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타 모토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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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기묘함(6) - 무라카미 하루키와 시바타 모토유키의 대담
오스터는 번역할 수 없다? 무라카미 : 지난번 대담 때 시간이 모자라 못했던 질문이 있습니다. 시바타 : 예. 무라카미 : 시바타 씨는 폴 오스터 같은 대단히 정합적인 문장, 논리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문장을 골라 번역합니다. 이와 동시에 마크 트웨인 같은 허풍이 있는, 화술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도 번역합니다. 그런데 딱 이 가운데에 위치한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시바타 : 아, 확실히. 무라카미 : 왜 그럴까, 참 묘하더군요. 시바타 : 평범한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도(웃음). 무라카미 : 평범이라면 중도 리얼리즘 같은? 시바타 : 그렇습니다. 무라카미 : 극단적이시군요. 시바타 : 그런가요. 하지만 구로하라 도시유키 씨 같은 분을 보면 더 극단적이지 싶습니다만. 무라카미 : 구로하라 씨는 어떤 점에선 일관성이 있는 듯합니다. 시바타 : 전 이관성(二貫性)(웃음). 무라카미 : (웃음) 그런데 묘하게도 시바타 씨가 번역한 허풍스러운 이야기를 읽으면 정합적인 허풍으로 들립니다.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거금 100만 달러"를 읽으면서 대단히 묘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바타 : 그 책은 소년이 점점 출세하는 성공 이야기 형태에 우익이 대두하기 시작한 시대의 분위기를 더해서 만든 이야기로, 어떤 종류의 공식적인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문맥에 놓고 보면 그런 돌발적인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에 수긍할 수 있다고나 할까. 무라카미 : 그렇군요. 시바타 : 뭐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 수긍한 독자는 거의 없었죠(웃음). 제가 가장 번역에 어려움을 느끼는 작품은 소위 강한 악문이라고나 할까, 무너��� 상태가 강점인 작품입니다. 그걸 제가 번역하면 왠지 논리라는 필터를 통과시켜 버리죠. 스티븐 에릭슨이 그런 선상에 있는 작가인데, 전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제로빌"이나 "검은 시계의 여행" 등 비교적 정리된 내용을 번역해왔습니다. 무라카미 : 아마도 전 오스터는 번역할 수 없을 듯합니다. 시바타 : 그건 왜 그렇죠? 무라카미 : 너무나 잘 정돈되어 있어서. 시바타 : 그렇군요. 무라카미 소설과 오스터 소설은 전혀 다르지만, 다음은 어떻게 될까 하고 기대하게 만드는 힘은 둘의 공통점이지 싶습니다. 무라카미 : 음. 오스터도 별소릴 많이 듣지만 페이지터너(page-turner)이죠. 이에 읽기 시작하면 술술 넘어갑니다. 시바타 : 페이지터너라는 뜻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챈들러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챈들러는 오스터만큼 정합성은 없는데 오히려 그게 강점이죠. 작가도 다음이 어떻게 될지 잘 모른 채 쓰는 듯한 스릴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 챈들러는 명문가(名文家)라고 봅니다만, 소설 안에 반드시 악문 블록이 있어서 일부러 장난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악문이 나오죠(웃음). 방 묘사 등 도대체 이건 뭐야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기묘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이런 부분을 빠져나오면 페이지는 잘 넘어갑니다만. 피츠제럴드도 그렇습니다. 피츠제럴드는 너무 공들인 블록. 어떤 뜻에선 챈들러와 피츠제럴드는 닮았죠. 시바타 : 그렇군요. 전 아직 챈들러 초보자로 4권밖에 읽지 않아, 앞으로 발견할 게 많죠. 지금은 대단히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 "깊은 잠"을 읽었을 땐 뭐가 뭔지 몰랐는데 점점 알게 되면서 그 돌발적인 비유도 포함, 요컨대 이는 전부 필립 말로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보면 내용이 잘 맞아 떨어집니다. 방 묘사도 부자의 방을 비꼬아서 써 놨죠. 어떤 방이라기보다 말로가 그 방을 어떤 식으로 비꼬면서 봤느냐는 점이 중요한 게 아닐까. 무라카미 : 음. 전 영어로 읽을 땐 그런 부분은 일일이 읽을 수 없어서 대충 훑어봅니다. 번역할 땐 열심히 읽습니다만, 정말 피곤하죠. 방 배치까지 세세히 쓸까 싶기도 합니다(웃음). 