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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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흥선대원군의 섭정 / 1866 8월 제너럴셔먼호 대동강에서 약탈 자행 / 1866 10월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빌미로 프랑스가 강화도 침략 / 1866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도굴 실패 / 1871 신미양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강화도 침략 / 1875 운요호 사건 일본 /
흥선대원군(이하응)과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합작품 고종 / 이명복(고종 익성군)을 자신의 남편(익종)의 양자로 삼아 철종에 이어 왕위에 오름 /
홍릉 고종 명성황후 경기 남양주 금곡동 / 유릉 순종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
흥선대원군의 개혁 / 비변사 혁파 안동 김씨 견제 / 서원 철폐 호포제 재정 확충 /
경복궁 중건 왕권 강화 당백전 발행
흥선대원군 최익현의 상소로 물러나다 /
고종2 / 문호 개방 임오군란 갑신정변 / 1875 운요호 사건 일본의 강화도 침입 / 1876 강화도 조약 일본 / 1882 임오군란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 / 1884 갑신정변 김옥균 박영효 삼일천하 / 1885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 /
개화파 박규수 김옥균 / 1차 수산사 김기수 /
김���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청의 황준헌 저) 영남 만인소 사건을 부르다 / 조사 시찰단과 영선사를 차견하고 서양과 수교하다 /
청 일 상권 경쟁의 산물 을지로와 충무로 / 을지문덕 이순신 화교 일본 /
고종3 / 1892 동학교도 교조 신원 운동 / 1894 동학농민운동 청일 전쟁 / 1894 갑오개혁 군국기무처 / 1895 을미사변 명성왕후 시해 을미의병 / 1896 아관파천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 /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남접의 3대 지도자 / 황토현 전적비 정읍 /
대원군 섭정의 제1차 김홍집 내각 제1차 갑오개혁을 주도하다 /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온건 개화파 / 유길준 김가진 급진 개화파 /
제2차 동학 농민 봉기 공주 우금치에서 무너지다 /
급진개화파의 부활 제2차 갑오개혁 / 홍종우가 김옥균을 상해에서 권총으로 살해함 / 김홍집 박영효 내각 재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다 / 을미사변 명성황후 살해 / 을미의병 궐기 아관파천 /
고종4 독립협회 대한 제국 성립 / 1896 서재필 이상재 독립협회 창립 독립신문 간행 / 1897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 환궁 / 1904 러일 전쟁 한일의정서 체결 / 1905 을사조약 을사의병 /
1895 삼국간섭 러 프 독일이 일본의 요동 반도 영유 반대 /
1907 김광제 서상돈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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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판 임오군란 위기! 푸틴, 전 국민을 적으로 돌렸다!/ 北, 대남 대량 핵공격 리허설! 韓, 전술핵 수십발 맞을 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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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7.3.
전날 만남을 가지고 오전에 겨우 몸을 전철에 실고 출근을 했다. 성과평가 정리 및 성과지표 정리를 하러 갔었다.
초과 근무때는 적요를 잘 작성한다. 그래야 내가 뭘 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
아, 무더운 여름날 은사님께 인사도 드렸다.
참, 공부 못하고 안 하는 ��생은 나이 먹어서 실컷 공부만 한다. 사실 일을 하며 월급을 받는 건지, 과제를 내며 월급을 받는 건지 잘 모르는 삶이다. 학교다닐때 기피했던 선생들을 자주 연락드리는 요즘이 야속하기도 하다.
근데 그녀가 일정이 빨리 끝났다며 와줬다. 흠, 자주 만나는 이유는 아마도 요즘 못만나려고 일주일에 두번이나 만났나보다. 우리는 사실 일주일에 한번도 눈 마주치기 어려운 사이니까. 그녀의 가족들이 어서 코로나를 이겨냈으면 좋겠다.
오는 주말에는 데이트도 없을 것이고 주말 출근도 없을 것이다. 요즘은 포스팅할때 점점 날짜가 섞이는 거 같다. 늘 사진을 남긴 날의 감정과 작성하는 날의 감정을 따로 적으려고 노력했건만 점점 구분을 못하는 요즘의 나는 그만큼 마음이 편치 않다고 생각이 든다.
몇년전 장충동의 족발이 비리고 맛없다는 그녀를 데리고 나의 최애 족발집 평안도 집을 갔다. 마치 허영만 작가의 만화는 맛집 인증패 같이 느껴졌다. 우리나라 미슐랭 스타랄까.
