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아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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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hhh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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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실험은 주권 의식을 고취시켰다. … 주민의 투표로 임기가 보장된 일꾼이 어디를 보고 일하겠는가. 당연히 주민들의 눈 높이에 맞춰 지역을 살필 수밖에 없다.” / 김대중 자서전
선거를 기다렸다.
최순실을 등에 업고 나라를 ‘말아먹은’ 박근혜가 탄핵당한 지 1년이다. 그리고 정권교체 이후 첫 번째 맞이하는 선거가 이번 6월에 예정된 제7회 전국동시 지방선거다. 보통 지방선거는 ‘정권 심판’을 하는 선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 같다.
정권심판이냐, 야당 심판이냐. 어쩌면 자유한국당 심판이 될 수도 있다
촛불 혁명 당시 추운 겨울에 선거만 기다려온 사람들이다. 박근혜가 빨리 파면돼서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기다렸다. 국회를 심판하는 총선을 좀 더 기다리겠지만, 적어도 정당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선거가 바로 지방선거다. 지방선거를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다.
‘정권 심판’은 없을듯 하고, ‘야당 심판’은 명확할 것 같다. 박근혜 정권에 이바지했던 인물들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많다. 누군가는 ‘박근혜를 지키기 위해’ 본인을 당선시켜달라 했던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늦었지만, 확실히’ 심판하려 한다.
지선아 반갑다
사람들은 이제 지방선거가 반갑다. 한때 ‘투표근 운동’ 등 이야기가 나왔을 때보다 더 선거를 기다리고 반가워한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 하나로 대통령을 끌어내렸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은 사람들이다.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선택을 통해 누군가를 심판하고, 누군가를 새롭게 뽑고 싶어 한다.
이렇게 ‘반가운’ 선거를 앞두고 지금까지 있었던 6번의 지방선거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자세히 보자니 지루하고 요즘처럼 ‘유명한’ 인물이 아닌, 현대사 책에나 등장할 법한 인물이 많아 재미가 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들을 적당히 거들떠보고, 그 와중에 재밌는 부분은 함디비(?) 볼 예정이다. 또 지방선거이니만큼 재밌고 중요했던 핫플레이스는 어디였는지 찾아보고, 그런 결과는 무엇이고 이후에는 정국이 어떻게 변했는지 정리할 생각이다.
이 글은 때로 길이가 길 수도 있고, 재미는 당연히 없을 수 있으며, 내용은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지방선거 예전엔 어땠을까?’ 알아볼 때 뒤적뒤적해볼 수 있는 글이 됐으면 한다.
지선아 ‘졸라’ 반갑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거들떠보자
투표율
첫 전국동시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68.4%로 나왔다. 내 손으로 직접 지역 단체장을 뽑는 선거에 대한 관심도는 투표율로 드러났다. 70%에 육박하는 투표율은 이후로 쉽게 보기 힘든 숫자가 됐다.
정당구도
여당은 집권 3년차 민주자유당. 야당은 (공식적으론 DJ가 없는) 민주당과 여당에서 떨어져 나온 JP의 자유민주연합. 기본적으로 3당 구도다. 거기에 서울 지역에서는 무소속 박찬종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1회 지방선거 당시 박찬종 무소속 후보
제1회 지방선거 당시 박찬종 무소속 후보
박찬종
박찬종은 정치 입문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에서 시작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영삼과 맞붙어 진 적도 있고, 오히려 중선거구제도의 도움으로 동반 당선돼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이후엔 야당으로 정치 방향을 옮겨 김영삼-김대중의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에 합류하기도 했고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며 탈당했다. 92년 대선에 출마하여 7% 지지율을 얻었으며, ‘무균질우유’ TV CF도 찍었다. 95년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무소속 출마 돌풍을 일으켰고, 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선거를 이끌었다. 이후로도 여러 정당을 오갔고,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대표적으로 BBK사건과 판사 석궁테러 사건, 미네르바 사건 등을 담당했다. 최근에는 정치평론가로 출연 중이다.