또, 챈들러는 되풀이가 많습니다. He complained라고 썼다면 조금 뒤 또 똑같이 complained이 나오고, murmured가 몇 번이나 나와 번역할 때 정말 난처합니다. 이런 부분은 편집자가 세세하게 체크하지 않나요. 시바타 : 저도 그런 부분은 본인보다도 편집자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라카미 : 순수 문학에선 이런 경우는 거의 없죠. 시바타 : 순수 문학에선 헤밍웨이가 said를 murmured나 complained로 바꾸기보단 said로 되풀이하는 쪽이 좋다는 미학을 제시했기 때문이죠. 역으로 대중 소설 쪽이 ��러 가지를 바꿔가며 사용합니다. 무라카미 : 그렇군요. 시바타 : 전 지금 레아드 헌트의 "NEVERHOME"을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세세한 의미보다도 목소리를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중요하기에, 흐름을 잘 타면 번역하는데 의외로 시간이 들지 않습니다. 한편 스티븐 밀하우저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무라카미 : 밀하우저의 문장은 꽤 논리적이죠. 시바타 : 의미는 알겠는데 이를 한 번만 읽어서 머릿속에 들어가는 일본어로 바꾸긴 꽤 어렵습니다. 오스터의 영어는 읽을 수 있는 일본어로 바꾸는데 거기까지 어렵진 않습니다. 무라카미 : 콘래드 쪽이 시간이 걸리지 않나요? 시바타 : 아, 대단히 오래 걸리죠. "로드 짐"은 핀천 다음으로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콘래드의 주요 작품이 절판된다면 손들고 싶습니다. 잭 런던은 흐름을 타면 가장 쉽게 읽히고 쉽게 번역할 수 있는 듯한데 번역은 의외로 시간이 걸립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무라카미 : 저도 이 잡지 7호에서 "환자 클라크"를 번역했을 때 꽤 어려웠습니다. 시바타 : 그렇죠. 이 사람 문장은 투박하지만, 꼭 전해야 할 리얼리티가 있죠. 이를 제대로 재현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잭 런던, 더 많이 번역하고 싶습니다. 무라카미 : 전 앨모어 레너드도 하고 싶고, 카슨 매컬러스도 더 번역하고 싶고, 이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아, 문제는 시간이군요. 시바타 : 무라카미와 시바타의 번역당 10권까지 나와 일단락됐습니다만, 이걸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갔으면 합니다. 오늘은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출처 : 잡지 MONKEY 1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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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기묘함(5) - 무라카미 하루키와 시바타 모토유키의 대담
긴즈버그의 시를 번역하고 무라카미 : 작년에 시바타 씨와 함께 긴즈버그의 시를 번역했을 때 어느 수준까지는 제대로 번역해야 하지만, 이를 넘으면 좋을 대로 번역하는 편이 시의 정신에 가까워지지 않는가 싶었습니다. 시는 어떤 선부턴 확 바꿔야 한다고나 할까. 시바타 : 전 긴즈버그를 번역하면서 새삼스레 시의 번역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기타무라 사토시 씨와 함께 책을 냈는데 오른쪽 페이지에 에밀리 디킨슨이나 루이스 캐럴 등의 시 원문을, 왼쪽 페이지에 제 번역과 배경에 기타무라 씨의 그림을 넣은 책이었습니다. 기타무라 씨는 영어를 읽을 줄 아는 분이라 제 번역을 통하지 않고 원문만 읽고 그림을 그려, 어떤 뜻에선 원문을 싣고 두 가지 '번역'을 제시한 책이 된 셈이죠. 방금 무라카미 씨가 언급하신, 번역은 몇 개가 있어도 좋다는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한 권에서 체현할 수 있어서 이런 방식은 꽤 괜찮지 싶었습니다. 대부분 시의 번역은 원문도 없고 그림도 없이 그냥 활자뿐인 번역만 있는 상태라 솔직히 잘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무라카미 : 그렇죠. 시바타 : 우리가 했던 긴즈버그 시의 번역은 "THE POET SPEAKS"의 공연에서 스크린을 통해 비치고, 그 전에 패티 스미스가 서서 낭독했죠. 패티 스미스의 존재와 목소리가 영상의 그림과 소리에 해당했고, 여기에 필립 글래스의 피아노도 있었고 우리의 번역은 자막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형태라면 참 좋죠. 무라카미 : 복합예술 같아 재미있었습니다. 패티 스미스의 목소리에 설득력이 있었고. 시바타 : 그 목소리는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 출처 : 잡지 MONKEY 1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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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기묘함(4) - 무라카미 하루키와 시바타 모토유키의 대담
