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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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ul: consonants.
2024년 7월 25일
안녕하세요 여러분!
Today, we will start learning the hangul consonants.
ㄱ {giyeok - g/k}
ㄴ {niun - n}
ㄷ {digut - d/t}
ㄹ {riul - l/r}
ㅁ {mium - m}
ㅂ {biub - b/p}
ㅅ {siot - s}
ㅇ {iung - ng}
ㅈ {jieut - j}
ㅊ {chieut - ch}
ㅋ {kieuk - k}
ㅌ {tieut - t}
ㅍ {pieup - p}
ㅎ {hieut - h}
So now that we know consonants + vowels, we can start to form syllables:
가 / 갸 / 거 / 겨 / 기 / 개 / 걔 / 게 / 계 / 고 / 교 / 구 / 규 / 그
나 / 냐 / 너 / 녀 / 니 / 내 / 냬 / 네 / 녜 / 노 / 뇨 / 누 / 뉴 / 느
다 / 댜 / 더 / 뎌 / 디 / 대 / 댸 / 데 / 뎨 / 도 / 됴 / 누 / 뉴 / 느
라 / 랴 / 러 / 려 / 리 / 래 / 럐 / 레 / 례 / 로 / 료 / 루 / 류 / 르
마 / 먀 / 머 / 며 / 미 / 매 / 먜 / 메 / 몌 / 모 / 묘 / 무 / 뮤 / 므
바 / 뱌 / 버 / 벼 / 비 / 배 / 뱨 / 베 / 볘 / 보 / 뵤 / 부 / 뷰 / 브
사 / 샤 / 서 / 셔 / 시 / 새 / 섀 / 세 / 셰 / 소 / 쇼 / 수 / 슈 / 스
아 / 야 / 어 / 여 / 이 / 애 / 얘 / 에 / 예 / 오 / 요 / 우 / 유 / 으
자 / 쟈 / 저 / 져 / 지 / 재 / 쟤 / 제 / 졔 / 조 / 죠 / 주 / 쥬 / 즈
차 / 챠 / 처 / 쳐 / 치 / 채 / 챼 / 체 / 쳬 / 초 / 쵸 / 추 / 츄 / 츠
카 / 캬 / 커 / 켜 / 키 / 캐 / 컈 / 케 / 켸 / 코 / 쿄 / 쿠 / 큐 / 크
타 / 탸 / 터 / 텨 / 티 / 태 / 턔 / 테 / 테 / 토 / 툐 / 투 / 튜 / 트
파 / 퍄 / 퍼 / 펴 / 피 / 패 / 퍠 / 페 / 폐 / 포 / 표 / 푸 / 퓨 / 프
하 / 햐 / 허 / 혀 / 히 / 해 / 햬 / 헤 / 혜 / 호 / 효 / 후 / 휴 / 흐
Tip: try to write and say this syllables out loud so you get used 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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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ul: consonantes.
2024년 7월 25일
안녕하세요 여러분!
Hoy aprenderemos las consonantes del Hangul.
ㄱ {giyeok - g/k}
ㄴ {niun - n}
ㄷ {digut - d/t}
ㄹ {riul - l/r}
ㅁ {mium - m}
ㅂ {biub - b/p}
ㅅ {siot - s}
ㅇ {iung - ng}
ㅈ {jieut - j}
ㅊ {chieut - ch}
ㅋ {kieuk - k}
ㅌ {tieut - t}
ㅍ {pieup - p}
ㅎ {hieut - h}
Ahora que sabemos las consonantes, podemos empezar a formar sílabas con las vocales:
가 / 갸 / 거 / 겨 / 기 / 개 / 걔 / 게 / 계 / 고 / 교 / 구 / 규 / 그
나 / 냐 / 너 / 녀 / 니 / 내 / 냬 / 네 / 녜 / 노 / 뇨 / 누 / 뉴 / 느
다 / 댜 / 더 / 뎌 / 디 / 대 / 댸 / 데 / 뎨 / 도 / 됴 / 누 / 뉴 / 느
라 / 랴 / 러 / 려 / 리 / 래 / 럐 / 레 / 례 / 로 / 료 / 루 / 류 / 르
마 / 먀 / 머 / 며 / 미 / 매 / 먜 / 메 / 몌 / 모 / 묘 / 무 / 뮤 / 므
바 / 뱌 / 버 / 벼 / 비 / 배 / 뱨 / 베 / 볘 / 보 / 뵤 / 부 / 뷰 / 브
사 / 샤 / 서 / 셔 / 시 / 새 / 섀 / 세 / 셰 / 소 / 쇼 / 수 / 슈 / 스
아 / 야 / 어 / 여 / 이 / 애 / 얘 / 에 / 예 / 오 / 요 / 우 / 유 / 으
자 / 쟈 / 저 / 져 / 지 / 재 / 쟤 / 제 / 졔 / 조 / 죠 / 주 / 쥬 / 즈
차 / 챠 / 처 / 쳐 / 치 / 채 / 챼 / 체 / 쳬 / 초 / 쵸 / 추 / 츄 / 츠
카 / 캬 / 커 / 켜 / 키 / 캐 / 컈 / 케 / 켸 / 코 / 쿄 / 쿠 / 큐 / 크
타 / 탸 / 터 / 텨 / 티 / 태 / 턔 / 테 / 테 / 토 / 툐 / 투 / 튜 / 트
파 / 퍄 / 퍼 / 펴 / 피 / 패 / 퍠 / 페 / 폐 / 포 / 표 / 푸 / 퓨 / 프
하 / 햐 / 허 / 혀 / 히 / 해 / 햬 / 헤 / 혜 / 호 / 효 / 후 / 휴 / 흐
Consejo: comienza a escribir y a decir en voz alta estas sílabas así te acostumbras a ellas.
#coreanoencasa#korean langblr#korean language#korean learning#learn korean#learning korean#koreanblr#korean grammar#korean consonants#hangul#hangul alphabet#study korean#korean studyblr#korean study#studyblr#langblr#한국어#한국어 공부#한국어 배우기#한국어 공부하기#coreano#aprende coreano#aprender coreano#estudia coreano#estudiar core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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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구멍으로 본 세상 풍경.
글쓴이 : 권 정 우
1. 소개.
저는 경남 김해시 한림면 가산리 신전 27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78세의 남자입니다.
4남 2녀의 차남으로 가정형편이 비교적 어렵지 않게 성장하여 지금 이 나이가 된 젊은 노인입니다.
글 쓰는 재주도 없는 저가 태어나 78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기록으로 용기를 내어 쓰 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잠시라도 생각이 나는, 글이기를 바래봅니다.
2. 6.25사변 종전 후.
최후의 낙동강전투로 어릴 적 기억들은 우리 집 앞 논두렁이며 건너 동내 둑에도 철조망 설치가 많았다.
내가 초등학교입학 한참 전의 희미한 기억들은 ��끔씩 낙동강 쪽에는 대포 소리가 밤낮으로 요란하였고
창녕군의 시골에 사시는 고모님께서 우리 집에 피신을 오셔서 잠시 동안 계셨다.
7촌 아제는 군대에 가서 권총을 차고 술에 취하여 군인의 곤조(?)를 부리는 것을 보았다.
밤, 낯을 가리지 않고 스리코트(군용 차량)엔 흑인 미군병사들이 지나가면서 껌을 질근질근 씹어가며
“갓 뎀! 사나가 비치”하며 차량 뒤를 따르는 동내 꼬마들에게 껌을 던져주며 하얀 잇 빨을 내어놓고
싱긋이 웃고 지나가면 내 위의 형님(초등학생)은“기브 미 찹찹”하면서 뭔가 달라는 시늉을 하면
재수가 좋은 날은 통조림도, 껌도 던져주곤 하였다.
꼬마들에게 주는 것 없이 지나가면 차 뒤를 따라가며 주먹 쑥떡으로 욕하면 흑인 병사가 싱긋이 웃으며
자기끼리 뭔가 수군거리며 웃는 모습도 보았다.
우리 형제가 어린 시절 철없이 보낸 세월은 6.25 사변의 기억들이라 싶다.
전쟁이 끝나서 철조망을 많이 친 곳은 미군들이 수거해 가고 그렇지 않은 곳엔 동네 사람들이
그 철조망을 거두어 오랫동안 필요한 울타리로 많이 사용하였다.
3. 참새고기.
모두 살기가 어려운 개구쟁이 시절의 참새구이고기는 잊지 못할 특미 로 기억된다.
가을부터 초봄까지 참새 덫으로 바지게 위쪽엔 돌 등의 무거운 걸 올리고 아래 막대를 받쳐놓고
밀이나 쌀을 뿌려 막대에 새끼줄을 묶어 멀찌감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세가 올 때까지 망을 보다가
참새가 많이 몰려 먹이를 주워 먹는 순간 줄을 당기면 일망타진하는 참새 잡이가 된다.
털을 뽑고 내장은 발라내고 짚불에 통째로 구운 참새고기를 소금에 찍어먹으면 정말 맛있는 별미다.
겨울저녁, 어둑해오면 참새들이 초가지붕에 구멍 집을 만들어 암 수가 잠을 자는데 플래쉬로 가만히
비춰보면 참새의 눈이 반짝반짝하고 그놈을 잡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손을 밀어 넣어 잡고,...
오래된 초가집일 경우 때론 작은 구렁이도 마주칠 때도 가끔 있어 혼 줄이 나는 경험도 있었다.
4. 범일동역의 처음 본 기차.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 아버지께서 부산에 터전을 잡으실 요량으로 범일동역 맞은편 2층 목조집을 매도하셨다. 6.25 종전 직전이라 외국에서 들어온 기차의 화차 머리가 모양이나 색깔이 다른 것을
2층 다락방에서 많이 보았다.
여러개의 황금색 벨이 바퀴에 달려 천천히 움직일 때는“땡 땡 땡”
이쁜 소리가 났고 기차 굴둑은 옛날 스타일의 나팔관 같이 생겼고, 기차 바퀴끼리 연결된 막대축이며
화차 디자인도 처음 보는 아주 다른 모형들이 많았다.
어린 나의 눈에는 신기고 새로운 기차를 많이 본 셈이다. 지금은 범일역이 없어졌지만...
5. 동내 뒷강, 강물놀이.
어린 시절 더운 여름날은 피서는 별도로 있는 게 아닌 뒷강에서 발가벗고 종일강물에서
지난 일 들이 생각난다.
찡쨍한 햇빛은 얼굴이며 몸통 모두가 햇살에 거슬려 새까맣게 타고 오래도록 강물에 살다시피 하다 보니
눈은 빨갛게 충혈이 되고 입술은 파랗게 색깔이 변하여 꼴불견의 꼬마촌놈이었다.
가끔씩 물밑을 잠수하여 여러 종류의 조개도 줍고 수영시합으로 넓은 강을 수영으로 건너기도 하였지.
강물 속 에는 여러 종의 물고기도 많았는데 주둥이가 뽀족한 꽁치 란 놈은 가끔씩 사람에게 주둥이로
콕콕 찔러 대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뒷강은 청정지역이라 거머리는 다행히 없었다.
날씨는 더워서 강물에 입욕하려 갔는데 아래의 여동생이 또래 친구 한명과 강에 들어 있었고
대낮에“가시나들이 강에 들어있냐”라고 고함치며 욕을(어린 시절이니..)하고 있는데, 어~라,!
동생이 깊은 강물 쪽 으로 휩쓸려 가면서 머리가 들숙 날숙 하고 있었다.
여동생의 나이는 나보다 3살 아래라 초등 입학 전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없이 강으로 뛰어들어 여동생을 강물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당시 나도 초등 3학년 이라 어린나이로 구할 수 없었지만 여름이면 죽기 살기로 강물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니 내가 개구리수영은 자신이 있어 구할 수 있었나 싶다.
6. 야생 꿩 키우기.
내가 군댈 재대하여 금방 취업이 안 되어해 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한 상태로
우연히 어느 일간잡지의 정보를 알게 되어 야생 꿩 사육을 해 볼 생각을 하였다.
처음부터 야생조류를 사육한다는 것이 쉽고 만만한 일이 아닌 건 사실이다.
꿩알의 확보부터 알 부하 등 모든 세세한 정보들을 구할 수가 있었다.
봄의 4월 18일 기준으로 농촌 보리밭에서 꿩알을 구할 수 있다고 해서 들판보리밭 골골이 헤 메어
다니며 그렇게 몇 시간을 수집 중에 있는데 갑자기 푸두덕 하며 바로 곁에서 꿩이 날았고 그 자리엔
품고 있는 4개의 알을 줏게 되었다. 몇 일간 어렵게 12개의 꿩알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알의 부하는 부하기를 구해야 한다고 하지만 부하기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고
이 부하작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초보자가 초기투자를 고민 중에 어머니께선 병아리를 품고 있는
닭을 이용해 보라고 하셨다.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시행해 본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쯤
꿩 세끼가 한 마리, 한 마리 알을 깨고 나오고 그중 3개는 실패를 하고 9마리를 부하에 성공하였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고 먹성도 좋았는데 이놈들이 커 갈수록 야생성의 본능이 시작되었다.
닭장 울타리엔 촘촘한 거물 망을 둘러쳤지만 그물사이로 탈출하려고 부리로 쑤셔대는 바람에
모든 세끼들의 부리는 피가 가실 날이 없고 소독약 요오드 딩크를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시작 3~4개월 후쯤 직장이 구해지고, 꿩 사육은 어머니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고향집으로 와 보면 야생에서 보는 색깔 좋은 꿩이 아닌 띠염 띠염 털이 빠진 놈들이었다.
결국 사육을 포기하여 한 마리, 한 마리 어머님의 별미의 특식용으로 끝이 났다.
1971년도 시절에 전문적 지식을 익혀 잘 관리하였다면 특수기술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시기, 종달새소리가 너무 좋아 시도를 해 보았지만 기초적 노하우가 없어 중도에 포기를 하고 말았다.
♧ 벼, 보리타작 그리고 모내기.
♧ 보리개떡.
보리등겨 송진 따먹기. 피기. 올밤 생이
♧ 소 꼴베기.
♧ 원두막.
7. 여름밤 모기 쫓기.
여름밤이면 언제나 모기퇴치용으로 짚단 불 위에 소꼴로 베어온 풀을 올려놓으면 매캐한 연기로
모기를 쫓기도 하였다.
그저 부채로 한 여름을 보내는 어려운 시기였다.
잠잘 땐 시골집 방에는 공기가 잘 통하지 않고 너무나 더워서 잘 수도 없고 선풍기는 너무나 귀한
고급식당이나 특수한 고급 영업소에 종종 보았지만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고 값 비산 귀한 물건이었다.
시골집에서 시원한곳은 마루에서 모기장을 치고 부채로 잠이 들 때까지 부채질을 하다가 잠이 들고
잠결에도 너무 더워서 나도 모르게 빈손으로 부채질을 한 기억이 난다.
그 귀한 모기장도 나이론이 없던 시절이라 구멍이 넓은 삼배로 만든 모기장이라 공기소통도 잘 되지 않는
것이기에 지금 생각으로 얼마나 더웠을까 싶다.
8. 초등학교 입학.
내가 6살 나이 일 때 누님과 형님이 학교 등교하는 것이 제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였는지
어머니에게 나도 학교에 가겠다고 졸라 입학하고 3~4개월 후 다니다가 거리가 멀고 힘들어
결국 포기하고 그만두었다.
다음 해에 가산초등학교에 다시 재 입학 하였다.
그러든 중,4학년 겨울방학 때 앞집 일호 형님 집 마당에 누님, 형님과 배구를 마루에 앉아 구경을 하고 있는 중에 내 앞으로 공이 굴러와 잡으려 할 때 넘어지면서 왼쪽 허벅지 골절상을 입게 되었다.
진영 성모병원에 1여 년 동안 입원하였다. 당시의 진영성모병원은 의료시설이 좋지 않아서 아버지께서
부산 아미동 부산대학병원의 정형욋과 전문의를 초빙하여 합동으로 수술 치료하였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진영 대창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을 온 당시 진영 전매서 아래 앞 사거리에
집을 사셨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그래서 4학년 통지표가 2개였다.
결국 초등학교는 8년의 긴 세월이 지나 졸업을 한 셈이다. 아마도 기네스북에? ^^
9. 입원한 기억 들...
그렇게 수술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도 절룸바리 장애자로 살았을 것이다.
내가 아프고 힘들어 울면 간호 해 주시던 어머니께서도 소리 없이 우시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내가 그렇게 많이도 부모님 속을 태웠다. 초빙교수의 진료금액이 꽤나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0. 옷 물려 입기.
그 당시에는 나뿐만 아니라 형제들은 형님의 내복이며 학생복까지 많은 옷을 물려받아 입었다.
3살 위의 형님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바이올린소리에 심취되어 아버지께 졸라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졸라 그 악기를 사주었고 광복동 바이올린 개인교습도 받았다.
