은, 조금이다. 뒤통수를 맞고, 문의 다른 편에 서 있다는 걸 갑자기 깨닫는 게 조금은 책임감이 덜할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학습이 주로 독학적인 형태를 띠는 경우, 무언가를 숙달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들을 직접 알아차리거나 누군가 알려주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다른 자료를 참고하지 않는 한, 학습이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모두 언어에 노출됨과 그 노출을 인지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특히 전에 경험한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언어와 문화는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그 다름을 알아채고, 분노하거나 흥미를 느끼고, 이국적으로 바라보고는 마음껏 흡수하고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로 둔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문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충만함에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도에 휩쓸리고, 꿀꺽 삼키고, 뱉고, 수면 위에 떠오르기 위해 물장구를 치느라 너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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