시기적인 정세
집권 2년차의 문민정부는 초기에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3당 야합이라는 세상 멍청한 짓을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군인 출신 정권을 끝낸 덕으로 볼 수 있을까. 임기 첫 해였던 93년 사회인 인기 투표에서 연예인들을 제치고 1위에 오른 사람이 김영삼이다. 취임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이라며 시작한 금융실명제와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결단을 내렸던 ‘하나회 척결’로 국민의 지지는 하늘을 찔렀다. 임기 내내 날개를 단 듯 날아다닐 줄 알았던 김영삼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문민정부라서 다르구나”라는 말이 오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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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이 높으면 역시 자신감도 높아지고 (생각없이 자신감만 높아지면) 결국 길을 잃고 헤매는 걸까. 임기 초반 그리도 높았던 지지율은 2년차부터 폭망한다. 특히 각종 사고 발생으로 국민은 정권에 대해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서해 페리호 침몰(93.10), 성수대교 붕괴(94.10), 아현동 가스폭발(94.12), 대구 지하철 공사 폭발사고(95.04) 등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오르 내리는 사고가 선거를 앞둔 1,2년 사이에 발생했다. 사고가 발생했어도 제대로 대처하고 사고 예방에 힘썼다면 국민의 지지가 떠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몇 달 간격으로 발생하는거 보면 김영삼 정부가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사에 대한 처참한 민심과 비교해 정치권 분위기는 ‘개판’이었다. 민자당은 국회를 열자는 민주당의 주장을 정치 공세 수준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전까지 자주 보던 여당의 모습이다) YS의 2인자로 불리던 김덕룡 민자당 사무총장은 “야당이 이번 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이다) 게다가 세상 상황파악 못한 것을 보이는 YS는 5월 2일 여당 의원들을 부른 자리에서 “대구 사고는 몇 사람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아까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라고 개소리를 했다.
이런 사안에 대해 비판하는 야당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통령도 여당도 무시하며 야당의 비판을 ‘정치공략’ 정도로만 생각했다. 권력 비리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지만 비리를 잡는 모습은 볼 수 없고 야당 주요 인사나 차기 주자를 타겟으로 삼는 표적 사정만 나왔다. 모든 부분에서 수구화 된 여당의 모습만 나타났다.
자민련 창당대회 김종필 총재
자민련 창당대회 김종필 총재
게다가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에서 JP 계열, 그러니까 당내에서 ‘공화계’로 불렸던 신민주공화당 인사들이 대거 탈당한다. 3당 합당 때 차기 주자로 김영삼을 밀어주며 ‘차차기’를 바라봤던 김종필을 김영삼은 물론이고, 당 내 YS 계열인 ‘민주계’도 김종필을 ‘개혁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 시대 인물’로 퇴진을 요구한다. 이렇게 탈당한 JP와 ‘공화계’는 충청을 기반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때가 불과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둔 95년 3월 30일이었다.
정부와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지지율 하락, 정치적 수구화 그리고 보수 세력의 분열로 점점 김영삼과 여당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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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6월 28일, 한겨레 1면
함디비보자
요약
95년 지방선거의 결과를 요약하자면 ‘YS 정부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참패’, ‘DJ의 후광을 업은 민주당의 선전’, ‘JP의 자유민주연합 돌풍’이다. 광역단체장 당선인 숫자로는 민자당이 우세하지만, 여야로 따지면 5:10 더블스코어로 패배했다. 기초단체장은 숫자에서도 민자당이 밀린다. 민자당 69, 민주당 84다. 광역의원으로 가보자. 민자당 284, 민주당 353이다. 사상 첫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누가 봐도 철저하게 ‘정권 심판, 여당 심판, YS 심판’이었다.
앞서 ‘거들떠보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취임 초 지지율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김영삼은 2년 차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참한 지지율은 결국 임기 3년 차 중간 평가나 다름없는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완패로 이어졌다.
