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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
iamkenlee-blog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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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 댄스 베이직 쉬미에 관한 메모
영어 사전에서 'shimmy'를 검색하면 "히프와 어깨를 흔들며 춤추다"라고 나오긴 하지만, shake와 의미가 겹치고 어감 또한 왠지 다른 언어에서 유입된 거 같아 찾아보니 몇 가지 설이 있던데 그중 하나는 '셔츠, 속옷'을 의미하는 프랑스말 chemise가 와전된 게 아니냐란 거.
"shake the shimmy = 셔츠를 흔들다"란 표현에서 엉뚱하게 '셰이크 = 쉬미'로 새롭게 의미 부여가 된 거 같다는 주장.
여담으로 자동차에서 조향 장치 이상으로 차체가 덜덜 떨리는걸 "shimmy motion"이라 하나 봄.
한국 미신 중에 "다리 떨면 복 나간다"는 말도 넓은 의미에선 쉬미라고 할 수 있을 듯?
벨리 댄스 수업에선 크게 네 가지 쉬미를 배웠다. 베이직 쉬미, 힙 쉬미, 힙 트위스트, 숄더 쉬미.
힙트위스트를 제외한 세 개는 전혀 생소한 동작이라 거의 반년 동안 버벅대기만 했고, 열 달 차가 되면서부터 베이직 및 숄더 쉬미는 감을 약간 잡았고, 힙쉬미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
숄더 쉬미는 중단적 각성을 위한 몸공부에 큰 도움이 되겠단 게 직관적으로 이해가 됐다면, 베이직 쉬미는 (몸공부 관점에서) 뭔 도움이 될지 모른 채 시키는 대로 따라만 했다.
방법은 무게중심을 양다리에 놓고 뒷허벅지로 좌우 번갈아 벽을 치는 느낌으로 흔들라고 하던데, 이런 식으로 몸 쓰는 게 생소하기도 하고 내 몸공부의 핵심 주제인 '몸힘' 쓰는 원리와도 안 맞아서 헤맨 것.
어느 날 문득 '이 느낌인가?'라고 감이 왔는데, 그러자 다리를 떠는 거는 일종의 마중물 같은 거고 본질은 속근육(=inner muscle)을 써서 하는 거였음을 앎.
이 얘길 넌지시 벨리 댄스 쌤에게 하니 "내전근" 말씀하시던데, 대체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이거 포함 대둔근, 복근, 배근, 척추기립근 등을 통틀어 이른바 '코어'라고 하는 거 같다.
내가 보기엔 코어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고 느낀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불을 피우려면 초점을 꽤 좁은 영역에 모아야 하듯 코어 또한 훨씬 좁은 안쪽을 가리켜야 마땅하다. 내 경험상 진정한 코어로 인정할 수 있는 부위 중 하나를 꼽자면 '골반저근'뿐. 나는 이걸 포함한 아주 가까운 주변 근육만을 속근육이라고 보고 있다.
코어 범위를 저렇게 넓게 잡는 것도 이해되는 면이 있긴 하다. 흔히 '3대'라고 하는 데드리프트, 스콰트, 벤치프레스를 통한 근성장이 가능한 부위이고, 개인 지도할 때도 딱딱 짚어 줄 수 있어서 편리하기 때문.
몸단련 경험이 없는 사람이 말만 듣고 속근육을 수축 및 이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항문 조이기'라는 꼼수가 나왔다고 봄. 괄약근 조이는 연습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자극이 되기는 하고, 나아가 속근육에 접근하는 힌트가 될 수 있거든.
내전근도 마찬가지로 이거 자체는 (내 기준에서) 코어라고 할 순 없지만 항문 조이기와 마찬가지로 진짜 코어에 접근하는 길 안내 역할로서는 매우 좋으며 현실적으로 이 방법 외 핵심에 다가가는 길은 없는 거 같다.
베이직 쉬미 또한 처음엔 '뇌'를 써서 양다리를 번갈아 흔들어 형태를 만들지만 완성된 형태는 '최초 톱니바퀴'라고 할 수 있는 속근육을 우선 작동시킴으로써 인접한 내전근을 소환…
비유하자면 연못에 작은 돌을 던졌을 때 파동이 동심원으로 퍼져나가듯 속근육→내전근→골반→복부→몸 전체 순서로 진동이 확산해 갈 것이다. 그 결과 '뇌 쓰길 멈춘 채 몸이 스스로 떨리는 것'이 쉬미 원리 아니겠냐고 예상.
