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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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yamuya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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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 타자연습
할 생각이 아예 없었는데 브라우저를 열다가 잘못 눌러서 한번 해 보자 하고 해 봤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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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생각보다 잘 나와서 다행. 기특하다 나 자신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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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ody-lines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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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odyline 멜로디라인 || 한글 안 나옴 hangul not working (Lyric video)
Spotify https://open.spotify.com/album/5iM5G8P8LPoMfQ8YWAjy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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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라인 Melodyline - 한글 안나옴 hangul not working
     Composed by Love and Live Who      Arranged by Love and Live Who      Lyrics by Love and Live Who
     Love and Live Who - Vocal, Chorus Vocal, Acoustic Guitar, Synthesizer, Percussion
yesterday i was going down um... yesterday yesterday i was going fly um.. yesterday
Shining Flaming even alive high um nothing is a wasted think, a waiting my heart 갑자기 한글이 나와서 너무 좋아 you never find um yesterday
yesterday and i'm going by um.. yesterday um but a yesterday
Shining Flaming even alive high nothing is a wasted think, a waiting my heart 갑자기 한글이 나와서 너무 좋아 wasted never fine
Shining going even alive high nothing is a wasted think, a wasted my eye 갑자기 한글이 나와서 너무 좋아 wasted never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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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keopi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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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프면 자전거를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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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을 두 발 아래 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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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aqu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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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20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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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반도의 술탄국 페락은 페낭 화인의 엘도라도가 되기 전까만 해도 동남아의 일반적인 특성과 전통적인 말레이 정치구조를 지닌 곳이었다. 말레이어로 ‘페락perak’은 은silver를 뜻한다. 예로부터 주석의 산지였던 것이다. 적도권에 해당하는 페락은 여느 동남아와 마찬가지로 열대와 밀림이란 환경 요인과 인력이 가장 필요하고 가치 있는 생산자원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Trocki, 2008: 336). 페락의 도읍 역시 해안과 강의 하구에 있었다는 점에서 말레이 세계의 전형적인 양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페락의 지배 구도는 술탄이 직할하는 남부의 페락강 하류 지역, 귀족 수장raja이 관할하는 디스트릭트district, 그리고 지역 토호의 관할지인 향촌mukim으로 구성됐다. 전통적으로 말레이왕국은 영역이 아니라 신민을 중심으로 한 까닭에 국경은 분명하지 않았고, 인구가 희박한 강의 상류는 사실상 방치됐다. 술탄은 ‘왕국의 통일성을 상징’하고 실질적으로는 귀족 수장들이 ‘주요 강의 계곡과 그곳의 신민을 통치’했다(Gullick, 1965: 2~3).
주석 러시가 페락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다. 라룻 지역은 페락의 북부 라룻강 유역으로 페락 술탄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페락의 주석 무역을 독점했던 네덜란드는 라룻 지역을 밀수업자와 도박꾼들이 득실대는 골치 아픈 곳으로 간주했다(Andaya, 1975: 234). 페낭 건설 초기부터 주석은 주요 수입품이었다. 페락과 슬랑오르에서 생산된 주석이 네덜란드의 독점 무역보다 값을 더 쳐주는 페낭으로 밀수출됐던 것이다. 그런 라룻 지역에 페낭의 화인 자본과 화인 노동자가 몰려들었다. 라룻 지역의 주석 러시는 페낭 화인사회에는 경제적 엘도라도였지만, 페락의 술탄국에는 왕국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은 정치적 사건이었다. 페낭 화인사회의 라룻 주석 러시는 1860년대 후반 페락의 술탄 승계 분쟁과 맞물리면서 내전으로 치달았고, 이는 1874년 팡코르조약으로 마무리되면서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 시발점이 됐다.
라룻의 주석 러시는 페낭의 복방 비밀결사 건덕당과 라룻의 객가 비밀결사 해산회의 동맹이 주도했음을 앞서 살폈다. 페낭 건덕당과 라룻 해산회의 동맹은 광산 개발 초기부터 이어졌고, 비밀결사의 영수들은 라룻의 지역 수장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주석 개발 붐이 일면서 페락의 술탄은 라룻의 주석광을 발견한 체 롱 자파르를 라룻 지역을 총괄하는 먼트리Mentri로 임명했다. 먼트리는 라룻 지역의 징세권과 징세청부 전매권 판매, 토지 불하 등의 전권을 가졌다. 페락의 오지가 주석 붐으로 흥성하면서 변방인 라룻의 먼트리도 정치적 위상이 덩달아 커졌다. 1862년 롱 자파르의 아들 체 응아 이브라힘Che Noah Ibrahim이 먼트리를 승계했다. 이브라힘도 해산회를 지지했다.
라룻의 먼트리가 대를 이어 해산회의 편을 드는 것을 의흥회는 못마땅해했다. 이권이 걸렸기 때문이다. 주석광산 주도권을 둘러싸고 라룻 화인사회를 양분한 비밀결사 해산회와 의흥회가 유혈 분쟁을 벌였다. 이를 ‘라룻전쟁Larut War’이라고 부른다. 1861년과 1865년의 2차례 라룻전쟁에서 라룻의 먼트리와 페낭 건덕당의 지원을 받은 청켕퀴의 해산회가 승리했다. 의흥회는 근거지였던 클리안 바루의 주석광산에서 밀려났다. 두 차례 분쟁은 말레이반도에서 ’중국인과의 교역‘을 둘러싼 화인사회의 내전이란 성격이 다분했다. 하지만 1872년~73년의 3차 라룻전쟁은 양상이 달랐다. 영국의 식민지 전략, 페락 술탄 승계의 권력 투쟁, 싱가포르 화인 거상의 이해 등이 복잡하게 맞물렸던 것이다.
1872년 2월 페낭에서 비밀결사의 행동대원과 무기를 들여와 전력을 보강한 의흥회는 3월에 해산회를 공격해 클리안 바루를 되찾고 해산회의 근거지인 클리안 파우마저 수중에 넣었다. 해산회가 패하자 급해진 것은 자금 지원을 해준 페낭의 복방 거상과 건덕당이었다. 자칫 거책 투자가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 페낭 건덕당이 전명에 나서 역공을 펼쳤다. 페낭 쿠콩시는 1872년 10월 정크선으로 무장 행동대원 100명을 비롯해 200정의 머스켓 소총과 총검, 8정의 경포輕砲, 400정의 창을 라룻으로 보냈다. 건덕당 지도부도 비밀리에 머스켓 소총 2,000정, 화약 1만 파운드, 무장 행동대원 1,000명을 보내 해산회를 도왔다(Blythe, 1969: 178).
페낭의 건덕당은 해산회에 병역을 지원하는 한편, 페낭의 영국 식민 당국을 움직였다. 1872년 12월 건덕당 영수 쿠톈테익은 자신 소유의 증기선 ‘페어 말라카’호가 교역 물품을 운송하던 중 라룻강 하구 해안을 봉쇄하고 있던 의흥회 소속 정크선의 공격으로 불에 탔다며 식민 당국에 고발했다. 쿠톈테익은 공격을 당한 증기선이 영국 선적이고 선장도 영국인이라며, 영국의 개입을 촉구한 것이다. 이는 의흥회의 라룻강 하루 봉쇄를 깨뜨리기 위한 건덕당의 술수였다(Wong, 2007: 89). 결국 영국 식민 당국은 건덕당-해산회 동맹을 편들어 라룻강에 영국 해군을 파견했고, 의흥회의 하구 봉쇄가 풀리면서 1873년 후반 전세가 역전됐다.
하지만 해산회와 의흥회의 분쟁 막후에는 페락의 술탄 승계를 둘러싼 왕족과 지역 수장들의 이해가 얽혀 있었다. 1871년 페락의 24대 술탄이 사망하면서 술탄 승계 분쟁이 벌어졌다. 관계를 따른다면 태자Raja Munda가 승계해야 마땅하지만, 주석 러시로 영��력이 커진 라룻의 먼트리인 이브라힘이 지지한 이스마일이 술탄에 올랐다. 이에 타자 압둘라가 승계권을 주장하면서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화인 방파 갈등과 말레이 권력투쟁이 결합된 3차 라룻전쟁에는 또 다른 세력이 가세했다. 페락의 주석광산 개발에서 소외됐던 싱가포르 화인 거상들이 끼어든 것이다. 1870년대 양철과 통조림 산업이 붐을 이루면서 미국에서 주석 수요가 폭증했다. 깡통을 만들기 위해 미국은 영국 웨일즈 산 주석의 75퍼센트를 수입해갈 정도였다. 1872년 국제 주석 가격은 헌드레드웨이트(50.802킬로그램) 당 7파운드 스털링으로 1823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Cowan, 1981: 141). 이런 상황에서 수세에 몰린 태자 압둘라는 싱가포르의 거상 탄킴칭Tan Kim Ching陳金鐘에게 접근했다.[*탄킴칭은(1829~1892)은 중국 복건 출신으로 탄톡셍 병원을 설립한 싱가포르의 카피탄 치나 탄톡셍Tan Tock Seng陳篤生(1798~1850)의 아들이며, 19세 후반 싱가포르의 아편팜의 실력자였다. 탄킴칭은 비밀결사의 영수로 알려졌다.] 압둘라는 자신을 페락 술탄에 오르게 해주면, 탄킴칭에게 페락 남부의 징세청부권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페낭이 독점한 주석 개발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긴 탄킴칭은 압둘라와 손잡았다. 탄킴칭은 압둘라에게 술탄이 되면 페락에 정책 자문을 하는 영국인 주재관Resident을 받아들이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런던과 해협식민지 정부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속셈이었다.
