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weekend-seoul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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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WEEKEND PROGRAM
박제호 × 이연석 (1/17-2/16)
박제호는 시대상과 조형언어 간의 관계성을 풀어내는 데에 목적을 갖고 작업한다. 그의 회화는 좌절될 수밖에 없는 기대와 욕망이 물신숭배적으로 집약된 판타지에 가깝다. 모노크롬과 고딕을 동시대와 연결지으며, 회화 매체를 불안한 시대상에 대한 극복 의지이자 여파로 바라본다.
이연석은 동시대 자본주의에 놓인 물질과 그것들이 위치하는 방식을 기반으로 회화의 새로운 형태를 탐구한다. 질량과 제조 이력이 감지되지 않는 화면은 모든 것이 0이라는 환상의 지점으로 다가간다. 그것이 실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이의 모호한 연결에 주목한다.
박세영 × 이소정 (4/3-5/3)
박세영은 영화과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전공하고 있다. 일상의 풍경과 허구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대안적 몽타주와 내러티브를 발명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이소정은 영상 매체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광학적 매체를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삼고 이를 풍경 이미지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표현한다.
조주현 (5/15-6/7)
조주현은 사회를 구성하는 그러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규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러한 비가시화된 규칙을 드러나게 하는 대상을 탐구한다. 매끄럽게 마감하려 하지만 종종 실패된, ‘콜라이더가 체크되지 않은 땅’과 같은 결과물에 주목하며 연원과 과정을 역추적해나간다. 이를 위해 사실을 수집하고, 사실 너머의 상상력을 가져온다.
* 코로나19으로 부득이하게 2020년 프로그램을 위와 같이 축소하여 운영합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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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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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주현
2020. 05. 15 - 2020. 06. 07
Opening Hours: Fri, Sat, Sun 1-7 pm
* ‘생활 속 거리두기’ 전환에 따라 전시 관람은 온라인 사전예약으로 운영합니다.
* 전시장 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1시간당 4명으로 입장을 제한할 예정입��다.
*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예약 링크 : https://forms.gle/oXZYt4U4nDMctPTdA
당신은 이 흑공에서 나올 수 있을까?
지속적으로 진행된 기상이변과 전염병으로 인해, 지금의 지구는 많은 생태계가 파괴되어 자원부족 사태를 겪고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년은 격변의 전쟁이라 할 만큼 다 분야의 변화에 가속도가 붙어 여기까지 왔다. 2019년 말 시작되었던 호주 산불과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인하여 많은 것이 멈춰지고 인류 생활에서 인지하지 못했던 경계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인류 중심의 생활상태는 잠시동안 림보 상태에 머물수 밖에 없었지만, 잠시나마 이산화질소 양도 크게 감소되었고 마치 이 행성이 자정능력을 보이듯 지구 곳곳에 기대하지 않았던 야생동물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간의 공백을 메꾸려 가동된 산업으로 이상 기후는 전보다 더 빠른 주기로 찾아오게 되면서 재배가 가능한 식물 종의 감소와 건기와 우기 밖에 남지 않아 모래바람과 폭우로 지구는 생태가 불가능한 상태에 점점 가까워 지고 있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자가 뇌 회로 세팅을 통해 다양한 감정과 지능 또한 계산되어지는 것이 일상화 되면서 데이터 및 기술적 지능과 공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소유욕이 사라졌고, 이전시대의 인류가 그렇게 바래왔던 영원한 삶을 이루게 되었으며, 많은 것을 공유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전의 국경과 정치의 권력을 흐리게 만든 대신 ‘지구생명체 연대’라는 이름으로 느슨한 공동체가 자리를 잡아 많은 것을 결정하고 추진하게 되면서, 현재의 지구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20여년 전의 정치를 되풀이 하듯 이 연대는 해체될 위기를 여러번 겪어왔지만 지구에서의 삶은 더 이상 대안이 없다는 현실에 대부분 동의하고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Habitable Zone)’ 사업에 많은 부분이 집중되고 있다. 또한 블랙홀 주변에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의 존재 또한 확실해 지면서, 블랙홀의 존재 조차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대안적 우주 에너지로 바뀌게 되었다.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관련 사업과 연구에 대한 정기적인 발표로 인해 인류는 지구의 사고체계를 벗어나 우주적 사고체계로 확장되고 있다.
당신은 아직 인류에게 지구라는 행성의 희망이 있는 시대에 서있지만, 동시에 블랙홀을 대하듯, 까마득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당신에게는 현재가 글리치(시스템의 일시적 오류)가 발생한 게임의 플레이어처럼 탈출하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와 같이 현재가 멈춰있다고 느끼거나 반복적으로 재생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내가 앞서 말했던 그 과정의 그 어딘가 일지도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설정된 아직 검증전의 가설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인 지옥문을 바라보았던 단테처럼 지금 당신에게 블랙홀은 희망이 없는 공간으로 느껴져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내가 있는 현재는 많은것이 당신이 예상하는 것을 벗어났음을 사실을 다시한번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흑공’은 블랙홀과 같이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당신이 속한 자본주의 사회의 ‘장벽’들, 가상세계 속 ‘탈출 할 수 없는 공간’, 당신에게는 아직 미지의 공간인 ‘블랙홀’ 사이를 오가며 아직 명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흑공을 두고 종종 자신의 비관적 처지를 투영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것이 생태의 변종을 떠나 인류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당신이 이 전환점이 될 수 있는 틈을 발견해주었으면 한다. 당신이 알아 챘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보내고 있는 이 세번째 겨울은 특히 끝이 없을것 같이 길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은 ‘흑공’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을 ‘흑공’의 존재를 완성하는 바로 그 탐험자가 될수 있기를 희망한다.
당신은 이 흑공에서 나올 수 있을까?
- 박미주
기획 및 협력
박미주
소설
천선란
사운드
위지영, 양윤화
공간디자인
괄호
그래픽디자인
하형원
주최
위켄드
후원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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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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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혹은 투명한 몸과 뒤집힌 세계
함윤이
몸들은 부딪칠 때 가장 재미있다. 부딪치는 일은 천천히 사라지는 것, 또한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1]. 
 《범퍼! Bump!》(이하 《범퍼》)의 영상들은 서로 만나고 충돌하며 자신의 경로를 찾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전표처럼 놓인 한 쌍의 영상 작품들이 총 다섯 줄, 한가운데로 틈새를 만들면서 천장에 걸려 있다. (가장 마지막의 <Murika>와 <Julie>만은 예외적으로 서로에게 보다 가까이 접해 있다.) 입구를 등지고 서면 오른쪽 행이 이소정의 작품들, 왼쪽은 박세영의 작품들이다. 나란히 걸린 한 쌍의 영상들은 서로 간의 느슨한 연계 속에서 함께 설치되었다.
 위캔드의 전시 공간은 한 덩어리로, 분리된 영역 없이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열을 제외하면, 관객들은 영상을 관람하기 위하여 각 작업에 할당된 의자와 헤드셋을 사용한다. 해당 영상의 소리에 집중할 때 영상들 사이의 마찰력은 한층 약화된다. 앞뒤로 반사되는 다른 이미지들, 프로젝터의 빛 등이 미약한 방해가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범퍼》의 직접적인 갈등은 물리적인 조건들 아래서보다, 관객들이 전시를 하나의 맥락으로 기억하는 순간 본격적으로 심화한다. 모든 이미지들은 정해진 공간에-묘사하자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각자 다른 스타일의 영상이 양옆으로 밀착되어 있을 때, 각 작품에 대한 인상은 전시 전체의 감상 속에서 각개의 ‘변별 요소’라기보다는 ‘부분집합’으로서 인지된다. 어떤 이미지들이 먼��, 또 나중에 떠오를 것인가? 동시에 《범퍼》의 영상들은 어쩌면 극장의 지위를 탐내는 방식으로 재생된다. 그들은 자신과 마주앉은, 헤드셋과 의자에 앉은 한 명의 관객에게 중심으로서 주목받기를 원한다. 어떤 스크린 앞에 마주앉더라도 관객들은 “나를 주목하라”는  이미지들의 힘 싸움에 휘말린다. 열을 따라 지그재그로 영상을 감상하건, 행을 좇아 각 작가의 행보를 살피건, 영상들은 서로 부딪친다. 무엇을 먼저 보고 또 누구를 다음에 보든, 모든 작업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달라서 변함없이 충돌한다. 충돌이란 만남의 또 다른 형태다. 그들은 하필 같은 전시장 안에 함께 설치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운명공동체다.