방학 때 집에서 연습하는 걸 보고 나도 덩달아 형님에게 배워달라고 해서 초보교재인 애츄드 교본을
배운 대로 가르쳐 주었으나 바이올린연주 기초자세가 너무나 어려워 애츄드 교본 100번째의 교제도
넘기지 못하고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더구나 바이올린은 기타처럼 포지션이 없는 음감으로 연주하는 게 너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내가 바이올린을 포기한 1년 정도가 되기 전, 형님은 또“아코디언”소리에 꽃혀 또 아버지에게 졸라
2열짜리, 120 베이스의 고가품 이태리 산 아코디언을 구입, 광복동의 개인레슨을 또 받게 되었고
그것마저도 오래 연습하지 못하고 아코디언을 포기하고 나에게 물러 주었다.
음악을 엄청 좋아하여 중학 1학년부터 학교 부라스 벤드에 들어가서 중학졸업까지 연습도 많이 하였다.
그것이 훗날, 군악대, 군예대 생활하게 된 시초가 되었지 싶다.
11. 유성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김해 한림면 가산리 신전, 양수시설이 있는 방앗간(정미소)을 운영하셨다.
항상 아버지께선 애지중지 아끼시던 태엽을 감아 작동되는 유성기(축음기) 음악을 들어시는 것이
취미셨고 일본가요판도 몇 장 되고 그 시절가요(이난영, 남인수, 고복수 의 레코드 등...)���
일본 가요판도 제법 많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가요를 무척 즐겨 들어셨고 약주를 드신 날이면 어린 우리들에게 노래를 시키시곤 하셨고
흥이 나시면 느긋이 고전의 한량 춤도 맞혀 추시는 멋쟁이 아버지셨다.
당시의 진공관 라디오(일산 내쇼날 제품)도 진영에서 출력이 큰 라디오를 사셨고 소리도 엄청 컸다.
유성기 바늘은 길이가 약 1.5Cm의 크기의 길이에 끝이 뾰족한 바늘이 놋쇠로 만든 둥글고
예쁜 모양의 바늘통 안에 다소 있었다.
어떤 판은 바늘에 골이 파여 줄이 합쳐져서 반복적 재생되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고
태엽은 오래되어 끊어져 그 구실을 할 수가 없어 어린 나는 애써 판위에서 손가락으로 돌려
소리를 내곤 하였다.
바늘이 무뎌지면 낮, 칼을 가는 수틀에서 갈아 쓰기도 하였다.
그렇게 쓰다 말고 결국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고물 엿장수에게 달콤하고 맛있는 엿으로 바꿔먹고 말았다.
지금껏 보관을 잘하였다면 값진 보물이 될 수 있었는데...
12. 마당의 닭똥.
내가 아주 어릴 때 모두가 살기 가난하고 귀천이 없든 그 시절 어머님의 말씀으로는 동내의 어린 아기가
마당에 기어 다니며 닭똥을 주워 먹어도 관심 없이“강아지처럼 키운다고 언짢아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가난하고 어렵게 자란 그런 부모 밑에서도 성장한 아이들이 고생하며 자라 자수성가한 부자로 성공한
경우도 보았다. 그런 시련 속에 살아온 우리의 옛, 조상님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세상살이가 어려운 것을 노력하지 않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 것은 옛 속담으로
“호강에 받혀 요강에 똥 싸는 격이라고...”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우리도 이런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13. 아버지와 자전거.
내가 아버지의 자전거 앞, 방석 위에 앉혀서 다닌 기억들은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아버지께선 유달리 어린 나를 이쁘 해 주셨고 동내 주변이나, 부산에 출타 시에도 어린 나를 자주
다리고 다니셨다.
어린 당시의 기억으로 나를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거리를 구경시켜 주시고 충무동 어시장이며,
앞바다에 엄청 크게 보였든 부두에 정박한 배(어선으로 짐작됨)며,
바닷물이 그렇게 푸른 색깔인 것도, 끝없는 수평선도 그때 처음 보았다.
내가 부산 범일동 집에 있을 치아갈이를 할 즈음“이를 빼면 시내에 데리고 구경시켜주마”하시면서
나를 꼬드겨도 아프고 무서워서 이를 뽑지 못했다. 내가 엄청 엄살이 심했던가 보다.
고향 낙동강 둑 옆 유등부락에 아버지 친구 분들의 귀여움도 많이 받고 때론 친구 분들께서
맛있는 과자며 삼각형 포장땅콩을 사 주시곤 했었지.
그 맛��� 자꾸만 아버지 외출 시에 따라나섰을 거야
진영대창초등 4학년부터 진영중학교 졸업까지 6년 동안 자전거로 왕복 8Km의 거리를 통학한 나는
항상 새 자전거처럼 반질반질하게 닦고 타고 다녔다.
초등학생 땐 위로타기가 어려워 옆으로 가량이사이로 타고 다녔다.
6.25 해병대출신 4촌 형님은 자전거가 귀한 시절 아버지에게 진영에 다녀 올 거라며
“삼촌, 저전거 좀 빌려 주십시오”하여 승낙 하였고 그 형님은 돈이 궁하여 자전거를 팔아 챙겨버렸지만
조카의 못된 행위를 나무라시지도 않으시며 싱긋 웃으시기만 하셨고 직장도 하는 일도 없는 사촌형님의 사정을 아버지는 이해 하셨나보다.
14. 닭서리.
하루는 늦게 아랫방에 자고 있는데 방 옆의 닭장에서 닭이 꼬올 꼬올~소리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었다.
이상한 소리에 잠은 달아나고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서 닭서리 온 좀 도둑 인걸 나는 알아차리고
크게,“맘 데로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후다닥, 좀도둑이(동내 청년들의 먹거리 서리가 많았다)
닭 계사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 고루(명견)가 죽을 듯 멍멍거리며 달아나는 도둑을 안 동내 방향으로 쫓아 버렸다.
어린 나의 기지로 도둑 쫓는 일을 잘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가끔씩 어머니께“맘 데로 안 될 것이다”
라며 가끔씩 웃기는 말투로 들먹이면 온 가족이 웃는 일이 종종 있었다.
15. 그네의 추억.
팔월대보름의 그네 타기는 해마다 논농사가 많았던 우리 짚으로 저녁이면 사랑방에서
동내 청년들이 모여 몇 날밤을 세끼를 꼬며 재미있게 만들었다.
20여 미터의 외줄 세끼를 꼬아 집 옆 양수장의 크고 높은 프라타나스 나뭇가지에 메면 3~4일간의
공든 그네작업이 끝이 난다.
아마도 내가 5세부터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까지 해마다 전통적으로 해 온 청년들의 합작품으로
동내 아이 어른 없이 즐거운 명절놀이로 즐겨왔던 옛 추억이 그립다.
16. 점심 도시락.
점심시간이면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은 점심 굶는 친구들도 꽤나 많았고,
듣기로는 다른 반 담임이신 박문수 선생님은 교장사택에 설치된 수동으로 젓는 우물펌프에
끼니를 그러는 어린 학생들에게 물배를 채워주신 고마우신 선생님이 생각난다.
17. 5학년시절 우리 반 우유배급.
(전쟁 후 미국 군정시절 옷, 쌀, 우유, 신발 등... 원조지원으로 우리나라 많은 지역에 배급됨)
우리 반 우유배급은“김종대”담임선생님의 지시로 두꺼운 종이로 만든 우유드럼통에 거꾸로 머리를
넣어 바가지로 하나하나 배급하다 보니 온통 머리와 옷에는 우유가루를 뒤집어쓴 된 내 모습이 우스워
친구들이 깔깔대며 웃고...
반 친구들에게 배분 후 다소 남은 우유를 많이 챙겨주신 선생님이 생각난다.
점심시간엔 선생님자리에 마주 앉아 반찬을 나눠먹기도 하고 채소밭에 마늘을 뽑아 씻어
된장에 찍어 먹으며 심부름도 하였고 담임선생님께서 무척이나 나를 이쁘해 주셨다.
어머님은 특별히 선생님의 반찬 신경을 많이 쓰셨다.
18. 풍금연주.
정오의 운동장 체조시간 후 김종대 담임선생님의 잊혀지지 않는 풍금 연주,
“성조기여 영원하라”,“라데스키 행진곡”곡명도 모르고 따라 흥얼 그렸던 또 하나의 행진곡은
“(니𝅗𝅥 네𝅘𝅥𝅮 모르나𝅘𝅥 도꾸이𝅘𝅥𝅯𝅗𝅥상𝅘𝅥)”?... ^^
오전 수업이 긑 나면 항상 운동장에서 모여 체조를 하고 2열 힁대로 풍금 연주의 행진곡에 발맞춰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각 교실로 가면 점심 도시락이 기다리는 즐거운 시간이 시작된다.
가끔 교실에서 신나게 연주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나도 선생님처럼 그렇게 신나는 연주를 언젠가는 하고 싶었다.
당시 스피커는, 원형의 양철통 둥근 스피커였고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다.
이런 좋은 음악을 연주하시든 선생님의 기억들이 내가 지금 것 음악마니아가 된 이유인가 싶다.
19. 천사처럼 이쁘고 뽀안 피부의 여학생.
그 행진곡에 사뿐사뿐 발 맞춰 행진하는 나 혼자 좋아했던 이름 모르는 여학생이 천사도 저렇게 이쁠까?
하며 맘속으로 좋아하게 되었지만 1년 후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는지 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옛날처럼 그렇게 이쁜 모습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까? 아직도 눈앞에 선한 것 같다.
20. 책가방 분실사건.
수업이 끝난 후 교무실 출입구 청소를 우리 반이 이 지역 청소담당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고
어느 날 바닥을 쓸고 청소를 마친 후 몇몇 친구들과 운동장서 놀다 와 보니 나의 책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고 집으로 가서 어머님께서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시면서“책이며 가방은 사면되지”하신 어머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각만 하여도 눈물이 나려 하고 그 일이 어제처럼 느껴진다.
21. 오전반, 오후반.
당시의 과밀학급에 임시로 좁은 골마루 같은 학교 자재실 에서도 수업을 하였다.
과밀학급으로 오전반, 오후반으로 수업편성이 되었고 학생 수가 한 반에 보통 65명 정도였다.
22. 철학적 이야기
5학년시절 담임 선생님(김종대)의 철학적 이야기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의 토론한 이야기라며,
잘 들어보라 하시면서“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 은 물건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선생님의 대학시절에 많은 토론을 하셨다 하시면서
어린 초등학생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가“철학적인 이야기”라 말씀하신 선생님이 아직도
잊혀 지질 않는다.
또, 손을 가만히 살펴보며“어쩜 사람의 손이 이렇게 잘 만들어졌는지! ”
손가락이 생긴 모양이며 손의구조 중에 더구나 엄지손가락이 검지와 같이 나란히 붙어있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등... 세상을 만든 조물주 이야기들을 종종 해 주셨다
어릴 적 이런 기억들이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신통방통할 뿐이다.
23. 교실바닥 아래 목발 발견 이야기.
6.25 시절 우리 학교가 임시 군 병원으로 사용한 사실은 한참 후에 알았다.
나무 교실바닥 틈 사이 연필이 흘러들어가 몇몇 개구쟁이 친구들이 연필을 주우려 컴컴한 교실 바닥
아래로 기어들어가 생각지도 못한 목발(의족)을 발견하여 무서움에 혼 줄이 난 친구들의 황당한 이야기도 웃음이 나온다.
24. 무서운 산모퉁이 길.
가을이면 대창초등학교의 5, 6학년 운동회 연습 때의 일인데,
수업 종료 후 운동회에 선보일 덤브링, 곤봉연습 등으로, 준비연습이 끝나면 초저녁이 지난 시간에
집까지 4Km가 넘는 먼 길을 가는 것도 힘이 드는데 집에 가기 전 조그마한 산모퉁이의 전해오는
무섭고 소름 지친 이야기가 생각나서 어린 초등생인 나는 그 산모퉁이 옆을 지나지 않는 방법은 없었다.
무서움에 조심조심 산 위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발 한발 긴장하며 지나는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경사진 산 위쪽에서 뭔가 모르지만“부시럭”하고 작은 불빛이“반짝”하드니 나의 온몸에 식은땀과
닭살이 돋고 현기증과 팔다리엔 힘이 빠져 버렸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산모퉁이, 무서워서 고함조차 지를수 없고 주저앉을 수 도 없는 이제 죽는줄 알았지.
정신을 차리고 죽기 살기로 집 쪽으로 달렸다.
얼마를 다렸을까? 한참을 달렸는데 어두운 앞 저만큼 사람보이는 것 같아
“살려 주세요?”크게 소리치니 아니나 다를까!
“정우야 나다”마침 우리 집일 도아 주시는 박씨 아저씨였다.
집에선 무서운 야밤에 내가 너무 늦게 오지 않으니 어머님은 아저씨를 시켜 마중을 보냈나 싶다.
실제로 도둑놈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고 때론 지나가는 사람에게 겁을 주기 위하여 무서운 그 자리
산 위에서 장 단지뚜껑에 의도적으로 칼을 가는 소리를 쏴악 쏴악 내고 만만한 사람이면 달려와 공갈과
위협으로 금품을 강탈하곤 하였다. 정말 무서운... 그러니 그 산모퉁이길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항상, 그곳은 멀쩡한 사람 혼 줄을 빼는 아이, 어른모두가 엄청 무서운 곳이었다.
우스운 이야기는 내가 군대 제대하여 나와 동내 친구 이렇게 셋이서 장난으로 작당을 하여 무서운
그 산모퉁이를 지나기 전, 뚝의 경사진 곳에“조용히 있어보자”하고 있는데,
어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 우릴 늦게 발견하여 놀라, 꽁지가 빠져라 화다닥 달아나서
“아저씨 놀라지 마십시오”하고 고함소리로 안심시킨 후에야 안심이 드는지 천천히 가드라고...
우리들의 짓 궃은 장난에 얼마나 놀랐을까? ^^
군 제대 이후 이웃집 닭서리며 짓 굿은 장난도 제미로 보낸 세월이 이젠 아련한 추억이다.
25 4.19 혁명시절.
4.19 혁명시절 진영 대창초등학교 앞 울타리 너머 차도에 도락구 차(일본말) 위에 머리띠를 맨
지나가며 데모하는 청년들의 모습에 초등시절 우리들이 모두 손뼉 치며 환호하며 응원한 기억도 새롭다.
진영 지서 아래 우 시장으로 가로질러가는 사이 길로 아버지와 내가 지나가고 있는데
‘군사혁명 장도영 계엄 사령관의 계엄 법’위반 이라며 진영에서 무단 철길통행 통제 군인에게
무단히 잡혀 붙잡혀 몇 시간이 지나 풀려난 일이 생각난다.
26 중학교 시절.
대창초등학교애서 진영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타 초등학교에 비해서 90% 가까운 입학 율 이였다.
당시의 학교평점이나 여론들도 주변에서 대창초등학교가 상위 급 그라스로 암암리 인정된 사실로,
나 역시 대창 초등 출신이라 어렵지 않게 입학할 수 있었다.
집과 학교의 거리가 약 4Km 정도니 등, 하교가 그렇게 만만하진 않은것은 등교 시에는 동내 형뻘의
키 큰 학생들의 빠른 보폭의 속도를 마취서 가자니 감당하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거리가 먼 지역은 밀양군 하남면 명래리(낙동강 건너 동내)에서 다니는 동기들도 많았는데
남학생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자전거통학 이였고 여학생들은 진영읍내의 학교부근에 자취생활이나
친척집에 신세를 졌다. 명래 에 사는 누님친구도 우리집에서 몇 달을 같이 보낸 기억도 있다.
명래 쪽의 학생들의 별명이“땅콩”으로 통하였다.
배고픈 어린 시절이었고 낙동강 모래밭에 심은 땅콩이 간식거리도 되었고 가방 안에는 항상 계절마다
고구마며 땅콩 등이 많이 들어있었다.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불면 명래 학생들은 나룻배의 운행에 변수가 있게 마련이라 그런 날들은
지각으로 일관했어도 학교에선 그 사정들을 이해해 주고 넘어갔다.
27. 김해, 창원의 중 고등학교의 문화행사.
당시의 김해, 창원의 중 고등학교의 체육 문화행사는 운동장이 큰 우리 학교 진영중학교에서 행사를
하였고 “금창 중 교교 체육대회”글 짖기 대회, 웅변대회, 육상 달리기. 축구 등. 년간 행사도 많았다.
내가 중 1학년 일 때 노무현이 2학년 시기에 금창지역 중학교 글짓기 대회에 1등을 하여 아침조회시간에
상품인 괘종시계를 시상을 한 것도 기억이 난다.
왜 기억이 나는 고 하니 항상 말이 없고 얌전하여 주변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조용한 학생이
그런 대상을 받았으니 그때 비로소 내가 노무현은 공부 잘하는 1년 선배로 기억하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부인이신 손명숙 여사님은 몇 해 대선배이시고 권양숙은 대창초등 동기라 하여도
학교 다닐 때는 동기인지 기억이 없다.
