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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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korea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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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 어촌
서산시(瑞山市)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북부 태안반도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당진시와 예산군, 서쪽으로 태안군, 남쪽으로 홍성군, 북쪽으로는 황해와 접한다.
서산시는 선사 시대부터 중요한 곳에 위치해 해미 휴암리, 대산읍 대로리 등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유적들이 발견되고있다. 이후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청동기 시대에는 마한의 속국 중 하나로 속해 치리국국(致利鞠國)이라 불렸다..
삼국시대에 와서는 백제에 속해 중국과 일본, 동남아와의 해상요충지로 백제가 아시아 여러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때의 해상요충지였다. 특히 행정상으로는 기군(基郡)이였으며 새로운 문화가 제일 먼저 형성돼 마애삼존불상, 보원사지 등 불교문화를 이끌었다
신라 때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인종 21년(1143)에는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충렬왕 10년(1284) 서산군으로 승격, 지군사(知郡事)를 두었고 이어 충렬왕 34년(1308) 서주목(瑞州牧)로 승격하였다. 충선왕 2년(1310) 서령부(瑞寧部)로, 후에 또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격하했고, 조선 태종 13년(1413) 서산군으로 되었으며 홍주목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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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iatv1004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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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끝나는 단어 알아보기 ⭕️
"지구 *사랑* : (1)1998년 최일규가 안무하고, 발표한 현대 무용 작품. 위기에 처한 지구의 환경을 진단하고, 지구인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징*사랑* : (1)고려 시대에 둔 정팔품 하(下)의 문관 품계. 문종 때에 정하여 충렬왕 1년(1275)에 없앴는데, 공민왕 18년(1369)까지 설치하고 없애기를 거듭하였다." "궁정풍의 *사랑* : (1)중세 서구의 기사도를 다룬 로맨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귀부인과 기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이상주의적 사랑의 유형." 붙이*사랑* : (1)동족이나 가까운 피붙이에 대한 사랑. 갑작*사랑* : (1)갑작스럽게 느끼는 사랑. 등*사랑* : (1)고려 시대에 둔, 정구품 하(下) 문관의 품계. 아래*사랑* : (..
2024.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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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jxnd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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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프리카 먹어야지
티프리카드(victoria di Paprika, 로마 원로원의 집무실)와도 관련이 있다. 이곳에는 약 600명의 사람들이 함께 생활한다. 성수항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에 있는 어촌정주어항의 하나. 개펄이 많아 모래가 많이 섞인 사주를 가지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티프리카 바로가기 링크: https://bit.ly/45a1MDq 본래 명칭은 소죽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제군 가배도에 편입되었다. 죽도는 조선 시대 충렬왕 때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하였다고 한다. 물이 맑고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1942년 3월 31일 준공된 부잔교와 1970년 12월 6일 설치된 길이 290m의 방파제가 남아 있다. 2003년 11월 29일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52호로 지정되었으며,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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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jx8p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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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피딩해야지
풋피딩을 위한 피니시. Barclays 2 – Portable Media Video Capture From The Dark Sides (1995)澙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1274년(충렬왕 즉위)에 이부낭중으로서 왕에게 시폐를 상소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다음 해 3월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기용되어 ��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충선왕이 복위된 사실을 알렸다 풋피딩 바로가기: 풋피딩에 대해 더 알아보기 뒤에 밀성군(경주)의 군민들이 이를 반대하며 난리를 일으켰는데, 경주의 주민들도 이에 가세하자 왕이 이들을 달래기 위해 부사를 제수하고 관직을 내리게 하였다. 이때 그는 “신은 신과 같은 사람은 천하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감찰어사가 되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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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chesonthesky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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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 Loves (왕은 사랑한다)
Episode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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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ingtalker-kr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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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학교생황 - 창원 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학들
최신 창원 소개
창원시(昌原市)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중남부에 있는 특례시이자 경상남도청 소재지이다. 인구 103만명의 경상남도 최대의 도시로, 해상무역과 공업이 발달하였다. 시청 소재지는 성산구이며, 행정구역으로는 5구 2읍 6면 46행정동 195법정동을 두고 있다.이 지역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인 청동기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이처럼 일찍부터 역사가 시작된 것은 바다가 접해 있어 해상교역에 유리했고, 구릉이 발달해 물과 땅을 적절히 이용하며 살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특히 창원 다호리의 고분군에서 볼 수 있듯이 청동기, 철기시대에는 창원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거대 집단이 강성했다. 이후 이 집단은 철기문명국인 가야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가야 연맹체의 탁순국(300년? ~ 530년?)을 거쳐 676년 신라 문무왕 때에 굴자군(屈自郡)이 설치되고, 757년 경덕왕 때 굴자군을 의안군(義安郡)으로 고쳤다. 지금의 마산 지역인 회원현(會原縣)은 본래 골포(骨浦)라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합포(合浦)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기인 1018년 현종 9년에 두 현을 모두 금���(金州) 관하에 붙였다가 뒤에 각기 감무(監務)를 두었고, 1282년 충렬왕 8년 의안을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를 회원현(會原縣)으로 승격하여 현령을 파견하였다.
창원 날씨 안내
남해 연안에 있어 연교차와 일교차가 적은 편이다. 특히 겨울철이 온화하다. 부산광역시와 기후가 비슷하며, 진주시와 같은 경상남도 서부 내륙지역보다는 좀 더 온화하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이 2.8℃, 가장 더운 8월의 평균기온이 26.5℃이며, 강수량은 1,545.4mm로 비가 많은 지역이다.
창원 교육 환경
창원시에는 4개의 대학교와 3개의 전문대학이 있으며, 46개의 고등학교, 63개의 중학교, 105개의 초등학교가 있다.(각주:위키백과창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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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ywho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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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쓰지 말거라. 나는 핍을 신사로 만들었다. 핍은 이제 너를 신사로 만들 것이다. 그런 내가 너희 둘에게 적당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주인공을 보며) 얘야, 그리고 (허버트를 보며) 핍의 벗아, 너희 둘은 믿어도 좋다. 내가 항상 고상한 말만하는 입마개(개에게 채우는 입마개 상상바람)를 쓰고 있겠다고 말이다. 내가 천박함에 내 자신을 넘겨주었 던 그 30초 이후부터 나는 입마개를 내 입에 채웠단다. 나는 그 입마 개를 현재도 차고 있다. 그리고 항상 차고 있을 것이다.”  허버트(23세, 주인공의 절친)가 말했다. “그렇고말고요(앞으론 험한 말씀을 하지 말라는 대답임 -_-;;).”  하지만 허버트는 프로비스의 방금 말에 어떤 구체적인 위안도 찾지 못한 마냥, 여전히 당혹스럽고 저고리 설명 저고리는 윗옷의 하나로 길, 소매, 깃, 섶, 동정, 고름 등으로 구성된다. 상대부터 남녀가 공통으로 착용하였는데 삼국시대에는 유복, 복삼, 또는 위해라고 하였다. 위해란 신라말로 ‘웃옷’의 표음이며 현재의 저고리보다는 길어 허리에 띠를 매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삼, 한삼, 적고리, 의, 져구리, 저고리, 곁막이가 있고 궁중용어로는 '동의대'라는 말로 쓰였다. 저고리라는 말은 조선 세종2년(1420)의 실록에 처음 보이지만 고려 충렬왕 이후 원의 지배 하에 있을 때부터 사용된 용어이다. 옷감은 계절에 따라 면, 마, 견, 단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조선중기 이후 저고리의 봉제에서 솔기 방향에 음양사상을 적용하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즉 겉섶의 방향은 섶 쪽으로, 안섶은 길 쪽으로, 뒷중심선은 입어서 오른손 쪽으로 처리하고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조선시대 남자저고리(갈적삼)는 길이 52cm, 품 44cm, 화장 61cm이다. 감을 짖이겨 낸 즙으로 염색을 한 제주도의 옷, 이렇게 만들어진 갈옷은 통기성과 방수성이 매우 좋아 작업복으로 사용되었다. 형태는 일반 저고리와 같고, 무명으로 옷을 만든 후에 염색을 했다. 참고문헌 한국복식문화사전(1998) / 김영숙한국복식2천년전(1995) / 국립민속박물관한국복식사(1998) / 유송옥한국복식문화사(1998) / 유희경,김문자한국복식사(2001) / 안명숙,김용서 색측정값   RGB La*b* NCS 255/102/0 54/31/46 2570-Y40R 평면도식화 참고자료 문화콘텐츠닷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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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shfhiug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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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지보 ㉠ 충선왕 즉위년(1298) 무술년}
邯鄲之步(한단지보) 한단(邯鄲)에서 걸음걸이를 배운다는 뜻으로,  제 분수(分數)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내다가 이것저것 다 잃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하여 이르는 말 충선왕 즉위년(1298) 무술년 • 충렬왕 24년 1월 갑진일.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국왕(國王)으로 책봉하는 한편 충렬왕을 일수왕(逸壽王)으로 임명했다.병오일. 왕이 양위[內禪]를 받아 강안전(康安殿)1)에서 즉위했다.무신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2)“옛날 우리 태조께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큰 이름을 무궁히 빛낸 후 역대 선왕께서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여[堂構3)] 지금까지 381년이 경과했다. 우리 광문선덕태상왕(光文宣德太上王 : 충렬왕)께서는 세자로 있을 적[潛邸4)]에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단안을 내려 황제의 조정에 입시하여 황녀를 배필로 맞이함으로써 선조의 위업5)을 그대로 잘 이어받아 스물다섯 해 동안 나라를 다스리니[嗣大曆服]6) 승평한 왕업이 이에 융성하게 되었다. 아아! 그러나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나의 모후이신 정민장선인명태후(貞敏莊宣仁明太后)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선왕께서는 마음이 울적한 나머지 정무에 권태를 느끼시고 나라의 온갖 중요한 일들을[繁機]7) 어린 나에게 맡기시니 재삼 굳이 사양했어도 허락을 얻지 못하여 결국 새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잘 것 없는 나는 다행히 선제(先帝 ; 원 세조)의 외손으로, 황제와 황태후의 돌보심을 받아 공주와 혼인하고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역대 선왕들께서 쌓으신 공덕에 힘입어 나라의 크나큰 기업(基業)을 길이 보전하려면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미치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에 금년 정월 21일 새벽 이전의 범죄자 가운데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는 모두 용서한다.1. 카다안[哈丹]이 침략8)해 왔을 당시 모든 주군(州郡)이 소문만 듣고서도 항복해 그들을 맞아들였지만 원주(原州)만은 유독 외로운 처지이면서도 적의 침략을 좌절시켰다. 그런 뒤에야 여러 성들이 원주성을 본받아 적의 무리를 소탕함으로써 삼한이 다시 안정되었고, 선제(先帝 : 원 세조)의 한을 갚았으니 그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당시 방호별감(防護別監)을 지냈으며 판서(判書)로 은퇴한 복규(卜奎)9)와 전사(戰士)인 중랑장(中郞將) 원충갑(元冲甲), 그 고을의 수령, 장리(長吏(鄕吏)) 가운데 공을 세운 자에 대해서는 이미 포상을 실시했지만 오히려 부족한 바가 있으니 높은 관직에 발탁하여 등용함으로써 후대 사람들의 귀감으로 삼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고을에 부과되는 상요(常徭)와 잡공(雜貢)10)도 3년 간 면제해 주어야 할 것이다.1.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11) 삼한(三韓) 통일 이후 역대의 벽상공신(壁上功臣), 배향공신(配享功臣),12) 전쟁에 나가 전사한 공신의 자손들 가운데 비천한 기예 밖에 없는 탓에 공인(工人)·상인(商人)·장인(匠人)·악공(樂工)으로 전락한 자나, 공적이 있거나 은택을 받아 진작 양반(兩班)의 반열에 오른 데다 그 부모에게 흠결이 없는 자가 있는지 조사해 관직에 오를 길을 터 줄 것이다.13) 공신전(功臣田)14) 가운데 자손이 엄연히 있는데도 타인이 점유한 경우 연한(年限)에 관계없이 자손에게 돌려주게 한다. 또 동종(同宗)15) 가운데 공신전(功臣田)을 한 집에서 다 차지하고 있는 경우 그 족정(足丁)과 반정(半丁)16)을 구별하여 고르게 나누어 줄 것이며, 공신의 자손으로 남반(南班)17)에 속한 자는 동반(東班 : 문반)으로 고쳐 줄 것이다.1. 문(文)·무(武) 양반과 정로(正路)·잡로(雜路)로서 현재 관직에 있는 자는 등급을 올려준다. 동정직(同正職)18)으로 그 전에 관직을 받지 못했던 자는 이번에 모두 관직을 주도록 하며, 전부터 향직(鄕職)19)에 있던 자는 등급을 올려 주고 향직의 임기가 만료된 자는 향직계를 올려 줄 것이다.1. 각 관청 인리(人吏)들의 인사이동[動靜]은 한 번만 허락하며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관직에 처음 오르는 정원은 50명까지 허용한다. 근시(近侍)와 다방(茶房)20)의 관속들은 등급을 뛰어서 직위를 올려 주고 급사(給事)는 첫 관직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며, 남반에 속한 자는 연한 관계없이 동반으로 고쳐줄 것이다.1. 속담에, ‘승려들이 비직(批職)21)에 많이 오르면 나라가 망하고 집안도 패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비직의 수가 지나치게 많으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차후 그들의 승진과 폄출에 대한 사항을 철저히 보고하게 할 것이다. 또한 금후로 승려로서 법덕(法德)이 특별히 뛰어난 자가 있으면 법호(法號)를 덧붙여 주도록 할 것이다.1. 현재 유배 가 있는 자들 가운데 반란을 도모한 자, 불충과 불효죄를 저지른 자, 살인 강도범, 고의로 사람을 살해하려 한 자로서 얼굴에 입묵(入墨)하여 상호(常戶)로 충당한 자22)들을 제외한 나머지 죄인으로서 섬으로 유배 가 있는 자들은 육지로 내 보내어 고향에 와서 거주하게 한다. 또 현재 고향에 거주하고 있는 자는 임금을 알현하는 것을 허용하고 일단 알현한 자는 정상을 참작해 벼슬을 줄 것이다. 공사(公私) 간에 잡죄(雜罪)를 범한 자는 몰수했던 직전(職田)23)을 돌려주고, 종신토록 서용을 불허했던 자나, 정직(停職)당해 산직(散職)에 소속되었던 자들도 정상을 참작해 벼슬을 줄 것이다.1. 일본에 호송사(護送使)로 갔다온 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은퇴한 김유성(金有成)과 공역령(供驛令) 곽린(郭麟) 및 그들과 동행했던 관원들의 자손을 관직에 등용24)할 것이다.”