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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게임을 하지 않는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목과 허리가 굳고 혀가 뻣뻣해지고 손가락에 잡힌 물집이 굳은살이 되고 그 밑에 다시 물집이 잡혀도 산패된 피지 냄새가 진동해도 점점 파괴되고 있는 날 고스란히 인식하며 게임을 멈추지 않는 걸 알기에 게임을 하지 않는다. 게다 게임에 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즐거움이 아닌 결핍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아쉬운 일이다. 또 게임 타령이라는 게 이미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는데 이건 더 배부른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대한 얘기다.
내 첫 게임기는 1인용 밥솥만한 크기의 갤러그 게임기였다. 엄밀히 말하면 내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장난감들을 좋아하던 아빠의 것이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참 잘 만들어진 단단한 일본 물건이었다. 갖고 있다면 꽤 비싸게 팔리겠지. 엄격한 집안에서 일본식 가풍 속 막내딸로 자라며 무서운 오빠들과 얄미운 언니에게 모든 걸 금지당하며 자란데다 세상을 겪으며 자신의 철학을 쌓기도 전에 턱도 없이 어린 나이에 날 낳아버린 엄마는 안될 것 같으니까 안되기 때문에 무조건 안돼,라고 말하고 보는, 근거 없는 보수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는, 공부를 잘 해야 하기 때문에, 게임기와 컴퓨터만은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과장된 내 기억에 따르면, 당시 매일 돈을 좀 버려도 될만큼 풍족한 살림을 운용하던 그 젊은 부부는 첫 아이인 내 뜻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아빠 차 좀 바꿔 지겨워-라고 건방진 꼬맹이가 좆같은 헛소리를 하자 남색 프린스를 타고 출근한 아빠는 저녁에 새하얀 콩코드를 타고 들어왔으니까, 그랬으니까. 매일 장난감과 외식을 선물받았던 왜곡된 느낌 같은게 남아있다. 하지만 게임기만은, 컴퓨터만은, 부모 동반 하에 오락실 출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갤러그 게임기를 열심히 갖고 놀았다. 곧 손바닥 두개 사이즈의 테트리스 게임기가 하나 더 생겼다. 역시 아빠가 갖고 놀던 것이었다. 아빠의 엄청난 기록들을 깰 수도 없는데다 더럽게 시시했다. 몰래 가본 오락실엔 파이널 파이트 같은 것들이 있는데. 쇠파이프 줍고 치킨먹으며 잭나이프 던지는 놈들이랑 싸울 수 있는데. 친구네 집에 가면 패밀리로 슈퍼마리오도 하고 야구도 할 수 있는데. 픽셀이 삐직삐직거리며 움직이는 갤러그나 테트리스라니.
문제는, 내가 사립 국민학교를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6.25때의 부상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퇴역 장성이 설립한, 매주 운동장을 행진하며 교장에게 멸공이라는 구호와 함께 경례를 올리는 사열식을 하던, 일제군의 모자와 군복을 네이비 컬러로 바꿔놓은듯한 교복을 입던, 사립 국민학교. 모든 학생들이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임에도 대부분 자가용이 두대 이상씩 있었고, 리복 펌프나 나이키 에어조던, 에어맥스를 신었으며, 50평 아파트 미만에 사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전원 스쿨버스 통학이 원칙인 학교였기에 등하교길의 학교 앞 골목 문화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집에 가면 게임기와 컴퓨터가 있는데 굳이 무서운 형들을 찾아 오락실에 갈 이유가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엄마의 치맛바람 멤버들을 따라 그 아이들의 집에 가면, 컴퓨터로는 원숭이섬의 비밀, 페르시아의 왕자를 하고. 패밀리로 슈퍼마리오나 야구를, 메가드라이브로 슈퍼시노비를 하는 건 내가 아니고 당연히 그 집 애들과 자기 집에도 같은 게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씨발 그거 한번 시켜달라고 말할 변죽도 없던 난 다같이 롤러블레이드 타러 나가자면 책 본다고 빠졌다가 조용히 몰래 해봤자 좆나 금방 죽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잖아. 그런 건 있었다. 난 그와중에도 그런 게임이 시시했다. 좀 때려부수고 싶은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스트리트파이터2가 등장했다. 바로 그 스트리트 파이터2. 아도겐 워리어겐 라딱따뚜겐 라데꾸 요가파이어 헐헐헐헐 라운드 원, 스트리트파이터2. 그리고 우리 집이 망했다.
