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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gryjanis-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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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서기 극기 훈련, 크로넛 먹기

‘빨리빨리’ 정신으로 유명한 한국인으로서 뉴욕에서 사는데 가장 큰 번거로움이 있다면 ‘줄서기’를 꼽겠다. 조금이라도 싼 슈퍼마켓(대표적으로 Trader Joe’s)에서 물건을 사려면 쇼핑 시간보다 훨씬 긴 계산대 줄을 감내해야하고, 거의 예약을 받지 않는 화제의 일본 라면 가게에서 무언가를 먹으려 하면 1시간을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주토피아>에서 나무늘보들이 직원으로 등장하는 도로교통국 DMV를 갈 일이 생긴다면 대기 시간이 예측불허이기 때문에 하루 휴가를 내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내일 DMV 가야해요.” “저런. 행운을 빌어요.” 뭐, 이런 연민의 대화가 오가는 게 다반사다. ‘쉐이크색’ 버거를 꼭 먹어야 하는 뉴욕 관광객이면 모르겠으나, 거주민들에게 ‘줄서기’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일상사다. 특히 밥 빨리 1등 한국인이라면 1시간 기다려서 20분 만에 밥 먹고 나오는 상황이 너무도 시간낭비로 여겨지는 것이다.(너 말이다! 쉐이크색!)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소호에 있는, 딱히 특별한 건 없는데 이상하게 인기는 많은 지중해 식당 ‘잭스 와이프 프레다 Jack’s Wife Freda’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잠깐 멈칫했다. ‘간만에 줄을 서 볼까’하는 자세로도착했지만 호스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40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 후회가 솟구쳤다. 그러나 쿨한 뉴욕커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오케이’라 답해야만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 보니 시간이 훌훌 지나가긴 했지만 대기자들의 줄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대기 리스트도 없이 대기자의 이름과 얼굴을 외워서 호명하는 호스트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한 소녀가 와서 물었다.

“뉴욕의 식당 줄서기 경험에 대해 조사 중인데 도와 줄래요? 학교 과제를 하는 중이거든요.”

몸이 배배 꼬일 만큼 지루한 줄서기를 하다 보면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반갑기 그지없다. 게다가 즉석 인터뷰라니, 오히려 이쪽에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가장 오래 줄을 섰던 경험을 말해주세요.”

어머나! 질문을 듣자 마자 나는 약간 시큰둥한 어조에, 줄서기 기록이라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거란 으쓱거림을 섞어 대답했다.

“크로넛 줄이요.”

게임 끝. 크로넛 줄을 이길 수 있는 줄서기는 없다고 99퍼센트 확신한다. 소녀는 눈을 반짝였다. “우와. 몇 시간걸렸어요? 세 시간? 네 시간?”

나는 도넛 하나 먹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네 시간을 기다린 사람이다.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더라?

지금으로 어언 3년 전 뉴욕에 크로넛이라는 음식이 등장했다. 크루아상 반죽으로 도넛을 만들어 튀긴 다음, 그안에 크림을 채우고, 표면에 설탕을 뿌리거나 설탕 시럽으로 코팅을 하는, 상상만 해도 설탕을 한 포대를 뒤집어 쓰는 것 같은 음식이었다. 허나 크로넛을 맛본 이들은 모두 엄청난 맛이라고 추켜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미국 뉴스 미디어를 장악하는 핫한 발명품이 되었다. 덕분에 크로넛을 창조한 ‘도미니크 앙셀 베이커리’는 뉴욕음식 줄 역사상 (비공식적으로) 가장 긴 줄 기록을 보유한 장소가 되었다. 8시에 문을 여는 베이커리는 크로넛을 하루에 300개 한정 판매했고 한 명당 2개까지 살 수 있었다. 크로넛을 먹기 위해선 상점 앞에서 밤샐 준비를해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터넷 거래 웹사이트인 ‘크레이그 리스트(Craiglist)’에서는 정가 5달러의 크로넛을개당 50달러에 팔며 배달까지 해주는 암시장이 형성됐다. 먹고자 하는 수요는 많지만 공급은 턱없이 적었고 게다가 줄을 서는 노력까지 필요한 상황이었다. 수요로 인해 다른 베이커리에서 아류작을 만들었는데 그쪽도 금세 품절되곤 했다.