탄킴칭에 이어 또 다른 변수가 추가됐다. 1873년 11월 강경 제국주의자인 앤드루 클라크Andrew Clarke가 해협식민지 2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클라크는 싱가포르로 향하는 선상에서 영국 정부로부터 말레이 반도의 내정에 간섭해도 좋다는 공식 지침을 받은 상태였다. 1786년 페낭의 이상한 점거 때부터 영국 정부가 견지해온 내정불간섭 정책이 바뀐 것이다. 이로써 ‘페낭 건덕당-라룻 해산회-페락 술탄 이스마일-라룻 먼트리 이브라힘의 동맹’ 대 ‘페락 태자 압둘라-라룻 의흥회-싱가포르 거상 탄킴칭의 동맹’이란 대결 구도로 재편된 라룻 전쟁의 결정권을 영국 해협식민지 총독이 쥐게 됐다.
클라크 총독은 부임하자마자 라룻전쟁에 개입했다. 분쟁 종식을 페락 술탄 승계 및 영국인 주재관제와 연계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클라크 총독은 의흥회 영수 친아얌을 설득하기 위해 윌리엄 피커링을 페낭으로 파견하고, 프랭크 스웨트넘을 라룻으로 보내 해산회 영수 청켕퀴를 맡도록 했다. 나중에 초대 화인보호관이 된 피커링과 해협식민지 총독이 된 스웨트넘은 영국의 말라야 지배의 분기점이 된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클라크 총독은 라룻전쟁 당사자들을 팡코르섬으로 불러들였다. 팡코르섬으로 향하는 배에서 중국 광동어와 복건어에 능통한 피커링은 친아얌, 청켕퀴와 대화를 나누면서 페락 주석광산의 화인들이 오랜 분쟁에 지쳤고, 영국의 개입을 반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Jackson, 1965: 21~23). 이전에는 싸우고 나면 해산회와 의흥회가 서로 중재하고 휴전을 했지만, 이번에는 술탄 승계 문제가 얽히면서 화인사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했던 것이다.
마침내 1874년 1월 6일 태자 압둘라를 페락 술탄으로 인정하고, 페락은 영국의 주재관을 받아들이며, 라룻 지역은 해산회와 의흥회가 분할해 개발하기로 최종 합의가 이뤄졌다. 1월 20일 영국과 페락의 술탄 압둘라가 서명했다. 이것이 1786년 페낭 점령 이래 페낭, 싱가포르, 말라카를 거점 지배해온 영국이 말레이반도로 식민지배를 확장하는 신호탄이 된 팡코르조약Pangkor Treaty이다. 팡코르조약은 유럽 열강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확보 경쟁에 나서는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세계사의 분기점에 페낭의 화인사회와 주석 러시가 관련되었다는 사실과 페낭 화인의 자본과 노동의 이동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이었다는 점은 기억할 만 하다.
청켕퀴와 친아얌은 라룻 지역을 분할해 개발하기로 별도의 약정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술탄 이스마일은 폐위되고, 응아 이브라힘도 라룻의 먼트리 직위를 잃었다. 1861년부터 12년 넘게 이어진 라룻전쟁은 끝났고, 영국 주재관이 상주하게 되면서 페락은 영국의 ‘보호령’이 됐다. 라룻의 주석광산은 클리안 파우가 타이핑으로, 클리안 바루가 카문팅으로 각각 개명되어 조업이 재개됐다. 청켕퀴와 친아얌은 1877년 타이핑과 카문팅의 카피탄 치나에 각각 임명됐다. 변방이었던 타이핑은 페락의 수도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팡코르조약 이후 페낭과 페락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락이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페낭의 화인사회의 영향력은 한층 커졌다. 페락의 영국 주재관 제도도 20세기 초반까지는 페낭의 해골정부와 다를 바 없었다. 페락에서 영국의 이익은 페낭의 화인 거상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과 직결됐다. 페락 주석광산 개발의 자본과 노동과 교역에 페낭 화인사회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 페낭의 주석 교역은 1870년에서 1910년까지 싱가포르를 압도했다. 이는 페낭의 거상들이 해협 북부의 ‘주석 벨트’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싱가포르의 주석 수입량이 페낭에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수출량에서는 근접한 것은 최대 주석 생산지인 페락과 푸켓에서 생산된 주석을 페낭이 수입해 싱가포르로 재수출했기 때문이다.
1880년대 후반 주석광산 개발의 중심은 페락 남부 페락강의 킨타계곡으로 옮겨졌다. 1911년 킨타 지역의 중국인 인구는 13만 3,436명으로 라룻 지역(2만 9,247명)의 4배로 늘어났다. 20여 년 만에 킨타 지역도 상류 오지의 밀림에서 상전벽해된 것이다. 이러한 제2차 주석 러시의 주체도 페낭 화인사회였다. 비록 라룻의 1차 주석 러시와 달리 페낭 화인의 직접 이주는 줄었고, 화인 비밀결사의 영향력이 예전과 달랐지만, 페낭 화인사회의 기여와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Khoo, 2009a,: 60). 라룻 지역의 타이핑과 카문틴이 그러했듯, 킨타 지역의 이포IPoh, 고펑Gopeng, 캄파르Kampar 등 신흥 광산도시를 건설한 토카이 대부분이 페낭 출신이거나 페낭 화인사회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20세기 초 페락의 경제 성장세는 페낭을 앞질렀다.[*1907~8년 해협식민지 정부의 재정 적자로 페낭 당국은 페락을 포함한 말레이국연방에서 60만 달러를 차입했다.] 하지만 페락의 화인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페낭 화인사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페락 화인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광동 출신과 객가 집단도 페낭 화인권의 공통어인 ‘페낭 혹키엔’으로 소통했다. 페락의 화인 부호들은 페낭에 저택을 지었다. 페낭 태생의 페라나칸은 더 큰 기회를 찾아 페락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후술하겠지만, 19세기 후반 이들은 스스로 ‘페낭 디아스포라Penang Diaspora’라고 했다. 페낭을 고향으로 여기는 페낭 화인의 사회가 말레이반도에 형성됐다는 의미다. 이렇게 주석의 시대에 페낭 화인사회는 말레이 세계로 한걸음 더 들어가세 됐다.
(213~220쪽)
페낭 화인사회가 푸켓의 주석광산 개발에 나선 것은 페락의 라룻 지역 진출보다 앞섰다. 16세기 이래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주석 벨트’에 속하는 푸켓의 주석 교역에 관여했다.. 태국에서 가장 큰 섬으로 말라카해협 북부 초입에 위치한 푸켓은 정크 실론Junk Ceylon, 우중 살랑Ujung Sayang, 살랑 포인트Salang Point, 탈랑Thalang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주석 산지이자 교역항이었다.
프랜시스 라이트의 친구이자 페낭 건설 주역인 영국인 제임스 스콧이 1773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푸켓의 주석은 태국인이 채굴하고 중국인이 제련했다. 중국인 제련업자는 태국인이 캔 주석 원광을 제련해 중국인 상인에게 넘기는 교역업자이자, 푸켓의 수장에게 세금을 대납하는 징세청부업자였던 셈이다. 영국이 페낭을 점거하지 2년 전인 1784년 푸켓의 인구는 1만 2,000명을 헤아렸지만, 1809~10년 버마가 태국 남부를 침략하면서 푸켓섬 전역이 파괴되고 수장과 주민 모두 인근 내륙 팡응아로 피난했다. 영국과 태국 사이에 버니조약Burney Treaty이 체결된 1826년에야 태국 항구와 해협식민지의 직접 교역이 가능해졌다. 이를 계기로 페낭의 화인들이 태국 남부의 주석광산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푸켓의 재건이 시작됐다. 1855년 징세와 아편 및 도박장을 제외한 모든 상업 부문의 국가 독점을 해제한 영국-태국의 보링조약Bowring Treaty으로 자유교역이 가능해지면서 페낭 화인사회의 푸켓 진출은 한층 확대됐다.
1820년대 태국 남부 주석광산 개발의 주역은 라농Ranong의 건설자 커수챵許泗漳과 푸켓의 건설자 탄가익���陳玉淡이었다. 커수챵이 라농을 근거로 한 태국 왕실의 조신朝臣이자 사업가였다면, 탄가익탐은 푸켓의 통카Tongkah에서 주석광산을 개척한 사업가이자 화인사회의 지도자였다. 두 인물은 활동 지역과 성취 내용이 달랐지만, 모두 복건 출신이며 반청 비밀결사인 소도회小刀會 활동을 하다 망명한 전력을 공유했다(Songprasert, 1986: Khoo S. N. 2009).[*소도회는 1850년대 결성된 정치적 결사로 복건, 광동 일대의 천지회와 마찬가지로 반청운동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태평천국과 의화단에도 소도회가 언급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인은 ‘페낭 화인권’의 관점에서 페낭 화인사회의 일원이었다.
