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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남성, 활력 충전! 지친 몸을 위한 피로회복제 추천 | 피로, 건강, 활력, 체력,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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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의 조지타운에는 사실상 ‘차이나타운’이 따로 없다. 중국인이 이주한 도시 어디에나 있는 차이나타운이 1786년부터 중국인이 이주한 페낭에는 정작 없는 것이다. 단지 조지타운의 차이나타운은 다인종 · 다문화의 조화 속에 도시 전역에 스며들어 있을 뿐이다. 페낭 화인사회의 위상을 대변하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페낭 건설 초기의 중국인 이주자와 관련해 누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를 자료로 확인하기는 힘들다. 일부 자료가 있다고 해도 대부분 19세기 몇몇 부자 상인에 관한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페낭에 영국 식민지가 건설된 이후 중국인 이주의 양상이 이전 시대 동남아시아의 중국인 이주 형태와 다르다는 것은 연구자들의 공통된 해석이다. 그렇다면 19세기 대량 이주의 물결이 밀려들기 이전 ‘어떤’ 중국인이 페낭으로 이주한 것일까? 페낭 건설 초기에 해당하는 1786년에서 1820년 사이에 작성된 세 차례의 페낭 인구조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현지 무역상이었던 프랜시스 라이트는 서툰 식민지 행정가이기는 했어도 꼼꼼한 기록자였다. 초기에 항구에 드나드는 배를 일일이 헤아렸고, 이주민의 인구통계도 초기부터 작성했다. 점거 2년 후인 1788년에는 8월과 12월 두 차례 인구조사가 있었다.
8월의 페낭 총인구는 829명이었고, 그 가운데 중국인은 121명으로 조사됐다. 말레이인이 302명으로 가장 많았고, 인도 무슬림인 출리아가 216명, 태국의 기독교 박해로 커다로 피난했다 이주한 기독교도가 180명으로 조사됐다.
12월 조사에서 페낭 인구는 넉 달 사이에 454명이 증가한 1,283명으로 집계됐다. … 한편 해협식민지 정부 기록에는 1788년 페낭에 거주한 중국인 가구의 가장을 이주 지역별로 구분하고 있는데, 커다 출신이 47명으로 가장 많고, 말라카 출신 6명, 말레이반도 북부 퍼를리스와 페락 출신이 각각 1명씩, 태국의 남동부 파타니와 송클라 출신이 각각 7명과 21명이었다. 중국에서 곧바로 이주한 국인 가장은 15명에 불과했다.
확인된 중국인 가장 98명 가운데 말레이반도에서 이주한 경우는 커다 출신 47명(47퍼센트)을 비롯해 57퍼센트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곧바로 이주한 경우는 15퍼센트에 그친 반면, 태국만에 면한 파타니와 송클라 출신이 28명으로 28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는 페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부터 커다를 중심으로 동쪽 태국만 일대와 서쪽 말라카해협에 육상 교역로가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하며, 이후에도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 1800년 페낭의 조지타운에 중국 복건성 출신과 광동성 출신이 공동으로 설립한 사원인 광복궁(관음정)의 비문에는 450명 기부자 가운데 태국 송클라의 ‘카피탄 우’가 200달러를 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장의 출신 지역으로 볼 때 1788년 페낭 중국인의 85퍼센트가 말레이반도 북부와 태국 남동부에서 이주한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사업 기반을 구축하고 가정을 꾸린 상태에서 페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한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화인‘이었다. 사람이 움직이면 교역 네트워크도 움직이는 게 통례였다.
말라카에서 페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 6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말라카해협 중부에 해당하는 말라카의 화인사회는 역사가 깊다. 하지만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페낭의 화인사회와 말라카 화인사회의 관련성은 그다지 깊지 않다. 나폴레옹전쟁으로 영국은 말라카를 1795년에 접수해 1818년 네덜란드에 되돌려준 바 있다. 이때 영국은 말라카의 유력 상인들을 선별해 페낭으로 이주하는 유럽인에게 정착금 전액을, 중국인에게는 정착금의 8분의 1을 지원하며 이주를 장려했다. 하지만 이주 계획은 성과가 없었다. 말라카의 중국인 대부분이 말라카를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라카의 상인들은 1824년 영국-네덜란드의 런던조약 이후 대거 싱가포르로 이주했다(Wong, 2007: 15).