난다긴다 하는 집들의 치맛바람 날리는 사립 국민학교에서 학원 하나 안 보내도 책 보는 거 좋아해서 머리가 좋아서 저렇게 공부를 잘해요, 소리 듣던, 그 소리 듣는 맛에 살던 엄마 때문에라도 그래야만 했던 나는, 그때 이미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을 생존무기로 삼던 조숙한 뇌와 약한 몸을 가진, 학교 1년 빨리 들어간 아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집이 망해서 아주 많이 위축됐던 것 같다. 고학년에 접어들며 학원과 과외수업을 지원받는 아이들에게 유일한 내 무기였던 공부마저 밀리기 시작했고, 친구들은 소니 워크맨과, 동네 꼬마들이 갖고 노는 것과 차원이 다른 정밀한 일제 비비탄총을 들고 다녔고, 한달마다 에어조던과 에어맥스를 새로 샀으며 프랑스 브랜드의 옷, 독일 가방등을 유니폼처럼 착용한 채 엄마가 운전하는 대형 세단에 올라 압구정 맥도날드에 모이곤 했다. 난 엄마가 반포에 사는 엄마의 사촌 집에서 가져다준 노랗게 바란 종이의 세계 문학전집을 읽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당시 아빠는 빚쟁이들을 피해 도피했고, 어느날 엄마는 지금부터 나쁜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자며 한밤중 계단으로 아파트를 내려와 담 밖으로 짐가방들을 던진 뒤 날 데리고 엄마네 오빠 집, 큰외삼촌네로 도망쳤다. 다음날 아침 난 큰외삼촌의 소나타를 타고 학교에 갔다. 뭔가 큰 일이 난것 같지만 엄마가 속상해할까봐 모른체했다. 사립 국민학교의 자랑, 급식 시간, 내 나이키 플라이트 백팩을 열고 파란 수저통을 꺼냈다. 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사다주신, 모두가 부러워했던 내 가면라이더 수저통이, 깨져있었다. 전날 밤 담 밖으로 짐가방을 던질때 깨진거다. 그땐 그게 그렇게 창피하더라. 집에 와서 가면라이더 수저통이 깨졌다고 엉엉 울던 내가 그저 철없이 아끼던 물건 망가졌다고 투정부리는 줄 알았겠지만, 그래도 엄마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겠지만, 사실 난 그때 우리 집에 큰일 난 �� 다 알고 내 운명에 절망하며 꺼이꺼이 운 거였다. 그 빠듯한 피난�� 짐에도 나 속상할까봐 내 가면라이더 수저통을 굳이 챙긴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깨진 가면라이더 수저통은 다시 오지 않을 내 행복한 유년기의 종말과 이어둔다. 가끔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하는 눈물버튼 같은 기억.
몇달동안 그 집에서 지냈다. 사촌누나방 침대와 책상 사이, 일미터 조금 넘는 공간에서 엄마와 꼭 끌어안고 잤는데, 역시 철없던 그 누나는 자다가 가끔 일부러 침대에서 떨어져 무릎으로 날 찍곤 했다. 일부러라고 하는 건, 세번째로 찍혔을때 아직 잠이 들지 않았던 내가 그 누나가 아래를 한번 살펴본 뒤 몸을 날리는 걸 봤기 때문이다. 부족한 배움을 허장성세로 숨기지 않고 어떻게든 인성이 고왔으면 참 좋았을 큰외숙모는 자잘한데서 욕심을 부리는 편이었는데, 고기 반찬이나 빨래 같은 것으로 시누이가 아닌 내게 구박을 했다. 그나마 목소리가 멋진 큰외삼촌과 잘 놀아보고 싶었지만, 막내동생이 오냐오냐 키운 내가 너무 제 멋대로라고 느꼈는지 그 멋진 목소리로 날 자주 야단쳤다. 팬티 바람으로 거실에 나온다던가, 양치하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다거나 하면 눈물이 나게 혼을 냈다. 그러고나면 밤에 꼭 다시 조용히 울었는데, 엄마가 옆에서 더 큰 소리로 외삼촌을 거들며 날 덜 혼나게 해주려했단 걸 그때도 눈치채서 그랬다.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을 먹여살려야할 놈에게 줄 새 밑천을 준비하던 외할아버지가 그나마 든든한 내 편이었지만, 주로 나고야에 계셔서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다 엄마의 고집이었는지 그 사립 국민학교 학비도 계속 지원해주셔서 오히려 내겐 좋지 않은 환경을 계속 제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환경이 급변하자 틈이 생겼다. 