커수챵은 1816년 고향을 떠나 수마트라 서안의 영국 식민지 번쿨루Benkulu(Bencoolen)에서 사업 기반을 다졌다. 1824년 영국-네덜란드의 런던조약으로 영국이 번쿨루와 네덜란드의 말라카를 맞바꾸면서 커수챵은 페낭으로 옮겼고, 다시 태국 남부의 라농으로 진출했다. 커수챵의 라농 진출을 페낭 카피탄 치나였던 코라이환의 딸이 주선했음은 앞서 보았다. 1830년대 밀림에 가까웠던 라농은 커수챵의 진출 이후 크게 바뀌었다. 주석광산을 열고 주석제련소를 운영하는 한편, 페낭과 주석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한 그는 1842년 라농의 주석광산 개발과 교역 및 징세에 관한 독점권을 확보했다. 사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행정가의 능력을 높이 산 태국 왕실은 커수챵으르 1854년 라농의 초대 부윤府尹에 임명했다.[*19세기 태국의 지방 행정 체제와 구역 및 직제에 관해서는 혼선이 있다. 영어로는 라농의 행정구역을 ‘province’라 하고, 그 수장을 ’governor’로 표기한다. 라농의 경우 몇 개의 디스트릭트 혹은 현縣을 관할하는 지방 행정구역으로, 현재의 도道나 성省보다는 작고, 중국 청대나 조선 후기의 부府와 가깝다고 여겨진다. 이의 수장을 지방 행정관이란 의미로 태수太守로 옮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본디 중국 고대 군현제 시대 군郡은 군사적 성격이 강할 뿐더러 태수가 사법과 재정 권한까지 장악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방콕 왕실에서 일종의 면허를 얻어 지방의 징세를 담당하던 것이 주 업무였던 19세기 태국 지방관의 번역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이 글에서는 부윤府尹으로 옮긴다.] 1862년에 그의 작위爵位는 3등작 프라Phra에서 2등작 프라야Phraya로 승격했다(Cushman, 1986: 64).[태국 왕실은 중국 도개의 5등작과 유사한 귀족 작위제를 시행했는데, 아로로부터 쿤Khun-루앙Luang-프라Phra-프라야Phraya-차오프라야Chao Phraya는 각각 남작-자작-백작-후작-공작에 준한다. 관료의 관직과 작위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라농부윤의 작위는 루앙일 수도 프라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라마 5, 6세 시기 방콕 왕실은 부유한 화인에게 명예 작위를 하사하기도 했다.]
커수챵과 태국인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도 태국 남부 연안의 프라부리, 랑수안 크라부리, 트랑 등의 부윤에 임명되면서 커 가문은 방콕 왕실의 조신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커수챵의 아들들은 페낭 유력 화인의 뇨냐를 아내로 맞거나 태국 지방 명문가와 혼맥을 맺었다. 아울러 커 가문은 사업가로서 ‘페낭 화인권’ 전역으로 경제적 영향력도 동시에 키웠다. 커 가문은 태국 남부에서 주석광산과 제련소를 운영하며 태국 정부에서 주석의 징세청부권을 확보하는 등 주석 개발을 주도했다.
이러한 커 가문이 신경회로와 같은 교역 회로를 총괄한 것에 페낭의 코에관콩시Koe Guan Kongsi高源公司였다. 코에관은 해협 북부 지역의 증기선 해운회사이자, 태국의 주석을 페낭으로 운송하고 광산에 필요한 쿨리와 식량 및 생필품을 태국으로 수입하는 무역회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태국 남부 연안에서 정치적 ·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던 커 가문이 푸켓으로 진출한 것은 커수챵의 아들 커심비가 몬톤 푸켓의 최고 행정관에 임명된 1900년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 푸켓의 경제권은 탄가익탐을 필두로 한 탄 씨들의 수중에 있었다.
탄가익탐은 1820년대 초 푸켓의 주석광산 개발을 주도했다(王重陽, 1965: 29~30). 그는 당시 푸켓 주석광산의 중심이었던 카투에서 두부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두부 장사가 될 정도로 당시 중국인 광부들의 시장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두부 제조에서 광산촌의 부식품 공급으로 사업을 확장한 탄가익탐은 푸켓부윤의 눈에 들어 푸켓의 카피탄 치나에 임명되었다. 부윤의 재정 지원을 받아 탄은 1828년 주석 개발 회사인 훕힌콩시Hup Hin Kongsi合興公司를 설립했다. 푸켓 통카항의 주석광산 개발은 훕힌콩시의 설립 이후 본격화했다. 훕힌콩시는 페낭으로 수출되는 주석세의 징수 대행사이자, 통카 주석광산 쿨리의 아편과 생필품을 독점 판매하는 트럭 시스템의 일부였다(Khoo, 2009b: 86). 훕힌콩시는 푸켓의 ‘거대한 광산촌 매점’이었던 셈이다. 어촌에 불과했던 푸켓의 통카항은 태국 최대의 광산촌으로 바뀌었고, 푸켓부윤의 작위도 프라야Phraya Witchitsongkhram로 승격됐다. 1860년대 탄가익탐의 주석광산은 320헥타르에 달했다(Wong, 2007: 25).
탄은 애초 푸켓부윤의 재정 지원으로 통카 주석광산 개발에 착수했지만, 광산에 필요한 자본과 인력과 물자는 페낭에서 조달했다. 특히 페낭 탄콩시 영천당 창건을 주도한 탄가익탐은 초기부터 페낭의 종친들을 푸켓으로 끌어들였다. 광부와 점원은 페낭과 연관이 있는 인물을 고용했다. 푸켓은 페락의 라룻과 달리 광부도 대부분 복건 출신이었다. 188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태국 남부 연안 지역에서 중국인과 태국인의 비율이 2대 1인데 반해, 푸켓에선 중국인 4만 5,000명에 태국인은 1,000명에 불과했다(Khoo, 2009b: 92). 19세기 푸켓은 복건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의 섬이었다. 페낭 복건 5대 성씨의 비밀결사인 건덕당의 푸켓지부가 생겨났고, 탄가익탐의 아들 탄위기Tan Wee Ghee陳威儀가 푸켓 건덕당의 ‘토아코大哥’에 올랐다.
태국의 지방 행정이 페낭의 해골정부와 다를 바 없었던 시��� 푸켓의 탄 가문은 페낭의 탄콩시와 건덕당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사업을 키웠다. 19세기 후반 푸켓의 거상이자 푸켓의 또 다른 비밀결사 화승의 ‘토아코’였던 탄킴자오Tan Kim Jao陳錦灶는 탄가익탐 밑에서 일을 배웠다. 탄위기와 탄킴자오는 친구이자 동업자였고, �� 동맹 비밀결사의 영수였다. 푸켓부윤의 정치적 지원을 받은 통카항 주석광산 거물 6인방 가운데 5인이 탄 씨였다. 이들 탄 씨는 푸켓부윤과 손잡과 19세기 후반 푸켓 전역이 아편 판매를 독점했다. 페낭-푸켓 교역에서 아편만큼 이문이 많은 품목은 없었다. 페낭이 아편 징세청부업자에게 태국 남부 연안의 주석광산 지역은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었고, 푸켓이 그중 최대였다(Songprasert, 1986: 62, 101, 123).
1880년대 푸켓의 주석 채굴량은 8만 4,000피쿨(약 5,000톤)로, 페락 라룻 지역의 생산량에 근접했다. 페낭의 복건 5대 성씨가 공동 투자한 무역회사 칩혹콩시Chip Hock Kongsi는 1890년대 말까지 통카 · 트랑 · 타보이의 광산업자에게 12만 5,000달러, 푸켓 주석광산 개발에 9만 6,000달러를 각각 투자했다. 태국 남부 주석광산 개발에 페낭의 화인자본이 대규모로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푸켓의 화인사회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76년 3월초, 푸켓에서 주석 광부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폭도로 변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태국인 선원을 살해한 혐의로 푸켓의 화인 비밀결사 회원 2명이 구속되자, 건덕당과 화승 소속 광부 300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 것이다. 당국은 즉각 두 피의자를 석방했지만, 2,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가 푸켓부윤의 청사를 방화하고 상점을 약탈하며 푸켓부윤을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시위가 벌어지기 한 달 전 푸켓부윤은 중국인 주석광산에 자금 대출을 동결하고, 중국인의 인두세를 6배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방콕 중앙정부에 진 부채부터 갚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푸켓부윤이 의흥회 소속 광산은 대출을 동결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인두세 인상 발표까지 겹치면서 푸켓 폭동이 벌어진 것이다.
도시가 마비되자 방콕 중앙정부는 푸켓에 특별판무관을 파견했다. 그해 3월 20일 건덕당 · 화승의 지도자와 협상을 벌인 특별판무관은 폭동의 책임을 묻지 않고 주석 광부의 처우를 개선하는 한편, 푸켓부윤이 공표한 화인 주석광산의 대출 동결과 인두세 인상안을 철회했다. 게다가 푸켓 건덕당 영수 탄위기는 주석 수출관세 징수를 포함해 아편 · 도박장 · 술 · 전당포의 징세청부권도 확보했다. 푸켓부윤과 건덕당 소속 광산 토카이의 대결에서 방콕 중앙정부는 화인 토카이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협상의 결과로 원인을 되짚어본다면, 푸켓 폭동은 푸켓부윤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건덕당의 광산주들이 광부를 사주해 태국 중앙정부를 끌어들이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방콕 왕실이 화인의 손을 들어준 결정은 화인사회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전략적이었다(Wong, 2007: 90~93). 페낭과 푸켓의 건덕당이 주도하는 주석광산 산업을 현상 유지하는 것이 1874년 팡코르조약 이후 제국주의 확장에 가속도를 내는 영국의 태국 진출을 견제하는 데 유리하다고 당시 방콕 왕실은 판단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방콕 왕실의 영국 견제 전략에서 ‘페낭 화인권’은 어떻게 평가받았던 것일까? 푸켓을 비롯한 태국 남부 연안의 주석광산 개발과 요역을 영국 식민지인 페낭의 화인사회가 주도한다는 점은 방콕 왕실도 모를 수 없었다. 의문의 핵심은 영국 식민지 페낭에서 영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계 영국인Chinese British’이 푸켓의 산업과 교역을 장악한 현실과 영국의 태국 진출 견제라는 태국 왕실의 전략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태국 왕실은 화인 디아스포라를 동화시켜온 오랜 역사적 경험을 고려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주목할 대목은 당시 태국 정부가 페낭과 푸켓의 화인사회를 과연 영국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간주했을까라는 점이다. 오히려 태국 왕실은 ’페낭 화인권‘을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 판단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페낭과 푸켓의 연계는 에릭 홉스봄이 ’제국의 시대‘의 분기로 잡은 1870년대의 해협 북부 지역에서 페낭 화인권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1880년대 후반부터 영국이 페낭 화인권을 왜 포획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겠다.
