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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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4일 목요일이다. 이제 곧 비가 올 것이다.
#1
지난 주에 나와 함께 입사한 분이 퇴사를 했다. 거의 모두가 그분의 퇴사 당일에야 그 소식을 알았다. 입사 동기이자 함께 온보딩 중이었던 나는 패닉이 됐다. 그분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 수도 있고, 먼저 퇴사를 한다고 한 걸 수도 있는데 다 안 좋게만 생각이 됐다. 3개월밖에 안 됐다지만 어떤 사람이 떠나가도 딱히 뭔가 함께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속마음은 모르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이, 짐을 정리하는 그분을 곁눈질로 흘긋 흘긋 보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렇게 좋지 않은 사람들인데 모두가 연극을 하고 있는 건가.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사라는 걸 우리는 다른 나쁜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힘껏 연기하고 있는 건가.
#2
오늘 윗사람과 있었던 면담에서 이 일을 얘기하다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저게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 나는 저렇게 떠나고 싶지 않은데 그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렇게 돼버릴 수도 있다는 무서움, 이딴 회사 따위가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대하나 싶은 분노 등이 섞인 것 같았다. 사실 울면서도 계속 말했다. 제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는데 자꾸 울게 되네요.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정말 몰랐고 사실 지금도 잘은 모르겠다.
#3
친구 A가 SNS에서 날 차단한 걸 알게 됐다. 알고 지낸 게 7년인 친구였다. 차단한 사실을 알게 되기 전 주에 그 친구 집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술도 마셨었다. 다음 날 일어나서 눈도 �� 마주치는 것 같고, 나랑은 얘기를 안 하려는 것 같고 뭐 그런 걸 느꼈는데 역시나였다. 도무지 이유를 짚을 수도 없고 딱히 연락도 없다. 너무 뻔하게 알 수 있는 거였는데, 참.
시간과 비례해 관계의 농도가 짙어진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엄청 무관하다는 생각도 안 했었다. 그래도 지난 시간들이 있으니까, 함께했던 기억이 다른 친구들보다 많으니까, 취하면 전화를 거는 버릇이 있어서 잠도 못 자고 걔 전화를 받았던 게 수십 번이니까, 어쩌면 많이 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로맨스의 기본은 착각이라던데, 모든 관계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4
아, 우울한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그간 읽은 책 얘기를 좀 써놔야겠다. 4월에 읽은 책 정리를 아직 하지 못했지만.. 5월에 읽은 책들 중에 좋은 책이 많다. 오랫동안 책장에 있었던 <서칭 포 허니맨>과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이것이 인간인가>.
<서칭 포 허니맨>은 박현주 작가가 쓴 아주 귀엽고 무서운 로맨스 스릴러물이다. 스릴러보다는 로맨스의 성격이 강한데 정말 매우 이상하고 신기하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게 특징이다. 정말 재미있었다. 자기 전에 읽었는데 읽느라 잠을 못 잤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쓴 아주 아주 유명한 책이다. 윗사람과 면담 때 이 책을 읽느라 기분이 다운돼 있다, 이런 말을 했는데 그분은 프리모 레비를 모르고 있었다. 그럴 수 있다고 말했지만 ‘어떻게 모를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뭔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에서는 아주 유명하다고 느꼈었다. 사실 굉장히 어둡고 무겁고 끔찍하고 충격적인 내용이 많지만 인간이라는 종으로 태어나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품격과 태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이란 걸 종종 잊어버린 채 개보다 못한 행동을 하기도 하니까. 그런 나를 발견할 때마다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에서 만났던 ‘로렌초’라는 사람을 기억하기로 했다. 불가촉천민이나 다름없던 프리모 레비에게 매일 빵 한 쪽과 남은 음식을 갖다줬던 사람. 누더기 옷을 갖다준 사람. 보답을 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그 어떤 보답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아니, 애초에 그런 걸 머릿속에 두지 않고 행동한 사람. 오직 무자비함만이 가득한 수용소에서 거의 유일한 인간이었던 로렌초를, 영원히 잊지 않고 싶다.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대체 왜 안 읽었을까. 나는 사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로 좋다, 라는 감정을 많이 느낀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그러고 있다. 정유정은 정말 멋진 작가고, 그��� 아주 많이 대단하고 탁월하다. 무엇보다 그는 죽도록 노력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세계일보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얼마간 엉엉 울었다는 그의 말도 잊지 않고 싶다. 아무도 출간해주지 않았지만 그 반짝거림을 알아봐주고 출간해준 편집자도 잊지 않고 싶다.