이미지들은 모두 다른 시공간에서 왔다. 만들어진 방법론 역시 각기 다르다. 동일한 풍경-캐나다의 온타리오 호수를 촬영한 <I love you Michael Snow>에서조차 그 차이가 드러난다. 모든 이미지들이 각자 가고 싶은 바가 다를지언데, 이들 간의 교집합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비약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분명한 공통점은 보이기는 한다. 이들은 모두 디지털 이미지다. 움직이고 있다. 움직인다는 점에서, 생명체와 유사한 궤를 갖는다. 그러나 이들의 몸을 이루는 것은 피와 살과 뼈가 아니다. 이들의 몸은 내부적으로 0과 1의 이진법 프로그램이며, 외부적으로는 점•선•면•색상•소리 등의 요소들로 이뤄져 있다. 다만 첫눈에 보기에는 우리의 현실에 존재할 법한 피사체의 형태로 꿈틀거린다. 이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도처에 있다. 쇠퇴한 이미지들은 0과 1 속에서 부활 가능하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마지막 저서, 『사라짐에 대하여』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일반적인 픽셀화의 우발적인 한 조각[2]으로, 나타남이 없었기에 사라짐의 운명 또한 상실한 대상으로 평한 바 있다. 디지털 이미지들은 현실을 수치적으로 포착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나고 사라지는 일 자체를 잃어버렸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지는 중요치 않은 시대이므로-우리는 정말이지 온갖 가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이미지의 귀중함이란 개념은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디지털의 환영은 더 이상 늙지 않으므로, 그 운명은 그다지 팽팽하지도 않다. 
두 명의 작가 또한 그 운명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라질 수 없는 이미지들이 사라질 수 있게끔 총력을 기울인다. 이미지들의 삶이라도 되찾아주려는 모양이다. 태어난 적 없는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시도로써, 그들은 각자의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그들이 만난 형상들을 바라보다, 기어코 손을 댄다. 쇼트들은 서로 부딪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원본이었던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혹은 함께 내걸린 스크린들과의 관계로 인해 그 자신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이미지들은 지시체로부터 떠나간다. 떠나온 곳에서 각자의 시공간을 구축한다. 《범퍼》의 모든 작업들은 이동하는 움직임의 과정이다. 지시 대상이 존재하는 현실을 떠나, 이미지들 각자가 또 다른 의의를 형성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는 몸짓. 그들은 이미지들을 붙잡아 가능한 먼 곳으로, 애초 피사체가 가진 적 없던 새로운 운명을 향해 떠나보내고자 한다.
그들의 고집은 영상을 제작하는 방법론들로부터 시작한다. 《범퍼》의 영상들은 (동시대의 다른 영상 작업들과 마찬가지로)디지털 카메라 또는 편집 툴로써 제작되었다. 2020년에 와서 영상을 제작한 기기나 프로그램을 구태여 언급하는 일이 아무래도 사족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범퍼》의 두 작가는 모두 필름 제작이 쇠퇴한 이후의 세대, 즉 ‘디지털 시대’만을 주로 경험한 작업자들이다. 그들에게 ‘이미지’들은 디지털 제작물과 거의 동위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미지에는 다시 한 번 ‘디지털’이라는 오래된 형용사를 붙일 수밖에 없다. 작가들 자신이 이미지 자체를 다루는 과정에서 그 개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미지는 적분학의 데이터로 기록되되, 현실(작업자들 각자가 그들의 신체로 겪어온 시공간)과 다른 방식으로 탄생하여 작동해야 한다. 전시장의 스크린 속 지시체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아오는 수많은 사물들과 같은 이름 혹은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다. 일순 이들은 제 2 롯데타워의 재현으로, 또는 토론토의 고층 건물이라거나 인천 부근의 등대 그 자체로 보인다. 그러나 재생과 동시에, 이들은 우리가 알던 세계의 규칙으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쇼트 간의 배열 속에서 새로운 맥락을 얻거나, 편집 과정 안에서 낯선 외양을 획득한다. 그들은 재생하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연계 속에서 새로운 장소를 발굴하도록 요구받는다. 즉 《범퍼》는 0과 1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프로그래밍 된 적 없는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모순적인 투쟁이다.
투쟁의 몸짓은 각각의 작업마다 다른 태도로 나타난다. 가장 첫 번째 열의 작업들, 유일하게 외부 스피커와 함께 굴러가는 <I love you Michael Snow>는 《범퍼》라는 제목의 외연에 가장 잘 부응하는 작업이다. 두 개의 영상은 서로에게 어깨를 맞댄 채, 동일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굴러간다. 각 영상의 움직임들은 서로에게 있어 지극히 대비된다. 박세영은 호수 너머의 이미지들로 카메라를 고정한다. 대상 하나를 척도로 삼은 뒤 카메라를 “돌린다!” 맨 처음 빌딩의 정경(처럼 보였던 것)은 뒤집히고, 회전하고, 흔들리는 과정에서 점차 색깔의 덩어리로 변한다. 반면 이소정은 본인이 직접 “돈다!” 호수와 그 맞은편의 풍경들 중앙에 서서 빙글빙글 회전한다. 호수와 황무지는 극단적인 움직임 속에서 희끄무레한 선으로 변한다. 그들은 원하는 만큼 움직인 뒤 다시 멈춘다. 다시 호수의 물결과 빌딩 숲으로 돌아오지만, 그 세계는 이미 갈라졌다.
두 개의 이미지는 길을 잃는다. 그들은 사라진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제 온타리오 호수는 전과 다른 무엇이 되었다. 카메라의 기록 속에서 일차로 흔들린 형상들은, 편집 프로그램 내부에서 이차로 변형된다. 혹은 동일한 쇼트가 구간마다 반복하며 일정한 형상에 켜켜이 의의를 쌓는다. 이미지들은 다른 피사체와 엉겨 붙으면서 지시 대상들과의 거리감을 확보한다. 그들은 대상이 가졌던 본래의 모습(근사한 마천루와 호수)을 잃은 대신, 충분히 망가질 자유를 얻었다. 마천루의 꼭대기는 극단적 ‘날카로움’의 감각을 나타내려는 형태로 변환하며, 빌딩숲은 언제나 회전이 가능한 색채의 덩어리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변형 가능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시체들을 떠난다. 