푸켓 폭동 3년 뒤인 1879년 6월 의흥회 소속 화인 417명이 건덕당 건물에서 숨지는 학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푸켓의 광방 비밀결사 의흥회는 페락의 라룻에서처럼 급속히 쇠퇴했다.[*학살 사건에 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건덕당에서는 의흥회의 급습 정보를 입수하고, 통카의 건덕당 건물에 지뢰와 다이너마이트로 부비트랩을 설치했는데, 이를 모르고 습격한 의흥회 회원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의흥회에서는 비밀 결사 간에 분쟁이 있은 뒤 건덕당이 휴전 기념으로 의흥회 회원을 초대해 만찬을 열어 술에 취하게 한 뒤 건물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떼죽음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Khoo(2009b: 88) 참조] 이후 푸켓의 화인사회는 1897년 방콕 왕실이 화인 비밀결사를 금지하기까지 복방의 건덕당이 독주하는 가운데 방파 경쟁에서 방파 협력으로 새로운 질서를 모색했다.
(221~228쪽)
말라카해협에 연한 수마트라 북동부의 메단Medan은 187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와 화인사회가 결합되어 건설된 식민지 도시이다. 오늘날의 메단은 19세기 술탄국 덜리Deli의 영지인 라부한 덜리Labuhan Deli, 메단Kampung Medan, 항구 벌라완Belawan 등으로 이뤄졌다. 18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촌락Kampung에 불과하던 메단은 20세기 초에 ‘수마트라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바뀌었다. 네덜란드가 수마트라를 직할 지배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담배농원을 개발했고, 여기에 중국인 이주자들이 몰려들면서 메단이 중심지로 괄목할 성장을 이룬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메단의 잎담배가 최고 평가를 받으면서 수마트라는 세계적인 댐배 원료생산지로 떠올랐다. 네덜란드인은 ‘돈의 땅het land dollar’,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이라며 메단의 성공을 치켜세웠다(Buiskool, 2009: 114).
메단의 담배농원 개발은 페락의 주석광산과 달리 네덜라드 동인도 정부와 유럽 ���본이 주도했다. 단지 인구가 조밀하지 않은 수마트라의 농원을 운영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중국인 이주노동력에 의지해야 했다.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은 영국의 자유방인에 견줘 훨씬 개입주의적이었다. 게다가 페낭과 달리 메단의 화인사회는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와 토착 술탄이란 이중의 정치권력과 상대해야 했다. 이런 메단 화인사회에서 광동성 개까지 집단의 신케인 총Tjong張 씨 3인방이 두각을 나타냈다. 특이하게 메단 화인사회는 복건 방언인 혹키엔을 공통어로 썼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의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다)보다 영국의 페낭과 훨씬 밀접했다.
신도시 메단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페낭의 상인과 해운업자들은 수마트라 북동안과 교역 네트워크를 갖췄다. 1790년 코라이환이 후추 묘목을 들여온 곳도 아체였다. 아체는 1820년대 세계 후추 공급의 절반을 생산했고, 인근의 랑캇Langkat, 덜리, 서르당Serdang 등 수마트라 동북부는 세계 최대 후추 생산지였다. 1849~50년 페낭은 아체와 덜리에서 4만 6,199피쿨의 후추를 수입했다. 이는 아체와 덜리가 수출한 전체 후추의 80퍼센트에 해당했다(Wong, 2007: 32~33). 수마트라 북부의 후추 교역을 페낭이 독점했다는 뜻이다. 1852년 아체와 덜리의 후추를 전담 운송하는 페낭의 무역선이 15척을 넘었다. 초기 후추 교역과 해운을 페낭의 아체 상인들이 주도했지만, 화인 무역 · 해운업자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페낭의 복건 출신 해운업자들은 1810년대부터 지역 해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페낭의 복건 출신 호토아Ho Toah何道는 1810년대에 이미 페낭-수마트라 항로에 정크선을 운항했고, 1820년대에는 태국 남부-페낭-수마트라 노선에 정크 무역선을 투입해 쌀과 제비집, 주석, 잡화, 아편 등을 실어 날랐다. 건덕당의 토아코가 되기 이전부터 굴지의 해운업자였던 쿠톈테익의 무역선은 1850년대부터 페낭-버마의 몰러먀잉-수마트라의 아체-태국의 타쿠아파Takuapa-싱가포르 항로를 운항했다. 페낭의 복건 출신 상인들은 자본을 출자해 1870년대까지 10여개의 대형 해운회사를 운영했는데, 1860년대에 설립된 해운회상 총모콩시Chong Moh & Co.崇茂公司는 증기선과 범선 12척을 소유하고 페낭, 싱가포르, 푸켓, 양곤, 덜리, 아체, 페락, 커다 등 말라카해협의 역내 해운은 물론 인도-중국의 장거리 해운도 담당했다(Wong, 2007: 20~23).
해운을 장악한 페낭의 복건 출신 화상들을 아체와 덜리에서 아체인과 바탁족이 재배하는 후추를 수입하면서 정치권력과 결탁한 일종의 계약 재배 방식을 썼다. 1850년대 후추 무역으로 세력이 커진 아체의 술탄은 지역 소영주의 후추 재배를 장려하던 참이었다(양승윤, 1944: 186). 화상이 후추 재배지의 술탄이나 수장과 동맹을 맺고 자금을 대주면, 이들이 현지 농민에게 영농자금으로 선대하고, 농민은 수확한 후추를 고정된 계약 가격으로 페낭 상인에게 넘기는 방식이었다. 페낭화상들은 피쿨당 2달러에 구입해 검은 후추는 4~6달러, 흰 후추는 7~14달러에 유럽 상인들에게 넘겨 2~7배의 이윤을 챙겼다. 입도선매立稻先賣의 ���취적 거래였다.
1860년대 메단에 담배농원이 개발되던 무렵 수마트라의 교역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1830년 자바 전역을 장악한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가 수마트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 세력 균형의 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 세력 균형의 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런던조약을 맺고 말라카 해협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분할한 바 있다. 런던조약의 허점은 수마트라의 지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수마트라가 정치적으로는 네덜란드의 세력권이었지만, 해협을 장악한 영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의 간섭 없이 수마트라와 교역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체는 영국의 보증 아래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런던조약 덕에 19세기 전반 영국 식민지 페낭이 네덜란드령 수마트라 북동부 연안에서 교역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낭의 화인 거상들이 주석광산 개발을 위해 말레이반도로 몰려가던 1840년대 후반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의 군대와 자본은 수마트라 중부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북상 명분은 독립 술탄국인 아체의 경제적 ·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다는 점과 미국이나 프랑스 등 열강이 아체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1860년대 후반 제국주의 경쟁이 본격화하자 영국도 네덜란드의 수마트라 북상을 용인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1871년 11월 헤이그에서 ‘수마트라조약Anglo-Dutch Treaty of Sumatra’을 맺고, 네덜란드의 수마트라 지배권을 확정했다. 이 조약에서도 아체의 독립은 확인됐는데도 네덜란드는 1873년 아체 침공을 단행해 수도 반다 아체를 점령했다. 이로써 아체의 술탄은 폐위됐지만, 아체 이슬람 지도자의 완강한 저항으로 1903년까지 30년에 걸친 ’아체전쟁‘이 이어졌다(최병욱, 2015: 329~330).
19세기 후반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가 수마트라 중부 이북으로 북상하며 곳곳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던 상황에서 메단의 광동 객가 ’총씨 3인방‘이 두각을 나타냈다. 총파츠Cheong Fatt Tze張弼士(1840~1916)와 총용혠Tjong Yong Hian張榕轩(1850~1911), 총아피Tjong A Fie張阿輝(1860~1921)가 그 3인이다.[*총파츠는 중국 광동성 대포大埔 태생으로, 본명은 장진훈張振勳이며 객가 방언의 알파벳 표기로 ‘Tjong Tjen Hsoen’이다. 필사는 그이 자이다. 총파츠의 이름 알파벳 표기는 문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페낭의 총파츠 맨션과 관련해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표기가 ’Cheng Fatt Tze’이다. 위에 언급한 본명이나, 중국에서 불리던 이름原名의 복건 방언 표기인 ‘Thio Thiau Siat張兆燮’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총용혠은 중국 광동성 매현梅縣에서 태어난 객가로, 본명은 張煜南Tjong Yu Nam이며, 용현榕轩은 자이다. 총용혠의 동생인 총아피의 본명은 張涄南Tjong Fung Nam이며, 자는 耀轩Yiauw Hian이다. 총아피張阿輝로 더 널리 알려졌다.] 총용혠과 총아피는 친형제이며, 총파츠는 두 형제의 후견인이었고, 두 형제는 총파츠의 재산 관리인이기도 했다. 이들 3인방이 각각 10년 터울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후술하겠지만 총파츠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남양 화인을 대표한 거상이며, 청조 말기 중국 정치와 경제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여기서는 메단과 관련된 총파츠의 초기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총파츠는 1859년 네덜란드 동인도의 바타비아로 이주했다. 화인 미곡상점 점원으로 일하다 상점주의 딸과 결혼했고, 장인의 지원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식료품을 판매는 그는 네덜란드 육군과 해군에 식량과 부식을 공급하면서 식민 당국의 신뢰를 얻었다. 이를 토대로 총파츠는 아편과 술의 징세청부권을 따내며 자바 서부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거부의 길을 내달렸다. 1860년대 농원과 도시 개발 붐이 일면서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중국인 쿨리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총파츠는 쿨리를 공급하고 관리하는 독점권도 수중에 넣었다(Godley, 1981: 10~11).