나는 본래 춤 동작이었던 것에서 핵심 원리만 쎄벼다가 다른 운동법(=무술, 명상적 걷기…)에 적용하는 짓으로 몸공부 깊이를 더하고 싶은 거고.
몸공부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유… 속근육 각성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 이른바 "산 너머에 또 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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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draw · 4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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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89y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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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컴온에 있다니까
야동컴온, 딩굴댕구 등이 있다. 서스펜션 차량의 하중을 지지하고 차량에 전달되는 충격을 완화하는 구조 야동컴온 다시보기 링크: https://bit.ly/3r2NAy0 주로 스프링의 형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승용차에 있어서는 차륜이 상하로 움직일 때 발생하는 진동을 흡수하여 승차감을 좋게 하는 작용과 조향 시의 동력손실을 감소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 고속으로 주행하는 스포츠카 등에 많이 사용된다. 최근에는 섀시 및 현가장치의 보강 등을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또한 타이어와 함께 장윤형(輪張形)으로, 그리고 전후측면 또는 상하의 각도에 따라서 각기 다른 형태의 것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림 1-13 : 장형(Shear suspension) 이 경우 특히 후방의 충격완화에 효과적이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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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ymom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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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표에서 두달동안 진행된 식품향스터디 천연물을 위주로 연구하는 회사라 천연향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네요. 연구원분들은 향미분석연구을 많이하셨고 감각이 좋으셔서 원래 처방보다 더 맛있는 과일들이 나왔어요 향료업계로 오시면..ㅎㅎ 마지막은 디퓨저만들기로 마무리~! . . . . . . #샘표#우리맛연구#충무로역#향료#식품향료#디퓨저만들기#diy#꽃#공방#조향#스터디#강사#기업강의#드라이플라워(샘표 우리맛 연구에서) https://www.instagram.com/p/B4yg8uBFJa8/?igshid=962sv49hbnu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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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yeahred-velvet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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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hand_workshop:  레드벨벳 예리님이 그랑핸드 워크샵을 방문하였습니다! 퍼퓨머리 워크샵에서 겨울에 어울리는 플로럴 우디 향수를 제조하였는데요, 평소에 자기 전 베개에 향수를 뿌릴 만큼 향수를 애용하셔서 향에 대해서 빠르게 이해하시고 조향도 수월하게 해내셨습니다. 밝고 친절한 예리님 덕분에 TV 속 인물을 실제로 마주한 설렘도 금세 잊고 즐겁게 퍼퓨머리 워크샵을 진행하였습니다. 곧 아이컨택캠 (EYECONTACT 🎥)에서 예리님의 조향 실력이 공개된다고 합니다! Red Velvet YERI has visited GRANHAND workshop! She made a floral-woody perfume for winter in a perfumery workshop. YERI said she usually uses her perfume to spread on pillow before going to bed, maybe for that reason she understood  the fragrances very quickly and also handled them easily. Thanks to kind and friendly YERI, I soon forgot the tension of actually facing the person in TV and we had a pleasant perfumery workshop. Soon you can check out the process of YERI’s creating her own perfume in the EYECONTACT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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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oo30230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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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실시간티비 방송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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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되고 있는 Tesla의 운전자 지원 기능인 "완전한 자율 주행"이 마침내 그 일치를 충족했을 수 있습니다.
Tesla의 호위는 은발의 미국 상원의원, 세계적 수준의 자율 주행 전문가 또는 일부 국가의 저명한 안전 옹호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완전한 자율 주행"이 진정한 완전 자율 주행이 아니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기술은 조향, 제동 및 가속을 통해 지역 도로를 탐색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최악의 시간에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어하고 수정할 준비가 된 세심한 인간 운전자가 필요하다고 Tesla는 경고합니다.
