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kgoyoh-96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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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달성한 K 시인에 관한 기사가 줄줄이 흘러나오고 나는 엇비슷한 헤드라인 사이를 헤치며 큼직한 단어들을 띄엄띄엄 해석한다.
 K 시인
그남은 문단의 큰 뿌리인 원로 시인으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는 D 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좌 교수와 K 대학교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였으니까. 일 년에 한 번 정도 강연을 한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배팅되던 인간이었지만 관심 없었다. 오히려 나는 K 시인의 시를 고루하다고 여겼다. 뻔한 문장 같고 시시해 보였다. 자연물을 예찬하는 짧고 짧은 시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가벼이 저으며 모니터 속 활자에 집중한다. 입학 후로는 항상 이렇다. 도저히 읽는 것에 집중하기 어렵고 순식간에 다른 생각에 빠져버리곤 한다.
 미투
이 말이 언제부터 자주 보이기 시작했더라. 미국에서부터 시작했나. 아니 그보다 훨씬 전 해시태그를 타고 얘기한 적 있지 않았나.
대부분 기사에서는 아직 가해자라고 단정 짓기 이르다는 견해가 많았다. 그 이유로 첫째, K 시인이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만약 불편함을 끼친 부분이 있다면 사과한다고 했다. 최초 고발자인지 대중인지 자신을 믿고 따른 사람을 향해서인지, 대상이 누구인지 모호했지만. 둘째, 법정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그 법은 누가 만들었나. 누가 행하는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포털사이트 기사 댓글 창은 보지 않았다. 댓글 창은 대체로 먼저 점령한 사람들의 입장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곳은 이십 대와 삼십 대 남성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누가 더 억울한지 호소하고 있겠지.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를 잡아야 한다느니, 증평 군부대에서 있었던 불의에 사고를 기억해야 한다든지, 1호선이 시끄러운 건 노인 때문인지 아이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누구 때문인지, 물가도 비싼데 그냥 국밥이나 먹으라는 둥. 3000개의 댓글은 따로 놀고 있을 것이다.
 숨 가쁘게 클릭하던 마우스와 손을 잠시 분리한다. 네이버 포털사이트, 다음 인기글, 네이트판, 트위터, 페이스북, 워마드, 인스타그램, 디시인사이드 실북갤…을 돌아다니며 K 시인의 이름을 쫓았지만 머리에 남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액정 너머 갇힌 활자를 읽는다기보다 눈으로 빠르게 훑는 행위였으니까. 그만두자.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잖아.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당장 내일 소설 합평이 있었다. 벌써 새벽 세 시, 쓸 수 있는 시간은 다섯 시간 남짓. 일부러 기한까지 미루려던 건 아니었다. 실은 두 달 전부터 오늘을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얇은 플롯을 짜고 초고를 끄적이다가 결국 엎고 새로 쓰는 중이다. 원래 쓰던 글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방안에서 가만히 있다. 암막 커튼을 쳐놓고 침대에 누워서 매트리스 속까지 파고드는 상상을 한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의 색을 탐색하다가 문득 깨닫고 만 거다. 아무리 깊이 고민하고 말을 늘여놓아도 결국 나 이외에 아무도 등장하지 않을 거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마흔 명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이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주제가 무엇이죠?
왜 이 인물은 아무것도 하지 않나요?
누워 있기만 한 행동은 무슨 의미를 지니나요?
이런 건 소설이 아니에요!
사고의 회의 끝에 나는 저녁부터 새로운 소설 쓰기에 돌입했다. 그건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 영화나 소설에서 본 것 같은 것들을 무자비하게 섞었기 때문에.
남자가 있다. 여자도 있다. 남자는 세 번째 수능을 망친다. 현역일 때보다도 쓰레기 같은 성적을 받았다. 둘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사귄 사이다. 그 당시 남자가 여자보다 공부를 더 잘했다. 틀림없이 서울대에 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자 자신과 그 주변에 모두가. 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서울대에 갈 거라고 말한 적이 없다. 꼭 가야 한다고 부담감을 주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그게 되려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말없이 웃는 저 얼굴은 기만인가. 끝까지 앉아서 시험을 칠 이유가 없었다. 수학을 완전히 말아먹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배부른 남자는 학교를 빠져나왔다. 걸었다. 여자에게 서운했다. 화가 났다. 예전에는 나보다 못했는데. 헤어지지 않는 건 동정인가. 나를 우습게 아나. 남자는 소주를 사서 단번에 들이붓고 전화를 건다. 여성의 몸과 행복이라는 교양을 듣고 있던 여자가 강의실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 뒤로 들리는 웅성거림, 날카로운 교수의 목소리. 남자는 그런 것이 부럽지 않다. 여의도 한강 공원으로 와. 여자는 왜 이 시간에 전화할 수 있는지 다짜고짜 오라고 하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의문을 갖지 않는 걸까. 남자는 여자를 만나면 물어보기로 결심한다. 무엇을? 질문에는 답이 있다. 어떤? 남자는 빈 소주병을 아스팔트 위에 던진다. 산산조각이 난 초록빛이 마음에 든다. 손바닥만 한 조각 하나를 주머니에 넣는다. 그의 눈은 근 삼 년 중 가장 예리했다…
남자는 왜 화가 났지?
여자는 왜 말을 하지 않지?
남자는 여자를 죽이고 싶은 것인가?
나는 죽일 것인가?
이건 두 달 내내 붙잡고 있던 ‘나’의 글보다 분량이 세 배 정도 많았다. 분량은 진작 넘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관성적으로 쓰고 있었다. EBS 다큐멘터리 속에 사는 목동 삼수생이 디시인사이드 수능 갤러리에 자살 예고글을 올린다. 악플만 달린다. 그는 어쩐지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참으로 평범하다…  
예전부터 이렇게 썼고 지금도 이렇게 쓰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노트북을 소리 나게 덮는다. 아래아 한글에 저장을 안 한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곧장 침대에 들어간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눈을 감는다. 새벽 네 시. 감정은 올라오지 않았다. 생각하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눈을 떴을 때는 정오였다. 집은 비어있었다. 잠에 취해 해롱거리던 나는 학교에 가지 않은 걸 약간 후회했다. 발표를 빼먹고 성적이 깎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순수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학교는 어떤 분위기일까. 애도가 필요한 초상집 분위기일까. 전쟁 후 남은 폐허처럼 고요할까. 과사무실로는 K 시인을 찾는 전화가 밀려들 것이다. 남교수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저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이가 비난받는 걸 견디기 힘들어할까?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떠든다며 불쾌해 할까? 얼른 해결되기만을 기다리며 평정을 가장한 불안을 흘리고 있겠지.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리면서 아주 잠깐 즐거웠다. 그게 오 분 정도였다. 사실 그런 상상은 현실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았다. 학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대로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세간이 시끄러운 것과 별개로 굴러가는 세상인 것처럼. 아침이면 축축한 풀 냄새가 나고 안서호에는 잔물결 하나 없는 유유자적한 캠퍼스. 굳이 단체 카톡방이나 에타 게시판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날 이후로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종강까지 한 달이나 남았고 아마 모든 과목에서 F가 나올 테지만 상관없었다. 더는 글을 쓸 수 없었다. 아직 남자는 술에 취한 채 한강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이 글을 묻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고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녀석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쓴 블로그. 구독자 수는 한 자릿수를 오갔지만 일기를 쓰고 백일장 후기를 쓰고 책 리뷰를 쓰고 영화 리뷰를 쓰고 참 열심히, 꾸준하게 무언가를 채워 넣었던 장소다. 제일 마지막으로 쓴 글은 문창과 합격글이다. 여태 쓴 글 중에서 가장 공감 수가 높았다. 총 이백 개의 글이 포스팅되었고 비공개 글까지 합치면 오백 개 남짓 되었다. 어디 가서 말 못할 망상, 욕, 한탄 글부터 공모전용 글과 실기용 꽁트 백업까지 전부.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고민은 짧았다. 블로그를 구매한다는 쪽지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열 개의 쪽지 중에서 세 곳에 답장했고 제일 빨리 연락이 온 사람과 채팅했다. 팔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블로그를 심사하기까지 며칠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에게 주소를 보내준 후 나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비공개 포스팅을 전부 삭제했다. 다른 곳에 백업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과거를 모조리 잘라내고 싶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항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확실하게 확인을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냥 절차가 그런 거예요.  
전화로 이런저런 조항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낯선 용어 탓에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건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십 분 안에 입금해준다는 답이 돌아왔다.
비밀번호만 바꾸지 마세요. 그럼 골치 아파지니까요.
내가 다시 그 아이디를 찾게 될 이유가 있을지. 이제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설령 가끔 그리워지더라도 말이다. 계좌를 열 번째 확인할 때 송금 내역을 발견한다. 총 100만 원이었다. 용돈 외에 처음 받은 돈이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지만 그 정도의 금액을 가져본 적 없어서 얼떨떨했다. 일단 당장 맥주와 담배와 햄버거를 샀다. 97만원이 남았다. 야식 같은 저녁을 먹으면서 브이로그를 본다. 고시원 브이로그, 선생님 브이로그, 치대생 브이로그, 고삼 브이로그, 타투이스트 브이로그, 비서 브이로그, 호주 워홀 브이로그… 브이로그의 플롯은 비슷비슷하다. 일어나서 씻고 먹고 화장하고 일하고 먹고 놀고… 차별성 있는 건 각기 열심히 꾸민 얼굴 정도였다. 근데 멜버른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저 사람은 좀 달랐다. 피부는 검붉게 타 있었고 콧잔등에는 기미와 주근깨가 올라와 있었다. 약간 누런 이를 환히 보이며 웃었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떨렸다. 그래, 호주에 가자. 저기는 볕이 좋고 사람들이 많이 웃는다. 인구 밀도가 낮고 인간보다 동물이 더 많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신청만 하면 금방 나온다고 했다.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자. 4등급짜리 영어 실력이지만 저 사람도 처음에 영어를 못했다잖아. 석 달은 동부에서 일하고 석 달은 남부를 돌아다니자. 골든코스트 해변을 가서 트렁크 차림의 산타와 펭귄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거야.
부모에게 F로 가득한 성적표 대신 워홀을 가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베트남 3박 4일 패키지 여행이 해외 경험의 전부인 그들은 워킹 홀리데이와 어학연수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지만 대단한 결심이라고 생각했는지 선뜻 호주행 티켓을 끊어주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학과 소식은 또 다른 미투였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수 년 전의 일로 전임강사였던 그남은 겸임교수가 되어있었다. 왜 이제야 얘기하게 되었냐면 그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해시태그를 타고 목소리는 퍼져나갔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남이 유명하지 않은 탓에 기사화가 거의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남교수의 수업을 들어본 적 없어 이름을 들어도 낯설었지만 스쳐 지나갔을지 모를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마주한 건 내게 혹평을 내뱉은 다른 남교수였다.
그건 소설이 아니다!
발표를 안 하고 늦게나마 메일로 제출하면 최소 점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보내지 않았다. 보낼 수 없었다. 그래. 이건 소설이 아니니까.
 *
 한인 타운 초입에 들어서면 네온 간판 떼들이 보인다. 80년대 드라마를 배경으로 하는 세트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목적지는 골목 안쪽에 있는 포차 형식의 술집. 새마을 운동스러운 초록색 간판에는 ‘NAKWON’이라고 붙어있었다. 여기서 요리 이외의 모든 잡다한 업무가 내가 호주에 오고 겨우 구한 일이었다. 생각보다도 언어의 중요성은 훨씬 컸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으니 하루 중 입을 떼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자연스레 영어는 늘지 못했다. 이력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돌려도 오지잡을 구하기는 무리였다. 더군다나 이력서에 경력이라고 쓸 내용도 없었다. 시드니는 구직사이트 공고글 업데이트 속도가 빠른 편이었지만 그만큼 사람도 많았다. 현지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아르헨티나인, 네덜란드인, 그리스인, 터키인과도 경쟁해야 했다. 나는 언어, 능력, 사교성, 뭐 하나 빠지지 않고 평균 미달이었다. 일을 빨리 구하지 못해서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텔에서 여덟 명이 함께 쓰는 방으로 몰리고 처음 하게 된 면접이 이 한인 식당이었다. 머리가 희끗한 오십 대 중반에 남성은 개인 신상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다가 학교 이름과 전공을 듣더니 표정이 울렁거렸다. 예전에 문학청년이었던 시기가 있었다며 K 시인을 참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사건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건지 한국 소식 업데이트가 안 돼서 그런 건지 몰랐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부터 한 시까지, 총 열두 시간 일하게 되었다. 한국 최저 시급을 겨우 맞춰줬고 야당수당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한국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지만 당장 돈이 궁해서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아직 해가 버젓이 떠 있는 시간이지만 식당 내부는 검푸르게 칠한 창문으로 으슥한 공기가 흘렀다. 천장에는 소주 뚜껑과 꼬마전구들이 얽힌 채 늘어져 있었고, 작고 둥근 테이블 여섯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필라멘트가 반짝 끊어졌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자가 눈이 마주쳤다. 퉁명스럽게 주방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면접을 본 남성은 스스로 사장이라고 말했지만 한 달 동안 일해 본 결과 실제 사장은 여자였고, 남성은 야구 동호회 회원들과 회식하는 주말이 아니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빨간 바구니에는 통마늘이 쌓여있었다. 키가 중학생 정도 되는 여자가 목욕탕에서 쓰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생각하면 가게의 매출이 적지 않을 텐데 부엌에 있는 물건은 대체로 낡았다. 나는 여자를 따라 작은 칼을 들고 마늘을 까기 시작한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면서 서서히 손님이 몰려들었다. 삼십 분도 안 돼서 만석이다. 한국보다 퇴근 시간이 빨랐다. 이들은 가끔 현지 식당을 가더라도 일찍 문을 닫는 탓에 결국 여기로 회귀하게 되었다. 뭐 가장 큰 이유는 혀에 각인된 한식의 맛 때문이겠지만. 짜고 맵고 달고 맵고 뜨겁고 맵다. 가끔 중국인이나 인도인이 오면 반도 못 먹고 남겼다. 메뉴판에는 닭발, 오돌뼈, 제육볶음, 부대찌개, 김치찌개, 육개장… 대부분이 냉동으로 원가와 비교하면 바가지인 가격이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에어컨이 돌아가지만 식당 내부는 후덥지근했다. 손님들의 성화에 숨 고를 틈 없이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한다. 주방에만 머물러 있는 여자는 말없이 빠르게 음식을 만든다. 돼지 비린내와 매운 냄새가 코를 마비시킨다. 어이, 거기, 여기, 이봐… 엇갈리는 호칭들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테이블 간격은 좁고 몸들은 서로 부딪힌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는 손길들이 스쳐 지나간다. 뜨겁고 축축하다. 최선을 다하지만 한 달 일한 거로 오십 년 달인처럼 굴 수 없었다. 술 마시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왜 팔은 두 개밖에 없을까. 플라나리아처럼 몸을 조각내 수십 개의 팔이 있다면 행주로 테이블을 닦고, 소주를 나르고, 뚝배기를 나르고, 달러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얇고 부드러운 피부 밑이 뜨겁다. 은은하게 화상을 입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에 달아놓은 풍경 소리가 울릴 때마다 담배 냄새가 흘러 들어온다. 환기가 전혀 안 되어서 온갖 냄새가 추악하게 섞였다. 어지럽다.