족발 소자와 국수를 시켰다. 족발집의 팁은, 족발을 시키고 국수나 전은 나중에 시키는 것이다. 같이 시키면 주방이모가 그만큼 족발을 덜 담아주시는 거 같은데. 이거 다 기분탓이겠지.
소주한병과 그녀는 사이다 1캔을 뚝딱 헤치우고, 장충단 공원을 거닐었다. 장충단도 사직단마냥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을미사변, 임오군란, 갑신정변때 희생당하신 신하들을 위한 사당이였다. 그리고 청계천 개발로 옮겨진 수표교를 거닐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철재료 없이 돌로 기둥을 바친 기둥을 볼때마다. 수표교니까 분명 수위를 측정하는 단위가 적혀 있었을 것이다. 단위가 나오고 화폐가 널리 쓰이는 시대니까 조선시대는 생각보다 거짓없는 시대였을 수도 있다. 가상화폐, 주식, 부동산, 유동성이 넘치는 시대보다 말이다.
사명대사의 동상을 보고 불교란 무엇인가 다시 다듬어봤다. 결국 석가의 말씀보다 대의가 더 먼저인 것이다. 대의를 따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쉬운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비석을 봤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결국 바람, 잔바람, 방울장수, 들꽃, 잔돌, 바위 뒤, 떠돌이가 되라고 한다. 결국 나도 당신도 바람이되고 잔돌이 되겠지만, 내몫은 충분히 해내려고 한다. 무책임하기는 싫으니까.
침례교회 앞의 능소화가 활짝 피어있었고 그렇게 아직은 장마철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한옥마을에서 여름 석양을 보며 우리는 헤어졌다.
2022.7.21.
매년 이 마음때는 마음이 편치 않다. 출렁이는 마음을 다 잡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버텨야한다. 그러기에는 너무 내게 권한은 없고 책임은 많이쥐어졌기에 NCS 공부해야하는데 술상에 앉겠지.
매년 같은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고 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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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났네... #일상 #일상스타그램 #날씨 #임오군란 #태풍 #링링 #헬게이트 #ordinary #typhoon #storm #windy #lingling https://www.instagram.com/p/B2GqUCwBm6Y/?igshid=1euzw7y6ocrm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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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던 일이었다. 「 ㅐ 박영효⑻
없었던 일이었다. 「안돼… 아니야!」 줄리어스는 미친 듯 으르렁거렸다. 지금 눈앞의 이 현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서영이 죽다니! 그럴 리 없어. 이건 단지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래, 속임수. 그녀가 나를 벗어나기 위해 꾸민 또 하나의 연극. 그래, 그 뿐이다. 그는 정신나간 인간처럼 그녀의 얼굴을 마구 어루만지며 억지로 미소를 끌어냈다. 「내게 속임수는 안 통해, 서영.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일어나」 그는 강제로라도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바쳤다. 「자, 서영. 이제 그만하고.」 순간 아직 굳어지지 않은 뭉클한 혈액의 덩어리가 그의 손을 검붉게 물들이자 줄리어스는 발작을 일으킨 병자처럼 마구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길고 가는 머리카락을 못쓰게 만든 걸로도 모자라 그녀가 누워있던 바닥까지 흥건하 게 적신 검붉은 얼룩들이 그의 눈 속으로 사정없이 쏘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박영효 김옥균과 함께 19세기 말 개화운동의 대명사이기도 한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그 짧지 않은 인생의 부침을 통해 인간의 신념과 권력욕의 불행한 조우를 극명하고 불편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그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의욕적이고 패기에 찬 우국 청년이었지만, 시대의 혼돈 속에서 그릇된 선택을 하였고 결국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인해 변절한 친일파로 생을 마감하였다. 개화사상에 매료된 왕실의 사위 박영효는 조선후기 누대에 걸쳐 명문가이던 반남 박씨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으로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의 스승이 된 박규수를 비롯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개화의 뜻을 품었던 박정양 등이 있다.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우의정이던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고명딸인 영혜옹주의 남편이 되었다. 당시는 이미 고종의 재위기였지만, 왕실의 사위가 되는 일은 왕실 가족으로 편입됨을 의미했고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마가 된 박영효의 행운은 3달을 가지 못했다. 영혜옹주가 요절하여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아내를 잃은 홀아비가 되었다. 남자의 축첩에 대해 엄격하지 않은 조선 사회였지만 부마의 재혼에 대해서는 까다로웠다. 왕실의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다시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영혜옹주와의 결혼으로 평생 정식 부인을 맞을 기회를 잃었고 첩실만 거느릴 수 있었으며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서출이 되었다. 어딘가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평생 해야만 했던 박영효를 측은하게 여긴 왕실과 고종은 그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18세의 나이에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고 19세인 1879년에는 혜민서제조, 스무 살인 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부마가 되어 얻은 일그러진 가정생활과 승승장구하는 관직 생활 속에서 박영효는 당시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실학적 학풍과 서세���점의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을 기르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중인계급의 한의학자 유대치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아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등 동년배들과 함께 개화당을 결성하였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던 박영효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 청년이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는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근대화에 큰 충격을 받다 그러던 중 준비되지 않은 어설픈 개화로 인해 일어난 부작용, 임오군란이 터진다. 