<Hold it!>과 <Winodwlicker>의 열에서부터, 관객들은 각자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쓴다. 이 물리적인 조건이 관객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요구하면서, 시청각의 직접적인 충돌은 한층 약화한다. 이제 영상들의 ‘범퍼’는 좀 더 내부적인 것으로 변한다. 관객들의 내부에서도 각기 다른 스타일의 영상에 대한 감상들이 부딪칠 것이다. 다만 좀 더 주목하고 싶은 쪽은 작가들이 작업 내부에 심어둔 장치들이 초래하는 충돌이다. 이 열에서부터 작가들은 각자의 이미지들이 갖는 무수한 가능성-무엇으로도 변형될 수 있으며, 어떤 가상이건 축조 가능하다-을 의식한다. 이로써 그들은 디지털 기기•프로그램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미지들을 제작한다. 이소정은 이후 나타나는 작업인 <Splash>와 마찬가지로, 촬영 기계를 인간의 신체가 아닌 다른 곳에 부착한다. <Hold it!>의 카메라는 스쿠터 뒤편에 매달리면서, 작가가 연출할 수 있는 형상들을 대폭 축소한다. 녹화 버튼이 눌리고, 카메라는 보다 우발적인 방식으로 바닥을 촬영한다. <Hold it!>에서 중시되는 것은 포착되는 지시체라기보다, 흔들림 그 자체에 있다. 이미지는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지시체-아스팔트를 최대한으로 배반한다. 렌즈가 포착한 시야는 흔들림을 극대화하면서, 아스팔트를 석유 화합물이 아닌 전연 낯선 물질로 보이게 한다. keygen의 노이즈와 시각적 흔들림이 공명하면서, 아스팔트는 기기묘묘한 상징으로 체화한다. 생물이 탄생하는 순간, 또는 벌레들이 우글거림 같다. 관객 중 누군가는 이후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보면서 아스팔트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와 어깨를 맞댄 <Windowlicker> 또한 디지털 이미지들의 내부적인 흔들림을 가져오고자 한다. 연출자의 전면적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 그곳은 구글로 대표되는 웹 내부의 이미지들이다. 박세영은 자신이 보거나 만진 적 없는 이미지들을 가져와 가상의 타임라인을 만든다. 이곳에 기계-구글 번역기-의 목소리가 가세하며 새로운 규칙들을 형성한다.  
처음에는 구체적인 대상들이 있다. 제 2 롯데타워와, 2007년 촬영한 강남구의 조감도가 그것이다. <Windowlicker>의 이야기, “롯데타워에 불현듯 등장한 ‘빛의 기원’을 찾아간다”는 목적이, 이미지들을 재조립한다. 그 안에서 도심의 풍경은 빛의 추적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변화한다. 또는 빛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증명하는 외연으로써 움직인다. 누가 이들을 찍었는지(아마도 구글 맵 스트리트 뷰의 트래커들일 텐데) 몰라도, <Windowlicker>의 경로에서 본래의 용도들은 서서히 사라진다. 대신 그들은 새로운 역할 속으로 녹아든다. 영상에 등장하는 납작한 빌딩은 실제의 구글 어스 속 이미지의 왜곡된 화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누구의 의도와도 맞지 않게 망가진 형상을 새로운 규칙 속으로 들여보내면서, 쓰러진 건물은 석양과 마주보는 지점으로 화한다. 그들은 <Winodowlikcer>라는 그물망 속에서 (“빛의 근원을 찾는 게 쓸데없다/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혹은 자신들에게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운명을 찾아 나선다. 
<Splash>는 전시장 내 작업 중 가장 직접적으로 사용한 기계의 특성을 드러낸다. 모든 푸티지는 물속에서 촬영되었다. 다시 말해, 방수 기능이 부착된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Splash>는 성사될 수 없다. 또한 모든 쇼트는 작가의 연출 없이 기록되었다. 이소정이 카메라를 바다로 던지면, 프로그램이 자동 기록을 시작한다. 이 때 뷰파인더를 확인하는 주체는 부재하다. 카메라는 단지 파도의 움직임에 맡겨진 채 물속의 시간을 포착한다. 연출하는 눈 없이 촬영된 이미지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모범적인 형상들을 모두 배반한다. 이들은 부옇고 흔들리며, 선명한 중심축을 탈피한다. 대신 파도에 자신을 내맡긴 기계의 눈으로 내부를 바라다보길 권한다. 우리는 바다 아래 납작이 누워 얼굴을 쓰다듬는 해초를 본다. 혹은 해초들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물 밖의 등대는 그 위치를 뒤죽박죽 바꾸며 나침반의 역할을 거부한다. 인간의 통제를 가능한 배제한 이들 이미지들은, 우리가 수없이 재현해온 감각의 새로운 틈새를 답사하고자 한다.
반대로 <Between  the hotel and city hall>(이하 <Between…>는 최대의 통제를 통하여 그 자신의 내러티브를 쌓는다. 여기에는 감각적인 규칙 몇 가지가 테제처럼 존재한다. 기계의 목소리가 녹음한 “Shot”과 “Reverse shot”을 번복한다. “shot”에서는 호텔이, “reverse shot”에서는 시청이 나타난다. 처음 이 내레이션은 이미지를 설명하는 주석 같다. 그러나 내레이션과 함께 나타나는 등장이 거듭 변화하면서, 목소리는 언명이 된다. “shot” 부를 때 눈을 휘둥그레 치뜬 여성의 사진이 등장하거나, “reverse shot” 호명과 함께 불꽃이 터지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호텔-시청의 진화체로 받아들인다. 규칙 안에서 언어는 의미를 달리하고 이미지는 하나씩 탈피를 시작한다. 마침내 비행기 안의 화면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어지러워진다. 처음의 이미지들은 사라지고(그러나 영상이 끝난 뒤에는 또 한 번, 등장할 것이다), 호텔과 시청의 의미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미지들은 의미 너머의 것을 갈구하는 몸짓을 이미지로 드러낸다. 
네 번째 열의 <사랑 (사이) 깍두기>와 <Romantic Machine> 사이에서는 거의 마찰이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다른 맥락들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때” 더 정확히 감상할 수 있다. 우선 두 영상의 길이는 모두 60분이 넘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위캔드 내 공간에서 관객들은 각자 60분씩만 예약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예상치 못한 문제로 인해 생겨난 환경이다. 그러나 그 점을 염두에 둔다 해도, 전체 전시 환경 자체가 1:1 관람을 필요로 하며,-각 영상에 연결된 헤드셋은 하나뿐이다-하나의 영상에는 하나의 관객만이 참여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네 번째 열은 다소 무거워진다. 만약 이것이 작가들의 의도라면, 《범퍼》의 영상들은 일부분만을 관람할 수 있도록, 혹은 몇 분만 관람하더라도 그 자신의 의도를 캐치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두 개의 영상은 분명 순차적인 감상에 더 적합하다. <사랑 (사이) 깍두기>에 등장하는 유기농맥주의 영상은 그 시간성을 염두에 두고 보았을 때 훨씬 짙은 농도를 지닌다. 이 유사한 얼굴들이 매해, 2014년부터 2019년까지 형태적으로 유사한 행위(합주와 공연)를 번복해왔기 때문이다. <Romantic Machine> 역시 마찬가지다. 빛들의 등장은 치밀한 구성 끝에 배치되어 있으며, 각 광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빛과 소리를 감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전제는 암흑과 고요다. 등대라는 주인공이 스크린의 광원으로 번지는 클라이맥스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극장과 같은 독립된 장소가 필요하다. 
반면 뒤편의 영상들-대망의 마지막 <Murika!>와 <Julie>은 서로에게 엮이는 과정 속에서 의의를 확장한다. 두 영상의 격차는 너무도 극명하여, 가벼운 문장들로 분리할 수 있을 정도다. <Murika!>는 말이 많고 <Julie>는 고요하다. <Julie>는 느릿하고 <Murika!>는 부산스럽다. 다루는 색상의 톤 역시 극명하게 대비된다. 멸망 직후처럼 붉게 저문 <Murika!>의 우주에 비해, <Julie>의 우주는 한낮의 쨍한 해안가 속에서 희고 푸르다. 잠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둘을 동시에 조망하면, 각각의 리듬은 너무 달라서 차라리 하나의 세트처럼 보인다. 동일한 배경을 각자의 스타일로 움직인 <I love you Michael Snow>와 달리, <Julie>와 <Murika!>는 그들 각자의 움직임을 담을 수 있는 적합한 배경에서 시작했다. 
<Murika!>의 배로 이동한다. 조그마한 선박이지만, 그렇기에 그 요동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Murika!>의 풍경은 너무나 혼란스러워서-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바다를 가리고, 자막들은 알아보기도 전에 지나가며, 소리와 이미지는 매번 어긋난다.-한 지점에 집중하기란 어렵다. 박세영은 다른 작업들에서 계속 그래왔듯, 여기에서도 대혼란을 꾀한다. 그는 혼돈을 정리하는 대신, 혼돈 속에 들어가 보기로 결단한다. 그 순간 이곳은 오해와 왜곡이 진실인 세계가 된다. 가끔은 “seagulls!” 부를 때 갈매기들이 날아가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기표와 기의의 어긋남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온갖 층위가 얹힌 우주와 석양이다.
