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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maviscarlettie · 2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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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o Koski; your friendly neighborhood 'Scam Art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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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viscarlettie. dn trace, or plagiarize. Buy me a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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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새해 맞이 불꽃쇼 & 소원 풍선 날리기 축제
2024 새해 맞이 불꽃쇼 & 소원 풍선 날리기 축제 2023. 12. 31. 23:30 오션투유리조트 앞 삼포해수욕장 해변 소개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아름다운 삼포 해수욕장에서는 청명한 하늘 아래 2024년 새해맞이 불꽃쇼가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매년 새해를 맞이하는 이 축제는 밤 12시에 시작되며, 뛰어난 연출과 화려한 불꽃의 향연으로 관광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새해맞이 불꽃쇼 이벤트에는 다양한 행사가 함께 진행됩니다. 이 중 가장 인기 있는 행사는 바로 소원 문구를 담은 풍선을 하늘 높이 날리는 행사입니다. 31일 밤, 삼포 해수욕장 앞에서 새해맞이 불꽃쇼를 관람하며 새해 소원을 빌 수 있는 특별한 용지가 제공됩니다. 이 용지에 새해 소원을 적고, 특별한 풍선에 달아 하늘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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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missouri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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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on Twitter: "#트레이스 이런 트레이스 써보실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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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daehwan0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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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까지 #솔투 #햄버거 하나 먹고 #편의점 에서 #캔맥주 #쥐포 숙박은 #찜방 #HONDA #XADV #hondaxadv750 (속초해수욕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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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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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8세기(世紀) 후반의 개항(開港) 전의 대외무역(對外貿易)은 중국(中國)ㆍ일본(日本)과의 사이에서 특산물의 교환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정도였다. 중국(中國)과는 1년 3회 정도 사신(使臣)의 내왕에 의존한 사신무역(使臣貿易)과,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민간상인(民間商人)들에 의하여 형성된 개시무역(開市貿易)의 형태로 특산물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사신무역(使臣貿易)에서는 우리 나라 쪽에서 조공품(朝貢品)의 형식으로 금(金)ㆍ은(銀)ㆍ말ㆍ인삼(人蔘)ㆍ화문석(花紋席)ㆍ피물류(皮物類) 등을 보냈고, 중국(中國) 쪽에서는 하사품(下賜品)의 형식으로 비단ㆍ약재(藥材)ㆍ서적(書籍) 등을 보냈다. 개시무역(開市貿易)은 중강개시(中江開市)와 북관개시(北關開市)로 나뉜다.74) 전자(前者)는 의주(義州) 건너편 중강(中江)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양쪽 정부의 감시하에 열리던 것으로서 소ㆍ다시마ㆍ해삼ㆍ면포(綿布)ㆍ소금ㆍ보삽ㆍ종이 등의 우리 쪽 물품과, 중국 쪽의 소청포(小靑布)가 교환되었다. 북관개시(北關開市)는 회령개시(會寧開市)와 경원개시(慶源開市)를 통틀어 부르는 말인데, 만주(滿洲)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을 위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소ㆍ보삽ㆍ소금과 그들의 양가죽 옷과 소청포(小靑布)가 교환되었다. 일본(日本)과의 무역(貿易)은 왜구(倭寇)에 대한 회유책의 하나로서 허락된 것인데 한 달에 여러 번 열렸던 삼포(三浦), 즉 부산포(釜山浦)ㆍ제포(薺浦)ㆍ염포(鹽浦)의 왜관(倭舘)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이 밖에 서울의 동평관(東平舘)과 일본(日本) 사신(使臣)이 부산(釜山)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특정한 장소에서도 이루어졌다. 동평관(東平舘)에서는 무역은 일본(日本) 사신이 조선국왕(朝鮮國王)에게 진상품(進上品)을 바치고, 이에 대하여 조선국왕(朝鮮國王)이 하사품(下賜品)을 내리는 조공무역(朝貢貿易)이었다. 일본(日本) 사신이 서울로 가는 중도에 교역장이 설치된 곳은 지금의 경북(慶北) 왜관(倭舘) 근처인데, 이곳은 서울로 가져가는 교역품(交易品)을 배에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올라와서 하역하는 지점이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에서 교환된 물품의 종류는 대단히 다양했었는데, 조선(朝鮮)의 수출품은 호피(虎皮)ㆍ금(金)ㆍ은(銀)ㆍ인삼(人蔘)ㆍ삼베ㆍ모시ㆍ명주ㆍ무명ㆍ화문석(花紋席) 등이었고, 수입품은 소목(蘇木)ㆍ호초(胡椒)ㆍ약재(藥材)ㆍ물소뿔ㆍ창검(槍劍) 등이었다. 이 밖에 쌀이 일본(日本)으로 많이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근대적인 의미의 대외무역(對外貿易)은 1876년 일본(日本)과의 강화조약(江華條約)에 의하여 부산(釜山)ㆍ원산(元山)ㆍ인천(仁川)의 세 항구가 통상지(通商地)로서 개항(開港)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약 이후 조선(朝鮮)과 일본(日本) 사이의 무역은 급격히 성장하여 조약 체결 5년 후의 무역액은 그 5연전(年前)보다 약 30배로 증가하였다. 개항초의 주요 수출품은 쌀ㆍ콩ㆍ보리ㆍ인삼ㆍ면화ㆍ소ㆍ소가죽 등의 농산물과 공업원료였고, 일본(日本)으로부터의 수입품은 모두 가공품으로서 직물류(織物類)ㆍ석유(石油)ㆍ성냥ㆍ양초ㆍ담배ㆍ도자기ㆍ우산 등의 생활 일용품과 향료(香料)와 조미료를 비롯한 각종 식품류였다. 그런데, 이들 수입품은 선진 구미제품(歐美製品)이 대부분이었고, 일본제품(日本製品)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일본(日本) 상인들은 구미(歐美)제품의 재수출과 값싼 조선(朝鮮)의 농산물 수입을 통하여 이중(二重)으로 이득을 보았다. 개항 초기에는 우리 나라에 대한 수출을 일본(日本)이 거의 독점하였으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한 다음해인 1885년부터는 중국(中國)과의 교역이 활발해져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거의 같은 비율이 되었다. 