어른들이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바쁜 사이 내게 관심이 줄어들었고, 큰외삼촌은 사촌누나에게 하듯 내게도 얼마의 용돈을 주었으며, 그새 난 머리가 조금 컸고, 스쿨버스가 아닌, 동서울터미널 근처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난 학교가 끝나면 우리 학교 아이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우리 학교 앞 오락실에서 몰래 스트리트파이터2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정신이 나갔다. 등교길에 오락실이 열려있다면 등교길에도 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모든 관심은 백원짜리와 스트리트파이터2였다. 미쳐가고 있던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만날 수 있던 다른 아이들은, 집에서 했다. 메가드라이브로. 그 녀석들은 무제한에 가깝게 연습할 수 있기 때문에 한 판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난 지면 백원을 잃는다. 라데꾸 두번에 비틀거리다 가까이서 반달차기 한번 맞으면 백원을 잃는 거다. 더 처절하게 더 정교한 플레이를 갈고 닦아야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가진 사람보다 더 큰 돈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적은 ��액으로 크게 보장받을 수 있는 각종 보험 같은 것들. 집이나 교육 같은 것들. 가난한 자는 적은 돈이 없어 더 큰 돈을 들여야 건강에, 좋은 환경에, 좋은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런 기반.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그 기반. 난 기반이 없었다. 백원짜리들의 무게가 줄어들수록 내 삶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얻을 것도 없다. 그저 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남의 집에 가기 싫었다. 무엇보다 여태 제대로 게임을 해본적이 없는 애가 그 전설의 스트리트파이터2를 만났으니. 얼마나 재밌었겠나. 준비물 산다며 돈을 많게 적게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밖이 깜깜했다. 사실 해가 져가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마주한 기계 위쪽으로 붉은 빛깔이 생겼던 것 같다. 멈출 수 없었을 뿐. 겁에 질린 채 퇴근길 어른들에 둘러싸여 버스를 타고, 집에, 남의 집이지만, 내가 묵던 곳에 도착하니 뭐 난리가 나있지. 한창 유괴다 인신매매다 극성일 땐데, 사립 국민학교 애들은 더 조심해야했고. 회초리 모양대로 피멍이 들게 엉덩이를 맞았는데 밤에 엄마가 울면서 연고를 발라줬던 거 같다. 울면서 연고 발라줄걸 왜 때려? 지 신세가 속상했던 게지. 지 화를 못 이겼던거고. 오락실 갔다가 늦게 올수도 있지. 아무리 학원 다니는 애들한테 밀리고 있어도 수우미양가가 아닌 100점 단위로 성적을 산출해 무슨 꼬맹이들 앉혀놓고 평균점수로 등수까지 매기던 그 잘난 국민학교에서 난 평균 96점 정도를 유지하던 중이었다. 집이 망하기 전엔 시험 봐서 한개 틀리면 울던 미친 재수 없는 새끼였으니까 못하면 99, 거의 늘 평균 100점이었고. 남의 집 빌��어 살면서도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데 뭐 속 썩인 일이 있나 만날 조용히 방구석에서 책만 보고 있다가 오락실 좀 갔다 늦게 왔다고 애를 그렇게 때려.
얼마 후 아빠가 돌아왔다. 경주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쪽 형제들이 경주에 사는데, 큰외할아버지가 도와줘 코오롱 호텔 근처에서 숨어살며 가끔 호텔에 딸린 필드에 라운딩도 나가고 씨발 뭐 좋은 공기 속에서 건강한 시골밥 먹으며 잘 지냈단다. 아주 낡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친구들에게 알려줄 근처의 다른 새 아파트 이름을 내게 주입했고 스쿨버스 정류장도 그 아파트에 등록했다. 허장전입이랄까, 난 아침마다 한참 걸어가 스쿨버스를 타야했다. 난 다음 학년이 됐고, 여전히 몰래 스트리트파이터2를 즐겼다. 스트리트파이터2를 잡기 위해 등장한 킹오브파이터도 해봤지만 뭔가 따라한 느낌, 복잡한 느낌이 싫었다. 같잖은 보수성을 발휘하는 건방진 꼰대 꼬맹이.