<Julie>의 바다는 너무 거대하기에 멈춘 듯 보인다. 그 안의 무수한 움직임들을 한 번에 알아보기란 어렵다. 바위들은 실제로 멈춰 있다. 다만 몇 차례 분할된 쇼트로 반복하여 나타난다. 갈매기(여기서는 seagulls가 아닌, Julie의 이름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새)나 해안가의 이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반복하여 등장하는 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나간다. <Julie>의 태양은 물속에서 흔들리며 하나씩 늘어난다. 바위들은 갈매기를 떠나보낸다. 
얼핏 보기에 두 작업은 다른 영상들보다 훨씬 얌전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손을 최대한 배제하려 한다거나, 기계의 목소리로 서사를 구성하려는 몸짓은 여기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같은 동작은 이들에게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Hold it!>의 아스팔트에 흔들림이 어울리듯, <Julie>의 바다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Between…>이 목소리 안에서 형상을 구축해가듯, <Murika!>는 이동하는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픽션을 발견한다. 영상의 뼈대는 촬영한 쇼트들의 내부에서부터 발생한다. 그로써 이미지는 자신들에게 적합한 장소를 발견하는 동시에 근원이 된 지시체와의 관계를 유지한다. 
《범퍼》의 이미지는 여전히 사라지지 못한다. 이들은 언제고 복사될 수 있으며, 사라질 일이 없기에 마땅히 애틋해질 수도 없다. 그 대신 “그 자체가 하나의 허구로, 우화로 남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사건이라는 풀리지 않는 허구에 공명”[3]에 가까워질 때까지 멀어져 가고자 한다. 이미지들은 자신의 근본을 왜곡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조성할 수 있는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것은 빛을 추적하는 모험담이기도 하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해초들이며, 대혼란의 틈새이고, 바위들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미지들은 자신의 몸체였던 것을 떠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자 애쓴다. 지시체들로부터 떠나온 이미지들은 영혼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영혼들이 충돌하는 순간 무엇이 새로 태어날까? 충돌은 언제나 움직임 속에서 발생한다. 영상은 재생하는 그 순간부터 끝을 향해 달려가며, 타임라인이 끝나면 다시금 시작한다. 이미지���은 스크린 안에서 운동을 되풀이하며 재차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디지털 수신호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가 그들과 마주앉아서 전면으로 부딪칠 때, 그 충돌의 대화가 시작되면서, 《범퍼》는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적 없이 투명한 몸들을 내보인다. 몸들은 뒤집힌 땅 위에 서 있다.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가 전혀 다른 감각에 접속하도록 손짓한다. 그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1]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민음��, 2014, 31페이지.
[2] 같은 책, 79페이지.
[3] 같은 책, 65-66페이지.
함윤이는 소설과 비평, 극본과 시나리오를 쓴다. 언어를 통하여 다양한 픽션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한다. 하나의 서사가 발생하고 확산되며 예상치 못한 갈래로 변화하는 과정에 관심이 많다. 스튜디오 풀옵션의 텍스트 담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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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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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라 솟아나는 것들
강동호
전시 《범퍼!》 리뷰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누가 흔드는 거지
다 반응할 겁니다. 박세영(b. 1996)은 그렇게 말했다. 카메라를 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거든요. 제가 카메라가 된 기분입니다.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규칙을 가지고 신중하게 기어 다니거든요. 저는 숨도 안 쉬고 여기저기를 긁고 다닙니다. 이소정(b. 1993)이 말했다. 어디든 긁다 보면 특별한 무늬가 생기고 조금씩 커지기 시작합니다. 실수로 물속에 들어갔다가 간신히 튀어나왔는데 또 긁고 싶어져서 계속 들락날락하고 있어요
해변에서 버티기. 공중에서 딴짓하기. 아무 데서나 눕고 거꾸로 매달리기. 갈매기를 보고 있는데 박세영은 갈매기를 보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방금 갈매기가 춤추며 지나갔는데요...... 누군가 말할 때 박세영은 그걸 다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은 뭐든 같이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저는 갈매기랑 같이 춤을 추는데요. 이소정은 자신이 갈매기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다. 갈매기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돌아다니는 돌멩이보다도 재미가 없거든요
저는 반짝거리는 걸 좋아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자꾸만 카메라에 나타나는 벌레 같은 건데 아무도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요. 잡으려고 하면 사라지는데 찍으려고 하면 꿈쩍도 안 합니다. 환해지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줄무늬 같은 거라고 이소정은 말했는데 박세영은 자신이 분명히 보았다고 모여 있는 얼굴들 사이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해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구의 이쪽과 저쪽을 순식간에 선회하는 그 벌레를 사람들이 사랑이나 깍두기를 삼키듯이 잽싸게 집어먹고 있다고 했다.
풍경이 길면 함께 길어지자 하나로 담을 수 없어서 갈라지는 풍경 앞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꼭 다시 모이자
마이클 스노우라는 친구가 있는데 스노우는 자신의 이름처럼 시간을 이리저리 굴리고 녹여서 퍼뜨리는 귀여운 사람인데 우리도 시간을 만들어 보고 싶어. 두 사람은 진지하게 말한다. 박자에 맞춰 넘어지면서 지구를 뒤집고 빙글빙글 돌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런 시간은 평소에는 잘 생겨나지 않거든요. 날씨가 좋으면 아름답게 넘어지고 아름답게 넘어지면 날씨가 좋아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파도를 타고 구름이 움직일 때 따라 걷는 두 사람이 부딪힌다.
둘 다 몸이 없어지고 있으면 뭐가 솟아나고 있는 걸까요
소개
 강동호는 1994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사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같은 대학 전문사 과정을 재학 중이다. 참여한 전시로는 2018년 킵인터치에서 선보인 2인전 <SPRING>, 2019년 위켄드에서의 개인전 <NEVERMORE>, 그리고 2020년 킵인터치에서의 개인전 <Bastards>가 있다. 
 그림을 그린다. 집요한 언어와 불확실한 표면의 세계를 즐긴다. 즐겨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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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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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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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퍼! Bump!
박세영 이소정
Syeyoung Park Sojeong Lee
2020. 04. 03 - 2020. 05. 03
Opening Hours: Fri, Sat, Sun 1-8 pm
토론토에서.
박세영과 이소정은 마이클 스노우의 신작을 보려 하나 실패한다.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각자의 카메라와 스노우가 촬영했던 장소의 좌표뿐. 이들은 스노우의 작업을 좇아 가기보다 스크린에 직접 소환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박세영과 이소정은 영상을 주 매체로 리듬을 만들고 관객이 촉각으로 그 리듬과 마주하는 화면을 제작해 왔다. 이들이 조형하는 스크린은 숏과 숏의 부딪힘과 얽힘, 굴절과 연쇄 같은 마찰들을 통해 하나의 코레오그래피, 하나의 시퀀스를 구축한다. 그런 과정에서 카메라 렌즈라는 물질은 내용의 한 축으로 포섭된다. 이소정의 카메라는 수면 아래에 위치한다. 물 밖의 풍경은 굴절되어 카메라 렌즈에 담기고, 이 렌즈의 표면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다 생물이나 파도가, 수면에 굴절된 빛이 직접 와 닿는다. 박세영 빨간 선은 빌딩의 유리창에 반사되어 스크린 밖까지 나올 것처럼 뻗다가 스크린 안쪽 면에 부딪혀 방향이 좌절되면 다시 화면의 내용으로 돌아간다. 빈 공간보다는 현란한 움직임에 더 익숙한 우리의 눈은 자연스럽게 빨간 선의 뒤를 좇기 때문에, 스크린 위를 성실한 시선으로 더듬어야 한다.