이때 ���국(中國) 상인들은 인천(仁川)지방의 상권(商權)은 물론, 일본(日本) 상인들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인 부산(釜山)에까지도 세력을 뻗쳤다. 중국과의 주요 교역품은 우리 나라의 가축ㆍ인삼ㆍ호피ㆍ해삼ㆍ도자기 등과 중국의 각종 면포ㆍ염료ㆍ담배ㆍ술 등이었다. 수입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의 면제품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수입은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일본(日本)에의 의존도가 급격히 높아갔다. 인천(人天)ㆍ부산(釜山)ㆍ원산(元山) 등 우리 나라의 개항장(開港場)에 설치된 상관(商舘)의 수를 보면, 1896년에 일본(日本)이 210개, 중국(中國)이 42개, 독일(獨逸)과 미국(美國)이 각각 2개, 영국(英國)과 프랑스가 각각 1개씩으로서 일본(日本)이 독점적으로 많았다.75) 그리고, 러시아와의 교역은 1888년의 한로통상조약(韓露通商條約)이 맺어짐으로써 시작되어 활기를 띠다가 노일전쟁(露日戰爭) 후 일본(日本)이 우리 나라를 보호국(保護國)으로 만들게 되자 끊어지게 되었다. 일제시대(日帝時代)의 무역(貿易):노일전쟁(露日戰爭) 후의 우리 나라의 무역은 일본(日本)이 완전히 독점하였다. 일제시대의 수출품으로는 1930년까지의 전기(前期)에는 쌀과 콩을 비롯한 농산물이 가장 중요했고, 광산물과 수산물도 많았다. 수입품은 대개 공업제품(工業製品)이었는데, 그 이전처럼 면직물(綿織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후기(後期)에는 농공병진(農工倂進) 정책으로 공업제품의 수출이 다소 늘었으나 우리 나라가 일본(日本)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였다는 점에서 큰 변화가 없었으며, 수입품으로서는 철강(鐵鋼)을 비롯한 건설(建設) 및 공업 원자재와 생활 일용품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일제하에서는 대일무역(對日貿易)이 전체 무역액의 약 70%를 차지했었는데, 그 밖의 지역도 일본(日本) 세력권 안에 있던 만주(滿洲)와 중국(中國)의 일부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무역항은 부산(釜山)과 인천(仁川)이었고, 그 다음으로 무역액이 많은 항구는 남포(南浦)ㆍ군산(群山)ㆍ신의주(新義州)ㆍ목포(木浦)ㆍ원산(元山)의 순이었다. 해방후(解放後)의 무역(貿易):해방후 국토의 분단으로 식민지적(植民地的) 산업체계(産業體系)는 극히 불균형한 상태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더구나 6.25동란(動亂)으로 기존 산업시설마저 대부분 파괴되어 우리 나라의 경제는 도탄(塗炭)에 빠지는 위기를 맞았다. 그리하여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까지 우리 나라의 무역은 격심한 수입초과(輸入超過) 현상을 나타냈다. 1961년만 해도 수출은 겨우 4천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수입은 3억 2천만 달러에 달했다. 해방 직후에서 6.25동란(動亂) 때까지의 수입에서는 식품(食品)ㆍ의류(衣類) 그 밖의 소비재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휴전(休戰) 후부터는 전재(戰災)의 복구와 경제재건을 위한 건설자재(建設資材)와 기계수입(機械輸入)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에 대하여, 수출품은 중석(重石) 위주의 광산물(鑛産物)과 농산물ㆍ수산물 기타 전통산업의 생산물이 대부분이었다. 1960년의 수출 상품의 비율을 보면, 농산물 21.9%, 수산물 17.7%, 광산물 42.2%, 공업제품 18.2%였다. 74) 강만길, 『한국 상업의 역사』 1975. (교양국사총서 pp. 172~179) 75) 강만길, 전게서 pp. 187~195
1960년대(年代)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경제개발(經濟開發) 5개년계획(個年計劃)에 의한 공업화(工業化)의 결과로 우리 나라의 수출무역(輸出貿易)은 구조적(構造的)으로 개선되는 한편,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공업의 기초자원이 부족하여 원료(原料)를 외국(外國)에서 수입하여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이른바 가공무역(加工貿易)의 신장(伸張)으로 제(第)1차(次) 경제개발(經濟開發) 5개년계획(個年計劃)이 끝난 1966년에는 총수출액이 2억(億) 6천만 달러로 늘어나고, 공업제품의 비율도 62% 이상으로 높아져 수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제(第)2차(次) 5개년계획(個年計劃)이 끝난 1971년에는 총수출액이 10억(億) 달러를 넘어섰고, 1977년에는 대망(待望)의 100억(億) 달러 선(線)을 돌파했는데, 이 해의 수출품에서는 공업제품이 약 90%를 차지했고, 과거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광산물은 1%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공업제품에 있어서도 대형(大型) 선박(船舶)ㆍ자동차(自動車)ㆍ기계(機械)ㆍ전자제품(電子製品) 등의 중화학 부문이 크게 신장되었다. 수입구조에 있어서도 1960년대(年代)에 들어와서는 경제개발과 관련된 기계류 등의 자본재(資本材)의 수입이 활발해지는 한편, 국내 생산이 전혀 없거나 부족한 원유(原油)ㆍ철광석(鐵鑛石)ㆍ원면(原綿)ㆍ고무ㆍ원목(原木) 등 각종 원자재(原資材)의 수입이 계속 늘어나 현재는 전체의 70% 이상에 달하게 되었다. 양곡을 비롯한 식료품의 수입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무역(貿易) 대상국(對象國)은 1960년대(年代) 초의 10여 개국에서 현재는 130여개국으로 급증하였다. 주요 대상 국가는 미국(美國)ㆍ일본(日本)ㆍ사우디아라비아ㆍ쿠웨이트ㆍ이란ㆍ홍콩ㆍ말레이지아ㆍ네덜란드ㆍ서독(西獨)ㆍ캐나다ㆍ오스트레일리아 등인데 미국(美國)과 일본(日本)에의 의존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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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cutecats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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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삼이 포쓰 삼포 포파... 또 있었나🤔 아무튼 ㅠ 삼색이가 안보인다...ㅠ 어디가써... https://ift.tt/33JZ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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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ngtinhanquoc · 4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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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ăn hóa "꼰대" là gì & Tại sao người trẻ Hàn Quốc mệt mỏi vì nó?
Văn hóa “꼰대” là gì & Tại sao người trẻ Hàn Quốc mệt mỏi vì nó?
Trước đây, khái niệm về thế hệ Thiên niên kỷ (Millenial) gồm những người ở độ tuổi 19 ~ 40, sinh ra từ sau năm 1980 và được chứng kiến hai cuộc khủng hoảng tài chính lớn vào năm 1997 và 2008. Thế hệ này còn có tên là thế hệ 88 vạn won (88만원세대) hay thế hệ sampo (삼포).
Tuy nhiên, tại Hàn Quốc, cũng tồn tại một thế hệ “sống lâu thành lão làng”, được gọi là “Kkondae” (꼰대).
