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mmkzzibba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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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방에는 커튼이 없다.
빛에 따라서 시시각각 바뀌는 방의 모습을 그다지 공들이지 않고도 볼 수 있었다. 그는 방에서 수면하는 일 말고는 가끔씩 통로처럼 오갈 뿐이었다. 사계절 닫히지 않는 창문을 통해서 좋은 꿈을 꾸거나 좋지 않은 꿈을 꾸는 가장 내밀한 숨소리나 뒤척임의 모양을 보이다가도 날이 밝으면 꿈이라고는 영영 꾸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가끔 날씨를 가늠하려는 듯이 창가에 바짝 다가오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그를 지켜보던 것이 발각될까봐 서둘러 나뭇잎 사이로 몸을 숨겼다. 새도 지저귀지 않고 벌레도 울지 않고 바퀴 두 개 바퀴 네 개가 굴러가지도 않는데 해만 뜨면 어떠한 기척이 생기므로 해가 뜨는 소리라는 것이 있어 다 듣는 사람인 양 바깥을 여겼으므로 그가 오랜 잠을 잘 수 없는 것은 당연해보였다. 나를 보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은 일일히 다 보는 그에게 좀처럼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지 몇 년이나 되었다. 그가 외출한 낮의 나절 동안에도 나는 여간해서는 그의 방 창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는 너는 네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말아 한철을 보낸 뒤에 내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야. 가끔 그런 말을 들려주는 꽃이나 모기와 매미나 열매나 눈의 결정 같은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 너무 멀지 않은 곳까지 배회하고 되돌아오는 길만이 그와 관련되지 않은 유일한 일이었고 길이었다. 길. 그것은 삶과 동등한 말임을 알고 있다.
나의 삶에도 골칫덩이는 있었다. 그가 키우는 한 마리의 커다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방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빨래처럼 널리면서 가장 먼저 바람을 맞는 곳에 빨래처럼 가끔 나부끼면서 그의 정물화를 엉망으로 만드는 장본이었다. 나는 그 문지기의 은근한 소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감시자처럼 나를 주시하는 눈깔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고양이가 내 정체를 탄로하려는 듯이 바깥을 향해 울면 그는 무언가를 찾기는 하지만 그다지 찾아내려고 힘 쓰는 기색 없는 엉성한 모습으로 내가 숨은 수풀 쪽을 넌지시 내다보면서도 고양이를 달래고 어르는 일에 조금 더 집중했으며 나는 불현듯 타오르는 질투심에 몸둘 바 몰랐다. 그 불온한 마음의 대상이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만이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의 방에 침입자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첫 번째 침입은 바로 내 몫이 되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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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kzzibba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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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학부생일 때 연우무대라는 소극단의 단원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연기를 했는데 후일에는 연극본을 집필했습니다. 나의 친조부는 직접 쓴 시를 엮어 책으로도 만들던 분이셨는데 아빠는 글을 쓰는 데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제인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피는 어떠한 식으로든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문학을 공부하고 지금도 어떻게든 무엇이든 쓰려고 애쓰는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릴 때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문제집을 읽어 내려가다가 아빠의 원고가 지문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모른 체할 정도로 어째서인지 아빠를 남부끄러워 했습니다. 아빠 앞에서는 그날 배운 일본어 낱말을 발음하는 일도 창피해지던 것이 나이를 조금 먹게 되었다고 쓴 시, 쓴 소설 같은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기 이전에 영상물을 연출하고 싶다고 어떠한 포부 비슷한 것을 놓았었는데 현장에서 발로 뛴 아빠가 그런 것은 여자애가 하기에는 고단하니 그 앞의 수순을 빼앗으라고 첨언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착실히 그렇게 했습니다. 글은 밑그림, 글은 밑그림. 그렇지만 쓰다 보니 밑그림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고 외따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굶주려도 좋으니 내가 다하지 못한 예술을 하라고 일찌감치 어린 딸에게 빛을 찾는 방법 대신에 그림자로도 잘 사는 방법을 가르친 아빠는 아빠가 된 순간 노인이 되었다. 늙은 아빠는 가정으로부터 달아나, 멀리 달아나 얼마나 멀리 가고 싶었던지 배를 타고서 바다 한가운데 가로지르고 한 계절씩 거기에 부표처럼 떠 살기도 하는 직업을 간신히 얻었다가 더 늙어서는 몇 번 죽기를 실패해 미쳐버린 내 손위 자매의 뒷바라지를 위해 땅으로 눅눅히 되돌아왔다. 노인은 그림자로도 자리잡지 못한 나를 나무라지 않고 그는 처음에는 연기를 했는데 내게 처음을 자신의 소중한 표상체를 떠안긴 사람처럼 나의 연기 공부를 물심양면 돕는다. 새로운 인생은 어디에, 내 질문에 그런 것은 없고 다른 것은 있으니 남의 것이 있으니 빼앗아도 된다고 말한 아빠는 내게 가짜 삶을 배역을 다른 사람의 모습을 실현 가능한 판타지를 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 이 중에 어떤 말들만이 진실인 걸까요? 당신이 훈육기에 ‘빼앗기’만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나는 내 것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랐어요. 자라버리고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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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kzzibba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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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쿠로 책 샀다. 이번에 받을 책은 실컷 찢다가 질리면 버린 스도쿠처럼 그러지 말아야지. 모바일로 하는 마작이나 체스는 안 맞는 것 같아서 실제로 만나 그런 것을 함께 하는 곳이나 사람들이 있는지 알아 보았지만 실제로 무엇을 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누구나 핑계나 구실로 여기던지 말던지 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 주어진 시간이 업보라고 여길 때는 시간만큼이나 나에게 넘쳐흐르는 것이 없는데 시간이 없어 할 일 하고 싶은 일 못한다는 말은 어쩐지 궤변처럼 들린다. 한동안 나는 약 없이 술 없이도 잘 잤다. 원래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처럼. 잊고 있던 걸 되찾은 사람처럼 말이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길에는 높게 돌담이 쌓인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오늘 주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기도하는 소리가 색유리 너머로 잘 들렸다. 걸음까지 멈추고 오랫동안 훔쳐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낯선 공간에 균열을 만들고 들어가는 일 같은 것을 자주 상상하게 되는 걸까. 이전에는 환영 받고 싶은 욕심이라고 판단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잠시 경계하는 응시에 노출되었다가 원래 그렇게 하고 있던 사람인 것처럼 있고 싶은 것 같다. 사람들의 태도는 카메라의 플래시처럼 짧고 강렬하고 나는 숨은그림찾기 속 숨은그림처럼 완벽하지 않게 한 폭에 담겨 있다가.
발각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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