마찰이 화면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사운드와 텍스트가, 세 가지 요소가 한번에 마찰할 때도 있다. 마찰은 서로에 대한 배반일 수도 있고, 조응일 수도 있다. 마이클 스노우에게 헌정하는 사랑으로 묶였던 박세영과 이소정이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박세영은 배반으로 더욱 나아간다. 미묘하게 느린 이미지의 속도는 사운드의 속도와 불일치하며, 사운드의 속도가 텍스트의 속도를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숏과 리버스 숏의 평행은 평행을 유지하던 축 자체가 변경되어 결국은 두 숏을 같은 수평선에 놓는다. 반면 이소정은 조응에 조금 더 집중한다. 그의 화면 안에서 숏과 숏이 가지는 연속성은 언뜻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가 능숙한 솜씨로 마찰을 다루었던 작업을 생각해 보면 과연 이 장면들이 같은 풍경에서 촬영된 것이 맞기는 한지, 인위적으로 조성된 풍경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전시 《Bump!》는 이 세계의 코레오그래피, (조금 귀엽게 제안해 보자면) 하나의 ‘쿵, 탁’을 이번 전시의 가장 앞에 제시한다(〈I LOVE YOU MICHAEL SNOW〉). 여기에는 세 개의 리듬이 존재한다. 병렬로 놓인 좌측과 우측 스크린의 이미지가 보여 주는 각각의 리듬, 그리고 그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운드의 리듬. 옥스포드 사전에 ‘Bump’를 검색했을 때 명사 1번에 ‘쿵, 탁 (단단한 것에 부딪치는 소리)’이 제시된다는 것, 드럼이 ‘쿵’과 ‘탁’으로 리듬을 만드는 타악기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이들의 유머 센스에 슬며시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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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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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a Verto: Why are Digital Kids Painting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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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a Verto
: Why are Digital Kids Painting Again? Because They Think It's a Good Idea
박제호 이연석
Jeho Park Yonsok Yi
2020. 01. 17 - 2020. 2. 16
Opening Hours: Fri, Sat, Sun 12-6 pm
동시대의 다른 수많은 매체 중에서, 회화는 어떻게 계속되는 걸까.
모더니즘 회화가 염원했던 것은 회화 매체의 내적 완결성이었다. 개념 미술 이후, 예술 실천은 그것을 설계하는 작가의 아이디어로 무게가 옮겨가며 모더니즘적 매체 특정성은 무화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회화는 포스트 매체 조건을 기반으로 하는 다른 많은 매체들 중 하나일 뿐인 매체가 된다. 미술비평가 얀 베르워트(Jan Verwoert)는 Why are conceptual artists painting again? Because They Think It’s a Good Idea에서 매체 특정성과 개념성(conceptuality)의 대립하에 놓인 동시대의 회화를 다룬다. 요약하자면, 회화는 더이상 단지 회화일 수 없다. 회화는 다른 많은 매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고려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 속에서 회화는 역으로 매체로써의 자기 역사와 끊임없이 대화할 것을 요청받는다. 회화가 다른 매체들 사이에서 자기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물질적 특성과 상징적 문법, 형식적 언어를 표현할 때, 회화는 필연적으로 개념적인 것이 된다. 매체 특정성과 개념성 사이 긴장감이 캔버스 위에 올려지는 것이다.
회화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이어나간다. 전시 《Vera Verto》의 두 작가 박제호와 이연석은 이러한 회화의 상황을 각자의 방식으로 말한다. 언뜻 보기에 추상 형식 실험으로 보이는 이들의 작업에는 사회적 징후들이 잠재되어 있다. 이 캔버스들은 자본주의 상품 논리나 물신 숭배, 물질주의의 광고 언어 문법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택(tag)이 달린 캔버스와 광학 장치의 언급, 산업 재료를 사용하는 브라켓에 매달린 캔버스들은 회화를 다른 많은 것들 중 하나인 상품으로 보이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흐릿한 종교적 이미지들과 트립티크(triptych) 형식으로 나열된 캔버스들은 미술사의 오래된 전통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참조한다. 긁혀지거나 어딘가에 찍힌 표면, 완전히 균일한 질감을 지닌 표면, 악어 가죽 같은 표면들은 회화를 통하여 회화의 물질성을 이야기한다.
이들 회화의 복합성은 전시의 제목으로 집결된다. ’Vera Verto’는 쥐를 유리잔으로 변형시키는 마법 주문이다. 주문 발동 중 멈추어 반은 쥐, 반은 유리에 멈추어 버렸던 잔을 떠올려 본다. 이 잔이 지닌 양가성이야말로 이들 회화의 미적 차원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자기 역사의 정밀 조사를 통해 존재의 타당성을 스스로 확보하고 다른 많은 것들이 이룩한 성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창출하는 것. 회화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기획: 김나현
도움 및 제언: 제니조
그래픽 디자인: 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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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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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WEEKEND PROGRAM
2020 WEEKEND PROGRAM 
박제호×이연석 (1/17-2/16)
박제호는 시대상과 조형언어 간의 관계성을 풀어내는 데에 ���적을 갖고 작업한다. 그의 회화는 좌절될 수밖에 없는 기대와 욕망이 물신숭배적으로 집약된 판타지에 가깝다. 모노크롬과 고딕을 동시대와 연결지으며, 회화 매체를 불안한 시대상에 대한 극복 의지이자 여파로 바라본다.
이연석은 동시대 자본주의에 놓인 물질과 그것들이 위치하는 방식을 기반으로 회화의 새로운 형태를 탐구한다. 질량과 제조 이력이 감지되지 않는 화면은 모든 것이 0이라는 환상의 지점으로 다가간다. 그것이 실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이의 모호한 연결에 주목한다. 
박세영×이소정 (2/28-3/22)
박세영은 영화, 실험 영화, 비디오 작업을 한다. 최근에 영화 〈굿타임〉을 재밌게 봤고 중고나라 거래 사기를 당해 촬영 장비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또한 스쿠터와 바이크에 관심이 생겨 사는 게 즐겁다.
이소정은 영상 매체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광학적 매체를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삼고 이를 풍경 이미지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표현한다.
박노완 (4/11-5/10)
박노완은 자신이 처한 조건 속에서 마주친 사물들, 이미지들이 회화적 공간으로 옮겨져 얽혀 있을 때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화면 안에서 얼룩과 자국 등이 유동한 흔적으로 남는데, 대상이 지워지고 재구축 되는 과정에서 화면은 회색조로 서서히 변하며 대상의 모습을 불명확하게 만든다. 반대로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은 더 선명해지는 신체감각이다.
조주현 (5/22-6/14)
조주현은 사회를 구성하는 그러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규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러한 비가시화된 규칙을 드러나게 하는 대상을 탐구한다. 매끄럽게 마감하려 하지만 종종 실패된, ‘콜라이더가 체크되지 않은 땅’과 같은 결과물에 주목하며 연원과 과정을 역추적해나간다. 이를 위해 사실을 수집하고, 사실 너머의 상상력을 가져온다.  
양윤화 (6/27-7/26)
양윤화는 몸의 움직임과 말, 텍스트, 시간이 얽혀 있는 상태에 관심을 갖고, 퍼포먼스, 비디오, 사운드 설치 작업 등을 해왔다. 보고 싶은 장면을 만들어 왔다. 최근에는 공간도 관객도 어떤 상태에 처해있도록 만들고 싶어 한다.
김민경 (8/28-9/20)
김민경은 과거와 현재의 매개체가 전달하는 파동과 입자가 연결되는 지점을 비디오, 사운드, 설치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예와 현을 이음으로써 상상적 축을 세우는 데에 관심을 가진다. 주사위를 공중에 튕기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전우진 (10/17-11/15)
전우진은 신체가 언어로 범주화되는 현상에 대면하여 비정형적인 조각과 설치를 통해 카테고리 바깥의 몸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작업을 통해 유동적이고 가변적 특성을 통해 ‘사이성(In-betweenness)’을 드러내며 ‘퀴어’라는 낱말의 형용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시도한다.