그러던 어느 날, 매해 그렇듯, 쓸데없이 학급회장이 됐다. 하고 싶은 애 하라고 하지 무슨 민주주의는 얼어죽을 입후보 추천을 받는게 무슨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도 아닌데 무식해가지고. 부회장�� 내가 좋아했던 여자애였는데, 걔도 날 좋아했다. 난 유덕화 머리, 걘 소피 마르소 머리를 하고 다녀서 아이들이 유덕화 책받침과 소피 마르소 책받침을 붙여들고 우리를 놀리곤 했다. 그런데 담임 선생이 우릴 싫어했다. 왜냐면 당시 사립 국민학교의 담임선생이라는 건 월급보다 부수입이 많은 자리거든. 송계숙. 씨발년. 한반에 50명이면 50명이 촌지를 갖다 바치며 자기 아이 잘 부탁하던 학교였는데, 학급회장과 부회장네 엄마는 그런 학부형들 전체를 이끌며 때마다 식사대접, 선물관리, 학급 시설 개선 등을 주도하고 목돈도 숨풍숨풍 써야했는데, 망한 집 자식이 회장이 된것도 미치겠는데, 부회장된 애네 집도 얼마전 망한거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갑자기 우리 얘기를 꺼냈다. 본받으라는 식으로. 그 나이때 아이들에게 집이 망해서 어려운데도 공부 잘하는 회장 부회장네 사연을 아이들에게 소상히 말했다. 좋은 뜻이지만 경솔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왜냐면 옆 반은 뭘 또 새로 했다며 우리들 앞에서 부쩍 자주 투덜거렸거든. 한번씩 내게 아니꼬운 눈빛을 주며 배배 비튼 말투로 그걸 얘기하던 그 썅년의 표정과 말투를 지금도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거든. 그날 그걸 듣는 우리반 애들이 교훈을 느끼기는커녕 그 나이에도 민망해하며 우리를 훔쳐봤거든. 내가 좋아했던 그 여자애는 고개를 들지 못한채 얼굴이 빨개져있었고 나도 얼굴이 뜨거웠지만 그 나이때 생각할 수 있는 어색함을 회피하는 방법이라곤 억지로 웃으며 괜히 옆 친구에게 쓸데없는 말을 계속 거는 정도라 버티고 버티다 끝내 귀에서 삐-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집에 돌아와 크게 울었다. 난 망했다라는 표현을 그때까지 써본적이 없어서 우리 집 망했어?라며 엄마에게 애들 앞에서 담임이 한 짓을 말했다. 아빠는 그 성질머리에 쌍욕을 퍼부으며 화를 냈다. 당장 가서 죽여버린다고 옷을 입었다. 놔뒀으면 아마 진짜 죽였을 거다. 그런 사람이거든. 엄마는 울면서도 그런 아빠를 진정시킨 뒤 담임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문을 닫고 한참 통화하더라. 다음 날, 내가 좋아하던 그 여자애는 결석했다. 그리고 내겐 메가드라이브가 생겼다. 스트리트파이터2팩과 함께.
한동안 집에 오면 거실의 아남 텔레비전을 차지하고 저녁 먹을때까지 게임을 해도 야단은커녕 그만 하는게 어떻냐는 청유 한번 듣지 않았다. 행복했다. 다만 아무리 부드럽게 문질러봤자 납작한 방향버튼의 조이패드로는 스틱이 달린 오락실 기계처럼 기술을 잘 구사할 수 없는데다 그렇게 많이 해대니 양쪽 엄지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그게 굳은살이 되면, 그 굳은살 아래에 또 물집이 잡히는 것을 반복하며 늘 손이 아픈채 살았다. 그렇게 죽어라고 해대니, 그시절 게임의 인공지능이란건 너무 낮은 수준이어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그리고 쓸데없게도 난 스트리트파이터2를 ���전히 정복해버렸고, 흥미를 잃었다. 무엇보다, 너무 늦었다. 그 잘난 학교의 친구들은 구닥다리 메가드라이브를 졸업하고 같은 회사의 새 모델 새턴이나 네오지오 같은, 세 배는 비싼 새 시대의 게임기로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내 것이 아닌 것들에 슬퍼하지 말자는 생각을 처음 했다. 난 마이클 조던과 NBA에 몰두했고, 밖으로 나가 농구공을 던져보기 시작하며 스트리트파이터2와 헤어졌다. 운동하는 게 즐거웠다.