신식군대에 대한 우대와 구식군대 차별로 인해 터진 이 사건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노골적 간섭과 함께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급이라는 불리한 상황을 불러왔다. 이 시기 박영효는 배상금과 관련하여 일본과 맺은 제물포 조약의 이행을 위한 특명 전권 대신 자격 겸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게 된다.사태에 대한 사과 및 배상금의 완화 협상이 당시 박영효의 임무였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면서 고종의 명으로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국기를 제작하였다. 이것은 태극기의 바탕이 된다.일본에 머물면서 박영효는 대사로서의 공식 업무 외에 일본의 근대화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개국 후 단시간에 군대, 재무, 산업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루어낸 일본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들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일본 근대 유명인사와 접촉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 근대화의 핵심인사이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도 있었다. 이 외에도 박영효는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절을 만나 국제정세 등을 파악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조선의 자주와 부국강병은 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었다. 번번히 좌절되는 개화운동 개화에 대한 의지를 굳히고 돌아온 조선의 정치 상황은 그러나, 박영효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간섭이 심해진 청나라의 힘을 얻은 민씨 척족 세력인 민태호, 안동김씨 세력이던 김병시, 김병국 등이 중심이 된 수구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의 개혁 시도는 이들에 의해 번번이 좌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한성부 판윤(현 서울 시장)이 되어 박영효가 만든 개혁적인 부서인 치도(도로 정비), 경순(치안 관련), 박문(출판 관련)의 3국은 수구파들의 반대로 폐지되었고 광주부 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신식군대를 신설하고 훈련을 시작하였지만 이마저 수구 세력들의 강력한 비판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발행되기도 하였지만, 20대 초반의 젊은이 박영효의 꿈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자신의 뜻이 수구 세력에 의해 번번이 꺾이는 시련을 감당�� 수 없었던 박영효는 세상 물정에 어둡고 성급한 상류층 젊은이답게 한방에 수구세력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전복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3일천하 청나라를 등에 업은 수구파들의 견제로 정치적으로 계속 궁지로 몰리던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적 개화파들은 자신들의 근대화에 대한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기회를 찾고 있었다.1884년 청나라와 프랑스의 베트남을 둔 일대 격전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3,000명의 청나라 군대 중 절반 정도가 빠져나가고 일본이 급진 개화파에게 접근해오면서 박영효와 급진적 개화파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조선의 근대화를 단시간에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이다.갑신정변의 계획은 박영효의 집에서 세워졌다. 청나라에 붙어 정권을 잡고 개화운동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기로 한 급진적 개화파들은 거사일을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의 개설일로 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원할 수 있는 신식군대의 군인들과 유학생을 모으고 청나라 군대의 반격과 개혁자금 문제를 일본의 협조로 해결하려 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조선 국권침탈의 걸림돌이던 수구 세력과 청나라를 한꺼번에 해결해주겠다는 급진적 개화파들의 제안이 반갑기 그지없었을 것이고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일본군의 동원과 차관을 약속했다.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저녁,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 피로연 자리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민씨척족세력을 살해하고 일본군과 조선군을 동원하여 고종과 왕비를 경우궁에 유폐한 후 정권을 획득하였다.다음날 12월 5일에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킨 본인들이 중심이 된 젊은 정권을 탄생시켰다. 박영효는 이 정권에서 경찰권과 군사권을 가진 전후영사 겸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다. 12월 6일에는 개혁정치의 신념이 깃든 14개조의 신정강이 발표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청나라와의 조공관계를 끊고 문벌을 폐지하며 계급제를 타파하여 평등권을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며, 호조관할로 모든 재정을 관리하고 경찰제도를 시행하는 등의 매우 급진적이고 근대적인 내용이었다.박영효를 비롯하여 정변에 참여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이상은 높았지만 정권을 유지하는 기술은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이 정변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신정강이 발표된 12월 6일 오후, 서울에 주둔한 1,500명의 청나라군은 유폐에서 풀려난 고종이 돌아온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고종을 호위, 감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급진 개화파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청나라 군대에 밀려 싱겁게 후퇴하고 말았다.일본군의 힘만 굳게 믿던 갑신정변의 주요 세력은 당황하여 나라의 상징인 임금, 고종을 결국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홍영식 등 일부는 청나라 군에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망명의 길을 택했다. 