특히 서울의 결과가 충격이었다. 이전 정부 국무총리까지 했던 민자당의 정원식 후보는 겨우 3위에 머물렀다. 2위도 아니고 3위다. 그마저도 다른 정당에 밀린 게 아니라 무소속 박찬종 후보에게 밀려 3위다. 게다가 자민련은 ���울시장 후보를 공천하지도 않고 조순을 지지했다. 굳이 꼬집어서 설명을 덧붙이자면 1위 조순, 2위 박찬종에게 밀려 꼴찌를 한 거다. 집권 여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가.
1991년 6월 한국외대에서 교수직 사퇴 당시 정원식 총리
1991년 6월 한국외대에서 교수직 사퇴 당시 정원식 총리
여기서 잠깐 ‘정원식’이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들에게 짧게 설명을 덧붙여본���.
정원식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고, 육군 장교를 했으며, 공무원 생활을 했다. 세상 엘리트 코스도 이런 코스가 없다 미국 유학도 갔다 오며 모교에서 교육학과 교수도 했고, 사범대학장까지 맡았다. <조선일보> ‘머리를 써서 살아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책으로 묶어 출판했는데 100만 권이 팔리기도 했다. 좋은 길만 쭉쭉 간다 이후에 방송위원회 산하 방송심의위원장을 지낸 뒤 노태우 정부에서 문교부 장관(88.12. – 90.12)을 지냈다.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공안정국에 동조하며 학생운동과 사학 분규에 강경하게 대응했고, 전교조에 대해서는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구속/해임 등 불이익 조치를 강하게 취했다. 91년에는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한국외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달걀,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를 ‘집단 폭행’으로 보도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것으로 봤을 때 학생들의 행동은 정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조선일보껀 살짝 비틀어봐도 좋지 않나. 그때나 지금이나 김영삼 당선 직후엔 대통령직인수위원장도 맡았고 드디어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무려 이명박을 이기고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본선 결과는…
서울보다 더 충격일 수 있는 지역을 꼽자면 대구다. 민주당은 후보조차 내지 못한 대구시장 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는 서울처럼 꼴찌를 했다. 혹시 까먹었을까 봐 이야기하는데 민자당은 집권여당이다. 심지어 당선은 무소속 문희갑 후보가 했다. 2위는 자민련 이의익 후보였고 3위도 무소속 이해봉이다. 집권 여당 민자당 후보인 조해녕은 16.87%의 득표율로 꼴찌를 차지했다. 한편으로는 보수세력의 분열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보면 집권여당에 대한 심판이다. PK(부산-경남) 출신 대통령이 TK(대구-경북)를 홀대한다는 ‘TK 홀대론’의 결과로 분석하는 의견도 있다. 게다가 선거 한 달 여 전 발생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로 대구 지역의 반 민자당 정서도 크게 작용했다.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1995년 4월 28일 대구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있는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공사 현��에서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50m에 달하는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400m에 달하는 건설현장이 무너졌다. 사망 101명, 부상 202명 등 3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차량 150대 이상, 건물 80여 채 이상이 파손되는 대참사다. 특히 사건 현장이 학교 근처에 있었고 등교 시간에 발생한 사고로 많은 학생 사상자가 나왔다. 100여 명의 사망자 중 영남중학교 학생이 42명이다.
참사 이후 민심은 흉흉했다. 사고 다음 날 <조선일보>는 ‘또 대참사’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던 기억들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지하철 공사장의 폭발사고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육-해-공의 모든 부문에서 대참사가 났으니 이제는 지하의 사고만 남았다는 국민들의 자조 섞인 탄식이 드디어 현실화했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에게는 과분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 마저 들 정도다.
참사에 대한 처참한 민심과 비교해 정치권 분위기는 ‘개판’이었다. 민자당은 국회를 열자는 민주당의 주장을 정치 공세 수준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전까지 자주 보던 여당의 모습이다) YS의 2인자로 불리던 김덕룡 민자당 사무총장은 “야당이 이번 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이다) 게다가 세상 상황파악 못한 것을 보이는 YS는 5월 2일 여당 의원들을 부른 자리에서 “대구 사고는 몇 사람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아까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라고 개소리를 했다.