빠르게 부를 축적한 25세의 총파츠는 1865년 유홉콩시Yoo Hop Kongsi裕和公司를 설립하고, 벼와 코코넛농원도 운영했다. 187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 군대가 수마트라 중부 이북으로 세력권을 넓히며 북상하자 총파츠도 자바를 떠나 수마트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총파츠는 1873년 네덜란드의 아체 침공 때 군대의 식얄 보급을 독점했고, 아체의 아편팜도 확보했다. 덜리의 아편팜도 손에 넣은 총파츠는 1875년 바타비아의 카피탄 치나 리아기Lee Ah Ghee를 끌어들여 페낭에 무역회사 리왕콩시Li Wang Kongsi笠旺公司를 세웠다(Wringt, 1908: 777), 총파츠와 페낭의 공식적인 관계는 1875년부터 시작된 셈이다.
수마트라 이주는 총용혠이 총파츠보다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총파츠가 1880년 페낭 리왕콩시의 메단지부를 설립할 때 총용혠과 합자했는데, 당시 총용혠은 네덜란드 식민지 관리인 ‘라부한 덜리의 루테난트’였다(Chang, 1981:26).[*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화인사회의 지도자를 임명해 간접 통치한 ‘카피탄 치나’ 제도를 차용하면서, 정부의 공식 관직으로 제도화했다. 군대 계급과 같이 카피테인Kapitein(대위) 위에 마요르Majoor(소령)와 아래로 루테난트Lieutenant(중위)의 등급을 뒀다. 총용혠은 당시 라부한의 루테난트에서 카피테인을 거쳐 최고 등급인 마요르Majoor der Chinezen에 올랐다.] 잡화상 집안의 8남매 장남이었던 총용혠이 여느 이주자들처럼 18~20세에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면, 그의 라부한 덜린 이주 시기는 187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당시는 수마트라의 담배 재배를 독점한 네덜란드의 ‘덜리 회사Deli Company’가 1869년 메단에 설립되어 담배농원 개발이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1870년~1933년 메단 지역의 담배농원에 동원된 중국인 쿨리는 30만 명에 달했다(Buiskool, 2009: 118).
총아피는 총파트와 총용혠이 동업자가 된 1880년 라부한 덜리에 이주했다. 그가 은화 10냥을 들고 광동성 산두에서 메탄행 배에 올랐을 때, 그와 함께 탑승한 중국인 대부분은 담배농원의 쿨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술했듯이 1880년대부터 메단 담배농원의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페낭 화인권의 농원과 주석광산 쿨리 조달이 차질을 입었을 정도다. 하지만 총아피는 쿨리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형의 도움으로 라부한 덜리의 화인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네덜란드 ���민 당국의 신임도 얻어 1888년에 루테난트에 임명되었고, 1890년 카피테인, 1911년 마요르로 승진했다(Leo, 1995: 210).
총용혠과 총아피 형제는 네덜란드 식민 당국이 임명한 관리인 ’카피탄 치나‘로서, 담배농원에 중국인 쿨리의 조달과 관리를 책임졌다. 메단의 담배농원은 페락의 주석광산과 달리 자본과 노동이 분리됐다. 농원주는 유럽인이었지만, 농원 임노동자는 중국인이었다. 이에 따라 노동의 통제권은 화인엘리트에게 돌아갔다. 메단 총 씨 형제의 핵심 사업은 ’쿨리무역‘이었고, 페낭 화인사회와의 연계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당시 해협 북부의 쿨리무역은 페낭 복방 비밀결사 건덕당이 장악하고 있었음은 전술한 바 있다. 총 형제는 담배농원에 중국인 쿨리는 물론, 식료품과 의복 등 생필품 일체를 독점적으로 조달했다. 19세기 전반 자바의 화인들이 네덜란드 식민지의 중개인으로서 현지인을 상대로 한 ’비중국인과의 교역‘에 치중했다면, 19세기 후반 신생 도시 메단에서 총 씨 형제는 급증하는 중국인 쿨리를 상대로 한 ’중국인과의 교역‘을 중심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태국의 커 가문처럼 메단의 총 씨 형제도 네덜란드 동인도의 관리이면서 사업가였다. 총파츠가 설립한 페낭과 메단의 리왕콩시는 수마트라 농원에 아편과 물리 및 생필품을 조달하는 ’중국인과의 교역‘을 위한 총 씨 3인방의 거점이었던 셈이다. 총파츠는 1999년 증기선 해운회사 반유힌콩시Ban Yoo Hin Kongsi萬裕興公司도 설립했다(Wright, 1908: 777). 1895년까지 반유힌의 증기선은 덜리-페낭-페락 항로를 운영했다.
총파츠가 1880년대 후반부터 말레이반도의 주석광산과 아편팜에 투자하고, 페낭 주재 중국 부영사와 싱가포르 주재 중국 총영사를 맡으며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총용혠은 총파츠의 뒤를 따라 움직였고, 메단의 사업은 총아피가 관장하게 됐다. 총아피는 총파츠와 총용혠이 닦아놓은 토대, 네덜란드 식민 당국 및 덜리 술탄과 긴밀한 협력, 그리고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총 씨 3인방의 사업을 키웠다. 총아피는 메단의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사전에 입수한 도시 개발 정도를 바탕으로 부동산에 투자해 재산을 늘렸다. 1900년 초 총아피는 메단 부동산의 75퍼센트를 소유했다(Buiskool, 2009: 115)>
총아피 형제는 1886년 메단에 정육시장 건설을 시작으로 생선시장(1887), 야채시장(1906)을 잇달아 세웠다. 총아피는 1911년 총용혠이 사망하자 ‘마요르’를 승계하고, 이들 시장에서 나온 수익으로 메단에 극빈자와 고령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치온의원Tjie On Djie Jan濟安醫院과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도 세웠다(Leo, 2012: 1198). 총아피는 1906년 수마트라 최초로 화인 소유의 고무나무농원을 열었고, 이듬해인 1907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최초의 화인 은행인 덜리은행Deli Bank도 개설했다.
(229~237쪽)
신케 객가인 총 씨 3인방이 19세기 후반 메단 건설의 주역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수마트라 북동 연안 지역 화인사회와 페낭의 관련은 더 오래고 뿌리 깊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메단 화인사회의 공통어가 혹키엔이라는 점이다. 수마트라 동부 연안의 화인 사회에서 주류는 광동 출신이고 광동 방언이 널리 쓰였지만, 메단은, 복건 출신 비중도 높았고 복건 방언이 우세했다(Buiskool, 2009: 124). 이는 담배농원의 노동자는 광방과 조주 출신이 주류였지만, 메단의 도시 상업사회는 복방이 주도했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메단을 비롯한 수마트라 동북 연안의 화인사회는 네덜란드어보다 영어 교육을 더 선호했다. 메단의 부자 화인들은 자녀를 페낭의 영어 학교로 유학시키곤 했다. 19세기 ‘페낭 화인권’은 식민지의 경계에 구애되지 않는 지리 경제적, 지리 문화적으로 ‘월경越境하는 화인사회’였던 셈이다.(239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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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xlog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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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타자 김승훈 ⚾️ 다들 월요일 힘내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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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trans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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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6 Big Hit’s Tweet
[네이버 포스트] 김남준은 이 화보에서도 섹. 시. 느. 낌. 아니고 섹. 시. (@ https://naver.me/5t4OfaFC) 
#BTS #방탄소년단 #RM #김남준
[Naver Post] Kim Namjoon’s pictorial is not just s.e.x.y.n.u.k.i.m. but s.e.x.y.
Naver Post Translation
Keep reading for a plain text version of the blog post! For a picture edit version, please check out our twitter post or the HD version on our website!
[BTS] Me, Myself, and RM 비하인드 포스트
[BTS] Me, Myself, and RM Behind Post
아-하!
Hi-A!
(T/N: Stands for ‘Hi ARMY’, which is how Bangbell always starts these p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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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탁! 아미들 저 또 왔어요,, (수줍)
Thump thump! ARMYs, I am here again,, (shy)
이번에는 미리 예고했던 대로! Special 8 Photo-Folio의 다음 타자! Me, Myself, and RM ‘Entirety’ 의 비하인드 포스트를 준비해왔읍니다 *^-^*
Just as I have teased before! I’ve come prepared with the behind-the-scenes post of the next one up to bat for the Special 8 Photo-Folios! Me, Myself, and RM ‘Entirety’  *^-^*
이번에도 콘셉트 포토가 뜨자마자 헐 ㅋㅋ 지존 킹왕짱 ㅋㅋ 미쳤다 ㅋㅋ 의 반응이 자자했는데요,, (웅성웅성)
As soon as this concept was released, the reactions were full of OMG haha, the best of the best haha, insane haha,, (chitter chatter)
이미 Skit 영상을 통해 많은 아미 여러분들이 아시겠지만! 옷, 액세서리 등 본인의 의견 적극적으로 얘기한 아이디어 뱅크 똑쟁이 RM,,!  이렇게 또 레전드의 레전드를 만들어내는 그는.. 도대체…
I am sure many ARMYs already know this from the Skit video! The smarty guy, idea bank RM gave his opinions on the clothes, accessories, etc.,,! Just going ahead and doing something else that's absolutely legendary.. how does he do it…
1가정 1김남준  합법화 시행하라.
1 family 1 Kim Namjoon Make it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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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말 그만하고, 따릉이 폭주족,, 다 숨겨 김조나단씨와 다양한 컨셉으로 아미들을 사로잡은 RM,, 만나러 갈 준비가 되셨나요?!
