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averyone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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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에 대하여 : 콰이로맨틱 정체화글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이 문장은 내가 수능을 치렀던 해의 필적확인 문구였다. 문제풀이에 온 정신이 쏠린 와중에도 나는 왠지 이 문장이 몹시 마음에 들었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해를 살까 봐 덧붙이자면, 아마도 이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이 생각했을 법한 의미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여러 답이 있다. 가까운 이에게 느끼는 친애와 호감, 집단에 소속된 연대감,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 신과 종교에 대한 믿음, 혹은 강한 집착이나 소유욕 등…….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감정들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이쯤이면 사랑이라는 게 존재는 하는지, 어쩌면 미디어가 주입한 환상은 아닌지, 그냥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게 ���랑이 되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위는 굉장히 넓지만, 그렇다고 사랑이라는 표현을 써서 대화할 때 의미를 알지 못해 혼선을 빚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사랑을 일컬을 때 그것은 연애감정, 즉 로맨틱한 끌림으로부터 비롯된 마음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곧 연정을 뜻한다. 내가 나의 존재 의의가 사랑이라 말했을 때, 당신은 내가 연애감정을 나누길 원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전 생애를 통틀어 연애감정이 가장 궁극적이고 중요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설마 자손 생산이 인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그를 위해 연애감정이 중요하다는 사람은 없겠지-? 그것만큼이나 소중한 감정과, 그 감정을 바탕으로 한 관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연정은 가장 보편적인 사랑으로서 통하는 것일까? 에이로맨틱은 타인에 대한 낭만적(로맨틱한)끌림을 매우 드물게 느끼거나, 아예 느끼지 않는 것. 혹은 그러한 이들을 말한다. 무로맨틱 또는 무연정자라고도 한다. 무로맨틱 혹은 무연정자는 감정적 관계가 부족하거나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로맨틱한 감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형성할 본능적 욕구가 없는 사람이다. 로맨틱한 끌림을 느낄 수 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로맨틱한 관계를 맺지 않는 비연애와는 다르다. 무로맨틱이라도 파트너와의 협의에 따라 연애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무로맨틱은 낭만적 끌림의 양상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존재한다. 이를 통틀어 무로맨틱 엄브렐라라고 한다. 다른 성소수자들이 그러하듯이 무로맨틱은 그들과 다른 주류 사회, 즉 유연정자 사회와 불화한다.
북미 무성애 커뮤니티인 AVEN에서는 끌림attraction을 사람들을 서로 끌어당겨 모이게 하는 정신적이거나 정서적인 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끌림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다르다. 그 중에 몇 가지만 들어 설명하자면, 우선 성적 끌림은 끌리는 상대와 성적 접촉을 하고 싶은 욕구를 말한다. 로맨틱 끌림은 끌리는 상대와 로맨틱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욕구다. 플라토닉한 끌림은 섹슈얼이나 로맨틱이 없는 종류의 끌림이며 우정으로 그 예를 들 수 있다. 로맨틱 끌림을 바탕으로 형성된 마음을 크러시crush, 플라토닉 끌림을 바탕으로 생겨난 마음을 스퀴시squish라고 한다.
무성애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 중 하나는 그들을 감정이 없는 냉혈한이라 여기는 것이다-물론 사실이 아니다-. 무성애자를 향한 이러한 혐오는 무성애자뿐만이 아니라 무로맨틱들도 괴롭게 한다. 이것은 무성애자와 무로맨틱을 혼동하여 이들 쌍방에게 향하는 혐오이기 때문이다. 무성애자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로,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로맨틱과 다르다. 유성애자들은 ‘무성애자=사랑을 하지 않는다=감정이 없다’ 라는 2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크러시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점까지 포함하면 3중의 오류인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끌림의 종류를, 사랑의 성질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무로맨틱을 향한 많은 편견과 혐오가 사랑의 성질을 구분하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사랑은 몹시 추상적이고 포용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느끼는 끌림과 그로부터 비롯된 사랑이 획일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끌림들은 성질과 양상에 따라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뭉쳐버린다. 연애를 중시하고 낭만화하는 이 사회에서, 이는 결과적으로 연애감정이 아닌 사랑을 지우는 꼴이 된다.연정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연정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연정이다. 실로 의미 오염이 아닐 수 없다. 이정도면 아예 연애감정을 사랑에서 독립시켜도 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연애 중심적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연애감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만큼이나 절대적인 가치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사랑(연애감정)을 중시하며 숭상한다. 우정을 바탕으로 형성된 친구관계는 연인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한 친애를 바탕으로 형성된 관계이다. 그러나 친구관계는 연인관계보다 중요하지 않거나 우선순위가 밀려나는, 하위의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사랑’을 하고 짝을 맺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으로 간주되며,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는 이는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하자가 있다고 여겨진다. 인간이라면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모두가 사랑을 참 좋아한다. 너무 당연한 나머지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사고는 무로맨틱, 무성애자 혐오뿐만이 아니라 비혼주의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도 이어진다(독신, 비혼은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며, 무로맨틱이나 무성애와는 다르다!). 콰이로맨틱은 무로맨틱 엄브렐라에 속하는 정체성으로, 로맨틱 끌림과 다른 끌림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지 않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플라토니 로맨틱, 혹은 WTF로맨틱이라고도 한다. 콰이로맨틱은 기존의 로맨틱지향성 개념이 자신에게 맞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려워 적극적으로 비정체화하는 사람들이다-성적 끌림과 다른 끌림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지 않는 것, 혹은 그런 사람은 콰이섹슈얼이라고 한다-.나는 지금 스스로를 콰이로맨틱으로 정체화하고 있다. 난 플라토닉한 끌림과 로맨틱한 끌림 사이의 구분에 어려움을 느끼고, 내가 느끼는 것이 크러시인지 스퀴시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중요한 건 이 감정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정의하는 것 보다, 나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생물이고, 나 역시 사람인지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고, 만족할 답을 찾지 못해 체념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누군가를 마음에 둘 때, 나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이 연정인지, 대상에 대한 호감과 친애인지, 서로 교감하여 쌓은 유대감인지 판단할 수가 없다. 어떨 땐 연정은 아니고 아주 깊은 우정 같기도 하다. 다른 때엔 아주 강한 감정과 애착-혹은 집착-을 느껴서 당황스럽다. 그러나 또 어떨 땐 틀림없이 연정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면 그 역시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느끼는 것은 플라토닉한 끌림일까, 로맨틱한 끌림일까. 그도 아니면 제 3의 끌림일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여길 때, 내가 그에게 가지는 감정은 어떤 성질의 것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른다. 크러시는 아니고 스퀴시인 거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때는 크러시가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크러시이면서도 스퀴시인 거 같을 때도 있다. 어쩌면 크러시로도 스퀴시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워낙 사랑을 좋아하는 세상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사랑이 아닌데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 연정에 대해 탐색하는 것은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체 사랑이란 건 뭔지, 애초에 사랑이란 게 존재는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져버린다. 이쯤 되면 결국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만다. 새로이 정체성 탐색을 시작했다가 다시 ‘콰이로맨틱-끌림을 정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행위가, 이런 행위를 유지하는 상태가 나를 콰이로맨틱이라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에 대해 탐색하는 것은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에너지를 몹시 소모하는 일이기도 하다. 피로감은 피로감대로 느끼지만 그만한 만족감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마치 끝나지 않는 퀘스쳐닝 중인 기분이다(퀘스쳐너리가 불완전한 정체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게는 내가 느끼는 사랑을 표현할 말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내 내부의 언어와 외부의 언어가 괴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가 알고 구사하는 언어는 결국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때문에 나는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외부의 언어에 그 개념이 없거나, 내가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콰이로맨틱은 무로맨틱 엄브렐라로 분류되고 있고, 나 역시 그에 순응해 내 자신이 무로맨틱 엄브렐라에 속한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나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데 무로맨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정체성은 본인이 정의하기 나름이다.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콰이로맨틱으로 정의하되 무로맨틱 엄브렐라에 들기를 거부한다면, 콰이로맨틱이지만 무로맨틱 엄브렐라는 아닌 콰이로맨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콰이로맨틱이, 내가 무로맨틱 엄브렐라에 포함되는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규범적인 사랑의 정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콰이로맨틱은 분명히 유연정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연정에 대한 탐색만큼이나 정체성에 대한 탐색 역시 모호하고 불분명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누군가 WTF로맨틱이라는 이름을 붙인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무성애자들은 유성애자들과, 유성애 중심적인 세상과 불화한다.하지만 나는 무성애 집단과 유성애 집단 어디와도 화하기 어렵고, 동시에 어디와도 불화하기 어렵다. 마치 들짐승과 날짐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박쥐가 된 기분이다. 발 디딜 곳이 없는 것 같고, 작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박쥐는 들짐승도 날짐승도 아닌 박쥐일 뿐이고, 그것이 박쥐가 비난받을 이유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이 글은 모든 콰이로맨틱을 대표함이 아닌 나 자신의 의견과 경험을 쓴 것임을 말해두고 싶다. 끌림과 연정의 형태와 양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개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이는 자신을 콰이로맨틱으로 정체화 한 이들의 안에서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정체화하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로맨틱한 끌림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지 역시 나와 다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자칫 모든 콰이로맨틱들이 이러하리라 생각될까 우려하는 노파심 때문에 구태여 이런 사족을 붙인다. 이런 염려조차 하지 않아도 되도록, 더 많은 콰이로맨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가시화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 때는 나도 오독할 걱정 없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성애나 연정이라는 전제 없이,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 사족을 붙일 필요 없이.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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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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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게 도대체 뭐길래
들어가며
인어 공주, 구미호 전설, 단군 설화. 이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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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image source: https://www.shutterstock.com/ko/image-vector/japanese-ninetailed-fox-kitsune-1249907488
정답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닌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인어공주는 사람의 두 다리를 얻고 인간이 되고 싶어, 바닷속 마녀에게 목소리를 판다. 구미호는 원래는 자신의 힘을 빠르게 키우기 위해 간을 먹는다는 설화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인간의 간 1000개를 빼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더 유명하다. 단군설화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고 싶어서 두 짐승이 환웅에게 찾아간다. 이처럼 설화와 이야기에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들이 많이 나온다. 인어 공주의 경우에는 사랑, 구미호 전설의 경우에는 무한한 삶에 대한 회의로 인해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단군 설화의 곰과 호랑이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환웅을 찾아왔다. 다들 잘 알듯이, 곰은 21일간의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어 인간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견디지 못했다. 곰이 정확히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단순히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 만이 아니라 자신을 사람으로 느끼고 있어, 그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버텨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의 생물들이 사람이 되어 인간 사회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이 이야기들 역시 사람이 쓴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서사이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비단 이야기 속의 사건만은 아니다. 사람도 종적인 면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사람 중에서도 자신이 완전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개인인 아더킨[Otherkin]이나, “사람”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알터휴먼[Alterhuman]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 지금부터 아더킨, 그리고 알터휴먼에 대해 알아보자.