이때 박영효도 김옥균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던 이 3일간을 '3일천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갑신정변 이후의 정치적 행보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는 일본정부 측의 푸대접 등으로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곧이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미국에서 적응하지 못한 것이 영어문제였는지 메이지 학원 영어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이름도 야마자키(山崎)로 개명하였다. 그는 1888년에는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상소를 우편으로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때 우편의 발신 주소로 민씨 세력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여기저기를 떠돌던 박영효는 1893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도움을 받아 유학생들의 기숙사인 친린의숙을 열어 경영하기도 하였다.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자 조선정부는 친일인사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사면된 박영효는 10여 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이때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의도를 외교 관계를 통해 저지하려 하였고 그 활로로 손을 잡은 것이 러시아였다. 조선 정부 내의 일본의 세력이 점차 줄어들고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박영효는 김홍집을 몰아내고 스스로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1895년 박영효는 을미개혁을 단행하여 각 방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명성황후의 암살음모를 꾸민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0년에는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옹립하는 역모를 일본에서 원격으로 지휘하기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일본 망명 12년 만인 1907년, 박영효는 같은 반남 박씨 ��족이며 을사오적 중 하나인 박제순이 다리를 놓아주어 다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일했는데, 당시 그는 한때 자신이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하였던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억지 양위를 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다.이 일로 인해 그는 제주도로 유배가기도 하였다. 친일파로의 완전한 변절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박영효가 보여준 행보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의 작위와 거금의 매국 공채를 받고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이사로 취임하였다.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동광회·조선구락부·민우회 등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1926년 이완용의 뒤를 이어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말년을 친일파의 ��두로 산 박영효는 1935년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으며 사망하고 나자 일본정부에 의해 정2위 훈1등으로 '추서'되었다.그가 남긴 책으로는 [사화기략]이 있으며 관훈동에 있던 그의 집은 현재 남산한옥마을로 옮겨져 조선 시대 8대 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관련링크 인물사 연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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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기원 김희선 / 소년(증조부) / 축구공 / 인천 ; 군함 / 박흥수 / 토머스 굿맨 / 증조부 / 굿맨 앤드 박 볼 컴퍼니 / 1982 1872 / 영국 ; 파키스탄 펀자브주 / 앤더슨 기자 ; 르포르타주 ; 런던 아동 노동의 실태 / 축구공 사업 실패 / 하와이 이민선 / 박흥수가 펀자브 oem으로 사업 성공 /
1882 하나부사 요시모토 제물포 조약 ; 임오군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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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 터. 장충단은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무관과 장병을 제사지내던 제단입니��. 을미사변 5년 뒤인 광무 4년(1900) 9월에 세웠는데, 10년 뒤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됐습니다. 2018.3.8. #장춘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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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선교사, 동아시아 지식인이 바라본 기독교와 유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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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선교사, 동아시아 지식인이 바라본 기독교와 유교의 관계
한국 초기 개신교는 유교와 어떻게 공생했을까
개화기 선교사, 동아시아 지식인이 바라본 기독교와 유교의 관계
옥성득 [email protected] | 2016.01.26 15:46:14
한 종교가 소수파일 때 내적 확신을 위해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믿지만, 사회에서 공적 지위를 얻기 위해 주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공존할 수 있다는 변증론을 편다. 그러나 변방의 비주류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힘을 가진 다수파가 되면, 어느새 교만한 집단으로 변질되어 타 종교를 차별하거나, 더 나아가 공격하는 근본주의 세력으로 전락한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 “God과 Allah는 같은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향해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을 미국 휘턴(Wheaton)에서 말하면 다수 기독교인의 비판을 받지만, 이슬람국가(IS) 거점 라카에서 하면 처형을 당할 것이다. 단순한 교리적 명제가 아니라, 정치신학적 함의를 가진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정치와 문화의 유통시장에서 그 말의 액면가는 지역마다 유동하는 환율 차로 인해 실제 가치가 달라진다.