28. 고등학교 시절.
1963년도 부산공업고등학교 입학 전 에는 경공업의 시기가 지나 박정희 대통령의“중공업 정책”
계획으로 국내에 신규 중 공업 사업체가 정책적으로 많이 생겨나서 대학 입시보다 부산공고를 나오면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판단으로 부산공고의 기계과. 건축과. 전기과. 토목과
중에 전기과 를 선택하여 나에게 적성이 맞는 과 선택을 잘한 것 같았다.
입학 후 시간이 조금 지나다 보니 점차 전공과목 보다 중학시절 악대부 요원으로 활동한 음악이
너무 좋았고 마침 학교 음악선생님이“부산 남녀고등학교 아카펠라합창단”을 창단한다고
해서 그 멤버에 합류하게 되었다.
방과 후 모여 합창단원의 많은 연습으로(부산 시민회관, 학교강당 등.)부산시내 관공단체 및 양로원 등
휴일이나 방학 때에도 꽤나 많은 활동을 하여 명실공히“부산 남녀고등학교 아카펠라 합창단”
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연습이며 연주회에 재정적인 문제와 학생회원들 간의 불협화음이 발생되어 결국 아쉽게도 활동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든 중 형님이 적성이 맞지 않아 버린 아코디언으로 나름대로 고아원, 양로원, 아파트 노인정 등으로
봉사활동을 하였다.
형님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내가 그러고 보니 음악에 소질이 있었나 보다.
고 1학년 때 이기대(용호동) 학교소풍에도 여러 선배 동기들 앞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29. 취업준비를 위한 실습.
그러던 중 실업학교의 취업과 현장경험을 쌓기 위한 각 사업체에 분야, 특기별 실습생으로 나서게 되어
나는“마산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에 실습생으로 부산공고 전기과 에서 제1차로 21명이 가게 되었고
2차는 진주공고, 3차는 마산공고 순으로 실업계 학교에서 많은 실습생들이 들어왔다.
국회의원 김택수 씨와 김한수 사장님(두 분은 형제)로 마산 양덕동의 광활한 7만여 평의 부지는 설렁하게
기초공사를 하는 신설회사였다.
고생이라 모르는 우리들로는 무척이나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맡은 바 일들을 충실히 하였다.
바닥의 기초공사부터 벽체 옥상 스라브, 각종 배관 작업등으로 안전화 바닥을 뚫고 들어온 못에 찔려
고생한 친구도 여럿명이고 야외에 설치한 한바 식당에는 김택수 씨와 김한수 사장님도 우리들과 식사도
같이하였고 우리들에게 많은 격려도 해 주었다.
김택수씨의 국회의원 선거 시에 내 고향 신전의 유권자를 초빙하는 행사에 나도 앞장서서 ��조를 하였다.
이래저래, 2년 가까운 세월에 나는 군 입대 영장 통지를 받고 사직서를 내고 입대하였다.
30. 군대 시절.
1968년 03월 05일 입대하여 창원 32 예비사단에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나의 창원 예비사단 군번은 5105****이고 같은 시기의 논산군번으로는 1186****쯤이고
군대 말로 젓가락(와르바시)11군번 이라고 전체육군이 통 하였다.
6주의 힘든 기초훈련을 마치고 전방의 자대에 배치될 때 창원역에서 수송기차를 대기 중에 집에서
어머니와 누님이 면회를 왔지만 면회도 금지되어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기차탑승 대기 열 끝 에서 호송관의 눈을 잠시피하여 필요 할 때 쓰라고 하시면서 군인으로는 큰 돈인
비상금 6천 원을 나에게 주시었다. 1968년의 금액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춘천 102 보충대로 도착한 몇일 후 인사처 병사(병장)에게 1군단에서 제일 후방은 양평 32사단이라 하여
32사단으로 배치해 달라고 뒷 거레로 3,000원을 호주머니에 몰래 찔러 주었다. 부정청탁으로...
그때 그 시절의 3,000원도 군대에선 꽤나 짭짤한 큰돈이었다.
1주정도의 시간이 흘러 각 사단 부대 배치되는 육군 GMC 운송차량이 병력수송을 위해 102보 연병장에 시동을 걸어놓고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하여 운송차량에 승차시켰다.
32사단 출발차량에 배치되는 군번과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하였다.
내 이름을 언제 호명할지, 가슴이 조마조마했었지. 한참 후에야 내 군번과 이름이 호명되었다.
68년 김신조가 1월 21일 내려왔으니 겁이 나서 전방 가기는 정말 싫었다.
훈련병 동료들은 최전방으로 각기 뿔뿔이 헤어졌다.
GMC운송차량에 실려 방향도 모르는 양평 32사단의 보충대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차량덮개도 없이
비포장도로를 달려 양평에 도착하여 보니 너, 나 모두가 먼지로 덮어져 눈만 반짝반짝하였다.
사단 보충대 대기 중에 신참 이등병도, 탈영이나 사고로 영창에서 나와 보충대 대기 중인 사고뭉치
병사도 가끔 보초 시 칼빈 총을 턱밑에 대고 방아쇠를 발가락에 걸어 당겨 자살하는 총성소도
가까이에서 종종 들었다.
군 생활적응이 쉽지 않아 탈영이나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는 사고를 많이 보았다.
31. 군악병과 보직.
도착 다음날 정훈참모(중령)의 환영사에서 앞으로 우리 사단에서는 군 위문단의 캄보밴드를
만들 계획이라며 여러분 중에 스윙드럼, 기타, 아코디언, 가수, 등으로 사회생활에 경험이 있거나 악기를
가진 사람은 손들어 봐라. 하여 나는 자신 있게 손을 들었고 주변을 보니 6~7명이 손을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고 그래서 나를 포함하여 가수 2명 포함하여 5명이 선정되었다.
보충대에서 5일쯤 대기후 쯤 보충병들이 각기 예하 부대로 가는 수송차량이 도착하였고
나도 경기도 금촌의 포대사령부로 배치가 되어 호명되었다.
도중 “군예대 차출 인원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손들어 문의하니
“아직도 사단장님의 승낙이 없으니 배치되어 기다려 보라고”...
어쩔 수 없이 포대 배치의 운송차량에 몸을 싣고 경기도 파주 위쪽, 전방 끝까지 가서 하차하였다.
32. 불침번과 정문보초.
여기가 최전방 이라니,...
주 특기 대로 포대(병과:360)로 통신병 내무반이 입소 신고를 하고 다음 날부터 도로변, 산속, 들판 등으로 PP선(군, 전화선)을 울러 메고 고단한 작업을 하였다.
첫 통신병, 내무생활이 시작되었다.
첫날은 초병인 내무반 보초근무가 짜여 졌고 그 다음 날은
내무반에서 거리가 먼 정문초소에 밤 3시경쯤 2명으로 편성되어 배치가 되어있고
상등병 한 명과 이등병인 내가 보초근무 중, 같이 근무하는 상등병은“간첩이 소리 소문 없이 내려와서
초소의 근무자를 죽이고 귀를 잘라간다“고 하며“너 혼자 근무하라”라고 하며 가 버렸다.
그 해 1월 21일은 김신조 침투사건으로 비상이 해제되기 전이고 북한의 대남방송이 귓전에
욍, 욍... 불안, 초조한데...
전방근무 경험도 없는 불안한 나는 선임의 괘씸한 처사에 원망만이 가득하였다.
캄캄한 주변, 바람이 불어 부스럭, 부스럭 소리에 그 때마다 무서워 온몸에 닭살이 돕고 불안 초조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정도였고 귀는 쫑곳 하게 M1총은 사격자세로... 당시의 이등병 심정으로는...
“내가 장가를 가면 절대로 자식 낳아 이런 고생하지 않게 해야지”명세, 또 명세를 하였다.
33. 포대사령관의 비서(군댓말로“따깔이”)가 되다.
몇 일을 통신업무 수행을 하고 있는데 부대의 중대장이 내가 대체로 인상이 좋다고 생각하였는지,
중대장이“권 이병! 옛, 이병 권정우”너, 포대장실에 근무할 수 있겠어! 하고 물어 왔어.
포대장실에선 어떤 일을 합니까? 하고 물었지.“하는 일은 포대장실의 정리정돈과 청소, 취사, 등
가끔씩 포대장님 숙소에 나가서 일을 도와 드려야 된다” 하기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좋을 것 같아서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오른 나는“추 웅, 써으 엉”하고...^^
당장 포대장실로 가서“선임 병 에게 신고하고 업무숙지를 하기 바란다고 지시하였다.
즉시, 포대장실 막사에 가니 상병이 지금껏 그 포대장 비서를 해 왔는데 내가 그 업무에
숙달될 때까지 같이 있게 될 거라 하였다.
그러면서 여기에 배치가 되면 군대 말로 특과 중 특과 라고하며 책상 위 먼지와 포대장님 워커는
반질반질 광나게 수시로 닦고 작전 시에는 취사준비며 반찬(취사장) 수불 등 일체의 잔 업무까지
불편 없이 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선임 상병과 내가 먹을 식사를 타려 병사들 뒷 줄어 서서 대기를 하려는데 누군가 모르게
“야 비켜라 포대장님 따까리 오셨다.
제일 앞줄에 세워라”라고 하여 즉시 앞줄에서 배식을 받았다.
이등병 졸병이 이렇게 대접을 받으니 으쓱하며 기분이 좋았다.
식사타려 온 사병들이 어떻게 나를 아는지 보니, 포대장 비서는 새 옷 입은걸 보고 안다고 하드만...
군대에서 이렇게 편하고 좋은 병과가 있나 싶어 한 동안 신나게 잘 지내고 있는데...
34. 사단사령부 인사과 보직 통보.
포대사령부 도착 약 1주일 후 행정 1과 인사부 소위가“사단군악대로 병과가 변경되어 군악대로
복귀하라는 통보가 왔다고 하드만...
“맘속으로 얼씨구 좋다. 잘 되었구나”하고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행정과 소위가 하는 말은
“군악대 가면 군기도 엄청 세고 졸따구는 선임 등살에 무척 힘든다”라고 하면서
아무 소리 말고 여기에 근무하는 것이 좋을 거라 하면서 나를 설득하였지만 뒤에는 어찌 되든
무조건 군악대로 가갰습니다 하니 만류하고 또 만류하였지만 결국 금촌 포대에서 1박짜리 외출증으로
금촌을 출발하게 되었지.
금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마장동 터미널에서 내렸는데 시간이 남을 것 같아서 한강 변의
AID APT 4촌 형님 집에 들렀다 가도 되겠다 생각하고 형님 집으로 들렸지.
형님 집에서 형수님께서 반가워하시면서 입은 군복이 남루하고 더러워서 인지
“도련님, 옷 세탁은 금방 되니 옷을 갈아입어라”해서 또래의 4촌 옷을 갈아입었지.
형수님은 세탁소에 빠른 세탁을 부탁하고 세탁물을 찾으려 갔지만 세탁물은 물에 담겨 있고 세탁소주인은 급한 볼일로 자릴 비웠든 거지.
이런저런 사유로 당일 양평 본 대로 갈 수 없는 사정이 생기고 귀대할 고민으로 밤을 보냈어.
이튼 날 부대복귀 날을 하루 미귀가 돼 버렸어. 이등병이 간도 크지!
마장동 터미널에서 양평에 도착하여 부대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지나가는 병참부대 부식차량을 사정해서 타고 보니 부식통과 바닥에는 가마니도 깔려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 가마니 밑에 사람손이 보였다.
헉~!.. 아~니~~~ 이게 뭐냐!.. 소스라치게 놀랐어.
이등병이 상급인 운전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병참부대 입구에서 하차를 하고 자대 군악대로 들어갔지.
아니나 다를까! 선임들과 하사관 들 모두가 나를 영창 보낸다고 야단법석들이었고 어떻게 변명도,
이유도 통 하지 않는 사항에서 어떤 처분도 달게 받을 각오로 그야말로 얼굴은 누렇게 뜬 상태였지.
마침, 운수 좋게 서상윤 선임 상사님(군번이 00058번)의 아량으로 위기는 면하게 되었지.
후에 알고 보니 6.25 전쟁을 치루 신 역전의 용사이신 진영읍 진례가 고향이신 고마운 분이었어.
서상윤 상사님의 하신 말씀은 탈영 안 하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용서하라고 모두에게 타일러 주셨지.
그 후, 선임에게 물었다.
부식차량 바닥의 손은 사망한 군인으로 병참부대에 6종 반납 가는 중이라 하였다.
6종이 뭔지도 모르지만 6종은 고기나 생선, 식량을 운송 배포하는 병과라 하였다. 그래서 군인 시체도..?
그리고 군악대장(대위)님의 면담이 있어가니 집에 가서 아코디언을 가져오라는 것과 또다시 또 미귀하면
안된다고 하여 약속하고 양평에서 진영 고향집, 왕복 3일간의 출장 증을 만들어 줬어.
35. 아코디언 가지려 고향으로 가다.
사실 군악대가 좋아 지원한 것도 아닌 그저 악기 가지려 출장 보내준다는 이야기에 혹 한 거였다.
부대와 가까운 원덕역에서 동해남부선을 탓 는데 어찌나 꾸물거리고 쉬다 말다 느린지 부산진역까지
12시간 넘게 걸렸어.
부산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고향 가는 그 기분은 얼마나 좋았든지!
진영에서 집까지 거리는 약 십리가 되는 거리를 걷다 뛰다하여 집에 도착하니 어머님께서 깜짝 놀라시고
어쩐 일이냐? 탈영하였나? 사실을 말씀드린 후에는 안심이 하셨어.
그리고 1일 전에 본 대로 귀대하여 무사히 아코디언을 가져오는 미션은 순조롭게 끝이 났지.
36. 군악대 + 군예대의 군 생활이 시작.
그때부터 본격적인 고되고 힘든 군악대와 군예대의 군 생활이 시작되었어.
군악대는 정규군의 모든 역할이나 훈련도 빠지는 일 없고, 그 다음이 악대였어.
첫 파트의 악기는 관악기 중에 제일 어렵다는"크라리넷(Bb)"로 배정되어 파트장(병장)의 레슨이
시작되고 악기스케일을 한번 일러주면 다시 묻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빈틈없는 군악대만의 관습이
있었다.
다행히 단 2일 만에 불안 속에서 반음 스케일을 마스트 할 수 있었다. 얻어터지기 싫어서...^^
그랬드니 파트장의 칭찬은“어! 제법 잘 하네”였다”그 파트장은 강원도‘삐딱 감자, 촌놈 이었지 ^^
대원 한사람의 잘 못이 있어도 주간엔 가만히 있다가 지침 전 빳다(단체)를 맞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군기가 센 곳은 헌병대, 군악대, 의장대, 수송대(차량) 순 이라지만 다 같이 힘든 군기라 보면 된다.
내가 미쳐서 군악대 란 호랑이굴에 들어 선 꼴이었지.
37. 군악대의 철저한 군기.
매일의 합동 연습 시간이 되면 삑사리가 나는 각 파트장은 선임하사관에게 심한 질책을 당하게 되어있다.
각 파트별 파트장이 그 파트의 책임자로 실수 없이 합주에 임하여야 하기 때문에
각 파트장은 항상 맡은 파트의 연주향상을 위하여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한 동안 일등병 시절 땐 과로가 겹쳐서 이침 점호 때 의식을 잃고 쓸어져 버렸다.
군 엠브란서로 급히 사단군 병원에서 1주일 입원하게 되었고 집에 편지로 부모님이 걱정되지 않게
알렸는데 어머님과 누님께서 면회를 와서 짧은 1주일의 휴가를 가게 되었다.
기간은 짧지만 힘들고 어려�� 때 엄청 도움이 껐다.
38. 베치카 당번.
전방부대 내무반엔 베치카(내무반의 연탄난로 시설)가 침상가운데 크게 설치되어 있다.
보통 일등병 말기까지는 교대로 당번을 맡고 뻬치카 화덕에 불이 꺼지면 졸병들은 초비상이 걸린다.
연탄연료는 옛 가정의 19공탄이 아닌 연탄가루를 반죽하여 베치카 화덕 위에 올려 불을 피워 쓴다.
화덕 위의 연탄불이 잘 붙지도 안지만 언제 꺼질지는 항상 점검하여야 비상사태(?)를 막을 수 있다.
당번은 떨어진 스키복을 덮어쓰고 살아있는 탄은 잘 살리고 재는 쇠막대로 쑤셔 털고 그 위에 반죽을
앏개 펴서 올리 놓고 입으로 불면 불씨가 붙게 되는데, 노하우가 있어야 되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평상시 작업은 그렇다고 하면 행사가 일찍 예정되어 있으면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베치카의 불이 꺼지면 불 피우는 소시기(나무 등)조차 구할 수 없는 사정들은 이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한 군 출신들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요즘엔 상상도 안 될 일이지만,
행사출발시간은 정해져 선임들은 모든 군장이 완벽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행사차량에 편히 탑승하고
베치카 작업이 늦어지면“빨리 승차하라”야단법석이고 연탄에 불은 안 붙고 행사복은 갈아입어야 하고
군장도 챙겨야 하고, 이런 어려운 베치카의 당번일은 마치 전쟁이, 아니 쫄다구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생각만 하여도 머리에 경련이 오는 것 같다. 전방부대의 겨울 베치카는 없어선 안 될 필수 시설이다.