‘거들떠보자’에서 말했던 대로 각종 사건 사고는 95년 지방선거를 김영삼과 민자당에 대한 심판으로 갈 수밖에 없게 자초했다. 단순히 사고가 발생해서 그 결과로 민심이 떠났다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내용도 없이 재탕 삼탕을 반복하는 말뿐인 대책 발표에 지쳐 떠났다. 선거 이후에도 각종 사고가 이어졌다는 것을 떠올리면 더 크게 아작(?)나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을 거다.
어쨌든, 첫 번째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여당 심판의 날’로 끝났다.
숫자
자, 숫자만 하나씩 따져보자.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5, 민주당 4, 자유민주연합 4, 무소속 2로 결과가 나왔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숫자만 단순히 비교하면 민주자유당이 이겼다고 할 수 있다. (뭐 사실상 승리라든가… ‘이 정도면 선방했다, 뽜이야’라든가…) 그러나 민자당은 집권 여당이고 국회에서 과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참패 중의 참패로 봐야 한다. 여/야 구도로 보면 5:10 더블스코어 완패다.
기초단체장 선거는 숫자 싸움에서도 졌다. 민주당 84, 민주자유당 69, 자유민주연합 24, 무소속 53으로 민주당에 제대로 패했다. 여/야 구도로 보면 이번에도 거의 뭐 더블스코어나 마찬가지 수준이다.
광역단체장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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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왜
3년 전 겨울, 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이겼고 김대중은 졌다. 김대중은 패배에 대해 바로 승복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92년 대선 직후 김대중 후보 은퇴 선언 신문 지면
92년 대선 직후 김대중 후보 은퇴 선언 뉴스화면
92년 대선 직후 김대중 후보 은퇴 선언 뉴스화면
저는 또 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저의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저는 김영삼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간 국민 여러분 막중한 사랑과 성원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김영삼 정부의 성공을 바라며 ‘역사의 라이벌’이 물러났다. 사람들은 김영삼에 대해 기대가 컸고 집권 1년 차 때만 해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거들떠보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임기 초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93년 사회인 인기투표에서 연예인들을 제치고 1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당시 대통령 김영삼이다.
하지만 집권 2년 차였던 1994년부터 각종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탄탄했던 지지율은 무너졌다. 각종 비리와 사건 사고로 인해서 우리 국민은 문민정부에 대해 기대를 접었다. 무능한 정부는 결국 해결책보다는 회피책만 찾았다. 이전 군사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은퇴한 김대중에 대한 향수만 불러일으키게 된 셈이다.
역사의 선택일까, 인물의 선택일까. 김대중이 93년 말에 낸 수필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는 무려 65만 부가 팔렸다. (뭔가 제목은 사실상 정계 복귀를 꿈꾸는 느낌적인 느낌?) 94년 5월에는 미국에서 있었던 연설에서 대북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여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성사에는 실패했지만)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었다. 김대중은 은퇴 이후 국내외에서 이전보다 더 깊은 지지를 얻게 됐다.
이때부터 김대중은 적극적으로 국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아태재단 설립을 시작으로 인적 네트워크 구성도 갖춰나갔고 95년 지방선거에서도 일찌감치 민주당 지지를 선언하며 사실상 복귀를 가늠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민주당 대표는 이기택이었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기택보다 김대중을 바라봤다. 이 갈등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김대중은 선거에서 ‘서울은 조순, 경기는 이종찬’이라는 구도를 짰다. 하지만 이기택은 자신이 당 대표라며 경기지사 후보에 장경우를 지지했다. 그런데 장경우는 경기지사 경선에서 ‘돈 봉투 살포’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렇지만 이기택이 김대중을 찾아 “만약 장경우 후보가 경기도지사에 떨어지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끝내 밀어붙였다. 김대중이 구상한 ‘서울 조순, 경기 이종찬’ 구도가 깨진 데다가 조순은 박찬종에게 밀리고 있었다. 이 상황은 오히려 김대중이 보다 적극적으로 선거 유세에 뛰어들게 했다.