Trong văn hóa Hà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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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ocylyhfsu-blog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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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최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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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ngeline8236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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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ôm kia hai đứa ngồi đàm đạo, mặc dù chủ yếu là chia sẻ từ một phía, đứa còn lại cảm thấy nghe hiểu được cũng là cả một nỗ lực đáng nể rồi chứ còn sức đâu phản biện, xong thì hai đứa nói đến cái hiện thực rằng giờ có quá ít thời gian cho chúng ta sống. Nguyên chỉ việc đi làm thôi, cộng cả thời gian di chuyển, rồi overtime, cũng chiếm tới 15 tiếng một ngày. Thế nhưng các bạn trẻ, không hiểu vì sao cứ cần mẫn như con dã tràng, ngày ngày bỏ ra 15 tiếng đi làm, làm việc rồi tan làm cứ như một con robot. Giới trẻ Hàn thậm chí còn có một từ để ám chỉ: 삼포: 세 가지 포기한다 - ba thứ bó tay trong đời gồm có 연애 (yêu đương), 결혼 (kết hôn) và 출산 (sinh nở). Mình mới bảo luôn với bạn ấy, nếu cuộc sống chỉ có mỗi việc đi làm thôi thì chán lắm, kể cả có sống xa xỉ, đi du lịch liên tục mình cũng sẽ chết vì chán mất. Mình cho dù giờ chưa thể nào bắt đầu một trong ba thứ mà giới trẻ đang bó tay kia, nhưng mình không hề có ý nghĩ từ bỏ. Ừ thì thực tế có thể khắc nghiệt đấy, nhưng một đứa chủ nghĩa lãng mạn đến tuyệt vọng như mình, sẽ không thể ngừng việc giữ trong mình một giấc mơ. Mình vẫn tin là ngày nào đó mình sẽ gặp được người mà khi gặp, mình sẽ biết ngay đó là người đó. Chắc hẳn đó sẽ là một người hiền lành, giọng nói trầm ấm, hay làm mình cười và luôn luôn bình tĩnh xoa dịu mình. Mình chắc chắn cũng sẽ kết hôn, vì mình đã muốn mặc váy cô dâu kể từ khi còn chùm màn đóng giả công chúa, và mình cũng sẽ có con nữa, không điều gì có thể thiêng liêng hơn việc thực hiện thiên chức làm mẹ. Ừ thì giấc mơ của mình có thể không đạt được lắm chứ. Nhưng nếu đã vậy, thì cứ để hẳn 50 tuổi, 60 tuổi rồi hẵng vỡ mộng đi, đâu nhất thiết phải trở nên u uất vào cái tuổi 24 nên còn tràn đầy nhiệt huyết này ch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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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daehwan0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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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해수욕장 #햄버거 #감자 #튀김 인스타 보여주시면 1000원 #할인 #강원도 #바다 #음악 #뮤직 #서퍼 #서핑 #SURF & #MUSIC #MIDNIGHT #PIC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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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oflovexyz-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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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트랜드]솔로 다이닝 창업은 블루칩이 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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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트랜드]솔로 다이닝 창업은 블루칩이 될수 있을까?
몇년 전 키이스 페라지의 “혼자 밥먹지 마라!” 란 책을 아주 흥미 있게 읽었던 경험이 있다.책 이전에 우리에게는 독특한 비즈니스 룰이 있다.모름지기 거래가 성사되기 위해선 밥 한끼 같이 먹어주고,사우나에서 홀라당 벗고 돈독한 우정?을 확인해 줘야 지피지기(知彼知己)지기지피(知己知彼)&win-win인 시절이 있었다.우리 경제의 호시절과 한 배를 타던 시절이었다.
국내 1인 가구가 2015년 기준 500만 가구를 넘어 섰다.전체 가구의 약 27%를 차지 한다.한 조사 기관에 의하면 올해 600만을 돌파 할 것이란 예상도 나왔다.저 성장과 인력 공급과잉으로 인한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떨어 지고,대면 접촉이란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일방적 글로 표현되는 각종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가  이것을 쿨하게 해결해 주었다.게다가 삼포(연애,결혼,출산)세대의 출현과 이에 따른 미혼,만혼의 사회적 병리 현상,높아진 이혼율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내다 봤다.
이미 주택,문화,레저,가전,가구업계를 주축으로 싱글슈머들을 위한 상품들이 불티 나게 팔리고 있다.외식업계에서도 편의점,술집,식당까지 혼밥(혼술)족들을 위한 각종 상품 구성과 테이블 동선 전략에 들어 갔다.이른바 솔로 다이닝 시대의 도래다.한국외식산업연구원의 지난해 한 조사에서는 남성의 경우 한달 나홀로 외식 빈도가 약 3.7회,여성의 2회 보다 더 높게 나왔다.연령대로는 20대에서 한달 3.7회로 가장 높게 나왔다고 한다.심리적으로 여성의 경우 사회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맛난 밥을 먹으며 지인과 수다를 떨며 이겨 나가는 자생적 성향이 있어서인지 예상과 다르게 남성이 혼밥을 많이 먹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이동이 잦거나 야근이 잦은 직업적 특수성까지 대입 한다면 남성의 혼밥 수치는 더 올라 갈 것으로 예상 된다.
이는 비단 우리만의 사회적 특수성은 아니다.이미 미국에서는 각 출판사 별로 혼자 밥먹기,란 제목으로 수많은 솔로 다이닝 가이드 서적들이 인기를 끌었고 관련 웹 사이트도 성업중 이다.미국만 약 85만개의 레스토랑에서 평균 8%의 고객이 솔로 다이더란 통계치도 있다.가까운 일본 역시 2~30대의 오피스레이디를 주축으로 혼자서 밥을 먹는 성향들이 화석화 된지 오래다.복잡한 인간계에서 최소한 기본욕구인 밥먹는 것만큼은 편하게 눈치 보지 않고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것이다.
혼자 밥먹을 수 밖에 없고,혼자 밥 먹는 것이 편한 솔로 다이닝 세대의 출현은 앞으로 경쟁이 치열한 외식 산업에서 불루칩이 될 확률이 높다고 본다.스타벅스에서 노트북 하나를 켜놓고 커피 한잔에 나홀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풍경화가 되었듯 밥도,술도 혼자서 마시며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는 기호들이 일상으로 자리잡을 것이다.이에 대비해서 철저하게 솔로 다이더를 위한 최적의 환경과 상품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자신만의 작은 공간에서 밥과 술을 마시며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에 아마도 프렌차이저들은 이미 작전 돌입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 된다.
주목할 시장이 하나 또 있다.양극적으로 같이 밥을 해먹는 시장도 성장할 확률이 높다.인간은 본디 외로운 존재 이면서도 상호교감을 추구하는 성향을 같이 가지고 있다.매달 매번 혼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실수는 없는 노릇이다.혼밥족의 개인적 욕구가 상승 할수록 반대 급부적인 시장이 함께 성장 할 것이다.다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는 시장 역시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제작년 부터 불어닥친 집밥 만들어 먹기 운동도 그 뿌리는 같다고 본다.욕심이 있다면 이런 트랜드를 5,000만원 이하의 작은 창업으로 연계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혼자 먹을래?
같이 먹을래?
결정은 스스로 하기로 하자.