기유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한학사승지(文翰學士承旨) 최참(崔旵),25) 학사(學士) 박전지(朴全之), 시독학사(侍讀學士) 오한경(吳漢卿)과 이전(李瑱)이 왕이 은사를 베푼 글을 작성한 공을 기려 각종 비단과 모시베를 각각 15필씩 하사했다.경술일. 왕이 덕자궁(德慈宮)26)을 찾아가 일수왕(逸壽王 : 충렬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왕의 장인인 진왕(晋王)이 평장(平章) 차라티무르[扎刺帖木兒]를 보내 공주의 죽음을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임자일. 중방(重房)27)에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계축일. 왕이 불은사(佛恩寺)28)에 행차해 궁궐 지을 터를 살펴본 후 그곳을 덕자궁(德慈宮)으로 정했다.을묘일.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덕자궁을 찾아가 선왕에게 전(牋)을 올려 태상왕(太上王)이라는 존호를 바쳤다. 왕은 자포(紫袍)를, 태상왕(太上王)은 황포(黃袍)를 입고 백관들의 하례(賀禮)를 받으니 당시 사람들이 삼한에서 보기 드문 성대한 일이라 칭송했다.○ 평양후(平陽侯) 왕현(王昡)과 대장군(大將軍) 김정(金精)이 왕과 일수왕(逸壽王)이 황제에게 사의를 표하는 표문을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병진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을 찾아가 태상왕(太上王) (충렬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는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날 또 태상왕(太上王)과 정화궁주(貞和宮主)를 맞아다가 왕궁에서 잔치를 열었다.• 2월 초하루 무오일. 왕이 처음으로 정동성(征東省)29)의 업무를 보았는데, 재추들과 행성좌우사(行省左右司)의 관리들이 왕을 알현하면서 원나라 조정의 의례에 따랐다.경신일. 아무간[阿木罕]30) 태자(太子)와 옹기라다이[甕吉剌歹]31) 승상(丞相)이 귀국길에 오르자 왕이 금교(金郊)32)까지 나가 전송했다.갑자일. 왕이 태상왕을 정화궁(貞和宮)으로 찾아본 후, “장목왕후(莊穆王后 :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에게 태후의 칭호를 덧붙여야 마땅하니 해당 관청은 의논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정묘일. 왕이 공주와 함께 인후(印侯)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기사일. 왕이 첨의밀직사(僉議密直司)를 왕궁(王宮)으로 삼으라고 지시했는데, 그 자리가 옛 언창궁(彦昌宮)의 터였기 때문이다. 애초 왕이 차신(車信)의 집을 왕궁으로 삼으려고 진작 공사에 착수까지 했는데, 지관(地官)이 그곳이 길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결국 이곳으로 정하고 크게 공사를 일으킨 것이다.경오일. 관등(觀燈)33) 행사에 참석차 왕과 공주가 태상왕(太上王)을 모시고 강안전(康安殿)에 행차했다.신미일. 연등회(燃燈會)34)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문한학사(文翰學士) 최참(崔旵)·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이전(李瑱)에게 상승국(尙乘局)35)의 안마(鞍馬)를 하사했다. 다음날 대회(大會) 때 신하들이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술잔을 올렸다. 네 학사(學士)36) 차례가 되자 왕이 그들을 앞으로 오게 한 다음 술을 주면서,37) “그대 학사들은 조금도 숨김없이 직언하라.”고 당부했다.갑술일. 총랑(摠郞) 강용정(姜用丁)을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로, 정랑(正郞) 유겸(柳謙)을 그 부사(副使)로, 국학사예(國學司藝) 허유전(許有全)을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직강(直講) 정형(鄭珩)을 그 부사(副使)로, 총랑(摠郞) 이원(李源)38)을 충청도 안렴사(按廉使)로, 낭장(郞將) 백응룡(白應龍)을 그 부사(副使)로 각각 임명했다.정축일. 감찰사(監察司)에서 교서랑(校書郞) 조진성(趙晋成)의 처 조씨(趙氏)를 수감했다. 조씨는 정랑(正郞) 조칭(趙偁)39)의 딸로 자기 친오빠인 조지열(趙之烈)과 간통했는데 모친이 그 사실을 알고 말리자 조지열(趙之烈)이 모친을 구타하고 누이를 은닉했기에 그 모친이 고소한 것이다.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갑신일. 왕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덕자궁(德慈宮)에서 태상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왕이 글을 내려 전 사간(司諫) 이승휴(李承休)를 불렀다.40)○ 이달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기근을 겪자 왕이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게 하는 한편 내주(內廚)에게 도토리를 올리게 한 다음 그것을 맛보았다.• 3월 무자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중찬(中贊) 정가신(鄭可臣)이 은퇴를 간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임진일. 왕이 정화궁(貞和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계사일. 왕이 각 도의 안렴(按廉)을 불러 백성을 잘 다스리라고 당부하는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술을 하사한41) 다음 각자의 임지로 보냈다.을미일. 방신우(方臣祐)·이숙(李淑)을 벽상삼한정광(壁上三韓正匡)으로. 오인영(吳仁永)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홍선(洪詵)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각각 임명했다.정유일. 진왕(晋王 : 원나라 진왕 카마라)의 생일을 맞아 왕과 공주가 태상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42)에서 잔치를 열었다.경자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와 건성사(乾聖寺)43)에 행차했다.○ 장양공(長陽公) 왕지(王潪)44)가 왕의 덕을 찬송하는 시를 지어 바치자 쌀 30석(石)을 하사했다.임자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45)을 열었다.○ 왕이 재신 최충소(崔冲紹)46) 및 한림(翰林)의 네 학사(學士)와 함께 삼교업(三敎業(儒·佛·道))에 대해 토론했다.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을 찾아뵈었다.을묘일. 고당왕(高唐王) 고리기스[闊里吉思]가 사신을 보내와 안평공주(安平公主 : 충렬왕비) 상(喪)의 부의(賻儀)를 전했다.○ 태상왕이 왕비 김씨(金氏(淑昌院妃))의 노비를 위해 내전(內傳)47)을 내려달라고 왕에게 요청했으나 왕은,“제가 즉위하는 날에 백성을 위하여 묵은 폐단을 반드시 없애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는데 내전(內傳)도 그 중의 하나이오니 분부를 따르지 못하겠나이다.”48)고 거절하였다.• 여름 4월 무오일. 우박이 쏟아졌다.○ 학사(學士) 최참(崔旵) 등 네 명과 승지(承旨) 김승(金昇)으로 하여금 관리의 선발[銓選]을 관장하게 했다.경신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인왕도량(印王道場)49)을 열었다.신유일. 왕이 개경에 머물러 ���는 지방관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별장(別將) 이하는 본역(本役)으로 복귀시켰다.갑자일. 태사국(太史局)50)에서, “도성에 거주하는 무당들의 음사(淫祀)51)가 날로 극성을 부리니 그들을 도성 밖으로 옮기게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을축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에서 태상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병인일. 왕이 사신(詞臣) 허유전(許有全)·조간(趙簡) 및 은퇴한 신하 김효신(金孝臣)과 최창(崔瑒)으로 하여금 현 정치의 잘잘못에 대해 직언하게 하면서 실책이 있으면 빠짐없이 즉시 상소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무진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에서 꽃놀이 잔치를 열었다.경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에 있는 태상왕을 찾아뵈었다.임신일. 또 덕자궁을 찾아갔다.을해일. 전 밀직사사(密直司使) 안전(安戩)이 죽었다.신사일. 우박이 쏟아졌다.○ 첨의사(僉議司)가 왕의 이름과 음이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嫌名] 원(元)·원(原)·원(源)·원(騵)·원(嫄)·원(羱)·원(原虫虫)·원(扌原)·원()·원(蒝) 등의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이를 허락하면서 아울러 원(遠)자도 쓰지 못하게 했다.• 5월 병술일. 공주가 조비(趙妃)를 투기하자 공주의 유모가 무뢰배들과 함께 몰래 음모를 꾸며, 공주가 왕에게서 소박을 맞았다고 하면서 코케부카[闊闊不花]·코케다이[闊闊歹]와 대장군(大將軍) 김정(金精)·오정규(吳挺圭) 등을 원나라에 보내 태후에게 고자질 하게 했다.52)경인일. 왕의 초대를 받아 서번(西蕃)의 바가스[八哈思]53) 등 19명이 찾아왔다.신묘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선왕들께서 관청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것은 적합한 사람을 얻어 모든 국무를 함께 처리하려는 뜻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상국의 조정에 입시해 몸소 선제(先帝 :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상국의 제도를 직접 상세히 관찰한 바 있다. 이제 외람되게 국왕으로서의 무거운 책임[重寄54)]을 맡아 나라가 당면했던 폐단을 모두 혁파했으나 다만 재상의 숫자가 옛 제도보다 훨씬 초과해 있는 바람에 조정의 의논도 상당 부분 차이가 커서 모든 일이 지체되고 있으니 그 수를 줄여야만 할 것이다.또 최근 들어 상국의 제도를 피해 백관의 명칭도 진작 고친바 있으나 동일한 것을 고치지 않은 것, 동일하지 않은데도 고친 것, 고친 명칭이 옛 제도를 따르지 않아 적절성을 잃은 것이 간혹 눈에 띈다. 즉위한 초기에 기존의 규정을 갑자기 고칠 경우 여론에 어그러질까 우려되기는 하나, 상황에 따라 변혁하는 일은 옛적에도 또한 있었던 일이다. 이제 역대의 관직을 참고하여 상국의 관직명과 관련되지 않는 경우에는 바꾸도록 하고 불요불급한 관청들은 폐지해 하나로 합하면 거의 관청의 숫자가 줄어 일의 처리가 쉬워질 것이다.”○ 이 날에 조인규(趙仁規)를 사도(司徒)·시중(侍中)·��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홍자번(洪子藩)을 좌복야(左僕射)·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홍규(洪奎)를 수사도(守司徒)·영경령궁사(領景靈宮事)로, 정가신(鄭可臣)을 사공(司空)·우복야(右僕射)·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인후(印侯)를 광정사(光政使)·참지기무(叅知機務)로, 김혼(金琿)을 검교수사도(檢校守司徒)·영봉상시사(領奉常寺事)로, 차신(車信)와 이지저(李之氐)를 함께 검교사도(檢校司徒)·자정원사(資政院使)로, 김지숙(金之淑)을 동지광정원사(同知光政院使)·참지기무(叅知機務)로, 안향(安珦)을 참지기무(叅知機務)·행동경유수(行東京留守)·집현전대학사(���賢殿大學士)·계림부윤(雞林府尹)으로, 유비(柳庇)를 광정부사(光政副使) 겸 권참지기무(權叅知機務)로, 최유엄(崔有渰)을 검교사공(檢校司空)·사헌대부(司憲大夫)로, 이혼(李混)을 검교사공(檢校司空)·서경유수(西京留守)·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정해(鄭瑎)를 남경유수(南京留守)·광릉부윤(廣陵府尹)으로, 최충소(崔冲紹)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행중경유수(行中京留守)·개원부윤(開元府尹)·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로, 박의(朴義)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로, 민지(閔漬)를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첨광정원사(簽光政院事)로, 원경(元卿)을 중경유수(中京留守)·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로, 민종유(閔宗儒)를 전조상서(銓曹尙書)·숭복관사(崇福館使)로, 허평(許評)을 민조상서(民曹尙書)로, 윤보(尹珤)를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의조상서(儀曹尙書)로, 최참(崔旵)을 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형조상서(刑曹尙書)로, 전승(全昇)을 숭문관학사(崇文館學士)·병조상서(兵曹尙書)로, 유욱(柳栯)을 병조상서(兵曹尙書)·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으로, 오한경(吳漢卿)을 사림학사(詞林學士)·시좌산기상시(試左散騎常侍)로, 이진(李瑱)을 사림학사(詞林學士)·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로, 홍자한(洪子翰)을 금오위(金吾衛) 섭상장군(攝上將軍) 겸 사헌중승(司憲中丞)으로, 장석(張碩)을 광정도승지(光政都承旨)·봉상경(奉常卿)으로, 김순(金恂)을 광정부사승지(光政副使承旨)·성균제주(成均祭酒)로, 조서(趙瑞)를 광정승지(光政承旨)·전객경(典客卿)으로, 이승휴(李承休)를 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시비서감(試秘書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심봉길(沈逢吉)을 사헌중승(司憲中丞)으로, 권영(權永)을 사림시강학사(詞林侍講學士)·시위위경(試衛尉卿)으로, 조간(趙簡)을 형조시랑(刑曹侍郞)·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으로 각각 임명했다.55)계사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승려는 이미 출가한 사람이라 위로는 군왕에게 절하지 않고 아래로는 부모에게도 절하는 않는 법이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승려와 속인들이 서로 절할 경우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비록 자기 집에 거처하는 하��은 승려라도 관청의 부역에는 차출하지 말도록 하라.”갑오일. 왕자 의충(宜忠)56)을 영가군(永嘉軍) 승선사(承宣使)로 의효(宜孝)57)를 강릉군(江陵軍) 승선사(承宣使)로 임명했다. 또 종실(宗室) 왕현(王眩)58)을 평양군공(平陽郡公)으로, 왕유(王維)59)를 함녕공(咸寧公)으로, 왕미(王亹)60)를 광릉군후(廣陵郡侯)로, 왕원(王元)61)을 한산군후(漢山郡侯)로, 왕지(王禔)62)를 통의군(通義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화(王和)63)를 단양군(丹陽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관(王琯)을 계양군(桂陽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상(王祥)을 임해군(臨海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구(王玖)64)를 한남군(漢南軍) 관찰사(觀察使)로, 왕빈(王贇)65)을 순정군(順正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헌(王軒)을 연평군(延平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형(王珩)66)을 시흥군(始興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숙(王璹)67)을 정산군(定山軍) 관찰사(觀察使)로, 왕마(王麻)를 영해군(寧海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광(王侊)68)을 강음군(江陰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온(王溫)을 진강군(晋江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기(王琪)를 보녕군(保寧軍) 관찰사(觀察使)로 각각 임명했다. 허경(許卿)을 한양군(漢陽軍) 관찰사(觀察使)·천우위(千牛衛) 상장군(上將軍)으로 각각 임명했다.갑진일. 공주가 테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냈다.을사일. 안평공주(安平公主)의 소상(小祥)을 맞아 왕이 선효사(禪孝寺)에 행차해 분향했다.병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을사일. 왕이 사람을 시켜 공주에게 테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내지 말라고 설득하게 했으나 공주는 듣지 않았다.임자일.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 유승(柳陞)이 죽었다.을묘일. 왕과 공주가 서번의 승려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새 궁궐의 건축 공사를 중지시켰다.○ 왕이, “이후로 모든 관료들은 모든 일에 대해 일일이 품의를 올리지 말고 재추들과 상의해 방침을 정한 후에 보고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6월 초하루 병진일. 태상왕 및 국왕과 공주가 서번(西蕃)의 승례에게 계(戒)를 받았다.○ 테리[徹里]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정사일. 원나라에서 우승(右丞) 아릭쿠이[阿里灰]·홍중희(洪重喜), 중서좌승(中書左丞) 양염룡(楊炎龍)을 보내 왔는데 역마를 타고 수행한 인원이 백 명을 넘었다. 그들은 조인규(趙仁規)를 국문69)한 후 원경(元卿)을 데리고 감찰사(監察司)로 가서 새로 제정한 관제(官制)를 철회시켰다.70)무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뵙고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기미일. 다시 테리[徹里]를 원나라로 보냈다.○ 첨의중찬(僉議中贊) 정가신(鄭可臣)이 죽었다.71)계해일. 승지방(承旨房)72)을 다시 설치하고 전 승지(承旨) 장석(張碩)·홍선(洪詵)·전승(全昇)으로 하여금 업무를 보게 했다.갑자일. 양염룡(楊炎龍)이 생성고(生成庫)를 봉인했는데 이곳은 왕궁의 진귀한 보물들을 소장해 둔 창고였다.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마팔국(馬八國)73) 왕자인 보카리[孛哈里]가 사신을 보내 은실로 만든 관모, 금실을 수놓은 수박(手箔), 침향(沉香) 5근 13냥, 토산품 베 2필을 바쳤다. 그 전에 왕이 채인규(蔡仁揆)의 딸74)을 원나라 승상 셍게[桑哥]에게 시집 보냈는데 셍게가 처형당한 후 황제가 그 여자를 보카리에게 내려주었다. 보카리가 자기 나라 국왕과 사이가 벌어지자 원나라로 망명해 천주(泉州)에 살았는데 이때에 와서 채씨와의 인연을 빌미로 사자를 보내 교통하게 한 것이다.무진일. 태후75)가 첨추밀원사(僉樞密院事) 홍군상(洪君祥)과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를 보내왔다.임신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에 행차하여 토번(吐蕃)의 승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액운을 없애달라고 축원했다.갑술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 뵈었다.을해일. 왕이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왕과 공주가 태상왕을 모시고 원나라 사신을 위해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정축일. 양염룡(楊炎龍)이 원나라로 돌아가자 왕이 선의문(宣義門)76) 밖까지 나가 전송했다.계미일. 안평공주(安平公主)의 생일을 맞아 왕과 공주가 태상왕(太上王)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갑신일. 천변(天變)이 자주 나타나므로 죄질이 경미한 죄수는 석방하고 중죄인은 형벌을 한 등급 낮추어 주었다.• 7월 정해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의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테리[徹里]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는 편에 황제가 8월에 국왕과 공주가 함께 입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신묘일. 