졸병시절의 보초, 내무반 불침번은 근무가 끝나면, 자기 파트의 선임병의 행사화(잇빨의 고추가루가 보일정도의 광내기), 화이바(실기스 없이 광내기), 엑스반도(눈이 부시는 광내기),악기(광내기),
행사복(상하의 칼주름),등 보초, 불침번근무 후의 작업으로 잠은 항상 모자라고 고된 하루의 생활이었다.
39. 위문공연과 대민지원.
양평 군악대에서 보면 경기도 용문산은 그렇게 멀지 않게 보인다.
해마다 강원도와 경기도의 위문공연의 일정이 사단사령부 정훈부에서 계획되어 하달되면
그때부터 군악대 군예대 대민 지원팀(의료 및 이발, 영화상영...)이 바쁘게 준비한다.
1군 사령부 군악대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당시의 1군사령부 공연팀의 사회자는“배일집”이 전속으로 진행하였고 해마다 우리 군악대 내무반에서
공연 팀과 탁주 파티도하며 서로간의 공연스케줄에 도움을 경유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유명한 개인 악기연주자, 2, 3류 가수계약, 등...
남자의 군대 이야기는 끝도 없다는데... 지금 내가 쓸데없이 무슨 이야길 하는 거지 ?...
당시의 용문산은 지금처럼 길이 없는 오지 중의 오지로 숨겨진 마을임이 틀림없었다.
힘 좋고 튼튼한 4륜 구동의 GMC차량이 험한 개울을 따라 바위를 쟈키, 긴 쇠막대 등으로 치워가며
길을 만들어가며 목적지인 마을 어귀에 다 달으니 동내꼬마들이 힘겹게 헐떡이며 따라 오는 아이들을
태워주며 왜 힘들게 따라오느냐고 물어보니“비행기는 보았지만 차는 처음 본다며”무척 신기 해 하였다.
산속의 오지는 좁은 길만 있고 아이들은 차 구경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각기파트의 봉사는 힘겹게 군악, 군예, 의료, 영상, 이발 팀등 많은 준비로 대민지원이 시작되며
이른 초저녁엔 점심식사 후 이발, 의료팀이 시작되고 관중을 운집하기 위하여 군악대연주가 소리 높여
몇 곡을 연주하면 짧은 시간에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다음은 군예대의 공연이 시작된다.
군악대, 군예대 요원의 노래 잘하는 가수, 그리고 서울에서 계약한 여자 가수등의 무대가 이어지고
어둑어둑 해가 질 때면 영화 상영 팀이 바쁘게 상영에 돌입하면 우리 군악대와 군예대는 편히
주변 동내의 풍경을 구경하며 개인 시간을 갖게 된다.
나는 군악대의 클라리넷 요원으로 합주에 동참 후 군예대 공연이 시작되기 전 빠른 시간 내 사제 구두며
사복으로 바꿔 입고 아코디언도 챙기고 군대 말로 소변하고 뭐 볼 시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였다.
40. 1군 사령관 한신 장군.
전방부대 사단을 총괄하는 1군 사령관‘한신’장군은 유명세가 높았던 분으로 때때로 헬리콥터로
전방사단을 종종 순시 중 마침 우리 사단 군 GMC차량이 도로변에 정차한 것을 보고 그 차 앞쪽에
헬기를 착륙시키고 그 운전자의 의복이며 차량상태를 점검하게 되었고 군화의 뒷 굽을 점검하고
많이 닳아서 군 보급품관리가 허술하다 하여 몇 차례 우리 사단을 집중관리를 하였고, 사단사령부 헬기장 옆에 우리 군악대 막사가 있어 어느 날 갑작스럽게 헬기착륙 소리에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잠시 후, 이름만 들은 한신 장군이 우리 내무반에 들이닥쳐 생각지도 않은 불시검열을 받게 되었다.
군악대장, 상, 하사, 병들 모두가 누렇게 뜬 상태로 추웅~썽!, 군악대장이 경례를 붙이고 전 대원은
당연히 부동자세였고 내무반을 둘러본 후 다른 지적은 없이“베게를 만들어 쓰라”고 하여
예상치도 않은 불시검열은 끝이 났다.
전군의 내무반에 베게는 구경도 못하는 시절이고 한신 사령관님은 병사들 복지를 많이 챙겨주신
장군으로 소문이 난 장군이셨다.
그 이후 전 예하부대원은 모두 베게를 사용한, 우리군악대가 최초로 베게를 사용한 역사가 되었고
그 시절은 먹고 입는 것이 무척이나 부실하였고 빈대며 이, 등의 해충들이 너무 많아 겨드랑이며 가랑이사이에 5~10Cm의 헝겊주머니로 직접 만들어 그 속에 인체에 해로운 DDT가루약을 넣어 달고 다녔다.
지금상식으론 도저히 상상도 못할 군바리의 설움이었다.
전방 금촌 포대공연이 늦어져 포대병 막사에 우리군악요원이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병사들이
입은 옷은 거지차림이고 시간이 나면 양지 바른쪽에 모여앉아 쓰네미(이)를 ��고 먹는 밥의 량도 적고
부식도 너무나도 부실하였고 그것이 말단부대의 현실이었다. 1970년도 전이라 군대생활이 무척 어려웠다.
41. 대납방송을 듣다.
금촌 포대공연을 마치고 양평사단으로 오는 도중 차에서 대납방송을 들었다.
“군악대장과 하사관 3명과 군악대원, 군예대원 모두 36명, 오늘 포대공연에 수고가 많았습니다....”
현지 생방송을 중계하는 것처럼 이런 대남방송이 당시에는“이후락 중앙정보부장”시절 이라 해도
국가 보안에 펑크가 났구나 싶었다. 정말 무서웠다.
당시 전방부대 민간인들이 간첩활동을 하는 불순분자가 많았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42. 3 사관학교(육사 공사 해사) 체육대회.
매년 우리나라의 사관학교의 명예와 자긍지심을 키우기 위여 서울 효창구장에서 체육대회가 열렸다.
우리 사단의 군악��와 11사단의 군악대가 해마다 10월 1일 국군의 날에 맞춰 1개월 동안 서울 정릉동
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군악대와 합숙하며 군악음악 연습을 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축구부는 사관생도 내무반 옆 다른 건물에 위치해 있었고 우리 사단군악대와 11사단
군악대도 축구부와 같은 옆 내무반에 기거하게 되었다.
조석으로 축구선수들은 내가 보기엔 덩치는 무척이나 크고 우람차서 억센 느낌이었다.
우리는 육군 2개 사단의 군악대 인원과, 육사군악대 인원수 모두 120여 명의 대규모 편성으로 되어
그 행사연습에 임하였다.
우리의 32사단 군악대의 인원수는 군악대장 1명, 하사관, 5명, 이발병을 포함한 총 인원은 33명이지만
군악대 연주인원은 항상 1/28 이였다.
사단군악대 사운드 28명과 육사행사 인원 120명의 4배정도로 사운드는 비교가 안 되는 일이다.
서울시내였으니 주말이면 자주 사촌형님집도 가까워 신세도 많이 졌다.
육사연병장은 온통 잔디로 깔려 넓기도 하지만 연병장 정면의 사열대는“화랑대”간판명의 건물 역시
군 간성의 요람인지 몰라도 웅장하고 고풍스러웠다.
사관생도 의장행렬 연습 땐 나도 초병시절 클라리넷 파트로 있으면서 부족인원 대체요원으로 행진드럼
도 배울 수 있었다.
드럼파트인“김순배”동기와 둘이서 행진드럼을 연주하면 정복차림의 사관생도는 오와 열을 맞춰
행진연습을 거의 매일같이 하였다.
사관생도는 항상 직각보행에 직각 식사 등..어려운 규율이 있었다.
그때 촬영해 둔 사진들은 아직도 추억으로 남아 종종 볼 수 있어 좋다.
연습기간이 지나 10월 1일 날 효청 구장으로 출동하였고 우리의 육군군사관학교 군악대는 효창구장
서편이 관람석이고 해군사관학교는 남측, 공군사관학교는 동편, 이렇게 관중석에 자리를 잡았다.
짜여진 각본대로 3개 사관군악대의 합주가 운동장입장 대기 장소에서 합동 팡파르가 연주가 끝난
즉시 각 사관군악대 선두로 사관생도의 경기장 입장식이 시작되어 넓은 효창구장을 군악대 행진곡에 맞춰
한 바퀴 돌아 3사관생도가 단상아래 정열 되면 국뱡장관 외 각 참모장 등의 축사가 끝난 후 또 다른
행진곡으로 3사관 군악대가 순서대로 연병장을 행진하는 합동 퇴장 곡은 웅장하고 장엄한 그 자체였다.
그 잠시 후 각 경기별 시합이 시작되었다. 각 군악대 응원단은 사물놀이며 국악연주도 신나게 연주하고
각 사관생도의 가족 친지며 서울 시민 등으로 무척이나 크고 좋은 운동장시설에 관람석은 초만원이었다.
당시엔 운동장규모가 무척이나 넓고 좋아보였는데 지금보기엔 너무 작게 보인다.
그때 나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경험으로는 지금의 나의 시야가 엄청 넓어졌다 싶다.
1968년도의 효창구장의 용도는 보통 축구, 야구로 때로는 서울시의 대, 소 행사장으로 로 사용되었다.
43. 진로상담.
종종 군악대시절(68년~71년)짧은 출장휴가가 되면 마포 한강교가앞에 보이는 AID APT 4촌 형님집에
종종 가서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4촌 형님은 KBS 전속악단요원(단장:김광섭)으로 오랫동안 피아노 연주생활을 하시다가 전자올겐이
도입되는 그 시기에 무교동의“에로이카 카페”에서 음악생활을 하셔서 휴가 때는 형님 아래의
나와 같은 또래의 동생과 형님이 일 하시는 그곳에 놀다 오기도 하였고 형님의 연주음악의 마력에 흠뻑
빠지게 되어 그 형님에게“저도 군악병인데 제대하여 형님처럼 음악을 하면 어떻겠습니까?”고 물었지.
“내 친구들은 서울시청에 과장 계장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음악을 직업으로 할려고 하느냐”며
“직업으로 음악은 절대 하지 말라”라고 이르셨다.
44. BAND부 임시고사.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을 알아보는 동안 고향의 진영 한얼고등학교 6촌 아우가 자기 학교의
밴드 조교를 구하고 있다 해서 형님이 쉬시는 동안 우리 학교 음악조교로 오시면, 하고 물었다.
당분간 별 일없이 시간을 보내니 그다음 날 한얼고등하교 교장실로 가서 면담하고 밴드부 조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악대부의 교육을 전적으로 할 수 없어 악기들의 소리조차 올바르게 낼 수 없는 상태였다.
각 파트 악기부터 기초 톤의 단단하고 맑은 소리위주로 집중하여 연습시켜 근 10일 여일 간 교육 중에
학교선생님들은“제대로 된 맑은 악기소리”라고 학생들에게 칭찬을 해주시었다.
학생들은 좋아진 소리에 만족을 하고 방과 후에도 열심히 연습하여 짧은 기간에 많은 발전을 하였다.
악대코치 후 집으로 퇴근 시에 거의 매일같이 오래 근무하신 나이 많으신 선생님들은 교문 앞 어묵집에
어묵을 술안주로 간단한 한잔이 아닌, 기분 좋게 선생님들은 술에 거나하게 취하시는 소주파 들이셨다.
그 덕분에 나도 거의매일 술에 찌 들린 기억이 난다.
45. 한국유리.
1971년 1월 재대 후의 느낌으로는 군 복무를 군악대와 군예대 생활의 두 가지로 힘들게 하여
일반 병의 곱으로 한 셈이다.
형님의 말씀대로 군 제대 후 음악은 접어두고 일반직장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저런 직장에 도전하여 대기업체인 한국유리공업사 변전실에 입사하여 8년을 근무하였다.
해마다 전 직원들의 년말 회식 겸 파티가 열렸고 나의 음악이력으로‘한국유리합창단’을 결성,
업무가 끝난 후 열심히 연습, 지휘하여 재직기간동안 회사 행사에 도움이 되었다.
회사의 월급으로 살기 어려워 회사생활을 영원히 접고 학교전공인 전기기술로 단독주택 전기공사를
3,4년간을 하였고 자본 없는 건축업자들에게 공사비를 많이 떼이고 심지어는 법원에 고소하여 승소도
하였지만 미지급 공사비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술도 사줘가며 그 사정을 내가 위로하는 경우도 있었다.
46. APT 납품 업
전기공사업을 그만두고 근교에 있는 동래, 연산, 사직, 영도지역 APT에 납품 업을 시작하였다.
납품 경험도 없는 내가 초기엔 고생을 좀 했어도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에 대한 노하우를 알게 되었다.
납품종류란, 청소재료, 전기기구, 및 교체 부품 등 아파트 관련 취급품목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고
거래 아파트에선 경우에 따라 납품 량도 적을 뿐 아니라, 급한 부품조달요청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맹점도 많아지게 되어 초기에 그런대로 그 업을 4~5년을 하고 그 업을 접게 되었다.
47. 서면 지하상가
세상에 쉬운 장사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 선결과제로 여기 지하상가가
초기 건설되어 활기가 있을것 이라 생각하고 초기 자본이 적어 달세가 많은 중앙 분수대 옆에 위치한
점포에 계약하여“무지게 과학”이란 간판으로 문을 열어 장사를 시작하였다.
오픈 후 학생들의 호기심으로 잠시 동안 제법 매출이 올라 제미를 보았지만 그것도 수익이 점점
만족스럽지 못하여 또 그 일도 접게 되었다.
48. 조명 철물점
동래구 명장동 에 또다시 지인의 건유로 조명등과 철물점을 같이 해 보라는 건유에 또 도전하였다.
그 시기는 단독주택의 건설 붐이 일든 시기라 승산이 있다 싶어 또 판을 벌린 것이다.
2 종목을 장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신규 주택의 전기공사와 조명의 수효도 같이 노렸다.
한 가지 장사를 오랫동안 하면 그 노하우가 쌓여 전문장사꾼이 되었을 텐데 같은 동내에 사는 친구는
나를 보고“1절은 잘하고 2절은 못 한다”고 가끔 웃으며 핀잔을 주었고 내겐 질긴 건성이 없었나 보다.
49. 화장지 대리점
또 신 보급 상품으로 갑작스럽게 수효가 늘어나는 화장지 대리점도 운영하였다.
정미소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싸구려 휴지장사가 웬 말이냐 싶지만, 그것도 일생일대의 모험과
체면을 앞세우든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뽑아버리고 개혁하는 각오로 외판원 15여 명 확보하고 리어카와
앰프 설치도 내손으로 설치하여 힘든 이 일을 착수하였다.
실업자 막일 외판원이 많아 상품을 싣고 나가 몇 단의 화장지가 팔리면 입금생각은 뒷전이고 술 마시고
늘어져 판매는 뒷전이라 매상도 판매한 수금액도 점점 미납하는 외판원도 다루가 쉽지 않았다.
이 일이 정말 힘들까? 싶어 하루는 내가 직접 리어카에 화장지를 싣고 동내를 돌며 판매에 나갔다.
집에서 줄발 할 때 얼굴 가리게 용으로 커다란 밀짚모자와 선 그라스를 썼는데도 마이크로 외쳐야
할 그 말이 목에 걸려 말을 할 수가 없고, 내가 세상을 이렇게 용기 없고 나약한 부잣집 아들로
호의호식으로 태어났나 싶어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도둑질도 아니지만 정말 부끄럽고 창피하였다.
길 주변에는 아주머니 아저씨, 학생들이 나를 훑어보며 지나가고,“자! 싸고 질 좋은 화장지가 왔어요”
마이크에 대고 외쳐야 되는 말을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여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내가 세상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으로“절벽에 떨어지는 죽을 각오로 시도는 해보자”고
힘차게 질러보았지만 나의 외침의 소리는 목구멍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는 절반 성공한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집으로 오는데 서먹, 서먹하고 껄그러운 마음은 많이 사라지고 당당한 용기가 생겼다.
자신과의 이런 싸움의 승리에 스스로 마음속 쾌재를 부르며 의기양양하게 집이 도착하였다.
어쩌면, 나약한 나 스스로를 뜨거운 담금질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50. APT 관리소장
내가 처음 아파트의 일자리는 원동 인터체이지 에 접한 현대 4차 아파트에서 시작되었다.