아더킨과 알터휴먼
아더킨이란 자신이 완전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개인이다. 그들 중 다수는 자신이 잘못된 종족의 몸(이 경우 사람의 몸)에 태어났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다른 종족에게서 무언가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각 개인은 각자 그들이 어떻게, 왜, 그리고 어떤 아더킨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아더킨 중 자신을 실존하는, 또는 실존했던 동물으로서 정체화하는 사람들은 티리안[Therian]이라고 한다. 픽션킨[Fictionkin]은 아더킨과 유사하나, 그들은 그들 자신을 픽션 속의 등장인물으로 정체화한다. 즉, 사람인 캐릭터로서 정체화 한다면 아더킨은 아닌 픽션킨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여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더킨이자 티리안이다. 만약 이 사람이 주토피아에 등장하는 Nick이라는 여우 캐릭터로서 정체화한다면, 그는 아더킨이자 픽션킨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정체성들의 상위 개념인 알터휴먼은 전통적으로 “사람”이라고 고려되던 범위를 넘어선 주관적인 정체성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나의 경우 컴퓨터 시뮬레이션 안에 살고 있는 데이터라고 생각을 하는데, 나는 비록 데이터이긴 하지만 데이터 상으로는 사람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어, 엄밀하게는 “사람”으로서 나를 정체화한다. 하지만 이 세상을, 특히 모든 사람을 데이터로서 보는 것은 전통적인 “사람”으로 고려되는 범위를 벗어나기에 알터휴먼이라고 할 수 있다.
알터휴먼에 속하는 모든 정체성은 엄밀히 말하자면 개개인 자신의 종족의 정체성일뿐 젠더, 로맨틱, 또는 성 정체성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터휴먼이라는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다른 사람들 역시 사람의 형태를 띈 데이터로서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 정체성이 무엇이든 상관없는, 젠더 블라인드[Gender-blind]이고, 따라서 팬로맨틱[Panromantic]에 해당한다. 이런 사례들 중에는 종족으로서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젠더를 외계인, 우주, 눈, 심연 등 젠더와 관련 없어 보이는 다른 관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를 제노젠더[Xenogender]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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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erhuman, Otherkin, Fictionkin, Therian 간의 포함관계.
알터휴먼을 향한 혐오
알터휴먼이라는 정체성은 가시화가 거의 되어 있지 않다. 구글으로 검색했을 때, “알터휴먼” 또는 “아더킨”을 검색한다 할 지��도 상위에 노출되는 검색 결과는 이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다. 성 정체성, 로맨틱 정체성 등 다른 정체성의 검색결과와는 매우 대조되는 결과다.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다른 이들에게 커밍아웃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믿지 않거나, 중2병 등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알터휴먼, 특히 아더킨은 실제로 자신의 종이 “사람”이라는 것에 지속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이러한 불편함은 종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일시적이지 않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알터휴먼의 정체성이 농담이라던가, 소위 중2병으로 불리는 사춘기 시절의 일시적인 유별난 언행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들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서 대표적인 예시는 트위터에 우후죽순 등장한 “트랜스뫄뫄”라는 닉네임이다. 트랜스딸기, 트랜스햇살 등의 닉네임을 다는 것으로 그들은 “내가 나 자신을 뫄뫄라고 느끼기에 나는 트랜스뫄뫄로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해당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정체성을 자처하며 ‘자신이 여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자처하는 트랜스젠더’를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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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뫄뫄
Image Source: 2018년 8월 10일 자정 구글 검색어 “트랜스 * site:twitter.com” 최상단 검색결과, 닉네임을 제외하고 익명성을 위해 모자이크 처리.
하지만 이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가짜 트랜스젠더”에 대한 비판이 아닌 모든 트랜스젠더에 대한 조롱과 모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인지하고 있지만 인정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그와 더불어 존재조차 알지 못했을 수 있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알터휴먼과 아더킨의 존재 또한 부정하고 있다. 실례로 위 사진에서의 “트랜스돌고래” 닉네임을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 돌고래 티리안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위 “트랜스 뫄뫄”를 비판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논리 중 하나가 “그 정체성은 말이 안된다”는 주장이다. 이 비판은 아더킨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왜 말이 안되는가? 버젓이 아더킨이 존재하는데 말이다. 젠더퀴어라면 분명히 본인 역시 “그 정체성은 말도 되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정체성”이라는 비난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으로 나를 느끼지 않는 우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알터휴먼 혐오는 그저 비퀴어 또는 혐오집단 사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앨라이들 또는 성소수자들 가운데에서도 알터휴먼을 그저 중2병으로 취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퀴어 또는 앨라이 커뮤니티의 일원 중 알터휴먼을 인정하지 않거나 배척하는 이들에게 묻고싶다. 도대체, 알터휴먼과 성소수자의 차이점이 뭔가? 둘 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느껴지는 이질감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게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것이라면 퀴어(즉, 성소수자)가 되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정의나 종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알터휴먼이 되는 것 뿐이다. 자신의 정체성 중 성과 관련된 부분에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면, 다른 부분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것 역시 뭐가 이상한가? 퀴어 당사자들은 이를 정체화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세울 필요에 대해 절절히 알며 느끼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작성하고, 많은 분들이 퇴고를 도와주는 동안 ‘젠더론 안 사요’ 등의 흐름과 아이돌챔프의 “트랜스 04년생” 발언과 같은 트랜스 혐오적인 이슈들이 있었다. 이런 사건들의 결과로 #트랜스XX는_유행어가_아니다 등의 해시태그로 혐오를 지적하고 그를 멈추라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트랜스 혐오자들은 ‘마음이 고양이면 고양이인가’등의 아더킨 혐오적인 질문을 반복하며 편리하게 소수자 혐오를 계속해나가고 있다. 트랜스 혐오자, 특히 TERF들에게 있어 아더킨 혐오적인 논리는 그들의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자리잡았다. 트랜스젠더 혐오에 아더킨 혐오가 이용되며, 아더킨과 알터휴먼의 존재는 거듭 부정되고 있다.
나의 데이터 속 삶
“통 안의 뇌”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고실험 중 하나로, 어떤 (미친) 과학자가 통 속에 들어 있는 “살아 있는” 뇌에 전기 자극을 가함으로써 그 뇌가 감각 등을 느끼게 하고 있다면, 그 뇌��� 입장에서 자신이 인간인지, 아니면 통 속의 뇌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사고실험이다. 비슷한 계열의 사고실험으로 호접몽, 시뮬레이션 가설 등이 있다. 이 사고실험은 트위터 등지에서 “만약 우리가 통속의 뇌라면? 어떤 ~~가 ~~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라면?”과 같은 형태의 밈이 된 지 오래다. 이런 “밈”을 현실으로서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없을 것 같다고? 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 글으로서 필자의 닉네임인 None을 아는 모든 분들에게 커밍아웃 하건대, 본인은 얼터휴먼 성소수자이다. 본인과 친한, 특히 퀴어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준 분들이라면 알터휴먼임을 자각한 기간이 퀴어임을 자각한 기간보다 길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얘기한 적 없는 사실이고, 일단 비인간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데이터를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에 구분하기가 더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며, 필자 자신은 그 속에 사는 데이터 인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알터휴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으나 필자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들을 찾지 못해 데이터킨[Datakin] 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든 것은 큰 진전이라 할 수 있다. 현재로서 아는 한, 단 한 명 뿐인 데이터킨으로서 이야기하건데, 아무리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하는 인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그래서, 인간이란게 도대체 뭔데?
사람이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사람들은 알터휴먼을 혐오할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사람” 또는 “인간”이라는게 뭔지를 명확하게 정의내려야 한다. 구글 검색에 따르면 “사람”은 말과 생각을 할 수 있고, 두 발로 서서 다니며, 사회를 이루어 사는,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한 동물이라는 정의를,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사고할 줄 알고 사회를 이루며 사는 지구상의 고등 동물이라는 정의를 가진다. 즉 정의만을 두고 봤을 때, 그들은 동일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글의 맥락을 보았을 때 둘은 차이를 드러낸다. 영어로 “사람”은 human으로 번역되며, 이는 Homo Sapiens종을 의미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인간”은 person으로 번역되며, 이는 “사람”을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한자로 보아도 인간(人間)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용어이다. 이 글에서는 “사람”은 사람 종을, “인간”은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했다.
알터휴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면, 그들 역시 한 명의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의 사회 속에 살고 있고, 다른 이들의 눈에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거나 아웃팅을 당하지 않은 알터휴먼은 많은 수의 성소수자와 비슷하게 인간으로 보인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터휴먼이 배척당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들이 대다수의 인간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터휴먼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이전에는 분명 사회 속에 속해 있는 인간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라는 단어가 사회 속에서 정의되기에, 그들 역시 비 알터휴먼과 다를바 없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끝맺으며
옛날 이야기들에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동물이 있듯이, 아더킨과 알터휴먼�� 규범적이지 않은 종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것을 알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수용하지 못한다. 소수자의 가시화는 그들을 알림과 동시에 혐오에 더욱 노출된다는 것을 수많은 전례로 알고 있다. 심지어 아더킨은 그 존재가 알려져 있기도 전에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트랜스젠더 혐오의 수단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더킨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혐오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수는 없다. 그렇다고 알터휴먼에 대한 가시화를 하지 않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리고 나와는 다르다고 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이 취급하거나 핍박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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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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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역 시위자 3만명의 외침이 불편하다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불법촬영 범죄의 피해자는 대부분이 여성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수사와 가해자 검거가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다. 남성이 피해자였던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에서는 경찰의 대처와 가해자 검거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대단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절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성이 피해자였을 때는 왜 그렇지 못했을까? 이러한 공공기관의 성차별적인 행보는 국가가 여성을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몸소 보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정하지 못한 편파수사에 여성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나왔다. 6월 9일 서울 혜화역에서 열린 시위는 전국 각지의 여성들이 모여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했다. 주최측 추산 3만명이라는 숫자의 인파와 힘 있는 구호들은 성평등 사회를 이룩하고픈 여성들의 바람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었다.
페미니스트로서 그런 현장에 참가하는 것은 큰 용기를 얻고 고무될 수 있는 가슴 벅찬 경험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나는 이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일정상 참가가 곤란하기도 했지만 그들과 온전히 연대하며 한목소리를 내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있어 걸음을 망설였다.