원문과 번역을 비교? 무라카미 : 가즈오 이시구로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도비타 시게오 씨가 번역했을 때 번역에 대한 평이 꽤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비판했던 사람들은 원문을 확인해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바타 : 확인하지 않았죠. 쓴 내용을 보면. 무라카미 : 그걸 읽었을 때 원문을 읽지 않고 비판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시바타 : 번역을 칭찬하든 비판하든 원문을 참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가이의 "즉흥시인"을 원문보다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만, 덴마크어로 된 원문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죠. 오가이는 독일어 번역본을 중역(重譯)했고 독일어라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꽤 있지만, 그래도 독일어를 확인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원문보다 뛰어나다고 표현하죠. 이는 확실히 묘한 일입니다만, 단지 번역문을 보기만 해도 훌륭한 번역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서평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엔 아무래도 원문을 읽어야 하겠지만. 무라카미 : 제가 번역한 작품 가운덴 이미 다른 분이 먼저 번역한 경우가 있어서 이를 읽어보면, 잘못된 부분이 있거나 군데군데 생략한 부분도 있고 개중엔 내용이 엉망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쪽 번역이 더 좋다고 보는 일도 있습니다. 원문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부정확한지 알 수 있지 싶은데, 역으로 읽기 쉽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경향에 빠지기 쉽죠. 이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시바타 : 전 영어를 번역한 작품을 읽을 땐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세로 읽습니다만, 러시아어나 독일어는 읽을 수 없기에 번역자가 생략한다면 생략한 부분도 포함해서 그 번역자를 신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읽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용할 수 있는 번역자만 골라서 읽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원문에 충실했으면 합니다만. 이와노 호메이라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활약한 문인이 아사 시먼스의 "상징주의 문학운동"이라는 프랑스 상징주의에 관한 책을 번역했는데, 서문을 보면 원문을 완벽하게 충실하게 번역했기에 이 번역본이야말로 원문의 정신 그 자체라고 스스로 대단히 자랑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문과 비교해보면 영어를 제대로 읽지 못한 부분이 더러 있어서 뛰어난 번역이라곤 할 수 없지만, 박력 같은 분위기가 확실히 느껴지기에 당시 시인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확하지 않더라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이는 당시 시인들이 이런 걸 원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여기에 잘 들어맞은 경우인 듯합니다. ※ 출처 : 잡지 MONKEY 1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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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기묘함(3) - 무라카미 하루키와 시바타 모토유키의 대담
훌륭한 번역은 악폐? 무라카미 : 훌륭한 번역이란 무엇이냐는 주제로 돌아가자면, 어떤 종류의 해후라고나 할까 만남이라는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노자키 씨의 번역에서도 대단한 부분이 있는 한편, 지금에 와선 낡아 버린 부분도 있습니다. 이건 궁합이 맞느냐 아니냐고 밖에 볼 수 없지 싶습니다. 시바타 : 전 예전부터 노자키 다카시 씨는 영국 문학이 잘 맞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스의 "연초 도매상"에서 구사한 의고문이 딱 들어맞은 거죠. 무라카미 : 그렇군요. 아, 제가 좋아하는 번역 가운데 무라카미 히로키 씨가 번역한 존 르 카레의 "훌륭한 남학생"은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시바타 : 죄송합니다,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점이 뛰어납니까? 무라카미 : 생생합니다. 