면접 후 첫날 출근하는데 관리사무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야단스러웠다.
알고 보니 이 아파트의 전체 내부인테리어 공사업체에게 인부들의 기성(일당) 금을 지불하지 못하여
때 거리로 몰려와서 관리소장을 찾고 있었다.
왜 인고하니, 도급공사 사장은 행방불명이라 사무실로 들이닥친 것이다.
관리소장의 업무 인계인수도 못하고 달아난 관리소장이 무슨 죄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달아난 소장과 공사업체 사장과의 약속은 몇 차례 이행이 되지 않아 인부들의 들끓는 원망이
더 증폭되어 몹시 화가 끝까지 난 것이다.
설명이 길지만, 줄인다면,..
작업 인부들의 기성을 일주일마다 지급하기로 계약하였는데, 일당이 싼 작업인부들을 역전이나
공원 등에서 공사 경험도 없는 사람들에게 옳은 교육도 없이 일을 시켜 인부들은 전체세대 욕조바닥의
기존 방수층을 무시하고 크라샤로 깨어 공사완공 후 아파트 천정에는 누수가 되고, 그 전체 입주민들은 물이 새는 공사비를 줄 수 없다 하여 이렇게 일은 복잡하게 꼬여만 갔다.
임금 체불로 인부들이 고발하여 부산 중부형사 2명이 와서 처음 출근하는 나에게 모든 회계장부를
내어달라고 하지만“전 관리소장은 인부들을 피해 달아나서 인수, 인계도 하지 않은 자료를
오늘 처음 출근한 나는 그렇게 협조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형사들이 온 사실을 알고 운영위원장도, 총무도, 전화도 되지 않고 정말 난감 그 자체였다.
하루 종일 그 소란을 막을 수 없었다.
오늘은 사항이 이러하니 인부들에게 협조해 주시라 말하여 모두 돌아가고,
인부대표 2명만 내일 오라고 하여 모두 돌려보내고, 틈을 봐서 대표회장에게 전화하여
“아파트 서류들은 검토하고 돌려준다 하니 그렇게 하면 좋겠다 말하고, 서류를 주고 모두 돌려보냈다.
덧 붙여 공사 중에 발생한 슬러지 처리비용이 많이 나오니 앞 소장이 건물 지하공간에 넣어 처리하자고
총무에게 건의하여 처리한 일이 건축폐기물 관리법에 저촉되어 앞 관리소장과 총무가 잘 못 관리한 일이
되어 이쪽저쪽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최초의 근무부터 이런 일을 눈으로 보고 어렵게 체험하며 아파트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부산시내의 아파트일자리가 수시로 많이 워크넷에 올려졌다.
이런 복잡한 일터에서 계속할 의욕이 없었다.
반년쯤 여기 근무 후 다른 곳으로 일터를 옮기고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또 반복적으로 옮겨가며
하다 보니 이전의 아파트처럼 어려운 일은 항상 있게 마련이라, 그것이 힘들어 이곳저곳으로 일터를
옮겨가며 일을 하였다.
어느 아파트도마찬가지로 언제나 동 대표나 입주민들이 아파트관리업무에 개입하고 관리원 모두를
비 인간적으로 대하는 입주민 때문에 스트레스는 항상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관리소장들은 한 곳에서 머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51. 음악생활의 흑 역사 본격 시작.
군 제대 후, 여러 직장을 헤매다가 우연히 아는 지인의 형님이 룸살롱을 한다고 하며 그 업소에서
마스터(건반악기)가 수입이 좋다는 이야길 듣고 즉시 영업시간에 방문하여 그 일에 자신을 얻고
집사람이 말리는 일을 어렵게 의논하여 당시 동래구 안락동의 어렵게 장만한 작은 연립주택을 팔아서
일부는 전세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서울 낙원악기상가에서 악기며 장비를 구입하게 되었고,
동래 로터리에 있는 서울재즈학원에 속성과에 입소하서 군악대에서 갈고 닦은 음악 실력으로
1개월이 안되어 학원을 끝내고“아는 것이 도적질”이라 결국 음악생활로 유턴하여 나이트의 솔로건반
12년 음악생활을 시작을 하게 되었다.
힘은 들어도 음악이 좋아 그 일을 재미있게 하였고 그 도깨비물장사 속에서도 많은 인생 공부도하였다.
꼴불견의 술꾼들의 술에 취한작태며 돈을 퍼질러대는 추한 꼴들을 보아야 했고 술값매상을 많이 올려준
손님에게는 사장들이 한 없이 저자세로 싸장님, 싸장님 하며 아첨을 떨다 가고 나면 입에도 담지 못하는
욕설로 분풀이를 하는 걸 많이 보았다.
제 돈 쓰고 인간대접 못 받는 함량 미달의 돌 아이, 술꾼들...!
52. 모두 모두나이트
음악생활 초기에는 음악연주실력 향상이 필요하여 부산시내의 여러 곳의 업소를 다니며 일하다가
조방 앞의 모두 모두나이트(85��)의 업소에 일자리가 나왔고 그곳에서 2년여 동안 일(콩나물 장사)
을 하였다.‘콩나물 장사’란, 음악음표가 콩나물 닮은 모양으로 딴따라들의 이름으로 종종 사용하였다.
옆 건물의 금호나이트를 인식해서 인지 내가 일하는 업소인 모두 모두 나이트에선 밤 12시가 되면
닭죽을 조용한 분위기의 부르스 음악을 잠시 틀어놓고 손님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래서인지 항상 손님이 많았고, 그 옆, 금호나이트도 함중아 밴드의 명성으로 손님이 항상 많았다.
그곳에서 어느 착실한 웨이터와 이야기 중 대학을 나왔으면 바른 직장을 잡지야지 하필이면 웨이터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세상살이를 배우는 목적으로 술집에서 일하려 왔다며 당당하게 말하였고
그 이야기에 나도 깊은 감명을 받고 칭찬도 해주고 나도 세상이치를 역으로 배우고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내가 살아온 흑 역사들이 쉽게 말해서 나만의 음악세계가 한때 제미 있는 생활로 느껴졌다.
53. 제비 방 나이트.
조방 앞 모두 모두 나이트에서 나와 부산 서면의 신신호텔 뒤쪽 태평양 나이트로 옮겼다.
(여기서 편의상 춤꾼을“제비”라고 표현)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12시간의 영업을 하였고 ‘제비들’은 12명, 마담 2명, 까지
직원이 많은 편이었다.
하루는 잘 생긴 이쁜 제비가 나에게 이런 걸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기에 뭐냐고 하였더니,
여기 자주 놀려오는 공순이 아가씨가 저에게 은행통장과 도장을 주며,
“오빠 이것 가지고 돈이 필요하시면 찾아 쓰시라”면서“넙죽, 생각 없이 기분 좋게 받았다”라고 해서
“마음이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네”그렇게 말하고
“돈이 아무리 좋아도 그 돈을 쓰면 우선은 좋을지 몰라도 두고두고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니
그 성의는 고맙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돌려주라”고 하였다.
몇일 후 그 통장과 도장을 그렇게 말하고 돌려주니“나는 오빠가 좋아해서 드린 것인데 ...”
하드라 하였다.
그 이후는 모르지만 아마도 좋아하는 오빠가 인간다운 면모를 느껴 사랑이 더 깊어져 지금쯤
아마도 두 사람은 이쁜사랑 하며 잘 살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제비는 젊은 돈 많은 과부와 연이 되어 양복이며 자가용까지 사줘서 거들먹거리는 제비도 보았다.
이런 제비 방 나이트에선 룸 사롱이나 나이트에서 자기 일을 마치고, 삼삼오오 끼리끼리 단골 제비에게
가서 정신을 잃도록 술 퍼마시고 팁으로 얻은 돈을 물 쓰듯 기분 좋게 뿌려대며 스트레스를 푸는
아가씨들을 여기서 많이 보았다.
사롱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중에도 종종 착실히 돈 벌어 꼬박꼬박 고향에 보내는 경우도 보았다.
어디나 마찬가지로 홀의 넓은 후로링 바닥에는 붕산(바닥 미끄럼재)을 얼마나 뿌렸는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무대조명아래에는 붕산가루 먼지가 날라 영업 중에는 조명 빛으로 기둥이 밤새껏 빙빙 돌았다.
밤 새 그 붕산가루를 숨 숴 마셨으니 집에서 세수를 하면 목에서 까만 �� 타르 가래가 나오곤 하였다.
여기서 큰 병이 날 것은 생각으로 5개월여 만에 나오게 되었다.
54. 모두랑 나이트 크럽.
그 업소에 나온 지 얼마 후 부산서면 부속골목 입구에 있는 모두랑 나이트 크럽으로 가게 되었고
일자리 알선업체에선‘사장이 부산 칠성파 두목’이라 하여 몹시 신경 쓰였다.
오후쯤 악기를 옮겨 앰프세팅을 하는데 홀에서 잠자고 있든 나이 많은 웨이터가 와서 인사를 하였다.
찝찝한 마음으로 업소의 영업에 대하여 물었지.
“며칠 전에 사장님은 돌아가시고 사모님이 경영 하신다”고 하여 쓸데없는 근심은 잊을 수 있었다.
모든 무대악기장치의 세팅이 완료되고 영업시간이 되었고 여사장이 출근을 하였다.
“잘 부탁 합니다. 사장님이 계시지 않으니 마스터 선생님께서 이것이 나의 업소라 생각하시고 많이 도아주세요”며 나에게 협조요청을 하였다.
남자사장의 그늘에서 살아온 여자라서 인지 몰라도 통이 아주 큰 여자임을 그 후에 알았다.
55. 여자고객과 양주.
평소처럼 일하든 어느 날 밤 12시경에 오부리(노래반주)를 하는데 어느 젊은 중년층으로 보이는 여자가
MC에게 신청하여야 되는데도 노래를 직접 신청한다며 악기 위에 만원을 올려놓고 순서를 기다리고,
순서가 되어 노랠 2곡을 하더니“고맙습니다”,“아직 몇 곡이 남아있습니다”라고 하니“좋습니다”
하며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기 자리에 돌아가고,
몇 분의 생음악 연주가 끝나고 감사한 말을 전하려 자리에 가 보니 테이불 엔 양주로 세팅 되어 있었고
한잔의 작은 잔의 술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나이트업소에서 웨이터는 근무 중에 술을 마셔선 안 되는 절대 규칙이 있었다.
나는 손님이 권하는 잔을 받아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자기는 용호동에 살며 남편은 모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한다고 하였다.”
그 말이 진위여부는 알 필요는 없고 더구나 밤늦게 술 마시고 돈 쓰고 돌아다니는 그 중년의 여인은
요즘말로‘돌 아이’로 보였다.
그 후, 그 여인은 업소에 자주 들려 많은 액수의 술값도, 오부리(노래비)도 올려주었다.
아마도 내가 그 여자 손님의 눈에 초점이 맞혀져 있는 걸 많이 느꼈다.
그렇지만 한차례 오부리가 끝이 났다고 해서 그 여자고객자리에 기생처럼 앉을 수는 더욱 없었다.
제법 많은 날들을 넉넉한 매상과 오부리를 주고 반복하는 어느 날,
영업시간이 끝나는 4시경 웨이터들이 영업 종료를 하는 중에도 앉아서 나를 기다리는 눈치가 보여
악기뚜껑도 덮지 않고 화장실로 가는척하며 웨이터에게“내가 급한 일로 퇴근하였다”전하라 하고
퇴근해 버렸다.
그 손님이 권하는 술을 여럿 날을 많이도 마셨다. 이런 일도 종사하는 사람들의 애환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런 술을 피할 수 없어 많은 날을 술에 취하여 보냈다.
이런 유혹에 잘 못하면 내가 눈이 빠질 번한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야간업소에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상적 부부관계가 아닌 것을 많이 보았다.
미드나이트의 음악연주는 무대앞에 춤 손님이 많을 때는 연주자의기분에 따라 템포가 빠른 생음악 연주를 가끔씩 하지만 20분은 노래반주 음악으로, 40분은 D.J 의 디스코타임, 영업이 종료 될 때까지 운용된다.
1970년도 연주자의 1시간당 배분시간은 30분으로 대략 9곡을 반주하면 9,000원정도의 큰 수입이 된다.
보통 영업시간은 계절마다 다르지만 10시간의 수입은 90,000원의 수입이 되었고 77년도쯤부터는 1곡당 1,000원에서 1,500원, 2,000원으로 곡당 케리어거 점점 상승되어 수입이 무척 좋아졌다.
평상적으로 새벽 4시에 영업종료를 하였고 종종 주변 나이트나 소주 집에 몰려가서 업무의 스트레스를
푸는 핑계로 술자리가 많았고 그 좌석엔 항상 우리 여사장은 평소에는 술은 잘 마시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종업원의 격려차원에서 술값을 지불하였고 그러다 보면 아침이 되어 학생들의 등교시간이
되어 집으로 퇴근하는 경우가 거의 매일 반복되곤 하였다.
연주자의 나 역시도 가끔씩 종업원 모두(스트립걸, DJ, MC, 마담, 아가씨, 웨이터, 상무..)
에게 반 호의적인 모습으로 술을 사고 나면 몇 일간 눈에 보이도록 나의 수입이 확연히 증가된다.
이것도 필연적 공생관계라 볼 수 있다.
메일 마스터의 도움을 주는 것은 업소마다 DJ, MC,의 능숙도 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976년 경의
일당이 DJ(디스커 쟈키), MC(마이크 사회자),의 일/평균 두당 3만~4만 원 정도며 케러는 마스터의
그날 수입에서 지급한다. 당시로선 DJ, MC, 의 수입이 괘나 높은 편이었다.
업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업주는 종종 Show를 계약하여 손님유치에 많은 투자를 하기도 한다.
이런 생활을 생각해 보면 내가 세상을 거꾸로 사는 도깨비 같은 생활을 너무 오래 한 것 같다.
더 많은 이야기는 각설하고... 다음 장으로 ^^
56. 경북 상주.
경북 점촌의 대형 룸 사롱의 일자리가 나와 그쪽으로 옮겼다.
이곳의 사장도 김천, 상주지역의 깡패출신이고 왼손이 잘려 없는 장애자인데 이웃들의 이야기로는
깡패 패거리에 맞고 잘렸다고 하드만... 그래도 자기 어머니에겐 효자라는 소문도 들었고...
젊은 시절, 그런 깡패바닥에 소속되어 시건 머리 없는 세상을 살았겠지.
업소가 신규로 개업하다보니 업소시설이나 룸살롱 아가씨 확보도 되기 전이고 여러 사정으로 2주 넘게
나는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2주 후쯤 개업을 하였는데, 오후 늦게 쯤 당시의 각 그렌져며 고급승용차가 그 동내 길가에
즐비하게 모이더니 덩치도크고 인상이 험 굿은 패거리 들(15여 명)이 들여 닥쳤다.
아마도 김천, 대구지역 등의 패거리 오야붕 들이 합동으로 개업축하에 동행하였나 싶었다.
다소 시간이 흘러 대형룸에 술판이 시작되고 나는 죄지은 것처럼 불안과 초조에 안절부절 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악연주요청이 들어왔다.
피할 수 없는, 난감하지만 그 룸에 악기장비를 밀고 들어갔다.
거의 한 차례씩 노래를 하고 오야붕 인 듯한 사람이 정중히
“마스트선생님 수고하셨고 이제 나가셔도 되겠습니다”하며 양복 안 호주머니에서 돈을 대충 얼마인지 모르게 두둠하게 돈을 집어 아래 인 듯한 사람에게 두 손으로 잘 드리라며 나에게 전달,“감사합니다”
하는데 옆에 있는 또 다른 대원도 같이 자기 주머니에서 뒤적뒤적 하드니 전달하였고 3~4명의 대원들이 돈을 뿌려대듯 나에게 노래비의 수고료를 주었다. 야! 참, 이런 멋쟁이 깡패들도 있네!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패들의 메너가 이렇게 신사답고 멋질 수가 없었고 돈을 소중하지 않게 던져버리는
그런 깡패의 의식과 그런 모습도 난생처음 보았다.
그 룸에서 나와 받은 돈을 세어보니 47만 원이었다. 한 팀에서 받은 금액으로 최초의 일로 기억된다.
개업을 한 후 손님들이 점점 뜸하여져“사장은 부산에서 올라오셔서 이 수입으로 되겠습니까?”하며
미안한 표정으로 여기서 일을 그만두셔도 좋으니 부산으로 내려가시라 하드군.
며칠 후 결국 부산행을 하였다.
57. 수석
점촌, 상주지역엔 전국의 수석 군들이 진귀한 수석이 많이 나온다는 소문에 수집가들이 모였다.
수석(돌)을 모르는 나도 보석을 줍는 제미도 있었다.
틈틈이 나도 머리가 베토벤을 꼭 닮은 명품을 주어 얼마나 신기하고 좋아 50년이 넘도록 소중히 가져
있다가 거치장스러워 결국 옥션에 판매가 50만 원으로 올려 2025년 4월에 40만 원에 팔리고 말았다.