당 차원에서, 후보 개인 차원에서 김대중을 찾아 지원 유세를 요청했다. 후보들은 선거 홍보물에 ‘김대중과 각별하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바빴다.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니 이기택도 김대중을 찾았고, 장경우 마저도 김대중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사실상 김대중이 민주당 선거를 이끌게 됐다. 당시의 분위기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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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지방선거 민주당 지원유세 현장에서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
나는 다시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를 했다. 유세장에는 예상 밖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수도권 지역에서는 어디를 가도 몇만 명이 모여 있었다. 유세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라치면 나를 둘러싸고 이름을 연호했다. 나는 김밥을 먹어 가며 하루에 많게는 11곳을 돌았다. 곳곳에 “우리는 김대중을 기다린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나는 김영삼 정권의 위선적 행태를 꾸짖었다. / 김대중 자서전. 605페이지.
‘우리는 김대중을 기다린다’ 이 한 문장이 선거 결과를 보여준다. 결국 DJ 때문이다. 은퇴한 DJ가 대통령 YS를 이겼다. 민주당이 완승하진 않았지만 완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대통령은 김영삼이었지만 국민의 지지는 김대중을 향해 있었다. 보수-수구화된 문민정부. 이전 군사정부와 별 다를 게 없었던 태도에 완벽하게 견제했다. 95년 지방선거는 철저하게 YS 정부 심판으로 끝난 것이다.
여기가핫플
서울특별시
시민들이 처음으로 뽑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인만큼 첫 서울특별시장으로 누가 뽑히느냐가 굉장히 관심을 모았다. (아 4.19 이후에 잠깐 11대 서울시장이 민선으로 뽑히긴 했다) 특히나 마지막 관선 시장인 최병렬이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임기를 시작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사고는 선거 이틀 후)’로 임기를 마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민들은 제대로 된 인물을 자신들의 시장으로 만들고 싶어 했을 것 같다. 정말로 ‘지선아 반갑다’ 외칠 정도랄까.
거들떠보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민주자유당에서는 정원식 후보가 출마했다. 노태우 정부 국무총리까지 한 인물이다. 집권당에서는 나름 나쁘지 않은 카드를 낸 셈이다. 민주당에서는 조순이 나섰다. 정원식이 총리까지 했다면 조순은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지냈고,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3당인 자유민주연합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켰던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초반 지지율 1위를 달렸다. 정원식은 그냥 처음부터 꼴찌를 유지했다.
초반에는 정말 박찬종이 당선될 줄 알았다. 거들떠보자에서도 얘기했지만 이미 국회의원을 여러 차례 했고,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정풍운동도 했었고, DJ-YS 사이에서 단일화 운동도 했으며, 92년에는 대선 출마도 했고, ‘무균질 우유’ CF까지 찍었으니 나머지 후보보다 인지도가 높았던 효과였다.
조순 전 서울시장
95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 조순 후보 포스터
하지만 선거가 진행되면서 김대중이 암묵적으로 조순을 지지하며 각종 유세 나섰고, 후보를 내지 않은 자민련의 사실상 조순 지지 선언으로 인해 후반부로 가면서 지지율이 뒤집혔다. 민주당 고정 지지층에다가 서울에 많이 있는 호남 출신 시민들의 지지, 충청 출신 시민들의 지지까지 ���함됐으니 결과가 뒤집히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물론 정원식은 그냥 꼴찌를 끝까지 유지했다.
게다가 선거 유세를 하면서 가장 인기 있던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을 컨셉으로 잡아 ���은 층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사진 을 보면 알겠지만, 조순의 눈썹이 포청천의 눈썹과 비슷해서 나온 컨셉이었는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선거 유세였다. (최근 사례를 굳이 뒤적뒤적해서 찾아보자면 19대 총선 동대문을 지역구에서 보여준 홍준표의 ‘홍그리버드’를 꺼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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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그리버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첫 번째 지방선거의 서울시장은 조순이 당선됐다. 서울 전체 지역에서 골고루 높은 표를 얻었다. 부재자투표에서는 역시 초반 지지율 1위를 달렸던 박찬종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선거 당일 투표를 못 하거나 놀러 가는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었던 거다. 그만큼 선거 유세 중반과 막바지에 조순이 뒤집기를 한 결과다.) 물론 정원식은 그냥 꼴찌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다.