차혜림 (11/28-12/27)
차혜림은 질병이 시간과 문화에 반응해 의미의 범주가 변화하는 사회적 약속으로 보고, 질병 개념의 등장과 소멸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데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노동 형태에 따라 증가하는 질병과 상해, 유튜브, 교양서로서의 신경 과학 유행이 낳은 정보 접근성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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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스테프 크레딧
권태현 (공동 디렉터), 김나현 (공동 디렉터), 박미주, RAT school of ART (공동 디렉터), 제니조 (설립/ 공동 디렉터)
2020 Staff Credit
Jenny Cho (Founder/ Co-Director), Nahyun Kim (Co-Artistic Director), Taehyun Kwon (Co-Artistic Director), Mijoo Park (Co-Artistic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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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켄드와 2/W는 하나의 고정된 디렉터쉽이 아닌 다양한 참여작가와 기획자가 공동으로 운영합니다. 앞으로 위켄드와 2/W가 위치한 물리적 공간은 필요에 의해 유기적으로 합쳐지거나 나뉘어질 예정입니다. 더 많은 이름이 생기고 또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공간에 관여하게 될 사람들 또한 특정한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공간을 공유합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과 기획을 마주하게 되기를, 또한 첫 전시를 하는 젊은 작가나 기획자에게는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틀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Weekend and 2/W will be operated by multiple curators and artists instead of a single artistic directorship. The physical space of Weekend and 2/W will be organically structured as they come together or separated as needed. More identities can be added or removed, and the participating curators and artists are not bound to a particular role or identity. Through such structure, we hope to provide an open platform where challenging young art and exhibitions of emerging artists and curators form their own frames of growth and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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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조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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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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𝒮𝑜𝒻𝓉 𝓀𝒾𝓁𝓁 *•.¸♡
무병장수(윤요주, 우이지, 미도리킴) + 김민희
☥ 날짜: 2019.12.20-2020.1.12 ☥ 장소: 위캔드 (영등포구 경인로 823-2) ☥ 운영시간: 금, 토, 일 15:00-21:00 ☥ 오프닝: 12.20, 18:00
☥ 기획/글: 권태현 ☥ 협력: 이슬기, 김동현, 신관수, Okuda Noboru
☥ 전시 기간 동안 SOFTKILL.VODKA가 제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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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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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ft K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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𝒮𝑜𝒻𝓉 𝓀𝒾𝓁𝓁 *•.¸♡
𝒮𝑜𝒻𝓉 𝓀𝒾𝓁𝓁 *•.¸♡
무병장수(윤요주, 우이지, 미도리킴) + 김민희
☥ 날짜: 2019.12.20-2020.1.12 ☥ 장소: 위캔드 (영등포구 경인로 823-2) ☥ 운영시간: 금, 토, 일 15:00-21:00 ☥ 오프닝: 12.20, 18:00
☥ 기획/글: 권태현 ☥ 협력: 이슬기, 김동현, 신관수, Okuda Noboru
☥ 전시 기간 동안 SOFTKILL.VODKA가 제공됩니다.
기억이 없어져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필름이 끊겼다고 하죠. 잘 알려진 알코올의 효능 중 하나입니다. 술을 많이 마신 뒤 정신을 차리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뭔가 떠오른다고 해도 그것들은 순서를 잃고 조각조각 떠다니죠. 기억인지 환각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러다 머릿속에 없는 지난 시간의 흔적이 몸이나 폰에 남아있다는 것을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이제 기억의 파편들은 날카로운 모서리를 드러냅니다. 그것들은 위태롭게 날아다니며 천천히 살을 에고, 부드럽게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몸서리치면서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자연스레 손을 뻗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만져보아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미끌미끌 말랑말랑 잡힐듯한 이미지들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립니다. 확실한 기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마저 헛것으로 흩어집니다. 단서를 찾기 위해 스마트폰 사진첩을 뒤져보고, 다른 사람의 타임라인까지 거슬러 오릅니다. 머릿속의 손과 몸에 붙은 손을 모두 열심히 움직입니다. 이래서 기억을 더듬는다고 하는가 봅니다.
기억은 이미지를 담아내는 물질인 필름에 비유되곤 합니다. 흩어져 버린 기억들은 평소처럼 롱테이크가 아니라, 짧은 클립들로 쪼개져 있습니다. 더 작은 파편들은 움짤에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말소리도 몇 가지 같은 문장들만 반복적으로 재생됩니다. 어떤 부분은 엄청나게 클로즈업되어 떠오르기도 합니다. 열화된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거나, 필터를 씌운 듯 색깔도 뒤바뀝니다. 심지어 기억의 조각들은 몽타주처럼 이리저리 연결되기도 합니다.
기억은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일 때도 있고, 말할 수 있는 문장이 될 때도 있고, 만질 수 있는 물건이 되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무병장수와 김민희는 사라진 기억을 더듬는 감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빚어냅니다. 전시장에서는 무빙이미지와 공간 전체를 뒤섞어버리고, 전시와 연동된 웹페이지에서는 뒤죽박죽 쌓여있는 이미지들을 손으로 더듬어 나갈 수 있도록 합니다. 때로는 다시 술에 취하기를 권하기도 하죠. 물리적인 공간과 가상의 공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그리고 눈과 손과 귀와 혀의 감각들을 교차하며 그 자리들을 바꾸어 놓습니다.
필름이 끊긴 건 사실 있었던 기억이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이 애초에 기억되지 않은 것이죠. 술에 거나하게 취하면 뇌의 기관이 시공간을 백업하는 기능을 멈추어버립니다. 그렇게 몸에 기입된 시간의 빈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올려진 타임라인 속 포스팅처럼.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공백은 엄청난 불안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 공백을 덮어버리려고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빈자리는 그 자체로 우리 세계 전체의 구멍입니다. 풍선에 구멍이 뚫리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빠져나가듯. 단단해 보이는 주체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였는지가 그 작은 공백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나, 공백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감각하는 것부터 역설적으로 다시 삶은 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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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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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 All That Heavenly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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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 All That Heavenly Glory
최이다
2019.10.25-11.17 
Fri, Sat, Sun 1-6 pm
Opening 2019.10.25 6 pm
이미 빠진 이가 흔들리는 기분이다.
편의를 위해 세계를 현실적인 것과 현실적이지 않은 것으로 과감하게 구분하자.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 꿈이나 가상, 허구 같은 것들은 현실적인 것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어느 정도는 현실일 법해야 조금 더 현실적이지 않은 속성을 획득하기 쉽다는 말이다. 현실적이지 않은 것에는 적절한 수준의 현실적인 것들이 함유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은 오히려 그럴싸함과 있을 법함을 잃는다. 결국 현실적인 것과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상호 존재를 기반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최이다의 첫번째 개인전 《Miss All That Heavenly Glory》는 그간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두 항의 사이를 꾸준히 탐구한 결과를 영상과 설치로 다룬다.
두 항 사이에서 현실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사라지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의 존재를 부풀리거나 가리기도 한다. 코끼리 상아는 앞으로 ‘예전에는 그런 것이 있었대’의 ‘것’이 될 것이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의 ‘게’는 야간 동물원이 된다. 흑조의 명성을 따라 갈 수 없던 백조는 자신을 증언하기 위해 납덩어리보다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준다. 작업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보면 허풍 같거나 허무맹랑하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은 오히려 두 항을 잇는 최초의 변곡점으로 작동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서 소매치기의 손으로, OS의 골다공증이 스위스 치즈로 넘어가는 힘은 맹랑함에서 온다.