#5
이들처럼 살기에 나는 너무 모자라고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잊지 않아야지. 잊지 말고 계속 각인하며 틀어지고 비틀거리는 나를 바로 세워야지. 똑바로 가야 해. 잠깐 편하자고 인간이 아닌 길을 택할 수는 없어. 지금을 유지하기 위해 포기만 할 수는 없어.
어떤 인간들의 치열한 정신과 대가 없이 행하는 선은 거의 매번 깊고 큰 울림을 준다. 무엇보다 삶을 살아가게 한다. 그렇게 많은 장애물과 고난을 이겨내게 한다. 아마 꼭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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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열세번째 모임
제목 : 이것이 인간인가 저자 : 프리모 레비 출판사 : 돌베개 모임날짜 : 7월 15일 (토), 늦은 2시 30분
발제문은 위 에버노트 ���크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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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삶을 향한 그 엄청난 충동을 억누를 수가 있단 말인가? 만일 충동이 아니라면, 수만 년 동안이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습관적으로 수행해 온 본능에 따른 삶의 욕망을 꺾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길에 의해서 고귀한 자아가 그 자신을 긍정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는 것인가?
괴테는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한 존재가 죽음으로써 자신에게 고하는 작별의 의미를 말하려 했다. "떠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그가 떠나온 친구 알베르트에게 보낸 편지의 첫 구절이다. 외관으로는 단지 떠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으로 시작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곧 그에게는 하나의 강박관념이자 집착이었던 '세상과의 결정적인 작별'로 구체화될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위안을 구할 수 있는 아무런 출구도 없었기에 베르테르는 친구인 알베르트에게 "문제는 약한 인간인가 강한 인간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거나 심리적인 그 고통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즉, '한 인간이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가'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셈이다. 괴테에게는 자살이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질병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사건'으로 여겨졌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자살은 자연에 의해서 일어난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등장하고 있다. "자연은 온갖 모순적이고 혼동된 힘으로 이루어진 미로의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러니 죽음뿐이다."
이 시점에서 죽음의 충동이 그치지 않고 내적으로 넘쳐날 때에는 운명적으로 이 충동이 축성의 의미로 다가온다. 즉, 자살하고픈 욕구가 심적 충동으로 다가올 때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르테르의 핏기 없는 고독은 그것이 근원이 사랑하는 사람이든 넘쳐나는 이 충동의 서식지이든, 죽음의 충동이라는 이 모호한 욕망이 형태를 갖고 마침내 이루어져 축성을 받게 될 신성한 장소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충동)은 성스러운 것이어서 모든 욕망도 그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만다"라고 롯데에게 쓰고 있다. 베르테르의 욕망이라는 것은 다른 출구가 없었기에 그 근원 자체로부터도, 그 대상으로부터도 단절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베르테르는 채워지지 않을 욕망일지라도 어떻게든 스스로 위안하면서 삶을 계속 끌고 나가기에는 너무 순수했기 때문이다. 그의 욕망은 그 근원으로부터도 단절되었고 너무나 찬란한 그의 대상은 접근이 가능하지 않은 지점에 놓여 있었기에 대상으로부터도 단절되었던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성스럽다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무한히 넘쳐나는 욕망, 즉 하나의 절대 주체의 존재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베르테르는 너무 즉각적으로 신성한 것에 다다르려고 자살한 셈이다. 모든 불행과 욕망을 간직한 채로 세계 속에서 구체화된 주체 너머로 무한히 확��된 주체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인 요구에 맞서서는 근본적으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답장을 받지 못한 채 보낸 편지에서 베르테르는 친구에게 자신의 경험과 고통, 결국 권총 자살을 결심한 것까지 털어놓는다. 그의 자살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그의 자살에 관해서 도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괴테는 주인공에게 동질성을 요구해 피할 수 없는 결론으로 자살을 부과했던 것이다.