그래서다음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정말 정신 차리고 ‘열일’하기 시작한다. (진작 잘하지..) 선거 직후인 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건물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다. 물론 3.1절 기념식에서 이미 밝혔던 철거 계획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선거 결과로 인한 노력으로 볼 순 없다. 그러나 각종 사건 사고에다가 선거 결과까지 봤던 국민에게 정부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다시 심어주게 된 계기가 됐다.
또 95년 12월 21일에는 5.18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 법을 통해 쿠데타 혐의와 비리 혐의로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을 구속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또 한 번 지지도 회복에 성공한다. (전두환, 노태우는 단순히 전직 대통령이나 반란 수괴를 떠나서 민주자유당을 창당시키게 된 사람들이다. 민자당 창당 당시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이지만 사실상 민주정의당을 이끌고 있었고, 노태우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민자당 창당 당시 총재를 맡았고, 그다음 순서로 김영삼이 대표였다. 일종의 ‘배신’이거나 ‘뒤통수’ 느낌이었기 때문에 TK 민심은 민자당을 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패(또는 지지도 하락)한 정당이 그렇듯 당명도 바꾼다. (예를 들면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으로 바꿨다랄까) 김영삼 정부의 상징적인 캐치프레이즈였던 ‘신한국 창조’에서 본뜬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물론 그 이름이 오래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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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에서 서울, 인천 등에서 당선하며 자리를 잡은 민주당은 오히려 그 결과 때문에 갈라지기 시작한다.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요청과 자신의 결단을 통해 95년 7월 정계 복귀 선언을 한다. 김대중은 선거 과정에 있었던 이기택 대표와의 갈등으로 민주당으로 복귀하지 않고 외부에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민주당 의원 중 동교동계는 대부분 국민회의로 옮겼고, 옮기지 못하는 전국구 의원들도 당적은 민주당에 있으면서 사실상 국민회의 활동을 했다. (최근에 이런 뉴스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볼 때 정치는 그대로인 것 같다) 이로 인해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창당과 동시에 제1야당을 차지한다.
이렇게 지방선거 이후 야권은 결국 민주당과 국민회의의 단일화 실패로 분열, 96년 15대 총선에서는 여당인 신한국당이 승리한다. 신한국당은 TK에서는 자민련에 자리를 내줬지만 다른 지역에서 완승했고, 끝끝내 무소속과 자민련 소속 의원을 영입해 과반 의석을 차지한다.
이번에도 숫자로는 신한국당의 기분 좋은 승리로 볼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지방선거 참패 이후 각종 당 내외 개혁작업으로 지지도를 얻었고, 야권의 분열로 인해 어부지리로 이긴 곳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로 따져보면 DJ와 국민회의의 승리다. DJ는 비록 원내 1당이나 100석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70석 이상 당선하며 여전히 제1야당 위치를 유지했다. 반대로 이기택의 민주당은 15석에 머물며 또다시 ‘꼬마민주당’으로 돌아섰다. DJ는 이번 선거를 기반으로 숫자로는 신한국당에 밀리지만 자기만의 정치를 이끌어갔다.
반면에 신한국당은 과반 의석을 차지한 거대 여당이었지만 ‘국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은 결국 96년 12월 25일에 있었던 ‘노동관계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 파동으로 국민의 지지를 다시 한번 잃었다.
신한국당의 지지율은 회복이 어려웠고 97년 외환위기에다가 당내 대선 경선에서 이인제의 경선 불복 등 악재가 겹쳤다. 그리고 국민회의 김대중은 신한국당의 저런 모습과 DJP 연대의 결과로 97년 대선에서 50년 만에 사상 첫 여야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다.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대-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박태준 자민련 총재, DJT연대
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지선아반갑다 #1. 은퇴한 DJ가 대통령 YS를 잡다 (1995) 서문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실험은 주권 의식을 고취시켰다. ... 주민의 투표로 임기가 보장된 일꾼이 어디를 보고 일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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