평생 소장할 것을 그렇게 처분하여 무척이나 후회스럽다.
58. 경북 점촌애서.
필링 룸살롱에서 나오기 전, 점촌에서도 요정과 나이트에서 같이 2개의 일자리가 나올 것 같다고 해서
우선 부산으로 가면 연락을 주기로 하고 내려온 3~4일경 점촌악기점에서 연락이 왔다.
이런 호재가 있나 싶어 쓰고 있든 나이트 악기장비를 둘로 나누고 모자란 장비는 주변 악기점포에서
임대하여 2개 업소에 세팅을 하였다.
1980년 전, 후반이고 촌 동내라 그렇게 술장사가 호황기가 아니라 두 곳의 일터가 가능한 일이었다.
업소에서 손님이 반주요청을 하면 나에게 폰으로 연락이 오는 즉시 가면 되는 사항이라 마음은 편하였다.
요정에선 당시 주변의“대성탄광”이라는 큰 탄광회사가 있었고 정부의 에너지의 한 축으로 그 회사는
사업이 꽤나 번창하였든 시절이었다.
어느 날 초저녁쯤 요정의상무가“오늘은 큰 손님이 예약되었다며 일찍 오셔서 대기하시라”하였다.
상무의 말로는 이 지역 동자부에서 3명, 상주지청장에 2명, 해서 5명이라 하였다.
저녁, 시간이 경과한 후 손님이 들여 닥쳤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나를 불렀다.
악기를 밀어 방으로 들어갔드니, 아니나 다를까!
요사이말로“헐~~”5명의 손님과 5명의 아가씨가, 남자는 상의를 탈의하고 있고 5명의 아가씨
종업원은 모두 실오라기 하나 없이 발가벗고 방석으로 부끄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나도 너무나도 부끄럽고 해서 악기를 벽 쪽으로 돌리려는데 한 사람이“선생님이 부끄럼 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평상시 얼굴을 보며 알고 있는 처지라, 아가씨들을 빤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요정의 술안주와 음식은 듣지도, 보지도, 먹어도, 못 본 것 들이 대형 상에 가득 차려져 있었다.
요정 상무의 말로는 한상의 음식비만 150만 원 짜리라 하였고 그런 걸 처음 본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몇 잔의 술잔이 오고 가드니 노래판이 시작되었다.
그중에 지검장이 홀랑 벗어 팬티 만 입고 두 아가씨가 혁대를 가로로 잡고, 나는 연주가 시작되어
“림보 춤”경연이 시작되었고, 한참을 역전 지게꾼들이나 하는 놀이에 그야말로 요지경 속이었다.
이 아니 배꼽이 빠질 일이냐 구여. ^^
지청의 지검장이나 탄광회사 사장 일행이 노는 수준이란 역전 지게꾼보다 낮은 꼴이었다... ㅋㅋㅋ
객지에서 많은 세월을 소비했다고 생각으로 부산 집으로 내려왔지.
59. 경남 고성의 나이트.
몇 일간의 시간이 흐른 후 경남 고성에 나이트 일자리가 나와서 잘 아는 악기사 에서 그쪽으로 가면
수입이 좋을 것이란 권유에 악기장비며 외지 생활의 모든 걸 챙겨 도착한 날이 몇 년도 인지 기억엔
없지만 그날이 정월 대보름 이 였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있는“고성 풍물패가 나이트 무대 앞에서 지신밟기 풍악을 울려대기 시작하였다.
풍물패의 인원도 많았지만 좁은 업소에선 그 소리도 무진장 크고 웅장하였다.
급한 대로 엠프의 음량 조절을 대충 하여 풍물패 대원의 노래 대결이 시작되었다.
결코 이날의 그런 풍물패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그로부터 몇 달의 세월이 흐른 후 느지막한 시간, 손님이 여럿 테이블 있었고 한 팀은 노래를 신나게
부르든 중에 알지 못하는 험상 굿은 젊은 두 놈이 무대 앞으로 오드니 노래하는 마이크를 뺏고
“아! 씨발, 노래 한번하자”며 재촉을 하니 노래하는 손님은 마이크를 빼앗기로 테이블로 가버리고
내가“노래손님의 순서에 따라 하면 좋겠습니다”“조금만 기다려주시면,,,”하는 찰나 놈들이
받아 쥔 마이크는 부대바닥에 내 팽겨 쳐졌고 그놈들이 자기 테이블에서 자기 왼팔에 칼로
난도질을 하여 바닥은 온통 피 바다로 변하고 나이트 업소는 소란스러운 무법천지기 되고 말았다.
그 업소 안주인은 별명이“고성강패”로 소문난 간 큰 뚱보의 중년여자로 그 명색이 유명하였다.
그 사건을 본 여주인은 그놈들을 달래보고 온갖 짓을 다하여도 막무가내였어.
피는 바닥에 낭자히 흐르고 있는데 그놈들이 파출소 연락도 못하게 하고 벗고 있는 러닝을 찢어
상처에 동여 메어 주고 같이 온 동료는 병원이 어디가 가깝냐고 해서 이곳 고성에선 그런 치료를
할 수 없으니 진주로 가라하며 야밤에 택시로 진주로 가 버렸다.
그로 3~4일 후 고성지역 어업 사무소 쪽에 이권이 걸려 안성애서 여기까지 온 잔 챙이 깡패인데
그 깡패 대장은 그 이튿날 업소에 찾아와 진심어린 사과를 하며“피해금액을 지불 하겠다”하였고
부셔��“마이크 값은 얼마냐”고 하여 나는 괴심 하지만 그렇게 사과와 용서를 바라는 깡패 대장에게
그 후에도 겁이 나서 더 이상 마이크 값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3~4일 후쯤 초저녁에 자해를 하여 말썽을 부린 두 놈이 가게에 와서 마담과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
알지 못하는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그놈들을 앉혀놓고 마담이 나에게로 왔다.
지난 일을 정식으로 사과하려 왔으니 선생님이 가서 좋게 잘 말씀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그건 그놈들이 자진해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놈들의 대장이 시켜서 왔다고 마담이 말해 주었다.
어디 없이 술집에선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험악한 곳이다.
그 후 약 2년간의 고성의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그 후로는 이런 험한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도 그런 것이 자식들이 혼사를 치루면 신랑 아버지가 딴따라 출산의 이야기가 듣기 싫은 이유도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60. 동명대학교 사감지원(부산 용호동).
이전의 몇 년간은 아파트 관리업무를 하였는데 한동안 백수로 쉬고 있었고,
“집사람이 동명대학교 사감자리가 워크넷에 나왔다”라고 해서 그 사감업무가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어니 생각하지 말라 하였지만, 한사코 손해 될 일이 없으니 한번 응시해보라 하였다.
응시 자격조건을 보니 응시할 수 있는 조건 들이였다.
서류준비를 철저히 하여 동명대학 총무과에 접수 후 4일 만에 면접통보가 왔다.
총무과 사무실 앞에는 8명의 후보가 와 있었다.
나는 기대도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면접장에 들어갔다.
나까지 남자후보 6명, 여자후보 2명, 으로 지원자 수가적은 것으로 알았다.
나의 면접순은 5번째로 되어있었고 먼저 면접을 본 사람은 떨떨한 표정으로 면접대기자의 묻는 말에
아무 말하지 않고 가버렸다.
면접관들이 어떤 난해한 질문이 있었는지 무적이나 궁금하였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결코 나의 이름이 호명되어 면접실에 들어갔다.
면접관의 명패는 동명대 총장, 총무과 실장, 기숙사 관장, 3명이 면접을 보았다.
아예, 처음부터 면접이 통과될 수 없는 나였기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무덤덤하게 면접에 임하였다.
어느 누군가 기억도 없는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 인가요”하고 물었고, 자신 만만하게
“세상일이 어렵지 않은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중에 사람 다루는 일이 저에겐 제일 어렵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또“경력사항엔 아파트관리 쪽 으로 근무하셨는데 사감직을 하실 수 있습니까!”
또 자신 있게“어떤 업무인지는 잘은 몰라도 최대한 사감업무를 빨리 파악하여 익히고 항상 부모 같은
입장으로 학생들을 잘 돌보며 타이르고 학생들 마음을 이해하면 좋을 것”이라 대답하였다.
면접관이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것을 물어볼 것 같은 말을 하였으니 좋은 점수를 얻었지
싶었다. 그로서 면접은 끝이 나고 총무과 한 직원은 동명대학 로고가 있는 박스(만년필 볼펜 샤프연필)
를 모두 하나씩 주었다. 값 비산 건 아니지만 나에게는 엄청 귀한선물이라 그 기념품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나는 조금도 기대를 하지 않고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권정우선생남 휴대폰 맞습니까?”“예 그렇습니다”“면접에 최종 합격 하셨습니다”“축하드립니다”
하며 “차를 돌려 학교총무과로 오십시오”였다. 이럴 수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든 일이 꿈만 같았고 총무과에 갔더니 많은 직원들이 일제히 박수로 축하해 주었다.
61. 사감이 되다.
몇 일후, 관장님께“사감 지원자가 몇 명이나 되었는지”여쭤보니 총 107명이 응시하여
1차 서류심사에 99명이 탈락시키고 마지막 8명이 최종 선별되어 권사감은 107:1로 최종 합격이
되었다고 나를 보고 대단하다고 하셨다. 많이 부족한 내가 이 얼마나 요행일까 싶다.
학교사감 업무파악에 들어갔다.
며칠 후 학교총무과에서 교직원증(교번:210219. 임용일자:2010.09.01)과 명함을 만들어주었다.
3년 전에 입사한 1호관의 권사감이 초보 사감인 나에게 업무에 대한 많은 도움을 주었다.
1호관의 권사감은 나와 같은 종씨로 육군중령 출신이었고 업무 외는 항상 나에게 형님으로 불러주었다.
내가 맡은 기숙사는 2개동으로 1호관과 3호관으로
본관 내의 1호관(4층, 여대생 기숙사)과, 본관외부의 맞은편 3층건물 3호관(외국학생 전용기숙사)과
권진달사감 : 2호관(동명불원 옆 7층건물) 국내 남학생 전용기숙사이며 동명대학교의 학생기숙사는
모두 3개 동이 있다.
사감업무란 전체 많은 기숙사 학생들의 신상파악과 기숙사 생활규칙과 위반 시 벌점을 기록 관리하며
상벌 규정에 따라 상, 벌을 주어 관리한다.(벌은 관내의 청소활동을 시간단위로 벌하게 한다. 등..)
개인 위생관리 및 기숙사 청결관리는 군대식으로 매주 점호하여 각 실의 벌점관리를 실별로도 한다.
기숙사의 입실관리와 학교와 기숙사에서 공지하는 사항을 공지 발표 관리한다.
기타 많은 업무는 작은 군대내무반 생활과 비슷한 업무들이고 더구나 내가 담당하는 기숙사인 1호관의
여대생들의 풍기 쪽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각 기숙사의 총 학년(신입생 및 기존입실 학생)의 오리엔테이션은(본관강당) 그 해 9월(신입생 포함)
중, 실시하는데 내가 입사를 하자마자 실시하였다.
오리엔테이션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 나는 당황하였다.
2호관 권 사감에게 가서 업무를 문의하여 파악하고 내가 맡은 1호관과 3호관의 오리엔테이션 이
넗은 강당에 1학년신입생부터 4학년학생, 300여명의 학생 앞에 새로 부임한 사감 인사를 하고
여러 학생들이 개인위생 및 청결과 정숙한 생활을 당부하고 기숙사규칙과 건물의 제반 안전장치이며
소방관계 교육 및 화재 시 엘리베이트 사용요령 등 큰 중앙단상 앞에서 30여분동안 교육하였다.
아파트 운영위원 회의 시에는 보통 10여 명 안팍인데 평�� 여러 사람 앞에서 연설경험도 없는 내���
최초 학생들 앞에 이런 교육 강연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고 보니 그것은 교육 자료를 잘 준비하였기에
안정된 순조로움으로 잘 끝낼 수 있었지 싶다.
사감업무를 한 처음부터 용역 경비들이 교직원인 사감위에 군림하는 안하무인의 독소집단이 되어
2호관의 권사감도 1, 3호관의 나도 그 스트레스로 두 사감이 합동으로 개선해 보자 하여
관장에게 그런 개선요구를 말씀드려 적당한 조치를 약속받았지만 경비들이 오랫동안 관장님의 수족이
되어 사무실청소며 자택일도 모든 충성을 다 하다 보니 업무의 잘 못된 부분의 시정요구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차일피일 그 일을 미뤄다 보니 두 사감은 개선이 안 되는 행정조치에 불만이 증가하여
내가 먼저, 1호 사감이 사직하고 말았다.
1호 사감은 퇴직하여 지리산의 어느 마을로 터전을 잡아 살고 있으며,
나는 규모가 작은 해운대 신도시에 있는 모 학원빌딩 소장으로 7년간 근무 후 건강상의 문제로
조용한 반촌의 도시, 경남 양산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62. 취미생활.
많은 직장을 떠돌다가 이전부터 취미생활을 생각 중에 늘 즐거운 마음으로 악기가 하고 싶어 먼저
엘토 색소폰을 구입하여 2년 여 동안 심취하고 옛날 기초실력을 되돌아 다시 음악 의론도 점검하여
영상이 나오는 연습기는 필요 없어 휴대폰에 MR자료를 입력하여 거치장스럽지 않게 계속 사용하였다.
그 후 점차적으로 Tener saxophone, Flute을 추가로 하나하나 구입하여 모두 3대의악기로 세상모르게
음악에 심취되어 살았다.
부속장비로 대형앰프, 스피커, 등 빠지지 않는 부속기구들이 생생한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MR이 좋은 이유는 휴대성과 음질이 좋은 여러 가지 장점이 많아 항상 새로운 곡을 검색, 편집하여
사용하다 보니 지금까지 가요를 비롯한 민요, 엔가, Pop, 영화음악, Jazz, 등 12,000여곡의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다.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영상반주기가 필요하지만 나는 과거 음악경험이 많아서인지 악보 없는
음악반주에 쉽게 익숙해졌고 초기로 배우는 사람들 눈에는 악보 없는 MR반주로 하는 연주가 어렵고
신기하게 느껴져 부러운 눈치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내가 재주가 좋은 것도 특별한 능력도 없는데도 하다 보니 연주상의 감정표현이나 나름 테크닉도 적용할 수 있어 가끔씩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였다.
무엇으로 이런 희열을 맛볼 수 있을까 싶어 한동안 미쳐 살았다.
간간히 동호회 회원들과 부산 지하철, 양로원, 해변 무대 등에서 연주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연주하였다.
15 여 년전의 신기하고 좋은 음악소리에 관중들의 박수가 많았지만 지금은 2~3년 경력의 짧은 연주자의
실력에 기대감도 인기도 떨어져 관중의 관심이 사라진 지도 오래되고 말았다.
그래선지 몰라도 지금의 관중들의 호응도가 옛날처럼 같지 않다보니 그 열정이 식고 말았다.
지금은 아파트 다용도실에 두고 연습할 의욕이 없어 방치되고 있다.
졸작,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4년 11월 12일
“바늘구멍으로 본 세상 풍경”은
세상모르고 부딪히며 세상을 살아온 나의이야기를 짧은 문장력으로 쓰 보았습니다.
♧ 권정우 삶의 어록 - Quotations from Kwon Jung woo's life. -
* If you lower your eyes to see the world, you will see happiness.
세상 보는 눈을 낮추면 행복이 보인다.
* Even if it is as small as the focus of a lens, it can burn objects by gathering light.
렌즈의 초점처럼 작아도 빛을 모으면 사물을 태울 수 있다.
* I create a work of writing by polishing and sewing scattered memories
of my past life like jewels, as if building a new house.
흩어진 과거 삶의 기억을 보석처럼 다듬고 꿰매어 새 집을 짓듯 글의 작품을 만든다.
* The past is a bad check, the present is cash, and the future is a promissory note.
과거는 부도수표, 현제는 케시, 미례는 약속어음이다.
** 보고 싶은 당신 **
경남 고성의 어느 산사에서 / 권정우
1998년 10월 모일
가을 밤 내내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여기 오지 않을 사람인 줄 알면서도...
혹시 달빛으로 별빛으로,
소식도 없이 올지도 몰라
아무도 서성이지 않은 산사로 가서,
그대 잠들 빈집 되어 기다렸습니다.
고요하기만 한 가을 산 속엔,
나무들 옷 벗는 소리 끊긴 지 오래고...
새들 곤히 잠든 지 오래고...
오직 그대 기다리는 내 빈집의 불빛만
흐린 날의 노을처럼 빛났습니다.
오지않는 사랑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뜨거운 눈물일지 알 수 없습니다.
멀리 있는 사랑이 행여 길을 돌아와,
언제 문을 두드릴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 가슴 빈집 되어 깨닫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는 일이 이토록
나를 훌훌 비워내는 일임을...