혼자 밥먹지 마라
작가
키이스 페라지, 탈 라즈
출판
랜덤하우스코리아
발매
200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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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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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군(韓將軍)놀이 Exorcism 한국민속대관
한 장군(韓將軍)놀이 Exorcism 신라시대인지 임진왜란 대인지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경상북도 경산 지방에 쳐들어 온 왜구를 한(韓)장군이 연희(演戱)를 가장해서 물리친 데에 그 연유를 두고 있다. 여장(女裝)한 남자 화랭이〔화랑(花郞)〕의 유풍에다 여원무(女圓舞) 등을 곁들인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놀이이다. 한 장군(韓將軍)놀이 - 2 Exorcism 언제부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산군(慶山郡) 자인(慈仁)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이 되면 토지(土地)의 수호신으로서 한종유(韓宗愈)라는 장군을 숭사(崇祀)하여 성대히 제전(祭典)을 올리는 풍속이 있었다. 이 제전을 「한장군제(韓將軍祭)」라 불러 왔다. 이 제전이 단오절에 거행되므로 일명 「단오제(端午祭)」라고 부르기도 했고, 또 이 제전에는 여러 가지 민속놀이를 하므로 「한장군(韓將軍)놀이」라고도 한다. 이 한장군(韓將軍)의 이름은 자세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한종유(韓宗愈)라고 하는 이로서 어느 때 어디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왜구(倭寇)가 내습하여 도천산(到天山)에 진을 치고 있을 때 한장군(韓將軍)이 그의 부하들을 버들못[柳池] 부근 골짜기에 매복시켜 놓고 계략을 꾸몄다. 그는 투구 위에 꽃으로 만든 꽃관(冠)을 쓰고 갑옷 위에는 여인(女人)의 복장으로 가장하고 그의 누이동생과 그 못가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어 산에 있는 적을 버들못 부근까지 유인하였다. 그리하여 적병이 접근하였을 때 복병(伏兵)으로 하여금 일시에 기습케 하여 적을 무찔러 군민(郡民)을 구했다고 한다. 그 때 한장군(韓將軍)은 수많은 적을 베어 버들못에 던졌으므로 그 때 못물은 핏빛으로 붉었다고 전한다. 그 후 군민(郡民)이 그의 충성과 덕을 우러러 계림(桂���)이라는 동산에 사당(祀堂)을 세우고 해마다 큰 제사를 올려 왔다. 그런데 왜적(倭敵)을 물리친 날이 바로 단오일이어서 이 날에 제사를 거행하여 왔다고 한다. 이 왜구(倭寇)는 고려 중엽 이후부터 조선조 초엽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지대에까지 출몰하면서 인명과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日本)[倭]의 해적이다. 이 왜구는 신라 때에도 있었지만 그때는 수와 피해가 많지는 않았으나 고려 중엽 이후 갑자기 강성하여 심지어는 내륙에도 침범하여 조정에서까지 이 왜구문제로 부심(腐心)하게 되었다. 왜구는 왜국의 국내 사정의 변동에 따라 무사(武士)에서 전략한 자들이 주동이 되는 일이 많았다. 고려 말에 와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최영(崔瑩) 장군과 이성계(李成桂) 등이 내륙에까지 들어온 적을 쳐 물리치기도 하였다. 당시의 왜구소탕(倭寇掃蕩)에는 병략가(兵略家) 최무선(崔茂宣)이 발명한 화약(火藥)과 화포(火砲)가 큰 효력을 발하였다. 왜구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그치지 않아 세종(世宗) 때에는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기도 하고, 혹은 삼포(三浦)[薺浦ㆍ 釜山浦ㆍ 監浦]를 개항(開港)하여 무역을 통해 회유도 해 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노략질은 여전하여 조선(漕船)을 탈취해 가는 등 행패가 여전하였고, 나중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큰 난리를 겪게까지 되었다. 한종유(韓宗愈)라는 사람은 고려 때에 있었으니 충렬왕(忠烈王) 13년(A.D. 1287)에 나서 공민왕(恭愍王) 3년(A.D. 1354)에 죽었다. 그는 시문도 능했고 좌정승(左政丞)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 한장군(韓將軍)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많기 때문이다. 『자인현읍시(慈仁縣邑詩)』 풍속편(風俗篇) 여원무조(女圓舞條)에는 만력시(萬曆時)(編者曰萬曆時云者誤甚 今傳羅麗之間) 유한장군실기명(有韓將軍失其名)(或云宗愈) 왜구거도천산(倭寇據到天山) 장군설녀원무(將軍設女圓舞) 전채지위화(剪彩紙爲花) 식이원관(飾二圓冠) 관변수오색지조(冠邊垂五色紙條) 여기매(與其妹) 개장녀복(皆粧女服) 명대일관(名戴一冠) 무어산하류제지내(舞於山下柳堤之內) 우설배우잡희(又設俳優雜戱) 왜구하산취관(倭寇下山聚觀) 장군습후자지소살심중(將軍襲後刺之所殺甚衆) 제방유석상유검흔(堤防有石尙有劍痕) 속전참왜석(俗傳斬倭石) 매당시일제수색적운(每當是日堤水色赤云) 읍인모기의(邑人慕其義) 건신사우현서록(建神祠于縣西麓) 단오일(端午日) 상녀원지제(象女圓之制) 사동남이인장여복대면무지(使童男二人粧女服戴面舞之) 우설배우잡희격고명금(又設俳優雜戱擊鼓鳴金) 호장착모대이제(戶長着帽帶以祭) 연년불폐(年年不廢) 폐즉필유재이(廢則必有災異) 유속상전(遺俗相傳) 지금숭봉(至今崇奉) 표기기왈(標其旗曰) 장산제군사명(獐山諸軍司命) 우하동면육동송림동(又下東面六洞松林洞) 하북면마라동(下北面麻羅洞) 역립사례지(亦立祠禮之) 만력년간(萬曆年間)에 [編者는 말하기를 萬曆年間이라 한 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니 이제 전하기를 신라와 고려 사이라고 함]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성이 한씨(韓氏)인 장군이 있었다[혹은 宗愈라고 함]. 왜구가 도천산(到天山)에 웅거하였다. 이 때 장군은 여원무(女圓舞)를 만들어 채색종이꽃을 갓 두개에 장식하고 갓 가장자리에 오색 종이조각을 드린[늘어뜨려] 후 누이동생과 함께 쓰고 여장(女裝)으로 변장하고 산 아래 버들제방 안에서 춤추었다. 또한 그는 배우(俳優)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놀이를 하게 하니 왜구가 모두 산에서 내려와 구경했다. 이 때 장군은 틈을 타서 뒤로 엄습하여 칼로 찔러 죽인 자가 심히 많았다. 그 제방에는 돌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돌에는 칼 흔적이 남아 있어 세상에서 전하기를 참왜석(斬倭石)이라 한다. 해마다 이 날이 돌아오면 방죽물이 붉게 변한다고 한다. 그 고을사람이 그 충의(忠義)를 사모하여 신사(神祠)를 고을 서쪽 산기슭에 세우고 단오일이면 여원무(女圓舞)의 제도를 본받아 사내아이 둘로 하여금 여복(女服)을 입히고 가면(假面)을 쓰고 춤추게 했다. 또 배우의 여러 가지 놀이를 베풀고 북을 치고 쇠를 올리면서 호장(戶長)이 사모관대를 하고 제사를 지내 해마다 폐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폐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므로 이에 생긴 풍속을 전하여 지금까지 숭봉(崇奉)하고 있다. 그 기(旗)에 표시하기를 「장산제군사명(獐山諸軍司命)」이라 하였고 또 하동면(下東面) 송림동(松林洞)과 하북면(下北面) 마라동(麻羅洞)에도 또한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왜적(倭敵)이 쳐들어 온 연대를 막연히 나려지간(羅麗之間)이라 했는가 하면 또 만력(萬曆) 때 라고도 하였다. 만력(萬曆)은 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로서 1573년에서 1617년 동안이다. 우리나라 조선조 선조(宣祖) 6년에서 광해군(光海君) 6년까지에 해당한다. 여원무(女圓舞)는 해방 후에 간행된 『경산군지(慶山郡誌)』 상편(上篇)에도 거의 같은 기사가 실려 있고 참왜석(斬倭石)은 검흔석(劍痕石)이라 하였다. 