‘정교분리’라는 말도 국경을 넘으면 시장가치가 달라진다. 1900년 이전에는 서구의 정교분리 개념이 아예 없던 동아시아를 생각해 보라. 정부가 종교를 통제하거나 국가(천명을 받은 천자인 황제)가 유사종교 위치를 차지해 온 중국(과 동아시아)에 들어간 극소수파 기독교 선교사들은 국가 종교인 유교와 공존하는 논리가 필요했다. 17세기 예수회는 원시 유교의 상제와 기독교의 천주가 동일하다는 적응주의를 채택하고, 서양의 과학으로 청 황실에 봉사하는 협조자가 되었다.
1949년 이후 중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산당 정권(마오쩌뚱)과 공존하는 논리로 서구 선교사의 제국주의를 배격하는 삼자애국교회를 만들고, 국가와 인민을 살리는 동일 목적을 가진 면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같다고 주장했다. 우(吴耀宗) 목사는 공산주의와 기독교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전자를 택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래서 비록 문화혁명기(1966~1976)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으나, 딩(丁光訓, 1915~2012) 주교 지도 아래 중국기독교협회(CCC)와 삼자애국교회는 부활했고, 매년 수백만 권의 성경을 출판·반포하며 성장하고 있다. 물론 절반 이상의 교인은 가정교회 소속이다.
한국은 어떠했는가? 1870년대까지 한 세기의 천주교 박해 경험 때문에 이후 한 세기 동안 천주교·개신교는 정부(대한제국-일제 총독부-미군정-이승만 정부-박정희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신, 종교의 영역에서 자유를 확보하고 교회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1965년 이후 반정부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교회의 주류는 아니었다.
1880년대 개화기라는 전환기에 한국 개신교는, 주류 종교로 기독교를 금지하거나 배척했던 유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그 역사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당시 개종한 일부 유교 지식인들은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을까? 여전히 위정척사파 유학자들은 서양 종교를 무부무군하는 짐승의 종교로 공격하고 있었고, 정부는 모든 외국과의 조약에서 기독교 문서 유입을 금지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는 지혜로운 정치신학이자 선교신학이 필요했다. 초기 개종자들이 접한 한문 개신교 문서가 제시한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크게 다음 여섯 가지 이미지로 제시되었다. 서로 비슷한 이미지였다.
1. 마틴의 <천도소원>과 금목걸이
중국 선교사 윌리엄 마틴(W. A. P. Martin, 1827-1916)은 <천도소원(天道溯原)>(Evidence of Christianity, 1854)에서 유교와 기독교��� 관계를 정��과 이단(正邪)이 아닌 넓고 좁음(廣狹)의 관계로 규정했다. 흩어져 있는 유교의 보석들(예, 오륜)을 예수교의 일이관지하는 황금 줄로 엮어 좋은 목걸이를 만들어 중국인에게 선물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천주교에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1603)가 있었다면 개신교에는 윌리엄 마틴의 <천도소원>(1854)이 있었다. 출판 후 1900년 전후까지 중국과 일본에서 기독교 서적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을 읽고 이수정이 개종했고, 김옥균도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최병헌은 이 책을 일부분 번역해서 <신학월보>에 실었는데 <성산명경(聖山明鏡)>(1909)에도 넣었다. 한마디로 유학과 개신교의 관계 설정에서 천주실의-천도소원의 보유론이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국 기독교를 논할 때 이 두 책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그 출발을 논할 수 없다.
▲ <天道溯原> 중권, 57쪽.
마틴 선교사는 “예수교를 믿으면 유교를 버려야 하는가?” 질문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어떤 사람은 ‘만일 내가 이 도(예수교)를 따르면 유교에 대해서는 반드시 등을 돌려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이는 다음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유교는 (인륜인) 오륜을 말하나 예수의 도는 오륜 위에 있는 신인(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더한다, 신인 관계가 조화롭게 되면 오륜의 인간관계도 각각 제자리를 잡게 된다. (중략) 유교와 예수교는 그 도의 광협(넓고 좁음)으로 차이가 나지 정사(정통과 이단)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찌 배교라 하겠는가?”
보유론(補儒論 accommodation theory)을 수용하되, 예수교 안에 유교가 들어 있으므로 참예수교인이 되면 참유교인이 된다는 초유론(超儒論)적 요소를 가진 성취론(成就論 fulfillment theory)이다. 유교 도덕의 기초인 인간관계에 대한 오륜을 버리지 않으면서 신륜(神倫)인 하나님 관계가 우선순위에 있는데, 원시 유교에 있던 상제 숭배를 주자의 신유학이 상실했으므로(마테오 리치의 주장), 예수교로 신인 관계를 회복하면 오륜도 제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이 중국이 근대화되는 기초라고 제시했다.