(애절한 베르테르가 행하지 못한 것을 파우스트는 성취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의 모순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욕망에서가 아니라 복잡한 존재의 현실에 자극을 받아서 성취하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죽음의 독약이 담긴 술잔에 매혹된 것은 생의 원천이 고갈되어서도 아니고 화병의 물이 말라버렸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그는 그의 아버지인 신으로부터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조그만 약병을 받아서 하나의 절대적 행동만이 지평을 열어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부활절의 노래 소리는 삶의 부드러움으로 파우스트를 유혹하고, 부인했던 신을 찬미하는 찬송가는 죽음의 욕망을 떨쳐버리게 한다.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우스트는 그의 헛된 탐색과 절대로서의 진리에 대한 집착을 버린 대가로 사변적 절망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정열의 결과와 노력의 수고를 통해서 보다 풍부하고 매력적인 할 일을 찾게 된다. 파우스트는 그가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 순수한 철학적 자살이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관점에서는 안티-베르테르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실체 없는 하나의 열정에 의한 자살이 아니라면 아직 자연적인 죽음이 저 멀리에 있는데 어떻게 냉정하게 끝을 맺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제 베르테르도 노쇠했다. 감성이 찬양되는 낭만주의 시대에 사는 것도 아니니 베르테르의 세계관은 더 이상은 삶의 기준으로서 절망한 젊은이들을 매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변한 것이다. 여기 또 하나의 편지를 보자. 부인과 딸을 남기고 자살한 어느 유명인사가 남긴 유서이다.
음악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활동을 하는 것이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못한 지가 벌써 수년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어들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 이상으로 나는 이 상황에 책임을 느낄 뿐입니다. 내가 공연장의 통로에 있고 조명이 꺼지면 관중들의 환호 소리가 증폭될 때, 내겐 그 상황을 부추기고 즐기는 프레디 머큐리(Freddy Mercury)식의 방식이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언제나 감탄하고 또 바라던 바이기도 했습니다.
진실은 내가 당신들 중 그 누구도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정직한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최악의 죄는 내가 언제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듯이 거짓으로 그런 체하며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시간등록기에 체크를 하는 느낌이 들곤 했었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을 사랑하려고 내가 가진 능력을 다했습니다. 맹세컨대 믿어주기 바랍니다. 그러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내(아니, 우리)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즐거움을 주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많이 부족했습니다.
아마도 나는 오직 홀로 있을 때만 사물의 고마움을 깨닫는 소위 나르시스트 타입인가 봅니다. 나는 너무 신경이 예민합니다. 어린 시절의 열정을 다시 찾으려면 조금은 둔감해질 필요가 있겠지요. 최근에 치렀던 3번의 순회공연 동안에 마주쳤던 사람들과 우리 음악의 팬들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주변 사람 모두를 훨씬 더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죄책감을 지울 수는 없었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느낌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선한 부분이 있으며 나는 정말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나를 정말로…… 슬프게(슬프고, 왜소하고, 민감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독약, 예수!) 합니다. 왜 나는 이것을 즐겨서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일까요? 나도 모릅니다.