검흔석(劍痕石) 좌현북일리(左縣北一里) 도천산류제방(到天山柳堤傍) 한장군참왜처검흔상재운이(韓將軍斬倭處劍痕尙在云爾) 검흔석(劍痕石)은 고을 북쪽 일리(一里)되는 도천산(到天山) 버들제방 가에 있는데 한장군(韓將軍)이 왜구를 벤 칼자욱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 하였다. 또 당시 왜구가 웅거하였던 도천산성(到天山城)에 대하여서는 동서(同書)에 도천산상(到天山上) 유토성지(有土城址) 왜병소축운이(倭兵所築云爾) 도천산(到天山) 위에는 토성 자리가 있으니 이는 왜병이 쌓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적(史蹟)은 지금도 남아 있다. 또 동서(同書)에는 북면마라동(北面麻羅洞) 우립일신당(又立一神堂) 일면지민(一面之民) 별제장군지매(別祭將軍之妹) 연년불폐(年年不廢) 폐즉필유재이(廢則必有災異) 유속상전(遺俗相傳) 지금숭봉(至今崇奉) 표기기왈장산사명(標其旗曰獐山司命) 사시본현속장산시(似是本縣屬獐山時) 유창의자(有倡義者) 이무문가미(而無文可微) 작일신총(作一神叢) 심가개기(甚可慨己) 건륭을유(乾隆乙酉) 현감정충언(縣監鄭忠彦) 중수신당(重修神堂) 관급제물(官給祭物) 작축문(作祝文) 사호장(使戶長) 비례축지(備禮祝之) 축문왈(祝文曰) 모기섬적(謀奇殲賊) 의병위국(義炳衛國) 기문영미(杞文英微) 사민기적(史泯其跡) 무전여원(舞傳女圓) 토유여속(土有餘俗) 검흔불마(劍痕不磨) 완피제석(宛彼堤石) 일간고묘(壹間古廟) 영안의백(永安毅魄) 단양조두(端陽俎豆) 세이위식(歲以爲式) 조여유황(旐旟有煌) 금고질작(金鼓迭作) 자수상전(玆修常奠) 재구공축(載具工祝) 어이장사(御以長詞) 선이늠속(饍以廩粟) 신기보우(神其保佑) 영전읍택(永奠邑宅) 북면(北面) 마라동(麻羅洞)에는 또 신당(神堂) 하나를 세우고 일면(一面)에 백성이 따로 장군의 누이동생을 제사지내어 해마다 폐(廢)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폐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으므로 없애지 아니하고 계속 지내온 풍속이다. 이 제사는 아직까지 숭봉(崇奉)하며 거기에 표시하기를 「장산사명(獐山司命)」이라 하였다. 아마도 본 고을이 장산(獐山)에 속하였을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할 만한 문적(文籍)은 없고 신당(神堂)만 하나 남아 있으니 심히 애석한 일이다. 건륭(乾隆) 을유년(乙酉年)에 현감(縣監) 정충언(鄭忠彦)이 신당(神堂)만 중수(重修)하고 관가(官家)에서 제물(祭物)을 주고 축문(祝文)을 지어 주어 호장(戶長)으로 하여금 예(禮)를 다하여 빌게 하였다. 축문(祝文)에 하였으되, 기특한 꾀로 도적을 멸하고 빛난 충의(忠義)로 나라를 호위하였으되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고 상고할 만한 자취가 없도다. 여원무(女圓舞)가 전하여지니 그 지방에 남은 풍속이 있으며 칼 흔적이 없어지지 아니하여 저 제방 돌에 완연히 남았도다. 한 칸 옛 사당(祠堂)에 길이 굳센 넋을 봉안(奉安)하고 단오(端午)에 제사드려 해마다 폐하지 않는도다. 깃발이 황황(煌煌)히 빛나고 징과 북이 번갈아 울리면서
연례의 전작(奠酌)을 드리고 또 약공(藥工)과 축문(祝文)을 갖추어 애오라지 긴 말로 빌고 관가(官家) 곡식으로 흠향케 하노니 신명(神明)을 보우(保佑)하여 길이 이 고을을 평안케 하소서. 하였다. 이 기록을 하면 북면(北面) 마라동(麻羅洞)에는 한장군(韓將軍)의 누이동생의 사당이 있었고 그 고을사람들은 그를 장산사명(獐山司命)이라 하여 수호신으로서 숭배하여 왔다. 그 후 조선조 영조(英祖) 41년(중국 淸의 高宗 30년 乾隆 乙酉年 A.D. 1765년)에 그 고을 현감(縣監) 정충언(鄭忠彦)이 중수(重修)하고 제물 및 축문으로써 예를 다하였다. 그리고 장산(獐山)이란 지명으로서 그 고을이 장산군(獐山郡)에 속하였을 때에 의병을 일으킨 자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자인(慈仁)이 경산군(慶山郡) 즉 장산군(獐山郡)에 속했던 것은 신라시대이고 조선조시대가 아니니 이로 미루어 보아 왜구(倭寇)가 쳐들어 온 것은 신라 때로 보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장산(獐山)이 신라 때 경산군명(慶山郡名)이었다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산현(慶山縣)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에도 보인다. 본압량국(本押梁國)(一云押督) 신라기미왕취지치군(新羅祇味王取之置郡) 경덕왕개칭장산(景德王改稱獐山) 고려초개장산(高麗初改章山) 현종속경주(顯宗屬慶州) 명종치감무(明宗置監務) 충선왕초피왕혐명개금명(忠宣王初避王嫌名改今名) 충숙왕이국사일연지향승위현령(忠肅王以國師一然之鄕陞爲縣令) 공양왕이(恭讓王以) 왕비노씨지향륭위군본조(王妣盧氏之鄕隆爲郡本朝) 원래는 압량국(押梁國)었던 바 신라 기미왕(祇味王)이 이 고을에 군(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 장산(獐山)이라고 고을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초에는 다시 장산(章山)이라고 고쳤다. 현종(顯宗) 때는 경주(慶州)에 속했고, 명종(明宗) 때에는 그 곳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충선왕(忠宣王) 초에 왕이 파천(播遷)하매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 하였다. 필자는 앞에서 왜구(倭寇)의 자인(慈仁) 침입은 신라시대라 했거니와 그 지방 고로간(古老間)에 전승되어 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천수백 년 전 임나(任那)[高靈]에 있던 대가야(大伽倻)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한장군(韓將軍)이라는 이가 단북동(丹北洞) 도천산성(到天山城)에서 적을 격파하고 군민(郡民)을 구한 데서 사당을 지어 제전을 거행하여 온다고 한다. 필자는 이 전승에 신빙성을 두면서 왜구의 침입을 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로 보며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임나(任那)와 왜인(倭人)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의 구명에 의하면 임나(任那)라는 명칭은 5세기 호태왕비(好太王碑)(A.D. 414)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나온 것이 가장 오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강수전(强首傳)에는 「신본임나가량인(臣本任那加良人)」이라 기록되어 있다. 서기 924년에 건립된 신라의 진경대사탑비(眞鏡大師塔碑)에는 「기선임나왕족(其先任那王族)」이라고 한 것이 보이므로 임나(任那)의 용례(用例)는 분명하고 따라서 임나(任那)의 존재도 확실하다. 일본(日本) 학자들은 이 임나(任那)를 「미마나」라고 부르거니와 변진지방(弁辰地方)에 근거를 잡았던 왜(倭)의 세력을 이르는 명칭이다. 당시 왜(倭)는 낙랑(樂浪)ㆍ 대방군(帶方郡)[지금의 南原地方]에 통교(通交)하면서 남해안에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그들은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무역을 활발히 하였고, 점차 경제적 세력이 커지자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간섭하게 되었다. 수많은 왜인(倭人)이 이 지역에 드나들게 되자 그 중에는 그 곳에 정주(定住)한 자들도 생겼을 것이다. 그 간섭의 정도는 왜(倭) 세력의 강약에 비례되었을 것이다. 백제ㆍ 신라의 진출에 따라서 축출되었고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23년에 대가야(大伽倻)[高靈]의 침공으로 임나(任那)는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대가야(大伽倻)로 대표된 지방이 대체로 일본서 주장하는 임나(任那)의 제부락국(諸部落國)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호태왕(好太王) 때 백제도 왜세(倭勢)의 발호로 인하여 백제도 흥기하자마자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왜(倭)와 백제의 중간 매개역할은 임나(任那)가 맡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나(任那)가 소멸할 무렵 왜(倭)는 회고적으로 말하기를, 백제(百濟)ㆍ 임나(任那)ㆍ 왜(倭)가 「삼문(三紋)의 강(綱)」[세 줄을 꼬은 동아줄]이라 비유도 하고 있거니와, 그 때 정세는 신라와 백제를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왜(倭) 사이에 눈부신 항쟁(抗爭)이 있었다. 