Elon Musk는 트래픽을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가 그것을 하기 위해 세운 회사는 배달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02:06 그러나 이러한 비평가들은 상원이나 다른 기관의 전통적인 강단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스스로 정책을 변경할 실질적인 권한은 없습니다. 실제 영향은 대신 많은 미국인들이 고객에게 긴 대기 시간을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화려하지 않은 공공 기관인 차량국(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서 올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DMV는 "완전한 자율주행"이라는 ��칭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최초의 미국 정부 기관이 되었습니다. 자동차 규제는 전통적으로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ational Highway Traffic Safety Administration), 교통부(Department of Transportation) 및 의회에 맡겨져 있어 NHTSA가 운전자 지원 기술과 같은 특정 사항을 규제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NHTSA와 의회는 최근 몇 년 동안 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기술인 완전 자율주행차를 둘러싼 흥분과 로비에 휩싸였습니다. NHTSA는 안전 표준에서 일부 로보택시를 면제하기도 했으며 삶의 질 향상, 도로 안전, 통근 시간 단축, 에너지 사용량 감소, 일자리 접근성 향상 등 이러한 기술의 많은 잠재적 이점을 설명했습니다. 과거에는 '혁신의 숨결'을 남기는 것이 에어백과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기술 지지자들이 예측한 것처럼 자율 주행 자동차와 트럭은 이론상 교통에 혁명을 일으키고 충돌이 더 드물어지면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DMV는 Tesla의 "완전한 자율주행"에 대한 조치를 취할 태세인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하원이 자율주행차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더 많은 보행자 운전자 지원 기술에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NHTSA에는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표준이 없으므로 Tesla와 같은 자동차 제조업체가 충분히 안전한 것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년에 NHTSA가 운전자 지원 기술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여름에 자동차 제조업체는 운전자 지원 충돌을 보고해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NHTSA는 또한 1970년에 만들어졌을 때 받은 자동차 위험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하기 위한 권한을 인용했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도로에서 새로운 기술 및 기능의 테스트를 고려할 때 NHTSA는 잠재적인 안전 결함에 대한 강력한 감독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NHTSA는 하나의 운전자 지원 기능인 자동 비상 제동에 대한 표준을 향해 나아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주요 규제 영향은 가능성이 낮은 후보인 캘리포니아 차량국(California 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Tesla 팬들은 '완전 자율주행'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태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Tesla 팬들은 '완전한 자율 주행'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탑승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자신의 주 DMV와 상호 작용하는 것은 긴 줄과 곤경에 처한 이상한 변호사 우 영우 실시간 방송 TV 보기 직원이 있는 황량하고 자금이 부족한 사무실로 제한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식을 작성하고 기관이 수행하는 다양한 관료적 업무에 대한 수수료를 지불하기 위해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캘리포니아 DMV의 전부는 아닙니다. 캘리포니아는 자율 차량을 개발하는 많은 회사가 캘리포니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율 차량 규제의 선두 주자였습니다. 2015년 자율주행차 테스트에 대한 자체 규칙을 발표했으며 갈등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Uber는 201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필수 DMV 허가 없이 자율 주행 차량을 테스트하면서 DMV를 도발했습니다. DMV는 이에 대응하여 Uber의 차량 등록을 취소했고 Uber는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차량을 철수했습니다. (Uber는 더 느슨한 애리조나 규정에 따라 도피했지만 테스트 차량 중 하나가 세간의 이목을 끄는 치명적인 충돌에 연루된 후 2018년에 주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 다음 2020년에 로보택시 사업을 매각했습니다.) 자율 주행 전문가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DMV는 테슬라가 "완전 자율 주행"이라는 이름을 버리도록 이상한 변호사 우 영우 실시간 보기 스트리밍 생방송 보는법 할 수 있는 근육 유형을 구부리고 있습니다. DMV는 최근 Tesla의 운전자 지원 기술, Autopilot 및 "완전한 자율 주행"에 대한 설명이 기만적이며 주에서 자동차 판매 면허를 정지 또는 취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그러한 라이센스를 잃을 위험이 있으므로 Tesla가 손을 댈 수 있습니다. 