거, 아가씨.
뒤에서 언짢은 기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손에 병맥주와 술잔을 든 상태로 고개를 돌리니 육십 대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얼굴이 검붉게 변색되고 목청이 컸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트림하는 것처럼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났다. 네? 되묻는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술 좀 더 달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무시야! 여기는 직원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부엌을 힐끔 봤다. 분명 소리는 들었을 텐데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 건가. 아니면 무시하는 건가. 화구 앞에서 열중하는 납작한 검은 뒤통수를 보면서 나는 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단번에 튀어나온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자는 대뜸 언성을 높였다.
그게 미안하다는 태도야?
양손이 무겁다. 온 손가락이 부들거리는 게 잘못하면 떨어트릴 것 같았다. 남자의 입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데도 어쩐지 고요하다. 모두 여기를 주시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절대 참여하지는 않겠지. 고개를 떨구고 내게 붙은 채 각기 따로 움직이는 열 개의 생명체를 바라본다. 그냥 이대로 남자의 머리를 가격하고 싶다. 면전에서 휘적거리는 남자의 검지가 내게 닿기 전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닌데. 귀가 먹먹했고 속에서 열이 솟구쳤다. 다음 날 기억도 못 할 내용을 취기에 빌어 막 쏟아내기만 한다. 분명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일시적인 충격은 잠깐 머리를 식힐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오른손으로 맥주병으로 남자의 정수리를 때리고 어안이 벙벙한 때 왼손에 든 컵을 던지는 거다. 그러면 일순간 식당 안은 정적이 돌 테지만 잠깐의 평화가 도래하겠지. 피가 날 수 있지만 얕은 외상에 그칠 것이다. 남자는 기절해서 오늘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유리 조각이 허공에 잠시 떠올랐다가 하강하고 청명한 소리가 뒤를 따른다. 행하지 못할 처벌을 그려보다가 나는 고개를 깊게 숙인다. 그렇다면 그 후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이곳에서 일하지 않을 건가. 도망칠 건가. 경찰을 순순히 따라갈 것인가. 합의할 건가. 철장에 들어갈 건가.
맥주병이 깨졌다. 단지 손가락이 버티지 못해서였다. 아쉬움에 혀를 찬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남자의 두꺼운 손이 내 어깨를 밀쳤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제야 여자가 주방에서 나왔다. 여자는 남성을 보더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고 사과했다. 아주 빠르고 일말의 고민 없이 비굴한 미소를 짓는다. 눈썹을 팔자로 내린 것이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들어보는 쨍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다. 사과의 말에 남자는 더 득의양양하게 화를 내고 삿대질을 했다. 남자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미적지근한 미소를 걸친 채 남자를 만류한다.
여자는 나를 일으켜 고개를 누른다. 말은 담담하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진정성 있는 사과인가. 그 시점에 나는 그들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손바닥에 꼼꼼히 박혀있는 유리조각을 보고 있었다. 피는 나지 않았다. 유리를 빼면 피가 나올 텐데. 그러면 뽑지 않는 게 좋은 건가. 평생 유리조각을 품고 살아가는 건가. 멋있네. 혈액에는 미세한 유리조각들이 반짝이고. 침도 오줌도 날카롭게 변하는 거다. 아주 잠깐 따끔하기만 할 거다. 그래, 유리를 빼면 더 고통스러울 거야. 손바닥에 숭숭 뚫린 구멍을 보는 건 혐오스럽고 아프니까. 나는 손바닥으로 불투명한 검은 조각들을 꼬옥 안아준다. 괜찮아. 익숙해지면 돼.
사장의 남편이 오자 가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화를 토해내기만 하던 남자는 이성적인 척 짐짓 목소리를 깔았다. 바닥을 쓸고 있는 내게 여자가 오늘은 이만 가라고 했다. 얼굴이 평소처럼 굳어있었지만 입매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오늘 보다 내일 더 깨질 것 같았다. 나는 인사하지 않고 낙원을 나갔다. 밤공기가 찼다. 반팔 아래 드러난 맨팔에 닭살이 돋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수구 냄새와 오래된 기름 냄새 밴 거리에는 오래된 케이팝이 고여 있었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걸을수록 점점 어둑해졌다. 가로등의 간격이 멀어지더니 인적 없는 곳에 이르렀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 디딘 땅은 축축했다. 여기가 바닷가인지 물기를 머금은 잔디밭인지도 모르겠다. 냄새에 혹사당한 코는 어떤 것도 포착하지 못했다. 핸드폰을 켜보지만 먹통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과 베드버그로 그득한 방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계속 걸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눈은 건조했고 바람이 닿자 모래를 퍼부은 것처럼 따가웠다. 문득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는지 누구를 향해 화를 내야 할지도 몰랐지만. 억울했다. 그 남자처럼 아무라도 붙잡고 탓하고 욕을 퍼붓고 싶었다. 걸음은 빨라지다 못해 뛰기 시작했다. 바닥이 물러서 발이 자꾸 빠졌다. 시야에 희멀건 무언가 들어찼다. 눈물은 아니었다. 빛도 아니었다. 그것은 풍경을 압사하여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백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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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oyoh-96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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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서울
버스 창 너머로 붉은 물결과 함성이 넘실댔다. 폴리스 라인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듯 수많은 인파를 가뒀다. 혜화역에서 시위가 있었나. 승객들은 대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깥을 구경했다. 나중에 기사를 통해 십만 명이 모인 규모의 시위였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피안은 어쩐지 그때를 상기하기 어려웠다. 삼 분도 안 된 순간이 블랙아웃 돼버렸다.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버스가 잠시 소란스러웠었나, 혹 싸움이 벌어졌던 건 아닌지. 피안이 떠올릴 수 있는 건 당시 휩싸였던 감정뿐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붉은 길을 바라보면서. 어서 벗어나고 싶다고. 숨이 막혔다.
할머니는 이를 기운에 눌린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신기가 예전 같지 않아서 영업을 중단한 지 오래지만 한창 잘 나갈 때는 정계에서 자주 찾던 무당이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다 모인 식사 자리였다. 혼자 서울로 올라온 피안을 염려하던 엄마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증평에서 찾아온 것이었다. 식당에서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왔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고기를 찢고 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한약재 물에 오랫동안 고아낸 닭살은 퍽퍽하고 간이 전혀 배지 않았다. 피안은 대답 대신 갑자기 샘솟은 충동을 내뱉었다.
“지방직으로 바꿀까 봐. 3년째 합격 못 하는 거 보면 인연이 아닌 것 같아.”
대입을 앞두고 있던 열아홉 살의 피안은 공무원 시험을 볼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온갖 변수를 고려하면서 심사숙고했다. 그런데 지금의 선택은 찰나였다. 엄마가 닭다리의 살을 모조리 발라 먹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 그게 현명할 수도 있겠네. 목소리는 그의 예상보다 심심했다. 해가 지날수록 엄마는 고시텔과 학원을 전전하며 3년을 보낸 피안을 사춘기 시절보다 걱정하곤 했으므로 오히려 돌아오는 것을 반기겠다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그는 증평 출생으로 서울로 상경하기 전까지는 수학여행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적 없었다.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테이블에 마주 앉은 셋이 전부였다. 3대가 무담독녀인 집안으로 할머니는 신내림을 받을 때 남자가 도망갔고, 엄마는 결혼하기 전 애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임신이 됐다고 했다. 항상 새로운 직장을 구하느라 바빴던 엄마의 사정으로 피안은 초경을 시작하기 전까지 점집에서 지냈다. 제 미래를 불안해하는 고객들에게 믹스커피를 갖다주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관심 없는 척 서빙한 후 멀찍이 앉아서 귀를 쫑긋 세웠다. 길에서 만나면 할머니를 무시하고 괄시하던 사람들도 이곳만 오면 절박해졌다. 매일 시내에서 전도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마치 할머니가 신인 것처럼 손을 모으고 답을 기다렸다. 나는 대리자에 불과하단다. 후에 할머니는 피안의 생각을 정정해줬다.
신의 존재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떨 때는 사람들의 믿음이 모여서 그 자체가 신이 되기도 하니.  
할머니 앞에 놓인 뚝배기 속 닭은 여전히 얌전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피안은 재채기하듯 웃었다.
 그 해 시험 운이 풀린 건지 그동안 공부했던 시간이 빛을 발한 건지 피안은 네 달 후 최종 합격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약 4년에 못 미치는 기간을 신림동에서 보냈지만 특별히 기억나거나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혼자 지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는 공부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었다. 피안은 열정적으로 불타면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지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고 마실 때 그는 하루에 한 갑 담배를 피우고 여덟 시간의 수면 시간을 확보했다. 다행히 부동산 투자에 소질이 있던 할머니를 둔 덕택에 아르바이트 걱정 없이 용돈을 받으면서 수험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 피안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으나 전화번호를 찾을 수 없었다. 피처폰 전에 사용했던 아이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시험은 끝났지만 손에 착 달라붙는 고아라폰의 느낌이 익숙해진 탓에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피안은 학원 선생들에게 한 달 치 식권을 선물로 주는 것으로 수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증평 시내 읍사무소로 발령받은 후 피안은 민원 접수를 시작으로 제 몫이 아닌 잡다한 업무까지 맡게 되었다. 증평군은 청주시에 비해 작은 지역이어서 뽑는 인력은 적었으나 그게 업무량이 적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개인에게 더 많은 업무량을 할당했다. 절대 워라벨을 실현하며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야근하지 않으면 다행인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철밥통들의 눈치를 견디며 보내는 직장 생활과 잦은 술자리는 보수적인 사내 문화를 보여준다고 얘기할 수 있겠으나… 모르겠다. 피안은 그런 것들을 상세히 읊을 수 있을 정도로 겪지 않았으니까. 그는 암묵적인 규칙들을 무시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독고다이로 지내기를 4년째. 피안은 눈치를 봐야 할 상황에서도 마이웨이였고, 의도적인 악의를 당해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몇 차례 회식 자리에 참여하지 않자 아무도 피안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업무상 필요한 교류 역시 무시하며 따돌리는 행태를 띄었지만 의외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피안은 오히려 공기 같은 존재감이 편했다.
업무 중 활기를 띠는 순간은 아무래도 민원 접수가 쇄도하는 오전―아침잠 없고 부지런한 어르신들이 새벽부터 기다렸다가 밀려오는―시간이었다. 신입으로 들어온 피안과 진희 씨는 데스크 앞에 마스코트처럼 앉아있었다. 옆자리에 진희 씨는 매일 생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얇은 블라우스와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고 한 옥타브 높인 목소리로 모두를 대했다. 그는 검붉게 그을린 아저씨를 상대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옥수수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멧돼지를 잡으라고 난리를 치는 상습범이었다. 민원 접수를 하러 온 사람의 90%는 중장년층으로 과반이 인터넷이나 전화 접수로도 가능한 사안을 토로하고자 나머지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떼쓰기 위해 번호표를 뽑았다. 기다리는 동안 화는 점점 쌓이고 순서가 다가오는 순간 폭발했다. 그들은 일개 말단 공무원이 문제의 원흉인 것처럼 싸우려 들었다. 피안은 그들에게서 점집에서 만났던 손님들이 겹쳐 보였다. 피안 앞에서 앉아 있는 노인은 얼굴의 모든 근육을 일그러뜨렸다.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숨을 못 쉬겠어. 피안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원을 잘 접수했고 조만간 환경부에서 해결안을 발표할 거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자 노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공기 청정 식물인 아레카야자를 키우거나 초미세먼지 방충망을 사는 둥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조언했다. 갱년기를 넘어서 임종에 가까워지는 이들은 ��정적으로 훨씬 예민했는데 피안은 오히려 이것이 다루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의 진심과 공감받고 있다는 느낌을 충족시켜주면 화가 사그라들었다. 여기서 요점은 인간으로서 대우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한 시가 돼서야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편의점에서 점심을 때울 생각으로 일어서는 피안을 진희 씨가 불렀다.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평소 진희 씨는 중장년층의 남성들 사이에서 그들이 사주는 밥을 먹곤 했다. 피안은 그 그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다. 한 달 동안 옆자리에 있었으나 제대로 말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편의점에서 피안은 관성적으로 빵을 집으려다가 내려놓고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골랐다. 진희 씨는 바구니를 든 채 김밥, 샌드위치, 컵라면, 볶음김치, 구운 계란, 하리보, 사이다, 아메리카노… 계속해서 무언가를 담았다.
“점심으로 다 드시려고요?”
진희 씨는 계산하는 동안 머쓱하게 웃더니 단둘이 앉게 되자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은밀하게 말했다.
“오늘 그 날이거든요.”
피안은 순간 알아듣지 못했다. ‘그날’이라는 게 생리 중인 상태를 표현했다는 것은 그 후의 맥락으로 파악했다. 피안은 그간 여초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대체어를 사용하거나 필터링하는 식의 대화에 익숙지 않았다. 진희 씨는 이 기간이면 식욕이 폭발한다고 덧붙였다.