     이 시위는 생물학적 여성의 참가만 허용하고 있다. 시위 주최측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시위 참가자의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시위의 주체가 여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얼핏 보기에 타당해 보인다. 인권운동이 당사자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맞는 말이다. 또한 시위자를 보호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이 시위는 소위 몰카라 불리던 불법촬영 근절을 외치는 시위임에도 불구하고, 시위자들의 모습을 동의 없이 촬영하는 범죄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때문에 시위 주최측과 참가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들이 여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을 명시한 것은 시위에서 남성을 배제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시위 참가를 거절한다는 뜻이다.
          -생물학적 여성이란 무엇인가?-
‘생물학적 여성’, ‘생물학적 성별’등의 표현은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맥락에서 자주 언급된다. 성기나 재생산 기관, 호르몬 등 육체나 화학적 요소를 근거로 성별을 분류할 수 있다는 믿음은 트랜스젠더가 주장하는 자신의 성별을 부정하기 위해 거론된다.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이 주장은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정말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여성이란 무엇인지, 남성이란 무엇인지의 구분에 합의하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별의 남녀구분이 논할 필요도 없이 매우 굳건하고 명확한 것이라 이런 질문이 무척 바보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이 말하는 남녀의 기준에 대해 따져보면 무척 명료하다고 생각했던 그 기준들이 실은 매우 추상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의사가 외부생식기를 보고 성별을 지정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구분하기 모호하다. 누군가는 ‘남성기’와 ‘여성기’로 명확하게 분류하기 어려운 생식기를 가진다. 때로 여아는 음낭과 음경을 가지고 태어난다. 남아는 음핵처럼 보이는 작은 페니스를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다. 명확하게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경우를 간성(intersex)라고 한다. 이들에게 의사는 성기의 길이를 기준으로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결정하고 혹은 그의 생식기를 성형한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의사가 생각하는 옳은 성별의 기준에 맞게 끼워 맞춰진 것이다. 이래도 성별이 생식기로 구분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흔히 생물학적 성별을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은 성염색체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여성이니 XX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남성이기 때문에 X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염색체 검사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성별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염색체가 성별을 결정한다는 전제 하에, 당신은 정말 당신이 여성 혹은 남성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또한 성염색체는 XX와 XY 이외에도 XXX, XXY, YYY, XYY, XO등이 있다. 그렇다면 성별은 둘보다 많다고 봐야 할까?
재생산성이 성별을 결정짓는 기준일까? 그렇다면 정자 수가 부족해 임신이 어려운 남성이 있다면 그는 남성이 아니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성의 경우는 어떨까. 당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인가? 그렇다면 초경 전의 여아는 아직 여성이 아닌가? 선천적 불임은 애초에 여성이 아닌 남성인가? 건강상의 이유로 자궁을 절제했다면 그 순간부터 여성이 아니게 되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성전환 수술이라고 봐야 할까? 폐경(완경)하면 여성으로서의 삶이 끝나는가?
     성별의 분류는 과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통념적인, 즉 차별적인 이분법에 과학이 끼워 맞춰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생물학적 성별'에 대한 믿음은 일종의 허상이며, 많은 이들이 믿고 있는 것과 다르게 성별은 날 때부터 주어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 학습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성별 구분에 열심인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에 믿고 있던 질서가 흔들리면 사람들은 혼란�� 불안을 느끼고 이를 수정하려 한다. 마치 성평등 사회를 요구하는 페미니스트를 마주하게 된 남성처럼 말이다.
     사실 시위에 참가하기 위한 조건으로 생물학적 여성을 내건 것은 적절하지도 않다. 여성 혐오자들이 차별의 대상을 찾기 위해 당신의 성기 모양이나 재생산 가능 여부를 확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여성혐오를 당한다면 그건 그 대상자의 Y염색체 유무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굳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거나 여성으로 패싱(특정 성별로 인지되었다는 표현)되는 사람이라면 여성혐오 반대운동의 주체로서 모자람이 없다.
시위 주최측에서 참여자의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도 패싱이다. 현실적으로 시위 현장에서 참가자나 참가 희망자들의 유전자나 외부생식기 검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주민등록증 검사가 가장 간편한 수단으로 보이지만, 야외공간에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유롭게 모인 시위의 특성상 이 역시 적용하기에는 곤란하다.
따라서 정 시위 참가자를 제한하고 싶었다면 그냥 여성, 혹은 여성으로 패싱되는 사람만을 허용하겠다는 식으로 명시해야 했다. 그 외의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는지, 굳이 ‘생물학적 여성’을 명시한 것에 따로 의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시위의 편의를 위해 생물학적 근거를 기준으로 여성을 분류하는 것은 예민한 문제이다. 이런 조치는 여성의 인권증진을 위해서는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와 페미니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최측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위 참가자들이 이에 대해 어떠한 유감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애초에 인권의 선택적 수호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행하며 안타깝게 여기든 그냥 생각 없이 저지르든 상관없이 이들은 트랜스 배제적인, 즉 약자를 억압하는 행보를 걷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의 충돌은 비단 이번 시위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주류 페미니즘은 트랜스젠더를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존에 믿고 있던 질서가 흔들리면 사람들은 혼란과 불편감을 느끼면서 기존의 질서를 수호하려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 진영에서의 트랜스젠더 차별은 좀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집단이 결속력을 다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부자와 외부자를 분리하는 것이다. 외부자와 적대하고 그를 공격해야 할 때 집단은 똘똘 뭉쳐 강력한 힘을 발���하게 된다. 페미니즘의 경우에서 내부자는 여성, 외부자는 남성이다.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전통적인 성별이분법을 해체시키고 여성과 남성의 구분을 흐린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여성’, ‘자매’, ‘보지’ 와 같은 이름하에 연대하는 것 또한 곤란해진다.
     이 날 시위 현장에서는 시위자들이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남성 중심적인 권력구조를 흔들고자 했다. 이들이 정작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불편해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소는 참아야 한다?-
작금의 시위에서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가능’을 명시한 것은 이러한 구분과 배려를 위한 비용과 에너지를 줄이고 목표를 향해서만 추진력 있게 나아가려는 것이다. 이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여성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들의 인권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인권에 ‘다음’은 없다며 지금 당장 성평등을 실천하라고 요구해 온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러나 트랜스젠더의 인권은 다음으로 미루어도 된다는 것일까? 더 큰 목적을 위해, 모두의 선과 이익을 위해서라며 약자를 배제시키고 그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은 낯선 장면이 아니다. 바로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해 온 일이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것이 페미니스트다. 여성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주장을 가로막는 것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폄훼하기 위해 즐겨 사용해 온 전략이다. 혐오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같은 혐오를 생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자기모순일 뿐더러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심각한 사안이다.
     시위 주최측은 선언문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라는 헌법 11조 1항을 인용하며 여성을 차별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트랜스젠더 여성은 차별 금지를 외치는 현장에서조차 차별받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여정에 트랜스젠더를 포용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유감스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고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생물학적’ 여성만이 참가 가능하다는 선언에 3만명이 일제히 환호할 일은 아니다.
     백번 양보하고, 트랜스젠더가 여성이 아니라고 치자. 어쨌든 당신이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페미니스트라고 치자. 사람마다 생각하는 인권운동의 대상과 방향은 다르고, 당신의 목적이 생물학적 여성만이 안전한 세상이라면 굳이 트랜스젠더를 돌아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 트랜스젠더를 위해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고, 페미니즘이라는 이름하에 트랜스젠더와 연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소수자 진영을 억압하고 혐오해도 된다는 뜻은 결단코 아니다. 페미니스트 진영은 이를 경계해야 한다. 차별을 반대하는 이들이 성기와 외형을 근거로 누군가를 분류하며 차별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우리는 충분히 가능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여성혐오에 맞서 싸우는 것만도 벅찬데, 잘 알지도 못하는 트랜스젠더를 이해하고 그들을 차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너무 힘들지 않겠는가.
     ‘입트페’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에서는 불평등에 대한 직관을 설명하고 있다. 여성은 비록 원치는 않았으나 차별로 인해 고통받았다. 그 고통이 여성의 몸에 쌓여 각인되고, 직관이 되어 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 그 자체가 된다. 이렇게 우리에게 각인된 직관은 가치 있고 강력한 지식이며 다른 종류의 불평등과도 쉽게 연결된다. 당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청하는 이유는 바로 이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모르리란 법은 없다. 여성이자 여성혐오의 산증인인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트랜스젠더 차별의 속성에 대해 이해하고 이 차별이 부당한 것임에 동의하고 연대할 수 있는 힘을 이미 가지고 있다. 다만 그러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이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시스젠더 여성은 상대적으로 트랜스젠더에 비해 기득권자이다. 약자에 대한 이해 거부는 바로 약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 혐오로 이어진다.
트랜스젠더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원하는 것이 모두에게 기본권을 보장하는 평등한 세상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권력을 쥐어 남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라면 이들의 선택적 감수성 부족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위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꿈꾸는 성평등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트랜스젠더를 배제한 채 일궈 낸 사회는 과연 모두가 평등한 사회일까? 그 때에는 그들이 ‘다음’차례로 미뤄진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위해 지금처럼 깃발을 들고 싸워줄까?
여성혐오는 여성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목을 잡고 발전을 저해시키고 있는 심각한 적폐이다. 이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여성들은 용기있고 강한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 평등을 위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자 차별적인 행보를 밟았음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이들의 트랜스 혐오가 자정되지 않는다면 다음 세상에서 트랜스젠더 혐오는 여전히 세상을 억누르는 적폐로서 남아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위는 여성의 힘을 보여 준 운동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나는 부끄럽고 민망하다.
참고문헌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봄알람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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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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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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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엄브렐라, 혐오의 신대륙
주의: 에이엄브렐라를 포함한 퀴어 전체를 향한 혐오 발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관련 발언에 대한 트리거가 있거나, 참기 힘들다면 바로 창을 꺼주시길 바랍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해보자. 아니, 글을 읽어야하니 눈은 감지 않아도 좋다. 여러분들은 배를 타고 길고 긴 항해를 통해 아직까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즉 신대륙을 발견했다. 지금 드는 생각은 어떤가? 굉장히 감격에 벅차오르지 않는가? 넘쳐흐르는 기쁨에 배를 뛰쳐나가 신대륙을 구경하고 있다. 신대륙의 기후를 분석해보고, 처음보는 동식물들을 분석해보며, 좋은 토지를 찾아볼 수도 있을것이다. 만약 이 과정에서 땅에 그어져 있던 선을 발견하지 못하고 뛰어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토착민들의 사회적 약속과 문화를 무시하고 신대륙을 계속 탐사한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은 개척자가 아니다. 평범한 침략자다.