맹랑함은 작업의 전체적인 어조와 태도를 관리하기도 한다. 작업 내에 등장하는 어른, 부모, 스승 같은 단어들은 말하는 사람이 최소한 성숙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거나 이르고 싶어 하지 않는 누군가라는 암시를 준다. 이 누군가는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사이 흐르는 기류에 몹시 예민하다. 포착된 단 하나의 글자를 경유하여 곧바로 다른 풍경을 상상하는 것은 예민함을 보장한다. 이 예민함은 자막에 의해 화면에 소환된 영화 감독의 독특한 태도로 이어지고, 이 태도는 인터넷을 떠노는 감성 글귀, 감성 이미지의 태도로 이어진다. 외롭지만 외로움을 즐기지는 않는다는 말은 다시 성숙에 이르지 못한 특정 시기나 때를 연상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수집되고 이어붙여진 조각들은 어떠한 방향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조각들은 화면 안에서 무한히 부팅만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헛소동들이 현실의 시간과 공간에 맞붙을 때 발생하는 기묘한 미끄러짐이 스크린 밖으로 흘러넘친다.
글 김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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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seoul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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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위한 스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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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위한 스코어 A Score for Hands
비고 Bigo
2019.9.7-9.29 / 2-5pm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등뼈가 있는 동물의 앞다리 맨 끝부분을 우리는 손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두 개가 있습니다. 인간의 경우 하나의 손은 또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나 몸의 보편성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눈이 없는 자에게 보여줄 그림을, 혀가 잘린 자에게 대접할 요리를, 손을 잃은 자와의 악수를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손으로 앞을 볼 수 있을까요? 무언가 인지하는 문제는 머릿속의 정신뿐 아니라 몸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특히 손은 어떠한 대상을 알게 되었다는 말과 연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에게 세계는 몸과 뇌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몸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주했을 때 몸 바깥의 세계도 다른 울림을 만들어 낼까요? (…)
글/기획: 권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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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STÁVKA & STA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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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스타브카 & 스타니체
임정수 Lim Jeongsoo
2019.8.4-8.25
Opening: 2019.8.4 5pm
무대와 배경, 천장과 바닥, 벽과 기둥, 주름과 껍질, 피부와 비늘과 털. 어떤 단어들로 임정수의 작업을 엮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임정수는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들, 만질 수 있는 것들의 너머를 상상하지 않는다. 감각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 이 문장을 조금만 뒤틀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표면이 감각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의미를 확보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임정수에게 표면은 주체와 세계가 마주하는 가장 첫 번째 장소이며, 기의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임시적인 무대이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자스타브카’와 ‘스타니체’는 그러한 무대이면서도 동시에 표면인 것들이다.
임정수는 표면과 그 질감을 탐구하는 설치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선물 포장지와 공업용 종이, 제각각의 색과 무늬를 가진 천들이 벽에 붙여지거나, 선에 걸려지거나, 바닥에 널려지거나, 자기들끼리 끌어안아 새로운 오브제를 구성하는 식이다. 이러한 오브제들은 일반적으로 사물의 너머나 내부를 상상하는 관객의 형이상학적 욕망과 반목한다.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표면에 압축되거나 박제된 상태만을 기반으로 한다. 임정수는 이 부재를 질감에 대한 관심으로 대체한다. 이런 관심은 기존 작업에 비해 조금 더 유동적인 형태를 지닌 최근 작업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퍼포먼스나 영상 매체의 사용 또한 존재는 물질 너머나 관념적 내부가 아니라 표면에 존재한다는 명제를 돕는다. 움직임에 참가하는 신체는 다른 사물들과 동일한 하나의 오브제로 다루어지며 인격이 부재하는 듯한 퍼포머들의 움직임은 신체와 그 움직임이라는 얇은 기표를 기반으로 한 현상학적 차원에서만 기의를 획득한다.
그 변화를 보여주듯 이 전시 《자스타브카 & 스타니체》에는 대략 십여 개의 무대에 배치된 오브제들과 함께 직접적인 신체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인쇄되어 전시된다. 사실 사진만큼 대상의 감각 가능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그 표면을 전시하는 매체는 또 없을 것이다.)신체에서 연장된 불규칙한 형태, 다양한 질감과 무늬로 구성된 오브제들을 임정수는 ‘껍질 오브제’라고 부른다. 신체를 닮은 오브제가 임시 무대에 올라가면 그제서야, 존재가 시작된다. 감각으로만 감지되는 존재들의 일시적 형이하학. 무대의 커튼이 올라간다. 무엇을 만나게 될까.
글: 김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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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ng Sh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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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민지(Ryu Minji)
2019.6.7(Fri)-6.30(Sun) Opening hours: Fri, Sat, Sun 13:00-19:00 Opening reception: 2019.6.7(Fri) 18:00
본 것을 아무리 잘 옮기려고 해도, 본 것과 그린 것 사이에는 틈이 벌어집니다. 눈에 넣었다 손으로 꺼내는 과정에서 형상이 뒤틀리기 때문입니다. 류민지는 손을 움직여 이미지를 생산하면서 그 사이의 움직임들을 포착합니다.
이번 전시는 류민지가 그린 나무의 이미지들을 엮어냅니다. 우리가 나무라고🌲 읽어내는 이미지와🌳 진짜 나무의 형상은🌴 이상하리만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라는 관념을 표현하는 것과 눈에 들어왔던 나무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 그리고 나무의 존재는 뭔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각기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회화라는 이미지 제작술은 그 자체로 다른 세계들 사이를 이어붙이고, 다시 찢어내고, 심지어는 그 사이를 널뛰며 노는 방법입니다. 캔버스에 찍힌 하나의 점은 작가의 팔이 움직였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면서, 나뭇잎을 그려낸 도상이며, 나무라는 존재 전체를 표상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그것은 천에 묻어있는 물감이죠. 우리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것들과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포개어졌다가 금세 어긋나기를 반복합니다.
작가는 그 움직임 속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일렁이는 것들을 그려냅니다. 형태를 드러내는 것과 드러내지 않는 것,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모양들을 돋아나게 합니다. 찬란하고 투명한 층부터 둔탁하고 무거운 층까지 쌓아 올려 만들어진 류민지의 화면에서 모양을 드러내는 것들은 실제로 그 가장자리가 빛이 흩어지듯 아른거리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들이자, 우리를 움직이는(moving) 모양들이기도 하죠. 또 하나, 물질로 존재하고 있는 이미지를 눈 안에 넣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몸을 움직여야 하기도 합니다.🚶
글: 권태현(Taehyun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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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
이유성 Lee Eusung
2019.4.26-5.19
Opening: 2019.4.26 6pm
기억이 작동하는 과정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기억은 나의 감각에, 타인의 행동에, 더 크게는 사회와 문화 등에 산재하고 있다가, 주체와 만나는 순간 구체적 이미지로 변환되고 이내 사라진다. 변환된 이미지는 재생산되어 다시 우리의 일상을 찌르는 뾰족한 감각으로 남아 다음 발생을 기다린다. 동일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기억은 특정 과거가 현재를 마주하는 불시의 순간에 우리의 피부 위로 재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였다가 과거가 되고, 과거가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내밀한 역학. 이유성의 두 번째 개인전 《Jane》은 이 역학에 대한 자기만의 접근법을 시도한다.
이유성은 과거로부터 파생되어 현재에 닿는 이미지들이 가지는 구조와 영향력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 전시의 오브제와 그 표면에 새겨진 것들은 ‘제인’이라는 이름에 엉켜 있는 유동적인 이미지들을 하나의 추상적 묶음으로 만들고 형태를 부여한 결과이다. 이 이미지들은 피어싱, 야자수나 사막이 그려진 엽서, 야생화, 성조기가 그려진 모자, 어딘지 낙관적인 느낌을 주는 두툼한 영어 타입페이스들 같은 구체적인 대상에서 시작하여 오브제에 이미지로써 분명히 등장하거나 은밀히 암시되고 있다. 이유성은 이 구체적 대상들을 ‘제인’에 의해 “간접적으로 각인되었으며, 지금까지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밀레니엄 시기 미국의 이미지들”이라 일컫는다.