* 권정우의 자작 시 소개 *
“보고 싶은 당신”은
글재주 없는 미약한 솜씨로
잠시, 경남 고성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적적하여 쓰 본 것이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완성한 나만의
최초이자 마지막 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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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남자 어딨냐. 잘생겼어, 키 커, 인성 좋아, 능력 있어, 미래 밝아, 다정해, 여자친구한테 화 한 번 안 내, 나 힘들까 봐 처음부터 끝까지 결혼 준비 자기가 다 해, 나 힘들게 하는 사람들 다 처리해줘, 장인, 장모님 사이에서 결혼할 사람 보호해줘, 시부모님께 내가 고민할 필요 없이 알아서 내 얘기 잘해줘, 하루 24시간 동안 내 생각만 해, 나 화나면 집앞까지 찾아와 차 대기시키면서 기다려, 내 기분 다 생각해줘...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남자!
역시 착하게 살면 복 받습니다. 사실 이상형에 내가 부합하거나 내가 착해서 남자친구가 다가온 것보다, 내가 그 아픔을 알아줘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게 남자친구 숨통을 트이게끔 한 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 한 명한테 전 인생을 배팅 할 수가 없고. '이 여자다!' 싶은 거? 결혼할 마당에 이런 게 뭐 궁금한가 싶지만(에너지를 쏟는 데 효율성을 추구하는 편) 그냥 쓰다보니 궁금해지네.
나중엔 남자친구의 가족분들과 다 만나겠죠. 날 어떻게 알고 계실지는 궁금하네요. 고양이든 강아지든 키우고, 일단 날 사랑해주는 남편과 아이들도 잘 키우고 행복하게 사는 게 내 하나의 꿈.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되지 않아?"라는 말을 그때마다 들었지만 안 굽혔다. 너무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가족을 보면서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런 건 전혀 아니고. 내가 성공하고 싶은 게 누구의 압박도 아닌 것처럼 요것도 내가 정한 꿈.
저희 아빠는 고모들께 '앞으로 상견례도 여기(=시골 집)서 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데 딸인 전 절대 안 그럴 겁니다. 그것만은 확실히 할 것. 상견례를 집에서 한다? 노노해. 내 역사에 그럴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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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상가인테리어 도안동 1층 빌라상가 브런치카페 완공현장
안녕하세요. 916 디자인입니다. 출근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차 한잔 들고 있는 직장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카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이젠 익숙한데요. 카페는 특정 세대들의 트렌드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21년 기준으로 국내 카페 수가 8만 5천 여개를 넘어선 숫자만 보아도 알 수 있죠. 그렇기에 카페라는 공간이 단순히 차와 커피를 마시는 공간보다는 목적과 유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카페테들이 생겼습니다. 프리미엄 프랜차이즈외에도 가성비가 좋은 테이크아웃 전문 소형카페라던지 건축적인 의미가 커 풍경이 좋다던지 등의 외곽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카페도 이에 포함되죠. 아예 미술품 관람이나 굿즈 전시 등을 하여 단순히 차를 즐기는 공간을 넘어선 복합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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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안 타. 너 나뻐 씨." "누나가 먼저 오자고 했잖아요." "겨우 이것만 벗어 주고 말이야. 그리고 내 생각은 않고 계속 타자고 졸라되기
나 하고..." 누나가 진짜 삐쳤나 봐요. 아무말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버리네요. 따뜻한 커 피 두잔을 사가지고 누나를 따라 갔다. "옷은 벗어 주고 가야지!"
세시가 못 되어 자연 농원을 나왔다. 자유 이용권 괜히 끊었다. 차 안에서 누나는 히터를 최고로 틀어 놓고 코를 풀고 있었다. 그래도 튼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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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스게러지 처분결과 윤성로만 의심말고 십구영상 주소를 알려줄수 있단다 의심없이 바보본다 클릭
모트라인은 또치와 노사장의 환상의 콤비일때 십구영상을 언제든지 볼수 있었꼬
윤성로도 어느정도 완소남이였지만 어느듯 욕쟁이 십구금영상 주소를 내놓지 않는 놈으로 변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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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Possessive Particle)
의 is a particle that indicates that one is the owner/possessor of another object. It has the same role as “ ‘s “ in English for most examples:
my book: 저의 책
my car: 저의 차
my finger: 저의 손가락
the person’s cake: 그 사람의 케이크
the doctor’s table: 의사의 탁자
the teacher’s car: 선생님의 차
With verbs and adjectives:
the teacher’s car is big:선생님의 차는 크다 = 선생님의 차는 커 / 선생님의 차는 커요
I want the teacher’s car: 나는 선생님의 차를 원하다 = 나는 선생님의 차를 원해 / 저는 선생님의 차를 원해요
my finger is long: 나의 손가락 길다 = 나의 손가락 길어 / 저의 손가락 길어요
that woman’s eyes are beautiful: 그 여자의 눈은 아름답다 = 그 여자의 눈은 아름다워 / 그 여자의 눈은 아름다워요
Words like “my/our/their/his/her” are often omitted from sentences. Whenever something can be assumed by context, words are often omitted to make sentences more simple.
Ex:
I meet my friend: 나는 (나의) 친구를 만나다 = 나는 나의 친구를 만나 / 저는 (저의) 친구를 만나요
In this case (and many others) you’re clearly meeting “your” friend, so the word “my” can be omitted.
ADVICE: always try to stay away from translating sentences directly, and focus more on translating them based on context.
source: howtostudy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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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서울
부러운 마음
목요일 밤 술자리의 대화 주제는 시작부터 끝까지 스타트업과 창업이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주제가 몇 시간째 계속 고정인 이유는 멤버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6개월 차 초보 스타트업 대표 A, 대기업 사내 벤처팀의 리더 B, 개발자이자 예비창업자 C, 그리고 전직 창업가 현직 백수 프리랜서 나. 4명의 멤버 모두 사고의 결? 관심사? 직업 정서? 어쨌든 그런 비스무리한게 유사한 사람들이라, 누가 ‘영화 엑시트 제목만 보고 스타트업 피인수되는 이야긴 줄 알았다'는 끔찍한 드립을 쳐도, 다 같이 빵 터져서 웃을 수 있을 만큼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래서 술자리의 분위기는 꽤 끈끈했다.
창업 6개월 차 스타트업 대표 A는 최근에 진행한 소비자 조사 결과가 별로라서, 과감하게 아이템을 바꿔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A는 6개월 만에 벌써 아이템을 2번이나 바꾼 이력이 있다. 나는 그래서 '소비자 조사 결과를 더 자세히 분석하고 부족하면 더 해라. 남이 떡이 커 보인다고 맨날 방향만 바꾸는 게 무슨 스타트업이냐. 일단 최대한 가볍게 제품을 만들어서 시장 반응을 봐라. 대표의 감정보다 논리와 숫자가 의사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B는 대기업 사내 벤처팀의 리더이다. 10개월째 제품 개발 중인데 최근에 회사 상황이 어려워지자 내부에서 사내 벤처팀에 대한 압박과 견제가 늘어나서 큰 고민이라고 한다. 듣기만 해도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래서 ‘사내 벤처의 장점이 낮은 리스크라면 지금 겪고 있는 일은 그 반대급부다.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10개월이 사실 운이 좋았던 거고,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거다. 최대한 제품 출시까지 버텨라’라는 위로를 건넸다.
예비창업자 C는 아직 뚜렷한 창업 아이디어도 없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지만, 최근에 회사에서 받은 부당한 대우와 주변 지인의 창업 성공 소식 때문에 당장이라도 창업을 해야 하나 고민이라고 한다. C에게는 ‘스타트업을 불행한 직장생활의 도피처쯤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안일한 생각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베르세르크 가츠의 말을 명심하라. 창업 우습게 보지 말고 제대로 준비해라.’라고 좀 다그쳤다.
술자리가 파하고 택시와 타다를 불러보았지만 잡히질 않는다. 아무래도 좀 기다려야 될 것 같다. 자정이 갓 넘은 신논현역이니 당연한 일이다. 문득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오늘도 결국, 술자리에서 조언해주고 상담하는 역할을 또 해버렸다. 나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에게 자꾸 뭘 물어본다. 나는 또 좋다고 X도 모르면서 꾸역꾸역 답을 한다. 남의 일에 훈수 두는 일, 하다 보니 참 쉽고 재밌다. 내 일 아니니까 부담도 없고.
문득 오늘 낮에 넷플릭스로 다시 봤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났다. 파리로 여행 간 미국 소설가가 1920년대와 1890년대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해서 당시의 다양한 예술가들을 만나서 벌어지는 몽환적이고 유쾌한 스토리의 영화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변태 영감, 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길 펜더는 그야말로 너무 부러운 놈이다. 물론 약혼녀 레이첼 맥아담스(!)와 내연녀 마리옹 꼬띠아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레아 세이두(!!!)와 잘 되는 그의 엄청난 여성 편력도 엄청 부럽긴 하다. 와, 써놓고 보니 진짜 나쁜 놈이네. 뭐 어쨌든 그것보다 더 부러운 것은 그가 자신이 동경하는 젊은 시절의 예술가들을 직접 만나서 조언도 얻고 도움도 받았다는 것이다. 소설가가 꿈인 사람이 젊은 시절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거스루트 스테인에게 피드백을 받다니!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일이 아닌가? 하아, 나도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서 젊은 시절의 스타트업 창업가들을 만나서 조언도 얻고 자극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내 앞에 오래된 차 한 대가 섰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차에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훈훈한 차 내부 온도에 쌀쌀한 날씨에 얼었던 몸이 스르르 녹았다. 술기운이 더 확 도는 느낌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차는 나를 한 건물 앞에 내려주었다. 건물 앞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중소기업청 주관, 한국 벤처 네트워킹 파티 - 1997년 11월 7일
두둥
1997년 11월 7일
나는 이 농담 같은 상황을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디 앨런이 나의 기도를 들었나 보다. 속으로 그에게 변태 영감이라고 한 걸 사과하며 행사장에 들어갔다. 준비된 발표가 막 끝나서 뒤풀이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다들 앉아 있는 와중에 뒤늦게 행사장에 들어온 나에게 이목이 쏠렸다. 헐퀴.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소개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ㅌ… 아니 벤처 경력 10년 차인 프리랜서입니다. 오늘 많이 배우겠습니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이쿠야. 나는 빠르게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1997년에 10년 차면 업계 최고 경력이다. 나는 의도치 않게 졸지에 업계의 큰 선배급;;이 되었다. 행사 진행 요원이 와서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저쪽 상석 테이블로 가시죠. 자리를 하나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앗 잠시만요. 제가 해외(?)에 있다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네요. 상석 테이블에는 누가 계신가요?” “뭐,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쟁쟁하신 분들이죠. 저기 가운데 저분이 휴맥스의 변대규 대표님입니다. 올해 4월에 코스닥에 ���장한 휴맥스 아시죠? 그리고 저분은 작년에 인기 탤런트 김희애 씨와 결혼해서 화제가 된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 대표입니다." 쿨럭… 지금이 1997년이라는 실감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휴맥스에 한글과 컴퓨터라니! “혹시 좀 편한, 아니 상대적으로 젊은 창업가들이 있는 테이블은 어디인가요?“ “그러면 저기 앞쪽 테이블은 어떠신가요? '바람의 나라’로 대박 난 넥슨의 김정주 대표도 있고 팩스맨과 새롬 데이터맨으로 유명한 새롬기술의 오상수 대표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젊은 피, 다음커뮤니케이션즈의 이재웅 대표도 있군요. 또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창업한 골드 뱅크의 김진호 대표님도 있고요. 저쪽으로 가시겠습니까?” … 뭔가 여러 가지 의미로 전설적인 이름들이 마구 쏟아진다. 그런데 문득 내가 지금의 시대 상황을 너무 모르고, 또 자칫 큰 말실수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분들 다 만나보고 싶긴 한데… 결심했다. 우선은 1997년의 상황에 좀 익숙해진 다음에 저분들은 천천히 만나야겠다. “아… 저는 일단 여기 입구 쪽 구석 자리에 앉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실내가 다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아 상황을 좀 관찰하기로 했다.
바보 같은 인수 합병
구석 자리에 앉아 물 한잔을 마시며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내 옆자리에서 앉아 있던 처진 눈을 가진 선량한 인상의 젊은이가 말을 걸었다. "저기 업계 선배님이라고 하셨죠.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나는 1997년의 분위기도 알아갈 겸,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에 편하게 이야기하시라고 했다. "저는 올해 3월에 창업해서 이제 반년 남짓 회사를 운영한 초보 창업가입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서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최근에 대기업 프로젝트도 잘 끝내고 첫 매출도 엊그제 입금되어서 행복한 상황입니다.” “오, 그래도 빠르게 잘 자리를 잡으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요새 제가 고민이 있습니다." “어떤 건가요?" “저랑 친한 후배 놈이 지금 다른 회사에서 열심히 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에 IMF가 터진 후에 그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개발 중인 프로젝트를 올 스탑해야 한다고 합니다. 출시가 코 앞인데 날벼락을 맞은 거죠. 참 안타까운 사정이라, 제가 그 후배네 개발팀을 거둬들여서 개발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할까 고민 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앞으로 B2B 사업을 하면서 게임 쪽도 동시에 도전하게 되는 거라, 둘 다 잘 할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됩니다." 휴, 일단 이 젊은 대표 덕분에 1997년 11년이면 한창 IMF 때문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는 귀중한 정보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일단 머릿속에 이 정보를 잘 갈무리하고, 동시에 이 한심한 작자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따끔하게 충고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표님, 혹시 이 회사 하시기 전에는 무슨 일 하셨습니까?” “아, 저는 개발자였죠. 한글과 컴퓨터나 한메소프트 같은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습니다.” “혹시 그럼 게임 개발 경험이나 운영 경험은요?“ “그… 없습니다." “그럼 제가 무슨 말 할지 대충 감 잡으셨을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 전혀 경험이 없는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한 가지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창업한 지 반년 좀 넘었는데 벌써 두 가지, 그것도 전혀 시너지가 나지 않는 다른 사업을 함께 운영하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울까요? 후배분 사정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IMF 시대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회사가 도산할지, 그리고 경영 상황이 얼마나 악화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 부디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너무 세게 이야기한 것 같아 좀 미안해졌다. 부드러운 말로 그를 만류하려던 찰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 선배님 마침 그 후배 놈이 일루 오네요. 어이~ 재경이~! 송재경! 여기야~!” 나는 마시던 물을 도로 뱉어냈다. “푸흡.. 뭐라고요? 그 후배가 그 바람의 나라를 만든 바로 그 송재경 씨라고요?" “아니… 저 친구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김정주 대표는 알아도 재경이는 알기 힘든데..." “그.. 그러면 잠깐만요. 혹시 그럼 송재경 씨를 데려갈까 고민하는 당신이 바로?" “아이고 다짜고짜 제 고민부터 이야기하느라 정식으로 소개도 못 했네요. 저는 엔씨소프트라는 자그마한 B2B 회사의 김택진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맙소사. 지금 내 앞에서 방금 온 후배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라니, 그리고 그에게 헤드락이 걸려있는 사람이 XL게임즈의 송재경 대표라니… 분명히 아까 사정을 들었을 때는 말리는 게 당연한 상황인데, 등장인물을 알고 나니 이것 참 황당하기 그지없다. 만약 김택진 대표가 내 조언 대로한다면, 아마 한 달 뒤에 송재경 대표는 엔씨소프트에 합류하지 않을 거고 내년에 ‘리니지’라는 게임은 출시되지 않겠지.
도대체 이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나는 일단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날아간 멘탈을 좀 추스를 필요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가까이 다가와 “저 빠른 67, 32살이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형님이시죠?” 어쩌고 하는 김택진 대표를 제대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심경
다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와중에 몇 명만 앉아있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테이블이 보여서 일단 그곳으로 피신했다. 리니지 사건(?)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멘탈을 다잡고 보니, 반대편에 혼자 차분하게 앉아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통성명부터 해야겠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저는 아직 정식으로 창업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대기업 사내 벤처팀에서 서비스를 준비 중인 사람입니다.” 절대 방심할 수 없다. 아까 김택진 대표와 송재경 대표에게 했던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 나는 재차 캐물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현재 소속, 준비하시는 서비스, 그리고 당신의 이름까지 빠짐없이 소상히 말씀해주세요” 나의 조금 무례한 요구에도 그는 눈만 살짝 크게 떴을 뿐이다. 그러고는 이내 아까와 똑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네 저는 삼성 SDS 사내벤처 웹글라이드 팀 소속입니다. 온라인 검색기술을 개발 중이고요, 이름은 이해진입니다.”