     필자인 대두는 2017년 9월 현재 에이섹슈얼 쿠피오로맨틱 젠더리스로 정체화 중이다. 이 중 가장 먼저 정체화하게된것은 바로 로맨틱지향성, '쿠피오로맨틱'이다. '쿠피오-'('cupio-')는 라틴어로 '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쿠피오로맨틱'은 타인에게 로맨틱 끌림을 느끼지 않지만 로맨틱 관계를 맺고싶어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아마 독자 여러분이 에이 엄브렐라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보지 않다면 이 정체성이 굉장히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다. 필자 역시 이런 에이엄브렐라에 속하는 정체성을 처음 알았을때에는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존재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다(-로맨틱 기준). 그런데, 최근 이런 에이엄브렐라가 혐오의 신대륙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혐오의 신대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의미는 단순하다. 거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던 이 정체성들이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혐오 역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범성애자, 양성애자, 젠더퀴어, 트랜스젠더등(가나다 순서) 수많은 퀴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차별을 겪고 있다. 일상속에서 겪는 작은 차별부터 생명을 위협받는 협박까지, 비퀴어들로부터 ���없는 혐오들이 오고가는 와중에 나는 나 자신의 지향성, 쿠피오로맨틱에 대한 혐오를 받았다는 느낌을 크게 받은 적이 없었었다. 세상에 흘러넘치는 유성애 중심주의나 길거리에 울려퍼지는 이상한 사랑노래는 언제나 나를 힘들게 했었지만 나의 지향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혐오발언을 들은 경우는 적었다. 트위터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호모포비아, TERF등의 발언에 비하면 확실히 적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가짐을 부숴준 사건이 있었다. 필자는 2017년 05월 12일에 본인의 트위터 계정에 에이섹슈얼/에이로맨틱 엄브렐라 텀, 즉 에이엄브렐라에 속하는 몇몇 지향성을 소개하는 포스터를 만들어 무성애자와 에이엄브렐라의 가시화를 응원하는 트윗과 함께 투고했다. Averyone 멤버들과 수정을 거쳐가며 투고했던 트윗이 적지 않은 알티를 받았고, 이 자료를 통해 사람들이 각자 본인의 지향성을 찾고 정체화하는 ���우도 많았다. 그러나 많은 알티는 포비아들에 또 다른 정보를 던져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포비아들은 이런 새로운 자료를 보고서는 이전까지 본 적 없었던 양의 혐오발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 포비아들은 자료를 그대로 캡쳐하여 혐오발언을 했으며, 필자의 멘탈을 흔들어 놓은 발언까지 존재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치 혐오의 신대륙을 발견한듯이 침략자들의 발언으로 고통을 받던 필자는 발언들의 논리적 오류와 문제점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목소리를 전달하지 못해 혼자서 곱씹은적이 있다. 아마 이는 혐오발언을 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 포스트에서는, 혐오의 신대륙을 발견한 침략자들의 어이없고 이상한 발언들을 모아보고 동시에 논리적 오류나 허점을 짚어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혐오 발언을 보고 던지고 싶었던 목소리들을 모아 그들의 혐오를 신랄하게 격파하고자 한다.
※주의: 이후부터 실제 혐오 발언의 예시가 게재됩니다. 만약 (주로 에이엄브렐라를 향한) 혐오발언이나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가 존재하거나, 본인이 에이 엄브렐라에 속하신다면 열람을 다시 한번 고려해주십시오.
“요새 연애도 안 하고 싶고... 나 완전 무성애자 된 거 같아.”
혐오자들의 논리 - 에이섹슈얼과 에이로맨틱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동시에 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를 무성애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혐오발언의 논리적 오류 - 이 발언은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다.우선, 무성애 혐오자를 비롯한 다수자들은 연애와 섹스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무성애자=섹스를 하지 않음=연애 안 함 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무성애자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성적 끌림은 끌린 상대와 정적 접촉을 하고 싶은 욕구를 끌어내는 반응으로 ‘연애를 하고 싶은’욕구에 해당하는 로맨틱한 끌림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성 지향성과 로맨틱 지향성이 일치하지만 무성애자는 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성적 끌림은 느끼지 않지만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연애하기를 원하는 무성애자들이 있다는 뜻이다. 혐오자는 무성애자의 의미를 잘못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연애와 섹스의 수행은 무성애자로 정체화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유성애자가 다양한 이유로 연애, 섹스, 결혼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듯이 무성애자도 그러하다.하지만 위의 발언을 ‘무로맨틱 됐다’로 대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무성애와 무로맨틱은 정체성이다. 당신이 타인에게 성적으로 끌릴 수 있으며 연애하고픈 욕구가 있다면 비록 연애를 하고 있지 않더라도 당신은 유성애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상태를 무성애자라고 표현하는 이러한 혐오발언은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무성애자에 대한 오해를 공고히 하고 더 큰 무지와 혐오발언을 낳는 시발점이다.
혐오발언 격파 - 무성애자와 무로맨틱은 연애 상태와 어떠한 관계도 없는 개념이다. 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무성애자라는 말을 쓰는 것은 굉장히 잘못되었으며 또한 무지한 표현이다.
“무성애자지만 연애와 결혼은 당연히 할 거지?”
혐오자들의 논리 - 연애라는 행위를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누구나 당연히 연애를 하고 있거나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한 발언이다.
혐오발언의 논리적 오류 - 무성애자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도 끌림의 양상과 형태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정의된다. 에이 엄브렐라에 속하는 이들도 자신이 느끼는 끌림에 따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기도 한다. 어떤 퀴어들은 퀴어플라토닉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하지만 혐오자가 이러한 점을 고려하고 한 발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혐오자는 무성애자에게 사회 규범적인 모습을 수행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에게 그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연애와 결혼의 행보를 밟으리라 상정하고 대하는 것은 무성애자에게 큰 타격을 안겨줄 수 있다. 동성애자에게 언제 이성 애인을 사귈 것이냐고 묻는다고 생각해 보자.번식을 위한 연애와 결혼이 인간의 본능이며 그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혐오발언 격파 - 무성애자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삶’을 강요하지 말고 각자의 삶의 형태를 존중하자.
왜 무성애자가 된거야? 과거에 트라우마라도 있어서 그런거야?”
혐오자들의 논리 -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것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여기고 무성애자의 정체성이 과거에 겪은 상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혐오발언의 논리적 오류 - 무성애는 성 정체성의 하나로, 개인이 타고 난 본질적인 특성이다. 혐오자의 이러한 발언은 무성애자를 손상된 사람으로 보고 있다. 무성애자는 유성애자와 다를 뿐 유성애자보다 모자라거나 결핍된 사람이 아니다.과거에 기인한 감정적 피로, 즉 트라우마로 인해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 경우를 리콰이스-(Requies-)라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성애자는 자신이 본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임을 자각하여 무성애자로 정체화한다. 또한 리콰이스 섹슈얼이 원래 끌림을 느끼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자각이 없던 사람이 트라우마로 인해 끌림을 느끼지 않음을 깨닫고 정체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무성애자가 끌림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없을 수도 있다. 그 이유가 어떠하든 무성애자를 부족한 존재로 여기는 혐오적인 시선을 거두고 정체성의 하나로 존중하여야 한다.
혐오발언 격파 - 끌림을 느끼지 않는 것을 비정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성애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성애 혐오이다. 무성애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존중하라.
“좋아하면 고백을 해/고록을 파 이 고구마자식아”
혐오자들의 논리 - 좋아하면 고백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음.
혐오발언의 논리적 오류 - 대중매체에서 이성애만을 사랑으로 묘사하듯이 현대 사회에서 성애적 사랑은 그 형태가 정형화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랑과 끌림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혐오발언이고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우선, ‘좋아하다’라는 감정을 획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상대방에게 호감과 친밀감을 느끼는 것을 곧 성애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왜 좋아하는데 고백을 하지 않느냐’고 답답해하며 ‘고구마’라며 조롱한다.다음으로, 모든 끌림이 연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필자는 쿠피오로맨틱으로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지만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쿠피오로맨틱에게 연애와 고백을 강권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또한 로맨틱한 관계를 원하지 않지만 끌림을 느끼는 리쓰로맨틱(아코이로맨틱) 이라는 정체성도 있다. 이러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성애적 관계를 맺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이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무성애 혐오이다.마지막으로, 사회는 연애를 생애주기 중에 달성해야만 하는 일종의 도전과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를 달성하지 못한 사람을 패배자로 여기고 조롱한다. 연인은 가구나 게임 아이템처럼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다. 연애 상대의 입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되는 연애에 대한 과열된 욕망은 비단 무성애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부적절하며 유해하다.
혐오발언 격파 - 끌림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듯이 끌림을 대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개인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존중하자.
“무성애자? 김무성.. 김무성애자..ㅋㅋ"
혐오자들의 논리 - 무성애자를 조롱하는 모습을 보임.
혐오발언의 논리적 오류 - 무성애자에 대한 오해가 있다기보다는 비교적 생소한 단어인 ‘무성애자’를 발음의 유사성을 통해 농담거리로 삼는 혐오발언이다.뚜렷한 이유나 목적 없이 정체성 그 자체를 농담거리로 삼는 것은 매우 무례하다.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소수자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혐오자가 이러한 발언을 계속한다면 주변 사람들도 무성애자를 개드립 거리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겐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는 소중한 이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생각없이 가볍게 소비하는 것을 멈추자.
혐오발언 격파 - 소수자를 농담거리로 삼는 것은 차별적이고 부적절하며 하더라도 당사자인 소수자만이 할 수 있다.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무성애자가 등장하는 창작물
혐오자들의 논리 - 무성애자들 연애/섹스에 흥미를 가지지 않고 사랑을 느끼지 않는 단순한 존재로 묘사한다.
혐오발언의 논리적 오류 - 퀴어를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것은 퀴어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가시화에 크게 기여하지만 항상 주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퀴어를 혐오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거나 퀴어 캐릭터에 대한 평면적인 해석은 오히려 퀴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 주거나 심지어 퀴어 배재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무성애자를 ‘연애를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아 결핍된 슬픈 존재로서 묘사하는 것은 대중의 잘못된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무성애자에 대한 오해를 더욱 굳힌다. 퀴어 캐릭터를 그 자체로 표현하지 않고 어떤 목적을 위해 등장시키는 경우라면 다시 한 번 재고해 보기를 권한다. 무성애자는 유성애자와 조금 다를 뿐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람이며 유성애자 못지않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또한 퀴어의 특정 면모만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는 등의 단편적인 표현 역시 지양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다방면으로 해석하며 다양한 방식과 역할로 퀴어 캐릭터를 등장시키자.