“과장님이 보신탕을 먹으러 간다는 거예요. 저는… 그건 도저히 아니어서.”
고마워요. 진희 씨는 피안 덕분에 빠질 수 있었던 것 마냥 얼굴을 붉혔다.
전자레인지로 모든 요리를 완성한 후 오 분 동안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안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진희 씨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음식을 탐했기 때문이다. 진희 씨는 컵라면과 샌드위치를 해치운 후 하리보를 먹으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입이 벌어질 때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닫힐 때는 색색깔의 젤리 곰을 짓이겼다. 어제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러 왔던 기사의 내연남, 처음 증평에 왔을 때 중년 남자한테 다방 아가씨로 오해받은 썰, 선물용으로 좋은 인삼을 구매하는 법… 피안은 각각 따로 노는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들었다. 진희 씨의 얼굴에서 빛이 도는 걸 처음 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좀 숨이 트이는 것 같아요. 그 아저씨들 사이에서 저 혼자 고생인 거 아시죠?”
장난스러운 말투 속에 가시가 있었다.
“…싫으면 안 가면 되죠.”
“어휴. 그걸 어떻게 그래요.”
진희 씨는 손사래 한 번으로 모든 걸 설명한 것처럼 답했다. 피안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피안 씨 되게 부럽네요. 그 새끼들이 좀 어려워하잖아요. 함부로 대하지도 않고.”
무시와 은근한 갈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피안은 분위기를 깨지 않을 정도로 미소 지으면서 불은 라면을 집었다. 씹지 않아도 면발이 혀로 뭉개졌다.
“짧은 머리도 멋있고. 그거 미용실에서 민 거예요?”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 걸까. 진희 씨는 큰 호의를 보였다. 고작 머리카락일 뿐인데. 피안은 괜히 바리깡으로 민 까슬까슬한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본가로 돌아가지 않은 건 피안의 선택이었다. 덕상리에서는 교통이 불편하니 출퇴근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는 면허가 없었고 한 시간에 한 대꼴로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불편하다고 주장했다. 엄마는 처음에 화를 냈지만 피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타협안으로 엄마가 구해주는 집에서 지내기로 체결했다. 그녀는 고교 동창인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서 읍사무소에서 도보 5분에 위치한 투룸을 잡아줬다. 그 몫으로 비밀번호를 공유하고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통행권을 얻었다. 매일 같이 손수 만든 밑반찬을 냉장고에 채우고 갔지만 피안의 늦은 퇴근 시간으로 둘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피안은 집에서 즉석밥과 절임류 반찬들로 식사를 해결했다. 집 반찬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역했지만 꾸역꾸역 넘겼다.
규칙적으로 담배를 피우던 습관은 자기 전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대체됐다. 피안은 집 앞에 있는 슈퍼 대신 십 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편의점에 갔다. 할머니의 오랜 단골로 데면데면한 김 사장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이사 온 첫날 엄마와 유난히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다. 피안은 제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가 불편했다. 편의점은 새로 들어온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다. 수 킬로미터 방치되어 있던 땅은 재개발돼서 임대아파트를 중심으로 상가들과 도서관이 지어졌다. 편의점은 야밤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점포였다. 피안은 연중무휴 할인하는 해외 맥주 네 캔을 샀다. 앞머리만 하얗게 센 중년 여성이 고개를 푹 숙이고 계산을 해줬다. 피안은 그런 태도가 편했다. 그는 아직 공사장 냄새가 가시지 않은 단지에서 벗어나 하천가로 향했다. 보강천 근처로 공원이 만들어졌으나 사람이 많지 않았다. 노인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유모차를 끌고 미취학 아동이 그 뒤를 따랐다. 피안은 벤치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이곳은 자신이 만든 심즈 속 마을보다 인적이 없었다. 그는 혹여 길거리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쳤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여러 시나리오를 세웠지만 실행시킬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동네였었나. 새삼스럽게 풀냄새 짙은 공기가 적응되지 않았다. 너무 평화롭고 조용해서 소름이 돋았다. 잠시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체감되지 않았다. 앞으로 이곳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잠식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피안은 세 캔을 해치운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대야인지 취기인지 모를 열감이 느껴졌다. 피안은 미지근해진 맥주를 마시면서 하천 옆을 걸었다. 물가에서 더운 바람이 불었다. 자꾸 옷 밑으로 파고드는 벌레 때문에 곳곳이 간지러웠다. 공원에서 멀어질수록 길의 경계가 무너지고 풀이 범람했다. 피안은 팔다리를 박박 긁었다. 가로등의 간격이 점차 멀어졌다. 어둠과 수풀들로 길이 제 목적을 잃고서야 피안은 걸음을 멈췄다. 오전 1시 63분. 핸드폰을 너무 오래 사용했나. 피안은 돌아가면 제일 먼저 핸드폰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질척거리는 땅에서 비탈을 따라 차도로 올라왔다. 진흙이 달라붙은 신발을 아스팔트에 문지르다가 홈 사이에 눌러 붙어있는 벌레를 발견했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버스 정류장이 눈앞에 있었지만 막차는 한참 전에 끝났을 것이다. 점멸하는 가로등 뒤로 십자가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평행하는 일차선 도로와 하천가 주위를 살피던 피안은 자신이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가늠해보려다가 실패했다.
주황색 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둠에 잠겼던 눈이 서서히 익숙해졌다. 아래에서 하울링이 들렸다. 짐승이라 하기에는 가냘프고 사람이라 부르기에는 거대한 소리였다. 날벌레 떼 사이로 무언가 움직였다. 검은 물에 파문이 일었다. 물에서 기어 나오는 그것은 밤보다도 검었다. 물안개가 낀 것인지 그것의 형상인지 모를 것이 시야에 가득 찼다. 피안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와 대치한 상태로 뒷걸음질 쳤다. 도로의 끝에 봉착한 후 그는 뒤를 흘깃 살폈다. 높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놓여있었다. 더 도망칠 곳이 없었다. 뜨겁고 밑 빠지는 감각이 온몸을 묶었다.
월경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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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oyoh-96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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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팅
밖을 나설 때면 선은 안경으로 파리한 눈 밑을 숨겼다. 안구를 간신히 덮는 작은 렌즈에는 도수가 없다. 이것은 몰래카메라로 남자의 물건이었다. 선은 걸레질하던 중, 책상 뒤편에서 먼지와 전선 사이에 끼어있는 까맣고 가느다란 다리를 발견했다. 가족이라곤 선과 아빠 둘뿐이었으니 이 낯선 물건은 당연히 그의 것이겠지만 아빠는 중년의 나이치고 꽤 눈이 좋은 편에 속했다. 안경의 목적이 시력 교정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외양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빠가 패션을 위해 썼을 리도 없었다. 선은 의아했지만 그것도 잠깐, 안경을 책과 책 사이에 놓아두고 다시 먼지를 닦아내는 데 열중했다. 만 원이면 살 수 있을 법한 플라스틱 뿔테는 그리 중요한 물건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특별히 무언갈 잃어버린 기색을 비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선은 굳이 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이 안경을 꺼내게 된 건 얼마 후의 일이다. 만성적인 불면증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다크서클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얼굴에 안경을 걸치니 예민함이 중화되고 무척 평범한 인상이 되었다. 선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오전 여섯시에 집을 나섰다. 아빠가 P 지역 동사무소로 발령받았기 때문에 3학년에 올라가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두 시간 통학해야 하는 거리로 이사하게 되었다. 전학, 즉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건 입시생에게 오히려 스트레스일 것이라며 아빠는 번거로운 수속 과정을 피했다.
역은 출근과 등교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상향 열차를 타기 위해 선은 그속을 비집고 들어가지만 마른 몸은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때 검은 모직 팔이 선의 얼굴을 가격했고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선은 줍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안경을 찾기는커녕 인파에 넘어지지 않게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결국 열차를 놓쳤다. 다소 공간의 여유가 생겼을 때쯤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선은 우두커니 선 채 황망하게 바닥만 내려다봤다. 안경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경을 들던 선은 부러진다는 표현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다리는 부러진 게 아니라 원래 구부러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열린 테 안에는 작은 SD 카드가 들어있었다. 선은 이것이 뉴스에서나 보던 몰래카메라라는 걸 알아챘다. 움찔했지만 금방 평정을 찾았다. 아빠가 추레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안경을 쓰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그와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선은 ‘안경 카메라’를 검색했다. 수많은 정보가 널려있었다. 의외로 쇼핑몰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다리 중간 부분에 동그란 나사처럼 보이던 것은 전원 버튼이었다. 테 끝부분에 나 있는 둥근 구멍에 케이블을 연결하면 충전되었다. 선은 핸드폰이나 컴퓨터 케이블을 모아 넣는 서랍을 열었다. 비슷비슷한 선들이 엉켜있었는데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빠는 아예 감출 생각 자체를 안 한 것 같았다. 안경을 컴퓨터에 연결하여 충전하는 동안 선은 이 물건을 요리조리 살폈다. 카메라 렌즈는 어디에 있을까. 알과 알을 잇는 테 부분에 있다는 설명을 읽었지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선은 SD 카드를 노트북에 꽂았다. 폴더 안에는 80분짜리 영상 파일 하나가 들어있었다. 클릭하자 낯익은 풍경이 뿌옇게 재생됐다. 언제 전원이 켜졌었는지 오늘 행적이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유달리 큰 바람 소리를 배경으로, 호선을 바꿔 타기 위해 바삐 걷는 사람들, 마을버스를 가득 메운 까만 교복, 구 시가지와 공사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등교길, 반짝이는 타일 바닥의 길고 긴 복도, 거기 울리는 슬리퍼의 마찰음과 수다, 수능완성 영어, 학생에게 인권이 어딨냐며 넋두리를 풀어놓는 중년의 남선생, 그리고 어둠. 남은 시간 동안 죽 화면은 캄캄했고 시시때때로 욕설이 끼어 들어왔다. 평범한 광경들이 모니터에서 재현되는 것뿐이었지만 선은 그것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무얼 찍기 위해. 왜 이런 걸 산 것일까.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던 선이 고개를 저었다. 더 알고 싶지 않다. 진실을 향한 과정은 언제나 힘겹고 역겹기 마련이었다. 끝에 다다라서 상처받는 이는 결국 밝혀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될 테니까.
커서를 움직여 인터넷을 켰다. 방금 선이 검색한 기록 말고도 보지 못한 방문기록이 쌓여 있었다. 그는 컴퓨터를 사용하면 흔적이 남는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한 번도 지운 것을 본 적 없었다. 아빠는 그런 사실을 사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기록을 지우지 않을 지도 모른다. 보톡스, 태반주사, 호텔 화장대… 정치 기사인지 찌라시인지 헷갈릴 정도로 노골적인 키워드의 제목들이 반, 나머지 절반은 온갖 파일공유사이트 주소로 채워져 있었다. 선은 댓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이중 아빠가 쓴 것도 있을지 가늠해봤다. 주술이 맞지 않고 무엇을 위한 주장인지 알 수 없게 분노로 가득 찬 몇천 개의 댓글.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선은 결국 창을 끄고 바탕화면에서 새 폴더를 열었다. 수많은 야동이 버젓이 들어있었다. 장소와 인물은 각각 달랐지만 대부분 비슷한 플롯이다. 선은 그중 한 영상을 틀었다. 반라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책상에 놓인 티슈 곽을 만지작거린다. 늘어진 뱃살과 북슬거리는 음모가 허벅지까지 이어진 것 같다. 침대에 누워있던 여자는 뭐하냐며 얼른 오라고 그를 채근한다. 샛노란 해바라기 벽지 아래에서 얼굴이 잘린 몸들이 합쳐진다. 살과 살이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 쥐어짜는 신음, 가명인지 실명인지 알 수 없는 이름이 뒤섞였다. 사정은 빨랐다. 콘돔 끼라고 했잖아. 불편한데. 선은 영상을 끄고 봤다는 흔적을 전부 지웠다.
선은 안경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안경을 쓰고 나와 학교와 집을 오가는 동안의 모든 행적을 담아왔다. 매일 밤 한 번도 스킵하지 않으며 자신이 찍은 동영상을 시청했다. 불면의 밤을 버티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평범함이었지만 선에게 안정을 주었다. 다 본 영상들은 지웠다. 자신은 아빠와 다르다고 되뇌면서. 충전을 마친 안경은 두 번째 서랍에 넣었다. 어디에 두더라도 살림에 관심 없는 아빠는 절대 안경을 찾지 못하겠지만, 선은 그에게 자신이 안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교 평준화가 시행된 후 선이 다니는 인문계 고등학교는 다들 기피하는 학교가 되었다. 과거에는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만큼 진학률이 높았었다. 선생들은 70년의 전통을 자랑스러워했었다. 하지만 이제 자산이 될 학생들은 외고나 과고로 빠졌고, 대부분은 집이 가깝거나 뺑뺑이로 원치 않아 오게 된 부류로 채워졌다. 그들에게 애교심은 없었다. 수능을 준비하지 않는 학생들이 한 반에 반이 넘었다. 예체능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종류는 다양했고 당장 취업을 위해 직업학교를 병행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하는 학생도 상당수였다. 하지만 학교는 이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과거의 영광이 빛바랜 것을 슬퍼했고 그만큼 그들을 비난했다. 집중하는 학생들이 줄어드니 수업의 질은 점점 떨어졌다. 공부한다는 학생은 개인 숙제를 했고 그렇지 않은 부류는 잠을 잤다. 이제는 매를 들 수 없게 된, 막 갱년기에 진입한 남선생은 학생 인권 조례는 너희들에게 사치라며 대신 교탁을 내리쳤다.
선은 0교시부터 7교시 내내 잤다. 책상에 이마만 처박은 채 꿈도 꾸지 않고 숙면했다. 처음에는 화를 내며 깨우던 선생들도 포기했다. 선은 집에서는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아래에서 기생충 같은 것이 꼬물거렸다. 근질거리는 몸을 꾹 참고 선잠이 들면 악몽이 시작됐다. 플라나리아가 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어오르는 그것을 손톱으로 눌러 죽이면 두 마리가 되었다. 증식만이 삶의 목적인 것 같은 그것은 절대로 죽지 않았다. 선은 선생은 물론 학생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았지만 잠은 불가항력적인 영역이었다.