…천만다행이다. 물어보길 정말 잘했다. 지금은 그저 삼성 SDS 직원에 불과한 이 남자는, 훗날 네이버와 LINE의 이해진 의장이 된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말을 더 붙여본다. “이해진 팀장(!)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고 계시는 사내 벤처 분위기는 어떤가요? 출시 준비는 잘 되시나요?" “사실은 안 그래도 고민이 많습니다. 계속 제품 개발에 매진 중인데, 최근에 회사 상황이 어려워지자 내부에서 압박과 견제가 늘어나서 큰 고민입니다.” 나는 그가 말한 내용에서, 그리고 내가 하는 맞장구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사내 벤처의 장점이 낮은 리스크라면 지금 겪고 있는 일은 그 반대급부겠지요. 그래도 한동안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었을 테니까요. 내부의 압박과 견제는 어쩔 수 없는 거니 지금은 그저 제품 출시까지 최대한 버티시는 게 최선 아닐까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IMF 때문에 상황이 갑자기 안 좋아져 더 힘들어졌습니다. 경쟁상황도 너무 치열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한국에 코시크과 심마니 같은 업체들이 잘하고 있고, 최근에 검색에 뛰어든 다음은 올해 5월에 무료 이메일을 오픈에서 유저들을 긁어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해외 업체들도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야후라는 세계 최대의 검색 서비스가 있습니다. 조만간에 일본 소프트뱅크와 합작해서 한국에 진출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리고 지난달에 최초로 흑자를 넘긴 괴물 신인 라이코스라는 곳도 있는데, 아시아 시장도 관심이 있다고 진출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 중이랍니다. 이런 와중에 저희 팀이 서비스를 다 개발하고 출시하려면 아직 좀 남은 상황인데, 그때까지 팀과 제가 버틸 수 있을까요? 시장에 기회라는 게 남아있을까요? 그때 저희가 파고들어 갈 틈바구니가 있을까요?" 그는 물을 한잔 마시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가 하는 일이 아무래도 규모가 작은 사업이다 보니 삼성 SDS에서 직접 사업화를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십중팔구 제가 직접 회사를 차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에 대해서 걱정이 앞섭니다. 제 주변에 성공한 친구들과 저를 비교하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저의 절친인 다음의 이재웅 대표나, 대학원 시절 룸메였던 넥슨의 김정주 대표 같은 친구들이 사업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전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입니다. 이런 제가 앞으로 사업을 잘 할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요즘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저 자신에 대한 고민이 겹쳐 매일 밤잠을 설칩니다."
나는 한창 Web 2.0이 유행하던 2008년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복학생이었고, 소프트뱅크 리트머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한 대학생 스타트업에 막 합류했을 때였다. 그 당시의 나는 스타트업이 먹을 만한 것들을 절대로 흘리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꼼꼼하게 트래픽을 싹쓸이하는 네이버가 너무 얄미웠다. 주변 동료 스타트업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네이버를 욕하는 게 일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밉기도 했지만 사실 네이버가 너무 무서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게 이해진 대표는 항상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 같은 이미지였다. 그리고 나는 그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잘 안 풀려서 계속 고생하지만 결국에는 검색 전쟁의 최종승자가 될 것이며, 또 몇 년 뒤에는 일본에서 LINE이 대박을 터트릴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내리는 결정과 행보에 대해 사람들은 욕도 하고, 부러워도 할 거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다. 그가 무려 '대기업 총수’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살면서 내가 이해진 대표를 안쓰럽게 생각할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번민하고 있는 이 서른한 살의 젊은 대기업 직원은, 그저 불확실한 미래에 흔들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내가 자주 만나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안타까운 한 명의 예비 창업자의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안쓰러운 마음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진 팀장님, 아무리 힘들더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버티고 최선을 다하면 무조건 잘 되실 겁니다.”
지금의 기분을 맨정신에 설명하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아무래도 술을 좀 더 마셔야겠다.
희미한 기억들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고, 나는 1997년 11월의 밤에 푹 빠져들었다. 나는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다니면서 파티를 즐겼다. 다양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30대 초중반의 대표들이다 보니 주량, 에너지, 자신감 그리고 입담까지 장난이 아니었다. 신나게 같이 어울려서 놀다 보니 술에 거나하게 취하게 되었다.
뭔가 이방인 느낌이 나는 친구도 만났다. 와튼 MBA였던가? 하여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Kevin이라는 미국물 덜 빠진 동생인데, 이 친구도 한국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처지라 왠지 동질감이 느껴져서 의기투합해서 신나게 마셨다. 여기 있는 벤처 회사 대표들 대부분이 정말 재미있고 입담도 좋은데 왜 방송국에서 안 데리고 가는지 모르겠다고, 한 명씩 개인 방송국을 차려주고 싶다는 실없는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한 것 같다.
우습게도 중간에 투자자 한 명이 따로 한번 보자고 하면서 명함을 주고 갔다. 하버드 출신에 Chales라는 아주 젊은 투자자였는데, 회사 이름이 리타워 뭐시기 였던것 같은데… 흠 잘 기억이 안 난다.
이런 어려운 자리에 학생 자격으로 참여한 기특한 대학생 친구들도 있었다. 게임 쪽으로 창업하고 싶다는 22살의 서울대 응용화학과 95학번 친구와 25살 서강대 전자공학과 92학번 친구였는데, 눈빛도 초롱초롱하고 아주 똘똘한 친구들이었다. 옛날 생각도 나고 기특하기도 해서 지갑에서 용돈도 꺼내서 줬다. “너희들이 커서 사업하게 될 때쯤에는 말이야 중국이 시장을 개방해서 큰 기회가 올 거야. 혹시 알아? 너희 같은 애들이 열심히 하면 거대한 중국 시장에서 한국 게임이 1, 2위 할 수도 있을지? 꿈을 크게 가지렴!”
그리고 마지막에 꽤 특이한 사람도 만났는데, 재작년에 창업한 의사 출신의 사업가라더라. 뭐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만드는 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한국판 카스퍼스키 같은 건가 봉가. 나이가 나랑 동갑인 36살이라고 해서 친구 먹고 러브샷도 했다. 취해서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난다. 주위 사람들이 별난 의사라고 부르던데…
후… 아무래도 술에 많이 취한 것 같다. 파티의 뒷부분은 기억이 희미하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가 붙잡는다. 뒤돌아보니 제일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였다. “아 선배님 벌써 가시게요? 그럼 이거 주차 쿠폰 받아 가세요. 쿠폰이 어디 있더라…" 품을 뒤지는 그를 만류하며 “아 저 차 안 가지고 왔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가 깜빡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후배분 게임 있잖아요. 그거 꼭 인수하세요! 할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승리의 NC!! 질주의 다이노스!! 워워워워워워~~" 나는 1997년의 그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응원을 외치며, 황당해하는 그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최종 보스
건물 밖에 나와 벤치에 궁둥이를 붙였다. 시원하다기보다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오히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아까 행사장에서 뵈었던 선배님인 것 같은데, 술 많이 드셨나 보네요."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이가 말을 건다. “네 안녕하세요. 술 좀 깨고 이제 돌아가야지요.” 마지막에 ‘미래로’라는 말을 겨우 삼켰다. “아까 다른 분들이랑 계속 같이 계셔서 좀 아쉬웠습니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아무리 봐도 그가 오늘의 마지막 상담인가 보다. 그는 과연 뭐가 고민일까? 그리고 그는 누구일까? 내가 아는 사람일까? “아휴 그럼요. 혹시 어떤 일 하시는 분이신가요?" “네, 저는 대기업 6년 차 직장인입니다. 요새 미래도 안 보이고 재미도 없습니다. 주변에서 다들 창업하는데 까짓거 저도 창업하려고요. 내년에는 무조건 창업하기로 했습니다.” 하아… 2019년이나 1997년이나, 겉멋만 잔뜩 들어 창업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그래도 무슨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다. “그러면 혹시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하실 생각입니까?” “아… 아직 뭐 확실한 건 없고요. 일단 내년에 목 좋은 대학교 하나 골라서 PC방 차리고 그다음에 돈 벌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살짝 부아가 치민다. “아니, 창업을 불행한 직장생활의 도피처쯤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안일한 생각입니다. 창업이 장난인 줄 아십니까? 일단 PC방 하면서 천천히 생각할 일이 아니라 제대로 준비하셔야죠.” 그런데 그의 반응이 희한하다. 오히려 씩 웃으면서 너스레를 떠는 게 아닌가? “어이쿠 뭘 그렇게 흥분하십니까. 헤헤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이건 정말 제가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건데, 선배님한테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는 넥슨의 바람의 나라나, 최근에 런칭한 울티마 온라인 같은 게임 말고 좀 다른 형태의 게임에 관심이 많습니다. 훨씬 더 많은 대중이 즐길 수 있는 가볍고 친숙한 게임 말이죠. 예를 들어 고스톱이나, 포커, 당구 같은 쉽고 부담 없는 게임요. 이런 가벼운 게임을 온라인에서 할 수 있게 만들면 전 국민이 짬이 날 때마다 가볍게 즐기지 않을까요? 막 친구끼리 공강 시간에 '한게임 할까?’ 하면서 당구 하러 가는 것처럼 말이죠.”.
싸늘하다. 몇 가지 요소들이 조합되어 비수가 되어 날라와 꽂힌다. 겉으로는 허술해 보이는 이 사람의 인상과 목소리가 생각보다 낯이 익다고 생각하는 찰나 “흠, 한 게임? 뭔가 느낌이 오는 이름 아닌가요? 하하하” 라고 그가 웃었다. 순간 나의 의심은 곧바로 경악이 되었다. 나는 이 유쾌한 젊은이가 내년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한양대 앞 PC방 사장님이 될 것이고, 또 이어서 한게임을 창업할 것이며 그리고 더 나중에는 콧수염을 기르고 카카오톡이라는 앱을 출시하게 되리라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 뭐 하나 맞추는 게 없구나. 하하하. 나는 32살의 삼성 SDS 6년 차 직원 김범수 씨(!)를 따라 웃었다. 정말 멋진 마무리 펀치구나.
차갑고 소심한 영혼
IMF가 휩쓸고 간 서울의 밤은 분위기와 날씨 모두 쌀쌀했지만 나는 하나도 춥지 않았다. 나는 서울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분명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과 유사한 경험을 하긴 했는데, 바로 전에까지 한국 스타트업계의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왔는데,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경험이었다. 선배 창업가들의 조언을 받아 뭔가 더 발전하고 싶었는데 내가 오히려 오지랖 넘게 조언도 하고 주제넘게 위로도 하고 쿠사리도 먹다니. 하지만 또 즐겁다. 왜일까? 2019년의 그들을 보면 절대 상상할 수 없었던, 1997년의 그들의 고민과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왜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일까?
2019년 시점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성공으로 그어진 한 줄의 선명한 선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이 그어지던 순간으로 돌아가 보면 완전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꺾여 있는 마디 하나하나가 전부 의사결정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부의 두려움과 불안과 싸우고 외부의 회의와 냉소를 버티며 겨우겨우 선을 그었을 것이다. 스타트업에 비법 따위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또 깨닫는다. 고뇌한 만큼, 공부하는 만큼, 고생하는 만큼 된다. 모든 노력하는 스타트업이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성공한 스타트업 중에서 노력하지 않은 스타트업이 없는 것처럼.
관중석에 앉아 비판이나 하고 훈수나 두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인한 사람이 어떻게 실수하는지, 어떻게 하는 편이 더 좋았을지에 대해 지적질이나 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사람은 경기장에 서 있는, 먼지와 피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용맹하게 싸우는 사람입니다. 거듭해서 실수도 하고 곤경에도 처하지만 계속 행동하려 나서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열정과 헌신을 의미를 알고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면 거대한 성취를 얻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대담하게 맞서다가 실패할 사람, 그러므로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차갑고 소심한 영혼들과는 결코 한자리에 놓이지 않을 사람입니다. -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1910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 연설 “Citizenship in a Republic(공화국에서의 시민권)” 중
예전에 갈무리해둔 글인데, 다시 한번 꺼내서 읽어본다. 남의 일에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전체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적당히 냉정한 소리를 내뱉는 것은 얼마나 안일하고 무례한 태도인가.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평소에 혐오하던 자들처럼, 차갑고 소심한 영혼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벨에포크?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1997년의 서울 밤거리를 걷고 있는데, 눈앞에 뜬금없이 마차(!)가 와서 선다. 그렇다! 까먹고 있었다. 나는 지금 우디 앨런 유니버스;; 속 아닌가? 한 번의 시간 여행 기회가 더 있다. 과연 대한민국 창업의 벨에포크 시대는 몇 년도일까? 그곳에는 누가 있을까? 기대에 부풀어 마차에 탄다.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친구 한 명이 타고 있어서 그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혹시 올해가 몇 년인가요. 그리고 이 마차의 목적지는 어딘가요?" "아이고 술 냄새야. 어르신, 약주를 거하게 하셨군요. 올해는 당연히 서기 1956년입니다. 그리고 이 마차는 한국 기업가 모임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1956년이라… 배경은 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아직 폐허 속의 한국. 과연 나는 이 시대에서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저기… 학생. 거기 가면 누구랑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요? 지금 유명한 사업가는 누구인가요?" “최근에는 이병철 사장이라는 분이 유명합니다.” “오! 그런가요?” “네. 그분은 원래 부산에서 고철 장사하시던 분인데 전후에 상경하신 다음 최근 식품업과 섬유업을 창업했는데 이게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 흠. 1956년의 이병철 회장은 삼성물산을 경영하면서 식품 스타트업(제일제당)과 패션 스타트업(제일모직)을 창업한 상황이구나, 지금으로 치면 마켓 컬리랑 스타일쉐어를 동시에 경영하는 창업가 정도로 봐야 하나? “혹시 또 누가 있을까요?” “그 외에도 아주 특이한 분이 있습니다. 건설회사 하시는 40대 초반의 젊고 추진력 넘치는 호걸인데요, 성함은 정주영 대표입니다. 꼭 한번 이야기 나누어 보세요. 그리고 재작년부터 없어서 못 파는 거로 유명한 럭키 치약 아시죠? 이승만 박사님도 사용하신다는 그 제품을 만든 락희화학 공업사의 구인회 사장님도 계십니다. 아주 인품이 훌륭한 분이시죠. 게다가 제가 이야기 듣기로 오늘 많은 분이 존경하는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님도 참석하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크으…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사람들이다. 전쟁 직후 폐허나 다름없던 한국 땅에서 사업을 막 시작한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엄청난 자극과 배움이 될 것 같다.
한편,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 똘똘한 젊은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혹시 우리 약관의 젊은 친구분은 딱 봐도 학생인데, 고등학생? 대학생? 어떻게 이런 내용을 다 아시나요?" “네 어르신, 저는 연희대학교의 경제학과 신입생입니다. 저도 사업가가 꿈이라 미리 이런 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많이 배우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커... 역시 젊은 친구의 순수한 열정과 당찬 포부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 같다. 나는 그가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저는 세계에 진출하는 국제적인 사업가가 될 겁니다.”
마차는 충격에 휩싸인 36살의 시간 여행자와 20세 김우중 군(!)을 태운 채, 시간을 달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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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to the end to find out what post is coming up next! Also check out my masterlist for the complete list of my previous posts all sorted out! And enjoy this post!
||Masterlist||
Note: The pronunciation of the letter “ㅢ” can change depending on how and when it is used.
You already know that ‘I’ in Korean is 저/나. You also know the translation for various objects in Korean.
“의” is a particle that indicates that one is the owner/possessor of another object. It has the same role as putting an ___’s (apostrophe s) in English. For example:
Note: ‘저’ as mentioned previously is the more formal and polite version of ‘나’.
저 = I 책 = book 저의 책 = my book
저의 차 = My car 그 사람의 차 = That person’s car 의사의 탁자 = The doctor’s table 저의 손가락 = my finger
‘저의’ and ‘나의’ can be shortened to ‘제’ and ‘내’
내 가방= My bag
제 방= My room
You can use these words in sentences you are familiar with (with verbs and adjectives):
선생님의 차는 크다 = The teacher’s car is big 선생님의 차는 커 / 선생님의 차는 커요
나의 손가락은 길다 = My finger is long 나의 손가락은 길어 / 저의 손가락은 길어요
그 여자의 눈은 아름답다 = That woman’s eyes are beautiful 그 여자의 눈은 아름다워 / 그 여자의 눈은 아름다워요
You will find that words like “my/our/their/his/her” are often omitted from sentences. As you will learn continuously throughout your Korean studies, Korean people love shortening their sentences wherever possible. Whenever something can be assumed by context, words are often omitted from sentences to make them more simple.
For example:
나는 나의 친구를 만나다 = I meet my friend 나는 나의 친구를 만나 / 저는 저의 친구를 만나요
Can be written as the following:
나는 친구를 만나다 = I meet (my/a) friend 나는 친구를 만나 / 저는 친구를 만나요
In this case (and many others like it) you are clearly meeting “your” friend, so the word “my” can be omitted from the sentence.
Always try to stay away from translating sentences directly, and try to focus more on translating sentences based on context as done above.
Beginner’s Course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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