이어서 마틴은 유교와 예수교의 관계를 흩어져 있는 보석(오륜)을 하나로 꿰는 황금 줄(예수교의 유일신 예배)로 엮어 좋은 목걸이를 만들어 중국인에게 선사하는 것으로 그렸다. 유교의 기본 윤리인 오륜은 좋은 것이나 인간관계만 규정함으로써 각각의 보석이 흩어져 결국 인륜이 무너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천(敬天)의 줄로 하나로 묶어야만 완성된 목걸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논어에서 공자는 일이관지를 충서(忠恕)로 말하였으나, 마틴은 충서, 곧 개인의 주체성 확립과 이웃 사랑(愛人)의 인륜(���倫)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경천(神倫)이 일이관지의 길이라고 제시했다.
2. 로스의 ‘한 겨리의 소’
마틴의 목걸이론과 유사한 것이 만주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에게서도 발견된다. 로스는 <Mission Method in Manchuria>(1900)에서 네비어스 방법을 만주에 적용하되, 네비어스보다 중국 유교와 도교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로스는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함께 중국인의 영성의 밭(靈田)을 가는 한 겨리(두 마리)의 소에 비유했다. 예수교는 유교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영성을 밭갈이하고 파종하는 동역자라는 이미지를 제시했다.
로스는 또한 도교가 강한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도교 사원 주지들과 교제했다. 요한복음 1장을 놓고 나눈 서면 대화에서 도교승은 요한복음 1장의 도(道), 광(光), 흑암(黑暗), 은혜(恩惠), 진리(眞理) 등의 개념이 도교와 흡사하다고 말했다. 이런 종교 대화의 한 결과가 1890년 선양교회를 건축할 때 드러난다. 로스는 건물 하반부는 서양 벽돌 양식으로 짓되, 탑처럼 올라가는 상단 부분은 도교 사원 양식을 차용해 독특한 반양반중 양식의 예배당을 만들었다. 만주에서 도교와 공존하면서 동시에 도교를 성취하려고 했던 로스의 토착화 신학의 한 결실이었다.
3. 쯔다센의 등불과 태양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농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했던 안종수(安宗洙)는 근대 농학자요 일본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쯔다센(津田仙) 박사를 만났다. 쯔다는 그에게 기독교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집에 걸려 있던 산상수훈 족자를 주었다. (기독교 금지령으로 가져갈 수 없어 받지는 않았다.) 안종수는 그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고 감개무량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種德門中見吉光 선하고 덕이 많은 명문가에서 상스러운 빛을 보았다. 耕田自在福田長 백성의 생업은 뜻대로 되고 복을 거두는 밭은 길다. 欣欣虛己迎人處 흔쾌히 나를 비우고 사람들을 환영하는 자리이지만 更悵明朝各一方 섭섭하게도 내일 아침이면 서로 헤어져야 하도다.
▲ 쯔다센의 등불 태양론과 안정수의 시. “三府近事: 東京,” <七一雜報> 명치 14(1881)년 11월 25일.
시를 풀이하면 이렇다.
“선을 쌓고 덕의 씨를 뿌린 적선종덕(積善種德)의 문중인 쯔다센의 집에 와서 빛나는 기독교 진리의 빛을 보았다. 기독교는 일본 근대화를 이루는 문명의 빛으로서 백성들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가난한 자의 복지를 돕는다. 나는 아주 기쁘게 사심을 비우고 여러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리를 가졌으나, 아쉽게도 내일이면 조선으로 떠나야 한다.”
기독교 개종자와 세례자가 줄을 잇던 1880년대 초에 쯔다센을 비롯한 일본 기독교인들은, 위의 신문 본문에서 보듯이, 공자의 빛은 등불과 같아서 유용하지만 한 나라의 암흑을 다 밝힐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유교의 계몽의 빛은 과거의 몽학 교사였다. 이제 개화의 새벽이 밝아 문명 종교인 예수교의 해가 솟았으니, 더 이상 등불이 필요하지 않다. 해처럼 밝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유교 윤리를 초월하는 8복의 가르침과 사랑의 윤리가 있다. 열심히 공부하여 경쟁에서 이겨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올라 출세하고 입신양명하는 것이 효라고 알았던 유교 양반들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굶주리고 긍휼을 베풀고 정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되다”는 가치 전복적 윤리관에 도전받았다. 무엇보다 경천애인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충격을 받았다. 가족주의와 파당주의에 묻혀 원수 갚는 것까지 효로 인식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유교와 기독교는 같지만 우열이 있다는 논리였다.