홍군상(洪君祥)이 궁 안에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임진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뵙고 다음날 공주와 함께 다시 찾아갔다.○ 홍군상(洪君祥)이 잔치를 열었다.무술일. 다시 관제(官制)를 고쳤다.77) 홍자번(洪子藩)을 삼중대광(三重大匡)·첨의중찬(僉議中贊)·판전조사(判銓曹事)로, 인후(印侯)를 중대광(重大匡)·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병조감찰사사(判兵曹監察司事)로, 김혼(金琿)을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민조사(判民曹事)로, 한희유(韓希愈)를 수사공(守司空)·중경유수(中京留守)·개성부윤(開城府尹)·상의도첨의회의도감사(商議都僉議會議都監事)로, 차신(車信)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판의조사(判儀曹事)로 김지숙(金之淑)을 첨의첨리(僉議僉理)·판공조사(判工曹事)로 안향(安珦)을 첨의첨리(僉議僉理)·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士)로, 이지저(李之氐)를 자정원사(資政院使)·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로, 최유엄(崔有渰)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이혼(李混)을 밀직사사(密直司事)·전조판서(銓曹判書)·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수국사(修國史)로, 정해(鄭瑎)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병조판서(兵曹判書)·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로, 유비(柳庇)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좌상시(左常侍)로, 민지(閔漬)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원후(元珝)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민조판서(民曹判書)로, 원경(元卿)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공조판서(工曹判書)로 김변(金賆)을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의조판서(儀曹判書)·동수국사(同修國史)로, 허평(許評)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판봉상사사(判奉常寺事)로, 오인영(吳仁永)을 밀직부사(密直副使)·판위위사사(判衛尉寺事)로, 민종유(閔宗儒)를 밀직부사(密直副使)·형조판서(刑曹判書)로, 윤보(尹珤)를 밀직부사(密直副使)·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유복화(劉福和)를 밀직부사(密直副使)·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 설경성(薜景成)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대복시사(判大僕寺事)로, 김부윤(金富允)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사진시사(判司津寺事)로 각각 임명하고 모두 상호군(上護軍)을 겸직하게 했다. 또한 최참(崔旵)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우상시(右常侍)·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장석(張碩)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판외부시사(判外府寺事)·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 유욱(柳栯)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로, 박전지(朴全之)를 삼사좌사(三司左使)·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오한경(吳漢卿)을 삼사우사(三司右使)·사림학사(詞林學士)로, 홍선(洪詵)을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병조판서(兵曹判書)·지전조사(知銓曹事)로, 홍자한(洪子翰)을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로, 전승(全昇)을 좌부승지(左副承旨)·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로, 이승휴(李承休)를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숭문관학사(崇文館學士)로, 김순(金恂)을 우승지(右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로, 이전(李瑱)을 좌승지(左承旨)·비서윤(秘書尹)·지병조사(知兵曹事)·사림학사(詞林學士)로, 권영(權永)을 밀직사우승지(密直司右承旨)·예빈윤(禮賓尹)·지공조사(知工曹事)·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로 각각 임명했다.기해일. 왕과 공주가 신효사(神孝寺)78)에 행차해 우란분재(盂蘭盆齋)79)를 열었다.계묘일. 홍군상(洪君祥)이 원나라로 돌아갔다.을사일. 왕이 삼대장소(三大藏所)에 행차해 오대부경(五大部經)을 필사하라고 지시했다.병오일. 왕과 공주가 안국사(安國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경술일. 왕과 공주가 함께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8월 초하루 을묘일. 왕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정해(鄭瑎)를, 행성(行省)에서는 석말에센티무르[石抹也先帖木兒]를 각각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경신일. 태상왕(太上王)이 장군(將軍) 최중경(崔仲卿)80)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갑자일. 원나라가 보롤[孛魯兀] 등을 보내와 왕과 공주의 입조(入朝)를 재촉했다.○ 유비(柳庇)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박전지(朴全之)를 밀직부사(密直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로, 김순(金恂)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허평(許評)을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로, 유복화(劉福和)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이승휴(李承休)를 밀직부사(密直副使)·감찰대부(監察大夫)·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임명한 뒤 은퇴시켰다.무진일. 안평공주(安平公主)를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했다.신미일.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가면서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임신일. 태상왕이 금교(金郊)에서 왕 일행을 전송하면서 술자리가 무르익자 갑자기 사신 보롤[孛魯兀]이 황제의 명령이라며 국왕인(國王印)을 빼앗아 일수왕(逸壽王 : 충렬왕)에게 주었다. 이에 태상왕이 복위했다.81)원나라에 간 충선왕은 그 후 모두 10년간 숙위(宿衛)했는데 원나라의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이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龍潛82)] 늘 그와 함께 지내면서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충렬왕 33년, 황제의 조카인 아유르바르와다태자[愛育黎拔力八達太子]83)와 우승상(右丞相) 다르칸[答刺罕]84)과 원사(院使) 베크부카[別不花]가 왕과 함께 회령왕(懷寧王) 카이샨[海山]85)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좌승상(左丞相) 아쿠타이[阿忽台]와 평장(平章) 바두마신[八都馬辛] 등이 안서왕(安西王) 아난다[阿難達]를 황제로 받들려고 반란을 계획했다. 태자가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서 하루 전에 먼저 아쿠타이 등을 체포해 대왕 두라[都剌]와 원사(院使) 베크부카 및 왕으로 하여금 죄를 추궁하게 한 다음 이들을 처형시켰다. 그해 5월 황제의 조카인 회령왕이 황제에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무종(武宗)이다.• 충렬왕 34년 5월 무인일. 황제를 옹립한 공86)을 기려 원나라에서 왕을 심양왕(瀋陽王)으로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아아! 그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정동행중서성좌승상(征東行中書省左丞相)·부마(駙馬) 왕장(王璋)은 세조(世祖)의 외손이자 선왕의 귀한 사위로서 ���이 황위를 계승하던 초기에 짐을 도와 큰 공로를 세웠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큰 절의를 길이 지켜나가기 위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적용하여 그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태자태부(太子太傅)·상주국(上柱國)·부마도위(駙馬都尉) 관작을 특별히 내려주며 아울러 심양왕(瀋陽王)으로 승진시켜 책봉한다.”또 왕으로 하여금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국정의 논의에 참여하게 했으며, 금호부(金虎符)·옥대(玉帶)·칠보대(七寶帶)·벽전금대(碧鈿金帶) 및 황금(黃金) 5백 냥, 은 5천 냥을 하사했다. 황후와 황태자도 왕을 총애한 나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기한 보물과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二十四年 正月 甲辰 元遣使, 冊爲國王, 以忠烈爲逸壽王. 丙午 受內禪, 卽位於康安殿. 戊申 敎曰, “昔我太祖, 一統三韓, 熙鴻號于無窮, 堂構相承, 于今三百八十有一年矣. 逮我光文宣德太上王, 在潛邸時, 爲安黎庶, 斷自睿慮, 入侍帝庭, 得配王姬, 光紹前寧, 嗣大曆服, 二十五年, 昇平之業, 於斯爲盛. 噫, 皇天不弔, 俾我母后貞敏莊宣仁明太后, 奄忽賓天, 上心鬱鬱, 倦于聽政, 以軍國繁機, 歸于幼冲, 牢讓再三, 不獲兪命, 新卽王位. 惟予小子, 幸爲先帝外甥, 又承皇帝·皇太后眷顧, 嘉與公主, 聿來于玆. 倘賴積累之功, 永保社稷丕丕之基, 宜以殊恩, 覃及遐邇. 自正月二十一日昧爽以前, 二罪以下, 咸宥除之.一, 哈丹之闌入也, 州郡望風迎降, 唯原州, 以孤城, 摧挫賦鋒. 然後, 諸城效之, 掃盡賊儻, 致三韓之再安, 敵先帝之所愾, 其功萬世難忘. 其防護別監判書致仕卜奎, 戰士中郞將元冲甲, 其邑守倅, 與長吏之成功者, 雖已褒賞, 尙有慊然, 宜加擢用, 勸勵後人. 其邑常徭雜貢, 宜復三年.一,87) 三韓壁上功臣, 三韓後代代壁上功臣, 配享功臣, 征戰沒陣而亡功臣子孫等, 以賤技, 落在工商匠樂者, 凡以功與恩, 已屬兩班, 而父母無痕咎者, 宜推明許通, 其功臣之田, 如有孫, 外人占取者, ��論年限, 依孫還給. 同宗中功臣田, 若一戶合執者, 辨其足丁·半丁, 均給功臣子孫, 屬南班者, 改東班.一, 文武兩班, 正·雜路, 凡有職者, 加次第. 同正職前恩未蒙者, 幷以今恩許蒙, 前有鄕職者, 加次第, 鄕職官滿者, 加鄕職階.一, 諸司人吏動靜, 許一度, 吏兵部入仕者, 各許五十人. 近侍·茶房員吏, 超等加職, 給事許初入仕, 南班屬者, 年限勿論, 改東班.一, 諺曰, ‘僧多批職, 亡國敗家.’ 今批職之數過多, 令有司, 褒貶申聞. 今後有法德殊勝88)者, 方加法號.一, 前所配者, 除謀亂國家, 不忠不孝, 殺人强盜, 謀故劫殺, 鈒面充常戶外, 其餘入島者, 出陸餘鄕. 餘鄕者通朝見, 朝見者量用. 公私雜罪者, 還其職田, 終身不叙, 停職屬散者量用.一, 日本護送使副知密直司事致仕金有成, 供驛令郭麟, 一行員將子孫錄用.”己酉 移御壽寧宮, 王, 以文翰學士承旨崔旵, 學士朴全之, 侍讀學士吳漢卿·李瑱, 修撰宥旨, 賜綾絹紬紵各十五匹. 庚戌 王詣德慈宮, 奉逸壽王, 宴于壽寧宮. 王舅晋王, 遣平章扎剌帖木兒來, 弔公主喪, 仍致祭. 壬子 重房宴王. 癸丑 幸佛恩寺, 相營宮之地, 置德慈宮. 乙卯 王率百官, 詣德慈宮, 奉牋, 上尊號, 曰太上王, 王衣紫袍, 太上王衣黃袍, 受賀, 時稱三韓罕有之盛事. 平陽侯昡, 大將軍金精, 齎王及逸壽王謝表, 如元. 丙辰 王與公主, 詣德慈宮,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爲公主誕日也. 翌日, 又奉迎太上王及貞和宮主, 宴于王宮.二月 戊午朔 王始署征東省事, 宰樞及行省左右司官吏謁見, 用元朝禮. 庚申 阿木罕太子及甕吉剌歹丞相還, 王餞于金郊. 甲子 王朝太上王于貞和宮, 王命, “莊穆王后宜加太后之號, 有司, 其議以聞.” 丁卯 王與公主, 移御印侯家. 己巳 命以僉議密直司爲王宮, 盖古彦昌宮基也. 初王欲以車信家爲宮, 旣興工, 相地者以爲不吉, 遂卜於此, 大興工役. 庚午 以觀燈, 王與公主, 奉太上王, 幸康安殿. 辛未 燃燈, 王如奉恩寺, 賜文翰學士崔旵·朴全之·吳漠卿·李瑱, 尙乘鞍馬. 翌日大會, 群臣上壽. 次至四學士, 王使之前, 賜巵酒, 謂之曰, “惟爾諸學士, 直言無隱.” 甲戌 以摠郞姜用丁爲慶尙道按廉使, 正郞柳謙副之, 國學司藝許有全爲全羅道按廉使, 直講鄭珩副之, 摠郞李源爲忠淸道按廉使, 郞將白應龍副之. 丁丑 監察司囚校書郞趙晋成妻趙氏. 趙氏正郞偁之女也, 與兄之烈通, 其母知而止之, 之烈歐母匿妹, 其母訟之. 親設消災道場于康安殿. 甲申 王率百官, 賀太上王生日于德慈宮. 王下書, 徵前司諫李承休. 是月 , 王以歲凶民飢, 減膳, 命內廚進橡實, 嘗之.三月 戊子 親醮三界于康安殿. 中贊鄭可臣上章乞退, 不允. 壬辰 王朝太上王于貞和宮. 癸巳 王召諸道按廉, 諭以治民之事, 爲之流涕, 賜酒遣之. 乙未 以方臣祐·李淑爲壁上三韓正匡, 吳仁永副知密直司事, 洪詵爲右副承旨. 丁酉 王與公主, 以晋王生日,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庚子 幸王輪·乾聖二寺. 長陽公潪, 進頌德詩, 賜米三十石. 壬子 親設功德天道場于康安殿. 王與宰臣崔冲紹及翰林四學士, 論三敎業. 癸丑 王朝于德慈宮. 乙卯 高唐王闊里吉思遣使來, 歸安平公主之賻. 太上王爲妃金氏奴婢, 求內傳于王, 王曰, “臣於卽位之日, 爲民, 請命于天, 革去宿弊, 內傳其一也, 臣不敢奉命.”夏四月 戊午 雨雹. 命學士崔旵等四人及承旨金昇, 掌銓選. 庚申 親設仁王道場于康安殿. 辛酉 王命撥還外吏之在京者, 別將以下, 勒還本役. 甲子 太史局言, “城中巫覡, 淫祀日盛, 請徙郭外.” 乙丑 王與公主, 上壽德慈宮. 丙寅 王命詞臣許有全·趙簡, 及致仕金孝臣·崔瑒, 直言時事, 凡有愆違, 卽以聞. 戊辰 王置賞花宴于壽寧宮. 庚午 王朝德慈宮. 壬申 亦如之. 乙亥 前密直司使安戩卒. 辛巳 雨雹. 僉議司請避王嫌名, 元·原·源·騵·嫄·羱····蒝等字, 從之, 仍命幷諱遠字.五月 丙戌 公主妬趙妃, 公主之乳媼, 與無賴之徒潛謀, 以公主失愛, 遣闊闊不花·闊闊歹, 與大將軍金精·吳挺圭等如元, 告大后. 庚寅 西蕃八哈思等十九人來, 王所招也. 辛卯 敎曰, “先王設官分職, 盖欲得人, 而共圖庶務. 孤於幼歲, 入侍天庭, 躬承先帝之訓, 目覩大都之制, 旣詳矣. 及叨重寄, 凡諸時獘, 一皆蠲罷, 惟宰執之數, 倍於古制, 公家議論, 多少異同, 事事稽滯, 宜當減省. 又頃者, 因避上朝之制, 百官名號, 早曾改之, 然或有同而不改者, 有不同而改之者, 所更之號, 亦不師古, 容有未稱. 孤當卽位之初, 遽革成規, 懼乖物議, 然隨時沿革, 古亦有之. 載按歷代官職, 不涉上朝官號者, 而易置之, 或罷不急之司, 合於一局, 庶幾官省, 而事易理也.”是日, 以趙仁規爲司徒侍中叅知光政院事, 洪子藩爲左僕射叅知光政院事, 洪奎守司徒領景靈宮事, 鄭可臣爲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叅知光政院事, 印侯爲光政使叅知機務, 金琿檢校守司徒領奉常寺事, 車信·李之氐並檢校司徒資政院使, 金之淑同知光政院使叅知機務, 安珦叅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大學士雞林府尹, 柳庇爲光政副使兼權叅知機務, 崔有渰檢校司空司憲大夫, 李混檢校司空西京留守平壤府尹, 鄭瑎爲南京留守廣陵府尹, 崔冲紹同知資政院事行中京留守開元府尹果毅軍都指揮使, 朴義同知資政院事, 閔漬集賢殿大學士簽光政院事, 元卿爲中京留守果毅軍都指揮使, 閔宗儒爲銓曹尙書崇福館使, 許評爲民曹尙書, 尹珤爲弘文館學士儀曹尙書, 崔旵爲詞林學士承旨刑曹尙書, 全昇爲崇文館學士兵曹尙書, 柳栯爲兵曹尙書鷹揚軍上將軍, 吳漢卿爲詞林學士試左散騎常侍, 李瑱爲詞林學士試右散騎常侍, 洪子翰爲金吾衛攝上將軍兼司憲中丞, 張碩爲光政都承旨奉常卿, 金恂爲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 趙瑞爲光政承旨典客卿, 李承休爲詞林侍讀學士試秘書監左諫議大夫, 沈逢吉爲司憲中丞, 權永爲詞林侍講學士試衛尉卿, 趙簡爲刑曹侍郞右諫議大夫.癸巳 敎, “僧人旣已出家, 固當上不拜君王, 下不拜父母, 況其餘乎? 自今, 僧俗相拜者, 重論如法. 雖至居家庸僧, 勿差官役.” 甲午 以王子宜忠爲永嘉軍承宣使, 宜孝爲江陵軍承宣使. 以宗室眩爲平陽郡公, 維爲咸寧公, 亹爲廣陵郡侯, 元爲漢山郡侯, 禔爲通義軍觀察使, 和爲丹陽軍觀察使, 琯爲桂陽軍觀察使, 祥爲臨海軍觀察使, 玖爲漢南軍觀察使, 贇爲順正軍觀察使, 軒爲延平軍觀察使, 珩爲始興軍觀察使, 璹爲定山軍觀察使, 麻爲寧海軍觀察使, 侊爲江陰軍觀察使, 溫爲晋江軍觀察使, 琪爲保寧軍觀察使. 許慶爲漢陽軍觀察使千牛衛上將軍.甲辰 公主遣徹里如元. 乙巳 王以安平公主小祥, 幸神孝寺行香. 丙午 詣德慈宮. 王使人請公主留徹里, 不聽. 壬子 都僉議參理柳陞卒. 乙卯 王與公主, 受戒于蕃僧. 罷營新宮. 敎, “自今百寮, 凡大小公事, 並除狀申, 從宰樞商議處決, 然後以聞.”六月 丙辰朔 太上王及國王·公主, 受戒于蕃僧. 徹里還自元. 丁巳 元遣右丞阿里灰·洪重喜, 中書左丞楊炎龍來, 凡乘傳者百餘. 鞫趙仁規, 遂與元卿, 往監察司, 收新定官制. 戊午 王朝德慈宮, 宥二罪己下. 己未 復遣徹里如元. 僉議中贊鄭可臣卒. 癸亥 復置承旨房, 以前承旨張碩·洪詵·全昇爲之. 甲子 楊炎龍封生成庫, 乃王府珍寶所臧也. 乙丑 王朝德慈宮. 馬八國王子孛哈里遣使來, 獻銀絲帽, 金繡手箔, 沈香五斤十三兩, 土布二匹. 先是, 王以蔡仁揆女, 歸丞相桑哥, 桑哥誅, 帝以蔡氏, 賜孛哈里. 孛哈里, 與其國王有隙, 奔于元, 居泉州, 至是, 以蔡氏故, 遣使通之. 戊辰 太后遣僉樞密院事洪君祥及帖木兒不花來. 壬申 幸壽寧宮, 飯蕃僧, 祓呪咀. 甲戌 王朝德慈宮. 乙亥 王受菩薩戒. 王與公主, 奉太上王, 宴元使于壽寧宮. 丁丑 楊炎龍還, 王餞于宣義門外. 癸未 王與公主, 以安平公主誕日,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甲申 以天變屢見, 放輕繫, 減重罪一等.七月 丁亥 王與公主, 朝德慈宮. 徹里還自元, 帝命國王公主, 以八月入朝. 辛卯 洪君祥享王于內. 壬辰 王朝德慈宮, 翌日, 偕公主又朝. 洪君祥設宴. 戊戌 ���改官制. 以洪子藩爲三重大匡僉議中贊判銓曹事,印侯爲重大匡僉議侍郞贊成事判兵曹監察司事, 金琿爲僉議侍郞贊成事判民曹事, 韓希愈守司空中京留守開城府尹商議都僉議會議都監事, 車信爲僉議贊成事判儀曹事, 金之淑爲僉議參理判工曹事, 安珦爲僉議參理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 李之氐爲資政院使知都僉議事, 崔有渰判三司事, 李混爲密直司使銓曹判書集賢殿大學士修國史,鄭瑎知密直司事兵曹判書寶文閣大學士, 柳庇知密直司事左常侍, 閔漬同知密直司事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 元珝同知資政院事民曹判書, 元卿同知密直司事工曹判書, 金賆同知資政院事儀曹判書同修國史, 許評同知密直司事判奉常寺事, 吳仁永爲密直副使判衛尉寺事, 閔宗儒爲密直副使刑曹判書, 尹珤爲密直副使成均大司成修文殿學士, 劉福和爲密直副使判禮賓寺事, 薛景成爲資政院副使判大僕寺事, 金富允爲資政院副使判司津寺事, 皆兼上護軍. 崔旵爲資政院副使右常侍詞林學士承旨,張碩爲資政院副使中京留守判外府寺事集賢殿學士, 柳栯爲資政院副使判內府寺事, 朴全之爲三司左使詞林學士承旨, 吳漢卿爲三司右使詞林學士, 洪詵爲密直司知申事兵曹判書知銓曹事, 洪子翰知監察司事, 全昇爲左副承旨判秘書寺事寶文閣直學士, 李承休判秘書寺事崇文館學士, 金恂爲右承旨成均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 李瑱爲左承旨秘書尹知兵曹事詞林學士, 權永爲密直司右副承旨禮賓尹知工曹事詞林侍讀學士.己亥 王與公主, 幸神孝寺, 設盂蘭盆齋. 癸卯 洪君祥還. 乙巳 幸三大藏所, 命寫五大部經. 丙午 王與公主, 幸安國寺, 觀水戱. 庚戌 王與公主, 朝德慈宮. 癸丑 王朝德慈宮.八月 乙卯朔 遣知密直司事鄭瑎, 行省亦遣石抹也先帖木兒如元, 賀聖節.庚申 太上王移御將軍崔仲卿家. 甲子 元遣孛魯兀等來, 趣王及公主入朝. 以柳庇判密直司事, 朴全之爲密直副使中京留守, 金恂爲三司左使, 許評同知資政院事, 劉福和爲密直副使, 李承休爲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 仍令致仕. 戊辰 追尊安平公主, 爲仁明太后. 辛未 王與公主如元, 宥二罪已下. 壬申 太上王餞于金郊, 酒酣, 使臣孛魯兀, 以帝命, 取國王印, 授逸壽王. 於是, 太上王復位. 王如元宿衛, 凡十年, 武宗·仁宗龍潛, 與王同臥起, 晝夜不相離.忠烈王三十三年 皇姪愛育黎拔力八達太子, 及右丞相答刺罕·院使別不花, 與王定策, 迎立懷寧王海山. 左丞相阿忽台, 平章八都馬辛等, 謀奉安西王阿難達爲亂, 太子知其謀, 先一日, 執阿忽台等, 使大王都刺, 院使別不花及王, 按誅之. 五月 皇姪懷寧王, 卽皇帝位, 是謂武宗.三十四年 五月 戊寅 元以定策功, 封瀋陽王, 制曰, “咨! 爾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王璋, 世祖外孫, 先朝貴壻, 方朕纘承之始, 寔參翊贊之功. 以賞善罰惡之至公, 保孝父忠君之大節, 可特授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 進封瀋陽王.” 又令入中書省, 參議政事, 賜金虎符·玉帶·七寶帶·碧鈿金帶, 及黃金五百兩, 銀五千兩. 皇后·皇太子亦寵待, 所賜珍寶錦綺, 未可勝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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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qwrhbajuf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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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인 칼럼]신뢰받는 사법부의 정착을 위하여 ㄿ 첨성���
첨성대 천체를 관측하기 위하여 높이 쌓은 대(臺)로, 고대에는 제천 의식의 장소로도 사용했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경주에 있는 신라 첨성대이지만 우리 역사에는 고려와 조선을 비롯해 다양한 첨성대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역사 기록에서 첨성대는 관천대(觀天臺), 영대(靈臺), 점성대(占星臺) 등으로도 불렸다. 목차 1.역사시대 이전2.삼국시대3.고려시대4.조선시대 역사시대 이전 첨성대와 관련된 역사시대 이전의 문헌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강화도 마니산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강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은 고대 제천대(祭天臺)로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祭)를 올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서운관지(書雲觀志)』에는 과거 일식 등 중요한 천문 관측이 필요한 경우 마니산에 관측자를 보내 살피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참성단의 수리가 필요할 경우 관상감 관원을 먼저 보내 살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마니산 참성단은 원형 구��물 안에 사각형의 제단이 놓여 있어 고대 천원지방(天圓地方) 우주 구조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니산의 칠선녀 이름도 북두칠성의 일곱별을 따르고 있어 천문과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경주에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신라 첨성대(국보 제31호)가 남아 있다. 선덕여왕 2년인 633년에 제작된 신라 첨성대는 천원지방(天圓地方) 구조의 호리병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남쪽 방향으로 중간 높이에 있는 창문의 아래쪽은 돌과 흙으로 채워져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따르면 사람들이 창으로 들어가 오르내리며 관측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정상의 정자석(井字石) 안쪽 절반은 돌판으로 막혀 있어 나머지 뚫린 부분으로 드나들면서 관측을 수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첨성대 구조와 관련해 여러 가지 설명이 있는데, 첨성대 남측 창의 위아래 24층은 24기(氣)를 상징하며, 전체 돌의 개수는 일 년의 날수를 상징한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삼국유사에는 점성대(占星臺)로 기록되어 있다. 그림 1. 경주에 있는 신라 첨성대와 상부의 안쪽 모습 그림 2. 18C 평양전도(平壤全圖)에 그려진 고구려 첨성대 터(출처: 이찬, 『한국의 고지도』 자료를 『한국천문학사』, 2000에서 다시 옮김)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신라만큼 활발하게 천문 관측을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천문대는 없다. 다만 조선 『세종실록』 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아홉 개의 사당(廟)과 아홉 개의 연못(池)이 있는데, 연못 옆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 첨성대로 생각되는 이 천문대의 위치는 18세에 제작한 평양전도(平壤全圖)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지도를 살펴보면 평양성 안쪽 성곽 아래 남쪽에 '첨성대(瞻星坮)'라는 글자가 있다. 백제는 일본에 많은 천문 지식을 전해줄 정도로 높은 천문 수준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 알려진 백제의 천문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시대 개성 읍지인 『중경지(中京誌)』에는 만월대 서쪽에 '첨성당(瞻星堂)이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일한 고려 첨성대 관련 문헌 기록이다. 첨성당은 고려시대 하늘을 관측한 왕실 천문대였다. 만월대는 고려의 왕궁터로 북한 개성에 위치해 있다. 현재 개성에는 고려시대 첨성대가 남아 있는데 다섯 개의 사각기둥 가운데 하나는 그 중심에 있으며 나머지 네 개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다섯 개 사각기둥은 그 위로 네모난 상판을 받치고 있다. 지면에서 상판까지의 높이는 약 2.8m이며, 가로 세로 3m 크기의 상판에는 다른 구조물과 연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여럿 있다. 과거에는 사다리를 통해 상판에 올라가 천문 관측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상판 주변으로는 석조 테두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의 주변 돌들은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충렬왕 7년(1281) 천문대와 천문의기를 만들어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개성 첨성당과 관련된 기록으로 추정된다. 그림 3.고려 첨성대인 개성 첨성당(瞻星堂). 개성 만월대 서쪽에 위치(출처:한국천문학사, 2000) 조선시대 조선 초기 서운관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과 북부 광화방(廣化坊)의 두 곳에 있었다. 세종 14년(1432)에는 경복궁 안에 천문의기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기 위한 간의대(大簡儀臺)를 만들었었는데 높이 31척, 기이 47척, 넓이 32척의 돌로 쌓은 대에 난간을 두르고 위에 간의(簡儀)를 비롯해 주변에 수격식 혼의와 혼상, 정방안, 40척 규표 등 여러 천문 의기를 두고 관측하였다. 간의대를 비롯한 여러 천문의기는 병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현재 남아 있는 조선 첨성대는 광화방의 소간의대(小簡儀臺)와 창경궁의 일성정시의대(日星定時儀臺)가 있다. 이들은 각각 세종과 중종 시기에 제작되어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증보문헌비고에는 월대(月臺), 일영대(日影臺) 등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외에도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천문대가 여럿 있었지만 모두 소실되어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림 4. 현존하는 조선의 첨성대. 세종대에 만든 광화방 소간의대(좌측, 사적 296호)와 중종 1536년 제작된 창경궁 일성정시의대(우측, 보물 851호)(출처:우리의 과학문화재, 1997) [참고] 조선 세종시대 이후 척도는 황종척(黃鍾尺), 영조척(營造尺), 주척(周尺), 포백척(布帛尺), 조례기척(造禮器尺)의 다섯 가지가 있었다. 천문관련 유물은 주척을 기준하였는데 1 주척은 20.7cm이다. 한편, 영조척은 건축물 측정에 사용되었으며 1 영조척은 30.8cm이다. [참고: 동률도량형, 1992, 문화재관리국] 지난 한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먼저 순위조작 사건에 대해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는 지난 11월18일 안준영 PD와 김용범 CP에게 원심과 동일한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이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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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wiyasuui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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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15일 - 과거속 오늘] ┕ 절기
절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등지에서 계절을 표시하기 위해 1년을 황경을 따라 15° 간격으로 24등분하고 태양의 위치에 따라 부른 것을 말한다(그림 1 참조). 고려 충렬왕 시기에 중국에서 도입되었다. 절후 혹은 시령이라고도 한다. 절기와 절기 사이는 대략 15일이며 태음태양력에서 계절과 맞추기 위해 19년에 7번 윤달(leap month)을 넣는다. 24절기는 절과 중으로 분류되는데 홀수 번째 절기는 절이고 짝수 번째 절기는 중이다. 천문학적으로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만 의미가 있고 나머지 20개에 대응하는 용어는 없다. 태양의 적위가 황경에 선형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24절기에 따라 태양의 남중고도가 일정하게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24절기는 중국의 신청으로 2016년 12월 1일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림 1. 24절기.(출처: 장헌영/이지원/천문학회) 목차 1.24절기 날짜2.24절기와 계절3.24절기의 의미와 풍속3.1.봄3.2.여름3.3.가을3.4.겨울 24절기 날짜 표는 각 절기에 해당되는 날짜와 그 때 태양의 황경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사용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음력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지만 24절기는 음력이 아니다. 태양의 위치 변화(황경상)와 관련되므로 '양력' 날짜가 고정되어 있다. 황경 이름 날짜 315° 입춘(立春) 2월 3일 혹은 2월 4일 330° 우수(雨水) 2월 18일 혹은 2월 19일 345° 경칩(驚蟄) 3월 5일 혹은 3월 6일 0° 춘분(春分) 3월 20일 혹은 3월 21일 15° 청명(淸明) 4월 4일 혹은 4월 5일 30° 곡우(穀雨) 4월 20일 혹은 4월 21일 45° 입하(立夏) 5월 5일 혹은 5월 6일 60° 소만(小滿) 5월 20일 혹은 5월 21일 75° 망종(芒種) 6월 5일 혹은 6월 6일 90° 하지(夏至) 6월 21일 혹은 6월 22일 105° 소서(小暑) 7월 6일 혹은 7월 7일 120° 대서(大暑) 7월 22일 혹은 7월 23일 135° 입추(立秋) 8월 7일 혹은 8월 8일 150° 처서(處暑) 8월 22일 혹은 8월 23일 165° 백로(白露) 9월 7일 혹은 9월 8일 180° 추분(秋分) 9월 22일 혹은 9월 23일 195° 한로(寒露) 10월 8일 혹은 10월 9일 210° 상강(霜降) 10월 22일 혹은 10월 23일 225° 입동(立冬) 11월 7일 혹은 11월 8일 240° 소설(小雪) 11월 22일 혹은 11월 23일 255° 대설(大雪) 12월 7일 혹은 12월 8일 270° 동지(冬至) 12월 21일 혹은 12월 22일 285° 소한(小寒) 1월 5일 혹은 1월 6일 300° 대한(大寒) 1월 20일 혹은 1월 21일 24절기와 계절 옛날 중국에서는 춘분점에서 출발하여 황도를 따라 30° 간격으로 12개의 점을 찍고 태양이 각 점을 통과하는 순간을 중이라고 하였다. 중 사이에 황경 15°, 45° 등의 점을 태양이 통과하는 순간을 절이라 하였다. 중과 절을 합쳐 24절기라 하였으며 계절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 달력에 표시하였다. 절기가 계절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4계절은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등 4립의 날에서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절기의 이름이 중국 주나라 때 화북 지방의 날씸에 맞춰지어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24절기를 현대 동아시아 전역에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4절기의 의미와 풍속 봄 그림 2. 새 봄을 새롭게 맞이한다는 각오로 대문에 붙이는 입춘축.(출처:GettyimagesKorea) 입춘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자 24절기 가운데 첫 절기이다. 농경 의례와 관련된 행사가 많으며 일년 동안 대길하기를 기원하는 의례를 베푸는 풍속이 있다.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의미인 우수가 지나면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린다'는 속담도 있듯이 완연한 봄이라고 생각한다. 경칩은 농사를 준비하는 절기이다. 경칩에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하였고, 보리 싹의 성장을 보며 그 해 농사를 예측 하기도 한다. 양이 정동에 음이 정서에 있으므로 음양이 서로 반반인 춘분에는 날씨를 보아 그 해 농사의 풍흉과 수한을 점치기도 하였다.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청명은 한식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일 수 있다. 손 없는 날이라고 하여 특별히 택일을 하지 않고도 이날 산소를 돌보거나 집수리 같은 일들을 하기도 한다.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가 되면 농사에 가장 중요한 볍씨를 담근 후 볍씨를 담아두었던 가마니는 솔가지로 덮어두는 풍습이 있다. 여름 입하는 여름이 시작을 알려주는 절기이다. 입하가 되면 볍씨의 싹이 ��� 모가 한창 자라기 시작한다.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의미인 소만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지는 시기이다. 망종은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라는 의미이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모내기와 보리 베기가 겹쳐 바쁜 편이다. 하지는 천문학적으로 일년 중 태양의 적위가 가장 커지는 시기이다. 보통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는데 장마 대비에 바쁜 시기이다.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네기도 하였다. 소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 농가에서는 모를 낸 뒤 소서 때에 논매기를 시작 하였다. 대서는 대게 중복이 끝난 후이다. 더위를 피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계곡이나 산정을 찾아가 노는 풍습이 있다. 가을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기인 입추가 지나서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조정에서는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를 올렸다. 여름이 지나고 시원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인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지고 파리, 모기의 극성도 사라진다. 농사철 중에 비교적 한가한 때여서 '어정 칠월 건들 팔월'이란 말도 한다. 어정거리면서 칠월을 보내고 건들거리면서 팔월을 보낸다는 의미인데 다른 때보다 한가하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흰 이슬이라는 뜻의 백로라는 이름은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 등에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하였다. 추분이 지나면 점차 밤이 길어지기 때문에 여름이 가고 가을을 실감하게 된다. 추분에 부는 바람을 보고 이듬해 농사를 점치는 풍속이 있는데 건조한 바람이 불면 다음해 대풍이 든다고 생각했다. 한로는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한로는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추수를 끝내야 하고 타작이 한창인 때이다. 서리가 내리는 시기인 상강 시기는 농사력으로는 이 시기에 추수가 마무리되는 때이기에 겨울 준비로 바쁘다. 겨울 예전에는 입동을 전후하여 담근 김장이 맛이 좋다고 하여 김장을 하기 시작한다. 입동 때의 날씨를 보아 그해 겨울 추위를 가늠하기도 했다. 소설 무렵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날씨가 추워지는데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 농사가 잘 된다고 생각했다. 대설은 농사일이 한가한 시기이다. 곡식들이 곳간에 가득 쌓여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풍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양력으로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 무렵에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태양의 부활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동지를 흔히 아세 또는 작은설이라 하였다.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소한 추위는 맵다. 대한은 음력 12월 섣달에 들어 있으며 24절기의 매듭을 짓는 절기이다. 중국에서는 소한 지나 대한이 일년 가운데 가장 춥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소한 무렵이 가장 춥다. [08월15일 - 과거속 오늘] 1974년 서울 지하철 1��선 운행 시작 서울특별시 지역에서 운행되는 도시철도 체계의 교통시설로서 1974년 8월 15일 1호선이 개통된 이래 1~9호선의 9개 노선이 있다. 1~4호선(서울 구간)은 서울메트로가, 5~8호선은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가, 9호선은 서울9호선운영(주)가 운영한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 운행되는 지하철 1~9호선을 말한다. 1~4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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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iatv1004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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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련된 단어 알아보기 ⭕️
"지구 *사랑* : (1)1998년 최일규가 안무하고, 발표한 현대 무용 작품. 위기에 처한 지구의 환경을 진단하고, 지구인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징*사랑* : (1)고려 시대에 둔 정팔품 하(下)의 문관 품계. 문종 때에 정하여 충렬왕 1년(1275)에 없앴는데, 공민왕 18년(1369)까지 설치하고 없애기를 거듭하였다." "궁정풍의 *사랑* : (1)중세 서구의 기사도를 다룬 로맨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귀부인과 기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이상주의적 사랑의 유형." 붙이*사랑* : (1)동족이나 가까운 피붙이에 대한 사랑. 갑작*사랑* : (1)갑작스럽게 느끼는 사랑. 등*사랑* : (1)고려 시대에 둔, 정구품 하(下) 문관의 품계. 아래*사랑* : (..