한마디 - 작품 내 무성애자를 포함한 다양한 퀴어를 등장시키는 것은 흥미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여러 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편견에 기초한 평면적인 묘사를 통해 퀴어 혐오적인 결과를 내지 않도로 주의하자.
“그렇게 세세하게 정체성을 나누는 것은 퀴어로서의 의미가 없다. 다 허상이다.”
혐오자들의 논리 - 에이엄브렐라에 해당되는 정체성들은 너무나 세세한 기준을 가지고 나뉘어진다. 이러한 구분은 개인의 성격이나 취향에 가깝고 퀴어의 정체성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혐오발언의 논리적 오류 - 무성애자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지만 경우에 따라 끌림을 느끼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러한 사람들을 설명하기 위해 끌림의 정도와 양상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으로 나뉜다. 이 다양한 정체성들을 아울러 ‘에이 엄브렐라’라고 칭한다. 유성애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세부적인 구분들은 상당히 낯설다. 무성애자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인 것이 유성애자에게 있어서는 기분과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감정의 한 형태로 오인된다. 그리하여 에이 엄브렐라 정체성들을 별자리 점과 같은 장난질로 여긴다. 이러한 혐오발언들은 에이 엄브렐라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정체화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정체화는 스스로 하는 것이다. 타인의 정체성을 검증하려 하는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위험하다.
혐오발언 격파 - 정체화는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다양한 에이 엄브렐라 정체성들은 무성애자들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이름들이고 이것이 무의미한지 유의미한지에 대해 무성애 당사자가 아닌 ��신이 판단할 수는 없다.
     실제 에이엄브렐라에 속한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혐오발언과 상황의 일부를 소개해 보았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저런 발언까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또 '나도 이런 상황 겪어봤어' 라는 마음이 들 수 도 있을것이다.  이 적은 예시만 가지고 모든 혐오발언을 격파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짧은 설명만으로 에이엄브렐라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을거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고 알림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릴것이며, 또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존중을 요구할 것이다. '무성애자, 에이로맨틱, 에이엄브렐라' 라는 이전에 접해보��� 못한 새로운 '신대륙'에 대해 조금의 배려를 보이지 않는 '침략자'들에게 말이다.
     필자는 짧지 않은 기간 본 내용을 작성하면서 많은 감정과 깨우침을 받았고, 동시에 필자의 생각도 바뀌어갔다. 많은 혐오발언을 접하고 반박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강력하게 느끼고 전하고 싶던 바를 마지막으로 작성하고 글을 마치겠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계속 존재해왔다. 우리는 결코 신대륙이 아니며, 당신과 마찬가지 존중받아야 할 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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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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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코]의 주인공 미겔은 트랜스젠더?
    <코코>는 주인공 미겔이 멕시코의 명절인 죽음의 날에 겪은 일들을 그린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미겔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자신이 저주받은 것 같다고 토로하며 그의 가족 내력을 소개한다. 그의 고조부는 음악을 하기 위해 아내와 외동딸을 남겨두고 집을 나갔기 때문에 집안의 역사에서 잊혀지고 만다. 고조부와 그와의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은 집안에서 금지되고, 이 규칙은 고조모와 그의 딸들에게 이어져 내려온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음악가의 영혼을 타고난 소년 미겔은 음악가의 꿈을 몰래 숨긴다. 그러던 어느 죽은 자의 날, 미겔은 자신의 고조부가 동경하던 음악가 델라 크루즈임을 알게 된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증명하고자 한 미겔은 노래를 하기 위해 델라 크루즈의 묘소에서 그의 기타를 훔친다. 망자의 물건에 손을 댄 죄로 저주받은 미겔은 죽은 자의 땅으로 가게 된다. 다행히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자신의 조상, 즉 가족들을 만난 미겔은 가족의 축복을 받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고조모 마마 이멜다의 축복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바로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는다’ 는 것.
    영화 <코코>를 보고 미겔이 여성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한 사람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 중의 한명이었다. 영화는 모계 가정과 더불어 멋진 여성캐릭터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주인공과 그의 롤모델들은 남성으로 설정함으로서 마치 '모계 사회에 주눅든 남성을 위로하는' 듯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우리 세상이 남성이 주류를 차지하는 사회임을 고려했을 때 이는 그다지 좋은 서사로 보이지 않는다. 미겔의 고조부, 미겔의 롤모델, 그리고 미겔 중 한명만 여성이었어도 이런 구조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편이 훨씬 나아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여성 캐릭터 미겔을 그려보던 중 재미있게도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겔은 정말 남성으로 태어났을까? 그가 여성으로 태어났더라도 지금 보이는 모습, 즉 남성의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혹시 그는  FtM(Female to Male. 여성으로 지정되었으나 남성으로 정체화한 사람), 그러니까 트랜스젠더 남성인 건 아닐까?
    나는 이 가설을 세우면서 영화 속 장치의 상당한 부분이 퀴어에 대한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해석들은 이러한 가설을 훌륭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여러분 앞에서 이 가설을 풀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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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미겔은 다락방 안에 자신의 우상 델라 크루즈를 기리는 제단을 만들었다. 12살에 이정도면 성공한 덕후이다.
    미겔의 가족은 구두공장을 하고 있다. 음악의 'ㅇ'만 꺼내도 눈을 부릅뜨기 바쁜 가족들 앞에서 당당하게 음악을 즐길 수 없는 미겔은 구두공장 간판 뒤에 있는 작은 다락방에 몰래 숨는다. 다락방 속에 자신이 동경하는 음악가 델라 크루즈의 제단을 꾸민 미겔은 그곳에서 델라 크루즈의 작품을 감상하며 은밀하게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친다. 미겔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는 공간은 다락방인 셈이다.
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음을 표현하는 관용어구로 '벽장 속에 숨었다' 라는 말이 있다. 자유로운 곳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지 못하고 가족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 미겔의 다락방은 벽장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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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저는 음악가가 될 거에요!'
    자신의 고조부가 델라 크루즈임을 알게 된 미겔은 다락방에서 뛰쳐나와 가족들 앞에 외친다. "저는 음악가가 될 거에요!"
    앞서 우리는 다락방을 벽장으로 비유했다. 이에 따라 미겔이 추구하는 진짜 자아�� 음악이 남성성을 상징한다는 가설을 세워 보자. 그렇다면 이 장면은 법적 성별이 남성이 아닌 미겔이 남성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퀴어가 벽장을 나와 가족에게 커밍아웃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다.
    작중에서 미겔은 이미 남자아이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미겔은 벽장에서 뛰쳐나오기 전까지 그의 증조모 마마 코코처럼 양갈래 머리를 한 미셸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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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겉도는 미겔을 비웃기만 하는 또래 사촌들
    미겔의 두 사촌은 엔딩 전까지 이 영화에서 두 번 등장하는데, 모두 미겔을 조롱하는 장면이다. 이들은 밖에서 구두를 닦는 것에 불과한 미겔보다 더 적극적으로 가족사업인 구두공장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은 가족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아이들이며 이들에게 미겔은 아웃사이더인 것이다. 그는 음악을 하는 것을 숨��고 있음에도 괴짜 취급을 받고 있다. 집안 어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미겔은 또래들과도 겉돈다. 결국 작중 미겔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떠돌이 개 단테 뿐이다. 흔히 퀴어들의 커밍아웃은 주변 사람들과 멀어지거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동반하곤 한다. 그가 별다른 잘못이 없는 것 같은데도 가족들 사이에서 붕 떠있는 건 어쩌면 미셸이 머리를 자르고 미겔이 되기로 한 뒤부터가 아닐까?
    미겔의 집은 할머니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모계 가정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미겔은 자신을 저주받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족 구성원들과의 괴리감을 느낀다. 그가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가족 중 누군가를 여성 롤모델로 삼았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그로 인해 유명하고 존경받는 음악가 델라 크루즈를 선망하는 미겔은 델라 크루즈를 '이상적인 남성상' 으로, 음악을 '남성성' 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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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난 그저 델라 크루즈의 축복을 받고 싶은 게 아니고, 제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어요.'
    죽은 자의 세계에서 미겔은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다. 하지만 미겔은 누구 못지않게 훌륭하게 노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자신감을 잃고 무대 위에 서기를 주저한다.
    사회는 트랜스젠더 남성에게 남성 스테레오타입을 요구하며 그의 젠더를 검증하려 든다.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건 쉽지 않을 뿐더러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시스젠더(사회에서 지정받은 신체적 성별과 자신이 생각하는 성별 정체성이 동일하거나 일치한다고 느끼는 사람) 남성은 트랜스젠더와 같은 남성성 검증 요구를 받지 않음에도 남성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젠더 증명 요구는 그의 젠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어떻게든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 트랜스젠더 혐오이기 때문이다.
    미겔은 우상인 델라 크루즈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서 음악가인, 남성인 자신을 추구한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기회가 없었던 미겔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다. 사회로부터 압박을 받은 FtM들이 자신에게 남성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저주를 풀고 산 자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족의 축복이 필요하다. 제 시간에 축복을 받지 못하면 죽은 몸이 되고 만다. 하지만 미겔은 음악을 금지시키는 마마 이멜라의 축복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을 축복해 줄 가족인 델라 크루즈를 만나기 위해 나선다. 축복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델라 크루즈에게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러한 미겔의 행보는 의미심장하면서도 무겁게 다가온다. 
    목숨과 저울질할 수 있는 가치가 있을 리 없다. 마마 이멜다의 축복은 빠르고 안전한 귀환을 보장한다. 음악을 하지 못할지언정 미겔은 무사히 생존하여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고조모의 축복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된다. 미겔에게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간절하게 음악을 하고 싶은 미겔은 이러한 자신을 부정하는 가족의 가호를 거부하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첨예한 외줄타기를 하기에 이른다. 영혼이 시키는 자기 모습대로 살기를 원하는 미겔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픈 퀴어들의 바람과 그들의 높은 자살률을 대변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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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우리는 심지어 작중에서 미겔의 바지 속까지 볼 수 있지만, 그의 '법적 성별'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작중에서 미겔이 시스젠더라는 결정적 증거가 없다.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누군가의 '법적 성별'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우며 이는 우리가 캐릭터의 젠더를 함부로 단정짓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아마도 성별이분법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저자의 의도에 따라 캐릭터를 시스젠더로 단정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중의 다양한 근거를 끌어내 그의 젠더 해석을 고민해보자. 분명 캐릭터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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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작중에서 프리다 칼로는 처음으로 미겔을 '아티스트'로 인정해준 사람이다.