대부분 7교시가 끝나면 하교했지만 선은 야간자율학습까지 남았다. 그나마 ‘덜 쓰레기’ 취급을 받을 수 있던 이유였다. 성적은 중위권 정도로 이변이 없다면 충청권 대학 중 한 곳에 가게 될 것이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기 때문에 선은 힘들이지 않으며 최선을 다했다.
야자를 끝낸 후, 술 취한 아저씨들과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렸을 때는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선은 잽싼 걸음으로 역사를 빠져나왔다. 집을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지만 며칠 하지 않으면 집은 금세 더러워졌다. 돌아가면 일단 세탁기에 꼬깃꼬깃한 옷들을 널어놓자, 저녁 설거지감이 쌓여있을 수도 있어… 선은 갑자기 멈춰섰다. 팬티 속에서 따뜻함이 퍼졌다. 금방이라도 다리 사이로 주륵 흘러내릴 것 같은 이물감. 선은 그제서야 자신이 생리 중이라는 걸 자각했다. 내려다본 제 다리는 깨끗했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얇은 천이 언제까지 피의 하중을 견딜 지 모를 일이었다. 혹여 베이지색 치마에 묻는다면 무척 도드라질 것이다. 생리컵을 사용하고부터 선은 종종 자신이 생리중이라는 걸 까먹었다. 더 이상 생리대에 기대 서로 엉겨 붙은 피와 털을 삭힐 필요가 없게 된 것은 장점이었지만, 오히려 너무 쾌적한 상태인 탓에 십칠 년간 각인된 생리의 느낌과 연관짓지 못했다. 생리통도 거의 없었으니 신세계였다. 하지만 끝물이라고 방심해버리고 말았다. 양이 줄고 있어도 밖에서 한 번쯤 확인해볼 걸. 선은 허둥지둥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역으로 돌아가기도 애매한 거리였고 집까지 가기에 누군가 자신의 피를 보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선의 내부에서는 스스로를 억압하는 제약들이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외부로부터 자유로운 걸 뜻하지는 않았다. 생리를 들키는 걸로, 타인의 이목을 이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스쳐봤던 사진이 떠올랐다. 바지에 생리혈이 묻은 줄도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두고 조롱하던 댓글들. 너무 당연하게 비난하는 어조는 경쾌하기까지 했다.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서 선이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수치였다. 키보드를 치는 게 펜을 잡는 것보다 익숙한 세대에게 정보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열두살의 선은 슈퍼에서 심부름인 척 사온 생리대를 엉성하게 붙이고 다니기 시작했다. 여자가 되었다고, 꽃을 선물하거나 파티를 한다는 말은 유난스럽게 들렸다. 그전까지 나는 여자가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고 선이 남자였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생리대는 용돈으로 구비해놓기엔 값이 비쌌고 선은 매번 새로운 거짓말을 지어내 아빠에게 돈을 타냈다. 그는 정서적 교류를 잘 하지 못하는 걸 선뜻 돈을 주는 걸로 대신했다. 선은 여자로 사는 건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글로 읽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의 차이는 상당했다. 이불이나 옷을 피로 물들일 때가 잦았고 선은 밤몰래 손빨래했다. 아빠와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심해서 잔인한 남자였다. 그는 때때로 킁킁거리며 어디서 오징어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냐고 물었다. 얼굴이 빨갛게 변색된 선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선은 집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시야에 공원이 들어왔다. 평소라면 노숙자가 출몰한다는 소문으로 밤이면 피하는 장소였지만 그곳의 화장실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암모니아 냄새와 썩은 하천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코를 찔렀다. 선은 칸 안에 들어가자 주위를 살폈다. 벽면에는 조그만 수많은 구멍들이 불규칙하게 뚫려있었고 누군가 휴지로 막아놨다. 팬티를 내려 확인한 선은 안도의 숨을 돌렸다. 갈색 혈이 옅게 퍼져있었지만 치마에 묻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선은 숨을 돌리고 가방에서 500mL 페트병 두 병을 꺼냈다. 한 병은 생수였고 한 병에서는 검붉은 액체가 바닥에 깔려있었다. 선은 변기에 앉은 후 생수로 오른손을 씻었다. 질 속에 검지와 엄지를 넣어 생리컵의 몸통을 잡았다. 펴져서 진공상태로 안착해있어야 할 컵이 아침에 접은 상태 그대로 질벽에 끼어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피가 흐르지 않게 버틴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몸통을 잡고 비틀면서 빼낸다. 피가 조금 울컥하며 손가락을 덮는다. 생리컵 바닥에는 소량의 피가 깔려있었다. 선은 주변에 흐르지 않도록 다른 페트병에 조심스럽게 혈을 부었다. 오른손이 피범벅이 되었지만 냄새는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리대에서 검게 굳어 풍기던 악취보다 신선했다. 선은 생수를 생리컵 표면에 흘렸다. 투명함을 되찾은 컵을 라비아폴드로 접고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방향으로 질에 넣었다.
선은 처녀막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걸 알았기 때문에 질에 손가락을 넣는 걸 무서워하지 않았다.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입구가 피로 번들거리면 삽입은 수월했다. 오히려 선에게 섹스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생리컵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지 못한 여자들이 물밑에서 고민을 토로하는 글들이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아프기만 했다고, 혹시 내가 성불감증이 아닐까. 그녀들은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곤 했다. 하지만 대체로 종합해보면 문제는 남자들이었다. 근육이 이완되지도 젖지도 않았을 때 그들은 성급하게 자지를 삽입하려고 했다. 또한 어중간한 크기의 자지는 보지의 입구를 찔러댔으니 남는 건 고통뿐이었다. 그녀들은 쾌락을 느끼지도 못한 채 생경한 이물감을 숨기기 위해 신음을 짜냈으니 삽입이라는 것에 공포를 가지는 게 당연해보이기도 했다. 기혼자 중에도 생리컵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은 엄마가 있었으면 자기도 그랬을지 종종 생각했다. 누군가와 활발한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한 선은 처녀성에 집착하는 관습을 습득할 틈이 없었다. 그저 유럽에서 19세기부터 사용했다는데 왜 한국에서는 알려지지조차 않은 걸까. 탐폰이나 생리대보다 편하고 인체에도 무해한 발명품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걸 아쉬워했다.  
물로 대충 손의 핏기만 지우던 선은 이질적인 소리에 모든 움직임을 정지했다. 그것은 옆 칸에서 발생하고 있는 신음이었다. 억누르는 중에도 교태를 부리듯 힘껏 쥐어짰고, 이응 받침과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야동 속에서 들었던 신음과 비슷했지만 음이 지나치게 낮았다. 언제부터지? 화장실에 오기 전부터? 아니면 중간부터? 집중하느라 듣지 못한 건가? 선은 실제로 타인의 신음을 들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혼잡했다. 선은 구멍에 박혀있는 휴지를 빼고 눈을 끼웠다. 캄캄함 어둠 위로 목소리의 실루엣을 그려본다. 탈색해야 나올 수 있는 밝은 갈색 가발을 쓴 남자. 떡진 머리카락이 뭉텅이 채 얼굴로 흘러내리고 손으로 쓸어올리자 선명한 이목구비가 드러난다. 매부리코, 단단한 턱과 광대, 비비크림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푸릇한 턱. 땀으로 젖어가는 근육들, 타일바닥 위에서 경쾌하게 또각거리는 하이힐. 그는 자위하고 있었다. 칸 밑으로 핸드백 손잡이가 빼꼼 튀어나왔고 검은 색의 얇고 긴 힐이 보였다. 선은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몸에 쫙 달라붙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을 것이다. 옷위로 브래지어 라인이 드러나는 가슴은 선보다도 클 것이고 팔다리에는 단단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근육이 붙어있을 것이다. 치마는 골반 위까지 말려 올라가고 보라색 망사 팬티는 커피색 스타킹은 돌돌 말려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겠지. 그는 왼손으로 성기 기둥을 잡고 흔들고 있을 것이다. 탁탁탁. 위아래로 흔드는 손이 점점 빨라진다. 선은 혀를 내빼는 헥헥거림에 귀기울인다. 개는 침을 질질 흘리며 현재에만 집중한다. 개의 성기는 커다랗고 체모도 없이 매끈한 표면일 것이다. 아빠의 것과 달리. 선이 여태까지 봐온 성기들과 달리. 아빠의 컬렉션 속에서 나오는 까맣고 작은 좆들. 그는 집에서 메리야스와 트렁크 팬티만 입고 있었는데 소파에 아무렇게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벌어진 다리 사이로 무성한 털숲이 보였다. 어릴 적 선은 남자에게 좆이라는 튀어나온 성기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성기는 자신의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에게 엄지보다 조금 큰 좆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선이 어른스럽단 소리를 듣기 시작했을 즈음이다. 피가 몰리면서 중지 정도로 늘어나는 갈색 표피의 좆. 헐떡임이 점차 빨라지고 신음이 절정에 이른다. 잠깐의 정적이 찾아오는 걸 보니 그가 사정한 것 같았다. 바닥에 불투명한 흰색 액체가 튀어있었다. 젖은 숨이 공기중에 배여 뜨거웠다.
여운에 젖어있던 건 남자뿐만 아니라 선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칸을 나왔을 때 그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휴지통에는 찢어진 스타킹과 팬티가 돌돌 말린 채 버려져 있었다. 꽃냄새가 비릿했다.
 집은 비어있었다. 정시 퇴근을 일삼는 아빠가 이 시간까지 없는 이유는 회식밖에 없다. 그는 친구가 없고 가족과 연락하지 않은 지도 오래였다. 이곳에 발령받은 후 회식을 사랑하는 동료들과 밤 늦게까지 함께하는 일이 잦았다. 사이가 좋다고 말하기에는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선은 만취한 그들이 어느 새벽, 집에 쳐들어왔었던 걸 기억했다. 이사 오고 삼일째 된 날이었다. 네 명의 아저씨들은 캔맥주를 사 들고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술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여있었다. 아빠는 그저 미소 지었다. 비굴함 속에 분노가 섞여 있었는데 선만 알아차릴 수 있는 소심한 분노였다. 그들은 선에게 안주를 내오라고 했다. 냉동실에 있던 마른오징어를 가스레인지 불에 구웠다. 딸이 있어 든든하겠어. 안주를 내오는 선의 허리에 슬쩍 손을 올렸다. 선은 접시를 갖고 오겠다며 부엌으로 도망갔다. 언제 아빠가 폭팔하지 않을까 선은 가슴을 졸였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아빠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새까맣게 탄 빨판을 오랫동안 씹었다. 아빠를 가리키며 미련할 정도로 착해빠졌다고, 그러니까 아내한테 버려진 거라고 안쓰러워했다. 아니 즐거워했다. 아빠도 함께 낄낄거렸다. 선은 웃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말주변이 없고 강자한테 약한 것뿐이었다. 착해 보이는 건 잠깐의 착시였다. 아빠의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했다.
양말에 먼지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지만 선은 지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수선한 거실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긴장이 풀리자 근육이 욱신거렸다. 선은 팬티를 갈아입은 후 피 묻은 팬티와 안경을 침대 밑에 넣었다. 이불에 몸을 뉘었다. 잘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서 잠들고 싶었다.
경쾌한 도어락 소리가 울렸다. 아빠가 온 걸까. 렘수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몸은 무거웠다. 불규칙한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방문이 열리고 술 냄새가 침입했다. 향수 냄새인지 탈취제 냄새인지 모르겠는 인위적인 향긋함도 뒤따랐다. 선은 눈꺼풀을 슬쩍 열었다. 아빠가 아니었다. 방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플라나리아였다. 악몽이 시작되고 있었다. 평소엔 속눈썹 한 올만 했는데 오늘은 성인 남자만큼이나 자랐다. 기다란 몸이 선의 몸을 휘감았고 중심부에 나 있는 입이 벌어졌다. 발기한 혀가 몸을 훑어 내려가다가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선은 플라나리아를 멈출 방법을 몰랐다. 아주 작았을 때도 죽이지 못했는데 자신보다도 거대해져서 나타났다. 선은 죽은 척을 해 그것의 흥미가 떨어져서 사라지기만을 기다린다. 몸을 축 늘어뜨렸다. 팬티 속으로 들어가던 얼굴이 갑자기 퍼덕거렸다. 질 바깥으로 튀어나온 생리컵 꼬리에 눈이 찔렸다. 그의 혀가 말려 들어가고 생전 들어보지 못한 비명을 질렀다. 그가 힘을 주어 정수리를 열심히 쳐들지만 진공상태의 컵은 꼼짝하지 않는다. 플라나리아의 몸이 맥없이 흔들렸다. 선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팔로 힘껏 뿌리쳤다.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선은 노트북을 갖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어폰을 연결하고 오늘 찍은 영상을 재생했다. 변함없는 지하철, 버스, 학교. 일상들이 이어지다가 진흙이 말라붙은 타일바닥이 나왔다. 음량을 조금 높였다. 남자는 어둠에 끼인 채 자위하고 있었다. 소리가 보다 자극적으로 들렸다. 밑이 뻐근하다 못해 아팠다. 선은 다리를 꼬고 상체를 수그리며 눈감았다. 당시에는 길게 느껴졌던 헐떡임은 실제로 오분도 되지 않았다. 선은 숨이 끊어지면 다시 이으며 듣기를 멈추지 않는다. 선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혹여 아빠가 깰까봐 소리를 죽이고 많이 웃었다. 누군가 들을까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흥분하는 꼴이 우스웠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라던가 성적 취향 등의 구질구질한 이유를 찾을 수고도 들이고 싶지 않은 변태였다. 이상 성욕을 어찌할 줄 모르고 공중화장실에서 배출하는 남자. 그는 여자가 되고 싶은 걸까? 마치 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좋은 걸까? 그는 몸속까지 울리는 저음으로 가냘픈 신음이 나오도록 애쓴다. 선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열등해 보였다. 처음 느껴보는 유쾌함이었는데 싫지 않았다. 선은 영상을 지우지 않고 숨김 폴더 속에 넣어두었다.