또한 “잘리고, 뿌려지고, 들어올려지거나 접히다시피한” 오브제들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뒤엉켜 있으나, 촉각적으로는 명료하다. 이는 우드 크래프트와 영어 폰트들이 연상시키는 두께감, 아크릴과 스테인리스 스틸이 유발하는 뾰족함이 보는 사람에게 시각적 재현을 넘어 촉각적 재접촉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접촉의 요청은 이를 테면 노스탤지어나 레트로 같은 특정 문화 현상이 가지는 시각성과 질감의 본질을 파악하고 다른 통과점을 생각해 보는 시도이다. 여기서 현재에 소환되는 것은 원래 존재했다가 지금은 부재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신원 미상이었던 것의 귀환인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경험된 적 없는 것을 감각하기란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제인’은 이유성과 오랜 기간 떨어져 미국에 살았던 친자매의 이름인 동시에 신원 미상의 여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대명사이다. 이 구체적 대상들은 이유성의 친자매인 ‘제인’을 경유하여 그에게 닿은 것들이다. 《Jane》은 대답 대신 신원 미상의 기억들이 가지는 날카로움을 내어놓는다.
《Jane》의 기억은 과거의 시간에만 머물러 있다가 불시에 발화하는 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현재는 과거의 지속적이고 미미한 영향 아래 있다. 따라서 특정 과거는 현재를 마주하는 불시의 순간에 우리의 피부 위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늘상 우리의 피부에 존재하며 현재에 영향을 줌으로써 작동한다. 이유성이 말하는 “관통의 감각”이란 이렇듯 개인의 주변을 부유하는 이미지들을 하나로 엮어 기억으로 만드는 메카니즘의 구현이 아닐까.
김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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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시대의 예술작품
주현욱 Joo Hyunwook
2019.3.2 - 3.31 Opening: 2019.3.2 6pm
수없이 반복되었던 이 제목을 왜 또다시 꺼냈을까? 벤야민은 그 유명한 텍스트의 첫 부분을 맑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며 그것의 예언적(prognostischen) 가치를 염두에 두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금의 생산 조건으로부터 미래를 미리(pro) 알(gnosis)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탁월함은 그것을 상부구조인 예술작품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어떤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규정은 예술작품의 생산 조건과 그것으로부터 나아가는 다양한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기억상실은 어떠한 조건인가? 주현욱의 기억상실이라는 규정은 기억 자체의 상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넘치는 기억들 속에서 무엇인가 누락되는 것을 감각한다. 지금의 형세에서 기억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이다. 레트로, 빈티지 등의 유행. 텅 빈 구조물이 되어버린 도시 곳곳의 동상들. 기념할 것을 잃은 기념비, 기념품 같은 것들. 물론 이것을 경제적 구조나 기술적 환경 같은 유물론적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현상이 지금의 문화 생산 전반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생각해 보면 분명 특정한 조건으로 상정할 수 있는 지대가 열린다.
이러한 인식적 토대에서 작가는 제의적 형식을 빌려 상실된 역사적인 기억들을 다시 불러온다. 역사적 맥락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싸구려 기념품으로 컬트 제단을 만들거나, 동상들을 3D 스캐너로 다시 소환하는 강령술을 펼친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힘을 잃고 관광지가 되어버린 혁명가의 미라를 두고 픽션을 구축하기도 한다. 주현욱은 이런 작업들을 통해 유물론적 토대를 드러내거나, 형식을 파괴해버리는 과거의 아방가르드 전통을 넘어 정치적 형식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왜 이토록 신비롭고 제의적인 형식을 취하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사유와 함께 사실 상품과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의 체계만큼 형이상학적이고 신비로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권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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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은 없다
<NEVERMORE> 전시 리뷰
이휘웅
 이번 전시의 오프닝 즈음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다소 뜬금없게도 강동호는 애드거 앨런 포의 시 <The raven>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시에 “nevermore”라고 읊조리는 까마귀가 한 마리 등장하기 때문에, 나는 이번 전시의 표제이자 주제작인 <Nevermore>의 출처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시를 잠깐 설명하자면, 연인을 잃고 괴로워하는 화자의 집 창문으로 느닷없이 거대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당황한 화자의 모든 질문에 까마귀는 같은 말로 대답한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 “nevermore.” 내가 다시 레노어를 볼 수 있을까? "nevermore.” 시가 끝날 때까지, 온갖 질문과 사색으로도 화자는 “nevermore”의 의미를 확정하지 못한다. 강동호의 말을 듣고 <The raven>을 다시 읽으면서, 팔라스 흉상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nevermore”의 동어반복은 언어에 대답하지 않는 이미지의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미지의 ‘대답’은 언어와 소통되는 것이 아니지만, 자신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온갖 질문과 사색보다 오히려 훨씬 명징하다.
 마찬가지로 강동호가 자신이 시적 이미지를 사용한다고 할 때, 그것이 모호한 이미지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강동호의 이미지는 우선 특유의 명징함 때문에 눈길을 끈다. 강동호의 회화에는 “nevermore”와 같은 동어반복이 있다. 예를 들어 <chilly pepper>의 경우, 멀리서 보면 잘 그려진 새빨간 닭들이 보인다. 가까이 살펴보면 뭐가 보일까? 아주 꼼꼼하게 잘 그려진 새빨간 닭들이 보인다. 힌트도 암시도 없는, 단지 빨간 닭들이. 하지만 이 동어반복이 이미지의 무의미함이나 그림의 성실함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빨간 닭과 빨간 닭 사이에는 짧고 변칙적인 외곽선에 의해 고립된 형상, 형상의 고립을 와해시키는 붉은 배경, 형상을 찌그러트리고 동시에 보강하는 붓의 스트로크가 있다. 이미지를 첫눈에 알아본 다음에는, 이미지의 의미가 아니라, 형상, 배경, 붓질이라는 ‘일반적인’ 회화적 요소들이 서로를 밀쳐내고 새치기하는 사태를 보게 되는 것이다.
 배경의 수평적이고 기계적인 붓질과 형상 속의 거친 붓질은 서로 충돌하며 매력적인 효과를 보여준다.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사람이 나란히 그려진 <Suit>의 경우 형상 위의 스트로크는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사람을 촬영할 때의 잔상을 떠올리게 하고, <Breast-side Up>에서 사이좋게 나란히 선 신랑신부 두 쌍을 파괴하는 붓질을 보면 디지털 합성 효과가 연상되기도 한다. 가장 최근작인 <Nevermore>에 이르기까지, 점차 복잡해져가는 형상과 배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독특한 효과들을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효과들’은 말 그대로 회화의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천착이 불러오는 이차적인 효과들이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아이러니하고 시적인 이미지, 대상을 기호처럼 만드는 납작한 배경, 고립되거나 열린 형상, 돌발적인 붓질은, 일반적으로 회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강동호의 집요한 대답처럼 보인다.
 동시대에 회화를 한다는 불안한 자의식에 흔들리지 않고, 강동호는 묵묵히 회화적 문제들을 진전시키려고 한다. 가까이서 그의 탐색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의 이런 집요함은 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강동호의 회화가 보여주는 것은 동시대 이미지 환경과 고전적인 회화적 문제의 접목도, 반응의 한 방식도 아니다. 회화에 대한 충실함, 그것이 불러오는 예기치 못한 효과의 산출을 그의 회화는 보여준다. 강동호의 회화는 접목이나 효과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기에 숨긴 패가 없다. 담론이나 의미를 숨기지 않기에 소통되지 않지만 표면에 드러난 그 자체로 명징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계속해서 바라볼 수 있는 회화다. 이번 전시의 “Nevermore”는 다음처럼 강동호의 야심이 담긴 말일 것이다. 회화는 대답이 없다, 숨겨진 것은 없다, 반칙은 없다, 더 이상은.
소개
이휘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에 재학중이다. 시를 공부하고 있다. 현대시에서 나타나는 대상성과 언어적 작용을 미술 작업에서 실천하는 데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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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호 개인전 <NEVERMORE> 전시 전경
2019.01.12-02.10
사진: 곽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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