19세기 후반 싱가포르에는 말라카 출신 중국인 거상이 많지만, 페낭에서 말라카 출신으로 이름을 남긴 상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페낭과 말라카의 화인사회는 상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애초부터 긴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라카해협에서 페낭은 해협 북부, 싱가포르는 해협 남부의 교역과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말라카는 교역과 인적 교류에서 싱가포르와 가까웠다. 이는 또한 영국이 33년의 시차를 두고 건설한 해협식민지 페낭과 싱가포르의 화인사회가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경제적 규모나 교역권의 차이로만 설명하기 힘든 상이함을 만든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프랜시스 라이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793년에도 인구조사가 실시됐다. ’1792~93년 인구조사‘에서는 1787년부터 1793년까지 6년간의 출생과 사망 및 혼인 등에 관한 조사도 이뤄졌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페낭 화인사회의 남녀 성비가 2대 1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는 대단히 불균형한 성비에 해당한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남성 노동자 이민이 급격히 늘면서 화인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비가 50대 1까지 벌어지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Khor & Khoo, 2004: 36), 초기 페낭의 성비 2대 1은 안정적이라 할 만하다. 당시 중국인 여성이 독자적으로 페낭에 이주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때, 초기 페낭의 중국인은 대부분 커다와 태국에서 기반을 잡고 가정도 꾸린 이들이 가족과 함께 이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조사에는 거주 예상 기간을 묻는 설문도 실시했는데, 이를 통해 초기 중국인 이주자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 대다수가 페낭에 아주 눌러살 생각은 없고,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달리 현지 여성과 결혼한 중국인과 그 가족들은 페낭에 정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조사 기간 6년 사이에 태어난 중국인 아이의 대부분이 중국인 남자와 말레이인 여자의 혼혈인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인 다수가 귀향하겠다고 답한 내용과 관련해 당시 이주자들이 페낭에 정주할 뜻이 없었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중국인도 돌아오지 않겠다며 집을 떠나는 법이 없으며, 언제나 꿈은 금의환향해 조상이 묻힌 선산에 자신도 묻히는 것이라고 한다(Smith, 1894: 166). 이러한 귀향 강박이 해외 화인사회에서 중국인 정체성의 요체라는 설명도 있다. 고향을 떠나 어디에 살든 언젠가 귀향하고 싶다는 바람이나 그리해야 한다는 농경사회의 전통으로 인해,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이 언어와 의례 등에서 문화적으로 중국인다움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경사회의 전통으로 19세기 해외 이주 중국인에게 귀향 강박을 규정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왕궁우(Wang, 2003: 3)에 따르면, 중국 전통 농경사회에서 자발적 이주란 개념은 없었다. 이민이란 군대를 이동하거나 당국이 기근���나 홍수 등으로 살림이 어려워진 지역의 인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가리켰다. 권력의 통제를 벗어나 제 발로 고향을 떠난 무리들은 유민流民으로 분류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페낭 건설 초기 중국인 이주자들은 청淸 조정이 해외 도항을 금지한 상황에서 경제적 · 정치적 이유로 고향을 떠났다. 이들에게 향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현지 정착을 방해할 정도로 귀향 강박이 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착 여부는 고향을 떠난 저마다의 이유와 현지에서 삶의 여건에 좌우될 사안이기 때문이다. 페낭에는 ���기부터 터를 잡고 살겠다는 화인들이 확인된다.