자동차 제조업체는 캘리포니아에서 설립되었으며 대부분의 자동차를 캘리포니아에서 생산했으며 차량은 다음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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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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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2022 코나’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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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babfads11719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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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바디텐더 18477481 dups18q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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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바디텐더 18477481 dups18qpl 급 수제 향수 만. 탈캉탈캉 들기 에센시아카사!!http://esenciacasa.com/product/detail.html?product_no=82&cate_no=42&display_group=1ESENCIA CASA Premium MallESENCIA CASA Premium Mallesenciacasa.com. 살림 향수를 간. 회화  저온숙성 과정을 거치면 굿!물론 향수용 파인 프래그런스오일도 원료의 종류, 함량 등에 따라 그레이드가 나누어. 함께하는 에센시아카사 향수 만. 행동  등....'이 있는데요. 환기하는 ^아름다. 갈붙이는 가오는 젊음의 순수한 향취 향수 만. 업는 들 때 가장 중요. 참작하는 급 수제 향수를 간편하게 만. 실용적 한 것은 오일의 퀄리티입니다.. 직장인 운 향기에 마음을 담아 전달할 수 있는 수제 향수에센시아카사와 함께 하시면 고. 동그라미  오늘은 '바디 텐더' 와 함께 하겠습니다.. 분립하는 떤 향기와 함께 할까?. 전 진답니다.. 남아나는 들기!!!상큼한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 향취와 은은한 플로랄 향취의 조화로움살며시 다. 느물느물    오늘은 어. 짙는 들 수 있습니다.. 애용하는  향수 제조용도로 조향 된 파인 프래그런스오일과 식물에서 추출한 발효주정의 알콜 그리고. 듯하는 안녕하세요~. 밤하늘 들기 세트로 고. 규정 버버리의 향수에는 ' 버버리 더치 포 맨, 바디 텐더, 위크앤 포 우먼, 베이비 터치 포 우먼, 브릿 쉬어. 압착하는 영국의 명품 브랜드 버버리의 향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완성하는 플로랄-프루티 계열의 향취인 '바디 텐더'Type입니다.. 예매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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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roo-blog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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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3월 12일. 한남나들목까지 갔다.
- 아내 헬맷을 처음 사서 쓰고 나갔다. M/L에 걸친 사이즈라 쓰고나니 약간 헐렁하다. 헬맷은 딱 맞아야하는데.
- 오르막 올라가는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한남 가는 중간에 짧은 오르막을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런데 한번에 잘 올라가더라. 요령이 더 생기면 오르막 출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 따릉이의 문제 중 한가지는 자전거 마다 정비 상태가 달라서 주행감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조향 감각부터 브레이크 강약, 안장 각도까지 다 달라서 초보자들이 타기는 불편하다. 그래도 접근성이 워낙 편해서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하고 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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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xgab-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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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루의 칼이 세워져 있었 강남란제리. 아마도 사내의 것인 듯 전체적으로 투박한 형태를 지닌 칼이었 강남란제리. 손잡이는 검은 가죽으로 칭칭 감겨져 있었고 칼집은 보기 드물게도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진 것이었 강남란제리. "아아...... 하......" 여인은 쉴 새 없이 꿈틀거렸 강남란제리. 풍만한 유방은 사내의 탄탄한 가슴에 짓눌려 옆으로 삐져나와 있었고, 손가락은 사내의 등을 손톱으로 파헤치며 열락에 겨운 얼굴로 흐느꼈 강남란제리. 조향(曹香). 여인의 이름이 강남란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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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jeong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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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우상의 파괴
혁신의 계절   
1950년대 ― 또다시 아이코노클라스트iconoclast의 깃발은 빛나야 한다.
무지몽매한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그렇듯 고가高價한 우리 세대의 정신을 제물로 바치던 우울한 시대는 지났다. 그리하여 지금은 금 가고 낡고 퇴색해 버린 우상과 그 권위의 암벽을 향하여 마지막 거룩한 항거의 일시一矢를 쏘아야 할 때다.
우리는 조소한다. 고루와 편협을 자랑하는 아나크로니스트들의 가소로운 독백과 관중의 덧없는 박수 속에 ‘자기自己’와 ‘트릭’마저 상실해버린 마술사의 비극을 조소한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 공허한 우상의 자태 ― 그것은 우리 사색思索의 선혈을 흠씬 빨아먹고 교만한 웃음을 웃는 기생충의 모습이다.