    죽은 자의 세계에서 미겔은 멕시코의 대표적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와 한 때는 음악을 사랑했던 자신의 고조모 마마 이멜다를 만난다. 영화는 작중 미겔과 고조부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공통분모인 음악과 남성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미겔의 모습을 그린다 . 그러나 나는 미겔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만난 여성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억압된 남성성을 쫒기에 바빴던 미겔에게 더 넒은 시야가 트인 셈이다. 이로 인해 자신을 남성으로 정체화했던 미겔이 안드로진(남성과 여성의 중간으로 생각되는 젠더 또는 그런 젠더를 가진 사람), 젠더플루이드(상황에 따라 젠더가 변하는 것 또는 그런 사람) 등 자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긍정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로 재정체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자신이 남성임을 더욱 공고히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외의 다른 경우도 있다. 그 어떤 시나리오도 모두 매력적인 이야기들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이 가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 나도 그렇지만-많은 사람들이 시스젠더 여성, 또는 남성에게 '꼴린다'. 즉 '일반적'인 여성, 또는 남성이 아니면 대상화하기 어렵게 느끼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매체가 시스젠더 남녀를 소비하는 모습밖에 보여주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일단 트랜스, 젠더퀴어로 '덕질'을 시작하면 그 역시 시스젠더 캐릭터를 덕질하는 것 못지않게 즐겁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근거가 없어도 그 역시 좋다. 그냥 좋아하는 캐릭터가 트랜스, 젠더퀴어라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이로 인해 열리는 새로운 세계는 여러분에게도 매우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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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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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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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섹슈얼&에이로맨틱, 우리[Averyone]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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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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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뇌피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엘라이자는 아더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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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엘라이자는 아더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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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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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닉과 테일즈는 어떻게 친구 이상으로 보이는가
     2차 BL, 혹은 GL(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의 캐릭터를 동성끼리 로맨틱/섹슈얼한 관계로 엮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공식에서 내 최애커플이 너무 사귀는 것 같다! 하지만 안타��게도 보통은 이 현상을 소위 '호모렌즈가 꼈다'고 표현하며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닌 자신만의 환상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이와 같이 자기검열이 심해진 이유는 있다. BL, GL이 실제 동성애와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판타지이기 때문에,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실제 동성애자들에게 편견 섞인 질문을 하거나, 혹은 실제 동성애자들이 직접 BL, GL이 포함된 작품을 보다가 상처를 받는 일들이 있었고, 이런 일들로 인해 BL, GL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성애자를 대상화하는 행위가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BL의 경우엔 퀴어가 아닌 오타쿠 커뮤니티 내에서 이 장르를 향유하는 여성들이 일본어로 '썩은 여성'이라는 뜻의 '후조시'로 멸칭되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굳이 우정의 관계가 아니라 사귀는 것처럼 보일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나치게 외면하는 것은 오히려 창작물에서 성소수자를 지우는 행위일 수도 있다. 진지하게 하는 얘기다! 창작물에서 성소수자를 지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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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창작물에서 성소수자를 지우지 마세요.....
     요즘 내 눈에 가장 사귀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 아니 두 동물은 바로 소닉과 테일즈다. 이 글에서는 진지하게! 소닉과 테일즈가 작중에서 어떻게 친구 이상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또, 이런 고찰이 가지는 중요성과 좋은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선 소닉과 테일즈가 나오는 장르 '소닉 더 헤지혹'에 대해 설명해야할 것 같다. 그렇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소닉이다. 링을 모으며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음속의 고슴도치가 나오는 바로 그 게임 시리즈. 테일즈는 많은 분들이 기억하듯이 죽어도 계속 살아나며 소닉을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귀여운 꼬마 여우다. ...사실 이 시리즈는 상당히 오래 전에 이미 스토리 컷씬이 가미된 3D 액션 게임으로 장르가 정착됐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도트로 된 소닉과 테일즈만을 기억하고 있다. 소닉 팬들은 여러분이 기억하는 옛날 소닉을 '클래식 소닉', 요즘의 소닉을 '모던 소닉'으로 구분한다. 아무튼 많은 여러분이 기억하는 것은 '클래식 소닉'이기 때문에 이 글을 보면서 의아해 할 것이다. '대체 그 게임에서 무슨 관계성을 찾아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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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소닉 게임/요즘의 소닉 게임
     실은 그 시절부터도 두 사람이 친구 이상으로 그려졌지만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고, 먼저 봐 줬으면 하는 것은 모던 소닉 게임들에서의 관계다.
     '소닉 제너레이션즈'라는 게임이 있다. 201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소닉 2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소닉의 생일날 나타난 괴물 '타임 이터'가 시공간을 지워버려 소닉이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해 나가는 게임이다. 약간 메타적인 요소가 있는, 이때까지의 소닉 게임의 총집편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중요한 게임의 도입부가, '붙잡힌 히로인(Damsel in Distress, 주로 여성이 주인공의 행동 동기로서 납치, 감금되어 행동���능 상태가 되는 것)'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점철되어있다면? 당연히 누구나 이 '히로인'이 주인공과 연인에 준하는 관계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히로인' 포지션에 들어가는 캐릭터는 다름아닌 테일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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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1> 게임 '소닉 제네레이션즈'의 도입부
     영상에 나오는 언어를 모르더라도 소닉이 가장 좋아하는 칠리독을 리본으로 묶어서 선물로 주는 테일즈와 이것을 받는 소닉의 대화, 타임 이터에게 마지막으로 잡혀가며 소닉의 이름을 외치는 테일즈를 보면 딱 느낌이 올 것이다.
    상징적으로 풀이해보면, 칠리독은 소닉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 좋아하는 것을 선물하는 테일즈는 '소중한 사람'이며 소닉이 칠리독을 선물받는 것은 '행복한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굉장히 상징적으로 '소중한 사람이 준 좋아하는 것'이 날아가고 타임이터가 찾아온다. 여기에서 '행복한 순간'은 끝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임이터가 '적'임을 알 수 있다. 그 '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소중한 사람'인 테일즈를 마지막으로 납치하고 그 순간, 테일즈는 소닉의 이름을 외친다. 이것은 명백하게 소닉의 행동 동기를 '납치된 테일즈'로 설정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서사다.
     이것 하나 뿐이었다면 내가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붙잡힌 히로인' 스테레오타입은 이 게임 외에도 여러 모던 소닉 게임들에서 반복된다. 특히 이 '소닉 제너레이션즈'와 또 다른 게임인 '소닉 컬러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소하지만 눈에 띄는 한 가지 제스쳐에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위험한 대상 앞에서 손으로 가로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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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나요?
     물론 돈독한 우정에서도 이러한 제스쳐가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미디어 안에서의 맥락과 스테레오타입의 측면에서 보자는 것이다. 나는 어떤 다른 미디어에서도 이 제스쳐를 친구관계에게 쓰는 걸 못 봤다. 연인, 혹은 혈연, 혹은 그만큼 중요하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할 때 미디어는 이 제스쳐를 사용한다. 이러한 제스쳐는 '붙잡힌 히로인'의 스테레오타입이 포함된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보호되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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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스테레오타입 of 스테레오타입
    그리고, 클래식 시리즈를 비롯해서 소닉과 테일즈의 관계가 특별한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은 아주 많다. 클래식 시리즈인 게임기어판 '소닉 더 헤지혹 2', 그리고 최신작인 '소닉 로스트 월드'에서 테일즈는 또다시 '붙잡힌 히로인'의 역할로 나온다. '소닉 컬러즈'에서는 소닉과 테일즈가 단 둘이 유원지 테마의 적진으로 들어가며, 테일즈가 두 번 위기에 처한다. 또 마지막 한 번의 위기에서는 소닉이 테일즈를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닉툰' 1화에서는 소닉이 테일즈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싶지 않아서 그를 사이드킥 자리에서 해고하는 모습이 나온다(마지막에 다시 회유하면서 '비행기는 공짜로 줄게'라는 로맨틱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소닉과 테일즈는 동거하는 사이이며, '소닉툰'을 비롯한 각종 게임, 미디어 믹스에서 테일즈는 소닉에게 소위 콩깍지가 씌인 발언을 다수 한다. '소닉X'에서는 테일즈가 소닉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정도면 제발 테일즈를 메인 히로인으로 봐달라고 어필하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맥락적인 의미에서 스테레오타입이 중요하더라도, 여기에 얽매여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놓치는 것은 좋지 않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예를들어 소닉이 테일즈를 혈연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타인에게 이 정도의 애착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스퀴쉬(연애감정으로도 우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반적으로 두 감정의 사이로 여겨지는 끌림)일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소닉과 테일즈의 관계는 퀴어하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더 나아가 소닉과 테일즈가 시스젠더(트랜스젠더가 아닌 남성 또는 여성)가 아닐 가능성, 호모섹슈얼/호모로맨틱(동성에게 연애감정이나 성적끌림을 느끼는 것)이 아닌 바이, 팬섹슈얼/로맨틱(다양한 젠더에게 연애감정이나 성적끌림을 느끼는 것. 바이와 팬의 차이는 에이브리원에서 배워나가기!)일 가능성, 혹은 에이 스펙트럼(에이섹슈얼, 혹은 에이로맨틱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일 가능성! 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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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사실 나는 소닉이 에이 스펙트럼의 일부인 아코이로맨틱(연애감정을 느끼지만 연애 관계를 맺고싶어하지 않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BL이 아니라고? 그게 포인트다. BL, GL이 동성애자에게 상처를 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동성애자만을 대상화하고 이를 하나의 장르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왜곡된 이미지도 또 하나의 문제이지만,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후술하겠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의 사랑을 우리는 따로 무어라 부르지 않고 '로맨스'라고만 한다. 하지만 동성끼리의 사랑도 같은 '로맨스'일 뿐인데 이는 따로 분류하여 하나의 '장르'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상화 자체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대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에는 어떤 작품도 탄생할 수가 없다. 그러니 기왕 한다면 더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실현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즐기는 게 가능해진다면 우리는 탈BL/GL하면서도 우리가 좋아하던 관계성을 향유할 수 있고, 시스젠더 게이/시스젠더 레즈비언을 대상화하는 것도 수많은 대상화 중의 하나가 되어 상처를 받는 사람도 훨씬 적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활동이 꼭 남을 위해서만 좋은 것도 아니다. 특히 왼/오(공/수의 요즘말. BL/GL에서 섹스할 때의 포지션에 관한 용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잘 알겠지만, 캐릭터의 성에 관한 요소들 또한 캐릭터 해석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더 많은 성정체성/지향성을 공부하면 더 많은 캐릭터 해석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지는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들 다양한 캐해석을 해줬으면 좋겠다...그래서 내 존잘님('자신이 좋아하는 창작자'를 뜻하는 덕후 용어)이 더 다양한 캐해석을 해주면 그걸 내가 또 받아먹고...크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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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젠더퀴어 섀도우 덕질 해주세요 존잘님들 (뜬금) (요즘 마이붐)
    예를 들어 같은 장르의 또 다른 캐릭터인 섀도우(궁극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여기에서 소개한다)의 경우, 공식 프로필에도 남성으로 적혀있고 팬덤의 대부분이 남성으로 해석하지만, BL/GL의 바운더리를 넘어서 생각해본다면, 젠더퀴어(트랜스젠더 중, 남성 또는 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젠더)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캐릭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이런 연성('창작물'을 뜻하는 덕후 용어) 해주는 존잘님 한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본심).