밤에는 촛불도 유용하고 길을 가자면 등불도 필요하므로, 유교는 개인과 가족 윤리 안에 존속했다. 문제는 교회가 그 등불의 가치관을 낮에도 들고 다닌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조차 입신양명하기 위해 연고주의와 파당주의가 득세하여 불공정한 경쟁을 벌인다. 부패는 불신의 골을 깊게 하여, 햇빛이 들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많다. 정치나 교회 지도자나 기업가를 불신하는 사회는 결국 악순환의 투쟁을 불러 고비용 사회를 만든다.
4. 파베르의 접목론
바젤복음선교회의 에른스트 파베르(Ernst Faber 1839~1899)는 동서양의 문명을 비교한 <자서조동(自西徂東)>(1884)에서, 유교와 기독교는 사회를 개혁하고 하나님나라를 만드는 데 동맹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두 종교는 접목(接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접목은 야생 대목이 어느 정도 자라면 줄기를 자르고 좋은 묘목의 순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오래되어 썩고 죽은 가지를 잘라낸 뒤 중국 종교 문화의 원형이라는 대목(臺木)에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붙이고자 했다.
파베르는 서양의 기술과 세속 학문만 중국 문명에 접붙이는 중체서용(中體西用)적 근대화 시도는 새로운 줄기를 죽어 가는 가지에 접붙이는 것처럼 일시적이고 결국에는 헛된 수고라고 봤다. 그래서 기독교를 접붙임하여 중국 문화의 뿌리와 이어지는 새 문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없이 서양 기술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국의 전국(戰國)시대에 양주가 주장했던 이단적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적 이기주의, 또는 묵자가 주장했던 공리주의와 같다고 보았다. 유교의 천명(天命) 실천과 기독교의 신의(神意) 순종이 크게 다르지 않듯이, 접목된 두 종교는 서로에게 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뿌리에 있는 유일신 사상에서 올라오는 기운으로 유기적 합일을 이룰 수 있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 이수정의 세례 기념 사진, 앞줄 중앙이 루미스 목사. 뒷줄에 녹스 박사, 이수정, 야스가와 목사.
5. 이수정의 송백론
일본에서 개종한 이수정도 파베르와 유사한 입장이었다. 안종수의 친구였던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왕비를 보호해 준 공으로 일본에 유학을 가서 안이 적극 추천했던 쯔다센을 만났고 야스가와(安川享) 목사의 문답을 거쳐 1883년 4월 29일 로게쯔조(露月町)교회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녹스(George W. Knox)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 기독교인 친목회에서 신앙고백서를 발표했으며,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한시를 썼다.
人有信心 如木有根 不有仁愛 根枯木萎 愛之於心 如水潤根 秋冬葉落 其根不朽 當春發生 花榮葉茂 敬天信道 花爲成實 壘壘滿枝 孔甘且碩 幹如松栢 霜雪不凋
사람에게 믿음이 있음은 나무에 뿌리가 있음과 같으니 인애가 없으면 뿌리는 마르고 나무는 시든다. 마음에 있는 사랑은 물처럼 뿌리를 촉촉하게 하여 가을과 겨울에 잎은 떨어지나 뿌리는 마르지 않는다. 봄이 되면 생기가 올라와 꽃이 만발하고 잎이 무성하듯이 하늘을 섬기고 도를 믿으면 꽃은 열매가 된다. 가지마다 가득 달린 열매는 아주 달고도 우람하며 줄기는 송백과 같아 눈서리에도 쇠하지 않는다.
앞에서 인용한 안종수의 시는 짧지만 종교적 상징과 불교 용어가 가득하다. 당시 유학자들의 불교 지식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수정의 시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느낄 수 있는 유학자의 강기와 절개를 느낄 수 있는 시다. 믿음과 사랑을 강조하고, 뿌리 깊고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잣나무를 신앙인에 비유하고 있다. 동시에 봄이 되면 꽃이 만발하고 가을에 가지가 풍성한 모습에서 개화파 지식인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과 소망을 본다. 신망애(信望愛)가 어울린 시라고 하겠다.
6. 언더우드의 ‘양춘에 반짝이는 무성한 나무’
이런 나무 이미지는 189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유교와 기독교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와 이론은 1890년대에 제시된 표리론이었다. 유교와 예수교는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관계라는 주장이었다. 1897년 창간된 언더우드 편집의 <그리스도신문> 사설은 1898년 말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논하면서 유교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비록 초고는 한국인들이 썼지만 언더우드가 ��집장이었으므로 그의 견해로 일단 제시한다.