페낭 인구는 점거 10년 만인 1796년에 1만 명을 넘었고, 점거 22년 뒤인 1818년에는 3만 명을 돌파했다.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는 것은 페낭에서 그만한 인구를 지탱할 경제활동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1810년의 인구조사에서부터 프라이를 포함한 페낭 전체 인구와 조지타운의 인구를 구분했고, 1818년에는 조지타운의 인구를 인종별 · 연령별 · 성별로 나누어 조사했다. 1818년 조지타운에 거주한 중국인 3,128명 가운데 15~39세 인구가 2,238명이었고, 남자는 1,993명, 여자는 245명이었다. 특기할 점은 1793년의 2대 1이던 중국인 남녀 성비가 25년 사이에 8대 1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페낭의 중국인 이주 패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페낭 화인사회의 성비 변화는 무엇보다 가족을 동반한 이주자보다 독신 남성의 이주가 월등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75~80쪽)
페낭 건설 초기에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에서 가족을 동반하고 이주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현지에서 활동해온 중국 상인이나 해운업자, 즉 화상華商의 후손이거나 해상교역 전통의 전승자들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특히 동남아시아 화인 연구에서 중요한 논점이다. 그간 동남아 화인사회에 관해 ‘중국’의 국민인 화교華僑에서 ‘거주국’의 국민인 화인華人으로의 변천이 중심 주제로 논구되어왔다. 이는 탈식민 시기와 국민국가 형성기라는 한정된 시기에 동남아 화인 사회의 정체성 변화에 주목한 설명의 틀이다. 하지만 서양 식민지도, 국경도, 국적도, 민족도, 국민국가도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해협 일대에 존재한 화인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단순히 ‘화교-화인’의 틀로는 설명되기 힘들다. 페낭 건설 초기 중국인 이주자들이 바로 그러한 도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해 동남아 화인사회 연구자들이 주목한 개념이 ‘디아스포라diaspora’와 ‘페라나칸peranakan’이다. 두 개념은 초기 페낭 화인사회의 형성은 물론 20세기 식민지 후기까지 페낭 화인사회의 전개 과정ㅇ르 살피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디아스포라와 페라나칸은 기본적으로 종족성ethenicity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정체성identity’ 문제와 연관된다.
(81~83쪽)
통상 유럽의 집시는 디아스포라의 범주에서 배제되는데, 실향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연구자들은 디아스포라 개념을 중심으로 이주자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 경제적 역할에서 종족적 · 문화적 · 정치적 정체성에 걸쳐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동남아 화인사회와 관련해 디아스포라 개념이 주목받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첫째는 고대로부터 서양 식민지 시기까지 이어져온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관련된 것이고, 1990년대 이래 세계화의 확산 속에서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종족 집단에 관심이 쏠린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해상교역과 관련된 디아스포라 개념은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 서사의 ���복이라는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15세기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한 대항해 시대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기는 해도, 유럽중심주의 관점은 서양의 도래 이전부터 세계의 대양에서 교역망을 갖추고 활발하게 교역하며 살았던 디아스포라의 서사를 자율적 주체로서 다루지 못했다(Clark, 2006: 386~7).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서양의 진출 이전과 이후 인도양 동쪽 해양교역이 누구에 의해, 어떤 매커니즘으로 이뤄졌는가를 설명하는 틀로서 “외국인 사회에서 연계 네트워크를 갖추고 살아가는 상인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교역하는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란 개념이 도출됐다. 이 개념은 종족 집단의 이주 현장에서 드러난 연관성에 주목한 후속 연구를 통해 “동일한 종족의 기원을 지닌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해외의 도시나 이방의 문화에 형성한 공동체”(Clark, 2006: 391)로 정의되었다.