나에게는 야심과 배려가 넘치는 여신 같은 아내와 너무나도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나게 하는 딸이 있지요. 그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쾌활해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키스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착하고 그녀에게 전혀 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이 아닌 까닭이지요. 이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어떻게 손쓸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내 딸 프랜시스가 지금의 나처럼 자기 파괴적인 막다른 골목으로 돌진하는 가련한 인간이 되는 상상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성공했고 이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일곱 살 이후로는 인간이라는 족속에 대해 대체적으로 증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너무 쉽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단지 내가 너무 사랑했고 너무 많은 슬픔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몇 년간 편지를 보내주고 염려해 주었던 당신에게, 타서 짓무르고 토할 것 같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열정도 느끼지 못한 채 어찌할 수 없는 방황만을 계속하는 낙오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보다는 한순간에 타올라서 폭발해 버리는 것이 낫다"는 닐 영의 노래 가사를.
유서의 주인은 1994년 자살한, 니르바나(Nirvana)의 리��� 보컬이었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다. 유서의 내용은 비교적 함축적이어서 그의 음악과 가족 관계에 대한 일종의 의욕 상실을 자살의 주요 요인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자기혐오가 가장 근접한 요인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살 혹은 타살(?), 아니면 의문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세간의 설들만 난무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데에는 50가지 방법이 있다"는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루 리드(Lou Reed)의 노래로 답한들, 떠난 자에게나 남겨진 부인과 딸에게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살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단순하고 분명한 단 한 가지 원인만이 우리들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로 이끄는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특히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요인들의 중첩에 의해서 자살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이 복합성이란 것은 이른바 근대성의 가장 분명하고 대표적인 특징인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것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즉, 자살이라는 현상에 관해서는 단 한 가지 이유, 한 가지 비밀만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와 여러 가지 비밀, 어쩌면 산일(散逸)되어 있으면서도 상호간에 서로 얽히고설킨,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요인들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막시마 아 미니미스(Maxima a miminus, 최소 원인에 최대 효과)로 대변되는 라이프니츠적인 단자론의 원칙에서 그 역인 미니마 아 막시미스(Minana a maximis)로 전도된 것이다.
사실 자살이라는 현상-그것을 '현상'이라고 꼭 인정해야 한다면-이 가진 진짜 문제는 그것에 대한 해답이 없다거나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없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답이 있고 원인의 규명에 대한 너무나 많은 담화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톡홀름 출신의 작가인 어거스트 스트린버그(August Strindberg, 1849~1912)는 여주인공의 자살로 막을 내리는 『줄리 양(孃) Miss Julie』(1888)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 누가 자살했다! 좋지 않은 일이군! 브르즈와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불행한 사랑이군! 여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병이 있었군!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절망을 경험했군! 낙오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것이나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어느 것도 정확한 이유가 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저 세상으로 가버린 자만이 진짜 이유를 감추고 그것을 생의 기억들을 가장 잘 밝혀줄 수 있을 어떤 것으로 위장한 채로 사라져버렸다!
줄리 양에게 부과된 운명. 나는 그것들에 수많은 상황을 설정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본성, 부친의 잘못된 교육, 그���의 성격에 대한 암시와 그녀의 약혼자가 유약하고 퇴폐적인 그녀의 정신에 미친 영향의 암시, 그리고 특히 성 요한 축제일의 분위기, 아버지의 출타, 그녀 자신이 자신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동물을 돌보았던 것, 춤추면서 느낄 수 있는 흥분된 분위기, 어슴푸레한 밤, 어쩌면 정염을 자극하는 꽃의 향기, 그리고 외딴 방에 단둘만 남게 된 우연과 흥분한 남자의 무례함.
도대체 줄리 양은 왜 자살했을까? 성 요한 축제일 전야의 어슴푸레한 밤의 분위기가 줄리 양을 몽롱하게 했을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몸소 잡다하게 열거한 것처럼 언급한 모든 요소들 모두가 한결같이 추정 가능한 원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모두가 하나같이 자살을 인정해야 할 만큼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가능한 요인 중에서도 우리가 찾는 것은 언제나 '직접적이고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필연성이 드러나는' 요인이다.