존 르 카레는 엉킨 묘한 문장을 쓰는 작가입니다만, 그 엉킴을 잘 벗어나면 맛을 느낄 수 있죠. 무라카미 씨는 그 엉킴을 잘 이해하고 있고, 존 르 카레에 대한 애정이 깊은 분입니다. 그래서 좋아합니다. 시바타 : 미묘하게 읽기 쉬운 번역? 무라카미 : 오히려 읽기 어렵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를 헤치고 나가면 순간 깨닫게 됩니다. 시바타 : 원문과 대조해본 적 있으십니까? 무라카미 : 있습니다. 저도 영어로 읽거나 일본어로 읽거나 합니다. 시바타 : 무라카미 히로키 씨는 엉킴을 충실하게 번역했군요. 무라카미 : 충실합니다. 생략하지 않았죠. 만들어내지도 않았고. 영어로 읽어도 그렇습니다. 미스터리의 경우, 작품을 번역하는 분이 대부분 정해져 있어서 챈들러는 시미즈 슌지 씨, 해밋은 고다카 노부미쓰 씨, 로버트 브라운 파커는 기쿠치 미쓰 씨. 순수 문학의 경우엔 이렇지 않죠. 시바타 : 확실히 그러네요. 하지만 요즘엔 피츠제럴드 작품을 무라카미 씨 이외에 다른 사람이 번역하기엔 용기가 필요할지도. 무라카미 :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는 여러 사람이 번역했습니다. 전 번역은 여러 가지 중에서 독자가 선택하는 쪽이 정도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훌륭한 번역은 꽤 악폐이지 싶습니다. 시바타 : 훌륭한 번역은 악폐라, 명언입니다(웃음). (역주 : 名訳は迷惑, '메이야쿠와 메이와쿠'라는 발음상 말장난의 뜻도 있음) 무라카미 : 훌륭한 번역이라고 하면 괜히 겁먹고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죠. 다들 황송해하고 고마워합니다. 전 오리지널 텍스트는 교환할 수 없지만, 번역은 교환 가능 또는 선택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훌륭한 번역도 좋지만, 너무 받드는 것도 잘못이지 싶습니다. 이에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은 많이 나오는 게 좋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선택하면 되니까. 시바타 : 그렇습니다만, 한편으론 예컨대 이시이 모모코 씨의 "곰돌이 푸" 번역은 너무 뛰어나서 손을 대도 전혀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없지 싶습니다. 아동 문학과 순수 문학에선 번역으로 할 수 있는 게 ��를까요? 무라카미 : 아동 문학은 어려울지 몰라도 시의 번역은 많은 게 좋죠. ambiguous한 존재이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하고 번역자의 감성에 따라 변해가도 괜찮은 듯. 시바타 : 엘리엇 와인버거라는 아메리카 번역가가 시는 한 개만 번역해선 안 되고 한 권을 해야만 보이는 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확실히 바쇼의 "옛 연못, 개구리가 뛰어드는 물소리"라는 한 구(句)만 영어로 번역하면, An old pond, a frog jumping in, the sound of water, 응? 그래서? 라는 식이 되어 이것만으론 영어권에선 이 사람을 하이쿠의 달인이라고 보지 않죠. 하지만 "오쿠노 호소미찌"를 전부 읽어보면 그 맛을 점점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와인버거도 무라카미 씨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시라도 가능한 한 몇 번이라도 번역되어야 한다. 같은 번역자가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해도 된다. 원리주의자만이 '결정적'인 번역이란 걸 믿는다."라고 썼죠. 무라카미 :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몸(서머셋 몸)의 글에 "번역 불가능한 문장은 없다. 사람이 쓴 문장을 사람이 이해 못 할 리 없기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땐 그렇구나 싶었죠. 시바타 : 와인버거도 "모두 번역 가능하다. '번역 불가능'한 작품은 아직 번역자를 찾지 못한 것뿐이다."라고 말했죠. 번역론의 앤솔로지를 읽었을 때 이 사람의 글만 와닿았습니다만, "번역 이론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번역엔 도움이 안 된다. 동역학의 법칙이 요리에 도움이 되나."라고 주장했기에 번역학 사람들 사이에선 평판이 나쁘죠(웃음). 무라카미 : 그 사람 "원문은 결코 번역보다 뛰어나지 않다."라고도 주장했죠? 과연 그럴까 싶습니다만. 시바타 : 아, 그건 제가 전에 보여드렸던 제 번역이 틀렸습니다. "번역과 원문의 우열을 비교할 필요 없고, 같은 원문에 대한 여러 번역의 우열을 비교해야 한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보면 번역이란 정말로 책임이 무겁습니다(웃음). ※ 출처 : 잡지 MONKEY 1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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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기묘함(2) - 무라카미 하루키와 시바타 모토유키의 대담