아울러 ’교역하는 디아스포라‘가 특정 시기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됐다(Loh, 2009: 1). 근대적 계약��계가 자리 잡기 이전까지 종족 기반의 교역하는 디아스포라는 정치적 경계를 넘어 같은 종족 또는 지역 출신과 거래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느는 것이다. 출신 지역이 같은 상인들과 거래하는 것이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을 상대하기보다 수월했고 속을 가능성도 줄여주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84~85쪽)
페라나칸은 디아스포라의 부수적 개념이면서, 동남아 화인사회의 특성을 함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페라나칸은 본디 말레이어로 ‘현지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이지만, 그 대상은 디아스포라로 국한된다. 출생자의 부계 종족성이 무엇인가에 따라 중국 상인의 후예이면 ‘페라나칸 치나Peranakan Cina’로, 인도계 무슬림 상인의 후예이면 ’자위 페라나칸/자위 페칸Jawi Peranakan/Jawi Pekan“으로 불렸다.[*자위 페라나칸은 ‘동남아시아’를 가리키는 아랍어 ‘자위’와 현지 태상을 가리키는 말레이어 ‘페라나칸’의 합성어이다. 페낭에서는 ‘자위 페칸’으로 통용됐다. 페낭 건설 초기에 이주한 인도 남동부 출신 무슬림 남성이 현지 말레이 여성과 혼인한 경우 ‘자위 페칸’이라고 했고, 이들의 후예를 ‘자위 페라나칸’으로 불렀으며, 이후 인도인 무슬림과 그 후손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자위 페칸’이 쓰였다. Musa(1999: 15) 참조. 인도인 여성의 이주가 본격화한 1860년대 이후 페낭의 자위 페칸은 혼혈의 의미보다 말레이어를 쓰는 인도계 무슬림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페라나칸을 지칭하는 용어는 나라와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말라카해협 디아스포라 화인사회의 원조에 해당하는 말라카에서 페라나칸 화인은 스스로 바바Baba峇峇라 칭했다. 바바가 혼혈의 후손을 가리키는 인도어에서 비롯했다고 하지만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이른 시기에 화인사회가 형성된 말라카에서 바바는 영어의 ‘미스터’에 해당하는 존칭으로 사용됐다. 페라나칸 화인 남성을 바바라면 여성의 존칭은 ‘뇨냐Nyonya娘惹’이다. 페낭을 비롯한 말라카해협에서 페라나칸은 시대에 따라 바바, 바바뇨냐, 해협화인Straits Chinese 등과 혼용되기도 한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페라나칸은 ‘타향에 머무는 자’로서의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온 자’와 ‘머무는 타향에서 출생한 자’의 경계가 생기고 그것을 구분할 어떤 필요성에서 생겨난 말일 터이다. 그 ‘어떤 필요성’이 페라나칸의 특성을 규정하게 된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사회인류학자 탄치벵은 그 필요성이 화인사회가 내부와 말레이 사회의 두 방향에서 제기됐다고 본다. 먼저 말레이 사회에서 말레이 문화에 동화된 화인과 그렇지 못한 화인을 구분할 필요성이었고, 화인 사회 내부에서도 양자의 경계를 구획할 필요성이 생겼다는 것이다(Tan, 1993: 21~22). 두 경우 모두에서 바바/페라나칸의 ‘타자他者‘는 중국에서 새로 이주한 신케sinkheh新客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라카해협에서 페라나칸 화인의 역사는 15세기 말라카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명대의 대항해가 정화鄭和(1371~1434)의 원정기에도 말라카왕국에 화인사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교역의 속도와 규모가 커지면서 오랜 역사의 아시아 지역이 앤서니 레이드(Reid, 1988, 1993)가 명명했듯이 ‘상업의 시대’(1450~1680)로 불리게 된 것은 서양 식민지화 이전 시기의 일이다. 동양과 서양의 해상 교차로로서 동남아시아에서 항구에 기초한 정치권력들은 해상을 통과하는 해상교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유럽과 중동, 인도, 중국, 일본의 상인들이 해상의 주요 항구와 기지와 지사를 건설하고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만들었다(Clark, 2006: 391). 이렇게 생겨난 항구 도시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정착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임시 머무는 거처를 의미했다.
중국인은 15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지배했다. 18세기를 ‘중국인의 세기Chinese century’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Blusse, 1999; Reid, 1997: 11~14). 중국인이 동남아 도처의 주요항구에 거주하면서 상업활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동남아 해상교역이 ’중국인의 세기‘였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이를 두고 화인 연구가 왕궁우(Wang, 1991b)는 “제국 없는 상인들”이라고 했다. 이 시기 중국 복건성 출신 중국 상인들이 동남아 해상교역에서 제국이란 공권력의 뒷받침 없이도 거대한 교역 제국을 건설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중국인의 세기가 중국 동남 연해안에서 교역과 해외 이주를 금지하는 명청대 해금海禁 정책의 시기와 겹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중국인 해상활동 황금기라는 남송(1127~129)과 원대(1271~1368)의 250년간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런데 이 시기 동남아 지역에 중국인이 정착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명대인 15세기 초부터 중국인 해외 정착이 기록으로 확인된다(Joh, 2009: 5).