사립초등학교를 졸업한 난 지역의 중학교에 입학했고 천호동 혹은 하남과 서울 변경의 슬럼에서 자란 작은 갱스터들과 만나며 연약함을 졸업했다. 그 친구들과 놀며 농구, 이태원 문화, 듀스, 힙합 패션, 흡연 같은 재미난 일들에 빠졌다. 무엇보다 자위행위를 시작했다. 공부는 시험때만 했다. 반에서 5등 정도. 부모에겐 납득할 수 없는 성적이었고, 중학교부턴 혼자 힘으로 안되는 것이라며 속상해했다. 아닌데. 딱 그만큼만 한건데. 아빠는 재기에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크게. 그 시절 건설 쪽 일이 그랬다. 망하면 집안에 동전 하나 없지만 풀리면 사치가 보장됐다. 그러자 날 학원에 보내려 했다. 영어학원만 다니겠다고 했다. 당시론 드물게, 성문영어 같은 입시 영어 가르치는 학원이 아닌, 회화나 영미 소설을 가르치는, 연대 이대, 고대 나온 젊은 여자 선생님들이 하는 특이한 학원이었는데, 그 여자 선생들은 모조리 내 자위의 대상이었다. 미안합니다. 내 머리 속 일이지만 그래도 당신들을 너무 많이 성적대상화했어요.
고등학교때도 다녔으니 그곳을 꽤 오래 다녔는데, 학원이 위치한 곳은 그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고, 뭐 놀거라곤 노래방이나 오락실 밖에 없던 우리들이 모이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케이드 오락실이 있었으니까. 애들이 갈 클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길가에 앉아 서로 마르떼 프랑소아즈 저버나 292513스톰을 뽐내고 괜히 나쁜짓 하는 거 티내며 담배 피우다 침 뱉는 일 밖에 할게 없던 중고딩들에게 그 오락실은 한껏 차려입고 들어가야하는 곳이기도 했다. 긱하고 너디한 정통 오타쿠들이 게임하겠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단 얘기다. 당시 학원을 가든 안 가든 그쪽에서 삐대고 놀때면 그 오락실에서 사무라이쇼다운이라는 걸 했다. 스트리트파이터2로 워낙 단련해서인지 버추어파이터, 후에 철권이 나왔을때도 대전 격투게임은 금새 잘 했지만 이상하게도 시시했다. 왜냐면 그때쯤 아빠의 사업이 다시 망했으니까. 나중에 알고보니 영어학원비도 꽤 밀렸던 모양이었다. 가난해서 게임하기 힘들어졌지만 운동하는 게 참 즐거웠던 시절이라 괜찮았다. 그리고 그 즈음에서야 난 이제 그만 낭만적인 책들을 내려놓고 내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입시 책들을 파고 들어야겠단 마음을 먹었고, 독하게 실���했다.
난 이름값 있는 대학에 갔다. 아직 세상이 덜 빡셌던 만만한 시절에 산 덕으로. 그리고 세상은 컴퓨터 게임의 시대였다. 무수히 많은 아이들을 재수시킨 스타크래프트는 방송에서 중계를 시작하고, 프로리그가 출범하고,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게임이 되더니, 게임을 넘어 하나의 종목, 역사, 전설이 돼 마치 포커나 당구 같은 자리에 올랐지만, 심지어 그 중계를 시작하고 성장시킨 사람들이 대학방송국 선배들이지만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가 지금도 참 좋아하는 친한 형들인데-도 난 스타크래프트를 안 좋아한다. 사실 난 그 이유를 이미 어렸을 때 알았다. 난 죽이고 부수는 액션을 하고 싶어 게임을 했던 거다. 전략 같은거 짜는 게 아니라. 그리고 그 세계는 여전히 비디오게임에 있었다.
다시 재기해 기사가 운전하고 다니는 차를 타는 아빠 덕에 플레이스테이션을 샀고 플레이스테이션2가 나오자 그것도 샀다. 온통 때려죽이고 부수는 게임들을 했다. 무쌍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들. 그리고 야구 게임. 예전처럼 게임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진 않았다. 사랑에 미쳐있었고 대학방송국 생활은 바쁘고 즐거웠으며 멋 내느라 정신 없는데 책 읽는 건 여전히 좋아했거든. 그러다 큰 실연을 했다. 다시 엄지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로 바뀌었다가 그 밑에 물집이 잡히길 반복했다. 살이 십킬로그램 빠졌다. 손가락 모양이 바뀌었다. 시력이 약간 떨어졌다. 배탈이 났는데 컨트롤러를 놓지 못하고 배배 꼬다 똥을 지린적도 있다. 그래도 됐다. 영장이 나왔거든. 내가 최전방 오지에서 좆같은 노예 생활을 하는 사이 아빠는 삶의 마지막 부도를 맞았고 엄마는 다른 남자를 만나왔던 걸 밝혔으며 둘은 이혼을 했다.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직 너무도 어렸던 내 동생은 그때부터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에 인생을 바쳤다. 외로웠을테니까. 내가 오락실에 갔듯이.