낡아지는 번역과 낡아지지 않는 번역 시바타 : 음악에서도 예능에서도 낡아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번역에선 어떤 게 낡아지고 어떤 게 그렇지 않은 가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제가 손꼽는 훌륭한 번역은 노자키 다카시 역 존 바스의 "연초 도매상", 슈뮤다 나쓰오 역 로렌스 스턴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오가이는 아름다운 문장이라면 "즉흥시인", 좀 거친 문장이라면 "여러 나라 이야기" 입니다. 이들 가운데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전에 언급한 문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대에 속하지 않고 어떤 면에선 원문에도 속하지 않은 독자적인 목소리가 번역문에 있는 듯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 저도 "연초 도매상"은 훌륭한 번역이지 싶습니다만, 이는 일종의 의고문(擬古文)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존 바스는 동시대를 다루지 않았고 애당초 옛 시대를 썼죠. 그 어긋난 감각이 번역과 딱 들어맞으면 그 번역은 낡아지지 않죠. 시바타 : 맞습니다. 오가이의 "즉흥시인"도 완전한 의고문으로 당시에서도 오래된 일본어였습니다.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는 거기까지는 아니지만, 결코 현대적인 문장은 아니었습니다. 이외에도 떠오르는 훌륭한 번역이 있습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 콘래드를 번역한 나카노 요시오 씨 작품은 지금 읽어도 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시바타 : 예, 저도 나카노 씨가 번역한 "어둠의 심장"부터 콘래드를 읽기 시작했죠. 나카노 씨는 콘래드뿐만 아니라 어떤 번역도 이치에 맞았고 학자티가 안 났죠. 무라카미 : 그리고 후지모토 가즈코 씨가 번역한 브라우티건도 좋습니다. 시바타 : 좋죠. 그 정도 되면 시대에 어긋난 의고문적인 기능만 있는 게 아닌 듯합니다. 무라카미 : 브라우티건의 번역은 1970년대니까 반세기가 흐르지 않았죠. 반세기가 검증의 첫 단계라고 본다면 이를 거친 작품은... 보니것은 50년 지났나요? 시바타 : "고양이 요람"의 이토 노리오 씨 번역이 처음인 듯하니 1968년이므로 딱 그 선상이죠. 얼마 전 라디오에서 훌륭한 번역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이 책을 꼽았는데, 요즘 독자에겐 바로 다가오지 않는다고나 할까, 후지모토 씨나 무라카미 씨가 조용한 유머 같은 것에 시민권을 부여했다고 설명해도 신선하다는 느낌은 바로 안 드는 듯이 ��였습니다. 무라카미 : 아, 요즘에 와서는 그렇군요. 시바타 : 예. 하지만 역시 천천히 읽어보면, 경험상 제일 먼저 말한 사람의 강점은 있는 듯싶습니다. 이야기를 원래대로 돌리자면 소위 의고문으로 쓰던가 또는, 야나세 나오키 씨처럼 화려한 언어 유희를 구사하던가 어떤 소설에서도 쉽게 구사하지 못하는 기술을 이루면 훌륭한 번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무라카미 : 그런 면은 있죠. 시바타 : 동시대적인 문장으로 동시대적인 내용을 착실하게 번역해도 훌륭한 번역이라고 보기 어려울까요. 무라카미 : 음. 같은 시대에 쓰인 동시대적인 글의 번역은 상당히 리스크가 있습니다. 이는 제가 카버를 번역했을 때 가장 많이 느꼈습니다. 계속 카버 작품의 위치가 변했기에 변화가 진정되기 전에 번역한 작품은 나중에 읽어보면, 흔들림 같은 걸 자신도 느낍니다. 그래도 역시 막 나온 뜨거운 상태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만. 시바타 : 카버라는 작가의 개인적인 변천이나 성장이 아닌, 카버가 놓인 문맥이 변하면 작품을 보는 눈도 변하기에 번역도 변한다는 뜻입니까. 무라카미 : 그렇습니다. 시바타 씨는 오스터를 번역하면서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시바타 : 음, 대부분 동시대적이지만 그래도 한 바퀴 정도 늦게 번역하고 있기에, 별로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번역도 변해가는 듯합니다. 작가로서의 위치도 그다지 극적으로 변하지 않았고. 카버의 경우, 그가 중견작가 즈음부터 무라카미 씨는 번역하기 시작하셨죠? 시작한 시점에선 아마도 이미 "제발 조용히 좀 해요"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출판되었죠. 무라카미 :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즈음의 카버는 컬트적인 작가였습니다만, 점점 주류가 되면서 중진처럼 되어버렸죠. 주위가 인정하지 않거나 극구 칭찬하거나 역풍이 불거나, 위치가 대단히 변했죠. 얼마 전에 시바타 씨와 같이 진행한 토크쇼에서 카버를 번역할 때 일인칭을 어떻게 번역하느냐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그 선택도 지금이라면 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바타 : 중진이라면 '저(私)', 컬트적이라면 '나(俺)' 등 그런 점에도 영향이 있다는 뜻이시죠? 