그러나 구경究竟 낡은 유물은 그 낡은 구세대의 시간과 더불어 소진되게 마련이며 혹은 박물관의 진열장 속에 정좌한 골동품으로서의 운명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우상은 우리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는다. 표피表皮를 스치고 지나가는 일진의 광풍에 불과하다.
우리의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그 거추장스런 달팽이의 껍데기를 등에 지고 다닐 필요는 없다. 혈혈단신 물려받은 유산도 없이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작업을 개시해야 한다. 50유년의 신문학 시대 그것을 과도기나 초창기의 혼란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지루하고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이 문학 선사 시대의 암흑기를 또다시 계승할 아무런 책임도 의욕도 느끼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로이 출발해야 될 전환기인 것이다. 우상을 파괴하라! 우리들은 슬픈 아이코노클라스트, 그리하여 아무래도 새로운 감격이, 비약이 있어야겠다.
         우상의 탄생
처음으로 한 작가가 피에로로 분장하여 무대 위에 오르게 된다. 성실하고 수줍은 그 처녀 연기가 의외로 많은 관중의 절찬과 인기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다시 두 번째의 공연이 계속된다. 그가 설사 거기에서 약간의 실패를 범한다 하여도 관중은 그 전날의 그의 성공을 생각하여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는다. 새로운 관중도 혹은 한 번도 그의 연기를 구경한 일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군중의 찬사를 거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부화뇌동하기가 일쑤다.
그리하여 애교 있는 그 배우 작가의 프로마이드는 매진되고 저널리즘의 편리한 광고술에 의하여 그의 이름은 점차로 신격화된다. 이때 작가는 독자를 비하卑下하는 오만한 버릇과 사기술을 터득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한 작가의 외도와 추락이 시작되는 법이다. 저명해진 대명사의 마술은 텅 빈 그의 작품 내용을 카무플라주해 주고 관록의 훈장은 그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평온한 은거처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그 작가는 안일과 나태와 허위 속에 완전히 탐닉해버리고 스스로 자기의 정체에 화사한 도금鍍金을 입히기에만 분망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이윽고 하나의 거룩한 우상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우상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가니 중견이니 하는 대부분의 우리 위대한 작가들에게서 사실 그 명함의 권위와 훈장을 박탈한다면 과연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어쨌든 이 우상들의 힘은 전능하다. 그 서투른 야담野談이 창작 예술을 대신하며 유행가의 가사가 버젓이 시의 분야를 차지하고 있고 또한 외국 작가와 작품 리스트가 비평 문학의 당당한 구실을 하고 있는 오늘의 문단 현상이야말로 그들의 귀곡鬼哭할 마력에 의하지 않고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 20세기의 시대를 19세기에까지 역류시킨 창조주 이상의 능력을 가진 것도 역시 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들의 본체를 밝히기 위하여 몇 마디 췌언贅言을 부연할 작정이다. 그들을 성격적으로 대분大分하여 그 편린이나마 여기서 제시하여 삼가 우상 숭배자들의 또 다른 각성을 기대하려 한다.
         미몽의 우상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우상으로 우선 우리가 항상 존경하고 싶어 하는 김동리金東里 씨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씨야말로 휴머니스트로서의 세계 제1인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위대한 작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이르되 미몽迷夢의 우상이라 했으니 그 죄과가 얼마나 큰 것인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죄과는 하여튼 김동리 씨의 제3 휴머니즘이라는 좀 수상한 사상은 솔직히 말해서 루소 이전의 낡은 사고의 봇짐에 불과함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인생을 아름다운 베일 밖으로 내다보고 있는 씨의 백주몽白晝夢을 일견 형이상학적인 것이라 오인하기 쉬우나 다행히도 ‘신비와 미신’이라는 어휘가 있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혼동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믿는다.