I’ll stop talking so much, bicycle gang,, the hide-him-all-away Kim Jonathan* and RM who captured ARMYs’ hearts with various concepts,, Are you ready to meet them?!
(T/N: *A joke in ARMY twitter is that RM seems like a ‘Jonathan’ when he’s channeling his sexy persona.)
바로 가보자고~!
Then let’s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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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뭐야..? 뭐야?..?? 시작부터 왜 꽃 밖에 안 보이지? 김남준 어디갔어엌!!!!!!!!!! 김남준 불러와앜!!!!!!!!!!!! 저는 김남준 보고 싶단 ��이에요!!!!!  (워이워이,, 진정해 방림,,,)
Huh What is this..? What is this?..?? Right from the start why can I only see flowers? Where did Kim Namjoon goooo!!!!!!!!!! Bring me Kim Namjooooon!!!!!!!!!!!! I want to see Kim Namjoon!!!!! (Whoa whoa,, Relax, Bangb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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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나무 그 자체 김RM,,, 너무너무 평화롭고,,, 편안해,,,,  사진 당장 출력해서 A3 사이즈로 액자 걸어.. 그곳이 낙원. 이니까.
The very definition of a human tree Kim RM,,, So so peaceful,,, and calm,,,, I want to print those pictures right away in size A3 and frame them.. Because that place. Is.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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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꽃을 찍는 꽃 (혼절)
Title : A Flower Capturing a Flower (Sw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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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컨셉은 미술관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는데요! (메이킹을 보시면 아실 수 있답니다)(찡긋)
For this concept they shot at an art museum! (You can find out all about it if you watch the making film)(wink)
방림이가 또 스포를 하자면,, 수근수근 (스포 피할 아미들은 흐린 눈 하고 다음 사진으로 호다닥 넘어가 주기!)
If I may give you another spoiler,, whisper whisper (For ARMY who want to avoid spoilers, please cover your eyes and move on to the next picture!)
이번에 RM씨가 직접 촬영지 선정, 그리고 작가님의 촬영 허가까지! 직.접 했다는 사실. 나 또 김남준 멋있네…
This time around RM picked out the location himself, and even got the artist’s permission! He seriously did it Him. Self. Kim Namjoon is so c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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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 또 과몰입하게 만드네.. .. .... . 나 이 사람 알아.. 나 혼자 설레고 나 혼자 이별하고..  뒤에서 몰래 지독하게 짝사랑 한 남자 아무튼 그 사람 맞음
He's.. he's really making me delulu again.. .. .... . I know this person.. He gets excited all on his own and he parts ways all on his own.. He secretly harbors a deep unrequited love-anyways, yeah, that’s who he is
저 책에다 이렇게 메모하고 싶은데 좀 주시술 있을까요..? …지…적….섹….시….김…남…준…
I want to jot this down on that book. Will you let me..? …s…e….x…y.…i…n…t…e…l…l…e…c…t….Kim…Nam…J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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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아악 위험.. 위험경보… 912단계..! !!!!!! !!! !!  (또 까마귀 소환하는 방림이)
Ah Ahh Danger.. Danger warning… Level 912..! !!!!!! !!! !! (Bangbell is once again imitating a 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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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이렇게 오토바이처럼 보일 수 있는거임? 따릉이도? 이걸 김남준이 해냅니다.. ((((((조나단 숨겨))))))
Can a bicycle really look like a motorbike? Even a rental bike? Kim Namjoon did that.. ((((((Hide Jonat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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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참,, 나 사진보고,,, 1번씩 만 감탄하게 해주세요,, 매혹,,, 카리스마,,, 킹갓제너럴어쩌구저쩌구제일좋은단어모음합침 = 김남준
I just,, I just want to be able to look at each of his pictures only once,,, please,, the allure,,, the charisma,,, KingGodGeneralSomethingSomethingAllTheBestWords = Kim Namj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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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들이 좋아하는.. 뒷모습,, (사진) 과연 저 사진의 결과물은 방림이가… 준비했을까요?! 방림이 특 : 보통 이렇게 언급하면 준비한 거임
That back profile.. that ARMYs really like,, (pictures of) Did I really come prepared… with those photos?! Bangbell’s tip : Usually if I mention it like this, I’ve prepared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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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만의 감성이 듬뿍 담긴 필름카메라 사진 ! Photo By. RM 몇 장도 보고 가실까요?!
Film camera photos that generously capture RM’s vibe ! Should we look at a few Photo By. 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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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의 결과물.jpg 옆에 보이는 손마저 ㄱㅇㅇ ㄱㄴㅈ ㄱㅇㅇ (오열)
The product of the photo from above.jpg Even his hand that you can see on the side is a QT KNJ QT (s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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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구름,, 그리고 RM의 손하트라…  오늘부터 배경화면 해놓으면 일코 완성ㅋㅋ (다음날 : 아미씨 ~ RM 좋아하는구나~?)
The sky and clouds,, and RM’s finger heart… If I set this as my phone wallpaper starting today, I can totally pass as a local haha (The next day : ARMY ~ So you like 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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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귀여워서 멘트 생략합니다)
(He’s so cute I’m going to leave out my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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갬성 넘치는 (이라고 쓰고,, 방림이 취향을 곁들인) 사진도 살포시 ~!
Overflowing with aesthetic (I write that, ,and it’s really my style), these pictures are so soft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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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만 있어도 세상이 환해질 것 같은 왕크왕귀 댕댕이였다가
He’s just a giant adorable pupper who makes the world feel brighter just looking at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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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블랙 수트섹시 였다가.. 기절할게요 걍…
So sexy in an all black suit.. Imma just go and pass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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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미쳤다 미쳤어 (좋은뜻) 이번에도 방림이 포스트 작성하다가 과다출혈로 조기 퇴근하겠습니다! (당당) 사유 : Me, Myself, and RM 비하인드 포스트  (당연히 안됨) (시무룩)
Ha… I’m going crazy. I’m going crazy (in a good way) Once again, while writing a post I need to go home early due to excessive bleeding! (confident) Cause : Me, Myself, and RM behind post (Of course not) (Sulk)
우리 아미 여러분들,, 이번에도 좋은 스포를 당하셨을까요,,? 방림이는 궁그매..! 궁금하다구..!
ARMY,, were things spoiled for you this time as well,,? I’m curious..! I’m very curious..!
이번 포스트로 남은 수, 목요일 잘 버티고 추석연휴를 아주 알차고, 즐겁게 보내자구요!
With this post, let’s get through the remaining Wednesday and Thursday and enjoy the Chuseok holiday!
방림이는 아미들을 위해 좋은 콘텐츠를 들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I will come back with more good content for ARMYs!
아미들! 미리 해피추석!
ARMYs! Happy Chuseok in advance!
아-뿅!
A-Poof!
(T/N: Short for “Bye ARMY! Poof!”, which is how Bangbell always ends these p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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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본 포스트는 BIGHIT MUSIC에서 직접 운영하는 포스트입니다.
This Naver Post account is personally  run by BIGHIT MUSIC.
[End Note]
Trans cr; Annie & Ali | Spotcheck cr; Aditi & Faith 
Typeset cr; XPXOXD & Archillea @ bts-trans © TAKE OUT WITH FULL CRED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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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yhyunah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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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아 수정아 다음에 또 타자 🎀💕✨] hyunah_aa / 2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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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iw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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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빈] 차에 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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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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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blank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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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7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비난하게 되는 건, 상대의 습성 안에서 내가 싫어하는 마음의 문제를 발견하였기 때문.
어떤 마음의 문제가 금세 눈에 띄는 건, 익숙하기 때문.
익숙한 내면은 주로 내가 내게서 자주 보는 면면일 테니,
결론, ���분별한 속단과 타자 혐오는 많은 부분 자기 혐오에서 기인한다.
(이런 나를 딱히 여겨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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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yashikiii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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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freak out about the sudden Korean. It's heartbreaking they missed out on all the things they could've had together.
아마 내가 텀블러에 한국어로 그리머x룽게에 대해서 처음 글을 쓴 사람이 되겠지...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이 가난하고 가난한 주식에 모든 것을 투자해버린 한국인 분을 위해서 작성함. 생길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어쨌든...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당신만 외롭게 이 지구상에서 혼자 이 컾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여기에 쓴 내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잘 다듬어서 영어로 번역하긴 할 거임.
나오키가 그리머를 죽인 건 지도 당황해서 그런 거 아니었을까?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루엔하임까지 가게 한 건 좋았는데 거기서 룽게와 만나게 하고 보니 이 자식들 케미가 쓸데없이 좋아서 지도 난감해진 거 아님? 아니 생각을 해 봐...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그리머가 살아남으면 이 자식들은 당연히 약속대로 맥주 한 잔을 하게 될 거고, 자기들의 과거와 안고 있는 심리적인 문제가 너무도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릴 거 아님? 말 그대로 단기간에 야 너두? 야 나두! 상태가 돼서 찐친이 될 거잖아? 그럼 뭐가 기다리고 있겠어? 룽게는 BKA 때려치우고 전 세계를 다시 자유롭게 돌아다닐 그리머를 따라가지 않겠음? 그리머가 큰 배낭 매고 "준비 다 됐어요?"하며 고개를 돌리면 "자네야말로 준비는 끝났나?" 하면서 사복 차림에 가방 든 룽게가 나오지 않겠냐고...말 그대로 역대급 퀴어 엔딩 나게 생겼으니까 나오키가 헉 그건 안 되지 하면서 그리머 죽인 거 아니냐는 킹리적 갓심이 든단 말임. 이거 작년부터 입이 닳도록 하던 소리인데 2023년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 이 시점까지 꽤 진심으로 떠들고 있다는 게 웃김.