2024.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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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qwrhuys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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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AI 스피커로 ‘아리아’ 부르면 지구촌 어린이 돕는다 ∥ 서대문구⁴
서대문구 정의 서울특별시 서북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종로구, 서북쪽은 은평구, 남쪽은 마포구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54'~126°58', 북위 37°33'~37°36'이다. 면적은 17.61㎢이고, 인구는 31만 214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4개 행정동(20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다. 자연환경 북한산의 말단에 위치하며 인왕산, 안산, 백련산 등의 산줄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산사면을 따라 높고 낮은 형세로, 택지는 ��제천 주변에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해당하며 인왕산(仁王山, 338.2m)·안산(鞍山, 295.9m)·백련산(白蓮山, 215.5m) 등 �� 개의 봉우리가 잔구(殘丘)의 형태로 솟아있다.지형적 이유로 북쪽 비봉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불광천과 백련산 동쪽을 감싸고 흐르는 홍제천[일명 사천(沙川)]이 있고, 안산과 인왕산 사이를 흘러 내리는 만초천(蔓草川, 일명 욱천)이 있으며 모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편서풍대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 기온은 12.5°C, 1월 평균기온은 -3.2°C, 8월 평균기온은 25°C이며, 연 강수량은 1,200mm 내외이다. 역사 이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 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 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구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을 다스렸다.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이후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후삼국시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에는 양주(楊州, 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천되지 않았다.그 뒤 무인정권과 몽고침략 등의 정치적·군사적 시련을 겪는 사이에, 남경은 서경과 함께 국왕 순주(巡駐)의 이경(離京)으로서의 가치가 감소되어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것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기반을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과거의 남경인 한양이 물망에 올랐다. 그 뒤 왜구의 침략으로 조운이 원활하지 않자 개경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곧이어 수도의 안보문제가 거론되자 또다시 한양천도론이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우왕 때는 한양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 한때 실현되었고, 공양왕 때에도 일시 한양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문제는 마침내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천도론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태조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 추진하기 위한 기관인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고,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종묘·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수도 건설을 위한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조는 1394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비로소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된 것이다. 당시 서대문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라고도 함)이 건설되어 이 일��의 지명이 되었다.서대문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의 반석방(盤石坊)·반송방(盤松坊)과 북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에 해당하는 상평방(常平坊)·연은방(延恩坊)·연희방(延禧坊) 지역이었다.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서부 반석방 반송방과 연희면(延禧面) 지역이 되었다. 1914년에는 서대문구의 행정구역이 축소되면서 용강면(龍江面)·연희면·은평면(恩平面) 지역이 고양군에 속하였고, 현 충정로 일대는 죽첨정(竹忝町) 등이 일제식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동시에 이 일대는 서대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15년에는 경성부 직할로 변경되었다. 1936년 고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의 대부분이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1943년 출장소 대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이곳은 서대문구역소(西大門區役所)에 속하게 되었다. 이어 1944년 마포구역소가 신설되면서 서대문구 관할구역의 일부가 마포구역소로 넘어갔다.1945년 10월 16일 구역소를 구청으로 하고 구장(區長)을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하면서 서대문구역소도 서대문구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9년 은평면 11개 리와 연희면 7개 리를 서울에 편입하여 서대문구 은평출장소에 편입하였으며, 1955년에는 종래의 동회(洞會)를 동(洞)으로 개칭하고 각 구청에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서대문구에는 53개의 행정동을 두게 되었다. 1962년에는 대신동을 신설하였고, 1964년에는 서대문구의 노고산동과 대현동 일부가 마포구에 편입되고, 마포구의 아현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0년 동명칭과 관할구역을 변경하면서 행정동을 53개에서 41개 동으로 축소하였다.1973년에는 진관동을 신설하였고,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그리고 마포구의 동교동과 서교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 대규모의 구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서대문구 관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서대문구 관할의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행촌동, 송월동, 홍파동, 평동과 교남동, 교북동, 현저동, 충정로1가의 각 일부가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서소문동, 정동, 순화동, 의주로2가, 중림동과 의주로1가, 충정로1가, 합동, 충정로3가, 만리동1·2가의 각 일부는 중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상암동, 성산동과 수색동, 중동, 남가좌동, 연희동 각 일부를 마포구로 넘겨주고 만리동1·2가 일부를 용산구에 넘겨 주었으며, 마포구의 동교동 일부를 서대문구에 편입하여 행정동이 42개 동에서 37개 동으로 축소되었다.1977년에는 북가좌2동과 증산동을 신설하였고, 1978년에는 영천동을 폐지하였다. 이어 1979년 은평출장소를 없애고 은평구청을 신설하면서 서대문구 중 녹번동, 불광동, 갈현동, 구산동, 대조동,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 증산동, 진관내동, 구파발동, 수색동 등 13개 동이 서대문구 관할에서 제외되어 종래 39개동이 23개 동으로 축소되었다.1980년에는 홍은4동이 홍은2동으로, 1983년에는 홍제1동 일부가 홍제2동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대현동 일부가 북아현3동으로, 북아현3동 중 일부가 충정로3가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는 현저동이 천연동에 편입됨에 따라 서대문구에는 14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는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白磁鐵畵葡萄文항아리, 국보 107호)를 비롯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 보물 제745호),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白磁鐵畵雲龍文항아리, 보물 제645호),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白磁靑華松竹人物文항아리, 보물 제644호), 고구려 평양성 석편(高句麗平壤城石片, 보물 제642호), 기사계첩(耆社契帖, 보물 제638호), 청자 투각고리문 의자(靑磁透刻連環文의자, 보물 제416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7(紺紙銀泥妙法蓮華經卷7, 보물 제352호),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傳楊平 菩提寺址大鏡大師塔, 보물 제351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靑磁淳化四年銘항아리, 국보 제326호) 등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연세대학교박물관에는 봉업사명 청동북(奉業寺銘靑銅金鼓, 보물 제576호)이 있다.사적으로는 서울 독립문(사적 제32호)과 서울 연세대학교 스팀슨관(사적 제275호), 서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사적 제276호), 서울 연세대학교 아펜젤러관(사적 제277호)와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사적 제324호), 서울 영은문 주초(迎恩門柱礎, 사적 제33호)가 있다.이외 무악산 동봉수대 터(毋岳山東烽燧臺터, 서울특별시 기념물 13호),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91호), 화산군 이연 신도비(花山君李渷神道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1호), 옥천암 마애좌상(玉泉庵磨崖坐像,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7호) 등이 있다.홍은동의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때인 747년(경덕왕 6)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한 사찰로 경내에는 명부전(冥府殿)·삼성전(三星殿)·극락보전(極樂寶殿)·범종각(梵鐘閣)·원통전(圓通殿) 등이 있고, 절문 앞에는 사령지취락(寺領地聚落)이 형성되어 있다. 봉원동에 있는 봉원사(奉元寺)는 신라 때인 889년(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로 대웅전·명부전·칠성각 등 11동의 건물이 남아있고, 그 중 염불당(念佛堂)은 마포 공덕리에 있던 대원군의 아소정(我笑亭)을 옮겨 온 것이다. 또한 인왕산 선바위 앞에 있는 인왕사(仁王寺), 홍은동의 옥천암(玉泉庵), 봉원동의 용암사(龍岩寺) 등의 사찰이 있다.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는 왕비록 원삼(王妃錄圓杉, 중요민속문화재 제63호), 적초의(赤綃衣, 중요민속문화재 제62호), 청초중단(靑綃中單, 중요민속문화재 제61호) 등의 중요민속문화재들이 있다.또한 영산재·봉산탈춤·단청장 등이 있는데, 영산재(靈山齋,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는 봉원동의 박희덕(朴喜德), 봉산탈춤(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은 홍제동의 윤옥, 단청장(丹靑匠,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은 봉원동의 이치호(李致虎),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은 홍은동의 이강덕이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漆匠,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1호)은 연희동의 홍동화(洪東和), 은공장(銀工匠,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7호)은 홍제동의 김원택(金元澤)이 보유자이다. 교육·문화 이 지역은 일찍부터 근대교육기관이 있었다. 초등학교로는 1896년 한성공립소학교(漢城公立小學校)에서 출발한 미근동의 미동초등학교, 1937년 개교한 홍은동의 홍제초등학교, 1941년 설립된 북아현동의 북성초등학교 등이 있다.중·고등학교로는 1921년 순종의 하사금을 받아 향상기술학교(向上技術學校)로 출발한 동명여자중학교, 1922년 손창원(孫昌源)의 인창의숙(仁昌義塾)으로 시작한 인창중·고등학교, 1928년 경성실업전문학교로 출발한 한성중·고등학교, 1940년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으로 출발한 중앙여자중·고등학교 등이 있다.2015년 현재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7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특히 많은 대학이 이 지역에 있어 명실상부한 교육의 중심부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1885년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설립한 광혜원(廣惠院)에서 비롯된 세브란스의과대학이 1957년 연희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연세대학교가 들어섰고, 1886년 선교사인 스크랜턴(M. F. Scranton)이 한 명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수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이화학당으로 설립된 이화여자대학교 그리고 1905년 미국 감리교회 한국선교부에서 설립한 감리교신학대학 등이 모두 광복 이전에 설립된 학교들이다. 이 외에도 서울여자간호대학·명지전문대학·명지대학교·경기대학교·추계예술대학교 등 많은 사립학교들이 있다. 이 외에도 신촌동에 있는 연세대학교 재활학교와 외국인 2세를 위한 연희동의 서울외국인학교와 한성화교중·고등학교 등이 있다.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단체로는 창작미술협회, 한국현대판화회, 한국조각공원연구회, 김자경오페라단 등 10여 개 단체가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대현동에 있는 한국전통예술연구보존회는 사물놀이의 대표인 김덕수가 조직하여 전통예술을 보존하고 보급시키고 있다.또한 현대적 전시관과 문화관이 함께 있는 곳으로는 구민회관을 비롯하여 서대문문화회관이 있다. 서대문문화회관은 1993년에 지상 3층 규모로 개관하여 80여 평 규모의 갤러리, 문화의 집 및 어학, 취미, 공예미술, 국악, 교양문화, 컴퓨터 등의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으며, 180석 규모의 소극장과 600석 규모의 대극장 등 다목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박물관으로는 연희동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연세대학교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 등이 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자연스럽게 동·식물과 접하면서 청소년의 교육공간, 주민들의 문화공간,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다양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국보 및 보물만 1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2004년 완공된 연희동의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약 1만 m²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되어 지구의 탄생과 변화, 생명체의 다양한 모습과 흔적 등이 주제별로 꾸며져 있다. 1층에는 ‘인간과 자연관’을 만들어 쥐라기 육식공룡인 티라노사우루스의 머리뼈를 포함해 중생대 백악기 공룡들의 골격 등이 전시되어 있고, 무분별한 광산 개발로 인해 파괴된 산림을 보여주는 ‘신음하는 자연’과 한강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전시한 수족관도 눈길을 끈다. 2층 ‘생명진화관’은 태초의 생명이 현재의 인류로 진화한 과정을 전시하는 곳으로 서해안에서 발견된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볼 수 있다. 3층 ‘지구환경관’에서는 입체 안경을 끼고 빅뱅부터 지구가 형성되는 과정을 3차원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동굴관은 벽과 천장이 실제 동굴처럼 꾸며져 있다.현저동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김구, 강우규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쳐 갔던 옛 서대문 형무소 보안과 청사와 옥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역사현장으로 남기기 위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1924년 개관한 신촌동 연세대학교 중앙박물관은 우리나라 대학박물관의 효시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전통문화와 이에 연관된 여러 지역의 문화자원까지도 개발·수집·연구하고 이를 보존 전시하여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1988년에는 100주년 기념관의 준공으로 이곳에 선사·역사·미술·민속·질그릇·전각·학교사·지질·동식물 등의 9개 상설전시실과 특별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을 갖춤으로서 대학박물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종합박물관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대현동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은 1935년 일제 치하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자 교수와 학생들이 모은 민속품, 목공품, 도자기 등을 본관 1층에 진열, 전시한 것이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귀중한 문화재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1990년 현재의 박물관을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은 지각을 구성하는 암석과 광물을 비롯해 국내에 서식하는 동물과 식물 등을 연구하기 위해 1969년에 설립되었다.이 외에도 현대적 전시관과 문화관이 함께 있는 곳으로는 구민회관을 비롯하여 서대문문화회관이 있다. 서대문문화회관은 1993년에 지상 3층 규모로 개관하여 80여 평 규모의 갤러리, 문화의 집 및 어학 취미 공예미술 국악 교양문화 컴퓨터 등의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으며, 180석 규모의 소극장과 600석 규모의 대극장 등 다목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이 지역의 스포츠는 구에서 운영하는 체육회 외에 생활체육협의회가 있어 일상생활과 밀접한 스포츠 활동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스포츠시설로는 공원이나 하천부지 혹은 야산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홍은동에는 서대문구립인조잔디축구장, 가좌배수지 배드민턴장과 테니스장, 홍은동 테니스장, 백련약수터, 논골그린공원, 옥척암녹지대, 실락어린이공원이 있다. 그리고 연희동에는 궁둥산 배드민턴장, 연홍약수터, 안산팔각정, 연서어린이공원이 있으며, 홍제동에는 둔치체육시설, 홍제3동 농구장, 불천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외 봉원동의 봉원사배드민턴장, 천연동의 금화테니스장과 동명여중 담장, 북아현동의 금화체력단련장, 창천동의 골목길공원과 바람산공원 등의 각종 스포츠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민속 정월 초하루에는 설날을 맞아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리는 풍속이 남아있다. 정월 열나흘에는 오곡밥 먹기, 정월 대보름의 부럼깨기와 더위팔기, 윷놀이,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연등달기, 칠월 복중에 개고기와 삼계탕 먹기, 추석 차례와 성묘가기, 동지 때 팥죽 먹기 등의 세시풍속이 펼쳐진다. 특히 정월대보름에 펼쳐지는 지신밟기는 지역의 대학생들과 동네 주민이 한데 어울려 펼쳐지는 행사로 주목받고 있다.민속놀이로는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새터지신밟기가 있다. 이는 신촌의 옛 이름인 새터에서 인근의 4개 대학, 연세대·이화여대·서강대·홍익대의 풍물패가 주최하고 대학생과 지역 주민이 함께 어우러져 동네 곳곳을 다니며 지난해의 묵은 액을 씻어내고 새해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행사이다. 이 놀이는 1993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문화 한마당공연과 윷놀이대회 등도 곁들인다.또한 봉원사에서는 영산재가 펼쳐지는데, 이 행사는 영산재 인도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습을 재현한 불교의식으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 함께 부처님의 참 진리를 깨닫고 고통이 없이 즐거움만을 얻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데 의의가 있다. 설화·민요 이 지역에는 무악재가 있어 예로부터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무악재는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는 길목이었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국가에서 유인막(留人幕)을 설치하여 호랑이로부터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던 곳이다. 그 중에 효자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한성부판윤을 지낸 박창선(朴昌先)에게 효성이 매우 지극한 조상이 한 분 있었다고 ��다. 선대조 박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한성의 집에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한다. 이 날도 박씨가 아버지의 묘소를 향해 가고 있는데, 무악재에 이르자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박씨가 깜짝 놀라 “나는 선친의 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먹으려거든 잡아먹으라.”하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호랑이는 박씨 앞으로 다가와서 넙죽이 엎드리더니 등에 타라는 몸짓을 하였다. 박씨는 호랑이 등에 탔고, 박씨를 태운 호랑이는 산봉우리를 몇 개나 넘어 달려 당도한 곳은 박씨의 선친묘 앞이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박씨가 묘소에 참배하였는데, 호랑이는 다시 박씨에게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박씨는 올 때와 같이 호랑이 등에 타고 무악재까지 왔는데, 호랑이는 박씨를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박씨가 무악재에 이르면 그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다녔다. 이렇게 하기를 몇 해가 지났고 박씨가 병들어 죽자 그 역시 고양군 신도면 선영에 장사 지냈다. 훗날 집안사람들이 박씨의 묘에 가 보니 묘 앞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대궐에까지 들리자 임금이 감탄하여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하여 하사금을 내려 묘 옆에 사당을 짓고 효자정문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 부근 마을을 효자리라고 하였다. 지금도 행정명으로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가 남아있으며, 이 밖에도 또 다른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산업·교통 토지의 26.6%가 임야이고 경지는 전체 토지의 0.4%이다. 대지 41.0%, 학교용지 12.3%, 도로 12.1%, 하천 2.4%, 철도용지 1.2%로 임야와 대지의 비율이 높다.산업 인구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는 5.5%, 도소매업이 16.2%, 숙박 및 음식업이 16.3%, 운수업 7.5%, 통신업 1.0%, 금융보험업 6.2%, 사업서비스업 6.4%, 교육서비스업 11.1%,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9.5% 등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전체 사업체 수 가운데 1~4명의 종사자를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전체의 88%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1,000명 이상의 사업체는 6개 업체에 불과하다.예로부터 이 지역은 도성을 나와 평안도의 의주로 통하는 큰 도로가 있어 사신들이 홍제원에 머물렀다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인파가 왕래하던 곳이었다. 또한 근대에는 경의선이 가설되면서 철로를 통한 왕래가 가능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전차가 왕래하기도 했다.현대에는 서대문에서 아현동·신촌·서교동·영등포로 통하는 도로, 금화터널을 통해 연희·성산·화곡동으로 통하는 도로, 무악재를 통해 구파발·불광·홍제동으로 통하는 의주로 등의 간선도로들로 도심지와의 소통이 매우 편리하며, 도심과 영등포·강서·은평구 지역을 연결해준다. 또한 고양·문산으로 통하는 경의선이 통과한다. 나아가 본격적인 지하철시대가 개막되면서 도심 순환선인 2호선과 동서를 연결하는 3호선 및 6호선이 모두 서대문지역을 지나면서 더욱 교통이 편리해졌다.폭 40m 이상의 넓은 도로는 서대문로터리에서 아현3거리에 이르는 충정로를 비롯하여 홍은동에서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어지는 통일로, 남가좌동 사천교에서 수색동으로 연결되는 수색로, 현저동 독립문에서 금화터널을 지나 영등포구로 연결되는 성산로, 충정로에서 신촌을 지나 동교동으로 이어지는 신천로 등이 주요 도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 외에 창전로, 응암로, 연희로, 가좌로, 동교로, 증가로 등의 간선도로가 있으며, 연희동과 홍제동을 관통하는 내부순환도로가 있다.철도는 서울역과 문산 간을 연결하는 경의선이 지나고 있으며 이 지역을 거치는 역은 신촌역, 가좌역, 수색역이 있다. 특히 신촌역은 1920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이래 지금까지 그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 최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서부역에서 출발하여 신촌역을 거쳐 벽제, 일영, 장흥, 송추 등을 경유하여 의정부역까지 순환하는 서울교외선이 있는데, 이 노선은 경의선의 신촌·가좌·수색역을 함께 이용하고 있다.지하철은 2호선과 3호선, 6호선이 ��� 지역을 통과한다. 지하철 2호선은 서울 강남과 강북의 도심권 43개 역을 순환하는 노선으로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1984년 5월 완공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2호선 구간은 충정로역, 아현역, 이대입구역, 신촌역, 홍대입구역이 있고, 충정로역에서는 5호선을 갈아탈 수 있다. 