명청대 해금정책에도 불구하고 복건성 연안 지역에는 ‘가까운 이들까리 무리를 이루어 바다로 나가 무역을 하는’ 이른바 주사무역走私貿易이 성행했다. 복건성의 상인은 물론 어민과 토지가 부족했던 농민은 “바다가 바로 논밭”이라고 할 정도로 교역에 열을 올렸다(이화승, 2007: 559). 이들은 범선에 상품을 싣고 남동 계절풍을 받아 말라카해협에서 교역을 하다 북서풍으로 바람이 바뀌면 해협 산물을 싣고 귀향하는 방식으로 교역했다. 이러한 교역 패턴에서 주요 항구에 디아스포라 화인 사회가 형성됐다. 대부분은 계절풍이 바뀌면 돌아가지만, 누군가는 현지에 남아야 했다. 무역은 물품을 실어 나른다고 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중국산 물품을 현지에 팔아야 하고, 중국으로 가져갈 현지의 산물을 수집하는 네트워크가 갖춰져야 가능했다. 현지에 머물며 교역망을 구축한 이들을 중심으로 동남아 도처에 ‘교역하는 디아스포라’의 화인사회가 생겼다.
타향에 머물던 자들은 해외 이주를 금지하는 해금조례海禁條例 탓에 귀향하고 싶어도 못하는 처지였기에 현지에 정착해 페라나칸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Tan, 2003: 40).[*청조는 옹정 · 건륭雍正 · 乾隆 연간(1722~1795) 해금조례를 발령하고 해외 도항을 금지했다. 가경 · 도광嘉靖 · 道光 연간(1796~1850)에 해금조례 자체는 존속됐지만 유명무실해졌다. 청조가 조례를 존속시킨 채로 해외 도항을 단속하지 않은 시점과 페낭의 영국 식민지. 건설 시기가 맞물린다는 점이 흥미롭다. 페낭 건설 초기부터 복건성과 광동성 중국인들이 대거 페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정책 변화를 반영한다. 도항을 금지한 해금조례가 폐지되고 이주자의 귀향이 합법화된 것은 1894년의 일이다.] 해외 이주가 불법으로 규정된 탓에 귀국도 불법이었던 것이다. 이다스포라 화인 가운데 일부는 현지 여성과 혼인해 가정을 꾸렸고, 그 후예들이 페라나칸 화인사회를 형성했다. 말라카해협의 페라나칸을 15세기 복건 상인들의 후예라고 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중국인 디아스포라 무역상들은 동남아시아의 항구 도시를 중계무역항entrepot으로 변모시켰다(Loh, 2009: 3). 중계무역항은 지역의 산물이 모이고, 외부의 상품과 산물이 지역으로 분배되는 중심을 가리킨다. 이는 곧 교역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사람의 총체로서의 중심이며, 상품 생산자와 해상 운송업자, 도매상인과 소매상인, 전대업자와 지역 권력자를 포괄했다. 이러한 교역망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중개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은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가운데에서도 페라나칸의 몫이었다. 페라나칸의 특정 지방 디아스포라 화인사회의 일원이면서도 지역의 교역 네트워크를 따라 유동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인도인 무슬림과 힌두교도 상인들이 그러했듯이 페라나칸 화인 디아스포라도 말레이인은 물론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 상인과도 거래를 성사시킬 만큼 여러 언어를 구사했다. 말레이반도 북부의 술탄국 커다의 페라나칸 화인은 말레이 지배엘리트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술탄을 위해 세금을 징수했고, 지역 시장에서 현지 산물과 외래의 잡화를 교환하는 상인이기도 했다(Khor, 2006: 60). 이렇게 수집된 해협 산물들은 ��구 도시의 시장으로 모이고, 거기서 중국인 해운 업자에게 팔려나갔다.