여기에 단편적으로 엿보이는 「임나가라(任那加羅)」는 왜(倭)의 퇴수지(退守地)로 전쟁에 가담한 것 같다. 다만 그 실정을 파악할 자료가 결여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송서(宋書)』에는 서기 438년에 유사공헌(遺使貢獻)한 왜왕(倭王) 진(珍)이 「사특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지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使特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之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 하였음을 보아 여기에 임나(任那)가 끼어 있는 것은 역시 왜(倭)와 관계가 있었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이후 일본(日本) 왕정(王廷)에서는 임나(任那) 부흥을 표방하면서 수대(數代)를 지낸 것도 임나(任那)가 일찌기 왜(倭)의 경제적 정치적 근거가 된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임나(任那)는 당시 그 지역에 정주 내지 왕래한 왜인(倭人)들로써 한때 세력을 떨쳤던 무리들이 장산(獐山), 즉 자인(慈仁)까지 침입해 들어왔을 것이다. 이 때 군민(郡民) 중에 한(韓)씨성(性)을 가진 힘센 장사가 용맹과 지혜로 왜구를 물리쳤을 것이고 군민들은 그를 추앙하여 장군이라 하고, 죽은 뒤에는 사당을 지어 해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왜구를 물리친 날이 바로 단오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때�� 야외(野外)놀이가 한창인 봄철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므로 신라의 명일(名日)인 수릿날 즉 단오일에 제사를 거행해 왔다. 따라서 뒷날 왜적을 물리친 날도 단오날로 믿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는 1969년 봄에 경북지방 민속 재조사 때에 자인(慈仁)지방에서 특히 필자의 주목을 끈 한 출토품(出土品)을 보았다. 한(韓)장군 사당 부근에 있는 자인중학교(慈仁中學校) 교정 확장공사 때에 땅속 암석 위 석총(石塚)에서 장군의 유골 및 유품으로 보이는 두개골과 투구와 갑옷 등 금속물(金屬物)이 출토되었다. 또 거기에는 천 3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伽倻)시대의 토기(土器) 몇 점이 나와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 곳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한(韓)장군의 유해도 한(韓)장군 사당 부근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이 무덤과 유골 등은 한(韓)장군의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 속에서 우리는 한(韓)장군의 년대(年代)에 대하여 한 가닥의 암시를 발견하게도 된다. 한(韓)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그 지방 사람들은 한묘(韓廟) 또는 한장군묘(韓將軍廟)라고 한다. 현재의 한(韓)장군 사당은 계림(桂林)에 있는 진충묘(盡忠廟) 하나뿐이다. 2차대전 전인 1936년 7월에 필자가 처음 보았을 때는 한묘(韓廟)라 하고 북서동(北西洞) 면사무소 뒤쪽에 세워진 것을 이한묘(二韓廟)라고 하였다. 일한묘(一韓廟)에는 그 위패가 「한장군지신위(韓將軍之神位)」라고 씌어 있었고 이한묘(二韓廟)의 위패에는 「증판서한장군지신위(贈判書韓將軍之神位)」라고 씌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한묘(二韓廟)는 일한묘(一韓廟)보다는 뒤에 세워진 것으로서 조선조 때 국왕이 장군의 공을 상찬하여 판서(判書)라는 벼슬을 추중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한묘(二韓廟)는 일제말(日帝末)에 일본인들이 허물어 없앤다. 1969년에 필자의 건의와 지방유지들의 활약 그리고 경산군(慶山郡)의 도움으로 이 한장군제전(韓將軍祭典)이 부활되었다. 1936년 필자의 첫 조사 때에는 이 제전이 단오 전후 3일간 계속되었다. 제전은 자인면(慈仁面)이 주최가 되고 제관(祭官)은 면장 또는 그 지방 유지 중에서 선정되었으며 제물(祭物)은 대체로 돼지ㆍ 닭(암ㆍ 수 두 마리)ㆍ술ㆍ 밤ㆍ 흰떡ㆍ 과일ㆍ 야채ㆍ 마른 생선 등이 사용되었다. 이 제전이 끝나면 일한묘(一韓廟) 앞에서 두 남자가 색종이를 길게 늘어뜨린 꽃관(冠)을 쓰고 수 10개의 꽃가지로 장식한 옷을 입고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바로 이 춤을 여원무(女圓舞)라고 하며 이 춤은 옛날 한(韓)장군이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여자복장으로 위장하여 버들못가에서 왜적(倭敵)을 유인할 때 추었던 춤이라 한다. 일한묘(一韓廟) 앞에서 이 춤이 끝나면 이어서 이한묘(二韓廟) 앞에서 추고는 마친다. 다음에는 가장행렬이 진행되는데 조선조 때 현감(縣監) 복장을 한 가장(假裝) 현감이 가마에 타고 앞서면 그 뒤에 역시 가장(假裝)의 육방관속(六房官屬) 및 양반들이 수십 명 말을 타고 뒤따른다. 일한묘(一韓廟)ㆍ 이한묘(二韓廟)에 참배한 뒤 이어서 계림(桂林) 뒤쪽 진터[陣場]에서 기마(騎馬)싸움의 놀이를 한다. 계림(桂林) 언덕 위에서는 별도로 시문대회(詩文大會)의 백일장(白日場)과 젊은 부녀자들의 그네뛰기대회가 열리고 장터에서는 남자들의 씨름대회와 기생(妓生)ㆍ 광대(廣大)들의 소리와 춤, 재인(才人)들의 곡예(曲藝) 등이 열리어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청금상련(聽琴賞蓮) Banquet around a Lotus Pond with Gisaeng 시대 / 조선시대 후기 크기 / 가로 35.3㎝, 세로 28.3㎝ 그린이 / 신윤복(申潤福) 소장 /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조선시대 사람들의 풍류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기생(妓生)이다. 지체있는 사람들의 술좌석에는 기생들이 불려 와서 권주가를 불렀다. 후원 연못 가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생들과 어울리는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화가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도 중의 하나이다. 제비(祭費)는 면에서 경비를 부담하였고, 여흥의 민속놀이 비용은 상인(商人)과 요식업자ㆍ유지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놀이는 민속예술의 하나로서 무대예술화하여도 좋겠지만 자인(慈仁)고을 특유의 연중행사의 하나인데 자인면민(慈仁面民)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민속놀음의 하나로서 보존 육성할 만한 것이다. 이 민속놀이는 군민 전체의 생기진작(生氣振作)과 민중 감정을 융화시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AFMt0iMq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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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zzzz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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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북부 2015 해수욕장 개장준비 . 삼포, 송지호오토캠핑장.....