그리고 지하철 3호선은 수서에서 대화까지 39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80년 착공, 부분적으로 개통을 시작하여 1985년 10월에 완전 개통되었으며, 서대문구간은 1985년 7월에 개통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3호선 구간은 독립문역, 무악재역, 홍제역이 있다. 지하철 6호선은 봉화산역에서 역촌역까지 38개 역을 운행하는 전철로 1994년에 착공하여 2001년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서대문구 지역은 2000년 12월 공사가 완료되었다. 서대문구를 지나는 6호선 구간은 수색역, 증산역이다. 관광 이 지역의 관광자원으로는 풍부한 문화재를 연결한 볼거리가 많이 산재해 있다. 특히 사적지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인근의 독립문 영은문주초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김구, 강우규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쳐 갔던 옛 서대문 형무소 보안과 청사와 옥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역사현장으로 보존하기 위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고 있다.1층에는 추모의 장을 만들어 일본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애국지사들을 가두었던 서대문형무소를 첨단 영상시스템을 통해 조감해 보고, 그분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보며 그 숭고한 넋을 기리도록 하였다. 2층에는 역사의 장을 만들었는데, 이곳은 나라 사랑에 불타는 선열들의 의거를 통해 우리의 암울했던 역사와 그 극복을 위한 저항 정신을 계승하고, 온갖 고문과 억압에도 굽힘이 없었던 역사의 현장을 다시금 되돌아보기 위해 구성되었다. 그리고 지하 1층에는 체험의 장을 개설하였는데, 이 장소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조건조차 말살되고 폭력과 고문으로 인한 애국지사들의 신음이 아직도 들려오는 곳, 그러나 끝내 꺾이지 않던 그 분들의 용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살아있는 역사체험의 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이어 2000년에 착공하여 2004년 문을 연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3층 규모로 인간과 자연 및 지구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이 외에도 연세대학교 안에 있는 옛 건물들과 안산 일대, 봉원사 경내와 영산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백련사 경내 등도 이 지역의 관광자원이다.신촌역을 중심으로 대학교가 밀집되어 있어 많은 학생들이 모이는데 특히 연세대학교 앞과 이화여자대학교 입구에 보다 집중되어 있다. 이화여대 입구에는 여학생들의 통행이 많은 관계로 양장점과 양품점 등의 상가가 발달되어 있고, 신촌로터리 주변에는 음식점과 주점 등이 대표적인 전문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모래내시장을 중심으로 해서는 서민들의 먹거리 문화가 형성되어 있으며, 연희동 일대에는 화교들을 위한 중국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전통문화 행사로는 음력 새터지신밟기 행사와 봉원사에서 개최되는 영산제가 있다. 특히 영산제는 사전에 예약을 받아 개최되며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대 문화행사로는 젊음과 낭만이 가득한 신촌에서 지역 주민과 대학생이 함께하는 거리축제가 있다. 퇴폐 향락문화를 추방하고 건전한 대학문화의 정착과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개최되는 이 축제는 지역문화, 대학문화, 상가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화합의 한마당을 연출한다. 대학촌의 특성에 어울리는 국악한마당, 락공연, 화합의 달리기, 응원제전 등과 외국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로 구성되어 있다. 동(洞) 1. 남가좌동(南加佐洞)서대문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가재가 있고 산에 둘러싸였기 때문에 ‘가재율’이라 부르던 자연 마을을 한자로 가좌동(加佐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구가 증가하면서 남북으로 나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가좌동계(加佐洞契) 가재율이었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가좌동1계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 가좌동1계 월사동이라 하였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남가좌리(南加佐里)로 변경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6년 서대문구 남가좌동이 되었다. 행정동으로는 남가좌1동과 남가좌2동의 2개 동이 있다. 수색로 옆의 오래된 모래내시장은 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고, 대학으로는 명지대학교가 있다. 2. 냉천동(冷泉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냉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마을 여기저기에서 찬 샘물이 솟아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였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지하계 이판동(李判洞)·냉동(冷洞)이라 하였다. 1914년 경성부 냉동이 되었고, 1936년 냉천정(冷泉町)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6년에 서대문구 냉천동이 되었으며, 행정업무는 1975년부터 천연동·옥천동과 함께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3. 대신동(大新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1962년 대현동(大峴洞)의 ‘대’(大)자와 신촌동(新村洞)의 ‘신’(新)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성외) 아현계(阿峴契)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희방 아현2계 대현동·신촌이었다. 1911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신촌리의 일부가 되었다. 1936년에 경성부 대현정(大峴町)·신촌정(新村町), 1946년에는 서대문구 대현동과 신촌동의 일부였다. 1962년에 두 지역을 통합하여 대신동이라 하였다. 4. 대현동(大峴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대현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아현동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현(大峴)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한성부 북부 연희방(延禧坊, 城外) 아현계(阿峴契)였으며, 1895년 북서(北署) 연희방 아현2계 대현동, 아현4계 마근동(麻根洞)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대현리로 불렸다. 1936년 경성부 대현정(大峴町)이 되었다가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서대문구 대현동이 되었다. 이곳에는 이화여자대학교가 있어 젊은이들이 붐비는 곳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국보 등 중요민속문화재들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한국전통예술보존연구회가 있어 김덕수를 중심으로 전통예술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5. 미근동(渼芹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미근동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이 지역에 있던 미동(尾洞)의 ‘미’(尾)자와 근동(芹洞)의 ‘근’(芹)자를 땄는데, 후에 한자가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하였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노첨정계 미동·수근전계 근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경성부 미근동(渼芹洞)이 되었고, 1936년 미근정으로 바꾼 후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서대문구 미근동이 되었고, 행정은 합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서대문극장과 드림시네마(구 화양극장)의 영화관이 있고, 행정기관으로는 경찰청과 서대문경찰서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1896년 한성공립소학교(漢城公立小學校)에서 출발한 미동초등학교가 있다. 6. 봉원동(奉元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봉원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이 마을에 위치한 봉원사(奉元寺)란 절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北部) 성외에 속하였고, 1911년 경성부 연희면 봉원동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봉원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봉원정(奉元町)이 되었다가 1946년 서대문구 봉원동이 되었다. 이곳에 안산도시자연공원이 있어 가벼운 산책과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동명의 유래가 된 전통사찰인 봉원사와 용암사가 있다. 7. 북가좌동(北加佐洞)서대문구의 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가재가 있고 산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가재율’이라 부르던 자연 마을을 한자로 가좌동(加佐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구가 증가하면서 남북으로 나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가좌동이계(加佐洞二契)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가좌동2계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북가좌리(北加佐里)로 변경되었고, 광복 후 1946년에 서대문구 북가좌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북가좌1동과 북가좌2동의 2개 동이 있다. 8. 북아현동(北阿峴洞)서대문구의 동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애오개, 즉 아이고개에서 비롯되었으며, 1914년 아현의 북쪽에 위치하여 ���현 북리라 한 것이 시초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외 지역이었으며, 1895년에는 한성부 서서(西署) 반송방 아현계·북부 연희방 아현1계로 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延禧面) 아현북리(阿峴北里)로,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로 칭하였다. 1936년 경성부 북아현정(北阿峴町)이 되었으며, 1943년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서대문구 북아현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북아현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대학으로는 추계예술대학교가 있다. 9. 신촌동(新村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으로 신촌동의 행정은 대신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새터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신촌’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北部, 城外) 연희궁계(延禧宮契)에 속하였다가,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아현2계 신촌으로 칭하였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 신촌리로 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가 되���다. 1936년 경성부 신촌정(新村町), 1943년에는 서대문구 소속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신촌동이 되었다.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이 있어 학생들과 시민의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10. 연희동(延禧洞)서대문구의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조선 초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던 연희궁(延禧宮 또는 衍禧宮) 터가 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성외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 정자동계 정자동(亭子洞)·염동1계(廉洞1契) 염동(廉洞)·세교2계(世橋2契) 궁동(宮洞)·음월리계(陰月里契) 음월리(陰月里)였다. 1911년 경성부의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연희리로 칭하였다. 1936년 경성부 연희정(延禧町)이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소속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연희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연희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있고, 관공서로서 서대문구청, 서대문구민생활체육협의회가 있다. 그리고 외국인을 위한 서울외국인학교가 있으며, 화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연희삼거리 일대에 화교음식점이 인기를 끌고 있다. 11. 영천동(靈泉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영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현저동사무소 서쪽 산정에 속칭 ‘악밖골약수터’가 있으며, 이 물을 영천(靈泉)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관전동(館前洞)·관후동(館後洞)·옥폭동(玉瀑洞)·장원정동(壯元亭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관동(館洞)이라 하였다. 1936년 관동정(館洞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영천동이 되었다.1 2. 옥천동(玉川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옥천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옛날에 옥천암(玉川庵)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옥폭동(玉瀑洞)·이판동(李判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옥천동이라 하였다. 1936년 옥천정(玉川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에 서대문구 옥천동으로 되었다.1 3. 창천동(滄川洞)서대문구의 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인 창천(滄川)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 한성부 북서(北署) 연희방(성외) 아현3계 창천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소속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창천정(滄川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창천동으로 하였다. 문화시설로는 신영극장이 있다.1 4. 천연동(天然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지역에 천연정(天然亭)이란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지하계 석교동(石橋洞)·이판동(李判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천연동이라 하였다. 1936년 천연정(天然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천연동으로 하였다.1 5. 충정로동(忠正路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법정동인 충정로2가와 충정로3가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충정로의 동명은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시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 城外)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송방 노첨정계(盧僉正契), 조판부사계(曺判府事契) 유동·팔각정, 수근답계(水芹畓契) 근동, 지하계(池下契) 냉동(冷洞), 차자리계(車子里契) 아현(阿峴)·형제정(兄弟井)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죽첨정2정목(竹添町2丁目)이라 하였다. 죽첨정은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충정로 부근의 민가에 거주한 일이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일제가 정하게 된 것이다.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충정로2가와 3가의 법정동으로 나뉘었다. 관공서로는 충정로3가에 해양수산부가 있고, 언론사로 동아일보사가 자리하고 있다. 지하철 5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1 6. 합동(蛤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합동의 행정은 충정로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어물 가운데 조개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을 ‘조개전’이라 하였고, 이것이 합동(蛤洞)이 된 것이라 전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석방(盤石坊), 반송방(盤松坊)에 속했으며, 1895년 서부 반석방 미전하계(米廛下契)·합동 한림동(翰林洞), 반송방 수근답계(水芹畓契) 근동(芹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합동이라 하였다. 1936년 합정(蛤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천연동이 되었다. 행정기관으로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가 있고, 프랑스대사관이 있다.1 7. 현저동(峴底洞)서대문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으로 현저동의 행정은 천연동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현저동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왕래하던 무악현(毋岳峴)의 밑에 위치한 마을 곧 ‘무악현저’(毋岳峴底)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에 속했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지하계 모화현(慕華峴)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 경성부 현저동이라 하였다. 1936년 현저정(峴底町)으로 변경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하였다.1 8. 홍은동(弘恩洞)서대문구의 서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홍제외리(弘濟外里)의 ‘홍’(弘)자와 은평면의 ‘은’(恩)자를 따서 붙여진 것이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홍은방(성외) 홍제원계 답동(畓洞)·백련동(白蓮洞)·외동(外洞)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 확장 때 홍제외리 중에서 홍제천 좌변 지역만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9년에 서대문구 홍은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홍은 1동에서 3동까지 3개 동이 있다. 동쪽으로 홍체천이 흐르고 하천을 따라 내부순환로가 지나며, 지하철 3호선이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체육시설로 서대문문화체육회관, 전통사찰로 백련사가 있고, 대학으로는 명지전문대학이 있으며 이외에 그랜드힐튼호텔이 자리잡고 있다.1 9. 홍제동(弘濟洞)서대문구의 동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유숙하던 홍제원(弘濟院)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였으며, 1895년에는 북서(北署) 연은방(延恩坊, 성외) 홍제원계 내동이라 하였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가 되었다. 1936년 경성부 홍제정(弘濟町)이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소속되었으며, 1949년에 서대문구 홍제동이 되었다. 서쪽으로 홍제천이 흐르고 내부순환로가 지나고 있으며, 지하철 3호선이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AI 스피커 기반 신개념 기부 프로그램 ‘AI기브유’ 운영코로나로 위축된 기부 문화 ‘언택트’로 활성화 기대SK텔레콤(017670)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와 함께 최신 ICT 기반의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23일 밝혔다.이번 협력으로 양사는 지난 3월부터 공동 개발해 온 AI(인공지능) 스피커를 활용한 신개념 기부 프로그램 ‘AI 기브유(GiveU)’를 처음으로 선보이고 본격 운영에 나선다. AI 기브유는 AI 스피커 ‘누구(NUGU)’로 편리하게 기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이용자가 누구 호출어인 "아리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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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qwr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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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조 정의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증조부. 추존왕.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행리(行里)이다. 덕원 출신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증조부이다. 아버지는 목조(穆祖: 安社)이며, 어머니는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천우위(千牛衛) 이숙(李肅)의 딸이다. 비는 등주최씨(登州崔氏) 호장(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 정숙왕후(貞淑王后 : 추증)이다. 1394년(태조 3) 4대조 추존 당시 익왕(翼王)으로 추존되었다. 태종 때 다시 익조로 추존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275년(충렬왕 1)에 아버지로부터 천호 및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직을 세습하였다. 그가 알동(斡東)에서 세력을 다지고 있는 동안 원나라의 세조는 일본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원나라의 명령을 받고 본소(本所)의 군인을 선발해 원정군에 협력하였다.이 무렵 그가 충렬왕을 알현한 기사가 『고려사』에 실려 있다. 그는 엄연히 원나라의 신하가 된 역신인데도 충렬왕은 그를 옛날의 신하로 온건하게 대하였다. 그도 충렬왕에게 고려를 배반한 죄과를 용서해 줄 것을 빌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알동에 살면서 안변·화주·함주에도 자주 내왕하여 활동영역을 넓혔다. 1300년에 원나라로부터 승사랑의 산계(散階)를 받은 것은 부원세력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닦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아버지 안사 때와는 달리 여진인과 마찰을 빚었다.그것은 이 때 원나라의 통치력이 약화하고 원장(元將) 산길(散吉)의 영향력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진인들은 기성(崎城: 용비어천가에는 하관성(奚關城)으로 보임.)을 정찰하는 도중에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두만강 하류의 적도(赤島)로 피해 화를 면하였다.알동의 주민이 이 곳으로 옮겨와서 한동안 같이 살았다. 1290년(충렬왕 16) 직도(稷島)·추도(楸島)·초도(草島)의 재목으로 배 10척을 만들어 뱃길로 연고지인 의주로 옮겨와서 살다가 죽었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안변 서쪽 서곡현(瑞谷縣)에 있다.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다 [같은 속담] 마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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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ashiri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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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 in Love (2017) - History
Historical background to help understand The King in Love (2017 MBC)
Yes, I did write it as I promised a few days ago. (L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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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of all, this drama’s protagonist Wang Won (왕원 王謜) / King Chungseon (충선왕 忠宣王, 1275~1325), is the first ever half-blood prince/king in the history of Korea. His maternal grandfather is Kublai Khan, the famous Mongol emperor and the founder of Yuan Dynasty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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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ublai Khan (played by Benedict Wong) from Netflix original drama Marco Polo. Venetian merchant traveler Marco Polo (1254~1324) served the Mongol emperor for many years.   → Wikipedia Kublai Khan (1215~1294) 
Then, I need to talk about why the Goryeo king got married with Kublai Khan's daughter in the first place. The story throws back to the Mongol invasion of Goryeo (1231~1259), about 40~50 years before this drama’s period.