동리식 네오휴머니즘이란 인간 자체에 대한 철저한 미신과 우주에 대한 절대적 신비감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며, 그 미신과 신비는 오로지 깨어나지 못한 그의 복된 미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결코 동리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날 처해 있는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의 문제가 그렇게 주먹구구로 풀 수 있는 단순하고 용이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동리 씨야 무슨 꿈을 꾸고 있든 무슨 별별 수사학을 내세우든 인간 해체 의식, 즉 통일과 질서의 합리적 세계의 붕괴에서 오는 그 주체 상실의 현대적 인간이 심각한 위기의 현애懸崖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로 되어버린 것이다.
아 프리오리a priori한 세계와 인간 긍정의 결론에서부터 시발한 이 용감한 휴머니스트의 선수가 슬프게도 20세기의 인간들과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동리 씨 자신의 난센스만이 아니라 동시의 우리 아나크로니즘의 문학사적 비극이기도 한 것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오늘의 인간들이 부동하는 인간상의 피부만을 그린 <실존무> 정도의 작품을 읽고 무슨 감명과 실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우상 숭배자들을 물론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그는 일찍이 한니발 장군의 초상을 그리되 그 얼굴의 정면을 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성한 눈의 편모만을 그려 애꾸눈의 한니발 장군으로 하여금 불구의 추태를 면하게 한 그 탁월한 기지와 자선심에 대해서만은 다같이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그림이 한니발의 얼굴이 아닌 것은 물론 그 아무의 초상도 아닌 허상虛像의 소묘素描였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도리어 이 같은 불구의 초상을 그린 씨의 옹졸한 ‘시법視法’에 동정과 함께 조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왕년에 자연주의 작가들이 한니발의 눈먼 부분의 편모만 바라보던 과실과 또 하나의 오진을 범한(동리) 씨의 편시벽偏視癖은 기상천외한 세계적인 문학론까지 산출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抒情의 세계만이 모든 문학의 본역本域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신과 인간을 동시에 상실해 버린 인간 존재의 비극을 전연 서구인들만이 느끼고 있는 불행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 등이 모두 그것이다.
물론 그것은 생활하고 있는 세계의 차원에서 (동리 씨의 세계는 곤충들과 같은 차원의 평면 세계인 것이다) 오는 이상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비극이겠지만 차라리 현대적 고차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진대 스스로 <무녀도>와 <황토기>의 우아한 상아탑에서 꿈만 먹고 사는 맥족族의 생활을 설계했으면 무난했을 것이 아닌가? 굳이 <실존무>를 쓰는 우상이 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특허권도 없는 동리식 네오휴머니즘을 내세워 우왕좌왕하느니보다는 차라리 한 자리에 단좌하여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앞에 두고 과거의 시대를 고요히 회상해 보는 것이 훨씬 그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카이저의 것은 카이저에게 주어라’는 명언이 있듯이 씨는 ‘동리의 시대는 동리에게 주어라’는 말과 함께 어쩌면 구세대의 모뉘망으로 남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금 세대의 카오스는 그들의 우매한 미몽의 정열과 낙조落照에 우는 애상이 이를 수 없는 저편 쪽 피안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고뇌란 그런 우상들의 이해의 길이 미치지 않는 영원한 구름이며 실감 없는 풍경일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김동리 씨를 중심한 대소 우상의 일군에게 원컨대 차라리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외계와 절연한 정적 속에 유영하는 풍류객이 될지언정 결코 우물 밖 넓은 세상의 이야기를 함부로 지껄이는 ‘시궁창의 올챙이’는 되지 말라는 것이다.
    사기사의 우상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낙향한 시골의 무사武士 이른바 20세기 후반기의 새로운 문학 아이디어를 모색한다는 조향趙鄕이라는 숭배할 만한 시인이 있다. 때때로 자기의 시와 정반대의 경향을 평론으로 쓰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의 평론이 자기 시를 옹호해주는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니 적지않이 이 나르키소스의 운명이 딱하다.