주의 깊은 독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충분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이러저러한 원인들을 읽어낼 것이다. 여기에서도 작가가 나열한 수많은 요인들이 결국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그 진짜 이유-그것이 정말로 있을 수 있다면-에 대한 생각으로 질려버리게 하고 있다. 심지어는 마지막에 언급된 우연은 이 모든 요인들과 자살행위와의 인과성을 모조리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결코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자살이라는 현상 앞에서는 언제나 하나의 설명을 갈구하고 있다. 자살로 몰고 갈 만한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수많은 전문가들은 자살에 대해 수긍이 갈 만한 명쾌한 이유를 찾기 위해, 사라져간 자의 흔적으로부터 가능한 기호적 지표와 상징적 메시지를 찾으며 혼신의 힘을 다한다.
물론 자살의 원인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비교적 명확하게 해독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오직 스스로를 파괴해 버리고자 했던 강력한 의지를 제외한 다른 분명한 해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의 원인은 영원한 비밀로 ��을 뿐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오직 '침묵만이 미덕'이라며 스스로를 달래야 할 것인가?
이진홍,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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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O LEVI
“이 이갸기가 소설이라면 나는 이 시점에서, 해방을 맞은 독일인이 보낸 겸손하고 따스하고 기독교적인 편지와 고집스러운 인종주의자가 보낸 야비하고 거만하고 차가운 편지, 이런 두 종류만을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게 아니다. ��실은 허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덜 정돈되어 있으며, 더 거칠고 덜 원만하다. 그것은 같은 차원에 놓여 있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
그는 파렴치한 사람도 영웅도 아니었다. 미사여구와 선의든 악의든 거짓말을 여과하고 나면 전형적인 회색 인간, 장님의 왕국에 사는 적지 않은 애꾸눈 중의 한 사람이 남았다. 그는 나를 적을 사랑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춘 남자로 만들어 내게 어울리지 않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아니, 그가 내게 부여한 그런 명예와 나는 거리가 멀고 그가 엄격한 의미의 적도 아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할 마음이 전혀 없다. “
-주기율표, pg 321
“물자 부족, 노역, 허기, 추위, 갈증들은 우리의 몸을 괴롭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정신의 커다란 불행으로부터 신경을 되돌릴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불행할 수 없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이 드물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 일상의 절박함이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후에는 자살에, 자살할 생각에 가까이 간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 안에서는 아니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저는 정상적인 인간은 목적이 있는 활동을 하도록 생물학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그래서 게으름 혹은 목적 없는 일은 고통과 기능의 퇴화를 불러온다고 믿습니다.”
“사실 화학자로 살아간다는 것과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이 되지요. 하지만 공장에서 생활한다는 것, 거기다 한 공장을 지휘한다는 것은 화학과는 거리가 먼 수많은 일들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을 채용하고 해고하고 사장과 고객과 납품업자와 싸우고 사고를 수습하고 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한밤중에도 친구들과 식사를 할 때도 전화가 왔어요. 관료들을 상대해야 하기도 했어요. ‘영혼을 파괴하는 임무들’은 그 밖에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글쓰기와는 잔인할 정도로 양립이 안 되었지요. 글쓰기는 어느 정도 영혼의 평화를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정년퇴직을 해야 할 나이에 이르러 회사를 그만두고 제 1번 영혼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저는 너무나 안도했어요.”
-필립 로스와의 대담에서,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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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017. 독서모임 아카이브
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3. 니체, <도덕의 계보학> 4.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6.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7. 셸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8. 한강, <채식주의자> 9. 밀란 쿤데라, <커튼> 10.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11. 앙리 베르그송, <웃음> 12.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13. 슈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14.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이갈리아의 딸들> 15. 마사 누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16. 똘스또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17. 서은국, <행복의 기원> 18. 마누엘 푸익, <거미 여인의 키스> 19. 김두식, <헌법의 풍경> 20. 필립 K. 딕, <안들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꾸는가> 21. 프란츠 카프카, <변신 외> 22.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23.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 24.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25.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26.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27. 로맹 가리, <그로칼랭> 28.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의 탄생> 29. 하인리히 뵐,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30.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31.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32.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예,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33. 커트 보니것, <제 5 도살장> 34. 레오 카츠, <법은 왜 부조리한가> 35. 이태준, <무서록>
영화 1. 스파이크 존즈, <Her>, 2013 2. 코엔 형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7 3. 장 마크 발레,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2014 4. 실뱅 쇼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2013 5. 리처드 쉔크만, <맨 프롬 어스>, 2007 6. 리들리 스콧, <프로메테우스>, 2012 7.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몽상가들>, 2003 8. 린 램지, <케빈에 대하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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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던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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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5일 일요일이다. 비는 오지 않았다.