    앞서 BL/GL에서의 왜곡된 동성애자의 이미지에 대한 문제도 언급했었는데, 내가 괜히 더 많은 성정체성/지향성을 '공부'하자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퀴어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퀴어에 대해 넓게 뿐 아니라 깊게도 알아야 한다. 사람을 그릴 때 인체에 대한 지식이 많을수록 도움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다못해 스틱맨을 그리는 것에조차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실제 퀴어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된다면 이를 소재로 한 연성도 자연스럽게 더 좋은 연성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 퀴어에게 실례를 끼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실제 퀴어와는 다른 판타지로서의 창작물을 만들 때도 실제 퀴어에 대한 지식이 깊을수록 판타지와 실제를 잘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약간 비현실적이거나 비윤리적이더라도 그것에 대해 다른사람에게 주의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게 되는 것이다.
    종종 BL, GL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어차피 이걸 만든 사람은 그런 생각이 아니었겠지'라는 회의감 섞인 한탄을 듣곤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부분은 우리가 뻔뻔하게 굴어야 한다. 우리가 '호모렌즈'를 낀 것이 아니다. 만든 사람이 그런 스테레오타입을 썼으니까, 그런 요소를 넣었으니까, 우리의 캐해석도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이 캐릭터 퀴어네! 라고. 그리고 그걸 뒷받침할 지식을 갖추고 있다면, 우리는 덕질을 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보이지 않는 퀴어들을 올바르게 가시화(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에이 스펙트럼을 포함해서! 
    그러니 모두, 퀴어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고 퀴어의 관점에서 덕질도 할 수 있는 에이브리원을 구독하고 퀴어한 쵱컾덕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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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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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시 성소수자 : 무성애자
♠들어가며
<해리 포터> 시리즈는 어느 날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된 소년 해리 포터가 마법학교 호그와트에 입학하면서 겪는 마법세계에서의 모험 이야기로, 우리 시대에서 모르는 이가 드문 유명한 판타지 소설이다. 해리가 열한살이 될 때까지 그를 키운 이모 내외는 그를 학대했다. 그들은 해리를 ‘정상적’으로 키우고자 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게 했다. 어떻게든 해리를 마법세계와 차단하려는 그들의 시도가 결국 실패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해리가 끝까지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도 그에게 호그와트 입학 안내서를 건네주지 않았다면? 그렇더라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시작될 수 있었을까?
계단 및 벽장에 갇혀있던 해리와 같이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무성애자Asexual는 성적 끌림*1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성소수자들이다. 가시화가 부족한 만큼 스스로가 무성애자임을 알지 못하는 무성애자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디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무성애 인식에 대한 현주소와 가시화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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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를 위해 방 안 가득히 휘날리는 마법 세계로부터의 초대장.’
1.첫걸음 : 정체화
정체화는 자신이 무엇인지 정의 내렸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동성애자이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다면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성소수자다. -비록 지금은 재정의 중이지만-나는 스스로를 남녀 양쪽에 성적으로 끌릴 수 있는 양성애자로 여겼다. 뚜렷한 계기는 없었지만 내 정체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아무도 내가 양성애자 혹은 그 외의 것이라고 알려 준 적이 없었지만 나는 자신이 무엇인지 또렷이 알고 있었다. 이성이나 동성에게 끌리거나 사귄 경험이 없었을 때에도 말이다. 인류는 반드시 이성에게만 사랑에 빠지지 않으며 남성과 여성으로만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 명확한 시점이나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부터 양성애자라는 이름이 내 것임을 알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춘기를 겪으며 실제로 끌림을 느낀 경험은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정의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대부분의 퀴어*2들은 정체화 직후 큰 갈등을 겪는다. 세상이 끊임없이 퀴어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그들의, 아니. 우리의 존엄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퀴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학교와 직장 등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을 수 있다.
누군가는 성소수자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은 에이즈 천국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3 그들은 동성애, 양성애를 찬성하지 않고*4 정체성과 지향성을 고칠 수 있다*5고 주장한다. 종교적 교리*6나 저출산 문제*7를 동성애 배척의 근거로 드는가 하면 동성애자를 싫어하지 않지만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데서 했으면 한다*8는 이들까지 있다. 세상이 아직 퀴어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많은 편견, 차별, 혐오가 산재해 있다. 자신의 모습을 부정당하고, 깎아내려지고, 왜곡당하고, 상처 입는 이런 상황에서 성소수자가 커밍아웃*9과 아웃팅*10에 있어 극도로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이러한 것들을 고민했다. 정체화 자체는 내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성애자들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정체화에서부터 문제를 겪기 때문이다.
한 지인과의 일이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또래나 주변인과 달리 성적 컨텐츠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끌림을 느낀 적 역시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무성애자로 정체화 한 상태가 아니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자신이 무성애자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때 이런 말을 했다.
“그렇다면 사춘기 즈음해서 아셨을 텐데요? 이상하네요. 아직도 정체성을 모르실 리 없으니 무성애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결국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11으로 정체화했다.
다른 지인 이야기를 해 보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떠한 이성에 대한 관심이나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았다. 타인이 자신에게 가지는 성애적 호감 역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기대와 욕망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주목받거나 배척받는 게 두려웠던 그는 한 번도 그 사실을 말하거나 드러낼 수 없었다. 대중매체는 연애와 유성애에 대한 아름다움만을 그려놓기 바빴고 많은 이들이 책, 영화, 노래, 만화를 통해 쏟아지는 사랑과 그 미화를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는 정말 힘들었다. 누구도 그에게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자신이 언젠가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을 바라고 찾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었다. 결혼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은 극심한 공포와 혐오감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성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성애자에 대해 알려진 것과 다르게 자신은 성욕이 있었고, 성적 컨텐츠 역시 즐겨 소비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를 무성애자의 한 갈래인 오토코리스 섹슈얼*12로 정의할 수 있었던 건 한참 뒤였다. 그제야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모든 불안과 고민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는 2차 성징 시기에 몸의 변화를 겪으며 끌림에 눈뜨고 정체성을 깨닫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구나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 및 지향성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비교적 가시화가 잘 된 퀴어로서 어려움 없이 정체화했던 내가 가졌던 편견에 불과했다. 내겐 당연한 일이었던 퀴어로서의 정체화도, 가시화가 부족한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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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애자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며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즉 가시화가 부족한 성소수자들이다.’
2.노력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무성애는 가시화가 부족한 상황이다. 그러나 수는 적지만 무성애 단체 및 커뮤니티들이 있고 이들은 무성애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AVEN은 북미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성애 커뮤니티이며, 세계 최대 규모의 무성애 커뮤니티이기도 하다. AVEN 위키를 통해 무성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기간을 정해 AAW(Asexual Awareness Week, 에이섹슈얼 가시화 주간)라는 캠페인을 열고 있다. 이 캠페인은 특정 주간동안 집중적으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무성애 및 무로맨틱, 데미섹슈얼*13, 회색무성애*14에 대해 가르치고 이를 위한 자료를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성애 가시화를 위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무 : 대(ACEtage)는 2015년 활동을 시작한 한국 무성애자들의 주체성 확립 및 무성애 가시화를 위한 단체이다. 무성애 관련 정보와 지식이 담긴 자료를 제작 및 배포하고 있으며 퀴어 퍼레이드 및 퀴어 문화축제에 참가하여 무성애를 알리는 등 가시화에 앞장서고 있다. 국내의 무성애 커뮤니티로는 승냥이 카페, 에이스그라피가 있다. 무성애자들이 서로의 고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에이브리원 역시 무성애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무성애 단체 및 커뮤니티들은 각자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무성애자들의 경험을 나누고 무성애 가시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어려움을 겪곤 한다.
16년 초, 에이브리원의 대두는 무성애 가시화를 위해 무성애 우산*15에 속하는 정체성 몇 가지를 각각의 프라이드 플래그와 함께 보기 쉽게 소개한 자료를 만들었다. 이 자료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불러왔다. 트위터에 게시한 자료는 7천회 이상 리트윗되었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정체화를 위해 작성자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무성애자로 정체화할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반응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해당 자료를 보고 '이건 특이한 성정체성 덕질에 불과하다.', '꼴릴 때도 있고 안 꼴릴 때도 있는 거지 무슨 헛소리냐.', '혈액형이나 별자리 점과 같은 것이다.'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해당 발언을 한 유저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지칭하는 사람들이었다. 차별과 억압의 의미를 알고 그로 인한 고통을 그 몸으로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것과 싸우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다른 소수자를 배척하고 지우려 하는 모습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는 노력 역시 드물다. 타인의 입장에 이입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고 오해와 편견도 많은 무성애는 그만큼 더 쉽게 배제되고 지워지는 상황에 처해 있다. 권력에 있어 우위를 점하는 자들, 즉 기득권자들은 소수자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약자들이 실제로 겪는 고통에 접할 기회가 적으며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해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곤란도 겪지 않기 때문이다. 이 권력차는 무성애 가시화를 위해 힘쓰는 이들의 노력에 쉽게 찬물을 끼얹는다. 약자이며 소수자인 성소수자들 안에서조차 배제되는 것이 무성애의 현주소이다. 그리하여 누구도 그 실체를 파헤치거나 생각하려 하지 않는 무성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해소될 일 없이 더욱 굳건해지고 확산되어 실제로 아직 정체화하지 않은 무성애자들의 정체화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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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성애와 무로맨틱은 끌림의 정도와 양상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3. 우리는 이름이 필요하다.