아무래도 그는 현대라는 말을 생활에서가 아니라 현대 문예 사전과 얄팍한 유행물의 팸플랫에서 배워온 것 같다. 나머지 1할은 또한 풍편風便에서…….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뒤늦은 유행곡이나 재즈를 듣는 듯한 불쾌한 인상을 받을 뿐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감동할 수 없으니 항상 그 시인에게 황송하고 미��한 생각뿐이다. 외국 시인이 서투른 한글로 시를 쓴 것 같은 그의 시를 대할 때 누구나 처음에는 호기심을 갖고 몰려오는 것 같으나 그 졸렬하게 만든 곧은 낚시에 걸려드는 둔한 고기가 적은 이것 또한 씨를 위해 미안한 일이다. 그의 엄숙한 시에서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형적인 외국어와 신어新語의 수식어를 벗기고 나면 17,18세 소녀의 눈물 같은 센티멘틀만이 남는다. 그때 우리는 문득 그 위대한 사기술에 찬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이솝 우화에서 보면 사자탈을 쓴 허세의 곡예가 그리 오래 가지 못하는 모양이니 한편 적이 걱정도 된다.
그는 네로에 못지않은 폭군인 것이다. 단지 씨가 민중 독자를 위하여 언어를 학대한 폭군이며 네로는 언어[詩]를 위하여 로마에 불을 지른 폭군이라는 점만이 정반대일 뿐이다. 기이한 단어와 외국어가 곧 새로운 언어와 시가 될 수 있다는 언어 미학이나 시론詩論이 존재하지 않는 한 조향 씨의 시는 어느 신어사전新語辭典의 찢어진 지편보다도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씨는 오로지 어리석은 독자를 시기하기에만 급급하지만 독자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음의 상징이 아니다. 아폴리네르, C. 데이 루이스, E. E. 커밍스, 엘뤼아르 등의 시는 읽고 감동, 그렇지 않으면 이해라도 할 수 있는데 어째서 한국의 모더니스트 조향 씨의 시는 이해조차 알 수 없는지 참으로 별일이다.
자기도 모르는 시를 타인에게서 이해받으려고 기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복권을 뽑아 10만원의 현상금을 꿈꾸는 것이 보다 양심적이며 확률이 많을 듯 생각된다. 비단 조향 씨뿐 아니라 모더니스트라고 자칭하는 대부분의 시인이 모두 이 사기사의 우상들이다. 그러나 이들 우상의 신전神殿에는 그나마 참례하러 오는 우상 숭배자도 적은 모양이니 다른 신전과는 달리 언제나 적적할 것을 생각하면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우매의 우상
농촌 문학가(?) 이무영李無影 씨 ― 씨는 무엇보다도 둔감한 데에 그 특징이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매의 우상 중에서 가장 높은 옥좌를 차지한다. <향가>를 비롯한 그 많은 농촌 소설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외계의 사상에 대해서 둔감한가를 알 수 있다. 그의 평범성이라는 것은 필립의 단편 소설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러한 유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이 아니라 건조다. 오로지 몽롱하고 둔탁한 시력 위에 반영된 건조한 영상인 것이다.
그의 소설엔 생의 철학도 미학도 없다. 단순한 인물과 풍경의 끊임없는 반복뿐이다. 그리고 그저 스토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원스 어폰 어 타임’ 식의 옛날이야기와 방불하다. 그러한 작품 속에 나타난 농촌 이야기에서 우리는 소월素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 신선한 향토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 농부들의 생활 이야기에서 이상의 <권태>에서 보는 것 같은 절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농촌이나 농부는 모두가 작자를 닮아 우둔 그것이다. 농촌은 그냥 단순한 시골 풍경일 뿐이다. 농부는 일종의 부르주아지같이 아주 여유 있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어쨌든 미다스 왕이 만지기만 하면 모든 물건이 황금으로 변한다고 하지만 씨가 소재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고 그 빛깔을 잃고 납덩어리처럼 되어버린다.