결국 잠들지 못한 선은 등교까지 한 시간가량 남았을 때 부엌으로 나왔다. 선은 학교에서 식사를 해결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남자는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제 밥을 차리지 않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선은 관성적으로 밥을 차렸다. 선이 어렸을 때 할머니가 집을 들락거렸었다. 그녀는 남자를 위해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선에게 전수해줬다. 애미가 없으니 니가 잘 챙겨야 해. 아빠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이 집안일이 손에 익던 5학년 무렵 할머니는 찾아오지 않았다. 할머니 대신 삼촌이라 소개하면서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비싸 보이는 양복을 입은 그는 선에게 미소 지으며 남자와 할 얘기가 있다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아빠는 신경 쓰지 않고 그에게 화를 냈다. 그게 어째서 내 잘못이냐. 돈도 많으면서 생색이냐.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던 선은 할머니가 쓰러져서 병실에 누워있고, 삼촌은 돈이 아주 많고, 둘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 정도를 파악했다. 이윽고 뒤따른 삼촌의 목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둘은 대화가 성립될 수 없는 사이다. 몇가지 욕설과 파열음이 닫힌 문을 따라 들어오지 못했지만 선은 눈치껏 숨을 죽였다. 그 후 삼촌은 물론 다른 친척들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할머니가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었지만 아빠에게 묻지 않았다.
선은 사골 끓이는 커다란 냄비를 꺼냈다. 포장된 1.5킬로 봉지 김치를 통째로 부었다. 김칫국물이 튀는 걸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가위질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냉동실에서 언제 산지 가물가물한 돼지고기와 다진 마늘을 꺼내 넣었다. 물을 사 분의 삼 높이만큼 채운 후 소금과 고춧가루를 쏟아부었다. 강불로 레버를 돌리고 끓기만을 기다렸다. 간은 보지 않았다. 아빠는 맛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루가 세 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식사할 뿐이었다. 오로지 오래 먹기 위해서 많이 만들었다. 너 때문에 식사를 못 하는 게 말이 되냐. 할머니의 손맛은 매웠다. 끓기 시작하자 선은 가방 속에서 페트병을 꺼내 왔다. 검붉고 걸쭉한 액체가 페트병 바닥에서 느리게 굴렀다. 선은 병 안에 물을 넣어서 잘 흐를 수 있도록 희석한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물을 찌개에 넣었다. 맵고 신 냄새 속에서 피냄새는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등을 찌르는 손가락에 선은 눈을 떴다. 수업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교탁에는 처음 보는 삼십 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4월 한 달 동안 국어를 가르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생은 자신이 이 학교 졸업생이며 지금 있는 교실이 예전에는 3학년 교실이었다는 등 학생들과 친밀감을 형성하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몽롱함에서 취해있던 선이 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에 조금씩 깨어났다. 젊다. 잘 생기지 않았어? 선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180을 간신히 넘기는 키, 근육이 적당히 붙었는지 슈트핏이 괜찮았다. 하지만 잘생긴 외모인가 하면 의문이었다. 이목구비가 대체로 큼직했지만 전체적인 조합이 촌스러웠다. 숱 많은 눈썹은 제멋대로 뻗어있었고 아직 1교시였는데 턱 끝이 푸릇했다. 사각 턱으로 인해 미소 짓는 얼굴이 고집스레 보였다. 어깨에 비해 크고 판판한 머리통까지. 키가 크지 않으면 비율이 좋지 않은 몸이었다. 선은 입을 쩍 벌리며 느리게 하품을 했다. 사립학교에서 정년만 기다리고 있는 갱년기 유부남들만 봐서 그럴까. 눈이 낮은 아이들을 안타까워했다. 올해 스물아홉, 서른도 되지 않았다는 말에 선이 조금 놀랐다. 그는 수업은 다음 시간부터 한다고 하자 학생들이 왁자지껄 말을 꺼냈다.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여자친구 있으세요? 그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기다리는 눈들이 반짝 빛났다.
“제가 수능을 본 해 처음으로 등급제가 시행됐어요. 평균편차도 백분율도 안 나왔고, 전례가 없고 다음 해에는 없어졌으니 완전 마루타였죠. 저는 운 좋게 원래라면 꿈도 못 꿀 대학에 들어가게 됐지만요.”
진지한 이야기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몇몇 학생은 흥미를 잃었지만 대부분은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집중했다. 선은 드물게 교생의 말을 열심히 들었는데 내용 보다는 그의 어조와 음과 울림에 집중했다. 처음 보는 사람일 그에게 기시감이 느껴졌다.
“입학할 때부터 1등으로 들어온 친구가 있었어요.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는데 공부를 정말 잘했어요. 모두 서울대를 갈 거로 생각했고 걔도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수능을 못 봤어요. 그전에 자살했거든요.”
우회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내뱉은 단어에 학생들은 당황했다. 한순간 교실이 썰렁해졌는데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만들어진 정적이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들은 자살한 그 친구가 나약한 거라고 했어요. 너희들은 그러지 말라고. 정 죽고 싶으면 졸업하고 하라고. 당시엔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선생이지 싶었는데 지금은 심정적으론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들에겐 그들의 의무가 있는 거니까요. 그건 나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 있는 걸까요? 설령 그 친구가 나약해서 그런 거라 하더라도, 누가? 무슨 자격으로? 그 지경까지 몰아넣은 사회와 사람들, 모두가 공범자이자 방관자 아닐까요?”
말투가 점점 격앙됐다. 열정적이었지만 선의 눈에는 진심을 토해 낸다기보다 아주 훌륭한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급작스럽게 변하는 감정선을 쫓지 못해서 갈팡질팡한 표정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지만 남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말을 끝내고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도 자신의 말에 심취해있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해마다 바뀌는 입시 제도나 혹은 사적인 일로 벼랑 끝에 몰리고 있는 학생들을 외면하지 않을 거에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난감한 자기고백이었다. 남자는 나름 유머러스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는지 몇가지 말을 덧붙이면서 살짝 미소지었다. 뒤늦게 경직된 박수가 터졌다. 당장 수능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와닿지 않았고 뜬금없기까지 했지만 그들은 그저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했다. 교생의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빛이 돌았다. 따라서 손뼉을 치던 선이 불현듯 나지막이 탄성을 뱉었다.
다음 순서는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수업, 시험 관련된 것부터 사적인 질문까지 오가는 동안 선은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곱씹었다.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 웅웅거림이 낯설지 않았다. 틀림없었다. 영상 속의 남자였다. 그는 곱슬진 짧은 머리와 올곧은 눈을 장착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교생으로 돌아왔다. 두 개의 렌즈에 땀을 흘리는 그의 인영이 상이 맺힌 후 합쳐졌다.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 선은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문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의 이목을 끌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을 것 같았다. 한참 어깨가 들썩거리자 뒤에서 아프냐고 물었다. 선은 아무 문제 없다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다. 화장실에서 자위하는 성도착자가 선생이라니! 선은 그가 선생의 자격은 되는지 논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한 달만 채우면 사라질 사람이었으니까. 모두 선망하는 이의 결점을 알고 있다는 우월감에 으쓱해졌다. 뻔뻔하게 장착한 열정스러움으로 교육을 논하는 남자를 비웃는 정도의 즐거움. 선은 그 정도의 선이 좋았다.
집에 돌아온 선은 재빨리 영상을 재생한다. ��띤 연설을 하는 교생의 얼굴 위로 자위하는 남자의 신음이 입혀진다. 흥분한 남자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목소리는 잘 어울린다기 보다 확실하게 그의 것이었다. 가뜩이나 두꺼운 입술은 시뻘겋게 두 배나 커져 있겠지. 짙은 쌍커풀에 붉은 섀도우를 올렸을까. 속눈썹을 겹쳐 올리면 훨씬 깊고 큰 눈이 될 것이다. 관자놀이를 향해 뻗어나가는 검은 아이라인을 하면 그의 원래 얼굴을 떠올리기 무리도 아닐 것이다. 선은 그 모습이 드래그퀸 같은 얼굴일 거라는 막연한 확신에 차 있었다. 화장이라기 보다 분장에 가까운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과장되게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손끝을 살려 삿대질하는 남자는 이게 여자라는 듯 열심히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잠깐 인상을 찌푸리던 선이 웃는다. 미친 듯이 깔깔거린다.
 교생은 일주일에 다섯 번 든 수업 중 세 번을 맡았다. 수업은 평범했다. PPT를 띄운 후 지문을 읽고 답지를 읽고 해석을 했다. 1반부터 5반까지 수업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선이 속한 2반에 관심을 많이 쏟았다. 추억이 묻어있는 교실이어선지 담임의 과목이 국어기 때문에 더 의무감에 불타는 건지. 이유 같은 건 학생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무관심과 타박에 익숙하던 학생들에게 그는 전에 없던 활기가 되었다. 사실 남자가 하는 말은 다른 선생과 다를 바 없이 비슷했지만 젊음은 이를 상쇄했다. 시기가 시기인데… 생각없는 것들, 선생들의 타박에도 학생들은 꿋꿋하게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그를 찾아가 스스럼없이 장난을 걸었다.
선은 처음 가진 생각과 달리 남자에게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었다. 점점 그의 존재가 거북스럽게 다가왔다. 남자들 둘러싸고 있는 평소보다 들뜬 반 분위기는 선이 상관할 영역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열정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선의 영역을 침범해왔다. 남자는 수업 시간에 모두 깨어있기를 바랐다. 개의치 않고 자는 선도 끈질기게 깨웠다. 교무실로 데려가서 상담을 시도했고 짐짓 엄숙한 얼굴로 꾸짖기도 했다. 처음에는 수업 태도만을 문제 삼던 것이 이제는 성적, 학교생활, 친구 관계, 가족, 진로 등 가능한 모든 것을 조심스러운 척도 하지 않고 물었다. 선은 대답 대신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 영상이면 당신 잘난 선생질도 망쳐버릴 수 있어. 당신이 누굴 훈계할 자격은 돼? 찔리는 게 없냐고 속으로만 되물었다. 하지만 교생은 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언의 신경전을 벌이다 보면 수업 종이 쳤고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다들 집이나 급식실로 향했지만 선은 혼자 교실에 남았다. 피자빵과 우유로 식사를 때웠다. 렌지에 돌리지 않아 치즈와 소스가 한데 뭉쳐있었고 옥수수알, 피클이 드문드문 올려져 있다. 선은 잘게 조각난 피클을 손톱으로 일일이 골라낸다. 비음 섞인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왜 안 먹어? 맛있는데.”
교생은 눈을 샐쭉거리며 말했다. 선은 무시하며 피클을 골라내는데 집중하지만 교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밥을 챙겨 먹어야지. 이런 것만 먹으면 몸 상해.”
“이거 나 학교 다닐 때 유행하던 안경 스타일인데. 10년도 전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못생긴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꺅꺅거리면서 열광할 정도도 아니었다. 선은 묵묵하게 빵을 먹었다. 얼른 삼켜서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남자는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상대가 바라고 있지 않을 때도 계속되는 건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왜 안 꾸미고 다녀? 다른 애들은 비비도 바르고 틴트도 바르던데.”
“교칙상 안 되는 거 아세요?”
말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교생은 그저 대답을 들은 게 기뻤는지 가벼운 어조로 말한다.
“적당히 하면 선생님들도 알면서 모른 척하잖아. 너도 꾸미면 예쁠 텐데.”
선의 볼이 씰룩였다. 유행하는 옷, 머리, 화장… 주변에 꾸미고 다니는 사람이 없던 탓에 영향을 받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원래 선은 꾸미는데 관심없는 인간이었다. 사실 시도해본 적은 있었다. 중학생 때 같은 반 아이들에게 휩쓸려 화장을 해봤다. 하얀 피부, 핑크빛 입술, 발그레한 볼, 과하지 않은 복숭아 메이크업이라고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어색하긴 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시간을 들이고 화장품을 구매하는 행위들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선은 썬크림도 잘 바르지 않는 얼굴로 다녔다. 주변의 여자 아이들 대부분은 당연하게 꾸미고 다녔는데 선은 그게 더 이상해보였다. 맨얼굴로 다니는 걸 부끄러워 하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결국 또래 문화에 어울리지 못하는 선은 겉돌았다. 선은 화장을 오이를 싫어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선호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생의 말은 여태까지의 선을 나무라는 것처럼 다가왔다. 여자가 화장하는 건 당연하고, 그렇지 않은 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식의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선생님은 안 하세요? 예쁠 텐데.”
선은 뭉개지는 그의 발음을 흉내 내면서 물었다. 교생은 그게 비꼬는 게 아니라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남자잖아.”
그렇죠.
선은 웃지 않았다.
 냄비 뚜껑을 열자 시큼함이 코를 찌른다. 김치찌개는 반도 줄지 않았다. 최근 퇴근 시간이 더 늦어진 아빠는 집에서는 거의 저녁을 먹질 않았다. 선은 레버를 돌려 강불로 끓인다. 주말이면 아빠는 점심때가 되어서야 느적느적 일어났다. 닫힌 안방 문 너머에서 목소리들이 왁자지껄 새어 나왔다. 그가 자주 듣는 팟캐스트였는데 정치를 하나도 몰라도 재밌게 들을 수 있게 욕설로 다분한 수다를 떨었다. 선은 냉장고에서 깻잎장아찌, 배추김치, 뱅어포를 꺼냈다. 전부 그를 위한 것들이다. 찌개가 팔팔 끓으면 그릇에 나눠 담고, 누레진 밥까지 푸면 끝이다. 부엌에서 쉰내가 진동했다.
속옷 차림으로 나온 아빠가 의자에 앉았다. 늘어진 메리야스를 걸친 상체는 왜소했고 배만 뽈록 튀어나왔다. 온종일 동사무소에서 잡다한 자료를 정리하는 팔은 희멀겠다. 그는 숟가락으로 밥을 푹 떠서 입에 넣었다. 개밥을 주더라도 쩝쩝거리며 잘 먹을 것 같았다. 선도 따라서 찌개 국물을 뜬다. 아주 조금 밥 위에 얹고 섞었다. 그런데도 짜다. 혀 전역이 아렸다. 뒤늦게 맨밥을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오늘 저녁은 차릴 필요 없다.”