#1
지난 주 내내 많이 힘들었다. 체력적으로 힘이 들거나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힘들었다. 직장에서 너무 큰 실수를 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옆 자리에 앉은 동료의 속마음을 알게 되기도 했고, 너무 많은 이에게 민폐를 끼쳤다. 원래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지난 주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과, 알고 싶지 않았던 여러 마음을 알고 나니 스스로가 더 싫었다. 지금도 싫고, 나는 출근한 지 한 달 만에 회사가 강하고 간절하게 가기 싫다.
#2
P에 글을 연재하는데, 지금 내 소개에 ‘슬프고 화가 날 때 글을 쓴다’는 내용이 있다. 내가 텀블러에 일기를 쓰는 건 나 자신에 대한 화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할 경우일 때가 많다. 어쩌면 오늘도, 지난 주를 떨치지 못해 이렇게 아이패드를 연 걸 거다. 슬픔이 넘쳐 흘러 여기에 질식해 죽어버릴 것 같을 때, 딴에는 주워 담겠다고 글을 쓰는 셈이다. 그런다고 완벽히 치유되진 않지만, 조금은 나아진다. 아마 많은 소설가와 작가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처를 드러내 어떤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그 찢어지고 피 나는 부위를 봉합하고 지혈하는 행위일 것이다.
#3
왜인지 모르겠는데 학교에 다닐 때 썼던 기사들과 학보 칼럼을 읽고 싶었다. (원래 전에 썼던 글들 읽어보는 걸 잘하는데 칼럼과 기사를 보는 날은 별로 없다) 이젠 기사 제목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다행히 학교 웹진에 올라가 있던 터라 찾을 수 있었다. 사실 몇 년 전 과제를 보면 진짜 이딴 걸 과제라고 냈다고? 싶을 정도로 엉망일 때가 많은데, 웹진에 올라간 기사 두 개는 스스로 굉장히 뿌듯해질 정도로 ‘잘 썼다’고 생각하는 기사들이다. 물론 지금 보니 맞춤법을 와장창 틀린 게 몇 개 있어 쪽팔리지만, 내용만큼은 좋다고 생각한다. 기사들을 읽다 보니 ‘역시 다른 친구들처럼 언시를 준비했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4
아주 어렸을 때 손예진님과 지진희님이 나온 <스포트라이트>를 보고 기자가 돼야지, 생각했다. 그냥 중고등학생 때부터 타인의 슬픈 얼굴과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소수자와 차별 그로 인한 여러 문제들에 민감했다. 지금도 어디선가 본 사람들의 고단한 얼굴, 때로 얼룩진 손, 청소부의 구부정한 허리, 자신에게 돈을 좀 달라고 테이블을 발로 차던 아주 어린아이의 미소 같은 걸 잘 기억한다. 누군가의 울먹이는 목소리,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눈물을 하도 흘려 빨갛게 충혈된 눈 같은 것들. 타인의 슬픔과 눈물과 고통과 절규를 유발하는 온갖 문제에 신경을 곤두서게 된다.