영동북부 2015 해수욕장 개장준비 . 삼포, 송지호오토캠핑장…..
피부가요즘 예민하네요 트러블이생길런지 휴 제 유일한 취미생활인블로그 송지호오토캠핑장주의해서 볼까요? 22일 영동북부지역(속초·고성·양양)에 따르면 지난해 세월호 여파 등으로 방문객이 감소한 만큼 올해는 이벤트 등을 개최해 방문객 유치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운영해변은 ▲가급(시범) 낙산 ▲나급(일반) 설악, 하조대, 오산, 남애3리, 지경 ▲다급(마을) 물치, 정암, 동호, 기사문, 잔교, 동산, 동산포, 죽도, 인구, 광진,갯마을, 남애1리, 원포 등 총 19개 곳이다. 군은 총 125명의 수상안전요원을 배치하고 속초해양경비안전서, 속초소방서 등 관계기관의 협조를 통해 해변 안전사고에 대비한다. 특히 올해는 7월30일~8월2일까지 하조대와 낙산해변에 무대를 세워 최정원의 뮤지컬 갈라쇼, 라디오(원음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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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koreanist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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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zbírka legend
정의
조선 성종 때에 노사신·강희맹 등이 각 도의 지리·풍속 등을 기록하여 편찬한 우리나라의 인문지리서.
내용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1486년(성종 17)에 완성된 인문지리서이다. 권1~2는 경도京都, 권3은 한성漢城, 권4~5는 개성開城,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의 인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머리에 그 도의 전도全圖를 싣고 이어 연혁沿革, 풍속風俗, 묘사廟社, 능침陵寢, 궁궐, 관부官府, 학교, 토산土産, 효자, 열녀, 성곽, 산천, 누정樓亭, 사사寺社, 역원驛院, 교량, 명현名賢의 사적, 시인의 산천이나 누정 등을 대상으로 주변의 풍광과 이를 보는 감흥을 읊은 시가詩歌인 제영題詠 등을 실었다. 이 중 풍속 편에서 다양한 형태의 민속놀이를 확인할 수 있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농경의식의 하나인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길쌈이라고도 한다. 대부분 정월대보름에 시행된다. 줄다리기 행사가 결정되면 양편은 각각 조직화되는데, 조직 상부는 대장(편장·줄패장)과 중장中將, 소장小將으로 구성되고, 애기장군이 추가되는 경우도 있다. 대장은 각 편의 총책임자로 행사의 진행을 지휘·감독할 뿐 아니라, 비용 충당에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마을의 유지가 선출되는 것이 관례이나 자원하는 경우도 많다.
줄다리기 장소에 도착하면 양편은 줄목을 끼우는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암줄의 목줄에 수줄의 목줄을 끼우고 목나무로 고정시키는 것은 남녀의 성기 삽입을 상징하는 행위로 보이며, 이때 음란한 말들이 오가며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진다. 일단 줄목이 끼워지고 신호에 따라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풍물패와 양편 주민의 응원이 어우러져 한바탕 굿이 벌어진다. 승패는 한 번 당겨서 기준점을 넘어간 것으로 가리는 것이 원칙이나 세 번 당겨서 두 번 이기는 쪽의 승리로 결정하기도 한다. 고서古書에는 이긴 편이 풍년이 든다는 기록이 일반적이다. 구전되는 바는 서편(여성 편), 즉 암줄을 당기는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신으로 말미암아 서편이 이기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동편이 일부러 져 주는 사례는 없다고 한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동편, 즉 남성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특수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삼척 오금잠제烏金簪祭: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마을의 수호신격인 오금잠신烏金簪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오제이다. 오금잠놀이 또는 오금잠굿라고도 한다. 이 행사는 음력 4월 초부터 5월 단오까지 한 달간 무당 집단이 주도하는 마을굿 형태로 진행된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오금잠제는 금비녀 모양의 신체를 신격화하여 단오날 굿당에 모셔다 놓고 올리는 마을굿이었다. 이는 동해안 일대에서 나타나는 단오굿의 고형이다. 오금잠제는 18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동해안 일대에 거행된 단오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마을굿이었다.
오금잠제는 1993년에 오금잠놀이로 재현되었는데, 오금잠제 모시기(제례)─오금잠신굿(축원)─놀이굿(제수나눠먹기)─뒤풀이(화합) 과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민속 행사는 동해안 마을굿의 원형이며, 단오 문화권에서의 풍년 기원제이며, 고대로부터 전승된 왕신격이면서 서낭신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오금잠신은 ‘백두옹白頭翁’이라는 갈야산葛野山 산신으로 변신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위협적인 신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제의를 유지시키려는 무당들의 악령의식에서 생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오금잠을 남성 상징으로 추단하였고, 오금잠신이 물을 다스리는 신력을 지녔다고도 하여 풍년 기원의 무제임이 주장된 바 있다. 삼척 부사가 금하여도 향리들이 주도하여 오금잠제가 계속 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오금잠제를 통해 지역 내에서 나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실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읍치성황사에서 오금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 전통은 최근까지 계승되어 1980년대 초까지 삼척의 읍치성황사(현재 성북동 성황당)에서 단오에 굿을 하였다. 이와 함께 무당들이 살을 풀어 주고, 복을 기원해 주며, 이에 주민들이 각종 물건을 봉헌한 전통은 내륙의 단오굿이나 해안지역의 별신굿 현장에서 무녀가 주민 개개인들의 1년 운세를 짚어 보고, 소지를 올려 주며, 액살을 풀어야겠다고 공수를 내려 주면 굿 말미에 액막음(용왕제龍王祭)을 지낸다는 점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오금잠제 전통은 집안 단위로 행해지는 산메기로 잔존하여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마을 단위로는 내륙에서 미로 단오굿이나 근덕 선흥마을 단오굿과 같은 형태로 주변 마을을 아우르는 마을굿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해안 마을인 삼척 근덕면 초곡리와 궁촌리 등에서 단오에 즈음하여 2~10년을 주기로 마을 단위의 별신굿으로 계승되고 있다.