“유교는 인륜의 지극한 법이라. 만세의 큰 강령이요, 선비를 가르치는 큰 가르치는 데 몸이니 참 지극한 보배요, 진실히 하늘을 공경하는 미쁜 덕이요, 격물치지하며, 만물을 마루 재는 큰 꾀가 다 갖추어 있다.” (“양교가 표리가 되는 론,” <그리스도신문> 1898년 12월 15일.)
비유하자면 유교는 아름다운 나무와 같고 예수교는 봄날의 태양과 같아서, 나무의 뿌리를 깊게 하고 줄기에 생기를 주고 잎을 무성하게 하여 가지마다 열매 맺게 한다. 나무가 태양이 아니면 무성할 수 없고 태양도 나무가 없으면 빛나는 것을 나타낼 수 없다.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율법과 예언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성취하러 왔다고 선언했다(마 5:17). 선교사들도 이 성취론에 근거하여 예수교는 조선에 유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여 ‘더 나은 유교’인 기독교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러 왔다고 전했다. 예수교는 서양 종교가 아니라 본래 동양 유대국에서 유래했다. 예수교는 조선 유교가 잃어버린 하나님을 섬기는 경천을 되살리고 애민의 뜻을 새롭게 한다.
뒤틀린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이상의 여섯 가지 비유에 나타난 적응주의 태도나 성취론적 타 종교 신학은 개신교가 비주류로 머문 해방 이전까지는 계속 되었으며, 1960년대 토착화 신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급성장한 개신교는 점차 사회 주류로 진출하면서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중심으로 강화되던 근본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 결과 지난 30년 넘게 한국 개신교회는 1920년 이전 한국 초대교회가 가졌던 온건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상실하고, 근본주의가 마치 한국 개신교의 원류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그런 망각과 오해에 기초한 근본주의적 복음주의가 법당을 불태우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극단적 행동을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해외에 나가 불교 사찰에서 마당 밟기를 하며 저주를 퍼붓는 것을 선교의 미명으로 정당화했다. 반면 내적으로는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기복하며 우상처럼 섬겼다.
이런 한국교회 역사의식 빈곤 현상은 민주화 운동 시기에 국가조찬기���회 등에서 잘 드러났다. 일제 말 신사참배를 하면서 교회를 지킨 것이 고통을 감내하는 수난이었듯이, 1970~1980년대 독재 정권하에서 역사상 유래 없는 교회 성장을 이룬 것은 교회성장론과 번영신학의 공이었다고 자화자찬했던 모습으로 이어졌다.
1890년대 한국 예수교가 가졌던 반봉건 개혁주의와 반제국 독립운동의 정치 참여적 신학의 유산을 되살린 것이 80년대 민중 신학이요 90년대 이후 참여적 복음주의였다. 그러나 타 종교 신학에서는 아직 갈 길은 멀다. 초대 한국교회가 가졌던 온건하고 겸손한 타 종교 신학을 다시 들여다보고 되살릴 때이다.
1880년대 초기 개종자들은 극소수였기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공적 통로나 언로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타 종교관은 개인적인 내적 확신의 표현이었다. 이때 등장한 논리가 유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론이었다. 한 종교가 더 낫다는 확신이 없으면 누가 선교를 하겠으며, 누가 그런 초기에 목숨을 걸고 개종을 하겠는가? 그러나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890년대 후반, 한국 사회가 개화를 향해 나아가고 청년 지식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교회는 유교와 기독교가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의존(interdependence)의 관계에 있다는 공존론과 유교를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성취론을 내세웠다.
복음의 씨앗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있는 곳에서 잘 자라지 못한다. 밭은 변하고, 신학도 변한다. 오늘의 젊은이의 마음 밭(心田)에서 예수교가 발견하는 보석은 무엇일까? 그것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신학은 무엇일까? 한국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영적 상상력의 빈곤이 문제이지, 젊은이들의 메마른 땅이 문제가 아니다. 150년 전, 100년 전에는 돌밭이요 잡초 무성한 황무지였다. 교회와 한 겨리의 소가 될 오늘의 영성은 무엇인지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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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 터. 장충단은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무관과 장병을 제사지내던 제단입니다. 을미사변 5년 뒤인 광무 4년(1900) 9월에 세웠는데, 10년 뒤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됐습니다. 2018.3.8. #장춘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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