기자를 하지 않았던 건 내가 쓰고 싶은 기사만 쓸 수 없다는 생각, 어차피 가장 적폐는 그 수많은 언론사들이라는 회의감 등등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내 주변에 훌륭한 동기선후배들처럼 열심히 성실하게 언시에 시간과 마음을 바칠 에너지가 없었다. 그들보다 뛰어나거나 그들만큼은 해야 언시에 붙을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책으로 그 일을 해보자 싶어 편집자가 된 거다. 결론적으로 세상에 좋은 책 하나를 선보이긴 했기에 꿈은 이뤘지만, 역시 직접 글을 쓰고 또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건 결이 다른 꿈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 아, 그런데 나는 너무 게을러서 안 된다. 글 쓰는 사람들은 정말로 아주 많이 대단하게 성실한 사람들이다. 필립 로스의 말대로 그들은 영감을 찾지 않고 그냥 바로 글을 쓰러 가는 사람들이니까.
#5
아, 쓸데없는 걸 많이도 썼다. 참, 최근에 최현명님이 쓴 <늑대가 온다>(양철북, 2019)와 전 판사였던 정재민 님이 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창비, 2018)를 읽고 있는데 둘 다 꽤 괜찮다. 내가 절대 경험하지 못할 영역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건 그 자체로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인데, 옆자리에 앉은 동료는 ‘에세이’를 굉장히 싫어한다. 가르치려 한다는 게 싫다고 했다. 하지만 그 동료가 만드는 콘텐츠들, 그러니까 지금 다니는 회사의 콘텐츠들이야말로 가르치는 것의 최고점에 있는 것들이라 사실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김영하 작가, 김영민 교수, 정재승 교수, 정혜신 박사 등의 책들, <나는 가해자의 엄���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왜 쓰는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같은 대단히 좋은 책들 모두 에세이에 속하는데. 심지어 경영서의 최고로 많이 꼽히는 <슈독>조차 필 나이트의 에세이 아닌가.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그 동료는 원래 책을 즐겨 읽지 않는다는 것.
생각보다 정말로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즐겨 읽는다면 에세이를 싫어할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책이 에세이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
#6
어제 술을 마신 거치고 일찍 들어왔고(세 시쯤?) 그래서 꽤 일찍 일어났다(열두 시 반쯤?). 일어나서 <이태원 클라쓰> 14화를 보고(뭐야? 박새로이 죽는 거야?), <슬기로운 의사생활> 1화를 보고(대학 절대 못 잃는 신원호), <하이에나> 7~8화(윤희재!! 희재야!!!! 희재야!!!!!!!!!!!)를 봤다. 중간에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를 읽었고. 알라딘에서 책을 주문하려 했는데 모바일에서 계속 결제가 안 된다. 뭔가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나.
#7
회사 사람들 몇 명이랑 인스타그램 친구인데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시켰다.
#8
참, 토요일(3월 14일)에 K와 K 애인을 봤다. K 애인은 말로만 듣다 처음 봤는데 너무 귀엽고 귀여웠다. 또 3월 14일이라고 K 애인은 꽃을 사오고 K는 초콜렛을 줬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인간들이라니. ‘술 먹는 나’ 덕에 ‘회사에서 쭈구리인 나’를 좀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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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추억을 되살리는 힘을 지닌 이 수용소 앞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모두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지만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부류는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혹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어서 악몽에 시달렸던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결국 다 잊어버린 사람들, 모든 것을 지우고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나는 대개 이런 사람들이 불운 때문에, 그러니까 정치 활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다가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고통은 사고나 질병 같은 트라우마일 뿐, 의미나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경험이었다. 그들에게 기억은 낯선 어떤 것, 그들의 삶에 난입한 고통스러운 물체였다. 그들은 그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다(혹은 아직도 애쓰고 있다). 둘째 부류는 반대로 '정치적'이었던, 혹은 어찌되었든 정치적 경험이 있거나 종교적 신념 또는 강한 도덕성을 소유한 포로들이다. 이 귀환자들에게는 기억하는 것이 의무다. 그들은 잊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세상이 잊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의 경험에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수용소는 사고가 아니라는 걸, 단순히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284-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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