말라카에서 여러 방언 집단으로 이뤄진 페라나칸 화인 사회는 공통어lingua franca로 ‘바바 말레이어Baba Malay’를 사용했다. 말레이어를 뼈대로 복건 방언이 대폭 차용된 것으로, 중국인과 말레이인의 교역에 쓰인다고 해서 ‘시장 말레이어bazaar Malay’ 혹은 말레이어와 복건 방언의 혼성어라는 의미에서 ’피진 말레이어pidgin Malay’라고도 한다. 출신 지역에 따라 방언이 다른 중국인은 바바 말레이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말라카해협의 페라나칸 화인은 오랜 세월 여러 세대가 이어지면서 현지의 말레이인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말레이 세계와 문화적으로 동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말레이인의 관습인 빈랑 씹기를 하고, 말레이의 향료를 많이 넣은 이른바 ‘뇨냐 음식’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페라나칸 화인은 전래의 조상 제사를 깍듯하게 모셨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지도 않았다. 말라카의 바바, 즉 페라나칸 화인 남성의 차림새는 중국 남부의 중국인과 다를 바 없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외부를 걸치고, 변발한 머리에는 두개모頭蓋帽를 썼다.
…
해협 일대에서 활동하던 페라나칸과 구분해, 중국에서 태어나 곧바로 페낭으로 이주한 중국인을 ‘신케’라 했다. 신케의 급속한 유입으로 페낭의 화인사회는 이전의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사회와도 질적으로 달라졌다. 이로써 페라나칸 화인은 신케와 대비되는 ‘현지 태생‘의 화인을 가리키는 화인사회 내부의 범주가 되었다(Tan, 1997: 105). 아울러 교역하는 디아스포라 화인사회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말레이 문화를 수용해온 문화적 수렴화의 흐름도 바꾸었다. 이주자 인구 변동으로 페낭의 화인사회에서 기존의 바바/페라나칸 전통은 약화되고 다수를 차지하는 신케의 중국 문화가 강세를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Khor, 2006: 60).
(86~91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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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여자 스케이팅 대회 개막식에서는 자신이 실제로 사랑스러운 "얼음 공주"라고 주장하는 50대 남성, 트젠 Minna-Maaria Aktikainen의 단독 공연이 펼쳐졌는데. 그리고 스케이트를 저렇게 못타는데 어떻게 개막식 단독공연을 맡게된건지 위원회 비리가 의심될 지경이네? 개막식을 본인이 여자라고 주장하는데 사용하려고 망쳐놓다니. 50대 중년남성이 스스로 사랑스런 얼음공주라고 칭하기위한 무대가 아니에요. 폭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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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여약사에게 남성 영양제 상담받은 4~50대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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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여약사에게 남성 영양제 상담받은 4~50대 남성이 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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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50대 남성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란다.
이해가 된다.
얼마나 고단하고 지치고 외로웠겠나.
에혀.. 하긴 뭐 나도.. 맘에 걸리는 게 많아 죽지 못해 산다.
이걸 살아간다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슬프다.
20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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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남성을 위한 최고의 선물| 피로 회복에 탁월한 남성용 건강기능식품 추천 | 건강, 피로 해소, 선물, 50대 남성
50대 남성을 위한 최고의 선물| 피로 회복에 탁월한 남성용 건강기능식품 추천 | 건강, 피로 해소, 선물, 50대 남성 소중한 50대 남성을 위한 특별한 선물을 찾고 계신가요? 건강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중요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50대는 체력 저하와 피로를 쉽게 느끼는 시기입니다. 피로 회복에 도움을 주는 남성용 건강기능식품은 50대 남성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남성 건강에 필요한 주요 성분은 홍삼, 녹용, 아연, 비타민 등이 있습니다. 홍삼은 면역력 증진과 피로 회복에 효과적이며, 녹용은 기력 회복과 원기 증진에 도움을 줍니다. 또한 아연은 남성 호르몬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타민은 신체 기능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50대 남성을 위한 피로 회복에 효과적인 건강기능식품을 선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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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쏘걸의 이번 신곡 ‘Lighter’는 레트로 R&B 감성을 담아낸 곡으로, 원더우먼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멜로디와 중독성 있는 후렴구가 특징이다. AV쏘걸 바로가기 링크: https://bit.ly/45a1MDq 최근 3년간 부산지역의 자살자 수가 해마다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인재근 의원이 23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이후 2016년까지 3년 동안 총 6만9천38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운데, 이 기간 중 여성(1만410명)이 남성(6,788명)보다 무려 2배 이상 많았다. 특히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많은 40~50대 연령층에서 타 지역에 비해 여성이 더 많았다. 지역별로는 해운대구 인구 10만 명당 252.8명, 사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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