소문을 듣자 마자 “시간 많은 관광객들이나 줄을 서겠지, 호호호” 하며 코웃음을 쳤으나 속으로는 그 맛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때문에 취재 요청이 들어왔을 때 못 이기는 척하며 잽싸게 크로넛 줄을 서기 위해 새벽같이 나섰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가식적으로 웃으며 “관광객이 아니라 취재하러 온 기자랍니다, 호호호”라고 말해주겠다!(아이, 재수없다!) 6시 넘어 합류한 크로넛 줄은 전부 관광객일 거란 예상과 달리 거주민의 인상을 지닌 분들도 많았다. 예상보다 길고 긴 줄을 보며 황당해 하고 있는데 내 뒤로 줄을 선 남자가 전화로 누군가에게상황 보고를 했다. “줄이 기냐고? 몰라. 앞에 한 600명 정도 있나 봐.”

600명은 과장이고 어림 잡아 300~400 명 정도 있었을까. 300개를 한 명당 2개씩 살 수 있다면 이미 150명을훌쩍 넘은 위��에 서 있는 나는 오늘 크로넛을 먹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새벽부터 시간낭비를 했다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이 줄서기를 위한 다른 구실이 필요했다. 베이커리 구경을 하고 내부 취재를 하겠다는마음으로 줄에 남았지만 허무한 마음을 달래기엔 부족한 변명이었다. 지루함에 지쳐가고 있는 와중에 이미 크로넛을 득템한 ‘승자’들이 다가왔다.

“크로넛 세 개 남았는데 하나에 15달러에 팔아요. 세 개에 45달러요. 관심있는 사람?”

3배나 폭리를 취하다니 너무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이 떠난 다음 재고해보니 15달러면 재방문시 왕복 차비만따져봐도 살 만한 가격이 아닌가. 더러운 세상이여, 이 모든 기다림은 돈이면 다 해결되는 거였구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언은 크로넛 루저의 마음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이거 크로넛 줄이죠?” (아줌마 1)

“그게 뭔데?” (아줌마 2)

“새로 나온 도넛이야.” (아줌마 1)

“뭐! 도넛 때문에 이 난리야??!!” (아줌마 2)

우리도 알고 있다.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시간이 남아 도는 것도 아닌데 희귀한 음식을 먹어보겠다고 지금세 시간 째 줄을 서고 있다. 10시쯤 스태프가 나타나서 크로넛 품절을 알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로넛을15달러에 파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을 이탈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나는 11시가 넘어서야 베이커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앞에 서 있던 할머니는 뉴저지에서 왔다고 했다. 쉐이크색 버거 오픈 때도 줄을 서봤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단다. 베이커리 뒤편 테이블에 자리��은 할머니와 나는, 때마침 눈앞에서 크로넛을 앞에 두고 인터뷰를 하는 파티쉐 도미니크 앙셀을 바라보며 베이커리의 다른 메뉴들로 배를 채워야만 했다. 그래도 도미니크 앙셀 인터뷰를 들을 수 있었다고 위안하며 줄서기를 재차 합리화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크로넛을 먹겠다고 두 번 줄서는 일은 없을 텐데 보통 사람보다 좀더 무모한 나는 이틀 뒤 다시 소호로 향했다. 좀더 일찍 도착한데다 평일이어서 줄은 예전보다 짧았다. 뒤에서 끊임없이 수다를 떨던 청년은 자기 앞에 몇 명이 있는지 세어보고 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와 일행에게 전한 정보는 그들이 125번째라는 것이었다. 뭐라고!!! 내가 150명 안에 들었다고? 오늘은 크로넛을 먹을 수 있다고?! 대학교 합격 대기자에서 합격자가 되었을 때 정도의 벅찬 기쁨이 몰려왔다! 어머니, 오늘 크로넛 합격했습니다!

앞에는 접는 의자까지 가져와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고수들이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다 읽어버릴 책 한권을 가져왔다. 베이커리 오픈 시간이 되어가자 맡아 놓은 앞자리를 파는 사람이 등장했다. “8시 5분에 들어가는자리, 30달러에 팔아요.”