외로움이라는 것. 즐겁고 싶다면, 욕망, 벗어나고 싶다, 탈출, 외면해야해, 몰두, 성공하고 싶다, 돈, 눈물, 사랑, 이야기, 당신이 태어난 것, 오늘 저녁을 먹는 것, 샤워, 그 신발, 옷장 속 그 옷의 브랜드, 가방, 죽음, 장난감, 24만원에 풀린 플레이스테이션4를 향한 아저씨들의 열광, 다 모두, 결핍, 외로움이 벌인 짓이다.
필요 없는 것들을 구현하는 필요없는 말들이 있다. 아무튼이라던가 그래도라던가 나중에라던가. 그것 또한 외로워서 그렇다. 외로움이 벌이는 짓이다. 궁지에 몰려 너무 외로워지면 아무튼이라 말하고 무엇이 맞음을 알게 되어도 그 길이 외롭다면 그래도를 말하며 지금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외로워져 나중에를 외친다면, 그런 말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러면, 지금을 말해야 한다. 외롭지 않게. 지금이 아닌 건 지금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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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다
듣는다.
아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알면 알수록 아는게 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아끼는지 알기 때문이다. 해야할 말을 하지 않는게 아니라 할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혹,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 해야할 말을 하지 않고 할 필요 없는 말을 한다. 알지 못해도 안다고 말해야 안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값어치 없는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자랑스럽다.
그렇게, 말한다. 남의 것을 말한다. 통찰 없이 주워온 표제들과 행동이 다르다. 그것은 생각에 닿기까지 들인 시간의 무게가 가볍다.
혹, 생각한다. 그것은 행동에 이르기까지 들인 시간의 무게가 무겁다. 통찰 있게 쌓인 행동에 표제가 붙는다. 남이 내 것을 듣는다. 그렇게, 듣는다.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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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저녁 7시. B는 20년째 재건축 뉴스를 공급하는 아파트 앞 스타벅스에 앉아있다. 엄마와 아이의 2인조로 짜여있지 않은 유일한 손님이다. 문제집을 풀고 있지 않은 유일한 남자 손님이다. 창밖엔 빨간, 하얀, 검은 박스터가 쉴새없이 오간다. 아이가 타고 아이가 내리고 아이가 탄다. B가 그 회사에 다닐때 한국에서 일년에 1000대 팔면 기적이라고 했다. 이제 일년에 4000대 팔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탑을 오픈한 컨버터블의 배경은 야자수가 아닌 학원간판이다. 미드십엔진으로 와인딩로드는 무슨 좁아터진 골목을 내달린다. 마케팅 할것도 없겠네. B는 생각했다. 어쩌면 B는 박스터를 타고 오지 않은 유일한 손님일지도 모른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 2인조들의 부산함. 히터 공기. 아침 이후로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지. B는 속이 안 좋았다.
일년 후, B는 그곳에서 다시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같은 풍경을 반복적으로 마주했다. 어느 날. 그곳에서 마지막 일정을 마친 B는 옆 마트에 들어���다. 집에 위스키가 떨어졌거든. 맥켈란과 글렌모렌지를 집어들다 씨발 왜. 하나야마처럼 다 부숴버리고 싶다. 싱글몰트는 지랄 난 이제 버번이다. B는 와일드터키를 샀다. 하나야마처럼 병째 마실 작정이었다.
집에 와 샤워를 마친 뒤 속옷을 꺼내던 B는 갑자기 속옷 서랍을 뽑아 부어버렸다. 캘빈 클라인 같은 이름은 이제 견딜 수가 없다. 쁘띠는 쁘띠해서 쁘띠로구나. 팬티를 모조리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수프림 팬티를 결제했다. Fuck You다 씨발.
B는 술을 따르고 앉아 페북을 읽는다. 같은 가치관을 가진 글을 읽으니 이렇게 편안하구나 역시 난 훌륭하구나 암암. 겨울이 되니 모피 제품을 비판하는 기사가 늘었네. 좋은 얘기지. 힙하다. 아 힙하다. 힙하네. 그놈의 힙. 또. 잔소리. 씨발. B는 스마트폰을 들어 콕 찍어뒀던 시어링 자켓과 구스다운을 사버렸다. 씨발 찝찝하게 다 니네 때문이야. 내가 동물과 환경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보지 말라고 뒤돌아보면 안된다고 그렇게 징징징징 신신당부하지 말고 그냥 명확히 한번만 말했어도.