더구나 근일에 이르러 씨께서 평론에 손을 대고 도시에서 생활하는 현대인의 말초적 생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시는 것 같은데 그것은 역도 선수가 외발 자동차를 타는 곡예를 보는 것 같아서 심히 위태로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씨에게 있어 이러한 모험은 만부당한 것이다. 사실 ‘둔감’하다는 것이 씨에게 있어선 ‘천부의 재능’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둔감으로 해서 여지껏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아무런 감동과 충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시대에 예민하지 못한 ‘둔감’에서 온 것이지 결코 씨가 저간這間에 남의 작품을 혹평한 바로 그 ‘안이성’과는 관계되지 않는다는 변명을 위해서도 씨는 어쨌든 우물愚物이기를 고집해야 된다. 그렇지 않을진댄 자기가 쏜 화살에 자기가 맞는 자승자박의 비통한 희극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 문단엔 씨와 같은 우매의 우상들이 8할 이상이나 된다. 나머지 8할의 우상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도 씨는 가장 예민하고 박식한 분이다. 그러니 나머지 우물에겐 말할 의욕조차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우물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되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웃집에서 불이 나도 안심하고 코를 골 수 있는 무딘 신경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에 있어 때로는 보다 더 편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영아의 우상
연륜이 많은 작가가 우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몰라도 아직 문단에 채 데뷔도 하지 못한 신진이 벌써부터 대가 의식이 들어 우상의 영아가 되려는 것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몇 번 활자화된 자기의 이름의 마술을 믿고 자중 없이 태작駄作을 연발하는 모모 제씨의 예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선 도저히 반성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 최일수라는 신진 평론가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해보려 한다.
씨는 보건대 M자와 W자 정도의 구별이라도 하고 외국 문학을 논하는지 적이 의심스럽다. 내가 씨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비평 태도에 있어서의 양심과 성실성이다. 즉 책임 없는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신인이 벌써부터 그렇게 독자와 동시에 자기를 속인다면 그 전도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다음 일례만 하더라도 얼마나 무책임한 비평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하는 시와 생각하는 시>에서 엘뤼아르, C. 데이 루이스, 오든의 제시諸詩를 이중 번역해 놓고 (그나마 인용도 이중 인용) 이 시는 운율에 의하지 않았느니 또 ‘완전히 운율에서 탈출하였느니’하고 운율을 논하고 있다. 항차 운율 있는 시를 직접 탁월한 솜씨로 번역한다 해도 그 원시의 운율이 파괴되어 그 잔형殘形을 찾아보기에도 힘이 들 터인데 하물며 그 졸렬한 그 이중 번역시를 앞에 놓고 어떻게 그 시의 운율을 논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경우를 보고 우리는 무지의 대담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놀랄 만한 힘인가를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된다.
대영 백과사전에도 없는 모더니틱(《문학예술》4월호 151쪽 – 아마 현대적이란 말을 뜻하는 것 같다)이란 말을 창안해 낸 일수 씨는 그렇듯 기상천외한 외국어의 실력을 가지고 무려 영, 독, 불의 근간 시집들을 자유자재로 독파한 듯싶으니 그 천재적인 공로에 대해서는 우선 깊이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어의 ‘나자레’ 발음이나 똑똑히 배워놓고 프랑스 상징파 등의 운율을 논하는지 말하기 곤란하다. 여하튼 작품 내용은 말할 것도 없으니 먼저 문학 용어의 정확한 뜻과 또 문맥이라도 통하는 작문법이라도 배워놓은 다음에 평론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어쨌든 지금 씨가 쓰고 있는 평론은 평론이라기보다 만화에 가까운 것이어서 식자층의 독자에게 이따금 폭소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씨와 같은 사람이 평론가란 칭호로 불리는 우리 문단의 형편을 생각할 때 이것은 씨의 체면이 아니라 민족적 체면에 관계되는 것이니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중해주기 바란다.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 그러한 자살 행위를 한다는 것은 더구나 동세대의 한 사람으로 서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르네상스의 스펠링을 하나 제대로 쓰는 사람이 드물었던 우리 선배의 무지를, 그 전철을 되밟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통한 운명이겠는가? 신문학사新文學史가 이인직李人稙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인직에서 끝나라는 법은 없다. 신인은 신인다운 모럴을 상실치 말아야 할 것이다.
         우상들의 분노
내가 이 순간 우상들의 분노를 생각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거룩한 우상들에 의하여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모진 형벌을 받을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소학교 시절부터 수신修身 점수에 59점의 낙제점을 받은 천재적인 악동이며 겸양의 동양 미덕을 모르는 배덕아背德兒다. 그러니 그만한 정도의 것은 이미 각오한 지 오래다. 다만 구세대의 문학과 신세대의 문학이 반드시 교차되어야 할 문학적 혁명기가 왔음에 우리 위대한 대가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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