줄서기를 두고 별의별 장사 아이템이 다 있다며 어이없어 하는 것도 잠시, 그 제안에 동의한 아줌마가 전문 줄서기꾼을 따라 사라졌다. 바가지 요금을 감당할 돈이 없어 시간을 길에 버리고 나는 점점 이 엄청난 줄서기의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크로넛 구매 가능성이 확실해지자 주변 사람들은 행복한 미소를 날려 댔다. 들뜨고 설렌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앞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흥겨운 짧은 대화를 이어갔다. 잠깐이었지만, 줄서기 동지애 같은 게 만들어진 기분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거 크로넛 줄?”이라며 반쯤 한심한 눈빛으로 물어봐도 괜찮았다. 줄서기 동지들은오히려 신이 나서 “맞아요! 이거 크로넛 줄이에요!”를 구호처럼 외쳐 댔다. 우리는 오랜 기다림 끝에 목적을 달성한 승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봐요, 그걸 알아요? 세상은 크로넛을 먹어본 자와 아닌 자로 나뉜다고요!(흥분 고조 상태)

그토록 어렵게 맛본 크로넛이 정말 세 시간 이상 줄 서서 먹을 만한 가치가 있는 맛이냐고 묻는다면 ‘예스’라고 대답하긴 어렵다. 혹시나 크로넛이 대량 생산되어 바로 사 먹을 수 있다면 꼭 먹어보라고 권하겠다. 부드러운 페이스트리 식감에 겉은 바삭하고 베어먹을 때마다 달콤한 필링과 표면의 설탕이 어우러지며 입안에서 녹아 든다. 도넛이 가진 달콤함을 극대화하고 퍽퍽한 질감을 풍부한 버터층으로 대체한 궁극의 도넛이었다. 섬세한 페이스트리 조직이 뭉개어진 상태에서 먹으면 머리 한 구석에 전주의 맛있는 꽈배기가 잠시 스쳐가지만, 꽈배기 비슷한걸 먹기 위해 다섯 시간을 기다렸다는 건 너무 가혹하므로, ‘세기의 디저트’를 먹고 있다고 계속 환상을 부추겼다.맛본 사람보다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 ‘카더라’ 풍문을 통해 전설의 음식이 탄생한다. 3년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침마다 줄을 서고 있다. 트렌드로서 가치는 끝났지 오래지만 전설의 맛을확인하러 온 관광객들이 계속 크로넛 열풍을 이어간다. <섹스 앤 더 시티>에 등장한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의 컵케이크가 뉴욕 관광 대표 음식이 되어 여전히 ��업 중인 것처럼 크로넛도 뉴욕의 음식 아이콘으로 인정받고 있나 보다.

뉴욕에서 유명해지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탐하는 대상이 된다. 욕망의 대상을 얻기 위해선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는 걸 깨달은 사업가들은 줄서기 대행 업체를 만들어 고객의 의뢰를 받는다. 시간당20달러를 준다고 하니 몇 시간 줄을 서면서 밀린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으며 돈까지 벌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무엇이든 사업으로 만들어버리는 미국인의 발 빠른 자본주의 저력 같은 걸 새삼 깨닫는다. 사실 나에게 줄서기는 뉴욕 사람들을 체험할 기회가 된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음식을 먹으려고 모여든 사람들끼리 일종의 유대감이 생겨서 이것저것 대화도 가능하다. 거리에선 묵묵히 앞만 보며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일 텐데, 줄을 서게 되면 같은목적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연다. 크로넛을 함께 목격했던 뉴저지 할머니, 바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우마미 버거(Umami Burger, 감칠맛을 강조한 캘리포니아 출신 햄버거 체인의 동명 버거)를 맛봤던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아줌마, 토토라멘(Toto Ramen, 인기 많은 일본 라멘집) 줄을 서서 모모후쿠 라멘 품평을 해줬던 라면 덕후들, 그리고 브런치 식당 ‘잭스 와이프 이즈 프레다’ 앞에서 뉴욕 줄서기 조사를 하던 학생 등등 여러 사람들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너무 긍정적인 자세일까. 그렇다. 사실 줄서기따윈 절대 하고 싶지 않다. 뉴욕의 맛있는 중저가 식당들이 예약 좀받았으면 좋겠다. 이런 틈새를 노려서 예약 안 받는 식당 예약을 주선하고 5달러 수수료를 떼는 치사한 앱도 있다! 맛있기로 유명한 걸 직접 먹고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같은 세속적인 맛탐험가들은 줄서기 대리인을 고용할 만큼 돈을 벌지 못하면 계속 시간을 길거리에 버려야할 것이다. 인내심은 뉴욕 서민의 필수 덕목일지니, 맛탐험가들이여, 오늘도 굿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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