취한다, 몰라 속 시원하네, 듬뿍 취한 B는 넷플릭스를 켠다. 악당들은 캐딜락을 타는구나. 얘도 쟤도. 그럼 이제 나도 캐딜락이지. 한동안 고민이었는데 됐다 이걸로 바꾸자. 독일차는 씨발 무슨 지하철 안 루이비통이냐. B는 담배를 물고 듀-뽕-하다, 다시 탁, 닫아서 버려버-리진 못하고 서랍에 넣었다. 씩씩하지도 멍청하지도 못하니까. 오래 쓰지 않았던 지포를 꺼내 기름을 부었다. B는 휘발유 냄새 가득한 담배를 빨아들였고- 그 순간, 쁘띠가 만들어낸 파란 깃의 악당이 탄생했다. 그 악당의 무기들은 프라다 백에 들어있다. 떳떳하지도 가난하지도 못하니까. 쁘띠를 경멸하는 그 악당은 기꺼이 브루주아의 돈을 줍는다. 허벅지 뒤가 찢어질것 같지만 무릎과 등을 꼿꼿이 펴고 허리만 숙여 줍는다. 누가 볼까봐 번개같이 숙였다 펴고선 어색한 미소로 주위를 둘러본다.
B는 M에게 카톡을 날린다.
-사장이 밉냐 부장이 더 밉지 일본인이 밉냐 친일파가 더 밉지. 부장이 밉냐 부장 되려는 새끼가 더 밉지 친일파가 밉냐 친일파 되려는 새끼가 더 밉지.
-그럼 넌 뭐 의병장이 되겠단거야? 이인영?
-내가 그런 씹선비질은 무슨 당연히 김원봉이지.
-웃기시네 넌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졌을때 죽은 콧수염 기른 조선인 순사였을걸.
-좆까 씨발 난 닥터드레처럼 에어포스 한번 신고 버릴지언정 발렌시아가를 신지는 않겠다 뭐 그런 얘기�� 이 반동 새끼야
-취했으면 자라. 내일 자라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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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동생이 잉태된 날을 알고 있다. 어렸을 때 난 몹시도 밤을 무서워했다. 밤은 귀신과 흡혈귀에 대한 공포로만 가득한 시간이었다. 밤에 오줌이 마려우면 천천히 암순응을 마친후 내 방문을 최대한 소리없이 열었다. 귀신이 듣고 쫓아올까봐. 우리 집은 부자였다. 80년대 건설 호황을 누린 청년사업가는 졸부가 되어 강남에 커다란 신축아파트를 구입했다. 뭔지도 모르고 유���세례를 받은 7살의 난 십자가를 한번씩 바라보며 벽을 짚고 한발 한발 그 커다란 거실을 통과해야 화장실까지 갈 수 있었다. 아주 오래 걸렸다. 그 차가운 바닥과 벽지, 지금의 서울에선 만날 수 없는 암흑과 적막, 보다 더 어두운 식탁 밑과 한번씩 크게 웅웅거리는 냉장고 근처엔 내 마음이 만들어낸 두려운 형체들까지 나타나 다시 방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적도 많았다. 그 모든걸 이겨내고 오줌을 누는데 성공하면 화다닥 안방으로 뛰어가 엄마의 품에 파고들어 다시 잠들었다. 아빠는 침대가 좁아져서인지 오냐오냐 키우는 꼴이 마음에 안들어서인지 그것을 못 마땅해했다.
수컷은 싸면 끝이다. 이제 비슷한 나이가 되어 생각해보니 늘 지 꼴리는대로였지. 좆나 좆같이 좆같게 굴진 않았고 운좋게 조금 좆같았던 정도였던 것 같다. 좆같은게 좆같은 건지 알긴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모든 아빠들은 좆같은 존재라 조금만 덜 좆같으면 훌륭한 아빠로 남아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 커서야 종합된 정보지만, 확실한건 아빠는 자기만 중요한 사람이었다. 게을렀고. 그 기질은 내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씨발. 그때 아빠가 지금 내 나이쯤이었으니 뭐 내가 애가 있으면 나라고 크게 다를까. 그 몇년 돈 잘 벌어 기분 좋았을때 잘 해준 기억 몇개 소중히 간직하며 당신덕에 내가 이렇게 컸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십쇼, 다만.