봉의산 축성놀이: 봉의산 축성놀이는 지금부터 700 ~800여 년 전 글안족과 몽고군이 침략할 무렵에 이 고장을 지키려고 산성을 쌓을 때 행하던 놀이를 재현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봉의산성의 둘레는 2,463척, 높이는 열 척이라고 한다.
봉의산 축성놀이는 전체 네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과장은 행진 시작(입성)으로 두 편으로 갈라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한다. 농악대가 앞서 행진하면서 흥을 돋운다. 일꾼 차림에 짚신을 신고 머리에 수건을 맨 일행 50명 정도(각 25명)가 삽, 괭이, 망치, 도끼, 낫, 지게, 목도 등의 장비를 메고 <춘천아리랑타령>을 부르면서 입성한다. 제2과장은 작업 진행(축성)으로 농악을 울려 축성 작업 시작을 알리고 작업의 흥을 돋운다. 1조·2조 등으로 조를 나누고 돌 파내기, 목도질 하기, 돌 쌓기 등으로 구분해서 작업을 진행한다. 작업 중에 휴식을 취하면서 참 돌리기(담배 피우기), 춤 자랑 등 여흥을 곁들인다. 제3과장은 작업 완료(봉화)로 성 쌓기를 먼저 끝낸 편에서 환호를 하면서 봉화를 올린다. 진 편에서는 이긴 편이 봉화를 올리고 있는 동안 성 쌓기 마무리 작업을 한다. 성을 모두 쌓게 되면 이긴 편의 대장이 성 위에 올라가서 성을 완전히 쌓았음을 선언한다. 제4과장은 한마당놀이(산신제)로 미리 장만하여 차려놓은 제물로 산신제를 올린다. 성을 튼튼하게 쌓는데 부상자도 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리고 이 고장에 항상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한다.
홍천 팔봉산 당굿: 팔봉산 당굿 놀이는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9일에 마을 주민들이 홍천 팔봉산의 제2봉 정상에 있는 당집에 모여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당굿을 말한다. 당집을 삼부인당이라고도 하는데, 김씨, 이씨, 홍씨 세 부인을 기리는 당집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400년 전인 1590년부터 마을의 평화를 위해 기원을 해 왔다고 한다. 팔봉산 당굿은 크게 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마당은 칠성신군과 후토신군에게 제사를 드리며, 둘째 마당은 세 부인에게 기원을 드린다. 셋째 마당은 무당들의 만신굿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김해 석전놀이: 1520년(중종 5)에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김해의 석전사들이 전라도까지 원정하여 왜구 토벌에 결정적인 활약을 하였음이 『동국여지승람』에 명시되어 전한다. 이렇듯 무기가 근대화 되지 못했던 시대에 전투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돌팔매질이 하나의 놀이로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조선시대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김해 지방에서는 매년 음력 사월초파일 무렵부터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성의 남쪽 지역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좌·우부로 나누어 편을 가르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기상을 돋우고 돌을 던져 상대편을 공격하는데 마치 돌비가 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사상자가 생겨도 승부가 가려질 때까지 싸웠다고 하며 음력 오월 단오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말뛰기놀이: 말뛰기놀이는 제주도에서 주로 이루어진 민속놀이로 『동국여지승람』 및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영등굿’, ‘말뛰기놀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월 초하루에 제주도의 귀덕·김녕·애월 지방에서는 열두 개의 나무 장대를 세우고 신을 맞아서 제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긴 나무 장대 끝에 색채 비단으로 꾸며 말뛰기놀이를 한다. 이날밤에는 등불을 매달아 켜므로 이 제의를 ‘영등굿’이라고 하며, 2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보름에 마친다. 곧 2월 초하루부터 15일 사이에 장간長竿을 세우고 신을 즐겁게 하였으며, 이때 말머리 같은 가면을 써서 말을 꾸미고 비단 안장을 채워 영등신을 모신 후, 놀이터로 와 흥겨운 한마당을 벌인다. 이렇게 하면 연등을 제사한 것이 되어 바다에 나가도 재난을 당하는 일이 없고, 각 가정에서도 초복제화招福除禍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징 및 의의
『동국여지승람』은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및 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더불어 조선 성종 때 이루어진 편찬 사업의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각 지역별로 연혁은 물론 지리·교육·인물·풍속 등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형성·전승시키며 향유했던 민속놀이의 유래를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옛 민속놀이에 대한 기록이 여느 분야의 기록에 비해 미미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충주 줄다리기·삼척 오금잠제·봉의산 축성놀이·홍천 팔봉산 당굿·김해 석전놀이·말뛰기놀이 등의 연행 양상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은 놀이의 전승 맥락을 이해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관련 기록 정보를 통해 민속놀이의 재구·보존·계승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민속문화의 정체성 연구(이창식, 집문당, 2001), 민속지로서의 여지승람(김열규, 진단학보46·47, 진단학회, 1979), 삼척지방 오금잠제의 구조와 의미(이창식, 강원민속학8·9, 강원도민속학회, 1990), 한국의 놀이(윤광봉, 열화당,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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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oflovexyz-blog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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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청년들과 직접소통, “내가 롤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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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청년들과 직접소통, “내가 롤 모델”
​홍준표 청년들과 직접소통, “내가 롤 모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가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젊은 청년들과 직접 소통에 나섰다. 홍 후보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에서 자신이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학창시절을 이겨내고 성공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라며 ‘삼포’를 넘어 ‘칠포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롤모델’이라고 밝혔다.
  홍 후보는 평소 자신의 페이스북을 직접 관리하며 소통창구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바쁜 선거일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손수 페이스북에 글을 남겨 페이스북 친구는 물론 국민들과 직접 소통하며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홍 후보는 이날도 글을 남겨 청년들과의 대화를 위한 사전 포석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20대 청년들에 대한 저의 지지가 낮은 것은 아마도 꼰대이미지 때문일 것”이라며 “자유한국당에 대한 선입견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렇다. 저는 젊은이들이 저를 꼰대라 싫어하는 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저는 흙수저 출신으로 무학인 아버지와 문맹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다”며 “유산 1원도 받지 않고 독고다이로 검사, 국회의원, 집권당 원내대표, 당대표, 경남지사, 보수본당 대통령후보까지 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두 아들로 부터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 아버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 있게 이 땅의 청년들에게 한마디 하고자 한다”며 “야들아 내가 너희들의 롤 모델이다. 그런데 왜 나를 싫어 하냐”라고 반문했다.
  직접 현장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는 홍 후보의 특성과 이 같은 글을 남기며 젊은이들에게 직접 자신을 어필하고 다가가는 모습을 보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향후 홍 후보가 직접 젊은이들과 대화를 통해 오해를 바로잡고 교감을 할 것으로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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