개인적으로 나오키는 이성애 정상가족 지키기에 미쳐 있는 것 같아서 좀 거부감 드는 부분이 있음...룽게의 인간성 회복으로 딸과 대화를 다시 시작한 묘사를 넣는 건 좋았는데...얘한테서 그리머를 뺏어가는 건 정말 너무 했음...남자와 새 시작을 하는 하인리히 룽게가 뭐 어때서요...룽게는 창조주에게 남친을 뺏긴 거나 다름없는 거야...만나자마자 뺏겼어...어쩔 건데 이거...아 나도 알고 있어 그리머를 죽인 이유가 있는 거 당연히 나도 알지 그리고 그건 요한의 실명이 밝혀지지 않았고 어머니와 재회했는지도 모호하게 그려진 이유와도 같다는 걸 나도 잘 알아...아니 시발 그래도 그렇지.........대충 이런 생각의 흐름을 ���고 내 안에 있는 오몰입 과타쿠가 날뛰는 편
그리고 혹시 누가 알겠음. 그리머는 살아 있었다면, 그리고 룽게와 함께였다면 그때는 정말로 자기 이름을 되잦았을지 누가 알겠냐고...나는 의심하지 않아...그리머가 이름을 찾는 과정에서 룽게는 반드시 관여될 거라고 의심하지 않는다고...
어나더 몬스터에서 바데만에게 그리머의 무죄를 입증해달라고 부탁한 사람 중에 룽게가 있다는 것도 너무...너무...웃겼음........아니 텐마와 수크가 그러는 건 매우 납득이 되는데 너까지? 이건 그냥 웃기다고 해야 할지....걍...그 묘사를 보고 룽게가 그리머를 알게 모르게 사랑했구나, 그리머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구나 이 생각밖에 안 들었음. 그게 아니라면 꼴랑 하룬가 이틀 정도 만난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겠냐...
이건 내가 룽게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쓰고나니까 졸라 이상한데 어쨌든)이라서 더욱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임. 룽게는 그리머에게 첫눈에 반했을 확률이 높음. 루엔하임에서 그리머를 대하는 룽게의 그 일련의 태도는 평정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깊게 동요하고 있고 놀라워하고 있다는 의미임. 말하자면 "세상에 저런 사람이 정말로 있다고? 와..."하고 있는 상태. 근데 룽게가 이 날 것 그대로의 감정에 진입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고, 자각조차 잘 하지 못했을 거임. 그래서 룽게는 일단 평정을 지키고 평소의 태도대로 그리머를 대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이끌리고 있는 거라고 난 확신할 수 있음. 말하자면 룽게는 그리머에게 첫눈에 반했으면서, 어떤 희망을 발견했던 거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쩌면 지금까지 삶에서 봐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옅지만 강렬한 기대와 희망말임. 근데 창조주께서...무심하신 창조주께서...룽게에게서 기어코 그리머를 앗아가버림................아 지금 타자 치고 있는데도 빡치네 나오키 용서 못 해 진짜
아 줄글로 주접글 쓰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내용 엉망진창이네. 근데 뭐 어쩌겠어 나는 피곤하다...
I'm pretty chill and laid-back when I use English, but when I dive into conversations in my mother tongue, I go wild. It's just something I can't c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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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minlee · 11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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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전북 익산시 만경강 하구에서 물새 모니터링을 하던 시민운동가 동필씨는 도요새 10만 마리가 갯벌에서 쉬다가 날아오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하늘을 수놓은 은빛 날갯짓.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간척사업이 강행되면서 도요새의 아름다운 군무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끝나자 갯벌은 바로 말라갔다. 조개와 게들이 죽자 도요새들은 갑작스러운 기근으로 터전을 잃었다. 그 많던 새들이 사라진 갯벌은 텅 비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갯벌의 생태계가 위협받자 그 변화를 시민들이 나서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긴 세월을 황윤 감독이 다큐멘터리 〈수라〉로 다시 기록했다. 동필씨는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본 죗값을 치르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고양이와 함께 산 이래로 10여 년간 나는 다양한 감정을 새롭게 배웠다. 그중 하나가 죄책감이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일의 무게, 어떤 동물은 귀여워하고 어떤 동물은 맛있어하는 모순에서 오는 마음의 부대낌, 기후위기의 주범인 인간으로서 세상에 대해 느끼는 일말의 책임감, 뭐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떤 죄책감은 죄책감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돌보고 키우고 넓힌다. 이런 사실을 가르쳐준 것도 고양이다. 요다, 모래, 녹두는 차례로 내 인생에 들어와 때로는 물음표가, 때로는 느낌표가 되었다. 동물과 산다는 건 나와 나 아닌 존재 사이의 틈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일이다. 보호하고 양육하는 엄마 노릇을 한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대면하여 갈등 속에 살아가는 일에 가깝다. 그러다 그들과 언어가 필요 없는 교감을 나눌 때면, 인간 세상이 규정해둔 많은 것들이 일순간 인위적이고 어색해진다. ‘동물’과 ‘사람’으로 존재를 구분짓고 분리하는 일도 그렇고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소유한다는 개념도 그렇다. 그들이나 나나 한 자리의 몫을 가진 지구의 거주자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이 실은 아주 허약한 관념과 게으른 관성에 기댄 것임을 깨닫는다. 지난 11월 막을 내린 권도연 작가의 개인전 〈반짝반짝〉은 도시의 야생동물들을 만나기 위해 어둠을 좇은 시간의 궤적을 담고 있다. 서울 올림픽대로 행주대교 남단 인근에는 습지와 작은 풀숲이 있어 많은 동물이 드나들 거처로 삼아왔다. 그런데 한강과 아라뱃길을 유람선으로 잇는 공사가 시작되자 강바닥이 파헤쳐지고 작은 숲은 며칠 만에 사라졌다. 사진 앞에 서면 인간이 만든 생태계의 변화 속에 도시의 여러 조각들이 깨어진 퍼즐처럼 함께 있는 게 보인다. 나무, 잡초, 고라니와 삵의 일시적 보금자리가 되었을 공터, 수달이 새끼를 돌보던 습지, 저만치 배경으로 선 아파트, 수많은 동물이 로드킬을 당하는 도로, 수십 년 전 역시 강바닥을 들어내 지은 다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듯 빛을 발하는 야생의 눈들까지. 그 눈들과 만나며 반짝이는 순간을 기록해온 작가는 썼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록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감탄일지 모른다”라고. 역설적으로 그 문장은 아름다운 것들이 점점 자리를 잃는 세상에서 기록으로 찰나를 붙드는 노력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를 말해준다. 나는 가끔 고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양이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반려 가족이자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다. 이들은 말 한마디 없이도 매일 가르쳐준다. 세상 모든 것이 잎맥처럼 연결돼 있음을, 더불어 사는 데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음을. 존재에 대한 경외와 감탄을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모순투성이 삶 속에서도 그 경험은 가치가 있다. 다른 존재에 대한 발견과 사랑이, 그 아주 작은 감동과 각성과 분투가 모여 우리의 삶을 ‘인간적’인 것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 나가게 해주리라 믿는다. — 김영글(미술작가)
김영글 씨의 시사인 연재 『반려인의 오후』 마지막 회를 옮긴다. 이 연재를 정말 좋아했다. 마지막 문단을 마음 깊이 새겨야지. 고마웠습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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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ody-lines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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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라인 Melodyline - 한글 안나옴 hangul not working
Apple Music https://music.apple.com/kr/album/hangul-not-working-single/1683089743
Melon https://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11226205
Spotify https://open.spotify.com/album/5iM5G8P8LPoMfQ8YWAjy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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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iromi-me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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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ド中のイメージ:宏美とキム・サピの画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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ロード中のイメージ:宏美とキム・サピの画面
紺野優希
画面に人物を収めることにすっかり慣れた時代になった。SNSのアイコン、タイムラインにアップする自撮り、ライブ配信など。肖像写真や雑誌を飾る表紙さながら、自分の姿をいたるところに出現させている。ここで自分の姿は、異なる二つの方向性から現れる。一つは他者志向のイメージ、そしてもう一つは私に正直なイメージとして。前者は他人の視線を意識した結果であり、後者は本来の自分の姿を露にしようとした結果だ。外からの視線と私から送る二つの視線は、時折交差することもある——私への他者の関心が、私の本音を打ち明けさせてくれるように。私が私を意識し、他人のことも意識する時代に、あらゆる人物像は、私または彼らの自画像になりえる。ここには社会構造的な関係も絡みあっている。私が望む姿でいたいと思いながらも、社会に一方的に押さえつけたり、また大衆の視線が私という人物の性格や態度までも強いるというように、だ。
イメージに板挟みになりながら、人は自分を生成したり、すでに書かれたシナリオやスクリプトに合わせて生きている。『Loading』はヒロミとキム・サピの絵に現れる人物に注目して、企画された。二人の共通点は生成中、または読み込み中のイメージだ。
 宏美の作品では、人物は生成中だが、その姿は二つの意味で���昧だ。一つは(宏美自身が述べるように)彼らがキャラクターという存在だからである。もう一つは身体の一部だけ描かれているからだ。一般的な人物像とは異なり、ヒロミの絵は自然や都市の風景に人物が断片的に描かれている。モザイクのような表現まで含めて、「Loading…」(2023)ではイメージが破片として、正体が明らかにされることがないまま、人物として描かれる。たとえ参照画像をそのまま絵に表現したり、または一から創作したとしても、宏美の絵画でキャラクターは特定できない「なにか」として描かれている。その姿は人でもないだけでなく、絵そのものを人物画とは異なるものに仕上げる。特定不可能なかたちに後退してゆく場所として、宏美の絵画はそこに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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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omi,『Loading…』,2023,45×45×5(㎝),acrylic on canvas
 キム・サピの絵画は理想的な場面の一歩前で止まっている。ここでの理想的な場面とは、主題と表現の両方を指す。近年試みてきているように(1)、キム・サピは理想的なシナリオを誇張したシーンを表現したり、エアブラシのノズルが詰まったまま制作をしている。本展初公開の「Last [pi:s]」(2023)には、一つだけ大きさの異なるキャンバスが(タイトルからも分かるように)「最後の1ピース」として強調されている。視線を送る人物は堂々としているが、下着が映ったカットは誰かによって付け加えられたようにも見える。一方、「Module」(2023)では、数多くの小さな画面の中に映った人物が描かれている。編集がどこまでやっても終わらず「最後の最後の最後・・・」と書かれたデータファイルがデスクトップに増えてゆくように、増殖したイメージはオリジナル原本に収斂することもなければ、確定した最後のバージョンにも発展し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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宏美とキム・サピは、人物像ではない人物像を絵画として追求し試みている。二人にとって「ローディング」は、生成中であると同時に読み込むイメージとして現れる。この時、イメージは人を視覚的に見せながらも、部分だけを残したり理想に仕上げる前段階にとどまる。自主的に現れ、包摂される姿との間で、宏美とキム・サピが描く人物は更生する=甦る。生成は破片的にも生きていられたり、重複した形として生きられる存在にしてあげ、読み込み中のスクリプトとシナリオを一瞬止めて生きられる存在にする。あるイメージに捉えられる前段階で、自由を求める人が絵画という画面の中に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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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一例として、『Forbidden fusion : Third Impact』(2021, Pie, Seoul)、『Go Go, romantic gals』(2022, Space four one three, Seoul)の出展作がそうだ。
로딩 중의 이미지: 히로미와 김사피의 화면
콘노 유키
화면에 인물을 담는 일에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 예를 들어 SNS 아이콘, 타임라인에 올리는 셀카, 동영상 방송처럼 말이다. 어떤 초상사진이나 화보 이미지처럼 곳곳에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모습은 방향성을 달리 가진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타자 지향적인 이미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게 솔직한 이미지. 전자는 남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이며, 후자는 본래 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결과이다. 밖에서 오는 시선과 내가 보내는 시선은 종종 교차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관심 가져 준다면 내 속마음을 털어놓듯이 말이다. 내가 나를 의식하고 남을 의식하는 시대에 모든 인물상은 내 또는 그들의 자화상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회 구조적인 관계도 얽혀 있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고 싶어 하면서도 사회는 강압적으로 억누르거나, 대중의 시선이 나라는 인물의 성격이나 태도를 강요한다. 