선은 반추 신경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늦게 들어오는 건지 외박까지 하고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묻지 않았다. 다만 조금 신기했다. 여태껏 아빠는 안방에 틀어박혀서 잠을 자거나 컴퓨터에 몰두하는 식으로 주말을 보내왔었다. 누군가와 만나는 걸까? 선은 갑작스러운 남자의 변화를 이끌어낸 존재는 여자가 아닐까 추측했다. 가장 안일하고 손쉬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발기부전으로 고민할 나이에 이른, 애 딸린 이혼남을 어느 여자가 만날까? 철밥통이라 불리는 직업은 고작 가족을 부끄럽지 않게 먹여 살릴 정도였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선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평생 공부만 하고 공무원이 돼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젊은 여자? 아니면 남자의 작은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밤의 그녀들 중 하나일까? 아빠의 한정된 생활을 미루어 보았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여자는 고작 이 정도였다. 순간 선은 뜬금없이 자신이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을 만나고 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평소라면 그가 만나지 못할 인물. 너무 의외라서 자신은 떠올릴 수조차 없는. 꾹 다문 입안에서 트림이 터졌다. 그것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와 비슷했다.
혼자 남게 된 선은 평일동안 밀린 집안일을 시작했다. 창문을 열자 눅눅한 공기가 쏟아졌다. 거실 바닥을 청소기를 돌리는 움직임이 신경질적이었다. 커다란 몸통이 의자와 좌탁에 자꾸 부딪히지만 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책꽂이와 책상, 전등을 훑는 시선이 진동했다. 선은 청소기를 던진 후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과 책 사이를, 서랍장이나 선반 속을, 전등, ^무슨 소방기구^, 벽에 난 구멍은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집은 점점 지저분해지고 청소기는 꿋꿋하게 괴음을 내며 바닥에서 돌고 있었다. 선은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줄도 모르고 찾고 있었다. 손끝이 달달거렸다. 불안감에 잠식당해 본능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었다. 이 집을 청소하는 건 나인데 내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움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선의 손과 눈은 쉬지 않았다. 안방 침대와 벽면을 쓸던 손이 우뚝 멈췄다. 손가락 끝에 걸려 올라오는 건 빨간색 브래지어였다. 선은 까끌까끌한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다가 떨어트렸다. 선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고 바닥에 물건들이 토사물처럼 쌓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 선에게는 브래지어의 정체보다 난장판이 된 집을 정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선은 명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번거롭게 저녁을 차릴 필요가 없어졌다. 선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은 후 컴퓨터 앞에 앉았다. 구글 창에 교생의 이름을 검색했다. 꽤 많은 계정이 나왔는데 그중 맨 위에 있는 것을 클릭했다. 인스타그램 계정이었는데 뽀얗게 보정한 남자의 셀카로 가득했다. 팔로워 수는 오만명이었다. 갸름한 얼굴과 날렵하게 뻗어있는 코. 턱을 힘껏 깎아서 뒤에 벽이 일그러졌다. 많은 댓글이 선생님을 연호하는 걸 보기 전까지 선은 이 남자가 교생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잘생김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댓글을 읽던 선이 점점 얼굴을 구겼다. 숨김 폴더에 넣어두었던 영상을 재생한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신음을 배경 삼아 ���머지를 계속 읽는다. 그는 거의 연예인처럼 우상화되어 있었다. 사귀고 싶다는 내용을 보았을 때 선은 조소했다. 저 사람의 본성을 알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뻔뻔하게 저런 사진을 올리는 교생이 역겨웠다.
선은 충동적으로 한 동영상 사이트에 가입했다. 외국 사이트로 개인 신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터넷 방문기록을 참조하며 노골적인 제목을 짓고는 남자의 자위 영상을 올렸다. 검색하면 바로 보일 수 있도록 그의 이름을 섞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의 생각보다 남자는 유명한 편인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충격받거나 혼란스러워했다. 그중 조작 같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소수였다. 얼마 안 있어 누군가의 신고로 음란물 처리되어 삭제됐지만 선은 본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걸 알았다. 지워졌더라도 앞으로 교생을 검색하는 사람들은 그가 여장하고 화장실에서 자위한다는 문장을 거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선은 퉁퉁 불은 면발을 먹는다.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주말 동안 소문은 점점 퍼지고 괴이하지만 세세한 이야기도 붙게 될 것이다. 선의 얼굴이 드물게 득의양양했다. 그것은 자신이 남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 우월감에서 비롯됐다. 그날 밤 선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평소 왁자지껄하던 아침 시간은 미묘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무리를 지어 속닥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선이 미소 지었다. 공고하던 그의 위치에 금이 가고 있었다. 간혹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아이도 있었다. 그럴 때면 다른 아이가 조용하고 친절한 태도로 그를 외진 곳으로 데려갔다. 커튼 뒤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갑자기 커튼이 열리고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담임이 머리가 반쯤 벗겨져 광활한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뺏고 엄숙한 얼굴로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말한다. 다른 학생들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문다. 그들이 먼저 교실을 나가고 담임은 발을 쿵쿵 구르면서 교탁 앞에 섰다.
“너희가 그렇게 저질일 줄은 몰랐다. 실망했다.”
한숨을 푹 쉬고 말을 이었다.
“말할 가치도 없다. 얼굴도 안 나오는데 누구인지 어떻게 아노? 공부해도 모자랄 시간에 지금 뭐하냐… 에휴 새끼들아. 보는 놈들 내 눈에 다시 띄기만 하면 가만 안 둔다. 알겠냐?”
누군가 그 짧은 시간에 영상을 다운받은 후 문자로 보냈던 모양이었다. 담임이 떠나자 교실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진짜일까? 불쌍하다. 누가 질투한 걸까. 잘 생겨도 힘들겠다. 그래도 목소리 좀 비슷하지 않았어? 목소리가 울리는데 어떻게 알아. 돈 달라고 협박했대. 사실관계를 판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대체로 모두 담임의 말을 의심 없이 믿는 눈치여서 선은 적잖게 당황했다. 자극적인 이슈는 사실관계와 관계없이 그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터였을텐데…
선의 기대와 달리 영상은 조회 시간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교생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수업을 진행했다. 처음 어색한 것 같았던 분위기도 금방 졸음에 취했다. 교생은 누구도 깨우지 않고 답안지를 읽었다. 선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렌즈만 노려봤다. 어쩌면 모두 처음부터 믿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절대 그럴 인간이 아니라면서… 어떤 확실한 증거를 내밀더라도… 그들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태연하기만 한 남자의 표정을 보며 이제 선은 자신이 오해했던 건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선생들은 영상에 관한 목소리가 일절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남자를 유난히 따르던 학생들은 범인을 찾아야 한다고, 조져버려야 한다고까지 저들끼리 모여 부득부득 주장했지만 담소에 그쳤다. 교생은 조용히 해결되기를 바란다며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에 불과하다면서. 뭐 인터넷에 그런 찌질이들 많잖아요. 열등한 것들을 안쓰럽게 생각할 때의 여유로운 투였다. 이를 두고 왜 신고하지 않냐고 혹시 켕기는 게 있냐라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극소수였고 굳이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교생은 여전히 지루하고 틀에 박힌 수업을 했다. 사실과 관계없이 그의 이미지에 타격을 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오히려 동정을 불러일으켰고 인기는 여전했다. 선은 허무했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전보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임하는 그는 더이상 선을 깨우지도 말 걸지도 않게 되었다. 선은 그걸로 만족했다. 다시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이었다.
남자의 자위 영상은 지웠다.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선은 하루 동안 찍은 영상을 보는 일도 그만두었다. 영상은 더없이 시시하고 지루했다. 안경도 버렸다. 두 동강 낸 후 쓰레기봉투 밑바닥에 넣었다.  
선은 여전히 꿈을 헤집고 다녔다. 아빠가 부쩍 외출이 잦아지고 플라나리아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팔다리가 좌우반전된 남자가 나타났다.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것처럼 완벽한 대칭을 이룬 얼굴은 되려 균형이 맞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얼굴 같기도 했고 아빠 같기도 교생 같기도 했다. 자신을 책망하려는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그는 조용히 선을 응시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를 꿈속에서 영원 같은 정적이 이어졌다. 선은 내심 미안했지만 억울함도 불쑥불쑥 올라왔다. 결국 아니래잖아. 내 얘기는 애초에 아무도 듣지 않았다고. 남자는 왼팔과 왼다리를,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함께 휘저으며 다가왔다.
아빠는 요즘 시골개를 대하듯 내킬 때면 선에게 말을 걸어왔다. 선은 그처럼 원래 그런 것처럼, 당연하게 말을 나누는 것이 어려웠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가져올 파장을 예측할 수 없었다. 혹여 불협화음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평생 밖에 묶여 사는 시골개에게 주인은 없다. 모든 것들은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짖음으로 경계한다. ‘주인에게 짖지 않는 개’는 유난히 충성심이 깊은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것 뿐이다. 장난으로 시작한 발길질이 언제 진심이 될 지 모를 일이다. 발버둥칠수록 새끼 때부터 묶인 목줄은 점점 깊게 파고들 것이다. 귓가에서 쇳소리가 들린다. 선은 방심할 수 없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너무 큰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것이다. 선은 항상 최선의 방법을 궁리한다. 그런 후 선택한 것이 침묵이었다.
 원래라면 지난주에 시작해서 끝났을 생리가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선의 주기는 28일로 꽤 정확한 편이었다. 언제 생리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에 학교도 일찍 끝났다. 모의고사가 있는 날은 야자를 하지 않았다. 등급이 떨어져서 담임에게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지만 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직 아빠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벌써 아빠가 돌아온 걸까. 선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좆같은. 새끼. 아무나. 건들면. 안되지. 지주제를. 알아야. 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분절된 욕설이 귀에 꽂혔다. 선의 몸이 얼었다. 틀림없이 집안에서 난 소리였다. 헐떡임인지 신음인지 모르겠는 저음을 따라 선이 소리 죽여 신발을 벗었다. 살짝 열려 있는 안방 문으로 향했다. 안은 암막커튼으로 캄캄했고 누가 있는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두 개의 인영이 하나로 합쳐진 채 들썩거렸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또렷했다. 깔린 남자는 매트리스에 축 늘어져 있었고 허리짓을 당할 때마다 가냘프게 흔들렸다. 무언가 웅얼거리기만 하는 게 취한 것 같았다. 한 데 얽힌 신음은 끝음이 뭉개졌고 드문드문 발생하는 욕설에서는 화가 묻어났다. 선은 처음에는 남자가 남자를 강간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자가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걸 보면서 극단적인 페티쉬를 가진 성도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성한 털 속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좆이 버등거렸다. 아니 시뻘게진 플라나리아가 도망치기 위해 제 몸을 끊으려 안간힘이었다.
선은 제 방으로 돌아와서 문을 잠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침대에 누웠다. 그동안의 불면증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해가 저물었다. 집은 고요했다. 밖으로 나오자 거실엔 서늘한 바람이 고여있었다. 흙자국을 따라서 안방으로 갔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선을 반긴 건 조잡한 향수냄새였다. 꽃내음에 지린내가 섞여 더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차가운 다리가 발에 걸렸다. 하의만 벗겨진 채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눈이 점점 어둠에 익숙해졌다. 벌어진 입 같은 항문에서는 하얗고 점성있는 액체가 말라붙은 채 반짝였다. 선에게 이 상황이 무척 익숙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장소와 인물만 바뀐 것뿐이지 새폴더 어딘가에 있을 법한 광경이었다. 선이 발로 그를 밀자 맥없이 얼굴 전면이 등장했다. 구멍마다 물이 질질 샜다. 정신을 잃은 걸까.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니 숨이 끈질기게 오갔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선은 한 번도 피해자가 된 남자를 생각해본 적 없었다. 실핏줄이 터진 상기된 볼과 보라빛 피멍울이 피어난 몸체, 비린 냄새 속에서 향수 냄새가 또렷했다. 선의 시선은 사정의 흔적이 남아있는 작은 성기에 닿았다. 자신은 과연 남자를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선은 남자를 굴복시킨 남자의 힘이 부러웠다. 오히려 무섭다 못해 혐오스러웠다.
선은 조심스럽게 남자의 얼굴에 올라탔다. 팬티에 스며드는 한기에 잠시 몸을 떨더니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죽지 않은 몸이건만 미동이 없었다. 안면을 문지를수록 밑은 뜨거워졌다. 점점 축축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팬티가 젖었다. 뜨거운 들숨에 녹아내린 공기는 둘을 짓눌렀다. 입을 꾹 다물고 힘껏 하반신을 그의 얼굴에 내리꽂았다. 둔탁한 마찰음이 지속됐지만 선은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남자의 입술이 검붉게 물든다. 어렴풋이 옹알거리는 입술 안으로 피가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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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oyoh-96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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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증명
처음 모는 중형차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세 번 정도 앞차와 충돌했고 경적이 오갔으나 뜻밖에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액셀을 세게 밟았다. 추월했다. 운전자가 욕을 지껄이며 얼굴을 울그락불그락 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개운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이쯤 되면 내 이름으로 수배령이 내려지지 않았을까. 신호위반이니 차량충돌 따위로 신고당한다 하더라도 죄 목록이 조금 늘어나는 정도일 테니, 사사롭기 그지없다. 감지 카메라 때문에 속���도 넘치게 달리는 걸 엄두 내지 못했던 평소를 생각하면 눈부신 발전이었다.
조수석에서 아이가 곤히 자고 있었다. 옴폭하게 들어간 자국들로 간신히 이목구비를 형성한 아기들은 대부분이 엇비슷했다. 오 개월은 넘었을까. 몸에 비해 월등히 큰 대가리에는 얇은 머리카락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내가 임상심리사 앞에서 그렸던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 에이포 용지 정중앙에 희미한 선으로 이루어진 형체는 사람이라기보단 사람의 형태를 띤 선의 집합이었다. 이것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당신인지 따위의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런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묻는 그를 피해 모른다며 대부분의 대답을 뭉갰다. 마찬가지로 아이의 성은 물론이오, 나이도 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기세로 울어댔건만. 아이는 죽은 듯 고요했다. ��간이 공백 사이로 침입하는 코 막힌 날숨이 신경에 거슬렸다. 죽어도 별 상관없지만 목숨이란 것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애지중지 키우지 않은 아이들은 오히려 악착같이 살아남는 법이다.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은 오직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다. 한 마디로 알코올 때문이었다. 정의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남남에 불과한 아이였으니까. 당장 버려도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어린아이를 보며 애정을 느껴본 적 없는 내가 아이를 구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저 그 상황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행동한 게 다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납치라고 부를 것이다. 차라리 돈을 목적으로 아이를 데려왔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렇게까지 세련된 사람은 못되었다. 삼억을 준비하라고 남자에게 전화하며 전전긍긍하는 게 더 귀찮았다.