번역할 땐 오로지 텍스트에만 집중하기에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는 별로 고려하지 않지 싶습니다만, 그런데도 그런 게 번역하는 방법을 어딘가 옭아매기도 합니까. 무라카미 : 예. 그리고 옛 작가라면 그 작품이 실패작인지 성공작인지 뚜렷하게 압니다. 하지만 동시대 작가라면 예컨대 제가 번역하는 팀 오브라이언은 아무래도 작품이 고르지 못합니다. 이를 따라간다는 건 어려운 점이 있죠. ※ 출처 : 잡지 MONKEY 1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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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기묘함(1) - 무라카미 하루키와 시바타 모토유키의 대담
후다바테이 시메이와의 공통점 시바타 : 번역과 관련 이번엔 먼저 후다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에 관해 묻겠습니다. 무라카미 씨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두를 일단 영어로 썼던 것처럼, 후다바테이도 "우키구모" 제2편을 쓰기 시작했을 때 에도적 문장을 피하고자 러시아어로 썼던 모양입니다. 자신을 옭아매던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써 외국어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일화이지 싶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라카미 : 소설의 문체가 점점 나타나게 되면 소설을 그 문체로 써야 하는 듯한 구속 같은 게 생겨 버립니다. 제가 막 소설을 쓰려고 했을 땐 현대문학이라는 올가미가 있어서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전 그걸 쓰려는 의도도 없었고 잘 써지지도 않았기에 그럼 일단 영어로 써보자. 그럼 편할 거고 올가미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지 싶었죠. 이는 후다바테이 시메이도 마찬가지였겠죠. 에도의 문장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시스템을 끌어오지 않으면 벗어나기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제 경우엔 번역과 글쓰기가 처음부터 어딘가에서 교차한 듯싶습니다만. 시바타 : 아마도 후다바테이보단 무라카미 씨에게 훨씬 더 고독한 작업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후다바테이의 시절엔 다들 새로운 문체를 만들려고 했었기 때문이죠. 무라카미 씨가 1970년대 후반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땐 그렇게 '다 같이 열심히 해보자'는 분위기가 없었죠. 하지만 그때도 한편에선 그런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있지 않았을까요. 무라카미 :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땐 오오에 겐자부로, 나카가미 겐지, 무라카미 류라는 주류가 있었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예를 들어, 쓰쓰이 야스다카처럼 서브 장르로 갈 수밖에 없었죠. 전 서브 장르로 갈 생각이 없었기에 새로운 문체를 고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전 소설을 쓸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역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도 "비밀 노트"를 외국어로 썼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시바타 : 헝가리어가 모국어이지만, 전편 프랑스어로 썼습니다. 무라카미 : 전 계속 그렇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기에 첫 문체 설정만 하면 그다음은 일본어로 할 수 있지 싶었습니다. 시바타 : 크리스토프는 헝가리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프랑스어로 쓰지 않으면 독자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랬죠. 그 결과 신선한 문체가 태어났다는 점은 같습니다만. 무라카미 씨는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요. 무라카미 : 글쎄요. 문체에 대한 제안이라면 나쓰메 소세키가 떠오릅니다만, 소세키는 한문 지식과 영문 지식, 에도시대의 이야기 같은 화술을 머릿속에서 섞어, 문체가 관념적으로 혼합되었다고 봅니다. 고로 소세키는 번역할 필요가 없었죠. 모리 오가이는 그의 작품을 별로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바타 : 오가이에게는 소세키의 영문학 대신 독일 문학이 있어서 하이브리드라는 면에선 소세키와 마찬가지입니다. 무라카미 : 하지만 오가이의 문장은 새롭진 않았죠. 