이미지 사이에서 사람은 스스로 생성하거나 이미 쓰여진 시나리오나 스크립트에 맞춰 살고 있다. 전시 《Loading》은 히로미와 김사피의 그림에 나타나는 인물에 주목했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생성 혹은 읽어들이는 중의 이미지이다. 
  히로미의 작품에서 인물은 생성 중에 있는데, 그 모습은 두 가지 의미로 모호하다. 하나는 (작가 본인이 말하듯) 이들이 캐릭터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신체 일부를 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인물상과 달리, 히로미의 그림은 자연이나 도시 풍경에 파편적으로 인물이 그려져 있다. <Loading…>(2023)에서 모자이크처럼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이미지도 포함해서, 이 파편들은 온전한 인물의 모습을 하지 않는다. 설령 작가가 직접적인 레퍼런스를 그림에 표현하거나 창작했다고 하더라도, 히로미의 회화에서 캐릭터는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그려진다. 이 모습은 사람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림을 인물화 아닌 것으로 만든다. 특정 불가능함을 향하도록 물러서는 장소로써 히로미는 회화를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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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omi,『Loading…』,2023,45×45×5(㎝),acrylic on canvas
  김사피의 회화는 이상적인 장면의 한 발짝 앞에서 멈춘다. 여기서 이상적인 장면이란 주제와 표현 기법 둘 다인데, 최근 몇 년 동안 작가가 시도해 왔듯이 (1)작가는 이상적인 시나리��를 과장해서 보여주거나 에어블러쉬 노즐이 막힌 채 작업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Last [piːs]>(2023)을 보면 하나만 크기가 다른 캔버스가 (제목에도 드러나듯이) 마지막 한 조각으로 강조되어 있다. 시선을 보내는 인물은 당당하지만, 속옷이 담긴 컷은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과 같다. 한편 <Module>(2023)을 보면 수없이 많은 작은 화면 안에 인물이 들어가 있다. ‘최종의 최종의 최종’처럼 늘어난 이미지는 원본으로도 수렴되지도 최종본으로도 발전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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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미와 김사피는 인물상 아닌 인물상을 회화로써 추구하고 시도한다. 두 작가에게 ‘로딩’은 생성중이자 동시에 읽어들이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때 이미지는 사람을 보여주면서도 부분만 남기거나 이상화되기 앞 단계에 머무른다.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모습과 포섭되는 모습 사이에서, 히로미와 김사피가 그리는 인물은 거듭난다. 생성은 파편적으로도 살 수 있거나 중복된 형태로 살 수 있게 해 주며, 읽어들이는 중인 스크립트와 시나리오를 잠시 멈춰 살 수 있게 해 준다. 어떤 이미지로 포착되기 앞 단계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회화 작업) 화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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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예를 들어, 《금지된 융합 : 서드임팩트》 (Pie, 2021), 《고고 로맨틱 걜즈》(공간사일삼, 2022, 알렉스 이노무세키와의 전시)의 전시 주제와 출품작이 해당된다.
宏美(Hiro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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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年生まれ。岡山県出身。倉敷芸術科学大学 芸術学部卒。
主な展示として
宏美個展 (日和坂アート研究舎 / 石巻、2021)、個展『木森土』(GALERIE OVO gallery / 台湾、2022)、「二次元派」(代官山ヒルサイドフォーラム、N&A Art SITE/東京、2022)、個展『川のほとり/まち』(LIGHT HOUSE GALLERY/東京、2022)など。企画した展示に、『大阪関西国際芸術祭 二次元派』(大阪府中ノ島図書館3階/大阪、2023)、グループ展『Local!』(pie / 韓国ソウル)
キム・サピ(Gims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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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年生まれ。
ソウル科学技術大学造形芸術専攻修士課程在籍。
個展『Forbidden fusion : Third Impact』(2021, Pie, Seou)を開催し、K90-99 Round 3. Hybrid Visions : Searching for Digital Era』(2023, lupo lupo lupo, Milan)
『Local! ローカル!』(2023, pie, 三Q, Seoul)、『Stars in your eyes』(2022, Plan X, Milan)、『Go Go, romantic gals』(2022, Space four one three, Seoul)などのグループ展に参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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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rddin0526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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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승민을 아끼는 이유
어떤 롯데팬들은 구승민을 그저 스찌, 운 좋은 셋업맨, 최악의 필승조...로 여긴다. 현재 롯데 자이언츠 통산 최다 홀드 기록은 구승민이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이 시즌 후반부에 쌓은 홀드라는 점과 셋업맨치고는 높은 whip, 당장 내가 생각해도 떠오르는 그가 날려 먹은 경기들... (양상문 4점줘 경기는 사실 구승민의 아주 훌륭한 빌드업이 있었다...) 그럼에도 구승민이란 선수를 결국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다.
그는 이승엽의 400호 홈런 허용투수다.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인 이승엽의 400호 홈런 영상은 결국 구승민이 던진 공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대선배이자 어마어마한 명성의 선수를 상대로 승부를 건 용기가 좋았다. 어차피 투수라는 포지션은, 가장 높은 곳에 서서 팀의 승리를 이끌어야 하는 그 포지션은 역설적으로 상대에게 점수를 주는 포지션이다. 투수가 아무리 잘 던진다고 하더라도 그는 득점을 올릴 수 없으며 심지어 잘 던진 공도 때론 홈런이 되어 팀을 패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견뎌야 하는 것이 투수의 숙명. 이제 구승민은 이승엽에게 400호 홈런을 허용한 투수가 아니라 롯데 자이언츠의 필승조로 여겨진다. 투수의 숙명을 이해하고 꿋꿋하게 공을 던지는 선수가 바로 구승민이라서 그래서 좋아한다.
그는 대졸에 하위라운드 픽이었고 대학생 시절에 내야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보통 좀 한다 하는 아마추어 선수들은 바로 고졸 신인으로 데뷔하니 어떻게 보면 재능이 부족한 경우일 수 있다. 그렇지만 본인이 사랑하는 야구를 계속하고 싶어서 포지션을 변경해가며 노력한 끝에 결국 만 28세에 프로 1군의 주전이 되었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이며 외로운 싸움에서 이겨낸 선수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불펜 투수는 결국 소모품이다. 늦은 나이에 프로 1군 주전이 된 선수들을 그만큼 더 경기에서 보고 싶은 나에게 이는 매우 슬픈 사실이다. 본인은 아직 젊고 불펜 투수는 부르면 바로 나가야 하는 보직이라고 말해서 더 슬프다. 올시즌 롯데 불펜의 역사를 새로 쓴 선수가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 구승민이 오래오래 이 팀의 필승조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그저 욕심인걸까. 그가 올해 새로 쌓은 롯데 계투진의 역사를 조금 더 오래 이어가길 그리고 그 역사에서 롯데의 영광의 순간이 있길 매일 바란다. 언젠가 구승민의 기록을 깰 선수가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그때까진 구승민이 오래오래 롯데의 승리를 지켜주길.
힘내라 구승민. 너는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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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turtledefendor · 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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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 """"추강대엽에서 빼주세요…이승엽 선배·이대호가 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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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lyfreshstudent · 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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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 이승엽과 이대호와의 비교에 대한 솔직한 심경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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