일단 목적지는 바다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딜 갈까 고민했을 때 철썩거리는 물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떠올랐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이대로 느긋하게 가다가 경찰에 잡힐 수도 있었지만 걱정되지는 않았다. 영화처럼 그들을 피해 도망치고 쫓기는 삶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속도로에 들어온 지 두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내륙이었다. 바다를 보기 위해선 최소 두 시간은 더 가야 했다. 속도가 점점 줄더니 결국 멈춰버렸다. 수많은 행렬들로 도로가 미어터지고 있었다. 평일인데 모두 바다를 가는 걸까. 타이어는 지지부진 요동이 없다. 창밖 너머 침엽수 무리와 공장이 삼십분 전 지나친 풍경과 비슷했다. 평소와 다름없을 고요함에 가슴이 들떴다.
오전 열 시는 섣부르게 뜨거웠다. 목요일이라 그런지 도보에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지랑이를 뿜어대는 아스팔트를 보니 아직 오월밖에 되지 않은 날이 실감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도 됐지만 굳이 한 시간 넘게 걷는 길을 택한 건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술을 먹기에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진료를 끝내고 아무런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 년 넘게 이어진 히키코모리 생활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오 분도 안 돼서 상담은 끝났고 어서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최근 잦은 폭식과 야식으로 살이 쪄 잠시 고민했지만 걷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의사는 술은 물론 전체적인 식습관을 바꾸라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다시 그곳에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캔맥주는 미지근하고 맹한 맛이었다. 텁텁한 입안을 혀로 쓸며 주위를 둘러봤다. 제정신이 박혀있는 인간이라면 지금 에어컨 틀어진 건물로 기어들어 가 있을 거였다. 습기가 온몸에 침투해 갑자기 팽창하는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발걸음은 점점 우측으로 향했고 나는 차도로 침범했다. 일렁이는 하얀 중앙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써 걸었다. 자꾸만 발이 중구난방 향했고 신발 속은 축축했다.
정신과에 다닌 지 삼 개월이었지만 나는 이렇다 할 병명을 진단받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많고 우울감이 높은 편이나 일상적인 부분이에요. 담담하게 약한 약을 처방해준다는 말에 나는 잠시 머리를 후려 맞은 것처럼 멍했다. 나의 우울은 너무 일상적이었고 해가 갈수록 극심해졌다. 무기력했고 흥미로운 일도 없었다. 그것만이 전부였다면 굳이 병원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은 이제 익숙했다. 특별하다고 칭하기도 부끄러웠다. 문득문득 목을 죄어오는 압박감과 가슴 두근거림이 발생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숨을 고르면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지만. 전에 없던 징조들이었다. 평화로운 수면은 조금의 자극만으로도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그런 불안들이 가중됐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고요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서 찾은 병원이었지만 오늘 나는 이곳에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을 때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특별한 문제나 명확한 원인이 없었다. 즉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울감이 다소 높고, 자아 정체감과 자존감이 좀 떨어져 보이지만…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서 그럴 수도 있어요. 딱히 걱정할 정도로 병명을 붙일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약을 처방받는 게…
긍정이나 부정을 표하는 것 대신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의사는 더 물을 생각이 없는지 조용히 타자를 쳤다. 그렇다면 내가 힘든 원인은 단순한 스트레스인가? 하지만 최근 나는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다. 술을 사러 나오거나 진료를 받기 위해 나가는 일 외에는 종일 방에만 있으니까.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무료했다.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이지? 그의 설명은 내 주위를 겉도는 정도였다. 부족했다.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서는 무언가 들끓다가 서로 죽이는 것들이 분명 존재했다. 차라리 처음 들어보는 괴이한 병명을 선고받았다면. 가련한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연기할 수 있었을 텐데. 실망스럽다.
상담할 때면 그는 요즘 힘든 건 뭐냐며 인사를 대신했다. 항상 거쳐야 할 관문이었는데 여간 익숙해지지 않아 나는 당황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야깃거리는 없었다. 언제나 평소와 같은 날들의 반복이었으니까. 떠오르는 거라곤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대화나 미소를 유지하려 애쓰는 가족들의 얼굴 정도. 무난하고 무료한 관계. 어젯밤 본 게이 포르노? 하지만 엄숙한 얼굴에 대고 페니스의 굵기와 길이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과연 이런 것이 상담할 만한 걸까? 우물쭈물 거리다 입을 열었다.
꿈을 꿔요. 현실이랑 똑같은 꿈.
나의 꿈에서 사람이 날아다닌다거나 고양이가 말을 하는 등, 비현실적인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곳이 꿈이라는 걸 깨기 전까지 자각해본 적이 없었다. 현실이랑 구분하기 힘들어요. 내가 말했지만 조소했다. 구별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느 쪽에서 살든 차이는 없었으니까. 나는 희미한 사건과 인물들 사이에서 착실하게 살아갔다. 의심 없이.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 않게. 가끔 이상한 사명을 띠기도 했으나 깨고서야 말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기어코 전공 강의를 빠져나온다. 1호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린다. 일제강점기의 양식이 남아있는 건물로 들어간다. 화이트칼라 사이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붉은 옷을 입고서. 최대한 담담하고 은밀하게. 사무실로 들어오자 눈이 마주친 늙은 남자. 면도하지 않았는지 아래 턱이 퍼렇다. 바지를 벗긴다. 팬티까지 같이 벗겨지고 엄지손가락만 한 좆이 튀어나온다. 못 본 척, 심장이 뛰지 않는 척 달려간다. 사무실은 온통 남자뿐. 담배 찌든 냄새가 은은하게 감돈다. 저기 아빠가 있다. 고개를 숙이고 우는 걸까 조는 걸까. 아무렴 어때. 어느새 내 손에 티스푼이 들려있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다. 나는 그의 뒷목에 스푼을 꽂았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프지 않은 걸까. 구멍마다 하나씩 밀어 넣는다. 귀, 눈, 입, 요도, 똥구멍… 피는 흐르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기색은 찾을 수 없다. 아무도 외부인의 침입을 깨닫지 못한다.
의사는 잠긴 가래를 되새김질하며 물었다. 이제 좀 화제를 바꿔보죠. 목소리는 탁했다.
아버지와 사이는 어떠세요? 어린 시절은요?
아- 이 사람도 그런 부류일까? 유년시절의 트라우마에서 시작하자 하나 두울, 결국 프로이트 좆 빠는 작자였다.
평범했어요.
어떤 점에서 말이죠? 조금 더 깊은 대화를 끌어내려는 그의 시도가 보였지만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흐름에 따라간다면 울음을 터뜨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베란다에 갇혀 골프채로 맞거나 비오는 날 모래밭에서 굴렀던 경험… 나는 이것들이 사소하거나 거대하게 변화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말을 아껴야 했다. 또한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아버지를 싫어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과거를 끄집어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새삼스럽게 그를 혐오해서 죽이고 싶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 사건을 치우침 없이 열거할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나쁨을 백 퍼센트로 해석하지도 않았고 좋음을 전부로 인식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제일 불쾌한 것은 의사의 얼굴에 스친 기만이었다. 그가 휴지를 건넸다. 내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어코 당신의 우울을 확인하겠다, 그러니 증명해보라 하는 권력. 좌절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게 조금의 위안이 되었던 것은 이주일 치 처방전이었다.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니 경과를 지켜보죠. 약효가 순한 약들로 가득했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마주친 이들에 새삼 내가 그리 비참할 수가 없었다. 비참하다기 보단 불쌍했다. 자의보다 타의로 온 게 분명한 얼굴들.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모르고 방황했다. 그 속에서 고집스럽게 이곳을 찾은 내가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제 이름이 호명된 남자가 나를 지나쳐 진료실로 들어갔다. 희미한 곰팡이 냄새와 썩은 나무 냄새가 났다. 중년과 노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얼굴은 검었다. 자식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 부인과 싸운 걸까.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년의 여자와 교복을 입은 아이, 아마 말수가 없어 걱정스러운 거겠지. 인간사 다 뻔했다.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갈등과 고통. 그늘진 얼굴의 간호사에게 처방전을 건넸다. 다음 상담 시간을 서둘러 정하고 빠져나왔지만 다시 오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곳에서 나의 우울은 해결될 수 없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사사롭게 느껴졌다. 과연 내가 힘든 게 맞긴 한 걸까? 고통이 허상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가슴은 두근거리고 숨이 턱턱 막혔다. 명확한 진실이 곁에 있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가난하지도 알콜홀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죽음과 이별의 눈물짓지 않았지만. 부족했고 막막했다. 술이 마시고 싶다.
아무도 없을 오전의 집. 옷을 모두 벗고 찬물로 샤워해야지. 알몸으로 집안을 누빈 후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땀으로 가득 찬 맨발과 운동화가 점점 뜨거워졌다. 찝찝한 근육들은 술기운에 다소 견딜만했다. 드디어 우뚝 서 있는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밭과 공사장이 위성도시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개발에 대한 기대가 넘쳐났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는 가벼운 수군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분양되지 않은 집들과 채 지어지지 않은 집들로 구성된 동네였다. 집이 팔리면 이사를 가는 거야. 휑한 동네를 거닐 때 엄마는 그리 말했다. 이곳은 사람 사는 느낌이 안 들잖아. 평수가 작아지더라도 서울로 가자고 했지만 몇 년째 집은 팔리지 않았다. 추울 리 없건만. 더워 죽을 것 같은데. 왜인지 가슴 한쪽이 시렸다.
입구 초입에 들어서자 검은 중형차가 도보 옆에 떡 주차해 놓은 게 눈에 띄었다.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타이어가 도보 위로 슬쩍 올라와 있었고 미세하게 떨리는 진동이 시동이 꺼지지 않은 걸 알렸다. 꼼꼼히 세차한 차에 비해 허름한 행색의 남자가 내렸다. 마흔 중반은 되어 보이는 그는 안색이 창백했고 삐쩍 곯았다. 외지인인 것 같았다. 오래된 플라스틱 같은 눈은 느리게 주변을 탐색했다. 잠시 시선이 얽힌 게 분명한데 그는 알아챈 기색이 없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걸어갔다. 오로지 관리하기 편하게 자른 반삭이었는데 크고 납작한 뒤통수가 도드라졌다. 쥰스헤어 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미용실로 들어갔다. 흰색 간판에는 날벌레 사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단지 내 상가에 붙어있는 가게였는데 아파트가 지어지기 훨씬 전부터 장사를 하고 있었고 지금 있는 위치는 이전한 거라고 했다. 이곳에서 오래 산 사람이라면 쥰을 모를 수는 없다고 얘기하곤 했다.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 없었지만 익숙하게 느껴졌다. 많은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까. 대부분이 좋지 않은, 뒷담화다. 남자관계, 특히 유부남들과의 내연을 즐긴다고 했다. 저번에 준후 애비랑 있는 거 같이 봤잖아요. 젊은 남자랑 있던데? 사람들은 불길하다는 듯 열 띄게 수다를 떨었지만 싹싹한 쥰 앞에서는 전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걸음을 떼려는 찰나 나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조수석에 누워있는 두 눈이 동그랗게 떠 있었다. 창문 전부를 썬팅해 놓고선 앞창은 하나도 건들지 않아 내부가 가감 없이 보였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낯. 가만히 베이비시트에 몸을 기대어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면 남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찡그린 입매가 점점 벌어진다. 짧다란 팔다리가 파득거리고 숭덩숭덩 드러나는 핑크빛 잇몸. 지나가야 했다. 내가 상담을 다녀오는 길이 아니었다면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기는 가장 귀찮고 피곤한 존재다. 자기 멋대로 울고 무는 게 다인 개만도 못한 존재다. 하지만 나는 지나치지 못했다. 괜히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 걸까. 아니다. 그런 건 아니었다. 오기였다. 그를 향한 반발심. 언젠가 봤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지금은 폐지되었는데 시사프로인지 예능인지 모르겠다. 어린이를 차에 놓고 잠시 나갔다 왔는데 아니다 다를까. 뜨거운 차 안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나는 눈앞에서 죽음을 보고 싶지 않은 거에 불과했다. 나중에 가명으로 재현되는 인물을 통해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갔다. 철컥, 의외로 가볍게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흘렀다. 밀폐된 공간에서 에어컨을 틀어놓으면 질식사한 사례도 있지 않았나. 이러나 저러나 죽는다는 거 아닌가? 모든 게 허무해졌다. 아기의 입에서는 커다란 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는 건 아니었다. 날 좀 봐줘. 원초적인 본능에만 이끌린 요구는 언제나 당황스러웠다. 짐승 소리를 내는 입을 틀어막고 싶다. 열쇠가 꽂혀있는 거로 보아 남자는 곧 돌아올 거였다. 아이를 뒤로 하고 나는 문을 닫았다. 새까만 창으로 시야가 가득 찼다. 여전히 바등거리고 있겠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버렸다. 남자가 나오는 것까지만 보고 돌아가리라. 이발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바퀴가 미세하게 덜덜거렸다.