After the death of Genghis Khan (1162-1227), his successors continued to conquer an immense territory and built the largest empire in the world. Like many other countries, Goryeo couldn't avoid their invasion. The Mongol’s Great Khans had frequently sent their troops to Goryeo for about 30 years but had failed to conquer it because of the strong resistance from Goryeo's common people. Despite Goryeo’s military regime, the puppet king, and incompetent nobles abandoned them and evacuated to the safer Gangwha island by themselves, the commoners desperately fought to the end against Mongols to save their own family. However, the long-time Mongol invasions devastated the whole country, and Goryeo's military regime was still on its way down due to chaotic internal str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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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you want to know about this chaotic period, go watch God of War 무신 武神 (2012 MBC historical drama). → Wikipedia 
In 1259, King Gojong (고종 高宗, 1192-1259), the 23rd ruler of Goryeo Dynasty, made a secret decision to send his Crown prince to the Mongol emperor in order to negotiate a ceasefire agreement between the two countries, without notifying Goryeo's military regime. It was intended to end the war as well as to take back the royal authority from the military regime.
However, on the way to Karakorum (the capital city of Mongol empire), the Crown prince of Goryeo (Later known as King Wonjong 원종 元宗, 1219~1274) heard about the sudden death of Monke Khan (1209~1259) during the expedition to Southern Song Dynasty of China. He also got to know about an impending civil war over who should be the next Mongol emperor between Monke Khan's two younger brothers : Kublai and Arik Buk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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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k Bukha (1219~1266) had procedural legitimacy by claiming the throne in Karakorum first, but Kublai (1215~1294) had military advantages with powerful troops and abundant supplies. Which would be a sure bet? The Crown prince was in a muddled situation to choose between the two Khans with limited information. If he makes a bad choice, Goryeo will be over. He was bearing the destiny of the whole nation on his shoulders. After much consideration, he chose Kublai and started off on a transcontinental journey to meet him. It was a defining moment to change the history of Korea.
Kublai was so surprised and pleased that Goryeo's Crown Prince traveled all the way to meet him, even though Kublai was in a relatively disadvantageous position compared to his younger brother Arik Bukha. He considered it very auspicious, saying that even the previous Great Khans couldn't conquer Goryeo but now Goryeo’s Crown prince came to meet him voluntarily. The peace treaty with Goryeo would raise his authority and help him beat Arik Bukha when claiming the throne. That is how the truce between Goryeo and Mongols was concluded in 30 years after the war broke out.
Kublai guaranteed Goryeo's political autonomy and preservation of its tradition and cultural customs. But every king of Goryeo had to marry a Mongolian princess and be subordinate to the Mongolian Khans.
Their meeting broke up in a very friendly atmosphere. The crown prince had to go back to Goryeo after hearing the news of his father's sudden death and ascended the throne. (King Wonjong of Goryeo) A few years later, Kublai won the civil war against his younger brother and became the 5th Mongol emperor. He brought Song Dynasty of China to the ground and founded Yuan Dynasty.
Meanwhile, the peace treaty led by King Wonjong sparked Goryeo military regime's strong opposition. Blaming the royal family for selling the country out to Mongols, the remnants of military leaders called Sam-byeol-cho (삼별초 三別抄) protested against the decision and continued their resistance fights against Mongols for another 10 year. However, as the last resistance army was defeated in 1270, the war against Mongols had ended officially in 4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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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274, Kublai Khan's 16-year-old daughter Qutlugh Kelmysh (쿠툴룩 케르미시 忽都魯揭里迷失 1259~1297), also known as Princess Wonseong (원성공주 元成公主) or Princess Jeguk (제국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 in Korean, married 39-year-old Crown prince of Goryeo (Later, King Chungnyeol 충렬왕 忠烈王 1236~1308) as their fathers promised to each other in the peace treaty.
However, this international marriage was the beginning of the couple's extremely unhappy married life. To say nothing of a language barrier and their age gap (he was 23 years older than her), the bridegroom already had 3 children of pure royal blood from his lawful wife, Lady Wang / Consort Junghwa (정화궁주 貞和宮主 ?~1319). She was also of royal b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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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yeo's royal family (Wang clan) believed that they were descendants from Dragon god, so incestuous marriages between half-siblings, cousins, uncle / niece, aunt / nephew were commonplace to keep their pure blood as well as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 If you watch Moon Lovers : Scarlet Heart : Ryeo (2016 SBS) and Shine or Go Crazy (2015 MBC), you can understand what I mean.) In such a mindset, it is safe to say that most Goryeo people didn't want their sacred future monarch would have the hateful enemy's blood in his vein, because it really hurt their national pride.
Goryeo people looked down on Mongols as uncivilized nomad barbarians but at the same time they were afraid of Mongol empire's power. In such a hostile atmosphere far away from her hometown, the newlywed Mongolian princess carelessly abused her authority and wielded her power to survive in the Goryeo palace. 
For example, she took a golden pagoda from a famous Buddhist temple by force just because it looked good, even though the temple's monks desperately stopped her, saying that the pagoda was a national treasure for people to pray for health and peace in the country. She didn’t care about critical opinion at all. 
In addition, after she gave birth to a son, she kicked Consort Junghwa (the king's first wife with royal blood) out of the palace and confined her in a remote house for over 20 years not to meet her husband again. Consort Junghwa's eldest son Lord Gangyang (강양공 江陽公) was also forced to become a Buddhist monk to get out of the new-born crown prince's way. (But he returned from the Buddhist priesthood to civil life after 4 years and lived his entire life as quietly as possible. )
All of these things made the king estranged from the princess and indulge in hunting and sex with other women, which in turn led to her resentment against her husband. In such a vicious cycle of marital discord, their only son Crown prince Wang Won grew up as one of Kublai Khan's favorite grandsons with genius brain and artistic talents. 
The first scene where the little Crown Prince desperately tried to stop his father from going out to hunt is really recorded in the history. But the king's insult to his half-blood son is a fiction of this drama.
Among the 3 main characters of this drama, Warrior Wang Rin and Lady Eun San are fictional characters. But Wang Rin's family members -- his father (Wang Young), his aunt (Consort Junghwa), his elder brother (Wang Jeon / Lord Seoheung), and his younger sister (Wang Dan / Consort Jeongbi) -- are real historical figures. They are direct descendants of King Shinjong (신종 神宗, 1144~1204, the 20th ruler of Goryeo dynasty) and the ancestor of King Gongyang (공양왕 恭讓王, 1345~1394) who is the last monarch of Goryeo in Six Flying Dragons 육룡이 나르샤 (2015 SBS).
OK. This is the beginning of The King in Love 왕은 사랑한다 (2017 MBC). I hope it will help you understand the context of the drama.  After this, Empress Ki 기황후 奇皇后 (2013 MBC) starring Ha Ji-Won, Joo Jin-Mo, and Ji Chang-Wook  will be a good sequel because it deals with the next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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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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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군(韓將軍)놀이 Exorcism 한국민속대관
한 장군(韓將軍)놀이 Exorcism 신라시대인지 임진왜란 대인지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경상북도 경산 지방에 쳐들어 온 왜구를 한(韓)장군이 연희(演戱)를 가장해서 물리친 데에 그 연유를 두고 있다. 여장(女裝)한 남자 화랭이〔화랑(花郞)〕의 유풍에다 여원무(女圓舞) 등을 곁들인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놀이이다. 한 장군(韓將軍)놀이 - 2 Exorcism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산군(慶山郡) 자인(慈仁)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이 되면 토지(土地)의 수호신으로서 한종유(韓宗愈)라는 장군을 숭사(崇祀)하여 성대히 제전(祭典)을 올리는 풍속이 있었다. 이 제전을 「한장군제(韓將軍祭)」라 불러 왔다. 이 제전이 단오절에 거행되므로 일명 「단오제(端午祭)」라고 부르기도 했고, 또 이 제전에는 여러 가지 민속놀이를 하므로 「한장군(韓將軍)놀이」라고도 한다. 이 한장군(韓將軍)의 이름은 자세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한종유(韓宗愈)라고 하는 이로서 어느 때 어디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왜구(倭寇)가 내습하여 도천산(到天山)에 진을 치고 있을 때 한장군(韓將軍)이 그의 부하들을 버들못[柳池] 부근 골짜기에 매복시켜 놓고 계략을 꾸몄다. 그는 투구 위에 꽃으로 만든 꽃관(冠)을 쓰고 갑옷 위에는 여인(女人)의 복장으로 가장하고 그의 누이동생과 그 못가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어 산에 있는 적을 버들못 부근까지 유인하였다. 그리하여 적병이 접근하였을 때 복병(伏兵)으로 하여금 일시에 기습케 하여 적을 무찔러 군민(郡民)을 구했다고 한다. 그 때 한장군(韓將軍)은 수많은 적을 베어 버들못에 던졌으므로 그 때 못물은 핏빛으로 붉었다고 전한다. 그 후 군민(郡民)이 그의 충성과 덕을 우러러 계림(桂林)이라는 동산에 사당(祀堂)을 세우고 해마다 큰 제사를 올려 왔다. 그런데 왜적(倭敵)을 물리친 날이 바로 단오일이어서 이 날에 제사를 거행하여 왔다고 한다. 이 왜구(倭寇)는 고려 중엽 이후부터 조선조 초엽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지대에까지 출몰하면서 인명과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日本)[倭]의 해적이다. 이 왜구는 신라 때에도 있었지만 그때는 수와 피해가 많지는 않았으나 고려 중엽 이후 갑자기 강성하여 심지어는 내륙에도 침범하여 조정에서까지 이 왜구문제로 부심(腐心)하게 되었다. 왜구는 왜국의 국내 사정의 변동에 따라 무사(武士)에서 전략한 자들이 주동이 되는 일이 많았다. 고려 말에 와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최영(崔瑩) 장군과 이성계(李成桂) 등이 내륙에까지 들어온 적을 쳐 물리치기도 하였다. 당시의 왜구소탕(倭寇掃蕩)에는 병략가(兵略家) 최무선(崔茂宣)이 발명한 화약(火藥)과 화포(火砲)가 큰 효력을 발하였다. 왜구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그치지 않아 세종(世宗) 때에는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기도 하고, 혹은 삼포(三浦)[薺浦ㆍ 釜山浦ㆍ 監浦]를 개항(開港)하여 무역을 통해 회유도 해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노략질은 여전하여 조선(漕船)을 탈취해 가는 등 행패가 여전하였고, 나중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큰 난리를 겪게까지 되었다. 한종유(韓宗愈)라는 사람은 고려 때에 있었으니 충렬왕(忠烈王) 13년(A.D. 1287)에 나서 공민왕(恭愍王) 3년(A.D. 1354)에 죽었다. 그는 시문도 능했고 좌정승(左政丞)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 한장군(韓將軍)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많기 때문이다. 『자인현읍시(慈仁縣邑詩)』 풍속편(風俗篇) 여원무조(女圓舞條)에는 만력시(萬曆時)(編者曰萬曆時云者誤甚 今傳羅麗之間) 유한장군실기명(有韓將軍失其名)(或云宗愈) 왜구거도천산(倭寇據到天山) 장군설녀원무(將軍設女圓舞) 전채지위화(剪彩紙爲花) 식이원관(飾二圓冠) 관변수오색지조(冠邊垂五色紙條) 여기매(與其妹) 개장녀복(皆粧女服) 명대일관(名戴一冠) 무어산하류제지내(舞於山下柳堤之內) 우설배우잡희(又設俳優雜戱) 왜구하산취관(倭寇下山聚觀) 장군습후자지소살심중(將軍襲後刺之所殺甚衆) 제방유석상유검흔(堤防有石尙有劍痕) 속전참왜석(俗傳斬倭石) 매당시일제수색적운(每當是日堤水色赤云) 읍인모기의(邑人慕其義) 건신사우현서록(建神祠于縣西麓) 단오일(端午日) 상녀원지제(象女圓之制) 사동남이인장여복대면무지(使童男二人粧女服戴面舞之) 우설배우잡희격고명금(又設俳優雜戱擊鼓鳴金) 호장착모대이제(戶長着帽帶以祭) 연년불폐(年年不廢) 폐즉필유재이(廢則必有災異) 유속상전(遺俗相傳) 지금숭봉(至今崇奉) 표기기왈(標其旗曰) 장산제군사명(獐山諸軍司命) 우하동면육동송림동(又下東面六洞松林洞) 하북면마라동(下北面麻羅洞) 역립사례지(亦立祠禮之) 만력년간(萬曆年間)에 [編者는 말하기를 萬曆年間이라 한 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니 이제 전하기를 신라와 고려 사이라고 함]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성이 한씨(韓氏)인 장군이 있었다[혹은 宗愈라고 함]. 왜구가 도천산(到天山)에 웅거하였다. 이 때 장군은 여원무(女圓舞)를 만들어 채색종이꽃을 갓 두개에 장식하고 갓 가장자리에 오색 종이조각을 드린[늘어뜨려] 후 누이동생과 함께 쓰고 여장(女裝)으로 변장하고 산 아래 버들제방 안에서 춤추었다. 또한 그는 배우(俳優)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놀이를 하게 하니 왜구가 모두 산에서 내려와 구경했다. 이 때 장군은 틈을 타서 뒤로 엄습하여 칼로 찔러 죽인 자가 심히 많았다. 그 제방에는 돌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돌에는 칼 흔적이 남아 있어 세상에서 전하기를 참왜석(斬倭石)이라 한다. 해마다 이 날이 돌아오면 방죽물이 붉게 변한다고 한다. 그 고을사람이 그 충의(忠義)를 사모하여 신사(神祠)를 고을 서쪽 산기슭에 세우고 단오일이면 여원무(女圓舞)의 제도를 본받아 사내아이 둘로 하여금 여복(女服)을 입히고 가면(假面)을 쓰고 춤추게 했다. 또 배우의 여러 가지 놀이를 베풀고 북을 치고 쇠를 올리면서 호장(戶長)이 사모관대를 하고 제사를 지내 해마다 폐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폐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므로 이에 생긴 풍속을 전하여 지금까지 숭봉(崇奉)하고 있다. 그 기(旗)에 표시하기를 「장산제군사명(獐山諸軍司命)」이라 하였고 또 하동면(下東面) 송림동(松林洞)과 하북면(下北面) 마라동(麻羅洞)에도 또한 사당을 세��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왜적(倭敵)이 쳐들어 온 연대를 막연히 나려지간(羅麗之間)이라 했는가 하면 또 만력(萬曆) 때 라고도 하였다. 만력(萬曆)은 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로서 1573년에서 1617년 동안이다. 우리나라 조선조 선조(宣祖) 6년에서 광해군(光海君) 6년까지에 해당한다. 여원무(女圓舞)는 해방 후에 간행된 『경산군지(慶山郡誌)』 상편(上篇)에도 거의 같은 기사가 실려 있고 참왜석(斬倭石)은 검흔석(劍痕石)이라 하였다. 검흔석(劍痕石) 좌현북일리(左縣北一里) 도천산류제방(到天山柳堤傍) 한장군참왜처검흔상재운이(韓將軍斬倭處劍痕尙在云爾) 검흔석(劍痕石)은 고을 북쪽 일리(一里)되는 도천산(到天山) 버들제방 가에 있는데 한장군(韓將軍)이 왜구를 벤 칼자욱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 하였다. 또 당시 왜구가 웅거하였던 도천산성(到天山城)에 대하여서는 동서(同書)에 도천산상(到天山上) 유토성지(有土城址) 왜병소축운이(倭兵所築云爾) 도천산(到天山) 위에는 토성 자리가 있으니 이는 왜병이 쌓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적(史蹟)은 지금도 남아 있다. 또 동서(同書)에는 북면마라동(北面麻羅洞) 우립일신당(又立一神堂) 일면지민(一面之民) 별제장군지매(別祭將軍之妹) 연년불폐(年年不廢) 폐즉필유재이(廢則必有災異) 유속상전(遺俗相傳) 지금숭봉(至今崇奉) 표기기왈장산사명(標其旗曰獐山司命) 사시본현속장산시(似是本縣屬獐山時) 유창의자(有倡義者) 이무문가미(而無文可微) 작일신총(作一神叢) 심가개기(甚可慨己) 건륭을유(乾隆乙酉) 현감정충언(縣監鄭忠彦) 중수신당(重修神堂) 관급제물(官給祭物) 작축문(作祝文) 사호장(使戶長) 비례축지(備禮祝之) 축문왈(祝文曰) 모기섬적(謀奇殲賊) 의병위국(義炳衛國) 기문영미(杞文英微) 사민기적(史泯其跡) 무전여원(舞傳女圓) 토유여속(土有餘俗) 검흔불마(劍痕不磨) 완피제석(宛彼堤石) 일간고묘(壹間古廟) 영안의백(永安毅魄) 단양조두(端陽俎豆) 세이위식(歲以爲式) 조여유황(旐旟有煌) 금고질작(金鼓迭作) 자수상전(玆修常奠) 재구공축(載具工祝) 어이장사(御以長詞) 선이늠속(饍以廩粟) 신기보우(神其保佑) 영전읍택(永奠邑宅) 북면(北面) 마라동(麻羅洞)에는 또 신당(神堂) 하나를 세우고 일면(一面)에 백성이 따로 장군의 누이동생을 제사지내어 해마다 폐(廢)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폐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으므로 없애지 아니하고 계속 지내온 풍속이다. 이 제사는 아직까지 숭봉(崇奉)하며 거기에 표시하기를 「장산사명(獐山司命)」이라 하였다. 아마도 본 고을이 장산(獐山)에 속하였을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할 만한 문적(文籍)은 없고 신당(神堂)만 하나 남아 있으니 심히 애석한 일이다. 건륭(乾隆) 을유년(乙酉年)에 현감(縣監) 정충언(鄭忠彦)이 신당(神堂)만 중수(重修)하고 관가(官家)에서 제물(祭物)을 주고 축문(祝文)을 지어 주어 호장(戶長)으로 하여금 예(禮)를 다하여 빌게 하였다. 축문(祝文)에 하였으되, 기특한 꾀로 도적을 멸하고 빛난 충의(忠義)로 나라를 호위하였으되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고 상고할 만한 자취가 없도다. 여원무(女圓舞)가 전하여지니 그 지방에 남은 풍속이 있으며 칼 흔적이 없어지지 아니하여 저 제방 돌에 완연히 남았도다. 한 칸 옛 사당(祠堂)에 길이 굳센 넋을 봉안(奉安)하고 단오(端午)에 제사드려 해마다 폐하지 않는도다. 깃발이 황황(煌煌)히 빛나고 징과 북이 번갈아 울리면서