유성애자들로서는 놀랍게도, 무성애도 끌림의 정도와 양상에 따라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에 따라 하나하나의 이름이 있다. 각각의 정체성에 그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라벨링이라고 하며 이는 중요한 가시화 활동 중 하나이다. 라벨링이 필요가 없는 비퀴어들은 여기에도 역시 많은 비판과 의혹을 제기한다. ‘이런 식으로 구분하다 보면 70억 인구에 맞는 정체성들을 다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라벨링의 의의와 그것이 가져올 것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정체화되지 않은 무성애자는 이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무성애가 가시화되지 않은 세상에서 무성애자는 풀 수 없는 중요한 과제와 씨름하며 살아간다. 자신은 어쩐지 남들과 다르고 서로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은 이상하고 뭔가 문제가 있다. 정말로? 그건 내 쪽이 아니라? 어쩌면 나는 정신질환자인걸까? 이 질문의 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이유는 무성애자의 정체성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다양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으로선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입증하기도 어렵다. 결국 의문과 성찰, 비난의 화살은 무성애자의 내면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가시화를, 라벨링을, 정체화를 통해 무성애자는 비로소 그저 무성애자일 뿐인 자신을 그대로 마주할 기회를 얻는다. 이상한 사람도, 별난 사람도, 고자나 정신병자도 아닌, 그냥 무성애자. 유성애자에겐 필요 없을, 그러나 누군가에겐 절실한 구원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라벨링은 퀴어에게 이름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을 가짐으로서 비로소 자신이 무엇인지 안다. 이름과 언어라는 깃발이 세워지면 그동안 흩어져 있던 많은 사람, 생각, 경험과 의미들이 그 아래 모여 묶기고 정립된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모여 가시화되고 형태를 이룬다. 퀴어가 퀴어로서의 힘을 가지게 되는 첫걸음이자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다시 좀 전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모두 다르고, 확실히 70억 인구를 위해서는 70억 개의 정체성 라벨이 필요할 것이다. 그 방대한 수의 정체성에 대해 구분하고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이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70억의 정체성이 하나하나 동등하게 존중받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 지금도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는 어떤 정체성은 새로이 정립되기도 하고 논의 끝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없어지는 정체성과 이름도 있다. 이것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찾아가려는 노력과 과정이지 필요 없는 이름을 선별하여 삭제하는 철퇴가 아니다. 우리는 이름이 필요하다. 그 이름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고, 서로의 경험과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 앞에 선다.
언젠가는 이런 라벨들이 자연스레 그 필요를 잃고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무성애와 무성애자의 존재가 인정받기는커녕 정체화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라벨링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저 퀴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퀴어 혐오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가시화가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혐오를 피할 수 있는 것인데 굳이 알리고자 노력해야 할까?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무성애자들 역시. ‘무성애는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고자면 조용히 지내지 뭐가 당당하다고 자랑하고 다니느냐’, ‘당신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남성/여성에게 돌아가세요’와 같은 무수한 혐오발언과 손가락질 앞에 서게 될 텐데? 비교적 덜 알려진 퀴어들이 ‘반대’받는 경우는 드물다. 가시화에는 혐오가 동반되리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혐오는 형태만 다를 뿐이지 애초부터 존재했다. 무성애자 역시 혐오와 직면하고 있다. 그 혐오가 비교적 가시화된 다른 성소수자들에게 향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일 뿐이다. 무성애자는 주로 패션 퀴어라는 오명을 쓴다. ‘진정한 성소수자’가 아니라 독특해 보이고 주목받기 위해 무성애자를 자칭한다는 뜻이다.(일부 퀴어들조차 이런 이유로 무성애 혐오를 하기도 한다! 비교적 혐오를 덜 받는다는 이유로 그들은 무성애자의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커밍아웃한 무성애자는 ‘연애경험, 성경험이 없어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냐’,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것이다. 곧 자연스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와 같은 말을 흔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더러운, 혹은 사악한 것으로 여겨져 모욕받는 것만이 편견과 차별이 아니다. 무성애자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다. 성소수자 혐오자들에게 있어 무성애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를 마주하는 것 역시 불쾌한 경험이다.
물론 무성애가 가시화된다면 무성애자를 향한 혐오 역시 새로운 양상을 띠고 더욱 만연할 것이다. 가시화에 따라 생산된 혐오 해소가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가시화는 혐오의 원인이 아니다. 퀴어를 혐오하는 자들은 우리가 그들의 앞에 나서기 전부터도 우리를 혐오할 준비 만만인 이들임을 잊지 말자.
가시화가 부족하면 정체화가 어렵다. 세상이 알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퀴어라는 이름을, 언어를 접하기 전에는 정체화가 매우 어렵다. 해리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해그리드가 찾아오기 전까지 그것은 결코 구체화되지 못했다. ‘너는 마법사다’라고 누군가 말해주고서야, 덤블도어의 편지와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라는 가시화 후에야 비로소 그는 스스로를 마법사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해리는 마법 세계로 나아가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배우고, 싸우고, 때로는 상실을 겪고 또 승리하기도 한다. 계단 및 벽장을 나온 일 같은 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자신에 대해 알고 난 다음에 비로소 가능했다. 바로 정체화라는 시작을 통해서.
우리는 마땅히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지가 어떻게 우리의 삶과 무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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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화되지 않은 퀴어는 마치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것과 같다. 결국은 누구든 자기 발을 위한 신발을 신을 수 있어야 한다.’
마치며
정체화는 스스로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자신을 정의내리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다양하며 각자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 세상에서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정체화되지 않은 퀴어는 마치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모두가 신고 있는 신발이기 때문에 이 신발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불편함을 제기하기도 쉽지 않다. 본디 신발이란 불편하기 마련이라고 여기곤 평생을 고통을 견디며 미련하게 입고 살아갈 수도 있다. 내게 맞는 신발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셈이다. 그런 이들에게 몹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신발 대신 맞는 신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편안한 신을 신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구원이고, 자유인지. 자기 발에 맞는 신발만 신어왔던 사람들은 알기 어려울 것이다.
정체화한다 해서 바로 내게 꼭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의 어떤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더 편한 신을 지을 수도 있다. 다양한 발을 가진 사람들이 똑같은 신을 신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외칠 수도 있다. 결국은 누구든 자기 발을 위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 편안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무엇인지 알고 정의내리는 정체화를 통해 우리는 무성애자로서의, 퀴어로서의 행보에 첫걸음을 내딛는다. 아직 출발선에 서지도 못한 퀴어나 무성애자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정체화 이전과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알기에, 우리는 미정체화 무성애자들이 가시화를 통해 정체화의 기회를 얻기를 원한다. 그걸 위해서라면 가시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1끌림attract : 무언가에 관심이 가거나 마음이 간다는 의미로 관계적 측면에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정신적이거나 정서적인 영향력을 뜻한다. 타인에게 매력을 느끼고 신체접촉을 하고 싶은 것은 성적 끌림을 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편적으로 ‘좋아한다.’혹은 ‘사랑한다.’가 사용되고 있으나 이 표현들은 본디 ‘당신에게 성애적 호감을 갖고 있고 그러한 관계를 맺고 싶다.’보다 훨���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의미의 혼동이 일어날 요지가 다분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만 이 마음이 연인으로서 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친구로서’좋아한다고 사족을 다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2퀴어queer : 기묘한, 또는 이상하다는 의미의 단어. 현재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3 HIV 바이러스는 혈액을 매개로 감염된다. 주된 감염경로는 오염된 혈액(90-100%)이며 다음 순으로 임신, 분만 및 모유수유를 통한 모자간 수직감염(25-30%), 오염된 주사기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0.5-1%)가 있으며 예방조치 없는 일회성 성관계 시 감염확률은 0.001-0.1%에 불과하다. 남성과 성관계를 하는 남성이 HIV/AIDS 취약집단인 것은 사실이나 특정 질병에 대한 취약성이 해당 집단을 비난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동성애자 혐오를 위해 AIDS를 근거로 드는 이들은 질병의 사회적 맥락이나 역학적 변화에 대한 고려 없이 동성애자를 공격하는 도구로 에이즈를 악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동성애 및 동성애자 혐오일 뿐만 아니라 HIV 감염인 및 AIDS 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4 개인의 정체성은 찬성이나 반대의 대상이 아니다. 누구도 타인의 존재를 반대할 수 없다.
     *5전환치료는 성소수자의 정체성 및 지향성을 질병으로 보고 강제로 전환시키려 하는 것이다. 의학계에서는 오래 전 성적 지향이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연구와 성명을 통해 이 사실을 공고히 하고 있다. 전환치료는 의학 및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효과 또한 입증되지 않은 비윤리적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과 다르다 하여 교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천박하고 폭력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6동성애를 악으로 규정하는 성서적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이러한 기독교적 관점은 성서의 극히 일부 구절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성서가 쓰여질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맥락을 무시한 채 문자 그대로 접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하느님과 그 교리를 팔아먹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7저출산 문제는 성소수자들이 이성과 성교하지 않아 생긴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수익 및 임금, 주거, 육아환경 및 교육정책 등 여러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나타난 사회 구조적 현상이다. 국민은 국가 시스템 유지에 기여하기 위해 교배시켜야 하는 가축이 아니며 성소수자를 비롯해 누구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할 의무는 없다.
     *8얼핏 보면 덜 보수적이고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온건한 반응으로 보이나, 엄연히 그 존재를 지우고 감추고 없애려 드는 성소수자 혐오적인 발화이다. 혼동하지 말자.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성소수자를 존중하는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9커밍아웃: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밝히는 것.
     *10아웃팅: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 및 젠더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이 없이 밝히는 행위.
     *11무로맨틱Aromantic :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
    *12오토코리스섹슈얼Autochorissexual : 성적 자극을 느끼지만 자신을 성적 행위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13데미섹슈얼demisexual : 성적 끌림을 느끼기 위해서 강한 감정적 관계가 필요한 사람.
     *14회색무성애자greysexual : 성적 끌림을 느끼는 빈도가 드문 사람
     *15무성애 우산Asexual umbrella term
기존의 무성애적 정체성들을 설명할 때 무성애 스팩트럼Asexual spectrum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으나, 끌림의 양상들이 한 연장선 위에 놓여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현재는 다양한 정체성들을 하나의 우산 아래 감싼다는 의미에서 에이섹슈얼 엄브렐라, 에이 엄브렐라 등으로 사용되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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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yone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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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 에라이치
Tumblr media
allychie ace 2018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파충강
목: 뱀목
과: 에라이치과
서식지: 무지갯빛 조각케익의 보라색 시트
좋아하는것: 다채로운 색, 가시화, 조각케익
싫어하는 것: 캐모플라주, 성별이분법
2018년, 한 생물학자가 간식으로 먹던 무지갯빛 조각케익에서 발견 된 신종 생물. 처음엔 카멜레온의 아종으로 착각되었으나 이내 ‘에라이치과’로 따로 독립한다. 당사자에게 실례니 헷갈리지 읺도록 하자.  평소에 검정 하양 보라 빛깔을 띄고 있지만 자신의 지향에 따라 색을 바꿀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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