그 날은 달이 밝았다. 덜 무서웠다. 오줌을 눈 뒤 안방으로 뛰어갔지만 문이 잠겨있었다.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적어도 엄마는 깨어있다고 생각했다. 엄마 소리였거든. 문을 똑똑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 그 작은 소리가 멈춘게 반응이었구나. 안방 문에 등을 기대고 거실과 현관쪽 넓은 공간을 보고 앉았다. 시야가 확보되는 편이 공포가 덜했다. 계속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분명 기척이 있었다. 아빠가 짜증내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깨어있다. 내가 와있단 사실도 알고 있다. 그날 내 부모는 분명 섹스를 했다. 다음날 아침 아빠는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고 출근했고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날 대했다. 왜 니 방으로 가지 않았냐고 짜증을 냈다. 상처 받았다. 좋게 말해주면 좋았을 거다. 상처 받으니까 이렇게 쓸데없이 선명하게 알고 싶지도 않은 당신들의 섹스를 기억하잖나. 다음해 난 8살이 됐고 동생이 생겼다.
동생은 나와 많이 달랐다. 책읽는 게 제일 즐거웠던 나와 달리 책을 읽으라고 하면 우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운동을 잘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미술도 음악도 재주가 없었다. 세 차례의 부도로 인한 가계 몰락과 부모의 이혼을 가장 예민한 시기에 겪었고 어린 시절에 먹은 미국 분유 탓인지 덩치가 아주 좋았지만 기가 약해 늘상 맞고 다녔다. 가장 좆같은 건, 늘 나와 비교당하며 자랐다는 거다. 난 그냥 공부에 재주가 있었다. 좋은 시대를 산 덕에 학원 하나 안 다녔지만 1등이었다. 8학군에서. 부모에게 얼마나 큰 자랑이었겠나. 누군가는 달리기가 빠르고 누군가는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난 그 재주가 있었을 뿐인데, 한국이잖나. 그렇다보니 내게 주어졌던 스트레스는 오히려 남성성에 대한 증명이었는데,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삼대째 똑같다는 눈 뒤집히는성질머리가 그 스트레스에 더해져 어줍잖게 건달 흉내내는 솜털 난 양아치들이랑 싸움도 많이 했고 잡히는대로 휘두르다 사고도 크게 쳐봤다. 공부도, 싸움도 잘했다.
그런 형이 무려 8살이나 많았다. 동생은 내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그렇게 교육시켰다. 동생은 간단한 의사 결정도 잘 하지 못해 내가 소리를 질러대야 겨우 뭐가 좋다고 말했다. 동생이 나처럼 과거의 정보를 종합해본다면 난 정말 좆같은 기억으로 가득한 개새끼일거다. 제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길 바란다. 난 정말 좆같은 형이었던게 틀림없으니까. 그 8살 많은 형은 동생을 엄하게 키운답시고 동생이 큰 실수를 할때마다 폭력을 가했다. 동생을 아낀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내가 부모처럼 돌보고 데리고 살거니까 때려서 고쳐야한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거짓말이다. 때리면서 짜릿하기도 했던 걸 이젠 안다. 폭력의 쾌감을 느꼈다. 죽일 듯이 몇분동안 때렸다. 엄마는 잘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위아래를 확실히 하고 동생을 잘 돌보라고 했다. 칭찬을 받았다. 정말 이보다 좆같을 수 있나. 엄마는 동생을 한심하게 여겼으니까. 미안하다. 나도 어렸다. 니가 졸업때까지 괴롭힘 당했단 걸 알고 널 죽일듯이 때렸다. 니가 약자인게 견딜 수 없었다. 난 전기와 가스가 끊긴 바퀴벌레가 점령한 집에서 지하철비도 없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쫄쫄이 굶은채 사박 오일 휴가를 보내고 부대로 돌아가야했던 군인이었다. 난 노예였다. 넌 착했다. 날 따랐다. 대체 왜. 우린 어렸다. 뭐든 너와 함께면 즐거웠다.
좆같은 과거는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진심이다. 말이 돌아가려 한다, 미안하다. ��� 미안하다. 그렇다고 이제 와 당신들을 안 보고 사는 걸 바꿀 생각은 없다. 왜냐면 당신들 덕에 좆같은 거거든. 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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