시바타 : "마이히메"와 같은 문어체가 있거나 소위 텍스트 파일처럼 담담한 문장 등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만, 확실히 새롭진 않은 듯하네요. 무라카미 : 문체에 대한 제안은 없었죠. 소세키의 경우엔 그게 있었습니다. 시바타 : "여러 나라 이야기"는 오히려 문체 없이 쓰려고 한 문장이었죠. 무라카미 : 소세키는 문체를 의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뛰어넘는 문체를 만든 사람은 그 이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버전을 올렸지만, 시가 나오야도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바닥엔 소세키의 문체가 깔려있죠. 전후 오오에씨 무렵부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시바타 : 오가이와 소세키의 차이에서 제가 흥미를 느낀 부분은 오가이는 번역을 활발하게 했지만, 소세키는 전혀 안 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겠다는 의뢰에도 대단히 회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문체를 깊이 의식했다는 지적과 통하는 면이 있지 싶습니다. 문체는 의미와는 다르고 번역할 수 있는 건 의미이기에. 무라카미 : 그렇군요. 전 소세키를 생각하면 늘 마루야 사이이치 씨가 떠오릅니다. 마루야 씨도 한학과 일본 고전에 관한 교양이 깊었고 더불어 영문학도 했죠. 옛날엔 둘 다 하지 않으면 본인도 납득하지 못했고, 주위에서도 인정해주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기에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시바타 : 예전엔 한문 소양은 남성 지식인의 필수였고 일본어 문학은 오히려 여성적이라고 취급받았습니다. 마루야 씨의 시대엔 더는 한문 소양도 일본 고전 소양도 필수가 아니었습니다만, 마루야 씨는 이를 이어갔죠. 무라카미 : 저한텐 그런 게 없습니다. 한문이나 고전의 소양이 거의 없습니다. 시바타 : 지금은 갖춘 사람이 오히려 희귀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라카미 : 우리 입장에선 특별히 그런 방면을 염두에 둘 필요도 없죠. 시바타 : 도식적인 비유로 생각해보면 예전엔 그런 식으로 한학 대 일본 고전이라는 대비였지만, ���금은 아메리카를 시작으로 한 서양 문학과 지금으로선 이미 오래된 일본 근대 문학의 대비로... 아, 이건 아닌 듯. 무라카미 : 오히려 전 영독미불러(영국, 독일, 미국, 불란서, 러시아)라는 유럽・영미 문학과 그 이외의 에스닉이라고나 할까 세계 문학과의 대비가 맞는 듯합니다. 일본의 전통은 현대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요. 물론 "겐지 이야기"나 "헤이케 이야기"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요즘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지마는. 시바타 : 확실히 가와데 출판사에서 나오는 일본 문학 전집은 번역이라는 관점에선 획기적이죠. 한편 그 영독미불러 이외의 문학에 팝 문학을 넣어도 괜찮을지도. 영미 팝 문화도 거기에 들어가죠. 무라카미 :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아메리카 문학엔 에스닉 문화가 침식해 들어오고 있고, 그 경계를 구분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시바타 : 무라카미씨가 쓰기 시작했을 땐 아메리카 문학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마이너리티 문학은 유대계 문학, 흑인 문학 정도로 나머진 죄다 백인 문학이었죠. 무라카미 : 그렇습니다. 시바타 : 팝 문화의 영향은 브라우티건과 보니것 즈음에 드러나기 시작했죠. 무라카미 : 단지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는 영향력이 있었죠. 시바타 : 그렇군요, 라틴 아메리카. 실로 강력한 타자 문화죠.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는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서 일본에서도 영미에서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무라카미 : 전 아버지의 전공이 일본 고전이었는데 그게 싫어서 이를 멀리했습니다. 시바타 : 굳이 가까이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가까웠지 않았나요. 무라카미 : 어린 시절 부모가 일본 고전을 강제로 읽혔기에 종종 읽었지만, 기억을 되살리기 싫어서 회피하고 있죠(웃음). 저에게도 "우게쓰 이야기"를 현대어로 번역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옵니다만, 영어를 번역하는 편이 편해서 좋습니다. ※ 출처 : 잡지 MONKEY 1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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