핸드폰 기본음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추락하던 도중 정지된 고개에 목 근육이 당겼다. 이제 술기운은 전부 모공 밖으로 빠져나갔다. 햇빛이 맹렬하게 뛰다니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여전히 차는 그 자리 그대로에 있었다. 최에게 온 문자다. 시간 되면 연락 줘.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끈질긴 연락이었다. 부재중 전화도 와 있었다. 그는 고교 동창이었다. 단체 생활을 극도로 피하는 나와 달리 무리를 이끄는 스타일이었다. 취향도 성격도 상반되었다. 어떻게 친해졌냐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나도 그런 의문이 자주 들었으나 최는 그런 질문들이 의아하기만 했나 보다. 그는 가리는 사람이 없었다. 세세하게 따지고 드는 나와 달리 취향이란 것 자체가 아예 없었다. 누구와도 원만하게 지냈다. 나와 친하게 지내진 것도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서였던 것뿐이었다. 내가 아닌 어느 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림. 대입 이후 만남은 뜸해졌다. 최는 명문이라 불릴 대학에 들어갔고 나는 인근에 있는 전문대에 합격했다. 나는 9층. 최는 20층. 학교가 달라도 자주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졸업하고 얼마간은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내가 한 학기도 버티지 못하고 휴학함과 동시에 연락은 끊어졌다. 일방적으로 내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온종일 히키 생활을 했지만 가끔 외출할 때면 신경을 곤두세웠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지 않을지 계단으로 다녔고 그와 비슷한 체격이 보이면 방향을 틀었다. 열등감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너무 다른 사람이어서 새삼스럽게 좌절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부담스러웠다. 그의 균등한 친절함에 나는 자꾸 작아졌다. 최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대해줄수록 숨이 막혔다. 꾸준하게 문자가 왔지만 화는커녕 적절한 선을 지켰다. 바쁜가 보네. 언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가 내가 집에 틀어박혀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는 아파트였으니까. 이것은 화를 숨기기 위한 처세에 불과하다. 만약 왜 그동안 잠수를 탔냐고 다그친다면,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에게는 그를 이해시킬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주머니에 넣었다.
제멋대로 어긋나는 다리를 부여잡고 차 가까이 갔다. 아이는 잠들었다. 미동 없는 아이는 현실감이 떨어져 보였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에 염색하거나 파마를 할 리는 없을 터. 기껏 해봐야 이발과 샴푸, 면도 정도일 테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뭘 하는 걸까. 이대로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의문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그렇다면 이대로 아이는 죽게 될까? 불투명한 창 위에 미용실이라 쓰인 글씨는 벗겨지고 벗겨져 얇아져 있었다.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 만든 창이었지만 글씨의 흔적이 있던 자리는 투명했다. 눈을 구멍에 끼웠다. 손님은 그뿐이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두 개의 뒤통수가 보였다. 볼륨감을 목적으로 펌을 한 짧은 머리카락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뻣뻣했다. 염색물이 빠져 주홍빛을 띠고 있었다. 다소 허름한 내부는 다방을 연상케 했다. 테이블 위에 잔에는 검은 물이 가득했다. 움직임 없는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미세하게 그들의 어깨의 떨림이 보이��� 듯했다. 반삭 머리는 자른 걸까. 아까���의 차이를 찾지 못하겠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려 해도 구멍은 너무 작았다. 문득 나는 가만히 있는 둘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한순간의 깨달음이 모든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그들은 섹스하고 있다. 설령 남자의 자지가 쥰의 보지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섹스하고 있지 않다고 표현하는 건 틀린 거였다. 관절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손가락은 몸선을 드러내는 타이트한 옷을 타고 오른다. 틈이라면 어디든 미끄러진다. 그 후를 상상하고 싶지 않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자정 이후, 안방 문을 열었을 때와 비슷했다. 얼굴의 열기가 몰렸다. 지불하면 보상받는 공식. 그것은 남자에게 당연한 세계이고 비논리적인 것은 하나도 없을 거였다. 어떤 배경이 있더라도. 그렇다면 쥰은? 왜 못생긴 남자를 참아야 하는가?
네 개의 눈이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입이 벌어지다 못해 찢어졌다. 너는 누구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주춤거리다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쥰의 표정은 미묘했다. 허겁지겁 나는 몸을 챙긴 후 뛰었다. 비리비리한 목소리가 뒤를 쫓다 고꾸라졌다. 삑사리만 간신히 고막에 꽂혔다. 멈! 야! 너! 거! 멈! 얼굴에 열이 쏠렸다. 뼈의 가죽이 간신히 붙어있는 몸은 절대 나를 잡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쥰이 빼꼼 목을 내놓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빛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때 나는 더위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남자에게 화가 났고 쥰에게 화가 났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존재에 화가 났다. 내게 그럴 의무는 없었지만 명확한 감정 하나만이 남아버렸고. 망설임이 사라졌다. 발의 속도가 붙었다. 달리기의 끝이 정해졌다. 절대 그에게 잡힐 리 없었다.
철컥, 가볍게 문을 열자마자 시동을 걸었다. 스틱이라니. 다행히 곁눈질로 본 게 있어 어렵지 않게 기동했다. 차가 꿈틀거리고 아이가 칭얼거렸다. 아직 눈도 뜨지 못했다. 남자의 몸에 맞춰진 좌석에서 액셀과 브레이크가 멀었다. 발끝을 쭉 뻗었다.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차에 달라 붙어있었지만 바퀴는 움직였다. 천천히 팬지 화단을 침입했다. 남자가 옆으로 뒤처졌다. 창을 두드리며 과장된 움직임을 펼쳤다. 그나저나 차가 무겁다. 장롱면허를 따고 3년 만에 한 운전 탓일까 낯선 기종 탓일까. 아이가 크게 목청을 높였다. 울상진 목소리는 유리창에 뭉개졌다. 핸들을 좌로 꺾고 시속을 올렸다. 백미러 속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서 어렴풋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시 눈을 씻고 보자 그는 사라졌다. 미용실 앞에 서 있던 쥰도 사라졌다. 차는 그대로 단지를 빠져나왔다. 아이는 틈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눈물 없이. 발버둥 없이.
얼굴이 조금 부서졌을까. 타이어에 조그만 파편들이 느껴졌다. 중앙선을 넘어가고 옆 차를 긁으면서 점차 익숙해졌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면 오히려 편해질 것이다. 직진으로 가속하면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으니. 익숙한 철골들과 부서진 상가들을 지나쳤다. 빨간불이 켜졌으나 지킬 필요는 없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이나 차는 없었다. 차분해지고 있었다. 서랍을 뒤적거리는데 담배가 나왔다. 포장지에는 남자의 목을 파헤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창문을 반쯤 연 후 불을 붙였다. 소리내길 멈춘 아이는 이제 칭얼거렸다. 나는 입에 연기를 머금은 후 조수석을 향해 불었다. 다시 시끄럽다. 의외로 현재 평화롭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까까지의 두근거림은 멎었다. 지금이 낯설지 않다는 감각. 언제까지고 그를 피해 아이를 데리고 도주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꽤 만족스러웠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들은 빠지는가 싶으면 다시 들어오길 반복했다. 영원히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시시덕거렸다. 시시껄렁한 사연으로 가득 찬 라디오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취향인 듯한 간지러운 사랑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 시디도 마찬가지였다. 엔진의 웅웅거림만 규칙적일 때 진동이 불현듯 울렸다. 최의 전화였다. 평소라면 그의 선심으로 발생한 끔찍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다. 올곧게 우정을 이어가려는 태도에서는 선교자가 얼핏 보였다. 진동이 그치기를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화면을 눌렀다.
뭐해?
스피커로 튀어나온 최는 다소 놀란 듯했지만 평이한 어조였다. 화를 내지 않을까, 질문을 쏟지 않을까. 고민들이 한순간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몇 달 동안 잠수했던 시간 동안 최의 화도 잠잠해진 것일까.
바다를 보러 가고 있어. 너도 갈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맥락 없이 명랑한 목소리였다. 언젠가 소금호수를 보러 가자고 했잖아. 우유? 유우였던가? 기약 없이 여행을 가자고 우리는 수다를 떨곤 했다. 피렌체, 교토, 마드리드처럼 익숙한 도시부터 알티플라노 같은 낯선 지명들까지도. 언젠간 가겠지. 언제나 현실적인 최였지만 이런 식으로 나열하는 건 싫어하지 않았다. 터키에 있는 소금호수를 얘기한 것도 그였다. 분홍빛이 수면에 퍼져있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언젠가 꼭 가자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일 시험이야. 그나저나 너 말이야…
그 후 수많은 말들이 쏟아진 것 같다. 걱정과 염려들이 정돈되어 흘러갔는데 나는 그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흥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숨이 다정했다. 한결같은 최. 그는 언제나 나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와 다르니까. 왜 포기하지 않는 걸까.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 그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겠지. 그런데도 최가 먼저 인연을 끊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고속도로인데 너만 간다고 하면 돌릴 수 있어.
정체된 흐름 속에서 불가능했지만 말은 긴박하고 진지하게 튀어나왔다. 들떠 있어 다급해진 탓도 있었다. 자의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처음이라 그럴까. 한참을 기다려도 최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타들어 가던 담배가 재를 떨궜다. 열기가 손가락에 미약하게 퍼졌지만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미쳤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렘이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입가가 스물스물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뻤다. 다음을 고대하며 최의 말을 기다리는데 전화가 뚝 끊겼다. 배터리가 닳은 걸까, 그가 끊은 걸까. 다시 전화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렴 이제 상관없었다. 나는 여간 조용한 아이를 바라봤다. 달게 자고 있었다. 미친을 수사로 쓸 수 있다니, 꽤 근사하잖아. 이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나 봐. 언어를 모르는 아이에게 나는 그 말만을 반복해서 말했다.
공기 중을 찢는 소음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백미러에 요란스러운 엠뷸런스가 고여 있었다. 행렬 속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꼴이었다. 구급차 한 대와 경찰차 두 대였다.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비켜달라고 스피커가 울렸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선의를 가지고 도움을 주고 싶더라도. 갓길로 빠지기도 힘들어 보였다.
저들이 쫓는 자가 혹 나일까?
문득 든 생각에 오한이 들었다. 친부인 그가 신고했다면 나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아이를 방치하고 관심도 없지만, 혈연이기 때문에 괜찮다. 모든 권리를 가진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문장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은 아이에게 향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밉다. 그들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교도소에 갈까? 벌금형으로 끝날까? 잡히는 건 무섭지 않았다. 가족과 마주했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일 뿐이었다. 여태껏 지나온 수많은 카메라에 내 모습은 찍혔을 것이다. 차량번호는 진작 수배되었을 테고.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를 바꾸며 뉴스 채널을 찾는다. 차라리 고속도로를 빠져나갈까. 바다를 가려는 마음은 떠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나 역시 오도 가도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타이어는 밀리미터씩 전진했다. 브레이크를 걸어놓지 않았을 때 내리막에서 미끄러지는 속도보다도 느렸다. 바람과 음성으로 구성된 소음들이 웅웅거렸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백칠십 센티미터의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조금 긴 숏컷 머리, 검은 뿔테 안경을 착용하고 붉은 옷을 입었으며… 객관적인 발음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이 첫사랑과 관련된 사연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 오전에 발생한 납치 사건을 다루는 채널은 찾을 수 없었다.
곁눈질로 그들의 동태를 살핀다. 앞장선 구급차가 천천히 갓길로 빠져나오고 있다. 경찰차가 뒤따르다 옆에 있는 차를 살짝 긁었다. 그들은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조용해졌다. 아 그는 신고하지 않았구나. 다른 위험하고 중요한 사건을 위해 떠난 거구나. 잡히지 않을 사실에 웃어야 하는 걸까. 가볍게 웃음이 역류했지만 입꼬리는 자꾸 추락했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드러났던 미소가 다시 살아난다. 이제는 환히 웃으며 기뻐하고 있다. 쥰과 함께 행복할까. 이제서야 그 의미를 알겠다. 아이는 버림받았다. 영영 찾지 않을 것이었다. 이해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은 전부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닐까? 나는 단지 작전 속에 휘말려든 것뿐이고? 기쁨에 고취되었던 때가 부끄럽다. 더듬더듬 담뱃갑을 찾는다. 눅눅한 담뱃대를 입술에 올렸다.
꺄르르, 가벼운 웃음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아이가 웃고 있었다. 휑한 눈썹을 구기면서 힘껏 웃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어깨가 들썩거리면서, 뭐가 그리 웃긴데. 비좁은 성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뭘 기대한 거야?
옹알거리는 말씨는 잇몸만���로 말하는 노인과 닮았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나는 평론가의 설명을 듣는 기분에 빠졌다.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모르는 단어가 없는데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아이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일단 밟아. 뒤차랑 부딪히겠어.
어느새 앞차와 간격이 멀어져 있었다. 액셀을 밟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 몸체가 천천히 움직였다. 이 나잇대 아이들이 아무리 말이 빨라야 뱉을 수 있는 단어는 엄마, 아빠가 고작일 텐데. 또박또박 걸어 나오는 말들은 이해하고 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래, 이건 모두 꿈이다. 꿈이어야 했고 꿈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어서 깨어나고 싶다. 어떻게 앞차라도 박을까? 아이의 입은 쉬질 않았다.
뭘 기대했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명백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흥분하지 말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이는 것일 뿐이다. 액셀을 밟는 발에 힘을 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한테도! 너한테도!
주어가 없었지만 대상이 나라는 건 확실했다.
나도 안단 말이야…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나라고…
아이의 목을 조르고 싶다. 어떤 말도 나오지 못하게 성대를 조여버리고 싶다. 강렬한 상상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해! 아이는 꽥꽥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비난하는 얼굴은 환히 웃었다. 옆으로 찢어지며 웃는 입은 점점 커졌다. 여분의 얼굴을 잡아먹을 정도로 늘어나고서야 아이는 조용해졌다. 몸을 축 늘어뜨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손발은 미세하게 좌우로 흔들렸는데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목적을 띄었다. 이것은… 도움을 청하는 표시였다.
아이의 목에 내 두 손이 안착해있었다. 손가락 주변으로 희멀겋게 짓눌린 살이 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리되지 않는 사이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숨이 점점 옅어졌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이건 모든 꿈이리라. 서서히 식어가는 체온도. 불규칙한 클락슨 소리도. 고통스러운 꿈이 만들어낸 환상이며 착란이다.
우리는 앞으로 튕겨 나간다. 유리 조각이 앞을 가렸다. 몸이 바닥으로 쏠렸지만 벨트로 인해 중간에 멈췄다. 숨은 간신히 버텼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흐르는 뜨거움에 눈이 감겼다. 그런데 왜 아픈 거지? 이해할 수 없다. 베이비시트와 결합한 아이는 거대한 공 같다. 도로를 가르는 하얀 선 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동그랗게 잘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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