연례의 전작(奠酌)을 드리고 또 약공(藥工)과 축문(祝文)을 갖추어 애오라지 긴 말로 빌고 관가(官家) 곡식으로 흠향케 하노니 신명(神明)을 보우(保佑)하여 길이 이 고을을 평안케 하소서. 하였다. 이 기록을 하면 북면(北面) 마라동(麻羅洞)에는 한장군(韓將軍)의 누이동생의 사당이 있었고 그 고을사람들은 그를 장산사명(獐山司命)이라 하여 수호신으로서 숭배하여 왔다. 그 후 조선조 영조(英祖) 41년(중국 淸의 高宗 30년 乾隆 乙酉年 A.D. 1765년)에 그 고을 현감(縣監) 정충언(鄭忠彦)이 중수(重修)하고 제물 및 축문으로써 예를 다하였다. 그리고 장산(獐山)이란 지명으로서 그 고을이 장산군(獐山郡)에 속하였을 때에 의병을 일으킨 자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자인(慈仁)이 경산군(慶山郡) 즉 장산군(獐山郡)에 속했던 것은 신라시대이고 조선조시대가 아니니 이로 미루어 보아 왜구(倭寇)가 쳐들어 온 것은 신라 때로 보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장산(獐山)이 신라 때 경산군명(慶山郡名)이었다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산현(慶山縣)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에도 보인다. 본압량국(本押梁國)(一云押督) 신라기미왕취지치군(新羅祇味王取之置郡) 경덕왕개칭장산(景德王改稱獐山) 고려초개장산(高麗初改章山) 현종속경주(顯宗屬慶州) 명종치감무(明宗置監務) 충선왕초피왕혐명개금명(忠宣王初避王嫌名改今名) 충숙왕이국사일연지향승위현령(忠肅王以國師一然之鄕陞爲縣令) 공양왕이(恭讓王以) 왕비노씨지향륭위군본조(王妣盧氏之鄕隆爲郡本朝) 원래는 압량국(押梁國)었던 바 신라 기미왕(祇味王)이 이 고을에 군(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장산(獐山)이라고 고을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초에는 다시 장산(章山)이라고 고쳤다. 현종(顯宗) 때는 경주(慶州)에 속했고, 명종(明宗) 때에는 그 곳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선왕(忠宣王) 초에 왕이 파천(播遷)하매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 하였다. 필자는 앞에서 왜구(倭寇)의 자인(慈仁) 침입은 신라시대라 했거니와 그 지방 고로간(古老間)에 전승되어 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천수백 년 전 임나(任那)[高靈]에 있던 대가야(大伽倻)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한장군(韓將軍)이라는 이가 단북동(丹北洞) 도천산성(到天山城)에서 적을 격파하고 군민(郡民)을 구한 데서 사당을 지어 제전을 거행하여 온다고 한다. 필자는 이 전승에 신빙성을 두면서 왜구의 침입을 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로 보며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임나(任那)와 왜인(倭人)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의 구명에 의하면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5세기 호태왕비(好太王碑)(A.D. 414)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나온 것이 가장 오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강수전(强首傳)에는 「신본임나가량인(臣本任那加良人)」이라 기록되어 있다. 서기 924년에 건립된 신라의 진경대사탑비(眞鏡大師塔碑)에는 「기선임나왕족(其先任那王族)」이라고 한 것이 보이므로 임나(任那)의 용례(用例)는 분명하고 따라서 임나(任那)의 존재도 확실하다. 일본(日本) 학자들은 이 임나(任那)를 「미마나」라고 부르거니와 변진지방(弁辰地方)에 근거를 잡았던 왜(倭)의 세력을 이르는 명칭이다. 당시 왜(倭)는 낙랑(樂浪)ㆍ 대방군(帶方郡)[지금의 南原地方]에 통교(通交)하면서 남해안에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그들은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무역을 활발히 하였고, 점차 경제적 세력이 커지자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간섭하게 되었다. 수많은 왜인(倭人)이 이 지역에 드나들게 되자 그 중에는 그 곳에 정주(定住)한 자들도 생겼을 것이다. 그 간섭의 정도는 왜(倭) 세력의 강약에 비례되었을 것이다. 백제ㆍ 신라의 진출에 따라서 축출되었고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23년에 대가야(大伽倻)[高靈]의 침공으로 임나(任那)는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대가야(大伽倻)로 대표된 지방이 대체로 일본서 주장하는 임나(任那)의 제부락국(諸部落國)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호태왕(好太王) 때 백제도 왜세(倭勢)의 발호로 인하여 백제도 흥기하자마자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왜(倭)와 백제의 중간 매개역할은 임나(任那)가 맡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나(任那)가 소멸할 무렵 왜(倭)는 회고적으로 말하기를, 백제(百濟)ㆍ 임나(任那)ㆍ 왜(倭)가 「삼문(三紋)의 강(綱)」[세 줄을 꼬은 동아줄]이라 비유도 하고 있거니와, 그 때 정세는 신라와 백제를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왜(倭) 사이에 눈부신 항쟁(抗爭)이 있었다. 여기에 단편적으로 엿보이는 「임나가라(任那加羅)」는 왜(倭)의 퇴수지(退守地)로 전쟁에 가담한 것 같다. 다만 그 실정을 파악할 자료가 결여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송서(宋書)』에는 서기 438년에 유사공헌(遺使貢獻)한 왜왕(倭王) 진(珍)이 「사특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지국제군사안동대장��왜국왕(使特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之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 하였음을 보아 여기에 임나(任那)가 끼어 있는 것은 역시 왜(倭)와 관계가 있었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이후 일본(日本) 왕정(王廷)에서는 임나(任那) 부흥을 표방하면서 수대(數代)를 지낸 것도 임나(任那)가 일찌기 왜(倭)의 경제적 정치적 근거가 된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임나(任那)는 당시 그 지역에 정주 내지 왕래한 왜인(倭人)들로써 한때 세력을 떨쳤던 무리들이 장산(獐山), 즉 자인(慈仁)까지 침입해 들어왔을 것이다. 이 때 군민(郡民) 중에 한(韓)씨성(性)을 가진 힘센 장사가 용맹과 지혜로 왜구를 물리쳤을 것이고 군민들은 그를 추앙하여 장군이라 하고, 죽은 뒤에는 사당을 지어 해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왜구를 물리친 날이 바로 단오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때가 야외(野外)놀이가 한창인 봄철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므로 신라의 명일(名日)인 수릿날 즉 단오일에 제사를 거행해 왔다. 따라서 뒷날 왜적을 물리친 날도 단오날로 믿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는 1969년 봄에 경북지방 민속 재조사 때에 자인(慈仁)지방에서 특히 필자의 주목을 끈 한 출토품(出土品)을 보았다. 한(韓)장군 사당 부근에 있는 자인중학교(慈仁中學校) 교정 확장공사 때에 땅속 암석 위 석총(石塚)에서 장군의 유골 및 유품으로 보이는 두개골과 투구와 갑옷 등 금속물(金屬物)이 출토되었다. 또 거기에는 천 3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伽倻)시대의 토기(土器) 몇 점이 나와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 곳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한(韓)장군의 유해도 한(韓)장군 사당 부근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이 무덤과 유골 등은 한(韓)장군의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 속에서 우리는 한(韓)장군의 년대(年代)에 대하여 한 가닥의 암시를 발견하게도 된다. 한(韓)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그 지방 사람들은 한묘(韓廟) 또는 한장군묘(韓將軍廟)라고 한다. 현재의 한(韓)장군 사당은 계림(桂林)에 있는 진충묘(盡忠廟) 하나뿐이다. 2차대전 전인 1936년 7월에 필자가 처음 보았을 때는 한묘(韓廟)라 하고 북서동(北西洞) 면사무소 뒤쪽에 세워진 것을 이한묘(二韓廟)라고 하였다. 일한묘(一韓廟)에는 그 위패가 「한장군지신위(韓將軍之神位)」라고 씌어 있었고 이한묘(二韓廟)의 위패에는 「증판서한장군지신위(贈判書韓將軍之神位)」라고 씌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한묘(二韓廟)는 일한묘(一韓廟)보다는 뒤에 세워진 것으로서 조선조 때 국왕이 장군의 공을 상찬하여 판서(判書)라는 벼슬을 추중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한묘(二韓廟)는 일제말(日帝末)에 일본인들이 허물어 없앤다. 1969년에 필자의 건의와 지방유지들의 활약 그리고 경산군(慶山郡)의 도움으로 이 한장군제전(韓將軍祭典)이 부활되었다. 1936년 필자의 첫 조사 때에는 이 제전이 단오 전후 3일간 계속되었다. 제전은 자인면(慈仁面)이 주최가 되고 제관(祭官)은 면장 또는 그 지방 유지 중에서 선정되었으��� 제물(祭物)은 대체로 돼지ㆍ 닭(암ㆍ 수 두 마리)ㆍ술ㆍ 밤ㆍ 흰떡ㆍ 과일ㆍ 야채ㆍ 마른 생선 등이 사용되었다. 이 제전이 끝나면 일한묘(一韓廟) 앞에서 두 남자가 색종이를 길게 늘어뜨린 꽃관(冠)을 쓰고 수 10개의 꽃가지로 장식한 옷을 입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바로 이 춤을 여원무(女圓舞)라고 하며 이 춤은 옛날 한(韓)장군이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여자복장으로 위장하여 버들못가에서 왜적(倭敵)을 유인할 때 추었던 춤이라 한다. 일한묘(一韓廟) 앞에서 이 춤이 끝나면 이어서 이한묘(二韓廟) 앞에서 추고는 마친다. 다음에는 가장행렬이 진행되는데 조선조 때 현감(縣監) 복장을 한 가장(假裝) 현감이 가마에 타고 앞서면 그 뒤에 역시 가장(假裝)의 육방관속(六房官屬) 및 양반들이 수십 명 말을 타고 뒤따른다. 일한묘(一韓廟)ㆍ 이한묘(二韓廟)에 참배한 뒤 이어서 계림(桂林) 뒤쪽 진터[陣場]에서 기마(騎馬)싸움의 놀이를 한다. 계림(桂林) 언덕 위에서는 별도로 시문대회(詩文大會)의 백일장(白日場)과 젊은 부녀자들의 그네뛰기대회가 열리고 장터에서는 남자들의 씨름대회와 기생(妓生)ㆍ 광대(廣大)들의 소리와 춤, 재인(才人)들의 곡예(曲藝) 등이 열리어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청금상련(聽琴賞蓮) Banquet around a Lotus Pond with Gisaeng 시대 / 조선시대 후기 크기 / 가로 35.3㎝, 세로 28.3㎝ 그린이 / 신윤복(申潤福) 소장 /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조선시대 사람들의 풍류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기생(妓生)이다. 지체있는 사람들의 술좌석에는 기생들이 불려 와서 권주가를 불렀다. 후원 연못 가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생들과 어울리는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도 중의 하나이다. 제비(祭費)는 면에서 경비를 부담하였고, 여흥의 민속놀이 비용은 상인(商人)과 요식업자ㆍ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놀이는 민속예술의 하나로서 무대예술화하여도 좋겠지만 자인(慈仁)고을 특유의 연중행사의 하나인데 자인면민(慈仁面民)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민속놀음의 하나로서 보존 육성할 만한 것이다. 이 민속놀이는 군민 전체의 생기진작(生氣振作)과 민중 감정을 융화시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AFMt0iMq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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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vgajkhfvj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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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Leaf Clover (Live) o 고려 왕 계보ㅎ
고려 왕 계보 1대 태조 918-943 왕건, 고려의 시조. 북진정책,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포섭함(왕권 안정). 2대 혜종 943-945 1대 태조 왕건의 맏아들. 이복동생들과 왕위 다툼에 시달림. 3대 정종 945-949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으나 실패함. 재위기간은 4년. 4대 광종 949-975 1대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정종의 동생. 왕권 강화를 위해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과거 제도를 실시함. 5대 경종 975-981 4대 광종의 맏아들. 976년 전시과 제정, 6년간 재위함. 6대 성종 981-997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최승로의 시무28조 수용),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체계의 기틀을 세운 왕. 7대 목종 997-1009 5대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함. 8대 현종 1009-1031 1대 태조 왕건의 손자.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6천여권)을 제작함. 관련사건: 강감찬의 귀주대���. 9대 덕종 1031-1034 8대 현종의 맏아들. 국자감시를 실시함.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함. 10대 정종 1034-1046 8대 현종의 둘째 아들.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함. 노비종모법과 장자상속법을 제정함. 11대 문종 1046-1083 8대 현종의 셋째 아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한 왕. 12대 순종 1083-1083 11대 문종의 맏아들. 재위 3개월만에 죽음. 13대 선종 1083-1094 11대 문종의 둘째 아들.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임. 14대 헌종 1094-1095 13대 선종의 맏아들. 즉위 1년만에 왕위를 숙부(숙종)에게 물려줌. 15대 숙종 1095-1105 11대 문종의 셋째 아들.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통용하게 함. 16대 예종 1105-1122 15대 숙종의 맏아들. 국학에 양현고라는 장학재단 설립하는 등 학문 진흥에 힘씀. 17대 인종 1122-1146 16대 예종의 맏아들.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 관련사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18대 의종 1146-1170 17대 인종의 맏아들. 정중부, 이의방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폐위됨. 19대 명종 1170-1197 17대 인종의 셋째 아들. 정권을 장악한 무신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20대 신종 1197-1204 17대 인종의 다섯째 아들. 최충헌이 실권을 잡았으며, 만적의 난 등 민란이 잇달아 일어남. 21대 희종 1204-1211 20대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폐위됨. 22대 강종 1211-1213 19대 명종의 맏아들. 1197년 최충헌에게 쫓겨 강화도로 갔다가 1211년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오름. 23대 고종 1213-1259 22대 강종의 맏아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함. 24대 원종 1259-1274 23대 고종의 맏아들. 친몽정책과 개경환도를 추진하다가 임연에게 폐위(1269), 4개월 만에 복위함. 개경환도(1270) 후, 이에 반기를 든 삼별초의 항쟁 일어남. 25대 충렬왕 1274-1298, 1298-1308 24대 원종의 맏아들. 고려왕이면서, 원나라의 사위로 살아간 왕. 26대 충선왕 1298-1298, 1308-1313 25대 충렬왕의 아들. 한국사 최초의 혼혈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함. 27대 충숙왕 1313-1330, 1332-1339 26대 충선왕의 둘째 아들. 심양왕 고(충선왕의 조카)와의 정권다툼에 시달림. 28대 충혜왕 1330-1332, 1339-1344 27대 충숙왕의 맏아들. 방탕한 행동으로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됨. 29대 충목왕 1344-1348 28대 충혜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해 12세에 죽음. 어머니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함. 30대 충정왕 1349-1351 28대 충혜왕의 서자. 12세에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었으나 3년만에 폐위됨. 31대 공민왕 1351-1374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과 반원정책을 단행하였으나, 권문세족 반발, 공민왕 시해로 개혁 중단됨. 32대 우왕 1374-1388 공민왕이 시해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됨. 33대 창왕 1388-1389 32대 우왕의 아들. 9세에 즉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 34대 공양왕 1389-1392 20대 신종의 7대손. 고려의 마지막 왕. No Leaf Clover (Live) - Metallica, San Francisco Symphony Orchestra And it feels right this time On this crash course with the big time Pay no mind to the distant thunder New day fills his head with wonder, boy Says it feels right this time Turned around and found the right line Good day to be alive, Sir Good day to be alive, he said, yeah Then it comes to be that the soothing light at the end of your tunnel Was just a freight train coming your way Then it comes to be that the soothing light at the end of your tunnel Was just the freight train coming your way, yeah Don’t it feel right like this? All the pieces fall to his wish Sucker for that quick reward, boy Sucker for that quick reward, they said Then it comes to be that the soothing light at the end of your tunnel Was just a freight train coming your way Then it comes to be that the soothing light at the end of your tunnel Was just a freight train coming your way, yeah It's coming your way It's coming your way Yeah Yeah Here it comes Yeah, then it comes to be that the soothing light at the end of your tunnel Was just a freight train coming your way, yeah Then it comes to be, yeah Then it comes to be, yeah Then it comes to be, yeah Then it comes to be, yeah Then it comes to be, yeah Then it comes to be, yeah Then it comes to be, yeah Then it comes to be, ye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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